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의구전요문 여래수량품16(중)-법련 11월호 태양의 불법

2023. 11. 30. 20:48佛法 .SGI

 

법련11월호 어의구전 요문편 여래수량품 제16(중) 

 

[세계를 비추는 태양의 불법]

 

^생(生)도 환희,사(死)도 환희^의  대경애

 

여래수량품 제16(중)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생사라는 주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과 종교의 최대 명제였습니다. 

^사문유관^이라는 석존의 일화가 상징하듯이, 불교도 생로병사의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장절한

 정신투쟁을 펼치는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어릴 때부터 불법을 배웠는데 염원하기를 사람의 수명은 무상이니라ㆍㆍㆍ 현명함도 어리석음도

늙음도 젊음도 무상은 상례이니라ㆍ 그러므로 우선 임종의 일을 배우고 후에 타사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여^^.어서1404쪽 라며

 젊을 때부터 생사를 깊이 탐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다선생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ㆍ 

^신심의 진정한 목적은 죽을 때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불법이 해결해야 할 최후의 문제는 죽음입니다. 이것을 가장 근본적으로 설하고 밝힌 것이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ㆍ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와 표리일체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마주하고

 영원성을 응시함으로써 이번 생生을 더 욱 깊이 충실하고 확고하게 살 수 있습니다. 거기에 바로 종교의 본원적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관,생사관, 문화관의 확립을 

 

30년 전인 1993년 9월 나는 하버드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두번째 강연을 했습니다.  인간은 생사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어떠한 영원성을 지향하고, 거기에 종교가 인류사와 오랫동안 함께한 이유가 있다고 논한 뒤에 죽음을 기피해야 할 것으로 여긴. 근대의 과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사死는 단순히 생生의 결여가 아니라 생과 나란히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 전체는 생명이며 삶의 방식인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를 응시하며.올바르게 위치를 부여하는 생명관, 생사관, 문화관의 확립이 곧 21세기 최대의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진수는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는, 인류를 희망의 빛으로 비추는 생 사관을 명확히 설해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애를 높이는 성업

 

법화경에는 석존의 궁극적인 생사관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깊은 생명관이 인류정신의 기조가 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경애도  높아지고 공생하며 평화로운 사회로 변혁하는 길도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펼치는 광선유포의  성업도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또 여기에 묘법 홍통의 인류사적  의의도 있습니다. 

인간내면의 깊은 생명관, 투철한 생사관을 확립해서 죽음을 기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직시해,  ^생도 환희,  사도 환희 ^로 바꾸는 가르침이 대성인의 불법입니다. 

 

<어의구전> 수량품의 일절

 

여래란 삼계의 중생이며, 이 중생을 수량품의 눈을 뜨고 보면 십계본유라고 여실히 지견했느니라. 삼계지상이란 생로병사이며 본유의 생사라고 보면 무유생사이다. 생사가 없으면 퇴출도 없고 다만 생사가 없음이 아니니라. 생사를 보고 염리함을 미迷라 하며 시각이라 한다. 그리고 본유의 생사라고 지견함을 오悟라고 하며 본각이라고 하느니라. 지금 니치렌등의 동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할 때. 본유의 생사 본유의 퇴출이라고 개각하느라ㆍ 어서전집753쪽 

 

사바세계야말로 영원한 적광토

 

 먼저 수량품의 요체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수량품에서는 가장 처음에 석존의 성도가 금세의 보리수 아래가 아니라, 오백진점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구원^이라고 밝혔습니다. 

수량품의  중요한 가르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ㆍ 

다시 말해 부처는 구원의 과거부터, 또 미래 영원히 이 사바세계에서 법을 설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투쟁을 계속한다고 밝혔습니다ㆍ진정한 적광토는 어딘가 다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에 출현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그때까지 경전에 씌어 있는 성불관과.  국토관을 크게 전환하는 가르침입니다. 도다선생님은 ^이 부분에 와서 불법이 발칵 뒤집혀버렸다^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석존이 수행해서 성도한 ^근원법^을 말법에 와서 설하고  밝힌 분이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님입니다. 그리고 수량품에는 영원한 붓다가 한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방편현열반. 영원한 구제자가.  방편으로써 세상을 떠난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부처인데 왜 죽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입멸을 통해 사람들에게 부처와 법을 갈 앙하게 하는 본원적인 신앙심을 일으켰습니다. 수량품의 본의는 어디까지나 민중 구제입니다. 중생을 교화하고 중생을 제도 하는 것이 근본 목적입니다. 오직 중생을 위해.  선근을 심고 환희의 마음을 생기게 하고자, 부처는 모든 지혜와 방편을 구사하고 영원히 계속 투쟁합니다. 그에 호응해 중생측도  깊은 구도심과 실천 의 신심을 일으켜 흉중에 부처의 생명을 용현하면, 그 사람이 투쟁하는 곳이 영산이  됩니다. 그야말로 수량품은 사제불이의 경전입니다. 사제가 감응해 함께 서원을 실현하고자 행동하고, ^영원한 생명^에 끝까지 살아가는 대경애를 밝힌 것이 이번 회에 배울 <어의구전>의 일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중속으로 뛰어들어 투쟁하는 부처

 

 법화경 경문에 

^여래여실지견^이라고 있습니다ㆍ 부처의 지혜는 현실을 여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깨달음의 지견입니다. 부처는 삼라만상을 보면 거기에 담긴 실상(진실한 모습)을 봅니다. 부처가 가진  지혜의 눈은 우리가 사는 ^삼계지상^의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여래란 ^삼계의 중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탁악의 현실세계에 사는 우리 중생이야 말로. 실은부처라고 단언하셨습니다ㆍ

부처의 눈, 수량품의 눈으로 보면 삼계의 중생도, 그 몸 그대로 본유의 부처입니다. 누구나 본디 부처이고 ^구원의 부처는 우리 자신^이라는 불법의 궁극적인 깊은 뜻을 밝힌 것입니다. 대성인은 ^이 중생을 수량품의 눈을 뜨고 보면 십계본유라고 여실히 지견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고뇌가 소용돌이치는 삼계에 사는 중생은 미혹이 가득한 육도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수량품의 눈으로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십계본유' 다시 말해 십계호구의 당체입니다. 어떠한 중생의 생명에도 본디 십계가 갖춰져 있습니다.  당연히 불계를 갖추고 있어. 묘법의 당체가 됩니다. 부처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부처는 대자비를 체현하고 생사를 되풀이하며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성불로 인도합니다.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삼계의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괴로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생로병사의 고뇌와 싸우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 동고와 자비의 기원으로 자타 함께.  행복과 사회의 안온을 위해 활동합니다. 여래의 심부름 꾼으로 여래와 같은 행동을 하고 민중을 구제하는 일을 완수합니다. 그야말로 인간 혁명의원리입니다. 불행과 맞서는 중생 외에 부처는 없습니다. 고뇌하는 민중속으로 일부러 뛰어드는  보통의 인간이 부처입니다.도다 선생님은 "구원의 범부"가 출현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누구나 원초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현실 세계에 뛰어들어 "원겸어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묘법의 본원적인 역용을 발휘하는 범부입니다. 이러한 존귀한 인간관. 생명관에  바로 인간을 위한 종교의 끝없는 원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갖춰진 본유의 작용> 

 

이어서 어의구전에는 수량품의 눈으로 여실지견하면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는 무상의 존재인 일체 중생이 본유의 생사에 영원히 살아가는 존극한.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삼계지상이란. 생로병사이며 본유의 생사라고 보면 무유생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본유란 본디 갖춰져 있는 것 본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십계 호구의 당체이고.  부처의 영원한 원초적 생명을 갖추고 있습니다. 생이든,사이든 영원한 생명이 나타내는 본유의 현상이고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부처의 위대한 안목입니다. 

 

<전 우주가 생사의 리듬을 연주하자>

 

도다 선생은  항상 사후의 생명은 대우주에 녹아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우리 생명도 이처럼 현세에서 내세로 계속될 뿐입니다. 결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라는 것은 시작된 때가 없습니다.  또한 끝도 없습니다. 우리 생명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대성인은 생명의 본질을 생사의 이법 또 묘호렌게교의 생사로 나타내셨습니다. 천지 음양 일월 오성 지옥 내지 불과. 생사의 이법이  아님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생사도 오직 묘호렌게쿄의 생사로다.(어서 1336쪽) 인간의 생명 뿐만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을  꿰뚫고 생과 사에 걸친 근원법이 묘법입니다. 십계 모든 의정이 묘법의 당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 우주가 생사의 이법이라는 리듬을 영원히 연주한다고 보는 것이.불법의 예지입니다. 

 

<순간순간의 생명에 끝까지 살아가다>

 

 대성인은 다만 생사가 없음이 아니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미혹의 생사관을 타파하고 본유의 생사관에 선다고 해서 현실의 생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사를 보고 염리함을 미라하며 시각이라 한다. 삼세의 생명관을 알지 못하고 죽음을 기피하며 금세의 생에만 마음이 사로잡히면 그것은 미혹입니다. 생을 부정하는 것도 미혹입니다.  

<광포의 사제를 끝까지 관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삼세의 사명을 위해 계속 투쟁할 수 있다>. 

본유의 생사라고 지견함을 오라고 하며 본각이라고 하느니라 입니다. 묘법을 불러 본유의 생사라고 지견한다.  요컨대 삼세의 생명을 확신하고 이 일생을 최고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금세의 개가가 "내세의 영광도 결정합니다. 이것이 불법의 엄연한 인과이법입니다. 따라서 대성인은 임종이 지금이라고 알아서. 신심을 다하여. (어서1337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종이 지금이라는 각오로 지금 이 순간순간의 생명을 최고로 빛내며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일입니다.그 사람이 "본유의 생사, 본유의 퇴출"이라고 개각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본유의 생사관을 심화하며 현실의 생활을 불계로 물들여 끝까지 살아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가운데 본유의 생사를 개각할 수 있습니다. 광포의 사제를 끝까지 관철하고 지금을 완전연소하며 살아가는 환희에 찬 생명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루 또 하루 보배를 쌓기에 금세 뿐만 아니라 삼세에 걸쳐 본유의 사명을 위해 계속 투쟁할 수 있습니다. 

 

<어의구전 수량품의 일절>

 

 무작장의 삼신의 당체의 연화의 부처란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이니 남묘호렌게쿄의 보호를 수지해 받들기 때문입니다. 어서 754쪽.

 

<십계 본유의 부처는 우리>

 

어의구전의 마지막에는 무작삼신-부처의 세가지 특성인 법신. 보신.응신의 삼신을 본디 갖추고 있는 십계본유의 부처란 대성인의 뒤를 잇는 우리라고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남묘호렌게쿄의. 보호를 수지해 받드는 것으로 남묘호렌게쿄를 자신의 생명에  열어 나타내 맥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사는 남묘호렌게쿄의 대법에 입각한 본유의 생사가 됩니다.  자신 법성의 대지를 생사 생사로 유전해 가느니라(어서724) 라며 삼세 영원히 지용의 사명을 대환희로 완수할 수 있습니다.본유의 생사이기 때문에 비로소 죽음은 결코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생도 환희,  사도 환희,생도 유락, 사도 유락이 됩니다. 물론 살아 있는 범부로서 우리 인생에는 죽음에 대한 슬픔과 쓸쓸함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몇 번이나 밀려오는 슬픔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묵묵히 제목을 부르면 생사를 초월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목을 보내며 위로해주는 동지도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반드시 죽음에 대한 깊은 의미와 소생의 희망을 느끼는 때가 옵니다. 묘법에 비춰진 생로병사의 고뇌는 반드시.  상락아정의 환희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묘이치니에게 세상을 떠난 남편은 가족을 반드시 지켜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1254쪽). 신심을 관찰하면 친척도 반드시 수호를 받고 틀림없이 행복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살아 계셨을 때는 생의 부처 지금은 사의 부처, 생사 다 같이 부처이니라. 즉신성불이라고 하는 중요한 법문은 이것이로다. (어서1504쪽)라고도 말씀하셨다. 실제로 우리 학회원은 자절광포를 위해 끝까지 살아 더 넓고 확고한 생사관을 체현하고 다음 생으로 여행을 떠나는 동지의 모습을 무수히 바라보며 이  어문을 실감했습니다. 생도 부처  사도 부처. 생도 환희. 사도 환희입니다.

 

<지용의 사명은 영원한 연속투쟁>

 

 어쨌든 성훈에 비춰 우리의 광포 여정은 결코 금세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처의 눈으로 본유상주의 경애로 보면 금세의 죽음은 잠깐의 휴식입니다. *수유간. (어서574쪽)반드시 다음의 새로운 사명과 복운의 생이 시작되고,청신한 생명으로 지용서원의 춤을 자유자재로 춥니다.  우리는 생생세세에 대복덕에 감싸여. 광선유포와 입정안국을 위해 계속 달립니다. 그렇게 투쟁하는 생명은 대우주의 근본법인 묘법과 합치한 가장 존극한  무상의 대경애를 열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의 보탑이 빛나다>

 

. 나는 30년 전 하버드 대학교 강연에서 어의구전의 일절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어의구전에는 사상 생노병사를 가지고 우리의 일신의 탑을 장엄하느라. (어서 740쪽) 라는 말씀이 있다. 나는 21세기 인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명의 보탑을 빛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열린 대화의 장대한 교향으로 이 푸른 지구를 감싸면서 제 3의 천년을 향하여.  신생의 일보를 내디딜 것을 저는 원합니다. 이 강연을 통해 대승불교의 정신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미래 문명의 바람직한 모습을 말하고 있다. 종교적인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보편적인 시민종교의 의의와 인간을 위한 종교의 의의를 제시했다.  등의 소감도 들었습니다. 식자들의 소감은 본유의 생사관과 깊은 생명관을 설하는 대승불교의 정수를 실천하는 우리 지용의 보살행에  21세기 문명을 구축하는 새로운 흐름을 감지한 기대이자 격려였습니다. 

 

<함께 영원한 사제불이의 대도를>

 

 인류가 커다란 기로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시대에 생명 존엄의 철리를 품은 우리의 행동을 마침내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도 환희, 사도 환희인 광포의 여로를

 다 함께 상쾌하고 밝게 , 또 활기차게 행진합시다.  자타 함께 행복과 평화를 확고하게 실현하기 위해 긍지 드높은 "태양의 불법"의 빛을 발하며 사제불이의 대도를 끝까지 함께 걸어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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