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7. 22:24ㆍ佛法 .SGI
제6장 ‘생사(生死)를 마주하다’
이 장을 읽기 전에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생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우선 임종(臨終)의 일을 배우고 후(後)에 타사(他事)를 배워야 한다.”(어서 140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확립할 수 있다고 외치셨습니다.
불교(佛敎)의 정수(精髓)인 법화경(法華經)은 생명이 금세(今世)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된다고 설합니다.
대성인은 법화경의 이 생명관을 바탕으로 묘법(妙法)과 하나가 된 생명은 온갖 생사의 괴로움을 넘어 영원히 불계(佛界)의 대도(大道)를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池田) SGI 회장은 니치렌불법(日蓮佛法)의 이 철리(哲理)를 ‘생(生)도 환희’ ‘사(死)도 환희’라는 장대(壯大)한 생명관으로서 현대에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일생성불(一生成佛)이라는 금세의 삶을 가장 가치적으로 꿋꿋이 사는 길을 명쾌하게 나타냈습니다.
“사(死)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사(死)를 응시하며 올바르게 위치를 부여하는 생명관, 생사관, 문화관의 확립이 곧 21세기 최대의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하버드대학교 기념강연,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라는 SGI 회장의 통찰은 더욱더 큰 빛을 발합니다.
6-1) 절대적 행복으로 가는 궤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뇌를 타고 넘어 영원한 행복 경애를 구축하려면 금세에 일생성불하는 일이 중요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라도 성불로 가는 ‘궤도’에서 멀어지지 말고 끈기 있게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외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뉴욕문화회관 모임 스피치에서
(1996년 6월 15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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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신앙하는가. 그것은 ‘누구보다 훌륭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고뇌를 유유히 타고 넘기 위해서입니다.
‘생(生)’, 인생은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꿋꿋이 살아야 합니다.
온갖 괴로움을 이겨내고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하루하루를 어떻게 힘차게 살아갈 것인가. 묘법의 신앙은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위대한 생명력을 줍니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그것을 모르는 가치 없는 인생은 시시합니다. 목적관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고, 먹고, 허무하게 죽는다면 차원이 낮은 동물적인 인생이 아닐까요.
그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무엇인가를 창조한다. 무엇인가에 공헌한다. 그러기 위해 목숨이 있는 한 한평생 끝까지 도전한다. 그래야 비로소 ‘충실한 인생’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인간다운 ‘고차원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묘법의 신앙은 그 중에서도 남을 위해, 자신을 위해 최고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노(老)’, 인생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맙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노인이 되고 체력도 떨어집니다. 여기저기 고장도 납니다.
그때 외롭고 쓸쓸한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의 황금빛 결실과 같은 풍요로운 자신이 되기 위한 신앙입니다. 저녁 노을은 천지를 온통 장엄하게 물들이고 빛납니다. 그 ‘노을빛’과 같은 노년을 후회 없이 웃는 얼굴로 맞이하기 위한 신앙입니다.
‘병(病)’, 살아 있는 몸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병으로 고생합니다.
묘법이 그 병고(病苦)를 씩씩하게 이겨내는 힘을 솟아나게 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사자후(師子吼)와 같으니 어떠한 병인들 장해를 할 손가,”(어서 1124쪽) 즉 “남묘호렌게쿄는 사자가 울부짖는 것과 같다. 어떠한 병이 장해가 되겠는가.(아니 어떠한 병에도 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병에 걸려도 어떠한 처지가 되어도 광선유포(廣宣流布)를 관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본존이 반드시 지킵니다. 제불(諸佛), 제보살(諸菩薩), 제천(諸天)이 모두 그 사람을 지킵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양약(良藥)을 갖는 여인들을, 이 사인(四人)의 대보살(大菩薩)이 전후좌우(前後左右)에 붙어 서서 이 여인이 일어서시면 이 대보살도 일어서시고, 내지(乃至) 이 여인이 길을 갈 때는 이 보살도 길을 가시는데, 비유하면 그림자와 몸, 물과 물고기, 소리와 울림, 달과 빛과 같으니라.”(어서 1306쪽) 즉 “이 양약(어본존)을 신수하는 여성을 이 사인의 대보살(지용보살의 리더인 상행, 무변행, 정행, 안립행보살)이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에 붙어 서서 이 여성이 일어서면 이 사대보살도 일어섭니다. 그렇듯 이 여성이 길을 갈 때에는 이 보살도 길을 갑니다. 비유하면 ‘그림자와 몸’ ‘물과 물고기’ ‘소리와 울림’ ‘달과 빛’처럼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대로 반드시 지킵니다. 더욱이 그 수호는 생사를 넘어 영원히 이어집니다.
‘사(死)’, 이것은 냉엄합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에 직면합니다.
그때 묘법의 궤도를 가는 사람은 법화경(비유품)에 설해진 ‘대백우거(大白牛車)’라는 수레를 타고 유유히 영산으로 갈 수 있습니다. 대우주의 불계와 융합합니다.
대백우거는 길이도, 넓이도, 높이도 크기가 장대하고 게다가 전체가 금은을 비롯해 무수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금세에 일생성불 하면 그 ‘부처’의 경애는 영원히 이어집니다.
‘생사’ ‘생사’로 생생세세(生生世世) 태어날 때마다 건강하고, 유복하고, 머리도 좋고 최고의 환경에 둘러싸여 복운이 넘치는 인생이 됩니다. 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을 지니고 사명에 걸맞은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것이 영원히 이어집니다. 두번 다시는 파괴되지 않습니다.
이 ‘영원한 행복’을 위해 “금세에 불계를 확립하세요, 불도수행(佛道修行)에 힘쓰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멋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대성인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쨌든 성불로 가는 ‘궤도’에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 광선유포, 불도수행의 ‘궤도’를 끈기 있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하기 싫거나 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범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궤도’에서 멀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끈질긴 인내로 서로 격려하며 ‘부처의 길’을 계속 걸어야 합니다.
‘궤도’에서 벗어나면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고를 일으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인생은 불행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생명의 궤도’가 있습니다. ‘절대적 행복으로 가는 궤도’가 엄연히 있습니다.
그것이 ‘묘법의 궤도’입니다.
퇴전하지 않고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반드시 마지막에는 물심(物心) 모두 ‘소원만족’의 인생이 됩니다.
(6-2) 죽음이 인생의 의미를 높인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여기서는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라는 근본의 일대사를 올바르게 응시해 죽음의 무게를 의식하는 일이 인생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된다고 외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법화경의 지혜》에서
(제4권, 1998년 12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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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언젠가는’이라는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합니다. 청년은 물론 나이를 먹어도 아니 나이를 먹을수록 ‘죽음’을 외면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실상은 어떠한가. 실은 인간은 바로 다음 순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지진, 사고, 급병(急病) 등 죽을 가능성은 ‘언제라도’ 있습니다. 그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죽음은 자기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등 뒤에서 자신에게 다가온다.” 하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노력해야지.’ ‘이 일만 끝나면 노력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맙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무런 생명의 재보(財寶)도 쌓지 못하고 죽음에 당면하게 됩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의 인생이겠지요. 그때는 후회해도 늦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죽음이 3일 뒤가 되어도, 3년 뒤가 되어도 또 30년 뒤가 되어도 본질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죽어도 좋을 정도로 ‘지금’을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백년도 한 순간입니다. 문자 그대로 “임종이 지금”입니다. 도다(戶田) 선생님도 “실은 죽을 때를 위해 신심을 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삼세(三世) 영원에 걸친 ‘마음의 재보’를 쌓아야 합니다. 인류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뒷전’으로 하거나 ‘뒤로 미루고’ 살아갑니다.
생사일대사(生死一大死)라고 하는데 인생에서 생사만한 ‘일대사’는 없습니다. 이 가장 중요한 대사에 비하면 나머지는 모두 작은 일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임종’할 때 실감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본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자신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자신이 사장이 되었다든가, 장사가 잘 되었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누구를 어떤 식으로 사랑했는지, 상냥하게 대했는지, 어떤 식으로 차갑게 대했는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 만족감이나 배신한 과오 등, 그러한 ‘인간적’인 부분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일이 인생을 향상시키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자각할 때 ‘영원한 것’을 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보내자고 결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틀림없이 인생은 느슨해지고 무료해지지 않을까요.
‘죽음’이 있기에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현대문명은 ‘죽음을 망각한 문명’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동시에 ‘욕망을 방치한 문명’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문명도 ‘생사’라는 근본 대사를 회피하면 하루하루 목적 없이 사는 타락한 생활에 바지고 맙니다.
(6-3) 사고(死苦)를 이겨내는 불법의 생명관
석존(釋尊)은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인 ‘사고’와 철저히 마주하면서 영원한 생명관에 이르렀습니다. 석존의 그 깨달음에 접근하며 생사를 응시한 불교의 본질을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생명을 말한다》에서
(제3권, 1974년 3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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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특히 인간은 자신이 생을 마감할 때 그 저편에 도대체 어떠한 세계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낍니다.
석존은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죽음을 응시하고 싶지 않다’는 본디 인간이 지닌 본능을 이겨내고 위대한 용기를 내어 인생의 고(苦)의 상(相)과 진실상(眞實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생과 사의 본질에 대해 사색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불법은 영원한 생명을 설하지만, 그것은 죽고 싶지 않다는 민중의 소원을 안이하게 받아들인 이론이 결코 아닙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고집멸도(苦集滅道, 불교가 설하는 고의 원인과 해결의 법리)라는 가르침은 인간이 피하고 싶어 하는 인생의 고(苦)의 상(相)을 그대로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공상적(空想的)인 가설로 진실을 어물어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눈으로 진실을 응시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대전제를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왜 죽는가. 생과 사는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인가. 아니면 밀접한 관계인가.
생명은 어떠한 흐름이 있는가. 석존은 용기와 인내 그리고 냉정함을 지니고 자신의 생명에 빛을 비추어 그 진실상을 깨닫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깨달음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본연적으로 생과 사를 지녔다. 인간의 생명은 생과 사를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웅대한 물결을 이루며 영원히 흐른다.’ 석존은 자기 생명의 분류(奔流) 속에서 이 점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생에 집착하여 확립된 영혼 불멸과 같은 사상이 아니라, 한 생명에 일관된 엄연한 인과(因果)의 법칙을 간파하고 확립한 영원한 생명관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관에 서서 사(死)에 의의를 부여한다면 사는 오히려 생(生)을 위한 것입니다. 마치 다음에 눈을 뜨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잠과 같습니다.
사는 생을 위한 방편(方便)입니다.
생을 더욱 빛내기 위한 것이며 생이 바로 생명 활동의 본태(本態, 본디 모습)입니다. 생과 사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오히려 생을 위한 것이라고 자리매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법화경에 설해진 ‘방편현열반(方便現涅槃)’(부처의 생명은 영원하며 석존이 중생에게 부처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방편으로서 열반을 나타냈다.)이겠지요.
불교의 본질은 무익한 비관주의나 염세주의도 아니거니와 근거 없는 낙관주의도 아닙니다. 인생의 고를 직시하고 거기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도전한 끝에 도달한 ‘생의 환희’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괴로움에서 도피하면 참된 기쁨은 없습니다.
남들이 외면하고 도피하려는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거기에 용감하게 도전해 이겨냈을 때 비로소 금강불괴(金剛不壞)와 같은 한없는 환희가 솟아납니다.
(6-4) 생과 사는 불이(不二)
불교는 생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법화경의 철리를 바탕으로 ‘생’으로 현재화(顯在化)하고 ‘사’로 잠재화(潛在化)하면서 생사를 한없이 지속한다는 ‘영원한 생명관’을 제시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생사일대사혈맥초》 강의에서
(1977년 4월 ‘세이쿄신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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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과 사(死)는 생명이 변화하는 모습이며 반대로 말하면 생명은 생(生)과 사(死)로만 나타납니다.
범부의 눈에는 생명이 오로지 생(生)으로 시작해 사(死)로 끝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법의 시점은 이 한계를 완전히 깨고 생(生)으로 나타나 사(死)로 지속하는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을 포착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불법은 생명의 변화상(變化相)으로써 생과 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법화경 수량품에 약퇴약출(若退若出)이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이 ‘후퇴하는 것’이 ‘사’에 해당하고 ‘나오는 것’이 생에 해당합니다.
또 수량품에서는 영원한 생명관에서 생명은 후퇴하거나 나타나거나 태어나거나 죽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는데 니치렌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더욱 깊은 본유(本有)의 생사, 즉 본디의 생사이며 (본디의) 퇴출(退出)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생명관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현재화(顯在化)한 상태를 ‘생’, 잠재화(潛在化)한 상태를 ‘사’로 받아들이고 게다가 그 생사를 무한히 지속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을 현재화, 사를 잠재화로 받아들이는 구극(究極)의 불법 철리는 얼마나 유구하고 위대한 생명을 간파하고 있는 것일까요.
더욱이 그 생과 사는 불이(不二)라고 설합니다. 생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잠재화된 묘한 힘이며 또 잠재화된 생명은 이윽고 연을 만나 현재화해 정력적으로 생을 영위하고 풍부한 색채로 개성을 발휘합니다.
마침내 그 생은 조용히 후퇴하여 사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 잠재화는 새로운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새로운 다음 생을 기다립니다.
말하자면 생은 그때까지 쉬면서 비축한 생명의 힘이 폭발하고 연소한 것이며 마침내 인생의 책 한권을 다 쓴 뒤 사로 향합니다.
그 우주에 명복되고 잠재화된 생명은 우주 생명의 힘을 자신에게 충전시키면서 생으로 비약할 때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본디의 생사이며 이 ‘우주 본연의 리듬’의 근원이 남묘호렌게쿄입니다.
(6-5) 생도 환희, 사도 환희
이케다 SGI 회장은 1991년과 1993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두 번에 걸쳐 강연을 했습니다. 이 절(節)에서는 1993년 강연<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 때 말씀하신 불법의 생사관에 관해 다루고 광선유포에 꿋꿋이 살며 절대적 행복 경애를 구축한 사람은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는 생명의 궤도를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각부합동연수 스피치에서
(2005년 8월 19일, 나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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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 최고봉의 학부인 하버드대학교의 초청으로 강연을 두 번했습니다. 그 중 두번째로 강연한 내용이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는 불법의 생사관입니다.
하비 콕스 학부장(당시)은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관점을 소개하셨습니다.” 하고 평가하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생’도 ‘사’도 영원한 생명의 한 측면입니다. 묘법에 기인한 생과 사는 영원히 상주(常住)하는 위대한 생명을 무대로 한 드라마입니다.
광포를 위해 꿋꿋이 싸우면 반드시 일생 동안에 절대적 행복 경애를 구축하고 확고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영원히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는 생명의 궤도를 나아갈 수 있습니다.
태어나는 장소도 지구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 넓은 우주에는 생명이 존재하는 혹성이 수없이 많다고 예측하는 연구가도 많습니다.
법화경에는 장대한 우주관이 펼쳐지고, 중생이 사는 국토가 무수히 많다고 설해져 있지만, 그것은 최첨단을 달리는 천문학의 지견과도 일치합니다.
선인만 사는 별도 있는가 하면 지구처럼 교활한 인간이 많은 별도 있을지 모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멋진 음악을 들으면서 건강하게 장수하고 온갖 기쁨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별도 있을지 모릅니다.
내 마음의 작용과 대우주의 작용이 합치해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자신이 바라는 장소에 태어납니다.(법화경에 “태어나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하므로”<법화경 360쪽> 하고 씌어 있다.) 이것이 불법의 진수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자주 죽음을 잠에 비유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푹 자고 다음날 아침에 건강한 모습으로 힘차게 눈을 뜨듯이 묘법을 끝까지 부르다 돌아가신 분은 죽음이라는 휴식을 취하고 바로 다시 태어나 광선유포의 진열로 돌아온다.”
대성인은 어서에서 임종에 대해 되풀이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묘법을 부르는 사람의 임종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일불(一佛)이나 이불(二佛)이 아니라 백불(百佛)이나 이백불(二百佛)도 아니라 천불(千佛)이나 마중을 나와 손을 잡아 주신다니 환희의 눈물을 억누르기 어렵다.”(어서 1337쪽 통해)
“당신이 임종할 때, 생사의 중간(생에서 사로 옮겨가는 사이)에는 니치렌이 반드시 마중을 나갈 것이다.”(어서 1558쪽, 통해)
“살아 계실 때는 생의 부처, 지금은 사의 부처, 생사 함께 부처입니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는 중요한 법문은 이것입니다.”(어서 1504쪽, 통해)
세계의 대문호나 사상가들은 대부분 생명의 영원성을 느꼈습니다. 불법의 생명관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그러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만년(1907년, 79세 때)에 어느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는 것이 기쁘고 죽는 것도 기쁩니다.”(《톨스토이전집》 수록)
대문호가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서 다다른 부동의 경지의 일부분을 느끼게 하는 문장입니다.
생각해 보면 토인비 박사도 불법의 생명관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우리는 인류 최고봉의 지성이 추구한 최고봉의 불법을 믿고, 행동하고, 가르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훌륭한 인생은 없습니다.
(6-6) 자신의 ‘성불의 경애’를 확고히 다지다
이 절에서는 묘법을 근본으로 한 생명은 무너지지 않는 행복 경애인 ‘불계의 대지’를 생의 때도 사의 때도 환희에 넘쳐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금세에 불계의 경애를 확고히 다지자고 외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전국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
(1996년 3월 29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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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생로병사’를 해결하려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생과 사는 인생의 근본 문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것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어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는 ‘사람의 목숨이 이 세상에 머무르지 않음은 산의 물이 흘러가는 것보다 빠르다. 오늘 살아 있다 해도 내일 목숨은 유지하기 어렵다.’고 설해져 있다. 마야경(摩耶經)에는 ‘비유하면 전다라(旃陀羅)가 양을 몰아 (양이) 도살되는 곳에 이르듯이 사람의 목숨도 또한 이와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사지(死地)에 다가간다.’고 씌어 있다.
법화경(비유품)에는 ‘사람이 사는 이 삼계(三界)는 편안하지 않다. 불길에 휩싸인 집과 같다. 여러 고뇌가 충만하여 매우 두려워해야 할 세계다.’라는 등으로 설해져 있다.
이러한 경문은 우리의 자부(慈父)인 대각세존(大覺世尊, 석존)이 말대(末代)의 범부를 훈계하여 깨닫게 하려고 설하신 경문이다.
그러나 조금도 깨닫는 마음이 없고 길을 구하는 마음을 한 순간도 일으키지 않는다. 죽어서 들판에 버려지면 하룻밤 사이에 벌거숭이가 되어버릴 몸을 장식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 아름다운 옷을 겹쳐 입으려고 애쓴다. 목숨이 다하면 3일 안에 물이 되어 흘러가고 먼지가 되어 흙에 섞이며,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몸을 부양하려고 많은 재산을 쌓고 있다.”(어서 1388쪽, 통해)
지금도 역시 이와 똑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더욱더 심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생사라는 근본 문제를 피해 아무리 번영해도 그것은 뿌리 없는 풀이며 모래 위에 세운 누각입니다.
‘무상(無常)한 인생’ 그러나 단지 무상함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는 별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관해도 가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 ‘무상한 인생’에서 어떻게 ‘영원한 가치’를 만드느냐 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은 법화경을 행하는 인간의 생사를 간결하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자신법성(自身法性)의 대지를 생사생사(生死生死)로 유전해 가느니라.”(어서 724쪽) 즉 묘법을 신앙한 사람은 법성의 대지, 불계의 대지를 ‘생’의 때도 ‘사’의 때도 유유히 나아갑니다. 대백우거라는 장려한 최고의 수레를 타고 자유자재로 나아갑니다.
‘불계의 대지’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행복 경애입니다. 대지와 같이 반석 같이 견고히 다진 자신의 ‘성불의 경애’입니다. 그 경애를 확고히 다지면 삼세 영원히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금세에 분발하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법성의 대지’를 ‘생도 환희’ ‘사도 환희’로 나아간다. 이것이 “생사 생사로 유전해 가느니라.”입니다.
나아가는 곳은 ‘자신의 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대지’를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행복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구축하는 것입니다. 남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가져다 주는 것은 무너지고 맙니다.
부모에게 의지해도 언젠가 부모는 세상을 떠납니다. 남편에게 의지해도 남편이 언제 먼저 떠날지 모릅니다. 또 시대의 변화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50년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도 그 앞뒤로도 수많은 비극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힘, 자신의 지혜, 자신의 복운이 근본입니다. 그것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신심이며, 자신이 강해지기 위한 학회활동입니다. 그것이 “자신법성의 대지를”이라고 설하신 의의입니다.
“어떠한 곳에서 놀고 장난쳐도 탈이 없을 것이며 유행(遊行)하여 두려움이 없음은 마치 사자왕(師子王)과 같으리라.”(어서 1124쪽)
즉 “어떠한 곳에서 놀고 장난쳐도 어떤 장해도 없을 것이다. 어디에 놀러 가더라도 두려움이 없음은 사자왕과 같을 것이다.” 반드시 이 어서와 같이 됩니다. 삼세 영원히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한 신앙입니다.
‘자신의 대지’를 영원히 나아갑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고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대지’에서 또 ‘생사’ ‘생사’를 반복하며 사명의 드라마를 연기합니다. 삼세 끝까지 ‘광선유포’라는 황금의 대도를 나아갑니다.
“자신의 ‘불계의 대지’를 생도 환희, 사도 환희로 나아가라!”
“그 대지를 확고히 다져라!”
이것이 니치렌대성인불법의 심원한 생사관입니다.
별첨 : 하버드대학교 기념강연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에서
(1993년 9월 24일)
그리스의 철인(哲人)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한다.”(판타레이)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확실히 인간계(人間界)든 자연계든 모든 것은 변화와 변화의 연속이며 한시도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금석(金石)이라 해도 오랜 기간을 놓고 본다면 세월의 작용에 의한 마멸(磨滅)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인간 사회의 놀랄 만한 변화상은,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불리는 20세기 말을 살고 있는 우리가 누구나 눈앞에서 보고 있는 파노라마와 같습니다.
불교의 눈은 이 변화의 실상(實相)을 ‘제행(諸行: 여러 현상)’은 ‘무상(無常: 항상 변화)’이라고 포착했습니다. 이것을 우주관에서 말하면 ‘성주괴공(成住壞空)’, 즉 하나의 세계가 성립하여 유전하고 붕괴하여 다음의 성립에 이른다고 설합니다.
또 이것을 인생관에서 논한다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 즉 태어나서 살아가는 괴로움, 나이 드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의 유전(流轉)을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사고, 특히 생(生)이 있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생사, 사의 문제는 예로부터 모든 종교나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었습니다.
석존이 출가한 동기라고 알려진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에피소드나, 철학을 ‘죽음의 학습’이라고 한 플라톤의 말은 매우 유명하며, 니치렌대성인도 “우선 임종(臨終)의 일을 배우고 후에 타사(他事)를 배워야 한다.”(<묘호니부인답서>, 어서 1404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20년 전. 이 주제를 중심으로 불세출의 역사가 토인비 박사와 며칠 동안 폭넓게 토론했습니다.
왜 인간에게 죽음이 이처럼 무거운 의미를 지니는가 하면, 인간은 무엇보다 죽음으로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한한 ‘부(富)’나 ‘권력’을 손에 넣은 인간이라도 언젠가는 죽게 되는 숙명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 유한성을 자각하고 죽음의 공포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영원성에 참획(參劃)하여 동물적 본능인 삶의 방식을 초월한 하나의 인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가 인류사와 함께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死)를 망각한 문명’이라고 일컫는 근대는, 이 생사라는 근본과제에서 눈을 돌려 죽음을 오로지 기피해야 할 범죄자와 같은 위치로 몰아세우고 말았습니다.
근대인에게 죽음은 단순한 생의 결여나 공백상태에 지나지 않았고, 생이 선(善)이라면 사는 악(惡), 생은 유(有)이고 사는 무(無), 생이 조리(條理)이고 사는 부조리(不條理), 생이 명(明)이고 사는 암(暗) 등 죽음은 모두 마이너스 이미지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현대인은 죽음으로부터 호된 보복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금세기가 브레진스키 박사가 말한 ‘메가데스(대량사<大量死>)의 세기’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를 망각한 문명’의 귀결(歸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요즈음 뇌사(腦死)나 존엄사, 호스피스, 이상적인 장례식 또 퀴블러 로스 여사의 ‘임사의학(臨死醫學)’ 연구 등에 보인 관심도는, 누구나 죽음의 의미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재검토를 요구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문명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사는 단순히 생의 결여가 아니라, 생과 나란히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 전체는 ‘생명’이며 삶의 방식인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사(死)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死)를 응시하며 올바르게 위치를 부여하는 생명관, 생사관, 문화관의 확립이 곧 21세기 최대의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법성(法性)의 기멸(起滅)’을 설합니다. 법성이란 현상의 오저에 있는 생명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합니다. 생사 등 일체의 사상(事象)은 그 법성이 연(緣)에 닿아 ‘기(起)’ 즉 출현하고, ‘멸(滅)’, 즉 소멸하면서 유전을 반복한다고 설합니다.
따라서 사란 인간이 잠으로 내일을 위한 활력을 비축하듯이 다음에 올 생을 충전하는 기간과 같은 것으로,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생과 마찬가지로 혜택이며 즐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설합니다.
그러므로 대승불전(大乘佛典)의 정수인 법화경은 생사가 유전하는 인생의 목적을 ‘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이라 하여, 신앙이 투철하면 생도 환희이고 사도 환희이며, 생도 유락이고 사도 유락이라고 설해 밝혔습니다.
니치렌대성인도 “환희 중의 대환희”(<어의구전> 어서 788쪽)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전쟁과 혁명의 세기’가 남긴 비극은 인간의 행·불행을 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외형만의 변혁에는 없다는 교훈을 명확히 남겼습니다. 따라서 다음 세기에는 이러한 생사관, 생명관의 변혁이 가장 중요해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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