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18. 14:46ㆍ佛法 .SGI
마음의 스승이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본 문
대저 묘(妙)란 무슨 뜻이뇨. 오직 나의 일념(一念)의 마음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묘라고 하며, 불가사의란 마음도 미치지 못하고 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즉 일어나는 바의 일념의 마음을 찾아보면 있다고 말하려 하면 색(色)도 질(質)도 없고, 또한 없다고 말하려 하면 갖가지로 마음이 일어나니, 유(有)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무(無)라고 생각할 수도 없느니라.
유무(有無)의 두 말도 미치지 못하고 유무의 두 마음도 미치지 못하며, 유무가 아니면서도 또한 유무에 두루 미치어 중도일실(中道一實)의 묘체(妙體)로서 불가사의함을 묘라고 이름하고, 이 묘한 마음을 이름하여 법(法)이라고도 하느니라.
이 법문(法門)의 불가사의를 나타냄에 비유를 사법(事法)으로 표현하여 연화(蓮華)라 이름함이라. 일심(一心)을 묘라고 안다면 또한 전환(轉換)해서 여심(餘心)도 묘법(妙法)이라고 아는 바를 묘경(妙經)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즉 선악(善惡)에 따라서 일어나고 일어나는 바의 염심(念心)의 당체(當體)를 가리켜서 이는 묘법의 체(體)라고 설해 말씀하신 경왕(經王)이므로 성불(成佛)의 직도(直道)라고 하느니라. (어서 384쪽 6행~12행)
통 해
대저 ‘묘’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오직 자기 일념의 마음이 불가사의한 것을 ‘묘’라고 한다. 불가사의란 우리 마음의 작용도 미치지 못하고 또 말로 표현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자기 일념의 마음을 탐구해 보면, 그것을 있다고 말하려고 하면 색도 형태도 없다. 또 없다고 말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일어난다.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없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유와 무의 두 가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유와 무라는 두 가지 생각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유와 무 어느 쪽도 아니며 더구나 유와 무의 어느 모습을 취하는, 중도이면서 보편 궁극의 진리 본연의 모습이며 불가사의함을 ‘묘’라고 이름하고, 이 ‘묘’한 마음을 이름하여 ‘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법문의 불가사의함을 비유해서 나타낼 때, 구체적인 사물에 견주어 ‘연화’라고 이름한다. 하나의 마음을 묘라고 안다면 또 전환해서 다른 마음도 또한 묘법임을 아는 것을 ‘묘경’이라고 한다.
따라서 법화경은 선이든 악이든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일념의 마음의 당체를 가리켜, 이것이 묘법의 체라고 설해 말씀하신 경왕(여러 경들의 왕)이므로 성불의 직도라고 하는 것이다.
강 의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
마음은 불가사의합니다. 마음의 세계는 무한히 확대합니다. 또 어디까지나 깊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맑게 갠 푸른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 듯이 대환희의 생명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만물을 비추는, 맑고 깨끗하며 빛나는 태양같이 고뇌에 빠진 사람들을 사랑하고 감싸 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자와 같이 정의를 위한 분노에 떨고 사악(邪惡)을 타파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은 드라마 같고 파노라마 같으며 천변만화(千變萬化)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불계(佛界)를 용현하는 것입니다. 미혹과 고뇌에 압박당하고 있던 사람도, 자기 마음의 무대에서 대우주와 융합하는 부처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변혁을 일으키는 드라마는 그야말로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입니다.
불법은 만인의 ‘마음<心>’속에 있는 위대한 변혁의 가능성과 무상(無上)의 존극성(尊極性)을 발견했습니다.
대성인은 그 결론으로 〈일생성불초〉에서 중생의 마음을 묘호렌게쿄의 창제로 연마하면 어떠한 미혹에 빠진 범부도 부처의 생명을 열고, 탁악(濁惡)의 예토(穢土)도 청정한 국토로 바꿀 수 있음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묘호렌게쿄는 ‘중생본유의 묘리’, 즉 생명에 본래 갖춰진 본연의 진리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唱題行)을 통해 ‘암경(闇鏡)’과 같은 범부의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 미혹의 마음)’을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으로 닦아서 불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본유의 묘리를 자기 생명에 나타내고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무한대의 가능성을 열 수 있습니다.
본유의 묘리인 묘호렌게쿄와 일체가 된 생명이 불계의 생명입니다. 남묘호렌게쿄는 이 근본적인 부처의 생명 이름입니다.
이번에 배우는 어문에서는 묘호렌게쿄와 중생 마음의 관계를 ‘묘’ ‘호’ ‘렌게’ ‘쿄’로 분류해서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중생의 마음이 묘호렌게쿄와 일체가 되어 불계의 생명이 현현(顯現)하는 상태를 설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어문의 깊은 뜻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래 마음은 중도일실(中道一實)의 묘체
우선 묘호렌게쿄의 ‘묘’에 대해, 중생이 지니고 있는 불가사의한 일념의 마음이 바로 ‘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불가사의한 모양을 ‘유(有)’와 ‘무(無)’의 개념으로 밝히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우리 일념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기멸(起滅)하고 변전(變轉)한다. 그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을 탐구해 보면, ‘유(有)’라고 말하려 하면 그 마음이 무슨 색이고 어떤 모습이나 형태를 하고 있는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색, 모습, 형태가 없다고 해서 ‘무(無)’라고 말하려면, 이런 저런 마음이 계속 일어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념의 마음은 ‘유’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즉 ‘유’ ‘무’라는 두 가지 말만으로 파악할 수 없고, ‘유’ ‘무’라는 두 가지 생각도 미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일념의 마음은 ‘유’ ‘무’의 개념을 초월하고 있다. 더구나 반드시 ‘유’ ‘무’ 어느 하나의 모습을 취한다. ‘유’도 ‘무’도 아니고 게다가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하다. ―
대성인은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형상을 취하는 일념의 마음을 ‘중도일실(中道一實)의 묘체(妙體)’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중도’는 단순한 중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두 가지의 극단적인 상황에 구애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포함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석존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으로 흐른 사상적·실천적 상황을 초월한 올바른 사상·실천의 자세를 세워 그것을 ‘중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유’ ‘무’라는 두 가지 극단을 초월하고 더구나 ‘유’ ‘무’ 양쪽의 형상을 취한 궁극의 진리를 가리켜 ‘중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진리의 궁극성의 면을 가리켜 ‘일실’(유일무이의 진실 혹은 실재〈實在〉)이라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무를 초월하고 있다”는 ‘유’ ‘무’에 걸쳐 그지없이 변하는 ?무상(無常)의 현상을 초월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유·무의 양쪽에 걸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무를 초월한다 해도 무상의 현상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초월한 실재(實在)나 절대자(絶對者)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현상을 포함해서 무상의 현상에 내재(內在)하는, 참된 영원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이 어서에서 ‘유’ ‘무’ 두 가지 말을 설명함으로써 용수(龍樹)의 ‘공(空)’과 천태(天台)의 ‘삼제원융’ ‘일심삼관’에 통하는 내용을 밝히신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대성인이 여기서 명백히 한 중도일실의 묘체는 ‘공’과 ‘삼제원융’ ‘일심삼관’으로 표현되는 궁극적인 진리와 일체가 된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렌게(蓮華)’는 인과구시의 법
다음으로 대성인은 지금까지 밝힌 ‘묘한 마음’을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묘한 마음’이 바로 ‘묘호’입니다. ‘공’이나 ‘삼제원융’이라 해도 추상적 이론이나 말만으로 ‘묘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중도의 지혜가 되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의 규범이 되고 법이 되어 넓혀지기 때문입니다.
또 “이 법문의 불가사의를 나타냄에 비유를 사법(事法)으로 표현하여 연화〈렌게〉라 이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묘법〈묘호〉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는 ‘이 법문의 불가사의’를 범부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구체적인 사물을 이용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것이 ‘연화〈렌게〉’입니다.
왜 연화인가. 그것은 보통 식물은 꽃이 핀 후에 과실을 맺습니다. 이 관계를 인과(因果)의 비유로 수용하면 꽃은 원인이고 열매는 결과입니다. 이것은 ‘인과이시(因果異時)’입니다.
이에 비해 연꽃은 꽃잎과 함께 과실이 동시에 생장하고, 꽃이 피었을 때 열매가 동시에 자랍니다. 연꽃과 열매는 ‘인과구시(因果俱時)’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불의 불인불과(佛因佛果)에 대해 법화경 이외의 이전권경(爾前權經)의 가르침은, 인(因)이 되는 범부의 생명속에 불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겁수행을 거쳐 비로소 부처의 경애를 구축할 수 있다고 설합니다. 이것은 ‘인과이시’입니다.
그러나 법화경은 범부 생명에 본래 갖춰진 부처의 경애를 바로 열어 나타낸다고 설합니다.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말하면 중생의 ‘미혹의 마음’이 부처의 ‘묘한 마음’으로 바로 전환한다고 설합니다. 이 ‘인과구시’를 ‘연화〈렌게〉’에 비유합니다.
‘묘심(妙心)’의 연속이 ‘묘경(妙經)’
대성인은 ‘경〈쿄〉’에 대한 뜻도 ‘마음의 묘’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즉 “일심(一心)을 묘라고 안다면 또한 전환해서 여심(餘心)도 묘법〈묘호〉이라고 아는 바를 묘경이라고 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쿄〉’이라는 말은 시간적 경과를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심’은 어느 순간의 마음, ‘여심’은 별도 순간의 마음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순간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제행(唱題行)에 구비된 강한 신심으로 ?무명을 타파하면 마음에 ‘본유의 묘리’가 나타나서 ‘묘호렌게’의 생명을 꽃피웁니다. ‘무명의 일념’을 ?‘법성진여의 일심’으로 전환할 수 있는 성불의 인과를 지속적인 창제로 나날이 쌓을 수 있습니다.
그 인과의 공덕이 자기 생명의 골수가 되어 인격과 인생에 공덕의 꽃을 피웁니다. 이것이 ‘묘경’입니다.
그리고 이 ‘묘경’을 자신이 타인에게 넓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일심’을 부처 자신의 마음, ‘여심’을 일체 중생의 마음으로 파악하면 참으로 ‘경〈쿄〉’은, 부처가 ‘묘한 마음’인 깨달음의 한 부분을 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묘한 마음’ 자체를 설한 경왕(經王)이 법화경이고 그 진수가 묘호렌게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행화타에 걸쳐 남묘호렌게쿄라고 소리도 아끼지 않고 부르며 광선유포를 전개하는 것이 ‘묘경’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묘호렌게쿄’는 참으로 ‘기심(己心)의 법(法)’이고 한사람 한사람이 창제를 통해 기심을 순간순간 변혁시킴으로써 그것이 생명의 근본적 변혁으로 그리고 인생 전체의 변혁, 즉 일생성불로 또 광선유포라는 인류 대변혁의 조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차원의 변혁과 약동이 모두 묘호렌게쿄입니다.
(중략)
월간법련 : 06/09/01 200609호
'佛法 .SG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화(蓮華) - ‘인과구시(因果俱時), 불가사의의 일법(一法)’ (0) | 2008.08.19 |
---|---|
일생성불초 강의 제7회(최종회) (0) | 2008.08.18 |
일생성불초 강의 제5회 용맹정진의 창제 (0) | 2008.08.18 |
일생성불초 강의 제4회 일념의 전환 (0) | 2008.08.18 |
일생성불초 강의 제3회 (0) | 2008.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