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고시 합격 체험담 정행주

2009. 6. 11. 17:30佛法 .SGI

 
                                                                               -  6월의 밤꽃 -
 
사법고시 합격 체험담 - 정행주

 
전국의 대학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본존님의 공덕과 이케다 선생님의 은혜로 재학중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영광을 안게된 광주방면 남자부 정행주입니다.


어렸을 적 할아버님의 알콜중독으로 인해 매일 집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할머님의 중풍으로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이 안계시면 할머님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또한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초등학교 때에만 이사를 네 번이나 가게 되어 이렇게 이쁜 얼굴을 하고도 친구 사귀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시골 보성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때 광주 이모네집 셋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모님의 권유로 어머님은 신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적 신심에 대한 저의 기억은 좌담회때 어머님께서 구멍난 양발을 신고 작은 공덕을 받은 일을 3분스피치때 하시던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님의 공덕담보다 구멍난 양발이 더 창피했고, 도대체 이런 집안에서 무슨 공덕이 있냐는 반발심이 컸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지지않고 순수하게 신심을 해가신 어머님의 초신의 공덕으로 입신한지 1년 만에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었고, 28살까지 대학입시준비로 집안 경제에 기여하신 삼촌도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시는 등 집안이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아리랑타령으로 집안을 힘들게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눈을 감으셨고, 2학년때 중풍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께서도 편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리고 3학년때 아버님께서도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제가 중학교 3학년때 직장암 선고를 받으셨고, 투병중에도 끝까지 담배를 고집하는 강직함을 보이시고는 제가 연합고사를 보기 일주일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현대인의 필수인 빚보증까지 남겨 주셨고,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어머님은 실업계가 아닌 인문계고등학교에 저를 진학시켜 주셨습니다. 윤봉길의사가 죽기 전 어린 두아들 모순가 담에게 보낸 글 중에 ‘너희들은 아비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사람중에 동양에 맹자가 있고 서양에 나폴레옹이 있으며 미국에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데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처럼 저 역시 그 사람이 되기 위해 전교 150등의 성적을 한달만에 전교 10등으로 끌어올리며 고등학교 3년내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수능에서 평소보다 30점이나 낮은 성적이 나와 점수에 맞춰서 전남대학교 법학과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어린 마음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고 그런 와중에 형님의 권유로 그동안 사람 귀찮게하는 미신적인 종교로 여겼던 신심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은 수능실패로 친구들과 만나기도 꺼려져 남는 시간 때우기로 생각하고 시작한 신심이었으나 차츰 저에게 새로운 인생관을 알게 해주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새내기 시절, 학교공부 보다는 올바른 인생의 가치관 확립과 인간혁명을 위해 학회활동에 매진하였고, 보성회 한달에 10번 이상 서기에 도전하며 근무비를 아껴서 그 돈으로 꼭 선생님 스피치를 사서 보았습니다. 점차 회관의 내집화, 신심 즉 생활이 아닌 회관 즉 우리집이 되었고, 군 전역후에는 지부 남자부장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 좌담회 참석 1명의 지부에서 연말에는 20명의 결과를 내어가며, 학교에서는 캠퍼스 평화문화 활동과 동아리 설립을 위해 뛰었습니다. 새내기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증을 내어가자 라고 결의하고 장학금에 도전한 결과 학기 내내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3학년이 되어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좋다! 이왕이면 스승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힘 있는 사람이 되어가자 라고 정하고 고시공부를 시작하였고, 본격적인 학업과 신심의 병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오바하지 마라’, ‘적게 먹고 가는똥 싸라’는 등의 주위의 만류가 컸지만 SBS 학회관련 편파보도 등을 보면서 반드시 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결의하고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지부남자부장, 화랑반, 고등부담당등의 사명과 학교에서도 고시반 실장, 동문회장등의 일을 맡고 있어서 공부가 정말 힘들었고, 그 모든 것을 다 해내겠다는 결의가 없었던 안이한 일념을 깨닫지 못한 채 2006년 1차 시험부터 낙방하였습니다.


내년에 다시 도전한다고 해서 될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과 스승과 약속한 도전에 졌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속에 한달여를 방황속에 보내다가 주위 동지들의 격려에 다시금 도전하자고 생각하고 창제부터 시작을 하였습니다.

신심과 학업 둘 다 놓을 수 없었기에 병행에서 성공한 다른분들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저도 하루에 4시간만 자기로 정했습니다. 11시에 활동을 마치고 새벽두시까지 공부를 하고 아침6시에 일어나기로 정했으나, 새벽두시에 자고 일어나면 오후 2시였습니다. 한달동안 그런 생활을 반복한 후에 ‘아~ 난 안되는구나’ 생각하고 다시 본존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원속에 불지혜가 떠올라 좋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자신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해 갔고, 남들보다 네 배의 집중력을 가질 수 있게 기원했습니다. 여러 활동을 해야하는 저로선 자리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 6시간 밖에 없었기에 내일이 시험 날이다 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으며, 그때부터 저의 주특기는 버스 안에서 책보기, 가로등 밑에서 공부하기가 되었습니다. 저를 한국은행 채권추심단보다 더 징한 놈으로 여기며 만나주지 않는 멤버들에게는 일단 저녁 6시면 짐을 싸고 나와서 무작정 멤버집 앞에서 책을 보며 기다렸습니다. 그 짠한 모습에 멤버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고, 저 역시 주위의 시선들이 언제부턴가 창피함보다는 오히려 저에 대한 격려의 시선으로 느껴졌습니다. 학교에서는 시간 때문에 점심을 굻어가며 공부를 하였고, 학교에서 회관까지 걸어가는 30분의 시간은 그날 공부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차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였고, 학교에서 별명은 공부는 안하는데 성적은 잘나오는 ‘쓰레기’로 불렸습니다. 선배들의 시기와 질투속에 교수님의 방해도 시작되어 저녁에 고시반 출석체크를 하러온 교수님께서 “이놈 또 어디 갔느냐?”는 질문에 옆자리 형이 “회관 갔는데요”라고 해 회관을 식당으로 착각하신 교수님이 “이놈 새끼 또 고기먹으로 갔냐?”고 잡아오라고해서 호출된 적도 있었습니다. 회관으로 향할 때면 주위의 우려섞인 시선과 친한 형들의 조언 아닌 조언이 있었고, 제 자신도 공부만 해가면 오히려 훨씬 합격이 쉽지 않을까라는 기심의 마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공부만 한다고 하여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런 신심이라면 혼자 노력해서 잘 먹고 잘살지 할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불운인지 오늘도 외로운 하루처럼 보이지만 나는 최후에 승리를 믿고 있기 때문에 결코 후회가 없다‘ 라는 선생님의 고경시를 기본서 표지마다 붙여두고 읽어가며 그렇게 1년을 노력한 결과 2007년 1차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2차 준비를 위해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활동으로 인해 하루 6시간밖에 공부하지 않던 저에게 활동할 필요가 없이 공부만 하게 되는 서울에서의 생활은 저를 나태하게 하였고, 매일 피시방과 당구장 만화방을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커피프린스 1호점 7번 다시보기를 통해 은찬이를 제 마음의 여자로 정하고, 스타크래프트 500승을 돌파할 때쯤, 문득 역시 나는 쓰레기다 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인근 회관으로 가서 창제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남자부들과 연계되어 좌담회 식순참여, 보성회 근무를 시작하였고, 매주 일요일은 회관에서 창제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활을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다시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고, 슬럼프가 올 때마다 선생님과의 약속을 생각하며, ‘져서 울지말고 울면서 승리하자’라고 정하고 마음을 다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회원님들의 격려속에 2008년 2차 시험을 무사히 치룰 수 있었고, 작년 다시 복학해 4학년 2학기 중간고사 시험도중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 답안지 3분만에 쓰기 신공을 발휘하며 바로 회관으로 달려가 감사의 제목을 올렸습니다.


저는 매우 나약합니다. 편모 가정에 아직까지 컴퓨터자격증은 커녕 운전면허 하나 없는 무자격자이고, 오른팔은 탈골되어 군대도 못가고 공익근무를 했으며, 생긴 것 역시 잘생겼습니다. 하지만 매일 새벽 두시까지 눈을 비벼가며 저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복바느질을 하시는 어머님과 자신은 잭필드3종세트와 5천원짜리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면서도 월급120만원중 100만원을 학비로 보내주는 형님이 계시고, 매주 주말이면 찾아와 격려를 해주는 동지가 있으며, 자기일이 아닌데도 시험 때면 만사를 제쳐놓고 함께 기원을 해주시는 회원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결국 어본존님의 공덕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대학 4년 내내 신심과 학업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병행하는가와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병행의 어려움에 지칠 때마다 여러 사명을 한꺼번에 수행하면서도 전부 승리하신 이케다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또다시 투쟁의 기치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마지막 강의로 유명한 카네기 멜런대학의 랜디 포쉬 교수가 박사학위를 받던 날 그 어머님께서 랜디 포쉬 교수를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제 아들입니다. 박사지만 아직 남을 돕지는 못하죠’ . 저 역시 아직 남을 돕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대학부의 사명은 대학을 가지 못한 사람을 지켜가는 것이다 라는 이케다 선생님의 말씀을 심간에 새기며 민중을 위한 법조인으로 스승의 꿈을 실현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