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담 모음

2022. 6. 4. 20:59佛法 .SGI

 

아래 체험담은 창가가족의 하늘아래구름님의 체험담 모음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좋은 체험담에 감사드립니다. 원본을 볼려면 창가가족 체험담모음에 가서 보시면 됩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

 

 

1.<가난·병고를 오직 창제와 활동으로 극복>

하늘도 땅도 놀란 공덕! 이제 信心의 위대함 사회에 알려갈 터

 

 

5년전 자궁경부암이란 진단을 받고도 가난한 살림에 수술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때가 있

었다. 오로지 창제와 활동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이 신재은(申材恩) 씨에게는 인생의 커다란 마디가 됐다.

 

1980년 1월 불법(佛法)을 하면 부자가 된다기에 입신한 신씨는 열심히 신심하면서 병약했던 딸도 건강해지고 자신도 걷지 못할 정도로 심했던 관절염과 간염도 모두 완치되는 초신의 공덕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은 신심을 반대했고 급기야는 집 얻을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가버렸다. 두 아이와 함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남의 집 다락방 생활을 하며 아는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장사를 하게 됐다. 그런 속에도 열심히 신심한 결과 전셋집으로 이사갈 수 있었다.

 

이후 남편은 돌아왔지만 신심을 반대하며 갖은 학대를 하는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낮에는 회관에서, 밤에는 불을 끄거나 담요를 문에 치고 소리나지 않게 일념을 다해 창제했다. 그것도 어려우면 박스 하나를 주워서 산에 올라가 창제를 했다.

 

‘본존님, 저는 숙명에 울 수 없습니다. 꼭 해내고야 말겠습니다’라고 간곡히 기원하며 열심히 신심에 매진해 갔다. 결국 남편은 간부의 지도로 창제를 시작하면서 취직을 하게 됐다.

그러나 얼마후 남편은 가족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매가 빗나가면서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 담임선생님이 제천이 되어 큰딸은 고등학교를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하고 장한 어머니상도 안겨주는 밝고 명랑한 효녀가 됐다.

 

이렇게 순수하게 신심해 간 결과 중계동 아파트로 입주해 95년 본존님도 모시게 됐다. 칸나와 화광회 활동이 하고 싶어도 생계를 이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단념해야 했지만 딸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서 일도 그만두고 원하는 만큼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96년 부인부 총회 성공을 위해 하루 5시간 이상 창제에 도전하고 매주 《화광신문》을 1백부에서 1백50부씩 배달해 갔다. 그러던 중 문득 암검사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검진을 받은 결과 ‘자궁경부암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15일 동안 치료받은 후 수술을 하자고 날을 잡았지만 설상가상으로 보험회사에서는 자궁경부암은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한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는 무료로 수술을 해준다고 해서 찾아가니 간호사들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하게 멸시하고 보호자가 없어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했다. 함께 병원에 따라온 간부는 기가 막힌 사정에 먼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신씨는 ‘여기서 질 수 없다. 반드시 나아 보이겠다’라고 결의하며 오히려 간부를 위로했다. 그리고 하루 5시간에서 7시간 창제에 도전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치료받는 동안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배가 몹시 아프고 검붉은 피고름이 몇 번이나 나왔다. 두 달 후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러 오라고 했지만 마다하고 ‘반드시 결과를 보이겠다’라며 다부지게 창제를 올렸다.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어서 234쪽)라는 어서(御書)를 생명에 새기며 반드시 하늘도 땅도 놀라는 공덕의 실증을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길 얼마 후 어느 날 하혈을 하는데 검붉은 암 덩어리같은 어혈이 나왔다. 그후 병원을 찾으니 암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아 확인하고자 5,6군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신씨는 자신에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한 면박을 했던 병원을 찾아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처음에는 욕을 하더니 결국 정중히 사과를 했다. 또 보험회사 직원이 제천이 되어 보험혜택도 받게 됐다.

97년 부인부 총회를 대성공한 후에는 재혼을 하여 일가화락의 신심을 할 수 있게 됐다.

 

가난에 시달렸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최고의 복운에 살아가는 모습으로 바뀌게 됐다. 올해 3월 만 5년째를 맞아 완전치유됐다는 확답을 들어 더욱 기쁘다는 신씨.

 

동네에서는 반장일을 보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복지관에서 도시락배달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그는 모든 것을 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신래자와 닛켄종 대상자들을 가정방문하며 진심어린 대화를 했다. 보행이 힘들 정도로 불편한 닛켄종의 한 회원을 위해 휠체어를 경찰서에서 대여해 주고 토요일마다 방문해 도와주고 있는데 신씨의 정성에 마음을 열고 딸과 함께 총회에도 참석했다. 어느새 장성한 아이들과 소중한 남편과 함께 단란한 가정 속에서 신심의 위대함을 사회 속에 알려가고 있는 신씨는 앞으로도 더욱 신심을 증명해 갈 것을 결의한다. ·

 

신재은 노원권 마들지역 하계지부 반담

 

 

2. <브라질의 절복왕 마다레나 나델란디>

 

본부간부회 때 이케다 선생님께서 몇 번 소개해 주신 적이 있는 브라질의 절복왕으로 ‘마다레나 나델란디(2002년 당시 지부지도원 73세)라는 분이 있습니다. 마다레나씨는 우리로 치면 강남 타워팰리스에 살던 수준의 생활에서 하루아침에 남편의 사업실패로 인한 극심한 가난고와 상피병(코끼리 피부처럼 딱딱하게 굳는 병)이라는 다리를 절단해야만 하는 병고 속에 입회해서 멋지게 숙명전환 하신 분입니다. 당시 세이쿄 신문에 이분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것을 간략히 소개하면,

 

의사로부터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죽는다. 하루 빨리 수술하도록, 권유 받았습니다. 괴롭고 또 괴로워서 날마다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아 죽지도 못 했습니다. 빚쟁이가 이 모습을 보다 못해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러보세요’라며 다음달에도 와서 신심을 권했습니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고, 이튿날 다리를 질질 끌며 거점장소로 갔습니다. 간부님이 ‘가장 원하고 싶은것을 기원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본존님께 창제하였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기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맹세’였습니다.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평생 불법을 수지하고 목숨이 있는 한 홍교 하겠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 다리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본존님께 창제하였습니다. 남편도 따라 부르며 울면서 ‘내가 나빴다’라고. 자식들도 함께 제목을 불렀습니다. 괴로웠지만 진정한 일가화락 이었습니다. 며칠 후, 갑자기 다리가 빨갛게 되더니 3일 동안 밤낮으로 고열이 계속 되었습니다. 창제를 계속하였습니다. 열이 내리자 바늘을 꽂아도 아무 감각이 없었던 다리에 감각이 되돌아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빠르게 회복하였고, 의사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기쁘고 기뻐서 가게에 오는 손님에게 무의식 중에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가게를 찾는 모든 이에게 묻습니다. ‘행복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행복해집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불법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았으나 다리가 나았다는 것과 창제할 때의 즐거운 생명은 틀림없는 실감이었습니다. 저의 확신으로 입회를 자청해 온 손님이 저의 절복 제1호 입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말을 겁니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친구가 되어줍니다.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으므로 험담도 많이 듣고, 비판도 당했습니다만 누가 뭐라 해도 제가 믿고 있는 것은 본존님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뭐라고 해도 조금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험담이나, 욕설을 한 사람과도 이윽고 사이 좋게 됩니다. 입회가 가까워진 사람들이니까. 친해지지 않으면 좀처럼 절복 되지 않습니다.

 

친해져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복해서 친해진다. 저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절복해도 처음에는 하기 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친구 중에도 입회까지 17년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길에서 나를 보면 반대쪽 보도로 건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에 세 자녀와 함께 입회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본존님과 똑같은 생명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구하려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단념하지 않습니다. 신심의 가치를 알게 되면 스스로 원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친구로 지내는 것입니다.

 

아침에 샤워를 마치고 창제합니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 ‘오늘 하루를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게 해주십시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묘법을 가르치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원합니다. 이케다 선생님게서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는 날은 모든것이 잘 풀립니다. 틀림없이 세계의 누구보다도 광선유포에 매진하고 있는 분이 이케다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나날이 인생최후의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행복을 남에게 전하지 않는 것은 무자비입니다. 투쟁하지 않는 인생은 보람이 없습니다. 나는 숨을 거둘 때까지 투쟁하겠습니다. 지금까지 485세대 절복 하였습니다. 2005년까지 1,000세대 홍교를 이루어 내겠습니다. 학회의 신심을 통해 슬픔의 눈물 같은 것은 흘리지 않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행복한 눈물만을 흘리는 인생으로 되었습니다. 감사와 보은밖에 없습니다.

 

 

3. 이케다 선생님에게 보내온 동북(東北)의 장년부의 편지

 

저는 입신한지 10년이 됩니다. 처음에는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케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행복하게 되지 않는다고

결의하고 실천한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었습니다.

제가 학회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좌담회출석, 선거응원 (일본의 공명당을 지지하는 응원),

타인을 절복하기 위해서 저를 안내해 줄 사람이 꼭 필요했습니다.

저와 아들, 불구인 우리들을 위해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저의 아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저의 아들도 결의를 해 주었습니다.

저의 아들은 뇌성소아마비로서 똑바로 걷기가 곤란한 몸입니다.

그 날부터 둘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저와 몸을 끌며 간신히 걷는 아들, 세간에서 보면 너무나 이상한 부자(父子)였습니다.

20년간 저희들은 매일같이 이런 말들을 들어왔습니다.

'네가 병이 나으면 신심하겠다. 다른 사람의 일보다 자기의 모습을 봐라.

다른사람의 일에 그렇게 말하지 말고 너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 어떻냐? '

비난과 중상의 소리가 끝없이 날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신심만 안 하면 이런 괴로움은 당하지 않고 살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심이 강해지면서 저같은 사람이 신심을 해서 창가학회에 수치를 입히고

이케다 선생님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결의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절대로 불법을 증명하는 몸이 되어서 보여 주겠다라고. 한집을 방문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겨우 그 집을 방문해도 언제나 듣는 말은 똑같았습니다. 그 괴로움으로 눈물이 앞을 가려서 우리들은 백만편 제목을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나긴 10년이었습니다.

정확히 10년이 되던 해, 저의 눈에 처음으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의사에게는 절대로 나을 수 없다고 들었던 저의 눈입니다.

보일지도 모른다. 눈부신 빛이 들어와 정신없이 제목을 불렀습니다.

뭔가 뿌옇게 보였습니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습니다.

그 눈물이 스며들어 드디어 눈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를 구해 준 이케다 선생님의 사진을 계속 보았습니다.

비난과 중상 속에 데리고 다녀준 아들은 1년 1년 얇은 종이를 벗기듯이

조금씩 좋아져서 드디어 10년 정말 오체만족의 몸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지금은 보통사람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이 공덕의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답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신심하지 않았더라면 사회를 세간을 원망하고 자신을 저주하며, 지옥과 같은 생활로 끝을 냈을 겁니다.

 

저는 장수할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오래 산다고 저희 부자(父子)같은 불행한 사람을 많이 구제해 줄 것은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작은 진심어린 보답으로 단 하나의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은 저희 부자의 수명을 이케다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과거 10년간 눈물 어린 100만편의 제목의 반복을 기쁨, 기쁨으로 가득한 이케다 선생님에게 수명을 보내기 위해 다시 100만편의 제목을 반복해 올립니다.

저는 간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선생님과 만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혹시 제가 싸워온 지방에 선생님이 오실 때에는 누구보다도 제목을 불러 선생님을 맞이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언제까지나 장수해 주십시오. 멀리 동북의 땅에서 간절한 기원으로 선생님의 무사고와 건강을 위해 제목을 부르겠습니다. 긴 세월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어떻게든 오래 장수해 주십시오. 이상

 

(선생님은 이 편지를 읽고)

여러분은 눈이 보이지 않습니까?

건강한 다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할 수 있죠. 더욱 잘 들릴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솔직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반대해서 그리고 질린 것 같이 보였지만 드디어 사명에 일어섰다. 고투 10년 잘도 견뎌냈다. 겨우 10년에 그것을 증명했다.

눈이 보이게 되었으면, 몸이 움직이게 되었으면,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을 텐데 이 사람은 수명이 필요없다고 나에게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 모이신 여러분은 눈도 보이고 신체도 움직인다. 꽤 좋은 옷을 입고 오지 않았습니까?

이 고투 속에서 살아온 이 사람이 훨씬 나의 일을 생각해 주고 있다.

간부가 아닌가 더욱 더 여러분들과 광선유포를 위해 나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

 

 

4. <암을 이겨낸 사람> 행동하는 인생에 시련은 승리의 도약대

1천만번 창제 확신의 행동으로 위암 극복

 

충청도 청주가 고향인 박재화(55세)씨가 서울로 이사온 것은 17살 때였다. 그리고 반신불수였던 박씨의 어머니는 1968년 이웃아주머니의 권유로 입신, 신심 8일째 되는 날 혼자 일어나서 세수하고, 수저질도 할 수 있는 초신의 공덕을 받았다고 한다. 또 1년만에 큰집을 짓고 이사하는 공덕을 받았는데, 외가쪽으로는 육촌까지 홍교가 되어 순수한 신심을 하고 있으며, 박씨와 더불어 육남매 모두가 본존님을 모시고 일가화락된 신심을 하고 있다. 원래 박씨의 외가는 단명(短命) 집안이어서 50살을 넘긴 분이 없었다고. 그러나 불법(佛法)을 만나 수명을 30년이나 연장한 그녀의 어머니는 74세의 나이로 1999년 1월 잠자듯이 운명하셨다.

그 후 어느날, 박씨는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어머니를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으나 소화도 안 되고 명치 끝에선 콩알만한 것이 걸려서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 나날을 고통스럽게 보냈다.

증상이 너무 심해져 검사를 받은 결과는 위암. 남편과 자녀들은 울면서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닥치느냐’ ‘창제와 활동밖에 모르는 엄마에게 암이 웬말이냐’라며 슬퍼했다. 그런 식구들을 그녀는 오히려 진정시키고, 자신이 약해지면 식구들이 더 힘이 빠질 것 같아 더욱 용기를 내어 평상시보다 더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했다.

어서에 “좋아지는 것은 불가사의요, 나빠지는 것은 필정이니라”라고 있듯이 닥친 시련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것. 1천만번 창제도전을 목표로 7백만번을 올리는 도중에 숙명이 나왔고 ‘전환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존님, 불법을 증명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원하며 창제에 도전, 하루 7~8시간 내지 12시간까지도 진심어린 창제를 올려나갔다.

남편과 동생을 따라 간 병원에서 그날로 진료받고 입원날짜를 잡게 된 박씨는 몸은 아파도 1년에 한번하는 지부총회에는 꼭 참석하리라고 일념을 세웠다. 그 일념이 통했는지 10월 17일, 입원 하루 전날 용케도 지부총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고, 딸이 노래하고 아들이 기타를 치며 합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활기찬 총회 분위기를 가슴에 간직하고 다음날 입원해서는 새벽 3시까지 창제했다. 대구에서 올라와 같이 병실을 쓰던 환자에게 체험담을 들려주고 함께 조석으로 창제도 올렸다. 드디어 수술날이었다. 낯선 수술기구들과 차가운 침대,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서는 많은 의사들을 보며 긴장한 그녀는 오직 본존님만을 생각했다.

‘꼭 살아서 나오게 해주십시오. 나와서 광선유포하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 속으로 간절한 창제를 했다.

그때 보호자대기실에서는 그녀의 동생이 언니를 위해 창제로 기원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수술이 시작된 지 2시간쯤 지나서 의사가운을 입은 어떤 여자가 다가와 “혹시 SGI회원이 아니냐. 나도 SGI를 잘 알고 있다”라고 말을 건네더란다. 그리고 수술실로 들어가 20분 뒤 다시 와서는 “지금 환자의 암세포들이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위를 절개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더욱 강성하게 창제를 해달라”라고 충고아닌 충고를 하고 갔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그 여의사가 제천이 아니었나 싶다.

장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옮겨졌을 때가 밤 11시.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 비몽사몽간인데 동생과 딸이 번갈아 가며 깨웠다. 눈을 뜬 그녀는 ‘드디어 살았구나! 내가 정말 살아 있구나!’하는 안도감에 오래간만의 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계속 울려대는 회원님들의 안부전화에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고. 자신을 위해 기원해주신 모든 분들이 고맙기만 했다. 회복은 빨라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짐을 느꼈다.

병원에서 같은 날 위암수술을 받았던 환자가 있었는데, 그 환자는 상처가 쓰려서 잠을 못 이루고 피가 아래 위로 쏟아지는 통에 간호사들이 항상 비상대기할 만큼 상태가 나빴다. 때문에 간호사들마다 박씨를 ‘정말 참을성이 많은 분’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줬다. 같은 병실의 환자들 역시도 그녀의 호전된 모습에 놀라워 하는 것이어서 박씨는 자연스럽게 불법의 현증(顯證)에 대해 얘기하며 홍교를 펼칠 수 있었다고. 그리고 불과 수술 10일만에 완쾌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기원을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강한 확신을 갖고서 활동과 창제를 꾸준히 했더니 수술후 6개월부터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될만큼 더욱 건강해졌다는 것이 그녀의 얘기. 위를 75%나 절개했으나 수술전보다도 식사를 잘 하고 있다.

“불법에 인생을 걸고 숙명에 울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감사하고, 순간순간이 기뻐요.”

어머니의 강성한 신심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한 박씨는 다시 한번 생애 광선유포의 대도(大道)를 힘차게 걸어갈 것을 다짐해 보인다.

 

·朴在花 성남권 산성지부 부부인부장

 

 

5. <아들의 교통사고 16시간 대수술 필사의 창제로 극복>

“어떤 난관 앞에서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엇보다 큰공덕이라고…”

 

내가 입신한 것은 아버지의 완고한 성격때문에 괴로워하시던 어머니가 1983년 이웃의 권유로 입신하면서다.

1984년 울산에 취업이 되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동안 신심과 조금씩 멀어지기도 했지만, 1992년 신심하는 가정의 여자부와 결혼하면서 새롭게 발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아버지의 완고한 성격으로 맏이인 우리 부부는 집안의 전반적인 문제로 자주 다투었고 이로 인해 이혼의 위기도 몇 번 겪어야 했다. 또 1994년 지금의 빌라를 사서 이사오면서 본존님을 모시고 좌담회 장소도 제공하는 공덕을 받았지만, 단지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집을 마음대로 샀다는 이유로 갈등은 더욱더 심해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올해 아들에게 엄청난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남동생이 승합차로 고종 사촌들과 아들을 태우고 놀러갔다가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과속으로 달려 승합차가 전복되면서 가드레일이 차 안으로 뚫고 들어와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 “살려 주세요”라고 몇 번이나 외친 끝에 근처를 지나던 어느 분의 도움으로 안전조치와 함께 병원으로 이송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본 아들의 모습은 멀쩡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았다. 머리와 얼굴도 심하게 다쳐 살아있다는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응급실에서 나를 본 아들은 오히려 “아빠, 운전 조심하세요”라며 나를 격려했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본존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구쳤다. 그리고 ‘우리 아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강하게 기원했다.

 

16시간의 대수술을 들어가기 전, 의사가 “어떠한 상황이 닥쳐올지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고, 아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러나 순간 “젖은 나무에서 불을 내고 마른 흙에서 물을 얻으려 하듯”(어서 1132쪽)이란 성훈을 떠올리면서 강성하게 기원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 본존님을 확신하자!” 그 말에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세 번 창제하고, 오히려 노래를 부르면서 내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순간 ‘내 아들은 반드시 살 수 있다’라는 대확신이 들었다.

아들을 수술실에 들여보낸 후 아내와 복도에서 필사의 일념으로 울면서 창제했다. 수술 대성공을 기원하며 아들을 광포의 대투사로 성장시키겠노라고 다짐했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의사는 “0.1%의 신경재생가능성밖에 없어서 다리를 움직일 확률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지만 또다시 기원한 결과 2년이 넘어도 생길지 확실치 않은 신경이 10일만에 만들어지는 대공덕을 받았다.

 

수술 후 하루하루 병과 싸워가던 아들이 어느 날 “아빠, 나는 커서 나처럼 아픈 사람을 위해서 봉사할거야”라고 말했다. 그 순간 아들은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김광포’라는 새이름을 지어주었다.

‘아픔에 울며 포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불법(佛法)을 알리자’라고 결의하며 병원 내 모든 환자들에게 불법의 올바름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간암 6개월 된 아기의 어머니, 폐렴에 걸려 고통받는 대학교수 부모, 20만분의 1 확률로 생기는 희귀병을 앓으며 힘들어하는 환자 등 다양한 사람과 불법대화를 해나갔다. 이를 계기로 “대악(大惡)이 일어나면 대선(大善)이 온다”(어서 1300쪽)라는 성훈처럼 공덕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먼저 부모님, 형제 모두 신심을 하게됐고 본존님도 하부받았다. 무엇보다도 어떠한 난관이나 고난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공덕이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5월 3일을 맞이한 지금, 아들 광포는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들과 함께 광포를 위해 끝까지 싸워가겠다.

“인생의 투쟁도 광포의 활동도 모두 강한 결의의 일념으로 결정된다. 패배의 원인도 장애나 상황의 어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자신의 일념의 후퇴에 좌절의 그 원인이 있다”라는 이케다(池田) 선생님의 지도처럼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이 내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져서 울지 말고 울면서 승리’할 수 있는 선봉 방어진권의 남자부로 제2의 ‘일곱 개의 종’을 선두에 서서 난타해 가겠다.

 

김영배 방어진권 대송지부 (男)지구리더

 

 

6. “길게 살아야 2년”이라던 자궁암 2기말"

회원들의 끊임없는 격려·필사의 창제로 극적 소생

 

유복한 가정에서 고생이 뭔지 모르고 자랐던 유옥자(60) 씨. 그녀는 결혼해 남편만을 믿고 따랐지만, 시집오는 그 날부터 가난에 허덕이는 고난의 길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던 남편이 빚보증을 잘못 서 가게까지 처분했지만 빚은 잔뜩 남았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죽지 않고 살았다는 자체가 한숨이요, 오늘은 또 어디서 돈을 꿔서 어디부터 막아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 와중에 유씨는 자궁암 2기말이란 진단을 받고 2년도 살기 힘들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때가 1999년 6월. 대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병원에서 처음으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권유 받았다.

같은 병실에서 항암제를 맞고 있던 한 부인이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면 살 수 있다”라고 했다.

‘남묘호렌게쿄’라고 창제하는 그 부인부만 머리카락이 하나도 빠지지 않은 모습을 보고는 수술 후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 누워서 창제를 했다고.

“당시 내 모습은 머리카락이 빠져 하나도 없었고, 피부는 새카맣고 몸은 말라서 지금과는 정말 달랐어요.”

유씨는 화장실을 오갈 때나, 링거 주사 7대를 양 손등에 꽂고서도 창제를 계속했다. 병실 환자 모두는 항암제 투여로 심한 구토증에 시달려 식사를 못하고 고통스러워했지만 함께 창제하는 두 사람만은 멀쩡했다.

한데 공덕이 있으면 난도 있다고. 퇴원을 해보니 며느리가 8개월 된 손녀를 두고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항암치료가 시작되면서 병원에 월 5일 통원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도움을 받기는 커녕 자신이 어린 손녀까지 돌봐야 하니! 너무나 막막해서 창제도 기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때 우연히 이웃에 사는 부인부가 연이 돼 매일 찾아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함께 창제를 했다.

설상가상으로 수술할 때 아랫배 속에 끼운 10cm 가량의 인공 호스가 잘못되어 한 달에 한 번씩 6개월 동안 교체를 해야 했다.

그런데 한 달이 되어 병원에 갔더니 의사와 간호사 모두가 “이 환자는 불로초를 먹었나, 왜 이렇게 건강해?”라고 놀라며 벌써 새 살이 돋았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그래서 6개월이나 해야 한다던 호스 교체는 더 이상 하지 않는 공덕을 받았다.

하지만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니까 엉뚱한 꾀가 생겼고 조석근행의 지속과 좌담회 참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10월 말까지만 치료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만 믿고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피했다. 그런데 10월 말 항암치료가 끝나는 날, 계속 치료해야 하며 확인 수술까지 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빚을 내 병원비를 대왔던 자식들은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어 망연자실했고, 그녀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떨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병(病)에 의해서 도심(道心)은 일어납니다”(어서 1480쪽)라고 있듯이 모든 것이 본존님의 뜻이었나 싶다.

의사를 원망하고 있던 유씨를 회원들이 찾아와 “의사 선생님을 제천이라 여기고 다시 한번 창제에 도전해서 6개월 뒤 검사에서 묘법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이자”라고 격려했다.

그 때부터 하루 3시간 이상씩 필사의 기원으로 창제하니 처음에는 몸에 무리가 오는 듯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정좌를 할 수 있었다. 또한 회관에 다녀올 때마다 몸이 가볍고 좋아지는 현증을 보면서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빚쟁이들은 가게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남편은 술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방에 숨어서만 지내는 등 생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쪼들렸으나 지도를 받고 난 후, 강한

확신을 가지고 더욱더 도전해 나갔다. 그러자 묘하게도 뜻하지 않던 곳에서 돈이 생겨 가게를 다시 열 수 있게 되었고, 끊겼던 수도와 전기를 한전이 도움이 되어 다시 공급 받았다.

또 언제까지 사채 이자의 얼마를 갚겠다고 기원했는데 그 날짜에 갚을 수 있는 공덕도 잇따랐다.

신심에 대해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죽고 사는 문제였기 때문에 식구들이 뭐라고 하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창제 한 결과 남편도 지금은 신심하는 것에 대해 협조적이다.

마침내 지난 해 4월, 병원검사에서 정상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길게 살아야 2년’이라며 온동네 사람들이 죽을 거라고 했던 그녀는 본존님의 힘으로 건강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 제는 남의 집에 돈을 빌리러 다니지 않아도 돼 행복하다. 그 동안 격려해 주고 함께 기원해 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욱 더 강한 신심을 해 나가리라고 결의한다.

 

유옥자 영등포권 대림지부 (婦)회원

 

 

7. ★ 일본 청년부-어부

 

신심은 괴로울 때야 말로 가장 중요하다. 소리를 드높여 외치고 싶다! “기원해 가면, 미래가 점점 변해간다고. 간단하게 말해서 좋은 방향으로 간다오. 나다운 삶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해 진다!”고

오오노 마나미(大野大洋, 어부). 1973년, 야마구치현(山口縣)출신. 오카야마(岡山)상과대학교 졸업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어부가 되었다. 주로, 돔 어업을 중심으로 조업중. 만선일 경우에는 한 번의 그물질로 2톤이나 건져 올린 기록을 가짐. 자기 자신의 조업 노하우를 항상 개방하고 있음. 1974년 입회. 창가학회 남자부 부장

 

절망의 바닥에서 신앙에 눈을 뜨고, 인생의 두 번째 스타트를 시작하다.

어부가 된지 8년. 저는, 매일 아침 5시가 되면 세토나이카이(瀬戶內海)에 배를 내고, 고치망(吾智網)을 사용해서 해가 질 때까지 조업을 합니다. 고지망은 돔 그물이라고도 불리는데 잡는 고기의 주종이 도미입니다.

걸어둔 그물에 고기가 많이 걸리는 때에는, 정말 기분이 좋고, 감사의 기분이 가슴 속에 가득합니다. 반대로, 빈 그물일 때는 물론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런 때야 말로 바닷가의 우울한 기분을 날려버릴 정도의 기세로 동료 어부들을 격려합니다. 어떤 때라도 명량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있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저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어부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얼른 얼른 일 몸에 안 익힐래!"라고, 야단맞았습니다. 어떨 때에는 침몰선에 20만 엔(약 200만원)이나 하는 그물이 걸려버려서 망가져 버린 일도 있습니다. 좀처럼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아서 낙담하고 있을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째에, 생각지도 못했던 만선. 그것도 한 번의 그물질에 병어가 380kg이나 건져 올렸습니다. 돈으로 따져서 120만 엔(약 1200만원)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될수록 어느 샌가 유혹에 빠져서, 밤이면 밤마다 놀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빚은 크게 불어나고, 가정은 파단되고, 그 결과 이혼.

그 때가 되어서 처음으로 저는 저 자신을 되돌아오고,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던 거야?”

라고, 자기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 속 깊이 후회했습니다. 부끄러웠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성질이 급한 편이었기에, 충고를 받게 되면 참을 수가 없게 되어서, 벌컥 화를 내게 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 저의 곁으로 창가학회 남자부 선배가 가끔 방문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모처럼 몇 번이나 찾아와 주었기 때문에, 때로는 가볼까 하고 생각해서, 본부간부회의 위성중계회장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이케다 명예회장의 모습과 스피치를 보게 된 순간,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왔습니다.

“어디까지라도 신념을 관철해 가는 것이다. 지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앞으로 앞으로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저에게 향한 격려와 같이 느껴져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이렇게 훌륭한 분이셨던가. 좋았어,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자. 신심으로 승부를 보는 거야.”

라고, 결의. 인생을 크게 방향전환하기 위한 스타트를 끊었던 것입니다.

 

할 의욕과 지혜로 어군(魚群)을 탐지. 지역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존재로.

그렇게 결의를 담아서 조업에 나가게 되자, “고기를 많이 잡을 꺼다!”라고 하는 할 의욕과 “많이 잡기 위해서” 아이디어가 점점 떠올랐습니다.

고기떼는, 수온, 먹이, 조류, 기후, 고기의 습성 등에 의해서 다릅니다. 저는, 여러 가지 데이터를 모아서 분석하고, 어군탐지기를 사용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정해서 그물을 내리면, 도미나 병어 때가 적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나 두 번이 아닙니다.

한 번 그물질로 병어를 2500kg이나 잡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어업량의 20배 이상. 혼자서는 건져 올리는 것이 무리였기에, 근처에서 조업하고 있던 어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건져 올렸습니다. 은색으로 빛나는 고기가 족족 배의 수조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에는 단지 열심히 하기만 했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만, 나중에 “아, 이렇게나 많이 있었구나.”라고 놀랐습니다. 항구에서도 모두가 대 소동이었습니다.

 

재기를 결심해서 3년째, “광선유포의 거점이 되는 우리 집을”이라고 기원하던 중에, 좋은 조건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게 되도록 상담이 진행되고, 척척 순조롭게 3층 건물의 74평의 저의 집을 지울 수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같이 사는 처와 알게 되어서, 따뜻한 가정을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은 최고의 기쁨입니다.

 

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는 수산회사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시장으로 출하됩니다. 제가 위탁하고 있는 수산회사가 “우량출하회사(優良出荷會社)”로서 히로시마시(廣島市)에서 표창을 받았습니다. 저만의 성과가 아닌데도 사장님께서, “오오노군의 덕분이에요”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해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이케다 선생님, 남자부의 선배님들, 그리고 가족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의 스피치로 격려받고, 선배님은,

“대지에 쓰러진 사람은, 대지를 딛고 일어서는 거야. 신심으로 일어서자!”

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기운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더욱이,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어업협동조합 청년부의 활동에도 참가. “한일어업교류단”의 야마구치현대표로 뽑혀서, 한국을 방문했고, 친선관계를 다졌습니다.

또, 고지망에 자주 삼치가 걸리기 때문에 낚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야마구치현어정과(漁政果)에서 “삼치, 병어, 도미전문 어망”의 인허가(認許可)를 특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삼치의 조사를 겸하고 있어서, 후계자로서 힘내주길 바란다고 하는 뜻이 실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처럼 손에 넣기가 힘든 허가증으로서, 매매하려고 할 때에는 100만 엔(약 천만 원)정도 들어갑니다.

 

자신다운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세토나이카이(瀬戶內海)는 전반적으로 불황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어획량이 나오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야말로,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심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도망가 버렸겠지요. 신심은, 힘들 때야말로 가장 중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제 스스로 말하기에는 좀 부끄럽지만, 급한 성격도 많이 누그러져서, 조그만 한 일에 있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심을 하면, 미래가 점점 더 변해가면서, 간단하게 말하면 좋은 방향으로 변해간다!”

그렇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창가학회의 활동 속에서 가장 자신에 어울리는 삶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요?

 

어부라고 하는 일은, 매일이 정말 힘듭니다. 기후의 파악이나 건강관리가 필요하고, 한 발 실수하면 생사에 관련된 위험과도 인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지망이라고 하는 것은 오(나 자신)의 지혜라고 쓰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지혜여하에 따라서 실적이 쌓여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제호미(醍醐味)로서, 더욱이 신심을 가장 멋지게 살려가는 어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업에 대해서,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목표로, 후계자를 늘리고, 어장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저 자신이 성장하고 싶다고 결의합니다.

 

 

 

8. 일본 소아과 의사

 

정말 싫었던 자신을 바꾸려고 진심으로 기원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의 온정이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솟아났습니다. 그러자, 나 자신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부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니미 타에미(新美妙美,소아과의사) 아이치현 출신. 어릴 때부터 천식으로, 매년 긴 입원생활을 계속했다. 그 자기 자신의 체험을 살려서, 소아과의사를 희망했다. 신쥬(信州)대학의학과를 졸업하고, 츄우신마츠모토(中信松本)병원에서 근무. 여자부 지역부여자부장

 

 

매일이 무서웠다. 지기 싫어서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만큼 다루기 어렵고 버릇없었던 아이는 없었겠지라고, 저 자신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초등학교의 저학년일 때에 있었던 충격적인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어떤 범죄를 당해, 그 범인에게,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마. 말했다가는 죽여 버리겠어! 라고 협박을 받았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떨어야했던 공포심에서,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것이 PTSD(심적외상후(心的外傷後)스트레스障害)와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보통 때는 그러한 사건을 잊어버리는데, 가끔 그 사고를 떠올리고 공포감이 되살아나서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수년간에 걸쳐서 저를 속박하고 있었습니다.

 

범인에 향한 공포는, 언젠가부터 어른에게 향한 공포, 자신이외의 사람에 대한 공포,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자신감 상실 등으로 변해져 갔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반동으로 타인을 공격하게 되었고, 자신이외의 사람들은 모두다 적이라고 조차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함부로 욕을 하고 내뱉고, 초등학교 때에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면서 지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제가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남자아이들에게도 “전염병균”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자아이들 속의 친구들과도 인간관계가 삐걱거려서, 반에서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정말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학교에 가지 않으면 지게 되는 것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용기를 주세요! 라고 진지하게 기원했습니다. 저를 바라보면서, “너, 기분 나빠. 죽어버려”라고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무서워서, 무서워서 엉엉 울면서 기원했습니다.

그럴 때, 갑자기, 제가 초등학교 때 반 남자아이들을 괴롭혔던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아, 그 아이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런 나쁜 뜻이 없이 행했던 일이 이렇게도 남들을 상처 입히는 것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저지른 죄의 비열함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 닫았을 때, 그 때부터 다음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부터의 행동으로 미래를 바꿔가는 것이다! 난 도망가지 않아! 용기를 내서 절대로 미래를 열어갈 꺼야! 어린 저의 마음속에서도 그렇게 결의했습니다.

그 때, 무엇보다도 절 지탱해 주었던 것이 이케다 선생님께서 쓰신 동화 『태평양에 걸린 무지개』였습니다.

그 책에는, 무엇을 하더라도 ‘용기의 길’과 ‘겁쟁이의 길’이 있다. 바른 것, 향상하는 것, 남을 배려하는 행동은 용기가 필요하고, 편하지 않다. ‘용기의 길’은 좁은 오르막길로서 험할지도 모르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밝고 넓어져서, 그것은 태양을 향해서 똑바로 뻗어가고, 깨끗한 공기와, 빛깔이 고운 꽃들에 둘러싸인 길에서는, 저 멀리 먼 곳에부터, 상쾌하게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 책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읽어서, 저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기원해 갔던 것입니다.

 

 

 

 

저 자신도 아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성장에 관련되는 일이 하고 싶다.

제가 가장 힘들어 하고 있을 때, 항상 변함없는 태도로 저를 지켜봐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분이, 가족 이외에도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창가학회 미래부 담당이셨던 여자부인 언니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화가 나는 말을 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더라도, “나는 타에가 굉장히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라고 언제나 저를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이, 저의 주치의이셨던 N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최악의 환자로, 병을 고치려고 하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약을 안 먹고 천식 발작을 일으킨다든지, 입원해서도 규칙을 어기기만 했습니다. 소등시간을 안 지키고, 병원을 빠져나가서 군것질을 한다든지...... N선생님은 제가 몇 번이나 약속을 어겨도, 저를 포기하지 않고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 자신도, 제가 믿을 수 없어서, 자기혐오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를, 저 이상으로 믿어주시고, 감싸 안아 주셨던 이 두 분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안도감을 되찾을 수 있었고, 저 자신을 그리고 남을 믿어보자고 하는 기분이 들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을 바꿔보자고 진지하게 기원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지금까지 저를 돌봐 주셨던 분들을 따뜻함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그러자, 저 자신도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속에서부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 사건이 있었던 때부터, 말 할 수 없었던 공포감이 되살아나는 것이 두려워 졌습니다. 그러한 고민들을 통해서, 저는 아이들의 성장에 관계되는 일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벽에 부딪친다든지, 불안이나 공포, 분노에 빠져들어 갈 때, 친근한 입장이 되어서 격려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사나 보육사, 심리 카운슬러 등, 아이들과 관련된 일은 여러 가지로 고민했을 때, 역시 저에게 있어서 특히 친근감이 있었던 것이 소아과 병동이었고, 소아과 의사라고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소아과 의사를 목표로 해서, 저는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쥬대학(信州大學)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저 자신의 “숙업”을 “사명”으로 바꿔서

저는 대인관계가 굉장히 어설픕니다. 어딘가부터 남들과 “벽”을 만들어 버립니다.

불법대화와 가정방문을 통해서, 아무리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성장을 기원해 가는 것으로, 서로 공감할 수 있고, 마음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믿고, 성장을 기원해서, 대화를 계속해 가는 중에, 그 사람도 바뀌며, 자신도 성장해 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섰을 때, 지금은 소아과 의사로서 아이들과 접하는 것에서도, 굉장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천식이나, 비장병, 당뇨병 등의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비굴해져 있거나, 자신감을 상실하거나, 버릇이 없어지거나,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자포자기의 상태로 되어, 자기 자신을 잘 컨트롤 할 수 없는 이차적인 장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고, 따뜻하게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런 아이들 자신의 문제해결능력을 끄집어내서, 그 아이에 알맞은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소아과의 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을 닫고 있었던 아이들도, 그 아이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다가갈 때, 마음을 열어가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년전에 저 자신과 겹쳐져서, 아무리 봐도 남 일 같지가 않고, 절대로 이 아이를 성장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생겨납니다. 여러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저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 자신의 “숙업”을 “사명”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불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금은 감사한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 차 있습니다.

 

 

9. 병마에서 벗어났다! 생명의 이인삼각!

 

 

지금으로부터 7년 전 1994년 8월, 도내의 대학병원.

침대에 기대어 남편을 격려하는 아내가 있다. 남편 카네후사는 위암 1기. 수술이 10일 후로 다가오고 있다.

“당신 괜찮아?” 라고 말을 거는 미소가 상냥하고, 밝다. 실은--.

남편이 경영하는 운송회사를 도맡으며, 열심히 남편의 간호에 힘쓰는 코즈키 자신도 몇 일전에 같은 병마를 선고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수술을 앞둔 남편에게 그것을 알릴 수는 없었다.

카네후사씨의 암이 발견된 것은 6월 상순. 8월에 들어 수술전의 검사에 들어가는 코즈키씨에게 의사가 말했다 “모처럼이니까 부인도 검사해봅시다.”

이렇게하여, 우연히 받은 검사. 그 카메라의 영상을 보여주는 의사의 표정은 굳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위암 1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걱정하는 장녀, 묘우코(50세)가 운전하는 차에 타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먼저 죽으면…”

“혹시 남편이 알면…”

“가족과 회사는…”

공포와 불안의 암운이 마음에 떠돈다.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코즈키는 곧바로 어본존 앞에 단좌했다. 62년에 입신한 이래 계속해서 많은 고난에 부딪쳐 왔다. 지병의 지병인 만성기관지 확장증을 치료하고 싶다고, 창제와 광포에 면려하여, 증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호전. 학회활동에도 벽이 부딪히면 기원해서 하나하나 승리해왔다.

창제를 계속하는 코즈키씨의 뇌리에 신심으로 이긴 광포의 추억이 차례차례 되살아 났다.

“저 때도. 이겼다. 그때도, 이겼다, 이번도 신심으로 이겨보이자."

결의와 함께 몸에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 날부터 부인은 창제를 계속하며, 생명력이 강해지면 남편의 병실에 들어갔다.

자신에게 암선고가 있었던 4일 후, 코즈키는 지부좌담회의 석상에 있었다. 모두가 체험과 결의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코즈키도 부부의 병에 대한 도전을 적나라하게 동지에게 말했다.

그 때이다. “힘내요!”라고 어느 여성이 말했다. 회우인 키요시(69)였다.

계속해서 코즈키가 행복을 기원해온, 지역의 회우. 그 날 좌담회에서 키요시는 선언했다.

“코즈키, 무사히 돌아와요. 그러면 나, 반드시 입신할께요.”

박수가 쏟아졌다. 코즈키씨는 눈시울을 적셨다. 그날 밤, 창제 후, 코즈키는 어서를 폈다.

“화도 전환되어 행으로 되리라.”(어서 1124쪽). 밑줄이 그어진 일절을 다시 배독했다. 너무나 두려웠던 암이, 빛나는 사명의 영관으로 보였다.

 

8월 22일.

수술실로 들어가는 카네후사는 처의 웃는 모습을 보고 용기가 솟았다.

“당신은 절대로 괜찮아. 기원하고 있으니까.”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위를 3/4절단하는 수술은 성공했다.

카네후사가 침대에서 마취에 깨어났을 때, 아내가 웃고 있었다.

“뭔가 있는 것같다”

아내의 얼굴을 보고 남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내가 수술의 치료를 계속하는 자신의 병실 옆에 입원한 것은 9월 8일의 일이었다.

“당신, 검사했지?” 라고 갑자기 물었다.

아내가 대답했다.

“나도 위암, 수술해요. 당신도 훌륭하게 극복했기 때문에, 나도 이겨.”

그 때 처음 카네후사는 전부를 깨달았다.

씩씩하게 말하는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당신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내에게 끝없는 감사를 느끼는 남편은 경이적인 회복력으로 퇴원한다.

집에 돌아와 유동식의 양을 조금씩 늘려 마시는 남편의 뇌리에는 간병해준 아내의 미소가 강하게 새겨져 잊혀지지 않는다.

“아내가 신심이 강성하여 정말 다행이다. 이 신심은 정말로 굉장하다.”

카네후사는 불단 앞에 앉아, 기원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바쁜 일에 쫓기여 신심으로는 광포의 활동에 진력하는 아내를 따라갈 수 없다. 몸이 약한 아내는 홍교와 우호확대에 발랄하게 달리면서 창제하면서 일가의 숙명을 하나하나 극복해 왔다. 아내의 모습이 주마등과 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신심으로 일어설 차례다.”

카네후사는 이 때, 입회이래, 일찍이 없던 진지함으로 기원하기 시작했다.

코즈키씨는 수술을 앞둔 병실에서 남편이 한 말이 생애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은 내가 기원할 차례다.”

결혼생활 44년간, 가장 기쁜 말이었다. 남편의 격려가 아내의 생명력을 불러일으켰다.

9월 26일. 4시간 걸려 위를 절반 잘라냈다. 동지가 모두 창제해주었다. 수술 전에도 병실로 돌아와서도, 코즈키는 건강했다. 병실의 환자의 고뇌를 상담해주었다.

10월에 들어, 자택에서 요양하는 중에 코즈키 부부에게 기쁜 방문객이.

입신기념근행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키요시가 보고를 하러 방문해준 것이다.

“열심히 신심하겠습니다!” 그 말이 최고의 위안이었다.

그리고, 이날 회우와의 감격적인 만남이 부부에게 새로운 도전으로의 신호가 되었다. 두 사람이 모여, 좌담회에. 광포의 거점을 제공하고 있는 우리 집에 모이는 동지를 격려한다. 95년 원단에는 자택에서 일가족이 모여 신년근행회를 열었다.

도사를 보는 남편의 등에 코즈키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당신, 정말로 고마워."

위장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회복. 카네후사는 제일 좋아하는 술도.

올해, 감사의 마음으로 딸들과 함께 4세대의 홍교를 달성했다.

“어머니의 병회복이 확신을 주었습니다.”라고 광포의 정원에서 뛰어노는 4명의 아이들은 말한다.

코즈키는 대표 지원자그룹활동을 재개했다. 명칭은 “스마일회”

“어떤 역경에도 지지않는 미소로, 벗에게 용기를 주는 생활방식을”이라고 붙인 이름이다. 이 모임에는 사용이 완료된 우표등의 회수이익을 노인시설, 난민소등에게 기부해왔다.

부부가 먹은 항암제도, 코즈키는 1년으로 카네후사는 3년만 먹었다.

의사는 99년, 두 사람에게 증상이 완료됨을 고했다.

코즈키는 오랫동안, 본지의 지구신문장으로서 진력. 저녁에 벗과의 대화를 넓히고 있다.

카네후사는 지구의 슬로건 등을 진심을 담아, 크게 쓴다.

남편 79세, 아내 74세. 입회한지 40년째에 들어선 이인삼각의 인생은 지금, 최고로 충실하다.

*의사의 말- “코즈키의 위암수술을 담당했다. 카네후사의 치료 경과도 알고 있다. 두 사람 다 위암이 1기로 조기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며 , 치료경과는 매우 좋았다. 남편 다음의 수술로 아내의 부담이 컸을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밝게 치료 및 수술의 검사. 항암치료법에 임해주었다. 그 병에 대한 자세가 암을 극복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세이쿄신문 6월 9일자 5면 [도쿄 오오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