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0. 20:36ㆍ佛法 .SGI
<사자(師子)의 광채 - 대원을 완수하자>
‘청년부 실장 취임’ 70주년
광선유포 승리의 방정식을 전부 만든다!
1954년 3월 30일,
청년부 실장(당시 참모실장)에 취임한 이케다 선생님은 넘치는 결의를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한단계 한단계 학회의 중핵으로서 광포(廣布)를 추진해야 한다.
이것이 내 사명이다.
화초가 있어야 꽃이 피는 법.
이것이 사명이리라.
나 자신이 있어야 묘법(妙法) 유포를 한다.
이것이 사명이리라.”
은사 도다 선생님에게 이케다 선생님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은사의 슬하에서 가마타지부 간사(1952년 1월 취임),
남자부 제1부대장(1953년 1월 취임),
분쿄지부장 대리(1953년 4월 취임)로서 지휘하고,
은사의 생애 원업(願業)인 75만 세대 달성을 향해 확대의 금자탑을 세웠다.
1954년 2월, 도다 선생님은 광포의 미래를 내다보며, 이케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청년에게 자신이 직접 맡고 있는 ‘스크루’ 역할을 주겠다고 결단했다.
1954년 3월, 실장에 취임한 이케다 선생님은 광선유포의 모든 기획, 안건, 수행을 책임졌다. ‘광선유포 승리의 방정식을 전부 만든다’고 각오했다. 당시 청년부 진용은 한 개 지부에 한 개 부대였다. 선생님은 청년의 연대를 더욱 넓히고자 남녀청년부 육성에 모든 힘을 쏟았다.
1954년 5월 9일, 남녀청년부 5000명이 결집해 도다 선생님 회장 취임 3주년을 기념하는 회합을 개최했다. 회합이 끝난 뒤, 은사는 청년부 1만 명이 모이는 회합을 10월에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은사가 “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이케다 선생님은 곧바로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러한 사제의 호흡에서 노도와 같은 청년부 확대가 시작됐다. 청년부원이 큰 폭으로 늘어났고, 각지에서 교학 연찬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해 10월에는 청년부 투쟁에 맞추듯이, 은사가 ‘대백련화’ 권두언에 ‘청년이여 국사(國士)이어라’를 발표했다. 은사는 “나라에 국사 10만이 있으면 고뇌하는 민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하다”라고 썼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과 만나자 곧바로 자신의 결의를 말했다.
“반드시 청년 10만 명을 결집하겠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은사는 기쁜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해주겠는가. 부탁하네.”
이케다 선생님은 이달(1954년 10월), 출발점이 된 1만 명 결집을 이뤘다.
선생님은 참신한 발상을 계속 도입해 청년부 활동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중 하나가 1954년 5월 6일에 선생님의 제안으로 결성한 음악대다. 결성된 지 사흘 뒤인 청년부 5000명이 모이는 회합에서 처음으로 연주했다.
11월에는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니혼대학교 운동장에서 청년부가 주최하는 첫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체육대회를 기획한 사람도 선생님이었다. 이 ‘세기의 제전’이 창가학회 문화제의 원류가 됐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청년은 신심(信心), 신심이라고 말로만 외쳐서는 정체되고 맙니다. 학회는 신심을 근본으로 한 폭넓은 문화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도다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시작했습니다.” 창가(創價)의 문화운동은 광포를 위한 새로운 문을 열었다. 그것은 청년부에서 시작돼 청년부의 손으로 전개됐다.
제일선에 들어가 활로를 열어라!
‘설마가 실현’이라고 세상을 놀라게 한 1956년 ‘오사카투쟁’.
이케다 선생님은 제일선의 구석구석까지 격려하러 다녔다. 자전거 3대를 쓰지 못할 정도로 타고 다니며 약 반년 동안 8000(평균 44명/일. 편집-추가)명과 만났다.
좌담회에는 생활고나 병과 투쟁하는 벗이 모였다. 어느 좌담회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강조했다.
“가난뱅이와 병자가 무엇이 나쁩니까?”
“이 어본존(御本尊)은 절대 틀림없습니다.
모두 신심을 해서 행복해지는 겁니다.”
그러한 확신에 찬 목소리는 ‘불법(佛法)으로 반드시 숙명전환할 수 있다’는 희망의 빛을 벗의 가슴속에 밝혔다. ‘오사카투쟁’뿐 아니라 ‘삿포로 여름투쟁’(1955년 8월), ‘야마구치 개척지도’(1956~1957년) 등 선생님은 전국 각지에서 확대의 돌파구를 열며 광포사(廣布史)에 새기는 드라마를 썼다.
‘어서(御書) 근본’
‘강성한 기원’
‘중심자의 예리한 일념’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속도’
선생님의 행동에서 많은 벗이 승리의 방정식을 배우고 광포의 리더로서 성장했다.
1957년, 권력의 마성이 박해의 엄니를 드러내 ‘유바리탄노사건’ ‘오사카사건’이 일어났다. 선생님은 진두에 서서 은사와 학회를 끝까지 지켰다.
일찍이 아르헨티나 인권의 투사 에스키벨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창가학회 역대 회장은 불의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박해를 받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희생해 미래의 희망을 키웠습니다.
창가학회는 지금도 계속 분투 중입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싸움은 영원히 이어져야 합니다.”
그 해 12월, 이케다 선생님이 펼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격투로 학회는 75만 세대를 달성했다. 선생님은 청년부 실장의 투쟁에 관해 이렇게 썼다.
“현장 제일이다. 그리고 벗이 괴로워하지 않도록, 투쟁하기 용이하도록, 또 광포의 기나긴 전망 위에서 전광석화의 속도로 모든 과제에 손을 썼다.
책상에서 잔재주 같은 책략을 짜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제일선에 뛰어들어가, 누구보다 고생하고 지혜를 짜내 활로를 열어야 한다.”
광포의 본무대는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명이 있는 지역에서 벗과 함께 참신한 아이디어를 거듭 고민한다.
거기에 사제공전(師弟共戰)의 대서사시가 쓰여진다.
반드시 청년 10만 명을 결집하겠습니다!
1961년 11월 5일, 맑고 산뜻한 가을 하늘 아래 국립경기장에서 전국의 대표 10만 명이 모여 ‘제10회 남자부총회’를 개최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날을 고대했다. 은사 도다 선생님에게 ‘정예 10만 결집’을 서원(誓願)했기 때문이다.
1954년 3월 30일, 이케다 선생님은 청년부 실장에 취임했다. 도다 선생님은 7개월 뒤인 10월 ‘대백련화’ <권두언>에 ‘청년이여 국사(國士)이어라’를 발표하고, 이렇게 썼다.
“나라에 국사 10만이 있으면 고뇌하는 민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하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에게 “반드시 청년 10만 명을 결집하겠습니다”라고 깊이 맹세했다.
당시 남자부원은 1만 명 정도였다. 1953년 4월에 개최한 ‘제1회 남자부총회’의 참석자는 700명이었다. 10만 명 결집은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이케다 선생님은 각오했다.
“설령 누가 하지 않아도 나는 결단코 선생님의 구상을 실현해 보이겠다!”
전국을 누비며 혼신의 힘을 다해 청년을 격려했다.
그러한 가운데 젊은 지용(地涌)의 벗 한사람 한사람이 광포(廣布)의 사명을 자각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1956년에 청년부 실장으로서 ‘세이쿄신문’ 신년호에 기고했다. 남자부 약 3만 명, 여자부 1만5000명의 진열을 갖췄다고 언급하고, 열렬히 이렇게 호소했다.
“도다 선생님의 문하생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올해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용약환희해서 투쟁하지 않겠습니까.”
그해 이케다 선생님은 ‘오사카투쟁’과 ‘야마구치 개척지도’를 지휘하며, 확대의 금자탑을 세웠다. 이듬해인 1957년 12월, 은사의 생애 원업(願業)인 75만 세대를 달성했다. 남자부원은 7만8000명까지 확대됐다.
1958년 1월, 이케다 선생님은 은사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올해는 남자부 부원 10만 명이 달성됩니다.”
도다 선생님은 쇠약해진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
“10만 명의 청년이 모이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민중을 위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도래한다.”
“예. 남자부가 10만 명을 달성하면 국사 10만을 결집하겠습니다. 그때는 꼭 봐 주십시오.”
그해 9월, 남자부는 부원 10만 명을 달성했다. 그러나 4월 2일에 서거한 도다 선생님은 이 기쁜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창가학회 제3대 회장에 취임하고 2개월 뒤인 1960년 7월에 지바현 이누보사키에서 실시한 남자부 인재육성그룹 ‘수호회’ 야외연수에 참석해 어느 간부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당장 도쿄에서 남자부를 결집한다면 몇 명이 모이겠습니까.”
회장에 취임한 뒤에도 청년부 실장 시절에 은사에게 맹세한 ‘정예 10만 결집’을 머릿속에서 잊지 않았다.
제3대 회장에 취임한 지 1주년이 되는 1961년 5월 3일, 남자부 10만 명을 결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달 6월에 실시한 ‘남자부간부회’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강하게 말했다.
“도다 선생님은 나라에 국사 10만이 있다면 고뇌하는 민중을 틀림없이 구제할 수 있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나는 이 은사의 외침을 절대로 허망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계 민중은 우리 동포
1961년 11월 5일, 정예 10만 명이 모인 ‘제10회 남자부총회’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마음속으로 은사에게 이렇게 외쳤다.
“지금 (도다) 선생님에게 맹세했던 일 중에서 한 가지를 완수했습니다. 선생님의 정신을 체득한 10만 젊은이의 대표들을 봐 주십시오.”
오전 9시 45분, 총회가 시작됐다. 선생님이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음악대의 용장(勇壯)한 팡파레가 울려 퍼지며 청년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스탠드 위에 걸린 ‘승리’라는 글자가 청년을 지켜봤다.
이케다 선생님은 단상에서 인류가 직면한 핵무기의 불안과 공포를 언급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는 자신의 인간혁명과 사회와 세계평화를 가능케 하는 완전무결한 니치렌(日蓮) 대성철(大聖哲)의 대생명철학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대생명철학이 바로 인류를 구제하는 최고의 지도 원리라는 것을 우리는 소리 높여 외쳐 가지 않겠습니까!”
일주일 뒤인 11월 12일, 요코하마 미쓰자와경기장에서 ‘제9회 여자부총회’를 개최해 8만5000명이 모였다. 선생님은 은사가 ‘원수폭금지선언’을 사자후(師子吼)한 곳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음 시대의 여성 지도자는 최고의 철학을 가진 여러분입니다”라고 말했다.
남녀청년부총회는 지금 광포사(史)에 찬연히 새겨졌다. 그 의의는 총회를 목표로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인간혁명에 도전한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총회는 핵무기 등 세계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이 일어서는 기점이 됐다.
소설 ‘신·인간혁명’ 제2권 <용무>에는 미국SGI 멤버가 청년부 간부에게 ‘국사’ 중 ‘나라’의 의미를 묻는 장면이 있다. 청년부 간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도다 선생님은 일단 일본이라는 의미로 쓰셨습니다만 그것은 일본의 청년에게 주신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여러분에게는 조국 미국의 번영과 평화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 사람들은 모두 동포라고 하는 것이 불법(佛法)의 관점이므로 세계를 하나의 나라로 하여 인류의 행복을 생각하며 행동해 가는 사람이 국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류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위해
지금 있는 곳에서
‘행동의 연대’를 넓히는 ‘세계청년학회 개막의 해’.
젊은 이케다 문하생의 새로운 승리드라마가 시작됐다.
화광신문 - 기획특집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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