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18. 14:47ㆍ佛法 .SGI
일생성불의 신심
- 사제불이의 대도(大道)를 걸어라!
강 의
새에게는 새가 나는 길이 있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인간으로서 행복해지기 위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범부는 쉽게 볼 수 없지만 부처의 눈에는 그 올바른 길이 명료하게 보입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행복을 향한 이 불멸의 궤도를 ‘일생성불의 대도(大道)’로서 만인의 눈앞에 열어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제행(唱題行)입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새의 길, 물고기의 길이 있는 것처럼 창제행은 성불을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길’입니다.
왜냐하면 〈일생성불초〉에서 ‘중생본유(衆生本有)의 묘리(妙理)’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생명에 본래 구비된 묘리를 나타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중생본유의 묘리’를 나타내는 ‘자연의 길’로서 ‘창제행의 의의(意義)’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오자(五字)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의 인과(因果)의 공덕을 물려주시느니라.”(어서 246쪽)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는 경문(經文)이 아니고 그 의(義)가 아니며 오직 일부(一部)의 의(意)일 뿐이라, 초심(初心)의 행자는 그 뜻을 모를지라도 그러나 이를 행하면 자연히 그 의(意)에 부합(符合)되느니라.”(어서 342쪽)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佛界)에 이르리라.”(어서 234쪽)
묘호렌게쿄는 부처가 깨달은 생명본유(生命本有)의 법(法)이므로, 창제행은 틀림없이 일생성불의 수행입니다. 그래서 “일생성불은 결코 의심할 바 없느니라”(어서 384쪽)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길’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길이라도 개척하고, 장애물도 제거하고 정리해야 사람들이 다닐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창제의 길도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를 믿는 ‘신심’을 관철하고 생명에 구비된 ①‘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타파하는 싸움이 필요합니다.
묘호렌게쿄의 오자를 수지하면 그때까지 겪어 온 악(惡)에서 악, 미혹(迷惑)에서 미혹(迷惑), 고뇌(苦惱)에서 고뇌라는 무명의 유전(流轉)을 전환하고, 우리 생명속에 자연스럽게 성불의 인과(因果)를 새길 수 있습니다.
성불의 인과는, 신심으로 악과 불행의 근원인 무명을 타파하고 본유의 묘리인 묘호렌게쿄의 리듬이 우리 생명에 엄연히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묘호렌게쿄의 리듬과 일체가 된 생명이 불계의 생명입니다. 이 신심을 ‘인’으로 하고, 불계의 생명을 용현하는 것을 ‘과’로 하는 ‘인과’가 성불의 인과입니다. 이 성불의 인과가 지금까지 무명을 근본으로 한 악(惡)의 인과를 대신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무명과 마성에도 지지 않는 신심을 연마하면 성불의 인과는 우리 생명의 골수로 확립됩니다.
이와 같이 어디까지나 신심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뜻을 깊이 믿고”(어서 384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깊이 신심을 일으켜야 하느니라”(어서 383쪽), “깊이 신심을 일으켜”(어서 384쪽)라고 ‘깊이’ ‘깊이’를 거듭해서 말씀하시어 어디까지나 ‘신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신심을 깊이하는 것이 ‘성불의 왕도(王道)’라고 지도하시고 있습니다.
흉중의 묘법을 용현하면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것을 얼마나 깊이 믿을 수 있는가, 여기에 범부성불의 요체(要諦)가 있습니다.
지용의 보살이 아니면 부르기 어려운 제목
한없이 깊어지는 신심이 ‘일생성불의 신심’입니다. ②‘지용의 보살’의 특색은 오직 이 ‘신심’에 있습니다.
대성인은 지용의 보살에 대해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을 단련하셨으리라”(어서 1186쪽)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어서의 끝 부분에서는, 묘호렌게쿄를 부름으로써 일생성불할 수 있다는 문증(文證)으로 법화경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제21의 한 구절을 드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용의 보살의 ‘단련된 신심’만이 ‘일생성불의 신심’임을 밝히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신력품에서는, 상행(上行)보살을 비롯한 지용의 보살에 대한 석존의 ③결요부촉이 있은 후, 석존 멸후에 상행 등의 보살이 행하는 홍교(弘敎)의 활동과 내용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결론으로서 상행 등의 보살에 대한 ‘홍교의 공덕’을 밝힌 경문을, 이 어서의 결론으로 인용하시고 있습니다.
“나의 멸도의 후에 있어서 응당히 이 경을 수지할 지어다. 이 사람은 불도(佛道)에 있어서 결정코 의심할 바 없느니라.”
여기서 설한 “이 경을 수지할 지어다”는 상행보살이 넓히는 결요부촉의 요법(要法)인 제목의 수지를 말합니다. 〈제법실상초〉에서는 “지용의 보살의 출현이 아니고서는 부르기 어려운 제목이니라”(어서 1360쪽)고 말씀하십니다. 왜 ‘부르기 어려운’ 것인가. 그것은 기본적 차원에서 보면 무명과 싸워 이기고 마성을 타파하는 ‘단련된 신심’으로 부르는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자행화타에 걸친 제목
덧붙여 말하면 자기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넓히는 것이 지용의 보살이 부르는 창제행의 본의(本義)입니다. 〈삼대비법품승사〉에서는, 상법 시대의 ④남악대사와 ⑤천태대사가 제목을 부른 적이 있지만 그것은 ‘자행(自行)’에 그쳤고 ‘화타(化他)’에는 이르지 못했는데, 이에 비해 대성인이 부른 제목은 ‘자행화타’에 걸친다고 밝히시고 있습니다.
상법 시대의 제목에 화타의 힘이 없는 것은 제목이 묘리(妙理)를 관(觀: 사물을 명확히 보고 분별하는 것)하기 위한 상징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대성인의 제목이 자행화타에 걸친 것은 완전히 단련된 신심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불계의 생명을 실제로 용현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관심의 본존초〉에서는 대성인의 제목을 “사행(事行)의 남묘호렌게쿄”(어서 253쪽)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행’이란 신(信)·행(行)의 제목을 실천하는 것이고, 사실로서 생명에 성불의 인과를 행하는 것입니다. 말법에 지용의 보살이 부르는 사행의 제목은 자타 함께 행복을 지향하는 민중구제의 창제행입니다.
〈제법실상초〉에 “니치렌 한 사람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렀으나 이인(二人)·삼인(三人)·백인(百人) 이렇게 차례로 불러서 전하느니라”(어서 1360쪽)고 말씀하시듯이 ‘불러 전하는’ 제목이 바로 창제의 본질입니다.
무명과 마성과 싸워 이기는 깊이 단련된 신심 그리고 자행화타에 걸친 창제의 실천. ― 이것이 지용의 보살이 부르는 제목입니다. 그 본질은 한 마디로 말하면 ‘광선유포의 신심’입니다.
대성인은 모든 장마(障魔)와 끝까지 싸우기로 각오하고 결단하여 입종선언(立宗宣言)하셨고, 그 직후에 일생성불의 원리를 설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묘호렌게쿄의 오자를 홍통하신 대성인의 일생이 고투와 대난과 박해의 연속이었음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대성인의 묘법홍통의 모습을 떠나서 일생성불을 논한다면 그것은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대성인 자신이 “니치렌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껏 일일편시(一日片時)도 마음 편한 일은 없었다. 이 법화경의 제목을 홍통하려고 생각할 뿐이니라”(어서 1558쪽)고 회고하시는 것을 깊이깊이 배독해야 합니다.
대성인 직결의 ‘창가(創價)의 신심’
현대에 대성인에 직결해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홍통하는 싸움을 관철하고, 어서와 같이 ⑥‘유다원질’ ⑦‘악구매리’ ⑧‘육난구이’ ⑨‘삼류의 강적’의 대난과 불석신명(不惜身命)으로 분투한 것이 창가 3대의 사제(師弟)입니다.
대성인의 진실한 혈맥은 오직 광선유포의 사제 속에서만 흐릅니다. 지금 진실한 지용의 제목 소리가 전 세계에 널리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창가의 흐름에 따라 홍통되어 온 ‘광선유포의 신심’ ‘장마에 이기는 제목’ 없이 니치렌 불법의 일생성불 실천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삼장사마와 싸우는 신심이 부처의 경애를 엽니다. 삼류의 강적과 싸우지 않고 성불은 없습니다.
광선유포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이 진실한 부처입니다. 이 위대한 성불의 경애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 분이 도다 선생님입니다.
도다 선생님의 인생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추상열일(秋霜烈日)의 파란만장한 일생이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불법을 믿으면서 안일무사하고 평온한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석존의 한평생도 대성인의 일생도 그런 평온 무사와 거리가 멀고 먼, 분투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불법 정신은 어떤 대난이 닥쳐도 결코 침해 당하지 않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경애를 확립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마성에도 절대로 파괴당하지 않는 강인한 신심을 구축하는 것이 진실한 일생성불입니다. 이것을 석존도 대성인도 몸소 가르쳐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법의 눈으로 보면 도다 선생님의 생애는 참으로 인간 왕자의 위대한 성불의 경애를 증명하기 위한 일생이었습니다. 나는 진정한 직제자로서 은사가 이룬 인간혁명의 대승리를 당당하게 선언해 두고자 합니다.
(중략)
① 원품(元品)의 무명(無明): 생명의 근본적인 무지(無知). 궁극의 진실을 밝힌 묘법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리고 그 무지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충동.
② 지용(地涌)의 보살(菩薩): 법화경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 제15에서 석존이 자신의 멸후(滅後)에 묘법홍통을 위탁할 사람으로 불러 낸 구원(久遠)의 제자인 보살들. 대지에서 용현했으므로 지용의 보살이라고 한다. 그 중심자가 상행(上行)보살이다. 석존이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제21에서 멸후 악세(惡世)에 홍통할 것을 위탁했다.
③ 결요부촉(結要付囑): 법화경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제21에서 석존이 자신의 멸후에 묘법홍통을 지용의 보살에게 위탁한 것. 사구(四句)의 요법(要法)을 설하고 법화경 간요(肝要)의 법을 홍통할 것을 위탁했으므로 결요부촉이라고 한다. 간요의 법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말한다.
④ 남악대사(南岳大師) (515~577): 중국 남북조 시대의 승려로 천태대사의 스승인 혜사(慧思)를 말한다.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고 법화삼매(法華三昧)의 경지를 체득하고 후에 천태대사에게 일심삼관(一心三觀)의 법을 수여했다.
⑤ 천태대사(天台大師) (538~597): 중국 수(隋)시대의 승려로 중국 천태종을 세웠다.
남삼북칠(南三北七)의 제종(諸宗)을 파절하고 법화경을 선양했으며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 등을 저술하고 일념삼천의 법문을 밝혔다.
⑥ “말법에 들어와서 이제 니치렌이 부르는 바의 제목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며”(어서 1022쪽)
⑦ 유다원질(猶多怨嫉): 법화경 법사품(法師品) 제10의 문. “더욱 원질이 많느니라”고 읽는다. 석존의 재세(在世)에도 원질이 많으니, 하물며 부처의 멸후에 법화경을 넓히는 자는 더욱 많은 원질을 받고 대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
⑧ 악구매리: 법화경 권지품(勸持品) 제13,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제20의 문. 법화경을 넓히는 행자가 욕을 먹고 매도당하는 것.
⑨ 육난구이(六難九易): 법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 제11에서 석존 멸후에 법화경을 실천하는 어려움을 여섯 가지 관점에서 설하고, 그것에 비하면 수미산을 들어 타방(他方)의 세계에 던지는 등 아홉 가지는 쉽다고 설한 것.
⑩ 삼류(三類)의 강적(强敵): 법화경 권지품(勸持品)의 이십행(二十行)의 게(偈)에서 멸후 악세에 법화경을 홍통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자를 밝히는 데, 그것을 묘락대사(妙樂大師)가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에서 속중증상만(재가〈在家〉의 박해자), 도문증상만(출가〈出家〉의 박해자), 참성증상만(성인처럼 행동하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사람)의 3종류로 분류한 것.
월간법련 : 06/10/01 2006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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