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실상(諸法實相) - 현실변혁을 향한 끝없는 도전

2008. 5. 28. 16:40佛法 .SGI

               

 

 

 

                              제법실상(諸法實相) - 현실변혁을 향한 끝없는 도전

오황금   맞습니다. 부처란 끊임없이 향상하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분투하는 사람의 이명(異名)이라고 합니다. 성장을 멈추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은 범부의 마음입니다.

어디까지나 신심은 쉼없는 전진입니다. 도다 선생님이 ‘전진하지 않으면 퇴전’이라고 하신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법화경 방편품에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법리가 나오는데, 이 법리의 핵심은 현실변혁을 향한 끝없는 도전이 부처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나희망   제법실상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그런 의미가 있는지는 몰랐네요. 오늘은 제법실상에 대해서 깊이 공부해 보고 싶습니다.

오황금   좋습니다. 그럼 먼저 방편품에서 제법실상을 어떻게 설하고 있는지를 살펴 봅시다. 우리가 매일 독송하는 부분에 있지요.

최인재   제가 그 부분을 읽어 보겠습니다.

“부처가 성취하신 바는 제일(第一)희유(稀有) 난해(難解)의 법이니라.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곧 능히 제법의 실상을 구진(究盡)하셨느니라. (제법의 실상이란) 소위 제법의 여시상(如是相), 여시성(性), 여시체(體), 여시력(力), 여시작(作), 여시인(因), 여시연(緣), 여시과(果), 여시보(報), 여시본말(本末)구경등(究竟等)이니라.”(법화경 154쪽)

왕모범  이 글의 앞뒤에는 부처의 지혜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가를 되풀이하여 설하고 있습니다.

그 부처의 지혜에 대해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제법의 실상을 속속들이 깊이 연구한 지혜’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실상이란 무엇인가를 여시상,여시성…… 여시본말 구경등으로 이어지는 십여시(十如是 = 십여실상〈十如實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황금   제법실상은 법화경 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법문입니다. 대성인께서는 “일체중생 개성불도(皆成佛道)의 근원이라고 말함도 오직 이 제법실상의 사자(四字) 이외는 전혀 없느니라”(어서 1139쪽)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로’라는 법화경의 테마는 바로 제법실상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 빛   고작 네 문자가 일체중생이 성불하는 근원이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군요.

오황금   먼저 기본적인 의미부터 알아봅시다. ‘제법(諸法)’이란 이 현실세계에서 여러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상(實相)’이란 문자 그대로 ‘진실한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물은 현실세계에서 얼음이나 수증기 시냇물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제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모습이나 성질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데, 수소와 산소가 결합한 H2O 물분자입니다. 이러한 물의 본래 모습을 알게 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입니다.

그런데 부처의 눈으로 보면 물분자도 결국은 인과법칙과 생사의 법칙에 따라 생성되었으므로, 물분자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의 법칙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야말로 궁극의 실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희망   제법실상초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이 바로 그 말씀이군요.

“이 경문의 의(意)는 어떠하오. 답하여 가로되 하지옥으로부터 상불계까지의 십계의 의정(依正)의 당체(當體)가 모두 일법(一法)도 남김없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상(相)이라고 하는 경문이니라”(어서 1358쪽)고.

오황금   앞에서 물을 예로 들었는데, 제법을 사람들에게 접목하면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인간 군상을 보여줍니다.

불법에서는 인간의 경애를 10가지 단계로 정리하여 지옥계부터 불계까지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있지만 그 실상은 모두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상(相), 즉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물도 태양도 지구도 별도 우주도 모두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가 나타난 모습이라고 합니다.

최인재   물리학에서는 전기력, 중력, 강력, 약력 등 복잡한 우주의 힘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힘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무량의경〉에서도 “무량의(無量義: 전 세계 삼라만상, 사물사상의 일체)는 일법(一法)에서 생(生)한다”라고 하는데. 모두 제법실상과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왕모범  결국 전 우주 삼라만상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가 나타난 모습이므로, 법화경〈=妙法蓮華經〉은 전 우주의 실상을 낱낱이 설해 밝힌 경이라는 것이 실감납니다.

부처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생명은 대우주의 생명과 전혀 차이가 없고, 범부와 부처의 생명도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가 되는군요.

차별 없이 모두 공존(共存)할 수 있는 진정한 평등대혜(平等大慧)의 사상이 제법실상에 담겨 있습니다.

한 빛   십여시(十如是) 마지막 구절인 ‘여시본말(本末) 구경등(究竟等)’은 부처의 생명〈本〉도 구계(九界)의 중생의 생명〈末〉도 결국 묘법의 당체(當體)로서 동등하다는 의미라고 배웠습니다.

오황금   맞습니다. 실상이란 무명을 극복한 부처의 깨달음에서 본 생명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거기서는 일체가 평등하며 주체와 객체, 자신과 타인, 마음과 신체, 마음과 물질 등 일체의 차이와 차별을 초월합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십계의 차별도 초월한 광대한 너비를 지닌 영원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나희망   말씀을 들으니 실상은 불법에서 말하는 공(空)의 세계와 닮았네요. 반면 제법은 색(色)과 상통하는 개념이구요. 그런데 이 세상의 모습을 보면 좋은 일도 많지만 전쟁이나 폭력 등 좋지 않은 제법의 모습도 많습니다.

제법은 실상이 나타난 모습이므로 실상, 즉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안에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황금   좋은 지적입니다.  대우주는 원품의 법성이라 하여 조화와 화합으로 이끄는, 질서를 지향하는 ‘코스모스’의 여시성(如是性)이 있습니다. 그것을 불성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무질서를 지향하는 ‘카오스’라는 여시성도 있는데, 이것은 원품의 무명에 해당합니다. ‘묘법(妙法)’에서 묘(妙)는 미혹, 무명이고, 법(法)은 법성, 깨달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주 자체가 묘법이므로 우주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성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주에 코스모스의 여시성만 있다면 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번뇌가 없으면 깨달음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카오스의 여시성만 있다면 혼돈 뿐으로 아름다운 조화의 세계를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오케스트라에서 각각의 연주자만 있고 그것을 하나로 묶는 지휘자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휘자가 없으면 아름다운 교향곡은 연주할 수 없습니다.  

그 지휘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이 우주에서 아름다운 교향곡이 연주되는 행복한 세계가 불국토라 할 수 있습니다.

최인재   그렇군요. 묘법이라는 두 글자에 생사(生死)라는 법칙 외에 그런 깊은 뜻이 담겨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결국 나에게 있는 미혹의 실상을 끄집어내어 인생을 불행하게 살아가는가, 아니면 법성의 부처의 생명을 용현하여 삼세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의 인생을 구가할 것인가의 문제군요.

오황금   맞습니다. 대성인은 제법실상에 대해 말씀하신 주요 어서에서 반드시 본존님에 대한 신심의 실천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 행학이 끊어지면 불법은 없느니라. 나도 행하고 남도 교화하시라. 행학은 신심(信心)에서 일어나는 것이로다. 힘이 있는 한 일문일구라도 설(說)할지니라”(어서 1361쪽)는 구절은 항상 생명에 새겨두어야 할 어문입니다.

왕모범  이제까지 이야기한 제법실상을 현대인이 알기 쉽게 정리하면, 제법은 개개의 생명, 그 제법의 실상은 하나의 커다란 우주생명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한없는 개개의 생명은 천차만별의 다채로운 생명의 곡을 연주하고, 그 곡들은 통일성을 지니고 우주 대생명 묘법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교향곡이 됩니다.

오황금   훌륭한 비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옥계의 중생이라도 나의 진실된 모습〈실상〉, 즉 그대 자신을 알면 실은 우주 생명과 일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이 이론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다는 것이 이 제법실상의 법리에서 증명됩니다.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당체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미혹할 때는 범부라 이름하고 깨달으면 부처라고 이름할 뿐, 그 실상은 동일한 것입니다.

한 빛   왜 제법실상이 일체중생이 성불하는 근원이 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제법의 실상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부처의 눈으로 상세히 설해 밝힌 것이 십여시(十如是)이군요.

오황금   그렇습니다. ‘여시(如是)’란 ‘이와 같은’이란 의미로 각각의 현상, 개개의 생명 즉, 제법에 대해 부처는 “이와 같은 상, 이와 같은 성……”이라고 실상을 지견(知見)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진리〈실상〉라 해도 어딘가 먼 별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제법〉에서 절대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상에 따라 제법이 나타나지만 실상은 제법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실상즉제법’이고, ‘제법즉실상’입니다.

현실세계〈제법〉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결심 ― 이것이 부처의 마음입니다. 동시에 현실세계의 표면에 얽매이지 않고 거기에 간직된 위대한 진실의 모습〈실상〉을 파악하여 가르치고 열어갑니다.

나희망   제법실상이라는 말 속에 불법의 철저한 현실주의와 현실을 극복하는 지혜가 담겨 있군요.

오황금   제법실상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변혁하는 철리(哲理)입니다. 고뇌로 가득찬 현실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피하지도 않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불계의 생명을 개발하고 세계의 안온을 실현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최인재   제법실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개인으로 볼 때는 일생성불을, 사회적으로 보면 입정안국을 실현하는 것이라도 해도 좋을까요?

오황금   그렇습니다. 일생성불이란 이 현실의 세상에서 성불하는 것입니다. 성불이라 해도 무엇인가 고정적인 도달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 한복판에서 고투하는 그 모습 그대로 부처의 경애를 여는 것입니다.

고뇌하는 경애에서 부처의 경애로 그리고 부처의 경애에서 현실의 변혁으로, 이렇게 항상 출발하는 신심의 강함, 계속 싸우는 신심의 강함, 거기에만 불계가 있습니다.

왕모범  이 부분에 대한 이케다 선생님의 스피치가 생각납니다.

“제법실상이라는 불안(佛眼)으로 보게 되면 삼라만상은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자신만의 행복도 없으며 타인만의 행복도 없습니다.남을 행복하게 해 준만큼 자신도 행복해집니다.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한 자신의 행복도 완전하지 않다’라고 보는 것이 제법실상이며, 따라서 현실변혁을 위한 한없는 도전이 제법실상의 마음입니다”라고.

한 빛   ‘일체중생의 고(苦)는 나의 고(苦)’라고 외치신 부처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군요. 대성인은 불법 이전의 사람일지라도 민중의 괴로움을 구제한 사람은 부처의 사자로서, 내심(內心)에는 불법의 지혜를 간직하고 행동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희망   대성인은 또 입정안국론을 쓰신 심경(心境)에 대해 “다만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법을 위하며 사람을 위해서이지 자신을 위해 이를 말함이 아니로다”(어서 35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대난의 폭풍우도 이 민중구제를 향한 불꽃을 꺼뜨리지 못했습니다. 이 정신을 이어받아 입정안국의 깃발을 높이 들고 마키구치 선생님께서는 옥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역대  회장들의 사신홍법의 분투도 이것과 같습니다.

오황금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종교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매몰하는 현실 추종의 종교,이 세상을 외면하는 현실 거부의 종교, 저 세상으로 도망치는 현실 도피의 종교가 있습니다.

법화경은 이 어느 것도 아닙니다. 법화경의 제법실상은 현실을 변혁하는 철학입니다.

‘운명론에 따르지 않겠다. 체념에도 동조하지 않겠다. 그런 무력감들을 떨쳐버리는 발판을 만들겠다. 그렇기 때문에 바꾸는 것이다’라고 투지를 불태웁니다.

최인재   민중을 고뇌에서 구하기 위해 불법이 있고 창가학회가 있습니다. 그 학회와 함께 싸우는 인생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오황금   숙명이라고 생각되는 곤란한 무대도 모두 본래 내 사명을 완수할, 둘도 없는 장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떠한 숙명도 빛나는 사명으로 전환하는 것이 제법실상의 지혜를 안 사람의 인생입니다.

현실의 대지에서 대환희의 세계를 만들어 넓히는 상쾌한 도전의 인생을 법화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