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젊어지고 복은 쌓일 것이외다

2021. 4. 23. 21:03佛法 .SGI

행복과 평화를 창조하는 지혜

 

제2부 인간혁명의 실천 

 

제13장 "나이는 젊어지고 복은 쌓일 것이외다"

 

이 장을 읽기 전에

니치렌 대성인(日蓮大聖人)은 "나이는 젊어지고 복은 쌓일 것이외다."(어서 1135쪽) 하고 문하를 격려하셨습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늙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더 젊게 생명을 빛내고 복덕을 풍족히 쌓으면서, 서로 격려하고 함께 인간혁명하는 승리의 인생을 장식한다, 이것이 묘법(妙法)을 수행하는 창가가족의 인생 여행입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오랜 세월 신심에 힘쓴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열심히 분투하는 한 가족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세심하게 격려하셨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비록 뇌에 새긴 기억이 사라졌다 해도 생명에 새긴 복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힘쓴 공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가문의 숙명전환을 짊어지고 위대한 총마무리의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위해 제목을 부르고 따뜻하게 보살펴 드리세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고 괴로워하거나 체면에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어떤 면에서 즐거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보살폈기 때문에 지금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보살핍니다. 굉장한 경애입니다.

 가족들은 고생이 많겠지만 반드시 변독위약(變毒爲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가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과 함께 동지와 함께 유유히 당당히 꿋꿋이 산다, 이것이 신심입니다."

 

(13-1) 풍요로운 '제3의 청춘'을

일반적으로 수학기(修學期) 등을 '제1의 인생'이라 하고 자립해 한창 일할 시기를 '제2의 인생' 그리고 그 시기를 마치고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기를 '제3의 인생'이라고 봅니다. 이 '제3의 인생'을 어떻게 풍요롭게 살 것인가, SGI 회장의 지도에는 그러기 위한 중요한 지침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제3의 인생'을 말한다>에서 (1998년 10월 발간)

 

 불교의 핵심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진수는 '사고(四苦)'를 이겨내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서에 "사면(四面)이란 생로병사이며 사상(四相)을 가지고 우리들의 일신(一身)의 탑(塔)을 장엄(莊嚴)하느니라."(어서 740쪽) 하고 씌어 있듯이, 불법에서는 좀더 깊이 들어가 '사고(四苦)'가 '일신의 탑' 즉 '생명의 보탑(寶塔)'을 장엄하게 장식하는 보물로 바뀐다고 설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노년은 겨울이지만 현명한 사람에게 노년은 황금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을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노년을 그저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운이 쇠약해지는 시기로 보느냐 아니면 인생의 완성을 향해 총마무리하는 시기로 받아들이느냐, 인생의 내리막길로 보느냐 오르막길로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인생의 풍요로움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습니다.

'제3의 인생'은 '제3의 청춘'입니다. 청춘은 나이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몇살이 되어도 적극적으로 도전하려는 마음이 있는 한 더욱더 깊이를 더해 어떤 사람은 황금빛으로 어떤 사람은 은은한 은빛으로 빛납니다.

 폭넓은 의미에서 '제3의 인생'의 중요한 과제를 말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마지막까지 자기다운 삶을 관철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 삶의 규범이 남은 사람들을 크게 감싼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3의 인생'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남길 것인가. 그것은 재산이나 명예, 지위를 모두 벗겨낸 뒤 생사(生死)를 초월해 엄연히 남는 '인간으로서 살아온 삶'밖에 없습니다.

어서에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도 밝아진다."(어서 1596쪽, 취의)고 씌어 있는데 고령화 사회에서는 '남을 위해 불을 밝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불이 마지막에는 자신을 비춥니다.

 불법에서는 "모든 사람이 은혜가 있는 중생이기에 모든 사람의 성불을 기원하세요."(어서 1527쪽, 취의) 하고 가르칩니다.

 인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거기에 장수사회의 급소가 있습니다.

 살이 있는 동안에 얼마나 '생명의 질'을 높일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래 사는 것만이 장수는 아닙니다. 비록 단명해도 충실한 삶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보람 있는 인생을 산 만큼 장수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하루를 광포의 전진과 함께 후회 없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몇살이 되어도 가슴 속에 삶의 목표를 찬연히 빛내야 합니다. 그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자행화타의 수행에 힘쓰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른 추억은 삼세(三世) 영원합니다. 비록 치매에 걸린다. 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엄연히 '혼의 일기장'에 씌어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영예는 학회활동입니다. 남을 위해 기원하고 움직이면 자신도 행복해집니다. 이보다 가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어서에도 "어디까지나 한마음으로 남묘호렌게쿄라고 자신도 부르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해야 합니다. 틀림없이 그 일만이 인간계(人間界)에 태어난 금세(今世)의 추억이 됩니다."(어서 467쪽, 취의) 하고 씌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걱정도 필요 없습니다. 신앙으로 쌓은 복덕은 노쇠하지 않습니다. 치매에 걸려도 생명에 명복(冥伏)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비록 치매에 걸렸어도 인생의 선배로서 또 오늘날의 번영을 이룩한 선배로서 존경하는 풍토를 사회 전체로 넓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고령화가 진행되면 좋든 싫든 모든 사람이 노인을 간호하는 데 매달리는 사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장수사회는 경쟁보다 협조를, 효율보다 여유를, 물질의 풍요보다 마음의 풍요를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남에게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좋으니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몇살이 되어도 자신을 올바르게 다스리면서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이것이 '가치창조'의 삶입니다.

철인 플라톤은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의 생기발랄 한 모습에 자신의 젊은 날을 투영하면서 젊은 사람의 행동을 힘의 원천으로 삼으세요." 하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남녀노소가 모이는 학회 좌담회는 연세 드신 분들이 젊은 사람들의 싱싱한 생명력을 흡수합니다. 반대로 젊은 사람은 연세 드신 분의 체험이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불법에는 전혀 헛됨이 없습니다. 고령화 사회의 선구입니다. 어쨌든 언제나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목숨이 있는 한 이 세상에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미국의 시인 롱펠로는 노래했습니다. "노년은 모습은 다르지만 청춘보다 나으면 낫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은 좋은 기회다. 마치 황혼이 지난 밤하늘에 대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이 온통 빛나는 것처럼"

 별이 쏟아지는 듯한 멋진 밤하늘과 같은 총마무리의 인생을 함께 그리고 싶습니다.

인생, 마지막까지 꿋꿋이 싸운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생애 청춘의 마음과 행동이 중요합니다. '나는 나이가 들었으니 적당히 해도 되겠지.' 하고 도망치는 인생이면 안 됩니다.

 석가교단(釋迦敎團)의 원로들도 대부분 나이가 들면서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지위도 있고 나름대로 깨달음도 얻었으니 이걸로 충분하겠지. 오랫동안 수행도 했다. 스승 석존의 깨달음은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는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다. 이대로 괜찮다.' 하고 안주해 버렸습니다.

 거기서 석존은 사리불에게 수기(授記)를 통해 "그렇지 않다. 한평생 계속 불도(佛道)에 정진해야 한다. 부처도 되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 힘내라." 하고 질타하며 격려했습니다. 원로들도 자신들의 타성을 깨닫고 다시 투쟁을 시작해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절대 성불할 수 없다던 이승(二乘)도 부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월월(月月)*일일(日日) 강성(强盛)해지시라."(어서 1190쪽) 이것이 법화경의 정신이자 학회의 혼입니다.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이 지은 '청춘'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한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도

예순 살 노인에게 청춘이 있다.

(<청춘은 마음의 젊음이다>)

 

청춘은 나이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광선유포를 향한 불타오르는 정열이 있는 한 아흔 살이라도 청춘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과 노년을 앞두고 인생과 사회에서 얼마나 자기답게 활력 넘치게 빛나는 인생의 마지막 장을 살 수 있는가. 그것이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사실상 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가르침은 '니치렌불법'밖에 없습니다. 창가학회밖에 없습니다. 그런 대확신으로 다 함께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하는 승리의 역사를 쓰면서 광선유포라는 희망 가득한 대원정을 나아갑시다.

 

(13-2) 도전 또 도전하는 총마무리를

이 절(節)에서는 불법에서 설하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깊은 의의를 제시하며 황금에 비유할 만한 '노년'의 가치에 관해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생로병사와 인생'을 말한다>에서 (2006년 11월 발간)

'노화에 맞서 싸우는 일'은 새로운 도전을 피하려는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일'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타협과 젊은 사람을 육성하려 하지 않는 이기주의 그리고 과거에 집착하는 마음의 틈에 '노년'은 슬며시 다가옵니다.

 마지막까지 계속 싸우는 사람이 가장 존귀하고 가장 젊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불로(不老)의 생명을 간직한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생각해보면 문호 괴테가 평생의 걸작 <파우스트> 제2부를 완성했을 때가 여든 살이 넘었습니다.

 우리 창가(創價)의 아버지 마키구치(牧口) 선생님도 인생의 총마무리를 '전진 또 전진!' '도전 또 도전!'의 역사로 장식하셨습니다.

불법을 만난 때는 쉰일곱 살 때입니다. 쉰아홉 살에 창가교육학회를 창립하셨습니다. 70대가 되어서도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먼 규슈까지 개인지도와 절복을 하러 활기차게 다니셨습니다. '우리 청년은!' 이것이 마키구치 선생님의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약 한달 전에 옥중에서 '칸트의 철학을 정독하고 있다.'고 엽서에 쓰셨습니다. 이 불타는 듯한 구도심과 도전하는 마음이 바로 젊음의 원천이겠지요.

 '불로불사'라 해도 당연히 '나이가 들지 않는다'든지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애'의 문제이자 '생명력'의 문제입니다.

 법화경에는 "만약 병이 있는 사람이 이 경을 듣게 되면 병은 곧 소멸되어 불사하리라."(법화경 601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또 성훈에는 "법화경의 공력(功力)을 생각하여 보면 불로불사가 목전(目前)에 있도다."(어서 1125쪽)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묘법을 신수(信受)하면 어떠한 병에도 지지 않고 나아가 들어도 생기발랄한 생명력으로 전진하여 삼세 영원에 걸쳐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를 이룩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늘 신선한 숨결로 쾌활하고 상쾌하게 활약하시는 소중하고 소중한 우리 '다보회'(고령자의 모임) 여러분의 모습이 바로 그 모범입니다.

한편으로 말하면 '노년'은 사람들에게 기피당하는 숙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연장선상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각 시기는 저마다 둘도 없는 소중한 고유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 본디 '노년'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감상에 젖는 시기가 아닙니다. 가장 장엄하고 유연하게 빛을 발하는 붉은 저녁노을처럼 삶의 충실함을 가장 도모해야 할 인생의 총마무리 시기가 아닐까요.

 거기에는 어둡고 쓸쓸한 '노년'의 이미지는 없습니다. "밝은 노인의 얼굴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서광과 같은 면이 있다."(<라미제라블3>)<빅토르 위고 문학관4>)는 빅토르 위고의 지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음'이라는 근본 문제를 외면하는 현대사회는 그러한 황금 같은 소중한 '노년'의 가치까지 잃어버리고 만 것 같습니다.

 성훈에 "우선 임종(臨終)의 일을 배우고 후(後)에 타사(他事)를 배워야 한다."(어서 1404쪽)고 있듯이 죽음을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노(老)'도 인생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노년'의 진정한 가치도 빛나지 않을까요.

 불법의 영원한 생명관에서 보면 '사(死)'는 새로운 '생(生)'을 향한 출발입니다. 어서에 묘법은 "생사의 장야(長夜)를 비추는 대등(大登)"(어서 991쪽)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묘법이라는 영원한 법을 수지한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는 없습니다. '생도 환희! 사도 환희!' 하며 생명의 여로를 자유자재로 유희할 수 있습니다.

 불법은 '생로병사'라는 고뇌에 찬 인생을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환희에 찬 인생으로 바꾸는 근본 방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13-3)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

이 절에서는 '희망'과 '유쾌한 마음' 그리고 '사명감'을 갖고 커다란 목적을 향해 명랑하게 전진하는 곳에 장수의 비결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본부간부회, 전국부인부간부회, 제정령추선근행법요 스피치에서(1992년 9월 25일)

 

장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개인차도 있고 의견도 다양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당연히 창제행이 근본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마음가짐이 큰 관건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① '걱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석존은 어느 불전(佛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를 쫓지 마라. 미래를 바라지 말라.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 해야 할 일을 각자 잘 알아서 흔들리지 말고 동요하지 말고 그것을 똑바로 실천하라. 오로지 오늘 꼭 해야 할 일에 힘써라."(<중부경전>4, <남전대장경> 제11권 참조)

 언제까지나 과거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거나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의 일로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보다 오로지 '오늘 해야 할 일'을 훌륭하게 완수하라, '오늘'이라는 하루를 열심히 정성껏 살아야 한다고 설합니다. 오래 사는 분은 대부분 낙천적인 분이 많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낙관주의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기 바랍니다.

 

 또 ② '목표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드골 전 대통령은 개인에게 '희망의 끝은 죽음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희망'이 '생명'입니다. 희망을 잃는 것은 인간으로서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란 영원히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희망을 만들고 희망을 실현한다, 그리고 더 큰 희망을 향해 더욱더 힘차게 나아간다, 그 원동력이 '신심'입니다.

 

③ '유머, 웃음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럽에는 '즐거운 마음은 의사와 같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도 "큰 소리로 웃는 것은 몸을 치유하는 의사와 같다."(취의, '판단력 비판')고 말했습니다.

 유머는 장난치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이자 마음의 여유입니다. '유쾌한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려면 하루하루 인생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당당한 생명력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④ '일이나 사명에 힘쓰는 것'입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 박사는 "나는 일할 수 있을 때까지는 죽을 생각이 없다. 그리고 일하고 있는 한 전혀 죽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래 살 것이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흔 살이 넘도록 꿋꿋이 사셨습니다. '내게는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사명이 있는 한 죽을 필요는 없다. 죽을 리가 없다.' 이런 '확신'이 장수할 수 있는 생명력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있겠지만 이러한 점들이 모두 불법 속에, 학회활동 속에 들어 있습니다. 창가학회는 광선유포라는 '큰 목적'을 향해 '희망'과 '유쾌한 마음' 그리고 '사명감'을 갖고 명랑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학회와 함께 나아가는 여러분의 인생은 누구보다 충실하고 훌륭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대성인은 시조 깅고 부부에게 "나이는 젊어지고 복은 쌓일 것이외다."(어서 1135쪽) 즉 나이는 젊어지고 복운을 쌓인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묘법의 대공력'을 실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13-4) 자기 생명에 영원한 궁전을 구축한다

 

불법자(佛法者)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직시한다면 인생의 말년은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살려 더욱더 사람들을 위해 애쓰고 부처의 경애를 완성시키는 희망과 향상의 기회라고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전국대표연수회 스피치에서(1997년 2월 1일)

 

대성인은 미노부에서 멀리 떨어진 사도의 노부부인 고우 입도 부부에게 편지를 보내 격려하셨습니다.

 대성인은 부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던 곳도 정처(定處)는 없으며, 부처가 되는 일만이 마지막의 보금자리라고 마음을 결정하시라."(어서 1323쪽) 즉 "어느 곳도 영원한 곳은 없습니다. 부처가 되는 일이 바로 '마지막 보금자리'(마지막 거처)라고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마지막 보금자리', 마지막에 다다라야 할 안온한 우리 집, 안주하는 곳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습니다. 자신의 가슴속에서 여는 불계가 바로 영원히 '안주하는 곳'입니다.

 환경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진 집에 살아도 마음이 쓸쓸하다면 안온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쁨의 인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지금은 좋아도 그것이 영원히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자기 생명 안에 불도수행으로 이룩한 '안온한 궁전'이야말로 삼세 영원합니다.

 이 고우 입도 부부는 같은 사도에 사는 아부쓰보, 센니치니 부부와 언제나 함께 활동했습니다. 대성인은 그 우정을 따뜻하게 지켜보며, 마음을 맞춰 사이좋게 나아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셨습니다.

 서로 지키고 격려하는 벗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일이지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실감할 것입니다. 학회는 그 '보배로운 우정'의 연대를 지역과 사회에 넓히고 있습니다.

석존은 고령자를 소중히 하는 사람은 스스로 '수명'과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힘'을 늘린다고 설합니다. 인과(因果)의 법리(法理)에서 보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도리입니다. '노인을 존경하는 사회'가 바로 '인간을 존경하는 사회'이고 그래야 비로소 '활기차게 번영하는 사회'가 되겠지요.

 어서에는 법화경을 인용해 "장수(長壽)로써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리라."(어서 657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장수'란 근본적으로는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밝히 '여래(如來)의 장원한 수명'을 말합니다. 법화경을 행하는 사람은 자기 가슴속에서 '영원히 부처의 생명'이 솟아납니다. '갱사수명(更賜壽命, 수명을 다시 받다)'이라 해여 생명력이 강해지고 수명도 연장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보살은 자기만을 위해 오래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자비와 하나된 지혜를 살려 더욱더 사람들에게 마음껏 진력하기 위해 오래 살려는 것입니다. 미묘하면서도 중대한 일념의 차이입니다.

 대성인은 '지용보살'을 이끄는 지도자를 "상행보살(上行菩薩)이라고 하는 노인(老人)"(어서 1458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에서 보면 여기에는 깊은 의의가 있는데 여기서 쓰인 '노인'이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장엄하기까지 한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흔들림 없는 굳은 신념, 꾸준하고 자애로운 행동,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절묘한 대화의 힘, 확신에 찬 인내심, 뭐라 말할 수 없는 기품과 위엄,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유자재로 해결하는 큰 바다와 같은 지혜 등입니다. 인덕(人德)의 향기를 그윽하게 풍기는 '인생의 달인'이 떠오릅니다. 이것이 악세(惡世)의 한복판에서 인간주의를 넓히는 '지용보살'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지요.

 

(13-5) 자기의 생애를 예술처럼

근대 간호를 창시한 나이팅게일의 모습을 통해 인생의 마지막까지 사명의 불꽃을 활활 불태우는 장엄한 삶을 제시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다가오는 여성의 세기를 위해, 나이팅게일을 말한다> (2002년 3월 발간)

 

나이팅게일은 간호학교 학생에게 약속했습니다.

"나는 내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날마다 노력하며 계속 배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간호할 수도, 배울 수도 없게 된다면 간호를 받으면서 즉 '나를' 돌봐 주시는 간호사의 간호를 보면서 배우겠지요."(<나이팅게일 저작집>)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말처럼 살았습니다. 꿋꿋이 살았습니다.

간호학교를 창립한 마흔 삶 무렵 나이팅게일은 체력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두통, 구토, 발작성 호흡곤란 등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고통스러웠습니다. 오랜 시간 말을 하면 탈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너무 이른 나이에 죽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습니다. 실제로 죽을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이팅게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습니다."(<나이팅게일과 의사들>) 이렇게 말하며 병마를 웃어넘겼습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해도 아직 쓸 수 있다, 나이팅게일의 침대 옆에는 늘 연필이나 펜이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쓴 논문은 통계만 해도 방대합니다. 게다가 편지를 1만 2000통에 달했다고 합니다.

의사가 쓰지 말라고 말려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계속 씁니다.' 하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내가 저 보고서를 완성하지 않았다면 내가 아무리 건강을 지켜낸들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이 나이팅게일의 변함없는 신념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활활 불태워 밝히는 '투쟁의 불꽃', 그것이 나이팅게일이었습니다. 이윽고 시력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나이팅게일은 딱 잘라 말했습니다. "당치도 않아요. 나는 결코 마음이 식거나 하지 않아요."(<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여든 살이 넘어서는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이팅게일은 절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 아직 말할 수 있는 입이 있다! 나이팅게일은 찾아온 손님이 놀랄 정도로 사회의 움직임에 정통했습니다.

불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손이 없어도 발이 있다. 발이 없어도 눈이 있다. 눈이 없어도 입이 있다. 입이 없어도 목숨이 있다."

이런 결심으로 목숨이 있는 한 법을 넓힌다. 이것이 불법자의 혼입니다. 석존도 임종 직전에 찾아온 한 수행자에게까지 법을 설하고 귀의시켜 마지막 제자로 삼았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행불행은 마지막 수년 간으로 결정된다. 도중이 아니다."

나이팅게일은 일생 중에서도 말년을 더한층 아름답고 풍요롭게 장식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스스로 말년을 '생애 가장 좋은 날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이팅게일만큼 만년에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은 여성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하나같이 당신의 이름을 들으면 밝아진다.'며 존경했습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처럼!' 이 말은 여성들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지도나 조언을 구하러 영국 전역과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나이팅게일을 만나러 찾아왔습니다.

 세계 왕족과 정치가들도 한번 만나고 싶다며 모두 나이팅게일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 와도 나이팅게일은 '간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세계를 계승할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다'며 젊은 사람을 소중히 했습니다. '간호 일을 하고 싶다!'고 희망하는 소녀들에게서 몇백 통이나 되는 편지가 왔습니다. 그 편지에 거의 대부분 답장을 썼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을 찾아 도전하고 '미래의 씨앗'을 계속 심었습니다. 

"일생을 하나의 예술처럼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팅게일 (그 생애와 사상')>)

이런 자신의 말처럼 인생을 살았습니다.

1910년 8월 13일, 예술과 같은 인생은 조용히 막을 내렸습니다. 아흔 살이었습니다. 나이팅게일 간호학교 창립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장례는 생전에 나이팅게일이 바라던 대로 간소하게 치렀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죽음을 '끝없는 활동을 위한 여행'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어서에는 "자신법성(自身法性)의 대지(大地)를 생사생사(生死生死)로 유전(流轉)해 가느니라."(어서 724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묘법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법성의 대지' 즉 '불계의 대지'를 '생도 환희' '사도 환희'처럼 즐겁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생 동안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상락아정'의 생명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올바른 신앙과 남을 위해 힘쓰는 정의로운 행동이 필요합니다.

한결같은 광선유포를 위해 끝까지 산 사람은 '환희 중의 대환희'라는 영원한 행복 궤도를 나아갈 수 있습니다.

 

(13-6) "일일의 수명은 삼천계의 재물보다 더함이니"

'하루하루를 정성껏 산다.' 이것이 SGI 회장의 신조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일이 얼마나 존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절에서는 무한한 생명의 가치를 빛낼 수 있는 하루하루를 살라고 외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전국장년부간부회, 규슈총회 스피치에서(1992년 10월 10일, 도쿄)

대성인은 "일일(一日)의 수명(壽命)은 삼천계(三千界)의 재물(財物)보다 더함이니"(어서 986쪽) 즉 "일일의 수명은 삼천세계(우주)의 전 재산보다도 존귀한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를 사는' 그 생명은 모든 재보를 모은 것보다도 존귀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루'가 소중합니다. 나도 하루하루를 소중히, 회원들을 위해 힘쓰며 살자고 정했습니다. 이것이 내 신조입니다.

 게다가 "법화경도 만나셨으니 일일이라도 살아 계신다면 공덕이 쌓이리라. 얼마나 아까운 생명이뇨, 아까운 생명이뇨."(어서 986쪽) 즉 "법화경을 만났기에 하루를 살면 그만큼 공덕이 쌓인다. 얼마나 소중한 목숨인가. 소중한 목숨인가."

 여러분의 사명 있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겉모습은 세상 사람과 똑같이 보일지 몰라도 광포를 위해 사는 학회원의 '하루'는 그 '생명 시간'에서 보면 영원에 통하는 존귀한 하루입니다.

 부디 '오늘도 즐거웠다. 승리했다.' '오늘도 후회가 없다.' '충실한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기 바랍니다.

 

(13-7) '첫 생일'

 마지막까지 하루하루를 소중히 하며 자신의 사명을 위해 끝까지 산 갤브레이스 박사의 일화를 들어 하루하루 근행창제하고 학회활동에 힘쓰는 일이 생명의 근본적인 건강법이라고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7.3'기념 본부간부회 스피치에서 (1999년 7월 3일, 도쿄)

세계적인 경제학자 갤브레이스 박사(하버드대학교 명예교수)도 아흔 살의 나이로 아직도 새로운 저서를 쓰는 등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박사는 나와 20년을 사귄 교우입니다. 어느 때는 보스턴에 있는 박사의 집을 방문하고(1993년) 또 어느 때는 도쿄(1978년, 1990년) 만났습니다.

 내가 하버드대학교에서 두 번째 강연을 할 때는 강평자로서 참석해 주셨습니다.(1993년. 강연 제목은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

1990년 10월 5일, 세이쿄신문사에서 박사가 말씀하신 한 마디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10월 15일이면 여든두 살이 됩니다. 그날을 제 생애 '첫 생일'로 삼을 생각입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배워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늘 젊은 기운이 넘치는 박사의 일생철학입니다.

 박사는 '건강법'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침에 일어날 때 '오늘 하루 계획을 정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아침을 '자 오늘도!' 하고 힘차게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활기찬 하루를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활기찬 하루를 출발하는 '아침의 낭랑한 근행창제'가 얼마나 훌륭한 건강법인지 모릅니다.

 근행창제는 소우주인 자신을 대우주의 근본 리듬에 합치에는 숭고한 의식입니다. 어본존에 합장하고 근행창제를 한다, 그 소리는 모든 불보살, 제천선신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지킵니다. 그 '한가운데' 자신이 있습니다.

 제목을 부르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든 불보살과 제천이 자기 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구제하는 힘이 있습니다. 구제할 사명이 있습니다.

 박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장 큰 잘못은 일에서 은퇴해 버리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없어지면 '육체적인 노력'과 '정신적인 노력'을 안 하기 됩니다. 특히 '정신적인 노력'을 그만두면 정말 좋지 않습니다."

 하물며 신심에 '은퇴'는 없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한 학회활동은 생명력을 키우는 '가장 존귀한 정신적 노력'이자 생명의 근본적인 건강법입니다.

 

(13-8) 산다는 것은 계속 배우는 것

'제3의 인생'의 모범벅인 발자취를 남긴 미국의 국민 화가 그랜마 모제스의 삶을 톤해 연륜을 더할수록 창조의 빛을 한층 더 빛내며 단풍과 같인 멋진 인생의 총마무리를 하라고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마음의 사계절>에서 (1993년 5월 발간)

미국의 여류화가 그랜마 모제스는 향수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시골풍경화와 소박한 그의 작품도 같은 인품으로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든 살 만학도'라 해도 좋을 나이부터 백한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박파(나이브 아트)를 대표하는 그림 1500점을 남긴 경이적인 사실은 매우 유명합니다.

 "돌이켜보면 내 생애는 열심히 일한 하루와 같습니다. 일이 완성되어 나는 흡족합니다. 나는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중략) 그리고 인생은 우리 자신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늘 그러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이 말은 그랜마 모제스의 자서전(<모제스 할머니의 그림 세계>)의 결론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달인다운 말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모제스는 농촌에 사는 평범한 아낙네였습니다. 1860년 미국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계속 농사일을 했습니다. 열두 살에 가정부로 남의 집살이를 시작해 요리, 집안일, 환자의 병간호 등 무슨 일이든 했습니다. 그러느라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스물일곱 살에 결혼한 뒤에도 한눈팔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자식도 열 명이나 낳았는데 그중 다섯 명은 어릴 때 죽었습니다. 남은 자식들도 결혼하거나 농장을 갖고 독립했습니다. 남편 토머스는 모제스가 예순여섯 살 때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제스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습니다.

 눈길을 달리는 말이 끄는 빨간 썰매, 푸릇푸릇 싹튼 들판, 확 트인 골짜기, 메이플시럽을 만드는 사람들…. 모제스의 가슴속에는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명화가 가득 담겨 있었겠지요. 그 기억을 더듬어 가슴속에서 한장 한장 화폭을 꺼냈습니다.

 그 전까지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흙과 땀투성이인 농촌 아낙네였습니다. 그런 모제스가 어떻게 그 나이가 되어 새로운 재능에 눈뜰 수 있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모제스는 늘 깨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모제스는 집에서 버터를 만들어 그것을 도매로 넘겼습니다. 솜씨가 좋아 인기를 얻어 계속 가격이 오르고 거래량도 많아져 큰 사업가로 성장했습니다. 그러자 모제스는 감자칩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것도 장사가 되었습니다.

모제스는 말합니다. "물론 괴로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거의 이겨내고 괴로운 일은 잊으려고 자신에게 되뇌는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면 어쨌든 마지막에는 괴로움이 사라집니다."(<모제스 할머니의 그림 세계)>

 모제스는 늘 지금이 빛날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니 투쟁했습니다. 불평도 푸념도 하지 않고 주부의 일을 척척 해내고 그것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게다가 주부라는 위치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이라는 하루를 자신만의 '창조의 빛'으로 늘 가득 채웠습니다.

 모제스가 젊은 시절에 그림을 그리거나 연구한 흔적이 없습니다. 완전히 독학입니다.

 놀랍게도 그런 모제스의 그림은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점 발전했습니다. 20여년 동안 그림 1500점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전진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소박파도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저절로 열린 인생의 '새로운 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일흔다섯 살에 한 선택, 모제스는 그렸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성장하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창조의 날개를 펼쳤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자기다운 창조의 날개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날의 집안일이나 지역에서도 그 날개를 펼칠 수 있습니다. 모제스 할머니의 생애는 그 점을 가르쳐줍니다. 

인생의 연륜과 더불어 창조의 빛을 더 한층 강하게 발하는 사람에게 '노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늘 인생의 '현역'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한평생 배우는 것입니다. 또 '인생은 우리 자신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모제스 할머니는 몇살에 시작해도 늦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학력 등은 필요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나는 거기서 더한 나위 없는 '자율'과 '자립'의 정신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일어선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늘 '주인공'을 연기할 수 있습니다.

 

-법련 201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