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복(折伏) - 자타(自他) 함께 행복해지는 자비의 보살행

2008. 5. 28. 17:43佛法 .SGI

오황금 권장   동감입니다. 우리 모두 하반기 포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타인을 구제하는 절복(折伏)에 대해 공부해 봅시다.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말법에 들어와서 이제 니치렌이 부르는 바의 제목(題目)은 전대(前代)와는 달리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쳐 남묘호렌게쿄이며”(어서 1022쪽), “나도 부르고 타인에게도 권하는 일만이 금생 인계(人界)의 추억이 되느니라”(어서 467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말법 시대에 부르는 제목은 자행화타의 제목입니다. 화타행이 없는 창제(唱題)는 자신과 타인을 근본적으로 구제할 수 없습니다.

정법 시대의 용수보살(龍樹菩薩)이나 상법 시대의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자신이 법의 이익을 받기 위해 수행하는 ‘자행의 창제’였을 뿐, 타인을 위해 제목을 부르는 화타행의 창제는 아니었습니다.

한 빛   용수나 천태는 “(부처에게서) 부촉(咐囑)이 없는 고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고로, 부처의 구원의 제자가 아닌 고로”(어서 1358쪽)라는 말씀처럼, 받은 사명이 없고 때가 아니었기에 자행으로만 끝나는 수행이었다고 배운 기억이 납니다.

오황금   창제를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에 있는 불성(佛性)이라는 가장 강력한 자동차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시동을 켜 놓은 상태에서 기어를 넣고 엑셀을 밟지 않으면 제자리에서 공회전만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학회 활동과 절복행이 없이 혼자서 제목만 부르는 신심이라면 공회전하는 인생이 되기 쉽습니다.  

나희망   제목을 부른다 하더라도 광선유포를 위한, 사람들을 위한 ‘화타’의 일념(一念)이 없으면 완벽한 신심이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오황금   대성인은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 경권(經券)을 읽고 꽃을 뿌리고 향을 피우는 것까지도 모두 나의 일념에 갖추게 되는 공덕선근이라고 신심을 취해야 할지니라”(어서 383쪽)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절복뿐 아니라 가정방문, 보성회 근무나 무궁화반 출동, 화광회 청소, 칸나 신문배달, 회합 준비, 문화행사 출연 등 회원을 위하고 광포에 연관된 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화타행이며 복운을 쌓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의 근본 목적은 말법 민중구제인 절복을 위한 것입니다.

최인재   그러면 절복의 의의와 절복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황금   절복의 첫번째 의의는 부처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석존은 자신이 부처가 된 근본 인(因)은 보살행이었다고 말합니다.

‘아본행보살도(我本行菩薩道)’라는 유명한 경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범부가 부처가 되려면 보살도라는 이타행(利他行), 즉 절복을 해야 한다고 설한 것입니다.

절복이란 사람을 불행으로 이끄는 미혹된 생명을 타파하는 행위입니다. 절복을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의 마(魔)를 타파해야 합니다.

절복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 불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자신속에 있는 기심의 마(두려움, 망설임, 작은 마음)를 이겨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왕모범   이렇게 하루하루 현장에서 자신의 기심의 마를 이겨 내려는 행동 속에 부처의 생명이 열려 나오므로 자신의 행복과 성불을 위해서도 절복을 하라는 것이군요.

오황금   맞습니다. 조직을 위해, 단순히 숫자를 늘리기 위해 절복을 하라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자행화타라는 실천 속에 우리 생명속에 있는 불성을 열어 활성화하면 의정불의의 원리로서 자신의 변화를 통해 자신도 주변의 환경도 행복의 방향으로 열립니다.  

최인재   도다 선생님은 “자신만을 위해 기원하고 광선유포를 위한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감추어 두고 혼자서 몰래 먹으려는 것과 같은 신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위대한 불법을 만나 공덕 속에 살면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하려고 하지 않는 이기적인 작은 마음속에는 진정한 부처의 생명이 나오지 않겠지요.

한 빛   가끔 절복(折伏)이라는 단어를 강하게 받아들여 상대를 굴복시켜 이긴다고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복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생명속의 마성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오황금   그렇습니다. ‘상대방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면 낮은 생명관이나 가치관을 버리고 올바른 법에 귀의할까’라고 진지하게 고민하며 이야기하고 납득시키는 것이 절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을 통해 자신의 생명속에 있는 악업도 소멸시키고 행복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절복의 두번째 의의는 자비가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상대방의 행복을 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진정한 절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희망   친구를 절복하고 싶은데 잘 안 되어 고민하던 한 부인부가 이케다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남편의 반대로 신심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가자 그 친구는 ‘당신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라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이케다 선생님은 “당신의 마음속에 혹시 ‘그것 봐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생각은 상대방에게 전부 전달됩니다. 자신입니다. 상대방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위해 제목을 올리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절복은 자비입니다”라고 엄하게 지도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부는 친구의 남편이 하루 빨리 건강해질 수 있도록 열심히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친구 부부는 입회하였고 그 후 두터운 우정의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오황금   상대방은 지금까지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살아왔는데, 그것은 불행한 사고 방식이니까 무조건 잘못됐다, 벌을 받는다는 식의 강요나 일방적인 대화는 오히려 반발심을 불러옵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상황에 맞게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입정안국론〉에서 나그네와 대화하는 주인을 ‘난실의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난이 있는 방에는 그 향기가 자연스럽게 옷에 배어 납니다. 이와 같이 대화란 자비의 향기가 되어 상대방을 감싸듯이 하는 것입니다.

왕모범   절복은 상대방의 불계의 생명에 예배하는 것이며 최고로 상대방을 존경하는 행동이라는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오황금   셋째 포인트로 절복은 진실을 끝까지 말한다는 것입니다. 절복을 하러 간다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절복 대화’라는 것은 결국은 진실을 이야기하러 가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어본존께 기원했더니 이렇게 행복해졌습니다”라고 자신의 체험이나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빛   “이 신심을 통해서 행복해지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위대한 어본존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우리 SGI는 인류의 숙명전환과 평화를 위해 싸우는 최고의 단체입니다”라고, 자신이 학회 속에서 보고 배우고 느낀 대로 또 확신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군요.

오황금   그러한 자비의 마음과 행동은 상대에게도 전해지지만, 이야기를 하는 속에 자기 자신도 불법에 대한 확신이 깊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복은 끝까지 이야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면 어떻게든 상대에게 전해집니다.

나희망   결국 절복은 진실을 말하고, 자비를 실천하고, 마와 싸우는 것이군요.  

오황금   맞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생명속에 있는 불계가 용현합니다. 부처와 똑같아 집니다. 그것이 절복의 공덕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남에게 물품을 베풀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법인데, 비유하면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내 앞이 밝아지는 것과 같다”(어서 1598쪽)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복은 남을 위해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자타 함께 행복해지는 최고의 보살도입니다.

한 빛   이와 연관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영국 런던에 살고 있던 어느 소년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호수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 마침 호숫가를 지나던 시골 소년이 용감하게 뛰어 들어 그 소년을 구해 줍니다.

이에 소년의 아버지가 시골 소년을 불러 “고맙구나. 너의 꿈은 무엇이니?”라고 물어보니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고 싶어요. 그러나 가난해서 대학에 갈 수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구사일생한 소년이 아버지에게 시골 소년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줄 것을 간청했고, 결국 대학에 입학하여 의사가 됩니다.

시골 소년은 나중에 페니실린을 만든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이고, 물에 빠졌던 도시 소년은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침공을 앞두고 중동을 순시하던 처칠은 급성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맵니다. 당시 폐렴은 걸리면 죽게 되는, 약도 없던 시대입니다. 이때 기적의 약이라고 불리는 페니실린을 만들어 처칠을 구한 사람이 바로 플레밍입니다.

오황금   아름다운 일화군요. 이기주의에 갇혀 있으면 행복은 없습니다. 그것을 부수고 나와 ‘사람들을 위해’ 행동할 때 자기 생명의 샘도 소생하는 것입니다.

남을 보살펴 준 만큼, 즉 남에게‘살아가는 힘’을 끄집어 내 준 만큼 자신에게도 ‘살아가는 힘’이 증가합니다.

남의 생명을 확대해 준 만큼 자기 생명도 확대됩니다. 이것이 보살도의 묘(妙)입니다. 이타(利他)와 자리(自利)의 일치입니다.

최인재   《법화경의 지혜》 제4권 ‘십계호구’의 장에서 본 말이 생각납니다.

“이타만 말하면 오만해진다. 남을 구해 준다는 위선이 된다.

절복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자각해야 겸허함이 나온다. 자신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전(自轉)하면서 공전(公轉)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주 법칙이다”라고 한 부분입니다.

오황금   대구 지하철 화재 때 가장 먼저 달려 와 자원봉사를 한 사람은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사고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소중한 가족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당한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슬퍼도 나와 같은 괴로움에 빠진 사람을 격려하는 것, 결국 타인을 구하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왕모범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기면 ‘나 만큼 불행한 인간은 없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만 불쌍하게 여기고 자기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기 괴로움에 얽매여 불평과 실망하는 가운데 생명력이 쇠퇴합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은 역시 자기 외의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려는‘인간의 연대’가 아닐까요.

나희망   동감입니다. 저도 비록 현실에 힘든 과제가 많지만 지지 않고 자비의 보살행인 절복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