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성불초 강의 제2회 창제의 의의

2008. 8. 18. 14:36佛法 .SGI

 

불법 정통의 실천으로 생명 궁극의 승리를

 

강 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창제행(唱題行)에는 무량무변의 공덕이 있습니다. 창제에는 ‘우주 근원의 법’인 묘법의 무한한 힘을 자기 생명에 불러 나타내는 힘이 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 남묘호렌게쿄의 무한한 공덕력으로 인류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 일어서셨습니다. 대성인이 분투하신 교의적 근거가 〈일생성불초〉의 첫머리에 간단히 나타나 있습니다.

“대저 무시(無始)의 생사(生死)를 멈추고 이번에 결정코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證得)하려고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중생본유(衆生本有)의 묘리(妙理)를 관(觀)할지어다. 중생본유의 묘리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한다면 중생본유의 묘리를 관(觀)하는 것으로 되느니라.”(어서 383쪽)

이 한 구절에는 불교의 깊은 철리(哲理)와 만인성불을 지향해 온 종교혁명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한구절 한구절의 표현에 탁월한 불법(佛法)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무시의 생사를 멈추고’란 인생의 근본적 과제라 할 수 있는 종교 본래의 역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상보리를 증득하려고’란 이 종교적 과제에 대해 불교에 보내는, 영지(英智)에 넘친 회답입니다.

‘중생본유의 묘리를 관할지어다’란 앞의 회답을 법화경의 사상으로 더욱 세련되게 만들고 심화한 것입니다.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한다면’이란 그 종교적 영지를 만인이 실천할 수 있도록 대성인이 세우신 수행입니다. 이를 실천하는 것은 민중구제를 목표로 하는 대자비의 결정이며 니치렌 불법의 깊은 혁신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서 전체를 통해, 대성인이 세우신 창제행이 불교에서는 ‘정통성’과 ‘궁극성’을 지닌 커다란 행동이라는 것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짧은 한 구절에, 수천 년에 걸친 불교의 영지와 대성인 불법의 민중구제의 자비와 지혜가 명쾌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번 회에서는 대성인이 세우신 창제행이 불교의 정통적인 수행법이라는 결론과 이 수행법으로 모든 사람이 부처와 같은 경지를 확립하는 진정한 민중불법이 개막했음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본문

대저 무시(無始)의 생사(生死)를 멈추고 이번에 결정코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證得)하려고 생각한다면 모름지기 중생본유(衆生本有)의 묘리(妙理)를 관(觀)할지어다. 중생본유의 묘리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한다면 중생본유의 묘리를 관하는 것으로 되느니라. (어서 383쪽 1행~2행)

 

통해

무한한 과거부터 되풀이해 온 생사의 고뇌를 멈추고 지금 이 인생에서 반드시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생각한다면 중생에게 본래 갖춰진 묘리를 반드시 자신의 생명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중생에게 본래 갖춰진 묘리란 묘호렌게쿄를 말한다. 그러므로 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면 중생에게 본래 갖춰진 묘리를 자신의 생명속에서 살펴보는 것이 된다.

 

무시의 생사를 멈추고 영원한 행복을 확립

 

우선 첫머리의 ‘대저 무시의 생사를 멈추고’라는 말씀의 뜻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무시의 생사’란 무한한 과거에서 영겁(永劫)의 미래까지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끝없는 반복을 말합니다.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사상(思想)을 전제로 하는 표현인데, 불교에서는 이 끝없는 생사 고뇌의 유전(流轉)은 번뇌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번뇌·업(業)·고(苦)라는 악(惡)의 연쇄가 이 생사유전을 수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시의 생사’는 끝없는 미혹과 고통의 반복이기도 합니다.

이 유전은 참고 견디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생사의 유전을 멈추고 미혹과 고뇌의 연쇄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깁니다.

불교에서는 생사유전에서 해방되는 데 대한 두 가지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전의 원인인 번뇌를 없애 버리면 유전에서 해방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생사는 결코 무상(無常)의 유전이 아니라는 대승교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보살의 서원에 의해 생사가 있다든가 혹은 생사유전 자체가 우주 근원의 위대한 생명에서 나타나 위대한 생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후자는 큰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들면 알기 쉬울 것입니다. 즉 위대한 생명은 큰 바다로, 생사유전은 큰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생사유전하는 자신의 생명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무상보리(無上菩提)’, 즉 부처의 최고 깨달음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에 내재(內在)하는 묘리

 

어서에서 ‘중생본유의 묘리를 관하는 것’이 ‘무상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생, 즉 생존하는 모든 것이 본래 갖추고 있는 묘리를 관하는 지혜가 부처의 최고 깨달음입니다.

불교가 기존의 사상이나 종교와 크게 구분되는 것은 인간 속에서 무량의 고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법’, 즉 ‘무한한 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이것으로 인해 고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무너지지 않는 행복을 쌓는 최고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불법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최고의 인간주의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내도(內道)라고 합니다.

이 ‘중생본유의 묘리를 관하는 것’이 ‘무상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며 ‘무시의 생사’를 멈추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석존(釋尊)의 출발점이고 불교사상의 결론입니다. 이 내도 사상을 높이 구가한 경전(經典)이 만인성불을 설하는 법화경(法華經)입니다. 법화경은 인간존엄 사상의 궁극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중생본유의 묘리’란 ‘일심법계(一心法界)의 취지(趣旨)’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일심법계의 취지’란 만법(万法)이 나의 마음에 잠기고 나의 마음이 만법으로 넓혀진다는, 마음과 우주의 불가사의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니치칸 상인이 일념삼천에 대해 말씀하신 ?‘구편(具遍)의 의(義)’와 같은 뜻으로 배견됩니다.

위대한 생명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에 편재(遍在)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므로 모든 것에 내재(內在)합니다. 그 위대한 생명과 마음이 일치하는 것이 ‘일심법계의 취지’이며 이 묘리를 깨닫는 것이 부처의 깨달음, 즉 ‘무상보리’입니다.

 

묘리에 이름을 붙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만인이 이 ‘중생본유의 묘리’를 관할 수 있는가 라는 점입니다. 설령 묘리를 관하는 길이 열려도 그 길을 끝까지 걷는 사람이 극히 일부에 한정된다면 불교는 민중에게 열린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대성인 이전에 이 묘리를 관하는 방도를 확립하려 한 것이 천태대사의 ‘관념관법(觀念觀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법의 민중에게 열린 방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대성인이 개척하신 길의 제일보는 묘리에 이름을 붙이신 것입니다.

‘중생본유의 묘리’에는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이 ‘중생본유의 묘리’를 자신의 생명에서 발견하신 대성인이 그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이에 관한 것은 〈당체의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창조적 행위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본질을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름이 붙어 만인이 그 가치를 공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생본유의 묘리란 묘호렌게쿄 이것이니라”(어서 383쪽)고 말씀하시듯이 대성인은 ‘중생본유의 묘리’라는 근본법은 ‘묘호렌게쿄’임이 틀림없다고 명확하게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묘호렌게쿄’라는 말은 법화경의 경제(經題: 경의 제목)로서 존재하고 있었으나 이 묘호렌게쿄야말로 법화경에서 부처의 깊고 깊은 지혜로서 설하고 있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깊은 원리를 뜻하는 이름이라고 밝힌 것은 대성인이 처음입니다.

또 수량품에서는 석존에 근본을 두고 영원한 부처의 생명을 설하는데, “수량품의 간심(肝心)”(어서 250쪽)이 바로 묘호렌게쿄라고 밝히신 것도 대성인이 처음입니다.

구원에 성불한 이후, 이 영원한 부처는 중생구제를 위해 십계의 여러 모습을 나타내면서 부처로서 생사유전을 되풀이하는 존재입니다. 십계의 중생도 또 삶도 죽음도 위대한 영원의 생명이 나타내는 모습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 수량품입니다.

이 수량품의 간심이 묘호렌게쿄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므로 묘호렌게쿄는 수량품의 위대한 생명의 이름이라고 배견할 수 있습니다. 실은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는 구계의 중생의 생명도 이 위대한 생명인 묘호렌게쿄에서 나타나 묘호렌게쿄로 귀착하는 생사의 리듬을 새기고 있으며 묘호렌게쿄에 싸여 묘호렌게쿄를 내재(內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묘호렌게쿄가 ‘중생본유의 묘리’의 이름입니다. 대성인이 묘호렌게쿄가 말법에 불러야 할 제목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발췌)



월간법련 : 06/05/01 2006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