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5. 21:39ㆍ佛法 .SGI
우주대에 울려 퍼지는
자기 일념의 찬가
“왜 산에 오르는가”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전에
어느 저명한 등산가는 말했다.
1981년 12월, 나는 제1차 종문사건으로 장마(障廳)의 열풍이 불어닥친 규슈 오이타를 방문했습니다. 악승들의 부당한 박해도 훌륭히 이겨내고 용약환희하며 모인 동지들의 미소는 상쾌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지용(地通)의 청년들이 어떠한 책동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늠름하게 투쟁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빛났습니다.
청년이 반석과 같다면 미래는 반석
나는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청년이 반석과 같다면 미래는 반석입니다. 이 창가 사제의 혼이 맥동하는 선구의 천지에서 일본 그리고 전 세계 후계의 용자들에게 지침을 선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청년이여 21세기 광포의 산을 등반하라'는 장편시를 읊었습니다.
그로부터 40성상.
태양의 불법(佛法)을 내걸고 청년들은 나와 함께 세기를 초월해 세계광포의 장대한 산을 오르고 민중승리의 역사를 당당히 열었습니다.
① '청년이여 21세기 광포의 산을 등반하라' 1981년 12월 10일, 오이타청년부간부회 석상에서 발표되었다. 도다 조세이 선생님이 '청년훈'을 발표한 지 30주년이 되는 때에 새로운 지침으로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이 구술하고 직전까지 첨삭하셨다. 이튿날〈세이쿄신문>에 실린 “왜 산에 오르는가"로 시작되는 약 400행의 '21세기를 향한 지표는 전국의 청년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1999년 3월 청년들의 요망에 따라 가필하여 세이쿄신문) 지면에 재차 발표되었다. 이케다 다이사쿠 전집》 제43권에 수록)
신심만큼은 지지 마라!
긴 인생에는 맑은 날도 있는가 하면 폭풍우 치는 날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하는 청년들에게 외쳤습니다. 어떠한 고충이 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마라! 신앙은 무한한 희망이다. 그러므로 신심만큼은 지지 마라! 그러면 미래는 반드시 양양하게 열린다.'고 말입니다. 시를 통해 내가 강하게 역설한 것도 이 점입니다.
신심의 두 글자가 불요(不燒)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승리의 만족스러운 증거가 기다리고 있다!
그 증거는
사회 속에서 엄연하게
명확하게 증명되는 것이
사(事)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불법이기 때문이다!
광포도 인생도 늘 부처와 마가 벌이는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이겨내면서 영원한 승리의 봉우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눈앞의 험한 산비탈로 확실한 한 걸음을 내딛느냐 마느냐, 그 승부의 열쇠는 자신의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 흉중의 위대한 ‘일념의 변혁’이 바로 결정타가 됩니다.
지금 창립 100주년을 목표로 새로운 등반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회는 아무리 험난한 봉우리도 전부 제패하고 가치창조하면서 환희작약하며 올라가는 힘의 원천인 신심의 '일념에 관해 배워봅시다.
〈일생성불초>의 일절
구극은 일심법계(一心法界)의 취지를 설해 나타냄을 묘법(妙法)이라고 이름하는 고로 이 경(經)을 제불(諸佛)의 지혜라고 하느니라. 일심법계의 취지란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의정색심(依正色心), 비정초목(非情草木), 허공찰토(虛空刹土) 어느 것도 제외하지 않고, 먼지도 남김없이 일념의 마음에다 포함하고이 일념의 마음이 법계(法界)에 편만함을 가리켜서 만법(萬法)이라고 하느니라. 이 이(理)를 각지함을 일심법계라고도 말하는 것이니라.(어서 383쪽 3~6행)
현대어역
결국 일심법계의 법리를 설해 나타낸 가르침을 묘법이라고 이름하기에, 따라서이 법화경을 제불의 지혜라고 한다.
일심법계의 법리에 관해 말하면 십계, 삼천의 의보(依報)나 정보(正報)도, 색법(色法)이나 심법(心法)도, 비정(非情)이나 초목도 또 하늘이나 국토도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티끌도 남김없이 일체를 자기 일념의 마음에 새겨 넣고 또 이 일념의 마음이 법계(우주)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미친다. 그러한 모습을 만법이라고 한다. 이 법리를 깨달음을 일심법계라고도 한다.
부처의 생명이 자기에게 갖추어져 있다.
부처는 무언가 특별하고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중생에게 부처의 경애가 본디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성인은 '제불의 지혜’인 법화경에 제시된 진리를 '묘법'이라 이름 붙이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如法蓮華經)의 창제행으로 모든 범부가 그 몸 그대로 일생동안에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이번에 배우는 <일생성불초>는 말법의 중생이 성불하기 위한 법리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창제행의 실천을 밝히신 어서입니다.
'위대한 부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고 깨닫는 것이 성불의 직도이자 일생성불의 근간입니다. 그것을 '일심법계의 취지에서 설명하셨습니다.
이 '일심법계의 취지의 '일심'은 순간의 마음, 순간의 생명, 일념을 말합니다. '법계'는 모든 사상(事象), 삼라만상입니다.
지옥계부터 불계(佛界)까지의 중생도, 그 중생이 사는 세계도, 무정물인 초목도, 허공이나 대지도 “어느 것도 제외하지 않고, 먼지도 남김없이 한사람 한사람의 일념에 담겨 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자기 일념에 전 우주의 요소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자기 일념이 전 우주에 고루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일심법계의 취지이고 법화경에서 설하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리입니다.
자기를 이겨내는 창제를
마음, 일념은 색이나 형태도 없고 유무(有無)의 개념도 초월한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일인일일중(一人一日中)에 팔억사천념(八億四千念)이 있으며”(어서 471쪽)라고 있듯이 다양한 연을 만나 연달아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 변천해 마지않는 일념을 좋은 방향으로, 행복의 방향으로 향상시키느냐 아니면 고뇌에서 고뇌로 향해 지옥의 경애로 유전하고 마느냐입니다.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선악(善惡)에 따라서 일어나고 일어나는 바의 염심(念心)의 당체(當體)를 가리켜서 이는 묘법의 체(體)라고 설해 말씀하신 경왕(經王)이므로 성불의 직도라고 하느니라.”(어서 38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은 멈추지 않고 늘 변화하는 자신의 일심이 본디 묘법의 당체입니다.
그렇게 들어도 자신이 묘법의 당체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인 이 무명을 없애는 것이 신심의 이검(利劍)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일념을 가리켜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한다고 깊이 신심을 일으켜야 하느니라.”(어서 383쪽) 하고 말씀하셨듯이 묘호렌게쿄에 대한 깊은 신(信)의 '일념에 불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묘법에 '자기 생명을 합치시키기 위한 창제입니다. 따라서 기원은 자신의 일념에서 법성(法性)과 무명이 벌이는 치열한 투쟁입니다. 이 투쟁에 승리해 자기 생명이 묘호렌게쿄의 당체'라고 완전히 확신하는 자세가 성불의 직도'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무명으로 뒤덮여 깨닫지 못한 묘법과 일체인 본디 자기에게 자각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고락(苦樂)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어서 1143쪽) 미혹된 자기를 이겨내는 창제를 거듭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② 〈일생성불초>. 1255년에 술작하셨다.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일이 일생성불의 직도임을 강조하셨다.
③ 일념삼천(一念三千) 천태대사 지의가 《마하지관 권5에서 만인성불을 설하는 법화경의 가르침에 입각해 성불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으로 범부의 일념(순간의 생명)에 삼천, 다시 말해 부처의 경애를 비롯한 삼라만상이 담겨 있음을 보는 관심(觀心)의 수행을 밝힌 것이다.
④ 원품(元品)의 무명(無明)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無知), 궁극적인 진실을 밝힌 묘법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 그 무지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충동이다.
⑤ 법성(法性) _ 만물의 본성, 부처의 깨달음의 본질이다. 진리이며 만물의 본디 모습을 밝힌 것으로 법성진여(法性眞如)라고도 한다.
자기자신이 묘법의 당체
은사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은 일념삼천의 법리를 인생의 생활에 적용해 알기 쉽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인생의 모든 생활은 자기 생명의 변화다. 그러므로 더 좋게 변화해 끊임없이 행복을 쟁취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기자신에 살아가자… 아니, 자기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자기자신에 살아간다, 그것은 영원한 묘법과 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그것을 명쾌하게 ‘자기자신이 남묘호렌게쿄라고 정해야 한다!"고 제시하셨습니다.
행복을 구축하는 ‘변혁의 종교’
가령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해도 그때 솟구치는 일념의 움직임, 순간의 마음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거기에 그때의 경애가 여실히 나타납니다. “삼천나열(三千羅列)”(어서 714쪽)입니다. 이것이 엄연한 생명의 실상입니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어서 384쪽)는 말씀대로 범부든 부처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는 있어도 인간으로서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결국은 오저에 놓인 일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또 인간이 사는 국토도 그렇습니다. 정토(淨土)라 하고 예토(土)라 해도 “우리들의 마음의 선악에 의한다.”(어서 384쪽)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일념이 행불행을 결정짓는 결전장입니다. 그렇기에 신심만큼은 관철해야 합니다.
불법은 확실한 자기 행복을 구축하기 위한 변혁의 종교입니다.
⑥ 정토(淨土), 예토(機土) _ '정토'는 부처가 사는 청정한 국토를 말한다. 또 나라를 청정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예토'는 더럽혀진 국토로, 번뇌와 괴로움이 충만한 범부가 사는 사바세계(娑婆世界)다. 법화경 본문에서는 사바즉적광(婆卽寂光)의 법리가 설해져 이 사바세계가 바로 부처가 사는 본유(本有)의 적광토(寂光土)로 여겼다.
광포를 위한 행동은 전부 공덕선근
대성인는 “유배의 몸이지만 희열(喜悅)은 한량없도다. 기뻐도 눈물이오, 괴로워도 눈물이라.”(어서 1360쪽)며 대난도 환희로 바꾸셨습니다. 난즉오달(難卽悟達)의 부처의 경애입니다.
현대에서 선사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은 감옥 안에서도 “대성인의 대난에서 본다면 자신의 난 따위는 구우일모(九牛-毛, 하찮은 일)”라고 쓰시고 “난이 옴을 가지고 안락"(어서 750쪽)으로 받아들이는 경애로 순교하셨습니다.
은사 도다 선생님도 또한 가혹한 옥중투쟁을 관철하고 '나, 지용보살이니라’하고 오달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장대한 세계 광선유포의 운동은 대성인에게 직결한 불이(不二)의 사제에 따른 사신홍법(死身弘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두 선생님을 이어 우리가 일념을 정하고 일어서서 자타 함께 최고봉을 목표로 광포와 인생의 산을 계속 오르는 일이 얼마나 깊은 숙연이고 복덕일까요.
“모두 나의 일념에 갖추게 되는 공덕선근(功德善根)”(어서 383쪽)이 될 것은 성훈에 비추어 분명합니다. 또 그렇게 확신하는 신심의 일념이 자신의 몸을 대복운으로 장식합니다.
"제목을 봉창하는 소리는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닿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우리들의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제목이라는 대음(大音)에 넣어서 봉창하므로 일대삼천계(一大三千界)에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어서 808쪽)입니다. 시방세계의 제불보살이 모두 내 편이 될 것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목을 끝까지 부른 사람은 누구도 절대로 당해낼 수 없습니다.
〈어의구전>의 일절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나무(南無)란 범어(梵語)이며 여기서는 명(歸命)이라 하느니라. 인법(人法)이 있으니 인(人)이란 석존을 받들어 귀명하고 법(法)이란 법화경을 받들어 귀명함이라. 또 귀(歸)라 함은 적문불변진여(門不愛眞如)의 이(理)에 귀의(歸依)함이며 명(命)이란 본문수연진여(本門隨緣眞如)의 지(智)에 의거함이라. 귀명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니라. 석(釋)에 가로되, 수연불변(隨緣不變), 일념적조(一念寂照)라고.(어서 708쪽 2~4행)
현대어역
((남묘호렌게쿄'에 관해서) 어의구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무'는 범어이고 (한어로는) '귀명'이라고 한다. (귀명에는) '사람'에 대한 귀명과 법'에 대한 귀명이 있다. '사람'에 대한 귀명은 석존에게 귀명해 받드는 것이다. '법'에 대한 귀명은 법화경에 귀명하여 받드는 것이다. 또 (귀명의) 귀는 적문불변진여의 이에 귀의하는 것이다. (귀명의) '명'은 본문수연진여의 지에 의거하는 것이다. 귀명은 남묘호렌게쿄 그 자체다. 어느 해석에는 수연(隨緣), 불변(不變)은 일념의 적(寂), 조(照)'라고 있다.
나무는 귀명
자기 일념의 변혁에 따라 자신이 묘법의 당체로 빛나는 것을 ‘귀명’의 원리로 가르치신 〈어의구전〉의 일절입니다.
먼저 나무는 한어로 귀명'이라 해석하는데 간결히 말하면 ‘근본으로 삼아 따른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또 무엇에 귀명하느냐에 관해 ‘사람’과 '법'이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로 배견하면 말법의 어본불(御本佛) 니치렌(日蓮) 대성인 그리고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에 대한 귀명입니다.
이어서 귀명을 귀와 명의 두가지 측면에서 논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신심을 실천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명확하게 씌어 있습니다.
⑦ 〈어의구전> 니치렌 대성인이 미노부에서 강의하신 법화경의 요문을 닛코 상인이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상하 2권 구성으로, 인용한 부분은 <어의구전> 첫머리의 ‘남묘호렌게쿄’에서 인용했다.
자기 생명을 묘법에 합치
먼저 “귀라 함은 적문불변진여의 이에 귀의함이며”라고 설하셨습니다. 이 ‘불변진여의 이’는 알기 쉽게 말하면 시대나 상황을 초월한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불변진여의 이에 귀의함'은 본래의 진리에 귀의한다, 다시 말해 우주와 생명을 관통하는 묘호렌게쿄 본원의 일법(一法)에 자기 생명을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천으로 요약하면 어본존을 믿고 창제하는 일이 근본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생명을 묘법에 귀의할 수 있습니다. 또 구도와 서원의 마음으로의 일관된 광포의 실천은 모두 묘법에 귀의하는 수행이 됩니다.
다음에 “명이란 본문수연진여의 지에 의거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연진여의 지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발휘되는 부처의 지혜입니다. 그야말로 불계의 작용입니다.
‘수연진여의 지에 의거함'이란 묘법에 따른 지용보살의 삶을 실천하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한한 생명력과 부처의 지혜를 용현시키고 인간혁명, 생활혁명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힘없이 지금의 고뇌나 고난도 하나하나 희망으로, 승리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가치창조의 행동과 태도가 수연진여의 지에 의거한 모습이 됩니다. 진정한의미에서 환희 차고 충실한 인생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불의불칙의 학회와 함께 나아가자
위와 같이 <어의 구전〉에서는 귀명’을 ‘귀의하다’와 ‘의거하다'로 나타내셨습니다. 법에 귀의하는 것은 법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묘법의 제목을 부름으로써 자신도 영원한 부처의 생명이 현현해 무한한 힘이 솟아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유자재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법과 일체가 된 경애입니다.
“귀명이란 남묘호렌게쿄이니라.”입니다. 범부의 생명에 불계를 맥맥이 용현시키는 데 묘호렌게쿄 제목의 깊은 의의가 있습니다.
또 “수연불변, 일념적조”라고 있습니다. ‘적(寂)'은 만법이 일념에 담겨 있는 것이고, '조(照)'는 일념이 만법을 비추는 것입니다. ‘수연' 불변은 '일념’의 '적'과 ‘조’로, 모두 남묘호렌게쿄에 갖추어진 작용입니다.
날마다 불의불칙(佛意佛劫)의 학회와 함께 신행학(信行學)의 실천을 관철하고 광선유포의 서원에 살고 또 살아 끝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자신의 개성은 최대로 풍부하게 살릴 수 있고 모든 것이 빛납니다. 본디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자유자재로 발휘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매자작시념의 염은 일념
법화경 수량품에 “매자작시념(自作是念)”이라고 있습니다. 부처는 일체중생을 무상도(無上道)에 들어가게 하고 성불시키려고 계속 마음을 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매자작시념의 염(念)이란 일념삼천 생불본유(生佛本有)의 일념이니라.”(어서 1368쪽) 하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이것은 중생이든 부처는 똑같이 본디 갖추고 있는 일념입니다. 그와 더불어 생명에 본원적으로 맥동하는 일념입니다. 이 일념에 눈뜨고 이 일념에 끝까지 살아간다, 그것이 묘법에 대한 귀명입니다.
그리고 묘법과 일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라는 부처의 대자비가 넘쳐흐르는 삶이 됩니다.
무한대의 힘을 발휘하는 인생을
도다 선생님의 불이의 제자인 나는 젊은 시절부터 “일념에 억겁(億劫)의 신로(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어서 790쪽)는 <어의구전>의 일절을 심간에 물들이고 투쟁해 일체를 승리해냈습니다.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한다는 것은 부처의 바람을 실현하겠다고 순간순간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필사의 일념으로 묘법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묘법에 의거해 부처의 지혜를 발휘하고 자신의 행동이 부처의 행동에 통해 무작삼신의 힘을 발휘하는 인생이 된다, 그것이 니치렌불법입니다.
인간의 혼이 추구하는 것
2022년은 20세기 최대의 역사학자 아널드. J. 토인비 박사와 대담한 지 50 수년이 되는 가절입니다. '인류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중심성을 타파하는 데 바로 전쟁, 빈곤, 차별 그리고 환경파괴 등 지구적 문제군을 극복하는 열쇠가 있다.'는 것이 인류의 역사를 투철한 안목으로 줄곧 응시한 대석학의 결론이었습니다.
박사와 나는 그 자기중심성을 타파하기 위해 우주 ‘궁극의 정신적 실재’와 일체화하기 위한 종교가 바로 현대에 필요하다는 점과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고 ‘소아(小我)’를 '대아(大我)'로 확대하는 것이 진실한 종교의 역할이라고 대담했습니다. 박사는 “불교에서 설하는 보편적인 생명의 법 체계 쪽이 ‘궁극의 정신적 실재'를 왜곡하지 않고 잘 밝힌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깊이 찬동하셨습니다.
‘묘법'은 박사도 지향하던 우주와 생명을 관통하는 근본법 그 자체입니다. 묘법에 대한 귀명은 욕망에 휘둘리고 고뇌에 사로잡힌 ‘소아’의 껍질을 부수고 타인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하여 자타 함께 행복을 바라는 '대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근원적인 사상과 인간혁명의 철학이 더욱더 요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승리자로’
나는 ‘청년이여 21세기 광포의 산을 등반하라’에서 이렇게도 읊었습니다.
신앙이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끊임없이/ 승리자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법과 사람과 사회를 맺어주는
위대한 인간을 만들어 가는 행동이다!
자기를 끊임없이 승리자로! 그것은 영원한 법인 묘법과 일체가 된 불요불굴의 강인한 자기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법과 사람과 사회를 잇는다, 그것은 불변진여의 이에 따라 수연진여의 지를 자유자재로 발휘하고 사회에 실증을 빛내는 일입니다. 위대한 인간, 그것은 '모든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고 “매자작시념의 비원(悲願)”(어서 466쪽)을 완수하는 일입니다.
이 사제불이의 날개야말로 청년이 비약하는 크나큰 날개입니다.
나와 여러분은 늘 서원의 제목, 사자후의 제목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새로운 광포의 산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자, ‘새로운 광포의 산'을 묘법정의의 깃발을 나부끼며 만년 진미래제를 내다고 인류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정상을 목표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한 걸음 또 한걸음 전진의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내디디며 또 명랑하게 오르지 않겠습니까.
전 세계 동지와 함께! 나와 함께!
우리 일념의 개가 그리고 창가 생명의 찬가를 우주대에 울려 퍼뜨리면서! -끝-
⑧ 아널드 J. 토인비 박사 _ 1889~1975년,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문명사가. 런던대학교,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요직을 역임했다. 대표작 《역사의 연구》는 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펴낸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이케다 다이사쿠 전집 제3권 수록)는 인류에 귀중한 전망을 주는 책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2021년에 세계 30번째 언어인 아랍어판이 발간되었다.
법련,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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