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인간혁명 제30권 제1장 대산 67-68

2021. 5. 1. 20:44佛法 .SGI

신 인간혁명 제30권 제1장 대산 67-68

 

[대산 67]

 

 오후 5시 반, 야마모토 신이치가 미네코와 함께 차로 소카(創價)대학교를 출발했다.

 신이치는 학회본부로 돌아가지 않고 요코하마에 있는 가나가와문화회관으로 갔다. 

 세계로 이어지는 요코하마 항구에서 세계 광선유포의 새로운 투쟁을, 진정한 사제(師弟)의 투쟁을 일으키자고 결심했다.

 오후 7시, 요코하마에 도착하니 이미 땅거미가 져 어두웠다.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 아래 항구에 보존되어 있는 화객선 하키와마루가 보였다. 건조한 시기는 1930년으로 창가학회를 창립한 해다.

 학회는 창립아래 '일곱개 종'을 모두 울리고 지금 다시 대항해를 시작한다.

 신이치는 겨우 한숨 돌린 느낌이었다.

 측근 간부가 "오늘 아침 신문에 선생님의 이름이 실렸습니다." 하고 알려주었다.

 그 기사는 요미우리신문이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갤럽과 제휴해서 실시한 미일 양국의 생활의식조사 결과로 일본국민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일본인'의 상위 20명 가운데 6위에 신이치의 이름이 올랐다. 요시다 시게루, 노구치 히데요, 니노마야 손토쿠, 후쿠자와 유키치 그리고 쇼와천황 다음이 야마모토 신이치였다.

 '현존하는 민간인으로는 1위이고 종교계에서는 유일하다'고 한다. 신이치는 극적인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자 불가사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지의 큰 기대와 힘찬 응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3주 전에 고(故) 저우언라이 부인인 덩잉차오에게 회장을 사임을 생각이라고 전했을 때 덩잉차오가 "인민이 지지하는 한 그만두면 안 됩니다."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라! 신의 보답하라! 계속 투쟁하라!는 격려였음에 틀림없다. 

 '어떠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나는 계속 싸우겠다! 이제부터 본문(本門)의 투쟁을 시작하자!'

 신이치는 이곳에서도 붓을 들어 '공전(共戰)'이라고 썼다.

 그리고 '제자여, 나와 함께 일어서라!'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이렇게 협서했다.

 "1979년/ 5월 3일 밤/ 생애에 걸쳐/ 나는 광포를/ 부동(不動)의 마음으로/ 결의하노라/ 진실한 동지가 있음을/ 확신하며/ 합장"

 

[대산 68]

 

 

 

 칠흑 같은 하늘이 차츰 자줏빛으로 바뀌더니 반도의 능선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이윽고 황금빛 광채가 동녘 하늘을 달리고 바다가 반짝반짝 빛났다. 상쾌한 5월 아침이 밝았다.

 5월 5월, 신이치는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새벽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날은 '어린이 날'로 국경일이자 '창가학회 후계자의 날'이다.

 신이치는 가나가와의 간부에게서 현지 학회원이 자신이 소유하는 대형 요트로 요코하마항 주변을 안내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30분 정도 요트를 타가로 했다. 배 이름은 '21세기'호다. 바다에서 보는 가나가와문화회관도 아주 멋졌다. 이 바다가 태평양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21세기 세계광포의 광활한 바다가 보이는 듯했다. 신이치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다.

 신이치는 하루 전날인 4일에는 가나가와현의 공로자 대표와 간담하고 5일에도 초창기 무코지마지부, 조토지부 대표들의 모임인 무코지마회, 조토회 멤버들과 대화하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공로자를 중심으로 한 격려의 차바퀴는 이미 기세 좋게 돌기 시작했다.

 신이치는 가능하다면 21세기를 짊어질 후계의 청년부, 미래부 회합에도 참석해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려하고 싶었다. 또 가나가와문화회관 앞에 있는 야마시타공원에는 날마다 수많은 학회원이 모여들었다. 그러한 동지들과 함께 회합을 열고 힘껏 칭찬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래 영원히 남겨야 할 창가(創價)의 혼을 후계의 제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기자!

 이날 신이치는 광선유포의 스승인 도다 조세이의 진정한 제자로서 굳은 다짐을 붓에 담아 단숨에 써 내려갔다.

 "정의" 그 오른쪽 아래에는 "나 홀로 정의의 깃발 드노라.' 하고 썼다.

 '진정한 승부는 이제부터다! 어떠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나는 단연코 싸우겠다. 단 혼자가 되더라도. 사제불이의 마음으로 반드시 승리해내겠다. 정의는 어디까지나 광선유포의 대도(大道)를 꿋꿋이 나아가는 일이다!'

 <제30권 제1장 끝>

 

신 인간혁명 제30권 제2장 자복(雌伏)

 (※자복(雌伏): 미래의 활약할 날을 참고 기다린다는 뜻)

 

[자복 1]

 

 자, 대화하자!

 벗의 눈동자에 서린/ 슬픔과 괴로움을 들여다보고

 힘겹게 꺼낸 말에 귀 기울여/ 용기를 내어

 격려의 대화를 시작하자!

 동고(同苦)의 날개를 활짝 펴고/ 힘찬 생명으로

 희망과 정의의 철학을 말하자!

 용솟음치는 정열과/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확신으로/ 끈기 있게

 공감의 가락을 연주하자!

 

 자, 대화를 이어가자!

 한 인간에게/ 내재하는 힘은 무한하다!

 한 사람이 발심하면/ 벗에게서 벗에게로/ 소생의 파동을 넓혀

 마침내 만파를 불러일으킨다./ ‘일(一)은 만(萬)의 어머니'(어서 498쪽)라고 하셨다.

 우리는/ 대화로 / 사람들의 심전(心田)에 행복의 씨앗을 심고

 이 세상에 태어난 존귀한 사명을 일깨운다.

 대화로/ 마음과 마음을 잇고 체계를 이어

 난공불락인/ 항구 평화의 성새(城塞)를 쌓는다.

 자, 오늘도 대화하자!

 

 제3대 회장을 사임하고 명예회장이 된 신이치는 1979년 5월 3일 본부총회에서 주조 기요시 회장을 중심으로 신체제가 출발하는 것을 지켜본 뒤 세계광포의 새로운 웅비를 위해 행동을 시작했다. 동지를 격려하는 대화에 힘쓰고 또 세계평화의 흐름을 열기 위해 각국의 대사와 지성인을 만나 대화했다.

 대화의 힘이 시대를 여는 평화의 힘이 된다.

 

[자복 2]

 

 신이치는 학회본부에 가급적이면 가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회장이 된 주조 기요시를 비롯한 집행부가 마음껏 지휘하기를 바랐고 자신이 본부에 있으면 무의식 중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의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이치의 가장 큰 바람은 뒷일을 부탁한 수뇌들이 창가의 위대한 사제정신을 이어받아 자신들의 힘으로 학회를 운영하고 회원을 지도해 광선유포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일이었다. 또 차대를 짊어질 청년들의 성장이었다.

 신이치는 깊이 기원하며 사자는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린다는 옛말을 떠올렸다. 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깊은 벼랑 아래로 떨어뜨려 살아 남은 새끼만 키운다는 속설이 있다. 자녀가 대성하기를 바란다면 일부러 시련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지금 신이치도 같은 심정으로 후계의 분투를 지켜보았다.

 주간지 등 언론 매체가 매주 신이치의 회장 사임을 다뤄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학회를 줄곧 비판해온 평론가들이 나와 학회는 점차 망할 것이라는 등 억측에 불과한 무책임한 보도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이치는 가나가와문화회관, 다치카와문화회관, 시즈오카연수원 등 가는 곳마다 학회원을 보면 말을 건네고 격려했다. 기념촬영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광선유포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스스로 정한 일을 하루하루 묵묵히 행동으로 옮겼다. 태양의 운행과 같은 이러한 전진 속에 인생의 영광도 광포의 승리도 있다.

 5월 11일, 신이치는 다치카와문화회관에서 일천, 월천과 대화하는 심정으로 시를 읊었다.

 

 서쪽에 가득한 석양/ 동쪽에 만월 환희 빛나도다

 하늘은 황혼에 물들어 상쾌하고/ 이 한순간의 고요함

 원초(元初)의 생명 한폭의 그림

 내 경애 역시/ 자재무애(自在無擬)와 닮았구나

 

[자복 3]

 

 신이치는 세계를 잇는 평화의 길을 열기 위해 각국의 식자나 대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5월 19일에는 친선교류를 위해 중일우호의 '망화(明華)'를 타고 교류단 단장으로서 일본을 방문한 중일우호협회 리오청즈 회장과 도쿄 내 호텔에서 회담했다.

 대화에서 신이치는 어떠한 위치에 있더라도 중일의 평화 . 문화 . 교육 교류를 추진하여 양국의 우호에 더욱 힘쓰고 싶다는 결의를 피력했다. 그리고 만대에 걸쳐 무너지지 않는 우호를 다지려면 민간 차원의 끈끈한 유대가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 리오 회장이 신이치에게 중국을 다시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이치에게는 제5차 방문이 된다

두 사람은 제1차 중국 방문 이후로 수차례 대화를 나누며 깊은 우정을 맺었다. 랴오 회장은 4년 뒤인 1988년 6월에 타계한다. 신이치는 그 이듬해에 랴오 회장의 가족을 조문하고 징푸춘 부인 그리고 아들을 만나 랴오청즈의 존귀한 생애를 기리며 대화했다.

 2009년 10월, 중국 광저우시에 있는 중카이농업공정학원이 신이치와 아내 미네코에게 각각 명예교수 칭호를 수여했다 ‘중카이'는 쑨원의 맹우이자 랴오청즈의 아버지 랴오중카이를 말한다. 이 대학의 연원인 중카이농공학교는 랴오중카이와 함께 신중국 건설을 위해 살아온 부인 허샹닝이 설립했다. 더욱이 이 대학은 랴오청즈와 신이치의 연구센터를 만들어 2010년 11월에 개소식을 열었다.

 신이치가 심은 우의의 어린나무는 21세기라는 넓은 하늘을 향해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있었다.

 신이치는 랴오청즈 회장과 회담하고 이어서 5월 22일에는 소련의 노보스티통신사 국제부장과 논설위원 그리고 대사관 관계자와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대화했다. 미소제2차전략무기제한협상(SALT II)과 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 문학 교육 문제 등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신이치에게 소련을 방문해 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항구 평화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노력하고 행동하는 일이 불법자(佛法者)의 책무다.

 

[자복 4]

 

 신이치는 평화우호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5월 25일에는 잠비아의 M.K.치프 마판자 주일대사와 회담하고 29일에는 중국문예계 지도자 저우양 부부와 대화했다. 6월도 뉴질랜드의 R.M.밀러 주일대사와 나이지리아의 B.A.T. 발레와 주일대사와 대화를 펼쳤다.

 신이치는 특히 아프리카 관계자와 대화하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21세기는 ‘아프리카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랜 세월 강대국의 식민지로 지배당해 빈곤과 기아에 허덕인 아프리카가 평화와 번영을 이루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통감했기 때문이다.

 신이치는 해외 요인과 회담하는 한편 일본의 지식인과도 대화했다.

 또 틈틈이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의 쓰루미구와 고호쿠구 도쿄의 이타바시구와 주호구. 노시마구. 고가네이시 그리고 고다이리시 등 가는 곳마다 광선유포를 위해 함께 땀을 흘린 동지의 집을 찾아가 격려했다.

 광선유포의 사제가 마음을 굳게 결합하면 어떠한 폭풍우에도 창가의 스크럼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려면 흉금을 터놓은 대화가 필요하며 그러한 생명의 촉발이 사명을 자각하게 하고 신뢰를 키운다.

 신이치는 초창기 동지를 만나면 꼭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인생은 총마무리를 할 때가 가장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활약하고 빛나는 역사를 남겼다 해도 말년에 퇴전한다면 결국은 패배한 인생이 되고 만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비유컨대 가마쿠라에서 교토까지는 십이일의 도정이니라 그런데 십일일 남짓 걸어가서 이제 일일을 남겨두고 걸음을 멈춘다면 어떻게 수도의 달을 바라볼 수 있겠느뇨"(어서 1440쪽) 하고 말씀하셨다.

 '생애구도' '생애도전' '생애투쟁'의 정신을 지속해야만 상세(三世) 영원히 빛나는 생명의 승리가 있다.

 

- 화광신문 제1207호 (2017.4.14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