생사일대사혈맥초 강의 제6회 ‘임종이 지금’ 과 ‘임종정념’

2007. 12. 5. 11:32佛法 .SGI

 

 

 

 

생사일대사혈맥초 강의 제6회 ‘임종이 지금’ 과 ‘임종정념’


삼세 영원한 승리를 지금 구축한다

 


강의

 

이 어서에서는 생사일대사의 법(法)인 묘호렌게쿄를 수지하는 깊은 취지로서 ‘임종이 지금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신심의 자세를 밝혔습니다.

 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으로 묘호렌게쿄를 수지하면, 이 어서에서 ?‘묘호렌게쿄의 생사(生死)’라고 밝히신 생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내 몸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미혹의 생사’를 ?‘불계의 생사’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종이 지금’이란 ‘불계의 생사’에 대한 깊은 ?신해(信解)에서 일어나는 신심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불계의 생사’에 신해

 

대성인은 “결국 임종이 지금이라고 알아서 신심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천불(千佛)이 지켜 주셔서 안심하고 임종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불이 지켜 주는 임종은 ‘임종정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을 하는 사람이 일생성불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결국’이란 말은 앞단의 글월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앞단에서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과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화경’과 ‘우리 중생’ 이 셋이 전혀 차별이 없다고 신해하는 묘호렌게쿄 수지(受持)의 본질을 설했습니다.

이 신해의 근본 자세가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이기 때문에 ‘결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이 전혀 차별이 없다’라고 신해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이 묘호렌게쿄의 당체고 부처와 불이(不二)의 생명이며 부처와 똑같은 생사, 즉 ‘불계의 생사’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생의 목적을 일생성불에 두고 인생에 근본적인 희망을 지니는 삶입니다.

신심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반드시 ‘임종이 지금’이라는 자세로 삽니다. 임종은 ‘인생을 총결산하는’ 순간입니다. 그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가’라고 엄격히 추궁당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깊이 긍정하고 아무 후회 없이 만족할 수 있는 임종을 맞을 수 있을까. 반대로 인생의 종막을 후회와 자책감으로 맞을 것인가.

참으로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이 하나도 속임 없이 임종의 순간에 응축됩니다. 따라서 비록 지금 임종을 맞이할지라도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같이 아무런 후회나 불만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도록, ‘지금’을 얼마나 진지하게 힘껏 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임종을 맞이해도 한이 없다”라고 자부할 수 있는 각오로 ‘현재’를 진지하게 사는 삶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입니다.

 

다음 삶을 향한 빛나는 출발

 

또 임종은 ‘인생 총결산’이면서 동시에 불법(佛法)의 생사관(生死觀)에서 보면 다음 ‘생(生)’을 향한 새 출발입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닐라 만(灣)의 석양을 본 적이 있습니다. 수평선에 가라앉는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바다는 황금빛으로 빛났습니다. 한 폭의 명화를 감상하는 듯 장엄한 광경이었습니다.

멋진 저녁노을은 내일 아침의 빛나는 욱일을 약속합니다.

임종은 삼세에 걸쳐 불계의 생사에 사는 우리에게, 다음 생<삶>을 향한 빛나는 출발입니다.

임종은 인생의 모든 것을 응축한 ‘인생의 정상(頂上)’이고 ‘다음 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하고 엄숙한 인생의 장면입니다. 이 임종의 때에 어떤 일념을 지니는가. … 후회 없이 승리하는 ‘생’은 안온한 ‘사’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만족스런 ‘사’가 다음 ‘생’을 향한 명랑한 새 출발을 결단케 합니다.

임종을 맞이할 때 금세(今世)를 총괄하는 일념이 어떠한가, 그 인(因)이 미래의 과보를 초래합니다. 여기에 ‘임종정념’의 의미가 있습니다.

‘임종정념’은 죽음에 임해도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올바른 생각, 즉 묘법을 믿는 신(信)의 일념을 흔들리지 않게 관철하는 것입니다.

임종 때에, 묘법을 신수할 수 있었던 무상(無上)의 기쁨으로 내 인생에 한이 없다고 만족하는 것이 ‘임종정념’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이제 ‘임종이 지금’과 ‘임종정념’의 차이를 정리하면, 금세에 살아 있을 때 임종이라는 인생 총결산의 의미를 깊이 느끼고, ‘지금 임종을 맞이해도 한이 없다’라는 각오로 시시각각 현실 속에서 생명을 연소하는 삶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을 쌓아 올림으로써 생명을 단련하고 경애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세의 삶의 자세를 확신하고 이해하며 임종을 맞이해도 후회 없이 묘법을 끝까지 부르며 편안히 웃으면서 영산(靈山)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이 장엄한 경지가 ‘임종정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을 쌓아 올림으로써 인생을 총결산하는 ‘임종정념’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임종정념’이 다음 ‘생’을 위해 여유 있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임종이 지금’을 기본으로 끝까지 살아온 좋은 ‘생’이 ‘임종정념’이라는 좋은 ‘사’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임종정념’이라는 좋은 인생의 총결산이 다음의 좋은 ‘생’을 위한 출발이 됩니다.

(중략)

 

【본문】  (생사일대사혈맥초 1337쪽 4행~9행)

결국 임종(臨終)이 지금이라고 알아서 신심(信心)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을 ‘시인명종(是人命終) 위천불수수(爲千佛授手) 영불공포(令不恐怖) 불타악취(不墮惡趣)’라고 설하셨느니라.

기쁘도다. 일불(一佛) 이불(二佛)도 아니고 백불(百佛) 이백불(二百佛)도 아닌 천불(千佛)까지도 마중을 나오시어 손을 잡으실 것이니, 환희의 감루(感淚)를 금할 길이 없도다.

법화불신(法華不信)의 자는 ‘기인명종(其人命終) 입아비옥(入阿鼻獄)’이라고 설해져 있으니 필정코 옥졸(獄卒)이 와서 손을 잡으리라. 가엾도다, 가엾도다. 십왕(十王)은 재단(裁斷)하고 구생신(俱生神)은 가책(呵責)하리라.

이제 니치렌의 제자단나(弟子檀那) 등,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

하는 자에게 천불(千佛)이 손을 내미시리라는 것은 비유컨대, 오이나 박이 덩굴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라.

 

【통해】

결국 ‘임종이 지금이다’라고 깨달아 신심에 면려해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을, 보현보살권발품 제28에서는 “이 사람은 수명이 끝나면 천 불이 손을 내밀어, 죽은 후에 대한 공포를 일으키거나 악도(惡道)에 떨어뜨리는 일은 없다” 하고 설했다.

기쁘게도 일 불이나 이 불이 아니라 또 백 불이나 이백 불도 아니라 천 불까지 마중 나와 손을 잡아 주신다니 환희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이에 대해 법화경 불신의 자는 비유품 제3에서 “그 사람은 명(命)이 끝난 후에 아비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설했으므로 틀림없이 옥졸이 와서 손을 잡을 것이다. 대단히 가엾은 일이다. 십왕에게 그 죄에 대한 재판을 받고 틀림없이 구생신에게 가책을 받을지도 모른다.

지금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자에게 천 불이 손을 내밀어 맞이해 주시는 것은, 예를 들면 오이나 박이 덩굴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라.

(중략)



월간법련 : 07/04/01 2007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