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18. 14:44ㆍ佛法 .SGI
일생성불초 강의 제5회 용맹정진의 창제
‘나날의 도전’으로 생명을 연마
강 의
만인에게 열린 생명변혁의 길
자신의 마음이 정의로 빛나는 태양과 같은 사람은 어떠한 곤란과 고뇌의 암흑 속으로 뛰어들어도 희망을 잃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람들의 고뇌를 비추는 빛이 되어 희망을 주고 불안을 제거하며 용기를 줍니다.
자신이 바뀌면 ‘세계’가 바뀝니다. ‘내 일념의 변혁’이 모든 변혁의 열쇠입니다. 이것이 ‘인간혁명’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변혁의 힘이 있습니다. 이 생명의 진실을 깨달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 힘을 현실적으로 열어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이 ‘변혁의 종교’라는 것을 명시한 법화경의 이념에 따라 위대한 ‘변혁의 길’을 만인에 열어 가르친 것이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이며 그 ‘변혁의 길’의 근본이 되는 실천이 창제행입니다. 이번에는 변혁 실천의 기본인 창제행의 기본 자세를 밝히신 글월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 문
이에 의해서 정명경(淨名經) 중에는 제불(諸佛)의 해탈(解脫)을 중생(衆生)의 심행(心行)에 구(求)하면 중생즉보리(衆生卽菩提)이며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밝혔느니라.
또 중생(衆生)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토(土)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토(土)도 청정(淸淨)하다고 해서 정토(淨土)라 하고 예토(穢土)라 함도 토(土)에 둘의 차이(差異)가 없으며, 오직 우리들의 마음의 선악(善惡)에 의한다고 쓰여 있다.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迷惑)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闇鏡)도 닦으면 옥(玉)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只今)도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信心)을 일으켜 일야조모(日夜朝暮)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어서 383쪽 15행~384쪽 6행)
통 해
이것(일체의 불법이 나의 기심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에 따라서 정명경 중에는 “모든 부처의 깨달음은 중생의 마음의 작용에서 구해야 한다. 중생을 떠나서 보리는 없고, 생사의 고뇌를 떠나서 열반은 없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 정명경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국토도 더러워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도 깨끗하다”라고 있다. 즉 정토라 해도 예토라 해도 두 가지 별도의 국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고 설하고 있다.
중생이라 해도 부처라 해도 또한 이와 같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흐린 거울도 닦으면 빛나는 구슬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의 일념이 무명에 싸여 미혹의 마음일 때는 닦지 않은 거울이고,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된다. 강한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게으름 없이 닦으시오.
그러면 어떻게 닦는가.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생명의 변혁과 국토의 변혁
이미 배웠듯이 불법은 전부 기심(己心)의 법(法)입니다. ‘성불’이라는 생명의 근본적인 변혁도 그 근본은 ‘인간의 마음’ 차원의 변혁에 있습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정명경(淨名經: 유마경〈維摩經〉)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부처의 해탈을 중생의 심행(心行)에서 구하면 중생즉보리이며 생사즉열반이라고 밝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즉보리’란 번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중생의 생명에, 성불하기 위한 지혜〈보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생사즉열반’이란 생사의 고뇌에 시달리는 중생의 몸에 부처가 이룬 진실한 안락의 경지〈열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성인은 부처와 중생은 결코 서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중생의 심행(마음의 작용)’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대성인은 예토와 정토의 차이에 대해 설한 정명경의 경문을 인용하셨습니다. 즉 정명경에서 ?“중생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국토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도 깨끗하느니라”고 설했으며 정토와 예토는 별도의 세계가 아니라 중생의 ‘마음의 선악’으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현실 세계에서 동떨어진 별도 세계의 정토가 아니라 중생이 스스로 변혁함으로써 현실 사회를 정토로 변혁케 하는 정토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위 ‘정불국토(淨佛國土: 불국토의 정화〈淨化〉)’라고 하는 동적(動的)이며 실천적인 정토관입니다.
대성인은 위 글월을 ?정명경의 문질품(問疾品)에서 인용하셨는데, 이 품은 탁월한 ‘재가(在家)의 보살’인 유마힐(維摩詰)이 병으로 쓰러져 문수사리보살이 문병차 방문했을 당시의 문답을 기록해 놓은 품입니다.
유마힐은 이 품에서 왜 자신이 병에 걸렸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은 중생이 병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보살의 근본 정신인 ‘동고(同苦)’의 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유명한 말입니다.
유마힐은 말했습니다. “보살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서 구제하기 위해 굳이 미혹에 빠져 괴로워하는 중생 속에 태어나서 ‘생사의 고뇌’를 동고(同苦)한다. 더구나 고뇌의 기력에 꺾여 헤매는 일은 없다. 보리심에는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와 같이 대성인이 인용하신 정명경의 경문은, 현실 속에서 싸우는 보살의 위치에서 진실한 부처의 생명과 진실한 정토의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정명경을 토대로 대성인이 말씀하신 결론으로서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고 있습니다. 즉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중생에게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미혹’을 ‘깨달음’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앞에서 중생의 심적인 변혁으로 국토도 변혁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변혁의 근간에 있는 것이 중생의 생명이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 전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창제’이고 심적인 차원에서는 ‘신(信)’이라는 것을 이 강의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즉 간단히 말하면 ‘신’으로 미혹의 근본인 ‘무명’을 타파하고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이 근본적인 전환의 가능성을 “비유컨대 암경(暗鏡)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라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신’을 근본으로 ‘무명’을 타파하는 창제행은 ‘생명의 연마’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본래 중생은 묘법의 당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에 갖추고 있는 무한한 묘법의 힘을 아무런 방해없이 필요한 때 필요한 형태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부처의 생명입니다. 이 상태를 ‘옥’과 같이 보이는 명경(明鏡)으로 비유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는 묘법의 당체라 할지라도 무명에 뒤덮이면 묘법의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암경’, 즉 얼룩져서 물체를 비추지 못하는 거울에 비유하시고 있습니다.
창제행 이외에 이 생명의 암경을 닦는 수행은 없습니다.
(중략)
월간법련 : 06/08/01 2006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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