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蓮華) - ‘인과구시(因果俱時), 불가사의의 일법(一法)’

2008. 8. 19. 10:36佛法 .SGI

 

연화(蓮華) - ‘인과구시(因果俱時), 불가사의의 일법(一法)’

 

‘전통의 2월’을 맞아 약진반 4부는 현장에서 확대의 돌파구를 여는 활동에 불타고 있다.

특히 현장에서 교학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으며 지난달에 이어 법화경 제호(題號)의 두번째 단어인 ‘연화(蓮華)’를 통해 누구도 거스를 수없는 인과(因果)의 법칙에 대해 함께 공부한다.

 

왕모범 반장   전통의 2월 현장에서는 엄동설한을 녹이는 청년들의 활동이 뜨겁습니다.

나희망 반담   맞아요. 정말 청년부의 기세가 대단해요. 저희 부인부도 청년부에게 지지 않기 위해 3월 부인부 반단위 총회를 앞두고 도전의 결의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최인재 그룹장   지난달에 배운 생사(生死)의 본질에 대해 공부한 청년부들이 지용의 보살로서 사명을 할 수 있음에 환희하며 더욱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 빛 그룹장   이번 달에는 인과구시(因果俱時)에 대해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법화경 제호의 두번째 단어인 연화(蓮華)가 인과구시를 뜻한다고 배웠어요.

오황금 권장   예! 알겠습니다. 인과구시란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갖춰진다는 말입니다. 구시(俱時)란 때를 같이하여 선후의 구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양자가 순간의 생명에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왕모범   인과에 대한 것은 지난번에도 배운 적이 있는데, 수많은 종교 중에서 불교만 이 법칙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래서 불교와 과학은 배치되는 내용이 없이 대부분 부합하고 있습니다.

나희망   전지전능한 절대적인 신(神)을 믿는 종교는 인과를 무시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인과법칙을 초월했을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한 빛   맞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인과법칙이라는 굴레를 쓰고 있다면 전지전능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불교를 제외한 대부분 종교는 비과학적인 교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오황금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나 현상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라는 부처의 깨달음을 통해서, 인간은 왜 불행한지, 인간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심지관경(心地觀經)》에 “과거의 인(因)을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과(果)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인을 보라”는 유명한 경문이 있습니다.

최인재   그런데 인과법칙은 쉽게 이해가 가는데 인과구시는 금방 이해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동시에 생길 수 있나요.

오황금   인과구시는 인과법칙의 본질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니치렌 대성인도 사유(思惟)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일법(一法)이라고 하셨습니다.

석존이 《심지관경》의 경문처럼 42년간 인과이시(因果異時)의 가르침을 설하다 법화경에 와서 처음으로 인과구시의 가르침을 설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제자들은 사리불 등의 일부 제자밖에 없었습니다.

왕모범   그래서 연꽃을 비유로 인과구시를 설명하려 했군요. 연꽃은 다른 꽃과 달리 꽃망울〈因〉와 열매〈果〉를 동시에 맺는 보기 드문 꽃이니까요.

나희망   석존이 인과구시의 개념을 법화경에 와서야 처음으로 이야기했고, 석존의 깨달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에 법화경의 제호에도 ‘연화’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이군요.

오황금   맞습니다.

법화경 이전(以前)의 경(經)에서는 본래 성불(成佛)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한 불도수행이 인이며, 그 불도수행을 통해 나중에 성불이라는 과보를 얻게 된다고 설했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에 들어오면 중생의 생명속에는 이미 불계(佛界)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부처의 생명을 만드는 것이 성불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생명속에 감춰져 명복(冥伏)해 있는 불계를 열어 나타내는 것이 성불의 실상(實相)이라고 설하게 됩니다.

최인재   그러니까 부처가 되기 위해 불도수행을 하는 중생의 생명〈因〉속에 이미 부처의 생명〈果〉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인과구시라고 하는 것이군요.

한 빛   역시 이해하기 어렵네요.

법화경을 난신난해(難信難解)의 경이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불도수행을 하는 범부의 생명속에 이미 불계가 갖춰져 있다는 가르침은 십계호구(十界互具)라고 하는데, 인과구시와 십계호구는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군요.

오황금   예, 맞습니다. 그런데 인과구시를 깊이 이해하려면 십여시(十如是)에 나오는 여시보(如是報)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여시보란 생명에 각인된 인과(因果)가 모습이나 형태로 나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최인재   그러면 여시과(如是果)는 무엇입니까? 여시보와 여시과는 차이점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황금   여시과는 생명 그 자체에 갖추어진 결과이며 무형(無形)입니다. 이 여시과가 유형(有形)의 형태로 나타날 때 여시보가 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결과라고 말할 때는 이 여시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존도 보이지 않는 무형의 여시과를 이해시키기가 어려웠기에, 여시과와 여시보를 합하여 과보(果報)라고 설하기도 했습니다.

나희망   무형의 여시과는 정말 이해하기가 쉽지 않군요. 쉬운 비유를 통해 이야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황금   요즘 모 박사 허위논문 사건으로 생명공학이 사회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데, 세포 속의 유전자를 보면 무형의 여시과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척수를 만드는 줄기세포는 척수가 만들어지는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줄기세포의 DNA 유전자는 완성된 척수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척수라는 형태로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완전한 척수가 유전자 속에 무형으로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연꽃 씨앗 속의 유전자에도 무형이지만 완전한 연꽃이 들어 있습니다.

최인재   제가 좋아하는 단감에도 그 씨앗을 쪼개 보면 삽자루 같이 생긴 어린 감나무의 배아가 있어요.

한 빛   유전자라고 하면 DNA가 발견된 지 불과 5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법화경 설법 당시의 민중들이 무형의 여시과를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웠겠어요.

왕모범   석존은 과학에서 최근에야 발견한 유전자와 유사한 개념을 이미 3천 년 전에 깨달아 무형의 여시과를 발견했고, 인과구시라는 불가사의한 궁극의 가르침을 법화경에서 설하셨군요.

오황금   그뿐 아니라 십여시에서 여시인(如是因)도 생명의 내면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십여시의 여시작(如是作)에 해당합니다.

식물이 씨앗을 맺기 위해서 수분을 빨아들이고 광합성을 하여 꽃을 피우는 일련의 행동이 여시작이 되며, 그 여시작은 동시에 씨앗이라는 여시인을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그 씨앗 속에는 식물의 전체 유전자가 들어 있으므로 동시에 여시과가 됩니다. 이것이 싹이 터서 여시보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빛   컴퓨터에 비유하면, 키보드를 치는 행위는 여시작, 그것에 의해 실시간으로 새겨지는 파일이 여시인인 동시에 여시과이고, 이것은 씨앗을 장기간 창고에 보관할 수 있는 것처럼 기억장치에 저장이 가능하며, 그 파일을 열어 프린트하면 여시보가 되는 것이군요.

나희망   그러니까 한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여시인이 되기도 하고 여시과가 되기도 하는군요. 인과일체, 인과불이(因果不二)네요. 그렇기 때문에 인이 있으면 반드시 과가 있고, 과가 있으면 반드시 인이 있군요.

인과가 홀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면 결론은 오직 하나! 바로 인과구시입니다.

최인재   인(因)과 과(果)는 몸과 그림자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군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인과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겠네요.

오황금   우주 자체가 인과의 당체(當體)입니다. 그래서 인과가 우주 전체에 흐르는 보편적인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여시작과 여시보를 인과라고 본다면 둘은 시간적으로 선후(先後)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는 더욱 깊이 인과를 투시하여 인과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왕모범   부처는 보이는 여시작과 여시보를 인과로 본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무형의 인과를 보고 인과구시를 발견해 낸 것이군요.

오황금   예 그렇습니다. 이 인과구시라는 근본의 일법은 우리 일상생활에도 수없이 많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일 기말고사가 있는 학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있다면 그 행동〈여시작〉에 의해 여시인과 동시에 무형의 여시과가 생명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것이 다음 날 시험이라는 과정(연〈緣〉)을 통해서 여시보로서 안 좋은 시험결과라는 유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희망   이제야 예전에 보았던 선생님 스피치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강한 기원이라고 하는 여시인은 기원이 열매를 맺는 여시과도 동시에 수반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가 되어 나타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깊은 차원에서는 기원즉성취입니다. 기원한 그 순간에 이미 빛이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스피치입니다.

최인재   우리가 나날이 광선유포의 활동을 하면서 생명에 새기는 인과(因果)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인간변혁의 모습과 행복한 인생, 즉 여시보로 반드시 나타나게 되겠군요.

오황금   아니 행동 그 자체가 이미 부처의 모습입니다.

“초목은 비가 내리면 무성하고 사람은 선근을 행하면 반드시 번영하도다”(어서 1562쪽)라는 대성인 말씀을 확신하고, 지용의 보살로서 부처의 사자라는 긍지를 품고 더욱 환희차게 현장으로 달려갑시다. (계속)



월간법련 : 06/02/01 20060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