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5. 20:55ㆍ佛法 .SGI
아래 체험담은 창가가족의 하늘아래구름님의 체험담 모음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좋은 체험담에 감사드립니다. 원본을 볼려면 창가가족 체험담모음에 가서 보시면 됩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
1.필사의 기원으로 연 미국 광포의 사명
SGI-USA 이사장
다니엘 나가시마
1973년 11월 7일, 300여명의 동지에게 전송을 받으며 하와이를 향해 일본을 출발한 것이, 저의 미국 광포에의 제일보였습니다.
「광포를 위해 미국의 흙이 되어라!」라는 동지의 격려아래,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몇 시간 후 아름다운 하와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후 수개월간 아침저녁으로 공부와 학회활동에 면려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 온지 겨우 5개월도 채 안된 1974년 4월 7일 이케다 선생님을 모시고 개최된 샌디에고 컨벤션에 하와이 대표로 참가하는 공덕을 받았습니다. 이 컨벤션에 참가한 후 반드시 미국 본토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오는 길에 재빨리 로스앤젤레스의 커뮤니티 칼리지에 전학 수속을 하고 의기 양양하게 하와이로 돌아왔습니다. 하와이에 돌아오자마자 전학수속 서류를 가지고 이민국에 상담하러 갔습니다. 그 때의 이민국 담당자는 말없이 몇 번이나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샌디에고 컨벤션이 끝난 후 4일 후인 4월 11일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미니 문화제에서는 선생님 앞에서 스틱 댄스를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제가 끝난 후, 선생님에게 직접 격려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선생님과의 이 만남을 계기로 미국 본토에서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도 이 날은 하와이에 오고 나서 정확히 100만 편의 창제를 끝낸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하와이를 떠나신 후 몇 주일 후, 저의 아파트에 이민국에서 한 통의 통지가 날아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봉투를 열어보니, 이민국에서 보낸 국외 출국권고서 였습니다. 그것은 정말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필사로 제목을 올렸습니다.
기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바로 이 때 마음에 떠오른 것은, 기도초의 「대지를 가리켜서 빗나갈지라도, 허공을 동여매는 자는 있을지라도, 조수의 간만이 없는 일은 있을지라도, 해는 서쪽에서 돋을지라도, 법화경의 행자의 기원이 성취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어서1351쪽)라는 일절과, 71년 진로문제로 고민하면서 일본에서 취직을 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에 갈 것인가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선생님께 받은 「남자는 혼자서라도 한다. 혼자서 싸우는 것이다」라는 지도였습니다. 어쨌든 하루 3시간, 4시간 제목을 올리는 와중에 절대로 이대로 일본에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의 칼리지에서는 이미 입학통지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 번 더 이민국에 사정을 해보자는 생각에 필요한 서류는 모두 챙겨서 다시 이민국을 방문했습니다.
불안한 속에서 6월이 되자, 다시 이민국으로부터 통지가 날아왔습니다. 이 번에는 2주 이내에 국외로 출국하라는 권고서 였습니다. 눈앞이 캄캄한 마음을 억누르고 울면서 어본존님 앞에 앉아 기도초의 일절과 선생님의 지도를 가슴에 새기며 열심히 제목을 불렀습니다.
그러던 중, 돌아가신 숙부가 한 때 상원이었고, 숙모가 아직 하와이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곧바로 숙모에게 연락을 취해 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숙모는 넓은 인맥을 통해 변호사, 이민국과 연락을 취하여 몇 주일 후 숙모와 함께 다시 이민국을 찾아갔습니다.
그 후 다시 제목을 올리던 중, 잊지 못할 7월 2일, 다시 이민국에서 통지가 왔습니다.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어보니, 이번에는 일주일 이내에 국외 출국을 하라는 권고서 였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체포하여 강제 송환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문제없다고 기대하고 있었던 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미국에 있으면 주위의 조직에 폐를 끼치게 된다고 생각하고, 울면서 귀국을 결심하였습니다. 어차피 귀국해야한다면 7월 3일에 귀국하자는 생각에, 현지의 조직에도 연락을 취하고, 다음날 비행기표도 구입하여 아파트에 이사 통고를 하였습니다. 그 때 부인부인 레온씨로부터 오늘밤 지부에서 저의 송별회를 하니까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 따뜻한 현지 멤버의 마음을 느끼면서도 너무나 비참한 생각뿐이었습니다.
선배의 따뜻한 격려에
그날 밤, 이사준비를 모두 마치고 하와이 회관에 귀국인사를 하러 갔을 때, 당시의 하와이 중심자였던 라이프씨, 그리고 히라마씨가 「열심히 했군요. 지금부터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면 안 되요.」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두 분의 따뜻한 눈빛은 지금도 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날밤 송별회에는 급한 연락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부의 멤버들이 저를 위해 와주셨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당시 그룹장이었던 야마나카씨는 저에게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엄하고도 따뜻한 격려를 해 주며, 자기가 친하게 지내는 하원의원과 다음날 오전 중에 만날 수 있도록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저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기원하고 다음날 3일 호놀룰루 공항에 가는 대신, 하원의원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저의 생각을 전했습니다. 그 하원의원은 곧 현지 이민국 관장과 연락을 취해 5일 관장과의 면접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2일 후 필요한 서류를 전부 준비하여 이민국 관장과의 면접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긴장을 해서인지 제대로 설명도 못한 채, 7일에 다시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에 돌아온 저는, 지금이야말로 제목밖에 없다라고 결의하고 제목을 올려서 그 주일 동안만 70시간을 넘는 창제를 하였습니다. 불안감으로 질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면, 마음속에 기도초의 일절을 떠올리고 선생님의 지도를 마음속에 새기며 진지하게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7일, 이 날은 불가사의하게도 4월 11일 선생님과 만난 후 150만 편의 창제를 끝낸 날이기도 했습니다. 면접에서는 지난번과는 너무나 다르게 자신도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차분하게 설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민국 관장도 자신이 책임지고 필요한 서류에 전부 사인을 해 주며 「9월에 학교가 시작하면 바빠질 테니까 7월에는 하와이에서 천천히 쉬세요」라고 따뜻한 말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73년 8월에 기쁜 마음으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할 수가 있었습니다.
스승에게 보답하는 길을
이 체험을 돌아보며 깊이 느끼는 것은, 제목을 부르며 괴로워하고 있던 중에 제 자신의 사명의 길, 그리고 선생님께 보답해 가는 길이 보였다는 것이 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것 이상의 진짜 공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미국 광포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겠다는 결의를 굳건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어서의 일절대로 법화경의 행자로 지용의 보살의 사명을 자각한 우리들의 기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깊게 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20년이 넘은 지금, 선생님께 물려받은 사명의 길을 당시의 결의대로 걸어갈 수 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본존, 그리고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뿐입니다.
이케다 선생님, 그리고 많은 신세를 진 하와이의 여러분들을 비롯하여 파이오니아의 여러분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불석신명의 정신으로 미국 광포의 더한 층의 전진을 위해 전력으로 싸워나갈 것을 결의합니다.
(3월2일자 월드트리뷴 일본어판)
2. 빛은 내면의 세계의 반영
전날의 리허설. 하나하나 장면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이와카미씨
무대·영상 조명 회사를 경영
카와사키시 아사오구 이와카미정남씨(48)
기술 이상으로 마음을 닦는 작업을 빠뜨릴 수 없다
1953년(쇼와 28년) 토쿄 태생. 68년, 창가 고등학교 개학과 동시에 입학해 1 기생. 창가 대학 1 기생. 졸업 후, 무대 조명의 세계에 들어간다. 85년 독립해, (유) 라이트 업을 설립, 현재에 이른다. 61년 입회.
12월 6일 오전 9시
토쿄·스이도교의 토쿄 돔. 2일 후가, 타격계의 종합 격투기 K―1「월드 그랑프리 2001」결승전.
준비는 급피치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 조명의 일체를 담당하는 것이, 이와카미씨가 대표이사를 맡는(유) 라이트 업.
「사장, 좀 좋습니까?」
링 주위의 라이트의 설치가 끝나자 마자, 백 스크린측의 스탭으로부터 소리가 걸린다. 현장의 상황이, 당초의 계획과 다른 것 같다. 스폰서 간판에 맞히는 빛을, 어디에 달지, 변경을 어쩔 수 없이 했다.
「모두, 째-응! 도중이지만, 전부 떼어내, 다시 붙여 주지 않는가?」
순간에 결단했다. 비록 시간이 없어도, 스탭에게 어떻게 생각되어도, 좋은 조명을 위해서(때문에)는 타협하지 않는다. 이와카미씨의 신념이다.
「전국 5~600사 있는 조명 회사는, 대부분이 나 같은 중소기업입니다. 그 중으로, 왜 집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1개는, 성실하게, 우직에 왔기 때문에라고 생각합니다」
이와카미씨는 창가 고등학교 1 기생. 함께 건학의 땀을 흘린 친구, 그리고 몇번이고의 창립자와의 만남이, 인생을 결정했다. 창대졸업 후, 무대 조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10년간의 수업을 경과해, 32세에 독립. 자본금은 빚. 아파트의 일실이 본사. 아내·유우코씨와 둘이서 가 작은 회사. 일이 없고, 필사적으로 제목을 주창했던 것(적)이, 신앙심의 토대가 되었다.
받은 일은, 성실하게, 정중하게. 학회의 문화제나 음악제, 동창생으로부터의 지원도……. 한걸음 한걸음, 착실하게 규모를 넓혀 지금 종업원 10명까지 되었다.
「“무슨 모아 두고”를 배운 학원의 3년간이, 나의 인생을 일변시켜 주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조금이라도 보은을 해 나가고 싶다. 후배이기 때문에, 길을 여는 것이 자신의 사명입니다」
7일 오후 9시
최초로 해 마지막, 조명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일중은, 돔의 천정으로부터의 빛이 너무 밝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링의 빛은 완전하게 떨어뜨려! 」
「객석에의 라이트는, 드문드문하게 맞히는 것만으로 좋아」
「searchlight는 8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4개씩 규칙적이게 할 수 있어?」
차례차례로 연출가의 소리가 퍼진다. 이와카미씨는, 라이팅이 수정하는 개소를 메모 하면서, 스탭에게 지시를 내린다.
「보통은, 나도 1 스탭. 맨 먼저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만, 이만큼 대규모로 되면(자), 과연 지휘에 사무치지 않으면」
이 날을 위해서(때문에) 준비한 기재는, 라이트를 원격 조작 하는 콘솔(조광탁)만으로도 6받침대. 전열 3받침대는 무빙과 일반 조명. 뒷줄 3받침대는 전식전용이다. 여기에, searchlight 40 받침대를 포함한 대소합계 500받침대의 라이트가 접속된다.
「응, 좋아. 이것으로 조명은 OK지」
연출가의 이해가 나왔던 것이 오후 11시. 지금부터가 수정의 중대국면.
프로그램을 다시 기억해 , searchlight의 위치를 갖추어 트러블로 점등 하지 않았던 라이트를 새로 붙인다. 스탭과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이, 생생하게 하고 있다.
역시 지시를 내리는 것보다, 현장의 (분)편이 성에 맞는 것 같다.
「학회의 지구 부장으로서 날마다,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군요. 얼마나 바빠도, 가능한 한 그 자리에 가는, 그 사람을 만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엑시던트가 있어도, 재빠르게 적확한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기분은 항상“현장 제일 주의”입니다」
8일 오후 9시
오후 5시부터 시작된 결승전도, 드디어 가경이다. 마크·헌트 선수대프란시스코·피리 선수의 우승 결정전.
칸! 개시 징이 울었다.
소리에 맞추어 스윗치를 넣어 라이트 업. 여기까지, 오퍼레이션 레이트(조작)는 순조롭다.
무빙과 일반 조명의 호흡도 짭짤하게. 선수의 입퇴장을 쫓는, 핀 스폿도 순조롭다.
문득 주위를 바라본다. 열광하는 팬. 전력을 다하는 선수. 시합의 행방을 응시하는 주최자--. 만족했다. 이와카미씨는, 이 날의 성공을 확신했다.
「이것은, 나개인의 생각입니다만, 조명은, 눈에 띄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연기하고 손, 주최자, 관객에 힘쓰는 존재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에 들어간지 얼마 안된 무렵, 의문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
외형은 신통치 않는 중년 남자인데, 일이 되면(자), 사람이 바뀐 것처럼 깊은 색을 사용하는 직공이 있었다.
“무엇으로 이런 아름다운 빛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조금씩, 그 비법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외형은 아니고, 내면의 세계의 반영입니다. 얼마나 대상으로 신경써, 다하려 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기술 이상으로, 마음을 닦는 작업을 빠뜨릴 수 없다. 신앙이 소중합니다」
결승전은, 3 라운드로 Draw(무승부). 1 라운드의 연장전이 짜여져 판정으로 결착이 붙었다.
사모아 독립국 출신의 괴인 마크·헌트. 맞아도 맞아도 직면하는, 새로운 히어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 히어로에게 빛을 쬐는 30명의 스탭도, 최고로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히어로가 탄생한 K―1「월드 그랑프리 2001」
3. 오키나와의 고야 (은)는 모두의 건강의 근원
현 농업 시험장 연구실장 사카모토 모리아키씨(48)
-신종 육성으로「오키나와 연구 장려상」
지역의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카모또씨(안)(우라소에시내에서)
NHK 프로그램「들씨」로 일약 각광을 받은“고야만”. 고야(니가우리)를 모종한 캐릭터다. 니가우리는, 오키나와현민에게 빠뜨릴 수 없다, 비타민 C가 풍부하고 건강 증진의 근원. 체프르(손상하고 것)나 쥬스, 차에도 이용되고 있다. 이 신품종 육성에 성공해, 현의 농업 진흥에 공헌한 사카모토 모리아키씨(48)는, 금년 1월, 제22회「오키나와 연구 장려상」(주최·재단법인 오키나와 협회)을 수상했다.
수상한「오키나와 연구 장려상」은,「니가우리와 트우간(동과)의 품종 육성과 유전 해석」의 연구에 의하는 것.
직장의 현 농업 시험장 원예지장은, 혼지마 중부의 구시카와시에 있다.
5개(살)의 연구실 중, 야채 육종 연구실의 실장이 사카모또씨.
손수 다루어 온 니가우리의 품종 개량의 성공으로, 수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지역으로부터도, 칭찬의 소리가 잇따랐다.
「오키나와의 농업 진흥에 공헌 할 수 있어 이 정도의 기쁨은 없습니다. 학회원으로서 사랑하는 고향의 발전을 계속 빌어 왔습니다」
창가학회에의 입회는 1960년(쇼와 35년).
농업을 영위하는 부친이 궁핍한 생활에 막혀, 아는 사람의 권유로 일가에서 입회했다.
사카모또씨는 9명 형제의 8번째. 입회 후, 부모의 표정이 점차 바뀌고 했다.
가난에 지지 않는 밝은 웃는 얼굴. 그 만큼은 아니다. 사람의 행복을 빌어, 친구를 위해서(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부모가 학회의 멤버와 언제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말을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빌어, 힘을 합해, 우리 고향을 행복의 섬으로 하자」
지역·사회의 번영을 바라는 부모님의 삶의 방법은, 아들의 마음에도 깊게 새겨졌다.
사카모또씨가 고등학교 1년때, 출석한 회합에서, 이케다 회장(당시)의「여기에 있는 전원이, 세계로 웅비하는 인재가 되었으면 한다」라는 격려에 감격.
“좋아! 자신도 선생님인 제자로서 인재가 되자!”라고 결의해, 류큐 대학 농학부에 진학했다.
원래 식물에 관심이 있었다. 야채를 테마로 배운다. 장학금과 가정교사로 생활. 연구와 학생부의 활동에 땀을 흘려, 친구에게로의 불법 대화에도 솔선.
77년, 코우치 대학 대학원난지 농학과에. 토마토의 식물호르몬의 연구에 임했다.
당시의 교수로부터 입 시큼하게 말해지고 있었던 것(적)이 있다.
“연구 테마는 농가의 마당에 있다. 농가와 함께 일해, 농가에 환원 해 나가는 것이 연구다”라고.
주에 2일은, 농가에서 함께 작업했다. 이 체험이, 이윽고 산다.
79년, 현 직원채용 시험에 합격. 현 농업 시험장에. 4년간, 미야코지장에 근무해, 현재의 원예지장의 야채 육종 연구실에 지났다.
당시, 오키나와 농업의 싱코우를 둘러싸 회의를 거듭할 수 있고 있었다. 멜론이나 수박 등, 수익율의 높은 작물을 생산하면 어떨까, 라는 의견이 잇따랐다.
사카모또씨도 괴로워했다. 창제(법화경에 귀의하는 뜻의 제목을 주창하는 것)를 거듭해 깊이 생각했다.
“오키나와 (위해)때문에, 제일 좋은 방법은……”
그 때, 대학원 시대에 농가에서 일한 체험을 생각해 냈다.
“고향 농가에 있어, 제일, 애착이 있는 작물을 만드는 것이, 제일 기쁜이 틀림없다”
회의에서, 사카모또씨는, 수익율 본위에의 전환에 단고, 반대한다.
「가격은 비싸도, 벌써 본토에서 생산되어 있는 작물로, 완수해 오키나와의 농가를 승부 할 수 있는 것인가」
니가우리 밖에 없다……. 성공할 확신은 없었지만, 오키나와를 사랑해, 번영을 바라는 기분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회의의 결과, 사카모또씨가 니가우리의 품종 육성의 책임자가 되었다.
86년에는, 대만의 아시아 채소 연구 발전 센터에 파견되었다.
5개월간, 온 세상의 니가우리 연구에 종사. 귀 오키 후, 신품종 개발에의 도전이 시작된다.
과제는 암꽃이 많은 니가우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보통 니가우리는, 수꽃이 90∼95%를 차지한다.
재래의 오키나와종이나 중국, 대만, 타이, 하와이, 방글라데시등에서 니가우리의 종을 수집해, 수분을 거듭하고 갔다.
실패가 계속된다. 전혀 암꽃이 증가하지 않는다. 앞이 전혀(완전히) 안보였다.
흙을 꽉 쥐어 비닐 하우스의 천정을 몇번, 들이킨 것인가.
1년, 2년과 때가 지나 간다. 단념할 것 같게 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을 닫아 빌었다.
연구는 다망해도, 시간을 찾아내 솔선해 친구의 격려에. 성인의 가르침 신문의 구독 확대도. 또, 학회의 인재 그룹인 학술 부원으로서 불법 세미나에서 불법에의 이해를 넓히고 갔다.
정성들여 기른 니가우리의 크기를 측정하는 사카모또씨
고향·오키나와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 노력하는 학회원의 웃는 얼굴이, 부모님의 웃는 얼굴과다 인 체한다.
“좋아, 자신도, 오키나와의 발전 (위해)때문에, 어떤 노고도 싫어하지 않든지. 스승인 이케다 명예회장에 맹세한 우리 인생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하자”
그 생각이 비닐 하우스에서의 도전을 지탱했다.
89년 4월. 연구실에 가기 전, 비닐 하우스에 들어갔다.
200하치의 니가우리의 모종을, 여느 때처럼 열심히 봐 돌았다.
사카모또씨는 눈을 의심한다. 믿을 수 없었다. 현격히 암꽃이 많은 니가우리의 모종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완성된다!”
어두운 곳에 1죠의 빛을 볼 생각이었다.
암꽃이 많으면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미노루가 너무 붙으면(자) 성장할 수 없다.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벌써) 불안은 없었다. 확신이 있었다.
숨겨 92년, 수꽃 40%, 암꽃 60%의「군성」이 완성. 연구를 시작한 다음 7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95년에는, 수꽃 60%, 암꽃 40%의「시오카제」를 개발했다.
지금,「군성」은 나츠아키용,「시오카제」는 동춘용으로서 농가에서 재배되고 있다. 수량은 1·5∼1·7배에.
현내의 재배 면적도 158 헥타르(90년)에서 305 헥타르(98년)에 배증.
「식생활 문화에 국경은 없습니다. 오키나와의 니가우리를 온 세상의 사람에게 먹어 주기를 바란다」
매주 1회, 류큐 대학의 비상근 강사로서「재배학」의 강의도.
내일의 오키나와 농업의 진흥을 담당하는, 사카모또씨의 무대는 한층 더 퍼진다. 젊은 날에 맹세한 거리.
4. 병마에서 벗어났다! 생명의 이인삼각!
지금으로부터 7년 전 1994년 8월, 도내의 대학병원.
침대에 기대어 남편을 격려하는 아내가 있다. 남편 카네후사는 위암 1기. 수술이 10일 후로 다가오고 있다.
“당신 괜찮아?” 라고 말을 거는 미소가 상냥하고, 밝다. 실은--.
남편이 경영하는 운송회사를 도맡으며, 열심히 남편의 간호에 힘쓰는 코즈키 자신도 몇 일전에 같은 병마를 선고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수술을 앞둔 남편에게 그것을 알릴 수는 없었다.
카네후사씨의 암이 발견된 것은 6월 상순. 8월에 들어 수술전의 검사에 들어가는 코즈키씨에게 의사가 말했다 “모처럼이니까 부인도 검사해봅시다.”
이렇게하여, 우연히 받은 검사. 그 카메라의 영상을 보여주는 의사의 표정은 굳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위암 1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걱정하는 장녀, 묘우코(50세)가 운전하는 차에 타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먼저 죽으면…”
“혹시 남편이 알면…”
“가족과 회사는…”
공포와 불안의 암운이 마음에 떠돈다.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코즈키는 곧바로 어본존 앞에 단좌했다. 62년에 입신한 이래 계속해서 많은 고난에 부딪쳐 왔다. 지병의 지병인 만성기관지 확장증을 치료하고 싶다고, 창제와 광포에 면려하여, 증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호전. 학회활동에도 벽이 부딪히면 기원해서 하나하나 승리해왔다.
창제를 계속하는 코즈키씨의 뇌리에 신심으로 이긴 광포의 추억이 차례차례 되살아 났다.
“저 때도. 이겼다. 그때도, 이겼다, 이번도 신심으로 이겨보이자."
결의와 함께 몸에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 날부터 부인은 창제를 계속하며, 생명력이 강해지면 남편의 병실에 들어갔다.
자신에게 암선고가 있었던 4일 후, 코즈키는 지부좌담회의 석상에 있었다. 모두가 체험과 결의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코즈키도 부부의 병에 대한 도전을 적나라하게 동지에게 말했다.
그 때이다. “힘내요!”라고 어느 여성이 말했다. 회우인 키요시(69)였다.
계속해서 코즈키가 행복을 기원해온, 지역의 회우. 그 날 좌담회에서 키요시는 선언했다.
“코즈키, 무사히 돌아와요. 그러면 나, 반드시 입신할께요.”
박수가 쏟아졌다. 코즈키씨는 눈시울을 적셨다. 그날 밤, 창제 후, 코즈키는 어서를 폈다.
“화도 전환되어 행으로 되리라.”(어서 1124쪽). 밑줄이 그어진 일절을 다시 배독했다. 너무나 두려웠던 암이, 빛나는 사명의 영관으로 보였다.
8월 22일.
수술실로 들어가는 카네후사는 처의 웃는 모습을 보고 용기가 솟았다.
“당신은 절대로 괜찮아. 기원하고 있으니까.”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위를 3/4절단하는 수술은 성공했다.
카네후사가 침대에서 마취에 깨어났을 때, 아내가 웃고 있었다.
“뭔가 있는 것같다”
아내의 얼굴을 보고 남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내가 수술의 치료를 계속하는 자신의 병실 옆에 입원한 것은 9월 8일의 일이었다.
“당신, 검사했지?” 라고 갑자기 물었다.
아내가 대답했다.
“나도 위암, 수술해요. 당신도 훌륭하게 극복했기 때문에, 나도 이겨.”
그 때 처음 카네후사는 전부를 깨달았다.
씩씩하게 말하는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당신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내에게 끝없는 감사를 느끼는 남편은 경이적인 회복력으로 퇴원한다.
집에 돌아와 유동식의 양을 조금씩 늘려 마시는 남편의 뇌리에는 간병해준 아내의 미소가 강하게 새겨져 잊혀지지 않는다.
“아내가 신심이 강성하여 정말 다행이다. 이 신심은 정말로 굉장하다.”
카네후사는 불단 앞에 앉아, 기원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바쁜 일에 쫓기여 신심으로는 광포의 활동에 진력하는 아내를 따라갈 수 없다. 몸이 약한 아내는 홍교와 우호확대에 발랄하게 달리면서 창제하면서 일가의 숙명을 하나하나 극복해 왔다. 아내의 모습이 주마등과 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신심으로 일어설 차례다.”
카네후사는 이 때, 입회이래, 일찍이 없던 진지함으로 기원하기 시작했다.
코즈키씨는 수술을 앞둔 병실에서 남편이 한 말이 생애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은 내가 기원할 차례다.”
결혼생활 44년간, 가장 기쁜 말이었다. 남편의 격려가 아내의 생명력을 불러일으켰다.
9월 26일. 4시간 걸려 위를 절반 잘라냈다. 동지가 모두 창제해주었다. 수술 전에도 병실로 돌아와서도, 코즈키는 건강했다. 병실의 환자의 고뇌를 상담해주었다.
10월에 들어, 자택에서 요양하는 중에 코즈키 부부에게 기쁜 방문객이.
입신기념근행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키요시가 보고를 하러 방문해준 것이다.
“열심히 신심하겠습니다!” 그 말이 최고의 위안이었다.
그리고, 이날 회우와의 감격적인 만남이 부부에게 새로운 도전으로의 신호가 되었다. 두 사람이 모여, 좌담회에. 광포의 거점을 제공하고 있는 우리 집에 모이는 동지를 격려한다. 95년 원단에는 자택에서 일가족이 모여 신년근행회를 열었다.
도사를 보는 남편의 등에 코즈키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당신, 정말로 고마워."
위장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회복. 카네후사는 제일 좋아하는 술도.
올해, 감사의 마음으로 딸들과 함께 4세대의 홍교를 달성했다.
“어머니의 병회복이 확신을 주었습니다.”라고 광포의 정원에서 뛰어노는 4명의 아이들은 말한다.
코즈키는 대표 지원자그룹활동을 재개했다. 명칭은 “스마일회”
“어떤 역경에도 지지않는 미소로, 벗에게 용기를 주는 생활방식을”이라고 붙인 이름이다. 이 모임에는 사용이 완료된 우표등의 회수이익을 노인시설, 난민소등에게 기부해왔다.
부부가 먹은 항암제도, 코즈키는 1년으로 카네후사는 3년만 먹었다.
의사는 99년, 두 사람에게 증상이 완료됨을 고했다.
코즈키는 오랫동안, 본지의 지구신문장으로서 진력. 저녁에 벗과의 대화를 넓히고 있다.
카네후사는 지구의 슬로건 등을 진심을 담아, 크게 쓴다.
남편 79세, 아내 74세. 입회한지 40년째에 들어선 이인삼각의 인생은 지금, 최고로 충실하다.
*의사의 말- “코즈키의 위암수술을 담당했다. 카네후사의 치료 경과도 알고 있다. 두 사람 다 위암이 1기로 조기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며 , 치료경과는 매우 좋았다. 남편 다음의 수술로 아내의 부담이 컸을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밝게 치료 및 수술의 검사. 항암치료법에 임해주었다. 그 병에 대한 자세가 암을 극복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세이쿄신문 6월 9일자 5면 [도쿄 오오타구]
5. 우리 인생은 Never Give Up
토쿄 토쿠나가행붕씨.
일본제일 오더 -하녀 의 보청기 회사를 경영
프롤로그
10년 남짓으로 연간 매상 5배
보청기는 고령 사회의 필수품. 「유저씨에게 확실한 상품을」――그 때문에, 모든 부국과 제휴를 조밀하게 하는 토쿠나가씨
불황이 계속된다.
그 중에 업적을 약5배에 편 기업이 있다.
1989년(평성 원년)에 7억이었던 연간 매상이, 이 10년 남짓으로 33억으로.
토쿠나가행붕씨(61)가 이사 사장을 맡는, 보청기 메이커 「뉴 재팬 히어링 에이드(주)」(=NJH, 본사·신쥬쿠구).
1975년에, 부사장인 아내·구자씨(57)와 2명으로 창업해 26년. 현재는, 주문제품의 보청기에서는, 그 확실한 품질, 100만대를 넘는 판매 실적으로 국내 타사의 추수를 허락하지 않는다(주문제품품의 시장점유율은 18%. 기성품도 포함한 전보청기에서는, 동12%로 일본 제 2위).
「 그렇지만……업적은 어디까지나 결과론. 우리가 중시해 온 것은, “자본의 논리” 보다 “인간성의 논리”인 것입니다」
항상 유저(난청자)의 시선으로 생각해 편리한 사용에 신경써 왔다.
「이것은, 우리 아이가 가르쳐 준 경영 철학입니다」
교통사고에 맞아, 중증의 지적 장애자가 된 장남·나오키씨(32)의 덕분에 이겨 내 올 수 있던--토쿠나가씨는 뒤돌아 본다.
“어떤 역경도 불황도, 넘겨 가는 사람”이라고 사원들은 각자가 말한다. 사장의 “네바·기브업의 정신”의 원점도, 그곳에 있었다.
장면 1
나오키가 차 에 받혔다!
한 통의 에어·메일이, 보청기의 회사의 세일즈맨이었던 토쿠나가씨의 기초로 닿았다. 1972년의 것.
복지의 선진 지역, 북구·덴마크의 거래처의 기업으로부터에서 만났다. 지금까지의 상담으로, 토쿠나가씨의 역량에 감탄했는지 「꼭 새롭게 회사를 설립해, 너의 힘으로 일본에도“보청기의 판로”를 개척 해 주었으면 한다」.
숨겨 1973년에 외자계의 회사를 발족. 33세, 청년 사장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당초는 항상 도산과 이웃(옆자리). 일순간의 방심도 용서되지 않는다, 적자 조업의 매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5월 8일, 시련이 습격했다.
일도 일단락 한 저녁때, 토쿠나가씨의 데스크의 전화가 운다. 수화기의 저 편으로부터는, 구자씨의 비통한 소리. 「나오키가 차 에 받혀. 이제(벌써) 안 됨일지도……」
병원에 급행. 동공은 열어,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않는 4세의 우리 아이…….
“미안이야,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고……”. 깨닫으면(자) 마음은 창가학회에 입회하기 전의 약함, 체념의 “마을구름”에 가려지고 있었다.
――빨리 아버지를 잃어, 모자 가정이었다. 병약하고, 어둡고 과묵. 인붐비어 사안…….
대학을 졸업 후도 그 성격이 화가 되어, 모두 잘 되지 않다. 친척으로부터 신앙심을 권유받고“이 괴로움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면”이라고 창가학회에 입회. 1966년, 27세의 봄이었다.
그 직후에 구자씨와 결혼도 해, 심기 일전. 매일 아침 1 시간 반의 창제(법화경에 귀의하는 뜻이라고 주창하는 것)와 학회의 활동에 힘써, 보청기 회사의 영업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입회해 7년째의 사장 취임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다, 우리 아이의 사고였다.
장면 2
어린 목숨의 고동에 분기
해외의 기업의 정상과 회담. 통역은 2 남자의 키요히코씨가
머리를 강타. 출혈 다량으로, 의사는“수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와 포기했다.
눈감으면(자) 건강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을 무렵의 우리 아이의 모습(뿐)만이 소생한다. 머리를 괴로운 누군가 자리수시, 복도의 저 편에 많은 발소리. 나오키씨와 같은 혈액형의 학회의 남자부의 동지가 수혈에 달리고 붙여 주었던 것이다.
30명여. 「 이제(벌써) 소망은 없다」라고 의사. 「아니 나오키군은 절대 살아난다. 수혈 해 주세요」
남자부의 멤버에서도, 그곳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도 주장을 보내고 있을테니까. 괜찮아!」. 토쿠나가 부부를, 오로지 격려해 주었다.
눈물이 나왔다.
「정말로 고마워서……학회원으로 좋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따뜻한 세계는, 그 밖에 없습니다」
용기를 불러 일으킨 부부는, 밤새, 완쾌를 바라 제목을 계속 보냈다.
이튿날 아침. “ 아직, 심장이 움직이고 있다”――의사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수술을 결단했다.
하지만, 수술후도 의식은 회복하지 않는다. 열도, 40도 이상. 그러한 날마다가, 1개월, 2개월, 3개월…….
그 사이도 토쿠나가씨는 설립한 직후의 회사의 제일선에서 분투를 계속했다. 판로 개척 (위해)때문에, 사장 스스로, 지방에 몇번이나 발길을 옮겼다.
“작은 목숨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아들을 생각하면(자), 회사가 어떤 고경에 직면 하려고 질 수 없었다.
“이대로 말하면(자) 식물상태”. 그런 의사의 무거운 말을은요 돌려주도록(듯이) 필사적으로 빌었다.
그리고 사고로부터 4개월이 경과한 있는 아침의 병실……. 구자씨는, 침대 위의 나오키씨의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움직이면(자) 눈이 쫓아 온다.
「나오키!……」
비유하자가 없는 기쁨. 회색이었던 병실에 처음으로, 밝은 웃음이 흘러넘쳤다.
――퇴원 후, 회복세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중증의 지적 장애자에게.
한해반 정도 끊은 1975년의 4월, 부모의 시중드는 사람을 조건으로 초등학교 보통 클래스에 입학. 입학식으로 향하는 아들의 뒷모습에 격려해져 토쿠나가씨는 일에서 이기는 것을 단단하게 맹세했다.
장면 3
사원 2명, 4첩반으로부터 출발
그 사이, 회사의 업적도 당초의 3배 이상으로 성장해 경영도 궤도에 오른다.
겨우, “봄”이 방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다시 토쿠나가씨에게 엄격한 시련이. 모회사가 돌연, 사장 경질을 전해 왔던 것이다.
덴마크인의 사장을 자리잡아 관리 체제를 강화하고 싶은 것 같다. 토쿠나가씨에게는“이만큼 실적을 올렸는데, 어째서? ”(와)과의 생각이 모집했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지나친 낙담에 다시 일어설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때의 자신에게는……」
창제 하는 옆에 나오키씨가 새근새근 잔다. “이 아이를 위해서(때문에)도 질 수 없다”. 우리 아이의 잠자는 얼굴에 뜨거운 생각을 맹세했다. 구자씨와 상담을 거듭해 보청기의 신회사를 일으키려고 결정했다.
이 무렵, 학회의 장년부에 소속해, 조직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면서의 분투였다.
그리고 나오키씨의 입학식으로부터 3개월--. 7월에 개여 현재의 NJH를 창업. 부사장에 오른 구자씨와“두 명 삼각”에서의 스타트였다. 사무소는, 자택의 4첩반일실.
회사의 발전을 빌어, 토쿠나가씨는 매일 아침, 반드시 1 시간 반의 창제를. 입회(1966년) 이래의 일과이다. 기원을 근본에 모두에 진지하게 임해 왔다.
창업해 5, 6년이 경과했을 무렵. 세계 최고봉의 메이커, 주문제품 기술에서는 제일의 미국, 베르토사로부터 기술 제휴의 이야기를 걸 수 있었다.
85년, 일본에서는 NJH만의 독점 기술 제휴. 수입 판매가 주요했던 당시의 일본에서는, 오더 기술의 도입은 선구적이었다.
“오더 보청기”의 제조·판매가 안정되는 것에 따라, 업적도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갔다.
장면 4
「인간성의 존중」을 내걸어
토쿠나가씨는, 회사의 팜플렛 속에서, 나오키씨와 함께 살아 온 날들에 접해 「어떠한 (분)편도, 둘도 없는 존재이면(자), 스스로 체험해, 실감해왔습니다」라고 꿰맨다.
그러므로, 「당사는 인간성의 존중을 근간에, 난청자를 위한 보청기의 제조 판매를 통해, 사회 복지에 공헌」해 나가고 싶다, 라고.
그런 책임감, 상냥함에 사원 전원이 마음을 합치고 있다--. 회사를 방문하면(자), 도달하는 곳에서 느껴진다.
창구 상담을 담당하는 사람은 「고령자, 장애자의 분들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 기쁨과 자랑을 가져, 임하고 있습니다」.
보청기 제조에 종사하는 기술 담당자는, 「일각이라도 빨리 유저씨의 수중에 닿도록(듯이), 주문 2일 후에는 물건을 발송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토쿠나가씨자신도 그 선두에 서, 전국, 전세계를 날아다닌다.
「사장은“고객 제일”의 자세를, 일이 있을 때 마다 가르쳐 줍니다. 접객·영업으로부터, 제조에 임하는 정신까지……. 우리 사원은, 일치단결해 그 마음을 실천 자제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스즈키 타카시 전무.
오랜 세월 , 거래를 계속해 온 「오키나와 보청기 센터」의 히가시 히데코 사장도, 절대의 신뢰를.
「토쿠나가 사장은 매우 인간미 넘치는 (분)편으로, 게다가, 일에 대해서는 엄격, 한편 엄정합니다. 항상“사용하는 사람의 측에 선다”와의 시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좋은 상품의 제공을 목표로 해지고 있기 때문(에)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뢰를 해 교제 할 수 있습니다」
토쿠나가씨는 지금 다시 맹세한다.
「 나는 장남과 함께 살면서 「학회 정신」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 가족과 사회 (위해)때문에, 약한 입장의 분들을 위해서(때문에), 곧바로 걸어 가고 싶다」 ..
---휴먼스토리-6월호 창가학회뉴스중에서.
6. ★
정말 싫었던 자신을 바꾸려고 진심으로 기원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의 온정이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도 솟아났습니다. 그러자, 나 자신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부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니미 타에미(新美妙美,소아과의사) 아이치현 출신. 어릴 때부터 천식으로, 매년 긴 입원생활을 계속했다. 그 자기 자신의 체험을 살려서, 소아과의사를 희망했다. 신쥬(信州)대학의학과를 졸업하고, 츄우신마츠모토(中信松本)병원에서 근무. 여자부 지역부여자부장
매일이 무서웠다. 지기 싫어서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만큼 다루기 어렵고 버릇없었던 아이는 없었겠지라고, 저 자신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초등학교의 저학년일 때에 있었던 충격적인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어떤 범죄를 당해, 그 범인에게,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마. 말했다가는 죽여 버리겠어! 라고 협박을 받았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떨어야했던 공포심에서,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것이 PTSD(심적외상후(心的外傷後)스트레스障害)와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보통 때는 그러한 사건을 잊어버리는데, 가끔 그 사고를 떠올리고 공포감이 되살아나서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수년간에 걸쳐서 저를 속박하고 있었습니다.
범인에 향한 공포는, 언젠가부터 어른에게 향한 공포, 자신이외의 사람에 대한 공포,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자신감 상실 등으로 변해져 갔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반동으로 타인을 공격하게 되었고, 자신이외의 사람들은 모두다 적이라고 조차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함부로 욕을 하고 내뱉고, 초등학교 때에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면서 지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제가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남자아이들에게도 “전염병균”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자아이들 속의 친구들과도 인간관계가 삐걱거려서, 반에서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정말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학교에 가지 않으면 지게 되는 것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용기를 주세요! 라고 진지하게 기원했습니다. 저를 바라보면서, “너, 기분 나빠. 죽어버려”라고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무서워서, 무서워서 엉엉 울면서 기원했습니다.
그럴 때, 갑자기, 제가 초등학교 때 반 남자아이들을 괴롭혔던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아, 그 아이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런 나쁜 뜻이 없이 행했던 일이 이렇게도 남들을 상처 입히는 것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저지른 죄의 비열함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 닫았을 때, 그 때부터 다음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부터의 행동으로 미래를 바꿔가는 것이다! 난 도망가지 않아! 용기를 내서 절대로 미래를 열어갈 꺼야! 어린 저의 마음속에서도 그렇게 결의했습니다.
그 때, 무엇보다도 절 지탱해 주었던 것이 이케다 선생님께서 쓰신 동화 『태평양에 걸린 무지개』였습니다.
그 책에는, 무엇을 하더라도 ‘용기의 길’과 ‘겁쟁이의 길’이 있다. 바른 것, 향상하는 것, 남을 배려하는 행동은 용기가 필요하고, 편하지 않다. ‘용기의 길’은 좁은 오르막길로서 험할지도 모르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밝고 넓어져서, 그것은 태양을 향해서 똑바로 뻗어가고, 깨끗한 공기와, 빛깔이 고운 꽃들에 둘러싸인 길에서는, 저 멀리 먼 곳에부터, 상쾌하게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 책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읽어서, 저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기원해 갔던 것입니다.
저 자신도 아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성장에 관련되는 일이 하고 싶다.
제가 가장 힘들어 하고 있을 때, 항상 변함없는 태도로 저를 지켜봐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분이, 가족 이외에도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창가학회 미래부 담당이셨던 여자부인 언니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화가 나는 말을 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더라도, “나는 타에가 굉장히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라고 언제나 저를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이, 저의 주치의이셨던 N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최악의 환자로, 병을 고치려고 하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약을 안 먹고 천식 발작을 일으킨다든지, 입원해서도 규칙을 어기기만 했습니다. 소등시간을 안 지키고, 병원을 빠져나가서 군것질을 한다든지...... N선생님은 제가 몇 번이나 약속을 어겨도, 저를 포기하지 않고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 자신도, 제가 믿을 수 없어서, 자기혐오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를, 저 이상으로 믿어주시고, 감싸 안아 주셨던 이 두 분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안도감을 되찾을 수 있었고, 저 자신을 그리고 남을 믿어보자고 하는 기분이 들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을 바꿔보자고 진지하게 기원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지금까지 저를 돌봐 주셨던 분들을 따뜻함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그러자, 저 자신도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속에서부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 사건이 있었던 때부터, 말 할 수 없었던 공포감이 되살아나는 것이 두려워 졌습니다. 그러한 고민들을 통해서, 저는 아이들의 성장에 관계되는 일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벽에 부딪친다든지, 불안이나 공포, 분노에 빠져들어 갈 때, 친근한 입장이 되어서 격려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사나 보육사, 심리 카운슬러 등, 아이들과 관련된 일은 여러 가지로 고민했을 때, 역시 저에게 있어서 특히 친근감이 있었던 것이 소아과 병동이었고, 소아과 의사라고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소아과 의사를 목표로 해서, 저는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쥬대학(信州大學)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저 자신의 “숙업”을 “사명”으로 바꿔서
저는 대인관계가 굉장히 어설픕니다. 어딘가부터 남들과 “벽”을 만들어 버립니다.
불법대화와 가정방문을 통해서, 아무리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성장을 기원해 가는 것으로, 서로 공감할 수 있고, 마음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믿고, 성장을 기원해서, 대화를 계속해 가는 중에, 그 사람도 바뀌며, 자신도 성장해 갈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섰을 때, 지금은 소아과 의사로서 아이들과 접하는 것에서도, 굉장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천식이나, 비장병, 당뇨병 등의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비굴해져 있거나, 자신감을 상실하거나, 버릇이 없어지거나,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자포자기의 상태로 되어, 자기 자신을 잘 컨트롤 할 수 없는 이차적인 장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고, 따뜻하게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런 아이들 자신의 문제해결능력을 끄집어내서, 그 아이에 알맞은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소아과의 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을 닫고 있었던 아이들도, 그 아이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다가갈 때, 마음을 열어가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년전에 저 자신과 겹쳐져서, 아무리 봐도 남 일 같지가 않고, 절대로 이 아이를 성장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생겨납니다. 여러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저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 자신의 “숙업”을 “사명”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불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금은 감사한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 차 있습니다.
★
상식적으로는, 저의 행동은 무모한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이 신앙과 함께할 때, 그러한 도전은 절묘한 균형의 최고의 도전이 되어 주었고, 최고의 가치를 창조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창가학회는 누구라도, 자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을, 현실의 행동 속에서 가르쳐주는 “인생대학”입니다.
이시카와 에이지(石川英司, 콤 테크널러지 연구소대표), 1970년생, 오사카출신. 생후 1개월 만에 선천성골형성불전증(先天性骨形成不全症)이라고 진단받음. 고등학생 때부터 PC의 세계에서 최고가 되기를 목표로 함. 26세의 젊은 나이에 정보공학기술사보시험(情報工學技術士補試驗)에 합격하고, 연구자로 됨. 『아이, 지구박람회(愛․地球博)』에서는, 개발했던 「입체카메라」를 전시했음. 1970년 입회. 창가학회 남자부 방면부남자부장
많은 분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자에 대한 느낌은 대부분 닮아 있습니다! 확실하게 말해서 저는, “무모한 장애자”이겠지요. 그런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야 말로, 창가학회 이외에는 없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청년부시절에 창가학회에 입회하셨습니다. 한번 유산을 경험했던 어머니는, “사명이 있는 아이로”라고 기원해서 저를 낳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도 한 달도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저는, 허벅지 뼈가 부러진 상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받은 진찰받은 결과, 병명은 ‘선천성골형성부전증’. 태어나면서부터 뼈가 약해서, 골절을 반복하는 난병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했던 골절은, 대강 세어보아도 50회가 넘습니다. 원인은 불명. 치료방법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안아주기, 돌려 눕히기만 해도 뼈가 부러집니다. 그런 저의 장래를 걱정하셔서, 어머니는 가족 전체가 자살하려고 생각하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기원했을 때 환경은 확 바뀌어버린다.
중학교 1학년 때, 저희 집은 오사카에게 미에현(三重縣)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장애인 학교에 다녔던 저도, 그것을 기회로 일반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저가 맛보았던 것은, 외계인이 된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3학년이 되어 처음 보았던 중간고사의 성적은, 학년의 끝에서 3번째였던 상황.
인문고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던 저의 뇌리에는, 창가학회 중등부 담당자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살았던 지역에서는, 매주 중등부의 회합이 있었습니다. 담당자님은 어떤 때에도 저를 찾아오셔서, 저를 업고 회합에 대려가 주셨습니다.
“기원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 이 신심이다.”
그때까지 막연했던 기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진지하게 기원하면서 공부를 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저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교과서의 내용이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왔습니다. 어느 덧 성적도 전교 20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성적이라면 어떤 학교라도 들어갈 수 있다”라고 담임선생님에게 확답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희망했던 학교에 저의 입학 여부를 타진해보니, “책임을 질 수가 없다”, “휠체어인 학생을 받아들일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라고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정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이었습니다. 창가학회의 품안에서 따뜻하게 자라왔던 저에게 있어서, 이때 처음으로 “장애”라고 하는 벽을 실감했습니다.
중등부의 회합에 참가를 해도, 낙심하고 있는 저에게 담당자님은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그런 환경을 바꿔버리는 거야. 그런 것이 가능한 멋진 신심이라고.”
고향에 있었던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를 찾아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길보(吉報)가 찾아왔습니다. 공립나바리니시 고등학교(公立名張西高等學校)의 개교가 예정보다 빠르게 실시되어서, 수험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고등학교는 문교부가 지정하는 「연구개발학교」로서, 재미있는 수업과정이 특색이었습니다. 일반 인문과정 이외에도, 영어과, 정보과를 병설. 그 중에서도 정보과는 전국에서도 다섯 곳 만 설치되었을 정도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저에게 있어서, 꿈에서라도 그리던 학교였습니다. 그것도 휠체어로 이동이 가능한 교내 시설에서도 상당히 고려가 된 곳입니다. 더욱이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어머니를 사무원으로 고용해주신다고 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좋은 조건이 겹치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입니다. 더군다나, 제가 바랐던 것이 전부 그곳에 모여 있다고 여길 정도로 환경이 확 바뀌어버렸던 것입니다.
불법에는 인간을 여유롭게 가르치고, 사회를 변혁하는 힘이 있다.
고등학교 때에는 학교에 은혜를 갚으려고 했기에, 도내 최연소로 제2정보처리기술자시험에 합격.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한편, 저의 마음속에서는 “무엇을 위해서 신심을 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신앙에 대한 한 발 더 나아간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문을 가진 채로, 또 다시 간호가 필요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토요하시기술과학대학(豊橋科學技術大學)에 진학을 해서, 자취를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 겨우 자취 생활이 익숙해 졌을 때,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창가학회 학생부의 그룹장으로서 임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소속 부원은 11명. 그 중에서 6명이 기숙사의 2~4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시카와군, 멤버의 가정방문은 일층에 있는 사람만 해도 돼요”라고, 휠체어인 저를 생각해 주셔서 부장님은 그렇게 말씀해 주셨지만, 저의 기분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을 위해서 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기뻐서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받았던 역직을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하고 싶다. 무모라고 해도, 저는 계단을 오르려고 결심했습니다.
휠체어를 내려서, 목발을 등에 지고, 네 발로 기어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4층의 멤버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40분이나 흐른 뒤였습니다. 벨을 누르자,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져 버렸을 정도입니다.
겨우 찾아갔던 멤버가, 신심을 통해서 사람이 변한 듯이 성장에 갔습니다. 더욱이 그 멤버에게 촉발을 받아서 다른 멤버가 변해 갔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하면서, 모든 것이 선의 방향으로 율동적으로 전환해가는 불법의 제호미를 처음으로 맛보았습니다.
그러자, 동시에 그럼 멤버의 모습 속에서, 저는 예전의 저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지금이 있기 까지 저를 업고, 여러 회합에 대려가 주셨던 많은 분들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갈 수 없었을 때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격려로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장애에 지지 않는 마음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솟아오르는 감사의 마음을 주저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더욱 더 의욕을 강하게 해서, 계단을 기어 올라가서 멤버를 방문해갔습니다. 그러한 저의 가정 방문이, 무엇보다 훌륭한 재활훈련이 되었습니다. 제활 훈련은 성장과 더불어 부하(負荷․體重)가 더해지고, 잃어버렸던 기능을 되돌리는 것이 어렵게 되어 집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휠체어 생활을 어쩔 수 없이 지내야했던 제가, 20살이 넘어서 목발로 걸을 수 있게 되었던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를 창조해 가는 일생을 보내고 싶다.
대학원을 졸업 후에는, 대기업의 정보 시스템부에 취직. 오픈 시스템에 관한 일에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뒤, 2000년 12월에 독립. 「컴 테크놀러지 연구소」를 설립해서, 화상처리에 관한 소프트 프로그램을 개발을 비롯한 연구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간호가 필요한 상태에서 시작한 자취나, 일류 기업을 그만두고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상식적으로는, 저의 행동은 무모한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이 신앙과 함께 할 때,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절묘한 균형인 최고의 도전이 되었고, 최고의 가치를 창조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창가학회는 누구라도, 자신이 사회를 변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을, 현실의 행동 속에서 가르쳐 주는 “인생대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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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있기에 불행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것은, 번뇌에 지는 것. 벽을 극복하는 힘은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신앙. 항상 도전해 가는 도전자이고 싶다.
모리시마 나오야(森嶋尙也,미용사). 1968년, 아이치현(愛知縣)에서 태어남. 3살 때에 왼쪽 눈을 실명. 원근감이 없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극복해서, 독자적인 컷 스타일을 확립. 월 500명의 지명을 받게 되는 카르스마 적인 미용사로 됨. 2003년 꿈꿔왔던 자신의 가게, 「ASIAN HAIR」를 오픈. 1968년 입신. 창가학회 남자부 부부장
왜 내 왼쪽 눈은 다른 아들과 다르노!
친구의 손끝이 왼쪽 눈에..... 세 살 때 입었던 상처가 원인이 되어서, 나의 왼쪽 눈은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왼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현실을 알게 되었던 것은, 초등학교 신체검사 때 이었습니다. 집 거울 앞에서 저의 얼굴을 봤을 때, 왼쪽 눈은 사시가 되어 친구들과 달랐습니다.
“왜 내 왼쪽 눈은 다른 아들과 달라요?”
저의 질문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눈이 빨갛게 되셨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부모님을 괴롭혀드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미용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배경에는, 저의 왼쪽 눈에 대한 걱정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격심한 두통과 구토에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갔던 적도 있습니다. 원인은 오른 쪽 눈의 혹사. 친구들과 함께 들어갔던 야구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야구도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다니.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살아남기 위한 기술을 구하려고 하는 기분은 남들보다 더 강했다고 기억합니다.
“기술만 있으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단다.” 미용사인 친척분의 한 마디로 저는 결심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미장원에서 일하면서 전문학교(1년제)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1년간의 인턴과정도 무사히 마치고, 국가시험도 패스. 미용사로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려고 했을 때, 저는 엄연한 현실과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 저에게는 원근감이 거의 없습니다. 칼날 끝이 살짝 귀에 닿아 있는 것을 모르고, 손님의 귀에 상처를 내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주의를 해도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눈썹을 밀어버린 적도, 이마에 상처를 입힌 적도 있었습니다. 미용사의 가위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습니다.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와서 가게 안이 대소동이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더 이상 가위를 보는 것도 무서웠습니다. 강에 가위를 던져 버리고 나서, 도망치듯이 해서 가게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때부터 프레스 공장 직원, 내장업, 꼬치가게, 커피 숍 직원 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열중할 수 없었고, 일도 길게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허무함만이 점차 커져갔습니다.
끝임 없는 연습과 도전으로 독자적인 컷 스타일을 습득
이런 저에게 다시 한 번 한 사람의 미용사가 되기 위해서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은, 창가학회의 회원이었던 미용사, S선배님과의 만남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간질병을 극복한 뒤, 미용사 면허를 취득, 독립을 쟁취해낸 S선배의 체험은, 제에게 다시 한 번 싸울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끝까지 기원하는 거야. 왼쪽 눈의 핸디캡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어.”
S선배의 미용실에서 연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기술은 현장에서 밖에 습득할 수 없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몸으로 익히는 것입니다.
가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악몽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런 공포를 끊어내겠다고 결심하고, 필사적으로 기원했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만족할 만큼 기원하고 난 뒤에는, “극복할 수 있다”라는 확신이 불쑥불쑥 솟아났습니다. 더욱이, “핸디캡이 있는 만큼, 몇 배나 노력해야지.”라는, 명확한 도전과제가 보였습니다.
명함을 만들어서, 미용 모델이 되어주실 분을 찾아서 돌아다녔습니다. 역 입구, 오락실, 술집, 카페 등. 천장을 준비했던 명함은 2~3달 만에 동이 났습니다.
모델이 되어주신다는 분이 계시면, 언제․어디라도 달려갔습니다. 가게를 마친 후에 혼자 남아서 연습을 날이 밝도록 계속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밤 1시, 혹은 2시가 되는 날도 흔히 있었습니다. 쉬는 날에는 컷 모델 연구회에도 참가. 열성적으로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눈썹을 밀어버린다든지, 귀에 상처를 낸다든지 하는 실패는 셀 수가 없습니다.
“아야! 야 임마, 어딜 자르고 있는 거야!”라는 호통을 듣고, 침울해갈 때마다, 신앙을 탄력으로 삼아서 더욱 용기를 내서, 다시 한 번 명함을 돌렸습니다. 그런 속에서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서 있는 위치를 어떤 방향으로 돌리자 저만의 원근감이 잡혔던 것입니다. 거리에 뿌렸던 명함은 벌써 2만장에 도달했었습니다.
“모리시마군, 11시에 예약하신 고객님. 자네가 담당하게.”
아침 미팅을 할 때, S선배에게 지명을 받았던 저는, 처음으로 한 분의 손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컷이 끝나자, 종업원들 모두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S선배는, 소리를 죽여가면서 눈이 빨갛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S선배는 “저 사람은 핸디캡이 너무 커요. 미용사는 절대 무리에요.” “저 녀석만은 절대로 고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라고, 걱정하는 종업원들이나 다른 미용사들의 말을, 계속 가슴속에 묻어두시고, 저를 계속해서 격려해주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3~4년의 연수로 미용사로서 데뷔를 하지만, 저는 6년이 걸렸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6년이 있었기에 확실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신적인 강함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지 않는 것. 번뇌에 대한 도전이야 말로 신심의 제호미(醍醐味)
이 일을 하는 중에서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담당했던 손님에게 지명을 받는 것입니다. 미용사로서 데뷔해서 1년이 지났을 때부터, 저에게도 지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친구에게 소개받고서 미용실까지 찾아주신 여성 고객님도 계셨습니다. 어느 덧, 많은 달에는 500명의 손님에게서 예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97년부터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내어서 젊은 후배들에게 기술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2000년에 아이치현(愛知縣)의 이미용교육단체(理美容敎育團體)가 개최하는 헤어 쇼에서는, 500명이 넘는 미용사들 앞에서 저의 컷 기술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03년에는 소망했던 독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미용사의 세계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항상 자신과 싸워가면서 겨우 살아남는 가혹한 세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지 않는 자신이 되는 것. 항상 도전해 가는 도전자로서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은, 번뇌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장애가 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번뇌에 지는 자신이 불행한 것이라고, 지금은 마음속에서 실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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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은 괴로울 때야 말로 가장 중요하다. 소리를 드높여 외치고 싶다! “기원해 가면, 미래가 점점 변해간다고. 간단하게 말해서 좋은 방향으로 간다오. 나다운 삶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해 진다!”고
오오노 마나미(大野大洋, 어부). 1973년, 야마구치현(山口縣)출신. 오카야마(岡山)상과대학교 졸업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어부가 되었다. 주로, 돔 어업을 중심으로 조업중. 만선일 경우에는 한 번의 그물질로 2톤이나 건져 올린 기록을 가짐. 자기 자신의 조업 노하우를 항상 개방하고 있음. 1974년 입회. 창가학회 남자부 부장
절망의 바닥에서 신앙에 눈을 뜨고, 인생의 두 번째 스타트를 시작하다.
어부가 된지 8년. 저는, 매일 아침 5시가 되면 세토나이카이(瀬戶內海)에 배를 내고, 고치망(吾智網)을 사용해서 해가 질 때까지 조업을 합니다. 고지망은 돔 그물이라고도 불리는데 잡는 고기의 주종이 도미입니다.
걸어둔 그물에 고기가 많이 걸리는 때에는, 정말 기분이 좋고, 감사의 기분이 가슴 속에 가득합니다. 반대로, 빈 그물일 때는 물론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런 때야 말로 바닷가의 우울한 기분을 날려버릴 정도의 기세로 동료 어부들을 격려합니다. 어떤 때라도 명량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있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저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어부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얼른 얼른 일 몸에 안 익힐래!"라고, 야단맞았습니다. 어떨 때에는 침몰선에 20만 엔(약 200만원)이나 하는 그물이 걸려버려서 망가져 버린 일도 있습니다. 좀처럼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아서 낙담하고 있을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째에, 생각지도 못했던 만선. 그것도 한 번의 그물질에 병어가 380kg이나 건져 올렸습니다. 돈으로 따져서 120만 엔(약 1200만원)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될수록 어느 샌가 유혹에 빠져서, 밤이면 밤마다 놀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빚은 크게 불어나고, 가정은 파단되고, 그 결과 이혼.
그 때가 되어서 처음으로 저는 저 자신을 되돌아오고,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던 거야?”
라고, 자기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 속 깊이 후회했습니다. 부끄러웠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성질이 급한 편이었기에, 충고를 받게 되면 참을 수가 없게 되어서, 벌컥 화를 내게 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 저의 곁으로 창가학회 남자부 선배가 가끔 방문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모처럼 몇 번이나 찾아와 주었기 때문에, 때로는 가볼까 하고 생각해서, 본부간부회의 위성중계회장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이케다 명예회장의 모습과 스피치를 보게 된 순간,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왔습니다.
“어디까지라도 신념을 관철해 가는 것이다. 지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앞으로 앞으로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저에게 향한 격려와 같이 느껴져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이렇게 훌륭한 분이셨던가. 좋았어,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자. 신심으로 승부를 보는 거야.”
라고, 결의. 인생을 크게 방향전환하기 위한 스타트를 끊었던 것입니다.
할 의욕과 지혜로 어군(魚群)을 탐지. 지역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존재로.
그렇게 결의를 담아서 조업에 나가게 되자, “고기를 많이 잡을 꺼다!”라고 하는 할 의욕과 “많이 잡기 위해서” 아이디어가 점점 떠올랐습니다.
고기떼는, 수온, 먹이, 조류, 기후, 고기의 습성 등에 의해서 다릅니다. 저는, 여러 가지 데이터를 모아서 분석하고, 어군탐지기를 사용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정해서 그물을 내리면, 도미나 병어 때가 적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나 두 번이 아닙니다.
한 번 그물질로 병어를 2500kg이나 잡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어업량의 20배 이상. 혼자서는 건져 올리는 것이 무리였기에, 근처에서 조업하고 있던 어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건져 올렸습니다. 은색으로 빛나는 고기가 족족 배의 수조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에는 단지 열심히 하기만 했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만, 나중에 “아, 이렇게나 많이 있었구나.”라고 놀랐습니다. 항구에서도 모두가 대 소동이었습니다.
재기를 결심해서 3년째, “광선유포의 거점이 되는 우리 집을”이라고 기원하던 중에, 좋은 조건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게 되도록 상담이 진행되고, 척척 순조롭게 3층 건물의 74평의 저의 집을 지울 수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같이 사는 처와 알게 되어서, 따뜻한 가정을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은 최고의 기쁨입니다.
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는 수산회사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시장으로 출하됩니다. 제가 위탁하고 있는 수산회사가 “우량출하회사(優良出荷會社)”로서 히로시마시(廣島市)에서 표창을 받았습니다. 저만의 성과가 아닌데도 사장님께서, “오오노군의 덕분이에요”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해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이케다 선생님, 남자부의 선배님들, 그리고 가족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의 스피치로 격려받고, 선배님은,
“대지에 쓰러진 사람은, 대지를 딛고 일어서는 거야. 신심으로 일어서자!”
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기운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더욱이,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어업협동조합 청년부의 활동에도 참가. “한일어업교류단”의 야마구치현대표로 뽑혀서, 한국을 방문했고, 친선관계를 다졌습니다.
또, 고지망에 자주 삼치가 걸리기 때문에 낚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야마구치현어정과(漁政果)에서 “삼치, 병어, 도미전문 어망”의 인허가(認許可)를 특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삼치의 조사를 겸하고 있어서, 후계자로서 힘내주길 바란다고 하는 뜻이 실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처럼 손에 넣기가 힘든 허가증으로서, 매매하려고 할 때에는 100만 엔(약 천만 원)정도 들어갑니다.
자신다운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세토나이카이(瀬戶內海)는 전반적으로 불황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어획량이 나오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야말로,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심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도망가 버렸겠지요. 신심은, 힘들 때야말로 가장 중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제 스스로 말하기에는 좀 부끄럽지만, 급한 성격도 많이 누그러져서, 조그만 한 일에 있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심을 하면, 미래가 점점 더 변해가면서, 간단하게 말하면 좋은 방향으로 변해간다!”
그렇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창가학회의 활동 속에서 가장 자신에 어울리는 삶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요?
어부라고 하는 일은, 매일이 정말 힘듭니다. 기후의 파악이나 건강관리가 필요하고, 한 발 실수하면 생사에 관련된 위험과도 인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지망이라고 하는 것은 오(나 자신)의 지혜라고 쓰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지혜여하에 따라서 실적이 쌓여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제호미(醍醐味)로서, 더욱이 신심을 가장 멋지게 살려가는 어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업에 대해서,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목표로, 후계자를 늘리고, 어장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저 자신이 성장하고 싶다고 결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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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의 단가가 싸다든가, 국산 원목이 팔리지 않는다든가, 안 돼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새로운 방도를 찾아서 개척정신을 불태우자. 도망가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서자. 지지 않는다.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것이, 신앙에서 내가 배운 것이다.
후지이 쇼우키치(藤井正吉, 목재업). 1966년, 군마현(群馬縣)출신. 어릴 적부터 산일을 가장 열성적으로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몇 번인가의 인생의 고비를 넘어서, 27살 때부터 목재업에 종사. 지금은 대자연을 상대로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충실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1966년 입신. 창가학회 방면 남자부장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기에 나는 계속해서 해간다.
저는 군마현 북부의 산간부인 하루나쵸(棒名町)에서 목재업을 하고 있습니다. 임업(林業)에 종사하게 된 것은 제가 2대째입니다. 임업이라고 하면, 「3D」업종을 넘어서, 「5D」라고 할 정도로 위험하면서도 힘든 일의 하나입니다. 급격한 경사면에서의 벌목 등을 3일 정도 계속해서 해보면, 발의 감각이 없을 정도로 지칩니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에 큰 병을 앓았습니다. 갑자기, 온 몸에 보라색의 반점이 가득 나타났던 것입니다. 반점을 만지기만 하면 아팠기 때문에 옷을 입는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복통과 미열도 계속되었습니다. 급성자반병성심염(急性紫斑病性腎炎)이라고 진단 받고 그 날 바로 입원. 9개월간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그 뒤 퇴원을 했지만, 완쾌는 되지 않았고, 식사제한, 운동제한이 붙어 있는 “무리하지 않는 생활”이라는 조건을 건 퇴원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학교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운동도 할 수 없고, 수업도 따라 갈 수 없었던 상황에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싫어지고, 꾀병을 부려서 학교를 가지 않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자기혐오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는 약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이대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라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남중부 부원에게 라고 하면서 받아왔단다.”라고 하시면서, 창가학회 명예회장인 이케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지를 건네주셨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지지마라 결코 전진 그리고 전진이다”
그 때 저의 가슴에 멋지게 날아와 박힌 말이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나의 일을 알고 계신다.” 그렇게 느꼈던 저는, 불단 앞에서 앉아서 30분, 1시간 계속해서 제목을 불렀습니다.
아버지와 형이 입을 모아서, “같이 목재업을 안 할래?”라고 말해주었을 때는, 제가 27살 때였습니다. 지역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벌써 결혼도 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지금은 고성능의 기계가 들어와서, 안전하게 되었고, 체력적으로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날씨에도 구애받지 않는단다.”라고 말했습니다. 형은, “형제가 힘을 모아서 가업을 일으켜 가자.”라면서, 열성적으로 권해왔습니다.
잡목의 벌채, 가지치기, 정원 가꾸기까지 모든 것을 완수하는 일과, 가지치기와 정원 가꾸기 등, 확실히 편리한 중장비가 도입되었던 같았습니다. 그 중장비를 공동으로 쓰기 위해서 현내(縣內)의 목재업 종사자들이 “고기임업기동대(高崎林業機動隊)”라는 조합도 만들었습니다.
그때가지 하던 일에 충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답답해하고 있을 때였기에, 매력적인 권유였습니다. 형의 강한 권유에 떠밀리는 듯이, 저는 그러한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부자간에 세 사람으로 새로 “유한회사 후지이목재(藤井木材)”를 시작했습니다.
회사일은, 국유림이나 공유림, 민간 소유의 숲 등을, 산 1개에 얼마로 입찰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낙찰받은 산에 들어가서, 수령 35년 이상의 삼나무나 노송나무 등의 나무를 벌채하고, 건축재로서 조재(造材)해 갑니다. 확실히 고성능의 중장비를 쓰면, 사람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를 체인 톱으로 자르는 것보다 10배는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인건비의 삭감도 가능했고,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장비가 들어갈 만한 넓은 산길이 있는 산은 점점 적어지고, 결국은 체인 톱을 이용해서 목재를 벌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졌고, 더욱이 값싼 외국산 목재에 밀려서, 국산 목재의 수요가 점차 줄어가기만 했습니다. 원목단가가 땅에 떨어지고, 재목의 판매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가 쌓였던 것이었겠지요. 그러던 중에 미열과 복통이 계속된다고 생각했더니, 그 악몽과 같은 보라색 반점이 다시 온 몸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자반병성심염의 재발이었습니다. 바로 입원해서, 검사해 봤더니, 오줌에서 보통보다 20배의 단백질이 나왔습니다. 이 이상 악화된다면, 인공투석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진지하게 기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저도 계속 완쾌를 목표로 기원해 나갔습니다. 제가 소속된 지역의 회원님들도 기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보라색 반점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완치된 것은 아닙니다. 2주일 정도로 퇴원을 했지만, 의사 선생님은, “당분간은 무조건 안정하셔야 합니다. 일도 바꾸시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저의 몸을 걱정해서, “목재업은 앞날도 잘 안보이고 하니까, 회사를 닫자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쓸쓸한 듯 한 얼굴을 봤던 저는, 중학교 때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이케다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지지마라 결코 전진 그리고 전진이다.” 체력적으로는 불안도 있었습니다만, 신앙으로 극복하자고 결정하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 할 꺼요.”
라고, 확실하게 말해버렸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기뻐하며 웃는 얼굴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안 되는 이유를 찾는 것보다 새로운 길을 탐색하고 싶다.
저는, 어느 사이엔가 대자연 속에서 일을 하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산은 좋은 것이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남자다운 일이란다.”라고 흔히 말하시는데, 그런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해서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예상했던 방향으로 나무가 넘어갈 때의 손맛과 상쾌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중장비가 들어올 수 있는 곳에서도, 일부러 중장비를 쓰지 않고, 체인 톱으로 나무를 벌목하는 적이 많아 졌습니다.
숲은, 목재 등을 생산해 내는 것은 물론이고, 자연적인 물 저장고이기도 하며,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서 지구 온난화 방지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한 산림을 건강한 상태로 보존시키는 것은, 역시 사람이 손을 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이 식림했던 침엽수의 숲은, 잡초베기, 제벌(除伐), 간벌(間伐) 등을 자주 돌봐줘야 합니다. 방치해 놓으면, 가지가 너무 무성해 져서, 햇빛이 밑에까지 통하지 않게 되어서 숲이 황폐해집니다. 뿌리도 약해지기 때문에 홍수나 폭설에 산사태를 일으키는 위험도 커지게 됩니다.
국내산 원목이 팔리지 않게 될수록, 지금은 긴 시간을 방치해두었던 숲에 들어가서, 산을 정리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산림정비사업의 보조금으로 일을 하고, 산에서 반출되는 간벌목재가 팔리면 산의 소유자에게도 환원하는 등 환영받고 있습니다.
원목의 단가가 싸기 때문에, 국내산 원목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등, 안 되는 이유를 들어서 그만둬 버리는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도망쳐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고통에서 도망치지 말고 딛고 일어선다. 그것이 신앙을 통해서 제가 키워갔던 신념입니다.
산 하나하나, 손을 대서, 바람이 통하고, 빛이 지면에 닿게 될 때까지 깔끔하게 된 숲을 바라볼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요즘은 자연을 상대로 하는 스케일이 커다란 일에, 저는 기쁨과 긍지와 사명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마라 결단코 앞으로 그리고 앞으로”라는 지침을 가슴에 새겨서, 산림의 재생에 힘을 기우리려고 결의합니다.
★
신앙에 의해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났고, 주위의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게 되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의 길이 개척되어 간다. 나의 꿈은 위험한 장소의 작업이나, 사람의 간호에 도움이 되는, 아톰과 같은 로봇을 만드는 것.
이마카와 히로키(今村弘樹, 정보과학 공학박사). 1973년, 나가노현(長野縣)출신. 창가대학 공학부 졸업 후, 호쿠리쿠(北陸)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에 진학. 1년간의 미국 카네기 메론대학 방문연구원을 지나서, 박사과정수료. 현재, 나가사키(長崎)대학 공학부 전교. 1973년 입회. 창가학회 남자부 부장.
타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때, 불가사의하게도 좋은 성적이 나왔다
건담을 비롯해서 라이덴, 텐지맨, 선벌칸 등, 저의 소년시절은 TV의 대형 로봇이 넘쳐나서 대활약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건담의 열성 팬이었습니다.
뭐라 말해도 로봇이 좋아서, 어떤 상태였냐면, 로봇의 모형을 만들어서 놀았습니다. 과자 상자를 연결해서 커다란 로봇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서, 중학교 3학년 때는 얇은 동판과 플라스틱의 얇은 파이프와 조각, 전차의 리모컨을 사용해서, 손이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장래 희망은 절대로 건담과 같은 로봇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가장 큰 추억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미래부 총회였습니다. 나가노연구소장에서 열렸습니다만, 고향인 나가노현의 창가학회 고등부 부원을 대표해서, 저와 다른 한명이 이케다 선생님께 소설 “인간혁명”의 10권 세트를 받았던 것입니다. 1권의 속지에 “정의왕”이라는 휘호가 있었습니다. 다른 부원에게는 “용기왕”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기대가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때 창가대학에 공학부가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공계를 목표로 했던 저는, 반드시 공학부에 진학하려고, 열심히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았던 날들의 중첩은 생각이상으로 컸고, 결국 불합격이 되어,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나고야(名古屋)에서 혼자서 하숙을 시작했고, 재수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곁에 살고 있던 남자부인 K선배와 알게 되었습니다. “점심 밥 사 줄테니깐 우리 집으로 오렴”이라고 듣고, 점심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러자, K선배는 함께 기원하자고 했습니다. 그런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 자신을 위해서만 기원했던 저는, 점차로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부모님과 누나와 동생, K선배를 비롯해서 지역의 창가학회의 많은 분들의 덕이라고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감사의 일념이 생겨났고, 주위의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도록 되었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그 때부터 성적이 급격히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창가대학 공학부에 멋지게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봇 연구를 하고 싶다. 그런 일념으로 대학원에 진학을 결의.
제가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로봇의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하는 꿈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4학년의 진로 상담의 때, 몇 분이나 앉아계신 교수님들 앞에서 저는,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진학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의 성적을 보시더니, 교수님들은 “뭐라고?”라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저의 성적은 정말 나빴던 것입니다. 학과장 교수님이 대표로 나서서 “이마무라군, 자네, 이 성적으로 정말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인가?”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말 속에는, 쓸데없는 노력은 그만두는 편이 좋아요 라고 하는 충고의 기분도 드러났습니다.
저는, 결의에 불타올랐습니다. 반드시 창가대학의 대학원에 가겠다고 결의하고, 그 날부터 하루 9시간의 공부에 도전했습니다만, 결과는 불합격.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원으로의 진학을 포기하지 못하고, 창가대학 이외의 대학원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호쿠리쿠(北陸)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을 발견했습니다. 국립으로, 연구 환경은 굉장히 좋은 곳입니다. 그것도 들어가기는 쉽지만, 졸업하기는 어려운, 쉽게 말해서 유럽식의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대학원에 시험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멋지게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해서부터 오전에는 수업, 오후 이후에는 오직 공부만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외국의 전공서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 날에는 더욱 더 밤샘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반년 뒤에 연구실로 배속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로봇의 제어, 특히 두발 주행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제어 쪽의 연구실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제 3지망이었던 전자 화상 쪽의 연구실로 배속되었습니다. 조금은 충격이었지만, 금방 나 자신은 전자 화상을 다루는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혼다가 두발 주행로봇을 만들어 버린 지금은, 혹시 제어 쪽의 연구실에 들어갔더라면, 연구의 목적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앙을 근간으로 하면,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께 받았던 “정의왕”의 의미를 깊게 사색하고 싶다
저의 연구 테마는, 동화상해석(動畵像解析)이라고 하는 것으로, 동화 속에서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가를 휘도지(輝度値)의 정보를 사용해서 해석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봇에게 적용해서 말해보면, 로봇의 AI(인공지능)의 인식기능에 도움이 되는 연구입니다.
연구를 진행함에 따라서, 저는 박사과정으로 진학해서 더욱 더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박사과정은 논문을 몇 편이나 적어야 하는 우수한 연구자가 가는 곳으로서, 저 자신은 어떻게 하더라도 무리겠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도 교수님에게, “자네는 취업을 하는 것 보다, 연구자가 되는 쪽이 어울리는 것 같군. 박사과정으로 진학해 보면 어떤가?”라는 말을 듣고,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일 년간 미국의 카네기 메론 대학에 유학을 해서, 동화상해석의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K교수님과 연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성과를 두 편의 논문으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박사논문을 집필하려고 할 때, 지도교수님의 연구의 진행방향과 의견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정리하려고 해도, 방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려서, 이제 박사과정을 중퇴해 버리려고 생각했을 때, 창가학회 학생부의 대학원생의 모임인 대학원생회의 멤버가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자, 의장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저도 학위를 받기 까지가 정말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거꾸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 벽을 극복했을 때, 절대로 경애가 크게 열립니다. 또 같은 고민을 가진 후배에게 희망이 되어 갑니다. 반드시 신앙을 실천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노력하는 것이, 뒤를 잊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강하게 실감했습니다. “좋았어, 어떤 고난이 있어도 논문을 완성하자.”라고, 이전보다도 더욱 더 진지하게 기원했습니다.
그 때부터 지도교수님께서 저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고, 논문 집필이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수료시험도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지나갔고, 발표, 질의응답을 무사히 끝내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바랐던 국립대학의 조교의 자리가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중에 무슨 일이 있든, 최종적으로는 제가 원했던 대로 되었습니다. 이 신앙은 정말 대단하다고, 저는 확신을 더욱 깊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의 꿈은 인간과 같은 로봇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물을 바르게 인식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알맞게 움직여 간다. 이른바 우주소년 아톰과도 같은 로봇입니다. 그러한 로봇을 만들게 되면, 위험한 장소에서의 작업이나 인명구조, 노인이나 장애를 가진 분들의 간호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항상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같은 기능이나 능력을 가진 로봇이라도,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할 것인가, 역방향으로 사용할 것인가로 전혀 다른 결과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과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존중을 위한 확실한 철학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자신의 삶을 포함해서, 고등학생일 때 이케다 선생님께 받았던 “정의왕”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더욱 더 깊게 사색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 ★
신앙에 의해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났고, 주위의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게 되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의 길이 개척되어 간다. 나의 꿈은 위험한 장소의 작업이나, 사람의 간호에 도움이 되는, 아톰과 같은 로봇을 만드는 것.
이마카와 히로키(今村弘樹, 정보과학 공학박사). 1973년, 나가노현(長野縣)출신. 창가대학 공학부 졸업 후, 호쿠리쿠(北陸)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에 진학. 1년간의 미국 카네기 메론대학 방문연구원을 지나서, 박사과정수료. 현재, 나가사키(長崎)대학 공학부 전교. 1973년 입회. 창가학회 남자부 부장.
타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때, 불가사의하게도 좋은 성적이 나왔다
건담을 비롯해서 라이덴, 텐지맨, 선벌칸 등, 저의 소년시절은 TV의 대형 로봇이 넘쳐나서 대활약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건담의 열성 팬이었습니다.
뭐라 말해도 로봇이 좋아서, 어떤 상태였냐면, 로봇의 모형을 만들어서 놀았습니다. 과자 상자를 연결해서 커다란 로봇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서, 중학교 3학년 때는 얇은 동판과 플라스틱의 얇은 파이프와 조각, 전차의 리모컨을 사용해서, 손이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장래 희망은 절대로 건담과 같은 로봇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가장 큰 추억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미래부 총회였습니다. 나가노연구소장에서 열렸습니다만, 고향인 나가노현의 창가학회 고등부 부원을 대표해서, 저와 다른 한명이 이케다 선생님께 소설 “인간혁명”의 10권 세트를 받았던 것입니다. 1권의 속지에 “정의왕”이라는 휘호가 있었습니다. 다른 부원에게는 “용기왕”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기대가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때 창가대학에 공학부가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공계를 목표로 했던 저는, 반드시 공학부에 진학하려고, 열심히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았던 날들의 중첩은 생각이상으로 컸고, 결국 불합격이 되어,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나고야(名古屋)에서 혼자서 하숙을 시작했고, 재수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곁에 살고 있던 남자부인 K선배와 알게 되었습니다. “점심 밥 사 줄테니깐 우리 집으로 오렴”이라고 듣고, 점심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러자, K선배는 함께 기원하자고 했습니다. 그런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 자신을 위해서만 기원했던 저는, 점차로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부모님과 누나와 동생, K선배를 비롯해서 지역의 창가학회의 많은 분들의 덕이라고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감사의 일념이 생겨났고, 주위의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도록 되었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그 때부터 성적이 급격히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창가대학 공학부에 멋지게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봇 연구를 하고 싶다. 그런 일념으로 대학원에 진학을 결의.
제가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로봇의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하는 꿈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4학년의 진로 상담의 때, 몇 분이나 앉아계신 교수님들 앞에서 저는,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진학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의 성적을 보시더니, 교수님들은 “뭐라고?”라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저의 성적은 정말 나빴던 것입니다. 학과장 교수님이 대표로 나서서 “이마무라군, 자네, 이 성적으로 정말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인가?”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말 속에는, 쓸데없는 노력은 그만두는 편이 좋아요 라고 하는 충고의 기분도 드러났습니다.
저는, 결의에 불타올랐습니다. 반드시 창가대학의 대학원에 가겠다고 결의하고, 그 날부터 하루 9시간의 공부에 도전했습니다만, 결과는 불합격.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원으로의 진학을 포기하지 못하고, 창가대학 이외의 대학원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호쿠리쿠(北陸)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을 발견했습니다. 국립으로, 연구 환경은 굉장히 좋은 곳입니다. 그곳은 들어가기는 쉽지만, 졸업하기는 어려운, 쉽게 말해서 유럽식의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대학원에 시험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멋지게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해서부터 오전에는 수업, 오후 이후에는 오직 공부만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외국의 전공서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 날에는 더욱 더 밤샘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반년 뒤에 연구실로 배속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로봇의 제어, 특히 두발 주행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제어 쪽의 연구실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제 3지망이었던 전자 화상 쪽의 연구실로 배속되었습니다. 조금은 충격이었지만, 금방 나 자신은 전자 화상을 다루는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혼다가 두발 주행로봇을 만들어 버린 지금은, 혹시 제어 쪽의 연구실에 들어갔더라면, 연구의 목적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앙을 근간으로 하면,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께 받았던 “정의왕”의 의미를 깊게 사색하고 싶다
저의 연구 테마는, 동화상해석(動畵像解析)이라고 하는 것으로, 동화 속에서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가를 휘도지(輝度値)의 정보를 사용해서 해석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봇에게 적용해서 말해보면, 로봇의 AI(인공지능)의 인식기능에 도움이 되는 연구입니다.
연구를 진행함에 따라서, 저는 박사과정으로 진학해서 더욱 더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박사과정은 논문을 몇 편이나 적어야 하는 우수한 연구자가 가는 곳으로서, 저 자신은 어떻게 하더라도 무리겠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도 교수님에게, “자네는 취업을 하는 것 보다, 연구자가 되는 쪽이 어울리는 것 같군. 박사과정으로 진학해 보면 어떤가?”라는 말을 듣고,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일 년간 미국의 카네기 메론 대학에 유학을 해서, 동화상해석의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K교수님과 연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성과를 두 편의 논문으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박사논문을 집필하려고 할 때, 지도교수님의 연구의 진행방향과 의견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정리하려고 해도, 방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려서, 이제 박사과정을 중퇴해 버리려고 생각했을 때, 창가학회 학생부의 대학원생의 모임인 대학원생회의 멤버가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자, 의장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저도 학위를 받기 까지가 정말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거꾸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 벽을 극복했을 때, 절대로 경애가 크게 열립니다. 또 같은 고민을 가진 후배에게 희망이 되어 갑니다. 반드시 신앙을 실천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노력하는 것이, 뒤를 잊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강하게 실감했습니다. “좋았어, 어떤 고난이 있어도 논문을 완성하자.”라고, 이전보다도 더욱 더 진지하게 기원했습니다.
그 때부터 지도교수님께서 저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고, 논문 집필이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수료시험도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지나갔고, 발표, 질의응답을 무사히 끝내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바랐던 국립대학의 조교의 자리가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중에 무슨 일이 있든, 최종적으로는 제가 원했던 대로 되었습니다. 이 신앙은 정말 대단하다고, 저는 확신을 더욱 깊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의 꿈은 인간과 같은 로봇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물을 바르게 인식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알맞게 움직여 간다. 이른바 우주소년 아톰과도 같은 로봇입니다. 그러한 로봇을 만들게 되면, 위험한 장소에서의 작업이나 인명구조, 노인이나 장애를 가진 분들의 간호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항상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같은 기능이나 능력을 가진 로봇이라도,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할 것인가, 역방향으로 사용할 것인가로 전혀 다른 결과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과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존중을 위한 확실한 철학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자신의 삶을 포함해서, 고등학생일 때 이케다 선생님께 받았던 “정의왕”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더욱 더 깊게 사색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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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는, 저의 행동은 무모한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이 신앙과 함께할 때, 그러한 도전은 절묘한 균형의 최고의 도전이 되어 주었고, 최고의 가치를 창조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창가학회는 누구라도, 자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을, 현실의 행동 속에서 가르쳐주는 “인생대학”입니다.
이시카와 에이지(石川英司, 콤 테크널러지 연구소대표), 1970년생, 오사카출신. 생후 1개월 만에 선천성골형성불전증(先天性骨形成不全症)이라고 진단받음. 고등학생 때부터 PC의 세계에서 최고가 되기를 목표로 함. 26세의 젊은 나이에 정보공학기술사보시험(情報工學技術士補試驗)에 합격하고, 연구자로 됨. 『아이, 지구박람회(愛․地球博)』에서는, 개발했던 「입체카메라」를 전시했음. 1970년 입회. 창가학회 남자부 방면부남자부장
많은 분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자에 대한 느낌은 대부분 닮아 있습니다! 확실하게 말해서 저는, “무모한 장애자”이겠지요. 그런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야 말로, 창가학회 이외에는 없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청년부시절에 창가학회에 입회하셨습니다. 한번 유산을 경험했던 어머니는, “사명이 있는 아이로”라고 기원해서 저를 낳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도 한 달도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저는, 허벅지 뼈가 부러진 상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받은 진찰받은 결과, 병명은 ‘선천성골형성부전증’. 태어나면서부터 뼈가 약해서, 골절을 반복하는 난병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했던 골절은, 대강 세어보아도 50회가 넘습니다. 원인은 불명. 치료방법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안아주기, 돌려 눕히기만 해도 뼈가 부러집니다. 그런 저의 장래를 걱정하셔서, 어머니는 가족 전체가 자살하려고 생각하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기원했을 때 환경은 확 바뀌어버린다.
중학교 1학년 때, 저희 집은 오사카에게 미에현(三重縣)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장애인 학교에 다녔던 저도, 그것을 기회로 일반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저가 맛보았던 것은, 외계인이 된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3학년이 되어 처음 보았던 중간고사의 성적은, 학년의 끝에서 3번째였던 상황.
인문고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던 저의 뇌리에는, 창가학회 중등부 담당자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살았던 지역에서는, 매주 중등부의 회합이 있었습니다. 담당자님은 어떤 때에도 저를 찾아오셔서, 저를 업고 회합에 대려가 주셨습니다.
“기원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 이 신심이다.”
그때까지 막연했던 기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진지하게 기원하면서 공부를 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저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교과서의 내용이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왔습니다. 어느 덧 성적도 전교 20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성적이라면 어떤 학교라도 들어갈 수 있다”라고 담임선생님에게 확답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희망했던 학교에 저의 입학 여부를 타진해보니, “책임을 질 수가 없다”, “휠체어인 학생을 받아들일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라고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정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이었습니다. 창가학회의 품안에서 따뜻하게 자라왔던 저에게 있어서, 이때 처음으로 “장애”라고 하는 벽을 실감했습니다.
중등부의 회합에 참가를 해도, 낙심하고 있는 저에게 담당자님은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그런 환경을 바꿔버리는 거야. 그런 것이 가능한 멋진 신심이라고.”
고향에 있었던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를 찾아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길보(吉報)가 찾아왔습니다. 공립나바리니시 고등학교(公立名張西高等學校)의 개교가 예정보다 빠르게 실시되어서, 수험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고등학교는 문교부가 지정하는 「연구개발학교」로서, 재미있는 수업과정이 특색이었습니다. 일반 인문과정 이외에도, 영어과, 정보과를 병설. 그 중에서도 정보과는 전국에서도 다섯 곳 만 설치되었을 정도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저에게 있어서, 꿈에서라도 그리던 학교였습니다. 그것도 휠체어로 이동이 가능한 교내 시설에서도 상당히 고려가 된 곳입니다. 더욱이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어머니를 사무원으로 고용해주신다고 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좋은 조건이 겹치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입니다. 더군다나, 제가 바랐던 것이 전부 그곳에 모여 있다고 여길 정도로 환경이 확 바뀌어버렸던 것입니다.
불법에는 인간을 여유롭게 가르치고, 사회를 변혁하는 힘이 있다.
고등학교 때에는 학교에 은혜를 갚으려고 했기에, 도내 최연소로 제2정보처리기술자시험에 합격.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한편, 저의 마음속에서는 “무엇을 위해서 신심을 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신앙에 대한 한 발 더 나아간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문을 가진 채로, 또 다시 간호가 필요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토요하시기술과학대학(豊橋科學技術大學)에 진학을 해서, 자취를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 겨우 자취 생활이 익숙해 졌을 때,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창가학회 학생부의 그룹장으로서 임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소속 부원은 11명. 그 중에서 6명이 기숙사의 2~4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시카와군, 멤버의 가정방문은 일층에 있는 사람만 해도 돼요”라고, 휠체어인 저를 생각해 주셔서 부장님은 그렇게 말씀해 주셨지만, 저의 기분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을 위해서 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기뻐서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받았던 역직을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하고 싶다. 무모라고 해도, 저는 계단을 오르려고 결심했습니다.
휠체어를 내려서, 목발을 등에 지고, 네 발로 기어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4층의 멤버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40분이나 흐른 뒤였습니다. 벨을 누르자,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져 버렸을 정도입니다. 겨우 찾아갔던 멤버가, 신심을 통해서 사람이 변한 듯이 성장에 갔습니다. 더욱이 그 멤버에게 촉발을 받아서 다른 멤버가 변해 갔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하면서, 모든 것이 선의 방향으로 율동적으로 전환해가는 불법의 제호미를 처음으로 맛보았습니다.
그러자, 동시에 그럼 멤버의 모습 속에서, 저는 예전의 저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지금이 있기 까지 저를 업고, 여러 회합에 대려가 주셨던 많은 분들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갈 수 없었을 때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격려로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장애에 지지 않는 마음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솟아오르는 감사의 마음을 주저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더욱 더 의욕을 강하게 해서, 계단을 기어 올라가서 멤버를 방문해갔습니다. 그러한 저의 가정 방문이, 무엇보다 훌륭한 재활훈련이 되었습니다. 재활 훈련은 성장과 더불어 부하(負荷․體重)가 더해지고, 잃어버렸던 기능을 되돌리는 것이 어렵게 되어 집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휠체어 생활을 어쩔 수 없이 지내야했던 제가, 20살이 넘어서 목발로 걸을 수 있게 되었던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를 창조해 가는 일생을 보내고 싶다.
대학원을 졸업 후에는, 대기업의 정보 시스템부에 취직. 오픈 시스템에 관한 일에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뒤, 2000년 12월에 독립. 「컴 테크놀러지 연구소」를 설립해서, 화상처리에 관한 소프트 프로그램을 개발을 비롯한 연구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간호가 필요한 상태에서 시작한 자취나, 일류 기업을 그만두고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상식적으로는, 저의 행동은 무모한 것이었겠지요. 하지만, 이 신앙과 함께 할 때,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절묘한 균형인 최고의 도전이 되었고, 최고의 가치를 창조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창가학회는 누구라도, 자신이 사회를 변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을, 현실의 행동 속에서 가르쳐 주는 “인생대학”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도쿄 창가대학 졸업생 타테와키라고 합니다.
오늘은 저의 체험을 바탕으로 창가대학 창립자이신 이케다 선생님의 철학이 제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창가대학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십일년전 저는 창가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입학식때 창립자 이케다선생님께서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도전의 왕이 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저는 ‘나에게 있어 진정한 도전이란 무엇인가’라고 사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아리 활동? 학교축제? 자원봉사? 학회활동? 아니면 외국으로 나가는 것? 즐거운 일을 선택할 기회는 많았습니다.
가치를 창조하는 교육 이것이 바로 창가교육입니다. 창가교육이 의미하듯이 창가대학의 모든 활동은 개인의 가능성개발을 장려합니다. 창가대학에는 학생들의 인격과 능력을 촉진하는 다양한 활동이 많이 있습니다. 창가대학에 입학한 후 저는 스스로 제 인생이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가학회와 이케다선생님을 둘러싼 환경을 생각해보면 비열한 닛켄종과 험담거리의 잡지에 의한 편견과 비방이 난무했습니다. 그러한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창립자 이케다선생님께서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생님께서는 신뢰로서 창가대학 학생들을 계속 격려하셨고, 당신의 철학으로 학생들을 감화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행동과 스피치에 깊이 감동되어 저는 열심히 학업에 면려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당시의 어리석은 사회상황을 바꾸고 싶었고 창립자 이케다선생님의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창가대학의 훌륭한 학풍은 제가 성장할 수 있는 자극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실증을 낼 것인가? 이는 제겐 대단히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오랫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저는(복자로 태어났지만 저는 복운이 없었습니다) 첫째, 보통정도의 부자는 되자. 둘째,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공인회계사(CPA)시험에 도전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CPA시험은 일본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중 하나입니다. 합격자의 평균연령은 25-26세 정도입니다.
당시 저는 아직도 가난한 학생이었기에 돈이 별로 없어 수업이 끝나면 일을 해야했기에 보통학생들 보다 공부할 시간이 적었습니다. 저의 투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하루 8-10시간씩 공부하고, 2-3시간씩 제목도전에 했으며 일주일에 삼사일 정도는 저녁에 일을 했습니다. 정말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속에서 저의 정신적 동지 그리고 도전의 동지라 할 수 있는 창가대학의 모든 친구들은 많은 격려를 보내주었습니다. 창가대학의 정신은 바로 인간주의이기때문입니다.
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년간의 투쟁후 스무살 때 드디어 최연소합격자로 CPA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저는 도쿄의 PRICE WATER HOUSE 라는 회사에 입사해 7년간 근무하면서 재무담당 감사팀장이 되었습니다. 굉장한 공덕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5월부터 KEDO한반도 에너지개발 기구 뉴욕지사에서 재무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KEDO는남북평화전략을 위한 국제기구로서 대북경수로 건설을 지원함으로써 북한의 핵무기개발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회계사로서는 보기드물게 남북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실은 제가 KEDO에서 일하고 뉴욕에 오게 된 결심 역시 이케다선생님의 철학에 의해서입니다. 처음KEDO에서 저를 고용하고자 했을 때 ‘뉴욕생활은 도쿄생활보다 힘들거야. 국제공무원이 되면 월급도 줄어들텐데..’라는 등의 성가신 생각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제목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케다선생님의 평화제언을 읽고 또 읽으며 제목을 불러나갔습니다.
2000년 1.26 평화제언에서 선생님께서는 “남북한의 평화야말로 나의 오랜 숙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화제언을 읽고 또 읽고 계속 제목에 도전하면서 이케다 선생님께서 한국사람들을 존경하고 ,한국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창가대학의 모토중 하나인 “세계평화의 요새가 되라”를 떠올렸습니다. 강성한 제목을 부르면서 이제는 나도 이케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한국사람들을 위해 기여해야 할 때 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소아적인 행복에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세계평화의 요새가 되어야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케다선생님의 지도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좋은 소식을 한 가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8월 창가고등학교 교사들이 뉴욕으로 미국 역사를 공부하기위해 왔습니다. 일본교과서는 근대사를 많이 다루지 않습니다. 특히 한일 양국간의 비극의 근대사는 300페이지가 달하는 책중 약 3페이지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가고등학교는 한국의 역사에 관해 자세한 사항에까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한반도는 21세기 세계평화의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전부터 창가고등학교에서는 한글어 연구회가 구성되었고 창가초등학교에서도 많은 어린이들이 한글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이케다 선생님의 1.26 평화제언의 파동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자리에 계신 많은 분들 혹은 모든 분들이 창가고등학교를 방문, 학생들을 격려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정말로 멋진 일이 아닙니까? 그렇게 된다면 학생들에겐 굉장한 격려가 될 것이고, 이는 세계평화를 위한 예행연습이 될것입니다. 저와 함께 창가고등학교를 방문하시지 않겠습니까!
창가대학으로의 입학은 제 인생을 확연히 바꾸었습니다. 실력개발은 물론이며 저는 제 인생의 기반을 다질수 있었습니다. 이케다선생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저는 꿈을 가질수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위해 전력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게는 타인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위해 제 일생을 바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창가대학과 이케다선생님으로부터 배우며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미국 창가대학의 사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창립자 이케다선생님께서는 “미국창가대학의 사명은 공헌의 삶을 살아갈 세계시민의 연대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체험담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창가대학 졸업생들이 이룩해 낸 실증은 수없이 많습니다. 창가대학에 가는 것 그것은 학생들에게 최고의 영원한 보물이 될 것이고, 훌륭한 인격을 연마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창가대학에 가고자 하는 미래부들을 뜨겁게 격려하고 도와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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