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선집 {제5장}

2014. 12. 7. 22:12佛法 .SGI






(5-1) “희()란 자타 공()히 기뻐하는 것이니라

 

이번 절에서는 <어의구전>을 배독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 진정한기쁨이라는 점을 확인합니다. 또 그러기 위한 지혜와 자비가신심이라는 두 글자에 들어 있다고 제시하고개인의 행복사회의 번영이 일치하는 시대를 만드는 것이 불법자의 사명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법화경의 지혜》에서

(5, 1999 9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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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희란 자타 공히 기뻐하는 것이니라.”(어서 761)

“자타 공히 지혜와 자비가 있음을 희라고 한다.”(어서 761)

자신도 다른 사람도 함께입니다. ‘자기만이라면 이기주의입니다. ‘다른 사람만이라면 위선이겠지요. 자신도 다른 사람도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 참된환희입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간단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까지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신심의 근본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행복’의 내용이 이 성훈에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입니다. 불계의 생명입니다. 지혜가 있어도 무자비하다면 생명은 닫혀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자비가 있어도 지혜가 없고 어리석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도 구제할 수 없습니다. 구제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자비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두 가지가 단지 ‘신심’이라는 두 글자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대성인은 “결국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同類)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할 때 반드시 무작삼신(無作三身)의 부처로 되는 것을 희라고 하느니라.(어서 761) 하고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환희 중의 대환희”(어서 788)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번영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의 행복이라고 해도 이기주의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자타 함께 지혜와 자비’를 지니는 진정한 ‘인간의 확립’입니다. 법화경이야말로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번영’을 함께 실현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5-2) 이타(利他)와 자리(自利)가 공명하는 보살도

 

남에게살아가는 힘을 북돋워 준 만큼 자신의살아가는 힘도 커지고 남의 생명을 확대한 만큼 자신의 생명도 확대된다. - 이타(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다)와 자리(자신을 이롭게 하다)’가 일치하고 공명하는보살도의 묘()’에 관해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법화경의 지혜》에서

(4, 1998 12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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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뻗어야 합니다. 실은 그렇게 해야 자신이 치유됩니다. 사람은 어떤 일이 생기면 ‘나만큼 불행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괴로움에 빠져 불평하고 실망하는 동안 생명력이 쇠퇴하고 맙니다.

그때 사람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이외의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려는 ‘인간의 유대’가 아닐까요. 이기주의에 갇혀 있으면 행복은 없습니다. 자진해서 ‘남을 위해’ 행동할 때, 자기 생명의 샘도 소생합니다.

남을 보살핀 만큼 즉 남에게 ‘살아가는 힘’을 북돋워 준 만큼 자신도 ‘살아가는 힘’이 증가합니다. 남의 생명을 확대한 만큼 자신의 생명도 확대됩니다. 이것이 보살도의 묘()입니다. ‘이타’와 ‘자리’의 일치입니다. 이타만을 말하면 오만해집니다. 남을 구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위선이 됩니다. 자신을 위한 일도 된다고 자각해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어 감사하다’는 겸허함이 나옵니다. 자타불이(自他不二)입니다. 그러므로 보살도밖에 없습니다.

 

(5-3) 서로 존경하고 함께 향상하는 길을

 

불법의 목적은 행복 추구이며 같은 행복의 추구자(追求者)로서 서로 존경하고 존중하면서 겸허하게 한결같이 행복을 지향하는자타 함께 향상하는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유럽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

(1992 6 11,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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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신심은 ‘행복’해지기 위해 있습니다. 불도수행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석존(釋尊)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 불리던 아나율(阿那律)이 있습니다. 아나율은 석존이 설법할 때 졸던 일을 깊이 반성하고 그 뒤부터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나머지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에 ‘심안(心眼)’을 얻었다고 합니다.(이하, ‘증일아함경’ 31, 《대정신수대장경》 제2권 수록, 마쓰타니 후미오 《불교백화》 지쿠마분코 참조)

어느 날, 아나율은 법의가 터져 꿰매려 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보이지 않아 바늘구멍에 실을 꿸 수 없었습니다.

곤란해진 아나율은 중얼거렸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이 바늘에 실을 꿰고 (불법자를 돕는다는) 복운을 쌓을 사람은 없는가.

그 때 누군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내게 복운을 쌓도록 해 주시오.

아나율은 깜짝 놀랐습니다. 틀림없이 석존의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세존(世尊)은 이미 아무런 공덕도 쌓을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아니, 아나율이여.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석존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나율에게 영원히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진리의 추구도 ‘이제, 이것으로 됐다.’는 끝은 없습니다. 사람들을 구제하는 실천도 ‘이제, 이것으로 됐다.’는 한도는 없습니다. 자기를 완성하는 수행도 ‘이제, 이것으로 됐다.’는 것은 없습니다.

행복의 추구도 또한 한계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갖가지 힘 중 가장 뛰어난 것은 행복의 힘이다. 이보다 뛰어난 것은 천계(天界)에도 인계(人界)에도 없다. 불도(佛道)도 이 행복의 힘으로 성취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석존이 “나만큼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 말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불법은 결코 인생을 등지거나,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행불행을 초월한 듯한 모습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자기만 특별하다는 착각은 불법과 연이 없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어디까지나 겸허한 ‘행복 추구자’로서 모든 사람과 똑같이 민중과 함께 진지하게 불도수행을 합니다. 누구보다 ‘복운을 쌓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꺼이 행동합니다.

‘이제, 이것으로 됐다.’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자, 또 복덕을 쌓자. 영원한 행복 경애를 만들자.’ 하고 투쟁합니다. 불법정신은 그 ‘영원한 향상’ ‘영원한 투쟁’을 다짐하는 마음에 맥동합니다.

“내가 그대의 바늘에 실을 꿰어주겠다.”는 석존의 짧은 한 마디에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행동에는 함께 도()를 닦는 동지라는 인간평등 철학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거울을 보고 예배(禮拜)할 때 떠오른 그림자 또한 나를 예배하느니라.(어서 769)

즉 “거울을 향해 예배할 때 거울에 비친 모습도 또한 자신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의 생명에 ‘불성(佛性)’이 있음을 믿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소중히 한다.

그때 상대의 불성도 근본적으로는 이쪽을 보고 예배합니다.

풀어서 말하면 자신이 성실한 마음으로 남을 대할 때, 대부분의 경우 상대도 또한 이쪽의 인격을 존중하게 됩니다. 기원이 근본에 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반대로 남을 경시하면 결국에는 자신도 경시 당하고 생명이 증오심에 물들면 자신도 또한 미움을 받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인류의 숙명적인 ‘악순환’을 완전히 막고 ‘상호존경’과 ‘공생(共生)’의 길을 열고 싶습니다.

 

 

(5-4) 지금을 소중히! 눈 앞의 사람을 소중히!

 

이 절()에서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소설을 통해 중요한 것은지금 이 순간이며지금 자신과 관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하는 삶의 자세를 관철해야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SGl아시아기념총회 스피치에서

(1993 5 16,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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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알기 쉬운 민화나 소설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지(大地)와 함께 살아가는 민중과 미래를 의탁할 소년, 소녀를 위해서입니다.

그중 《세 가지 질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날, 황제가 일을 하면서 세 가지 의문에 부딪쳤습니다.

그것은 첫째, 일을 시작할 때 가장 적절한 ‘때’는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어떠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는가.

둘째,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인물인가, 어떤 사람을 소중히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모든 일 중에서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의문입니다.

황제는 이 세 가지를 매우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것만 알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올바른 답을 알려주는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상금을 주겠다고 온 나라에 알렸습니다.

많은 학자가 모여 와 여러 가지 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학자’가 즉 ‘현자(賢者)’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소설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지만, 황제는 서민과 함께 살아가는 한 현자를 만나면서 진실된 해답을 찾습니다.

그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지금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에게 선()을 베풀고 남을 위해 애쓰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언젠가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오늘, 하루입니다. 지금 이 때에 전혼(全魂)을 기울입니다. 그런 ‘지금’에 ‘미래의 승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어딘가 멀리에 특별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를 지닌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 유명한 사람, 부유한 사람이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 지금 인연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소중히 한다. 옆에 있는 이 사람, 저 사람을, 그 사람의 특질을 생각하면서 전부 살려간다. 그런 사람이 현인(賢人)입니다. 거기에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얻는 길도 있습니다.

해외를 방문할 때도,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 그 사람을 최대로 진심을 다해 대합니다. 내 우호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무명(無明)이어도 좋습니다. 평범해도 좋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벗을 위해 민중을 위해, 나는 나답게 행동의 역사를 남겼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인간으로서 황제이며 인생의 황제입니다.

 

(5-5) 이타의 행동이 자신을 풍요롭게 한다

 

불법은자타 함께 행복해지고모두 승자가 되는 길이며, 그 목적을 향해서 남을 위해 힘쓰는 일이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더없이 소중한 재산이 된다고 외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청춘대화》에서

(2000 9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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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에 ‘행복의 씨앗’을 심는 일은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것이 지구 전체를 바꾸는 근본적인 작업입니다.

멀리 돌아가는 듯이 보여도 심은 씨앗이 자라서 ‘거목(巨木)’이 되면 일제히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나무 그늘에서 모두가 쉴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그러한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불법은 ‘자타 함께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희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희생하는 것은 숭고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요구하면 이상해지고 맙니다.

‘자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 참된 길입니다. ‘모두가 승자가 되는’ 길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상대에게 진력할 때에도 ‘상대에게 고마워하면서’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을 위해 이렇게 고민한 덕분에 나 자신이 크게 성장했다. 고마운 일이다.” “저 사람을 위해 이만큼 움직였기 때문에 강해질 수 있었다. 고맙다.

또 실제로 광선유포를 위해 행동한 만큼 복덕과 지혜도 넓혀집니다. ‘이타(利他)’와 ‘자리(自利)’ 이 두 가지를 갖춘 것이 학회활동입니다.

한 사람과 만난다, 누군가를 위해 기원한다, 편지를 쓴다, 설령 약속이 깨져도 몇 번이고 찾아간다, 이런 활동이 사소하게 보이거나 때로는 ‘이렇게 해도 소용 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 되돌아보면 무엇 하나 헛됨이 없었음을 반드시 알게 됩니다.

벗을 위해 뛰었기 때문에 얼마나 자신이 강하고 커졌는가. 벗을 위해 제목을 부르며 얼마나 내 마음이 풍부해졌는가. 10, 20,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부 둘도 없이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그 사람도 당신에게 고마워할 때가 옵니다. “저 사람이 있어서 내가 일어설 수 있었다.” “저 선배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렇게 웃는 얼굴로 말해 주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평생, 그런 사람을 몇명 만들었는가. 인간에게 그 이상의 보배는 없습니다.

 

(5-6)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보살도의 실천

 

이 절에서는자비의 정신을 근본으로 모든 사람에게 내재하는 불성을 철저히 존경하고 그 보편적인 존엄성을 자타 함께 발휘하는보살도의 실천이 바로자타 함께 행복해지는 대도(大道)’라고 제시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21세기의 인권을 말한다》에서

(1995 2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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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행복을 떠나 자신의 행복은 없습니다. 불법자(佛法者)의 행동의 기반은 자비의 정신입니다. ‘자()’는 ‘발고(拔苦)’이고 ‘비()’는 ‘여락(與樂)’이므로 ‘자비’는 사람들의 불안이나 공포를 없애고(발고) 기쁨과 안심 그리고 희망을 줍니다(여락).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일은 불법자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간단명료한 일일수록 어렵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의 진수는 간단명료합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입니다. 부처는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람이고 수행하며 힘쓰는 사람입니다.

불법은 이타의 정신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보살이라 부릅니다. 불전(佛典)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관세음보살, 약왕보살 등 여러 보살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보살은 그 특성을 살려 중생을 위해 헌신하고 고뇌와 재난에서 구하는 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어 문수는 지혜, 보현은 학리(學理), 미륵은 자비심, 관세음은 세음(世音, 세상의 상황)을 관하는 힘을 가지고 중생을 괴로움에서 구제합니다.

약왕은 이름대로 의약을 사용해 병을 치료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은 많은 보살 중에서도 실천의 모범으로 법화경에 등장하는 불경보살에게 주목합니다. ‘불경(不輕, 경시하지 않는다)’이라는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어떠한 사람도 업신여기지 않고 최고로 경의를 표합니다.

법화경에는 불경보살이 이렇게 말하며 사람들을 존경했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깊이 존경합니다. 결코 업신여기거나 우쭐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보살도를 수행해 즉시 성불(成佛)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법화경에서 설하는 인간존엄의 정신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불경보살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합장하며 예배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불경보살의 행동을 “일대(一代)의 간심(肝心)은 법화경•법화경의 수행의 간심은 불경품이니라.(어서 1174) 하고 불법을 실천하는 핵심으로 규정하셨습니다.

불경보살의 행동은일체중생은 불성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신념에서 나옵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내재한불성즉 보편적인 존엄성을 발휘하면 가장 존귀한 인생길을 열 수 있습니다. 그 길을 자타 함께 나아가는 것이 보살도의 실천입니다.

 

  

(5-7) 자타 함께 마음의 재()를 쌓는 인생을

 

이 절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애쓰는 보살의 행동이 자신을 장엄(莊嚴)하게 하는 영원한 역사가 된다고 강조하고 자타 함께마음의 재를 쌓는 인생을 살아가자고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법화경의 지혜》에서

(5, 1999 9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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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구제함으로써 자신도 구제됩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나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일어설 수가 있는가.

아무리 자신의 괴로움을 직시해도 더욱더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자신과 똑같은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 사람을 도와주면 자신도 ‘살아가는 힘’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이 자신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애쓰는 일’이 어쩐지 ‘손해’를 보는 듯한 경향이 있습니다. ‘자애(慈愛)’라고 말하면 냉소하는 듯한 분위기도 있는데 그런 오만이 얼마나 사회를 불행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미국인 선교사가 간디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인도의 종교는 미래에 어떠한 형식을 취하게 될까요.

종교적 논의를 거론하자 간디는 뭐라고 답변했는가.

마침 그 방에 병자가 두 사람 누워 있었습니다.

간디는 그 두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봉사하는 것, 시중을 드는 것이 내 종교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간디는 정치도 역시 ‘봉사’이며 타고르의 말처럼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모리모토 다쓰오 《간디와 타고르》, 3문명사 인용, 참조)

행동입니다. ‘보살행’ 외에 종교는 없습니다. 불법은 없습니다. 본디의 정치도 교육도 없습니다. 우리 사명은 큽니다.

“곳간의 재()보다도 몸의 재가 뛰어나고, 몸의 재보다 마음의 재가 제일이로다.(어서 1173)입니다. ‘곳간의 재’ 즉 경제에만 치중해도 경제는 좋아지지 않습니다. 설령 좋아졌다 해도 사회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입니다. 마음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움직입니다.

복운과 지혜가 넘친 ‘마음의 재’가 있으면 거기에서 참으로 풍요로운 ‘몸의 재’ ‘곳간의 재’도 갖추어집니다.

인생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추억입니다. 생명에 새겨진 추억이 남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작가 숄로호프 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노벨 문학상 작가. 대표작으로는 《고요한 돈강》, 《인간의 운명》. SGI 회장과 대담은 1974 9)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가장 괴로웠던 일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여러 가지 일들의 색채가 희미해져 가장 즐거웠던 일도 가장 슬펐던 일도 모두 지나가고 맙니다.

그리고 한번 호흡을 하고 웃음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케다 선생님이 70세가 되면 알게 되겠지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잊을 수 없는 만남》에서. 《이케다 다이사쿠전집》 제21권 수록)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하늘이라도 오를 듯한 기쁨도, 죽고 싶은 만큼의 괴로움도 지나고 보면 꿈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을 완전히 연소시킨 추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해 두고 싶습니다. 그 중에서도 광선유포를 위해 완전연소한 추억은 영읜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도대체 몇 사람이나 행복하게 했는가. 몇 사람에게서 “나는 당신 덕분에 구제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공헌을 했는가.

인생 마지막에 남는 것은, 마지막 생명을 장식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요.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타인에게도 권하는 일만이 금생(今生) 인계(人界)의 추억이 되느니라.(어서 467)입니다.

 

 

(5-8) 묘법(妙法)을 가르치는 일이 최고의 이타의 길

 

남묘호렌게쿄가 바로 모든 사람이 갖춘불성을 여는 열쇠이며, 그것을 가르치고 함께 실천하는 곳에 니치렌불법이 설하는자타 함께 행복의 극의(極意)가 있다는 점을 제시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청춘대화Ⅱ》에서

(2000 9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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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보통 자기 일도 주체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가족이라도 실제로는 행복하게 해 주기란 어렵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정치가도 유명 인사도 더러 겉모양일 뿐, 진정으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겠습니까.

초창기의 벗은 모두 가난했습니다. 지위도 없었습니다. 학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고귀했습니다.

‘저 사람도 이 사람도 모두 행복하게!’ 인류의 선각자(先覺者)로서 위대한 사명감에 불타올랐습니다.

남을 돕자, 행복하게 해 주자, 이렇게 숭고한 삶은 없습니다.

남미 페루 광포의 대공로자의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이 피와 살 이외에 나를 지탱해 준 것은 페루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이것이 그분의 ‘생애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것도 좋다. 돈을 주는 것도 좋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사람 모두에게 평등하게 줄 수는 없다. 물건에는 한도가 있다. 또 상대는 기뻐하지만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또 받으면 된다.’는 식이 된다. 결국 최고의 보시(布施: 무언가를 주는 것)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새롭고 강한 생명력을 얻어 그 사람은 자신의 일에 힘쓰고 스스로 건강해질 수 있다. 그 힘은 대지에서 물이 솟아오르듯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이타’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