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18. 14:40ㆍ佛法 .SGI
기심(己心)의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묘법(妙法)이 아니다
강 의
창제는 ‘묘법’과 ‘자신’이 나누는 교류입니다. 자신이 묘법과 일체가 되기 위한 수행입니다. 그것은 묘법과 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무명(無明)과 싸우는 것입니다. 신(信)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묘법과 일체가 되면 묘호렌게쿄라는 ‘위대한 법’의 ‘위대한 힘’을 나의 몸에 꽃피울 수 있습니다. 거기에 창제의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있습니다.
그 구도의 신심을 담아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것이 대성인이 넓히신 창제의 요체(要諦)입니다.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입니다. 삼장사마(三障四魔)에 지지 말고 무명을 타파하는 용기 있는 신심이야말로 우리가 창제할 때 무엇보다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본문
단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며 수지(受持)한다 해도 만약 기심(己心)의 밖에 법(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묘법(妙法)이 아니라 추법(法)이니라. 추법은 금경(今經)이 아니로다, 금경이 아니면 방편(方便)이며 권문(權門)이니라. 방편권문의 교(敎)란다면 성불(成佛)의 직도(直道)가 아니고, 성불의 직도가 아니면 다생광겁(多生曠劫)의 수행(修行)을 거쳐도 성불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성불(一生成佛)은 이루기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묘호(妙法)라고 부르고 렌게(蓮華)라고 읽을 때에는 나의 일념(一念)을 가리켜서 묘호렌게쿄라고 이름한다고 깊이 신심(信心)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어서 383쪽 6행~9행)
통해
단 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수지한다 해도 만약 자신의 생명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묘법이 아니라 추법(불완전한 법)이다.
추법은 법화경이 아니다. 법화경이 아니라면 방편의 가르침이며 임시의 가르침이다. 방편이고 임시의 가르침이라면 성불로 곧바로 이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성불로 곧바로 이를 수 있는 길이 아니면 여러 번 태어나 장원한 수행을 반복해도 성불할 수 없으므로 끝내 일생성불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묘호라고 부르고 렌게라고 읽을 때는 나의 일념을 가리켜서 묘호렌게쿄라고 이름한다고 깊이 신심을 일으켜야 한다.
성불의 인과(因果)를 생명의 골수에
묘호렌게쿄란 궁극적인 묘리(妙理)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남묘호렌게쿄는 이 묘리를 나타낸 부처 생명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하는 신심의 일념에 묘호렌게쿄의 무한한 공덕이 꽃핍니다. 이것이 불계(佛界) 생명의 용현입니다.
여기에 신심을 ‘인(因)’으로 하고 불계 생명의 용현을 ‘과(果)’로 하는 일념의 ‘인과(因果)’가 있습니다. 고락(苦樂)에서 또 자행화타에 걸쳐 이 인과일념의 창제를 지속하는 사람은 창제속에 들어 있는, 성불할 수 있는 ‘인과의 공덕’을 우리 생명의 골수로 확립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생명에 확고한 불계 생명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일생성불’입니다.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묘호렌게쿄의 수지(受持)가 즉 관심(觀心)이라는 것을 논하시며 “묘각(妙覺)의 석존(釋尊)은 우리들의 혈육(血肉)이니라. 인과(因果)의 공덕(功德)은 골수(骨髓)가 아니겠느뇨”(어서 246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심의 ‘인’과 불계 용현의 ‘과’. 이 인과일념을 성취하는 것이 창제의 힘입니다. 이로써 생각해 볼 때, 창제의 소리는 무명을 타파하고 장마(障魔)를 떨쳐 버리는 확고한 신심과 구도의 소리이며, 그 결과로 용현한 불계 생명에서 나오는 사자후(師子吼)입니다.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는 중생이 신심을 행하는 소리이며 동시에 부처 생명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창제는 어디까지나 백마가 달리듯이 낭랑하고 상쾌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래 자기 자신이 묘호렌게쿄라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가 창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 구원원초의 생명력을 분발시키는 싸움이 창제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외의 유락(遊樂)은 없느니라”(어서 1143쪽)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락이란 ‘자수법락(自受法樂)’이라고 하셨습니다.
‘법락’이란 살아서 존재하는 자체에 갖출 수 있는 확고한 안락입니다. 묘법과 일체인 위대한 생명력을 만끽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묘법의 즐거움을 받는 자수법락의 길은 이 창제 외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묘법과 추법
이런 의의가 있는 창제행(唱題行)에서 절대 잊으면 안 될 것은 ‘자기 자신이 묘호렌게쿄의 당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으면 아무리 제목을 불러도 대성인이 가르치신 창제행과 별개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단 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수지(受持)한다 해도 만약 기심(己心)의 밖에 법(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묘법(妙法)이 아니라 추법이니라”(어서 383쪽)고 엄격히 훈계하십니다.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불러도 묘호렌게쿄가 기심의 밖에 있다고 생각하며 창제하는 한, 그것은 묘법이 아니라 추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묘법이 완전한 진리를 뜻하는 반면에, 추법은 불완전하다는 뜻이며 부분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는 종교가 빠지기 쉬운 나쁜 폐습을 극복하기 위한 깊은 종교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행복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신앙론이 있습니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위대한 것’ ‘절대적인 것’ ‘성스러운 것’을 인간과 결부하기 위한 인류 보편의 행위라고 합니다.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에서 성(聖)과 속(俗), 신(神)·불(佛)과 인간은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종교는 그것을 다시 결합시키는 가르침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 대성인은 ‘절대적인 것’이나 ‘성스러운 것’을 처음부터 분리하는 종교의 사고방식을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포착하신 것으로 배견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일생성불초〉에서 이런 추법의 예로서 이전권교(爾前權敎)를 드시고 있습니다. 그것들은역겁수행(歷劫修行)에서 볼 수 있듯이 중생이 일생성불할 수 있는 법리도, 실천도 설하지 않았습니다.
이전권교에서는 ‘부처’와 ‘범부’ 사이에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습니다. 범부 중에 수행을 한 극히 일부의 달인만이 역겁수행 끝에 부처를 목표로 할 수 있으며, 반대로 부처가 된 후에 범부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부처가 사는 세계는 범부가 사는 사바세계가 아닙니다. 양자 사이는 철저히 격리되어 있습니다.
만인 성불은 ‘불계’와 ‘구계’ 사이에 단절이 있는 한, 현실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디까지나 이상적으로 말하는 부처는 인간과 격리된 존재이고, 그 부처가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이외에 범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 구계와 불계의 단절을 부순 것이 법화경에서 설하는 일념삼천의 법이며 단적으로 말하면 ‘구계즉불계’ ‘불계즉구계’의 법리입니다. 법화경의 십계호구(十界互具) 사상이 얼마나 탁월한가.
니치렌 대성인은 창제행을 하나의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시고 십계호구라는 일생성불의 원리를 실현하는 길을 여셨습니다. 여기에 중생 성불을 지향하는 불교의 완성된 모습이 있습니다.
(중략)
월간법련 : 06/06/01 2006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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