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논문
2008. 4. 29. 15:03ㆍ佛法 .SGI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琴章泰*
1)
目次
Ⅰ. 攻西派의 성립과 신후담의 위치
Ⅱ. 신후담의 서학 인식과 비판 태도
Ⅲ. 천주?태극 개념의 논변
Ⅳ. 영혼론의 비판 논리
Ⅴ. 신후담 서학비판론의 특성
Ⅰ. 攻西派의 성립과 신후담의 위치
18세기 전반 星湖李瀷(1681-1763)은 천주교 교리의 신비적 신앙 내용을
비판하면서도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열린 자세로 서학에 대응한
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을 받은 문인들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
에는 적극적이면서도 서양과학에 대한 이해에는 소극적이었던 愼後聃?安鼎
福등의 攻西派와 서양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다가 천주교 교리를 신봉하
는 데로 나갔던 權哲身?權日身?李家煥?李基讓?丁若鏞등 信西派로 양분
화하였다.1) 연령층으로 본다면, 서학비판 입장을 취한 攻西派의 인물들이
성호의 초기 문인으로 老壯層이었다면, 서학신봉 입장을 취한 信西派의 인
물들은 성호의 후기 문인으로 少壯層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당시 서학에 대
한 대응의식의 변화 과정과 적응 양상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서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攻西派’라고 할 때, 당시의 도학자들은 누구
나 ‘공서파’가 될 수 있는 입장이었으므로, ‘공서파’가 성호 문하에만 있었던
* 서울대 교수, 종교학
1) 星湖학파를 서학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攻西派’와 ‘信西派’로 나누어 보는 견해
와는 달리, 도학 전통에 대한 입장에 따라 ‘左派’와 ‘右派’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종교학 연구 2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서학에 대한 비판이나 수용이 성호와 성호문인을
중심으로 주도되었던 사실을 주목한다면, 공서파나 신서파의 성립은 성호학
파에서 발단하여 성호학파 바깥으로 확산되어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전반과 후반에 서학비판이론을 체계화하여 제시한 공서파의 주요
인물로는 성호 문하에서 활동한 愼後聃(遯窩?河濱, 1702-1761)?安鼎福(順
菴, 1712-1791) 등과, 성호 문하 바깥에서 활동한 李獻慶(艮翁, 1719-179
1)?洪正河(髥齋, 생몰년 미상)?李基慶(瘠菴, 1756-181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공서파의 입장은 당시 서학 수용의 양상에 상응하여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공서파의 전개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
는 성호 문하에서 신후담?안정복에 의해 서학비판론이 제기되는 단계이고,
둘째 단계는 천주교신앙활동의 초기에 안정복?이헌경?홍정하 등에 의해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비판론이 제시되는 단계이며, 셋째 단계는 이기경에
의해 正祖시대 천주교 신앙활동이 일어나던 과정에서 사건과 배척론의 전
개과정을 사료로 정리하는 단계이다.
첫 단계는 18세기 전반과 중반 아직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이전에 성
호 문하에서 漢譯西學書를 읽고 나서 천주교 교리의 논리적 모순을 찾아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단계이다.
18세기 전반에는 李瀷의 초기 제자인 愼後聃이 서학비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23세(1724)때 西學때 을 저술하여 西學書인 靈言?勺? 天主
實義? 職方外記를 조목별로 비판함으로써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 체
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서 그는 도학의 이단비판론적 입장에 따라 천주교 신
앙을 전면적으로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아쉬워하며 이익을 탐내는 마음’(貪
生惜死之利心)으로 규정함으로써 서학을 異端의 한 유형으로 비판하는 입장
을 전제로 밝히고 있다.2)
한편 安鼎福은 18세기 중반 성호 문하에서 서학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757년
李瀷에게 올린 편지에는 천주교 교리 서적을 검토하면서 天堂地獄說이나
靈魂개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정밀하게 전개하고 있다.3)
둘째 단계는 18세기 후반 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1784) 信西派의 천주교 신앙활동이 일어나는 초기 단계이다.
2) 闢衛編, 권1, 16, ‘愼遯窩西學때: 靈言?勺’, “至於西泰, … 亦不能自掩其貪生惜死
之利心.”
3) 順菴集, 권2, 26-30, ‘上星湖先生書(戊寅) 別紙’.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3
먼저 안정복은 1784-85년 사이에 본격적인 서학비판론을 제기하였다. 그
는 이때 ?天學考?를 저술하여 서학이 중국 역사 속에 이미 수차 들어왔다
가 쇠퇴한 것임을 주장하고, ?天學問答?의 저술을 통해 서학이 老?佛?
楊?墨이나 왕양명처럼 성리학에서 배척해야 할 이단이며, 黃巾賊?白連敎
등의 流賊이나 자칭 彌勒佛과 같은 邪敎라고 규정하는 비판 이론의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보다 약간 뒤에 李獻慶도 ?天學問答?을 저술하고 있다.4) 이
헌경은 서학을 추종하는 자가 많은 까닭은 老?佛등의 異端을 따르는 것
처럼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급속히 이루는 것을 기뻐하는 경박한 심리(好
新喜捷之心)에 영합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5) 안정복과 이헌경이 모두
?천학문답?이라는 제목의 서학비판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서학
의 문제가 관심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예리한 쟁점으로 떠올라 활발한 논쟁
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아직도 ‘天學’이란 명칭을 허용하
고 있는 것은 ‘西學’을 ‘天主學’ 또는 ‘天學’으로 일컫는 천주교쪽의 명칭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후기사회에서 서학에 대한 비판과 배척이
격렬해지면서 ‘서학’이란 명칭도 거부되고 오직 ‘邪學’이라 일컬어졌던 사실
과 비교해 보면, ‘天學’이란 호칭은 비록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면서도
서로 마주하는 토론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1791년 珍山에서 천주교도 尹持忠?權尙然이 제사를 폐지하고 神主
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禁書令과 禁敎令을
내렸는데, 바로 그 직후에 서학의 교리서를 조목별로 비판하였던 인물로는
洪正河가 있다.6) 홍정하는 4종의 천주교 교리서를 직접 읽고 조목을 나누
어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신후담의 경우에 견주어지지만, 비판 태도는 비록
토론의 형식을 여전히 지니면서도 이미 전면적이고 철저한 배척 입장을 엄
격하게 견지하였다.
셋째 단계는 1780-90년대에 천주교 신앙활동이 正祖의 측근인 畿湖南人
4) 이헌경의 ?天學問答?이 저술된 시기는 안정복이 ?天學問答?이 저술되는 1785년보
다 약간 늦은 시기로 보인다. 안정복은 1789년에 보낸 ?答艮翁李參判夢瑞(獻慶)書?
( 순암집 , 권5, 36)에서 이헌경의 ?天學問答?을 빌려보고, 자신의 ?天學問答?을 빌
려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5) 闢衛編, 권1, 10, ‘李艮翁天學問答’, “聖人之學, 理旣平易而用工辛苦, 異端之學, 語
甚新奇而用工徑捷, … 老氏之無爲, 佛家之頓悟, 適中其好新喜捷之心, 故趨之者甚衆.”
6) 洪正河(髥齋)는 正祖때의 處士로 그 인물에 관해 아직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서학비판저술은 ?證疑要旨???實義證疑???萬物眞源證疑???眞道自證證疑??
?盛世芻?證疑?의 5편으로 이루어진 四編證疑로 許?이 편찬한 大東正路(권
5-6)에 수록되어 있다.
종교학 연구 4
속에서 일어나자, 洪樂安?李基慶등은 천주교 신앙활동을 배척하여 사회문
제로 확산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한 시기이다. 이기경 자신은 이 시기에 전
개되었던 천주교 신앙 활동에 따른 갈등과 논란의 과정을 闢衛編으로 정
리하였다. 이는 정조시대 천주교신앙의 확산과 비판의 쟁점을 역사적 사료
로서 가치가 있다.7)
공서파의 서학비판론은 서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유교의 비판적 입장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으며, 서학이 제기한 새로운 문
제에 대해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유학의 자기인식을 드러
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18세기 공서파의
서학비판론의 문제는 이론적 비판체계를 제시한 신후담?안정복?이헌경?
홍정하의 경우를 중심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신후담은 23세때(1724) 星湖李瀷의 문하에 나와 수학하면서 西學에 접
하게 되었는데, 특히 西學의 종교적 영역인 천주교 교리문제에 예민한 관심
을 보였다. 그가 1724-25년 사이에 스승 이익과 서학에 관해 문답한 ?紀聞
篇?을 보면, 이익이 서학의 긍정적 측면을 주목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職
方外紀를 처음 보고 나서 서학이 불교를 답습한 것이요 邪學이라고 규정
하는 비판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8) 이무렵 그는 西學서적으로서 천주교의
영혼론을 제시한 靈言?勺과 유교문화권에 가장 널리 알려진 敎理書인
天主實義및 세계지리와 서양의 문물을 소개한 職方外紀의 3종을 검토
하면서 道學의 정통주의적 입장에서 西學을 邪學으로 비판하는 西學때 을
저술하였다. 西學때 은 조선후기에 성리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천주교의 교
리서를 조목별로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던 최초의 작업으로 주목
될 필요가 있다.9)
7) 이기경의 闢衛編(兩水本)은 1801년 辛酉敎獄까지의 18세기말에서 서학에 대한 비
판과정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 데 비하여, 이기경의 현손 李晩采는 이기경의 闢
衛編을 토대로 삼아 19세기중반 憲宗대까지 조선후기 서학의 전파와 비판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闢衛編을 편찬하여 1931년에 간행하였다.
8) 서종태 譯, ?李瀷과 愼後聃의 西學에 대한 토론?(1), 란山敎會史報27(부산교회사
연구소, 2000. 7.), 100쪽, “竊嘗求西泰所撰職方外紀觀之, 則其道全襲佛氏, 其爲邪學
無疑.”
9) 西學때 은 신후담이 23세때인 1724년(갑진)에 저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星
湖문하에서 서학에 관해 문답한 ?紀聞篇?이 초보적 이해수준에 머물고 있는 사실
과 비교해 보면, 西學때 은 성호의 입장과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는 자신의 입장을
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저작이 훨씬 더 뒤에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5
Ⅱ. 신후담의 서학 인식과 비판 태도
신후담은 西學때 에서 영언려작 ? 천주실의 ? 직방외기 의 순서로
서학서적을 검토하고 있는데, 영혼론을 제시한 영언려작 을 가장 먼저 다
루었다. 이런 순서에는 그의 의도가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천
주교의 ‘영혼’개념이 천주교 교리의 근본 과제요, 다른 모든 문제를 포함하
는 비판 체계에서 기본 전제가 되는 것이라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러나 영언려작 의 영혼론에 대한 신후담의 비판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해
명하기에 앞서, 천주실의 ? 직방외기 에 대한 그의 서학비판론이 제기하
는 다양한 쟁점을 통해 서학 인식의 범위와 비판론의 전반적 성격을 이해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후담의 서학 비판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두
가지로 집약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천주교를 불교와 연관시켜 인식하고
비판하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서양문물로서 세계지리와 서양의 교육제도
에 관심을 보이면서 중화의식과 유교전통에 따르는 비판적 입장을 확립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1. 불교와 연관성 속의 비판
신후담은 천주실의 에 대해 “그 귀결은 ‘천당?지옥의 설로 겁주어 유
혹하고, 사람이 죽어도 精靈은 불멸하는 것이므로 천주가 사람이 죽기를 기
다렸다가 상벌을 내린다는 것에 불과하다”10)고 규정하고, 천주교 교리가 귀
결되는 ‘천당지옥설’과 ‘精靈불멸설’은 유교에서는 없는 불교의 설이라 지적
한다. 이에 따라 그는 “(천주교가) 불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우리 유교와
같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불교의 자질구레한 설을 주워 모아서
도리어 불교를 배척하는 명목을 삼으니, 릿치 등은 우리 유교의 죄인일 뿐
아니라 불교의 역적이다”11)라고 하여, 릿치가 제시하는 천주교의 입장이 유
교와 일치를 주장하지만 유교와 다르고 불교를 배척하지만 불교와 같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靈魂불멸설’과 더불어, ‘童貞을 지킴’과 ‘세
10) 벽위편 , 권1, 32, ‘西學때: 天主實義’, “其歸趨, 則不過以天堂地獄之說恐誘之, 以爲
人死而精靈不滅, 故天主待其死而賞罰之.”
11) 같은 곳, “吾未知異於佛氏者何事也, 同於吾儒者何事也, 區區?拾乎佛氏之餘論, 反以
斥佛爲名, 瑪竇諸人, 不徒吾儒之罪人, 抑亦佛氏之反賊也.”
종교학 연구 6
속과 인연을 끊음’은 불교와 같고, 천주교에서 세상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은 불교의 ‘勸善’과 같고, 천주교의 미사첨례는 불교의 ‘頂禮’
와 같고, 천주교에서 세간의 福樂을 버리고 산골짝에 은둔하여 수도하는 것
은 불교의 ‘出家’와 같고, 천주교에서 죄를 뉘우치는 의례(拔地斯摩之禮?恭
?桑之禮)는 불교의 ‘懺罪’와 같다고 하는 등 서로 유사한 점을 일일이 열
거하고 있다. 그만큼 천주교 교리의 전반적 성격을 불교와 동일시하여 서학
비판의 기본 입장을 삼고 있는 것이다.
신후담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대개가 불교의 남은 부스러기들을 본받아
서술하였으니, 그 식견의 비루함이 불교보다 열등하다” 하고, “이러한 설명
들은 불교보다 더욱 천박하니 어찌 사람을 속일 만하겠는가. 스스로 그 허
황함을 드러낼 따름이다”12)라고 하여,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서 더욱 열등
한 것이라 규정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학문이 중국에서 이미 성행하고 있
으며, 우리나라 사람들도에도 많은 이가 기뻐하고 사모하여 이를 일컫기에
이르렀다”13)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는 천주교 교리를 포함한 서학이 당시
우리나라의 유교지식인들 사이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현실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며, 그의 비판 태도는 천주교를 불교와 동일시함으로써 불
교에 대한 도학의 闢異端論的비판론의 확고한 기반을 활용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라 하겠다.
2. 세계지리와 서양교육제도에 대한 비판
신후담은 직방외기 에서 제시된 세계지리의 지식을 거부하고 중국 중심
의 華夷의식을 재확인한다. 곧 “중국은 천하의 중심에 자리잡고, 풍속과 기
후가 바르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성인과 현인이 잇달아 나왔고, 유교를 숭
상하며, 그 풍속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은 참으로 외국이 미칠 수 있
는 것이 아니다”14)라고 하여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극진하게 높였다. 이
에 비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바다 끝 외딴 지역이요, 오랑캐의 궁벽한
지방에 불과하여, 스스로 중화문명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제 단지 그 토
12) 벽위편 , 권1, 41-42, ‘西學때: 職方外紀’, “皆祖述乎佛氏之緖餘, 而其見之陋, 又出
於佛氏下, … 此等說, 視諸佛氏, 尤爲淺露, 曾何足以誣人, 適足自狀其荒誕而已.”
13) 벽위편 , 권1, 41, ‘西學때: 職方外紀’, “歐羅巴之學, 頗已盛行於中國, 至於我東人, 亦多有悅慕而稱道之者.”
14) 벽위편 , 권1, 40, ‘西學때: 職方外紀’, “中國處天下之中, 得빌氣之正, 自古?今, 聖
賢迭興, 名敎是尙, 其빌俗之美, 人物之盛, 固非外國之所可及.”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7
지의 크기가 대략 서로 비슷한 것으로 갑자기 감히 중국과 병렬하여 뒤섞
어 일컫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미 전혀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15)라고 하여,
서양을 변방의 오랑캐로 낮추어 중국과 병렬시키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
다. 이처럼 신후담은 스승 李瀷이 서학의 세계지리 지식을 합리적인 것으로
적극 수용하였던 태도와는 달리, 도학정통의 華夷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보
수적 입장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신후담은 직방외기 에서 소개된 서양의 학교제도에도 깊이 관심을 기울
이면서, 小學?中學?大學의 과정이나 시험제도와 인재선발제도는 유교와
비슷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가르치는 내용이 다르다는 차이를 주목하였다.
그는 유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天命인 本然의 善에 근원하고 人倫인 일용의
떳떳함에서 드러나는 것’(原於天命本然之善, 著於人倫日用之常)으로서의 ‘道’
임을 확인하고, 小學에서는 ‘德性을 기르고 根基를 북돋우기’(涵養德性, 培壅
根基)를 먼저하며, 大學에서는 小學에서 가르친 것에 근거하여 ‘窮理하여
德을 높이고, 修身하여 사업을 넓혀서, 天命의 善을 온전히 하고 人倫의 떳
떳함을 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에서 소학
과 대학이 德性과 人倫을 배양하고 실현하는 일관된 과정임을 밝혔던 것이
다. 이에 비해 서양의 小學에서 가르치는 내용(古賢名訓?各國史書?各種詩
文?文章議論)에 대해 “덕성을 기르고 근기를 북돋우는 일에 미치지 못하
니, 이것은 이미 本領이 있는 곳에 전혀 어두운 것이다”라고 하여 가르침의
핵심을 망각한 것이라 비판하고 中學에서 가르치는 내용(논리학?물리학?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기르고 북돋우는 공부가 소학에서 빠졌으니 중학에
서 변론하고 관찰한다는 것이 장차 무엇에 의거하여 근거를 삼을 것인가”
라고 하여 근거가 상실된 공부라 비판하였으며, 大學에서 가르치는 내용(醫
科?治科?敎科?道科)에 대해서는, 醫는 비천한 기술이라 治?敎?道와 병
렬될 수 없는 것이라 하고, 또 治?敎?道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갈라
놓아 세 가지 것으로 삼았으니 서로 관통할 수가 없다”고 하여 학문의 통
합적 일관성을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 따라 학문의 전문적 분화를 중시하
는 서양의 학문 방법을 비판하였다.16)
15) 같은 곳, “歐羅巴等諸國, 不過窮海之絶域, 裔夷之偏方, 不能自進於華夏, 今乃徒以其
土地之大小, 略相彷彿, 而輒敢幷列而混稱之者, 固已不倫之甚矣.”
16) 벽위편 , 권1, 43-44, ‘西學때: 職方外紀’, “(小學)未嘗略及於涵養德性, 培壅根基底
事, 此已全昧乎本領之所在矣, … 其涵養培壅之功, 闕於小學, 則及乎中學, 所以때所以
察者, 將欲何據而爲之基乎, … (大學)判然爲三件物事, 而不能相貫通也.”
종교학 연구 8
中學의 敎科??논리학(落日加)-- 辨是非之法
??물리학(費日加)-- 察性理之道
??형이상학(?達費西加)-- 察性理以上之學
大學의 敎科??의학(醫科)-- 主療病疾
(4科) ??법학(治科)-- 主習政事
??인문학(敎科)-- 主守敎法
??신학(道科)-- 主興敎化
여기서 신후담은 서학을 비판하면서 유교와의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차이가 뚜렷하게 제시될 수 있다면 이단을 비판하기
도 쉽고 해로움도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 다만 서학의 경우는 “우리 유교의
것을 몰래 훔쳐다 속임을 꾸미고, 가탁하여 거짓됨을 수식하며, 정상을 감
추고 그 실지를 숨겨서 교묘하게 우리 유교에 끌어다 부합시키니, 그 참과
거짓을 마침내 분별하기가 어려워 혹세무민의 해가 말할 수 없다”17)고 언
급하여, 유교에 대한 릿치의 적응주의적 태도가 더욱 유교사회에 기만적이
고 위험한 것임을 경계하고 있다. 그만큼 서학에 대한 신후담의 비판의식은
도학의 이단배척론에 확고하게 입각하였던 것이며, 공서파의 선구적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Ⅲ. 천주?태극 개념의 논변
신후담이 제기하고 있는 서학의 쟁점을 두 주제로 집약해 보면, 하나는
‘천주’ 개념이요 다른 하나는 ‘영혼’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천주 개념의 문
제로는 천주와 예수의 존재에 대한 논변과 太極?理개념에 대한 논변을 들
수 있고, 영혼 개념의 문제로는 귀신?혼 개념에 대한 인식과 천주교의 영
혼론 체계에 대한 정밀한 분석적 논변을 찾아볼 수 있다.
1. 천주와 예수의 존재에 대한 논변
신후담은 천주실의 의 대강은 ‘천주를 높이 받드는 일’(尊奉天主之事)을
17) 벽위편 , 권1, 45, ‘西學때: 職方外紀’, “獨其竊取而文其詐, 假托而飾其僞, 藏情匿實, 而巧與吾儒牽合者, 則其眞似之分, 卒難能때, 而惑世誣民之害, 將有所不可勝言者矣.”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9
말한 것이라 규정하고, 천주실의 에서 ‘天主’를 유교의 ‘上帝’와 일치시켜
언급하고 있는 예수회의 補儒論的적응주의 입장에 대해, “우리 유학에서
논하는 ‘上帝’의 설명에 근거함으로써, 참된 것에 의탁하여 거짓된 것을 선
전하려는 계책을 삼으니, 끝내는 스스로 감출 수 없을 것이다”18)라고 하여,
참과 거짓으로 대립시킴으로써 일치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입장
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는 ‘천주가 천지와 만물을 만들고 주재하여 편안히 길러낸다’(天主制作
天地萬物, 而主宰安養之)는 것이 천주실의 제1편의 요령임을 확인하고,
여기서 ‘창조’와 ‘주재’라는 천주의 두 가지 역할이 제시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는 程子?朱子의 말을 이끌어 천지와 만물을 ‘주재’(主宰?安養)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창조’(制作)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천지의 이루
어짐이 천주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하니, 이것은 이치에서도 증명할 수 없고
경전에서도 확인할 수 없으니, 바로 망녕된 이론에서 나온 것이다”19)라고
하여 근거가 없는 것으로 거부하였다.
신후담은 창조(천지의 개벽)를 목수가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할 수 없는
것이라 지적하고, 天地의 존재는 “太極의 이치에 근원하고 바陽의 실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따름”(天地者, 乃原於太極之眞, 成於兩儀之實而已)이라고
하여, 성리학적 생성론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른바 上帝는 천지가 이루어
진 뒤에 그 사이에서 주재하니, 道와 器를 합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마치
사람이 생명을 부여받은 후에 바로 이 마음이 있어서 사람의 몸을 주재하
지만, 참으로 사람의 몸을 만들 수는 없는 것과 같다. 上帝가 비록 천지를
주재하지만 어찌 천지를 만들어낼 이치가 있겠는가”20)라고 하여, 인간의 마
음이 인간의 몸을 주재하지만 제작하지는 못하듯이 上帝도 천지를 주재하
지만 창조하지는 않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신후담은 이처럼 천주교의
‘창조’론과 성리학의 ‘생성’론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철저히 성리학의
‘생성’론에 근거하여 ‘창조’론을 부정하였다.
신후담은 천주가 강생하여 예수로 태어났다는 ‘天主降生說’에 대해서도
극심하게 거짓되고 이치에 어긋나는 것으로 천주교의 교리 자체와도 모순
18) 벽위편 , 권1, 33, ‘愼遯窩西學때: 天主實義’, “因吾儒論上帝之說, 以爲托眞衒僞之計, 而終有所不能自掩者.”
19) 같은 곳, “天地之成, 由於天主之制作, 則此乃於理無徵, 於經無稽, 而特出於妄度之論也.”
20) 같은 곳, “所謂上帝, 則蓋亦天地成形之後, 主宰乎其間, 合道與器而爲之名, 如人賦生
之後, 方有此心, 主宰乎人身, 而固不能制作人身, 則上帝雖主宰乎天地而豈有制作天地
之理乎.”
종교학 연구 10
되고 있음을 두 가지 점에서 지적하고 비판한다. 그 하나는 天主가 강생하
여 33년동안 민간에 살았다면 그동안 하늘에는 주재자가 없게 되어 천주
개념과도 모순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천주교에서 천주를 ‘고금의 큰
부모’(古今大父)라 하고 ‘우주의 공변된 임금’(宇宙公君)이라 하면서도 천주
가 천하를 두루 덮어주지 못하고 특정한 곳에 강생하여 특정한 나라 사람
에게 사사롭게 작은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 모순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21)
천주 개념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만큼 신후담의 비판 태도가
합리적 일관성을 지키려는 것이요, 적대적 비판에 앞서서 이론적 대립과 모
순을 찾아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2. 太極?理개념에 대한 논변
마테오 릿치는 천주실의 에서 ‘천주’를 유교 경전의 ‘상제’나 ‘천’과 일치
시키면서, 송대 성리학의 ‘태극’이나 ‘리’의 궁극적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이
에 대해 신후담은 상제를 공경하여 제사 드리지만 태극을 공경하여 제사하
지 않는 사실을 들어, 태극이 만물이 시조가 될 수 없다는 릿치의 지적을
반박하였다. 신후담은 “태극이란 그 이치는 실재하지만 그 자리는 비어있
다. 상제가 하늘에서 주재하여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공
경하는 의례를 베풀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하여, 上帝는 주재하는 역할과
하늘에 있다는 자리를 갖추고 있지만 태극은 이치로서 자리가 없으므로 ‘이
치’(理)와 ‘자리’(位)라는 조건에서 양자의 차이가 있음을 밝힌다.
한편 신후담은 이러한 상제와 태극의 관계를 성인과 도덕의 관계로 비유
하여, “사람이 요?순?공자?맹자를 높이는 것은 그 도덕이 높고 두텁기
때문이나, 도덕을 높이 받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22)고 해명한
다. 곧 聖人에게는 실지의 자리가 있으니 제사를 드리지만 도덕에는 자리가
없으니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처럼, 태극에 제사하지 않는 것도 태극이 궁
극의 이치로서 실재하지만 정해진 자리가 없으면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라고 변론하였다. 유교적 궁극존재의 개념에서 상제와 태극의 차이를 강조
하는 릿치의 견해에 반박하는 것이, 신후담에게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상제
21) 벽위편 , 권1, 39, ‘西學때: 天主實義’, “天主之降生, 獨生於西泰之國, 則天主施恩之
道, 亦云偏矣, 烏在其爲大父公君也.”
22) 벽위편 , 권1, 34, ‘西學때: 天主實義’, “太極者, 其理則實, 而其位則虛, 非若上帝之
主宰乎天, 而有定位, 則恭敬之禮, 固無可施之處, … 人之尊堯舜孔孟, 以其道德之高厚
也, 而未聞有尊奉道德者.”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1
와 태극의 차이와 일치성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릿치가 주렴계의 ?太極圖?를 홀수와 짝수(奇?偶)의 형상을 말한
것에 불과하며 태극의 형상이 없다 하여 태극과 음?양을 동일시하고 있는
데 대해, 신후담은 “태극은 음?양을 떠나는 일이 없으니, 음?양에 깃들어
있지만 음?양과 뒤섞이지 않는 것이다”23)라고 하여, 태극이 홀수?짝수의
형상인 음?양에 깃들어 있지만 “易에는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음양을 낳
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는 주역 (繫辭上)의 구절을 근거로 태극이 음?
양의 발생근원이요 음?양과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태극을 상제와 구분함으로써 궁극존재로서 실재성을 부정하려는 릿치의 견
해를 반박하여, 태극이 음?양의 생성근원으로서 궁극적 실재임을 확인한다.
나아가 신후담은 릿치가 ‘理’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견해를 세 가지 측면
에서 반박하고 있다.
① 릿치는 ‘리’가 人心이나 사물에 있다는 것은 ‘리’가 사물의 뒤에 존재
하는 것이므로 사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여, 理를 사물의 속성(依늘者)
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理와 사물은 애초에 가르고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니, 이제 이것으로 理가 사물을 벗어나지 않는
다면 옳지만, 만약 이 사물에 앞서서 이 사물이 되는 理가 없다고 하면, 이
른바 사물이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이랴”24)라고 하여, 理는 사물에 내재하
면서 사물의 존재 근원이 되는 것이라는 성리학적 입장을 확인한다.
② 또한 릿치는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의 空虛에서는 ‘리’가 의존할 수 없
어서 떨어지고 말 것이라 하여 사물에 앞서서 ‘리’가 존재할 수 없음을 밝
혔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木?石처럼 有形한 사물과 달리 ‘리’는 無形한 것
이므로 空虛에서 떨어질 염려가 없음을 강조하고, 천지가 형성된 뒤에도 하
늘과 땅 사이에 공허가 있지만 ‘리’가 어디에나 있으며 떨어진 일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③ 나아가 릿치는 ‘리’가 靈(이성능력)?覺(지각능력)과 明義(도덕적 판단
력)가 있는 鬼神의 부류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없는 것(靈覺?明義)을 사물
에게 베풀 수 없다고 하여, ‘리’가 靈覺이 있는 존재의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사물이 靈하고 覺할 수 있는 것
23) 벽위편 , 권1, 35, ‘西學때: 天主實義’, “太極者, 未嘗離乎바陽, 但卽바陽, 而不雜乎
바陽者, 是也.”
24) 같은 곳, “理與物, 初未嘗判然離絶, 而爲兩事, 今若以此, 而謂理之不外於物, 則可, 若
謂無此物之先, 未有爲此物之理, 則所謂物者, 何自而出乎.”
종교학 연구 12
은 氣가 하는 것이요, 그 靈하고 覺하는 근거를 미루어 가면 곧 理이다”25)
라고 하여, 靈?覺하는 氣작용의 근거로서 ‘리’의 근원성을 재확인하고 있
다. 바로 여기서 靈覺이 있는 인격적 神을 최고의 존재로 보는 천주교의
인식과 靈覺도 氣의 작용일 뿐이요, 그 근거를 ‘리’로 인식하는 성리학적 인
식의 차이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Ⅳ. 영혼론의 비판 논리
1. ‘영혼’ 개념에 대한 이단비판론의 적용
신후담은 천주교가 ‘영혼불멸설’을 통해 이 세상이 고통스럽고 수고로움
과 죽어서 땅에 묻히는 근심을 극진하게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이에 대
해 유교의 입장을 “스스로 즐거운 곳이 있으니, 군자의 마음은 어느 때나
편안하고 순조롭게 대처하여 살고 죽음에 대해 근심하는 일이 없다”26)고
하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천주교의 태도와 유교의 당당한 사생관
을 대비시키고 있다.
또한 천주교의 귀신?영혼의 설에 대해서는 릿치가 시경 ? 서경 등
유교 경전으로 입증하려는 태도를 “세상을 현혹시키는 한가지 실마리가 될
까 두렵다”(恐爲惑世之一端)고 경계하고, 유교의 鬼神?魂魄개념의 기준으
로 朱子語類를 인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만큼 신후담의 서학비판론은
성리학의 입장을 확고한 기준으로 지켰던 것이다.
릿치는 ‘人性’을 生(성장능력)?覺(지각능력)하고 이치를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仁?義?禮?智’는 추론한 다음에 있는 것으로 人性이 될
수 없는 것이요, ‘德’은 性에 있는 것이 아니라 義念?義行에 오랫동안 익숙
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라 하여 성리학적 인식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
담은 “저들은 生?覺과 추론이 魂에 속하는 것이라 하는데, 魂은 氣이니,
어찌 人性의 本然을 논할 수 있겠는가”27)라고 하여, 人性과 魂을 일치시키
25) 벽위편 , 권1, 36, ‘西學때: 天主實義’, “物之能靈能覺者, 氣之爲也, 推原其所以靈覺
者, 則理也.”
26) 벽위편 , 권1, 37, ‘西學때: 天主實義’, “自有樂地, 君子之心, 安時處順, 未嘗戚戚於
生死者也.”
27) 벽위편 , 권1, 38, ‘西學때: 天主實義’, “彼嘗以生覺推論屬之於魂, 則魂是氣也, 何足
以論人性之本然乎.”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3
는 천주교의 입장과는 달리, 氣로서의 魂과 理로서의 性을 분별하는 성리학
적 입장에 따라 ‘人性’에 대한 릿치의 정의를 거부하고 있다. 또한 신후담은
‘인?의?예?지’가 人性임은 孟子에서 제시된 정론이라고 강조하면서,
‘인?의?예?지’가 추론한 다음에 있고 本然의 性에 갖추어있는 것이 아니
라면 四端(惻隱?羞惡?辭讓?是非)의 마음은 어디에 깃들어 있다가 추론을
기다리지도 않고 발현될 수 있는 것인지를 반문한다.28) 이처럼 그는 性(四
德)에서 情(四端)이 발현되어 나온다는 성리학의 견해를 통해 릿치의 견해
를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德이 義念과 義行에서 생기고 性에
갖추어 있지 않은 것이라면, 사람이 德을 가진다는 것은 과연 바깥에 있는
것을 잡아끌어 억지로 안에 넣은 것이 되고 만다”29)고 하여, 대학 의 ‘明
德’이나 중용 의 ‘德性’의 性에 내재하는 德개념과 어긋나는 것임을 지적
한다. 따라서 신후담의 비판은 성리학적 견해를 재확인하는 것이며, 릿치의
천주교 교리와 성리학의 견해가 얼마나 대립된 입장에 서 있는지를 뚜렷하
게 드러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신후담은 삼비아소가 영언려작 의 서문에서 핵심 과제로 강조하고
있는 ‘천상에 변함 없이 있는 복’(天上常在之福)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
이 불멸하여 선을 행한 사람이 천당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천주교의 영혼론이 ‘영혼불멸설’과 ‘천당지옥설’로 집약되는 것임을 지적하였
다. 그것은 천주교의 영혼론에 관한 전반적 비판에서 가장 먼저 ‘영혼불멸설’
을 주목하고 이에 따라 사후에 영혼이 가는 곳에 대한 설명인 ‘천당지옥설’
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송대 도학에서 정립된 불교에 대
한 이단비판론의 체계를 기반으로 천주교와 불교를 동일시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비판 논리를 천주교에 대해서도 반복하여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다.
신후담은 주역 의 ‘鬼神死生說’을 근거로 “사람이 태어남은 바(精)과 陽
(氣)이 모여서 개체를 이루고 죽게 되면 魂은 날아가고 魄은 내려가서 흩어
져 변하게 되니, 변하면 존재하는 것도 없어진다”30)고 하여, 죽은 뒤에는
魂?魄이 흩어져 없어지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영혼불멸설’을 거부한다.
또한 유교의 ‘福善禍淫之說’은 선하면 복을 받고 방탕하면 재앙을 받는다는
28) 벽위편 , 권1, 39, ‘西學때: 天主實義’, “使仁義禮智誠在抽利之後, 而不具於本然之性, 則所謂惻隱等四者之心, 未知寓於何處, 而猝發於倉黃入井之際, 不必待推理而後有之耶.”
29) 같은 곳, “德之生於義念義行, 而不具於性, 則人之有是德者, 果是攬取在外之物, 强以
納之於內者.”
30) 벽위편 , 권1, 14, ‘西學때: 靈言?勺’, “人之生也, 바精陽氣, 聚而成物, 及其死也, 魂遊魄降, 散而爲變, 變則存者亡矣.”
종교학 연구 14
것으로 “이치로서 말한 것이요, 이치를 따르는 자는 스스로 마땅히 복을 받
고 이치를 거스리는 자는 스스로 마땅히 재앙을 당하는 것이니, 어찌 상제
가 일일이 사람에게 (복이나 재앙을) 내려준다고 말하겠는가. 또한 재앙이
나 복이란 (하늘이) 德을 명하고 죄를 징벌하는 사이에 드러나는 것일 뿐이
니, 어찌 저들이 말하는 천당지옥의 설과 같겠는가”31)라고 하여, 이치에 따
르는지 여부의 당위성을 기준으로 하는 유교의 禍福說로서 天主에 의해 일
일이 심판을 받아 가게 되는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후담은 유교가 가르치는 道가 일상의 당위적 규범으로서 事
親?事君임을 강조하고 천주교의 가르침은 ‘천상의 복을 구하는 것’만을 옳
게 여겨서, 事親?事君등 일상의 도리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라 대비시켰
다. 그리하여 “이것은 윤리를 업신여기고 이치를 어그러뜨리는 것이요, 사
사로움을 따르고 이익을 바라는 데 머무는 것이니, 어찌 심히 미워할 것이
아니겠는가. …저들이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福을 구하는 데서 나왔으니,
그것은 역시 不誠함이 심하며, 오로지 利欲으로 마음을 삼은 것이다”32)라고
비난한다. 이처럼 그는 천주교에서 天上의 福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도덕규범과 책임을 저버리게 되는 것인 동시에 사사롭고 利欲에 빠져있는
반도덕적 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유교의 학문방법과 과제를
‘誠’과 ‘義’로 확인함으로써, 천주교의 가르침이 求福에 빠져 不誠과 利心으
로 유교의 도덕적 가치에 배반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신후담은 異端의 공통적 성격을 ‘利’(利欲)에 근원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33) 그리하여 楊朱?墨翟?莊子?列子가 모두 利를 탐하는 것이라
하고, 특히 불교에서 제시한 ‘精神不滅’과 ‘輪廻報應’의 설에 대해서는 “精神
이 不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 사람들의 죽기를 아쉬워하는 마음에 이미
넉넉히 적중하고 있으며, 輪廻?報應등의 說은 또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두려워하게 하여 유인하니, 그러므로 온 세상에 휩쓸려 따르는 자들
이 역시 이익을 위한 것이다”34)라고 하여, 불교의 기본교리도 利欲을 근거
31) 벽위편 , 권1, 15, ‘西學때: 靈言?勺’, “此特以理言, 順理者, 自當獲福, 逆理者, 自
當遇禍, 豈謂上帝一一下降於人也, 且其禍福, 不過見於命德討罪之間而已, 亦豈如彼所
謂天堂地獄之說哉.”
32) 같은 곳, “是其蔑倫悖理, 徇私要利之留, 豈非可惡之甚者耶, … 彼所以爲學者, 特出於
求福, 則其亦不誠之甚, 而專以利爲心也.”
33) 벽위편 , 권1, 15, ‘西學때: 靈言?勺’, “異端之學, 其流則有萬不同, 而其源則皆出於利.”
34) 같은 곳, “所謂精神不滅者, 旣足以中世人惜死之心, 輪廻報應等說, 又有以持世人之心, 而恐誘之, 故擧世靡然從之者, 亦爲利也.”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5
로 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또한 천주교의 영혼불멸설과 천당지옥설에 대해
“서양에 이르면, 곧 불교의 자질구레한 이론에 근거하여 이를 변화시키고
신비롭게 하니 더욱 이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싫어하는 利欲의 마음임을 스스로 감출 수는 없다”35)고 하여, 천주
교도 불교를 따라 利欲을 추구하는 이단의 하나일 뿐이라 밝히고 있다.
2. ‘영혼’ 개념 체계에 대한 비판 논리
삼비아소(Fransesco Sambiaso, 畢方濟)가 靈言?勺을 저술한 것은 心性
論과 鬼神死生論의 이론으로 정립되어 있는 성리학적 사유틀을 극복하기
위해 스콜라철학의 ‘영혼’(anima) 개념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신후담이 서학변 에서 영언려작 을 가장 먼저 비판 대상으로 다
루고 있는 것은 ‘영혼’ 개념의 문제를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의 핵심 문
제로 삼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성리학의 근본 문제인 心性論?鬼
神死生論과 천주교의 영혼론을 대결시키고, 성리학의 입장에서 비판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철저히 성리학의 이론을 따라
조목마다 정밀하게 이론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그의 천주교 비판 가운데서
영혼론 비판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그는 영언려작 의 편차에 따라 ‘영
혼’(anima, 亞尼瑪) 개념을 ① 體(본체)?② 能(능력)?③ 尊(존귀함)?④ 情
(성질)의 4주제로 나누어 자신의 비판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1) 영혼의 본체(體):
영언려작 에서는 영혼의 본체를 규정하는 개념으로 ‘자립하는 실체’(自
立之體),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것’(本自在者), ‘神의 부류’(神之類), ‘죽을
수 없음’(不能死), ‘인간의 體模가 됨’(爲我體模), ‘끝내 은총에 의지함’(終늘
額辣濟亞)의 여섯 가지를 들고 있다.
영혼이 ‘자립하는 실체’라는 규정에 대해, 신후담은 “혼이란 형체에 의지
하여 있다가 형체가 이미 없어지면 흩어져 無로 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자
립하는 실체가 될 수 있겠는가”36)라고 하여, ‘혼’이 형체에 의존하는 것이
요 자립하는 실체가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형질에 따라 나오는 生
35) 벽위편 , 권1, 16, ‘西學때: 靈言?勺’, “至於西泰, 則又因佛氏之餘論, 而變而神之, 愈爲近理, 然亦不能自掩其貪生惜死之利心.”
36) 같은 곳, “魂者, 乃依於形而爲有, 形旣亡則消散而歸於無者也. 烏得爲自立之體乎.”
종교학 연구 16
魂?覺魂이 의지하던 형질이 소멸하면 같이 소멸되는 것과 달리 사람에게
있는 영혼은 형체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요 사람이 죽어도 소멸되지 않는
것으로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란 주장에 대해,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
의 ‘혼’이 있어서 생장하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魂3品說’을 비판
하고, 생장과 지각이 없어진 다음에는 영혼이 홀로 존재할 이치가 없음을
강조하여, 영혼의 불멸설을 거부함으로써 영혼이 본래 스스로 존재한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혼’이 ‘神’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요 ‘氣’가 아니라는 천주교의 견해에 대
해, 그는 “魂은 곧 氣의 神이다”(魂便是氣之神)라는 주자의 언급을 근거로
“이미 氣의 神이라 하였으니, 魂이 곧 氣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氣
가 아니면 이른바 魂이라는 것도 없다. 이제 다만 魂은 氣가 아니라고만
말하고 氣의 神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장차 모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氣를
떠나서 魂을 찾게 할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37)라고 하여, 魂은 氣
의 神이지 氣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이러한 논변에서 드러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천주교에서 제시하는
‘神’ 개념과 성리학에서 이해하는 ‘神’ 개념이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사
실이요, ‘신’ 개념의 두 입장이 어떻게 다른가를 밝히지 않고서 제각기 자기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리학에서 ‘신’이란 ‘음?양의 헤아리기
어려운 것’(바陽不測)이요, 氣(음?양)의 신묘한 작용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다. 그만큼 ‘신’은 본질적으로 氣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
궁극존재를 의미하는 서학의 ‘신’ 존재와는 개념적 차이가 매우 큰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영혼’은 식물의 ‘生魂’이나 동물의 ‘覺魂’과는
달리 죽을 수 없는(不能死) 것이고, 죽은 뒤에도 ‘생혼’과 ‘각혼’을 포함하여
죽지 않는 것이며, 다만 신체가 없으므로 쓰이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
한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사물(식물?동물)에 있는 생혼?각혼이 형체와
함께 소멸되는 것이라면 인간에 있는 생혼?각혼만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인간이 죽
은 뒤에 인간의 영혼에 포함된 생혼?각혼은 쓰이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에 대해, “생혼?각혼이 이미 쓰이지 않는다면, 비록 소멸되지 않았다
37) 벽위편 , 권1, 17, ‘西學때: 靈言?勺’, “旣是氣之神, 則固不可便謂之氣, 而非氣則又
無所謂魂也. 今但言魂之非氣, 而不言其爲氣之神, 則將使不知者, 離氣而覓魂矣, 烏可
乎哉.”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7
하더라도 소멸된 것과 다름이 없다. 비록 천당의 즐거움이 있어도 반드시
그 즐거움을 지각할 수 없고 비록 지옥의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고통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반드시 하늘에 오르기를 구하는
일은 무엇 때문인가”38)라고 하여, 죽은 뒤에 생혼?각혼의 작용이 없다면
영혼이 불멸한다고 하더라도 천당의 즐거움이나 지옥의 괴로움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니 천당?지옥의 존재도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임을 지적한다.
이처럼 신후담은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면서 영혼 속에 생혼?각혼의 단계
를 영혼의 한 기능으로 내포시키고 있는 천주교의 신앙적 영혼론에 대해
논리적 정합성을 요구하는 비판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천주교에서 영혼을 인간의 바깥으로 드러난 형체의 모상인 ‘依模’가 아니
라 안으로 실체의 모상인 ‘體模’라 한 데 대해, 신후담은 “형체가 있은 다음
에 魂이 있는 것이지, 먼저 魂이 있고 이 魂의 모상에 의지하는 것이 형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39)라고 하여, 혼이 ‘體模’가 될 수 없다고 부정하였다. 그
것은 魂을 신체적인 것을 초월한 존재로 보는 천주교의 입장과는 달리, 신체
적인 것에 의존하는 존재라고 보는 성리학적 인식에 따른 것이다. 또한 천주
교에서는 하늘의 참된 복은 사람의 ‘志力’이나 천주의 ‘公祐’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주의 ‘特祐’가 있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이에 대해 신후
담은 한편으로 그런 인식이 천주의 ‘特祐’를 기다리기만 해서 착한 일을 하
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음을 경계하고, 다른
한편으로 “천주된 자가 널리 천하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중에
서 사사롭게 사랑함이 있어서 혹은 은총을 내려주기도 하고 혹은 내리지 않
기도 하는 것이다”40)라고 하여,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公祐’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特祐’로서 천상의 참된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
은 천주가 편벽되어 공평하지 못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2) 영혼의 능력(能)
영언려작 에서는 영혼의 능력인 생장(生)?지각(覺)?이성(靈)의 3가지
38) 벽위편 , 권1, 17-18, ‘西學때: 靈言?勺’, “生覺旣不用, 則雖不滅, 而與滅無異矣, 雖
有天堂之樂, 而必不能覺其樂, 雖有地獄之苦, 而必不能覺其苦, 若是而必欲求升天之事
者, 亦何也.”
39) 벽위편 , 권1, 18, ‘西學때: 靈言?勺’, “有是體, 然後有是魂, 非先有是魂, 而依是魂
之模狀者, 乃爲形體也.”
40) 벽위편 , 권1, 19, ‘西學때: 靈言?勺’, “天主者不能普愛天下之人, 而於其中, 有所私
愛, 或祐而或否也.”
종교학 연구 18
능력 가운데서도 ‘지각능력’(覺能)을 주목하였다. 이러한 ‘지각능력’은 外能
(五司: 耳?目?口?鼻?體)에 의한 外覺과 內能(二司: 公司?思司)에 의한
內覺으로 나뉘고, 內能에는 二司이외에 별도로 嗜司(欲能?怒能)가 있어서
外五司와 內二司가 거두어들인 것을 좋아하거나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라고 한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마음의 지각 이외에 다시 별도의 지각은 없다”(心
覺之外, 更無別覺)라고 하여, 모든 지각작용은 마음의 지각(心覺)일 뿐이라
하여 지각의 주체를 外覺과 內覺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여기서 그
는 “內能이라는 것이 ‘魂’이라는 한 글자에 불과한데, 황홀하고 무근거한 설
명으로 처음부터 마음이 안에서 주장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
른바 ‘內’라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內’가 아니요 별도로 공허하게 꾸며놓은
군소리일 뿐이다”41)라고 하여, 지각작용의 양상과 내용에 따르는 분석을 지
각의 통일된 주체로서 ‘마음’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영언려작 에서는 아니마(영혼)의 ‘靈能’에 대해 記含(기억)?明悟
(인식)?愛欲(욕구)을 하는 3기관(司)을 구분하고 있다.
영언려작 에 의하면 ‘記含’(기억) 중에 형체가 있는 사물을 기억하는 ‘司
記含’은 頂骨뒤의 ‘腦囊’에 있고, 형체가 없는 것을 기억하는 ‘靈記含’은 인
간만이 지닌 ‘영혼’이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서학에서 기억의 기관으로 제
시한 ‘뇌낭’說이 유교의 ‘심’說과 다른 것임을 강조하면서, ‘마음’을 “虛靈하
여 知覺함으로써 한 몸의 주재가 되니, 記憶하고 思惟하며 酬酌하고 言行함
은 어느 것이나 이 마음이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여, 기억도 마음의
작용이라 확인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는 “사람의 기억과 언행을 모두 뇌낭
이 하는 것이라면 마음이란 일종의 붙어있는 군더더기가 되고 말 것이
다”42)라고 하여, 기억의 주체가 뇌낭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성리학의 전통적
심개념을 역설하였다.
다음으로 ‘明悟’(인식)는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萬像을 만드는
작용을 하는 ‘作明悟’와 이 萬像에 빛을 비추어 만물의 이치를 얻는 ‘受明
悟’로 구분된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明悟한다는 것
41) 벽위편 , 권1, 20, ‘西學때: 靈言?勺’, “內能者, 不過於魂之一字, 而恍惚胡說, 初不
及於此心之爲主於內, 然則其所謂內者, 非吾所謂內也, 特架虛之贅談而已.”
42) 벽위편 , 권1, 21, ‘西學때: 靈言?勺’, “心之爲物, … 虛靈知覺, 以爲一身之主宰, 所
以記藏思惟酬酌云爲者, 孰非此心之所爲乎, … 人之記藏云爲, 皆腦囊之所爲, 而心則成
一寄贅之物矣.”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9
은 心靈이 하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여 ‘受明悟’
의 과정을 거부하고, 그 사물에 근거하여 그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일
뿐이라 하여, 사람이 사물의 형상을 만드는 ‘作明悟’의 과정을 거부한다. 또
한 서학에서 ‘명오’의 극치는 사물의 형체나 기질을 벗어나며 피차의 분별
을 버리고 사물의 精微함(이치)을 남기는 것이라 언급한데 대해, 그는 “천
성을 형색 밖에서 구하니 이것은 그 한쪽에 집착하여 관통하는 방법을 모
르는 것이다. 이른바 ‘명오’는 空寂과 虛無의 영역에 빠져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작용에서 드러난 것이 있겠는가”43)라고 하여, 道?器와 體?用이 일
체라는 전제에서 이치를 현실의 사물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明悟’
의 극치는 이치를 형색을 벗어나 추상적 관념으로 인식하는 것이라 비판하
고 있다.
그 다음으로 ‘愛欲’(욕구)은 식물?동물?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는 ‘性欲’
(본성적 욕구)과, 동물?인간에게만 있는 ‘司欲’(감각적 욕구)과, 인간에게만
있는 ‘靈欲’(이성적 욕구)의 셋으로 구분된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性欲’이
란 성리학의 ‘性’ 개념에 따라 ‘德을 좋아하는 마음’(好德之心)을 가리키거나
맹자 처럼 맛?색깔?소리?냄새를 대하는 기질도 ‘性’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천주교의 ‘性’은 德性도 形氣도 아니고 常生과 眞福을 추구하
는 사사롭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곧 그는 “이것은 단지 老莊과 釋
迦의 무리에서 나온 것으로 스스로 사사롭고 스스로 이로움을 위주로 하여
그 자질구레한 이론들을 주워모아 더욱 꿰맞추어 人性의 欲이 오로지 常生
과 眞福있는 것이라 한다”44)고 하여, 老莊?釋迦의 異端이 추구하는 이기적
욕구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司欲’과 ‘靈欲’에 대해서도 ‘司欲’은 생각(思司)을 따라간다는 견해
에 대해서도, 생각(思)이란 道心과 人心의 어느 쪽에나 연관되는 것인데 人
心쪽에만 한정시키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靈欲’이 理義를 따라간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理義란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사람의 본성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확충시켜 가는 것이지 理義가 바깥에 있어서 사람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천주교의 입장을 “理義가 性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性과 義를 나누어 두 가지로 삼고서, 性을
43) 벽위편 , 권1, 23-24, ‘西學때: 靈言?勺’, “求天性於形色之外, 執其一而不知所以貫, 所謂明悟者, 淪於空寂虛無之域而已, 曾何足以見之於用乎.”
44) 벽위편 , 권1, 25, ‘西學때: 靈言?勺’, “此特出於老莊釋迦之屬, 以自私自利爲主者, 而彼又?其餘論而益傅會之, 以爲人性之欲專在於常生眞福.”
종교학 연구 20
따르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는데 이르렀으니 大本을 모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45)고 하여, 천주교 교리가 근본이 되는 성리학의 性?義개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영혼이 존귀함이 天主와 비슷함(尊與天主相似)
영언려작 에서 영혼의 존귀함이 天主와 비슷함을 논하였는데, 이에 대
해 신후담은 上帝를 ‘천주’라고 칭할 수도 있고 人魂을 ‘아니마’라고 일컬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니마’를 천주에 비교하여 그 존귀함이 서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라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유교에서 인간의 魂?魄개념과 天의 鬼?神개념을 제시한
다. “우리 유교에서 魂을 논의함에는 반드시 魄과 상대시켜 말한다. 魂은 陽
의 靈이니 펼침을 주장하고, 魄은 바의 靈이니 굽힘을 주장한다. 만약 형상
과 종류로 미루어본다면 하늘에 鬼?神이 있는 것과 같다. 神은 펼쳐짐이요,
天의 陽靈이며, 鬼는 굽힘이요 天의 바靈이다. 그러므로 바?陽이 굽히고 펼
쳐지는 자취는 하늘에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하고 사람에 있는 것을 ‘혼백’이
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은 서로 비슷한 것이 되니 견주어볼 수 있다.”46) 따
라서 그는 인간의 ‘魂?魄’과 하늘의 ‘鬼?神’을 유사한 것으로 비교할 수 있
는 것이라 하지만, 음?양이 굽혀지고 펴지는 자취로서 ‘혼?백’을 천지?만
물의 주재자인 ‘상제’에 견줄 수 없는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신후담은 “비록 ‘아니마’를 ‘魂’이라 하지만, 그 논의한 것을 보면 氣의
음?양이 굽혀지고 펴지는 자취를 대략도 언급한 일이 없으니, 우리 유교에
서 魂을 논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바로 魂이 魂이 되는 까닭
을 모르는 것이다. 이미 ‘아니마’를 ‘魂’이라 하고서, 上帝가 천지를 주재하
는 데 견주었으니, 이것은 바로 상제가 상제 되는 까닭을 모르는 것이다”47)
고 하여, ‘아니마’가 유교의 ‘혼’ 개념과 다른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동시에
45) 벽위편 , 권1, 26, ‘西學때: 靈言?勺’, “不識理義之具在於性中, 而以性義分爲兩物, 至以隨性而爲之非, 則其不見得大本者, 亦可知矣.”
46) 벽위편 , 권1, 28, ‘西學때: 靈言?勺’, “吾儒之論魂也, 則必與魄而對擧, 魂者陽之靈
也, 而主乎伸, 魄者바之靈也, 而主乎屈, 若以象類推之, 則如天之有鬼神, 神者伸也, 天
之陽靈也, 鬼者屈也, 天之바靈也, 故바陽屈伸之迹, 在乎天, 則謂之鬼神, 在乎人, 則謂
之魂魄, 若是者爲相似, 而可以比之也.”
47) 같은 곳, “雖以亞尼瑪謂之魂, 而觀其所論者, 未嘗略及氣바陽屈伸之迹, 與吾儒之所以
論魂者, 全不相似, 則此固不知魂之所以爲魂矣, 旣以亞尼瑪謂之魂, 而乃以比之於上帝
之主宰天地, 則此又不知上帝之所以爲上帝矣.”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21
魂과 견주어질 수 없는 유교의 ‘上帝’ 개념과 魂에 견주어지는 천주교의 ‘天
主’개념이 다르다는 것도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그는 유교적 의식으로 인간에게서 상제와 견주어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혼’이 아니라 ‘마음’(心)임을 제시한다. “上天에서 주재하는 것은 上
帝요, 一身에서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다. 사람에게 이 마음이 있는 것은 하
늘에 상제가 있는 것과 같다”48)고 하여, 마음과 상제는 주재한다는 역할에
서 공통되지만 一身과 上天이라는 지위에서는 엄격히 구별되고 있는 것임
을 밝혀준다.
또한 그는 인간의 마음과 상제의 관계로 상제가 내려준 性이 마음 속에
부여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따라서 그는 “상제가 내려준 속마음은 마음과
더불어 갖추어 태어나니 우리의 性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유교의 학문은
반드시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으며, 그 공효의 극치는 天地에
참여하고 化育을 돕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으니, 이것이 마음이 靈한 까
닭이요 上帝에 견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49)고 언급한다. 그것은 魂(영혼)을
바陽의 자취로 확인하여 天主의 존귀함에 견줄 수 없는 것이라 규정하면서,
이에 비해 心은 主宰의 역할에서나 上帝가 내려준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서 上帝에 견주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서, 성리학적 魂과 心개념의
차이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니마’를 ‘영혼’(魂)으로 번역하
고 있는 것은 ‘영혼’을 사후존재로서 확립하는 데 적합한 것이지만 유교적
의미에서는 ‘心’ 개념에 더욱 가까운 것임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4) 영혼의 ‘아름답고 좋은 것을 지향하는 성질’(所向美好之情)
영언려작 에서는 영혼의 ‘美好’(아름답고 좋은 것)를 지향하는 성질을 논
하면서, ‘지극히 아름답고 좋은 것’(至美好)을 보고 들을 수 없으며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죽은 후에 명확히 알게 된다는
설에 의탁하고 常生의 福으로 유혹하니, 스스로 죽은 후의 일은 사람들이
그 있고 없음을 힐난할 수 없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50)라고 하여, 유교의
48) 같은 곳, “今以吾儒之說論之, 則人之可比於上帝者, 惟有此心耳. 主宰乎上天者帝也, 主宰乎一身者心也, 人之有此心, 如天之有上帝.”
49) 벽위편 , 권1, 29, ‘西學때: 靈言?勺’, “惟其上帝所降之衷, 與心俱生而爲吾之性, 故
吾儒之學, 必以治心而爲本, 惟其功效之極, 而可至於參天地贊化育之域, 此則心之所以
爲靈, 而可比於上帝者也.”
50) 벽위편 , 권1, 30, ‘西學때: 靈言?勺’, “托爲死後明見之說, 而誘之以常生之福, 自以
爲死後之事, 人不能詰其有無.”
종교학 연구 22
학문이 實理로 증험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천주교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
도 없는 일을 믿으라고만 하며, 의심하여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증명할 수
없는 죽은 뒤의 일로 속인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영언려작 에서는 사람이 추리하여 알 수 있는 ‘자연의 本光’(自然
之本光)과 이치의 위에 있으며 오직 천주가 내려줄 뿐이요 인간의 知見이
미치지 못하는 ‘자연을 초월하는 眞光’(超於自然者之眞光)을 구별하고 ‘지극
히 아름답고 좋은 것’은 ‘자연의 本光’으로는 조금만 알 수 있고 ‘자연을 초
월하는 眞光’으로 온전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신후
담은 이치의 위에 있다는 것은 이치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
인한다. 따라서 그는 “이치로 미루어 볼 수 없는 것은 자기도 알 수 없는
것인데, 입으로 말하며 글로 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說을 믿게
하고 그 道를 따르게 하니, 그 역시 곤란하도다”51)라고 하여, 이치로 알 수
없는 것을 주장한다는 사실이 이미 거짓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그
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지극히 아름답고 좋은 것’이란 허구로서 증험할 수
있는 실지가 없는 것인데, 이에 비해 유교의 학문은 “實然의 마음으로 實然
의 이치를 궁구하여, 알면 반드시 정밀하기를 기약하고 보면 반드시 밝기를
기약한다”52)고 하여, 마음으로 이치를 정밀하게 알고 밝게 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유교의 主知的이고 합리적인 입장과 천주교의 신앙적이고
초월적인 입장이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에서 심각한 장애
를 일으키면서 대립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주고 있다.
천주교의 영혼론에 대한 신후담의 비판 입장은 철저히 성리학의 인식에
기초하여 양자의 차이를 드러내고 성리학과 다르거나 성리학적 인식을 결
여한 것은 바로 거짓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성리
학에 근거한 이론적 비판이라는 점에서 성리학의 논리를 분명하게 밝혀주
고 있으며, 성리학의 논리가 천주교 교리의 논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잘 드
러내주고 있다. 특히 아니마를 ‘영혼’으로 번역하는 천주교의 입장에 대해
성리학의 魂?魄개념과 心?性개념 사이의 관계를 대비시켜 주고 있는
것은, 신후담의 서학비판론이 서학과 유교 사이에서 개념적 인식의 차이와
공통성을 조명해주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51) 벽위편 , 권1, 31, ‘西學때: 靈言?勺’, “以理之所不能推, 己之所不能知, 而宣之於口, 筆之於書, 欲使天下之人, 信其說而從其道, 其亦難矣哉.”
52) 벽위편 , 권1, 31-32, ‘西學때: 靈言?勺’, “以實然之心, 而究實然之理, 知之必期於
精, 見之必期於明.”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23
Ⅴ. 신후담 서학비판론의 특성
성호 문하를 중심으로 천주교 비판론을 전개하였던 이른바 ‘공서파’에서
신후담은 가장 선구적 인물이다. 천주교 교리에 대한 그의 비판저술인 서
학변 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천주교교리서를 직접 읽고 이를 비판한 것이다.
신후담은 이 교리서에서 제시된 ‘補儒論’의 논리, 곧 유교와 천주교의 일치
나 소통을 강조하는 적응주의적 논리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오히려
양자의 근원적 차이를 더욱 예리하게 표출시키는 것으로 비판의 입장을 확
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후담이 성호의 영향 아래서도 서양과학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
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 비판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조선 후기 사회를 이
끌어 가는 도학 정통의 신념을 지키는 유교지식인의 입장을 밝혀주는 것이
다. 그의 서학비판론은 대부분 도학의 이단 배척 논리를 따르는 것으로서,
열려있는 토론의 입장은 이미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배타적 적대감으로 천
주교를 배척하였던 18세기말 이후의 斥邪論과 비교한다면, 신후담의 비판론
은 논리적 일관성과 합리성을 지켜가는 매우 이론적 성격의 비판론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신후담은 가장 초기에 본격적인 비판 이론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그만큼
그의 비판론은 성리학적 기반을 확립한 유학자로서 漢譯西學書의 천주교
교리서를 접할 때 반응하는 태도와 문제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경우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비판론이 지닌 특성을 세 가지로 들어볼 수
있다.
첫째, 신후담이 천주교 교리서의 핵심 문제를 ‘천주’와 ‘영혼’ 개념 및 서
양교육제도와 세계지리 등 서양문물의 문제를 비판의 과제로 추출하고 있
다는 점에서 그 문제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그는 당시 조
선사회에서 서학에 대한 비판론자나 신봉자들 사이에 거의 논의되고 있지
않던 교리서인 영언려작 을 구해서 천주교의 영혼론을 자신의 비판이론을
위한 전제요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서학인식이 지닌 예리
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뒤를 이어 서학비판론을 전개한
안정복도 처음부터 영혼론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영혼론의 문제는
‘영혼불멸설’에 따라 사후세계의 문제인 천당?지옥설로 연결되고 있으며,
나아가 영혼 개념의 문제는 바로 제사문제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
종교학 연구 24
기 때문이다.
둘째, 신후담의 천주교 교리 비판론은 천주교 교리를 뒷받침하는 스콜라
철학의 논리와 성리학의 논리가 맞서는 철학적 논쟁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
다. 그는 ‘천주’ 개념의 문제에서 유교의 ‘상제’ 개념과 ‘태극?리’ 개념 사
이의 관계를 해명하면서 성리학의 궁극 존재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재인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천주교의 ‘천주’와 유교의 ‘상제’ 개념 사이에 소통가능
성과 차이점을 뚜렷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영혼’ 개념의 문제에서도 유교에
서 氣의 聚散說로 설명되는 혼백?귀신의 존재와 대비시키면서 동시에 ‘性’
에 대한 성리학적 인식을 연관시켰으며, ‘德’에 대해 행위의 결과로 보는 천
주교교리의 견해와 인격의 본질로 보는 성리학적 입장의 차이를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셋째, 그의 비판론은 천주교 교리를 기본적으로 불교와 같은 맥락의 이
단으로 파악하고, 이익(利)을 추구하는 것이라 규정하여 의리(義)를 기준으
로 삼는 유교의 입장과 대립시키고 있다. 그는 영혼불멸설이나 천당지옥설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종교의례들이 불교적 의례와 상통하는 것이라 지적
하여 불교비판론에 근거하여 천주교비판론을 정립하였다. 또한 이단의 공통
적 속성을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아쉬워하는’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규정하고, 천주교 교리에 나타난 신앙태도가 이러한 이단의 조건에 일치하
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스승 성호가 서양과학과 세계지리
에 대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입장과는 달리, 여전히 華夷論의 중
국중심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후담의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론은 천주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비판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유교 안의 이론들을 재점검하면서 유교의 문제의식
을 새롭게 각성하고 적용논리를 심화시키는 데 많은 수확을 거두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따라서 그의 천주교비판론은 그 비판 논리의 타당성이나
비판 결과의 성공에서보다도 오히려 천주교 교리에 대항하면서 천주교 교
리와 차별화되는 유교의 이론적 인식을 새롭게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데 풍
성한 소득이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25
Shin Hu-tam's(愼後聃) Theoretical Criticism of
Western Learning and its Issues
Keum, Jang-tae
Shin Hu-tam (愼後聃, 1702-1761), a leading scholar of the S?ngho
school, is the most systematic critic of the Anti-Western Faction
(Kongs?pa) known for their opposition to the Western learning (Sh?hak)
in the late Chos?n dynasty. In his work titled Comments on Western
Learning (西學때, S?hakpy?n), Shin focuses on the basic doctrinal
differences between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According to his
analysis, the Catholic doctrine was a distinctive contrast to Confucian
thought in the fundamentals of their respective world-views. Shin points
out that the core of Catholic doctrine is the conception of tienzhu (Lord
of Heaven) and linghun (anima, soul). He insists that the Confucian
conception of ultimate being and the soul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at of Christianity. This was highlighted when the Catholic conception
of ultimate being and soul stimulated many christians to reject the
confucian ancestor worship in late Chos?n dynasty.
Shin's discussion shows the characteristic of doctrinal disputes between
scholasticism and Neo-Confuciaism. From his viewpoint, Catholicism was
a heterodoxy like Buddhism that did not seek public righteousness but
sought private gain. Shin's rejection of western science as well as
Catholic doctrine can be characterized by a Sino-centric consciousness
that had been preval!ent during the Chos?n dynasty.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김 종 서*
1)
目次
Ⅰ. 한국 근대 종교교육의 형성
Ⅱ. 일반 학교의 종교교육
Ⅲ. 종립 학교의 종교교육
Ⅳ. 한국 종교교육의 전망
Ⅰ. 한국 근대 종교교육의 형성
한국 전통 사회의 교육은 대체로 불교와 유교를 주요 기반으로 하고 있
다. 그러므로 세속적 교육과 종교교육이 구분 없이 미분화 상태였다고도 할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근대 교육이 시작되는 것은 19세기 말 기독교가 들
어와 학교들을 세우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타고 특히 1894
년 갑오경장이후 <홍범 14조>에서 근대 교육의 수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
었고, 이듬해 소학교들이 생겨나고 연이어 근대식 학교들이 나타났다. 그러
니까 이쯤부터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이 종교로부터 분화되어 독립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물론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전통적인 교육이 죄다 끝난 것은 아니다.
향교와 서원을 주축으로 하던 전통적 유교 교육은 대폭 변화되어 일부 향
교만이 오늘날 그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또 강원과 선원을 주축으
로 하던 전통적 불교 교육도 강원이 승가대학이나 교양불교대학 등으로 일
부 형식적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종단 자체의 종교교육으로서 이들은 그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기독교의 신학교들도 일부는 신학대학 등으
로 비록 공교육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종단 자체의 종교교육을 수
* 서울대 교수, 종교학
종교학 연구 28
행하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근대 교육이 종교에서 분화되어 독립 영역을 구축했다는 것은 세속
적 학교가 이제 공교육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대
식 학교들은 우선 <외국어>나 <수학>, <과학> 등 전통 교육기관과는 사뭇
다른 분화된 교과목을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 교육에서 종교가
차지했던 내용들이 완전히 무의미해짐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근
대적 공교육 속에도 <사회>, <윤리>, <역사> 등 다양한 일반 교과들 중에
종교적 내용들이 상당히 포함되었다. 특히 종립 학교들에서는 전교(傳敎) 및
수신(修身)의 목표와 맞물려 종교가 매우 적극적으로 교육되어 왔다.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종교교육은 크게 종단 자체의 교육과 공교육의 두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물론 후자 즉 근대 종교교육의 주축
이 되어온 공교육 속에서의 종교교육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
고 공교육에서의 종교교육은 다시 일반 학교에서의 교육과 종립 학교에서
의 교육으로 나누어 거론하는 것이 편리하다.
Ⅱ. 일반 학교의 종교교육
광복이후 <헌법>이 제정되어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으나 종교 관련 조
항은 그대로다. 즉 현행 <헌법 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라고 성문화하고
있다. 근대 국가 헌법의 보편적 특징인 소위 ‘종교의 자유’와 ‘국교금지(정
교분리)’를 명시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국교금지(정교분리)와 관련하여 현
행 하위법인 <교육기본법>에서는 제6조에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설립
한 학교에서는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1) 즉 국공립학교에서는 특정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국공립학교는 물론, 비종립 사립학교들까지
1) 이것은 종전의 <교육법 제5조>에서 “국립 혹은 공립의 학교는 어느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되었던 것이 2000년에 1월에 개정된 것
이다. 여기서 사립 학교들인 이른바 종립 학교들에서의 종교교육은 심지어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조차도 금하도록 규정되지 않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
다. 다시 말해서, <교육기본법>은 종립 학교에 대해서는 전교 지향적 종교교육조차
도 열어 놓고 있는 셈이다.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29
도 모든 종교교육은 금기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종종 잘못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교육기본법>상의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이란 개념은 엄
밀히 말하자면 포교 등 종교활동으로서의 교육을 뜻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
해서, 국공립학교에서까지도 인간의 문화적 현상이나 사회적 제도로서의 종
교를 학문적이나 인성 교육적 차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말이
다. 따라서 실제로 초 중등학교의 <사회>와 <도덕> 그리고 고등학교의 <국
사>, <사회와 문화>, <윤리> 등의 교과목 속에는 상당한 분량의 특정 종교
들에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종교자체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교과의 일부로서 종교를 다루므로 매우 체계적이지 못하고 단편
적인 내용들이다. 그리고 교과서들도 종교 전문가들이 집필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편파적이거나 심지어는 잘못된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은 종교가 아주 복잡한 나라다. 즉 세계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 국가인 셈이다. 그러므로 일반 학교의 종교교
육과 연관하여서 타종교 및 종교갈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1980년대 고등학교 및 대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의 종교관계 기
술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근대 교육은 종종 서양식 교육을 의미해왔고, 그
것은 당연히 서구 기독교적 배경들이 깔려왔다고도 하겠다. 이러한 기독교
편중 경향을 그 동안 오래도록 피해의식에 시달려 왔던 불교계가 강력한
비판을 하고 나섰다. 즉 기독교적 내용에 비해 불교적 내용이 상대적으로
적고 미약하다는 것, 그리고 과연 전통사상에 기독교도 포함시켜 교육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반면에 기독교 측의 전통종교에 대한 공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즉 한국
<교육법>(현행 <교육기본법>)의 기초 이념은 국조 단군에서 유래하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을 표방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무 국수주의적이
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상 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일부 근본주
의적 기독교 측의 개정안이 나온 바 있다. 이에 반대하는 민족종교들의 서
명운동들도 대단하였다.
아주 최근에는 일부 민족종교가 초등학교들에 국조 단군상(檀君像)을 건
립하는 운동을 펼쳐 나가자 이에 맞서 기독교계의 반발이 굉장했다. 민족종
교 측은 종교적 신앙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국조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기본
적 관심임을 강조하였고, 반면에 기독교 측에서는 일부 종교 단체의 교조선
전을 위한 신앙활동으로서 <헌법>상 국교금지(정교분리) 원칙의 명백한 위
종교학 연구 30
배라는 주장이었다.
Ⅲ. 종립 학교의 종교교육
종립 학교는 종교단체들이 세우고 현재 운영을 맡고 있는 일종의 공교육
기관이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종립 학교의 총수
는 약 400여 개 교다. 그중 불교계 종립 중 고등학교는 20여 개 교고, 기
독교계 종립 중 고등학교는 270여 개 교다. 그리고 이런 종립 중 고등학교
의 총 수는 전체 중 고등학교 수의 약 10%다.
종립 학교도 공교육 기관이므로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세속적 교과목
들을 모두 가르친다. 그러나 본래 전교활동의 일부로서 설립된 셈이므로 동
시에 정기적인 종교행사(예배와 미사 및 법회 등)나 종교관련 교과목을 대
체로 주당 1시간 이상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기가 일쑤다.2) 즉
1970년대까지는 기독교계 종립 중 고등학교들은 <성경>이라는 교과목으로
운영해왔고, 불교계 종립 중 고등학교들은 <불교>라는 교과목으로 가르쳐
왔었다. 그러니까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개별 종
립 학교들이 임의적으로 종교 교과목을 운영해 온 셈이었다.
이렇다 보니 실제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예컨대 종교 교과목을 담당하
는 교사들은 정식 교사 자격증을 가질 수가 없어서 교사처럼 불리긴 하지
만 학교의 서무 직원으로 채용되고, 신분 보장이나 연금 혜택 등 정식 교
사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또 학생들도 정규 교과목이 아니므로 소
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런 종립 중 고등학교 종교교육의 파행적 실태를 개선하고, 일반
중 고등학교에 있어서까지 수신(修身)과 인성 교육의 일환으로 종교교육의
중요성을 수용하고자 1980년대 초반부터 종교 교과목을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과정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3) 그래서 결국 제4차 고등
2) 사실 이러한 의무적 부과는 (<교육기본법>상은 문제가 없지만) 위헌의 소지가 있
다. 그러나 국공립학교만으로 교육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는 한국적 현실에서 사
립인 종립 학교들이 나름대로 종교활동의 일환으로서 종교교육을 강제적으로 부과
함은 어느 정도 묵인되어 온 셈이었다.
3) 특히, ‘기독교교육연합회’를 중심으로 종교계와 종교계 언론들이 앞장서 종교교육의
합법화를 위한 여론이 조성되었다(윤이흠, ‘종교교육의 교육적 의미’, 여산 유병덕박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1
학교 교육과정(1982-1988, 문교부 고시 제442호, 1981. 12. 31)에 <논리학
>, <철학>, <심리학>, <교육학>과 더불어 <종교>는 ‘자유선택과목’으로 지
정되었다. <종교>4)가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즉 종립 학교만이 아니라 일반 학교들을 포함하는 모든 고등학교
에서 <종교>를 보통교과의 정식 ‘자유선택과목’으로 채택하는 것이 가능해
진 셈이었다. 다만, ‘자유선택과목’으로 <종교>를 부과할 경우 <종교> 이외
의 과목을 포함, 복수로 과목을 편성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선택의 기회를
가지게 할 것을 단서로 달고 있다.5)
그러다가 제5차 고등학교 교육과정(1989-1994, 문교부 고시 제88-7호,
1988. 3. 31)부터 ‘자유선택과목’에서 ‘교양선택과목’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그리고 제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1995-2001, 교육부 고시 제1992-19호,
1992. 10. 31)과 제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2002-2007, 교육부 고시 제
1997-15호, 1997. 12. 30)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고등학교 ‘교양
선택과목’으로는 <종교> 이외에도 <철학>, <논리학>, <심리학>, <교육학>,
<생활 경제>, <생태와 환경>, <진로와 직업>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 ‘교양
선택과목’들은 4단위6)까지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4차 고등학교 교육과정부터 <종교>가 ‘자유선택과목’으로 포
함되었다는 것은 종립 학교의 경우 엄밀히 말하자면 없던 교과가 새로 생
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동안 가르쳐 오던 <성경>이나 <불교> 과목을
정규화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우선 교사들이 정식 자격증을 가진 교사들로
채워진다.7) 하지만 기존의 종교 교사들을 일시에 자격증을 가진 교사들로
사 화갑기념 한국철학종교사상사 ,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0, pp.937-938). 즉, 국가나 교육계가 아니라 종교계의 요구에 의하여 공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의 길
이 열린 셈이다.
4) 여기서 교과목명이 <종교학>이 아니라 <종교>인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까 종교를 정규 교과목에 편입시키고자한 사람들의 관심이 순수 학문적 종교학이
라기보다도 전교(傳敎) 내지 수신(修身) 및 인성 교육의 일부로서의 종교 자체이었
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동안 새로운 교과과정으로 개정될 때마다
종교학적 시각을 확대해 나아가고자 하는 일부 시도들이 있었지만, 교과목명이 <종
교학>으로 수정되지 않고 <종교>로 유지되는 한, 그에 적합한 교육목표를 또한 유
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5) 이 조항은 그 이후 교과과정이 본격화되는 제6차 교육과정 때에도 그대로 포함된
다(교육부, 한문, 교련, 교양선택과목 교육 과정 , 1997, p.20). 이것은 아마도 <종
교> 교과목이 강요되어 위헌시비가 있게 됨을 피하고자 마련된 규정이라고 할 것
이다.
6) 1단위는 매주 50分수업을 기준으로 하여 1학기(17주) 동안 이수하는 수업량이다.
종교학 연구 32
모두 바꿀 수는 없으므로 1년간 임시 집중연수 코스를 마련하여 3차에 걸
쳐 약 300명쯤 되는 기존의 종교교사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종립 학교의 종교교육이 정규 교육과정의 일부로 된다는 것은 자
율적인 종교활동의 일환으로서의 종교교육이 공교육의 성격을 더욱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였다. 제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칭만 있던 <종교>과의 구체적인 교육과정이 마련되었다. 우선
<종교>과 교육과정의 내용 체계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각
종단마다 각기 다른 자신의 특정 종교의 신행(信行)만을 가르치던 종전의
내용을 지양하여 모든 학생, 심지어는 일반 학교의 무종교인들에게도 가르
칠 수 있는 하나의 통일된 교과내용을 개발해 내야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보편적인 종교 이론과 종교 문화전통에 관한 내용이 새로운 교육과정의 중
심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개교 이래로 오래된 자체의 전교 지향적 종교교
육을 하여온 긴 전통을 하루아침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과도기적
상황을 고려하여 결국 두 가지 측면의 의미를 심각하게 반영하여 다음과
같은 교육과정의 내용체계가 성립되었다.
영역 내용
1. 인간과 종교 생활주변의 종교들
종교적 신념과 이해
궁극적 가치와의 만남
종교적 인격 형성
2. 세계 문화와 종교 유교, 불교, 도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힌두교의 전통과
사상 및 그 밖의 종교사상
3. 한국 문화와 종교 전통적인 민간 신앙
7) 종교 교사 자격증을 따려면 일정한 수의 종교와 교육학 과목들을 이수해야 한다. 그
리고 적어도 <종교사>, <비교종교학>, 및 <한국종교>의 세 과목은 필수과목으로 부
과되어 왔다. 아주 최근에는 필수과목이 더 확대되어 <종교교육론>, <종교학개론>,
<종교현상학>, <종교철학>, <한국종교>, <종교사회학> 또는 <종교인류학>, <종교심
리학>, <세계종교> 또는 <종교사> 또는 <비교종교학>, <현대종교>, <종교와 과학>,
<종교학사> 11과목 중 5과목을 이수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도 일부 저급 신학교들
에서 이러한 과목들에 적당한 교수요원을 확보하지 못하여, 예컨대 ‘종교사’ 과목을
개설해 놓고 <교회사>를 하거나, <교회사> 과목을 <종교사>의 대체과목으로 이수하
게 하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3
유교, 불교, 도교의 수용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의 수용
한국의 민족 종교
4. 종교경험의 이해 신앙의 여러 관점
종교의식과 종교적 실천
종교적 공동 생활
5. 현대 사회와 종교 성스러운 문헌들의 현대적 의미
종교와 세속 문화와의 만남
다른 종교들 간의 대화
종교와 사회의 이상 실현
6. 특정 종교의 교리와 역사 종교의 경전
종교의 교리
종교의 역사
일상생활 속에서의 종교적 생활
종교와 내일의 한국
<제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의 ‘종교’와 내용체계>8)
다시 말해서, 총 6개 영역으로 구성되고 그 중 1, 4, 5영역은 종교 이론
에 해당되고, 2, 3영역은 세계 및 한국 종교 문화 전통에 해당되며, 마지막
6장에서는 종전에 행해오던 자체의 종교교육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
었다.9) 즉 공교육적 종교교육과 종단 자체의 종교교육이라는 이중적 교육
이념이 절충된 셈이다. 이 두 가지 교육이념의 절충 문제는 이후로도 계속
고등학교 종교 교육과정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생각되고 있다. 즉 종교
8) 한국 공교육에서 최초로 구체화된 정규 종교교육 교과과정인 이 제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종교>과 내용체계는 필자가 초안을 마련하였고, 공청회와 심사위원회
를 거치며 일부가 수정(특히 ‘제6장 특정 종교의 교리와 역사’가 추가됨)되어 교육
부에서 확정하였다.
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내용체계가 곧 교과서의 장(章)이나 수업시간의 비중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로 이러한 내용 체계에 대하여 종립 학교들의
반발이 심각하였다. 기존의 전교 지향적 종교교육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 작다
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용체계는 제시된 바와 같지만 실제 교과서나 수업의 편성
은 융통성을 두는 것이 묵인되어 왔다. 따라서 제6차 교육과정에 맞추어 나온 교과
서들의 내용은 종교학 이론 및 종교 문화 전통들에 대한 것이 30%~40%이고 자체
의 특정 종교에 대한 것이 60%~70% 정도 되고 있다.
종교학 연구 34
교육과정을 초안하는 사람들은 현재 일반 대학에서 학문으로서만 종교학을
하듯이 고등학교에서도 종단 자체의 전교 지향적 종교교육을 그만두고 학
문적으로만 가르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종립 학교 종교교육의 현장
에서는 학교 설립의 취지를 살려서 전교 지향적 종교교육을 어느 정도 병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1997년에 확정되어 현재 시행중인 제7차 고등학
교 종교 교육과정도 이러한 두 가지 요소가 서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결국
확정되었다.10) 그러나 점차 전교 지향적 성향이 약화되고 학문적 성향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집필된 종교 교과서들은 심사를 거쳐 ‘인정
교과서’가 된다.11) ‘인정’ 심사는 지방 교육청의 소관 사항이다. 지방 교육
청에서는 종교학 교수와 일선 중 고등학교 종교교사들로 구성된 심사위원
회에 심사를 의뢰하여 그 결과를 참고하여 ‘인정’ 권을 행사한다. 대체로 인
정 심사에서 중시되는 것은 내용상의 오류와 타종교에 대한 비방과 왜곡된
기술 등을 바로 잡는 것이다.12)
10) 정진홍 교수가 초안을 작성하고, 필자가 심사위원장을 맡고, 교육부가 확정한 현행
제7차 고등학교 종교 교육과정의 내용체계는 다음과 같다.
영역 내용
1. 인간과 종교 궁극적인 물음과 문제, 종교와의 만남과
문제 해결,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종교의 의의와 역할
2. 종교 경험의 이해 여러 가지 인생 문제, 우주관 역사관 생사관, 경전과 종교 규범, 종교 의식과 종교적 실천
3.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 종교 사상과 배경, 참된 것과 깨달음, 종교의 특성 이해
4. 세계 종교와 문화 유교와 도교, 불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와
기타 종교
5.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다양한 인간관, 종교적 인간관
종교적 이해 종교적 자연관, 과학과 종교
6. 한국 종교와 문화 한국 불교와 문화, 한국 유교와 도교 문화
한국 크리스트교와 문화, 한국 무속 신앙과
민족 종교
7. 종교 공동체 공동체의 이념과 구조, 종교의 사회적 기능, 종교간의 화해와 공존, 종교적 인격 형성
8. 특정 종교의 전통과 사상 경전 교리 역사, 종교적 생활, 한국 종교와 문화 창조, 나의 종교 생활
설계
11) <국어>나 <국사> 교과서들이 ‘국정 교과서’들이고, <영어>나 <수학> 등의 필수과목
교과서들이 대개 ‘검정 교과서’인데 비해 선택과목이므로 ‘인정 교과서’인 셈이다.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5
그러나 종교 교과목이 중 고등학교의 정규 교육과정 속에 편입되면서 진
짜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연 한국의 모든 중 고등학생들에게 무리 없이 수
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사실 정규 교육과정의 하나이므로 종립 학
교뿐만 아니라 비종립 사립학교와 심지어 국공립학교를 포함하는 일반 학
교에서도 어디서나 교양선택과목으로 채택하여도 무방하다. 그러나 실제로
는 일반 학교에서 <종교>를 교양선택과목으로 채택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그 이유는 <종교>를 택하면 우선 원칙적으로 (앞서 언급되었듯이) 적
어도 하나 이상의 또 다른 교양선택과목을 더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교사 확보나 반 편성 등 번거로움이 많다는
것이다. 또 기존의 <종교> 교과서들은 대개 종단 배경을 가지고 집필된 것
이므로 국공립학교 등 일반 학교에서는 채택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독자
적인 교과서를 개발할만한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종립 학교치고 <종교>를 교양선택과목으로 가르치지 않는 학교는
없다. 그런데 종립 학교들은 대체로 교양선택과목으로 <종교>만 개설할 뿐
다른 과목을 복수로 동시에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대개 다른 교양선택과목을 개설해도 학생들이
선택하지를 않는다는 구차한 변명이다. 그러니까 <종교>는 중 고등학교의
보편적 교육과정 속에 포함된 정규과목이지만 사실상 종립 학교에서만 가
르치고 있는 매우 특수적 교과목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중 고등학교들은 학생들을 대개 무시험 (통학거리
등을 위주로 한) 컴퓨터 임의배정으로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종
교 신자도 일반 학교에 배정되는 반면에 무종교인도 종립 학교에 배정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불교인이 기독교 학교에 배정되기도 하고, 가톨릭
신자가 불교 학교에 배정되기도 한다. 분명히 종교가 강요되는 위헌적 소지
가 있다. 물론 본인이 극구 반대하는 경우에는 종교행사나 종교수업에 불참
해도 용인은 된다. 그러나 그렇게 혼자만 행동하기란 쉽지만은 않다. 이런
12) 필자는 10여 종의 <종교> 교과서를 위한 인정 심사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한 바
있다. 심사 기간이 대개 충분하지 못하므로 교육과정에 충실하여 집필되었는가 하
는 것을 정밀하게 따지기는 어렵다. 또 아직도 전교 지향적 옛날 교과서의 잔재들
이 남아 있다. 따라서 교과서의 이름도 단순히 ‘종교’라고들 쓰고 있지 않다. ‘종교
(기독교)’ 또는 ‘종교 (불교)’라고들 하고 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종교 일반 이론
의 내용이 확대되고 교과서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목격한다. 물론 일부 교
과서들이 인정 심사에서 탈락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삭제, 수정, 보완 지시
를 거쳐 통과시켜서 종단의 독자적 집필 의도를 존중해주고 있다.
종교학 연구 36
맥락에서라도 <종교> 교과목은 종전의 종파적 전교 지향적 성격을 지양하
여 비록 점진적으로라도 장차 더욱 학문적이고 수신(修身)과 인성 교육적
차원13)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즉 학생들의 ‘종교적 센스 또는 정조(情
操)’를 길러내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사용할 만한 비 종파적 <종교> 교과서가 나와야 할 것이다.
Ⅳ. 한국 종교교육의 전망
이상 간단히 검토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공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은 비
록 풀어야 할 난제들을 많이 안고 있으나 점차 확대 일로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몇 가지 덧붙여 보면, 우선 종단 차원의 다양한 종교교육이 빠르
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특징은 강원과 선원 및 향교와
서원 그리고 신학교 중심의 종교전문인들을 위한 종교교육보다는 평신도들
중심의 교양불교대학, 전통 예절 강좌, 성서(聖書)대학들이 매우 활성화되고
있다.14) 여기에는 그 동안 1980년대 이후 급속히 발달된 종교관계 매스컴
특히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15) 비록 종단 차원의 종
교교육이지만 이들의 확산은 분명히 공교육에서의 종교교육의 내용과 질에
도 점차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공교육의 일환으로서의 종교교육도 전반적으로는 확대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위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아직 일반 학교에서는 세속적 교과목의
일부에서만 종교가 취급되고, <종교>라는 교과목 자체는 종립 중 고등학교
13) 과연 이러한 수신(修身)과 인성 교육적 차원에서 종교교육이 현대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는 또 다른 큰 문제다. 특히 도덕교육의 일환으로 종교교육을 확대하려는 시
도는 실제 경험적 조사들에 의하면 매우 신중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 문제에 대
하여 김종서, “학교 도덕교육에 영향을 주는 종교적 변수”, 한국교육개발
원, 교육개발 , 14/6 (1992): 20-27 참조.
14) 다만 이렇게 평신도를 위하여 시작된 교양불교대학이나 성서 신학원들이 전혀 교
육부의 인가는 못 받은 무인가 교육기관이면서도 졸업생들에게 (공인 학위인 듯) 자체 종단 내에서만 통용되는 가짜 학위증들을 남발하여 문제가 되는 수가 있다. 즉 국가 공인 학위제도를 오염시키고, 자격이 안 되는 성직자들을 배출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다.
15) 불과 20년 전만 해도 변변한 불교개론서가 없어서 기본 지식도 잘 못 갖추었던 불
자들이 요즈음 불교방송의 교리상담 프로 등을 듣다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의 높
은 불교 지식을 갖고 있는 것에 심지어 격세지감을 느끼게까지 된다.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7
에서만 국지적으로 교육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정규 교육과정 속에 편입되
어 일반 중 고등학교에까지 확대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은 열린 셈이다.
한편 일반 대학에서도 미국에서처럼16) 종교학이 인문학의 일부로서 상당
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 국립 서울대학교에만 종교학
과가 있었으나 그 후 서강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 등에 설립되었고, 종교철
학과와 종교문화학과 등 유사학과들까지 합치면 꽤 여러 대학에 종교학 관
련학과들이 생겼다. 교양과목으로서의 <종교학개론>이나 <세계종교> 등은
거의 모든 중요 대학교들에서 개설하고 있으며, 수강생들이 늘고 있는 추세
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심지어 순수 신학대학이나 불교대학 등에서도 종교학
관련과목들은 거의 필수적으로 설강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근대화의 초기에는 과학적 합리적 지식에 대조되어 종교는 학문적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수가 많았다. 특히 <헌법>상의 ‘국교금지(정교분
리)’ 조항은 종교문제에 국가가 간섭할 수 없는 것으로 종종 간주되어, 종
교를 개인적 신앙문제 정도로 치부하고 국가적인 배려를 하지 않기가 일쑤
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국교금지(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가 다원
화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어느 특정 종교만을 지나치게 후원하는 이른바 국
교화(establishment)로 인한 상대적인 다른 종교들에 대한 박해를 피하기 위
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어야 한다. 즉 오늘날처럼 종교다원주의가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사실상 국교화의 위험이 거의 없고, 오히려 지나친 정교의 분리
가 종종 많은 국가로 하여금 국민의 영적 복지(spiritual welfare)에 대한 무
관심만을 초래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정교분리의 원칙은 오
늘날처럼 철저한 종교다원주의 시대에는 사실상 무의미한 셈이다. 그러므로
정교분리 조항 때문에 종교교육을 공교육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셈이다.17)
실로 우리는 한국동란 이후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아직도 빈부
의 격차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 덕분에
상대적으로 이제는 후진국의 오명은 벗어난 셈이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정
부는 이제 국민의 배고픔뿐만 아니라 생활의 질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16) 미국 대학들에서 종교학의 성립과 전개에 대하여, 김종서, “미국인의 종교에 대한
지적 관심변화: 미국 종교학의 성립과 발달”, 미국학 , 20 (1997): 343-358 참조.
17) 김종서, “종교교육 실태분석 ―종교교육의 이론적 체계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
학 종교사상의 제 문제 (VI) , 1990, pp.241-269. 특히 정교분리의 원칙이 깨지면서
공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이 강화되어온 과정은 미국의 경우에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종교학 연구 38
다시 말해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건강한 국민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민들이 종교에 대한 건전한 지식
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영성 생활을 영위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은 정부의
기본적인 의무다.
특히 현대 한국사회에는 종교적 편견으로 인한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
고, 또 종교적 무지를 이용한 범죄들이 속출하고 있다.18) 그러나 국민들은
이들에 거의 대책없이 노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국민적 차원의 공교육으
로서의 종교교육은 일정한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사회에서 사는데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꼭 국민의 행
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국가는 일정
한 교육을 의무로까지 국민들에게 부과하면서 넓은 의미의 국가를 위한 ‘인
간적 자본(human capital)’으로 여기고 있다. 종교도 이제 마찬가지로 인식
되어야 한다. 즉 국민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건강할 수 있
게 해야 진정한 의미의 복지국가라면 결국 종교도 ‘국민적 자본’으로서 이
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19)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공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은 기존의 세속적 교
육이 지닌 국민적 자본 가치에 더욱 성숙한 영적 복지이념까지가 새롭게
접목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고차원의 국민적 자본 가치의 축적통로로서
한국 사회에서 기능하고 있다. 요컨대, 종교교육이 지닌 이러한 국가의 이
념적 인프라로서의 성격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공교육으
로서의 종교교육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정교화될 것이라고 우리
가 분명히 믿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논거다.
18) 실로 1930년대 백백교(白白敎) 사건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는 용화교(龍
華敎), 동방교(東方敎) 및 오대양(五大洋) 집단사망 사건, 휴거(携擧)를 내세운 시한
부 종말론 그리고 영생교(永生敎), 만민중앙교회(萬民中央敎會), 천존회(天尊會) 등
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관련 범죄 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은 신종교들
뿐만이 아니라 기성종교들에서까지 골고루 나타나고 있으며, 가출, 의료 사기, 재산
갈취, 부녀자 성폭행 등 다양한 양상을 띄고 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범죄수
법이 갈수록 악랄해지고, 규모도 매우 확대되어 금전 등의 피해 등도 상당한 수준
에 이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종교 관련 범죄들에 당면하여 국민들이 기본적인 종교교육만 되어 있어
도 피해는 줄어들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이러한 종교관련 범죄
와 종교교육의 상관관계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
또 다른 커다란 연구 테마를 초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9) 같은 책, pp.241-244.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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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미국인의 종교에 대한 지적 관심변화: 미국 종교학의 성립과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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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 경기도: 현대사회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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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상사 ,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0, pp.935-942.
종교학 연구 40
Issues and Vistas in Korean Religious Education
Kim, Chong-suh
Religious education in Korea has been mainly performed by religious
orders themselves and secular schools. Again, there are two kinds of
secular schools to offer religious curricular: public (non-parochial)
schools and parochial schools.
The Basic Education Law articulates, “Government-established (public)
schools should not give a religious education for a particular religion.”
However, this article is often misunderstood even as prohibition of
religious education in parochial schools. And academic studies of religion
do not matter with this article.
There are almost 400 parochial schools in Korea. Religion has been
officially included in regular curricular of junior high schools and high
schools since 1980s. It is the most import!ant issue how the education
for a particular religion can harmonize with the academic study of
religion in parochial schools. Non-religious students are often forced to
attend particular parochial schools in Korea. Thus it might be against the
religious free-exercise article of the Constitution that non-religious
students or the students of other religions are compelled to take the
course for a particular religion.
Despite present problems, it is still necessary that students have
chances to learn religious and spiritual sense for their life. In this
context, religion might be thought of as a national capital for spiritual
welfare of the people.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ㅡ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ㅡ
김 현 자*
1)
目次
Ⅰ. 머리말
Ⅱ. 신화, 자연의 과학에서 몽상의 시학으로
Ⅲ. 원형의 모방, 존재에의 향수
Ⅳ. 맺는 말
Ⅰ. 머리말
‘추락한 이카루스의 신화’, ‘맨주먹의 신화’, 요즈음 대중매체들은 20세기
후반 우리나라의 두 경제적 주역에 대해서 이러한 수식어를 사용한다. 특정
인들의 삶을 환기시키는 이 표현들은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 그들
이 비록 고대 그리스의 이카루스 신화의 내용은 모른다 할지라도ㅡ 단지
일시적인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
에게는 윤리적 경종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현재의 역경을 헤치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부추기는 등, 사람에 따라 다양한
심리적, 실존적 변화를 초래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집단의 정신과
삶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이데올로기나 인물 또
는 사건에 대해 오늘날 매스컴에서는 흔히 신화라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레비스트로스와 엘리아데는 20세기의 뛰어난 신화 연구자라는 점에서 공
통점이 있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가 21세기 정신 문명에 밝은 빛을 던져줄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그리하여 그들의 학문적 업적이 또 다른 신화가 되
어 그 힘들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예견된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이
* 서울대 강사, 종교학
종교학 연구 42
글의 부제는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연구가 21세기 정신문명에 끼
칠 이러한 영향을 시사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사실 레비스트로스와 엘리아데의 지적 편향과 연구방법은 판이하게 달라
서 공통점보다는 차이점들이 더 많으며, 심지어 레비스트로스는 엘리아데가
행한 작업들의 학문적 객관성에 대해 비판을 넘어 불신의 눈길을 던지기까
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신화적 사고를 원시사고, 고대사
고, 또는 주술-종교적 사고와 동일시하면서 이 사고의 특성들을 탁월한 통
찰력으로 규명한 신화학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레
비스트로스와 엘리아데의 신화연구의 일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
이 밝혀낸 신화적 사고의 특성들을 소개하겠다.
엘리아데가 주목하고 강조한 면은 ‘신화를 사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그는 신화적 사고의 주요 특성은 바로 신화를 사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통
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엘리아데에게 신화를 사는 인간의 존재방
식은 곧 종교인의 존재방식으로, 그는 이러한 존재 방식 ㅡ 엘리아데는 이
것을 고대 존재론이라 명명했다ㅡ 을 20세기 중반이래 합리적인 서구 정
신이 대면하고 있는 한계 또는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만든 주체인 원시정신 ㅡ 레비스트로스는 이 정신
을 야생의 사고라 불렀다ㅡ 자체에, 그리고 신화 자체의 논리와 특징들에
주목하여 신화적 사고의 특성들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였다. 엘리아데와는 달
리 비록 그가 신화적 사고를 근대 이후 서구 문명이 겪고있는 위기들을 극
복케 해줄 대안적 사고 페러다임으로 공공연히 내세우지는 않지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밝혀낸 신화적 사고는 바로 21세기가 대안적 사고로 내세우
는 환경생태적 사고, 생명적 사고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ㅡ 이 점은 앞으
로 보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적 사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뿐 아니라 대중들이 기울이는 신화에의 관심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근원적인 물음, 즉 ‘왜 첨단 과학의 시대인 21세기에 사람들은 신
화에 관심을 가지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어떤 해답을 제시해 줄 것이다.
Ⅱ. 신화, 자연의 과학에서 몽상의 시학으로
1. 신화, 원시과학인가?
노르웨이 신화는 지진이 왜 발생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최초의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43
신의 아들들이 서리 거인 이미르를 죽이자 이미르의 소금기 있는 피가 흘
러 바다를 이루었고, 이미르의 뼈는 산을 이루고 살은 땅을 이루었다. 거인
이미르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일부는 아직 살아서 거대한 물
푸레나무 아래에서 잠자고 있는데, 그가 몸을 뒤척이면 땅이 흔들린다.
하늘과 땅이 창조되기 이전의 세계는 어떠했는지, 하늘과 땅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등을 한 중국 신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옛날에 하늘과 땅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는, 상(像)만
있고 형태는 없었다. 고요하고 컴컴하고, 흐릿하고 아득하고, 까마득하고 깊
어서 그 문을 알 수가 없었다. 두 신(神)이 함께 섞여 생겨나 하늘과 땅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깊숙하여 그 끝나는 곳을 알지 못하고, 매우 커서
그 멈추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나뉘어 음양(바陽)이 되고, 또 나뉘어
팔극이 되었으며,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 어울려 만물이 형성되었다.
어수선한 기운은 벌레가 되고, 맑은 기운은 사람이 되었다.”1)
각 나라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낮과 밤이, 산과 바
다가, 어떤 섬이, 한 식물 종(種)이 또는 동물 종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인
간은 또 어떻게 생겨났는지, 눈, 비, 얼음, 서리, 지진, 화산, 번개같은 자연
현상들이 왜, 또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하는 신화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종류의 신화들은 과학과 관심 영역을 공유하고 있으며, 과학처
럼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화들이
우주 구성물의 생성과 자연 현상의 발생을 설명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과학
이 설명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과학적 인과론의 관점에서 보면, 비합
리적이고 비논리적인 듯이 보이는 신화의 설명방식은 무지몽매한 사유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화에 관심 가졌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고대인들이나 원시인들이 지적으로 덜 발달하
여, 우주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창
조와 인류의 발생을 그렇게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신화를 원시과학으로 가
치폄하하면서 신화와 과학을 대립시키는 관점의 기저에는 이처럼 전과학적
이고 비논리적인 신화/합리적, 논리적인 과학이라는 관념이 깔려 있었으며,
이때 신화적 사고는 대체로 주술?종교적 사고, 또는 원시사고, 고대사고와
동일시되었다.
오늘날 신화학자들은 이러한 신화/과학의 대립구도를 부정한다. 신화가
1) 淮南子, ?情神訓?.
종교학 연구 44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견해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며 신화적 사고의
논리성과 과학성을 밝혀낸 이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를 연구한 프랑스 인
류학자 레비스트로스다. 그는 오늘날의 토테미즘 Totémism d'aujourdhui
과 야생의 사고 La Pensée sauvage 에서 ‘원시인들은 경제적?본능적 욕
구에 충실한 존재로서, 주술적이며 따라서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다’라는
주장의 근거들을 반박하는 수많은 예들을 제시하면서 신화적 사고와 과학
적 사고의 차이점들 및 신화의 속성들을 규명하였다.
초기 민속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신화를 만들어내는 원시사고 또는 고대
사고의 지적 열등성을 주장했던 근거는 대개 언어 영역과 기술?경제적 영
역의 관찰에서 나왔다.
고대사회나 원시사회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이 사회들은 현대 문명사
회에 비해, 또 그 사회 내에서 개별적 특수어들에 비해, 일반어나 추상적
관념어가 덜 발달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추상적 관념어의 빈곤을
종종 원시인들의 지적 열등성을 말해주는 근거로 내세우곤 하였는데, 일반
어 또는 추상적 개념들은 구체적인 실재물의 속성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
심을 가졌을 때, 또 그 속성들을 구별할 수 있기 위해 보다 잘 깨어있는
관심을 가졌을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먼저 추상
적 관념어의 풍부함이 문명화된 언어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밝혀주는 예들
이 경시되어왔다고 말한다. 북미 서북부에 사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치누크
어’가 널리 쓰였는데,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디언들은 모든 소유물이나 특
질들을 거의 추상적 언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그 악인이 그 가
엾은 아이를 죽였다’라는 말이 치누크어에서는 ‘그 사나이의 악이 그 아이
의 가엾음을 죽였다’라고 표현된다. 그런가 하면 ‘그 여자는 너무 작은 바구
니를 사용했다’라는 표현은 ‘그 여자는 양지꽃의 뿌리들을 조개 바구니의
협소함 속에 넣었다’라고 표현된다.2)
그런데 언어 영역과 관련하여, 대다수의 초기 민속학자, 인류학자들은 이
율배반적인 태도를 드러낸다고 레비스트로스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반대
의 경우, 즉 일반적 용어들이 특정 명칭들보다 많을 때의 경우도 역시 야
만인들의 지적 빈곤을 확인하는 증거로 활용되었으며, 이 경우 일반적 용어
들의 발달을 원시인들의 유기체적 욕구 또는 경제적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
2) F. Boas, “Handbook of American Indian Languages,” Part.Ⅰ, Bulletin 40, Bureau
of American Ethnology, Washington D.C., 1911, pp.657-658. Claude Lévi-Strauss,
La Pensée sauvage, Plon, Paris, 1962, p.3에서 재인용.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45
로 민속학자들은 설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연구자들이 개별적 특수
어들보다 일반어들이 더 발달한 원시사회와 접했을 때는, 그들은 추상적 개
념어의 빈곤을 증거로 내세워 원시인을 지적으로 열등한 인간으로 간주했
던 자신들의 견해를 수정하려 하지 않고, 이번에는 일반어의 발달을 지적
욕구가 아닌 생존을 위한 본능적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말
하자면 원시인을 동물의 영역으로 귀속시킨다는 것이다.
기술?경제적 영역과 관련해서, 프레이저, 레비 브륄과 같은 인류학자들
은 원시사회의 낮은 단계의 경제와 기술을 곧 원시사고의 단순함이나 조야
함으로 간주하였으며, 의식적이며 복합적이고 일관된 분류체계는 낮은 단계
의 경제와 기술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했다. 원시사회가 상당히
복잡하고 체계적이며 의식적으로 고안된 토테미즘이라는 분류체계에 의해서
조직되고 있음을 관찰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인들의 사고는 단순하고 조야
하다는 편견이 민속학자들로 하여금 일관되고 복합적이며 의식적인 원시인
들의 분류체계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한다.3)
“야만인들은, 사람들이 즐겨 상상하듯이, 동물적 조건들을 겨우 탈피하여
욕구와 본능에 내맡겨진 존재도 아니며, 또 그들의 의식이 감정에 지배되며
혼돈과 참여 속에 빠져있었던 적은 결코, 어디서도 없었다”4)고 강조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인들이 토템적 동?식물에게 기울이는 관심은 생리적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던 말리노프스키와 신비적 참여로써 원시심성
을 규정했던 레비 브륄을 비판한다.
신석기 시대에 터득한 위대한 문명의 기술들, 예컨대 토기 제작, 직조,
농경, 가축 사육과 같은 거대한 업적들을 오늘날 그 누구도 우연한 발견의
축적이라거나 어떤 자연현상을 수동적으로 눈구경해서 드러난 것으로 생각
할 수는 없으며, 이 기술들 각각은 수세기에 걸친 능동적이고 조직적인 관
찰과 대담한 가설을 세워 반복해서 실험하고 검증하는 숱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또 신화와 함께 탄생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는 현대의 기술로는 도저히 이루
기 어려운 과학?기술적 위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인들은
그것을 마치 우연의 산물인양, 또는 과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적의 산
물인 듯한 뉴앙스를 풍기는 ‘불가사의’로 표현하면서 은연중 고대인의 그
3) 레비스트로스에게 신화적 사고와 야생의 사고 또는 원시사고는 동의어이며, 토템
분류의 논리는 바로 신화적 사고의 논리이다.
4) La Pensée sauvage, p.57.
종교학 연구 46
뛰어난 과학성과 기술성을 부인하거나 외면하고 싶어한다.
고대인이나 원시인들의 자연환경과의 밀접한 관계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세계 여러 지역의 고대 또는 원시 사회 연구자들에 의해 일찍
이 확인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환경에 대해 정확
하고도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현지조사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예리한 식별력으로 바람, 빛, 계절의 색깔, 물결의 장막, 파도의 변동, 기류와
해류 등과 같은 자연 현상의 미묘한 변화들 및 바다와 육지의 온갖 종류의
생물에 대해, 그 종(種)에 고유한 특성들을 파악했다. 끝없는 지적 호기심과
관심, 체계적 관찰 및 시행착오의 반복들이 없이는 불가능한, 그래서 자연의
과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러한 지식들이 단지 경제적, 실용적 목적만을 위
해 구축된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수많은 예들을 열거하면서, “원시인들의 객
관적 지식에의 욕구가 비록 근대 과학이 실재들에 몰두하는 정도만큼 실재
들 쪽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대 과학에 비견될만한 지적
보행과 관찰방법들을 내포하고 있다. 두 경우 다 우주는 필요한 것들을 충족
시키는 수단이자 사고의 대상이다”라고 레비스트로스는 주장한다.5)
고대인이나 원시인을 지적 미개인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
는 자연계 및 인간계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설명 방식과 이
른바 신화적 설명 방식이라고 부르는 원시인과 고대인의 설명방식과의 차
이점이다. 과학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보면 신화적 설명은 지적, 논리적 인
식의 결여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를 필연적 관계들의 설정으로, 과학을
인간과 자연,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관찰하여 그것들에 대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체계로 이해한다면, 신화는 근대 과학 못
지 않게 논리적이며 과학적임을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여러 저서 속에서 수
많은 신화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일 원시과학을 지적으로 열등
한 전과학적 설명체계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화를 고대 또는 원시
과학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학은 근대 과학과는 다른 다차원의
과학, 구체의 과학으로, 근대 과학의 논리가 지적인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반면, 구체의 논리는 정서적인 면과 지적인 면 두 면에서 포착된다.
2. 신화, 다차원의 과학, 구체의 과학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와 과학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인간정신
5) 앞의 책, p.5.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47
의 발달단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과학적 인식의 공략을
받을 때 나타나는 두 전략적 층위들이다. 하나는 지각과 상상력의 층위에
대략 맞추어졌고, 다른 하나는 거기를 벗어난 것이다. 두 가지 다른 길을
통해 모든 과학 ― 그것이 원시과학이건 근대 과학이건― 의 목표인 필연
적 관계들에 이를 수 있듯이, 전자는 감각적 직관에 매우 가까운 길에서
필연적 관계들에 도달하려고 하고, 후자는 감각적 직관에서 멀리 떨어진 길
에서 그 관계들에 도달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신화와 과학은 동일한 현
상의 인과관계를 각기 다르게 설명하는 상반된 설명체계가 아니라, 동일 현
상의 다른 진실, 다른 의미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서로 다른
설명체계이며, 신화적 설명체계는 감각적 직관이 보다 강하게 작용하는 설
명체계라는 것이다.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는 두 가지 다른 사유방식이다. 태양은, 과학
적 사고에게는 플라스마 상태의 입자들이 중력에 의해 뭉쳐있는 덩어리이
지만, 신화적 사고에게는 매일 아침 동쪽에서 떠올랐다 저녁에 서쪽으로 지
고 북쪽의 어두운 계곡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다시 동쪽에서 떠오르는
우주의 규칙적인 질서이자 변치 않는 찬란한 진리의 빛, 그래서 신적이고
제왕적인 권능의 현현이다. 과학적 사고에게, 봄에 식물을 싹 틔우고 곡물
의 이삭들을 발아시키는 비와, 삶의 터전들을 파괴시키고 뭇 생명들을 앗아
가는 대홍수의 비는 동일하다. 그것들은 수소와 산소가 2 : 1의 비율로 합성
되어 이루어진 물이며, 이 물은 한랭기단과 온난기단이 만나 정체 상태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 사고에게는 전자는 단비, 풍요를 가
져다주는 곡우(穀벌)이며, 후자는 폭우(暴벌)이다. 또 전자는 조상의 은덕(恩
德), 신의 은총의 표시이며, 후자는 조상의 분노, 신의 분노의 표시이다. 이
처럼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는 서로 다른 사유방식이기 때문에 신화학
자들은 신화를 과학적 시각에서 읽기를 거부하며, 신화를 전과학으로 간주
하는 것은 신화적 사고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박한다.
근대 과학이 필연적 관계들을 추상적 개념들을 이용해서 설명하는 추상
의 과학이라면, 신화는 구체적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필연적 관계들을 설명
하는 구체의 과학이라고 레비스트로스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신화의 언어는
감각의 언어이다. 대상들의 개별적 특수성들에 무관심한 과학적 개념어가
아니다. 노르웨이 신화는 서리 거인 이미르가 거대한 ‘나무’ 또는 ‘우주목’
아래에서 몸을 뒤척이면 땅이 흔들린다고 하지 않고, 거대한 ‘물푸레나무’
아래라고 구체적으로 나무 이름을 명시한다. 노르웨이인들에게 물푸레나무
종교학 연구 48
는 일반적인 나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감각의 세계는 일반어
나 추상어보다는 특수어, 구체어를 더 선호한다. 우리가 ‘먹거리’ 하면 기껏
해야 양식, 음료수, 간식 등 몇 가지 용도들이 떠오르는 것이 고작이지만,
또 과학적 사고에게 아이스크림은 탄소, 수소, 산소, 유황, 질소의 함량비로
환원되지만, 신화적 사고에게 아이스크림, 생크림, 초콜릿, 우유, 김치, 고사
리, 치즈, 커피, 포도, 수박 등은 저마다 다른 세계를 상기시키며 여러 다양
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주체인 나의 세계와 나의 생리적 욕구
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인 음식의 세계를 나와 너가 교감하여 소통하는
우리의 세계로 융합시킨다.
취리히의 한 동물원 원장이 돌고래와 처음으로 상면했을 때의 느낌을 표
현한 다음의 글은 문화계의 인간과 야생계의 동물이 함께 융합하여 만들어
내는 신화의 세계를, 그리고 이 세계는 과학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를 잘
보여준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돌고래의 인간적인 눈초리, 괴상한 콧구멍, 어뢰
같은 몸짓과 그 빛깔, 유난히 매끈매끈하고 반지르르한 피부결, 부리 모양의
입 속에 가지런하게 4열로 나온 뾰족한 이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의 감동을 서술하고 있다.
“폴립피는 물고기와는 전혀 다르다. 70센티미터가 채 못되는 거리에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의 눈과 마주칠 때면 잠시 숨이 막히고, 이것이 진짜 동물인가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너무도 신선하고 신비하
고 또 괴상쩍은 동물이어서 마법에 걸린 사람이 동물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동물학자의 두뇌는 그것이 학명
으로 Tursiops truncatus라 불린다는, 냉정한 그리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사실만을 연상할 뿐이다.”6)
신화적 사고에게 자연은 인간이 마음껏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돈단무심
한 물질적 대상인 천연자원이 아니다. 자연의 움직임과 변화는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아니 그보다는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동일 유기체의 일부분이다. 나이 쉰이 넘어 농사꾼이
된 윤구병씨7)가 전북 변산에 내려간 뒤 서툰 농사일을 배우느라 쩔쩔매면
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6) La Pensée sauvage, pp.52-53.
7) 전 충북대 철학과 교수.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49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물으며 달력을 쳐다보던 윤씨는 “으응, 올
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는 거여”하는 동네 할
머니 말씀에 정신이 번쩍났다. … 윤씨는 “사람에게 철을 가르치는 것
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한 철 또 한 철 자연과 교섭하는 가운데
밖에서 나는 봄철, 여름철, 가을철, 겨울철을 내면화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철이 나고 철이 듭니다.”
라고 말한다.8)
이웃집 할머니에게 콩 심을 때를 물어보던 윤구병씨는 아마도 ‘모월 모
일 쯤’이라는 대답을 예상하며 달력을 보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삶이 달력 속의 한 숫자와 연결되어 꾸려질 정도로 우리가 긴요하게 사용
하고 있는 이 달력이라는 것은 지구의 공전 주기를 대략 365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달력이 나타내는 것은 날짜에 따른 태양의 고도 차
이이지 기상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경작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빛의 온도
나 광도 뿐 아니라 습도, 바람 등 여러 요소가 있다. 올해의 지금은 작년보
다 더 추울 수도 있고, 비가 더 많이 왔을 수도 있다. 달력은 이러한 기상
변화들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지만, 감꽃은 기후에 따라 피고 지면서 콩
심을 때를 정확히 알려준다. 그래서 농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대인이
나 원시인들처럼 자연의 삶에 자신의 삶을 동화시키면서, 우주의 질서를 자
신 속에 내면화하면서 살아간다.
“이론적 지식은 감정과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인식은 객관적인 동
시에 주관적일 수 있으며, 인간과 살아있는 존재들간의 구체적 관계는 때로
는 과학적 인식의 세계 전체를 감성적 뉴앙스로 채색한다. 특히 과학이 전
적으로 자연적인 그러한 문명 속에서는”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9)
신화적 사고는 지혜가 아직 열리지 않아서 인간과 동?식물을 뒤섞어 같
은 종(種)으로 혼동하는 미개 사고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세계 여러 지
역에서 차용한 숱한 예들을 통해 보여주며 강조했듯이, 원시인들은 ‘같은
속(屬)에 속하는 종(種)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까지도 구별할 수 있는, 생계
수준을 넘어서는 세밀하고 정확한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화 속에서
사람의 이야기가 동?식물이나 천체, 그 밖의 자연현상들과 결부되어 즐겨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신화적 사고가 사회집단과 자연 종(種)과를 동일 종
8) 윤구병씨가 어린이들을 위해 쓴 ‘계절 그림책’을 소개한 신문 기사(한겨례, 2000/
6/19)에서 인용.
9) La Pensée sauvage, p.53.
종교학 연구 50
으로 혼동해서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사회집단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성격들과 차이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종(種)의 수준에서 드러나는 여
러 특질과 차이들을 깊이 파악하여 이 두 다른 질서의 세계를 서로 대응시
켰기 때문이다.10) 또 신화 속에서 신들의 모습이 종종 동?식물이나 천체
또는 자연현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자연을 인간의 인식이 그 변화무쌍
한 움직임의 원리를 속속들이 다 파악할 수 있는 대상, 그리하여 지배, 착
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그 무한하고 다양한 힘
들에 의존해 있는 경외의 대상,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 무궁한 변화의 원리
를 다 알 수가 없는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
시키기 위해 시애틀의 인디언 부족에게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이 워싱턴의 대통령에게 보낸 다음의 서한은 자연과 인간과
의 관계에 관한 이러한 신화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
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
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그걸 어떻게 사
겠다는 것인지요?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
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
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
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
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
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 줍니다. 강
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 줍니다. 그러니까 그대
10) 앞의 책, p.178.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1
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이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는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신성한 땅으로 여겨 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 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이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
다. 땅에 일이 생기면 땅의 아들에게도 일이 생깁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
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이, 그
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
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
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
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륙되
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
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 냄
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
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 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 신세가 될 때에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
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이 사랑
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 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 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
하듯이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이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종교학 연구 52
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
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11)
바지직 마른 장작을 불태우며 널름거리는 불꽃, 따뜻한 바람에 실려 촉
촉이 젖어드는 봄비를 맞고 연초록 잎을 피워내는 버드나무, 단단한 대리
석, 뭇 생명을 키워내고 다시 걷어들이는 대지 등, 신화적 사고는 이처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우주의 움직임인 경외로운 신의 몸짓을 자신의 온 몸
으로 느낀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물, 불, 나무, 흙, 돌, 하늘, 새들에 관한
‘자연의 과학’은 ‘몽상의 시학’으로, ‘생명의 예술’로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는 과학과 종교, 윤리, 詩와 예술이 함께 어울리는 다차원의 과학, 총
체적 인간학이다.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의 아들 파에톤(Phaeton)은 자신이 하루동안만
태양수레를 몰도록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랐다. 태양신은 아들이 자기 대
신 태양수레를 몰 경우 겪게 될 온갖 위험을 이야기하며 겁을 주면서 분에
넘치는 아들의 욕망을 저지시키려 하였으나, 파에톤은 고집을 꺾지 않고 막
무가내로 졸랐다. 힘닿는 데까지 아들을 타이르다 지친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하고는 파에톤을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태양 수레가 있는 곳으
로 데리고 갔다. ‘이 태양 수레는 바퀴 굴대도 황금, 뼈대도 황금, 바퀴도
황금이었고 바퀴살만 은이었다. 마부석에는 태양신이 쏘는 빛을 발사할 감
람석과 보석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고 신화는 이야기하면서 동틀 무렵의 장
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파에톤이 벅찬 가슴을 안고 태양 수레를 만져보고 찬탄하고 있을 즈음, 붉게 동터오는 동녘에서는 새벽잠을 갠 아우로라12)가 장미꽃이 가득 핀
방의, 눈부시게 빛나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별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루키페르13)가 긴 별의 대열을 거느리고 천계의 제 자리를 떠나고 있었
다. 태양신은 이 루키페르가 떠나는 것과, 하늘이 붉어지면서 이지러진
달빛이 여명에 무색해지는 것을 보고는 발빠른 호오라이14)에게 분부하
여 천마(天馬)를 끌고 나오게 했다. 호오라이가 분부를 시행했다. 호오라
이들은 천장이 높은 마굿간에서 암브로시아를 배불리 먹은 천마를 끌어
내어 마구(馬具)를 채웠다. 천마들은 숨쉴 때마다 불길을 토했다.”
11) J. Campbell, 신화의 힘 , 이윤기 옮김, 고려원, 84-87.
12) 새벽의 여신.
13) ‘빛을 부르는 자’라는 뜻.
14) 때(시간)의 여신들.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3
일출의 순간을 묘사하는 이 부분이 한편의 詩라면, 아들 파에톤이 무사
히 태양수레를 몰고 돌아올 수 있도록 천계의 지형을 자세히 설명하며 아
들에게 신중한 처신을 당부하는 부분은 과학, 윤리, 또 과학 너머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되도록이면 채찍은 쓰지 말고 고삐는 힘껏 틀어잡도록 해야 한다. 천
마는 저희들이 요량해서 잘 달릴 게다만 이들의 조급한 마음을 누그러
뜨리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천계의 다섯 권역(圈域)을 곧장 가
로질러 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세히 보면 세 권역의 경계선 안으로
조금 휘어진 샛길이 있다. 이 길을 잡으면 설한풍이 부는 남극 권역과
북극 권역을 피해 갈 수가 있다. 이 길로 들어서면 바퀴자국이 보일게
다. 하늘과 땅에 고루 빛을 나누어주려면 너무 높게 몰아서도 안되고, 너무 낮게 몰아서도 안 된다. 너무 높게 몰면 창궁에 불이 붙을 것이고, 너무 낮게 몰면 대지를 그을리고 만다. 그 중간이 가장 안전하니 명심
하여라. 오른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는 또아리 튼
뱀15)이 있다. 왼쪽으로 너무 치우쳐 신들의 제단을 태워서도 안 된다. 이 사이를 조심해서 지나가도록 하여라.”
아버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한껏 우쭐해진 파에톤은 태양수레를 속력을
내어 몰았다. 태양신 대신 파에톤이 올라타 갑자기 수레의 무게가 가벼워진
탓에 천마들은 제멋대로 날뛰었으며, 또 파에톤은 황도 12궁의 동물들을
보고 놀라 그만 天馬의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태양수레를 이끌던 네 마리
의 천마가 마음대로 날뛰어 수레가 궤도를 이탈하여 산과 바다와 땅이 불
길에 휩싸였다. 이때 리비아는 사막으로 변하였으며, 이디오피아인들은 태
양의 열기 때문에 피가 살갗으로 몰려 피부가 새까맣게 되었다고 한다.16)
이처럼 하나의 스토리 속에 우주의 여러 차원을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다
차원의 과학인 신화는 오늘날 그 역동적인 생명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다. 그 이유는 신화적 사고의 총체성은 현대 우리들의 사유양식과 전혀 다
르기 때문에 신화가 옛날과 같은 성격을 가질 수 없으며, 또 과학적 사고
의 출현과 함께 신화는 공중 분해되고 말았고 이제는 그 파편들만 남아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현대를 ‘신화 분산의 시대’, ‘신화 해체
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신화의 생명력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으며,
또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의식의 심층에서, 예술가나 시인의 정신
15) 뱀자리 성좌.
16)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9, 61-78쪽.
종교학 연구 54
속에서, 또는 민중 집단의 의식 속에서 신화적 사고는 늘 생생하게 살아
작용하면서 인간의 삶을 온기있고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신화’의 힘을 느낀다.
지성과 감성이 함께 어울려 작용하여 우주의 여러 차원을 동시에 연결지
어 의미를 부여하는 다차원의 과학인 신화,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이 힘을
“의미없음에 항거하는 해방적” 힘이라 표현했다.17)
이제 신화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여기서 찾으려했던 엘리아데에게 눈길
을 돌려 신화가 지닌 구원적 힘의 인간학적 의미를 알아보자.
Ⅲ. 원형의 모방, 존재에의 향수
현대인들에게 고대 신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이야기거리? 고대
인들의 삶의 흔적들? 창조적 영감의 원천? 인간 심혼의 이미지? 엘리아데
는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물음 자체에 문제를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고대 신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원시인에
게 원시 신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렇게 물음이 제기되어야지만 우리는
엘리아데의 신화관을 이해할 수 있는 바른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먼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엘리아데가 신화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펴보자.
1. 살아있는 신화, 원형의 모방
엘리아데의 신화관에서 창조신화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아니 그
보다는 엘리아데에게 신화는 항상 어떤 창조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신성한 역사(une histoire sacrée, a sacred history)를 이야기한
다. 그것은 원초의 시간, 우화적인 시초의 시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언급한다. 달리 말하면 신화는 어떻게 초자연적 존재들의 무훈 덕분에
하나의 실재 ― 그것이 우주라는 총체적 실재이건, 아니면 단지 한 단편
(어떤 섬 한 식물 種, 인간의 어떤 활동, 어떤 제도)이건― 가 존재하게
17) “신화적 사고는 지칠줄도 모르고 경험과 사건들을 배치하고 또 재배치하여 그것들
에서 의미를 발견해내는 경험과 사건들의 포로만은 아니다. 신화적 사고는 과학이
먼저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의미없음’에 항거하는 해방자이기도 하다.” La Pensée
sauvage, p.33.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5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신화는 늘 어떤 사물이 어떻게 생겨났는
지,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나를 말해주는 어떤 창조의 이야기이다. 신화
는 실제로 일어났던 것,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신화의 인물들은 초자연적 존재들이다. 이 초자연적 인물들은 특별히 장
대한 시초의 때에 그들이 행했던 것 때문에 알려졌다. 신화는 이들의 창
조적 활동을 드러내 보이고 이들 작품의 신성성(sacralité, 또는 단순히
초자연성 sur-naturalité)을 공표한다. 신화는 神聖한 것들(또는 초자연적
인 것들)이 다양하게 그리고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세계 속에 뚫고 들어
오는 聖의 세계 속으로의 침투를 묘사한다. 실제로 세계를 건설하고 또
그것을 오늘날의 세계로 만든 것은 바로 이 聖의 침투이다.”18)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아데에게 있어 신화는 신적인 존재들, 초자연적
인 존재들, 또는 천체의 존재들의 태초의 활동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신성
한 이야기이고, 하늘과 땅, 인류, 동?식물 또는 인간이 사용하는 제도나 도
구 등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작업을 이야기하므로 창조의 이야기이다.19) 그래
서 그는 신화를 전설이나 민담들과 같은 이야기 유형과 엄밀히 구별하여, 후
자를 신성성이 결여된, 다시 말해서 위상이 격하된 신화들로 간주한다.
뒤메질이나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다른 신화학자들에 비견해 볼 때 엘리
아데는 신화의 범위를 다소 협소하게 규정하는데20), 이는 그가 인간의 행
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해서, 즉 현실의 양태 일
반에 대해서 본받아야 할 신적 모델을 제시하는 이야기들만을 신화로 간주
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세람섬의 한 신화에 의하면, 태초에는 인간들이 불멸의 삶을
18) 수없이 다양한 면들을 지닌 신화를 몇 마디 말로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았던 엘리아데는, ‘신화는 지극히 복합적인 문화적 실재이므
로 이에 대한 접근과 설명은 수많은 보충적인 관점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모
든 학자들에게 또 동시에 비전문가들에게도 다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정의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모든 고대 사회와 전통 사회들에서의 신화의 전 유형들과
모든 기능들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정의를 찾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고 자문하면
서, 위와 같이 신화를 정의한다. Mircea Eliade, Aspects du mythe, Gallimard
(folio essais), Paris, 1963, pp.16-17.
19) 이러한 엘리아데의 신화 이해는 신화/전설/민담을 엄밀히 구분하는 말리노프스키의
신화 이해와 그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유형을 셋으로 구분하는 말리노프
스키와는 달리, 엘리아데는 한편으로는 참된 이야기로서의 신화, 다른 한편으로는 민
담이나 전설, 우화 등과 같은 신성성이 결여된 다른 유형의 이야기들로 구분한다.
20) 인도-유럽제족의 신화를 연구하였던 뒤메질은 전설, 민담, 서사시, 발라드 등을 모
두 넓은 의미에서의 신화 범주에 포괄시키며, 또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들에서 구전되는 이야기 전부를 신화로 간주한다.
종교학 연구 56
누렸으나 ‘태양의 인간’이라 불리는 괴한이 한 처녀를 납치하여 산채로 묻
어 죽였기 때문에 그 벌로 인간은 영생의 삶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세람섬
의 원주민들은 살인이 그들을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의식을 통해 이 처녀와 살인자를 되새긴다.21) 다시
말해서, 세람섬의 원주민들은 매해 의례에서 이 신화를 낭송함으로써 유한
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이게 함과 동시에, 살인의
응징을 상기시킴으로써 그 사회에서 살인의 금기가 지속적으로 준수될 수
있도록 한다.
중국의 지대는 서북쪽이 높아서 강들이 동남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중국
의 한 고대 신화는 중국의 이러한 지형적 경사는 그 옛날 공공(工共)과 전
욱(顚頊)의 왕권 다툼의 결과라고 이야기함으로써22) 통치자들의 개인적 욕
망이 초래할 위험들을 경고한다.
이처럼 고대사회 또는 원시사회에서 신화는 인간이 왜 현재와 같은 삶을
누리게 되었나를 이야기해줄 뿐만 아니라,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 또는 초자
연적 존재들의 행위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행
위에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며 생생하게 살아 작용한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신화적 사유의 구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가 살아있는’ 그러한 사
회 ― 고대 사회, 전통 사회, 전근대 사회23) ― 의 신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살아있는 신화’의 강조로 인해 엘리아데가 규정하는 신
화의 범위는 불가피하게 좁아질 수밖에 없으며, 또 엘리아데의 독특한 신화
관이 드러나는 곳도 바로 여기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특히 시인이나 소설가, 예술가들이 살아있는 신화를
강조한다. 그러나 엘리아데가 말하는 살아있는 신화는 이들이 의미하는 바의
것과는 다르다. 후자에게 살아있는 신화란 고대 신화에 창조적 영감을 받아
그 의미를 재해석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해내는 것을 의미하지만, 전자에게는
신적 행위의 모방(immitatio dei), 신화적 시?공간을 되사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살아있는 신화는 언제나 종교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숭배의례
(culte, worship)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러한 곳에서는 신화는 허구가 아니라
탁월한 진실을 드러내 준다’고 말하면서, ‘신화는 신성한 이야기로 간주되며,
21) 자크 아탈리, 미로, 지혜에 이르는 길 , 이인철 옮김, 영림카디널, 1997, 63쪽.
22) 列子, ?湯問?.
23) 고대 사회, 전통 사회, 전 근대 사회란 우리에게 ‘원시’(primitive)라고 알려진 세계
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등의 고대 문화 양자를 지칭한다.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7
또 신화는 늘 실재에 관계하므로 참된 이야기’임을 거듭 강조한다.24)
요약하자면, 엘리아데가 보기에 원시사회 또는 고대 사회의 구성원들에
게 신화는 ‘탁월한 진실’을 드러내주는 ‘참된’ 이야기, ‘실재’와 관련된 ‘신성
한’ 이야기이므로 ‘본받아야 할 행위의 모델’을 제시한다. 말리노프스키의
지적대로, 원시인이나 고대인들에게 신화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게 ‘천지창
조, 타락, 십자가에서의 죄’라고 하는 성서의 이야기와 같은 의미를 지닌
다.25) 구체적인 예를 통해 ‘참된 이야기’, ‘실재에 관한 이야기’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해보자.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신년의례 아키투 페스티발에서 그들의 우주창조
신화 에누마 엘리쉬 를 낭송하며 창조 때의 사건들을 재현했다. 12일 동
안 7단계로 행해지는 신년 축제의 네 번째 날에 창조신 마르둑과 티아맛과
의 전투가 재현되며, 여기서 왕은 낡은 질서를 물리치고 새로이 우주와 인
간을 창조하는 마르둑을 구현한다. 마르둑의 승리로 끝나는 전투의 재현 이
후 신년 축제의 집인 비트 아키투(Bit Akitu)로 가는 승리의 행진이 이어지
고, 그곳에서 향연이 베풀어진다. 그 다음 단계로 왕과 여신을 표상하는 성
창(聖娼, hierodule)과의 신성혼이 거행되고, 마지막으로 열두 달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해의 시작은 우주가 창조되어 최초로 질서가
수립된 순간과 동일시된다.26) 말하자면 고대 바빌로니아인에게 모든 새해는
시간을 처음부터 되시작하는 것, 곧 우주창조의 반복인 셈이며, 여기서 왕
은 태초에 행해졌던 창조적 신들의 행위를 직접 모방함으로써 자신이 다스
리는 왕국에 완전한 신적 질서가 유지되기를 보장받고자 한다.
고대 이집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년의례이자 동시에 파라오 대관식
이 재현되었던 세드축제(Sed festival)는 나일강의 물이 범람하였다가 지표
면에 작은 언덕과 들판이 물 아래로부터 다시 올라오는 시기에 행해졌는데,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우주창조 신화가 이야기하는 시초의 때, 원초적
물에서 둔덕이 솟아 나오는 때에 해당된다. 새해의 시작과 왕권의 수여를
우주창조의 순간과 동일시함으로써, 즉 사회적 질서를 우주적 질서에 동화
시킴으로써, 고대 이집트인들은 시간을 주기적으로 재생시켜 창조의 완전한
24) Aspects du mythe, p.16-17; Myth and Reality, p.5-6.
25) B, Malinowski, 원시신화론 (Myth in primitive psychology), 서영대 옮김, 민속원,
1996. 21쪽.
26) Eliade, A History of Religious Ideas, vol. Ⅰ,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p.56-84.
종교학 연구 58
순간을 반복하여 되살고자 하였던 것이다.27)
엘리아데가 주목한 것은 이처럼 고대인은 그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규범
적 모델을 태초에 계시된 것, 초월적 근원을 지닌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다.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태초의 신들의 활동 및 행위, 이것을 엘리아데는
원형(archetype)이라 부른다.28) 원형의 반복, 곧 창조의 신화적 순간을 되사
는 몸짓은, 위의 두 경우처럼, 신년의례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만,
엘리아데는 주기적 창조, 순환적 재생의 모티브를 담고 있는 의례를 모두
신년의례와 동일시함으로써 신년의례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확대한다.
연속되는 시간을 마디지어 일정한 기간의 끝과 새로운 기간의 시작을 구
분하는 것이 새해 개념이다. 나라와 민족에 따라 새해의 시작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우며 일년의 길이도 다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년을 나
일강의 범람에서부터 시작해서 홍수기, 발아기, 수확기의 세 계절로 나누었
으며, 각각의 계절은 네 달로 구성되며 연말에는 여기에 5일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동지 또는 춘분을 기점으로 해(年)가 구분되었으
며, 일년은 네 계절로 구성되었다.
엘리아데는 지나간 기간의 끝과 새로운 기간의 시작이라는 관념을 내포
하고 있는 새해 개념을 사계절의 순환적 리듬, 달의 차고 기울음, 식물의
한 살이 등과 같은 우주의 바이오 리듬을 관찰함으로써 비롯된 관념이라고
보았다. 그는 새해가 언제 시작되고, 또 그 기간이 어떠하건, 중요한 것은
세계 어디서건 새해에 대한 관념이 있으며, ‘새해는 시간을 처음부터 되시작
하는 것, 곧 우주창조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적 창조,
순환적 재생의 모티브를 담고 있는 의례는 이런 의미에서 모두 신년의례와
동일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원시사회에서 주요 작물의 수확의례
27) Eliade, “Theogonies and Cosmogonies,” 앞의 책, pp.87-97.
28) 이 점에서 엘리아데의 원형(archetype) 개념과 융의 원형 개념의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융의 원형은 집단 무의식인 인간 심혼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엘리아데의 원형 개념은 전통 사회 혹은 고대 사회의 인간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
는 여러 제도의 모델이나 여러 행동의 범주를 위한 규범이 시간이 비롯된 태초에
“계시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모델이나 규범은 초인간적이고 “초월적인” 근
원을 지니고 있는 것, 가장 완전하고 풍부한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아데는 “모범이 되는 모델”(exemplary
model), “본”(本, paradigm), 혹은 “원형”(archetyp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
은 엘리아데 자신이 Le Mythe de l'éternel retour 영원회귀의 신화(우리말 번역
우주와 역사 )의 서문에서 직접 명시하며, 이 책의 부제가 바로 원형과 반복
(archétypes et répétition)이다.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9
는 ㅡ 주요 작물의 수확이 1년에 몇 번 이루어지건ㅡ 모두 주기적 창조, 순
환적 재생의 모티브를 담고 있으므로 신년의례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주창조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또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
는 세례, 낡은 우주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우주 질서를 창조하는 홍수 개
념도 마찬가지로 천지창조의 주기적 반복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29)
엘리아데의 통찰력은 다양한 종류의 의례가 함축하고 있는 주기적 창조,
순환적 재생이라는 공통된 모티브를 파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우주창조 행위의 반복에서 고대인이나 원시인들의 역사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읽어낸다.
“우주창조의 반복이란 곧 원형(archetype)을 모방 또는 반복하는 것이다. 원시사회 또는 고대사회에서 사물이나 행위는 그것이 원형을 모방 또는
반복하는 한에서만 실재적이게 된다. 하나의 행위(또는 사물)가 본이 되
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실재를 획득할 경우, 그러니까 다른 어떤 것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그러한 반복을 통하여 실재를 실현하는 경우, 그
곳에서는 은연중에 속(俗)의 시간, 지속성, ‘역사’ 등의 소거가 이루어지
고, 따라서 모범이 되는 행동을 재현한 사람은 그 스스로가 그 모범이
되는 행위가 나타났던 신화시대에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30)
고대인에 의하여 행해진 의미있는 행위, 실재적인 행위, 즉 원형적인 행
동의 반복은, 그 어떤 것이든 지속성을 정지시키고, 속(俗)의 시간을 소거하
며,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는 신화적인 시간에 참여한다. 다시 말해서, 원
형의 반복은 곧 ‘신의 모방 immitatio Dei’으로, 이것은 지속적인 역사의 시
간을 거슬러가 태초의 신화적 순간을 지금, 이곳에서 되사는 것이다. 그런
데 엘리아데는 이러한 ‘역사의 소거’를 비단 신화를 사는 고대인 또는 원시
인들의 몸짓에서만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을 신화
적 원형들로 변형시키는, 즉 역사를 신화화하는 변형의 메카니즘 속에서도
발견한다.
2. 역사의 소거 : 존재에의 향수, 낙원에의 향수
솔로몬의 시편(Ⅸ:2)에 나타나는 폼페이(Pompey) 왕이나 예레미아
29) Le mythe de l'éternel retour, pp.65-77.
30) 앞의 책, p.50.
종교학 연구 60
(Jeremiah)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는 느브갓네살 왕은 용의 특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엘리아데는 이것을 고대 히브리의 예언자들이 역
사를 감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군사적인 패배와 정치적인 굴욕을 참아
내기 위하여 히브리민족이 겪은 당대의 사건들을 가장 고대의 우주창조적-
영웅신화로써 해석하였다고 보았다. 고대 신화가 용의 일시적 승리를 허용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메시아-왕에 의하여 그 용이 최후에는 제거되
므로 히브리인들의 상상력 속에서는 이방의 왕들이 용의 특질을 지니고 있
는 것으로 의식되었다는 것이다.
‘비난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역사의 신화화를 정치적 선전이나
허풍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이방의 왕들을 신화적 용으로 바꾸어버리는 것
은 “역사적 현실”을 감내할 수 없어서, 그래서 온갖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신화 속으로, 희망적 사고 속으로 피난처를 찾아 스스로 위로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소수 민족 히브리인들의 고심 속에서 빚어진 하나의 창작물일 뿐
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이러한 해석은 고대 심성의 구조
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31) 역사
를 신화로써 설명하는 이러한 구상 방식은 히브리 예언자들과 같은 고대
엘리뜨의 사고가 정치적 허풍이나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소극적 방
편으로만 볼 수 없는 또 다른 예들이 있기 때문이다.
“집단기억은 어느 정도로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가?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을 민중이 어떻게 보존하고 있는
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엘리아데는 민간 기억도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
을 이들 엘리뜨들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해석하는 구체적 예들
을 제시한다.
유고슬라비아 서사시의 주인공인 마르코 크랄예비치(Marko Kralevic)는
14세기 후반기 동안 그의 탁월한 용기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의 역
사적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사람들은 그의 사망 연대(1394년)까지
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르코라는 역사적 인격이 집단 기억 속에 들어가자
마자 그의 역사적 인격은 소거되어 버렸고, 그의 전기는 신화적 규범들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희랍의 영웅들이 물과 샘의 요정들의 아들들이었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
도 아내도 모두 선녀(vila)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 전기에 의하면, 그는 정
31) 앞의 책, pp.52-53.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61
당한 방법이 아닌 책략을 통하여 아내를 얻었는데, 마르코 크랄예비치는 아
내가 그녀의 날개를 찾아내어 자기를 버리고 날아갈까 두려워 몹시 조심을
한다. 그런데 이 서사 발라드의 다른 변형에 보면 그의 아내는 첫 아들을
낳은 뒤에 날아가 버린 것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는 인드라, 트
레타오나, 헤라클레스 등의 원형적인 모델처럼 삼두용과 싸워 이를 죽이고,
형제가 서로 적이 되는 신화처럼 자기의 아우 안드리야(Andrija)와 싸워 그
를 죽이기도 한다. 또한 모든 다른 원형적인 서사시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마르코의 이야기 속에도 시대착오적인 것이 있다. 예를 들면 1394년에 사
망한 마르코가 1450년경 터키인에게 저항하는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바 있
는 존 훈야디(John Hunyadi)의 친구도 되고 적도 되고 있다. 더욱 흥미로
운 것은 17세기의 서사시 형식의 발라드의 手寫本들에서 이 두 영웅들은
함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훈야디의 죽음 뒤 거의 200년이나 지
나서이다.
현대의 서사시에서는 이러한 시대 착오적인 현상이 훨씬 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그 시의 인물들이 신화적인 영웅으로 탈바꿈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엘리아데는 설명한다.32)
그런데 민간기억이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
를 엘리아데는 시간에 따른 기억력의 쇠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중
요한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왜냐하면 현대에서도 역사적 사건
이 불과 40여 년만에 신화적 내용들로 각색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일
련의 예들에서 모두 역사에 대한 저항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차대전이 일어나기 얼마 전 루마니아의 한 민속학자 콘스탄틴 브레일
로우(Constantin Brailoiu)는 루마니아의 한 마을 마라무레스(Maramures)에
서 비극적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한 발라드를 채록하였다.
?약혼한 한 젊은이가 산의 요정의 마술에 걸렸다. 결혼 며칠 전 질투에
불탄 요정은 이 젊은이를 높은 바위 꼭대기에서 떨어뜨렸다. 다음 날 목동
들이 한 나무 아래에서 이 젊은이의 시체와 모자를 발견하고는 마을로 운
반해 왔다. 그의 약혼녀는 죽은 약혼자 앞에서 신화적 인유로 가득찬 장송
의 비가를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32) 엘리아데는 ‘민간 기억 속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회상은 2, 3세기 이상으로는 존
속하지 못한다고 한다. 민간기억은 개인적 사건들과 진짜 모습들은 잘 간직하지 못
하고, 사건 대신 범주가, 역사적 인물 대신 원형이 자리잡는다’고 주장한다. 앞의
책. pp.53-56.
종교학 연구 62
이 발라드의 변종들을 가능한 한 모두 채록하면서 그 민속학자는 이러한
비극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사람들의 대답은 옛날에
일어났던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사를 계속하면서 그
는 이 사건이 겨우 4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발라드의
주인공인 약혼녀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은 다
소 진부한 비극이었다.
어느 날 저녁 젊은 약혼자는 벼랑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즉사하지 않았으
며, 그의 비명이 산을 울려 사람들은 그를 마을로 데려왔다. 마을로 운반된
뒤 그 비운의 젊은이는 곧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 때 그의 약혼녀는 마을의
다른 아녀자들과 함께 통상적으로 행하는 장송의 비탄들을 반복했을 뿐이었
다. 물론 이 비탄에는 산의 요정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었다. 민속학자가
사실을 확인한 뒤에 그 확실한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주자, 그들은
그 늙은 여인이 모두 잊어버렸다든가, 그 큰 슬픔이 그녀의 혼을 거의 빼놓
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경우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신화였고, 실제의 이야기는 다만 곡해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신화가 실제의 이야기보다 더 진실한 사실로 간주되었다는 사실
은 신화가 실제 이야기의 비극적인 참 모습을 보다 깊이 드러내어 주고,
보다 풍부한 의미를 가지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하며, 신화적 시
간에로의 주기적 복귀, 집단 기억의 비역사성 속에서 엘리아데는 공히 ‘역
사적 시간’ 또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저항을 발견하며, 나아가 역사에 대
한 저항의 몸짓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 인간의 한 존재방식을
간파해낸다.
“고대인의 의식에서 원형의 중요성, 그리고 원형 이외의 그 어떤 것도
기억 속에 붙들어 두지 못한다는 점(집단 기억의 비역사성), 이런 것들
은 전통적인 정신(靈性, spiritualité)의 ‘역사에 대한 저항’ 이상의 어떤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인간 개별성의 덧없음(무
효성) 혹은 부차적 성격(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33)
원형과 반복을 통한 삶의 실재성 획득, 다시 말해서 속(俗)의 시간을 소
거하고 신화적 시?공간 속으로 전이하여 초월적 모델의 행위를 모방함으
로써 삶의 실재성을 획득하는 고대인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역사를 신화로
33) 앞의 책, p.62.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63
변형시키는 신화적 사고의 작용에서 엘리아데는 개체성, 일상성, 유한성으
로부터의 탈출을 통해 참된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인 존재
에의 향수(Nostalgia for Being), 낙원에의 향수(Nostalgia for Paradise)를
읽어낸다. 그리고 이것을 “신적인 축복과 정신적인 풍요를 향유하는 이상적
인 인간의 이미지”이자 “속적(俗的)인 실재의 무의미성에 의하여 압도되도
록 내맡김으로써 야기되는 자기 상실에 대한 공포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
해한다.34) 그래서 엘리아데는 그가 ‘고대 존재론’이라 일컬었던 이 삶의 방
식, ‘신적인 것들의 모방’으로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철학적 인
간학에 어떤 길을 열어주기를, 그리하여 종국에는 새로운 인간학(New
Humanism)의 도래를 바란다.
현대 서구철학은 인간을 특히 역사적 존재로서, 역사에 의해 조건지워지
는, 요컨대 역사에 의해 창조되는 그러한 존재로 규정한다. 그리고 신은 상
황적 존재,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신 역시 역사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존재로 간주된다. 축복과 풍요로운 낙원의 세계에서 추방된
인간이 이번에는 자신들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신을 낙원에서 추방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악과 고통이 난무하는 현실 세계에서 벗어날 구원의 기회
를 상실해버렸다. 엘리아데는 역사적인 것에만 의미를 부여한 서구 정신이
20세기에 이미 한계와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했으며, 이 위기는 종교적
삶의 회복, 즉 추방한 신들과 잃어버린 낙원을 일상의 삶 속으로 다시 불
러들일 때에, 다시 말해서 서구 정신이 고대 존재론을 창조적으로 자신과
융화시킬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35)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 랍비 이야기는 이성과 영혼의 화합을, 신화를 상실한 서구 정신과 여전
히 신화적 삶을 살고있는 동양의 정신과의 창조적 만남을 진정으로 바라는
한 성자의 구원의 메시지이다.
“크라코비의 경건한 랍비 에제키엘은 어느 날 그에게 프라하로 가라고
권하는 꿈을 꾸었다. 프라하의 왕궁으로 가는 큰 다리 아래에 보물이 묻
34) 앞의 책, pp.109-110.
35) L'Angoisse du temps présent et les devoirs de l'esprit(현시대의 불안과 정신의 의
무), Ed. de La Braconnière, Neuchatel, pp.55-72. 이 책은 서구 정신의 위기에 공
감했던 Raymond de Saussure, Paul Ricoeur, Mircea Eliade, Robert Shuman,
Guido Calogero, François Mauriac이 1953년 제네바 국제 회담에서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엘리아데는 이 회담에서 ‘종교적 상징과 불안의 가치평가’라는 제목으
로 발표했다.
종교학 연구 64
혀져 있으니 가서 그것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똑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꾸자 랍비는 마침내 떠날 결심을 하였다. 프라하에 도착해서 그는 그 다
리를 발견했는데, 보초가 밤낮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어서 다리 밑을 파
볼 수가 없었다. 계속 다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그는 보초 대장의 주
목을 끌게 되었다. 보초 대장이 그에게 뭔가를 잃어버렸느냐고 친절하게
물었다. 우직하게도 랍비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들
은 장교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기를, “이런 불쌍한 사람 보았나, 아니
그래 당신은 그 꿈 때문에 이 먼길을 오느라고 신발을 닳게 했단 말이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래 꿈을 믿겠소.” 그 장교 역시 꿈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꿈속의 그 목소리는 내게 크라코비에 대해 말하
면서, 그곳으로 가면 제켈의 아들, 즉 에제키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랍비
가 있는데 그 사람의 집에 엄청난 보물이 있으니 찾으러 가라고 하였소. 보물은 먼지 낀 구석, 난로 뒤에 묻혀 있으니 거기서 찾으라고 하였소” 그러나 장교는 꿈속에서 들렸던 목소리를 믿지 않았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랍비는 깊이 머리 숙여 장교에게 인사하고는 서둘러
서 크라코비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기 집의 버려둔 구석을 파헤쳐 보
물을 찾아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비참한 가난을 끝내었다. 이 이야기는 하인리히 짐머 박사가 마틴 부버가 소장했던 자료들에
서 찾아낸 것이다. 짐머씨는 말하기를, “우리의 빈곤함, 우리의 시련들
을 끝나게 해주는 진정한 보물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므로 먼 나
라로 그것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집, 즉 우리
자신의 존재의 가장 내밀한 구석에 묻혀있다. 그것은 난로 뒤, 생명과
온기를 주면서 우리의 존재를 통솔하는 생명과 온기의 중심지, 심장의
심장에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파낼 줄 알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기이하면서도 변치않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먼 지역, 이방의 나라, 새
로운 땅으로 여행을 하고 난 후에야 우리의 탐구를 이끄는 이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또 하나 덧붙일
것은 신비로운 우리 내면 여행의 의미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이는 바
로 이방인,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인종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참된 만남의 깊은 의미로, 이것은 전세계적 규모의
새로운 휴머니즘의 출발점을 이룰 것이다.”
Ⅳ. 맺는 말
1970년대 이후 유럽에서 불기 시작했던 신화 열풍이 지금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다. 뒤메질, 레비스트로스, 엘리아데의 신화연구 성과들을 사상사
적 관점에서 조망했던 다니엘 듀뷔송(Daniel Dubuisson)은 유럽 신화 열풍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65
의 원인을 20세기의 두 위대한 신화학자인 뒤메질과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연구 업적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정보문명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큰
물길을 열어가는 21세기에게 맡겨진 과제들, 지난 몇 세기가 넘겨준 문명
의 질곡들을 직시해보면, 그리고 신화적 사고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게 되
면, 우리는 이 시대의 신화 열풍은 개인의 학문적 업적과의 유관성을 넘어
서는 어떤 것들과 맞물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유의 영역에서 신화적 사고가 지배하는 시대 또는 사회는 그 구성원들
의 삶이 자연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 통
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나 사회에서는 신화적 사고는 다른 유형의 사
고에게 그가 군림했던 자리를 물려준다. 현대는 과학적 사고가 지배적인 위
치를 차지하는 시대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과학적?이성적 사고는 20세기에
그 한계와 위험을 곳곳에서 노출시켰다. 산업자본주의의 확대와 과학기술의
발달이 초래한 대량 학살의 전쟁과 무자비한 환경 파괴 등,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온갖 종류의 재앙이 일상을 위협하는 ‘위험한 사회(risk society)’에
살고 있다. ‘피와 눈물의 세기’인 20세기를 보내면서 사람들이 21세기에 통
합과 조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화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고대로의 회
귀에 대한 낭만적 갈구는 분명 아닐게다. 그것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
인류의 생존을 지속시키기 위한 몸부림, 절박한 구원의 신호이다.
망가져 황폐해진 자연 속에서의 삶, 신적 축복과 정신적 풍요를 상실한
채 일상에 함몰된 삶, 이것은 바로 고대 신화들이 묘사하는 지옥에서의 삶
이다. ‘자연보호’, ‘생명윤리’라는 21세기의 화두는 현대인이 처한 위험하고
피폐한 삶의 정황을 잘 말해준다. 이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
저 사고의 혁신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환경생태적
사고는 인간과 자연, 생태계는 한 유기체의 통합적 구성요소들처럼 뗄래야
뗄 수 없이 상호의존 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환경
생태적 사고를 21세기의 대안적 사고 패러다임으로 간주한다.
신화적 사고는 자연, 인간, 생태계 사이에는 유기체적 상호의존관계를 설
정했다는 점에서 환경생태적 사고와 유사하다. 그러나 신화적 사고는 환경
생태적 사고를 넘어선다. 비록 생태적 사고가 인간 중심적이 아닌 상호관계
적 사고라고 주장하긴 하나, 환경생태적 문제 의식의 바탕에는 여전히 인간
이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화적 사고는
자연의 죽음, 신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끊임
없이 자연을, 또는 신을 찬미하면서 그 경외로운 질서 속에 자신을 동화시
종교학 연구 66
키려고 애를 썼던 종교적 사고이자 심미적 사고이다.
레비스트로스와 엘리아데는 신화적 사고의 다른 면들을 조명하긴 하였지
만 두 사람은 공히 신화적 사고는 분열된 세계, 분열된 인간 정신을 통합
시켜줄 구원적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전자는 신화적 사고가 자연
과 인간, 이성과 감성을 융화시켜, 그리고 후자는 신과 인간을 교감시켜,
우주 만물을 풍부한 의미의 세계로, 이상적인 낙원의 세계로 변화시키는 통
합적 사고임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신화연구는 분명 21세기 문명의 흐름에
맑은 물줄기를 형성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우주 만물에 佛性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진실로 공감하고, “함께
머물고, 꽃을 배우며, 홀가분히(빛처럼) 가자 stay together, learn the
flowers, go light”고 노래하면서 스스로 토속적인 인디언들의 삶을 선택한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그는 생태 시인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말 그대
로 신화적 삶을 사는 현대인, 동?서양의 영적 정신을 창조적으로 융화시킨
‘신휴머니즘’의 실천자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스나이더처럼 살기는 불가
능하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말대로, ‘우리는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
으며, 그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현대 과학이
잃어버린 것들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인 설명의 장
(場)에서 그 잃어버린 것들을 통합하려 한다’면, 그리고 시인들이 ‘어린이들
을 위해서 For the Children’ 다시 신화를 노래한다면, 미래의 어린이들은
자연과 신과 인간이 혼융된 大同의 낙원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67
In Search of Lost Paradise
―The Myth of Eliade and Lévi-strauss ―
Kim, Hyun-ja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present the characteristics of mythical
mind which Lévi-strauss and Eliade have elucidated with brilliant insight.
In an age when mythical thingking prevails among the realm of
mentality, people's lives have a close relationship with nature. Today
scientific and rational thingking is in a prevelent position, but its
overuse has revealed limits and problems everywhere. For example there
has been wars of massacre and relentless destruction of nature caused by
the enlarge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and the development of scientific
techonology. As a result we lives in a 'risk society' where all sorts of
disasters threaten our everyday lives.
According to Lévi-strauss and Eliade, mythical mind is a religious and
a harmonizing one that seeks to integrate itself constantly within the
admiring rythme of nature or of God. Thus they expected that it would
play a soteriological role that unify the fragmented universe and human
being, though each author illuminated different aspects of it. Lévi-strauss
shows that mythical mind harmonized nature and human being, or reason
and emotion, while Eliade shows that it allowed communication between
God and human being. This leads us to conclude that mythical mind is
an integrating thingking that recognizes the whole world as meaningful
and cooperative.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 불교혁신운동의 측면을 중심으로 ―
박 규 태*
1)
目次
들어가는 말
Ⅰ. 창가학회의 개관과 현황
Ⅱ. 마키구치 츠네사브로(牧口常三郞, 1871-1944)
와 가치론
Ⅲ. 도다 죠세이(戶田城聖, 1900-1958)와 생명론
Ⅳ. 창가학회와 불교혁신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1993년 9월 7일자 마이니치(每日) 조간신문은 “창가학회, 종문과 결별,
독자적으로 본존수여(本尊授與)를 결정”이라는 제하의 일면 톱기사를 내보
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신도단체인 창
가학회는 7일 오전, 신앙의 근간이자 근행의 대상인 본존을 신규회원들에게
독자적으로 수여할 것을 결정했다. 이는 다음달 1일부터 시행될 것이다. 본
존은 원래 일련정종의 법주가 수여하게 되어 있으나, 창가학회가 2년 전부
터 일련정종으로부터 파문당한 이래 신입회원들은 본존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금번의 결정은 63년 전에 설립된 창가학회가 종문측과 결별하여,
종교단체로서 완전히 자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가학회는 명칭 및 교의
등에는 변동이 없다고 하는데, 공칭 8백 3만 세대에 이르는 거대종교단체
의 이와 같은 움직임은 종교계뿐만 아니라 정계를 비롯한 관련 각계에 적
* 서울대 강사, 종교학
종교학 연구 70
지 않은 파문을 던질 것임에 분명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유력 일간지 아사
히(朝日)와 요미우리(네賣)도 마이니치를 이어 관련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
도했다. 도대체 창가학회라는 집단은 어떤 종교단체이기에 주요 일간지들이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현대 일본의 종교 지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전체 인구의 1할 내지
2할을 차지하는 신종교의 교세인데, 그 중 절반 이상이 니치렌(日蓮,
1222-1282)을 숭경하는 법화계 신종교이다. 이때 법화계란 공통적으로 법화
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계통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법화계 신종교 교단에
서는 단순하게 법화경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설한다.1) 그리하여 법화
계 신종교 교단에서는 다이모쿠(題目) 즉 법화경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
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말만 암송하면 구원받고 복 받는다 하
여 이 다이모쿠를 문자로 써서 그것을 기도 대상인 본존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물론 법화계가 일본 불교 내에서 지배적인 교단은 아니다. 현재 천태
종과 일련종 등을 포함한 법화계 불교교단의 사원수는 전체 일본 불교교단
사원수의 15%정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일본 재가불교 혹은 일본불교의
현대적 재해석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법화계 신종교 교단들의 성장세는
가히 놀랄 만하다. 그와 같은 법화계 신종교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영우회
(靈友會)2)와 창가학회(創價學會)를 비롯하여 입정교성회(立正?成會),3) 불소
호념회(佛所護念會),4) 묘지회(妙智會),5) 본문불립종(本門佛立宗)6) 등을 들
1) 니치렌의 등장은 실은 법화경 신앙의 재활성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는
불교 전래이래 줄곧 법화경이 중시되어 왔다. 가령 일본 불교의 개조로 말해지는
성덕태자(574-622)의 저서 삼경의소 는 법화경을 포함한 세 경전의 주석서였으며,
8세기에 세워진 국분니사에서는 법화경 독송이 중요한 행사였다. 또한 9세기 초 사
이쵸(最澄, 767-822)의 천태종은 법화경을 최고 경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후
13세기에 이르기까지 밀교, 정토교, 선종, 율종 등이 세력을 펼치면서 법화경의 권
위가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니치렌이 등장하여 법화경에 의한
국가적 사상통일을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중적인 대승경전 중의 하나인 법
화경은 “정경이 무엇이냐” 하는 강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 속에는 법화경
이전의 설법은 모두가 임시 가르침에 불과하며 최고의 진리가 법화경에 있다고 하
는 강력한 신앙이 내재되어 있다.
2) 구보 가쿠타로(久保角太郞)에 의해 1924년 창시된 법화계 신종교. 신자수는 공칭
300만 정도..
3) 니와노 닛쿄(庭野日敬)에 의해 1938년에 창시된 법화계 신종교. 영우회의 일분파로
성립되었으며 현재 신자수는 공칭 650여만 명.
4) 세키구치 가이치(關口嘉一)에 의해 1950년에 창립된 불교계 교단으로서 영우회로부
터 분파되었다. 현재 동경에 본부가 있으며 신자수는 공칭 200여만 정도..
5) 미야모토 미츠(宮本みつ)에 의해 1950년에 창시된 불교계 교단으로서 영우회로부터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1
수 있다. 이들 법화계 신종교 교단들은 주로 192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에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 시기는 일본사에서 매우 급격한 사회변동기에 해당
한다. 이 법화계 신종교들은 주로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1857년 나가마츠 닛센(長松淸빌)이 창시한 본문불립종으로부터 시작되는 흐
름이며, 둘째는 1925년 구보 가쿠타로와 고타니 기미가 창시한 영우회 계열
로서 여기서 오늘날 거대교단으로 발전한 입정교성회를 비롯하여 불소호념
회와 묘지회 교단 등 20여 분파가 갈라져 나왔다. 이 영우회의 중요한 특징
으로서 법화경 신앙을 선조숭배와 결부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셋째는
일련정종 계열로서 본고가 다루고자 하는 창가학회가 이에 속한다(島?進,
1992a: 134-166쪽 참조).
창가학회는 일본의 현대종교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종교단체
이며,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과 브라질 등 전세계에 걸쳐 지부를 가지고 있
는 다국적 교단이다. 본고는 이 창가학회에 대해 그것이 가지는 기성불교에
대한 혁신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
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창가학회의 개관과 현황을 간략히 항목별로 정리
해 본 다음, 이어서 창가학회 신념체계의 대표적인 세 가지 구성축이라고
여겨지는 마키구치의 가치론, 도다의 생명론, 일련정종의 교학에 대해 살펴
본 후에, 법화계 신종교인 창가학회가 어떤 측면에서 현대불교 혁신운동의
중요한 사례로 말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Ⅰ. 창가학회의 개관과 현황7)
(1) 본부 소재지: 도쿄(東京)도 신쥬쿠(新宿)
(2) 창시자: 마키구치 츠네사브로(牧口常三郞, 1871-1944), 도다 죠세이
(戶田城聖, 1900-1958)
(3) 현재: 명예회장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1928- ), 회장 아키야 에
이노스케(秋谷榮之助, 1930- ), 이사장 모리타 카즈야(森田一哉)
(4) 목적: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건립한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
분파되었다. 현재 본부는 동경에 있으며 신자수는 공칭 90여만 정도..
6) 나가마츠 세이후(長松淸빌)에 의해 1857년에 창립된 불교계 신종교교단으로서 현재
교토에 본부가 있으며 신자수는 공칭 50여만 정도..
7) 이하는 주로 (橫山眞佳, 1997: 72-76쪽)을 참조했다.
종교학 연구 72
을 본존으로 삼고, 일련정종의 교의에 입각하여 불교 의식을 거행하는 한
편, 회원들의 신심을 확립시키며, 이를 토대로 세계평화를 실현하고 인류문
화의 향상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울러 이에 필요한 제반 공익
사업, 출판사업 및 교육문화활동을 전개한다.(종교법인 창가학회 규칙)
(5) 주요 연혁:
1930 일련정종에 입신한 마키구치, 도쿄에서 ‘창가교육학회’ 설립
1941 기관지 價値創뗄 창간
1943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 혐의로 마키구치와 도다 투옥. 창가교
육학회 와해
1944 마키구치, 옥중사
1945 도다 출옥.
1946 ‘창가학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의 재건 시도
1949 기관지 大白蓮華창간
1951 기관지 聖敎新聞창간, 折伏敎典발간
1952 창가학회의 종교법인 인가
1954 절복대행진 시작, 사회문제화
1955 ‘국립계단’ 건립을 위한 정계진출 도모, 통일지방선거에 후보 내세움
1958 도다 사망
1960 이케다, 3대회장에 취임. 해외포교 착수
1962 동양철학연구소 설립
1964 공명당 결성
1968 창가학원 개교
1970 ‘언론출판 방해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에 의해, 공명당과의 분
리 및 국립계단론 포기 선언
1971 창가대학 설립
1972 후지야마(富士宮)시에 후지(富士)미술관 설립
1975 이케다, 소설 인간혁명 발간. 괌도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회의?에
서 SGI(국제창가학회) 결성, 회장으로 취임. 창가학회의 반전반핵
평화운동 시작
1979 이케다, 회장직 사임(명예회장으로 남음). 호오조, 4대회장 취임
1980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SGI(국제창가학회) 제1회 총회개최
1981 호오조 사망
1983 하치오오야(八王子)시에 도쿄후지(東京富士)미술관 설립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3
1990 일련정종측, 이케다 및 아키야의 직책 해임
1991 일련정종측, 창가학회 파문조치
1993 창가학회, 일련정종으로부터 완전분리 선언
(6) 경전: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日蓮大聖人御書全集)
(7) 교의 및 실천: 창가학회 신앙의 근본은 일본중세 가마쿠라 신불교의
일파인 일련종(日蓮宗) 창시자인 니치렌(日蓮, 1222-1282))의 불법(佛法)에
있다. 이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에는 인간 개개인을 내적으로 변혁시키는
힘과 구제력이 내포되어 있음을 믿으며, 특히 니치렌의 입정안국론(立正安
國論, 법화경에 입각한 정법으로써 나라와 사회의 평화 및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에 의거하여 평화, 문화, 교육활동을 전개한다.
(8) 주요 의식 및 행사: 지부총회, 좌담회, 춘추 히간(彼岸)근행법요, 세
계평화기원 근행회
(9) 교세: 1995년 현재 국내 회원수 812만 세대,8) 해외 회원수 136만 명9)
(10) 기관지 및 발매부수: 성교신문(聖敎新聞)-550만 부, 대백련화(大白蓮
華)-280만 부, 그라프SGI-120만 부
(11) 최근 동향 : 국제연합 NGO행사로서, 1992년 리오데자네이로와 상파
울로에서 “환경과 개발전”을, 그리고 나가사키(長崎)에서 “전쟁과 평화전”을
개최. 캄보디아 UNTAC(국제연합 잠정통치기구)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아
“VOICE-AID 캄보디아 라디오 지원캠페인” 실시. UNHCR(국제연합 난민
고등변무관 사무소)과 협력하여 난민을 위한 기금 및 홍보 캠페인 실시. 오
키나와에서 “제1회 SGI 아시아총회 및 평화음악제” 개최. 뉴델리에서 “제2
회 인도문화제” 개최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애당초 일련정종의 재가 신도단체였던 창가학회
는 1930년 마키구치가 창가교육학체계 를 발간하고 ‘창가교육학회’를 창설
한 데에서 비롯된다. 이후 마키구치가 옥중에서 사망한 뒤에 1946년 도다
가 ‘창가학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새롭게 재건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창가학
8) 1951년 이후 회원수 증가추이는 다음과 같다: 1951년-5700세대, 1955년-30만 7500 세대, 1960년-140만 세대, 1965년-500만 세대, 1970년-755만 세대, 1975년-775만
세대, 1980년-791만 세대, 1985년-795만 세대, 1990년-803만 세대, 1995년-812만
세대(창가학회 공칭).
9) 전세계 128개국에 분포되어 있는 해외 신자수는 지역별로 다음과 같다: 북미-33만
8천 명, 중미-1만 2천 명, 남미-20만 5천 명,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77만 9천 명, 유럽-1만 9천 명, 중근동 및 아프리카-7천 명(창가학회 공칭).
종교학 연구 74
회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1958년 도다가 사망한 후 이케다 다이
사쿠(池田大作, 1928- ) 및 호오조 히로시(北條浩, 1923-1981) 시대를 거쳐
현재에는 아키야 에이노스케(秋谷榮之助, 1930- )가 제5대 회장으로 있다.
이 가운데 창가학회의 사상적 초석은 역시 초대 회장 마키구치와 2대 회장
도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키구치의 ‘가치론’과 도다의 ‘생명
론’이 그것인데, 이하에서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뒤에 그 가운데
특히 기존 불교(특히 일련정종)의 혁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해 생
각해 보기로 하자.
Ⅱ. 마키구치 츠네사브로(牧口常三郞, 1871-1944)와
가치론
창가학회의 창시자 마키구치 츠네사브로는 1871년 현 니가타(新潟)현 가
시와자키(柏崎)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인생은 개인적으로 그다지 유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세때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마키구치(牧口)가의 양
자로 들어간 그는 보통소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홋카이도(北海道)로 건너
가 경찰서 급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에 힘썼다. 이런 그의 성실성과 학
문적 소질을 알아보았던 경찰서장의 도움으로 마키구치는 20세때 홋카이도
보통사범학교에 편입할 수 있었고, 그곳을 졸업한 후부터 일생에 걸친 교육
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초기 노정에서 지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마키구치는 잠시 소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도쿄로 건너가 인생지리학
(1903년)이라는 저서를 간행했는데, 이 책은 현지조사를 기초로 한 탁월한
실증주의적 연구서로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10) 1909년에는 도쿄에서 교직
생활을 다시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등이 주최하는 향토회(鄕土會)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에서 나온 주저가 바로 교수의 통합중심으로서의 향토과 연구 (1912
년)이다. 여기서 마키구치는 향토의 현지조사를 통한 자연 관찰교육의 필요
성을 역설하면서 각 학교마다 향토과라는 과목을 설치하여 가르쳐야 한다
고 주장했다. 1920년(49세)에 니시마치(西町)소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
10) 당시 대만총독부의 기사(技師)였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뗄)도 이 저서를 읽고 깊
은 인상을 받아 마키구치에게 격려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5
을 때 그는 홋카이도에서 올라온 청년 도다 죠세이(戶田城聖)를 교사로 채
용했는데, 이 둘의 만남은 이후 창가학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로
기억되게 된다. 1928년(57세) 마키구치는 일련정종에 입신하였고, 이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창가교육학체계 (1930-1934년)라는 대저를 발간한다.
이 창가교육학체계 는 교육학조직론(제1권), 가치론(제2권), 교육개조론
(제3권), 교육방법론(제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가치론에
주목할 만하다. 이 저술에서 마키구치는 교육의 목적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
드는 데에 있음을 천명하고 있는데, 그때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서 나온 것이 바로 가치론이었다. 즉 마키구치는 가치 개념을 통해 인간의
행복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가치’를 ‘진리’ 개념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진리가 인식의 문제라면 가치는 평가의 문제이다. 대
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인식작용과 관련된 진리 개념은 인간의 구체적
인 삶의 장을 넘어서 있다. 이에 비해 가치란 항상 구체적인 인간 삶과의
관계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우리 삶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가치라는 것이다.(東京大學法華經硏究會編, 1975: 27-33쪽)
진리란 가치평가 및 가치창조 이전의 것으로서, 가치와는 관계가 없다. 또
한 이런 저런 가치에는 참도 거짓도 없다. 왜냐하면 가치란 시대와 장소
혹은 사람에 따라 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가령 “개나리꽃이 샛노랗다”라
는 진술은 ‘진리’와 관계가 있다. 그 진술에 대해서는 참이냐 거짓이냐를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나리꽃이 아름답다”는 진술은 참이냐 거짓이냐를 말
하기 어렵다. 어떤 이에게는 그 진술이 참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가치’의 속성이다.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며 가치는 창조되는 것이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 가치 있지만,
진리 그 자체는 결코 가치가 아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제 마키구치는 가치의 영역으로부터 진리를 추방
한다. 주지하다시피 칸트는 대표적인 가치 영역으로서 진선미를 꼽았다. 그
러나 마키구치는 진(眞) 대신 리(利)를 대체했다. 진은 가치와는 상이한 인
식 차원에 속한 것이고, 선이나 미와는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
기 때문이다. 선과 미에 상응하는 가치로 리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리는 “전인적 생명에 관련된 개체적 가치”로서, 선은 “집단적 생명에 관련
된 사회적 가치”로서, 그리고 미는 “부분적 생명에 관련된 감각적 가치”로
서 규정되고 있다. 이처럼 마키구치가 구상한 가치의 왕국에서는 미보다는
리가, 리보다는 선이 보다 상위의 가치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이처럼 리를
종교학 연구 76
중시하는 관점은 아마도 다이쇼 초기의 일본 사상사에 공통된 에토스, 즉
진보다 리를 더 중시하는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추
정된다. 그런데 리의 가치에 주목하는 시선은 창가교육학체계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었다. 전술한 교수의 통합중심으로서의 향토과 연구 에서도 마
키구치는 이미 ‘리미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키구치의 가치론
에 있어 창가교육학체계 가 보여주는 새로운 측면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치창조’ 즉 창가의 개념을 통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때의 인간이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나가는 능동적인 인간을 가리킨다. 요
컨대 창가교육학체계 는 인생 전체를 그와 같은 가치창조의 과정, 나아가
생명의 끊임없는 자기갱신의 과정으로 간주한다. 둘째로, 창가교육학체계
는 리선미에 등급을 매겨 선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임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
서 이전의 입장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마키구치는 ‘대선(大善)생활’
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인생이라고 규정한다. 지금까지는 리를 기준으로
한 지식추구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그러나 이제 리는 낮은 차원의 가치
이며, 가장 최상의 가치는 선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셋째, 마키구치는 창가
교육학체계 에서 문화현상의 많은 부분을 가치창조에 관련된 현상으로 파
악, 그런 현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경험적 귀납에 의해 가
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련정종에 귀의한 마키구치는 결국 이 모든 가치
론의 층위를 일의적인 신앙과 연결시키고 말았다.
Ⅲ. 도다 죠세이(戶田城聖, 1900-1958)와 생명론
이시가와(石川)현에서 태어난 도다는 5세때 가족이 모두 홋카이도로 이
사하면서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삿포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1920년(19세) 동경으로 가서 마키구치 츠네사브로를 만나 생애에
걸친 특별한 사제관계를 맺는다. 1922년 교사직을 사임한 도다는 사설학원
을 세웠고, 이후 출판 활동 등 마키구치를 후원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28년 마키구치가 창가학회의 전신인 ‘창가교육학회’를 창설하여 회
장직을 맡게 되자 도다는 28세의 나이로 이사장에 취임한다. 창가교육학회
는 처음에는 교육연구에 전념하였으나 점차 종교색을 띠게 되었다. 그러던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7
중 1943년 전시하에서 이세(伊勢)신궁의 부적 모시기를 거부했다는 천황불
경죄의 혐의로 도다는 마키구치와 함께 투옥되고 만다. 이때 도다는 독방에
서 불경과 여러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어떤 종교적 확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도다는 매일 일만 번씩 “나무묘법연화경”을 암송하는 창제(唱
題)수행을 했다고 하는데, 마침내 그것이 이백만 회가 되는 날 그는 생명의
신비를 체득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다는 “붓다는 곧 영원한 생명이다.
우주와 인간은 모두 그 생명이 드러난 것이다. 모든 생명은 붓다에게서 유
래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서 곳곳에 편재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 생
명력의 근원이 바로 나무묘법연화경을 도식으로 표현한 ‘본문의 본존’ 만다
라이다. 그러니까 이 본존을 받들고 다이모쿠(題目)를 창하면 개개 생명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발동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행복을 얻고
성불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도다 또한 마키구치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핵심이 행복의 추구 및 행복의
보장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 듯 싶다. 이때 마키구치가 행복의 문제를 가치
와 연결시켰듯이, 도다는 그것을 생명의 문제와 연결시켰다. 도다에 의하면,
행복이란 우리의 내적 생명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뒤
집어 말하자면, 내적 생명력의 확인 없이는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도다는 이런 내면적 생명을 보여주는 것이 종교이며, 일련정종이야
말로 인간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종교이고 따라서 이 위대한 종교를
믿어야만 생명의 리듬이 우주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게 되어 살아 있음의
행복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11)
요컨대 우주가 곧 생명이라는 것이다. 생명이란 우주와 더불어 존재하며
우주보다 앞선 것도 아니고 그 뒤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우주 자체가 생
명이다. 그러므로 어디든 조건만 갖추어지면 생명이 발생한다. 생물체뿐만
아니라 비생물체도 다 생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각일각의 생명,
생활이 바로 실상(實相)에 다름 아니다. 이 순간적 실상 속에 과거 영원의
생명이 내포되어 있고 미래 영원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 이 일순의 생명이야
말로 우주 자체의 활동이며, 자기 생명이며 실재이다.” 이런 관점은 중국 천
태종으로부터 니치렌에게 전승된 “일념삼천(一念三千)” 및 “관심(觀心)”의
11) 확실히 넘치는 생명력, 생명의 환희야말로 행복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부정할 사
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명력의 발현이 오직 일련정종에만 있다는
도다의 인식에 있다. 즉 도다는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은 우주의 대생명을 발휘
하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오직 일련정종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종교학 연구 78
교리가 ‘생명’ 및 ‘우주’라는 말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주=
생명은 대어본존(大御本尊)과 동일시된다. 대어본존이란 니치렌이 삼대비법
으로 말법의 중생에게 전한 본문의 다이모쿠(題目),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
단이 총집약되어 있는 대만다라를 가리킨다. 이 대어본존이야말로 우주 생명
력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대만다라에는 본불(本佛)로 신앙되는
니치렌의 깨달음과 생명이 면면히 살아 있으며, 그 위대한 생명력을 지닌다
면, 고통으로 가득한 이 삶을 즐겁게 누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
위대한 생명력이야말로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대어본존을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큰 영험이다. 이 대어본존을 향해, 대어본존과
일련성인과 내가 구별이 없음을 믿고 감사하며 열심히 다이모쿠를 창할 때,
우주의 리듬과 내 리듬이 조화하여 우주의 대생명이 내 생명과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대어본존에 일련대성인의 깨달음 즉 우주의 생명에 관한 진리
(一念三千)가 직접 구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진다. 요컨대 석가가
법화경 적문(전반부)에서 설한 “리(理)의 일념삼천”에 대해 니치렌의 삼대
비법은 “사행(事行)의 일념삼천”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생명은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나타나는 것이 된다. 우리의 생명
에는 세정(洗淨)의 이법(二法)이 존재한다. 맑은 생명(淨法)은 외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우주의 큰 리듬과 조화하여 생명이 유전되므로
결코 무리가 없다. 이런 생명이야말로 위대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생명의 세법(洗法)은, 생명이 여러 가지
유전의 도상에서 잘못된 생활에 물든 것을 말한다. 욕심, 분노, 어리석음,
질투 등으로 인해 오염된 생명은 우주 리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생명력
을 시들게 한다. 말법에는 악인이 많다. 그럴수록 사랑이 필요한 시대인데
실제로는 사랑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붓다의 지혜를 통해
사랑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절복(折伏)을 통해 청정한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것이야말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이다(島?進, 1995: 367-374쪽).
이러한 도다의 생명론에서 니치렌은 자비 그 자체이며, 우주만물은 모두
가 붓다의 실체라고 간주된다. 그 우주 본연의 모습은 사랑(자비)이며, 우주
는 붓다의 모습 그 자체다. 요컨대 도다의 생명론은 우주=생명=사랑=붓다=
인간, 이런 식의 동심원적 동일화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도다의 생명론에는 전통적인 일련정종의 교학과는 사
뭇 이질적인 새로움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9
Ⅳ. 창가학회와 불교혁신
일련정종은 니치렌의 직제자 6인방 중 한 명인 닛코(日興)에 의해 1279
년에 창시되었으며 후지 대석사(大石寺)를 중심으로 하는 종파이다. 이 일
련정종의 특징으로는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일련정종은 니치렌
에 의해 불법의 궁극으로서 제시된 만다라 본존(本門의 本尊=大御本尊), 만
다라본존을 안치하는 장소인 계단(本門의 戒壇), 불법의 구극인 나무묘법연
화경을 창하는 다이모쿠(本門의 題目), 이 세 가지가 말법시대에 불교신앙
의 핵심이라고 하는 이른바 ‘삼대비법’을 주장한다. 특히 후지 대석사야말로
본문의 계단이며, 1279년이래 거기에 안치되어 있는 대만다라 본존이야말
로 지고의 존재라고 여겨진다. 둘째, 일련정종에서는 니치렌의 존재와 그의
가르침을 석가의 존재 및 가르침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니치렌이야말로 석가보다도 더 뛰어난 궁극적인 부처라는 것이다. 이것
을 일련정종에서는 ‘니치렌 본불론(本佛論)’이라 한다. 셋째, 이 니치렌 본불
론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풀어 말하면 일련정종의 불교개시사관(佛敎開示史
觀)이 된다. 법화경 수량품 제16에 보면 지금까지 최고의 각자라고 믿어
져 온 인도의 석가는 보다 보편적인 부처의 한정적인 현현에 불과하다고
설해진다. 이때 보다 보편적인 부처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으로 묘
사된다. 그런데 일련정종에서는 이 ‘구원실성의 석존’보다 더 앞선 지고존재
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으로서는 나무묘법연화경이며 인간으로서는
‘무작의 본불’이라는 것이다. 니치렌은 바로 이러한 지고존재가 다시 태어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넷째, 일련정종의 관심론(觀心論)을 들 수 있다. 니
치렌의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 에 의하면, 지의(智?, 538-597)12)의 ‘일념
삼천(一念三千)’의 교설에 의거하여 본존을 믿고 다이모쿠를 창하는 것이
성불의 길이며, 그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이다. 이때 일념삼천의 ‘삼천’이란
모든 존재,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십계(十界)’, ‘십여시(十如是)’, ‘삼세간(三
世間)’에서 서로 얽힌 세계를 가리킨다. 이 중 십계란 ‘지옥, 아귀(餓鬼), 축
생(畜生), 수라(修羅), 인간, 천(天),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 불’이라는
중생의 열 가지 존재양태를 가리키는데, 그 각각은 다시 열 가지를 각자
자기 안에 구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옥 안에 다시 십계가 있다. 이를테면
12) 중국 천태종의 개조. 법화경 을 최고의 경전으로 하는 교상판석에 입각한 명상(지
관, 좌선, 관심)의 이론과 실천체계에 대해 기술한 저술로 마하지관 이 있다.
종교학 연구 80
지옥 안에도 부처가 있고, 부처 안에도 지옥이 있다는 식이다. 이를 ‘십계
호구(十界互具)’라 한다. 이로부터 백가지 세계가 나오는데, 여기에 십여
시13)와 삼세간14)이 합쳐져 총 삼천개의 세계가 된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삼천세간이 일념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일념삼천이다. 그 일
념삼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 안에 부처가 있다는 깨달음이다. 관
심이란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일념삼천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중생이 살아
있는 몸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다섯째, 있는 그대로의 중
생이 그대로 깨달음의 경지에 있다고 주장하는 일본 천태 본각사상에서는
‘일념삼천’을 ‘즉신성불’과 결부시켜 이해했다. 니치렌의 저술 관심본존초
등에서도 그런 생각이 전제로 깔려 있다. 일련정종은 니치렌 사후, 본각사
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즉신성불’을 지향해 왔다. 그리하여 본존과 다이
모쿠가 그대로 일념삼천을 구체화한 것이며, 명상으로서의 ‘관심’이 아니라
창제로서의 ‘관심’의 실천에 의해 즉신성불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일련정종
에서는 이를 ‘사(事)의 일념삼천’이라 하여 천태지의가 설한 ‘리(理)의 일념
삼천’과 대치시킨다. 이리하여 일련정종에서는 대어본존을 믿고, 다이모쿠를
창하는 것이 그대로 즉신성불의 실현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이
누추하고 나약한 몸 그대로 붓다의 경지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옥중의 도다가 직면한 것은 이런 문제였다. 도다는 바로 ‘붓다는 생명이다’
라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로 삼았던 듯싶다.
우리가 도다에 의한 혁신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도다의 생명론은 ‘즉신성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나무
묘법연화경이라고 창할 때 스스로 부처의 경지에 있다는 것을 그는 ‘부처는
생명이다’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즉 도다의 생명론의 내용은 즉신성
불의 생명주의적 이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이를 다시 이렇게 풀어
말할 수 있으리라. 즉 붓다와 인간의 생명, 붓다와 현세의 모든 존재들은
다 동일한 생명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신앙으로써 대어본존
의 생명과 일체가 될 수 있으며, 또한 행불행의 여러 양상을 지닌 구체적
인 생명활동으로서의 삶을 생명력이 넘치는 절대의 행복으로서의 성불 상
태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타자에게 전해주는 삶이야말로
참된 불교적 인생이다.
13) 如是相, 如是性, 如是?,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
究竟.
14) 五바世間, 衆生世間, 國土世間.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81
이로써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첫째, 도다에게 있어 불교
란 전적으로 현세적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대어본존=붓다는 생
명력의 원천이며 현세이익을 실현시켜 준다. 물론 불교가 추구하는 성불이
라는 인생의 목표는 절대적인 것이며, 행복이라는 것이 그런 궁극적인 목표
와 결부된다. 행복은 생명력의 충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성불이
란 바로 이 세상에서 실현해야 할 것으로 파악된다. 둘째, 도다는 궁극적
존재와의 연관성을 현세적 실재의 차원에 귀속시켜 이해했다. 생명이라든가
생명력이란 것은 현실 속에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지 않으면 안되며
붓다도 그렇다. 즉 붓다와 같은 궁극적 존재 또한 감각적으로 몸의 차원에
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차원과 세속적인 앎의 차원,
종교와 과학의 차원은 생명을 매개로 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 셋째, 도다
에게 있어 종교적 자기변혁과 현세에 대한 적극적 참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불이란 것은 외면적인 일상생활과 분리된 내면적 사건 혹은 사후
세계에서 체험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성불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변혁을
통해 체험되는 것이다. 생명이란 것은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
이다(島?進, 1995: 367-381쪽).
이와 같은 도다의 관점은 일본 불교의 구원론적 구조에 큰 혁신을 초래했
다고 보여진다. 종교학자 시마조노는 이를 “생명주의적 구원관으로 특징지워
지는 현세구원사상의 수립이라는 종교사상의 혁신”으로 설명한다(島?進,
1995: 382쪽). 즉 도다의 생명론은 일본 신종교의 생명주의적 구원관15)의
15) 쓰시마 미치히토(對馬路人) 등은 “신종교에 있어 생명주의적 구원관”이라는
논문에서, 흑주교, 금광교, 천리교, 대본교, 영우회, 생장의 가, 입정교성회,
PL교단, 창가학회, 세계구세교, 천조황대신궁 등 19세기초에서 현대에 이르
기까지 성립한 일본 신종교 제교단 가운데 대표적인 11개 교단의 구원사상
에 관해, 우주의 본체(우주관), 종교적 근원자(신관), 인간의 본성(인간관), 생과 사(생사관), 악과 죄(선악관), 구원방법, 구원의 상태 등 8개 항목에 걸
쳐 고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신종교의 구원사상에는 ‘생명주의적 구원관’이
라 불릴 만한 공통된 사유양식이 깔려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 논문의 핵
심적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신종교 교의의 핵심은 ‘우주=親
神=생명’으로 보는 우주관 및 신관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근원적 생명’의
관념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종교의 구원사상을 ‘생명주의적 구원관’이라
부를 수 있다. (2) 이러한 ‘생명주의적 구원관’에 있어, 인간은 기본적으로
‘소우주=대우주’의 틀 안에서 이해되며, 거기서 소우주로서의 인간은 ‘근원
적 생명=우주=親神’에게서 비롯되었고 또한 생명을 부여받아 살아가는 ‘신
의 분신’ 혹은 ‘신의 자녀’로 간주된다. (3) 신종교 교조는 생명력에 가득 찬
그의 생애로써 구원받은 인간의 모델로서의 生神으로 신앙된다. (4) ‘생명주
의적 구원관’에 있어 악이란, 생명력의 쇠약 혹은 조화의 상실에 다름 아니
종교학 연구 82
전형적 사례라는 것이다.16) 한편 그렇다고 해서 신종교의 현세구원사상을 단
순히 ‘현세긍정’의 사상으로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도와 민속종교
의 애니미즘, 혹은 일본불교의 특징인 천태 본각사상17)도 현세긍정적이기 때
문이다. 그런데 신도나 애니미즘의 경우는 ‘구원’이라는 관념이 희미하다. 한
편 본각사상은 현세긍정적이면서 구원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전통
적 불교의 본각사상과 신종교의 생명주의적 구원관은 어디가 다를까? 지금
까지 살펴 본 창가학회의 사례는 이런 문제를 고찰하고자 할 때 좋은 사례
였다. 전술했듯이, 창가학회 종교사상의 토대는 일련정종의 교학인데, 그것은
본각사상의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마쿠라 신불교들은 대체로 사상
의 핵심부분에서 본각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호넨(法然)이나 도겐(道元)에 비
해 신란(親鸞), 잇펜, 니치렌이 더 현저하다. 니치렌의 저술 관심본존초 는
특히 본각사상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일련정종은 이 관심본존초 사상에 입
각하고 있다. 일련정종의 성불관은 붓다와 범부가 대립되고 범부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여 붓다로 바뀐다는 이원적 발상을 거부한다. 그보다는 번뇌가
곧 보살이고 사바세계가 곧 적광이라는 일원론적 관점을 선호한다. 그리하여
일련정종의 사상에서는 범부가 그대로 자기 안에 불계를 구비하고 있으며,
대어본존을 받듦으로써 즉신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창가학회는
이와 같은 일련정종의 본각사상적 구원관을 일본 신종교에 공통된 생명주의
적 구원관으로 변용시켰다는 것이 앞서 인용한 시마조노의 관점이다(島?進,
1995: 385쪽). 바로 이 점에서 창가학회는 사상적으로 현대 불교혁신운동이
자 동시에 신종교로서의 양가적 측면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다. 따라서 이때 ‘악으로부터의 탈각=구원’은 생명력의 회복 혹은 ‘근원적
생명’과의 조화의 회복으로 이해되며, 그런 구원은 내세가 아닌 현세 속에
서 실현되는 것으로 관념된다. (5) ‘생명주의적 구원관’은 기본적으로 애니
미즘적인 농경적 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서는 현세이익과 구원이 모
순없이 공존하고 있으며, 밝고 낙관적인 현세중심주의가 주된 기조를 이루
고 있다. (6) ‘생명주의적 구원관’은 민속종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며, 기
성종교와의 관계에 있어 불교적 내세구원관을 대체함으로써 장식불교와의
분업관계를 구성했다고 하는 종교사적 의의를 가진다(박규태, 1996: 29-30쪽
및 對馬路人(외), 1979 참조).
16) 물론 창가학회의 경우는 마음의 조화가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 먼 과거의
대어본존과 니치렌이 숭경된다는 점에서 여타 신종교와의 차이를 보여 준다.
17) 본각사상은 (1) 이원적 상대적인 현실을 넘어선 불이(不二) 절대의 세계를 규명,
(2) 거기서 현실로 되돌아와 이원적 상대적인 현상들을 불이, 본각의 나타남으로서
긍정하는 사상이다.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83
나오는 말
본고의 서두에서 창가학회와 일련정종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그 갈등은 1990년 11월 16일 도쿄의 도다기념강당에서 개최된 창가학회
“제35회 본부간부회, 제3회 도쿄총회”에서 이케다 명예회장의 연설을 녹음
한 테이프가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일련정종의 최고 성직자 아베(阿部)
법주 이하 종문 승려들은 이 테이프에 녹음된 연설내용을 듣고 경악했다.
무엇이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어서 급기야 동년 12월 27일, 이케다 명예회
장이 일련정종 교단 내에서 맡고 있었던 총강두(總講頭, 신도대표직) 직함
을 해임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케다는 연설 가운데 “법주란 자리는 신도
들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그건 권력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대어본존의 신자입니다. 승려라고 뭐 다른가요?”라고 역설했는데, 이것이
법주와 승려를 경시하는 입장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창가학회와 일련정종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재가불교와 출가불교 사이의
갈등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 즉 창가작용
을 중시하는 창가학회가 기성의 권위를 다 수용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갈등이기도 했다. 재가불교와 출가불교의 상관관계는 방금 언급한 창가학회
의 혁신적 측면(일련정종의 본각사상적 구원관을 일본 신종교에 공통된 생
명주의적 구원관으로 변용시킨 측면)과 더불어 함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문제인
데다가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의 시야를 벗어나는 문제로 여겨지므로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다만 재가불교의 정당성
을 주장하는 창가학회측이든, 출가불교의 권위를 내세우는 일련정종측이든,
파문 사태를 둘러싸고 상호간 원색적인 공방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극단적
인 결벽증과 공격적인 독선주의를 노출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종교의 모습
을 보여주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에 머물고자 한다. 진속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본각의 깨달음이나 혹은 생명과 죽음의 얼굴이 둘이 아니라
는 무서운 진실을 양측은 왜곡된 방식으로 입증해 보여준 듯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가학회가 1995년 새로운 “SGI헌장”에서 타종교에 대
한 존중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 및 협력 원칙을 내세웠다는 사실은 매우
희망적인 서광으로 비쳐진다. 이는 타종교에 대해 극단적인 배타성을 보였
던 니치렌 이래 일련종 불교종단 및 법화계 신종교들에게 공통적인 성향
종교학 연구 84
즉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체질이 개선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조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창가학회가 보다 열려진 신앙체계를 지향할 때 그것이 지닌
가치론적 혁신주의와 생명론적 에너지가 말 그대로 참된 평화를 위한 토대
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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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연구 86
A Study on Soka Gakkai
―Renovation of the Japanese Buddhism ―
Park, Kyu-tae
Soka Gakkai(創價學會), established in 1930 by a distinguished
pedagogist, Makiguchi Tzunesaburo (牧口常三郞, 1871-1944), is said to be
the biggest religious order among contemporary Japanese new religions.
This paper investigates the renovative aspects of Soka Gakkai which has
come to characterizes Japanese Buddhism.
Soka Gakkai has been separated from Nichirenshoshu (日蓮正宗), a
sect of Japanese Buddhism to which it originally belonged until 1993.
This suggests that Soka Gakkai as a Zaike (在家) group of believers has
made a declaration of a new identity totally different from Shukke (出
家), a form of Buddhism like Nichirenshoshu. This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Soka Gakkai gave up all the teachings of Buddhism.
This paper concludes by suggesting that Soka Gakkai can be regarded
as a renovation of the Japanese Buddhism from the perspective of not
only Makiguchi's discourse of value (價値論), but also from Toda Josei's
(戶田城聖, 1900-1958) teachings about life (生命論).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 주희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임 부 연*
1)
目次
Ⅰ. 서론
Ⅱ. 마음의 본질적 성격과 주재(主宰)
Ⅲ. 마음의 이원적 대립론 : 人心道心論
Ⅳ. 마음의 심층 영역 : 未發論
Ⅴ. 결론
Ⅰ. 서론
純祖15년, 곧 1815년 5월 그믐에 茶山東菴에서 정약용(丁若鏞)은 心
經密驗(이하 밀험 으로 약칭)을 완성한다. 이 책은 心經에 대한 해석서
로서 마음에 대한 그의 입장을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대표적인 저서다. 본래
宋代주자학자 西山眞德秀(1178-1235)의 심경 은 유가 성현들의 “心法”
곧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글귀를 편찬해 만든 책이다. 여기에 明代
의 程敏政(1445-?)이 주석을 붙여 만든 心經附注는 특히 조선에서는 李滉
이후 주자학자 전반에 걸쳐 매우 중시된다. 이 저서들은 明에서 양명학의
방식으로 “마음의 학문(心學)”이 발달한 반면, 조선에서는 주자학의 틀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마음의 문제가 발전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밀험 의 ?序?에서 다산은 “독실한 실천(篤行)”의 측면에서 소학 과 함
께 심경 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한 뒤, “마음 다스리는(治心)” 방법을 제
시하는 저서라고 규정한다( 밀험 , 2:25). 이는 물 뿌리고 마당 쓰는 등 관
* 서울대 박사과정 수료, 종교학
종교학 연구 88
성적으로 몸에 익히는 소학 의 공부와는 별도로, 반성적으로 몸을 단련시
키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심경 을 통해 찾으려 한 것이다. ‘密驗’이
란 말이 은밀하면서도 주체적인 체득과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도 이런 맥락
에서다.
정약용이 사상적 대결 상대로 여긴 주희는 흔히 理氣論으로 심성을 형이
상학화하여 신유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신유학에서 마음은
형이상학적 기반 위에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변화 혹은 완성을 추구케 하
는 기반이란 점에서 수양의 문제와 연관된다. 그런데 다산도 “오늘부터 죽
는 날까지 마음 다스리는 기술에 힘을 쏟고자 하며, 경전을 궁구하는 일은
심경 으로 끝맺고자 한다.”( 밀험 , 上同)고 다짐한다. 이런 다짐은 마음의
문제가 다산에게 있어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통한 사상 형성에 핵심 관건
이며, 그가 신유학이래 수양 전통의 연장 위에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주자학과 다산학의 단절과 연속의 양면을 마음론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마음의 본질적 성격과 주재(主宰)
神과 形이 오묘하게 결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神은 형제가 없으며 또한
이름 없음을 숭상한다. 그것이 형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빌어 ‘神’이
라 부른다. 마음은 피의 창고로서 오묘한 결합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름
을 빌어 ‘心’이라 부른다( 孟子要義/이하 요의 로 약칭, 1:32-3).
다산에게 마음의 문제는 인간 구성과 연관되어 있다. 초월적 존재인 ‘神’
이란 본래 형체도 없기 때문에 그 용어를 빌려 인간의 정신적 요소(神)를
표현한 것이다. 원래 ‘心’은 일종의 ‘피의 창고(血府)’로서 오장(五臟)의 하나
인 ‘심장(心臟)’을 뜻한다. 정신적 요소가 발동하는 곳에는 반드시 血氣가
필요하고, 따라서 혈기의 주인인 ‘心’이란 용어를 빌려 내면적 정신을 가르
치게 된 것이다.1) 곧 정신과 혈기가 동시에 작동하는 ‘오묘한 결합의 지도
리(妙合之樞紐)’이기 때문에 내면 주체를 표현할 때 心이란 말을 빌려 쓴
것이라고 다산은 해석한다. 이는 정신과 육체가 마음이라는 소통의 장을 통
해 매개되고 있음을 뜻한다.
1) 心經密驗, 2:25.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89
1. 내면 주체의 초월적 성격 : ‘靈明’
다산에게 마음의 초월성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용어는 바로 “靈明”이다.
그는 마음을 세 가지로 나눈다. 곧 육체기관인 심장(心臟)의 ‘마음(心)’, “영
명(靈明)한 마음”과 그 “영명한 마음이 발동한 마음”이다.2) 두 번째와 세
번째 마음은 본체와 그 작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내면 본체로서의 마음이
수많은 현상으로 발현되는 것이 세 번째 마음이다. 예를 들어 정서, 사변,
의지 등 모든 현상적 정신 작용은 세 번째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七情
이나 맹자의 四端혹은 의지(志) 등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맨 처음 心臟으로서의 心은 氣의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나머지 둘
은 불가하다. 둘 다 영명한 존재로서 궁극적 실재인 하늘 곧 上帝와 연관
되기 때문이다. 영명한 본체의 마음을 인간은 배태하는 순간에 하늘로부터
받는다.3) 가시적인 푸른 하늘은 단지 하나의 자연물에 지나지 않는다.4) 다
산은 상제로서의 하늘을 氣혹은 자연계의 현상 차원과는 전혀 다른 존재
영역에 설정한다. 상제란 만물을 초월하여 主宰하는 하늘이다. 따라서 이
상제는 지각이나 위엄 그리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 만물의
생장과 번성을 주재하는 신령한 존재다. 그리고 그러한 권능은 그 靈明에서
비롯된다. 다산에게 “영명이 없는 존재는 주재할 수 없다.”( 요의 , 2:39)
따라서 그에게 신적 존재는 理氣論으로 분해되어 “있음과 없음의 사이
(有無之間)”에 있는 존재로 의심받아 아득한 자리에 던져질 존재가 아니
다.5) 이는 주희가 귀신이나 신적 존재를 이기론의 틀 안에서 중간지대에
위치지우려 한 입장과 대비된다. 주희는 “있는 듯 없는 듯”( 朱子語類
25:77/이하 어류 로 약칭, “若有若亡”)한 신적 존재의 존재성을 氣의 신비
한 측면(靈)을 통해 정당화한다.6) 이에 비해 다산은 상제의 영명과 마찬가
지로 ‘靈’이란 신적 측면이 氣의 층위를 초월한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理
의 층위에서 보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理는 지각의 활동이나 권능이 부재
하기 때문이다.
다산에게 귀신의 至尊으로서 가시적 형질이 없지만 인간과 소통하고 만
2) 詩文集, ?答李汝弘?, 19:30-31.
3) 中庸講義補, 1:2.
4) 孟子要義, 2:39.
5) 中庸講義補, 1:23.
6) 이용주, “朱熹의 문화적 정통의식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9, 150-156쪽
참조.
종교학 연구 90
물을 주재하는 존재가 바로 상제다.7) 그는 귀신을 이기론으로 말할 수 없
으며, 따라서 그 지존인 상제 또한 그렇다고 본다. 이는 주희처럼 중간적
영역에 귀신 혹은 상제를 두면 그 생생한 존재성이 약화된다고 보기 때문
이다. 하늘의 영명함은 인간의 마음과 지속적으로 소통하여 마음의 모든 흐
름을 살펴 볼 수 있다.8) 그러한 소통이 가능한 것은 마음의 영명 때문이
다.9) 주희의 경우 소통의 근거는 ‘同氣’였지만 다산의 경우엔 ‘同靈’이다.
이기론으로 접근되지 않는 마음의 영명은 단지 상제와 소통 근거로 끝나
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주권적 위상을 부여하는 원천이
다. 인간은 자연계의 존재들과 달리 ‘영명’의 초월성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우월(‘超越’)하고 자신을 위해 자연계를 이용(‘享用’)할 수 있다.10) 존재론적
인 우월은 존재론적인 차별을 함축하고, 그것은 위계적인 존재질서를 나타
낸다. 즉 현실 세계 안에서 인간의 至尊을 의미한다. 그러한 주권적 지위에
따라 만물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계 안
의 모든 존재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소유물이다.11)
정약용의 영명은 얼핏 주희가 마음의 성격으로 규정한 “虛靈不昧”,12)
“虛靈知覺”,13) “虛明”14)이란 용어와도 유사하다. 글자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세 가지 규정은 서로 상통하며 그 중 대표적인 규정은 “虛靈知
覺”이다. 虛靈知覺은 體用論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지각’에 있어 우선성은 理와 관련된다. 곧 구체적인 지각의 사
태는 理와 氣의 결합으로 발생하지만 지각의 理가 先在한다( 어류 , 5:24).
주희는 마음 속에 잠재된 理를 “고요한 가운데 있는 존재(靜中有物)”라고
표현한다. 이는 현상적 움직임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늘 흐르고 있는 理를
나타내며, 그것이 지각의 원천이 된다.
理와 연결되어 존재하는 마음의 지각은 개체와 타자의 만남에서 발생하
는 사태 혹은 현상으로서의 ‘지각’을 가능케 한다. 또한 지각은 단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인식론적인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고, 도덕적 판단이나 내재된
7) 中庸自箴, 2:16.
8) 中庸自箴, 1:6.
9) 中庸自箴, 1:6.
10) 中庸講義補, 1:2.
11) 論語古今注, 9:14.
12) 大學章句1章, 朱熹注.
13) 書, ?大禹謨?, 朱熹注.
14) 朱子語類, 57:32.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1
본성의 발현 혹은 실현이란 측면을 갖는다. 따라서 외물과의 만남에서 표출
되는 도덕감각의 내적 자발성이나, 그러한 계기에서 요청되는 외재적 권위
혹은 규범의 인식 및 수용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理의 통일성을
매개로 주체와 타자 사이의 분리를 매꿔 줄 다리라는 의미도 갖는다.15) 따
라서 다산의 영명처럼 다른 존재와의 존재론적 단절을 예비하지 않는다.
2. 주재(主宰)의 문제 : ‘心統性情’의 재검토
마음은 유가적 이상을 구현할 초월의 내적 근거를 함유하고, 동시에 그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은 바로 주재(主
宰)의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 주희의 마음론에서 절대적 진리는 “心統性
情”이다.16) 곧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통섭한다는 뜻이다. 이 규정은 본래
張載가 쓰던 것인데, 주희는 伊川이 마음을 體用으로 나누어 보는 관점과
결합시켜 심성론의 핵심명제로 삼는다.17)
마음은 마치 비어 있는 밭이고, 그 속엔 하늘로부터 받아 내재된 道理
곧 본성(性)이 가득차 있다. 외물과의 접촉에서 본성이 발동하여 사려의 차
원으로 드러난 것은 감정(情)이다( 어류 , 98:43). 여기서 감정(情)은 기쁨
(喜)?분노(怒)?슬픔(哀)?즐거움(樂) 등의 정서적 상태만 가리키지는 않는
다. 그것을 포함하여 현상화된 정신 작용 일반을 뜻한다. 그러한 의식 현상
의 내적 원천은 본성이다. 즉 본성이 발동하여 감정이 된다. 伊川이 제시한
體用論으로 보자면, 본성은 마음의 본체(體)가 되고 감정은 마음의 작용(用)
이 된다. 본성은 보편적인 도덕규범의 내재로서 仁?義?禮?智로 제시되고,
감정에는 그런 본성으로부터 발동된 惻隱?羞惡?辭讓?是非의 마음이 예시
된다.18)
“心統性情”에서 ‘統’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겸한다는 뜻
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병사들을 統制하듯이 主宰한다는 뜻이다.19) 전자는
본성과 감정이 마음의 영역 안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이는 내면의 포괄적 총
체로서의 마음을 말한다. 글자에서 보듯이 본성(性)?감정(情)이 모두 심(?)
15) Donald J. Munro, Images of Human Nature, Prinston University Press, 1988,
93-96쪽 참조.
16) 朱子語類, 5:70.
17) 朱子語類, 95:3.
18) 朱子語類, 98:41.
19) 朱子語類, 98:39 / 98:41.
종교학 연구 92
을 부수로 하고 있는 것도 마음의 통합성을 나타내는 징표로 해석된다.20)
후자는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는 주재적 주체로서
의 마음을 말한다. 하지만 이 경우 주재의 일차적인 대상은 감정이 된다.
곧 감정은 본성에 뿌리를 두지만 마음에 의해 주재를 받는다.21) 주재는 단
지 억제한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올바른 발현을 유도하고 선
한 감정은 확장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것은 理의 내재로서 본성의 보
편적 도덕원칙을 기준으로 잘못된 감정을 통제하고 올바른 감정을 확장한
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재의 대상은 감정만이 아니다. 감정을 주재할 때 본성이 기준
으로 기능한다고, 본성에 대한 주재가 배제되지는 않는다. 다만 주재의 방
식이 달라진다. 본성 자체는 완전한 도덕 원칙 혹은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
을 통제할 외적인 기준은 불가하다. 다만 그것의 온전한 보존이란 측면에서
주재가 논의된다. 여기서 涵養이나 主敬등의 공부를 통해 본성을 주재하는
것이다.22)
정약용은 포괄과 주재의 양면을 지닌 주희의 마음론을 ‘主宰’, 특히 본성
에 대한 주재의 측면에서 비판한다. 그는 영명한 마음의 본성은 善을 좋아
하고 惡을 부끄러워한다고 본다.23) 곧 주희처럼 본성을 내면 본체로 보지
않고 마음의 본질적 속성으로 본다. “心統性情”과 연관지워 보면, 본성을
마음의 선한 경향성으로 보는 건 마음과 본성의 존재론적 분리에 대한 비
판이다. 주희식으로 보면, 감정에 대한 주재는 마음과 본성 사이의 틈을 전
제한다. 理의 내재인 본성은 마음의 본체이자 본질이다. 따라서 비록 체용
론의 구도에 의해 양자의 연속이 설정되지만, 실제로는 양자 사이에 ‘공존
속 분리’가 존재하게 된다.
본성에 대한 주재를 말할 경우에도, 純善한 본성의 발현 조건이나 계기
에 대한 주재이지 본성 자체에 대한 주재라고 보기는 힘들다. 본성 자체는
완전한 본질이자 이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현상화되는 과정을 온전
히 하기 위해 마음의 주재를 위한 敬이라는 수양이 요청된다. 예를 들어,
해의 밝음은 늘 그대로 인데 그것을 가리는 구름을 제거하여 그 해의 밝음
이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것과 같다. 결국 마음에 의한 본성의 주재는 존
20) 朱子語類, 5:66.
21) 朱子大全, 32:8.
22) 陳來, 宋明理學, 遼寧敎育出版社, 1991, 174-175쪽 참조.
23) 詩文集, ?答李汝弘?, 19:35.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3
재론적인 차이 때문에 보조적 주재에 그친다.
주자학 체계에서 본성은 理이고 육체는 氣라고 할 때, 곧 이기론 안에서
마음은 두 가지로 규정될 수 있다. 하나는 ① 율곡 이이처럼 마음을 氣로
보는 입장이고,24) 다른 하나는 ② 퇴계 이황처럼 理와 氣의 결합으로 보는
입장이다.25) 전자에 대해 다산은 마음이 氣가 되면 ‘心統性情’은 ‘氣統理氣’
가 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본다.26) 理氣論에 따라 하나씩 대응시켜 논리
적 타당성이 부족함을 지적한 것이다. 주재자로서의 마음이 氣라면 理인 본
성과 존재론적인 괴리를 노정하기 때문이다. 곧 이 경우에는 본성 자체에
대한 주재는 사실상 불가하고, 단지 본성을 기준으로 삼아 마음이 감정을
통제하는 방식에 그치게 된다. 곧 본성에 대한 주재는 불가하게 된다.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통섭한다’고 말하면 ‘마음이 크다’는 학설(心大說) 이 되고, ‘본성은 理이고, 마음은 氣이다’라고 말하면 ‘본성이 크다’는 학
설(性大說)이 된다. ‘마음이 크다’는 학설은 ‘神과 形이 오묘하게 결합하
되 단지 하나의 마음 뿐’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말한 것이다. ‘본성이 크
다’는 학설은 이 ‘본성(性)’이란 글자를 움켜쥐고 그것으로 ‘大體’와 ‘法
身’의 전칭(專稱)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한 글자를 빌려서 대체의 전
칭을 삼고자 한다면, ‘마음(心)’이 오히려 가깝고 ‘본성(性)’은 옳지 않다. 본성이란 글자는 마땅히 雉性?鹿性?草性?木性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
니, 본래 ‘기호(嗜好)’로서 이름을 지은 것으로 고원하고 광대하게 말해
서는 안 된다( 밀험 , 2:1-2).
여기서는 인간의 내면 주체를 어떻게 규정할지 논하고 있다. ①의 입장
과 상통하는 ‘性大說’에 대한 비판을 보자. 비판의 논점은 앞서 보았듯이 본
성을 理라고 하는 내면 본체로 규정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본성을
마음의 본질적 속성 곧 기호(嗜好)라는 욕구로 본다. 이는 본성을 본질 혹
은 본체로 보아 너무 고원하고 광대해지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고원(高
遠)’과 ‘광대(廣大)’는 理로서의 본성이 현실 위의 본질로서 보편적으로 편재
함을 표현한다. 이 경우 앞의 ‘氣統理氣’처럼 마음의 주재력은 고원하고 광
대한 본성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다산은 본성을 본체로서의 지위에서 강등시킴으로써 ‘心大說’과 ‘心統性
情’을 지지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②처럼 마음을 理와 氣의 결합으로
24) 栗谷全書, ?答安應休?, 12:20.
25) 李子粹語, 道體, ?答奇明彦?.
26) 詩文集, ?答李汝弘?, 19:30-31.
종교학 연구 94
보고 ‘心統性情’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는 그가 ‘心大說’에 대해 ‘神과 形
이 오묘하게 결합하되 단지 하나의 마음 뿐’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말한 것
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②의 입장이라면 ‘神形妙合’이
아니라 ‘理氣妙合’을 제시했을 것이다. 理氣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마
음의 중심성 혹은 주재력을 담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에게 理란 지각의 활동이나 위엄 혹은 능력이 없는 무능한 존재다.27)
따라서 理와 氣의 묘합으로 마음을 규정한다 하더라도, 主宰의 능력이 생기
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그는 理氣論체계 안에서 마음의 주재력이 불가능하
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靈明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28) 그래서 ‘理
氣妙合’ 대신 ‘神形妙合’으로 마음을 규정한 것이다.
‘神形妙合’의 측면에서 ‘心統性情’을 해석할 경우, 마음은 육신과 정신의
결합처로서 내면 주체의 총칭이 된다. 그 마음의 영명함은 궁극적 실재인
하늘에 기원하며, 그러한 마음의 속성으로 기호(嗜好)인 본성이 자리한다.
그럼으로써 마음과 본성 사이의 괴리를 피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감정은
영명한 마음이 발동한 마음들을 가리킨다. 이 감정 중에 四端과 같은 선한
종류는 선한 경향성인 본성을 그대로 발현한 것이다. 곧 선한 감정만이 본
성의 결과물이 되고, 나머지 감정들은 그러한 본성과 무관한 마음의 발동이
다. 이런 도식을 통해 정약용은 ‘心統性情’이 담고 있는 마음의 포괄성과 주
재력을 담보하려 하였다.
Ⅲ. 마음의 이원적 대립론 : 人心道心論
新儒學에서 사람의 마음은 육신의 주인이다. 따라서 마음의 문제는 인간
의 도덕 행위와 관련하여 수양론의 중요 주제가 된다. 특히 인간의 실존적
현실이 갖는 도덕적 긴장 혹은 갈등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문구는 바로 書
經?大禹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라
는 명제다. 주희는 중용장구 ?序?에서 道統論과 연관지워 이 구절이 바로
성인들이 전해준 心法이라고 보고 자신의 핵심명제로 규정한다.
다산은 ?대우모?의 인심도심론에 대해 양면적 태도를 보인다. 우선, 중
27) 中庸自箴, 1:5.
28) 孟子要義, 2:39.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5
용장구 ?序?에서 유가적 도통론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주희의 입장을 부정
한다. 이에 비해 다산은 이 구절을 梅?의 僞作으로 본다. 곧 매색이 荀
子?解蔽篇?에서 道經을 인용한 말, 논어 ?堯曰篇?등의 구절을 결합
하여 만들었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 구절의 僞作과는 별개로 다산은 그
문구의 진리성을 인정한다. 곧 “五帝이후에 전수돼 내려온 道訣”로서 “萬
世心學의 으뜸”이라고 극찬한다( 밀험 , 2:29). 漢儒의 훈고학이 문자 해석
에만 매달린 데 비해, 주희는 인심도심론으로 인해 유가의 “中興之祖”가 된
다고도 했다.29) 이렇듯 다산은 인심도심론에 대해 한편으론 ?대우모?의 經
文이 아니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진리를 담고 있는 格言으로 높인다.30)
1. 인심과 도심의 발생 근원
우선, 인심도심론에 중요한 문제는 인심과 도심의 발생 근원이다. 주희는
사사로운 形氣인 육신과 올바른 性命이라는 두 근원의 대비구도로 설명한
다.31) 인간의 대립적 마음의 근원으로 제시된 이 양자는 이기론이라는 형
이상학의 틀로 뒷받침된다. 곧 형기는 氣로 수렴되고, 性命은 理의 내재이
기 때문에 理로 수렴된다. 이렇듯 마음의 양상은 이 세계의 기본적인 대립
구도를 응축하여 상징한다. 理와 氣는 서로 환원되지 않는 독립된 범주로
서, 비록 양자가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분되는 관계다.
주희에겐 이기론이 보편적인 구성이론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존재는
理와 氣의 결합체가 된다. 인간의 생명도 理의 내재인 본성과 氣의 결합으
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理와 氣는 또다른 가치론적 대립항과 연계되어 있
다. 곧 ‘主理와 主形(氣)’는 ‘私와 正’, ‘純善과 或不善’의 대립항이 형성된
다.32) 윤리적 가치판단과 관련하여 ‘私와 正’, ‘純善와 或不善’의 대립항은
비대칭이다. 왜냐면 “私”란 인간이 하나의 개체로서 육체적 한계를 갖고 있
음을 말하는 중립적 묘사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배고프면 배불리 먹는
등의 일은 자신의 육체에만 관련되지 타인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私”다.33)
이는 현실에서 타인과 구별되어 살고 있는 개체의 개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비록 부정적인 함의를 갖더라도 곧바로 ‘不正’이나 ‘惡’이 되진 않는다. ‘純
29) 論語古今注, 6:1.
30) 梅氏書平, 2:23.
31) 中庸章句, ?序?.
32) 朱子大全, 中, 44:2, ?答蔡季通?.
33) 朱子語類, 62:37.
종교학 연구 96
과 或’의 기우뚱한 대립은 인간의 실존을 잘 묘사한다. “純善”이 우리의 이
상이자 본성이라면, “或不善”은 우리의 현실이다.
다산은 神과 形, 곧 정신적 요소와 육체적 요소의 결합으로 인간을 본다.
이렇듯 대립적인 요소의 결합으로 인간이 구성된다는 말은 태생적 갈등을
함축한다. 그 갈등이 현실화하는 구체적인 場은 마음이 된다. 따라서 人心
과 道心이라는 마음의 이원구도는 다산에게도 수용된다.34) 다만 주희의 경
우에 그 갈등의 양 축은 理와 氣라는 형이상학적 보편 범주였다.
다산은 이기론의 틀에서 인간의 마음을 보지 않는다. 따라서 도심을 理
發로 보지 않고, 초월적 내재자인 상제의 명령이 담긴 마음으로 본다. 상제
인 하늘은 도심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경고를 전달한다35). 그것은 태생 초
기의 본성 부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상의 시시각각 모든 순간에 도심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전해준다.36) 이는 도심이 스스로 각성하는
현장에 하늘의 명령이 직접적으로 경험됨을 뜻한다.37) 이처럼 도심은 이기
론에 분해되지 않고, 궁극적 실재와의 실존적 소통의 場이 된다. 또한 현상
존재계에서 인간의 至尊的지위를 보장케 해주는 고귀한 마음이다.38)
정약용에게 도심의 원천이자 준거는 道義가 되고, 인심의 원천은 氣質
혹은 形氣가 된다.39) 도의는 본체론적 자리를 갖는 주희식의 “올바른 性命”
과는 다르다. 곧 “性卽理”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정초되는 도덕 원리가 아
니라, 상제가 제시하는 도덕 명령이다. 하늘의 純善한 명령 곧 본성은 純善
하다. 또한 그러한 본성이 발현된 마음인 도심 또한 純善하다. 하지만 육체
적 욕구에 따라 발생하는 人心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40) 가치론적으
로 유동적이다. 이것은 앞서 보았듯이 주희와 동일한 관점이다. 다만 주희
는 ‘純善’과 ‘或不善’이라 하고, 다산은 ‘純善’과 ‘可善可惡’의 대비로 표현한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런 기우뚱한 대립항은 앞서 보았듯이, 존재론적인 범주 차원에
서 정초된 것이다. 주희의 ‘理’와 ‘氣’-‘性命之正’과 ‘形氣之私’-‘道心과 人心’-
‘純善과 或不善’ 및 다산의 ‘神’과 ‘形’-‘道義와 形質’-‘道心과 人心’-‘‘純善’과
34) 論語古今註, 9:17.
35) 中庸自箴, 1:5.
36) 孟子要義, 1:35.
37) 금장태. 茶山實學탐구 , 소학사, 2001, 111쪽.
38) 心經密驗, 2:30.
39) 詩文集, ?上?園書?, 18:41 / 孟子要義, 2:21.
40) 心經密驗, 2:38.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7
‘可善可惡’의 연관은 존재론, 마음 그리고 가치론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
다. 다만 주희의 경우, 두 마음의 근원이 형이상학적인 보편적 구성범주인
데 비해, 다산의 경우엔 인간에 한정된 구성범주를 설정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하지만 기우뚱한 대립항을 통해 인간 실존을 묘사하고 윤리적
기획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2. 人欲과의 연관 및 도심의 위상
인심과 도심의 기우뚱한 대립은 윤리적 기획과 연관되어 있다. 특히 ‘사
람의 마음(人心)’과 ‘道의 마음(道心)’이란 자체가 함축하듯이, 사람(人)과 道
사이의 분리와 일치의 문제가 수반된다. 사람(人)이란 윤리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개체이고, 道란 사람이 걸어가야 할 당위적인 길이다. 따라서 마음과
연관된 욕구 및 그 조절이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大體, 小體는 맹자가 사용한 말로 사람이 大人과 小人으로 갈리게 되는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41) 주희는 대체를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마음
으로, 소체는 눈과 귀처럼 구체적인 감각기관으로 본다.42) 다산에게 대체는
形氣와 섞이지 않는 순수하고 영명한 내면적 주체다. 소체는 주희가 생각하
듯이 구체적인 감각기관이기보다 육신 전체를 가르킨다( 요의 , 2:29-30).
그런데 영명한 마음으로서 도덕적 본성을 가진 대체는 육신이라는 소체
에 “갇혀(?)”있다.43) 다산에게도 육신은 초월해야 할 대상이다. 자연의 빌
氣와 부모의 精血로부터 받아 이룬 우리의 육신 곧 소체를 따라서 인심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기 초월을 가능케 하는 근거인 대체의 본성
은 육신 곧 소체의 욕구와 대비를 이룬다. 그래서 마치 “欲”이라는 것이
육신에만 관련되는 듯 하다. 하지만 바로 구절에서 다산은 도심과 인심이
각각 大體와 小體를 “늘 기르려 한다(常欲養)”( 要義, 2:30)고 말한다.
여기서 마음과 人欲의 관계에 대한 다산의 독창적 견해를 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주희의 경우에 인심은 인욕에 혹은 사욕과 관련지워 논의된
다. 하지만 道心은 어떤 경우에도 “欲”의 차원에서 접근되지 않는다. 그것
은 純善한 性命의 발현 자체이다. 性命이란 형이상학적 내면 본체로서 “欲”
의 차원에서 볼 수 없다. 그것은 보편적 도덕 원칙으로서 자체의 활동성이
41) 孟子章句, ?告子上?.
42) 孟子章句, ?告子上?, 朱熹注.
43) 論語古今註, 9:12.
종교학 연구 98
없이 形氣에 의존해 발현된다. 단지 수동적으로 발현되는 준거로서 ‘나(我)’
에 의해 사용되길 기다리는 존재다.
다산은 인심과 도심의 구분을 떠나 관통하는 “欲”을 설정한다. 곧 이 욕구
가 正理를 따르면 善이 되고, 私意만을 따르면 惡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맥
락에서 “常欲養”이 제시된다. 마음의 “願欲”은 “欲”이란 글자가 나타내듯이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44) 그 채움의 자리에 “常欲養”이 위치한다. 이는 인심
과 도심 곧 인간의 마음이 육체 혹은 도덕 원칙의 수동적 발현양상 이상임
을 뜻한다. 자신의 발동 원천에 대한 반작용의 욕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서 그렇다. 그리하여 윤리적 판단 능력과 도덕적 욕구를 지닌 도심은 “殺身
成仁”과 연결되고, 개체적인 욕구 일반을 담고 있는 인심은 富뉘와 性, 그리
고 안락을 좇게 만들어 善하기 어렵고 惡에 빠지기는 쉽게 된다고 본다.45)
여기서 마음과 육체 그리고 人欲에 대한 주희의 입장을 살펴보자. 우선
인심의 발현 근원이 形氣곧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에 대한 기본 시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사사로운 육체에 “갇혀서” 인심을
지닐 수밖에 없다.46) “갇힌다”(梏)는 표현이 나타내듯 개체적인 육신의 한
계 자체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육신을 없애거나 부정할 수는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따라서 인심은 인간인 한 성인이라도 없앨 수 없
는 것이다. 이렇듯 주희는 程?처럼 인심과 인욕을 동일시하여 부정하는 태
도를 취하지 않는다.47)
주희는 도심을 육체의 주재자로 삼아 인심이 늘 그로부터 명령을 듣는
主從관계를 제시한다.48) “올바른 性命”에 근원을 둔 도심은 義理를 따라
지각하는 마음이고, 인심은 육체적인 욕구를 따라 지각하는 마음이다.49) 우
선 도심이라는 도덕적 마음을 육체의 주인 혹은 주체로 삼아야 한다. 이는
육체 전체에 대한 ‘주재’의 권한을 도심이 행사하도록 한다는 말이 된다. 도
심은 인심의 주재자로서 그 준거가 되는 것이다.50) 이렇게 인심 혹은 육체
44) 中庸講義, 1:65.
45) 論語古今註, 9:17.
46) 朱子大全上, 36:30, ?答陳同甫?.
47) 이봉규, “{心經附註}에 대한 조선성리학의 대응”, 태동고전연구 제12집, 태동고
전연구소, 1995, 106쪽 참조. 이 글에선 주희를 ‘인심의 전환’이란 측면에서 조선
성리학자들이 재해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48) 中庸章句, ?序?.
49) 朱子語類, 78:189.
50) 朱子語類, 62:41.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9
의 주재이자 준거인 도심을 통해 현실적 개체인 ‘나(我)’는 한 명의 도덕
주체로서 완성된다. 곧 육체의 개체적 한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보편적인 도
덕 원칙에 따라 모든 행위를 행사하는 도덕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 ‘나’는
도심에 의해 육체와 인심을 주재하게 된다.
다산은 인간 현존에서 두 개의 대립적 자아를 설정한다. 그리고 양자 사
이의 끝없는 싸움을 도덕적 현실이라 본다. 여기서 “도심이 인심을 이긴다
(道心克人心)”는 명제가 제시된다.51) ‘이긴다(克)’는 말은 멸하거나(滅)하거
나 제거한다(去)는 뜻이 아니다. 곧 발생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도심
과의 싸움에서 지도록 해서 육신의 주재자가 못되게 하는 것이다. 다만 정
약용은 주희의 ‘주재’와 달리 ‘극복’을 제시함으로써 내면의 실존적 대립과
그 안에서의 주체적 선택의 가치를 더 부각시켰다.
Ⅳ. 마음의 심층 영역 : 未發論
주희 심성론의 완성을 흔히 “中和新說”이라 부른다. 곧 張?등 湖南學
의 영향으로 “性體心用”의 입장에서 마음의 구조를 파악하다가, “心統性情”
의 입장으로 전환한 것이 바로 “중화신설”이다.52) “중화”라는 용어가 나오
듯이 주희의 마음 이론은 “중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그
핵심인 中和라는 말은 中庸에 나온다.
기쁨?분노?슬픔?즐거움(喜怒哀樂)이 발동하지 않은 것을 ‘中’이라 한
다. 발동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和’라 한다( 중용장구 , 1章,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여기서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이다. 우선 다
산은 기쁨?분노?슬픔?즐거움을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정서적 감정의 대
표적인 것들로 한정한다. 이는 體用論에 따라 본성에 기반해 발생하는 의식
일반 곧 감정으로 해석하는 주희와 대비된다. 다시 말해, 정약용은 그러한
정서적 감정 이외의 정신활동은 미발에 포함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靜坐하
더라도 사려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없으면 불교의 ‘坐忘’이라도 한다.53) 그
51) 孟子要義, 2:42.
52) 손영식, 이성과 현실 , 울산대출판부, 1999, 제8장 참조.
종교학 연구 100
래서 그는 중용 의 미발이 “마음의 지각활동과 사려의 미발은 아니다(非心
知思慮之未發)”라고 말한다.54)
정약용이 미발을 사물과의 접촉이 없지만 사려 혹은 지각활동이 존재하는
영역으로 보는 태도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과 연결된다. 그리고 공부
의 사례로는 상제를 향한 戒愼, 이치 탐구로서의 窮理, 윤리적인 道義의 사
고 등 정신활동의 전반을 포괄한다.55) 이는 주희처럼 미발을 본성의 이치가
온전히 구비되어 잠재되어 있는 상태로 보지 않음을 뜻한다. 본문에선 未發
이 곧 中을 가르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未發, 謂之中) 그런데, 다산은 그것
을 同格으로 보지 않고 공부와 그 효과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미발의 조건으로, 사물과의 접촉 부재 및 사려가 싹트지 않음을
든다.56) 특히 초점은 사려가 발동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려를 인정하
지 않는 경우 불교의 無念등의 적막한 상태와의 차별이 애매하다. 그래서
주희는 지각의 작용은 없지만 지각의 주체(能知覺者)는 인정한다.57)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있는 존재(靜中有物)은 곧 理를 말한다. 그것은 윤리적 실천
의 움직임(動)을 가능케 하는 잠재적 원천이다.58) 예를 들어 마음의 지각력,
귀의 청각능력, 눈의 시각능력 등은 실제 思考와 듣기 및 보기라는 정신
및 감각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이것들은 그런 현상의 理로서 미발의
자리에 선재해 있는 것이다.59)
따라서, 사려의 차원이 아니면서 이를 잘 보존하는 공부가 요청된다. 그
것이 바로 미발의 敬공부다. 곧 마음의 본체인 미발의 본성에 대해서는 存
養(혹은 涵養)이라는 敬공부를, 마음의 작용으로서 이발의 감정에 대해서는
省察의 敬공부를 배치한다. 마치 마음에 體用이 갖춰져 動靜을 관통하면서
쉼이 없듯이, 마음에 대한 敬공부도 멈춤이 없는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본성
을 보존할 줄 알아야 하고, 움직일 때는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60)
여기서 미발의 存養/涵養공부는 본성을 함양함으로써 도덕적 주체성을 확립
하려는 노력이다.61)
53) 心經密驗, 2:38.
54) 中庸自箴, 1:7.
55) 中庸講義補, 1:7.
56) 朱子語類, 62:117.
57) 中庸或問1章, 朱熹注.
58) 朱子語類, 53:47.
59) 朱子大全, ?答呂子約?, 48:18.
60) 中庸或問, 1章, 朱熹註.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101
이렇듯 주희도 미발의 공부를 주장하는데, 문제는 일관되지 않아 보이는
데 있다. 어떤 때는 완전한 본성이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는 자리로( 중용장
구 ), 어떤 때는 공부하는 군자만이 이루는 자리로( 중용혹문 ) 규정한다.
이는 고요한(寂) 미발의 양면성에 기인한다. 미발은 어두워서 생명의 빛이
부재한 상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려는 뜻을 품고 있다( 어류 , 86:45,
“寂, 含活意”). 모든 사람의 본성의 빛이 작동하고 있는 자리다. 미발의 자
리이자 리의 내재인 본성을 통해 총체적 완전성과 모든 존재와의 통일성
획득이라는 理想의 가능성이 갖춰진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온전한 발현을
위해선 사려가 개입되지 않은 미발의 敬공부가 요청된다.
다산이 주희의 중용혹문 을 定論이라 했는데,62) 거기서 미발은 삼가고
두려워하는(戒懼)자세로 理의 내재인 본성을 온전하게 늘 지키는 공부의 자
리다. 그런데 다산의 경우, 삼가고 두려워하는 대상은 하늘 곧 보이지도 들
리지도 않는 상제다.63) 이처럼 상제라는 인격적 주재자로 보려는 근본의도
는 “두려움을 구하는(求畏)” 정신에서 찾는다. 영명한 마음의 지각력이 발
동하는 미발시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제를 의식하고 섬기는(昭事上帝) 자
세다. 이것이 전제돼야 ‘戒懼’라는 생생한 정서적 감정이 가능하고, 도리를
어기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자세로 마음의 ‘平正’ 곧 中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64)
정약용은 마음에 확립된 도덕 원칙을 “權衡과 尺度”로 표현하고, 일일이
하늘의 명령에 證驗하는 미발공부를 제시한다.65) 따라서 이런 昭事의 자세
는 자기 내면에 도덕적 원칙을 세워, 마음을 도덕적 주체로 확립시키는 역
할을 한다.
Ⅴ. 결론
마음을 둘러싼 정약용의 고민과 해결방식을 주희와의 대비를 통해 살펴
보았다. 다산에게 마음은 정신과 육체의 오묘한 결합체다. 그 내면 주체의
61) 손영식, 앞의 책, 281쪽.
62) 中庸講義補, 1:7.
63) 中庸自箴, 1:5.
64) 中庸自箴, 1:7.
65) 中庸講義補, 1:8.
종교학 연구 102
초월적인 성격은 ‘靈明’으로 표현된다. 이는 궁극적 실재인 상제의 특징이
자, 그러한 상제와 소통케 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신적 존재와의 소통의 근
거는 주희처럼 同氣아니라 氣의 차원을 넘은 同靈이다. 또한 영명은 인간
의 존재론적인 우월성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주희의 ‘虛靈知覺’처럼 理의 통
일성을 고리로 주체와 타자 사이의 분리를 윤리적 인식을 통해 메꾸는 방
식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육신의 주재자로서 마음이 유가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주재
(主宰)의 문제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주희가 확고한 진리로 제시한 “心統
性情”을 다산은 근원적으로 재검토한다. 그리하여 理氣論으로 뒷받침되는
위 명제는 마음의 주재력을 담보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보편 원리의 내재인 본성이 존재론적인 우위를 갖는다는 점이다. 따
라서 마음과 본성의 ‘공존 속 분리’ 때문에 마음의 주재력 확보가 어렵게
된다. 이 지점에서 다산은 본성을 본질이 아니라 마음의 선한 속성으로 제
시하여 마음의 주재력을 추구한다.
인심도심론에 대해 다산은 비록 그것을 僞作이라 평가하면서도 그 진리
성은 인정하고, 그것을 신유학의 방식으로 이론화한 주희의 업적을 높이 평
가한다. 하지만 그 발생 근원에 있어, 다산은 주희가 이기론에 따라 形氣와
性命의 대비를 형이상학적으로 정초지은 방식에 반대한다. 대신 그는 도심
이 상제의 명령을 담는 마음으로서 궁극적 실재와의 소통의 場이라고 해석
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 존재론과 연관되는 윤리적 가치론을 기우뚱한 대
립항으로 설명하면서 윤리적 기획을 시도한다.
육신을 가진 한 지니게 되는 개체의 마음 곧 인심은 윤리적으로 극복의
대상인 人欲과 동일하지 않다. 곧 인심 자체가 죄악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며, 이런 입장은 정약용과 주희 모두 공유한다. 다만
그런 인심을 조절하는 도덕 기준인 도심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난다. 주희는
도심의 원천을 純善하고 고요한 본체 곧 본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 발현으로
서 도심은 ‘欲’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다산은 본성 자체를 하나의
욕구적 경향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 발현인 도심 또한 욕구로 해석한다.
마음의 심층영역인 未發의 문제를 정약용은 철저하게 공부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곧 주희처럼 의식 일반으로서의 감정이 발생하기 이전에 본성이
존재하는 상태로 미발을 보지 않는다. 물론 주희도 敬을 미발의 공부로 제
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사려가 미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理의
내재인 본성의 ‘涵養’이 된다. 이에 비해 정약용은 기쁨?분노?슬픔?즐거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103
움은 정서적 감정의 대표로 한정하고, 그 이외의 사려활동을 인정한다. 그
런 사려 활동이 작동하는 미발은 “求畏”의 차원에서 상제를 밝게 섬기는
(昭事) 자리다. 상제를 섬기는 자세를 통해 사람은 자기 내면 안에 도덕 원
칙을 확립하고, 따라서 도덕 주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마음론의 기본구조 및 그와 연관된 쟁점들에 대한 위의 정리를 통해 다
음과 같이 결론을 지을 수 있다. 곧 정약용이 주희의 마음론에 전제된 형
이상학인 理氣論을 해체하고 궁극적 실재로서 상제의 존재성을 강조하였지
만, 마음을 통해 유교 윤리적 지향 및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주희와 상통한다.
종교학 연구 104
Cho˘ng Yag-yong's(丁若鏞, 1762-1863) Discourses
on Mind
Lim, Boo-yeon
Ch?ng Yag-yong, a representative Confucian reformist of the late
Chosun dynasty, constructed an alternative world view to that of the
ruling Neo Confucian orthodox ideology. He focused his philosophy on
the mind, which had been one of the central notions of Chu Hsi’s (朱
熹) Neo-Confucianism. This article investigates Ch?ng’s new vision on
the mind by comparing it to that of Chu Hsi.
The argument of this paper can be divided into three points. Firstly,
Ch?ng considers “divine brilliance” (靈明) of the mind as the source of
communion with the Ultimate Reality and as sustaining man’s ontological
priority. This contrasts with Chu Hsi’s “reflective awareness” (知覺) of
the mind which bridges the gap between the self and the surrounding
objects by a unitary principle Li (理).
Although Ch?ng accepted the Neo-Confucian maxim, “the mind brings
into conjunction nature and feelings (心統性情),” he denied the
ontological difference articulated by Chu Hsi between nature as
immanent principle (理) and the mind as material force (氣), or the
consolidation of Li-Chi (理氣). Ch?ng substituted Chu Hsi’s nature as
substance or essence of the mind for nature as tendency or desire of the
mind that likes goodness and dislikes evil. Through this assertion, he
tried to establish the sovereignty of the mind as the ruler (主宰) of
nature and feelings.
Secondly, recognizing the significance of Chu Hsi’s discourse on the
human mind and the mind of the Tao (人心?道心), Ch?ng suggested
that the mind of the Tao was a direct utterance of Shang ti rather than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05
a manifestation of the innate nature as Heavenly principle. To Ch?ng,
the mind of the Tao as moral consciousness was a kind of desire for
goodness, which sought to conquer the human mind. But, Ch?ng and
Chu Hsi accepted the tilted polarity of values attributed to the human
mind and the mind of the Tao, which explains the restlessness of the
self and the possibility of becoming a sage at the level of phenomenal
minds.
Thirdly, Ch?ng replaced the Chu Hsi’s wei-fa(未發), the ontological
states of tranquility devoid of all feelings and thoughts, with the states
of thoughts devoid of particular sentiments, namely pleasure, anger,
sorrow, and joy. While Chu Hsi’s wei-fa is cultivated by reverential
concentration (敬), Ch?ng’s wei-fa is the place of serving Shang ti with
brightness (昭事上帝) and an attitude of “seeking fear" (求畏) in order to
become a practitioner of Heaven's mandate.
In the final analysis, Ch?ng tried to establish a world view different
from that of Chu Hsi’s Neo-Confucianism by developing a new idea of
the mind. Yet, in spite of his deconstruction of the Neo-Confucian
conceptualization of the metaphysical Li-Chi, Ch?ng both continued Chu
Hsi’s discourse of the mind and offered a new vision through critical
rethinking.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과정을 중심으로 ―
방 원 일**
1)
目次
Ⅰ. 머리말
Ⅱ. 신크레티즘/혼합주의의 역사
Ⅲ. 학술용어로서의 혼합현상
Ⅳ. 한국 개신교 의례의 형성과 혼합현상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종교’(religion)라는 용어 자체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종교학의 용어들
중에는 특정한 종교 전통 내에서 사용되다가 일반적인 범주로 재설정된 경
우가 많다. 종교 전통 내의 특정한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종교학을 통해
다른 전통의 현상과의 비교 인식을 거쳐 객관적 용어의 위치를 획득하는 것
은 종교학 성장 과정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혼합현상(syncretism)1)에 대한 고찰은 그러한 범주 설정의 작업에 속한다.
* 이 글은 방원일,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과 혼합현상에 관한 연구 ― 전래초기
(1884-1945)의 실천 양상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대학원 문학석사학위논문, 2001. 을 요약한 것임.
** 서울대 석사과정 졸업, 종교학
1) ‘syncretism’은 흔히 혼합주의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뒤에서 보게 되듯이 혼합주의
라는 용어는 일종의 담론으로, 종교의 존재 양태라기보다는, 종교를 ‘혼합’이라는
상태로 만들려는 의도적이고 때로는 악의적인 시도를 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신학
적 태도를 지칭하는, 협소한 의미를 지닌다. 문화적 현상인 ‘혼합’에 인위적 시도인
‘주의’가 결합하면서 왜곡된 함의를 산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감안할 때, 본
논문에서는 ‘syncretism’을 혼합현상, 그리고 맥락에 따라서 혼합이라는 용어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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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종교학에서 종교간의 만남을 서술하는 용어는 그리 체계화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다. 예컨대 최근에 논의되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여러 종교들이 공존해 있는 상황의 묘사이기 때문에, 하나의 종교가 다른 문
화권에 들어가 다른 종교들과 부딪히며 겪는 역동적 변화에 대한 서술을 담
지 못하는 실정이다. 우리는 종교사에서 종교가 낯선 문화권에 선교될 때 겪
는 변화를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는 해당 문화권에서 존재하는
종교의 정체성을 논의할 때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닐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를 서술하는 용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을 때 그 변화의 현상마저 부정
된다는 점이다. 뒤에서 살펴볼 터이지만, 혼합현상은 기독교 신학의 시각에
서 부정적인 함의를 부여받으며 현상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범하
지 말아야 할 ‘혼합주의’로 공격받아 왔다.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용어 사용
이 왜곡된 정체성의 형성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혼합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한국 개신교계는 순수정통주의를 표방하며 한국
이라는 맥락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변화를 부정해왔다.
이 글에서 우리는 우선 신크레티즘이라는 용어가 서구 지성사에서 어떠
한 역사를 지녔으며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핌으로써 용어에 부
정적 의미가 덧씌워진 역사적 요인을 점검할 것이다. 그 다음 그 용어를 종
교학 용어로서 다듬어 사용하는 이론적인 논의를 펼친 후, 한국 개신교의
의례 정착 과정에서 혼합현상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났는지를 고찰할 것이
다. 한국 개신교 내에서 일어난 전통 종교와의 상호작용을 밝힘으로써 우리
는 개신교가 한국종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는 방식을 탐구하게 될 것이다.
Ⅱ. 신크레티즘/혼합주의의 역사
1. 신크레티즘의 역사
우리는 우선 서양어 ‘신크레티즘’(syncretism)과 그것의 번역어로 유통되
어온 ‘혼합주의’에 대해 분석적으로 고찰하도록 하겠다. 신크레티즘이라는
용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의미를 획득했는지의 역사를 개괄하는
작업을 통하여, 이 용어가 어떻게 하여 신학적 전제들을 내포한 용어가 되
역해 사용할 것이다.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09
었는지를 알아보자.
서구에서 신크레티즘(syncret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역사는 플루타르
크(Plutarch)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서로 자주 다투고 싸우다가도 외
부의 적이 쳐들어올 때에는 그들의 차이점들을 융합하여 단결하는 행동 방
식이 ‘신크레티즘’”2)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신크레티즘은, 평소에는 견해
의 차이를 지녔던 사람들이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여 원래의 차이를 해소하
고 내부적으로 결속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전략
적 제휴라는 매우 정치적이고도 실용적인 의미를 지니며 도덕적으로도 정
당하고 권장되는 긍정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처음 이 용어는 긍정적인 용
법으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이후 약 14세기가 지나서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사용할 때도 유지된다.3)
이 용어가 신학적 용어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유럽의 종교
개혁기인 17세기에 들어서부터였다. 당시에 루터교와 가톨릭의 화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칼리투스(George Calixtus)라는 개신교 신학자가 있었는
데, 그의 신학적 입장은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불리었으며, 그를 중심으
로 해서 가톨릭과 루터교를 일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사람들은 혼합주
의자(syncretist)라고 불렸다. 칼리투스파의 움직임은 루터교 내에서 혼합주
의 논쟁이라고 불린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논쟁에서 패배해 실패로
돌아간다. 논쟁의 결과는 이후 결정적으로 신크레티즘의 의미를 규정짓는다.
칼리투스에 의해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던 이 용어는 그의 정치적 패배로
인해 비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거의 잡종(hybrid)과 동의어로 사
용되었다. 신크레티즘은 일반적으로 원칙에 대한 배신 행위나 진리를 희생
하고서라도 안전한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간주되었다.4) 이 시점에서
그 이전의 긍정적인 함축은 완전히 부정적인 함축으로 전환되었고, 부정적
함축은 현재까지도 신학적 발언을 통해서 지배적인 함축으로 남아 있다.
신학적 논쟁 내에서의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된 이 용어의 부정적 함축은
19세기 후반 들어서 헬레니즘 종교 현상에 대한 용어로 사용되면서 종교사
서술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1853년에 어느 익명의 필자가 잡지에 기고한
2) Plutarch, (tr.) by W. C. Helmbold, Plutarch's Moralia, Vol. VI, London: William
Heinemann LTD, 1939, p.313(490b).
3) Stewart, Charles & Shaw, Rosalind, “Introduction: Prblemizing Syncretism,”
Syncretism/Anti-Syncretism, New York: Routledege, 1994, p.4.
4) Moffat, James, “Syncretism,” Hasting, J. (ed.), The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12,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22, p.155.
종교학 연구 110
글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이래,5) 역사학자 드로이센(J. G. Droysen)의 헬레니
즘 문화 서술에서 신크레티즘의 도입은 정식화되었고, 이후 레빌(Jean
Réville), 유즈너(Hermann Usener), 쿠몽(Franz Cumont) 등의 학자들에 의
해서 이 용어는 사용되었다.
이들 학자들이 사용한 신크레티즘 개념은 헬레니즘과 로마 후기의 종교
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로마 후기의 종교는 그
리스,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지의 다양한 종교들이 뒤섞인 무질서, 혼란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었으며, 신크레티즘은 이 현상을 일컫는 용어로
채택되었다. 로마 후기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기독교의 등장과 맞물려 진화
론적인 도식을 형성한다. 즉 기독교 이전의 상황은 혼란과 무질서 상태였는
데 그것이 기독교의 등장을 요청하는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
이다. 그러한 도식은 “기독교가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이교적인 혼합주의는
종국에 이르고 말았다”6)는 단정적인 역사 서술로 나타나며 지금까지도 영
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후 20세기 들어서 신학에서는 혼합주의에 대한 부
정적 시각이 더욱 강화된다. 특히 개신교 교회연합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
(WCC)의 태도는 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1960년대 들어 세계교회협의
회에서는 타종교전통과의 협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넘지 말아
야 할 선’으로 신크레티즘을 지목하며 그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입장을 내
세우며 신크레티즘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2. 한국에서 ‘혼합주의’로서 수용된 혼합현상
서구 기독교계의 맥락에서 논의되던 신크레티즘이 한국의 종교문화에 적
용된 최초의 예는 1929년에 출판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 (원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에서 나타난다. 그는 한
5)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신학적 형태로, 가능한
모든 형태의 신크레티즘은 로마 황제들이 가장 좋아한 정책이었다. 그들은 모든 종
류의 인류를 불러들여 카이사르의 화폐로 다시 찍어내고자 하였다.”(Anonymous,
“the Octavius of Minucius Felix,” Fraser's Magagine for Town and Country,
vol. XLVII, March 1853, p.294.(Martin, Luther H., “Why Cecropian Minerva?
Hellenistic religious syncretism as system,” Numen 30, 1983, p.135에서 재인용))
6) Anthony Parel, S. J., “혼합주의”,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엮음, 기독교대백
과사전 , 기독교문사, 1985, Vol. 16, p.594(이 항목은 원래 C. S. J. Annette (ed.),
The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and Home, New York: Gradlier, 1965에
실려있던 것임).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1
국 종교의 특성을 개괄하는 대목에서, 기독교 유입 이전의 한국에는 고유신
앙들이 쇠퇴해 있었으므로 독특하고 지배적인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전
제하며 “古로마 세계에도 있었지마는, 당시 우리나라에도 종교혼합이 성행하
고 있었다”7)고 서술한다. 우리는 앞에서 서구 학계에서 로마 종교사를 서술
하는 용어로 신크레티즘이 사용되면서, 그것이 기독교의 승리라는 진화론적
인 도식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살펴본 바 있다. 백낙준은 기독교가 국교화되
기 이전의 로마의 상황과 19세기 말 한국 종교의 상황을 유사한 것으로 놓
는 비교의 인식을 통해서, 서구 학계의 진화론적 도식을 한국 종교사 서술에
도입하였다. 기독교 수용은 한국의 종교적 정황에서 볼 때 하나의 구원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유입 이전의 한국 종교계는 암흑기로 규정된다.
각각의 전통들이 쇠퇴하여 제 모습을 상실하고 혼합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종교혼합행위는 우리 겨레가 진리의 확증을 찾아보려는
비판성과 신앙적 집착성을 결여함을 보여주는 예증이 될 것 같다”8)고 판단
할 수 있으며, “표면적으로 볼 때에 한국인의 종교혼합은 신앙에 무관심 내
지 무한한 관용성의 표현 같으나, 엄정히 따져보면 종교신앙의 기갈(飢渴)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9)는 결론에 이른다. 백낙준의 서술에서
기독교 전래 이전의 한국 종교사는 일종의 결핍 상태로 묘사되며, 그것은 그
가 서술하는 개신교 선교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배경이 된다. 그러한 구도를
형성하는데 신크레티즘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용어 사용은 이후
학계에서 한국의 종교문화를 서술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 전통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신크레티즘의 번역
어 ‘혼합주의’가 결합하여 하나의 담론 체계를 이루게 되면서 이 용어는 한
국사회에 본격적으로 확산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
학이 한국의 신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세계교회협의회는 1960년대 초반 혼합주의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특히 1961년의 세계교회협의회 제3차 총
회에서는 혼합주의의 망령을 피해야 한다는 신학 노선을 제시해10) 한국 신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7)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832-1910 ,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p.12(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p.16).
8) 위의 책, p.20.
9) 위의 책, p.21.
10) 말린 벤엘데렌, 이형기 옮김,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p.87.
종교학 연구 112
한국 신학자들은 그들의 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부정적인 함축을 지닌
신크레티즘을 한국 사회에 정착시키게 된다. 이 시기에 신크레티즘은 종교
혼합, 제설혼효(諸說混淆), 습합(習合), 제교종합주의 등 다양한 표현으로 번
역되었지만 나중에는 혼합주의라는 표현으로 번역 정착되었다. 한국 신학계
에서 혼합주의는 기독교의 독자성 혹은 절대성을 해치면서 기독교를 종교
일반의 보편성을 가진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혼합주
의는 그 말 자체로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음모로 여겨져 빠지지 말아야 할
오류로 치부되었다. 이때 혼합주의가 적용되는 양상은 백낙준의 용법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백낙준의 혼합주의가 기독교 전래 이전의 종교적 지형
을 뭉뚱그려 지칭하던데 반해, 60년대 이후 신학자들의 혼합주의는 기독교
내에서의 전통의 영향을 지칭하고 있다. 용어가 겨냥하는 지점이 전통에서,
기독교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의 접촉면으로 이동한다.
60년대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영향을 받아 경멸적인 의미로 확고하게 자리
를 잡은 혼합주의는, 담론(discourse)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기독교와 전통
종교의 관계를 논하는 신학의 자리에 상투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신학이
범하지 말아야 할 오류로 지적된다. 그러나 혼합이 어떠한 의미에서 부정적
인 것인지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결여되어 있다. 그저 한국문화와의 접촉,
변형은 혼합주의라는 이름으로 단죄되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신학에서 혼합주의는 현상을 서술해주는 분석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는 개념으로 역할을 하였다.
Ⅲ. 학술용어로서의 혼합현상
그렇다면 우리는 현상으로서의 혼합을 어떠한 방식으로 학술적으로 서술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용법의 맹점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새로운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기존 혼합현상 논의에 대한 성찰
베어드(Robert D. Baird)에 따르면 종교사 서술에서의 혼합현상의 사용
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는 어떤 때는 혼합현상이 종교사에
서 불가피하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기술되는가 하면, 어떤 대목에서는 동양
종교들의 본질적 특성으로 기술되는 모순된 용법을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3
한다.11) 이 다른 쓰임새를 정리하여 베어드는 전자를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syncretism as a historical phenomenon), 후자를 ‘신학 현상으로
서의 혼합현상’(syncretism as a theological phenomenon)이라고 부른다.
우선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은 사상들이나 운동들 간의 역사적 상
호관련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이
러한 의미에서 역사상의 모든 종교는 기존 문화의 혼합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할 때,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이 적용되는 것이다. 헤르만 궁켈
(Herman Gunkel)이 기독교를 혼합적 종교라고 한 것은 이러한 용법의 예
가 된다. 베어드는 이러한 용법이 종교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전
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모든 종교가 혼합이라는 진술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대한 동어반복일 뿐이며, 어떠한 사실에 대한 분석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학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은 신념 체계의 차원에서 다양한 이
념들을 혼합한 경우를 말하는데, 상충되는 이념들이나 실천들이 한 데 모여
일관성의 이득 없이 유지되는 상태나 그 결과가 조화로운 통합이 아닌 경
우에 적용된다.12) 혼합현상은 유기적 총체를 이룬 종합보다는 평가절하된
의미로, 종합을 이루지 못한 채 모순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
러한 식의 용법은 특히 인도, 중국, 일본 신도 등의 동양의 종교를 묘사할
때 널리 쓰인다. 베어드는 이러한 용법에서 주장되는 정합성의 결여, 상충
되는 이념들의 공존은 순전히 외부적 관점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한다.13)
해당 문화권 내의 사람들은 외부인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하등의 모순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세계관 내에서 조화시키며 살아간다. 그
러므로 혼합현상이 종합에 비해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위계 설정은 의
미가 없으며, 어느 문화권의 특성으로 주장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두 용법의 혼합현상은 모두 서술범주로서의 부적절함을 드러낸다. 따라서
베어드는,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은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것이기 때
문에, 신학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은 정당한 종교사적 이해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종교사 연구에서 혼합현상의 사용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
11) Baird, Robert, D., Category Formation and the History of Religions, The Hague:
Mouton & Co. N. V., 1971, p.143.
12) 위의 책, p.147.
13) 위의 책, p.150.
14) 위의 책, p.152.
종교학 연구 114
그러나 혼합현상이라는 용어의 범주 설정이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
이 그 용어를 폐기처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곧장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종교’라는 개념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해서 학술적 논의
에서 그것을 배제하는 시도가 성공할 수 없는 것은 현실적으로 유통되는
개념의 간과될 수 없는 위력 때문이다. 혼합현상의 경우에 있어서, 그 용어
가 ‘사이비종교’와 같이 용어 자체가 악의에 찬 함축을 지니지 않은 한 그
것을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혼합현상에 대한 학술적 논의의
중지로 인해서 그 용어가 신학적인 함축을 담고 오용되는 현실을 묵과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15)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용어의 폐기
가 아니라 용어의 전제를 성찰하고 학술적으로 생산성 있는 용어로 다듬는
작업이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혼합현상이 사용될 수 있는 세 번째
용법은 한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수용될 때 발생하는 현상, 문화접변의 현
상을 서술하는 범주로서 혼합현상을 사용하는 것이며, 이러한 방향의 고찰
이 혼합현상을 생산성을 지닌 용어로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선교현상으로서의 혼합
혼합현상이 종교의 선교와 수용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서술하는 용어로서
기능할 때 유용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학자는 반 데르 레에우이다.
그는 혼합현상의 본질적 성질을 종교의 역동성의 한 형태로서 이해해야 한
다고 역설한다.16) 또 그는 “종교의 역동성은 선교로 나타난다”17)고 지적한
다. 앞서 베어드가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에 대해 지적했듯이, 혼합의
의미를 확대한다면 종교들 중에 그러한 성질을 갖지 않는 종교는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를 혼합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종
교들이 역동성을 지니는 시점을 포착하여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혼합현
상을 적용하는 작업이다.
더 나아가 레에우는 혼합현상의 요체를 간결하게 제시해준다. 그가 제시
해주는 혼합의 요체는 자리물림, 전위(듭位, transposition, Verschiebung)이
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5) Schreiter, Robert J., “Defining syncretism: an interim report,”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17-2, 1993/4, p.50.
16) Van der Leeuw, G., trans. by J. E. Turner, Religion in Essence and Manifestation,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3, p.609.
17) 위의 책, p.611.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5
‘자리물림’은 종교들의 역동성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형태는 전혀 변
하지 않은 채 있으면서 어떤 현상의 의미가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집’이라는 성스러운 말, 베델의 신화는 주물숭배의 경험으로부터 신현(神
顯)의 경험으로, 이어서 신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언표로, 최종적으로는
위안을 고양하는 것으로 ‘자리물림’된다. 이와 매우 비슷하게, 짜라투스트
라 이전의 페르시아 종교에서는 칭송할 가치가 있는 삶의 해방으로 간주
되던(왜냐하면 미트라는 잔인하기 때문에 동물을 죽인 것이 아니라 단순
히 삶을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였으니까) 소 도살이, 조로아스
터교에서 ‘자리물림’되어 아리만(Ahriman)의 첫 번째 파괴 행위로 악덕
화되었다. 또 향을 바치는 기도는 기독교 예배에서 (자리물림에 의해) 성
만찬에서 주의 강림을 희원하는 기도(epiclesis)가 되었다.18)
어떠한 종교가 수용되었을 때, 이전에 있던 요소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새 종교 안에서 새로운 요소와 결합할 때 그것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
던 의미작용을 일으킨다. 레에우는 이 과정을 자리물림이라고 명명하고 혼
합현상의 핵심적인 메카니즘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세계종교사에서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다. 신앙하
는 종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이전의 신앙에서 지니던 성스러
운 시간, 공간, 상징 등이 잔존하는 경우는 종교사에서 흔하게 보고되는 현
상이다. 고대 이집트의 사원이 있던 자리에 콥트 기독교 사원이 세워지고,
그 위에 이슬람 사원이 건축되는 사례에서처럼, 지배적인 종교 전통이 교체
되더라도 그 지역민들에 의해 성스럽게 여겨지던 공간은 여전히 자신의 자
리를 유지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소도(蘇塗)가 있던 자리에 불교 사원이 건
립된 경우19)가 그러한 현상에 해당한다. 공간 외에도 시간과 상징의 경우
도 새 종교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며 새로운 체계
내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뒤에서 이러한 자리물림이 한
국 개신교 의례 정착 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3. 혼합현상의 주체로서의 대중 전통
우리가 혼합현상에 대한 학술적 논의에서 주목하는 두 번째 지점은 혼합
현상을 구성하는 주체에 관한 관심이다. 이 문제는 문화를 구성하는 주체의
18) 위의 책, p.611.
19) 서영대, “葛蟠地小考- 蘇塗의 佛敎的變容”, 종교학연구 제2집, 서울대학교 종교
학연구회, 1979.
종교학 연구 116
시각에서 문화를 이해하려 했던 인류학자들의 문제의식에 의해서 구체화된
바 있다. 이들 인류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문화를 전수받는 객체로서가 아니
라 의미제작자(meaning-maker)로서 강조된다. 대표적인 예가 구조주의 인류
학자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제시된 손재주꾼(bricoleur)이라는 인간형인데,
그는 재료를 적절하게 조합함으로써 원래의 재료가 가지지 못했던 용도에
쓰일 수 있는 구성물을 제작해내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이다. 다른
말로 해서, 손재주꾼은 주어진 요소들의 재조합을 통해 구조를 구성하는데,
이때 생성된 구조는 이전의 것과는 상이한 형태를 갖는다. 이러한 손재주꾼
이라는 인간형, 의미제작자로서의 인간은 종교를 신행하는 인간의 실천적
행위를 이론화하여 서술하는데 유용한 틀이 된다. 예컨대 코마로프(Jean
Comaroff)는 남아프리카인들이 토착적 종교 전통과 기독교 전통을 결합하
여 현실에 대응하는 종교적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을 연구하였다.20) 또 조
나단 스미스(Jonathan Smith)는 마오리족의 창조신화 이오(Io)신 신화에 대
한 연구에서 전통의 요소들과 외래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현실에 대한 성찰
을 가능케 하는 신화의 작용을 밝혀내었다.21) 이러한 연구들에서 강조되는
것은, 신화를 누리는 사람들, 제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활용하느냐에 대해서이다. 연구의 초점은 종교 전통
자체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에 맞추어진다. 혼합현상은 의미 수용자가
행하는 요소들간의 조합으로 연구되어진다.22) 그 조합의 창조성이 혼합현상
을 규정하는 가장 큰 관건이 된다. 그러므로 수용자들이 어떤 요소, 즉 ‘무
엇을’ 받아들였느냐에 대한 연구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
느냐에 대한 연구가 요청되는 것이다.
혼합현상을 그것을 구성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작업은, 종교사
서술의 중요한 안목의 하나인 엘리트 전통과 대중 전통의 구분에서 대중
전통의 관점에서의 서술을 채택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혼
합현상은 대중 전통의 신행(信行)에 의해 빚어지는 현상이다. 엘리트 전통
에서 ‘무엇을’ 대중 전통에 부여하였을 때, 대중 전통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20) Comaroff, Jean, Body of Power, Spirit of Resistanc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21) Smith, Jonathan, Z., “The Unknown God: Myth in History,” Imagining Relig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2) Drooger, A., “Syncretism: The Problem of Definition, the Definition of the
Problem,” Dialouge and Syncretism: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Michigan:
William B. 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9, p.18.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7
신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어떻게’의 문제가 제기된다. 대중 전통은 기존의
요소와 엘리트 전통에서 받아들인 새로운 요소들의 창조적 결합, 즉 혼합을
통해 자신들의 전통을 고안한다. 물론 이렇게 고안된 전통은 엘리트 전통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 엘리트 전통은 고안된 전통을 상황에 따라 묵인하기도
하고, 규제하기도 하면서 그것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이러한 의미
에서 혼합현상은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영역이다.
Ⅳ. 한국 개신교 의례의 형성과 혼합현상
이제 앞서 논의된 혼합현상에 대한 논의들을 염두에 둔 채,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 과정에서 나타나는 혼합현상의 특성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한국 개신교 의례의 특성
한국 개신교는 선교 초기부터 ‘말씀 중심의 교회’라고 불려 왔다. 한국
개신교에서 말씀, 즉 신념 체계가 강조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제의, 즉 실천 체계에 대한 관심의 약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교회의 중
추를 이루는 성례(聖禮)는 한국에서는 지극히 소극적인 면밖에는 가지고 있
지 못했”23)으며 “성찬 예식을 모르고, 그 성례의 견고한 짜임새 위에 세워
지지 아니한, 그러한 한국 교회”24)가 세워졌다. 심지어 한국 개신교는 반
(反)의례적 성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개화기의 개신교인들은 의례보다는
정신적 측면에 치중하는 것이 고등한 종교라는 논리를 내세워 상대적으로
의례에 비중을 두었던 유교나 천주교와 자신을 차별화시키기도 하였다.25)
성경, 교리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특성인 것만큼이나, 제의에 대한 관심의
결여는 전래 초기 한국 개신교의 중요한 특성을 이룬다. 한국에 들어온 선
교사들은 세례, 성만찬과 같은 최소한의 의례 외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
다. 개신교 엘리트 전통은 의례에 대해 소극적인 관심만을 가졌고, 이 사실
은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의례의 혼합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3) 민경배, 앞의 책, 연세대출판부, 1994, p.174.
24) 위의 책, p.175.
25) 장석만, “한국 의례 담론의 형성 ― 유교 허례허식의 비판과 근대성”, 한국사회의 근
대성과 종교문화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창립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2001, pp.29-31.
종교학 연구 118
엘리트 전통의 신학적 관심은 제의 실천 전반에 균일하게 적용되지 않았
으며 각각의 제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신학적 관심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은 제의에 대한 신학적 통제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
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학적 관심은 혼합의 양상과 상관 관계
를 갖는다. 순수정통주의적 입장을 지닌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관심은 전통
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신학적 관심이 강하게 투영
된 제의 실천에서는 혼합적 양상이 규제되고, 그렇지 않은 제의 실천에서는
혼합적 양상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정착된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개신교의
의례들을 세 부류로 무리지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즉 개신교 의례를 혼합
의 양상과 신학적 관심의 반비례 관계에 따라 정기 의례와 성례전, 절기
의례, 평생 의례의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정기 의례와 성례전은, 주로 주일에 행해지는 예배, 성만찬, 세례를
가리킨다. 이들은 개신교의 신념 체계를 직접적으로 구현하는 중심적 의례
이다. 개신교에서 예배는 말씀을 선포하는 의례로서 가장 중요한 제의적 실
천으로 인식되며 성만찬과 세례는 개신교의 2대 성사(聖事)26)로 규정된 공
식적인 의례이다. 이러한 공식적 성격으로 인하여 정기 의례와 성례전은 신
학적 관심이 강하게 나타나는 영역이 된다. 지성적인 차원에서 엘리트 전통
의 신학적 규제가 가해지기 때문에 혼합을 배제하려는 노력이 계속된다. 그
리하여 한국 개신교회에서 예배나 세례, 성찬식 등의 의례는 선교사들에 의
해 전래된 미국 청교도적 교파 교회의 양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둘째, 절기(節氣) 의례는 1년을 구획하는 의례로,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
수감사절 등의 교회력의 실천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절기 의례들은 기독교
의 전래와 더불어 소개되었으나 지성적 차원에서라기보다는 풍속(빌俗)의
차원에서 도입되었다. 도입과 함께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긴 하였지만 정기
의례와 성례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관심이 주어졌을 뿐이다. 신
학적 통제가 덜한 만큼, 한국 개신교인들은 자율성을 갖고 나름의 방식으로
절기 의례를 영위하였다. 게다가 절기 의례는 한국인에게 완전히 낯선 의식
이 아니었다. 의례에 담긴 기독교적 의미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1년을 구획
하여 의미화하고 기념하는 행위 자체는 고유의 세시풍속(歲時빌俗)에 원래
26) 천주교가 7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백성사, 병자성사, 신품성사, 혼인
성사)를 규정하여 일상의 의례들을 성사 내에 통합하고 있는데 반하여, 개신교는
종교개혁 당시 성만찬과 세례만을 성사로 인정하여 성사의 범위를 제한하였다.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9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절기 의례는 서양의 교회력 전체계를
통째로 이식하여 새로 배워 익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도입하여
한국 교인들이 원래부터 의미화하여 지니고 있었던 일년 주기 안에 편입되
는 양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절기 의례의 실천에 있어서,
고유의 절기 의례들과 어떠한 관계맺음을 이루느냐의 문제가 핵심적인 관
건이 된다. 이처럼 개신교 절기 의례는 전통의 맥락 안에서 실천되면서 혼
합을 이루게 된다.
셋째, 평생 의례는 주요한 삶의 계기에서 행해지는 의례로, 결혼식, 장례
식, 제사 등이 여기에 속한다. 평생 의례에 대해서는 신학적 관심이 상대적
으로 가장 적게 주어졌으며, 평생 의례의 실천은 신학적 개입보다는 교인들
의 자율에 따라 이루어졌다. 교인들은 자신의 몸에 배어 있던 전통의 행위
양식을 통해 기독교 신념 체계를 구현하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형적인
혼합현상이 일어났다.
기존의 의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기독교 평생 의례를 실천하는 것은 기
존의 행위의 일부를 수정하거나 기독교 상징을 첨가하여 변형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더구나 제사와 같이 신학적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
황에서도 공동체적 요구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던 의례의 경우, 전통적 방식
에 대한 의존성은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도식화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제시한 의
례의 범주들 내에서 동일한 혼합의 양상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와 추수감사절, 결혼식과 제사 등의 의례에서는 상이한
양상의 혼합이 나타난다. 이 도표는 함께 묶여 있는 의례들이 동일한 정도
의 혼합을 나타낸다는 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혼합 양상의 공통적인
특성을 지시하는 것일 뿐이다.
신학적 관심 친밀도 혼합의 양상
정기 의례와
성례전
예배, 성만찬, 세례 강하게 적용됨 낯선 행위 위주 제한적
절기 의례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사절
소극적으로 적용됨 낯선 행위와 익숙한
행위의 혼재 부분적
평생 의례 결혼식, 장례식, 제사 약하게 적용됨 익숙한 행위 위주 전반적
우리는 이제 개신교 의례 중 혼합현상이 나타나는 평생의례와 절기의례
종교학 연구 120
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개신교 평생의례에 나타나는 혼합
(1) 개신교 결혼식의 정착 양상과 혼합
개신교 평생 의례 중에서 전통의 실천 양식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것은
결혼식이었다. 한국 고유의 풍속 중에서 가장 많은 비판이 제기된 부분이
결혼식을 둘러싼 폐단에 관한 것이었고, 그 폐단을 고치는데 개신교 결혼식
이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생에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가 이교도의
결혼식”27)이라는 한 선교사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종래의 결혼식에 대
한 기독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의 시각은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종래의 결혼
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기독교식 결혼식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결혼식의 형성은 기존
요소들의 완전한 소거를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스크랜튼 부인
(Mary Fitch Scranton)은 1898년도에 은혜라는 개신교 신자의 결혼에 참석
한 후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켜진 결
혼식의 반대할만한 특성들은 폐기되었고, 대수롭지는 않지만(indifferent) 바
람직한 것으로 여겨진 것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에 의해 유지되었다.”28) 개신
교 결혼식은 기존의 결혼식에서 문제되는 부분을 개량하고 선택적으로 서
구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 부분은 그
대로 유지되었다. 기독교인을 찾아서 중매가 이루어지고, 비단 봉투에 사주
를 넣어 보내고, 혼수를 마련하는 등의 절차가 진행되었다. 개신교 결혼식
은 처음부터 혼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29) 위의 기록보다 약 20년 후에 감
리교 여선교사 어윈(Cordelia Erwin)이 남긴 기록에서도 우리는 전통의 실
천체계 내에 개신교 의식이 삽입되는 비슷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
도 화천에서 1918년 거행된 개신교 결혼식은 “최소한의 이교의 흔적도 없
는 엄격한 기독교식 결혼식”30)으로 의도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기존의 예
식을 소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였다. 어윈은 전통적인 결혼 절차 안에
27) McCune, Katherine, Miss, “A Hearthen Bride,” KMF 6-9, 1910. 9, p.222.
28) Scranton, M. F., Mrs., “Grace's Wedding,” Korean Repository, Vol. 5, 1898, p.295.
29) Kendall, Laurel, Getting Married in Kore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p.63.
30) Erwin, Cordelia, Miss, “Transition, A Korean Christian Wedding,” KMF 14-4,
1918. 4, p.73.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1
신부의 머리에 씌우는 흰 베일이라는 서구 상징의 도입을 통하여 혼합적
의례를 진행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이교적이지 않은 결혼식을
행하려 했던 개신교인의 노력은, 이렇게 전통적인 행위의 틀 안에서 형성된
혼합적 형태의 결혼으로 귀결되었다.
때로는 한국인에 의해 실천된 개신교 결혼식에는 전통적 실천 논리가 다
시 수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가 되는 것이 초기에는 비판받았던 중매가 개
신교 결혼에서 다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중매에 대한 비판은 개화 초기
부터 빈번히 제기되었으며, 새로운 결혼의 중요한 특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개신교 결혼식의 영향을 받은 사회인들의 결혼에서
는 자유연애를 강조하는 풍조가 생겨났지만, 정작 개신교인들은 결혼의 대
상을 제한하는 노력을 하였다는 점이다. 한국 개신교는 초기부터 개신교인
들끼리만 결혼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보였다. 신자들끼리의 결혼은, 신
자와 비신자의 결혼에서 생기는 문제점, 특히 여자 신자가 남자 비신자에게
시집가서 겪는 어려움 때문에 요청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필요성은 교회 총
회를 통해 율법화되면서 강제적인 규정이 되었다. 1904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자가 불신자와 더불어 결혼하는 것은 죄로 정함”31)이라고 규정한 이래
신자 아닌 사람과의 결혼은 교회의 규제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교
회의 혼인범위는 구한국시대의 사색(四色)의 혼인보다도 더 좁아졌는지
라”32)는 개탄이 나올 정도로 개신교인들의 혼인 상대는 제한되었다.
한국 개신교의 결혼식은 이념적으로는 ‘이교의 흔적이 없는’ 예식을 지향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전통적 결혼의 틀을 많은 부분 유지하며
부분적인 행위와 상징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혼합의 과정으로 형성되었다.
겉모양으로 볼 때 개신교 결혼식은 전통 혼례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의 개신교 결혼식이 서양의 것을
그대로 들여와 실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수용의 과정에서
기존의 틀과 혼합되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정착했다는 사
실이 중요하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기독교 상징을 전통의 혼례 과정에 도입
하고, 전통의 요소 중에서 상황에 의해 요청되는 것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결혼 의례를 정착시켰다.
31) 長老敎會史典彙集, 朝鮮耶蘇敎書會, 1918(한규무,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결혼 문
제 인식(1890-1940)”,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0호, 1999, p.72에서 재인용).
32) “조선교회의 7난(속)”, 기독신보 , 1917년 9월 26일.
종교학 연구 122
(2) 장례식
결혼식이 전통의 의례에 상당히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에 비하여, 장례
식은 전통적 의례가 그리 많은 변화를 겪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시점에서도, 예식 집행은 기독교식으로 거행된다고 하더라도 그 예
식과 예식 사이에서 되어지는 모든 절차는 구습(舊習)대로 조금의 변화 없
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평가가 내려질 정도이다.33) 한국의 개신교 장례식은
집례자가 목사로 바뀌고 운명(殞命)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임종 예배가 삽
입되었다는 점을 빼고는, 입관-장례-하관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장례식 순서
가 그대로 이어진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전통 장례에 기독교 예배를 삽입하는 방
식으로 장례 실천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행위를 전통
실천의 맥락 안에 배치하는 작업과 전통의 상징물들을 기독교 상징물로 대
체하는 작업으로 구성된다. 전자의 작업은 기독교 예배의 기본 형식인 기
도, 찬송, 성경 봉독, 설교 등의 행위를 장례 안의 절차로 삽입하는 것이고,
후자의 작업은 십자가 상징을 의례 도구에 도입하는 일이었다. 발상하는 장
소로 예배당을 사용하고, 목사가 성경을 들고 관을 인도하며, 상여소리가
들어갈 대목에는 찬송가가 불리었다. 개신교인들은 낯선 행위들을 전통의
차례 안에 배치하는 혼합을 통하여 그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의례를 창안
하였다. 그 창안의 과정은 상징의 도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들은 종래
의 상복에 십자가를 새겨 넣고 묘비로 십자가를 사용하였다. 그리스도 죽음
의 상징이자 기독교인임을 분별해주는 기호인 십자가를 종래의 상징물들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실천 체계를 구성하였다.34) 그들은 장례를 치루면서
전적으로 새로운 행동만을 고집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고민한 지점은
익숙해져 있던 몸짓 사이사이의 어떤 지점에 낯선 몸짓을 집어넣고 어떤
부분을 바꾸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몸짓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고민이었다. 전통적인 몸짓의 틀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것
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이해하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어떤 식으로든
소통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죽음관을 담고 있는 몸짓으로
기독교의 죽음관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35) 그러므로 익숙한 행위와 낯
33) 박근원, “기독교의 관혼상제 의식지침”, 기독교와 관혼상제 , 전망사, 1985, p.178.
34) 이것은 강화도 고씨 부인의 장례식에서 잘 나타난다(이덕주?조이제, 강화기독교
100년사 , 강화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역사편찬위원회, 1994, p.142.).
35) 차은정, 196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 의례의 변화에 대한 연구 , 서울대학교 대학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3
선 행위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장례의 반복이 죽음에 대한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낳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앞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과제가
될 것이다.
3. 개신교 절기의례에 나타나는 혼합현상
개신교와 더불어 한국에 도입된 교회력에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
사절이 있다. 이들이 한국의 전통적 절기의 맥락에 자리매김하는 양상은 혼
합과의 직접적인 상관성을 갖는다. 크리스마스가 기존의 요소와의 혼합을
통해 한국의 명절로 확고한 자리를 얻은 데 반하여, 혼합의 과정 없이 수
입된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은 교회 내의 행사로 한정되었고 제대로 정착하
지 못했다.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개신교 선교가 개시된 1884년부터 선교사들에 의해
누려졌으나,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크리스마스에 그리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으며,
미국의 청교도는 크리스마스를 이교도의 풍습으로 보아 한 때 그것을 폐지
했을 정도로 크리스마스에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크리스
마스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선교가 어느 정도 진
척된 1890년대 중반에도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기 보다는 휴가로서의 의미가 강하였다. 즉, 선교사로서 한국 신자들
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내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선물을 교환하
거나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하였다.
선교사들의 상대적 무관심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1890년대 후반부터 본
격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자신들에게 의미있는 날로 정착시켜 나가기 시작한
다. 이 당시에 발간된 신문들을 참고하면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가 급속히
확산되었음을 볼 수 있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크리스마스에 대한 보도
는 확대되어갔고, 1899년에는 “구세주 탄일이 대한국에도 큰 성일이 되었
다”36)는 평가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크리스마스가 급속히 보급된 것에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수용 의지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원 문학석사학위논문, 1997, p.35.
36) “1899년 12월 27일 기사”, 대한크리스도인회보 .
종교학 연구 124
크리스마스는 전통적 실천 체계의 맥락에서의 혼합을 통해서 한국에 정
착되었다. 이 혼합의 양상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절기 의례로서 한국에 정착
하였다. 전통적인 절기 의례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짓는 역할을 담당한 날은
동지였다. 크리스마스와 동지는 한 해를 마무리짓는다는 구조적 동일성을
지니면서 3, 4일 정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존재하였고, 이질적인 두 풍습
은 서로 섞이면서 양립하게 되었다.37) 구체적으로 동지는 음력에서의 한
해를 마무리짓는 날로 팥죽을 해 먹고, 다음 해의 달력을 나누어주며, 친한
사람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한 해를 정리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러한 행위들
은 크리스마스에서도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가까운 사람에게 찾아가 문안
을 드리던 관행은 카드와 연하장을 보내는 풍속으로 자리잡았으며,38) 달력
을 나누어주는 행위도 크리스마스에 그대로 나타난다.39)
전통적인 동지가 유지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로 대체된 것은 물론 양력
의 보급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1890년대 후반의 몇 해 동안 크리스마스가
급속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 시기는 양력의 보급 시기와 일치한
다. 양력의 보급에 따라 음력의 한해를 마무리하는 것은 의미를 잃게 되었
고, 대신에 성탄(聖誕), 신정(新正), 구정(舊正)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연말연
시의 절기가 한국 사회에 형성되었다.40) 이 새로운 구도에서 크리스마스는
동지가 하던 역할을 계승하여 한 해를 마무리하는 한국인의 절기 의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에
의미있는 절기로 자리잡은 것은 양력의 보급에 따른 절기 의례 구도가 변
화되었고, 그 구도에서 동지의 행위를 양도받아 한국 절기의 맥락 안에서
의미화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한국 크리스마스의 실천에서 나타난 혼합의 양상은 고유한
생일 모심과의 연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낯선 명절이 한
37)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한국인의 의식과 예절문화 Ⅱ: 한국 의례문화의
구조와 역사 , 96년 교육부 인문?사회과학 중점영역 연구결과 보고서, 1998,
p.179.
38)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앞의 책, p.180.
39) 1901년에 선교사 마펫이 묘사한 평양의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다음과 같다: “예배
후에 교회 직원들의 주도하에 수많은 교인들이 달력을 가지고 평양의 각 대문으로
나가서 아직 전도 받지 못한 시골 마을의 집집마다 복음이 퍼지길 바라며 지나가
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소.”(사무엘 마펫, “1901년 12월 25일 편지”,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 편지(1890-1904) , pp.680-681.)
40) 이서구, 세시기 , p.208.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5
국인에게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는 그것이 예수의 생일이라는 점에
있었다. 원래 모셔 오던 부모의 생일, 임금의 생일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인
들은 구세주의 생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초기 감리교 신학자인
최병헌에 따르면, 가정에는 부모의 생일이 있어 이를 기념해야 하고, 나라
에는 임금의 생일(만수성절)이 있어 이를 경축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세
계의 구세주의 생일을 모든 이가 경축해야 한다는 설명된다.41) 여기서 구
세주의 탄생일을 모시는 방식이 부모의 생일 모심, 임금의 생일 모심의 연
장선상에 있으며 따라서 그 방식이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 논리에 유념할 때, 우리는 전통적 생일 모심의 행위가 예수
의 탄일에도 나타났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한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등불 장식과 깃발의 사용이다. 등불 장식과 깃발의 사용은 석
탄일에서, 그리고 임금의 생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42)에서 사용되었던 축
하의 행위였다. 이러한 상징 논리의 전승이 혼합의 세 번째 양상에 해당한
다. 그것은 전래 초기 한국 크리스마스의 대표적인 풍경인 등불 장식에서
잘 나타난다. 초기 한국 기독교에서 등불은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장식이
다. 등불 장식은 서구에서 촛불을 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단
적으로 강조된다. 사실 탄일(誕日)을 등불로 장식하는 것은 한국 불교에서
성행했던 풍습이다. 이것이 기독교 전래 이후 크리스마스라는 외래적 요소
와 등불이라는 토착적 요소의 결합이라는 혼합현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기
독교에서 제공된 크리스마스라는 틀 안에서 전통적인 등이라는 요소가 새
로이 배치되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이 일어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크리스마스의 정착과 혼합 과정에서, 우리는 엘리트 전
통의 신학적 관심과 혼합현상의 반비례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크리스마스의 종교적 의미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
았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 신자들은 크리스마스를 수용하여 한해를 마무리
하는 절기 의례로 정착시켰다. 신학적 규제가 약했던 영역인 크리스마스의
정착 과정에서는 이전의 동지에서 행해진 행위들, 생일 모심의 행위들이 그
대로 반복되면서 그 위에 개신교 신념 체계가 덧씌워지는 혼합이 일어났다.
41) 최병헌, “구세주의 탄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 1897. 12. 15. 이 글은 이듬해에
약간 수정된 채로 같은 신문에 다시 실렸다.
42) 만수성절은 고종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로,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경축되었다.
종교학 연구 126
(2)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반면에 크리스마스와 함께 개신교 교회력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절기 의
례인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은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중요한 절기의례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엘리트 전통의 차원에서 부활절은 크리스마스 못지 않은 중
요한 행사로 강조되었지만, 유럽에서 부활절이 정착할 때 일어난 과정, 즉
봄의 축제라는 대중 전통과의 혼합과 같은 일이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
던 것이다.
더욱이 추수감사절은 선교 과정에서 엘리트 전통에 의해서 부과되었다는
특성이 두드러진 절기 의례이며, 이 점에서 대중 전통에 의해 수용이 주도
된 크리스마스와는 대조를 이룬다. 추수감사절은 선교 개시 직후부터 수행
된 의례가 아니며 한국의 교단 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된 시점에서 실행되
기 시작한 절기 의례이다.43) 각 교단마다 달리 지켜지던 추수감사절은
1914년 장로교 총회에서 추수감사절 날짜는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확정된
다.44) 그런데 이 날짜의 결정은 선교사들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었
다. 1902년 첫 추수감사예배가 행해질 때만 해도 시행 날짜는 미국의 추수
감사절 날짜에 비해 한 달 이상 앞당겨진 10월 5일이었다. 이것은 초기의
추수감사가 한국의 추수시기에 맞추어 추석과 비슷한 시기에 행해졌음을
암시한다.45) 이에 반해 1914년의 결정은 전통적인 삶의 리듬보다는 선교사
들의 입장을 강변한 것이었다. 날짜가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해진 것은
그 날이 ‘선교사 최초 도선일(渡鮮日)’이기 때문이었다. 추수감사절은 한국
에 외국인 선교사가 최초로 도착한 날을 기리는 날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시행이 전적으로 엘리트 전통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추수감사절을 “외지(外地) 전도(傳導)를 위해서 예배하고 강도(講道),
기도, 연보(捐補)하는 날”46)로 규정한 것 역시 선교사가 중심이 된 엘리트
전통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은 엘리트 전통의 강한 신학
적 관심을 내포하고 있는 실천이었기 때문에 혼합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전통적 절기 의례 중에 추석이라는 매우 유사한 의례가 있었음에도, 교계는
“하나님 은혜로 얻은 추수 감사를 집안 귀신에게 굿하여 주는 것은 하나님
43) 1902년에 들어서야 이천의 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예배를 올렸다는 기록
이 등장한다(“곡식 거둔 감사례?”, 신학월보 2-11, 1902/11).
44) “感謝日은 陽曆十一月第三主日後三日(水曜日)노 定하니 此는 宣敎師가 朝鮮에
始渡하던 日이다”(곽안련 엮음, 長老敎會史典彙集, 北長老敎宣敎會, 1936, p.12).
45) 이정훈, 한국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절기 예배 이야기 , 대한기독교서회, 2000, p.53.
46) 곽안련 엮음, 長老敎會史典彙集, p.12.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7
의 물건을 악신에게 드리는 것”47)이라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추수감사
절의 실천에는 전래의 행위와의 혼합을 통한 정착이 아니라 배제를 통한
이식의 의도를 강하게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몸에 익은 절기와의 단
절로 인해 추수감사절은 개신교 대중 전통에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크리
스마스는 양력의 보급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동지를 흡수 대체할 이유를 갖
고 있었던 반면에, 추수감사절의 경우에는 추석 대신에 준수되어야 할 이유
가 없었다. 결국 대중 전통에 의해 추석은 확고한 명절로 계승된 반면에
추수감사절은 교회에서 근근히 지켜졌을 뿐이다.
Ⅴ. 맺음말
우리는 혼합현상을 기술하는 용어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이 현상의 매우
특수한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 현상에 대한 용어 자체가 종교현
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서구 신학계에서 혼합현상을
지칭해 왔던 용어 ‘신크레티즘’은 종교현상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엘리트 전통이 대중 전통을 규제하는 종교현상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 점은
한국의 경우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크레티즘은 한국 신학계에서 ‘혼
합주의’로 번역되어 사용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담론으로 정착
하여 기독교와 다른 전통간의 접촉과 변화를 부정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되
었다. 담론으로서의 혼합주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을 차단해 왔으며, 이는
학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베어드의 구분에 따르
면 신학 현상으로 혼합에 해당하는 것으로, 혼합을 의도적인 이념적 결합이
라는 제한된 관점에서 제시하였고, 그 결합을 상충되는 요소들이 정합성 없
이 공존하는 부정적인 상태로 평가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신크레티즘의 한
국에서의 번역에 ‘-주의(主義)’라는 접미사가 붙어있음은 한국에서 혼합현상
이 신학 현상으로서 인식되어왔음을 잘 보여준다.
이론적으로 생산성 있는 용어로 혼합현상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역사 현상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일반화시키기보다는 종교현상의 한 측면을
지칭하는 술어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반 데르
레에우가 혼합현상을 종교의 역동성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그 역동성이 선
47) “츄슈?깃븜”, 신학월보 1-1, 1900/12.
종교학 연구 128
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언급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혼합
현상은 한 종교의 선교에 따른 문화접변을 서술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은 자리물림, 즉 어떠한 요소가 형태는 변하지 않으면서
현상의 의미가 변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옛 요소가 잔존하여 새로
운 맥락에서 변화된 의미를 갖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한국 개신교 의례
의 정착 과정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 옛 요소의 잔존이 어떠한 의미작용을
일으키는가이다. 한국 개신교 의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전의 의례 실천
에 의해 한국인의 몸에 배어있던 몸짓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익숙해져 있던
몸짓의 잔존은 개신교 의례를 한국적 방식으로 창출한다. 개신교식 결혼식
과 장례식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전통적인 절차들, 제사 금지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기일(忌日)이 되면 행해져야 했던 몸짓들, 그리고 백일, 환갑 등 이
전부터 경축해왔던 삶의 대목들은, 이교의 습속을 폐지하겠다고 결심했던
개신교인들에게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잔존해 있던 몸짓들은 이전의 의미
그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여기서 바로 자리물림이 일어난다. 개신교인
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행위자에게서 이전의 행위들은 새로운 신념체계
를 실천하는데 사용된다. 전통적인 등불 장식은 세상의 빛인 구세주의 탄일
을 기념하는데 사용되고, 새벽의 비손은 절대자를 향한 갈망을 표상한다.
기독교 신념 체계라는 새로운 맥락 안에서 이전의 몸짓들이 반복되고, 잔존
해 있던 이 행위들이 한국 개신교 의례를 독특한 것으로 만든다. 이 과정
에 의해 한국 개신교는 독자적인 실천 체계를 갖게 된다.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 과정에서 나타난 혼합현상은 대중 전통의 실천
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우리는 이론적 고찰을 통해 혼합현상을 의미제작자
로서의 인간이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혼합주의 담론에서는 혼합현상을 일종의 타락, 난맥상으로 여긴다.
한국의 경우에도 순수한 기독교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전통과의 혼합
을 통해 기독교를 오염시키는 행위에 대해서 비판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전
통의 고정성, 순수성은 엘리트 전통의 교의적 주장에 해당되는 내용이지 혼
합현상을 판단하는 전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혼합주의 담론에서 벗어난 위
치에서 혼합현상을 기술하는 작업은 현상을 엘리트 전통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 전통과 대중 전통의 긴장 관계의 맥락에서 보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국 개신교 의례의 혼합은 대중 전통에서 일어난 창조적 결
합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반면에 엘리트 전통의 신학적 관심은 이를 규제하
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의례의 혼합의 양상은 엘리트 전통의 신학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9
적 규제의 강도에 반비례하여 나타났다. 신학적 관심이 강하게 투영되었던
정기 의례와 성례전에서는 선교사들이 전수해 준대로 미국 청교도들의 의
례 절차가 그대로 한국인들에 의해 준수되었다. 반면에 엘리트 전통의 신학
적 관심이 소극적이었던 절기 의례, 그리고 관심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던
평생 의례의 영역에서는 전통적 요소들과의 혼합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한국 개신교 의례의 상황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대부분 그것을 혼란의
상황으로 묘사한다. 개신교 실천과 전통적 실천이 공존하는 상황은 흔히 개
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개신교 의례가 담고 있는 신념 체계와 이전부터 행
해오던 몸짓이 담고 있는 신념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난맥상
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개신교 의례가 아직 통합적인 우주론을 구성
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 연구의 평가에는 새로운
의례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신학적 목소리가 깃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 이루어진 작업은 어떠한 신학적 당위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종
교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혼합현상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가 새로운 문화권에 전래될 때 나타나는 역동적인 현상
이며, 그 종교가 문화권에 정착될 때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다. 한국
개신교 전통을 이해하는 일은 개신교의 혼합현상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
다. 그것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신학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혼합 자체에서 전통을 형성하는 역동성을 인식하고 그 방향성을 가늠하는
것이 종교현상의 이해에 근접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종교학 연구 130
Theorizing Syncretism
― Focusing on the Formation of Korean Protestant Praxis System ―
Bang, Won-il
There has been plenty of disputes on whether the term ‘syncretism’ can
be applied to Korean Protestantism. In the western tradition, syncretism
received negative implications during the theological controversies and this
has come to influence the use of the terminology used in the academic
studies of religions. Also, in Korea syncretism has come to take on
negative connotations. Especially since 1960s this meaning became firmly
fixed. When discussing the interaction between traditional religions and
Christianity, syncretism functioned as a diluting argument that inhibited a
clear understanding of the phenomenon. In academia the term syncretism
has been used with such a scope that it covered all religious phenomena.
It was also mainly used to describe certain religious traditions
pejoratively.
In order for the term syncretism to be academically useful, we need
to delimit its application to certain events such as during missionary
activity or during contact between religions. This conclusion has been
the outcome of debates in religious studies and in anthropological studies
of religion. In this thesis, syncretism is proposed as a category for
describing and understanding acculturation. Within this theoretical
bearing, two arguments are posed: 1) The main aspect of syncretism is
the process of ‘transpositioning.’ That is, syncretism refers to a
phenomenon where elements of pre-existing religions are reconstructed
with a different meaning within the newly introduced religion. 2)
Syncretism takes place through a creative combination or a bricolage of
popular religious forms.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31
These theoretical arguments can be applied to the Protestant case in
Korea in two ways. Firstly, the phenomena of syncretism in Korean
Christianity has been considered in the eyes of the Christian theologians
as a degradation and corruption from a true form. Also, the term
‘syncretism’ has become part of the discourse of regulating the processes
of transformation within the Church. Secondly, it has been found that
consideration of syncretism as a missionary phenomena has been an
extant notion in the Korean academic tradition. Thirdly, syncretism in
the area of Korean Protestant rituals has taken place through
transposition. Forthly, there was tension in the syncretism process
between the popular tradition and the elite tradition in Korean
Protestantism. Thus, when the theological concern of elite tradition
weaken, room for syncretism was created.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Attila K. Moln ?ar*
1)
The word “religion” is not a modern invention, we inherited it from
the Romans. Yet, it was not commonly used until the age of the
Reformation, when it emerged as a by-product of the religious conflicts.
During this formative age of Europe many of our basic notions, like
“politics,” were constructed. The aim of this paper is not to define
religion or to analyse its several meanings and definitions, but to focus
on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in the early modern
Europe. It seems that the word “religion” adopted the meanings of
conscientia and universitas fidelium at this time. one of the basic ideas
in the Christian thought was that sinful human needed restrains, controls
from within as well as from without, which is referred to as forum
internum or conscientia, and forum externum or worldly judges,
respectively. When during the 16th-17th centuries conscientia received a
highly individualized and emotional meaning from Luther and Milton, it
was a useful concept for the reform minded people. It came to mean a
control from within and at the same time shared, common among the
people. However, the community who supported a gradual change in
political thinking and political theology requested another word instead of
conscientia. It is here, from the notions of conscientia and universitas
fidelium, that relgion adopted its own ideas of shared, common control
from within and independent from the worldly power of any leader.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was partly a side effect of
the Reformation and religious wars, and more specifically, this notion
* Eötvös University, Budapest
종교학 연구 134
was taken from republican principles. The notion of religion was created
by lay politicians and by political theologians from the viewpoint of
politics and political society.
*
The basic tenet of medieval! Christian thought was obedience. Because
of the fall of man and original sin, Christian thought emphasized virtue
and the need of obedience of human will and mind. According to
Augustinian thought, one of the results of original sin was worldly
power. The effects of original sin―self-love, ambition, quarrels, the
libido dominandi, and so on―could be restrained by baptism (regeneratio
or renovatio). Through baptism people could also become members of
corpus Christi, that is, the Church. The members of the Church are
fidelis, subjects who are under the law that govern and rule over them,
a law handed down and not created by fallible human1). The Church,
just like a political society was seen as a congregatio fidelium or
universitas fidelium, of which members are connected to each others by
common fides and obedience to common law. Here, obedience originated
from fides.
It was also a widespread view that people needed control in the foro
conscientiae as well in the foro externo, that is, control from within by
conscientia as well as control from without by magistrates. Neither of
them could exist without the help of the other. The stronger the
conscientia in a person the closer that person is to the ideal of a citizen
of Chvitas Dei, while the weaker the conscientia, the closer that person
is to the citizen of civitas terrena. The most terrible is, of course, the
faithless atheist who can be governed only by their will, in which case
libido dominandi is stronger than the conscientia.
In spite of the wars and conflicts between the Pope and secular
powers, the idea of universitas fidelium was common in worldly
thinking. Subjects were loyal to their rulers and to their oaths, because
1) I Corinthian. 15, 10.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35
they allegedly worried about other-worldly punishment. However, when
the hope of rewards and the fear of divine punishment are removed, no
human society can endure. Thus, those who did not believe in the other
world and the associated punishment were seen as potential rebels,
oath-breakers. Therefore, Christian thought connected the idea of being
good subjects to Christian faith.
After the publication of Machiavelli's “The Prince” in 1513, in which
religion or Christian faith were not used in the description of a political
society, Luther published his 95 points in 1517. In the following two
centuries the matter of divinity became again the most import!ant element
in public as well as in private life. After the victory of the secular
government in the Investitura wars, not the Papal, but the highly
individualist interpretation of conscientia, created a new rival for secular
governments. Sacerdotium came back against imperium, however
sacerdotium had taken a new form which, in the remote period between
11th-13th century, was institutionalized and legalized. Later after the
Reformation sacerdotium was seated in the individual's conscientia.
The old wars between the Holy Roman Empire and the Holy Seat
was about the question of ultimate judgement. Rome vindicated the right
to be the ultimate judge in any matter, even over the emperor, yet the
new problem for rulers in the 16th century was the popular movements
that claimed conscientia as the ultimate judge. However, the Holy Seat
considered itself to be the ultimate judge above secular power, because
of its direct relation to God's will. At the same time, conscientia was
thought to be the ultimate judge, even above the rule of secular power
because of its direct relation to God. However, the Reformation spread
the view that the ultimate judge could only be conscientia, because it
was not from human but from God.2) Already in the patristic thoughts
of St. Augustine and St. Jerome, conscientia became the highest position
of authority in questions of morality.
2) “Conscientia was a little God sitting in the middle of men's hearts.” (Perdins)
“It immediately subject to God, and his will, and therefore it cannot submit it
selfe unto any creature without idolatry.” (Ames)
종교학 연구 136
The idea of conscientia originated from the Hellenistic popular
language, from the term “syneidesis.”3) Syneidesis was the feeling of
shame and fear produced by the knowledge that one's personal action in
the past was wrong. It meant both the capacity to experience this
reaction as well as to possess the knowledge that could bring about this
reaction. St. Paul connected syneidesis to God, and saw it as a
counterpart to Christian faith. Conscientia. however, was considered by
St. Jerome as an inner secret of individuals and as part of the Christian
faith, but still conscientia meant knowledge “shared with others.” “Con”
or “Syn” means “with” and the original meaning of conscientia was the
shared aspect of knowledge.
Conscientia in the Roman Stoic philosophy, namely of Seneca and
Cicero, was connected to people's natural awareness of the natural moral
law, so for Seneca and Cicero, conscientia was connected with “logos.”
In the cases of Philip de Chancellor, Aquinas, and St. Bonaventura,
healthy conscientia was a good emotion produced by reason. on the
other hand, unhealthy conscientia was a bad emotion and it ruled over
reason. Good conscientia produced certainty, clear and undisturbed
felicity, and joy while bad conscientia caused terror, confusion, sadness,
fear, and desperation. Whatever role and significance were given to
reason in the idea of conscientia, it worked by mans of feelings and
emotions.
Aquinas' ideas were different from previous theologians. He gave a
new and import!ant meaning to conscientia, which was knowledge applied
to an individual case. For him conscientia meant discoursive,
argumentative reasoning, and the application of knowledge and since
Aquinas, Conscientia played the role of judge and witness, or reasoning
and memory. Aquinas further believed that Conscientia came from
nature, therefore everyone, by nature, had conscientia (synteresis -
reason). It cannot be lost, not even by the damned.
Luther's notion of conscientia was connected to William Ockham's
3) This idea, however, cannot be found in the Old Testament.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37
nominalism. In Ockham's view, reason and will were identical, but
unlike Luther he rejected natural law and synteresis. In Luther's works
after 1516, conscientia became only an emotional concept and synteresi
s ―reason and syllogism―disappeared from his works all together.4)
Conscientia was not the application of Law anymore, but rather a direct
result of the Gospel, or the Holy Spirit. Luther equates Conscientia with
faith, while syntereisis, shared reason, was criticised as quasi-Pelagian.
For Luther, without grace there was not conscientia but only Love.
According to Luther, shared knowledge and reason was not seen as a
natural part of the human mind. The desire for good was not seen as
natural. In other words, goodness was not a natural inclination of human
but a gift. Human nature after the “fall of man” was seen by Luther as
corrupt as argued in his “Tower Experience,” published in 1516. After
the problem of application of God's Law to the people has disappeared,
the chance and the problem of erring conscientia disappeared as well.
For Luther, conscientia was always good, infallible and homogeneous
among faithful Christians, and it was mainly an emotional experience
given as a gift by God. Moreover, Luther, in this view of conscientia,
turned against Scholastic rationalism but towards mysticism. He saw this
rare, mystic conscientia as being basically emotional based on love and
as the basis of Christian freedom. Basically, a true Christian does not
need laws, government, nor anything that is of human invention, because
a Christian was directed by God. Failing to follow the dictates of one's
conscientia was seen as a sin. Thus, a Christian should not act against
his conscientia. This is the origin of “negative freedom” in human made
laws.
Conscientia characteristically could not be forced onto the people by
the secular powers. So “force” as well as the “debate” were useless.
This radical, Lutheran interpretation of conscientia was against not only
institutional religiousity, but even against rational argumentation and
reasoning. Luther's notion of conscientia had nothing to do with reason,
4) This is evident in Luther's “Lectures on Letter to Romans,” and in the
“Lectures on Letter to Galatians.”
종교학 연구 138
nor inter-subjectivity. Conscientia's direct relation with God was the
origin of the sense of individual dignity and the confidence in other
people. Luther says, “I cannot so otherwise, here I stand, may God help
me. Amen.” Luther's faith was a faith of conscientia and through his
reformation the meaning of conscientia was individualized losing its
inter-subjective character.
*
In the period between 16th-17th century the word “religion” took
partly the previous role of conscientia in social-political thought and it
was only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that theologians adopted the
word “religion” for their use. The change of fides and conscientia into
the pagan idea of religion originated before the conflicts of Reformation,
but the spread and formation of this idea can be seem as an intellectual
effect of the Reformation.
The Renaissance of Cicero and stoic took the word of “religion” into
the premodern political thinking. In the “De Natura Deorum,” Cicero
refers to salvation; he writes “with piety, reverence and religion must
likewise disappear. And when these are gone, life soon becomes a welter
of disorder and confusion, and in all probability the disappearance of
piety towards the gods will entail the disappearance of loyalty and social
union among men as well, and of justice itself, the question of all
virtues.”5) It seems to be significant that the word “religion” was used
initially in the republican political thinking, and emerged alongside the
idea of “politics.” It is also interesting to note that this adaptation
started with a highly sceptical author, Cicero, whose arguments against
dogmas and certainty spread widely in the 16th century. Thus the idea
of religion was linked from its early period on to the sceptic's view on
the possibility of certainty about truth. In the Ciceronian context divinity
and piety was not import!ant because of salvation, but because of its
peaceful consequences to the Roman respublica. In a fragments of “De
5) Cicero. De Natura Deorum, tans. H. Rackham,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p.7.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39
natura Deorum” we can find a decisive meaning of religion. Cicero was
aware that the objects of perople's worship were false. For after saying a
number of things tending to subvert religion, he adds nevertheless that
these matters ought not to be discussed in public, lest such discussion
destroy the established religion of the nation.
I have referred previously to Machiavelli, because he had a role in
the creation of the notion of politics as well as the notion of religion.
As I have mentioned, in his work “The Prince,” religion did not have
any role in any meaning, but his later work, “Discourses on Livy”
introduced the idea of republicanism with the notion of religion into
European thought. Machiavelli wrote here three chapters on Roman
religion, Chapters XI-XIII in Book I. A Ciceronian meaning of religion
was used wholly from the point of view of political society: “religion as
a thing altogether necessary if he wished to maintain a civilitá or
civilization.”6) He further says, “religion... was among the first causes of
the happiness of that city, Rome. for it caused good order, and good
order makes good fortune, and from good fortune arises happy success
of enterprises. And the observance of the divine cult is the cause of the
greatness of republics, so the disdain for it is the cause of their ruin.
For where the fear of God fails, it must be either that the kingdom
comes to ruin, of that it is sustained by the fear of a prince, which
supplies the defects of religion.”7) It is worth noting that Machiavelli
connected 'religion' to the civitas and civility, that is a political
community following Ciceronian thinking. Simply said, the elimination of
religious feelings results in anarchy and disorder. Instead of fides,
Machiavelli used the word “religion” that was apart from any relevance
to truth and salvation. This is evident when he named religion as the
people's source of obedience where he writes, “In the province of
Germany this goodness and this religion are still seen to be great in
those people, which makes many republics there free, and they observe
6) Machiavelli, Nicolo. Discourse on Liv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34.
Probably, the ‘civility’ could be a better translation here than ‘civilization’.
7) Ibid., p.35. emphasis added.
종교학 연구 140
their laws.”8)
In the Christian republican thought, two phenomena were connected:
freedom with morality, and despotism with immorality. Augustine spread
the idea in Christian thought that, as a result of original sin, the lack of
true faith and morality are necessarily connected to arbitrary power or
coercion.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resent paper, this image of
civitas terrena or “city of man” is highly import!ant. In civitas terrena,
original sin results in vain, willful, and self-interested people, who are
necessarily in conflict with each other and only absolute force may
implement some relative peace. Since there is no morality among the
people in the civitas terrena, the ruling power is necessarily absolute
and cannot be morally legitimated. It is meaningless to think of morally
conditioned power when the people are an immoral mob. Furthermore, in
this social setting the controlling agency cannot depend on the approval
of individuals. The citizens of civitas terrena can approve only sinful
things, thus a form of rule cannot and should not result from their own
will. In order that corrupted individuals can coexist, only a despotic
power can control and oppress their licentiousness. The solution to this
situation is true faith and the love of God, which can create real peace
among the people. In such case, if people are obedient to God there
would not be any need for a human ruler. The more people that can
live peacefully without an outer controlling agency, the less they need a
despotic ruler. What Augustinus connected to true faith and the love of
God, civitas Dei, was freedom from libido dominandi of a ruler and
hence he connected religion with the republican tradition.9)
8) Ibid., p.110.
“Italy... this province has lost all devotions and all religion, which brings
with it infinite inconveniences and infinite disorders, for as where there is
religion one presupposes every good, so where it is missing one presupposes the
contrary.” (Machiavelli, p.38)
“Roman histories shows how much religion served to command armies, to
animate plebs, to deep menschliche good, to bring shame to the wicked.”
(Machiavelli, p.34)
9) The above quoted sentences can be rather familiar for anyone who at least read
Tocqueville's “Democracy in America”, a characteristically republican book.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1
From the early use, the notion of “religion” had a sceptical meaning,
this notion significantly was indifferent to doctrinal differentiations or
arguments about truth. Thus, Machiavelli writes, “a prince of a republic
of a kingdom should maintain the foundation of the religion they hold...
All things that arise in favor of religion they should favor and magnify,
even though they judge them false.”10) This sceptical republican notion
of religion was against church hierarchy and the experts of divinity.
Machiavelli even goes as far as to argue that the church of Rome is
opposed to religion. He says, “those people who are closest to the
Roman church, the head of our religion, have less religion.”11)
The dogmatic conflicts and wars of the 16th-17th century spread
doubt against the church dogmas because of the social-political
consequences of them. The need of peaceful co-existence of people
attached to different faiths emerged. Therefore the image of universitas
Democracy can exist in America, because, other than the self-governing
townships, there is a common religion which limits individuals from within.
Religion supports democracy by means of restraining the mind. “Thus, while the
law permits the Americans to do what they please, religion prevents them from
conceiving, and forbids them to commit, what is rash or unjust.” (Tocqueville,
vol. I. p.305) Liberty especially needs religion, because in despotism there is
political control, but in liberty it is replaced by religious morality. “Religion is
much more necessary in the republic, which they set forth in glowing colors,
than in the monarchy which they attack. It is more needed in democratic
republic than in any others. How is it possible that society should escape
destruction if the moral tie is not strengthened in proportion as the political tie
is relaxed?” (Tocqueville, vol. I. p.307) As in Biblical thought, a person has to
be obedient to God or to another person. Liberty and order can exist side by
side, if religious morality governs individuals. “But what now remains of those
barriers which formerly arrested tyranny? Since religion has lost its empire over
the souls of men, the most prominent boundary that divided good from evil is
overthrown and everything seems doubtful and indeterminate in the moral
worlds; kings and nations are guided by chance, and none can say where are
the natural limits of despotism and bonds of licence (lie).” (Tocqueville, vol. I.
p.327); “I doubt whether man can ever support at the same time complete
religious independence and entire political freedom. And I am inclined to think
that if faith be wanting in him, he must be subject; and if he be free, he must
believe.” (Tocqueville, vol. II. p.22. emphasis added).
10) Machiavelli, p.37.
11) Machiavelli, p.37.
종교학 연구 142
fidelium based on conscientia and dogmatic tenets was slowly worn out,
and religion took the role of conscientia. Religion was seen as a
necessary control from within. As conscientia was being individualized
during the Reformation, religion took its original meaning―a shared,
inter-subjective knowledge of benevolent action in everyday life. The
meaning of religion from its early days in the 16th century meant
control, and it referred first of all not to dogmas, but to shared common
moral rules. Of course, this change caused a new problem later in the
18th-19th century; if dogmatic faith was not the origin of good moral
action, what on earth can be the origin of these shared common rules
controlling human actions from within?
The meaning of religion was indifferent to truth, because it did not
refer to salvation. It was without a defined content; it was simply a
form of opinion, of thinking. Religion meant immanent moral rules with
this worldly consequences, and it bracketed the future afterlife. Religion
was seen as useful from the point of view of peace in a political
society. This republican and highly sceptic meaning can be found, beside
Montaigne's essays, in Bodin's writings who was the godfather of the
modern notion of the state. Indeed, Bodin's “Colloquium” was not
published until the 19th century, but his other work, the “Six Books of
the Commonwealth” was widely read. This book not only spread the
idea of republicanism, but it had a decisive role in the creation of our
ideas about sovereignty, state, and politics. In Bodin's books, we can
find the same republican and highly sceptic use of religion more in the
“Six Books” than in “Colloquium.” “Even atheists agree that nothing so
tends to the preservation of commonwealth as religion, since it is the
force that at once secures the authority of kings and governors, the
execution of the laws, the obedience of subjects, reverence for the
magistrates, fear of ill-doing, and knits each and all in the bonds of
friendship. Great care must be taken that so sacred a thing should not
be brought into doubt or contempt by dispute, for such entails the ruin
of common wealth.”12)
In the “Colloquium heptaploromes,” that is, “Discourse on the Seven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3
Secrets of the Sublime,” Bodin's main interest was how the harmony of
state could be preserved in spite of the variety of different opinions
about humanity and the divided affairs. “Nothing is more destructive in
a state than for citizens to be split into two factions, whether the
conflict is about law, honor, or religion.”13) In the France that he had
lived, almost everyone was at odds with everyone else, all were angry
at all others. one of this basic axiom was that not a more dangerous
pest could arise than civil discord. “A change in religion has more
dangerous consequences, namely upheaval in public affairs, destructive
wars, even more calamitous than plagues and torments of demons.”14)
Toleration, a sceptic's attitude towards religions keeps religion in people's
mind, but the peace in a political community does not need doctrinal
unity, that is, it does not need a substantive universitas fidelium.15)
Bodin's conclusion was that ambiguity in matters of faith cannot be
removed, and because such matters cannot be decided by reasoning or
arguing, it is laudable to abstain from discussions of divine matters.
From these two premises he concluded the outcome of tolerance, the
indifference of the state in the affairs of divinity. He writes, “Since the
leaders of religions and the priests... have had so many conflicts among
themselves that one could decide which is true among all the religion, is
it not better to admit publicly all religions of all peoples in the state, as
in the kingdom of the Turks and Persians, rather than to exclude one,
for if we seek the reason why the Greeks, Latins, and barbarians
12) Bodin, Jean. Six Books of the Commonwealth, Basil Blackwell, p.141.
13) Bodin, Jean. Colloquium on the Seven Secrets of the Sublime, Princeton University
Pres, p.151.
14) Ibid., p.165.
15) “But if the prince who is assurance of the true religion wishes to convert his
subject, split by sects and factions, he should not, in may opinion, attempt to
coerce them. The more one tries to constrain men's wills, the more obstinate
they become... those who are prevented from the exercise of their own religion,
and not in sympathy with any other end by becoming atheists, as we know.
Once they have lost the fear of God, they trample under foot the law and the
magistrate, and give themselves over to every sort of impiety and wickedness,
beyond the power of any human law to remedy.” (Bodin, Six Books, p.142).
종교학 연구 144
formerly had no controversy about religion, we will find no other cause.
I think, then a concord and harmony of all in all religions (will come
about).”16) We read practically the same sentences in the “Six Books”
where it refers to the political wisdom of pagan antique states as well
as the practice of the Turks.17) Because we cannot decide which religion
is true, “it is safer to admit all religions than to choose one from
many.”18) It is clear that, as the sceptics have thought, religion meant a
form without any reference to rank or grade. As Bodin remarks, “I am
not concerned here with what form of religion is the best.”19)
The point of view from worldly political peace and the view of it's
experts, the politiques, have come out as the winners above the
questions of truth and otherworldly salvation and their experts, the
clerics.20) “I believe all are convinced that it is much better to have a
false religion than no religion. Thus there is not superstition so great
that it (religion) cannot keep wicked men in their duty through the fear
of divine power and somehow preserve the law of nature.... Epicurus
committed an unpardonable sin because in trying to uproot the fear of
divinity he seems to have opened freely all the approaches to sin. Of all
the categories of public consideration nothing is more destructive than
anarchy in which no one rules, no one obeys, no rewards are granted to
good men, no punishment is given for wicked life.”21) “However great
superstition may be, it is more tolerable than atheism for the one who
is bound by some superstition if (he is) kept by his awe of the divine
16) Bodin, Coliquium, p.152.
17) “The Kings of Turks... safeguard the rites of religion as well as any prince in
this world. Yet, they constrain no one, but on the contrary permit everyone to
live accordingly as his conscience dictates.” (Bodin, Six Books, p.142).
18) Ibid., p.154.
19) Bodin, Six Books, p.141.
20) “When, therefore, he realized that Jews, pagans, and Christians were divided on
religious principles, he choose to embrace all the religions of all groups rather
than, by repudiating one, to arouse any one to contempt of divinity. With this
reasoning he joined not only individual men but all men in the state to the
great harmony of piety and love.” (Bodin, Colloquium p.159.)
21) Bodin, Colloquium, p.162. emphasis added.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5
in a certain way within the bounds of duty and of the law of nature.”22)
Beside its effect on people's disposition to obedience, religion took
another meaning of faith and conscientia. Namely, religion was thought,
just like conscientia in Luther's case, as something out of the scope of
political human will. Bodin writes, “we are unable to command religion
because no one can be forced to believe against his will.”23)
While Bodin focused on harmony, peace and integrity in the society,
Machiavelli's concerns were freedom and success. Machiavelli faced in
the renaissance masterless people, so he argued for internal controls, that
of virtue and religion where religion was as import!ant as virtue. Bodin,
on the other hand, lived in a time of religious civil war, and having
seen masterless enthusiasts, he, like Montaigne, claimed religion as a
common shared moral rule that was indifferent to dogmatic tenets.
The notion of religion was blind to differences, but it strictly refused
any atheism because of potentially harmful consequences. Religion meant
something common among the differing sects and faiths, and it excluded
any dogmatic debates among them due to its disruptive effects. That is
why “religion was indifferent with respect to truth and salvation. It is
import!ant for us to know that religion was created by worldly rulers,
politicians whose main interests were a peaceful society, control from
within and without, obedience, but not eternal truth nor salvation.
Religion referred to the inner-worldly consequences of fides, whatever its
content might be. So, these authors did not think import!ant to
understand fides or to demonstrate dogmas.
*
It was an import!ant part in the emergence of the notions of religion
when theologians, the experts of churches started to speak about religion
instead of “Christian faith” or “true faith.” With this change they
emphasized worldly political function instead of salvation and truth. Of
course, it seems to be impossible to give the exact time of this change,
22) Ibid., p.139. Emphasized sentence can also be read in “Six Books.” p.142.
23) Ibid., p.471. Also in “Six Books.” p.142.
종교학 연구 146
but a significant change occurred in the discourse about divinity when
Edward Stillingfleet, the Bishop of Worcester, retitled his book.
Originally published in 1662 as “A Rational Account of the Grounds of
the Christian Faith,” he later revised it with a new title, “A Rational
Account of the Grounds of Natural and Revel'd Religion.”
The central meaning of religion was common inter-subjective moral
rules defining duties indifferent to personal feelings. Not the reformers,
but their opponents, the defenders of establishment, like Cicero, used the
notion of “religion.” During the reformation conscientia received a rather
individualized meaning, and many people referred to his conscientia in
order to find an unquestionable ground on which to judge for
themselves. The experience of the high ages was schism which “arise
from errors of conscience as well as carnal and corrupt reasons.”24) As
Machiavelli argued for religion and virtue for the masterless disobedient
people of Italy, Latitudinarians invoked religion for the civil disorder and
upheaval originating from theological debates in England. Similar to the
Latitudinarian use of religion, “the Apostles did not leave all persons to
act as they judged fit, but did make rules determining their practice, and
obliging them to uniformity therein.”25)
It was because they, namely the Anglican Latitudinarians, started to
use the notion of religion with indifference to doctrinal, dogmatic
questions that they were criticized. Latitudinarians argued for
social-political peace and harmony and against the disorder of civil
society resulting from doctrinal fights about truth. This group of clerics
import!ed the word of “religion” from the political discourse into the
theological. It could be said that they were the first group of
theologians, that is, the experts of divinity who reflected on the subject
of “religion.” one of the leading figure of theological thought was John
Tillotson, and his work, “The Advantage of Religion to Societies” may
be a typical and a decisive one.26)
24) Stillingfleet, Edward. The Mischief of Separation, London, 1680, p.40.
25) Ibid., p.11.
26) At this time, the Calvinist sceptic, John Locke also used the word “religion”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7
Tillotson insisted on religion using intrinsic and political arguments.
He writes, “religion is the great friend to our temporal interest... it doth
not only tent to make every man happy considered singly and in a
private capacity, but is excellently fitted for the benefit of human
society.” “Religion and virtue are the great cause of public happiness
and prosperity” because “God recompenseth religious and virtuous
nations with temporal blessings and prosperity.” Without religion “human
society would in a short space disband, and run into confusion, the earth
would grow wild”27) This positive effect of religion in this world was
interpreted as the consequence of political peace, obedience to the law
of the state, and self-control by the religious people. Tillotson goes on
to say “religion and virtue do naturally tend to the good order and more
easy government of human society... Religion hath a good influence
upon the people, to make them obedient to government, and peaceable
one towards another” because religion “requires the extirpation of all
those passions and vices which render man unsociable and troublesome
to one another; as pride, covetousness and unjustice, hatred and revenge
and cruelty... (Religion) heals the natures of men, and (helps) to sweeten
their spirits, to correct their passions and to mortify all those lusts
which are the cause of enmity and division.”28)
*
Transferring the notion of religion from political discourse into a
theological one is paradoxical but import!ant because firstly, religion
refers to fides without involving the question of truth and salvation, the
main issues of theological debates. Secondly, religion meant a shared
common moral rules of which, the content is out of the control of
clerical experts or any institution. Religion meant control from within
with a doctrinally indifferent meaning in the “Epistola de Tolerantia” when he
argued for toleration. Yet, he was not a cleric!
27) Tillotson, John. The Words of the Most Reverend Dr. John Tillotson, vol, I.
Edinburgh, 1768, pp.70-72, 76.
28) Ibid., pp.74-75.
종교학 연구 148
which was thought necessary for a peaceful political life, obedience to
worldly judges, and loyalty to oath. Moreover, religion was independent
from doctrinal differences of clerics and from any direct control by these
experts. Understanding of religion was supposed to be possible in
this-worldly terms, apart from any special knowledge gained by training
or obtained though inspiration. The early modern idea of religion
continued the Medieval! conception of universitas fidelium, but the word
of fides lost its definite doctrinal content and its institutional and
hierarchical reference. The word “religion” stole the matters of divinity
from clerical experts and gave to the lay people whose common problem
was living a peaceful conventional life. It seems that the religion did
indeed solve this problem. “Let us walk by the same rule, let us mind
the same things.” 829)
Not only the pre-modern notion of religion evolved from the medieval!
conceptions of universitas fidelium and conscientia, but the rationalist
utopia of enlightenment in the 18th century, of which Rousseau and
Kant were the main figures, also came from this heritage, but that is
another story.
29) I. Timothy 2, 8.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9
References
Augustinus. The City of God, London, Penguine Books, 1984.
Cicero. De Natura Deorum, trans. H. Rackham,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William Heinemen, 1967.
Bodin, Jean. Colloquium on the Seven Secrets of the Sublim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Bodin, Jean. Six Books of the Commonwealth, Oxford, Basil Blackwell.
Machiavelli. Nicolo: Discourse on Livy, Chicago -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Montaigne, de Michael. The Complete Essays, London, Penguin Books,
1991.
Stillingfleet, Edward. The Mischief of Separation, London, 1680.
Tocqueville. De Alexis: Democracy in America, London, Everyman's
Library, 1994.
Tillotson, John. The Words of the Most Reverend Dr. John Tillotson,
vol, I. Edinburgh, 1768.
종교학 연구 150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Attila K. Moln ?ar
Conscientia originated from the Hellenistic idea of syneidesis, or
shared feelings of shame and fear of having done wrong. Through the
Roman stoics and Aquinas conscientia took a more legalistic and rational
nature. However, Luther interprets Conscientia to be no different from
faith and as resulting from God's grace rejecting previous notions. It
follows that even goodness was not a natural human inclination but a
gift from God. one had to follow the dictates of one's conscientia and
failing to follow it was sin. It was a radical interpretation that rejected
rationality and polemics and it became personal rather than shared.
Other than this, the Reformation spread the idea of conscientia as a
profane idea of religion and it was during the 17th century that the
word religion begins to be used by theologians. Initially, as instigated by
Cicero, religion was used as a source of social order and harmony rather
than for the attainment of salvation. The profane nature of religion was
made more poignant by Machiavelli when he joined the notion of
religion with the idea of a republican ideal. Thus, a Ciceronian notion
of religion that is stripped of its relevance to truth and salvation is
connected to civility and social order. However the envisioned society
was not based on conscientia as a dogmatic rule but based on religion
as a controlling tool from within.
This republican and highly sceptic meaning of religion can be found
in Bodin's works also. He assert the import!ance of religion to social
order when he insists that changes in religion can be more calamitous
than natural disasters. Like Luther, Bodin too saw that religion was out
of the command of the rulers and namely a form of internal control.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51
Yet, as a source of social stability, religion was seen as a social tool
without any connection to the other-worldly by secular rulers whose
main concern was political.
In following this tradition, the Latitudinarians invoked religion to
counter the social disorder caused by dogmatic conflicts. Their goal,
however, was a theological one not political. This seems ironic but the
Latitudinarian conception of religion did not involve the question of
truth and salvation but included the idea of being a shared but
internalized moral rule. It also was seen as being out of the control of
the clerics or any institution. Religion meant control from within which
was thought necessary for obedience to moral leaders, loyalty to oaths,
and a peaceful society.
Tracing its history from the Greek era to after the Reformation, it
seems the notion of religion stole the matter of divinity from the clerics
and gave it to the populace. There, religion has come to resolve the
problem of peaceful living for the ordinary person and not for the
secular rulers nor clerics. Through religion, other-worldly force came to
be mediated not through external social agents, such as the church, but
through internal personal channels.
종교학 연구 152
종교개념의 형성
Attila K. Moln ?ar
‘Conscientia’는 잘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의미
하는 희랍의 개념 ‘syneidesis’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
과 아퀴나스를 거치면서 conscientia는 좀더 법적인, 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 같은 이전의 관념을 거부하면서, conscientia를 믿
음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고 신의 은총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르자면 선(善)까지도 인간의 본래적인 성향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다. 사람
은 자신의 conscientia의 명령에 따라야하며 이를 따르지 못하면 죄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이성과 논증을 거부하는 급진적인 해석으로 이를 통해 종교는
여러 사람에게 공유되는 것이기보다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은 종교의 세속적인 개념으로서의 conscientia의 개
념을 퍼뜨렸으며, 신학자들은 17세기 무렵부터 ‘종교’라는 말을 쓰기 시작
했다. 처음에는 과거 키케로가 사용한 것과 같이 구원의 성취보다 사회적인
질서와 조화의 원천이라는 의미로 종교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종교
의 세속적인 성격은 마키아벨리가 종교의 개념을 공화정의 이상과 결합시
키면서 보다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진리, 구원과의 연관성이 제거된 키케로
식의 종교 개념은 사회적인 규범과 질서와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
고 있는 사회는 교리적 질서로서의 conscientia에 기반한 사회가 아니라 내
면적 통제 수단으로서의 종교에 기반한 사회였다.
이처럼 공화주의적이고 매우 회의적인 의미의 종교개념은 보딘의 저작에
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종교의 변화가 자연재해보다 더 불행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질서에서 종교가 갖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루
터와 같이 보딘 역시 종교는 지배자들의 명령권 밖에 있는 것으로서 내적
통제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에 주된 관심을 둔 세속
지도자들은 종교가 사회안정의 근원으로서 내세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라
보았다.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53
이러한 전통을 따라 광교파주의자(廣敎派主義者)들은 교리적 충돌로 의한
사회적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종교라는 개념에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
표는 신학적인 것이었지 정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광교파
주의자의 종교 개념은 진리, 구원에 대한 물음을 수반하지 않으며, 여러 사
람에게 공유된, 내재화된 도덕 규범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성직자들이나
어떤 단체의 통제 밖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종교는 도덕적 지도자들에
대한 복종, 서약에 대한 충성, 그리고 평화로운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
는 통제를 의미했다.
희랍시대에서부터 종교개혁 이후까지의 역사를 훑어보면, 종교의 개념이
성직자들에게서 신성의 문제를 빼앗아 이를 민중들에게 넘긴 것처럼 보인
다. 그 과정에서 종교는 세속적인 지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을 위해서가 아니
라 범인들을 위해 평화로운 삶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종교를 통해 신
적인 힘은 교회와 같은 외부의 사회적 대리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개인적 통로를 통해 전달되게끔 되었다.
종교학 연구 154
◆ 논문 심사 및 게재원칙
1. 투고 논문의 창의성과 완성도를 논문 1편당 2명의 심사위원이 종합적으
로 심사하여 게재여부를 결정한다.
2. 심사원칙은 ① 종교학적 주제와 방법의 적절성 ② 논지의 일관성 및 논
거의 타당성 ③ 논문의 참신성 ④ 국내외 연구 참조 정도 등이다.
◆ 원고작성시 준수사항
1. 논문의 투고 및 접수는 매년 1회 실시하며, 99년도부터는 매년 8월 30 일까지 논문 접수를 받는다.
2. 원고분량: (1) 논문: 200자 원고지 100매 내외
(2) 서평: 200자 원고지 30매 내외
(3) 논문평: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3. 투고요령: (1) 워드프로세서(한글97이상)로 작성
(2) 디스켓과 함께 출력 원고 1부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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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투고자의 소속, 주소, 전화번호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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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고모양: (1) 한글 전용. 부득이한 경우 괄호 안에 한문 혹은 외국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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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고문헌: (1)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참고문헌을 작성하여 첨가하여야 한다.
(2) 참고문헌에는 본문에서 인용, 참조된 문헌의 수록을 원칙
으로 한다.
(3) 참고문헌의 수록 순서는 국한문 문헌 다음에 외국 문헌을
싣되, 각각 저자 이름의 가나다와 알파벳 순서로 기재한다.
6. 문헌부호: 문헌관계의 표기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 약정을 따른다.
(1) 국내 및 중국, 일본 문헌 관계 부호
전집, 단행본:
신문, 잡지:《》
개별 작품, 논문, 기사: ??
(2) 서구 문헌 관계 부호
전집, 단행본, 논문 잡지: 이탤릭체
개별작품, 논문, 기사: “ ”
(3) 기타 부호
강조 부호: ‘ ’
인용 부호: “ ”
7. 투고된 논문과 디스켓 일체를 반환하지 아니한다.
編輯委員
鄭鎭弘尹以欽
琴章泰金鍾瑞
尹元澈종 교 과
宗敎學硏究第20 輯
2001년 12월 5일 인쇄
2001년 12월 10일 발행
발행처 한국종교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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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01
▣ 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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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
박 규 태 69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 불교혁신운동의 측면을 중심으로 ―
임 부 연 87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 주희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방 원 일 107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과정을 중심으로 ―
Attila K. Molna?r 133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韓國宗敎學硏究會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Vol. XX, 2001
▣ Articles
Shin Hu-tam's(愼後聃) Theoretical Criticism of Western Learning
and its Issues ···························································· Keum, Jang-tae
Issues and Vistas in Korean Religious Education
··········································································· Kim, Chong-suh
In Search of Lost Paradise: The Myth of Eliade and Le?vi-strauss
················································································ Kim, Hyun-ja
A Study on Soka Gakkai: Renovation of the Japanese Buddhism
··············································································· Park, Kyu-tae
Cho˘ng Yag-yong’s(丁若鏞, 1762-1863) Discourse on Mind
············································································· Lim, Boo-yeon
Theorizing Syncretism: Focusing on the Formation of Korean
Protestant Praxis System ··············································· Bang, Won-il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 Attila K. Moln ?ar
Korean Association of Religious Studies
宗敎學硏究 第 二 十 輯 韓國宗敎學硏究會
第二十輯
韓國宗敎學硏究會
琴章泰*
1)
目次
Ⅰ. 攻西派의 성립과 신후담의 위치
Ⅱ. 신후담의 서학 인식과 비판 태도
Ⅲ. 천주?태극 개념의 논변
Ⅳ. 영혼론의 비판 논리
Ⅴ. 신후담 서학비판론의 특성
Ⅰ. 攻西派의 성립과 신후담의 위치
18세기 전반 星湖李瀷(1681-1763)은 천주교 교리의 신비적 신앙 내용을
비판하면서도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열린 자세로 서학에 대응한
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을 받은 문인들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
에는 적극적이면서도 서양과학에 대한 이해에는 소극적이었던 愼後聃?安鼎
福등의 攻西派와 서양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다가 천주교 교리를 신봉하
는 데로 나갔던 權哲身?權日身?李家煥?李基讓?丁若鏞등 信西派로 양분
화하였다.1) 연령층으로 본다면, 서학비판 입장을 취한 攻西派의 인물들이
성호의 초기 문인으로 老壯層이었다면, 서학신봉 입장을 취한 信西派의 인
물들은 성호의 후기 문인으로 少壯層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당시 서학에 대
한 대응의식의 변화 과정과 적응 양상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서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攻西派’라고 할 때, 당시의 도학자들은 누구
나 ‘공서파’가 될 수 있는 입장이었으므로, ‘공서파’가 성호 문하에만 있었던
* 서울대 교수, 종교학
1) 星湖학파를 서학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攻西派’와 ‘信西派’로 나누어 보는 견해
와는 달리, 도학 전통에 대한 입장에 따라 ‘左派’와 ‘右派’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종교학 연구 2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서학에 대한 비판이나 수용이 성호와 성호문인을
중심으로 주도되었던 사실을 주목한다면, 공서파나 신서파의 성립은 성호학
파에서 발단하여 성호학파 바깥으로 확산되어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전반과 후반에 서학비판이론을 체계화하여 제시한 공서파의 주요
인물로는 성호 문하에서 활동한 愼後聃(遯窩?河濱, 1702-1761)?安鼎福(順
菴, 1712-1791) 등과, 성호 문하 바깥에서 활동한 李獻慶(艮翁, 1719-179
1)?洪正河(髥齋, 생몰년 미상)?李基慶(瘠菴, 1756-181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공서파의 입장은 당시 서학 수용의 양상에 상응하여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공서파의 전개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
는 성호 문하에서 신후담?안정복에 의해 서학비판론이 제기되는 단계이고,
둘째 단계는 천주교신앙활동의 초기에 안정복?이헌경?홍정하 등에 의해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비판론이 제시되는 단계이며, 셋째 단계는 이기경에
의해 正祖시대 천주교 신앙활동이 일어나던 과정에서 사건과 배척론의 전
개과정을 사료로 정리하는 단계이다.
첫 단계는 18세기 전반과 중반 아직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이전에 성
호 문하에서 漢譯西學書를 읽고 나서 천주교 교리의 논리적 모순을 찾아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단계이다.
18세기 전반에는 李瀷의 초기 제자인 愼後聃이 서학비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23세(1724)때 西學때 을 저술하여 西學書인 靈言?勺? 天主
實義? 職方外記를 조목별로 비판함으로써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 체
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서 그는 도학의 이단비판론적 입장에 따라 천주교 신
앙을 전면적으로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아쉬워하며 이익을 탐내는 마음’(貪
生惜死之利心)으로 규정함으로써 서학을 異端의 한 유형으로 비판하는 입장
을 전제로 밝히고 있다.2)
한편 安鼎福은 18세기 중반 성호 문하에서 서학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757년
李瀷에게 올린 편지에는 천주교 교리 서적을 검토하면서 天堂地獄說이나
靈魂개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정밀하게 전개하고 있다.3)
둘째 단계는 18세기 후반 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1784) 信西派의 천주교 신앙활동이 일어나는 초기 단계이다.
2) 闢衛編, 권1, 16, ‘愼遯窩西學때: 靈言?勺’, “至於西泰, … 亦不能自掩其貪生惜死
之利心.”
3) 順菴集, 권2, 26-30, ‘上星湖先生書(戊寅) 別紙’.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3
먼저 안정복은 1784-85년 사이에 본격적인 서학비판론을 제기하였다. 그
는 이때 ?天學考?를 저술하여 서학이 중국 역사 속에 이미 수차 들어왔다
가 쇠퇴한 것임을 주장하고, ?天學問答?의 저술을 통해 서학이 老?佛?
楊?墨이나 왕양명처럼 성리학에서 배척해야 할 이단이며, 黃巾賊?白連敎
등의 流賊이나 자칭 彌勒佛과 같은 邪敎라고 규정하는 비판 이론의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보다 약간 뒤에 李獻慶도 ?天學問答?을 저술하고 있다.4) 이
헌경은 서학을 추종하는 자가 많은 까닭은 老?佛등의 異端을 따르는 것
처럼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급속히 이루는 것을 기뻐하는 경박한 심리(好
新喜捷之心)에 영합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5) 안정복과 이헌경이 모두
?천학문답?이라는 제목의 서학비판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서학
의 문제가 관심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예리한 쟁점으로 떠올라 활발한 논쟁
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아직도 ‘天學’이란 명칭을 허용하
고 있는 것은 ‘西學’을 ‘天主學’ 또는 ‘天學’으로 일컫는 천주교쪽의 명칭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후기사회에서 서학에 대한 비판과 배척이
격렬해지면서 ‘서학’이란 명칭도 거부되고 오직 ‘邪學’이라 일컬어졌던 사실
과 비교해 보면, ‘天學’이란 호칭은 비록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면서도
서로 마주하는 토론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1791년 珍山에서 천주교도 尹持忠?權尙然이 제사를 폐지하고 神主
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禁書令과 禁敎令을
내렸는데, 바로 그 직후에 서학의 교리서를 조목별로 비판하였던 인물로는
洪正河가 있다.6) 홍정하는 4종의 천주교 교리서를 직접 읽고 조목을 나누
어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신후담의 경우에 견주어지지만, 비판 태도는 비록
토론의 형식을 여전히 지니면서도 이미 전면적이고 철저한 배척 입장을 엄
격하게 견지하였다.
셋째 단계는 1780-90년대에 천주교 신앙활동이 正祖의 측근인 畿湖南人
4) 이헌경의 ?天學問答?이 저술된 시기는 안정복이 ?天學問答?이 저술되는 1785년보
다 약간 늦은 시기로 보인다. 안정복은 1789년에 보낸 ?答艮翁李參判夢瑞(獻慶)書?
( 순암집 , 권5, 36)에서 이헌경의 ?天學問答?을 빌려보고, 자신의 ?天學問答?을 빌
려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5) 闢衛編, 권1, 10, ‘李艮翁天學問答’, “聖人之學, 理旣平易而用工辛苦, 異端之學, 語
甚新奇而用工徑捷, … 老氏之無爲, 佛家之頓悟, 適中其好新喜捷之心, 故趨之者甚衆.”
6) 洪正河(髥齋)는 正祖때의 處士로 그 인물에 관해 아직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서학비판저술은 ?證疑要旨???實義證疑???萬物眞源證疑???眞道自證證疑??
?盛世芻?證疑?의 5편으로 이루어진 四編證疑로 許?이 편찬한 大東正路(권
5-6)에 수록되어 있다.
종교학 연구 4
속에서 일어나자, 洪樂安?李基慶등은 천주교 신앙활동을 배척하여 사회문
제로 확산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한 시기이다. 이기경 자신은 이 시기에 전
개되었던 천주교 신앙 활동에 따른 갈등과 논란의 과정을 闢衛編으로 정
리하였다. 이는 정조시대 천주교신앙의 확산과 비판의 쟁점을 역사적 사료
로서 가치가 있다.7)
공서파의 서학비판론은 서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유교의 비판적 입장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으며, 서학이 제기한 새로운 문
제에 대해 유학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유학의 자기인식을 드러
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18세기 공서파의
서학비판론의 문제는 이론적 비판체계를 제시한 신후담?안정복?이헌경?
홍정하의 경우를 중심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신후담은 23세때(1724) 星湖李瀷의 문하에 나와 수학하면서 西學에 접
하게 되었는데, 특히 西學의 종교적 영역인 천주교 교리문제에 예민한 관심
을 보였다. 그가 1724-25년 사이에 스승 이익과 서학에 관해 문답한 ?紀聞
篇?을 보면, 이익이 서학의 긍정적 측면을 주목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職
方外紀를 처음 보고 나서 서학이 불교를 답습한 것이요 邪學이라고 규정
하는 비판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8) 이무렵 그는 西學서적으로서 천주교의
영혼론을 제시한 靈言?勺과 유교문화권에 가장 널리 알려진 敎理書인
天主實義및 세계지리와 서양의 문물을 소개한 職方外紀의 3종을 검토
하면서 道學의 정통주의적 입장에서 西學을 邪學으로 비판하는 西學때 을
저술하였다. 西學때 은 조선후기에 성리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천주교의 교
리서를 조목별로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던 최초의 작업으로 주목
될 필요가 있다.9)
7) 이기경의 闢衛編(兩水本)은 1801년 辛酉敎獄까지의 18세기말에서 서학에 대한 비
판과정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 데 비하여, 이기경의 현손 李晩采는 이기경의 闢
衛編을 토대로 삼아 19세기중반 憲宗대까지 조선후기 서학의 전파와 비판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闢衛編을 편찬하여 1931년에 간행하였다.
8) 서종태 譯, ?李瀷과 愼後聃의 西學에 대한 토론?(1), 란山敎會史報27(부산교회사
연구소, 2000. 7.), 100쪽, “竊嘗求西泰所撰職方外紀觀之, 則其道全襲佛氏, 其爲邪學
無疑.”
9) 西學때 은 신후담이 23세때인 1724년(갑진)에 저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星
湖문하에서 서학에 관해 문답한 ?紀聞篇?이 초보적 이해수준에 머물고 있는 사실
과 비교해 보면, 西學때 은 성호의 입장과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는 자신의 입장을
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저작이 훨씬 더 뒤에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5
Ⅱ. 신후담의 서학 인식과 비판 태도
신후담은 西學때 에서 영언려작 ? 천주실의 ? 직방외기 의 순서로
서학서적을 검토하고 있는데, 영혼론을 제시한 영언려작 을 가장 먼저 다
루었다. 이런 순서에는 그의 의도가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천
주교의 ‘영혼’개념이 천주교 교리의 근본 과제요, 다른 모든 문제를 포함하
는 비판 체계에서 기본 전제가 되는 것이라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러나 영언려작 의 영혼론에 대한 신후담의 비판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해
명하기에 앞서, 천주실의 ? 직방외기 에 대한 그의 서학비판론이 제기하
는 다양한 쟁점을 통해 서학 인식의 범위와 비판론의 전반적 성격을 이해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후담의 서학 비판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두
가지로 집약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천주교를 불교와 연관시켜 인식하고
비판하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서양문물로서 세계지리와 서양의 교육제도
에 관심을 보이면서 중화의식과 유교전통에 따르는 비판적 입장을 확립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1. 불교와 연관성 속의 비판
신후담은 천주실의 에 대해 “그 귀결은 ‘천당?지옥의 설로 겁주어 유
혹하고, 사람이 죽어도 精靈은 불멸하는 것이므로 천주가 사람이 죽기를 기
다렸다가 상벌을 내린다는 것에 불과하다”10)고 규정하고, 천주교 교리가 귀
결되는 ‘천당지옥설’과 ‘精靈불멸설’은 유교에서는 없는 불교의 설이라 지적
한다. 이에 따라 그는 “(천주교가) 불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우리 유교와
같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불교의 자질구레한 설을 주워 모아서
도리어 불교를 배척하는 명목을 삼으니, 릿치 등은 우리 유교의 죄인일 뿐
아니라 불교의 역적이다”11)라고 하여, 릿치가 제시하는 천주교의 입장이 유
교와 일치를 주장하지만 유교와 다르고 불교를 배척하지만 불교와 같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靈魂불멸설’과 더불어, ‘童貞을 지킴’과 ‘세
10) 벽위편 , 권1, 32, ‘西學때: 天主實義’, “其歸趨, 則不過以天堂地獄之說恐誘之, 以爲
人死而精靈不滅, 故天主待其死而賞罰之.”
11) 같은 곳, “吾未知異於佛氏者何事也, 同於吾儒者何事也, 區區?拾乎佛氏之餘論, 反以
斥佛爲名, 瑪竇諸人, 不徒吾儒之罪人, 抑亦佛氏之反賊也.”
종교학 연구 6
속과 인연을 끊음’은 불교와 같고, 천주교에서 세상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은 불교의 ‘勸善’과 같고, 천주교의 미사첨례는 불교의 ‘頂禮’
와 같고, 천주교에서 세간의 福樂을 버리고 산골짝에 은둔하여 수도하는 것
은 불교의 ‘出家’와 같고, 천주교에서 죄를 뉘우치는 의례(拔地斯摩之禮?恭
?桑之禮)는 불교의 ‘懺罪’와 같다고 하는 등 서로 유사한 점을 일일이 열
거하고 있다. 그만큼 천주교 교리의 전반적 성격을 불교와 동일시하여 서학
비판의 기본 입장을 삼고 있는 것이다.
신후담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대개가 불교의 남은 부스러기들을 본받아
서술하였으니, 그 식견의 비루함이 불교보다 열등하다” 하고, “이러한 설명
들은 불교보다 더욱 천박하니 어찌 사람을 속일 만하겠는가. 스스로 그 허
황함을 드러낼 따름이다”12)라고 하여,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서 더욱 열등
한 것이라 규정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학문이 중국에서 이미 성행하고 있
으며, 우리나라 사람들도에도 많은 이가 기뻐하고 사모하여 이를 일컫기에
이르렀다”13)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는 천주교 교리를 포함한 서학이 당시
우리나라의 유교지식인들 사이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현실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며, 그의 비판 태도는 천주교를 불교와 동일시함으로써 불
교에 대한 도학의 闢異端論的비판론의 확고한 기반을 활용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이라 하겠다.
2. 세계지리와 서양교육제도에 대한 비판
신후담은 직방외기 에서 제시된 세계지리의 지식을 거부하고 중국 중심
의 華夷의식을 재확인한다. 곧 “중국은 천하의 중심에 자리잡고, 풍속과 기
후가 바르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성인과 현인이 잇달아 나왔고, 유교를 숭
상하며, 그 풍속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은 참으로 외국이 미칠 수 있
는 것이 아니다”14)라고 하여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극진하게 높였다. 이
에 비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바다 끝 외딴 지역이요, 오랑캐의 궁벽한
지방에 불과하여, 스스로 중화문명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제 단지 그 토
12) 벽위편 , 권1, 41-42, ‘西學때: 職方外紀’, “皆祖述乎佛氏之緖餘, 而其見之陋, 又出
於佛氏下, … 此等說, 視諸佛氏, 尤爲淺露, 曾何足以誣人, 適足自狀其荒誕而已.”
13) 벽위편 , 권1, 41, ‘西學때: 職方外紀’, “歐羅巴之學, 頗已盛行於中國, 至於我東人, 亦多有悅慕而稱道之者.”
14) 벽위편 , 권1, 40, ‘西學때: 職方外紀’, “中國處天下之中, 得빌氣之正, 自古?今, 聖
賢迭興, 名敎是尙, 其빌俗之美, 人物之盛, 固非外國之所可及.”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7
지의 크기가 대략 서로 비슷한 것으로 갑자기 감히 중국과 병렬하여 뒤섞
어 일컫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미 전혀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15)라고 하여,
서양을 변방의 오랑캐로 낮추어 중국과 병렬시키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
다. 이처럼 신후담은 스승 李瀷이 서학의 세계지리 지식을 합리적인 것으로
적극 수용하였던 태도와는 달리, 도학정통의 華夷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보
수적 입장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신후담은 직방외기 에서 소개된 서양의 학교제도에도 깊이 관심을 기울
이면서, 小學?中學?大學의 과정이나 시험제도와 인재선발제도는 유교와
비슷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가르치는 내용이 다르다는 차이를 주목하였다.
그는 유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天命인 本然의 善에 근원하고 人倫인 일용의
떳떳함에서 드러나는 것’(原於天命本然之善, 著於人倫日用之常)으로서의 ‘道’
임을 확인하고, 小學에서는 ‘德性을 기르고 根基를 북돋우기’(涵養德性, 培壅
根基)를 먼저하며, 大學에서는 小學에서 가르친 것에 근거하여 ‘窮理하여
德을 높이고, 修身하여 사업을 넓혀서, 天命의 善을 온전히 하고 人倫의 떳
떳함을 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에서 소학
과 대학이 德性과 人倫을 배양하고 실현하는 일관된 과정임을 밝혔던 것이
다. 이에 비해 서양의 小學에서 가르치는 내용(古賢名訓?各國史書?各種詩
文?文章議論)에 대해 “덕성을 기르고 근기를 북돋우는 일에 미치지 못하
니, 이것은 이미 本領이 있는 곳에 전혀 어두운 것이다”라고 하여 가르침의
핵심을 망각한 것이라 비판하고 中學에서 가르치는 내용(논리학?물리학?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기르고 북돋우는 공부가 소학에서 빠졌으니 중학에
서 변론하고 관찰한다는 것이 장차 무엇에 의거하여 근거를 삼을 것인가”
라고 하여 근거가 상실된 공부라 비판하였으며, 大學에서 가르치는 내용(醫
科?治科?敎科?道科)에 대해서는, 醫는 비천한 기술이라 治?敎?道와 병
렬될 수 없는 것이라 하고, 또 治?敎?道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갈라
놓아 세 가지 것으로 삼았으니 서로 관통할 수가 없다”고 하여 학문의 통
합적 일관성을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 따라 학문의 전문적 분화를 중시하
는 서양의 학문 방법을 비판하였다.16)
15) 같은 곳, “歐羅巴等諸國, 不過窮海之絶域, 裔夷之偏方, 不能自進於華夏, 今乃徒以其
土地之大小, 略相彷彿, 而輒敢幷列而混稱之者, 固已不倫之甚矣.”
16) 벽위편 , 권1, 43-44, ‘西學때: 職方外紀’, “(小學)未嘗略及於涵養德性, 培壅根基底
事, 此已全昧乎本領之所在矣, … 其涵養培壅之功, 闕於小學, 則及乎中學, 所以때所以
察者, 將欲何據而爲之基乎, … (大學)判然爲三件物事, 而不能相貫通也.”
종교학 연구 8
中學의 敎科??논리학(落日加)-- 辨是非之法
??물리학(費日加)-- 察性理之道
??형이상학(?達費西加)-- 察性理以上之學
大學의 敎科??의학(醫科)-- 主療病疾
(4科) ??법학(治科)-- 主習政事
??인문학(敎科)-- 主守敎法
??신학(道科)-- 主興敎化
여기서 신후담은 서학을 비판하면서 유교와의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차이가 뚜렷하게 제시될 수 있다면 이단을 비판하기
도 쉽고 해로움도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 다만 서학의 경우는 “우리 유교의
것을 몰래 훔쳐다 속임을 꾸미고, 가탁하여 거짓됨을 수식하며, 정상을 감
추고 그 실지를 숨겨서 교묘하게 우리 유교에 끌어다 부합시키니, 그 참과
거짓을 마침내 분별하기가 어려워 혹세무민의 해가 말할 수 없다”17)고 언
급하여, 유교에 대한 릿치의 적응주의적 태도가 더욱 유교사회에 기만적이
고 위험한 것임을 경계하고 있다. 그만큼 서학에 대한 신후담의 비판의식은
도학의 이단배척론에 확고하게 입각하였던 것이며, 공서파의 선구적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Ⅲ. 천주?태극 개념의 논변
신후담이 제기하고 있는 서학의 쟁점을 두 주제로 집약해 보면, 하나는
‘천주’ 개념이요 다른 하나는 ‘영혼’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천주 개념의 문
제로는 천주와 예수의 존재에 대한 논변과 太極?理개념에 대한 논변을 들
수 있고, 영혼 개념의 문제로는 귀신?혼 개념에 대한 인식과 천주교의 영
혼론 체계에 대한 정밀한 분석적 논변을 찾아볼 수 있다.
1. 천주와 예수의 존재에 대한 논변
신후담은 천주실의 의 대강은 ‘천주를 높이 받드는 일’(尊奉天主之事)을
17) 벽위편 , 권1, 45, ‘西學때: 職方外紀’, “獨其竊取而文其詐, 假托而飾其僞, 藏情匿實, 而巧與吾儒牽合者, 則其眞似之分, 卒難能때, 而惑世誣民之害, 將有所不可勝言者矣.”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9
말한 것이라 규정하고, 천주실의 에서 ‘天主’를 유교의 ‘上帝’와 일치시켜
언급하고 있는 예수회의 補儒論的적응주의 입장에 대해, “우리 유학에서
논하는 ‘上帝’의 설명에 근거함으로써, 참된 것에 의탁하여 거짓된 것을 선
전하려는 계책을 삼으니, 끝내는 스스로 감출 수 없을 것이다”18)라고 하여,
참과 거짓으로 대립시킴으로써 일치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 입장
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는 ‘천주가 천지와 만물을 만들고 주재하여 편안히 길러낸다’(天主制作
天地萬物, 而主宰安養之)는 것이 천주실의 제1편의 요령임을 확인하고,
여기서 ‘창조’와 ‘주재’라는 천주의 두 가지 역할이 제시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는 程子?朱子의 말을 이끌어 천지와 만물을 ‘주재’(主宰?安養)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창조’(制作)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천지의 이루
어짐이 천주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하니, 이것은 이치에서도 증명할 수 없고
경전에서도 확인할 수 없으니, 바로 망녕된 이론에서 나온 것이다”19)라고
하여 근거가 없는 것으로 거부하였다.
신후담은 창조(천지의 개벽)를 목수가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할 수 없는
것이라 지적하고, 天地의 존재는 “太極의 이치에 근원하고 바陽의 실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따름”(天地者, 乃原於太極之眞, 成於兩儀之實而已)이라고
하여, 성리학적 생성론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른바 上帝는 천지가 이루어
진 뒤에 그 사이에서 주재하니, 道와 器를 합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마치
사람이 생명을 부여받은 후에 바로 이 마음이 있어서 사람의 몸을 주재하
지만, 참으로 사람의 몸을 만들 수는 없는 것과 같다. 上帝가 비록 천지를
주재하지만 어찌 천지를 만들어낼 이치가 있겠는가”20)라고 하여, 인간의 마
음이 인간의 몸을 주재하지만 제작하지는 못하듯이 上帝도 천지를 주재하
지만 창조하지는 않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신후담은 이처럼 천주교의
‘창조’론과 성리학의 ‘생성’론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철저히 성리학의
‘생성’론에 근거하여 ‘창조’론을 부정하였다.
신후담은 천주가 강생하여 예수로 태어났다는 ‘天主降生說’에 대해서도
극심하게 거짓되고 이치에 어긋나는 것으로 천주교의 교리 자체와도 모순
18) 벽위편 , 권1, 33, ‘愼遯窩西學때: 天主實義’, “因吾儒論上帝之說, 以爲托眞衒僞之計, 而終有所不能自掩者.”
19) 같은 곳, “天地之成, 由於天主之制作, 則此乃於理無徵, 於經無稽, 而特出於妄度之論也.”
20) 같은 곳, “所謂上帝, 則蓋亦天地成形之後, 主宰乎其間, 合道與器而爲之名, 如人賦生
之後, 方有此心, 主宰乎人身, 而固不能制作人身, 則上帝雖主宰乎天地而豈有制作天地
之理乎.”
종교학 연구 10
되고 있음을 두 가지 점에서 지적하고 비판한다. 그 하나는 天主가 강생하
여 33년동안 민간에 살았다면 그동안 하늘에는 주재자가 없게 되어 천주
개념과도 모순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천주교에서 천주를 ‘고금의 큰
부모’(古今大父)라 하고 ‘우주의 공변된 임금’(宇宙公君)이라 하면서도 천주
가 천하를 두루 덮어주지 못하고 특정한 곳에 강생하여 특정한 나라 사람
에게 사사롭게 작은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 모순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21)
천주 개념의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만큼 신후담의 비판 태도가
합리적 일관성을 지키려는 것이요, 적대적 비판에 앞서서 이론적 대립과 모
순을 찾아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2. 太極?理개념에 대한 논변
마테오 릿치는 천주실의 에서 ‘천주’를 유교 경전의 ‘상제’나 ‘천’과 일치
시키면서, 송대 성리학의 ‘태극’이나 ‘리’의 궁극적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이
에 대해 신후담은 상제를 공경하여 제사 드리지만 태극을 공경하여 제사하
지 않는 사실을 들어, 태극이 만물이 시조가 될 수 없다는 릿치의 지적을
반박하였다. 신후담은 “태극이란 그 이치는 실재하지만 그 자리는 비어있
다. 상제가 하늘에서 주재하여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공
경하는 의례를 베풀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하여, 上帝는 주재하는 역할과
하늘에 있다는 자리를 갖추고 있지만 태극은 이치로서 자리가 없으므로 ‘이
치’(理)와 ‘자리’(位)라는 조건에서 양자의 차이가 있음을 밝힌다.
한편 신후담은 이러한 상제와 태극의 관계를 성인과 도덕의 관계로 비유
하여, “사람이 요?순?공자?맹자를 높이는 것은 그 도덕이 높고 두텁기
때문이나, 도덕을 높이 받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22)고 해명한
다. 곧 聖人에게는 실지의 자리가 있으니 제사를 드리지만 도덕에는 자리가
없으니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처럼, 태극에 제사하지 않는 것도 태극이 궁
극의 이치로서 실재하지만 정해진 자리가 없으면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라고 변론하였다. 유교적 궁극존재의 개념에서 상제와 태극의 차이를 강조
하는 릿치의 견해에 반박하는 것이, 신후담에게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상제
21) 벽위편 , 권1, 39, ‘西學때: 天主實義’, “天主之降生, 獨生於西泰之國, 則天主施恩之
道, 亦云偏矣, 烏在其爲大父公君也.”
22) 벽위편 , 권1, 34, ‘西學때: 天主實義’, “太極者, 其理則實, 而其位則虛, 非若上帝之
主宰乎天, 而有定位, 則恭敬之禮, 固無可施之處, … 人之尊堯舜孔孟, 以其道德之高厚
也, 而未聞有尊奉道德者.”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1
와 태극의 차이와 일치성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릿치가 주렴계의 ?太極圖?를 홀수와 짝수(奇?偶)의 형상을 말한
것에 불과하며 태극의 형상이 없다 하여 태극과 음?양을 동일시하고 있는
데 대해, 신후담은 “태극은 음?양을 떠나는 일이 없으니, 음?양에 깃들어
있지만 음?양과 뒤섞이지 않는 것이다”23)라고 하여, 태극이 홀수?짝수의
형상인 음?양에 깃들어 있지만 “易에는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음양을 낳
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는 주역 (繫辭上)의 구절을 근거로 태극이 음?
양의 발생근원이요 음?양과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태극을 상제와 구분함으로써 궁극존재로서 실재성을 부정하려는 릿치의 견
해를 반박하여, 태극이 음?양의 생성근원으로서 궁극적 실재임을 확인한다.
나아가 신후담은 릿치가 ‘理’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견해를 세 가지 측면
에서 반박하고 있다.
① 릿치는 ‘리’가 人心이나 사물에 있다는 것은 ‘리’가 사물의 뒤에 존재
하는 것이므로 사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여, 理를 사물의 속성(依늘者)
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理와 사물은 애초에 가르고 나누어
두 가지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니, 이제 이것으로 理가 사물을 벗어나지 않는
다면 옳지만, 만약 이 사물에 앞서서 이 사물이 되는 理가 없다고 하면, 이
른바 사물이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이랴”24)라고 하여, 理는 사물에 내재하
면서 사물의 존재 근원이 되는 것이라는 성리학적 입장을 확인한다.
② 또한 릿치는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의 空虛에서는 ‘리’가 의존할 수 없
어서 떨어지고 말 것이라 하여 사물에 앞서서 ‘리’가 존재할 수 없음을 밝
혔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木?石처럼 有形한 사물과 달리 ‘리’는 無形한 것
이므로 空虛에서 떨어질 염려가 없음을 강조하고, 천지가 형성된 뒤에도 하
늘과 땅 사이에 공허가 있지만 ‘리’가 어디에나 있으며 떨어진 일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③ 나아가 릿치는 ‘리’가 靈(이성능력)?覺(지각능력)과 明義(도덕적 판단
력)가 있는 鬼神의 부류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없는 것(靈覺?明義)을 사물
에게 베풀 수 없다고 하여, ‘리’가 靈覺이 있는 존재의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사물이 靈하고 覺할 수 있는 것
23) 벽위편 , 권1, 35, ‘西學때: 天主實義’, “太極者, 未嘗離乎바陽, 但卽바陽, 而不雜乎
바陽者, 是也.”
24) 같은 곳, “理與物, 初未嘗判然離絶, 而爲兩事, 今若以此, 而謂理之不外於物, 則可, 若
謂無此物之先, 未有爲此物之理, 則所謂物者, 何自而出乎.”
종교학 연구 12
은 氣가 하는 것이요, 그 靈하고 覺하는 근거를 미루어 가면 곧 理이다”25)
라고 하여, 靈?覺하는 氣작용의 근거로서 ‘리’의 근원성을 재확인하고 있
다. 바로 여기서 靈覺이 있는 인격적 神을 최고의 존재로 보는 천주교의
인식과 靈覺도 氣의 작용일 뿐이요, 그 근거를 ‘리’로 인식하는 성리학적 인
식의 차이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Ⅳ. 영혼론의 비판 논리
1. ‘영혼’ 개념에 대한 이단비판론의 적용
신후담은 천주교가 ‘영혼불멸설’을 통해 이 세상이 고통스럽고 수고로움
과 죽어서 땅에 묻히는 근심을 극진하게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이에 대
해 유교의 입장을 “스스로 즐거운 곳이 있으니, 군자의 마음은 어느 때나
편안하고 순조롭게 대처하여 살고 죽음에 대해 근심하는 일이 없다”26)고
하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천주교의 태도와 유교의 당당한 사생관
을 대비시키고 있다.
또한 천주교의 귀신?영혼의 설에 대해서는 릿치가 시경 ? 서경 등
유교 경전으로 입증하려는 태도를 “세상을 현혹시키는 한가지 실마리가 될
까 두렵다”(恐爲惑世之一端)고 경계하고, 유교의 鬼神?魂魄개념의 기준으
로 朱子語類를 인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만큼 신후담의 서학비판론은
성리학의 입장을 확고한 기준으로 지켰던 것이다.
릿치는 ‘人性’을 生(성장능력)?覺(지각능력)하고 이치를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仁?義?禮?智’는 추론한 다음에 있는 것으로 人性이 될
수 없는 것이요, ‘德’은 性에 있는 것이 아니라 義念?義行에 오랫동안 익숙
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라 하여 성리학적 인식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
담은 “저들은 生?覺과 추론이 魂에 속하는 것이라 하는데, 魂은 氣이니,
어찌 人性의 本然을 논할 수 있겠는가”27)라고 하여, 人性과 魂을 일치시키
25) 벽위편 , 권1, 36, ‘西學때: 天主實義’, “物之能靈能覺者, 氣之爲也, 推原其所以靈覺
者, 則理也.”
26) 벽위편 , 권1, 37, ‘西學때: 天主實義’, “自有樂地, 君子之心, 安時處順, 未嘗戚戚於
生死者也.”
27) 벽위편 , 권1, 38, ‘西學때: 天主實義’, “彼嘗以生覺推論屬之於魂, 則魂是氣也, 何足
以論人性之本然乎.”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3
는 천주교의 입장과는 달리, 氣로서의 魂과 理로서의 性을 분별하는 성리학
적 입장에 따라 ‘人性’에 대한 릿치의 정의를 거부하고 있다. 또한 신후담은
‘인?의?예?지’가 人性임은 孟子에서 제시된 정론이라고 강조하면서,
‘인?의?예?지’가 추론한 다음에 있고 本然의 性에 갖추어있는 것이 아니
라면 四端(惻隱?羞惡?辭讓?是非)의 마음은 어디에 깃들어 있다가 추론을
기다리지도 않고 발현될 수 있는 것인지를 반문한다.28) 이처럼 그는 性(四
德)에서 情(四端)이 발현되어 나온다는 성리학의 견해를 통해 릿치의 견해
를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德이 義念과 義行에서 생기고 性에
갖추어 있지 않은 것이라면, 사람이 德을 가진다는 것은 과연 바깥에 있는
것을 잡아끌어 억지로 안에 넣은 것이 되고 만다”29)고 하여, 대학 의 ‘明
德’이나 중용 의 ‘德性’의 性에 내재하는 德개념과 어긋나는 것임을 지적
한다. 따라서 신후담의 비판은 성리학적 견해를 재확인하는 것이며, 릿치의
천주교 교리와 성리학의 견해가 얼마나 대립된 입장에 서 있는지를 뚜렷하
게 드러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신후담은 삼비아소가 영언려작 의 서문에서 핵심 과제로 강조하고
있는 ‘천상에 변함 없이 있는 복’(天上常在之福)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
이 불멸하여 선을 행한 사람이 천당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천주교의 영혼론이 ‘영혼불멸설’과 ‘천당지옥설’로 집약되는 것임을 지적하였
다. 그것은 천주교의 영혼론에 관한 전반적 비판에서 가장 먼저 ‘영혼불멸설’
을 주목하고 이에 따라 사후에 영혼이 가는 곳에 대한 설명인 ‘천당지옥설’
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송대 도학에서 정립된 불교에 대
한 이단비판론의 체계를 기반으로 천주교와 불교를 동일시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비판 논리를 천주교에 대해서도 반복하여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다.
신후담은 주역 의 ‘鬼神死生說’을 근거로 “사람이 태어남은 바(精)과 陽
(氣)이 모여서 개체를 이루고 죽게 되면 魂은 날아가고 魄은 내려가서 흩어
져 변하게 되니, 변하면 존재하는 것도 없어진다”30)고 하여, 죽은 뒤에는
魂?魄이 흩어져 없어지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영혼불멸설’을 거부한다.
또한 유교의 ‘福善禍淫之說’은 선하면 복을 받고 방탕하면 재앙을 받는다는
28) 벽위편 , 권1, 39, ‘西學때: 天主實義’, “使仁義禮智誠在抽利之後, 而不具於本然之性, 則所謂惻隱等四者之心, 未知寓於何處, 而猝發於倉黃入井之際, 不必待推理而後有之耶.”
29) 같은 곳, “德之生於義念義行, 而不具於性, 則人之有是德者, 果是攬取在外之物, 强以
納之於內者.”
30) 벽위편 , 권1, 14, ‘西學때: 靈言?勺’, “人之生也, 바精陽氣, 聚而成物, 及其死也, 魂遊魄降, 散而爲變, 變則存者亡矣.”
종교학 연구 14
것으로 “이치로서 말한 것이요, 이치를 따르는 자는 스스로 마땅히 복을 받
고 이치를 거스리는 자는 스스로 마땅히 재앙을 당하는 것이니, 어찌 상제
가 일일이 사람에게 (복이나 재앙을) 내려준다고 말하겠는가. 또한 재앙이
나 복이란 (하늘이) 德을 명하고 죄를 징벌하는 사이에 드러나는 것일 뿐이
니, 어찌 저들이 말하는 천당지옥의 설과 같겠는가”31)라고 하여, 이치에 따
르는지 여부의 당위성을 기준으로 하는 유교의 禍福說로서 天主에 의해 일
일이 심판을 받아 가게 되는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후담은 유교가 가르치는 道가 일상의 당위적 규범으로서 事
親?事君임을 강조하고 천주교의 가르침은 ‘천상의 복을 구하는 것’만을 옳
게 여겨서, 事親?事君등 일상의 도리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라 대비시켰
다. 그리하여 “이것은 윤리를 업신여기고 이치를 어그러뜨리는 것이요, 사
사로움을 따르고 이익을 바라는 데 머무는 것이니, 어찌 심히 미워할 것이
아니겠는가. …저들이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福을 구하는 데서 나왔으니,
그것은 역시 不誠함이 심하며, 오로지 利欲으로 마음을 삼은 것이다”32)라고
비난한다. 이처럼 그는 천주교에서 天上의 福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도덕규범과 책임을 저버리게 되는 것인 동시에 사사롭고 利欲에 빠져있는
반도덕적 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유교의 학문방법과 과제를
‘誠’과 ‘義’로 확인함으로써, 천주교의 가르침이 求福에 빠져 不誠과 利心으
로 유교의 도덕적 가치에 배반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신후담은 異端의 공통적 성격을 ‘利’(利欲)에 근원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33) 그리하여 楊朱?墨翟?莊子?列子가 모두 利를 탐하는 것이라
하고, 특히 불교에서 제시한 ‘精神不滅’과 ‘輪廻報應’의 설에 대해서는 “精神
이 不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 사람들의 죽기를 아쉬워하는 마음에 이미
넉넉히 적중하고 있으며, 輪廻?報應등의 說은 또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두려워하게 하여 유인하니, 그러므로 온 세상에 휩쓸려 따르는 자들
이 역시 이익을 위한 것이다”34)라고 하여, 불교의 기본교리도 利欲을 근거
31) 벽위편 , 권1, 15, ‘西學때: 靈言?勺’, “此特以理言, 順理者, 自當獲福, 逆理者, 自
當遇禍, 豈謂上帝一一下降於人也, 且其禍福, 不過見於命德討罪之間而已, 亦豈如彼所
謂天堂地獄之說哉.”
32) 같은 곳, “是其蔑倫悖理, 徇私要利之留, 豈非可惡之甚者耶, … 彼所以爲學者, 特出於
求福, 則其亦不誠之甚, 而專以利爲心也.”
33) 벽위편 , 권1, 15, ‘西學때: 靈言?勺’, “異端之學, 其流則有萬不同, 而其源則皆出於利.”
34) 같은 곳, “所謂精神不滅者, 旣足以中世人惜死之心, 輪廻報應等說, 又有以持世人之心, 而恐誘之, 故擧世靡然從之者, 亦爲利也.”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5
로 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또한 천주교의 영혼불멸설과 천당지옥설에 대해
“서양에 이르면, 곧 불교의 자질구레한 이론에 근거하여 이를 변화시키고
신비롭게 하니 더욱 이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싫어하는 利欲의 마음임을 스스로 감출 수는 없다”35)고 하여, 천주
교도 불교를 따라 利欲을 추구하는 이단의 하나일 뿐이라 밝히고 있다.
2. ‘영혼’ 개념 체계에 대한 비판 논리
삼비아소(Fransesco Sambiaso, 畢方濟)가 靈言?勺을 저술한 것은 心性
論과 鬼神死生論의 이론으로 정립되어 있는 성리학적 사유틀을 극복하기
위해 스콜라철학의 ‘영혼’(anima) 개념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신후담이 서학변 에서 영언려작 을 가장 먼저 비판 대상으로 다
루고 있는 것은 ‘영혼’ 개념의 문제를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의 핵심 문
제로 삼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성리학의 근본 문제인 心性論?鬼
神死生論과 천주교의 영혼론을 대결시키고, 성리학의 입장에서 비판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철저히 성리학의 이론을 따라
조목마다 정밀하게 이론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그의 천주교 비판 가운데서
영혼론 비판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그는 영언려작 의 편차에 따라 ‘영
혼’(anima, 亞尼瑪) 개념을 ① 體(본체)?② 能(능력)?③ 尊(존귀함)?④ 情
(성질)의 4주제로 나누어 자신의 비판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1) 영혼의 본체(體):
영언려작 에서는 영혼의 본체를 규정하는 개념으로 ‘자립하는 실체’(自
立之體),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것’(本自在者), ‘神의 부류’(神之類), ‘죽을
수 없음’(不能死), ‘인간의 體模가 됨’(爲我體模), ‘끝내 은총에 의지함’(終늘
額辣濟亞)의 여섯 가지를 들고 있다.
영혼이 ‘자립하는 실체’라는 규정에 대해, 신후담은 “혼이란 형체에 의지
하여 있다가 형체가 이미 없어지면 흩어져 無로 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자
립하는 실체가 될 수 있겠는가”36)라고 하여, ‘혼’이 형체에 의존하는 것이
요 자립하는 실체가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형질에 따라 나오는 生
35) 벽위편 , 권1, 16, ‘西學때: 靈言?勺’, “至於西泰, 則又因佛氏之餘論, 而變而神之, 愈爲近理, 然亦不能自掩其貪生惜死之利心.”
36) 같은 곳, “魂者, 乃依於形而爲有, 形旣亡則消散而歸於無者也. 烏得爲自立之體乎.”
종교학 연구 16
魂?覺魂이 의지하던 형질이 소멸하면 같이 소멸되는 것과 달리 사람에게
있는 영혼은 형체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요 사람이 죽어도 소멸되지 않는
것으로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란 주장에 대해,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
의 ‘혼’이 있어서 생장하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魂3品說’을 비판
하고, 생장과 지각이 없어진 다음에는 영혼이 홀로 존재할 이치가 없음을
강조하여, 영혼의 불멸설을 거부함으로써 영혼이 본래 스스로 존재한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혼’이 ‘神’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요 ‘氣’가 아니라는 천주교의 견해에 대
해, 그는 “魂은 곧 氣의 神이다”(魂便是氣之神)라는 주자의 언급을 근거로
“이미 氣의 神이라 하였으니, 魂이 곧 氣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氣
가 아니면 이른바 魂이라는 것도 없다. 이제 다만 魂은 氣가 아니라고만
말하고 氣의 神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장차 모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氣를
떠나서 魂을 찾게 할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37)라고 하여, 魂은 氣
의 神이지 氣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이러한 논변에서 드러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천주교에서 제시하는
‘神’ 개념과 성리학에서 이해하는 ‘神’ 개념이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사
실이요, ‘신’ 개념의 두 입장이 어떻게 다른가를 밝히지 않고서 제각기 자기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리학에서 ‘신’이란 ‘음?양의 헤아리기
어려운 것’(바陽不測)이요, 氣(음?양)의 신묘한 작용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다. 그만큼 ‘신’은 본질적으로 氣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
궁극존재를 의미하는 서학의 ‘신’ 존재와는 개념적 차이가 매우 큰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영혼’은 식물의 ‘生魂’이나 동물의 ‘覺魂’과는
달리 죽을 수 없는(不能死) 것이고, 죽은 뒤에도 ‘생혼’과 ‘각혼’을 포함하여
죽지 않는 것이며, 다만 신체가 없으므로 쓰이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
한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사물(식물?동물)에 있는 생혼?각혼이 형체와
함께 소멸되는 것이라면 인간에 있는 생혼?각혼만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인간이 죽
은 뒤에 인간의 영혼에 포함된 생혼?각혼은 쓰이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에 대해, “생혼?각혼이 이미 쓰이지 않는다면, 비록 소멸되지 않았다
37) 벽위편 , 권1, 17, ‘西學때: 靈言?勺’, “旣是氣之神, 則固不可便謂之氣, 而非氣則又
無所謂魂也. 今但言魂之非氣, 而不言其爲氣之神, 則將使不知者, 離氣而覓魂矣, 烏可
乎哉.”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7
하더라도 소멸된 것과 다름이 없다. 비록 천당의 즐거움이 있어도 반드시
그 즐거움을 지각할 수 없고 비록 지옥의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고통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반드시 하늘에 오르기를 구하는
일은 무엇 때문인가”38)라고 하여, 죽은 뒤에 생혼?각혼의 작용이 없다면
영혼이 불멸한다고 하더라도 천당의 즐거움이나 지옥의 괴로움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니 천당?지옥의 존재도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임을 지적한다.
이처럼 신후담은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면서 영혼 속에 생혼?각혼의 단계
를 영혼의 한 기능으로 내포시키고 있는 천주교의 신앙적 영혼론에 대해
논리적 정합성을 요구하는 비판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천주교에서 영혼을 인간의 바깥으로 드러난 형체의 모상인 ‘依模’가 아니
라 안으로 실체의 모상인 ‘體模’라 한 데 대해, 신후담은 “형체가 있은 다음
에 魂이 있는 것이지, 먼저 魂이 있고 이 魂의 모상에 의지하는 것이 형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39)라고 하여, 혼이 ‘體模’가 될 수 없다고 부정하였다. 그
것은 魂을 신체적인 것을 초월한 존재로 보는 천주교의 입장과는 달리, 신체
적인 것에 의존하는 존재라고 보는 성리학적 인식에 따른 것이다. 또한 천주
교에서는 하늘의 참된 복은 사람의 ‘志力’이나 천주의 ‘公祐’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주의 ‘特祐’가 있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이에 대해 신후
담은 한편으로 그런 인식이 천주의 ‘特祐’를 기다리기만 해서 착한 일을 하
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음을 경계하고, 다른
한편으로 “천주된 자가 널리 천하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 중에
서 사사롭게 사랑함이 있어서 혹은 은총을 내려주기도 하고 혹은 내리지 않
기도 하는 것이다”40)라고 하여,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公祐’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特祐’로서 천상의 참된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
은 천주가 편벽되어 공평하지 못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2) 영혼의 능력(能)
영언려작 에서는 영혼의 능력인 생장(生)?지각(覺)?이성(靈)의 3가지
38) 벽위편 , 권1, 17-18, ‘西學때: 靈言?勺’, “生覺旣不用, 則雖不滅, 而與滅無異矣, 雖
有天堂之樂, 而必不能覺其樂, 雖有地獄之苦, 而必不能覺其苦, 若是而必欲求升天之事
者, 亦何也.”
39) 벽위편 , 권1, 18, ‘西學때: 靈言?勺’, “有是體, 然後有是魂, 非先有是魂, 而依是魂
之模狀者, 乃爲形體也.”
40) 벽위편 , 권1, 19, ‘西學때: 靈言?勺’, “天主者不能普愛天下之人, 而於其中, 有所私
愛, 或祐而或否也.”
종교학 연구 18
능력 가운데서도 ‘지각능력’(覺能)을 주목하였다. 이러한 ‘지각능력’은 外能
(五司: 耳?目?口?鼻?體)에 의한 外覺과 內能(二司: 公司?思司)에 의한
內覺으로 나뉘고, 內能에는 二司이외에 별도로 嗜司(欲能?怒能)가 있어서
外五司와 內二司가 거두어들인 것을 좋아하거나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라고 한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마음의 지각 이외에 다시 별도의 지각은 없다”(心
覺之外, 更無別覺)라고 하여, 모든 지각작용은 마음의 지각(心覺)일 뿐이라
하여 지각의 주체를 外覺과 內覺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여기서 그
는 “內能이라는 것이 ‘魂’이라는 한 글자에 불과한데, 황홀하고 무근거한 설
명으로 처음부터 마음이 안에서 주장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
른바 ‘內’라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內’가 아니요 별도로 공허하게 꾸며놓은
군소리일 뿐이다”41)라고 하여, 지각작용의 양상과 내용에 따르는 분석을 지
각의 통일된 주체로서 ‘마음’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영언려작 에서는 아니마(영혼)의 ‘靈能’에 대해 記含(기억)?明悟
(인식)?愛欲(욕구)을 하는 3기관(司)을 구분하고 있다.
영언려작 에 의하면 ‘記含’(기억) 중에 형체가 있는 사물을 기억하는 ‘司
記含’은 頂骨뒤의 ‘腦囊’에 있고, 형체가 없는 것을 기억하는 ‘靈記含’은 인
간만이 지닌 ‘영혼’이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서학에서 기억의 기관으로 제
시한 ‘뇌낭’說이 유교의 ‘심’說과 다른 것임을 강조하면서, ‘마음’을 “虛靈하
여 知覺함으로써 한 몸의 주재가 되니, 記憶하고 思惟하며 酬酌하고 言行함
은 어느 것이나 이 마음이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여, 기억도 마음의
작용이라 확인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는 “사람의 기억과 언행을 모두 뇌낭
이 하는 것이라면 마음이란 일종의 붙어있는 군더더기가 되고 말 것이
다”42)라고 하여, 기억의 주체가 뇌낭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성리학의 전통적
심개념을 역설하였다.
다음으로 ‘明悟’(인식)는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萬像을 만드는
작용을 하는 ‘作明悟’와 이 萬像에 빛을 비추어 만물의 이치를 얻는 ‘受明
悟’로 구분된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明悟한다는 것
41) 벽위편 , 권1, 20, ‘西學때: 靈言?勺’, “內能者, 不過於魂之一字, 而恍惚胡說, 初不
及於此心之爲主於內, 然則其所謂內者, 非吾所謂內也, 特架虛之贅談而已.”
42) 벽위편 , 권1, 21, ‘西學때: 靈言?勺’, “心之爲物, … 虛靈知覺, 以爲一身之主宰, 所
以記藏思惟酬酌云爲者, 孰非此心之所爲乎, … 人之記藏云爲, 皆腦囊之所爲, 而心則成
一寄贅之物矣.”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19
은 心靈이 하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여 ‘受明悟’
의 과정을 거부하고, 그 사물에 근거하여 그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일
뿐이라 하여, 사람이 사물의 형상을 만드는 ‘作明悟’의 과정을 거부한다. 또
한 서학에서 ‘명오’의 극치는 사물의 형체나 기질을 벗어나며 피차의 분별
을 버리고 사물의 精微함(이치)을 남기는 것이라 언급한데 대해, 그는 “천
성을 형색 밖에서 구하니 이것은 그 한쪽에 집착하여 관통하는 방법을 모
르는 것이다. 이른바 ‘명오’는 空寂과 虛無의 영역에 빠져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작용에서 드러난 것이 있겠는가”43)라고 하여, 道?器와 體?用이 일
체라는 전제에서 이치를 현실의 사물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明悟’
의 극치는 이치를 형색을 벗어나 추상적 관념으로 인식하는 것이라 비판하
고 있다.
그 다음으로 ‘愛欲’(욕구)은 식물?동물?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는 ‘性欲’
(본성적 욕구)과, 동물?인간에게만 있는 ‘司欲’(감각적 욕구)과, 인간에게만
있는 ‘靈欲’(이성적 욕구)의 셋으로 구분된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性欲’이
란 성리학의 ‘性’ 개념에 따라 ‘德을 좋아하는 마음’(好德之心)을 가리키거나
맹자 처럼 맛?색깔?소리?냄새를 대하는 기질도 ‘性’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천주교의 ‘性’은 德性도 形氣도 아니고 常生과 眞福을 추구하
는 사사롭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곧 그는 “이것은 단지 老莊과 釋
迦의 무리에서 나온 것으로 스스로 사사롭고 스스로 이로움을 위주로 하여
그 자질구레한 이론들을 주워모아 더욱 꿰맞추어 人性의 欲이 오로지 常生
과 眞福있는 것이라 한다”44)고 하여, 老莊?釋迦의 異端이 추구하는 이기적
욕구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司欲’과 ‘靈欲’에 대해서도 ‘司欲’은 생각(思司)을 따라간다는 견해
에 대해서도, 생각(思)이란 道心과 人心의 어느 쪽에나 연관되는 것인데 人
心쪽에만 한정시키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靈欲’이 理義를 따라간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理義란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사람의 본성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확충시켜 가는 것이지 理義가 바깥에 있어서 사람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천주교의 입장을 “理義가 性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性과 義를 나누어 두 가지로 삼고서, 性을
43) 벽위편 , 권1, 23-24, ‘西學때: 靈言?勺’, “求天性於形色之外, 執其一而不知所以貫, 所謂明悟者, 淪於空寂虛無之域而已, 曾何足以見之於用乎.”
44) 벽위편 , 권1, 25, ‘西學때: 靈言?勺’, “此特出於老莊釋迦之屬, 以自私自利爲主者, 而彼又?其餘論而益傅會之, 以爲人性之欲專在於常生眞福.”
종교학 연구 20
따르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는데 이르렀으니 大本을 모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45)고 하여, 천주교 교리가 근본이 되는 성리학의 性?義개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영혼이 존귀함이 天主와 비슷함(尊與天主相似)
영언려작 에서 영혼의 존귀함이 天主와 비슷함을 논하였는데, 이에 대
해 신후담은 上帝를 ‘천주’라고 칭할 수도 있고 人魂을 ‘아니마’라고 일컬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아니마’를 천주에 비교하여 그 존귀함이 서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라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유교에서 인간의 魂?魄개념과 天의 鬼?神개념을 제시한
다. “우리 유교에서 魂을 논의함에는 반드시 魄과 상대시켜 말한다. 魂은 陽
의 靈이니 펼침을 주장하고, 魄은 바의 靈이니 굽힘을 주장한다. 만약 형상
과 종류로 미루어본다면 하늘에 鬼?神이 있는 것과 같다. 神은 펼쳐짐이요,
天의 陽靈이며, 鬼는 굽힘이요 天의 바靈이다. 그러므로 바?陽이 굽히고 펼
쳐지는 자취는 하늘에 있는 것을 ‘귀신’이라 하고 사람에 있는 것을 ‘혼백’이
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은 서로 비슷한 것이 되니 견주어볼 수 있다.”46) 따
라서 그는 인간의 ‘魂?魄’과 하늘의 ‘鬼?神’을 유사한 것으로 비교할 수 있
는 것이라 하지만, 음?양이 굽혀지고 펴지는 자취로서 ‘혼?백’을 천지?만
물의 주재자인 ‘상제’에 견줄 수 없는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신후담은 “비록 ‘아니마’를 ‘魂’이라 하지만, 그 논의한 것을 보면 氣의
음?양이 굽혀지고 펴지는 자취를 대략도 언급한 일이 없으니, 우리 유교에
서 魂을 논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바로 魂이 魂이 되는 까닭
을 모르는 것이다. 이미 ‘아니마’를 ‘魂’이라 하고서, 上帝가 천지를 주재하
는 데 견주었으니, 이것은 바로 상제가 상제 되는 까닭을 모르는 것이다”47)
고 하여, ‘아니마’가 유교의 ‘혼’ 개념과 다른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동시에
45) 벽위편 , 권1, 26, ‘西學때: 靈言?勺’, “不識理義之具在於性中, 而以性義分爲兩物, 至以隨性而爲之非, 則其不見得大本者, 亦可知矣.”
46) 벽위편 , 권1, 28, ‘西學때: 靈言?勺’, “吾儒之論魂也, 則必與魄而對擧, 魂者陽之靈
也, 而主乎伸, 魄者바之靈也, 而主乎屈, 若以象類推之, 則如天之有鬼神, 神者伸也, 天
之陽靈也, 鬼者屈也, 天之바靈也, 故바陽屈伸之迹, 在乎天, 則謂之鬼神, 在乎人, 則謂
之魂魄, 若是者爲相似, 而可以比之也.”
47) 같은 곳, “雖以亞尼瑪謂之魂, 而觀其所論者, 未嘗略及氣바陽屈伸之迹, 與吾儒之所以
論魂者, 全不相似, 則此固不知魂之所以爲魂矣, 旣以亞尼瑪謂之魂, 而乃以比之於上帝
之主宰天地, 則此又不知上帝之所以爲上帝矣.”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21
魂과 견주어질 수 없는 유교의 ‘上帝’ 개념과 魂에 견주어지는 천주교의 ‘天
主’개념이 다르다는 것도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그는 유교적 의식으로 인간에게서 상제와 견주어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혼’이 아니라 ‘마음’(心)임을 제시한다. “上天에서 주재하는 것은 上
帝요, 一身에서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다. 사람에게 이 마음이 있는 것은 하
늘에 상제가 있는 것과 같다”48)고 하여, 마음과 상제는 주재한다는 역할에
서 공통되지만 一身과 上天이라는 지위에서는 엄격히 구별되고 있는 것임
을 밝혀준다.
또한 그는 인간의 마음과 상제의 관계로 상제가 내려준 性이 마음 속에
부여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따라서 그는 “상제가 내려준 속마음은 마음과
더불어 갖추어 태어나니 우리의 性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유교의 학문은
반드시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으며, 그 공효의 극치는 天地에
참여하고 化育을 돕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으니, 이것이 마음이 靈한 까
닭이요 上帝에 견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49)고 언급한다. 그것은 魂(영혼)을
바陽의 자취로 확인하여 天主의 존귀함에 견줄 수 없는 것이라 규정하면서,
이에 비해 心은 主宰의 역할에서나 上帝가 내려준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서 上帝에 견주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서, 성리학적 魂과 心개념의
차이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니마’를 ‘영혼’(魂)으로 번역하
고 있는 것은 ‘영혼’을 사후존재로서 확립하는 데 적합한 것이지만 유교적
의미에서는 ‘心’ 개념에 더욱 가까운 것임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4) 영혼의 ‘아름답고 좋은 것을 지향하는 성질’(所向美好之情)
영언려작 에서는 영혼의 ‘美好’(아름답고 좋은 것)를 지향하는 성질을 논
하면서, ‘지극히 아름답고 좋은 것’(至美好)을 보고 들을 수 없으며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신후담은 “죽은 후에 명확히 알게 된다는
설에 의탁하고 常生의 福으로 유혹하니, 스스로 죽은 후의 일은 사람들이
그 있고 없음을 힐난할 수 없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50)라고 하여, 유교의
48) 같은 곳, “今以吾儒之說論之, 則人之可比於上帝者, 惟有此心耳. 主宰乎上天者帝也, 主宰乎一身者心也, 人之有此心, 如天之有上帝.”
49) 벽위편 , 권1, 29, ‘西學때: 靈言?勺’, “惟其上帝所降之衷, 與心俱生而爲吾之性, 故
吾儒之學, 必以治心而爲本, 惟其功效之極, 而可至於參天地贊化育之域, 此則心之所以
爲靈, 而可比於上帝者也.”
50) 벽위편 , 권1, 30, ‘西學때: 靈言?勺’, “托爲死後明見之說, 而誘之以常生之福, 自以
爲死後之事, 人不能詰其有無.”
종교학 연구 22
학문이 實理로 증험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천주교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
도 없는 일을 믿으라고만 하며, 의심하여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증명할 수
없는 죽은 뒤의 일로 속인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영언려작 에서는 사람이 추리하여 알 수 있는 ‘자연의 本光’(自然
之本光)과 이치의 위에 있으며 오직 천주가 내려줄 뿐이요 인간의 知見이
미치지 못하는 ‘자연을 초월하는 眞光’(超於自然者之眞光)을 구별하고 ‘지극
히 아름답고 좋은 것’은 ‘자연의 本光’으로는 조금만 알 수 있고 ‘자연을 초
월하는 眞光’으로 온전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신후
담은 이치의 위에 있다는 것은 이치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
인한다. 따라서 그는 “이치로 미루어 볼 수 없는 것은 자기도 알 수 없는
것인데, 입으로 말하며 글로 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說을 믿게
하고 그 道를 따르게 하니, 그 역시 곤란하도다”51)라고 하여, 이치로 알 수
없는 것을 주장한다는 사실이 이미 거짓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그
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지극히 아름답고 좋은 것’이란 허구로서 증험할 수
있는 실지가 없는 것인데, 이에 비해 유교의 학문은 “實然의 마음으로 實然
의 이치를 궁구하여, 알면 반드시 정밀하기를 기약하고 보면 반드시 밝기를
기약한다”52)고 하여, 마음으로 이치를 정밀하게 알고 밝게 볼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유교의 主知的이고 합리적인 입장과 천주교의 신앙적이고
초월적인 입장이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에서 심각한 장애
를 일으키면서 대립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주고 있다.
천주교의 영혼론에 대한 신후담의 비판 입장은 철저히 성리학의 인식에
기초하여 양자의 차이를 드러내고 성리학과 다르거나 성리학적 인식을 결
여한 것은 바로 거짓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성리
학에 근거한 이론적 비판이라는 점에서 성리학의 논리를 분명하게 밝혀주
고 있으며, 성리학의 논리가 천주교 교리의 논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잘 드
러내주고 있다. 특히 아니마를 ‘영혼’으로 번역하는 천주교의 입장에 대해
성리학의 魂?魄개념과 心?性개념 사이의 관계를 대비시켜 주고 있는
것은, 신후담의 서학비판론이 서학과 유교 사이에서 개념적 인식의 차이와
공통성을 조명해주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51) 벽위편 , 권1, 31, ‘西學때: 靈言?勺’, “以理之所不能推, 己之所不能知, 而宣之於口, 筆之於書, 欲使天下之人, 信其說而從其道, 其亦難矣哉.”
52) 벽위편 , 권1, 31-32, ‘西學때: 靈言?勺’, “以實然之心, 而究實然之理, 知之必期於
精, 見之必期於明.”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23
Ⅴ. 신후담 서학비판론의 특성
성호 문하를 중심으로 천주교 비판론을 전개하였던 이른바 ‘공서파’에서
신후담은 가장 선구적 인물이다. 천주교 교리에 대한 그의 비판저술인 서
학변 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천주교교리서를 직접 읽고 이를 비판한 것이다.
신후담은 이 교리서에서 제시된 ‘補儒論’의 논리, 곧 유교와 천주교의 일치
나 소통을 강조하는 적응주의적 논리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오히려
양자의 근원적 차이를 더욱 예리하게 표출시키는 것으로 비판의 입장을 확
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후담이 성호의 영향 아래서도 서양과학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
고 천주교 교리에 대해 비판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조선 후기 사회를 이
끌어 가는 도학 정통의 신념을 지키는 유교지식인의 입장을 밝혀주는 것이
다. 그의 서학비판론은 대부분 도학의 이단 배척 논리를 따르는 것으로서,
열려있는 토론의 입장은 이미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배타적 적대감으로 천
주교를 배척하였던 18세기말 이후의 斥邪論과 비교한다면, 신후담의 비판론
은 논리적 일관성과 합리성을 지켜가는 매우 이론적 성격의 비판론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신후담은 가장 초기에 본격적인 비판 이론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그만큼
그의 비판론은 성리학적 기반을 확립한 유학자로서 漢譯西學書의 천주교
교리서를 접할 때 반응하는 태도와 문제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경우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비판론이 지닌 특성을 세 가지로 들어볼 수
있다.
첫째, 신후담이 천주교 교리서의 핵심 문제를 ‘천주’와 ‘영혼’ 개념 및 서
양교육제도와 세계지리 등 서양문물의 문제를 비판의 과제로 추출하고 있
다는 점에서 그 문제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그는 당시 조
선사회에서 서학에 대한 비판론자나 신봉자들 사이에 거의 논의되고 있지
않던 교리서인 영언려작 을 구해서 천주교의 영혼론을 자신의 비판이론을
위한 전제요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서학인식이 지닌 예리
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뒤를 이어 서학비판론을 전개한
안정복도 처음부터 영혼론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영혼론의 문제는
‘영혼불멸설’에 따라 사후세계의 문제인 천당?지옥설로 연결되고 있으며,
나아가 영혼 개념의 문제는 바로 제사문제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
종교학 연구 24
기 때문이다.
둘째, 신후담의 천주교 교리 비판론은 천주교 교리를 뒷받침하는 스콜라
철학의 논리와 성리학의 논리가 맞서는 철학적 논쟁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
다. 그는 ‘천주’ 개념의 문제에서 유교의 ‘상제’ 개념과 ‘태극?리’ 개념 사
이의 관계를 해명하면서 성리학의 궁극 존재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재인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천주교의 ‘천주’와 유교의 ‘상제’ 개념 사이에 소통가능
성과 차이점을 뚜렷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영혼’ 개념의 문제에서도 유교에
서 氣의 聚散說로 설명되는 혼백?귀신의 존재와 대비시키면서 동시에 ‘性’
에 대한 성리학적 인식을 연관시켰으며, ‘德’에 대해 행위의 결과로 보는 천
주교교리의 견해와 인격의 본질로 보는 성리학적 입장의 차이를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셋째, 그의 비판론은 천주교 교리를 기본적으로 불교와 같은 맥락의 이
단으로 파악하고, 이익(利)을 추구하는 것이라 규정하여 의리(義)를 기준으
로 삼는 유교의 입장과 대립시키고 있다. 그는 영혼불멸설이나 천당지옥설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종교의례들이 불교적 의례와 상통하는 것이라 지적
하여 불교비판론에 근거하여 천주교비판론을 정립하였다. 또한 이단의 공통
적 속성을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아쉬워하는’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규정하고, 천주교 교리에 나타난 신앙태도가 이러한 이단의 조건에 일치하
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스승 성호가 서양과학과 세계지리
에 대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입장과는 달리, 여전히 華夷論의 중
국중심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후담의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론은 천주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비판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유교 안의 이론들을 재점검하면서 유교의 문제의식
을 새롭게 각성하고 적용논리를 심화시키는 데 많은 수확을 거두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따라서 그의 천주교비판론은 그 비판 논리의 타당성이나
비판 결과의 성공에서보다도 오히려 천주교 교리에 대항하면서 천주교 교
리와 차별화되는 유교의 이론적 인식을 새롭게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데 풍
성한 소득이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25
Shin Hu-tam's(愼後聃) Theoretical Criticism of
Western Learning and its Issues
Keum, Jang-tae
Shin Hu-tam (愼後聃, 1702-1761), a leading scholar of the S?ngho
school, is the most systematic critic of the Anti-Western Faction
(Kongs?pa) known for their opposition to the Western learning (Sh?hak)
in the late Chos?n dynasty. In his work titled Comments on Western
Learning (西學때, S?hakpy?n), Shin focuses on the basic doctrinal
differences between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According to his
analysis, the Catholic doctrine was a distinctive contrast to Confucian
thought in the fundamentals of their respective world-views. Shin points
out that the core of Catholic doctrine is the conception of tienzhu (Lord
of Heaven) and linghun (anima, soul). He insists that the Confucian
conception of ultimate being and the soul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at of Christianity. This was highlighted when the Catholic conception
of ultimate being and soul stimulated many christians to reject the
confucian ancestor worship in late Chos?n dynasty.
Shin's discussion shows the characteristic of doctrinal disputes between
scholasticism and Neo-Confuciaism. From his viewpoint, Catholicism was
a heterodoxy like Buddhism that did not seek public righteousness but
sought private gain. Shin's rejection of western science as well as
Catholic doctrine can be characterized by a Sino-centric consciousness
that had been preval!ent during the Chos?n dynasty.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김 종 서*
1)
目次
Ⅰ. 한국 근대 종교교육의 형성
Ⅱ. 일반 학교의 종교교육
Ⅲ. 종립 학교의 종교교육
Ⅳ. 한국 종교교육의 전망
Ⅰ. 한국 근대 종교교육의 형성
한국 전통 사회의 교육은 대체로 불교와 유교를 주요 기반으로 하고 있
다. 그러므로 세속적 교육과 종교교육이 구분 없이 미분화 상태였다고도 할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근대 교육이 시작되는 것은 19세기 말 기독교가 들
어와 학교들을 세우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타고 특히 1894
년 갑오경장이후 <홍범 14조>에서 근대 교육의 수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
었고, 이듬해 소학교들이 생겨나고 연이어 근대식 학교들이 나타났다. 그러
니까 이쯤부터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이 종교로부터 분화되어 독립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물론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전통적인 교육이 죄다 끝난 것은 아니다.
향교와 서원을 주축으로 하던 전통적 유교 교육은 대폭 변화되어 일부 향
교만이 오늘날 그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또 강원과 선원을 주축으
로 하던 전통적 불교 교육도 강원이 승가대학이나 교양불교대학 등으로 일
부 형식적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종단 자체의 종교교육으로서 이들은 그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기독교의 신학교들도 일부는 신학대학 등으
로 비록 공교육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종단 자체의 종교교육을 수
* 서울대 교수, 종교학
종교학 연구 28
행하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근대 교육이 종교에서 분화되어 독립 영역을 구축했다는 것은 세속
적 학교가 이제 공교육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대
식 학교들은 우선 <외국어>나 <수학>, <과학> 등 전통 교육기관과는 사뭇
다른 분화된 교과목을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 교육에서 종교가
차지했던 내용들이 완전히 무의미해짐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근
대적 공교육 속에도 <사회>, <윤리>, <역사> 등 다양한 일반 교과들 중에
종교적 내용들이 상당히 포함되었다. 특히 종립 학교들에서는 전교(傳敎) 및
수신(修身)의 목표와 맞물려 종교가 매우 적극적으로 교육되어 왔다.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종교교육은 크게 종단 자체의 교육과 공교육의 두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물론 후자 즉 근대 종교교육의 주축
이 되어온 공교육 속에서의 종교교육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
고 공교육에서의 종교교육은 다시 일반 학교에서의 교육과 종립 학교에서
의 교육으로 나누어 거론하는 것이 편리하다.
Ⅱ. 일반 학교의 종교교육
광복이후 <헌법>이 제정되어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으나 종교 관련 조
항은 그대로다. 즉 현행 <헌법 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라고 성문화하고
있다. 근대 국가 헌법의 보편적 특징인 소위 ‘종교의 자유’와 ‘국교금지(정
교분리)’를 명시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국교금지(정교분리)와 관련하여 현
행 하위법인 <교육기본법>에서는 제6조에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설립
한 학교에서는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1) 즉 국공립학교에서는 특정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국공립학교는 물론, 비종립 사립학교들까지
1) 이것은 종전의 <교육법 제5조>에서 “국립 혹은 공립의 학교는 어느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되었던 것이 2000년에 1월에 개정된 것
이다. 여기서 사립 학교들인 이른바 종립 학교들에서의 종교교육은 심지어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조차도 금하도록 규정되지 않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
다. 다시 말해서, <교육기본법>은 종립 학교에 대해서는 전교 지향적 종교교육조차
도 열어 놓고 있는 셈이다.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29
도 모든 종교교육은 금기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종종 잘못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교육기본법>상의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이란 개념은 엄
밀히 말하자면 포교 등 종교활동으로서의 교육을 뜻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
해서, 국공립학교에서까지도 인간의 문화적 현상이나 사회적 제도로서의 종
교를 학문적이나 인성 교육적 차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말이
다. 따라서 실제로 초 중등학교의 <사회>와 <도덕> 그리고 고등학교의 <국
사>, <사회와 문화>, <윤리> 등의 교과목 속에는 상당한 분량의 특정 종교
들에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종교자체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교과의 일부로서 종교를 다루므로 매우 체계적이지 못하고 단편
적인 내용들이다. 그리고 교과서들도 종교 전문가들이 집필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편파적이거나 심지어는 잘못된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은 종교가 아주 복잡한 나라다. 즉 세계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 국가인 셈이다. 그러므로 일반 학교의 종교교
육과 연관하여서 타종교 및 종교갈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1980년대 고등학교 및 대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의 종교관계 기
술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근대 교육은 종종 서양식 교육을 의미해왔고, 그
것은 당연히 서구 기독교적 배경들이 깔려왔다고도 하겠다. 이러한 기독교
편중 경향을 그 동안 오래도록 피해의식에 시달려 왔던 불교계가 강력한
비판을 하고 나섰다. 즉 기독교적 내용에 비해 불교적 내용이 상대적으로
적고 미약하다는 것, 그리고 과연 전통사상에 기독교도 포함시켜 교육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반면에 기독교 측의 전통종교에 대한 공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즉 한국
<교육법>(현행 <교육기본법>)의 기초 이념은 국조 단군에서 유래하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을 표방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무 국수주의적이
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상 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일부 근본주
의적 기독교 측의 개정안이 나온 바 있다. 이에 반대하는 민족종교들의 서
명운동들도 대단하였다.
아주 최근에는 일부 민족종교가 초등학교들에 국조 단군상(檀君像)을 건
립하는 운동을 펼쳐 나가자 이에 맞서 기독교계의 반발이 굉장했다. 민족종
교 측은 종교적 신앙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국조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기본
적 관심임을 강조하였고, 반면에 기독교 측에서는 일부 종교 단체의 교조선
전을 위한 신앙활동으로서 <헌법>상 국교금지(정교분리) 원칙의 명백한 위
종교학 연구 30
배라는 주장이었다.
Ⅲ. 종립 학교의 종교교육
종립 학교는 종교단체들이 세우고 현재 운영을 맡고 있는 일종의 공교육
기관이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종립 학교의 총수
는 약 400여 개 교다. 그중 불교계 종립 중 고등학교는 20여 개 교고, 기
독교계 종립 중 고등학교는 270여 개 교다. 그리고 이런 종립 중 고등학교
의 총 수는 전체 중 고등학교 수의 약 10%다.
종립 학교도 공교육 기관이므로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세속적 교과목
들을 모두 가르친다. 그러나 본래 전교활동의 일부로서 설립된 셈이므로 동
시에 정기적인 종교행사(예배와 미사 및 법회 등)나 종교관련 교과목을 대
체로 주당 1시간 이상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기가 일쑤다.2) 즉
1970년대까지는 기독교계 종립 중 고등학교들은 <성경>이라는 교과목으로
운영해왔고, 불교계 종립 중 고등학교들은 <불교>라는 교과목으로 가르쳐
왔었다. 그러니까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개별 종
립 학교들이 임의적으로 종교 교과목을 운영해 온 셈이었다.
이렇다 보니 실제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예컨대 종교 교과목을 담당하
는 교사들은 정식 교사 자격증을 가질 수가 없어서 교사처럼 불리긴 하지
만 학교의 서무 직원으로 채용되고, 신분 보장이나 연금 혜택 등 정식 교
사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또 학생들도 정규 교과목이 아니므로 소
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런 종립 중 고등학교 종교교육의 파행적 실태를 개선하고, 일반
중 고등학교에 있어서까지 수신(修身)과 인성 교육의 일환으로 종교교육의
중요성을 수용하고자 1980년대 초반부터 종교 교과목을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과정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3) 그래서 결국 제4차 고등
2) 사실 이러한 의무적 부과는 (<교육기본법>상은 문제가 없지만) 위헌의 소지가 있
다. 그러나 국공립학교만으로 교육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는 한국적 현실에서 사
립인 종립 학교들이 나름대로 종교활동의 일환으로서 종교교육을 강제적으로 부과
함은 어느 정도 묵인되어 온 셈이었다.
3) 특히, ‘기독교교육연합회’를 중심으로 종교계와 종교계 언론들이 앞장서 종교교육의
합법화를 위한 여론이 조성되었다(윤이흠, ‘종교교육의 교육적 의미’, 여산 유병덕박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1
학교 교육과정(1982-1988, 문교부 고시 제442호, 1981. 12. 31)에 <논리학
>, <철학>, <심리학>, <교육학>과 더불어 <종교>는 ‘자유선택과목’으로 지
정되었다. <종교>4)가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즉 종립 학교만이 아니라 일반 학교들을 포함하는 모든 고등학교
에서 <종교>를 보통교과의 정식 ‘자유선택과목’으로 채택하는 것이 가능해
진 셈이었다. 다만, ‘자유선택과목’으로 <종교>를 부과할 경우 <종교> 이외
의 과목을 포함, 복수로 과목을 편성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선택의 기회를
가지게 할 것을 단서로 달고 있다.5)
그러다가 제5차 고등학교 교육과정(1989-1994, 문교부 고시 제88-7호,
1988. 3. 31)부터 ‘자유선택과목’에서 ‘교양선택과목’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그리고 제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1995-2001, 교육부 고시 제1992-19호,
1992. 10. 31)과 제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2002-2007, 교육부 고시 제
1997-15호, 1997. 12. 30)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고등학교 ‘교양
선택과목’으로는 <종교> 이외에도 <철학>, <논리학>, <심리학>, <교육학>,
<생활 경제>, <생태와 환경>, <진로와 직업>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 ‘교양
선택과목’들은 4단위6)까지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4차 고등학교 교육과정부터 <종교>가 ‘자유선택과목’으로 포
함되었다는 것은 종립 학교의 경우 엄밀히 말하자면 없던 교과가 새로 생
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동안 가르쳐 오던 <성경>이나 <불교> 과목을
정규화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우선 교사들이 정식 자격증을 가진 교사들로
채워진다.7) 하지만 기존의 종교 교사들을 일시에 자격증을 가진 교사들로
사 화갑기념 한국철학종교사상사 ,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0, pp.937-938). 즉, 국가나 교육계가 아니라 종교계의 요구에 의하여 공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의 길
이 열린 셈이다.
4) 여기서 교과목명이 <종교학>이 아니라 <종교>인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까 종교를 정규 교과목에 편입시키고자한 사람들의 관심이 순수 학문적 종교학이
라기보다도 전교(傳敎) 내지 수신(修身) 및 인성 교육의 일부로서의 종교 자체이었
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동안 새로운 교과과정으로 개정될 때마다
종교학적 시각을 확대해 나아가고자 하는 일부 시도들이 있었지만, 교과목명이 <종
교학>으로 수정되지 않고 <종교>로 유지되는 한, 그에 적합한 교육목표를 또한 유
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5) 이 조항은 그 이후 교과과정이 본격화되는 제6차 교육과정 때에도 그대로 포함된
다(교육부, 한문, 교련, 교양선택과목 교육 과정 , 1997, p.20). 이것은 아마도 <종
교> 교과목이 강요되어 위헌시비가 있게 됨을 피하고자 마련된 규정이라고 할 것
이다.
6) 1단위는 매주 50分수업을 기준으로 하여 1학기(17주) 동안 이수하는 수업량이다.
종교학 연구 32
모두 바꿀 수는 없으므로 1년간 임시 집중연수 코스를 마련하여 3차에 걸
쳐 약 300명쯤 되는 기존의 종교교사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종립 학교의 종교교육이 정규 교육과정의 일부로 된다는 것은 자
율적인 종교활동의 일환으로서의 종교교육이 공교육의 성격을 더욱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였다. 제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칭만 있던 <종교>과의 구체적인 교육과정이 마련되었다. 우선
<종교>과 교육과정의 내용 체계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각
종단마다 각기 다른 자신의 특정 종교의 신행(信行)만을 가르치던 종전의
내용을 지양하여 모든 학생, 심지어는 일반 학교의 무종교인들에게도 가르
칠 수 있는 하나의 통일된 교과내용을 개발해 내야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보편적인 종교 이론과 종교 문화전통에 관한 내용이 새로운 교육과정의 중
심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개교 이래로 오래된 자체의 전교 지향적 종교교
육을 하여온 긴 전통을 하루아침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과도기적
상황을 고려하여 결국 두 가지 측면의 의미를 심각하게 반영하여 다음과
같은 교육과정의 내용체계가 성립되었다.
영역 내용
1. 인간과 종교 생활주변의 종교들
종교적 신념과 이해
궁극적 가치와의 만남
종교적 인격 형성
2. 세계 문화와 종교 유교, 불교, 도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힌두교의 전통과
사상 및 그 밖의 종교사상
3. 한국 문화와 종교 전통적인 민간 신앙
7) 종교 교사 자격증을 따려면 일정한 수의 종교와 교육학 과목들을 이수해야 한다. 그
리고 적어도 <종교사>, <비교종교학>, 및 <한국종교>의 세 과목은 필수과목으로 부
과되어 왔다. 아주 최근에는 필수과목이 더 확대되어 <종교교육론>, <종교학개론>,
<종교현상학>, <종교철학>, <한국종교>, <종교사회학> 또는 <종교인류학>, <종교심
리학>, <세계종교> 또는 <종교사> 또는 <비교종교학>, <현대종교>, <종교와 과학>,
<종교학사> 11과목 중 5과목을 이수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도 일부 저급 신학교들
에서 이러한 과목들에 적당한 교수요원을 확보하지 못하여, 예컨대 ‘종교사’ 과목을
개설해 놓고 <교회사>를 하거나, <교회사> 과목을 <종교사>의 대체과목으로 이수하
게 하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3
유교, 불교, 도교의 수용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의 수용
한국의 민족 종교
4. 종교경험의 이해 신앙의 여러 관점
종교의식과 종교적 실천
종교적 공동 생활
5. 현대 사회와 종교 성스러운 문헌들의 현대적 의미
종교와 세속 문화와의 만남
다른 종교들 간의 대화
종교와 사회의 이상 실현
6. 특정 종교의 교리와 역사 종교의 경전
종교의 교리
종교의 역사
일상생활 속에서의 종교적 생활
종교와 내일의 한국
<제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의 ‘종교’와 내용체계>8)
다시 말해서, 총 6개 영역으로 구성되고 그 중 1, 4, 5영역은 종교 이론
에 해당되고, 2, 3영역은 세계 및 한국 종교 문화 전통에 해당되며, 마지막
6장에서는 종전에 행해오던 자체의 종교교육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
었다.9) 즉 공교육적 종교교육과 종단 자체의 종교교육이라는 이중적 교육
이념이 절충된 셈이다. 이 두 가지 교육이념의 절충 문제는 이후로도 계속
고등학교 종교 교육과정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생각되고 있다. 즉 종교
8) 한국 공교육에서 최초로 구체화된 정규 종교교육 교과과정인 이 제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종교>과 내용체계는 필자가 초안을 마련하였고, 공청회와 심사위원회
를 거치며 일부가 수정(특히 ‘제6장 특정 종교의 교리와 역사’가 추가됨)되어 교육
부에서 확정하였다.
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내용체계가 곧 교과서의 장(章)이나 수업시간의 비중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로 이러한 내용 체계에 대하여 종립 학교들의
반발이 심각하였다. 기존의 전교 지향적 종교교육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 작다
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용체계는 제시된 바와 같지만 실제 교과서나 수업의 편성
은 융통성을 두는 것이 묵인되어 왔다. 따라서 제6차 교육과정에 맞추어 나온 교과
서들의 내용은 종교학 이론 및 종교 문화 전통들에 대한 것이 30%~40%이고 자체
의 특정 종교에 대한 것이 60%~70% 정도 되고 있다.
종교학 연구 34
교육과정을 초안하는 사람들은 현재 일반 대학에서 학문으로서만 종교학을
하듯이 고등학교에서도 종단 자체의 전교 지향적 종교교육을 그만두고 학
문적으로만 가르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종립 학교 종교교육의 현장
에서는 학교 설립의 취지를 살려서 전교 지향적 종교교육을 어느 정도 병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1997년에 확정되어 현재 시행중인 제7차 고등학
교 종교 교육과정도 이러한 두 가지 요소가 서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결국
확정되었다.10) 그러나 점차 전교 지향적 성향이 약화되고 학문적 성향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집필된 종교 교과서들은 심사를 거쳐 ‘인정
교과서’가 된다.11) ‘인정’ 심사는 지방 교육청의 소관 사항이다. 지방 교육
청에서는 종교학 교수와 일선 중 고등학교 종교교사들로 구성된 심사위원
회에 심사를 의뢰하여 그 결과를 참고하여 ‘인정’ 권을 행사한다. 대체로 인
정 심사에서 중시되는 것은 내용상의 오류와 타종교에 대한 비방과 왜곡된
기술 등을 바로 잡는 것이다.12)
10) 정진홍 교수가 초안을 작성하고, 필자가 심사위원장을 맡고, 교육부가 확정한 현행
제7차 고등학교 종교 교육과정의 내용체계는 다음과 같다.
영역 내용
1. 인간과 종교 궁극적인 물음과 문제, 종교와의 만남과
문제 해결,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종교의 의의와 역할
2. 종교 경험의 이해 여러 가지 인생 문제, 우주관 역사관 생사관, 경전과 종교 규범, 종교 의식과 종교적 실천
3.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 종교 사상과 배경, 참된 것과 깨달음, 종교의 특성 이해
4. 세계 종교와 문화 유교와 도교, 불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와
기타 종교
5.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다양한 인간관, 종교적 인간관
종교적 이해 종교적 자연관, 과학과 종교
6. 한국 종교와 문화 한국 불교와 문화, 한국 유교와 도교 문화
한국 크리스트교와 문화, 한국 무속 신앙과
민족 종교
7. 종교 공동체 공동체의 이념과 구조, 종교의 사회적 기능, 종교간의 화해와 공존, 종교적 인격 형성
8. 특정 종교의 전통과 사상 경전 교리 역사, 종교적 생활, 한국 종교와 문화 창조, 나의 종교 생활
설계
11) <국어>나 <국사> 교과서들이 ‘국정 교과서’들이고, <영어>나 <수학> 등의 필수과목
교과서들이 대개 ‘검정 교과서’인데 비해 선택과목이므로 ‘인정 교과서’인 셈이다.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5
그러나 종교 교과목이 중 고등학교의 정규 교육과정 속에 편입되면서 진
짜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연 한국의 모든 중 고등학생들에게 무리 없이 수
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사실 정규 교육과정의 하나이므로 종립 학
교뿐만 아니라 비종립 사립학교와 심지어 국공립학교를 포함하는 일반 학
교에서도 어디서나 교양선택과목으로 채택하여도 무방하다. 그러나 실제로
는 일반 학교에서 <종교>를 교양선택과목으로 채택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그 이유는 <종교>를 택하면 우선 원칙적으로 (앞서 언급되었듯이) 적
어도 하나 이상의 또 다른 교양선택과목을 더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교사 확보나 반 편성 등 번거로움이 많다는
것이다. 또 기존의 <종교> 교과서들은 대개 종단 배경을 가지고 집필된 것
이므로 국공립학교 등 일반 학교에서는 채택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독자
적인 교과서를 개발할만한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종립 학교치고 <종교>를 교양선택과목으로 가르치지 않는 학교는
없다. 그런데 종립 학교들은 대체로 교양선택과목으로 <종교>만 개설할 뿐
다른 과목을 복수로 동시에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대개 다른 교양선택과목을 개설해도 학생들이
선택하지를 않는다는 구차한 변명이다. 그러니까 <종교>는 중 고등학교의
보편적 교육과정 속에 포함된 정규과목이지만 사실상 종립 학교에서만 가
르치고 있는 매우 특수적 교과목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중 고등학교들은 학생들을 대개 무시험 (통학거리
등을 위주로 한) 컴퓨터 임의배정으로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종
교 신자도 일반 학교에 배정되는 반면에 무종교인도 종립 학교에 배정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불교인이 기독교 학교에 배정되기도 하고, 가톨릭
신자가 불교 학교에 배정되기도 한다. 분명히 종교가 강요되는 위헌적 소지
가 있다. 물론 본인이 극구 반대하는 경우에는 종교행사나 종교수업에 불참
해도 용인은 된다. 그러나 그렇게 혼자만 행동하기란 쉽지만은 않다. 이런
12) 필자는 10여 종의 <종교> 교과서를 위한 인정 심사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한 바
있다. 심사 기간이 대개 충분하지 못하므로 교육과정에 충실하여 집필되었는가 하
는 것을 정밀하게 따지기는 어렵다. 또 아직도 전교 지향적 옛날 교과서의 잔재들
이 남아 있다. 따라서 교과서의 이름도 단순히 ‘종교’라고들 쓰고 있지 않다. ‘종교
(기독교)’ 또는 ‘종교 (불교)’라고들 하고 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종교 일반 이론
의 내용이 확대되고 교과서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목격한다. 물론 일부 교
과서들이 인정 심사에서 탈락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삭제, 수정, 보완 지시
를 거쳐 통과시켜서 종단의 독자적 집필 의도를 존중해주고 있다.
종교학 연구 36
맥락에서라도 <종교> 교과목은 종전의 종파적 전교 지향적 성격을 지양하
여 비록 점진적으로라도 장차 더욱 학문적이고 수신(修身)과 인성 교육적
차원13)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즉 학생들의 ‘종교적 센스 또는 정조(情
操)’를 길러내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사용할 만한 비 종파적 <종교> 교과서가 나와야 할 것이다.
Ⅳ. 한국 종교교육의 전망
이상 간단히 검토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공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은 비
록 풀어야 할 난제들을 많이 안고 있으나 점차 확대 일로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몇 가지 덧붙여 보면, 우선 종단 차원의 다양한 종교교육이 빠르
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특징은 강원과 선원 및 향교와
서원 그리고 신학교 중심의 종교전문인들을 위한 종교교육보다는 평신도들
중심의 교양불교대학, 전통 예절 강좌, 성서(聖書)대학들이 매우 활성화되고
있다.14) 여기에는 그 동안 1980년대 이후 급속히 발달된 종교관계 매스컴
특히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15) 비록 종단 차원의 종
교교육이지만 이들의 확산은 분명히 공교육에서의 종교교육의 내용과 질에
도 점차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공교육의 일환으로서의 종교교육도 전반적으로는 확대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위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아직 일반 학교에서는 세속적 교과목의
일부에서만 종교가 취급되고, <종교>라는 교과목 자체는 종립 중 고등학교
13) 과연 이러한 수신(修身)과 인성 교육적 차원에서 종교교육이 현대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는 또 다른 큰 문제다. 특히 도덕교육의 일환으로 종교교육을 확대하려는 시
도는 실제 경험적 조사들에 의하면 매우 신중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 문제에 대
하여 김종서, “학교 도덕교육에 영향을 주는 종교적 변수”, 한국교육개발
원, 교육개발 , 14/6 (1992): 20-27 참조.
14) 다만 이렇게 평신도를 위하여 시작된 교양불교대학이나 성서 신학원들이 전혀 교
육부의 인가는 못 받은 무인가 교육기관이면서도 졸업생들에게 (공인 학위인 듯) 자체 종단 내에서만 통용되는 가짜 학위증들을 남발하여 문제가 되는 수가 있다. 즉 국가 공인 학위제도를 오염시키고, 자격이 안 되는 성직자들을 배출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다.
15) 불과 20년 전만 해도 변변한 불교개론서가 없어서 기본 지식도 잘 못 갖추었던 불
자들이 요즈음 불교방송의 교리상담 프로 등을 듣다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의 높
은 불교 지식을 갖고 있는 것에 심지어 격세지감을 느끼게까지 된다.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7
에서만 국지적으로 교육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정규 교육과정 속에 편입되
어 일반 중 고등학교에까지 확대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은 열린 셈이다.
한편 일반 대학에서도 미국에서처럼16) 종교학이 인문학의 일부로서 상당
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 국립 서울대학교에만 종교학
과가 있었으나 그 후 서강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 등에 설립되었고, 종교철
학과와 종교문화학과 등 유사학과들까지 합치면 꽤 여러 대학에 종교학 관
련학과들이 생겼다. 교양과목으로서의 <종교학개론>이나 <세계종교> 등은
거의 모든 중요 대학교들에서 개설하고 있으며, 수강생들이 늘고 있는 추세
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심지어 순수 신학대학이나 불교대학 등에서도 종교학
관련과목들은 거의 필수적으로 설강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근대화의 초기에는 과학적 합리적 지식에 대조되어 종교는 학문적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수가 많았다. 특히 <헌법>상의 ‘국교금지(정교분
리)’ 조항은 종교문제에 국가가 간섭할 수 없는 것으로 종종 간주되어, 종
교를 개인적 신앙문제 정도로 치부하고 국가적인 배려를 하지 않기가 일쑤
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국교금지(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가 다원
화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어느 특정 종교만을 지나치게 후원하는 이른바 국
교화(establishment)로 인한 상대적인 다른 종교들에 대한 박해를 피하기 위
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어야 한다. 즉 오늘날처럼 종교다원주의가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사실상 국교화의 위험이 거의 없고, 오히려 지나친 정교의 분리
가 종종 많은 국가로 하여금 국민의 영적 복지(spiritual welfare)에 대한 무
관심만을 초래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정교분리의 원칙은 오
늘날처럼 철저한 종교다원주의 시대에는 사실상 무의미한 셈이다. 그러므로
정교분리 조항 때문에 종교교육을 공교육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셈이다.17)
실로 우리는 한국동란 이후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아직도 빈부
의 격차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 덕분에
상대적으로 이제는 후진국의 오명은 벗어난 셈이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정
부는 이제 국민의 배고픔뿐만 아니라 생활의 질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16) 미국 대학들에서 종교학의 성립과 전개에 대하여, 김종서, “미국인의 종교에 대한
지적 관심변화: 미국 종교학의 성립과 발달”, 미국학 , 20 (1997): 343-358 참조.
17) 김종서, “종교교육 실태분석 ―종교교육의 이론적 체계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
학 종교사상의 제 문제 (VI) , 1990, pp.241-269. 특히 정교분리의 원칙이 깨지면서
공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이 강화되어온 과정은 미국의 경우에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종교학 연구 38
다시 말해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으로 건강한 국민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민들이 종교에 대한 건전한 지식
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영성 생활을 영위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은 정부의
기본적인 의무다.
특히 현대 한국사회에는 종교적 편견으로 인한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
고, 또 종교적 무지를 이용한 범죄들이 속출하고 있다.18) 그러나 국민들은
이들에 거의 대책없이 노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국민적 차원의 공교육으
로서의 종교교육은 일정한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사회에서 사는데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꼭 국민의 행
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국가는 일정
한 교육을 의무로까지 국민들에게 부과하면서 넓은 의미의 국가를 위한 ‘인
간적 자본(human capital)’으로 여기고 있다. 종교도 이제 마찬가지로 인식
되어야 한다. 즉 국민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건강할 수 있
게 해야 진정한 의미의 복지국가라면 결국 종교도 ‘국민적 자본’으로서 이
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19)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공교육으로서의 종교교육은 기존의 세속적 교
육이 지닌 국민적 자본 가치에 더욱 성숙한 영적 복지이념까지가 새롭게
접목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고차원의 국민적 자본 가치의 축적통로로서
한국 사회에서 기능하고 있다. 요컨대, 종교교육이 지닌 이러한 국가의 이
념적 인프라로서의 성격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공교육으
로서의 종교교육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정교화될 것이라고 우리
가 분명히 믿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논거다.
18) 실로 1930년대 백백교(白白敎) 사건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는 용화교(龍
華敎), 동방교(東方敎) 및 오대양(五大洋) 집단사망 사건, 휴거(携擧)를 내세운 시한
부 종말론 그리고 영생교(永生敎), 만민중앙교회(萬民中央敎會), 천존회(天尊會) 등
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관련 범죄 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은 신종교들
뿐만이 아니라 기성종교들에서까지 골고루 나타나고 있으며, 가출, 의료 사기, 재산
갈취, 부녀자 성폭행 등 다양한 양상을 띄고 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범죄수
법이 갈수록 악랄해지고, 규모도 매우 확대되어 금전 등의 피해 등도 상당한 수준
에 이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종교 관련 범죄들에 당면하여 국민들이 기본적인 종교교육만 되어 있어
도 피해는 줄어들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이러한 종교관련 범죄
와 종교교육의 상관관계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이것은 본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
또 다른 커다란 연구 테마를 초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9) 같은 책, pp.241-244.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3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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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철학 종교사상의 제 문제(VI) , 1990, pp.24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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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미국인의 종교에 대한 지적 관심변화: 미국 종교학의 성립과 발
달,” 미국학 , 20 (1997): 34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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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 경기도: 현대사회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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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상사 ,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0, pp.935-942.
종교학 연구 40
Issues and Vistas in Korean Religious Education
Kim, Chong-suh
Religious education in Korea has been mainly performed by religious
orders themselves and secular schools. Again, there are two kinds of
secular schools to offer religious curricular: public (non-parochial)
schools and parochial schools.
The Basic Education Law articulates, “Government-established (public)
schools should not give a religious education for a particular religion.”
However, this article is often misunderstood even as prohibition of
religious education in parochial schools. And academic studies of religion
do not matter with this article.
There are almost 400 parochial schools in Korea. Religion has been
officially included in regular curricular of junior high schools and high
schools since 1980s. It is the most import!ant issue how the education
for a particular religion can harmonize with the academic study of
religion in parochial schools. Non-religious students are often forced to
attend particular parochial schools in Korea. Thus it might be against the
religious free-exercise article of the Constitution that non-religious
students or the students of other religions are compelled to take the
course for a particular religion.
Despite present problems, it is still necessary that students have
chances to learn religious and spiritual sense for their life. In this
context, religion might be thought of as a national capital for spiritual
welfare of the people.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ㅡ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ㅡ
김 현 자*
1)
目次
Ⅰ. 머리말
Ⅱ. 신화, 자연의 과학에서 몽상의 시학으로
Ⅲ. 원형의 모방, 존재에의 향수
Ⅳ. 맺는 말
Ⅰ. 머리말
‘추락한 이카루스의 신화’, ‘맨주먹의 신화’, 요즈음 대중매체들은 20세기
후반 우리나라의 두 경제적 주역에 대해서 이러한 수식어를 사용한다. 특정
인들의 삶을 환기시키는 이 표현들은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 그들
이 비록 고대 그리스의 이카루스 신화의 내용은 모른다 할지라도ㅡ 단지
일시적인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
에게는 윤리적 경종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현재의 역경을 헤치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부추기는 등, 사람에 따라 다양한
심리적, 실존적 변화를 초래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집단의 정신과
삶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이데올로기나 인물 또
는 사건에 대해 오늘날 매스컴에서는 흔히 신화라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레비스트로스와 엘리아데는 20세기의 뛰어난 신화 연구자라는 점에서 공
통점이 있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가 21세기 정신 문명에 밝은 빛을 던져줄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그리하여 그들의 학문적 업적이 또 다른 신화가 되
어 그 힘들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예견된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이
* 서울대 강사, 종교학
종교학 연구 42
글의 부제는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연구가 21세기 정신문명에 끼
칠 이러한 영향을 시사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사실 레비스트로스와 엘리아데의 지적 편향과 연구방법은 판이하게 달라
서 공통점보다는 차이점들이 더 많으며, 심지어 레비스트로스는 엘리아데가
행한 작업들의 학문적 객관성에 대해 비판을 넘어 불신의 눈길을 던지기까
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신화적 사고를 원시사고, 고대사
고, 또는 주술-종교적 사고와 동일시하면서 이 사고의 특성들을 탁월한 통
찰력으로 규명한 신화학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레
비스트로스와 엘리아데의 신화연구의 일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
이 밝혀낸 신화적 사고의 특성들을 소개하겠다.
엘리아데가 주목하고 강조한 면은 ‘신화를 사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그는 신화적 사고의 주요 특성은 바로 신화를 사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통
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엘리아데에게 신화를 사는 인간의 존재방
식은 곧 종교인의 존재방식으로, 그는 이러한 존재 방식 ㅡ 엘리아데는 이
것을 고대 존재론이라 명명했다ㅡ 을 20세기 중반이래 합리적인 서구 정
신이 대면하고 있는 한계 또는 위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만든 주체인 원시정신 ㅡ 레비스트로스는 이 정신
을 야생의 사고라 불렀다ㅡ 자체에, 그리고 신화 자체의 논리와 특징들에
주목하여 신화적 사고의 특성들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였다. 엘리아데와는 달
리 비록 그가 신화적 사고를 근대 이후 서구 문명이 겪고있는 위기들을 극
복케 해줄 대안적 사고 페러다임으로 공공연히 내세우지는 않지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밝혀낸 신화적 사고는 바로 21세기가 대안적 사고로 내세우
는 환경생태적 사고, 생명적 사고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ㅡ 이 점은 앞으
로 보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적 사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뿐 아니라 대중들이 기울이는 신화에의 관심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근원적인 물음, 즉 ‘왜 첨단 과학의 시대인 21세기에 사람들은 신
화에 관심을 가지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어떤 해답을 제시해 줄 것이다.
Ⅱ. 신화, 자연의 과학에서 몽상의 시학으로
1. 신화, 원시과학인가?
노르웨이 신화는 지진이 왜 발생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최초의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43
신의 아들들이 서리 거인 이미르를 죽이자 이미르의 소금기 있는 피가 흘
러 바다를 이루었고, 이미르의 뼈는 산을 이루고 살은 땅을 이루었다. 거인
이미르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일부는 아직 살아서 거대한 물
푸레나무 아래에서 잠자고 있는데, 그가 몸을 뒤척이면 땅이 흔들린다.
하늘과 땅이 창조되기 이전의 세계는 어떠했는지, 하늘과 땅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등을 한 중국 신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옛날에 하늘과 땅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는, 상(像)만
있고 형태는 없었다. 고요하고 컴컴하고, 흐릿하고 아득하고, 까마득하고 깊
어서 그 문을 알 수가 없었다. 두 신(神)이 함께 섞여 생겨나 하늘과 땅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깊숙하여 그 끝나는 곳을 알지 못하고, 매우 커서
그 멈추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나뉘어 음양(바陽)이 되고, 또 나뉘어
팔극이 되었으며,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 어울려 만물이 형성되었다.
어수선한 기운은 벌레가 되고, 맑은 기운은 사람이 되었다.”1)
각 나라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낮과 밤이, 산과 바
다가, 어떤 섬이, 한 식물 종(種)이 또는 동물 종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인
간은 또 어떻게 생겨났는지, 눈, 비, 얼음, 서리, 지진, 화산, 번개같은 자연
현상들이 왜, 또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하는 신화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종류의 신화들은 과학과 관심 영역을 공유하고 있으며, 과학처
럼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화들이
우주 구성물의 생성과 자연 현상의 발생을 설명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과학
이 설명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과학적 인과론의 관점에서 보면, 비합
리적이고 비논리적인 듯이 보이는 신화의 설명방식은 무지몽매한 사유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화에 관심 가졌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고대인들이나 원시인들이 지적으로 덜 발달하
여, 우주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창
조와 인류의 발생을 그렇게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신화를 원시과학으로 가
치폄하하면서 신화와 과학을 대립시키는 관점의 기저에는 이처럼 전과학적
이고 비논리적인 신화/합리적, 논리적인 과학이라는 관념이 깔려 있었으며,
이때 신화적 사고는 대체로 주술?종교적 사고, 또는 원시사고, 고대사고와
동일시되었다.
오늘날 신화학자들은 이러한 신화/과학의 대립구도를 부정한다. 신화가
1) 淮南子, ?情神訓?.
종교학 연구 44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견해에 가장 강하게 반발하며 신화적 사고의
논리성과 과학성을 밝혀낸 이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를 연구한 프랑스 인
류학자 레비스트로스다. 그는 오늘날의 토테미즘 Totémism d'aujourdhui
과 야생의 사고 La Pensée sauvage 에서 ‘원시인들은 경제적?본능적 욕
구에 충실한 존재로서, 주술적이며 따라서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다’라는
주장의 근거들을 반박하는 수많은 예들을 제시하면서 신화적 사고와 과학
적 사고의 차이점들 및 신화의 속성들을 규명하였다.
초기 민속학자나 인류학자들이 신화를 만들어내는 원시사고 또는 고대
사고의 지적 열등성을 주장했던 근거는 대개 언어 영역과 기술?경제적 영
역의 관찰에서 나왔다.
고대사회나 원시사회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이 사회들은 현대 문명사
회에 비해, 또 그 사회 내에서 개별적 특수어들에 비해, 일반어나 추상적
관념어가 덜 발달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추상적 관념어의 빈곤을
종종 원시인들의 지적 열등성을 말해주는 근거로 내세우곤 하였는데, 일반
어 또는 추상적 개념들은 구체적인 실재물의 속성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
심을 가졌을 때, 또 그 속성들을 구별할 수 있기 위해 보다 잘 깨어있는
관심을 가졌을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먼저 추상
적 관념어의 풍부함이 문명화된 언어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밝혀주는 예들
이 경시되어왔다고 말한다. 북미 서북부에 사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치누크
어’가 널리 쓰였는데, 이 언어를 사용하는 인디언들은 모든 소유물이나 특
질들을 거의 추상적 언어로 표현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그 악인이 그 가
엾은 아이를 죽였다’라는 말이 치누크어에서는 ‘그 사나이의 악이 그 아이
의 가엾음을 죽였다’라고 표현된다. 그런가 하면 ‘그 여자는 너무 작은 바구
니를 사용했다’라는 표현은 ‘그 여자는 양지꽃의 뿌리들을 조개 바구니의
협소함 속에 넣었다’라고 표현된다.2)
그런데 언어 영역과 관련하여, 대다수의 초기 민속학자, 인류학자들은 이
율배반적인 태도를 드러낸다고 레비스트로스는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반대
의 경우, 즉 일반적 용어들이 특정 명칭들보다 많을 때의 경우도 역시 야
만인들의 지적 빈곤을 확인하는 증거로 활용되었으며, 이 경우 일반적 용어
들의 발달을 원시인들의 유기체적 욕구 또는 경제적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
2) F. Boas, “Handbook of American Indian Languages,” Part.Ⅰ, Bulletin 40, Bureau
of American Ethnology, Washington D.C., 1911, pp.657-658. Claude Lévi-Strauss,
La Pensée sauvage, Plon, Paris, 1962, p.3에서 재인용.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45
로 민속학자들은 설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연구자들이 개별적 특수
어들보다 일반어들이 더 발달한 원시사회와 접했을 때는, 그들은 추상적 개
념어의 빈곤을 증거로 내세워 원시인을 지적으로 열등한 인간으로 간주했
던 자신들의 견해를 수정하려 하지 않고, 이번에는 일반어의 발달을 지적
욕구가 아닌 생존을 위한 본능적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말
하자면 원시인을 동물의 영역으로 귀속시킨다는 것이다.
기술?경제적 영역과 관련해서, 프레이저, 레비 브륄과 같은 인류학자들
은 원시사회의 낮은 단계의 경제와 기술을 곧 원시사고의 단순함이나 조야
함으로 간주하였으며, 의식적이며 복합적이고 일관된 분류체계는 낮은 단계
의 경제와 기술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했다. 원시사회가 상당히
복잡하고 체계적이며 의식적으로 고안된 토테미즘이라는 분류체계에 의해서
조직되고 있음을 관찰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인들의 사고는 단순하고 조야
하다는 편견이 민속학자들로 하여금 일관되고 복합적이며 의식적인 원시인
들의 분류체계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한다.3)
“야만인들은, 사람들이 즐겨 상상하듯이, 동물적 조건들을 겨우 탈피하여
욕구와 본능에 내맡겨진 존재도 아니며, 또 그들의 의식이 감정에 지배되며
혼돈과 참여 속에 빠져있었던 적은 결코, 어디서도 없었다”4)고 강조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원시인들이 토템적 동?식물에게 기울이는 관심은 생리적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던 말리노프스키와 신비적 참여로써 원시심성
을 규정했던 레비 브륄을 비판한다.
신석기 시대에 터득한 위대한 문명의 기술들, 예컨대 토기 제작, 직조,
농경, 가축 사육과 같은 거대한 업적들을 오늘날 그 누구도 우연한 발견의
축적이라거나 어떤 자연현상을 수동적으로 눈구경해서 드러난 것으로 생각
할 수는 없으며, 이 기술들 각각은 수세기에 걸친 능동적이고 조직적인 관
찰과 대담한 가설을 세워 반복해서 실험하고 검증하는 숱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또 신화와 함께 탄생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는 현대의 기술로는 도저히 이루
기 어려운 과학?기술적 위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인들은
그것을 마치 우연의 산물인양, 또는 과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적의 산
물인 듯한 뉴앙스를 풍기는 ‘불가사의’로 표현하면서 은연중 고대인의 그
3) 레비스트로스에게 신화적 사고와 야생의 사고 또는 원시사고는 동의어이며, 토템
분류의 논리는 바로 신화적 사고의 논리이다.
4) La Pensée sauvage, p.57.
종교학 연구 46
뛰어난 과학성과 기술성을 부인하거나 외면하고 싶어한다.
고대인이나 원시인들의 자연환경과의 밀접한 관계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세계 여러 지역의 고대 또는 원시 사회 연구자들에 의해 일찍
이 확인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환경에 대해 정확
하고도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현지조사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예리한 식별력으로 바람, 빛, 계절의 색깔, 물결의 장막, 파도의 변동, 기류와
해류 등과 같은 자연 현상의 미묘한 변화들 및 바다와 육지의 온갖 종류의
생물에 대해, 그 종(種)에 고유한 특성들을 파악했다. 끝없는 지적 호기심과
관심, 체계적 관찰 및 시행착오의 반복들이 없이는 불가능한, 그래서 자연의
과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러한 지식들이 단지 경제적, 실용적 목적만을 위
해 구축된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수많은 예들을 열거하면서, “원시인들의 객
관적 지식에의 욕구가 비록 근대 과학이 실재들에 몰두하는 정도만큼 실재
들 쪽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대 과학에 비견될만한 지적
보행과 관찰방법들을 내포하고 있다. 두 경우 다 우주는 필요한 것들을 충족
시키는 수단이자 사고의 대상이다”라고 레비스트로스는 주장한다.5)
고대인이나 원시인을 지적 미개인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
는 자연계 및 인간계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설명 방식과 이
른바 신화적 설명 방식이라고 부르는 원시인과 고대인의 설명방식과의 차
이점이다. 과학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보면 신화적 설명은 지적, 논리적 인
식의 결여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를 필연적 관계들의 설정으로, 과학을
인간과 자연,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관찰하여 그것들에 대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체계로 이해한다면, 신화는 근대 과학 못
지 않게 논리적이며 과학적임을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여러 저서 속에서 수
많은 신화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므로 만일 원시과학을 지적으로 열등
한 전과학적 설명체계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화를 고대 또는 원시
과학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학은 근대 과학과는 다른 다차원의
과학, 구체의 과학으로, 근대 과학의 논리가 지적인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반면, 구체의 논리는 정서적인 면과 지적인 면 두 면에서 포착된다.
2. 신화, 다차원의 과학, 구체의 과학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와 과학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인간정신
5) 앞의 책, p.5.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47
의 발달단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과학적 인식의 공략을
받을 때 나타나는 두 전략적 층위들이다. 하나는 지각과 상상력의 층위에
대략 맞추어졌고, 다른 하나는 거기를 벗어난 것이다. 두 가지 다른 길을
통해 모든 과학 ― 그것이 원시과학이건 근대 과학이건― 의 목표인 필연
적 관계들에 이를 수 있듯이, 전자는 감각적 직관에 매우 가까운 길에서
필연적 관계들에 도달하려고 하고, 후자는 감각적 직관에서 멀리 떨어진 길
에서 그 관계들에 도달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신화와 과학은 동일한 현
상의 인과관계를 각기 다르게 설명하는 상반된 설명체계가 아니라, 동일 현
상의 다른 진실, 다른 의미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서로 다른
설명체계이며, 신화적 설명체계는 감각적 직관이 보다 강하게 작용하는 설
명체계라는 것이다.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는 두 가지 다른 사유방식이다. 태양은, 과학
적 사고에게는 플라스마 상태의 입자들이 중력에 의해 뭉쳐있는 덩어리이
지만, 신화적 사고에게는 매일 아침 동쪽에서 떠올랐다 저녁에 서쪽으로 지
고 북쪽의 어두운 계곡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다시 동쪽에서 떠오르는
우주의 규칙적인 질서이자 변치 않는 찬란한 진리의 빛, 그래서 신적이고
제왕적인 권능의 현현이다. 과학적 사고에게, 봄에 식물을 싹 틔우고 곡물
의 이삭들을 발아시키는 비와, 삶의 터전들을 파괴시키고 뭇 생명들을 앗아
가는 대홍수의 비는 동일하다. 그것들은 수소와 산소가 2 : 1의 비율로 합성
되어 이루어진 물이며, 이 물은 한랭기단과 온난기단이 만나 정체 상태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 사고에게는 전자는 단비, 풍요를 가
져다주는 곡우(穀벌)이며, 후자는 폭우(暴벌)이다. 또 전자는 조상의 은덕(恩
德), 신의 은총의 표시이며, 후자는 조상의 분노, 신의 분노의 표시이다. 이
처럼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는 서로 다른 사유방식이기 때문에 신화학
자들은 신화를 과학적 시각에서 읽기를 거부하며, 신화를 전과학으로 간주
하는 것은 신화적 사고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박한다.
근대 과학이 필연적 관계들을 추상적 개념들을 이용해서 설명하는 추상
의 과학이라면, 신화는 구체적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필연적 관계들을 설명
하는 구체의 과학이라고 레비스트로스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신화의 언어는
감각의 언어이다. 대상들의 개별적 특수성들에 무관심한 과학적 개념어가
아니다. 노르웨이 신화는 서리 거인 이미르가 거대한 ‘나무’ 또는 ‘우주목’
아래에서 몸을 뒤척이면 땅이 흔들린다고 하지 않고, 거대한 ‘물푸레나무’
아래라고 구체적으로 나무 이름을 명시한다. 노르웨이인들에게 물푸레나무
종교학 연구 48
는 일반적인 나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감각의 세계는 일반어
나 추상어보다는 특수어, 구체어를 더 선호한다. 우리가 ‘먹거리’ 하면 기껏
해야 양식, 음료수, 간식 등 몇 가지 용도들이 떠오르는 것이 고작이지만,
또 과학적 사고에게 아이스크림은 탄소, 수소, 산소, 유황, 질소의 함량비로
환원되지만, 신화적 사고에게 아이스크림, 생크림, 초콜릿, 우유, 김치, 고사
리, 치즈, 커피, 포도, 수박 등은 저마다 다른 세계를 상기시키며 여러 다양
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주체인 나의 세계와 나의 생리적 욕구
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인 음식의 세계를 나와 너가 교감하여 소통하는
우리의 세계로 융합시킨다.
취리히의 한 동물원 원장이 돌고래와 처음으로 상면했을 때의 느낌을 표
현한 다음의 글은 문화계의 인간과 야생계의 동물이 함께 융합하여 만들어
내는 신화의 세계를, 그리고 이 세계는 과학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를 잘
보여준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돌고래의 인간적인 눈초리, 괴상한 콧구멍, 어뢰
같은 몸짓과 그 빛깔, 유난히 매끈매끈하고 반지르르한 피부결, 부리 모양의
입 속에 가지런하게 4열로 나온 뾰족한 이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의 감동을 서술하고 있다.
“폴립피는 물고기와는 전혀 다르다. 70센티미터가 채 못되는 거리에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의 눈과 마주칠 때면 잠시 숨이 막히고, 이것이 진짜 동물인가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너무도 신선하고 신비하
고 또 괴상쩍은 동물이어서 마법에 걸린 사람이 동물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동물학자의 두뇌는 그것이 학명
으로 Tursiops truncatus라 불린다는, 냉정한 그리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사실만을 연상할 뿐이다.”6)
신화적 사고에게 자연은 인간이 마음껏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돈단무심
한 물질적 대상인 천연자원이 아니다. 자연의 움직임과 변화는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아니 그보다는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동일 유기체의 일부분이다. 나이 쉰이 넘어 농사꾼이
된 윤구병씨7)가 전북 변산에 내려간 뒤 서툰 농사일을 배우느라 쩔쩔매면
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6) La Pensée sauvage, pp.52-53.
7) 전 충북대 철학과 교수.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49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물으며 달력을 쳐다보던 윤씨는 “으응, 올
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는 거여”하는 동네 할
머니 말씀에 정신이 번쩍났다. … 윤씨는 “사람에게 철을 가르치는 것
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한 철 또 한 철 자연과 교섭하는 가운데
밖에서 나는 봄철, 여름철, 가을철, 겨울철을 내면화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철이 나고 철이 듭니다.”
라고 말한다.8)
이웃집 할머니에게 콩 심을 때를 물어보던 윤구병씨는 아마도 ‘모월 모
일 쯤’이라는 대답을 예상하며 달력을 보았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삶이 달력 속의 한 숫자와 연결되어 꾸려질 정도로 우리가 긴요하게 사용
하고 있는 이 달력이라는 것은 지구의 공전 주기를 대략 365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달력이 나타내는 것은 날짜에 따른 태양의 고도 차
이이지 기상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경작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빛의 온도
나 광도 뿐 아니라 습도, 바람 등 여러 요소가 있다. 올해의 지금은 작년보
다 더 추울 수도 있고, 비가 더 많이 왔을 수도 있다. 달력은 이러한 기상
변화들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지만, 감꽃은 기후에 따라 피고 지면서 콩
심을 때를 정확히 알려준다. 그래서 농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대인이
나 원시인들처럼 자연의 삶에 자신의 삶을 동화시키면서, 우주의 질서를 자
신 속에 내면화하면서 살아간다.
“이론적 지식은 감정과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인식은 객관적인 동
시에 주관적일 수 있으며, 인간과 살아있는 존재들간의 구체적 관계는 때로
는 과학적 인식의 세계 전체를 감성적 뉴앙스로 채색한다. 특히 과학이 전
적으로 자연적인 그러한 문명 속에서는”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9)
신화적 사고는 지혜가 아직 열리지 않아서 인간과 동?식물을 뒤섞어 같
은 종(種)으로 혼동하는 미개 사고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세계 여러 지
역에서 차용한 숱한 예들을 통해 보여주며 강조했듯이, 원시인들은 ‘같은
속(屬)에 속하는 종(種)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까지도 구별할 수 있는, 생계
수준을 넘어서는 세밀하고 정확한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화 속에서
사람의 이야기가 동?식물이나 천체, 그 밖의 자연현상들과 결부되어 즐겨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신화적 사고가 사회집단과 자연 종(種)과를 동일 종
8) 윤구병씨가 어린이들을 위해 쓴 ‘계절 그림책’을 소개한 신문 기사(한겨례, 2000/
6/19)에서 인용.
9) La Pensée sauvage, p.53.
종교학 연구 50
으로 혼동해서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사회집단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성격들과 차이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종(種)의 수준에서 드러나는 여
러 특질과 차이들을 깊이 파악하여 이 두 다른 질서의 세계를 서로 대응시
켰기 때문이다.10) 또 신화 속에서 신들의 모습이 종종 동?식물이나 천체
또는 자연현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자연을 인간의 인식이 그 변화무쌍
한 움직임의 원리를 속속들이 다 파악할 수 있는 대상, 그리하여 지배, 착
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그 무한하고 다양한 힘
들에 의존해 있는 경외의 대상,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 무궁한 변화의 원리
를 다 알 수가 없는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
시키기 위해 시애틀의 인디언 부족에게 그 부족의 땅을 팔 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이 워싱턴의 대통령에게 보낸 다음의 서한은 자연과 인간과
의 관계에 관한 이러한 신화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
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
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그걸 어떻게 사
겠다는 것인지요?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 속의 안
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
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
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
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
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 줍니다. 강
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 줍니다. 그러니까 그대
10) 앞의 책, p.178.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1
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이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는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쓰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게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신성한 땅으로 여겨 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 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이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
다. 땅에 일이 생기면 땅의 아들에게도 일이 생깁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것
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이, 그
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
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
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
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륙되
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
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 냄
새에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
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 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
그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 신세가 될 때에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
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이 사랑
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 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 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
하듯이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이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종교학 연구 52
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
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11)
바지직 마른 장작을 불태우며 널름거리는 불꽃, 따뜻한 바람에 실려 촉
촉이 젖어드는 봄비를 맞고 연초록 잎을 피워내는 버드나무, 단단한 대리
석, 뭇 생명을 키워내고 다시 걷어들이는 대지 등, 신화적 사고는 이처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우주의 움직임인 경외로운 신의 몸짓을 자신의 온 몸
으로 느낀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물, 불, 나무, 흙, 돌, 하늘, 새들에 관한
‘자연의 과학’은 ‘몽상의 시학’으로, ‘생명의 예술’로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는 과학과 종교, 윤리, 詩와 예술이 함께 어울리는 다차원의 과학, 총
체적 인간학이다.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의 아들 파에톤(Phaeton)은 자신이 하루동안만
태양수레를 몰도록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랐다. 태양신은 아들이 자기 대
신 태양수레를 몰 경우 겪게 될 온갖 위험을 이야기하며 겁을 주면서 분에
넘치는 아들의 욕망을 저지시키려 하였으나, 파에톤은 고집을 꺾지 않고 막
무가내로 졸랐다. 힘닿는 데까지 아들을 타이르다 지친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하고는 파에톤을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태양 수레가 있는 곳으
로 데리고 갔다. ‘이 태양 수레는 바퀴 굴대도 황금, 뼈대도 황금, 바퀴도
황금이었고 바퀴살만 은이었다. 마부석에는 태양신이 쏘는 빛을 발사할 감
람석과 보석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고 신화는 이야기하면서 동틀 무렵의 장
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파에톤이 벅찬 가슴을 안고 태양 수레를 만져보고 찬탄하고 있을 즈음, 붉게 동터오는 동녘에서는 새벽잠을 갠 아우로라12)가 장미꽃이 가득 핀
방의, 눈부시게 빛나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별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루키페르13)가 긴 별의 대열을 거느리고 천계의 제 자리를 떠나고 있었
다. 태양신은 이 루키페르가 떠나는 것과, 하늘이 붉어지면서 이지러진
달빛이 여명에 무색해지는 것을 보고는 발빠른 호오라이14)에게 분부하
여 천마(天馬)를 끌고 나오게 했다. 호오라이가 분부를 시행했다. 호오라
이들은 천장이 높은 마굿간에서 암브로시아를 배불리 먹은 천마를 끌어
내어 마구(馬具)를 채웠다. 천마들은 숨쉴 때마다 불길을 토했다.”
11) J. Campbell, 신화의 힘 , 이윤기 옮김, 고려원, 84-87.
12) 새벽의 여신.
13) ‘빛을 부르는 자’라는 뜻.
14) 때(시간)의 여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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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의 순간을 묘사하는 이 부분이 한편의 詩라면, 아들 파에톤이 무사
히 태양수레를 몰고 돌아올 수 있도록 천계의 지형을 자세히 설명하며 아
들에게 신중한 처신을 당부하는 부분은 과학, 윤리, 또 과학 너머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되도록이면 채찍은 쓰지 말고 고삐는 힘껏 틀어잡도록 해야 한다. 천
마는 저희들이 요량해서 잘 달릴 게다만 이들의 조급한 마음을 누그러
뜨리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천계의 다섯 권역(圈域)을 곧장 가
로질러 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세히 보면 세 권역의 경계선 안으로
조금 휘어진 샛길이 있다. 이 길을 잡으면 설한풍이 부는 남극 권역과
북극 권역을 피해 갈 수가 있다. 이 길로 들어서면 바퀴자국이 보일게
다. 하늘과 땅에 고루 빛을 나누어주려면 너무 높게 몰아서도 안되고, 너무 낮게 몰아서도 안 된다. 너무 높게 몰면 창궁에 불이 붙을 것이고, 너무 낮게 몰면 대지를 그을리고 만다. 그 중간이 가장 안전하니 명심
하여라. 오른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는 또아리 튼
뱀15)이 있다. 왼쪽으로 너무 치우쳐 신들의 제단을 태워서도 안 된다. 이 사이를 조심해서 지나가도록 하여라.”
아버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한껏 우쭐해진 파에톤은 태양수레를 속력을
내어 몰았다. 태양신 대신 파에톤이 올라타 갑자기 수레의 무게가 가벼워진
탓에 천마들은 제멋대로 날뛰었으며, 또 파에톤은 황도 12궁의 동물들을
보고 놀라 그만 天馬의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태양수레를 이끌던 네 마리
의 천마가 마음대로 날뛰어 수레가 궤도를 이탈하여 산과 바다와 땅이 불
길에 휩싸였다. 이때 리비아는 사막으로 변하였으며, 이디오피아인들은 태
양의 열기 때문에 피가 살갗으로 몰려 피부가 새까맣게 되었다고 한다.16)
이처럼 하나의 스토리 속에 우주의 여러 차원을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다
차원의 과학인 신화는 오늘날 그 역동적인 생명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다. 그 이유는 신화적 사고의 총체성은 현대 우리들의 사유양식과 전혀 다
르기 때문에 신화가 옛날과 같은 성격을 가질 수 없으며, 또 과학적 사고
의 출현과 함께 신화는 공중 분해되고 말았고 이제는 그 파편들만 남아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현대를 ‘신화 분산의 시대’, ‘신화 해체
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신화의 생명력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으며,
또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의식의 심층에서, 예술가나 시인의 정신
15) 뱀자리 성좌.
16)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9, 61-78쪽.
종교학 연구 54
속에서, 또는 민중 집단의 의식 속에서 신화적 사고는 늘 생생하게 살아
작용하면서 인간의 삶을 온기있고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신화’의 힘을 느낀다.
지성과 감성이 함께 어울려 작용하여 우주의 여러 차원을 동시에 연결지
어 의미를 부여하는 다차원의 과학인 신화,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이 힘을
“의미없음에 항거하는 해방적” 힘이라 표현했다.17)
이제 신화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여기서 찾으려했던 엘리아데에게 눈길
을 돌려 신화가 지닌 구원적 힘의 인간학적 의미를 알아보자.
Ⅲ. 원형의 모방, 존재에의 향수
현대인들에게 고대 신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이야기거리? 고대
인들의 삶의 흔적들? 창조적 영감의 원천? 인간 심혼의 이미지? 엘리아데
는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물음 자체에 문제를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고대 신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원시인에
게 원시 신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렇게 물음이 제기되어야지만 우리는
엘리아데의 신화관을 이해할 수 있는 바른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먼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엘리아데가 신화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펴보자.
1. 살아있는 신화, 원형의 모방
엘리아데의 신화관에서 창조신화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아니 그
보다는 엘리아데에게 신화는 항상 어떤 창조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신성한 역사(une histoire sacrée, a sacred history)를 이야기한
다. 그것은 원초의 시간, 우화적인 시초의 시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언급한다. 달리 말하면 신화는 어떻게 초자연적 존재들의 무훈 덕분에
하나의 실재 ― 그것이 우주라는 총체적 실재이건, 아니면 단지 한 단편
(어떤 섬 한 식물 種, 인간의 어떤 활동, 어떤 제도)이건― 가 존재하게
17) “신화적 사고는 지칠줄도 모르고 경험과 사건들을 배치하고 또 재배치하여 그것들
에서 의미를 발견해내는 경험과 사건들의 포로만은 아니다. 신화적 사고는 과학이
먼저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의미없음’에 항거하는 해방자이기도 하다.” La Pensée
sauvage, p.33.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5
되었는가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신화는 늘 어떤 사물이 어떻게 생겨났는
지,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나를 말해주는 어떤 창조의 이야기이다. 신화
는 실제로 일어났던 것,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신화의 인물들은 초자연적 존재들이다. 이 초자연적 인물들은 특별히 장
대한 시초의 때에 그들이 행했던 것 때문에 알려졌다. 신화는 이들의 창
조적 활동을 드러내 보이고 이들 작품의 신성성(sacralité, 또는 단순히
초자연성 sur-naturalité)을 공표한다. 신화는 神聖한 것들(또는 초자연적
인 것들)이 다양하게 그리고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세계 속에 뚫고 들어
오는 聖의 세계 속으로의 침투를 묘사한다. 실제로 세계를 건설하고 또
그것을 오늘날의 세계로 만든 것은 바로 이 聖의 침투이다.”18)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아데에게 있어 신화는 신적인 존재들, 초자연적
인 존재들, 또는 천체의 존재들의 태초의 활동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신성
한 이야기이고, 하늘과 땅, 인류, 동?식물 또는 인간이 사용하는 제도나 도
구 등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작업을 이야기하므로 창조의 이야기이다.19) 그래
서 그는 신화를 전설이나 민담들과 같은 이야기 유형과 엄밀히 구별하여, 후
자를 신성성이 결여된, 다시 말해서 위상이 격하된 신화들로 간주한다.
뒤메질이나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다른 신화학자들에 비견해 볼 때 엘리
아데는 신화의 범위를 다소 협소하게 규정하는데20), 이는 그가 인간의 행
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해서, 즉 현실의 양태 일
반에 대해서 본받아야 할 신적 모델을 제시하는 이야기들만을 신화로 간주
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세람섬의 한 신화에 의하면, 태초에는 인간들이 불멸의 삶을
18) 수없이 다양한 면들을 지닌 신화를 몇 마디 말로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았던 엘리아데는, ‘신화는 지극히 복합적인 문화적 실재이므
로 이에 대한 접근과 설명은 수많은 보충적인 관점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모
든 학자들에게 또 동시에 비전문가들에게도 다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정의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모든 고대 사회와 전통 사회들에서의 신화의 전 유형들과
모든 기능들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정의를 찾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고 자문하면
서, 위와 같이 신화를 정의한다. Mircea Eliade, Aspects du mythe, Gallimard
(folio essais), Paris, 1963, pp.16-17.
19) 이러한 엘리아데의 신화 이해는 신화/전설/민담을 엄밀히 구분하는 말리노프스키의
신화 이해와 그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유형을 셋으로 구분하는 말리노프
스키와는 달리, 엘리아데는 한편으로는 참된 이야기로서의 신화, 다른 한편으로는 민
담이나 전설, 우화 등과 같은 신성성이 결여된 다른 유형의 이야기들로 구분한다.
20) 인도-유럽제족의 신화를 연구하였던 뒤메질은 전설, 민담, 서사시, 발라드 등을 모
두 넓은 의미에서의 신화 범주에 포괄시키며, 또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들에서 구전되는 이야기 전부를 신화로 간주한다.
종교학 연구 56
누렸으나 ‘태양의 인간’이라 불리는 괴한이 한 처녀를 납치하여 산채로 묻
어 죽였기 때문에 그 벌로 인간은 영생의 삶을 상실하였다고 한다. 세람섬
의 원주민들은 살인이 그들을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의식을 통해 이 처녀와 살인자를 되새긴다.21) 다시
말해서, 세람섬의 원주민들은 매해 의례에서 이 신화를 낭송함으로써 유한
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이게 함과 동시에, 살인의
응징을 상기시킴으로써 그 사회에서 살인의 금기가 지속적으로 준수될 수
있도록 한다.
중국의 지대는 서북쪽이 높아서 강들이 동남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중국
의 한 고대 신화는 중국의 이러한 지형적 경사는 그 옛날 공공(工共)과 전
욱(顚頊)의 왕권 다툼의 결과라고 이야기함으로써22) 통치자들의 개인적 욕
망이 초래할 위험들을 경고한다.
이처럼 고대사회 또는 원시사회에서 신화는 인간이 왜 현재와 같은 삶을
누리게 되었나를 이야기해줄 뿐만 아니라,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 또는 초자
연적 존재들의 행위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행
위에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며 생생하게 살아 작용한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신화적 사유의 구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가 살아있는’ 그러한 사
회 ― 고대 사회, 전통 사회, 전근대 사회23) ― 의 신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살아있는 신화’의 강조로 인해 엘리아데가 규정하는 신
화의 범위는 불가피하게 좁아질 수밖에 없으며, 또 엘리아데의 독특한 신화
관이 드러나는 곳도 바로 여기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특히 시인이나 소설가, 예술가들이 살아있는 신화를
강조한다. 그러나 엘리아데가 말하는 살아있는 신화는 이들이 의미하는 바의
것과는 다르다. 후자에게 살아있는 신화란 고대 신화에 창조적 영감을 받아
그 의미를 재해석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해내는 것을 의미하지만, 전자에게는
신적 행위의 모방(immitatio dei), 신화적 시?공간을 되사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살아있는 신화는 언제나 종교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숭배의례
(culte, worship)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러한 곳에서는 신화는 허구가 아니라
탁월한 진실을 드러내 준다’고 말하면서, ‘신화는 신성한 이야기로 간주되며,
21) 자크 아탈리, 미로, 지혜에 이르는 길 , 이인철 옮김, 영림카디널, 1997, 63쪽.
22) 列子, ?湯問?.
23) 고대 사회, 전통 사회, 전 근대 사회란 우리에게 ‘원시’(primitive)라고 알려진 세계
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등의 고대 문화 양자를 지칭한다.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7
또 신화는 늘 실재에 관계하므로 참된 이야기’임을 거듭 강조한다.24)
요약하자면, 엘리아데가 보기에 원시사회 또는 고대 사회의 구성원들에
게 신화는 ‘탁월한 진실’을 드러내주는 ‘참된’ 이야기, ‘실재’와 관련된 ‘신성
한’ 이야기이므로 ‘본받아야 할 행위의 모델’을 제시한다. 말리노프스키의
지적대로, 원시인이나 고대인들에게 신화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게 ‘천지창
조, 타락, 십자가에서의 죄’라고 하는 성서의 이야기와 같은 의미를 지닌
다.25) 구체적인 예를 통해 ‘참된 이야기’, ‘실재에 관한 이야기’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해보자.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신년의례 아키투 페스티발에서 그들의 우주창조
신화 에누마 엘리쉬 를 낭송하며 창조 때의 사건들을 재현했다. 12일 동
안 7단계로 행해지는 신년 축제의 네 번째 날에 창조신 마르둑과 티아맛과
의 전투가 재현되며, 여기서 왕은 낡은 질서를 물리치고 새로이 우주와 인
간을 창조하는 마르둑을 구현한다. 마르둑의 승리로 끝나는 전투의 재현 이
후 신년 축제의 집인 비트 아키투(Bit Akitu)로 가는 승리의 행진이 이어지
고, 그곳에서 향연이 베풀어진다. 그 다음 단계로 왕과 여신을 표상하는 성
창(聖娼, hierodule)과의 신성혼이 거행되고, 마지막으로 열두 달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해의 시작은 우주가 창조되어 최초로 질서가
수립된 순간과 동일시된다.26) 말하자면 고대 바빌로니아인에게 모든 새해는
시간을 처음부터 되시작하는 것, 곧 우주창조의 반복인 셈이며, 여기서 왕
은 태초에 행해졌던 창조적 신들의 행위를 직접 모방함으로써 자신이 다스
리는 왕국에 완전한 신적 질서가 유지되기를 보장받고자 한다.
고대 이집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년의례이자 동시에 파라오 대관식
이 재현되었던 세드축제(Sed festival)는 나일강의 물이 범람하였다가 지표
면에 작은 언덕과 들판이 물 아래로부터 다시 올라오는 시기에 행해졌는데,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우주창조 신화가 이야기하는 시초의 때, 원초적
물에서 둔덕이 솟아 나오는 때에 해당된다. 새해의 시작과 왕권의 수여를
우주창조의 순간과 동일시함으로써, 즉 사회적 질서를 우주적 질서에 동화
시킴으로써, 고대 이집트인들은 시간을 주기적으로 재생시켜 창조의 완전한
24) Aspects du mythe, p.16-17; Myth and Reality, p.5-6.
25) B, Malinowski, 원시신화론 (Myth in primitive psychology), 서영대 옮김, 민속원,
1996. 21쪽.
26) Eliade, A History of Religious Ideas, vol. Ⅰ,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p.56-84.
종교학 연구 58
순간을 반복하여 되살고자 하였던 것이다.27)
엘리아데가 주목한 것은 이처럼 고대인은 그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규범
적 모델을 태초에 계시된 것, 초월적 근원을 지닌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다.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태초의 신들의 활동 및 행위, 이것을 엘리아데는
원형(archetype)이라 부른다.28) 원형의 반복, 곧 창조의 신화적 순간을 되사
는 몸짓은, 위의 두 경우처럼, 신년의례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만,
엘리아데는 주기적 창조, 순환적 재생의 모티브를 담고 있는 의례를 모두
신년의례와 동일시함으로써 신년의례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확대한다.
연속되는 시간을 마디지어 일정한 기간의 끝과 새로운 기간의 시작을 구
분하는 것이 새해 개념이다. 나라와 민족에 따라 새해의 시작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우며 일년의 길이도 다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년을 나
일강의 범람에서부터 시작해서 홍수기, 발아기, 수확기의 세 계절로 나누었
으며, 각각의 계절은 네 달로 구성되며 연말에는 여기에 5일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동지 또는 춘분을 기점으로 해(年)가 구분되었으
며, 일년은 네 계절로 구성되었다.
엘리아데는 지나간 기간의 끝과 새로운 기간의 시작이라는 관념을 내포
하고 있는 새해 개념을 사계절의 순환적 리듬, 달의 차고 기울음, 식물의
한 살이 등과 같은 우주의 바이오 리듬을 관찰함으로써 비롯된 관념이라고
보았다. 그는 새해가 언제 시작되고, 또 그 기간이 어떠하건, 중요한 것은
세계 어디서건 새해에 대한 관념이 있으며, ‘새해는 시간을 처음부터 되시작
하는 것, 곧 우주창조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적 창조,
순환적 재생의 모티브를 담고 있는 의례는 이런 의미에서 모두 신년의례와
동일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원시사회에서 주요 작물의 수확의례
27) Eliade, “Theogonies and Cosmogonies,” 앞의 책, pp.87-97.
28) 이 점에서 엘리아데의 원형(archetype) 개념과 융의 원형 개념의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융의 원형은 집단 무의식인 인간 심혼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엘리아데의 원형 개념은 전통 사회 혹은 고대 사회의 인간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
는 여러 제도의 모델이나 여러 행동의 범주를 위한 규범이 시간이 비롯된 태초에
“계시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모델이나 규범은 초인간적이고 “초월적인” 근
원을 지니고 있는 것, 가장 완전하고 풍부한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아데는 “모범이 되는 모델”(exemplary
model), “본”(本, paradigm), 혹은 “원형”(archetyp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
은 엘리아데 자신이 Le Mythe de l'éternel retour 영원회귀의 신화(우리말 번역
우주와 역사 )의 서문에서 직접 명시하며, 이 책의 부제가 바로 원형과 반복
(archétypes et répétition)이다.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59
는 ㅡ 주요 작물의 수확이 1년에 몇 번 이루어지건ㅡ 모두 주기적 창조, 순
환적 재생의 모티브를 담고 있으므로 신년의례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주창조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또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
는 세례, 낡은 우주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우주 질서를 창조하는 홍수 개
념도 마찬가지로 천지창조의 주기적 반복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29)
엘리아데의 통찰력은 다양한 종류의 의례가 함축하고 있는 주기적 창조,
순환적 재생이라는 공통된 모티브를 파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우주창조 행위의 반복에서 고대인이나 원시인들의 역사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읽어낸다.
“우주창조의 반복이란 곧 원형(archetype)을 모방 또는 반복하는 것이다. 원시사회 또는 고대사회에서 사물이나 행위는 그것이 원형을 모방 또는
반복하는 한에서만 실재적이게 된다. 하나의 행위(또는 사물)가 본이 되
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실재를 획득할 경우, 그러니까 다른 어떤 것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그러한 반복을 통하여 실재를 실현하는 경우, 그
곳에서는 은연중에 속(俗)의 시간, 지속성, ‘역사’ 등의 소거가 이루어지
고, 따라서 모범이 되는 행동을 재현한 사람은 그 스스로가 그 모범이
되는 행위가 나타났던 신화시대에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30)
고대인에 의하여 행해진 의미있는 행위, 실재적인 행위, 즉 원형적인 행
동의 반복은, 그 어떤 것이든 지속성을 정지시키고, 속(俗)의 시간을 소거하
며,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는 신화적인 시간에 참여한다. 다시 말해서, 원
형의 반복은 곧 ‘신의 모방 immitatio Dei’으로, 이것은 지속적인 역사의 시
간을 거슬러가 태초의 신화적 순간을 지금, 이곳에서 되사는 것이다. 그런
데 엘리아데는 이러한 ‘역사의 소거’를 비단 신화를 사는 고대인 또는 원시
인들의 몸짓에서만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을 신화
적 원형들로 변형시키는, 즉 역사를 신화화하는 변형의 메카니즘 속에서도
발견한다.
2. 역사의 소거 : 존재에의 향수, 낙원에의 향수
솔로몬의 시편(Ⅸ:2)에 나타나는 폼페이(Pompey) 왕이나 예레미아
29) Le mythe de l'éternel retour, pp.65-77.
30) 앞의 책, p.50.
종교학 연구 60
(Jeremiah)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는 느브갓네살 왕은 용의 특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엘리아데는 이것을 고대 히브리의 예언자들이 역
사를 감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군사적인 패배와 정치적인 굴욕을 참아
내기 위하여 히브리민족이 겪은 당대의 사건들을 가장 고대의 우주창조적-
영웅신화로써 해석하였다고 보았다. 고대 신화가 용의 일시적 승리를 허용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메시아-왕에 의하여 그 용이 최후에는 제거되
므로 히브리인들의 상상력 속에서는 이방의 왕들이 용의 특질을 지니고 있
는 것으로 의식되었다는 것이다.
‘비난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역사의 신화화를 정치적 선전이나
허풍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이방의 왕들을 신화적 용으로 바꾸어버리는 것
은 “역사적 현실”을 감내할 수 없어서, 그래서 온갖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신화 속으로, 희망적 사고 속으로 피난처를 찾아 스스로 위로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소수 민족 히브리인들의 고심 속에서 빚어진 하나의 창작물일 뿐
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이러한 해석은 고대 심성의 구조
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31) 역사
를 신화로써 설명하는 이러한 구상 방식은 히브리 예언자들과 같은 고대
엘리뜨의 사고가 정치적 허풍이나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소극적 방
편으로만 볼 수 없는 또 다른 예들이 있기 때문이다.
“집단기억은 어느 정도로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가?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을 민중이 어떻게 보존하고 있는
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엘리아데는 민간 기억도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
을 이들 엘리뜨들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해석하는 구체적 예들
을 제시한다.
유고슬라비아 서사시의 주인공인 마르코 크랄예비치(Marko Kralevic)는
14세기 후반기 동안 그의 탁월한 용기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의 역
사적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사람들은 그의 사망 연대(1394년)까지
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마르코라는 역사적 인격이 집단 기억 속에 들어가자
마자 그의 역사적 인격은 소거되어 버렸고, 그의 전기는 신화적 규범들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희랍의 영웅들이 물과 샘의 요정들의 아들들이었던 것처럼 그의 어머니
도 아내도 모두 선녀(vila)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 전기에 의하면, 그는 정
31) 앞의 책, pp.52-53.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61
당한 방법이 아닌 책략을 통하여 아내를 얻었는데, 마르코 크랄예비치는 아
내가 그녀의 날개를 찾아내어 자기를 버리고 날아갈까 두려워 몹시 조심을
한다. 그런데 이 서사 발라드의 다른 변형에 보면 그의 아내는 첫 아들을
낳은 뒤에 날아가 버린 것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는 인드라, 트
레타오나, 헤라클레스 등의 원형적인 모델처럼 삼두용과 싸워 이를 죽이고,
형제가 서로 적이 되는 신화처럼 자기의 아우 안드리야(Andrija)와 싸워 그
를 죽이기도 한다. 또한 모든 다른 원형적인 서사시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마르코의 이야기 속에도 시대착오적인 것이 있다. 예를 들면 1394년에 사
망한 마르코가 1450년경 터키인에게 저항하는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바 있
는 존 훈야디(John Hunyadi)의 친구도 되고 적도 되고 있다. 더욱 흥미로
운 것은 17세기의 서사시 형식의 발라드의 手寫本들에서 이 두 영웅들은
함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훈야디의 죽음 뒤 거의 200년이나 지
나서이다.
현대의 서사시에서는 이러한 시대 착오적인 현상이 훨씬 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그 시의 인물들이 신화적인 영웅으로 탈바꿈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엘리아데는 설명한다.32)
그런데 민간기억이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
를 엘리아데는 시간에 따른 기억력의 쇠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중
요한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왜냐하면 현대에서도 역사적 사건
이 불과 40여 년만에 신화적 내용들로 각색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일
련의 예들에서 모두 역사에 대한 저항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차대전이 일어나기 얼마 전 루마니아의 한 민속학자 콘스탄틴 브레일
로우(Constantin Brailoiu)는 루마니아의 한 마을 마라무레스(Maramures)에
서 비극적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한 발라드를 채록하였다.
?약혼한 한 젊은이가 산의 요정의 마술에 걸렸다. 결혼 며칠 전 질투에
불탄 요정은 이 젊은이를 높은 바위 꼭대기에서 떨어뜨렸다. 다음 날 목동
들이 한 나무 아래에서 이 젊은이의 시체와 모자를 발견하고는 마을로 운
반해 왔다. 그의 약혼녀는 죽은 약혼자 앞에서 신화적 인유로 가득찬 장송
의 비가를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32) 엘리아데는 ‘민간 기억 속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회상은 2, 3세기 이상으로는 존
속하지 못한다고 한다. 민간기억은 개인적 사건들과 진짜 모습들은 잘 간직하지 못
하고, 사건 대신 범주가, 역사적 인물 대신 원형이 자리잡는다’고 주장한다. 앞의
책. pp.53-56.
종교학 연구 62
이 발라드의 변종들을 가능한 한 모두 채록하면서 그 민속학자는 이러한
비극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사람들의 대답은 옛날에
일어났던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사를 계속하면서 그
는 이 사건이 겨우 4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발라드의
주인공인 약혼녀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은 다
소 진부한 비극이었다.
어느 날 저녁 젊은 약혼자는 벼랑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즉사하지 않았으
며, 그의 비명이 산을 울려 사람들은 그를 마을로 데려왔다. 마을로 운반된
뒤 그 비운의 젊은이는 곧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 때 그의 약혼녀는 마을의
다른 아녀자들과 함께 통상적으로 행하는 장송의 비탄들을 반복했을 뿐이었
다. 물론 이 비탄에는 산의 요정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었다. 민속학자가
사실을 확인한 뒤에 그 확실한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주자, 그들은
그 늙은 여인이 모두 잊어버렸다든가, 그 큰 슬픔이 그녀의 혼을 거의 빼놓
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경우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신화였고, 실제의 이야기는 다만 곡해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신화가 실제의 이야기보다 더 진실한 사실로 간주되었다는 사실
은 신화가 실제 이야기의 비극적인 참 모습을 보다 깊이 드러내어 주고,
보다 풍부한 의미를 가지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하며, 신화적 시
간에로의 주기적 복귀, 집단 기억의 비역사성 속에서 엘리아데는 공히 ‘역
사적 시간’ 또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저항을 발견하며, 나아가 역사에 대
한 저항의 몸짓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 인간의 한 존재방식을
간파해낸다.
“고대인의 의식에서 원형의 중요성, 그리고 원형 이외의 그 어떤 것도
기억 속에 붙들어 두지 못한다는 점(집단 기억의 비역사성), 이런 것들
은 전통적인 정신(靈性, spiritualité)의 ‘역사에 대한 저항’ 이상의 어떤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인간 개별성의 덧없음(무
효성) 혹은 부차적 성격(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33)
원형과 반복을 통한 삶의 실재성 획득, 다시 말해서 속(俗)의 시간을 소
거하고 신화적 시?공간 속으로 전이하여 초월적 모델의 행위를 모방함으
로써 삶의 실재성을 획득하는 고대인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역사를 신화로
33) 앞의 책, p.62.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63
변형시키는 신화적 사고의 작용에서 엘리아데는 개체성, 일상성, 유한성으
로부터의 탈출을 통해 참된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인 존재
에의 향수(Nostalgia for Being), 낙원에의 향수(Nostalgia for Paradise)를
읽어낸다. 그리고 이것을 “신적인 축복과 정신적인 풍요를 향유하는 이상적
인 인간의 이미지”이자 “속적(俗的)인 실재의 무의미성에 의하여 압도되도
록 내맡김으로써 야기되는 자기 상실에 대한 공포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
해한다.34) 그래서 엘리아데는 그가 ‘고대 존재론’이라 일컬었던 이 삶의 방
식, ‘신적인 것들의 모방’으로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철학적 인
간학에 어떤 길을 열어주기를, 그리하여 종국에는 새로운 인간학(New
Humanism)의 도래를 바란다.
현대 서구철학은 인간을 특히 역사적 존재로서, 역사에 의해 조건지워지
는, 요컨대 역사에 의해 창조되는 그러한 존재로 규정한다. 그리고 신은 상
황적 존재,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신 역시 역사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존재로 간주된다. 축복과 풍요로운 낙원의 세계에서 추방된
인간이 이번에는 자신들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신을 낙원에서 추방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악과 고통이 난무하는 현실 세계에서 벗어날 구원의 기회
를 상실해버렸다. 엘리아데는 역사적인 것에만 의미를 부여한 서구 정신이
20세기에 이미 한계와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했으며, 이 위기는 종교적
삶의 회복, 즉 추방한 신들과 잃어버린 낙원을 일상의 삶 속으로 다시 불
러들일 때에, 다시 말해서 서구 정신이 고대 존재론을 창조적으로 자신과
융화시킬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35)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 랍비 이야기는 이성과 영혼의 화합을, 신화를 상실한 서구 정신과 여전
히 신화적 삶을 살고있는 동양의 정신과의 창조적 만남을 진정으로 바라는
한 성자의 구원의 메시지이다.
“크라코비의 경건한 랍비 에제키엘은 어느 날 그에게 프라하로 가라고
권하는 꿈을 꾸었다. 프라하의 왕궁으로 가는 큰 다리 아래에 보물이 묻
34) 앞의 책, pp.109-110.
35) L'Angoisse du temps présent et les devoirs de l'esprit(현시대의 불안과 정신의 의
무), Ed. de La Braconnière, Neuchatel, pp.55-72. 이 책은 서구 정신의 위기에 공
감했던 Raymond de Saussure, Paul Ricoeur, Mircea Eliade, Robert Shuman,
Guido Calogero, François Mauriac이 1953년 제네바 국제 회담에서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엘리아데는 이 회담에서 ‘종교적 상징과 불안의 가치평가’라는 제목으
로 발표했다.
종교학 연구 64
혀져 있으니 가서 그것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똑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꾸자 랍비는 마침내 떠날 결심을 하였다. 프라하에 도착해서 그는 그 다
리를 발견했는데, 보초가 밤낮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어서 다리 밑을 파
볼 수가 없었다. 계속 다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그는 보초 대장의 주
목을 끌게 되었다. 보초 대장이 그에게 뭔가를 잃어버렸느냐고 친절하게
물었다. 우직하게도 랍비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들
은 장교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기를, “이런 불쌍한 사람 보았나, 아니
그래 당신은 그 꿈 때문에 이 먼길을 오느라고 신발을 닳게 했단 말이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래 꿈을 믿겠소.” 그 장교 역시 꿈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꿈속의 그 목소리는 내게 크라코비에 대해 말하
면서, 그곳으로 가면 제켈의 아들, 즉 에제키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랍비
가 있는데 그 사람의 집에 엄청난 보물이 있으니 찾으러 가라고 하였소. 보물은 먼지 낀 구석, 난로 뒤에 묻혀 있으니 거기서 찾으라고 하였소” 그러나 장교는 꿈속에서 들렸던 목소리를 믿지 않았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랍비는 깊이 머리 숙여 장교에게 인사하고는 서둘러
서 크라코비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기 집의 버려둔 구석을 파헤쳐 보
물을 찾아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비참한 가난을 끝내었다. 이 이야기는 하인리히 짐머 박사가 마틴 부버가 소장했던 자료들에
서 찾아낸 것이다. 짐머씨는 말하기를, “우리의 빈곤함, 우리의 시련들
을 끝나게 해주는 진정한 보물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므로 먼 나
라로 그것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집, 즉 우리
자신의 존재의 가장 내밀한 구석에 묻혀있다. 그것은 난로 뒤, 생명과
온기를 주면서 우리의 존재를 통솔하는 생명과 온기의 중심지, 심장의
심장에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파낼 줄 알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기이하면서도 변치않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먼 지역, 이방의 나라, 새
로운 땅으로 여행을 하고 난 후에야 우리의 탐구를 이끄는 이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또 하나 덧붙일
것은 신비로운 우리 내면 여행의 의미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이는 바
로 이방인,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인종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참된 만남의 깊은 의미로, 이것은 전세계적 규모의
새로운 휴머니즘의 출발점을 이룰 것이다.”
Ⅳ. 맺는 말
1970년대 이후 유럽에서 불기 시작했던 신화 열풍이 지금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다. 뒤메질, 레비스트로스, 엘리아데의 신화연구 성과들을 사상사
적 관점에서 조망했던 다니엘 듀뷔송(Daniel Dubuisson)은 유럽 신화 열풍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65
의 원인을 20세기의 두 위대한 신화학자인 뒤메질과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연구 업적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정보문명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큰
물길을 열어가는 21세기에게 맡겨진 과제들, 지난 몇 세기가 넘겨준 문명
의 질곡들을 직시해보면, 그리고 신화적 사고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게 되
면, 우리는 이 시대의 신화 열풍은 개인의 학문적 업적과의 유관성을 넘어
서는 어떤 것들과 맞물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유의 영역에서 신화적 사고가 지배하는 시대 또는 사회는 그 구성원들
의 삶이 자연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 통
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나 사회에서는 신화적 사고는 다른 유형의 사
고에게 그가 군림했던 자리를 물려준다. 현대는 과학적 사고가 지배적인 위
치를 차지하는 시대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과학적?이성적 사고는 20세기에
그 한계와 위험을 곳곳에서 노출시켰다. 산업자본주의의 확대와 과학기술의
발달이 초래한 대량 학살의 전쟁과 무자비한 환경 파괴 등,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온갖 종류의 재앙이 일상을 위협하는 ‘위험한 사회(risk society)’에
살고 있다. ‘피와 눈물의 세기’인 20세기를 보내면서 사람들이 21세기에 통
합과 조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화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고대로의 회
귀에 대한 낭만적 갈구는 분명 아닐게다. 그것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
인류의 생존을 지속시키기 위한 몸부림, 절박한 구원의 신호이다.
망가져 황폐해진 자연 속에서의 삶, 신적 축복과 정신적 풍요를 상실한
채 일상에 함몰된 삶, 이것은 바로 고대 신화들이 묘사하는 지옥에서의 삶
이다. ‘자연보호’, ‘생명윤리’라는 21세기의 화두는 현대인이 처한 위험하고
피폐한 삶의 정황을 잘 말해준다. 이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
저 사고의 혁신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환경생태적
사고는 인간과 자연, 생태계는 한 유기체의 통합적 구성요소들처럼 뗄래야
뗄 수 없이 상호의존 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환경
생태적 사고를 21세기의 대안적 사고 패러다임으로 간주한다.
신화적 사고는 자연, 인간, 생태계 사이에는 유기체적 상호의존관계를 설
정했다는 점에서 환경생태적 사고와 유사하다. 그러나 신화적 사고는 환경
생태적 사고를 넘어선다. 비록 생태적 사고가 인간 중심적이 아닌 상호관계
적 사고라고 주장하긴 하나, 환경생태적 문제 의식의 바탕에는 여전히 인간
이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화적 사고는
자연의 죽음, 신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끊임
없이 자연을, 또는 신을 찬미하면서 그 경외로운 질서 속에 자신을 동화시
종교학 연구 66
키려고 애를 썼던 종교적 사고이자 심미적 사고이다.
레비스트로스와 엘리아데는 신화적 사고의 다른 면들을 조명하긴 하였지
만 두 사람은 공히 신화적 사고는 분열된 세계, 분열된 인간 정신을 통합
시켜줄 구원적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전자는 신화적 사고가 자연
과 인간, 이성과 감성을 융화시켜, 그리고 후자는 신과 인간을 교감시켜,
우주 만물을 풍부한 의미의 세계로, 이상적인 낙원의 세계로 변화시키는 통
합적 사고임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신화연구는 분명 21세기 문명의 흐름에
맑은 물줄기를 형성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우주 만물에 佛性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진실로 공감하고, “함께
머물고, 꽃을 배우며, 홀가분히(빛처럼) 가자 stay together, learn the
flowers, go light”고 노래하면서 스스로 토속적인 인디언들의 삶을 선택한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그는 생태 시인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말 그대
로 신화적 삶을 사는 현대인, 동?서양의 영적 정신을 창조적으로 융화시킨
‘신휴머니즘’의 실천자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스나이더처럼 살기는 불가
능하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말대로, ‘우리는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
으며, 그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현대 과학이
잃어버린 것들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인 설명의 장
(場)에서 그 잃어버린 것들을 통합하려 한다’면, 그리고 시인들이 ‘어린이들
을 위해서 For the Children’ 다시 신화를 노래한다면, 미래의 어린이들은
자연과 신과 인간이 혼융된 大同의 낙원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67
In Search of Lost Paradise
―The Myth of Eliade and Lévi-strauss ―
Kim, Hyun-ja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present the characteristics of mythical
mind which Lévi-strauss and Eliade have elucidated with brilliant insight.
In an age when mythical thingking prevails among the realm of
mentality, people's lives have a close relationship with nature. Today
scientific and rational thingking is in a prevelent position, but its
overuse has revealed limits and problems everywhere. For example there
has been wars of massacre and relentless destruction of nature caused by
the enlarge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and the development of scientific
techonology. As a result we lives in a 'risk society' where all sorts of
disasters threaten our everyday lives.
According to Lévi-strauss and Eliade, mythical mind is a religious and
a harmonizing one that seeks to integrate itself constantly within the
admiring rythme of nature or of God. Thus they expected that it would
play a soteriological role that unify the fragmented universe and human
being, though each author illuminated different aspects of it. Lévi-strauss
shows that mythical mind harmonized nature and human being, or reason
and emotion, while Eliade shows that it allowed communication between
God and human being. This leads us to conclude that mythical mind is
an integrating thingking that recognizes the whole world as meaningful
and cooperative.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 불교혁신운동의 측면을 중심으로 ―
박 규 태*
1)
目次
들어가는 말
Ⅰ. 창가학회의 개관과 현황
Ⅱ. 마키구치 츠네사브로(牧口常三郞, 1871-1944)
와 가치론
Ⅲ. 도다 죠세이(戶田城聖, 1900-1958)와 생명론
Ⅳ. 창가학회와 불교혁신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1993년 9월 7일자 마이니치(每日) 조간신문은 “창가학회, 종문과 결별,
독자적으로 본존수여(本尊授與)를 결정”이라는 제하의 일면 톱기사를 내보
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신도단체인 창
가학회는 7일 오전, 신앙의 근간이자 근행의 대상인 본존을 신규회원들에게
독자적으로 수여할 것을 결정했다. 이는 다음달 1일부터 시행될 것이다. 본
존은 원래 일련정종의 법주가 수여하게 되어 있으나, 창가학회가 2년 전부
터 일련정종으로부터 파문당한 이래 신입회원들은 본존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금번의 결정은 63년 전에 설립된 창가학회가 종문측과 결별하여,
종교단체로서 완전히 자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가학회는 명칭 및 교의
등에는 변동이 없다고 하는데, 공칭 8백 3만 세대에 이르는 거대종교단체
의 이와 같은 움직임은 종교계뿐만 아니라 정계를 비롯한 관련 각계에 적
* 서울대 강사, 종교학
종교학 연구 70
지 않은 파문을 던질 것임에 분명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유력 일간지 아사
히(朝日)와 요미우리(네賣)도 마이니치를 이어 관련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
도했다. 도대체 창가학회라는 집단은 어떤 종교단체이기에 주요 일간지들이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현대 일본의 종교 지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전체 인구의 1할 내지
2할을 차지하는 신종교의 교세인데, 그 중 절반 이상이 니치렌(日蓮,
1222-1282)을 숭경하는 법화계 신종교이다. 이때 법화계란 공통적으로 법화
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계통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법화계 신종교 교단에
서는 단순하게 법화경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설한다.1) 그리하여 법화
계 신종교 교단에서는 다이모쿠(題目) 즉 법화경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
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말만 암송하면 구원받고 복 받는다 하
여 이 다이모쿠를 문자로 써서 그것을 기도 대상인 본존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물론 법화계가 일본 불교 내에서 지배적인 교단은 아니다. 현재 천태
종과 일련종 등을 포함한 법화계 불교교단의 사원수는 전체 일본 불교교단
사원수의 15%정도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일본 재가불교 혹은 일본불교의
현대적 재해석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법화계 신종교 교단들의 성장세는
가히 놀랄 만하다. 그와 같은 법화계 신종교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영우회
(靈友會)2)와 창가학회(創價學會)를 비롯하여 입정교성회(立正?成會),3) 불소
호념회(佛所護念會),4) 묘지회(妙智會),5) 본문불립종(本門佛立宗)6) 등을 들
1) 니치렌의 등장은 실은 법화경 신앙의 재활성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는
불교 전래이래 줄곧 법화경이 중시되어 왔다. 가령 일본 불교의 개조로 말해지는
성덕태자(574-622)의 저서 삼경의소 는 법화경을 포함한 세 경전의 주석서였으며,
8세기에 세워진 국분니사에서는 법화경 독송이 중요한 행사였다. 또한 9세기 초 사
이쵸(最澄, 767-822)의 천태종은 법화경을 최고 경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후
13세기에 이르기까지 밀교, 정토교, 선종, 율종 등이 세력을 펼치면서 법화경의 권
위가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니치렌이 등장하여 법화경에 의한
국가적 사상통일을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중적인 대승경전 중의 하나인 법
화경은 “정경이 무엇이냐” 하는 강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 속에는 법화경
이전의 설법은 모두가 임시 가르침에 불과하며 최고의 진리가 법화경에 있다고 하
는 강력한 신앙이 내재되어 있다.
2) 구보 가쿠타로(久保角太郞)에 의해 1924년 창시된 법화계 신종교. 신자수는 공칭
300만 정도..
3) 니와노 닛쿄(庭野日敬)에 의해 1938년에 창시된 법화계 신종교. 영우회의 일분파로
성립되었으며 현재 신자수는 공칭 650여만 명.
4) 세키구치 가이치(關口嘉一)에 의해 1950년에 창립된 불교계 교단으로서 영우회로부
터 분파되었다. 현재 동경에 본부가 있으며 신자수는 공칭 200여만 정도..
5) 미야모토 미츠(宮本みつ)에 의해 1950년에 창시된 불교계 교단으로서 영우회로부터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1
수 있다. 이들 법화계 신종교 교단들은 주로 192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에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 시기는 일본사에서 매우 급격한 사회변동기에 해당
한다. 이 법화계 신종교들은 주로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1857년 나가마츠 닛센(長松淸빌)이 창시한 본문불립종으로부터 시작되는 흐
름이며, 둘째는 1925년 구보 가쿠타로와 고타니 기미가 창시한 영우회 계열
로서 여기서 오늘날 거대교단으로 발전한 입정교성회를 비롯하여 불소호념
회와 묘지회 교단 등 20여 분파가 갈라져 나왔다. 이 영우회의 중요한 특징
으로서 법화경 신앙을 선조숭배와 결부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셋째는
일련정종 계열로서 본고가 다루고자 하는 창가학회가 이에 속한다(島?進,
1992a: 134-166쪽 참조).
창가학회는 일본의 현대종교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종교단체
이며,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과 브라질 등 전세계에 걸쳐 지부를 가지고 있
는 다국적 교단이다. 본고는 이 창가학회에 대해 그것이 가지는 기성불교에
대한 혁신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
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창가학회의 개관과 현황을 간략히 항목별로 정리
해 본 다음, 이어서 창가학회 신념체계의 대표적인 세 가지 구성축이라고
여겨지는 마키구치의 가치론, 도다의 생명론, 일련정종의 교학에 대해 살펴
본 후에, 법화계 신종교인 창가학회가 어떤 측면에서 현대불교 혁신운동의
중요한 사례로 말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Ⅰ. 창가학회의 개관과 현황7)
(1) 본부 소재지: 도쿄(東京)도 신쥬쿠(新宿)
(2) 창시자: 마키구치 츠네사브로(牧口常三郞, 1871-1944), 도다 죠세이
(戶田城聖, 1900-1958)
(3) 현재: 명예회장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1928- ), 회장 아키야 에
이노스케(秋谷榮之助, 1930- ), 이사장 모리타 카즈야(森田一哉)
(4) 목적: 니치렌(日蓮) 대성인이 건립한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
분파되었다. 현재 본부는 동경에 있으며 신자수는 공칭 90여만 정도..
6) 나가마츠 세이후(長松淸빌)에 의해 1857년에 창립된 불교계 신종교교단으로서 현재
교토에 본부가 있으며 신자수는 공칭 50여만 정도..
7) 이하는 주로 (橫山眞佳, 1997: 72-76쪽)을 참조했다.
종교학 연구 72
을 본존으로 삼고, 일련정종의 교의에 입각하여 불교 의식을 거행하는 한
편, 회원들의 신심을 확립시키며, 이를 토대로 세계평화를 실현하고 인류문
화의 향상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울러 이에 필요한 제반 공익
사업, 출판사업 및 교육문화활동을 전개한다.(종교법인 창가학회 규칙)
(5) 주요 연혁:
1930 일련정종에 입신한 마키구치, 도쿄에서 ‘창가교육학회’ 설립
1941 기관지 價値創뗄 창간
1943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 혐의로 마키구치와 도다 투옥. 창가교
육학회 와해
1944 마키구치, 옥중사
1945 도다 출옥.
1946 ‘창가학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의 재건 시도
1949 기관지 大白蓮華창간
1951 기관지 聖敎新聞창간, 折伏敎典발간
1952 창가학회의 종교법인 인가
1954 절복대행진 시작, 사회문제화
1955 ‘국립계단’ 건립을 위한 정계진출 도모, 통일지방선거에 후보 내세움
1958 도다 사망
1960 이케다, 3대회장에 취임. 해외포교 착수
1962 동양철학연구소 설립
1964 공명당 결성
1968 창가학원 개교
1970 ‘언론출판 방해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에 의해, 공명당과의 분
리 및 국립계단론 포기 선언
1971 창가대학 설립
1972 후지야마(富士宮)시에 후지(富士)미술관 설립
1975 이케다, 소설 인간혁명 발간. 괌도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회의?에
서 SGI(국제창가학회) 결성, 회장으로 취임. 창가학회의 반전반핵
평화운동 시작
1979 이케다, 회장직 사임(명예회장으로 남음). 호오조, 4대회장 취임
1980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SGI(국제창가학회) 제1회 총회개최
1981 호오조 사망
1983 하치오오야(八王子)시에 도쿄후지(東京富士)미술관 설립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3
1990 일련정종측, 이케다 및 아키야의 직책 해임
1991 일련정종측, 창가학회 파문조치
1993 창가학회, 일련정종으로부터 완전분리 선언
(6) 경전: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日蓮大聖人御書全集)
(7) 교의 및 실천: 창가학회 신앙의 근본은 일본중세 가마쿠라 신불교의
일파인 일련종(日蓮宗) 창시자인 니치렌(日蓮, 1222-1282))의 불법(佛法)에
있다. 이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에는 인간 개개인을 내적으로 변혁시키는
힘과 구제력이 내포되어 있음을 믿으며, 특히 니치렌의 입정안국론(立正安
國論, 법화경에 입각한 정법으로써 나라와 사회의 평화 및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에 의거하여 평화, 문화, 교육활동을 전개한다.
(8) 주요 의식 및 행사: 지부총회, 좌담회, 춘추 히간(彼岸)근행법요, 세
계평화기원 근행회
(9) 교세: 1995년 현재 국내 회원수 812만 세대,8) 해외 회원수 136만 명9)
(10) 기관지 및 발매부수: 성교신문(聖敎新聞)-550만 부, 대백련화(大白蓮
華)-280만 부, 그라프SGI-120만 부
(11) 최근 동향 : 국제연합 NGO행사로서, 1992년 리오데자네이로와 상파
울로에서 “환경과 개발전”을, 그리고 나가사키(長崎)에서 “전쟁과 평화전”을
개최. 캄보디아 UNTAC(국제연합 잠정통치기구)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아
“VOICE-AID 캄보디아 라디오 지원캠페인” 실시. UNHCR(국제연합 난민
고등변무관 사무소)과 협력하여 난민을 위한 기금 및 홍보 캠페인 실시. 오
키나와에서 “제1회 SGI 아시아총회 및 평화음악제” 개최. 뉴델리에서 “제2
회 인도문화제” 개최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애당초 일련정종의 재가 신도단체였던 창가학회
는 1930년 마키구치가 창가교육학체계 를 발간하고 ‘창가교육학회’를 창설
한 데에서 비롯된다. 이후 마키구치가 옥중에서 사망한 뒤에 1946년 도다
가 ‘창가학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새롭게 재건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창가학
8) 1951년 이후 회원수 증가추이는 다음과 같다: 1951년-5700세대, 1955년-30만 7500 세대, 1960년-140만 세대, 1965년-500만 세대, 1970년-755만 세대, 1975년-775만
세대, 1980년-791만 세대, 1985년-795만 세대, 1990년-803만 세대, 1995년-812만
세대(창가학회 공칭).
9) 전세계 128개국에 분포되어 있는 해외 신자수는 지역별로 다음과 같다: 북미-33만
8천 명, 중미-1만 2천 명, 남미-20만 5천 명,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77만 9천 명, 유럽-1만 9천 명, 중근동 및 아프리카-7천 명(창가학회 공칭).
종교학 연구 74
회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1958년 도다가 사망한 후 이케다 다이
사쿠(池田大作, 1928- ) 및 호오조 히로시(北條浩, 1923-1981) 시대를 거쳐
현재에는 아키야 에이노스케(秋谷榮之助, 1930- )가 제5대 회장으로 있다.
이 가운데 창가학회의 사상적 초석은 역시 초대 회장 마키구치와 2대 회장
도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키구치의 ‘가치론’과 도다의 ‘생명
론’이 그것인데, 이하에서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뒤에 그 가운데
특히 기존 불교(특히 일련정종)의 혁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해 생
각해 보기로 하자.
Ⅱ. 마키구치 츠네사브로(牧口常三郞, 1871-1944)와
가치론
창가학회의 창시자 마키구치 츠네사브로는 1871년 현 니가타(新潟)현 가
시와자키(柏崎)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인생은 개인적으로 그다지 유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세때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마키구치(牧口)가의 양
자로 들어간 그는 보통소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홋카이도(北海道)로 건너
가 경찰서 급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독학에 힘썼다. 이런 그의 성실성과 학
문적 소질을 알아보았던 경찰서장의 도움으로 마키구치는 20세때 홋카이도
보통사범학교에 편입할 수 있었고, 그곳을 졸업한 후부터 일생에 걸친 교육
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초기 노정에서 지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마키구치는 잠시 소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도쿄로 건너가 인생지리학
(1903년)이라는 저서를 간행했는데, 이 책은 현지조사를 기초로 한 탁월한
실증주의적 연구서로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10) 1909년에는 도쿄에서 교직
생활을 다시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등이 주최하는 향토회(鄕土會)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에서 나온 주저가 바로 교수의 통합중심으로서의 향토과 연구 (1912
년)이다. 여기서 마키구치는 향토의 현지조사를 통한 자연 관찰교육의 필요
성을 역설하면서 각 학교마다 향토과라는 과목을 설치하여 가르쳐야 한다
고 주장했다. 1920년(49세)에 니시마치(西町)소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
10) 당시 대만총독부의 기사(技師)였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뗄)도 이 저서를 읽고 깊
은 인상을 받아 마키구치에게 격려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5
을 때 그는 홋카이도에서 올라온 청년 도다 죠세이(戶田城聖)를 교사로 채
용했는데, 이 둘의 만남은 이후 창가학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로
기억되게 된다. 1928년(57세) 마키구치는 일련정종에 입신하였고, 이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창가교육학체계 (1930-1934년)라는 대저를 발간한다.
이 창가교육학체계 는 교육학조직론(제1권), 가치론(제2권), 교육개조론
(제3권), 교육방법론(제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가치론에
주목할 만하다. 이 저술에서 마키구치는 교육의 목적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
드는 데에 있음을 천명하고 있는데, 그때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서 나온 것이 바로 가치론이었다. 즉 마키구치는 가치 개념을 통해 인간의
행복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가치’를 ‘진리’ 개념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진리가 인식의 문제라면 가치는 평가의 문제이다. 대
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인식작용과 관련된 진리 개념은 인간의 구체적
인 삶의 장을 넘어서 있다. 이에 비해 가치란 항상 구체적인 인간 삶과의
관계에 있어서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우리 삶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가치라는 것이다.(東京大學法華經硏究會編, 1975: 27-33쪽)
진리란 가치평가 및 가치창조 이전의 것으로서, 가치와는 관계가 없다. 또
한 이런 저런 가치에는 참도 거짓도 없다. 왜냐하면 가치란 시대와 장소
혹은 사람에 따라 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가령 “개나리꽃이 샛노랗다”라
는 진술은 ‘진리’와 관계가 있다. 그 진술에 대해서는 참이냐 거짓이냐를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나리꽃이 아름답다”는 진술은 참이냐 거짓이냐를 말
하기 어렵다. 어떤 이에게는 그 진술이 참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가치’의 속성이다.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며 가치는 창조되는 것이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 가치 있지만,
진리 그 자체는 결코 가치가 아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제 마키구치는 가치의 영역으로부터 진리를 추방
한다. 주지하다시피 칸트는 대표적인 가치 영역으로서 진선미를 꼽았다. 그
러나 마키구치는 진(眞) 대신 리(利)를 대체했다. 진은 가치와는 상이한 인
식 차원에 속한 것이고, 선이나 미와는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
기 때문이다. 선과 미에 상응하는 가치로 리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리는 “전인적 생명에 관련된 개체적 가치”로서, 선은 “집단적 생명에 관련
된 사회적 가치”로서, 그리고 미는 “부분적 생명에 관련된 감각적 가치”로
서 규정되고 있다. 이처럼 마키구치가 구상한 가치의 왕국에서는 미보다는
리가, 리보다는 선이 보다 상위의 가치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이처럼 리를
종교학 연구 76
중시하는 관점은 아마도 다이쇼 초기의 일본 사상사에 공통된 에토스, 즉
진보다 리를 더 중시하는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추
정된다. 그런데 리의 가치에 주목하는 시선은 창가교육학체계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었다. 전술한 교수의 통합중심으로서의 향토과 연구 에서도 마
키구치는 이미 ‘리미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키구치의 가치론
에 있어 창가교육학체계 가 보여주는 새로운 측면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치창조’ 즉 창가의 개념을 통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때의 인간이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나가는 능동적인 인간을 가리킨다. 요
컨대 창가교육학체계 는 인생 전체를 그와 같은 가치창조의 과정, 나아가
생명의 끊임없는 자기갱신의 과정으로 간주한다. 둘째로, 창가교육학체계
는 리선미에 등급을 매겨 선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임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
서 이전의 입장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마키구치는 ‘대선(大善)생활’
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인생이라고 규정한다. 지금까지는 리를 기준으로
한 지식추구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그러나 이제 리는 낮은 차원의 가치
이며, 가장 최상의 가치는 선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셋째, 마키구치는 창가
교육학체계 에서 문화현상의 많은 부분을 가치창조에 관련된 현상으로 파
악, 그런 현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경험적 귀납에 의해 가
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련정종에 귀의한 마키구치는 결국 이 모든 가치
론의 층위를 일의적인 신앙과 연결시키고 말았다.
Ⅲ. 도다 죠세이(戶田城聖, 1900-1958)와 생명론
이시가와(石川)현에서 태어난 도다는 5세때 가족이 모두 홋카이도로 이
사하면서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삿포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1920년(19세) 동경으로 가서 마키구치 츠네사브로를 만나 생애에
걸친 특별한 사제관계를 맺는다. 1922년 교사직을 사임한 도다는 사설학원
을 세웠고, 이후 출판 활동 등 마키구치를 후원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28년 마키구치가 창가학회의 전신인 ‘창가교육학회’를 창설하여 회
장직을 맡게 되자 도다는 28세의 나이로 이사장에 취임한다. 창가교육학회
는 처음에는 교육연구에 전념하였으나 점차 종교색을 띠게 되었다. 그러던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7
중 1943년 전시하에서 이세(伊勢)신궁의 부적 모시기를 거부했다는 천황불
경죄의 혐의로 도다는 마키구치와 함께 투옥되고 만다. 이때 도다는 독방에
서 불경과 여러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어떤 종교적 확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도다는 매일 일만 번씩 “나무묘법연화경”을 암송하는 창제(唱
題)수행을 했다고 하는데, 마침내 그것이 이백만 회가 되는 날 그는 생명의
신비를 체득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다는 “붓다는 곧 영원한 생명이다.
우주와 인간은 모두 그 생명이 드러난 것이다. 모든 생명은 붓다에게서 유
래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서 곳곳에 편재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 생
명력의 근원이 바로 나무묘법연화경을 도식으로 표현한 ‘본문의 본존’ 만다
라이다. 그러니까 이 본존을 받들고 다이모쿠(題目)를 창하면 개개 생명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힘이 발동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행복을 얻고
성불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도다 또한 마키구치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핵심이 행복의 추구 및 행복의
보장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 듯 싶다. 이때 마키구치가 행복의 문제를 가치
와 연결시켰듯이, 도다는 그것을 생명의 문제와 연결시켰다. 도다에 의하면,
행복이란 우리의 내적 생명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뒤
집어 말하자면, 내적 생명력의 확인 없이는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도다는 이런 내면적 생명을 보여주는 것이 종교이며, 일련정종이야
말로 인간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종교이고 따라서 이 위대한 종교를
믿어야만 생명의 리듬이 우주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게 되어 살아 있음의
행복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11)
요컨대 우주가 곧 생명이라는 것이다. 생명이란 우주와 더불어 존재하며
우주보다 앞선 것도 아니고 그 뒤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우주 자체가 생
명이다. 그러므로 어디든 조건만 갖추어지면 생명이 발생한다. 생물체뿐만
아니라 비생물체도 다 생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각일각의 생명,
생활이 바로 실상(實相)에 다름 아니다. 이 순간적 실상 속에 과거 영원의
생명이 내포되어 있고 미래 영원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 이 일순의 생명이야
말로 우주 자체의 활동이며, 자기 생명이며 실재이다.” 이런 관점은 중국 천
태종으로부터 니치렌에게 전승된 “일념삼천(一念三千)” 및 “관심(觀心)”의
11) 확실히 넘치는 생명력, 생명의 환희야말로 행복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부정할 사
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명력의 발현이 오직 일련정종에만 있다는
도다의 인식에 있다. 즉 도다는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은 우주의 대생명을 발휘
하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오직 일련정종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종교학 연구 78
교리가 ‘생명’ 및 ‘우주’라는 말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주=
생명은 대어본존(大御本尊)과 동일시된다. 대어본존이란 니치렌이 삼대비법
으로 말법의 중생에게 전한 본문의 다이모쿠(題目),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
단이 총집약되어 있는 대만다라를 가리킨다. 이 대어본존이야말로 우주 생명
력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대만다라에는 본불(本佛)로 신앙되는
니치렌의 깨달음과 생명이 면면히 살아 있으며, 그 위대한 생명력을 지닌다
면, 고통으로 가득한 이 삶을 즐겁게 누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
위대한 생명력이야말로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대어본존을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큰 영험이다. 이 대어본존을 향해, 대어본존과
일련성인과 내가 구별이 없음을 믿고 감사하며 열심히 다이모쿠를 창할 때,
우주의 리듬과 내 리듬이 조화하여 우주의 대생명이 내 생명과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대어본존에 일련대성인의 깨달음 즉 우주의 생명에 관한 진리
(一念三千)가 직접 구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진다. 요컨대 석가가
법화경 적문(전반부)에서 설한 “리(理)의 일념삼천”에 대해 니치렌의 삼대
비법은 “사행(事行)의 일념삼천”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생명은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나타나는 것이 된다. 우리의 생명
에는 세정(洗淨)의 이법(二法)이 존재한다. 맑은 생명(淨法)은 외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우주의 큰 리듬과 조화하여 생명이 유전되므로
결코 무리가 없다. 이런 생명이야말로 위대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생명의 세법(洗法)은, 생명이 여러 가지
유전의 도상에서 잘못된 생활에 물든 것을 말한다. 욕심, 분노, 어리석음,
질투 등으로 인해 오염된 생명은 우주 리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생명력
을 시들게 한다. 말법에는 악인이 많다. 그럴수록 사랑이 필요한 시대인데
실제로는 사랑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붓다의 지혜를 통해
사랑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절복(折伏)을 통해 청정한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것이야말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이다(島?進, 1995: 367-374쪽).
이러한 도다의 생명론에서 니치렌은 자비 그 자체이며, 우주만물은 모두
가 붓다의 실체라고 간주된다. 그 우주 본연의 모습은 사랑(자비)이며, 우주
는 붓다의 모습 그 자체다. 요컨대 도다의 생명론은 우주=생명=사랑=붓다=
인간, 이런 식의 동심원적 동일화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도다의 생명론에는 전통적인 일련정종의 교학과는 사
뭇 이질적인 새로움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79
Ⅳ. 창가학회와 불교혁신
일련정종은 니치렌의 직제자 6인방 중 한 명인 닛코(日興)에 의해 1279
년에 창시되었으며 후지 대석사(大石寺)를 중심으로 하는 종파이다. 이 일
련정종의 특징으로는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일련정종은 니치렌
에 의해 불법의 궁극으로서 제시된 만다라 본존(本門의 本尊=大御本尊), 만
다라본존을 안치하는 장소인 계단(本門의 戒壇), 불법의 구극인 나무묘법연
화경을 창하는 다이모쿠(本門의 題目), 이 세 가지가 말법시대에 불교신앙
의 핵심이라고 하는 이른바 ‘삼대비법’을 주장한다. 특히 후지 대석사야말로
본문의 계단이며, 1279년이래 거기에 안치되어 있는 대만다라 본존이야말
로 지고의 존재라고 여겨진다. 둘째, 일련정종에서는 니치렌의 존재와 그의
가르침을 석가의 존재 및 가르침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니치렌이야말로 석가보다도 더 뛰어난 궁극적인 부처라는 것이다. 이것
을 일련정종에서는 ‘니치렌 본불론(本佛論)’이라 한다. 셋째, 이 니치렌 본불
론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풀어 말하면 일련정종의 불교개시사관(佛敎開示史
觀)이 된다. 법화경 수량품 제16에 보면 지금까지 최고의 각자라고 믿어
져 온 인도의 석가는 보다 보편적인 부처의 한정적인 현현에 불과하다고
설해진다. 이때 보다 보편적인 부처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으로 묘
사된다. 그런데 일련정종에서는 이 ‘구원실성의 석존’보다 더 앞선 지고존재
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으로서는 나무묘법연화경이며 인간으로서는
‘무작의 본불’이라는 것이다. 니치렌은 바로 이러한 지고존재가 다시 태어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넷째, 일련정종의 관심론(觀心論)을 들 수 있다. 니
치렌의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 에 의하면, 지의(智?, 538-597)12)의 ‘일념
삼천(一念三千)’의 교설에 의거하여 본존을 믿고 다이모쿠를 창하는 것이
성불의 길이며, 그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이다. 이때 일념삼천의 ‘삼천’이란
모든 존재,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십계(十界)’, ‘십여시(十如是)’, ‘삼세간(三
世間)’에서 서로 얽힌 세계를 가리킨다. 이 중 십계란 ‘지옥, 아귀(餓鬼), 축
생(畜生), 수라(修羅), 인간, 천(天),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 불’이라는
중생의 열 가지 존재양태를 가리키는데, 그 각각은 다시 열 가지를 각자
자기 안에 구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옥 안에 다시 십계가 있다. 이를테면
12) 중국 천태종의 개조. 법화경 을 최고의 경전으로 하는 교상판석에 입각한 명상(지
관, 좌선, 관심)의 이론과 실천체계에 대해 기술한 저술로 마하지관 이 있다.
종교학 연구 80
지옥 안에도 부처가 있고, 부처 안에도 지옥이 있다는 식이다. 이를 ‘십계
호구(十界互具)’라 한다. 이로부터 백가지 세계가 나오는데, 여기에 십여
시13)와 삼세간14)이 합쳐져 총 삼천개의 세계가 된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삼천세간이 일념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일념삼천이다. 그 일
념삼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 안에 부처가 있다는 깨달음이다. 관
심이란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일념삼천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중생이 살아
있는 몸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다섯째, 있는 그대로의 중
생이 그대로 깨달음의 경지에 있다고 주장하는 일본 천태 본각사상에서는
‘일념삼천’을 ‘즉신성불’과 결부시켜 이해했다. 니치렌의 저술 관심본존초
등에서도 그런 생각이 전제로 깔려 있다. 일련정종은 니치렌 사후, 본각사
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즉신성불’을 지향해 왔다. 그리하여 본존과 다이
모쿠가 그대로 일념삼천을 구체화한 것이며, 명상으로서의 ‘관심’이 아니라
창제로서의 ‘관심’의 실천에 의해 즉신성불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일련정종
에서는 이를 ‘사(事)의 일념삼천’이라 하여 천태지의가 설한 ‘리(理)의 일념
삼천’과 대치시킨다. 이리하여 일련정종에서는 대어본존을 믿고, 다이모쿠를
창하는 것이 그대로 즉신성불의 실현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이
누추하고 나약한 몸 그대로 붓다의 경지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옥중의 도다가 직면한 것은 이런 문제였다. 도다는 바로 ‘붓다는 생명이다’
라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로 삼았던 듯싶다.
우리가 도다에 의한 혁신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도다의 생명론은 ‘즉신성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나무
묘법연화경이라고 창할 때 스스로 부처의 경지에 있다는 것을 그는 ‘부처는
생명이다’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즉 도다의 생명론의 내용은 즉신성
불의 생명주의적 이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이를 다시 이렇게 풀어
말할 수 있으리라. 즉 붓다와 인간의 생명, 붓다와 현세의 모든 존재들은
다 동일한 생명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신앙으로써 대어본존
의 생명과 일체가 될 수 있으며, 또한 행불행의 여러 양상을 지닌 구체적
인 생명활동으로서의 삶을 생명력이 넘치는 절대의 행복으로서의 성불 상
태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타자에게 전해주는 삶이야말로
참된 불교적 인생이다.
13) 如是相, 如是性, 如是?, 如是力, 如是作,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 如是本末
究竟.
14) 五바世間, 衆生世間, 國土世間.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81
이로써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첫째, 도다에게 있어 불교
란 전적으로 현세적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대어본존=붓다는 생
명력의 원천이며 현세이익을 실현시켜 준다. 물론 불교가 추구하는 성불이
라는 인생의 목표는 절대적인 것이며, 행복이라는 것이 그런 궁극적인 목표
와 결부된다. 행복은 생명력의 충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성불이
란 바로 이 세상에서 실현해야 할 것으로 파악된다. 둘째, 도다는 궁극적
존재와의 연관성을 현세적 실재의 차원에 귀속시켜 이해했다. 생명이라든가
생명력이란 것은 현실 속에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지 않으면 안되며
붓다도 그렇다. 즉 붓다와 같은 궁극적 존재 또한 감각적으로 몸의 차원에
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차원과 세속적인 앎의 차원,
종교와 과학의 차원은 생명을 매개로 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 셋째, 도다
에게 있어 종교적 자기변혁과 현세에 대한 적극적 참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불이란 것은 외면적인 일상생활과 분리된 내면적 사건 혹은 사후
세계에서 체험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성불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변혁을
통해 체험되는 것이다. 생명이란 것은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
이다(島?進, 1995: 367-381쪽).
이와 같은 도다의 관점은 일본 불교의 구원론적 구조에 큰 혁신을 초래했
다고 보여진다. 종교학자 시마조노는 이를 “생명주의적 구원관으로 특징지워
지는 현세구원사상의 수립이라는 종교사상의 혁신”으로 설명한다(島?進,
1995: 382쪽). 즉 도다의 생명론은 일본 신종교의 생명주의적 구원관15)의
15) 쓰시마 미치히토(對馬路人) 등은 “신종교에 있어 생명주의적 구원관”이라는
논문에서, 흑주교, 금광교, 천리교, 대본교, 영우회, 생장의 가, 입정교성회,
PL교단, 창가학회, 세계구세교, 천조황대신궁 등 19세기초에서 현대에 이르
기까지 성립한 일본 신종교 제교단 가운데 대표적인 11개 교단의 구원사상
에 관해, 우주의 본체(우주관), 종교적 근원자(신관), 인간의 본성(인간관), 생과 사(생사관), 악과 죄(선악관), 구원방법, 구원의 상태 등 8개 항목에 걸
쳐 고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신종교의 구원사상에는 ‘생명주의적 구원관’이
라 불릴 만한 공통된 사유양식이 깔려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 논문의 핵
심적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신종교 교의의 핵심은 ‘우주=親
神=생명’으로 보는 우주관 및 신관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근원적 생명’의
관념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종교의 구원사상을 ‘생명주의적 구원관’이라
부를 수 있다. (2) 이러한 ‘생명주의적 구원관’에 있어, 인간은 기본적으로
‘소우주=대우주’의 틀 안에서 이해되며, 거기서 소우주로서의 인간은 ‘근원
적 생명=우주=親神’에게서 비롯되었고 또한 생명을 부여받아 살아가는 ‘신
의 분신’ 혹은 ‘신의 자녀’로 간주된다. (3) 신종교 교조는 생명력에 가득 찬
그의 생애로써 구원받은 인간의 모델로서의 生神으로 신앙된다. (4) ‘생명주
의적 구원관’에 있어 악이란, 생명력의 쇠약 혹은 조화의 상실에 다름 아니
종교학 연구 82
전형적 사례라는 것이다.16) 한편 그렇다고 해서 신종교의 현세구원사상을 단
순히 ‘현세긍정’의 사상으로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도와 민속종교
의 애니미즘, 혹은 일본불교의 특징인 천태 본각사상17)도 현세긍정적이기 때
문이다. 그런데 신도나 애니미즘의 경우는 ‘구원’이라는 관념이 희미하다. 한
편 본각사상은 현세긍정적이면서 구원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전통
적 불교의 본각사상과 신종교의 생명주의적 구원관은 어디가 다를까? 지금
까지 살펴 본 창가학회의 사례는 이런 문제를 고찰하고자 할 때 좋은 사례
였다. 전술했듯이, 창가학회 종교사상의 토대는 일련정종의 교학인데, 그것은
본각사상의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마쿠라 신불교들은 대체로 사상
의 핵심부분에서 본각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호넨(法然)이나 도겐(道元)에 비
해 신란(親鸞), 잇펜, 니치렌이 더 현저하다. 니치렌의 저술 관심본존초 는
특히 본각사상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일련정종은 이 관심본존초 사상에 입
각하고 있다. 일련정종의 성불관은 붓다와 범부가 대립되고 범부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여 붓다로 바뀐다는 이원적 발상을 거부한다. 그보다는 번뇌가
곧 보살이고 사바세계가 곧 적광이라는 일원론적 관점을 선호한다. 그리하여
일련정종의 사상에서는 범부가 그대로 자기 안에 불계를 구비하고 있으며,
대어본존을 받듦으로써 즉신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창가학회는
이와 같은 일련정종의 본각사상적 구원관을 일본 신종교에 공통된 생명주의
적 구원관으로 변용시켰다는 것이 앞서 인용한 시마조노의 관점이다(島?進,
1995: 385쪽). 바로 이 점에서 창가학회는 사상적으로 현대 불교혁신운동이
자 동시에 신종교로서의 양가적 측면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다. 따라서 이때 ‘악으로부터의 탈각=구원’은 생명력의 회복 혹은 ‘근원적
생명’과의 조화의 회복으로 이해되며, 그런 구원은 내세가 아닌 현세 속에
서 실현되는 것으로 관념된다. (5) ‘생명주의적 구원관’은 기본적으로 애니
미즘적인 농경적 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서는 현세이익과 구원이 모
순없이 공존하고 있으며, 밝고 낙관적인 현세중심주의가 주된 기조를 이루
고 있다. (6) ‘생명주의적 구원관’은 민속종교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며, 기
성종교와의 관계에 있어 불교적 내세구원관을 대체함으로써 장식불교와의
분업관계를 구성했다고 하는 종교사적 의의를 가진다(박규태, 1996: 29-30쪽
및 對馬路人(외), 1979 참조).
16) 물론 창가학회의 경우는 마음의 조화가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 먼 과거의
대어본존과 니치렌이 숭경된다는 점에서 여타 신종교와의 차이를 보여 준다.
17) 본각사상은 (1) 이원적 상대적인 현실을 넘어선 불이(不二) 절대의 세계를 규명,
(2) 거기서 현실로 되돌아와 이원적 상대적인 현상들을 불이, 본각의 나타남으로서
긍정하는 사상이다.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83
나오는 말
본고의 서두에서 창가학회와 일련정종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그 갈등은 1990년 11월 16일 도쿄의 도다기념강당에서 개최된 창가학회
“제35회 본부간부회, 제3회 도쿄총회”에서 이케다 명예회장의 연설을 녹음
한 테이프가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일련정종의 최고 성직자 아베(阿部)
법주 이하 종문 승려들은 이 테이프에 녹음된 연설내용을 듣고 경악했다.
무엇이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어서 급기야 동년 12월 27일, 이케다 명예회
장이 일련정종 교단 내에서 맡고 있었던 총강두(總講頭, 신도대표직) 직함
을 해임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케다는 연설 가운데 “법주란 자리는 신도
들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그건 권력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대어본존의 신자입니다. 승려라고 뭐 다른가요?”라고 역설했는데, 이것이
법주와 승려를 경시하는 입장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창가학회와 일련정종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재가불교와 출가불교 사이의
갈등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 즉 창가작용
을 중시하는 창가학회가 기성의 권위를 다 수용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갈등이기도 했다. 재가불교와 출가불교의 상관관계는 방금 언급한 창가학회
의 혁신적 측면(일련정종의 본각사상적 구원관을 일본 신종교에 공통된 생
명주의적 구원관으로 변용시킨 측면)과 더불어 함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문제인
데다가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의 시야를 벗어나는 문제로 여겨지므로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다만 재가불교의 정당성
을 주장하는 창가학회측이든, 출가불교의 권위를 내세우는 일련정종측이든,
파문 사태를 둘러싸고 상호간 원색적인 공방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극단적
인 결벽증과 공격적인 독선주의를 노출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종교의 모습
을 보여주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에 머물고자 한다. 진속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본각의 깨달음이나 혹은 생명과 죽음의 얼굴이 둘이 아니라
는 무서운 진실을 양측은 왜곡된 방식으로 입증해 보여준 듯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가학회가 1995년 새로운 “SGI헌장”에서 타종교에 대
한 존중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 및 협력 원칙을 내세웠다는 사실은 매우
희망적인 서광으로 비쳐진다. 이는 타종교에 대해 극단적인 배타성을 보였
던 니치렌 이래 일련종 불교종단 및 법화계 신종교들에게 공통적인 성향
종교학 연구 84
즉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체질이 개선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조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창가학회가 보다 열려진 신앙체계를 지향할 때 그것이 지닌
가치론적 혁신주의와 생명론적 에너지가 말 그대로 참된 평화를 위한 토대
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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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연구 86
A Study on Soka Gakkai
―Renovation of the Japanese Buddhism ―
Park, Kyu-tae
Soka Gakkai(創價學會), established in 1930 by a distinguished
pedagogist, Makiguchi Tzunesaburo (牧口常三郞, 1871-1944), is said to be
the biggest religious order among contemporary Japanese new religions.
This paper investigates the renovative aspects of Soka Gakkai which has
come to characterizes Japanese Buddhism.
Soka Gakkai has been separated from Nichirenshoshu (日蓮正宗), a
sect of Japanese Buddhism to which it originally belonged until 1993.
This suggests that Soka Gakkai as a Zaike (在家) group of believers has
made a declaration of a new identity totally different from Shukke (出
家), a form of Buddhism like Nichirenshoshu. This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Soka Gakkai gave up all the teachings of Buddhism.
This paper concludes by suggesting that Soka Gakkai can be regarded
as a renovation of the Japanese Buddhism from the perspective of not
only Makiguchi's discourse of value (價値論), but also from Toda Josei's
(戶田城聖, 1900-1958) teachings about life (生命論).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 주희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임 부 연*
1)
目次
Ⅰ. 서론
Ⅱ. 마음의 본질적 성격과 주재(主宰)
Ⅲ. 마음의 이원적 대립론 : 人心道心論
Ⅳ. 마음의 심층 영역 : 未發論
Ⅴ. 결론
Ⅰ. 서론
純祖15년, 곧 1815년 5월 그믐에 茶山東菴에서 정약용(丁若鏞)은 心
經密驗(이하 밀험 으로 약칭)을 완성한다. 이 책은 心經에 대한 해석서
로서 마음에 대한 그의 입장을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대표적인 저서다. 본래
宋代주자학자 西山眞德秀(1178-1235)의 심경 은 유가 성현들의 “心法”
곧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글귀를 편찬해 만든 책이다. 여기에 明代
의 程敏政(1445-?)이 주석을 붙여 만든 心經附注는 특히 조선에서는 李滉
이후 주자학자 전반에 걸쳐 매우 중시된다. 이 저서들은 明에서 양명학의
방식으로 “마음의 학문(心學)”이 발달한 반면, 조선에서는 주자학의 틀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마음의 문제가 발전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밀험 의 ?序?에서 다산은 “독실한 실천(篤行)”의 측면에서 소학 과 함
께 심경 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한 뒤, “마음 다스리는(治心)” 방법을 제
시하는 저서라고 규정한다( 밀험 , 2:25). 이는 물 뿌리고 마당 쓰는 등 관
* 서울대 박사과정 수료, 종교학
종교학 연구 88
성적으로 몸에 익히는 소학 의 공부와는 별도로, 반성적으로 몸을 단련시
키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심경 을 통해 찾으려 한 것이다. ‘密驗’이
란 말이 은밀하면서도 주체적인 체득과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도 이런 맥락
에서다.
정약용이 사상적 대결 상대로 여긴 주희는 흔히 理氣論으로 심성을 형이
상학화하여 신유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신유학에서 마음은
형이상학적 기반 위에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변화 혹은 완성을 추구케 하
는 기반이란 점에서 수양의 문제와 연관된다. 그런데 다산도 “오늘부터 죽
는 날까지 마음 다스리는 기술에 힘을 쏟고자 하며, 경전을 궁구하는 일은
심경 으로 끝맺고자 한다.”( 밀험 , 上同)고 다짐한다. 이런 다짐은 마음의
문제가 다산에게 있어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통한 사상 형성에 핵심 관건
이며, 그가 신유학이래 수양 전통의 연장 위에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주자학과 다산학의 단절과 연속의 양면을 마음론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마음의 본질적 성격과 주재(主宰)
神과 形이 오묘하게 결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神은 형제가 없으며 또한
이름 없음을 숭상한다. 그것이 형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빌어 ‘神’이
라 부른다. 마음은 피의 창고로서 오묘한 결합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름
을 빌어 ‘心’이라 부른다( 孟子要義/이하 요의 로 약칭, 1:32-3).
다산에게 마음의 문제는 인간 구성과 연관되어 있다. 초월적 존재인 ‘神’
이란 본래 형체도 없기 때문에 그 용어를 빌려 인간의 정신적 요소(神)를
표현한 것이다. 원래 ‘心’은 일종의 ‘피의 창고(血府)’로서 오장(五臟)의 하나
인 ‘심장(心臟)’을 뜻한다. 정신적 요소가 발동하는 곳에는 반드시 血氣가
필요하고, 따라서 혈기의 주인인 ‘心’이란 용어를 빌려 내면적 정신을 가르
치게 된 것이다.1) 곧 정신과 혈기가 동시에 작동하는 ‘오묘한 결합의 지도
리(妙合之樞紐)’이기 때문에 내면 주체를 표현할 때 心이란 말을 빌려 쓴
것이라고 다산은 해석한다. 이는 정신과 육체가 마음이라는 소통의 장을 통
해 매개되고 있음을 뜻한다.
1) 心經密驗, 2:25.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89
1. 내면 주체의 초월적 성격 : ‘靈明’
다산에게 마음의 초월성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용어는 바로 “靈明”이다.
그는 마음을 세 가지로 나눈다. 곧 육체기관인 심장(心臟)의 ‘마음(心)’, “영
명(靈明)한 마음”과 그 “영명한 마음이 발동한 마음”이다.2) 두 번째와 세
번째 마음은 본체와 그 작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내면 본체로서의 마음이
수많은 현상으로 발현되는 것이 세 번째 마음이다. 예를 들어 정서, 사변,
의지 등 모든 현상적 정신 작용은 세 번째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七情
이나 맹자의 四端혹은 의지(志) 등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맨 처음 心臟으로서의 心은 氣의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나머지 둘
은 불가하다. 둘 다 영명한 존재로서 궁극적 실재인 하늘 곧 上帝와 연관
되기 때문이다. 영명한 본체의 마음을 인간은 배태하는 순간에 하늘로부터
받는다.3) 가시적인 푸른 하늘은 단지 하나의 자연물에 지나지 않는다.4) 다
산은 상제로서의 하늘을 氣혹은 자연계의 현상 차원과는 전혀 다른 존재
영역에 설정한다. 상제란 만물을 초월하여 主宰하는 하늘이다. 따라서 이
상제는 지각이나 위엄 그리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 만물의
생장과 번성을 주재하는 신령한 존재다. 그리고 그러한 권능은 그 靈明에서
비롯된다. 다산에게 “영명이 없는 존재는 주재할 수 없다.”( 요의 , 2:39)
따라서 그에게 신적 존재는 理氣論으로 분해되어 “있음과 없음의 사이
(有無之間)”에 있는 존재로 의심받아 아득한 자리에 던져질 존재가 아니
다.5) 이는 주희가 귀신이나 신적 존재를 이기론의 틀 안에서 중간지대에
위치지우려 한 입장과 대비된다. 주희는 “있는 듯 없는 듯”( 朱子語類
25:77/이하 어류 로 약칭, “若有若亡”)한 신적 존재의 존재성을 氣의 신비
한 측면(靈)을 통해 정당화한다.6) 이에 비해 다산은 상제의 영명과 마찬가
지로 ‘靈’이란 신적 측면이 氣의 층위를 초월한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理
의 층위에서 보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理는 지각의 활동이나 권능이 부재
하기 때문이다.
다산에게 귀신의 至尊으로서 가시적 형질이 없지만 인간과 소통하고 만
2) 詩文集, ?答李汝弘?, 19:30-31.
3) 中庸講義補, 1:2.
4) 孟子要義, 2:39.
5) 中庸講義補, 1:23.
6) 이용주, “朱熹의 문화적 정통의식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9, 150-156쪽
참조.
종교학 연구 90
물을 주재하는 존재가 바로 상제다.7) 그는 귀신을 이기론으로 말할 수 없
으며, 따라서 그 지존인 상제 또한 그렇다고 본다. 이는 주희처럼 중간적
영역에 귀신 혹은 상제를 두면 그 생생한 존재성이 약화된다고 보기 때문
이다. 하늘의 영명함은 인간의 마음과 지속적으로 소통하여 마음의 모든 흐
름을 살펴 볼 수 있다.8) 그러한 소통이 가능한 것은 마음의 영명 때문이
다.9) 주희의 경우 소통의 근거는 ‘同氣’였지만 다산의 경우엔 ‘同靈’이다.
이기론으로 접근되지 않는 마음의 영명은 단지 상제와 소통 근거로 끝나
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주권적 위상을 부여하는 원천이
다. 인간은 자연계의 존재들과 달리 ‘영명’의 초월성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우월(‘超越’)하고 자신을 위해 자연계를 이용(‘享用’)할 수 있다.10) 존재론적
인 우월은 존재론적인 차별을 함축하고, 그것은 위계적인 존재질서를 나타
낸다. 즉 현실 세계 안에서 인간의 至尊을 의미한다. 그러한 주권적 지위에
따라 만물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계 안
의 모든 존재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소유물이다.11)
정약용의 영명은 얼핏 주희가 마음의 성격으로 규정한 “虛靈不昧”,12)
“虛靈知覺”,13) “虛明”14)이란 용어와도 유사하다. 글자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세 가지 규정은 서로 상통하며 그 중 대표적인 규정은 “虛靈知
覺”이다. 虛靈知覺은 體用論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지각’에 있어 우선성은 理와 관련된다. 곧 구체적인 지각의 사
태는 理와 氣의 결합으로 발생하지만 지각의 理가 先在한다( 어류 , 5:24).
주희는 마음 속에 잠재된 理를 “고요한 가운데 있는 존재(靜中有物)”라고
표현한다. 이는 현상적 움직임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늘 흐르고 있는 理를
나타내며, 그것이 지각의 원천이 된다.
理와 연결되어 존재하는 마음의 지각은 개체와 타자의 만남에서 발생하
는 사태 혹은 현상으로서의 ‘지각’을 가능케 한다. 또한 지각은 단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인식론적인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고, 도덕적 판단이나 내재된
7) 中庸自箴, 2:16.
8) 中庸自箴, 1:6.
9) 中庸自箴, 1:6.
10) 中庸講義補, 1:2.
11) 論語古今注, 9:14.
12) 大學章句1章, 朱熹注.
13) 書, ?大禹謨?, 朱熹注.
14) 朱子語類, 57:32.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1
본성의 발현 혹은 실현이란 측면을 갖는다. 따라서 외물과의 만남에서 표출
되는 도덕감각의 내적 자발성이나, 그러한 계기에서 요청되는 외재적 권위
혹은 규범의 인식 및 수용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理의 통일성을
매개로 주체와 타자 사이의 분리를 매꿔 줄 다리라는 의미도 갖는다.15) 따
라서 다산의 영명처럼 다른 존재와의 존재론적 단절을 예비하지 않는다.
2. 주재(主宰)의 문제 : ‘心統性情’의 재검토
마음은 유가적 이상을 구현할 초월의 내적 근거를 함유하고, 동시에 그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은 바로 주재(主
宰)의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 주희의 마음론에서 절대적 진리는 “心統性
情”이다.16) 곧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통섭한다는 뜻이다. 이 규정은 본래
張載가 쓰던 것인데, 주희는 伊川이 마음을 體用으로 나누어 보는 관점과
결합시켜 심성론의 핵심명제로 삼는다.17)
마음은 마치 비어 있는 밭이고, 그 속엔 하늘로부터 받아 내재된 道理
곧 본성(性)이 가득차 있다. 외물과의 접촉에서 본성이 발동하여 사려의 차
원으로 드러난 것은 감정(情)이다( 어류 , 98:43). 여기서 감정(情)은 기쁨
(喜)?분노(怒)?슬픔(哀)?즐거움(樂) 등의 정서적 상태만 가리키지는 않는
다. 그것을 포함하여 현상화된 정신 작용 일반을 뜻한다. 그러한 의식 현상
의 내적 원천은 본성이다. 즉 본성이 발동하여 감정이 된다. 伊川이 제시한
體用論으로 보자면, 본성은 마음의 본체(體)가 되고 감정은 마음의 작용(用)
이 된다. 본성은 보편적인 도덕규범의 내재로서 仁?義?禮?智로 제시되고,
감정에는 그런 본성으로부터 발동된 惻隱?羞惡?辭讓?是非의 마음이 예시
된다.18)
“心統性情”에서 ‘統’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겸한다는 뜻
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병사들을 統制하듯이 主宰한다는 뜻이다.19) 전자는
본성과 감정이 마음의 영역 안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이는 내면의 포괄적 총
체로서의 마음을 말한다. 글자에서 보듯이 본성(性)?감정(情)이 모두 심(?)
15) Donald J. Munro, Images of Human Nature, Prinston University Press, 1988,
93-96쪽 참조.
16) 朱子語類, 5:70.
17) 朱子語類, 95:3.
18) 朱子語類, 98:41.
19) 朱子語類, 98:39 / 98:41.
종교학 연구 92
을 부수로 하고 있는 것도 마음의 통합성을 나타내는 징표로 해석된다.20)
후자는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는 주재적 주체로서
의 마음을 말한다. 하지만 이 경우 주재의 일차적인 대상은 감정이 된다.
곧 감정은 본성에 뿌리를 두지만 마음에 의해 주재를 받는다.21) 주재는 단
지 억제한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올바른 발현을 유도하고 선
한 감정은 확장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것은 理의 내재로서 본성의 보
편적 도덕원칙을 기준으로 잘못된 감정을 통제하고 올바른 감정을 확장한
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재의 대상은 감정만이 아니다. 감정을 주재할 때 본성이 기준
으로 기능한다고, 본성에 대한 주재가 배제되지는 않는다. 다만 주재의 방
식이 달라진다. 본성 자체는 완전한 도덕 원칙 혹은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
을 통제할 외적인 기준은 불가하다. 다만 그것의 온전한 보존이란 측면에서
주재가 논의된다. 여기서 涵養이나 主敬등의 공부를 통해 본성을 주재하는
것이다.22)
정약용은 포괄과 주재의 양면을 지닌 주희의 마음론을 ‘主宰’, 특히 본성
에 대한 주재의 측면에서 비판한다. 그는 영명한 마음의 본성은 善을 좋아
하고 惡을 부끄러워한다고 본다.23) 곧 주희처럼 본성을 내면 본체로 보지
않고 마음의 본질적 속성으로 본다. “心統性情”과 연관지워 보면, 본성을
마음의 선한 경향성으로 보는 건 마음과 본성의 존재론적 분리에 대한 비
판이다. 주희식으로 보면, 감정에 대한 주재는 마음과 본성 사이의 틈을 전
제한다. 理의 내재인 본성은 마음의 본체이자 본질이다. 따라서 비록 체용
론의 구도에 의해 양자의 연속이 설정되지만, 실제로는 양자 사이에 ‘공존
속 분리’가 존재하게 된다.
본성에 대한 주재를 말할 경우에도, 純善한 본성의 발현 조건이나 계기
에 대한 주재이지 본성 자체에 대한 주재라고 보기는 힘들다. 본성 자체는
완전한 본질이자 이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현상화되는 과정을 온전
히 하기 위해 마음의 주재를 위한 敬이라는 수양이 요청된다. 예를 들어,
해의 밝음은 늘 그대로 인데 그것을 가리는 구름을 제거하여 그 해의 밝음
이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것과 같다. 결국 마음에 의한 본성의 주재는 존
20) 朱子語類, 5:66.
21) 朱子大全, 32:8.
22) 陳來, 宋明理學, 遼寧敎育出版社, 1991, 174-175쪽 참조.
23) 詩文集, ?答李汝弘?, 19:35.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3
재론적인 차이 때문에 보조적 주재에 그친다.
주자학 체계에서 본성은 理이고 육체는 氣라고 할 때, 곧 이기론 안에서
마음은 두 가지로 규정될 수 있다. 하나는 ① 율곡 이이처럼 마음을 氣로
보는 입장이고,24) 다른 하나는 ② 퇴계 이황처럼 理와 氣의 결합으로 보는
입장이다.25) 전자에 대해 다산은 마음이 氣가 되면 ‘心統性情’은 ‘氣統理氣’
가 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본다.26) 理氣論에 따라 하나씩 대응시켜 논리
적 타당성이 부족함을 지적한 것이다. 주재자로서의 마음이 氣라면 理인 본
성과 존재론적인 괴리를 노정하기 때문이다. 곧 이 경우에는 본성 자체에
대한 주재는 사실상 불가하고, 단지 본성을 기준으로 삼아 마음이 감정을
통제하는 방식에 그치게 된다. 곧 본성에 대한 주재는 불가하게 된다.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통섭한다’고 말하면 ‘마음이 크다’는 학설(心大說) 이 되고, ‘본성은 理이고, 마음은 氣이다’라고 말하면 ‘본성이 크다’는 학
설(性大說)이 된다. ‘마음이 크다’는 학설은 ‘神과 形이 오묘하게 결합하
되 단지 하나의 마음 뿐’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말한 것이다. ‘본성이 크
다’는 학설은 이 ‘본성(性)’이란 글자를 움켜쥐고 그것으로 ‘大體’와 ‘法
身’의 전칭(專稱)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한 글자를 빌려서 대체의 전
칭을 삼고자 한다면, ‘마음(心)’이 오히려 가깝고 ‘본성(性)’은 옳지 않다. 본성이란 글자는 마땅히 雉性?鹿性?草性?木性처럼 읽어야 하는 것이
니, 본래 ‘기호(嗜好)’로서 이름을 지은 것으로 고원하고 광대하게 말해
서는 안 된다( 밀험 , 2:1-2).
여기서는 인간의 내면 주체를 어떻게 규정할지 논하고 있다. ①의 입장
과 상통하는 ‘性大說’에 대한 비판을 보자. 비판의 논점은 앞서 보았듯이 본
성을 理라고 하는 내면 본체로 규정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다산은 본성을
마음의 본질적 속성 곧 기호(嗜好)라는 욕구로 본다. 이는 본성을 본질 혹
은 본체로 보아 너무 고원하고 광대해지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고원(高
遠)’과 ‘광대(廣大)’는 理로서의 본성이 현실 위의 본질로서 보편적으로 편재
함을 표현한다. 이 경우 앞의 ‘氣統理氣’처럼 마음의 주재력은 고원하고 광
대한 본성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다산은 본성을 본체로서의 지위에서 강등시킴으로써 ‘心大說’과 ‘心統性
情’을 지지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②처럼 마음을 理와 氣의 결합으로
24) 栗谷全書, ?答安應休?, 12:20.
25) 李子粹語, 道體, ?答奇明彦?.
26) 詩文集, ?答李汝弘?, 19:30-31.
종교학 연구 94
보고 ‘心統性情’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는 그가 ‘心大說’에 대해 ‘神과 形
이 오묘하게 결합하되 단지 하나의 마음 뿐’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말한 것
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②의 입장이라면 ‘神形妙合’이
아니라 ‘理氣妙合’을 제시했을 것이다. 理氣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마
음의 중심성 혹은 주재력을 담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에게 理란 지각의 활동이나 위엄 혹은 능력이 없는 무능한 존재다.27)
따라서 理와 氣의 묘합으로 마음을 규정한다 하더라도, 主宰의 능력이 생기
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그는 理氣論체계 안에서 마음의 주재력이 불가능하
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靈明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28) 그래서 ‘理
氣妙合’ 대신 ‘神形妙合’으로 마음을 규정한 것이다.
‘神形妙合’의 측면에서 ‘心統性情’을 해석할 경우, 마음은 육신과 정신의
결합처로서 내면 주체의 총칭이 된다. 그 마음의 영명함은 궁극적 실재인
하늘에 기원하며, 그러한 마음의 속성으로 기호(嗜好)인 본성이 자리한다.
그럼으로써 마음과 본성 사이의 괴리를 피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감정은
영명한 마음이 발동한 마음들을 가리킨다. 이 감정 중에 四端과 같은 선한
종류는 선한 경향성인 본성을 그대로 발현한 것이다. 곧 선한 감정만이 본
성의 결과물이 되고, 나머지 감정들은 그러한 본성과 무관한 마음의 발동이
다. 이런 도식을 통해 정약용은 ‘心統性情’이 담고 있는 마음의 포괄성과 주
재력을 담보하려 하였다.
Ⅲ. 마음의 이원적 대립론 : 人心道心論
新儒學에서 사람의 마음은 육신의 주인이다. 따라서 마음의 문제는 인간
의 도덕 행위와 관련하여 수양론의 중요 주제가 된다. 특히 인간의 실존적
현실이 갖는 도덕적 긴장 혹은 갈등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문구는 바로 書
經?大禹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라
는 명제다. 주희는 중용장구 ?序?에서 道統論과 연관지워 이 구절이 바로
성인들이 전해준 心法이라고 보고 자신의 핵심명제로 규정한다.
다산은 ?대우모?의 인심도심론에 대해 양면적 태도를 보인다. 우선, 중
27) 中庸自箴, 1:5.
28) 孟子要義, 2:39.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5
용장구 ?序?에서 유가적 도통론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주희의 입장을 부정
한다. 이에 비해 다산은 이 구절을 梅?의 僞作으로 본다. 곧 매색이 荀
子?解蔽篇?에서 道經을 인용한 말, 논어 ?堯曰篇?등의 구절을 결합
하여 만들었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 구절의 僞作과는 별개로 다산은 그
문구의 진리성을 인정한다. 곧 “五帝이후에 전수돼 내려온 道訣”로서 “萬
世心學의 으뜸”이라고 극찬한다( 밀험 , 2:29). 漢儒의 훈고학이 문자 해석
에만 매달린 데 비해, 주희는 인심도심론으로 인해 유가의 “中興之祖”가 된
다고도 했다.29) 이렇듯 다산은 인심도심론에 대해 한편으론 ?대우모?의 經
文이 아니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진리를 담고 있는 格言으로 높인다.30)
1. 인심과 도심의 발생 근원
우선, 인심도심론에 중요한 문제는 인심과 도심의 발생 근원이다. 주희는
사사로운 形氣인 육신과 올바른 性命이라는 두 근원의 대비구도로 설명한
다.31) 인간의 대립적 마음의 근원으로 제시된 이 양자는 이기론이라는 형
이상학의 틀로 뒷받침된다. 곧 형기는 氣로 수렴되고, 性命은 理의 내재이
기 때문에 理로 수렴된다. 이렇듯 마음의 양상은 이 세계의 기본적인 대립
구도를 응축하여 상징한다. 理와 氣는 서로 환원되지 않는 독립된 범주로
서, 비록 양자가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분되는 관계다.
주희에겐 이기론이 보편적인 구성이론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존재는
理와 氣의 결합체가 된다. 인간의 생명도 理의 내재인 본성과 氣의 결합으
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理와 氣는 또다른 가치론적 대립항과 연계되어 있
다. 곧 ‘主理와 主形(氣)’는 ‘私와 正’, ‘純善과 或不善’의 대립항이 형성된
다.32) 윤리적 가치판단과 관련하여 ‘私와 正’, ‘純善와 或不善’의 대립항은
비대칭이다. 왜냐면 “私”란 인간이 하나의 개체로서 육체적 한계를 갖고 있
음을 말하는 중립적 묘사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배고프면 배불리 먹는
등의 일은 자신의 육체에만 관련되지 타인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私”다.33)
이는 현실에서 타인과 구별되어 살고 있는 개체의 개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비록 부정적인 함의를 갖더라도 곧바로 ‘不正’이나 ‘惡’이 되진 않는다. ‘純
29) 論語古今注, 6:1.
30) 梅氏書平, 2:23.
31) 中庸章句, ?序?.
32) 朱子大全, 中, 44:2, ?答蔡季通?.
33) 朱子語類, 62:37.
종교학 연구 96
과 或’의 기우뚱한 대립은 인간의 실존을 잘 묘사한다. “純善”이 우리의 이
상이자 본성이라면, “或不善”은 우리의 현실이다.
다산은 神과 形, 곧 정신적 요소와 육체적 요소의 결합으로 인간을 본다.
이렇듯 대립적인 요소의 결합으로 인간이 구성된다는 말은 태생적 갈등을
함축한다. 그 갈등이 현실화하는 구체적인 場은 마음이 된다. 따라서 人心
과 道心이라는 마음의 이원구도는 다산에게도 수용된다.34) 다만 주희의 경
우에 그 갈등의 양 축은 理와 氣라는 형이상학적 보편 범주였다.
다산은 이기론의 틀에서 인간의 마음을 보지 않는다. 따라서 도심을 理
發로 보지 않고, 초월적 내재자인 상제의 명령이 담긴 마음으로 본다. 상제
인 하늘은 도심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경고를 전달한다35). 그것은 태생 초
기의 본성 부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상의 시시각각 모든 순간에 도심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전해준다.36) 이는 도심이 스스로 각성하는
현장에 하늘의 명령이 직접적으로 경험됨을 뜻한다.37) 이처럼 도심은 이기
론에 분해되지 않고, 궁극적 실재와의 실존적 소통의 場이 된다. 또한 현상
존재계에서 인간의 至尊的지위를 보장케 해주는 고귀한 마음이다.38)
정약용에게 도심의 원천이자 준거는 道義가 되고, 인심의 원천은 氣質
혹은 形氣가 된다.39) 도의는 본체론적 자리를 갖는 주희식의 “올바른 性命”
과는 다르다. 곧 “性卽理”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정초되는 도덕 원리가 아
니라, 상제가 제시하는 도덕 명령이다. 하늘의 純善한 명령 곧 본성은 純善
하다. 또한 그러한 본성이 발현된 마음인 도심 또한 純善하다. 하지만 육체
적 욕구에 따라 발생하는 人心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40) 가치론적으
로 유동적이다. 이것은 앞서 보았듯이 주희와 동일한 관점이다. 다만 주희
는 ‘純善’과 ‘或不善’이라 하고, 다산은 ‘純善’과 ‘可善可惡’의 대비로 표현한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이런 기우뚱한 대립항은 앞서 보았듯이, 존재론적인 범주 차원에
서 정초된 것이다. 주희의 ‘理’와 ‘氣’-‘性命之正’과 ‘形氣之私’-‘道心과 人心’-
‘純善과 或不善’ 및 다산의 ‘神’과 ‘形’-‘道義와 形質’-‘道心과 人心’-‘‘純善’과
34) 論語古今註, 9:17.
35) 中庸自箴, 1:5.
36) 孟子要義, 1:35.
37) 금장태. 茶山實學탐구 , 소학사, 2001, 111쪽.
38) 心經密驗, 2:30.
39) 詩文集, ?上?園書?, 18:41 / 孟子要義, 2:21.
40) 心經密驗, 2:38.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7
‘可善可惡’의 연관은 존재론, 마음 그리고 가치론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
다. 다만 주희의 경우, 두 마음의 근원이 형이상학적인 보편적 구성범주인
데 비해, 다산의 경우엔 인간에 한정된 구성범주를 설정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하지만 기우뚱한 대립항을 통해 인간 실존을 묘사하고 윤리적
기획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2. 人欲과의 연관 및 도심의 위상
인심과 도심의 기우뚱한 대립은 윤리적 기획과 연관되어 있다. 특히 ‘사
람의 마음(人心)’과 ‘道의 마음(道心)’이란 자체가 함축하듯이, 사람(人)과 道
사이의 분리와 일치의 문제가 수반된다. 사람(人)이란 윤리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개체이고, 道란 사람이 걸어가야 할 당위적인 길이다. 따라서 마음과
연관된 욕구 및 그 조절이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大體, 小體는 맹자가 사용한 말로 사람이 大人과 小人으로 갈리게 되는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41) 주희는 대체를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마음
으로, 소체는 눈과 귀처럼 구체적인 감각기관으로 본다.42) 다산에게 대체는
形氣와 섞이지 않는 순수하고 영명한 내면적 주체다. 소체는 주희가 생각하
듯이 구체적인 감각기관이기보다 육신 전체를 가르킨다( 요의 , 2:29-30).
그런데 영명한 마음으로서 도덕적 본성을 가진 대체는 육신이라는 소체
에 “갇혀(?)”있다.43) 다산에게도 육신은 초월해야 할 대상이다. 자연의 빌
氣와 부모의 精血로부터 받아 이룬 우리의 육신 곧 소체를 따라서 인심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기 초월을 가능케 하는 근거인 대체의 본성
은 육신 곧 소체의 욕구와 대비를 이룬다. 그래서 마치 “欲”이라는 것이
육신에만 관련되는 듯 하다. 하지만 바로 구절에서 다산은 도심과 인심이
각각 大體와 小體를 “늘 기르려 한다(常欲養)”( 要義, 2:30)고 말한다.
여기서 마음과 人欲의 관계에 대한 다산의 독창적 견해를 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주희의 경우에 인심은 인욕에 혹은 사욕과 관련지워 논의된
다. 하지만 道心은 어떤 경우에도 “欲”의 차원에서 접근되지 않는다. 그것
은 純善한 性命의 발현 자체이다. 性命이란 형이상학적 내면 본체로서 “欲”
의 차원에서 볼 수 없다. 그것은 보편적 도덕 원칙으로서 자체의 활동성이
41) 孟子章句, ?告子上?.
42) 孟子章句, ?告子上?, 朱熹注.
43) 論語古今註, 9:12.
종교학 연구 98
없이 形氣에 의존해 발현된다. 단지 수동적으로 발현되는 준거로서 ‘나(我)’
에 의해 사용되길 기다리는 존재다.
다산은 인심과 도심의 구분을 떠나 관통하는 “欲”을 설정한다. 곧 이 욕구
가 正理를 따르면 善이 되고, 私意만을 따르면 惡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맥
락에서 “常欲養”이 제시된다. 마음의 “願欲”은 “欲”이란 글자가 나타내듯이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44) 그 채움의 자리에 “常欲養”이 위치한다. 이는 인심
과 도심 곧 인간의 마음이 육체 혹은 도덕 원칙의 수동적 발현양상 이상임
을 뜻한다. 자신의 발동 원천에 대한 반작용의 욕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서 그렇다. 그리하여 윤리적 판단 능력과 도덕적 욕구를 지닌 도심은 “殺身
成仁”과 연결되고, 개체적인 욕구 일반을 담고 있는 인심은 富뉘와 性, 그리
고 안락을 좇게 만들어 善하기 어렵고 惡에 빠지기는 쉽게 된다고 본다.45)
여기서 마음과 육체 그리고 人欲에 대한 주희의 입장을 살펴보자. 우선
인심의 발현 근원이 形氣곧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에 대한 기본 시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사사로운 육체에 “갇혀서” 인심을
지닐 수밖에 없다.46) “갇힌다”(梏)는 표현이 나타내듯 개체적인 육신의 한
계 자체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육신을 없애거나 부정할 수는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따라서 인심은 인간인 한 성인이라도 없앨 수 없
는 것이다. 이렇듯 주희는 程?처럼 인심과 인욕을 동일시하여 부정하는 태
도를 취하지 않는다.47)
주희는 도심을 육체의 주재자로 삼아 인심이 늘 그로부터 명령을 듣는
主從관계를 제시한다.48) “올바른 性命”에 근원을 둔 도심은 義理를 따라
지각하는 마음이고, 인심은 육체적인 욕구를 따라 지각하는 마음이다.49) 우
선 도심이라는 도덕적 마음을 육체의 주인 혹은 주체로 삼아야 한다. 이는
육체 전체에 대한 ‘주재’의 권한을 도심이 행사하도록 한다는 말이 된다. 도
심은 인심의 주재자로서 그 준거가 되는 것이다.50) 이렇게 인심 혹은 육체
44) 中庸講義, 1:65.
45) 論語古今註, 9:17.
46) 朱子大全上, 36:30, ?答陳同甫?.
47) 이봉규, “{心經附註}에 대한 조선성리학의 대응”, 태동고전연구 제12집, 태동고
전연구소, 1995, 106쪽 참조. 이 글에선 주희를 ‘인심의 전환’이란 측면에서 조선
성리학자들이 재해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48) 中庸章句, ?序?.
49) 朱子語類, 78:189.
50) 朱子語類, 62:41.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99
의 주재이자 준거인 도심을 통해 현실적 개체인 ‘나(我)’는 한 명의 도덕
주체로서 완성된다. 곧 육체의 개체적 한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보편적인 도
덕 원칙에 따라 모든 행위를 행사하는 도덕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 ‘나’는
도심에 의해 육체와 인심을 주재하게 된다.
다산은 인간 현존에서 두 개의 대립적 자아를 설정한다. 그리고 양자 사
이의 끝없는 싸움을 도덕적 현실이라 본다. 여기서 “도심이 인심을 이긴다
(道心克人心)”는 명제가 제시된다.51) ‘이긴다(克)’는 말은 멸하거나(滅)하거
나 제거한다(去)는 뜻이 아니다. 곧 발생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도심
과의 싸움에서 지도록 해서 육신의 주재자가 못되게 하는 것이다. 다만 정
약용은 주희의 ‘주재’와 달리 ‘극복’을 제시함으로써 내면의 실존적 대립과
그 안에서의 주체적 선택의 가치를 더 부각시켰다.
Ⅳ. 마음의 심층 영역 : 未發論
주희 심성론의 완성을 흔히 “中和新說”이라 부른다. 곧 張?등 湖南學
의 영향으로 “性體心用”의 입장에서 마음의 구조를 파악하다가, “心統性情”
의 입장으로 전환한 것이 바로 “중화신설”이다.52) “중화”라는 용어가 나오
듯이 주희의 마음 이론은 “중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그
핵심인 中和라는 말은 中庸에 나온다.
기쁨?분노?슬픔?즐거움(喜怒哀樂)이 발동하지 않은 것을 ‘中’이라 한
다. 발동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和’라 한다( 중용장구 , 1章,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여기서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이다. 우선 다
산은 기쁨?분노?슬픔?즐거움을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정서적 감정의 대
표적인 것들로 한정한다. 이는 體用論에 따라 본성에 기반해 발생하는 의식
일반 곧 감정으로 해석하는 주희와 대비된다. 다시 말해, 정약용은 그러한
정서적 감정 이외의 정신활동은 미발에 포함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靜坐하
더라도 사려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없으면 불교의 ‘坐忘’이라도 한다.53) 그
51) 孟子要義, 2:42.
52) 손영식, 이성과 현실 , 울산대출판부, 1999, 제8장 참조.
종교학 연구 100
래서 그는 중용 의 미발이 “마음의 지각활동과 사려의 미발은 아니다(非心
知思慮之未發)”라고 말한다.54)
정약용이 미발을 사물과의 접촉이 없지만 사려 혹은 지각활동이 존재하는
영역으로 보는 태도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과 연결된다. 그리고 공부
의 사례로는 상제를 향한 戒愼, 이치 탐구로서의 窮理, 윤리적인 道義의 사
고 등 정신활동의 전반을 포괄한다.55) 이는 주희처럼 미발을 본성의 이치가
온전히 구비되어 잠재되어 있는 상태로 보지 않음을 뜻한다. 본문에선 未發
이 곧 中을 가르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未發, 謂之中) 그런데, 다산은 그것
을 同格으로 보지 않고 공부와 그 효과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미발의 조건으로, 사물과의 접촉 부재 및 사려가 싹트지 않음을
든다.56) 특히 초점은 사려가 발동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려를 인정하
지 않는 경우 불교의 無念등의 적막한 상태와의 차별이 애매하다. 그래서
주희는 지각의 작용은 없지만 지각의 주체(能知覺者)는 인정한다.57)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있는 존재(靜中有物)은 곧 理를 말한다. 그것은 윤리적 실천
의 움직임(動)을 가능케 하는 잠재적 원천이다.58) 예를 들어 마음의 지각력,
귀의 청각능력, 눈의 시각능력 등은 실제 思考와 듣기 및 보기라는 정신
및 감각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이것들은 그런 현상의 理로서 미발의
자리에 선재해 있는 것이다.59)
따라서, 사려의 차원이 아니면서 이를 잘 보존하는 공부가 요청된다. 그
것이 바로 미발의 敬공부다. 곧 마음의 본체인 미발의 본성에 대해서는 存
養(혹은 涵養)이라는 敬공부를, 마음의 작용으로서 이발의 감정에 대해서는
省察의 敬공부를 배치한다. 마치 마음에 體用이 갖춰져 動靜을 관통하면서
쉼이 없듯이, 마음에 대한 敬공부도 멈춤이 없는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본성
을 보존할 줄 알아야 하고, 움직일 때는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60)
여기서 미발의 存養/涵養공부는 본성을 함양함으로써 도덕적 주체성을 확립
하려는 노력이다.61)
53) 心經密驗, 2:38.
54) 中庸自箴, 1:7.
55) 中庸講義補, 1:7.
56) 朱子語類, 62:117.
57) 中庸或問1章, 朱熹注.
58) 朱子語類, 53:47.
59) 朱子大全, ?答呂子約?, 48:18.
60) 中庸或問, 1章, 朱熹註.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101
이렇듯 주희도 미발의 공부를 주장하는데, 문제는 일관되지 않아 보이는
데 있다. 어떤 때는 완전한 본성이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는 자리로( 중용장
구 ), 어떤 때는 공부하는 군자만이 이루는 자리로( 중용혹문 ) 규정한다.
이는 고요한(寂) 미발의 양면성에 기인한다. 미발은 어두워서 생명의 빛이
부재한 상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려는 뜻을 품고 있다( 어류 , 86:45,
“寂, 含活意”). 모든 사람의 본성의 빛이 작동하고 있는 자리다. 미발의 자
리이자 리의 내재인 본성을 통해 총체적 완전성과 모든 존재와의 통일성
획득이라는 理想의 가능성이 갖춰진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온전한 발현을
위해선 사려가 개입되지 않은 미발의 敬공부가 요청된다.
다산이 주희의 중용혹문 을 定論이라 했는데,62) 거기서 미발은 삼가고
두려워하는(戒懼)자세로 理의 내재인 본성을 온전하게 늘 지키는 공부의 자
리다. 그런데 다산의 경우, 삼가고 두려워하는 대상은 하늘 곧 보이지도 들
리지도 않는 상제다.63) 이처럼 상제라는 인격적 주재자로 보려는 근본의도
는 “두려움을 구하는(求畏)” 정신에서 찾는다. 영명한 마음의 지각력이 발
동하는 미발시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제를 의식하고 섬기는(昭事上帝) 자
세다. 이것이 전제돼야 ‘戒懼’라는 생생한 정서적 감정이 가능하고, 도리를
어기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자세로 마음의 ‘平正’ 곧 中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64)
정약용은 마음에 확립된 도덕 원칙을 “權衡과 尺度”로 표현하고, 일일이
하늘의 명령에 證驗하는 미발공부를 제시한다.65) 따라서 이런 昭事의 자세
는 자기 내면에 도덕적 원칙을 세워, 마음을 도덕적 주체로 확립시키는 역
할을 한다.
Ⅴ. 결론
마음을 둘러싼 정약용의 고민과 해결방식을 주희와의 대비를 통해 살펴
보았다. 다산에게 마음은 정신과 육체의 오묘한 결합체다. 그 내면 주체의
61) 손영식, 앞의 책, 281쪽.
62) 中庸講義補, 1:7.
63) 中庸自箴, 1:5.
64) 中庸自箴, 1:7.
65) 中庸講義補, 1:8.
종교학 연구 102
초월적인 성격은 ‘靈明’으로 표현된다. 이는 궁극적 실재인 상제의 특징이
자, 그러한 상제와 소통케 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신적 존재와의 소통의 근
거는 주희처럼 同氣아니라 氣의 차원을 넘은 同靈이다. 또한 영명은 인간
의 존재론적인 우월성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주희의 ‘虛靈知覺’처럼 理의 통
일성을 고리로 주체와 타자 사이의 분리를 윤리적 인식을 통해 메꾸는 방
식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육신의 주재자로서 마음이 유가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주재
(主宰)의 문제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주희가 확고한 진리로 제시한 “心統
性情”을 다산은 근원적으로 재검토한다. 그리하여 理氣論으로 뒷받침되는
위 명제는 마음의 주재력을 담보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보편 원리의 내재인 본성이 존재론적인 우위를 갖는다는 점이다. 따
라서 마음과 본성의 ‘공존 속 분리’ 때문에 마음의 주재력 확보가 어렵게
된다. 이 지점에서 다산은 본성을 본질이 아니라 마음의 선한 속성으로 제
시하여 마음의 주재력을 추구한다.
인심도심론에 대해 다산은 비록 그것을 僞作이라 평가하면서도 그 진리
성은 인정하고, 그것을 신유학의 방식으로 이론화한 주희의 업적을 높이 평
가한다. 하지만 그 발생 근원에 있어, 다산은 주희가 이기론에 따라 形氣와
性命의 대비를 형이상학적으로 정초지은 방식에 반대한다. 대신 그는 도심
이 상제의 명령을 담는 마음으로서 궁극적 실재와의 소통의 場이라고 해석
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 존재론과 연관되는 윤리적 가치론을 기우뚱한 대
립항으로 설명하면서 윤리적 기획을 시도한다.
육신을 가진 한 지니게 되는 개체의 마음 곧 인심은 윤리적으로 극복의
대상인 人欲과 동일하지 않다. 곧 인심 자체가 죄악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며, 이런 입장은 정약용과 주희 모두 공유한다. 다만
그런 인심을 조절하는 도덕 기준인 도심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난다. 주희는
도심의 원천을 純善하고 고요한 본체 곧 본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 발현으로
서 도심은 ‘欲’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다산은 본성 자체를 하나의
욕구적 경향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 발현인 도심 또한 욕구로 해석한다.
마음의 심층영역인 未發의 문제를 정약용은 철저하게 공부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곧 주희처럼 의식 일반으로서의 감정이 발생하기 이전에 본성이
존재하는 상태로 미발을 보지 않는다. 물론 주희도 敬을 미발의 공부로 제
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사려가 미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理의
내재인 본성의 ‘涵養’이 된다. 이에 비해 정약용은 기쁨?분노?슬픔?즐거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103
움은 정서적 감정의 대표로 한정하고, 그 이외의 사려활동을 인정한다. 그
런 사려 활동이 작동하는 미발은 “求畏”의 차원에서 상제를 밝게 섬기는
(昭事) 자리다. 상제를 섬기는 자세를 통해 사람은 자기 내면 안에 도덕 원
칙을 확립하고, 따라서 도덕 주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마음론의 기본구조 및 그와 연관된 쟁점들에 대한 위의 정리를 통해 다
음과 같이 결론을 지을 수 있다. 곧 정약용이 주희의 마음론에 전제된 형
이상학인 理氣論을 해체하고 궁극적 실재로서 상제의 존재성을 강조하였지
만, 마음을 통해 유교 윤리적 지향 및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주희와 상통한다.
종교학 연구 104
Cho˘ng Yag-yong's(丁若鏞, 1762-1863) Discourses
on Mind
Lim, Boo-yeon
Ch?ng Yag-yong, a representative Confucian reformist of the late
Chosun dynasty, constructed an alternative world view to that of the
ruling Neo Confucian orthodox ideology. He focused his philosophy on
the mind, which had been one of the central notions of Chu Hsi’s (朱
熹) Neo-Confucianism. This article investigates Ch?ng’s new vision on
the mind by comparing it to that of Chu Hsi.
The argument of this paper can be divided into three points. Firstly,
Ch?ng considers “divine brilliance” (靈明) of the mind as the source of
communion with the Ultimate Reality and as sustaining man’s ontological
priority. This contrasts with Chu Hsi’s “reflective awareness” (知覺) of
the mind which bridges the gap between the self and the surrounding
objects by a unitary principle Li (理).
Although Ch?ng accepted the Neo-Confucian maxim, “the mind brings
into conjunction nature and feelings (心統性情),” he denied the
ontological difference articulated by Chu Hsi between nature as
immanent principle (理) and the mind as material force (氣), or the
consolidation of Li-Chi (理氣). Ch?ng substituted Chu Hsi’s nature as
substance or essence of the mind for nature as tendency or desire of the
mind that likes goodness and dislikes evil. Through this assertion, he
tried to establish the sovereignty of the mind as the ruler (主宰) of
nature and feelings.
Secondly, recognizing the significance of Chu Hsi’s discourse on the
human mind and the mind of the Tao (人心?道心), Ch?ng suggested
that the mind of the Tao was a direct utterance of Shang ti rather than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05
a manifestation of the innate nature as Heavenly principle. To Ch?ng,
the mind of the Tao as moral consciousness was a kind of desire for
goodness, which sought to conquer the human mind. But, Ch?ng and
Chu Hsi accepted the tilted polarity of values attributed to the human
mind and the mind of the Tao, which explains the restlessness of the
self and the possibility of becoming a sage at the level of phenomenal
minds.
Thirdly, Ch?ng replaced the Chu Hsi’s wei-fa(未發), the ontological
states of tranquility devoid of all feelings and thoughts, with the states
of thoughts devoid of particular sentiments, namely pleasure, anger,
sorrow, and joy. While Chu Hsi’s wei-fa is cultivated by reverential
concentration (敬), Ch?ng’s wei-fa is the place of serving Shang ti with
brightness (昭事上帝) and an attitude of “seeking fear" (求畏) in order to
become a practitioner of Heaven's mandate.
In the final analysis, Ch?ng tried to establish a world view different
from that of Chu Hsi’s Neo-Confucianism by developing a new idea of
the mind. Yet, in spite of his deconstruction of the Neo-Confucian
conceptualization of the metaphysical Li-Chi, Ch?ng both continued Chu
Hsi’s discourse of the mind and offered a new vision through critical
rethinking.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과정을 중심으로 ―
방 원 일**
1)
目次
Ⅰ. 머리말
Ⅱ. 신크레티즘/혼합주의의 역사
Ⅲ. 학술용어로서의 혼합현상
Ⅳ. 한국 개신교 의례의 형성과 혼합현상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종교’(religion)라는 용어 자체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종교학의 용어들
중에는 특정한 종교 전통 내에서 사용되다가 일반적인 범주로 재설정된 경
우가 많다. 종교 전통 내의 특정한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종교학을 통해
다른 전통의 현상과의 비교 인식을 거쳐 객관적 용어의 위치를 획득하는 것
은 종교학 성장 과정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혼합현상(syncretism)1)에 대한 고찰은 그러한 범주 설정의 작업에 속한다.
* 이 글은 방원일,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과 혼합현상에 관한 연구 ― 전래초기
(1884-1945)의 실천 양상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대학원 문학석사학위논문, 2001. 을 요약한 것임.
** 서울대 석사과정 졸업, 종교학
1) ‘syncretism’은 흔히 혼합주의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뒤에서 보게 되듯이 혼합주의
라는 용어는 일종의 담론으로, 종교의 존재 양태라기보다는, 종교를 ‘혼합’이라는
상태로 만들려는 의도적이고 때로는 악의적인 시도를 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신학
적 태도를 지칭하는, 협소한 의미를 지닌다. 문화적 현상인 ‘혼합’에 인위적 시도인
‘주의’가 결합하면서 왜곡된 함의를 산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을 감안할 때, 본
논문에서는 ‘syncretism’을 혼합현상, 그리고 맥락에 따라서 혼합이라는 용어로 번
종교학 연구 108
현재 종교학에서 종교간의 만남을 서술하는 용어는 그리 체계화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다. 예컨대 최근에 논의되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여러 종교들이 공존해 있는 상황의 묘사이기 때문에, 하나의 종교가 다른 문
화권에 들어가 다른 종교들과 부딪히며 겪는 역동적 변화에 대한 서술을 담
지 못하는 실정이다. 우리는 종교사에서 종교가 낯선 문화권에 선교될 때 겪
는 변화를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는 해당 문화권에서 존재하는
종교의 정체성을 논의할 때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닐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를 서술하는 용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을 때 그 변화의 현상마저 부정
된다는 점이다. 뒤에서 살펴볼 터이지만, 혼합현상은 기독교 신학의 시각에
서 부정적인 함의를 부여받으며 현상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범하
지 말아야 할 ‘혼합주의’로 공격받아 왔다. 한국 개신교는 이러한 용어 사용
이 왜곡된 정체성의 형성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혼합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한국 개신교계는 순수정통주의를 표방하며 한국
이라는 맥락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변화를 부정해왔다.
이 글에서 우리는 우선 신크레티즘이라는 용어가 서구 지성사에서 어떠
한 역사를 지녔으며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핌으로써 용어에 부
정적 의미가 덧씌워진 역사적 요인을 점검할 것이다. 그 다음 그 용어를 종
교학 용어로서 다듬어 사용하는 이론적인 논의를 펼친 후, 한국 개신교의
의례 정착 과정에서 혼합현상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났는지를 고찰할 것이
다. 한국 개신교 내에서 일어난 전통 종교와의 상호작용을 밝힘으로써 우리
는 개신교가 한국종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는 방식을 탐구하게 될 것이다.
Ⅱ. 신크레티즘/혼합주의의 역사
1. 신크레티즘의 역사
우리는 우선 서양어 ‘신크레티즘’(syncretism)과 그것의 번역어로 유통되
어온 ‘혼합주의’에 대해 분석적으로 고찰하도록 하겠다. 신크레티즘이라는
용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의미를 획득했는지의 역사를 개괄하는
작업을 통하여, 이 용어가 어떻게 하여 신학적 전제들을 내포한 용어가 되
역해 사용할 것이다.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09
었는지를 알아보자.
서구에서 신크레티즘(syncret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역사는 플루타르
크(Plutarch)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서로 자주 다투고 싸우다가도 외
부의 적이 쳐들어올 때에는 그들의 차이점들을 융합하여 단결하는 행동 방
식이 ‘신크레티즘’”2)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신크레티즘은, 평소에는 견해
의 차이를 지녔던 사람들이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여 원래의 차이를 해소하
고 내부적으로 결속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전략
적 제휴라는 매우 정치적이고도 실용적인 의미를 지니며 도덕적으로도 정
당하고 권장되는 긍정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처음 이 용어는 긍정적인 용
법으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이후 약 14세기가 지나서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사용할 때도 유지된다.3)
이 용어가 신학적 용어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유럽의 종교
개혁기인 17세기에 들어서부터였다. 당시에 루터교와 가톨릭의 화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칼리투스(George Calixtus)라는 개신교 신학자가 있었는
데, 그의 신학적 입장은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불리었으며, 그를 중심으
로 해서 가톨릭과 루터교를 일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사람들은 혼합주
의자(syncretist)라고 불렸다. 칼리투스파의 움직임은 루터교 내에서 혼합주
의 논쟁이라고 불린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논쟁에서 패배해 실패로
돌아간다. 논쟁의 결과는 이후 결정적으로 신크레티즘의 의미를 규정짓는다.
칼리투스에 의해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던 이 용어는 그의 정치적 패배로
인해 비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거의 잡종(hybrid)과 동의어로 사
용되었다. 신크레티즘은 일반적으로 원칙에 대한 배신 행위나 진리를 희생
하고서라도 안전한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간주되었다.4) 이 시점에서
그 이전의 긍정적인 함축은 완전히 부정적인 함축으로 전환되었고, 부정적
함축은 현재까지도 신학적 발언을 통해서 지배적인 함축으로 남아 있다.
신학적 논쟁 내에서의 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된 이 용어의 부정적 함축은
19세기 후반 들어서 헬레니즘 종교 현상에 대한 용어로 사용되면서 종교사
서술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1853년에 어느 익명의 필자가 잡지에 기고한
2) Plutarch, (tr.) by W. C. Helmbold, Plutarch's Moralia, Vol. VI, London: William
Heinemann LTD, 1939, p.313(490b).
3) Stewart, Charles & Shaw, Rosalind, “Introduction: Prblemizing Syncretism,”
Syncretism/Anti-Syncretism, New York: Routledege, 1994, p.4.
4) Moffat, James, “Syncretism,” Hasting, J. (ed.), The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12,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22, p.155.
종교학 연구 110
글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이래,5) 역사학자 드로이센(J. G. Droysen)의 헬레니
즘 문화 서술에서 신크레티즘의 도입은 정식화되었고, 이후 레빌(Jean
Réville), 유즈너(Hermann Usener), 쿠몽(Franz Cumont) 등의 학자들에 의
해서 이 용어는 사용되었다.
이들 학자들이 사용한 신크레티즘 개념은 헬레니즘과 로마 후기의 종교
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로마 후기의 종교는 그
리스,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지의 다양한 종교들이 뒤섞인 무질서, 혼란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었으며, 신크레티즘은 이 현상을 일컫는 용어로
채택되었다. 로마 후기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기독교의 등장과 맞물려 진화
론적인 도식을 형성한다. 즉 기독교 이전의 상황은 혼란과 무질서 상태였는
데 그것이 기독교의 등장을 요청하는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
이다. 그러한 도식은 “기독교가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이교적인 혼합주의는
종국에 이르고 말았다”6)는 단정적인 역사 서술로 나타나며 지금까지도 영
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후 20세기 들어서 신학에서는 혼합주의에 대한 부
정적 시각이 더욱 강화된다. 특히 개신교 교회연합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
(WCC)의 태도는 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1960년대 들어 세계교회협의
회에서는 타종교전통과의 협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넘지 말아
야 할 선’으로 신크레티즘을 지목하며 그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입장을 내
세우며 신크레티즘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2. 한국에서 ‘혼합주의’로서 수용된 혼합현상
서구 기독교계의 맥락에서 논의되던 신크레티즘이 한국의 종교문화에 적
용된 최초의 예는 1929년에 출판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 (원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에서 나타난다. 그는 한
5)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신학적 형태로, 가능한
모든 형태의 신크레티즘은 로마 황제들이 가장 좋아한 정책이었다. 그들은 모든 종
류의 인류를 불러들여 카이사르의 화폐로 다시 찍어내고자 하였다.”(Anonymous,
“the Octavius of Minucius Felix,” Fraser's Magagine for Town and Country,
vol. XLVII, March 1853, p.294.(Martin, Luther H., “Why Cecropian Minerva?
Hellenistic religious syncretism as system,” Numen 30, 1983, p.135에서 재인용))
6) Anthony Parel, S. J., “혼합주의”,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엮음, 기독교대백
과사전 , 기독교문사, 1985, Vol. 16, p.594(이 항목은 원래 C. S. J. Annette (ed.),
The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and Home, New York: Gradlier, 1965에
실려있던 것임).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1
국 종교의 특성을 개괄하는 대목에서, 기독교 유입 이전의 한국에는 고유신
앙들이 쇠퇴해 있었으므로 독특하고 지배적인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전
제하며 “古로마 세계에도 있었지마는, 당시 우리나라에도 종교혼합이 성행하
고 있었다”7)고 서술한다. 우리는 앞에서 서구 학계에서 로마 종교사를 서술
하는 용어로 신크레티즘이 사용되면서, 그것이 기독교의 승리라는 진화론적
인 도식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살펴본 바 있다. 백낙준은 기독교가 국교화되
기 이전의 로마의 상황과 19세기 말 한국 종교의 상황을 유사한 것으로 놓
는 비교의 인식을 통해서, 서구 학계의 진화론적 도식을 한국 종교사 서술에
도입하였다. 기독교 수용은 한국의 종교적 정황에서 볼 때 하나의 구원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유입 이전의 한국 종교계는 암흑기로 규정된다.
각각의 전통들이 쇠퇴하여 제 모습을 상실하고 혼합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종교혼합행위는 우리 겨레가 진리의 확증을 찾아보려는
비판성과 신앙적 집착성을 결여함을 보여주는 예증이 될 것 같다”8)고 판단
할 수 있으며, “표면적으로 볼 때에 한국인의 종교혼합은 신앙에 무관심 내
지 무한한 관용성의 표현 같으나, 엄정히 따져보면 종교신앙의 기갈(飢渴)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9)는 결론에 이른다. 백낙준의 서술에서
기독교 전래 이전의 한국 종교사는 일종의 결핍 상태로 묘사되며, 그것은 그
가 서술하는 개신교 선교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배경이 된다. 그러한 구도를
형성하는데 신크레티즘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용어 사용은 이후
학계에서 한국의 종교문화를 서술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 전통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신크레티즘의 번역
어 ‘혼합주의’가 결합하여 하나의 담론 체계를 이루게 되면서 이 용어는 한
국사회에 본격적으로 확산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
학이 한국의 신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세계교회협의회는 1960년대 초반 혼합주의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특히 1961년의 세계교회협의회 제3차 총
회에서는 혼합주의의 망령을 피해야 한다는 신학 노선을 제시해10) 한국 신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7)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832-1910 ,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p.12(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p.16).
8) 위의 책, p.20.
9) 위의 책, p.21.
10) 말린 벤엘데렌, 이형기 옮김,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p.87.
종교학 연구 112
한국 신학자들은 그들의 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부정적인 함축을 지닌
신크레티즘을 한국 사회에 정착시키게 된다. 이 시기에 신크레티즘은 종교
혼합, 제설혼효(諸說混淆), 습합(習合), 제교종합주의 등 다양한 표현으로 번
역되었지만 나중에는 혼합주의라는 표현으로 번역 정착되었다. 한국 신학계
에서 혼합주의는 기독교의 독자성 혹은 절대성을 해치면서 기독교를 종교
일반의 보편성을 가진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혼합주
의는 그 말 자체로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음모로 여겨져 빠지지 말아야 할
오류로 치부되었다. 이때 혼합주의가 적용되는 양상은 백낙준의 용법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백낙준의 혼합주의가 기독교 전래 이전의 종교적 지형
을 뭉뚱그려 지칭하던데 반해, 60년대 이후 신학자들의 혼합주의는 기독교
내에서의 전통의 영향을 지칭하고 있다. 용어가 겨냥하는 지점이 전통에서,
기독교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의 접촉면으로 이동한다.
60년대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영향을 받아 경멸적인 의미로 확고하게 자리
를 잡은 혼합주의는, 담론(discourse)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기독교와 전통
종교의 관계를 논하는 신학의 자리에 상투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신학이
범하지 말아야 할 오류로 지적된다. 그러나 혼합이 어떠한 의미에서 부정적
인 것인지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결여되어 있다. 그저 한국문화와의 접촉,
변형은 혼합주의라는 이름으로 단죄되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신학에서 혼합주의는 현상을 서술해주는 분석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는 개념으로 역할을 하였다.
Ⅲ. 학술용어로서의 혼합현상
그렇다면 우리는 현상으로서의 혼합을 어떠한 방식으로 학술적으로 서술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용법의 맹점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새로운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기존 혼합현상 논의에 대한 성찰
베어드(Robert D. Baird)에 따르면 종교사 서술에서의 혼합현상의 사용
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는 어떤 때는 혼합현상이 종교사에
서 불가피하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기술되는가 하면, 어떤 대목에서는 동양
종교들의 본질적 특성으로 기술되는 모순된 용법을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3
한다.11) 이 다른 쓰임새를 정리하여 베어드는 전자를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syncretism as a historical phenomenon), 후자를 ‘신학 현상으로
서의 혼합현상’(syncretism as a theological phenomenon)이라고 부른다.
우선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은 사상들이나 운동들 간의 역사적 상
호관련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이
러한 의미에서 역사상의 모든 종교는 기존 문화의 혼합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할 때,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이 적용되는 것이다. 헤르만 궁켈
(Herman Gunkel)이 기독교를 혼합적 종교라고 한 것은 이러한 용법의 예
가 된다. 베어드는 이러한 용법이 종교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전
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모든 종교가 혼합이라는 진술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대한 동어반복일 뿐이며, 어떠한 사실에 대한 분석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학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은 신념 체계의 차원에서 다양한 이
념들을 혼합한 경우를 말하는데, 상충되는 이념들이나 실천들이 한 데 모여
일관성의 이득 없이 유지되는 상태나 그 결과가 조화로운 통합이 아닌 경
우에 적용된다.12) 혼합현상은 유기적 총체를 이룬 종합보다는 평가절하된
의미로, 종합을 이루지 못한 채 모순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
러한 식의 용법은 특히 인도, 중국, 일본 신도 등의 동양의 종교를 묘사할
때 널리 쓰인다. 베어드는 이러한 용법에서 주장되는 정합성의 결여, 상충
되는 이념들의 공존은 순전히 외부적 관점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한다.13)
해당 문화권 내의 사람들은 외부인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하등의 모순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세계관 내에서 조화시키며 살아간다. 그
러므로 혼합현상이 종합에 비해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위계 설정은 의
미가 없으며, 어느 문화권의 특성으로 주장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두 용법의 혼합현상은 모두 서술범주로서의 부적절함을 드러낸다. 따라서
베어드는,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은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것이기 때
문에, 신학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은 정당한 종교사적 이해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종교사 연구에서 혼합현상의 사용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
11) Baird, Robert, D., Category Formation and the History of Religions, The Hague:
Mouton & Co. N. V., 1971, p.143.
12) 위의 책, p.147.
13) 위의 책, p.150.
14) 위의 책, p.152.
종교학 연구 114
그러나 혼합현상이라는 용어의 범주 설정이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
이 그 용어를 폐기처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곧장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종교’라는 개념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해서 학술적 논의
에서 그것을 배제하는 시도가 성공할 수 없는 것은 현실적으로 유통되는
개념의 간과될 수 없는 위력 때문이다. 혼합현상의 경우에 있어서, 그 용어
가 ‘사이비종교’와 같이 용어 자체가 악의에 찬 함축을 지니지 않은 한 그
것을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혼합현상에 대한 학술적 논의의
중지로 인해서 그 용어가 신학적인 함축을 담고 오용되는 현실을 묵과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15)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용어의 폐기
가 아니라 용어의 전제를 성찰하고 학술적으로 생산성 있는 용어로 다듬는
작업이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혼합현상이 사용될 수 있는 세 번째
용법은 한 종교가 다른 문화권에 수용될 때 발생하는 현상, 문화접변의 현
상을 서술하는 범주로서 혼합현상을 사용하는 것이며, 이러한 방향의 고찰
이 혼합현상을 생산성을 지닌 용어로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선교현상으로서의 혼합
혼합현상이 종교의 선교와 수용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서술하는 용어로서
기능할 때 유용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학자는 반 데르 레에우이다.
그는 혼합현상의 본질적 성질을 종교의 역동성의 한 형태로서 이해해야 한
다고 역설한다.16) 또 그는 “종교의 역동성은 선교로 나타난다”17)고 지적한
다. 앞서 베어드가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에 대해 지적했듯이, 혼합의
의미를 확대한다면 종교들 중에 그러한 성질을 갖지 않는 종교는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를 혼합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종
교들이 역동성을 지니는 시점을 포착하여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혼합현
상을 적용하는 작업이다.
더 나아가 레에우는 혼합현상의 요체를 간결하게 제시해준다. 그가 제시
해주는 혼합의 요체는 자리물림, 전위(듭位, transposition, Verschiebung)이
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5) Schreiter, Robert J., “Defining syncretism: an interim report,”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17-2, 1993/4, p.50.
16) Van der Leeuw, G., trans. by J. E. Turner, Religion in Essence and Manifestation,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3, p.609.
17) 위의 책, p.611.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5
‘자리물림’은 종교들의 역동성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형태는 전혀 변
하지 않은 채 있으면서 어떤 현상의 의미가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집’이라는 성스러운 말, 베델의 신화는 주물숭배의 경험으로부터 신현(神
顯)의 경험으로, 이어서 신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언표로, 최종적으로는
위안을 고양하는 것으로 ‘자리물림’된다. 이와 매우 비슷하게, 짜라투스트
라 이전의 페르시아 종교에서는 칭송할 가치가 있는 삶의 해방으로 간주
되던(왜냐하면 미트라는 잔인하기 때문에 동물을 죽인 것이 아니라 단순
히 삶을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였으니까) 소 도살이, 조로아스
터교에서 ‘자리물림’되어 아리만(Ahriman)의 첫 번째 파괴 행위로 악덕
화되었다. 또 향을 바치는 기도는 기독교 예배에서 (자리물림에 의해) 성
만찬에서 주의 강림을 희원하는 기도(epiclesis)가 되었다.18)
어떠한 종교가 수용되었을 때, 이전에 있던 요소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새 종교 안에서 새로운 요소와 결합할 때 그것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
던 의미작용을 일으킨다. 레에우는 이 과정을 자리물림이라고 명명하고 혼
합현상의 핵심적인 메카니즘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세계종교사에서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다. 신앙하
는 종교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이전의 신앙에서 지니던 성스러
운 시간, 공간, 상징 등이 잔존하는 경우는 종교사에서 흔하게 보고되는 현
상이다. 고대 이집트의 사원이 있던 자리에 콥트 기독교 사원이 세워지고,
그 위에 이슬람 사원이 건축되는 사례에서처럼, 지배적인 종교 전통이 교체
되더라도 그 지역민들에 의해 성스럽게 여겨지던 공간은 여전히 자신의 자
리를 유지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소도(蘇塗)가 있던 자리에 불교 사원이 건
립된 경우19)가 그러한 현상에 해당한다. 공간 외에도 시간과 상징의 경우
도 새 종교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며 새로운 체계
내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뒤에서 이러한 자리물림이 한
국 개신교 의례 정착 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3. 혼합현상의 주체로서의 대중 전통
우리가 혼합현상에 대한 학술적 논의에서 주목하는 두 번째 지점은 혼합
현상을 구성하는 주체에 관한 관심이다. 이 문제는 문화를 구성하는 주체의
18) 위의 책, p.611.
19) 서영대, “葛蟠地小考- 蘇塗의 佛敎的變容”, 종교학연구 제2집, 서울대학교 종교
학연구회, 1979.
종교학 연구 116
시각에서 문화를 이해하려 했던 인류학자들의 문제의식에 의해서 구체화된
바 있다. 이들 인류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문화를 전수받는 객체로서가 아니
라 의미제작자(meaning-maker)로서 강조된다. 대표적인 예가 구조주의 인류
학자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제시된 손재주꾼(bricoleur)이라는 인간형인데,
그는 재료를 적절하게 조합함으로써 원래의 재료가 가지지 못했던 용도에
쓰일 수 있는 구성물을 제작해내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이다. 다른
말로 해서, 손재주꾼은 주어진 요소들의 재조합을 통해 구조를 구성하는데,
이때 생성된 구조는 이전의 것과는 상이한 형태를 갖는다. 이러한 손재주꾼
이라는 인간형, 의미제작자로서의 인간은 종교를 신행하는 인간의 실천적
행위를 이론화하여 서술하는데 유용한 틀이 된다. 예컨대 코마로프(Jean
Comaroff)는 남아프리카인들이 토착적 종교 전통과 기독교 전통을 결합하
여 현실에 대응하는 종교적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을 연구하였다.20) 또 조
나단 스미스(Jonathan Smith)는 마오리족의 창조신화 이오(Io)신 신화에 대
한 연구에서 전통의 요소들과 외래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현실에 대한 성찰
을 가능케 하는 신화의 작용을 밝혀내었다.21) 이러한 연구들에서 강조되는
것은, 신화를 누리는 사람들, 제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활용하느냐에 대해서이다. 연구의 초점은 종교 전통
자체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에 맞추어진다. 혼합현상은 의미 수용자가
행하는 요소들간의 조합으로 연구되어진다.22) 그 조합의 창조성이 혼합현상
을 규정하는 가장 큰 관건이 된다. 그러므로 수용자들이 어떤 요소, 즉 ‘무
엇을’ 받아들였느냐에 대한 연구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
느냐에 대한 연구가 요청되는 것이다.
혼합현상을 그것을 구성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작업은, 종교사
서술의 중요한 안목의 하나인 엘리트 전통과 대중 전통의 구분에서 대중
전통의 관점에서의 서술을 채택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혼
합현상은 대중 전통의 신행(信行)에 의해 빚어지는 현상이다. 엘리트 전통
에서 ‘무엇을’ 대중 전통에 부여하였을 때, 대중 전통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20) Comaroff, Jean, Body of Power, Spirit of Resistanc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21) Smith, Jonathan, Z., “The Unknown God: Myth in History,” Imagining Relig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2) Drooger, A., “Syncretism: The Problem of Definition, the Definition of the
Problem,” Dialouge and Syncretism: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Michigan:
William B. 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9, p.18.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7
신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어떻게’의 문제가 제기된다. 대중 전통은 기존의
요소와 엘리트 전통에서 받아들인 새로운 요소들의 창조적 결합, 즉 혼합을
통해 자신들의 전통을 고안한다. 물론 이렇게 고안된 전통은 엘리트 전통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 엘리트 전통은 고안된 전통을 상황에 따라 묵인하기도
하고, 규제하기도 하면서 그것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이러한 의미
에서 혼합현상은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영역이다.
Ⅳ. 한국 개신교 의례의 형성과 혼합현상
이제 앞서 논의된 혼합현상에 대한 논의들을 염두에 둔 채,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 과정에서 나타나는 혼합현상의 특성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한국 개신교 의례의 특성
한국 개신교는 선교 초기부터 ‘말씀 중심의 교회’라고 불려 왔다. 한국
개신교에서 말씀, 즉 신념 체계가 강조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제의, 즉 실천 체계에 대한 관심의 약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교회의 중
추를 이루는 성례(聖禮)는 한국에서는 지극히 소극적인 면밖에는 가지고 있
지 못했”23)으며 “성찬 예식을 모르고, 그 성례의 견고한 짜임새 위에 세워
지지 아니한, 그러한 한국 교회”24)가 세워졌다. 심지어 한국 개신교는 반
(反)의례적 성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개화기의 개신교인들은 의례보다는
정신적 측면에 치중하는 것이 고등한 종교라는 논리를 내세워 상대적으로
의례에 비중을 두었던 유교나 천주교와 자신을 차별화시키기도 하였다.25)
성경, 교리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특성인 것만큼이나, 제의에 대한 관심의
결여는 전래 초기 한국 개신교의 중요한 특성을 이룬다. 한국에 들어온 선
교사들은 세례, 성만찬과 같은 최소한의 의례 외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
다. 개신교 엘리트 전통은 의례에 대해 소극적인 관심만을 가졌고, 이 사실
은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의례의 혼합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3) 민경배, 앞의 책, 연세대출판부, 1994, p.174.
24) 위의 책, p.175.
25) 장석만, “한국 의례 담론의 형성 ― 유교 허례허식의 비판과 근대성”, 한국사회의 근
대성과 종교문화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창립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2001, pp.29-31.
종교학 연구 118
엘리트 전통의 신학적 관심은 제의 실천 전반에 균일하게 적용되지 않았
으며 각각의 제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신학적 관심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은 제의에 대한 신학적 통제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
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학적 관심은 혼합의 양상과 상관 관계
를 갖는다. 순수정통주의적 입장을 지닌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관심은 전통
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신학적 관심이 강하게 투영
된 제의 실천에서는 혼합적 양상이 규제되고, 그렇지 않은 제의 실천에서는
혼합적 양상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정착된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개신교의
의례들을 세 부류로 무리지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즉 개신교 의례를 혼합
의 양상과 신학적 관심의 반비례 관계에 따라 정기 의례와 성례전, 절기
의례, 평생 의례의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정기 의례와 성례전은, 주로 주일에 행해지는 예배, 성만찬, 세례를
가리킨다. 이들은 개신교의 신념 체계를 직접적으로 구현하는 중심적 의례
이다. 개신교에서 예배는 말씀을 선포하는 의례로서 가장 중요한 제의적 실
천으로 인식되며 성만찬과 세례는 개신교의 2대 성사(聖事)26)로 규정된 공
식적인 의례이다. 이러한 공식적 성격으로 인하여 정기 의례와 성례전은 신
학적 관심이 강하게 나타나는 영역이 된다. 지성적인 차원에서 엘리트 전통
의 신학적 규제가 가해지기 때문에 혼합을 배제하려는 노력이 계속된다. 그
리하여 한국 개신교회에서 예배나 세례, 성찬식 등의 의례는 선교사들에 의
해 전래된 미국 청교도적 교파 교회의 양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둘째, 절기(節氣) 의례는 1년을 구획하는 의례로,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
수감사절 등의 교회력의 실천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절기 의례들은 기독교
의 전래와 더불어 소개되었으나 지성적 차원에서라기보다는 풍속(빌俗)의
차원에서 도입되었다. 도입과 함께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긴 하였지만 정기
의례와 성례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관심이 주어졌을 뿐이다. 신
학적 통제가 덜한 만큼, 한국 개신교인들은 자율성을 갖고 나름의 방식으로
절기 의례를 영위하였다. 게다가 절기 의례는 한국인에게 완전히 낯선 의식
이 아니었다. 의례에 담긴 기독교적 의미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1년을 구획
하여 의미화하고 기념하는 행위 자체는 고유의 세시풍속(歲時빌俗)에 원래
26) 천주교가 7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백성사, 병자성사, 신품성사, 혼인
성사)를 규정하여 일상의 의례들을 성사 내에 통합하고 있는데 반하여, 개신교는
종교개혁 당시 성만찬과 세례만을 성사로 인정하여 성사의 범위를 제한하였다.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19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절기 의례는 서양의 교회력 전체계를
통째로 이식하여 새로 배워 익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도입하여
한국 교인들이 원래부터 의미화하여 지니고 있었던 일년 주기 안에 편입되
는 양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절기 의례의 실천에 있어서,
고유의 절기 의례들과 어떠한 관계맺음을 이루느냐의 문제가 핵심적인 관
건이 된다. 이처럼 개신교 절기 의례는 전통의 맥락 안에서 실천되면서 혼
합을 이루게 된다.
셋째, 평생 의례는 주요한 삶의 계기에서 행해지는 의례로, 결혼식, 장례
식, 제사 등이 여기에 속한다. 평생 의례에 대해서는 신학적 관심이 상대적
으로 가장 적게 주어졌으며, 평생 의례의 실천은 신학적 개입보다는 교인들
의 자율에 따라 이루어졌다. 교인들은 자신의 몸에 배어 있던 전통의 행위
양식을 통해 기독교 신념 체계를 구현하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형적인
혼합현상이 일어났다.
기존의 의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기독교 평생 의례를 실천하는 것은 기
존의 행위의 일부를 수정하거나 기독교 상징을 첨가하여 변형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더구나 제사와 같이 신학적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
황에서도 공동체적 요구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던 의례의 경우, 전통적 방식
에 대한 의존성은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도식화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제시한 의
례의 범주들 내에서 동일한 혼합의 양상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와 추수감사절, 결혼식과 제사 등의 의례에서는 상이한
양상의 혼합이 나타난다. 이 도표는 함께 묶여 있는 의례들이 동일한 정도
의 혼합을 나타낸다는 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혼합 양상의 공통적인
특성을 지시하는 것일 뿐이다.
신학적 관심 친밀도 혼합의 양상
정기 의례와
성례전
예배, 성만찬, 세례 강하게 적용됨 낯선 행위 위주 제한적
절기 의례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사절
소극적으로 적용됨 낯선 행위와 익숙한
행위의 혼재 부분적
평생 의례 결혼식, 장례식, 제사 약하게 적용됨 익숙한 행위 위주 전반적
우리는 이제 개신교 의례 중 혼합현상이 나타나는 평생의례와 절기의례
종교학 연구 120
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개신교 평생의례에 나타나는 혼합
(1) 개신교 결혼식의 정착 양상과 혼합
개신교 평생 의례 중에서 전통의 실천 양식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것은
결혼식이었다. 한국 고유의 풍속 중에서 가장 많은 비판이 제기된 부분이
결혼식을 둘러싼 폐단에 관한 것이었고, 그 폐단을 고치는데 개신교 결혼식
이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생에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가 이교도의
결혼식”27)이라는 한 선교사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종래의 결혼식에 대
한 기독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의 시각은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종래의 결혼
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기독교식 결혼식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결혼식의 형성은 기존
요소들의 완전한 소거를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스크랜튼 부인
(Mary Fitch Scranton)은 1898년도에 은혜라는 개신교 신자의 결혼에 참석
한 후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켜진 결
혼식의 반대할만한 특성들은 폐기되었고, 대수롭지는 않지만(indifferent) 바
람직한 것으로 여겨진 것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에 의해 유지되었다.”28) 개신
교 결혼식은 기존의 결혼식에서 문제되는 부분을 개량하고 선택적으로 서
구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 부분은 그
대로 유지되었다. 기독교인을 찾아서 중매가 이루어지고, 비단 봉투에 사주
를 넣어 보내고, 혼수를 마련하는 등의 절차가 진행되었다. 개신교 결혼식
은 처음부터 혼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29) 위의 기록보다 약 20년 후에 감
리교 여선교사 어윈(Cordelia Erwin)이 남긴 기록에서도 우리는 전통의 실
천체계 내에 개신교 의식이 삽입되는 비슷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
도 화천에서 1918년 거행된 개신교 결혼식은 “최소한의 이교의 흔적도 없
는 엄격한 기독교식 결혼식”30)으로 의도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기존의 예
식을 소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였다. 어윈은 전통적인 결혼 절차 안에
27) McCune, Katherine, Miss, “A Hearthen Bride,” KMF 6-9, 1910. 9, p.222.
28) Scranton, M. F., Mrs., “Grace's Wedding,” Korean Repository, Vol. 5, 1898, p.295.
29) Kendall, Laurel, Getting Married in Kore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p.63.
30) Erwin, Cordelia, Miss, “Transition, A Korean Christian Wedding,” KMF 14-4,
1918. 4, p.73.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1
신부의 머리에 씌우는 흰 베일이라는 서구 상징의 도입을 통하여 혼합적
의례를 진행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이교적이지 않은 결혼식을
행하려 했던 개신교인의 노력은, 이렇게 전통적인 행위의 틀 안에서 형성된
혼합적 형태의 결혼으로 귀결되었다.
때로는 한국인에 의해 실천된 개신교 결혼식에는 전통적 실천 논리가 다
시 수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가 되는 것이 초기에는 비판받았던 중매가 개
신교 결혼에서 다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중매에 대한 비판은 개화 초기
부터 빈번히 제기되었으며, 새로운 결혼의 중요한 특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개신교 결혼식의 영향을 받은 사회인들의 결혼에서
는 자유연애를 강조하는 풍조가 생겨났지만, 정작 개신교인들은 결혼의 대
상을 제한하는 노력을 하였다는 점이다. 한국 개신교는 초기부터 개신교인
들끼리만 결혼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보였다. 신자들끼리의 결혼은, 신
자와 비신자의 결혼에서 생기는 문제점, 특히 여자 신자가 남자 비신자에게
시집가서 겪는 어려움 때문에 요청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필요성은 교회 총
회를 통해 율법화되면서 강제적인 규정이 되었다. 1904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자가 불신자와 더불어 결혼하는 것은 죄로 정함”31)이라고 규정한 이래
신자 아닌 사람과의 결혼은 교회의 규제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교
회의 혼인범위는 구한국시대의 사색(四色)의 혼인보다도 더 좁아졌는지
라”32)는 개탄이 나올 정도로 개신교인들의 혼인 상대는 제한되었다.
한국 개신교의 결혼식은 이념적으로는 ‘이교의 흔적이 없는’ 예식을 지향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전통적 결혼의 틀을 많은 부분 유지하며
부분적인 행위와 상징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혼합의 과정으로 형성되었다.
겉모양으로 볼 때 개신교 결혼식은 전통 혼례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의 개신교 결혼식이 서양의 것을
그대로 들여와 실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수용의 과정에서
기존의 틀과 혼합되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정착했다는 사
실이 중요하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기독교 상징을 전통의 혼례 과정에 도입
하고, 전통의 요소 중에서 상황에 의해 요청되는 것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결혼 의례를 정착시켰다.
31) 長老敎會史典彙集, 朝鮮耶蘇敎書會, 1918(한규무,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결혼 문
제 인식(1890-1940)”,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0호, 1999, p.72에서 재인용).
32) “조선교회의 7난(속)”, 기독신보 , 1917년 9월 26일.
종교학 연구 122
(2) 장례식
결혼식이 전통의 의례에 상당히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에 비하여, 장례
식은 전통적 의례가 그리 많은 변화를 겪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시점에서도, 예식 집행은 기독교식으로 거행된다고 하더라도 그 예
식과 예식 사이에서 되어지는 모든 절차는 구습(舊習)대로 조금의 변화 없
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평가가 내려질 정도이다.33) 한국의 개신교 장례식은
집례자가 목사로 바뀌고 운명(殞命)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임종 예배가 삽
입되었다는 점을 빼고는, 입관-장례-하관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장례식 순서
가 그대로 이어진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전통 장례에 기독교 예배를 삽입하는 방
식으로 장례 실천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행위를 전통
실천의 맥락 안에 배치하는 작업과 전통의 상징물들을 기독교 상징물로 대
체하는 작업으로 구성된다. 전자의 작업은 기독교 예배의 기본 형식인 기
도, 찬송, 성경 봉독, 설교 등의 행위를 장례 안의 절차로 삽입하는 것이고,
후자의 작업은 십자가 상징을 의례 도구에 도입하는 일이었다. 발상하는 장
소로 예배당을 사용하고, 목사가 성경을 들고 관을 인도하며, 상여소리가
들어갈 대목에는 찬송가가 불리었다. 개신교인들은 낯선 행위들을 전통의
차례 안에 배치하는 혼합을 통하여 그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의례를 창안
하였다. 그 창안의 과정은 상징의 도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들은 종래
의 상복에 십자가를 새겨 넣고 묘비로 십자가를 사용하였다. 그리스도 죽음
의 상징이자 기독교인임을 분별해주는 기호인 십자가를 종래의 상징물들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실천 체계를 구성하였다.34) 그들은 장례를 치루면서
전적으로 새로운 행동만을 고집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고민한 지점은
익숙해져 있던 몸짓 사이사이의 어떤 지점에 낯선 몸짓을 집어넣고 어떤
부분을 바꾸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몸짓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고민이었다. 전통적인 몸짓의 틀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것
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이해하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어떤 식으로든
소통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죽음관을 담고 있는 몸짓으로
기독교의 죽음관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35) 그러므로 익숙한 행위와 낯
33) 박근원, “기독교의 관혼상제 의식지침”, 기독교와 관혼상제 , 전망사, 1985, p.178.
34) 이것은 강화도 고씨 부인의 장례식에서 잘 나타난다(이덕주?조이제, 강화기독교
100년사 , 강화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역사편찬위원회, 1994, p.142.).
35) 차은정, 196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 의례의 변화에 대한 연구 , 서울대학교 대학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3
선 행위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장례의 반복이 죽음에 대한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낳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앞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과제가
될 것이다.
3. 개신교 절기의례에 나타나는 혼합현상
개신교와 더불어 한국에 도입된 교회력에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
사절이 있다. 이들이 한국의 전통적 절기의 맥락에 자리매김하는 양상은 혼
합과의 직접적인 상관성을 갖는다. 크리스마스가 기존의 요소와의 혼합을
통해 한국의 명절로 확고한 자리를 얻은 데 반하여, 혼합의 과정 없이 수
입된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은 교회 내의 행사로 한정되었고 제대로 정착하
지 못했다.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개신교 선교가 개시된 1884년부터 선교사들에 의해
누려졌으나,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크리스마스에 그리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으며,
미국의 청교도는 크리스마스를 이교도의 풍습으로 보아 한 때 그것을 폐지
했을 정도로 크리스마스에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크리스
마스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선교가 어느 정도 진
척된 1890년대 중반에도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기 보다는 휴가로서의 의미가 강하였다. 즉, 선교사로서 한국 신자들
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내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선물을 교환하
거나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하였다.
선교사들의 상대적 무관심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1890년대 후반부터 본
격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자신들에게 의미있는 날로 정착시켜 나가기 시작한
다. 이 당시에 발간된 신문들을 참고하면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가 급속히
확산되었음을 볼 수 있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크리스마스에 대한 보도
는 확대되어갔고, 1899년에는 “구세주 탄일이 대한국에도 큰 성일이 되었
다”36)는 평가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크리스마스가 급속히 보급된 것에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수용 의지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원 문학석사학위논문, 1997, p.35.
36) “1899년 12월 27일 기사”, 대한크리스도인회보 .
종교학 연구 124
크리스마스는 전통적 실천 체계의 맥락에서의 혼합을 통해서 한국에 정
착되었다. 이 혼합의 양상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절기 의례로서 한국에 정착
하였다. 전통적인 절기 의례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짓는 역할을 담당한 날은
동지였다. 크리스마스와 동지는 한 해를 마무리짓는다는 구조적 동일성을
지니면서 3, 4일 정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존재하였고, 이질적인 두 풍습
은 서로 섞이면서 양립하게 되었다.37) 구체적으로 동지는 음력에서의 한
해를 마무리짓는 날로 팥죽을 해 먹고, 다음 해의 달력을 나누어주며, 친한
사람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한 해를 정리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러한 행위들
은 크리스마스에서도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가까운 사람에게 찾아가 문안
을 드리던 관행은 카드와 연하장을 보내는 풍속으로 자리잡았으며,38) 달력
을 나누어주는 행위도 크리스마스에 그대로 나타난다.39)
전통적인 동지가 유지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로 대체된 것은 물론 양력
의 보급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1890년대 후반의 몇 해 동안 크리스마스가
급속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 시기는 양력의 보급 시기와 일치한
다. 양력의 보급에 따라 음력의 한해를 마무리하는 것은 의미를 잃게 되었
고, 대신에 성탄(聖誕), 신정(新正), 구정(舊正)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연말연
시의 절기가 한국 사회에 형성되었다.40) 이 새로운 구도에서 크리스마스는
동지가 하던 역할을 계승하여 한 해를 마무리하는 한국인의 절기 의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에
의미있는 절기로 자리잡은 것은 양력의 보급에 따른 절기 의례 구도가 변
화되었고, 그 구도에서 동지의 행위를 양도받아 한국 절기의 맥락 안에서
의미화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한국 크리스마스의 실천에서 나타난 혼합의 양상은 고유한
생일 모심과의 연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낯선 명절이 한
37)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한국인의 의식과 예절문화 Ⅱ: 한국 의례문화의
구조와 역사 , 96년 교육부 인문?사회과학 중점영역 연구결과 보고서, 1998,
p.179.
38)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앞의 책, p.180.
39) 1901년에 선교사 마펫이 묘사한 평양의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다음과 같다: “예배
후에 교회 직원들의 주도하에 수많은 교인들이 달력을 가지고 평양의 각 대문으로
나가서 아직 전도 받지 못한 시골 마을의 집집마다 복음이 퍼지길 바라며 지나가
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소.”(사무엘 마펫, “1901년 12월 25일 편지”,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 편지(1890-1904) , pp.680-681.)
40) 이서구, 세시기 , p.208.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5
국인에게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는 그것이 예수의 생일이라는 점에
있었다. 원래 모셔 오던 부모의 생일, 임금의 생일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인
들은 구세주의 생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초기 감리교 신학자인
최병헌에 따르면, 가정에는 부모의 생일이 있어 이를 기념해야 하고, 나라
에는 임금의 생일(만수성절)이 있어 이를 경축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세
계의 구세주의 생일을 모든 이가 경축해야 한다는 설명된다.41) 여기서 구
세주의 탄생일을 모시는 방식이 부모의 생일 모심, 임금의 생일 모심의 연
장선상에 있으며 따라서 그 방식이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 논리에 유념할 때, 우리는 전통적 생일 모심의 행위가 예수
의 탄일에도 나타났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한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등불 장식과 깃발의 사용이다. 등불 장식과 깃발의 사용은 석
탄일에서, 그리고 임금의 생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42)에서 사용되었던 축
하의 행위였다. 이러한 상징 논리의 전승이 혼합의 세 번째 양상에 해당한
다. 그것은 전래 초기 한국 크리스마스의 대표적인 풍경인 등불 장식에서
잘 나타난다. 초기 한국 기독교에서 등불은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장식이
다. 등불 장식은 서구에서 촛불을 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단
적으로 강조된다. 사실 탄일(誕日)을 등불로 장식하는 것은 한국 불교에서
성행했던 풍습이다. 이것이 기독교 전래 이후 크리스마스라는 외래적 요소
와 등불이라는 토착적 요소의 결합이라는 혼합현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기
독교에서 제공된 크리스마스라는 틀 안에서 전통적인 등이라는 요소가 새
로이 배치되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이 일어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크리스마스의 정착과 혼합 과정에서, 우리는 엘리트 전
통의 신학적 관심과 혼합현상의 반비례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크리스마스의 종교적 의미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
았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 신자들은 크리스마스를 수용하여 한해를 마무리
하는 절기 의례로 정착시켰다. 신학적 규제가 약했던 영역인 크리스마스의
정착 과정에서는 이전의 동지에서 행해진 행위들, 생일 모심의 행위들이 그
대로 반복되면서 그 위에 개신교 신념 체계가 덧씌워지는 혼합이 일어났다.
41) 최병헌, “구세주의 탄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 1897. 12. 15. 이 글은 이듬해에
약간 수정된 채로 같은 신문에 다시 실렸다.
42) 만수성절은 고종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로,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경축되었다.
종교학 연구 126
(2)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반면에 크리스마스와 함께 개신교 교회력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절기 의
례인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은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중요한 절기의례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엘리트 전통의 차원에서 부활절은 크리스마스 못지 않은 중
요한 행사로 강조되었지만, 유럽에서 부활절이 정착할 때 일어난 과정, 즉
봄의 축제라는 대중 전통과의 혼합과 같은 일이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
던 것이다.
더욱이 추수감사절은 선교 과정에서 엘리트 전통에 의해서 부과되었다는
특성이 두드러진 절기 의례이며, 이 점에서 대중 전통에 의해 수용이 주도
된 크리스마스와는 대조를 이룬다. 추수감사절은 선교 개시 직후부터 수행
된 의례가 아니며 한국의 교단 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된 시점에서 실행되
기 시작한 절기 의례이다.43) 각 교단마다 달리 지켜지던 추수감사절은
1914년 장로교 총회에서 추수감사절 날짜는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확정된
다.44) 그런데 이 날짜의 결정은 선교사들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었
다. 1902년 첫 추수감사예배가 행해질 때만 해도 시행 날짜는 미국의 추수
감사절 날짜에 비해 한 달 이상 앞당겨진 10월 5일이었다. 이것은 초기의
추수감사가 한국의 추수시기에 맞추어 추석과 비슷한 시기에 행해졌음을
암시한다.45) 이에 반해 1914년의 결정은 전통적인 삶의 리듬보다는 선교사
들의 입장을 강변한 것이었다. 날짜가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해진 것은
그 날이 ‘선교사 최초 도선일(渡鮮日)’이기 때문이었다. 추수감사절은 한국
에 외국인 선교사가 최초로 도착한 날을 기리는 날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시행이 전적으로 엘리트 전통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추수감사절을 “외지(外地) 전도(傳導)를 위해서 예배하고 강도(講道),
기도, 연보(捐補)하는 날”46)로 규정한 것 역시 선교사가 중심이 된 엘리트
전통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은 엘리트 전통의 강한 신학
적 관심을 내포하고 있는 실천이었기 때문에 혼합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전통적 절기 의례 중에 추석이라는 매우 유사한 의례가 있었음에도, 교계는
“하나님 은혜로 얻은 추수 감사를 집안 귀신에게 굿하여 주는 것은 하나님
43) 1902년에 들어서야 이천의 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예배를 올렸다는 기록
이 등장한다(“곡식 거둔 감사례?”, 신학월보 2-11, 1902/11).
44) “感謝日은 陽曆十一月第三主日後三日(水曜日)노 定하니 此는 宣敎師가 朝鮮에
始渡하던 日이다”(곽안련 엮음, 長老敎會史典彙集, 北長老敎宣敎會, 1936, p.12).
45) 이정훈, 한국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절기 예배 이야기 , 대한기독교서회, 2000, p.53.
46) 곽안련 엮음, 長老敎會史典彙集, p.12.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7
의 물건을 악신에게 드리는 것”47)이라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추수감사
절의 실천에는 전래의 행위와의 혼합을 통한 정착이 아니라 배제를 통한
이식의 의도를 강하게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몸에 익은 절기와의 단
절로 인해 추수감사절은 개신교 대중 전통에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크리
스마스는 양력의 보급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동지를 흡수 대체할 이유를 갖
고 있었던 반면에, 추수감사절의 경우에는 추석 대신에 준수되어야 할 이유
가 없었다. 결국 대중 전통에 의해 추석은 확고한 명절로 계승된 반면에
추수감사절은 교회에서 근근히 지켜졌을 뿐이다.
Ⅴ. 맺음말
우리는 혼합현상을 기술하는 용어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이 현상의 매우
특수한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 현상에 대한 용어 자체가 종교현
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서구 신학계에서 혼합현상을
지칭해 왔던 용어 ‘신크레티즘’은 종교현상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엘리트 전통이 대중 전통을 규제하는 종교현상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 점은
한국의 경우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크레티즘은 한국 신학계에서 ‘혼
합주의’로 번역되어 사용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담론으로 정착
하여 기독교와 다른 전통간의 접촉과 변화를 부정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되
었다. 담론으로서의 혼합주의는 현상에 대한 인식을 차단해 왔으며, 이는
학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베어드의 구분에 따르
면 신학 현상으로 혼합에 해당하는 것으로, 혼합을 의도적인 이념적 결합이
라는 제한된 관점에서 제시하였고, 그 결합을 상충되는 요소들이 정합성 없
이 공존하는 부정적인 상태로 평가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신크레티즘의 한
국에서의 번역에 ‘-주의(主義)’라는 접미사가 붙어있음은 한국에서 혼합현상
이 신학 현상으로서 인식되어왔음을 잘 보여준다.
이론적으로 생산성 있는 용어로 혼합현상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역사 현상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일반화시키기보다는 종교현상의 한 측면을
지칭하는 술어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반 데르
레에우가 혼합현상을 종교의 역동성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그 역동성이 선
47) “츄슈?깃븜”, 신학월보 1-1, 1900/12.
종교학 연구 128
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언급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혼합
현상은 한 종교의 선교에 따른 문화접변을 서술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은 자리물림, 즉 어떠한 요소가 형태는 변하지 않으면서
현상의 의미가 변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옛 요소가 잔존하여 새로
운 맥락에서 변화된 의미를 갖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한국 개신교 의례
의 정착 과정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 옛 요소의 잔존이 어떠한 의미작용을
일으키는가이다. 한국 개신교 의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전의 의례 실천
에 의해 한국인의 몸에 배어있던 몸짓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익숙해져 있던
몸짓의 잔존은 개신교 의례를 한국적 방식으로 창출한다. 개신교식 결혼식
과 장례식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전통적인 절차들, 제사 금지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기일(忌日)이 되면 행해져야 했던 몸짓들, 그리고 백일, 환갑 등 이
전부터 경축해왔던 삶의 대목들은, 이교의 습속을 폐지하겠다고 결심했던
개신교인들에게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잔존해 있던 몸짓들은 이전의 의미
그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여기서 바로 자리물림이 일어난다. 개신교인
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행위자에게서 이전의 행위들은 새로운 신념체계
를 실천하는데 사용된다. 전통적인 등불 장식은 세상의 빛인 구세주의 탄일
을 기념하는데 사용되고, 새벽의 비손은 절대자를 향한 갈망을 표상한다.
기독교 신념 체계라는 새로운 맥락 안에서 이전의 몸짓들이 반복되고, 잔존
해 있던 이 행위들이 한국 개신교 의례를 독특한 것으로 만든다. 이 과정
에 의해 한국 개신교는 독자적인 실천 체계를 갖게 된다.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 과정에서 나타난 혼합현상은 대중 전통의 실천
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우리는 이론적 고찰을 통해 혼합현상을 의미제작자
로서의 인간이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혼합주의 담론에서는 혼합현상을 일종의 타락, 난맥상으로 여긴다.
한국의 경우에도 순수한 기독교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전통과의 혼합
을 통해 기독교를 오염시키는 행위에 대해서 비판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전
통의 고정성, 순수성은 엘리트 전통의 교의적 주장에 해당되는 내용이지 혼
합현상을 판단하는 전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혼합주의 담론에서 벗어난 위
치에서 혼합현상을 기술하는 작업은 현상을 엘리트 전통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 전통과 대중 전통의 긴장 관계의 맥락에서 보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국 개신교 의례의 혼합은 대중 전통에서 일어난 창조적 결
합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반면에 엘리트 전통의 신학적 관심은 이를 규제하
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의례의 혼합의 양상은 엘리트 전통의 신학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29
적 규제의 강도에 반비례하여 나타났다. 신학적 관심이 강하게 투영되었던
정기 의례와 성례전에서는 선교사들이 전수해 준대로 미국 청교도들의 의
례 절차가 그대로 한국인들에 의해 준수되었다. 반면에 엘리트 전통의 신학
적 관심이 소극적이었던 절기 의례, 그리고 관심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던
평생 의례의 영역에서는 전통적 요소들과의 혼합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한국 개신교 의례의 상황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대부분 그것을 혼란의
상황으로 묘사한다. 개신교 실천과 전통적 실천이 공존하는 상황은 흔히 개
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개신교 의례가 담고 있는 신념 체계와 이전부터 행
해오던 몸짓이 담고 있는 신념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난맥상
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개신교 의례가 아직 통합적인 우주론을 구성
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 연구의 평가에는 새로운
의례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신학적 목소리가 깃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 이루어진 작업은 어떠한 신학적 당위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종
교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혼합현상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가 새로운 문화권에 전래될 때 나타나는 역동적인 현상
이며, 그 종교가 문화권에 정착될 때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다. 한국
개신교 전통을 이해하는 일은 개신교의 혼합현상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
다. 그것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신학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혼합 자체에서 전통을 형성하는 역동성을 인식하고 그 방향성을 가늠하는
것이 종교현상의 이해에 근접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종교학 연구 130
Theorizing Syncretism
― Focusing on the Formation of Korean Protestant Praxis System ―
Bang, Won-il
There has been plenty of disputes on whether the term ‘syncretism’ can
be applied to Korean Protestantism. In the western tradition, syncretism
received negative implications during the theological controversies and this
has come to influence the use of the terminology used in the academic
studies of religions. Also, in Korea syncretism has come to take on
negative connotations. Especially since 1960s this meaning became firmly
fixed. When discussing the interaction between traditional religions and
Christianity, syncretism functioned as a diluting argument that inhibited a
clear understanding of the phenomenon. In academia the term syncretism
has been used with such a scope that it covered all religious phenomena.
It was also mainly used to describe certain religious traditions
pejoratively.
In order for the term syncretism to be academically useful, we need
to delimit its application to certain events such as during missionary
activity or during contact between religions. This conclusion has been
the outcome of debates in religious studies and in anthropological studies
of religion. In this thesis, syncretism is proposed as a category for
describing and understanding acculturation. Within this theoretical
bearing, two arguments are posed: 1) The main aspect of syncretism is
the process of ‘transpositioning.’ That is, syncretism refers to a
phenomenon where elements of pre-existing religions are reconstructed
with a different meaning within the newly introduced religion. 2)
Syncretism takes place through a creative combination or a bricolage of
popular religious forms.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131
These theoretical arguments can be applied to the Protestant case in
Korea in two ways. Firstly, the phenomena of syncretism in Korean
Christianity has been considered in the eyes of the Christian theologians
as a degradation and corruption from a true form. Also, the term
‘syncretism’ has become part of the discourse of regulating the processes
of transformation within the Church. Secondly, it has been found that
consideration of syncretism as a missionary phenomena has been an
extant notion in the Korean academic tradition. Thirdly, syncretism in
the area of Korean Protestant rituals has taken place through
transposition. Forthly, there was tension in the syncretism process
between the popular tradition and the elite tradition in Korean
Protestantism. Thus, when the theological concern of elite tradition
weaken, room for syncretism was created.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Attila K. Moln ?ar*
1)
The word “religion” is not a modern invention, we inherited it from
the Romans. Yet, it was not commonly used until the age of the
Reformation, when it emerged as a by-product of the religious conflicts.
During this formative age of Europe many of our basic notions, like
“politics,” were constructed. The aim of this paper is not to define
religion or to analyse its several meanings and definitions, but to focus
on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in the early modern
Europe. It seems that the word “religion” adopted the meanings of
conscientia and universitas fidelium at this time. one of the basic ideas
in the Christian thought was that sinful human needed restrains, controls
from within as well as from without, which is referred to as forum
internum or conscientia, and forum externum or worldly judges,
respectively. When during the 16th-17th centuries conscientia received a
highly individualized and emotional meaning from Luther and Milton, it
was a useful concept for the reform minded people. It came to mean a
control from within and at the same time shared, common among the
people. However, the community who supported a gradual change in
political thinking and political theology requested another word instead of
conscientia. It is here, from the notions of conscientia and universitas
fidelium, that relgion adopted its own ideas of shared, common control
from within and independent from the worldly power of any leader.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was partly a side effect of
the Reformation and religious wars, and more specifically, this notion
* Eötvös University, Budapest
종교학 연구 134
was taken from republican principles. The notion of religion was created
by lay politicians and by political theologians from the viewpoint of
politics and political society.
*
The basic tenet of medieval! Christian thought was obedience. Because
of the fall of man and original sin, Christian thought emphasized virtue
and the need of obedience of human will and mind. According to
Augustinian thought, one of the results of original sin was worldly
power. The effects of original sin―self-love, ambition, quarrels, the
libido dominandi, and so on―could be restrained by baptism (regeneratio
or renovatio). Through baptism people could also become members of
corpus Christi, that is, the Church. The members of the Church are
fidelis, subjects who are under the law that govern and rule over them,
a law handed down and not created by fallible human1). The Church,
just like a political society was seen as a congregatio fidelium or
universitas fidelium, of which members are connected to each others by
common fides and obedience to common law. Here, obedience originated
from fides.
It was also a widespread view that people needed control in the foro
conscientiae as well in the foro externo, that is, control from within by
conscientia as well as control from without by magistrates. Neither of
them could exist without the help of the other. The stronger the
conscientia in a person the closer that person is to the ideal of a citizen
of Chvitas Dei, while the weaker the conscientia, the closer that person
is to the citizen of civitas terrena. The most terrible is, of course, the
faithless atheist who can be governed only by their will, in which case
libido dominandi is stronger than the conscientia.
In spite of the wars and conflicts between the Pope and secular
powers, the idea of universitas fidelium was common in worldly
thinking. Subjects were loyal to their rulers and to their oaths, because
1) I Corinthian. 15, 10.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35
they allegedly worried about other-worldly punishment. However, when
the hope of rewards and the fear of divine punishment are removed, no
human society can endure. Thus, those who did not believe in the other
world and the associated punishment were seen as potential rebels,
oath-breakers. Therefore, Christian thought connected the idea of being
good subjects to Christian faith.
After the publication of Machiavelli's “The Prince” in 1513, in which
religion or Christian faith were not used in the description of a political
society, Luther published his 95 points in 1517. In the following two
centuries the matter of divinity became again the most import!ant element
in public as well as in private life. After the victory of the secular
government in the Investitura wars, not the Papal, but the highly
individualist interpretation of conscientia, created a new rival for secular
governments. Sacerdotium came back against imperium, however
sacerdotium had taken a new form which, in the remote period between
11th-13th century, was institutionalized and legalized. Later after the
Reformation sacerdotium was seated in the individual's conscientia.
The old wars between the Holy Roman Empire and the Holy Seat
was about the question of ultimate judgement. Rome vindicated the right
to be the ultimate judge in any matter, even over the emperor, yet the
new problem for rulers in the 16th century was the popular movements
that claimed conscientia as the ultimate judge. However, the Holy Seat
considered itself to be the ultimate judge above secular power, because
of its direct relation to God's will. At the same time, conscientia was
thought to be the ultimate judge, even above the rule of secular power
because of its direct relation to God. However, the Reformation spread
the view that the ultimate judge could only be conscientia, because it
was not from human but from God.2) Already in the patristic thoughts
of St. Augustine and St. Jerome, conscientia became the highest position
of authority in questions of morality.
2) “Conscientia was a little God sitting in the middle of men's hearts.” (Perdins)
“It immediately subject to God, and his will, and therefore it cannot submit it
selfe unto any creature without idolatry.” (Ames)
종교학 연구 136
The idea of conscientia originated from the Hellenistic popular
language, from the term “syneidesis.”3) Syneidesis was the feeling of
shame and fear produced by the knowledge that one's personal action in
the past was wrong. It meant both the capacity to experience this
reaction as well as to possess the knowledge that could bring about this
reaction. St. Paul connected syneidesis to God, and saw it as a
counterpart to Christian faith. Conscientia. however, was considered by
St. Jerome as an inner secret of individuals and as part of the Christian
faith, but still conscientia meant knowledge “shared with others.” “Con”
or “Syn” means “with” and the original meaning of conscientia was the
shared aspect of knowledge.
Conscientia in the Roman Stoic philosophy, namely of Seneca and
Cicero, was connected to people's natural awareness of the natural moral
law, so for Seneca and Cicero, conscientia was connected with “logos.”
In the cases of Philip de Chancellor, Aquinas, and St. Bonaventura,
healthy conscientia was a good emotion produced by reason. on the
other hand, unhealthy conscientia was a bad emotion and it ruled over
reason. Good conscientia produced certainty, clear and undisturbed
felicity, and joy while bad conscientia caused terror, confusion, sadness,
fear, and desperation. Whatever role and significance were given to
reason in the idea of conscientia, it worked by mans of feelings and
emotions.
Aquinas' ideas were different from previous theologians. He gave a
new and import!ant meaning to conscientia, which was knowledge applied
to an individual case. For him conscientia meant discoursive,
argumentative reasoning, and the application of knowledge and since
Aquinas, Conscientia played the role of judge and witness, or reasoning
and memory. Aquinas further believed that Conscientia came from
nature, therefore everyone, by nature, had conscientia (synteresis -
reason). It cannot be lost, not even by the damned.
Luther's notion of conscientia was connected to William Ockham's
3) This idea, however, cannot be found in the Old Testament.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37
nominalism. In Ockham's view, reason and will were identical, but
unlike Luther he rejected natural law and synteresis. In Luther's works
after 1516, conscientia became only an emotional concept and synteresi
s ―reason and syllogism―disappeared from his works all together.4)
Conscientia was not the application of Law anymore, but rather a direct
result of the Gospel, or the Holy Spirit. Luther equates Conscientia with
faith, while syntereisis, shared reason, was criticised as quasi-Pelagian.
For Luther, without grace there was not conscientia but only Love.
According to Luther, shared knowledge and reason was not seen as a
natural part of the human mind. The desire for good was not seen as
natural. In other words, goodness was not a natural inclination of human
but a gift. Human nature after the “fall of man” was seen by Luther as
corrupt as argued in his “Tower Experience,” published in 1516. After
the problem of application of God's Law to the people has disappeared,
the chance and the problem of erring conscientia disappeared as well.
For Luther, conscientia was always good, infallible and homogeneous
among faithful Christians, and it was mainly an emotional experience
given as a gift by God. Moreover, Luther, in this view of conscientia,
turned against Scholastic rationalism but towards mysticism. He saw this
rare, mystic conscientia as being basically emotional based on love and
as the basis of Christian freedom. Basically, a true Christian does not
need laws, government, nor anything that is of human invention, because
a Christian was directed by God. Failing to follow the dictates of one's
conscientia was seen as a sin. Thus, a Christian should not act against
his conscientia. This is the origin of “negative freedom” in human made
laws.
Conscientia characteristically could not be forced onto the people by
the secular powers. So “force” as well as the “debate” were useless.
This radical, Lutheran interpretation of conscientia was against not only
institutional religiousity, but even against rational argumentation and
reasoning. Luther's notion of conscientia had nothing to do with reason,
4) This is evident in Luther's “Lectures on Letter to Romans,” and in the
“Lectures on Letter to Galatians.”
종교학 연구 138
nor inter-subjectivity. Conscientia's direct relation with God was the
origin of the sense of individual dignity and the confidence in other
people. Luther says, “I cannot so otherwise, here I stand, may God help
me. Amen.” Luther's faith was a faith of conscientia and through his
reformation the meaning of conscientia was individualized losing its
inter-subjective character.
*
In the period between 16th-17th century the word “religion” took
partly the previous role of conscientia in social-political thought and it
was only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that theologians adopted the
word “religion” for their use. The change of fides and conscientia into
the pagan idea of religion originated before the conflicts of Reformation,
but the spread and formation of this idea can be seem as an intellectual
effect of the Reformation.
The Renaissance of Cicero and stoic took the word of “religion” into
the premodern political thinking. In the “De Natura Deorum,” Cicero
refers to salvation; he writes “with piety, reverence and religion must
likewise disappear. And when these are gone, life soon becomes a welter
of disorder and confusion, and in all probability the disappearance of
piety towards the gods will entail the disappearance of loyalty and social
union among men as well, and of justice itself, the question of all
virtues.”5) It seems to be significant that the word “religion” was used
initially in the republican political thinking, and emerged alongside the
idea of “politics.” It is also interesting to note that this adaptation
started with a highly sceptical author, Cicero, whose arguments against
dogmas and certainty spread widely in the 16th century. Thus the idea
of religion was linked from its early period on to the sceptic's view on
the possibility of certainty about truth. In the Ciceronian context divinity
and piety was not import!ant because of salvation, but because of its
peaceful consequences to the Roman respublica. In a fragments of “De
5) Cicero. De Natura Deorum, tans. H. Rackham,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p.7.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39
natura Deorum” we can find a decisive meaning of religion. Cicero was
aware that the objects of perople's worship were false. For after saying a
number of things tending to subvert religion, he adds nevertheless that
these matters ought not to be discussed in public, lest such discussion
destroy the established religion of the nation.
I have referred previously to Machiavelli, because he had a role in
the creation of the notion of politics as well as the notion of religion.
As I have mentioned, in his work “The Prince,” religion did not have
any role in any meaning, but his later work, “Discourses on Livy”
introduced the idea of republicanism with the notion of religion into
European thought. Machiavelli wrote here three chapters on Roman
religion, Chapters XI-XIII in Book I. A Ciceronian meaning of religion
was used wholly from the point of view of political society: “religion as
a thing altogether necessary if he wished to maintain a civilitá or
civilization.”6) He further says, “religion... was among the first causes of
the happiness of that city, Rome. for it caused good order, and good
order makes good fortune, and from good fortune arises happy success
of enterprises. And the observance of the divine cult is the cause of the
greatness of republics, so the disdain for it is the cause of their ruin.
For where the fear of God fails, it must be either that the kingdom
comes to ruin, of that it is sustained by the fear of a prince, which
supplies the defects of religion.”7) It is worth noting that Machiavelli
connected 'religion' to the civitas and civility, that is a political
community following Ciceronian thinking. Simply said, the elimination of
religious feelings results in anarchy and disorder. Instead of fides,
Machiavelli used the word “religion” that was apart from any relevance
to truth and salvation. This is evident when he named religion as the
people's source of obedience where he writes, “In the province of
Germany this goodness and this religion are still seen to be great in
those people, which makes many republics there free, and they observe
6) Machiavelli, Nicolo. Discourse on Liv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34.
Probably, the ‘civility’ could be a better translation here than ‘civilization’.
7) Ibid., p.35. emphasis added.
종교학 연구 140
their laws.”8)
In the Christian republican thought, two phenomena were connected:
freedom with morality, and despotism with immorality. Augustine spread
the idea in Christian thought that, as a result of original sin, the lack of
true faith and morality are necessarily connected to arbitrary power or
coercion.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resent paper, this image of
civitas terrena or “city of man” is highly import!ant. In civitas terrena,
original sin results in vain, willful, and self-interested people, who are
necessarily in conflict with each other and only absolute force may
implement some relative peace. Since there is no morality among the
people in the civitas terrena, the ruling power is necessarily absolute
and cannot be morally legitimated. It is meaningless to think of morally
conditioned power when the people are an immoral mob. Furthermore, in
this social setting the controlling agency cannot depend on the approval
of individuals. The citizens of civitas terrena can approve only sinful
things, thus a form of rule cannot and should not result from their own
will. In order that corrupted individuals can coexist, only a despotic
power can control and oppress their licentiousness. The solution to this
situation is true faith and the love of God, which can create real peace
among the people. In such case, if people are obedient to God there
would not be any need for a human ruler. The more people that can
live peacefully without an outer controlling agency, the less they need a
despotic ruler. What Augustinus connected to true faith and the love of
God, civitas Dei, was freedom from libido dominandi of a ruler and
hence he connected religion with the republican tradition.9)
8) Ibid., p.110.
“Italy... this province has lost all devotions and all religion, which brings
with it infinite inconveniences and infinite disorders, for as where there is
religion one presupposes every good, so where it is missing one presupposes the
contrary.” (Machiavelli, p.38)
“Roman histories shows how much religion served to command armies, to
animate plebs, to deep menschliche good, to bring shame to the wicked.”
(Machiavelli, p.34)
9) The above quoted sentences can be rather familiar for anyone who at least read
Tocqueville's “Democracy in America”, a characteristically republican book.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1
From the early use, the notion of “religion” had a sceptical meaning,
this notion significantly was indifferent to doctrinal differentiations or
arguments about truth. Thus, Machiavelli writes, “a prince of a republic
of a kingdom should maintain the foundation of the religion they hold...
All things that arise in favor of religion they should favor and magnify,
even though they judge them false.”10) This sceptical republican notion
of religion was against church hierarchy and the experts of divinity.
Machiavelli even goes as far as to argue that the church of Rome is
opposed to religion. He says, “those people who are closest to the
Roman church, the head of our religion, have less religion.”11)
The dogmatic conflicts and wars of the 16th-17th century spread
doubt against the church dogmas because of the social-political
consequences of them. The need of peaceful co-existence of people
attached to different faiths emerged. Therefore the image of universitas
Democracy can exist in America, because, other than the self-governing
townships, there is a common religion which limits individuals from within.
Religion supports democracy by means of restraining the mind. “Thus, while the
law permits the Americans to do what they please, religion prevents them from
conceiving, and forbids them to commit, what is rash or unjust.” (Tocqueville,
vol. I. p.305) Liberty especially needs religion, because in despotism there is
political control, but in liberty it is replaced by religious morality. “Religion is
much more necessary in the republic, which they set forth in glowing colors,
than in the monarchy which they attack. It is more needed in democratic
republic than in any others. How is it possible that society should escape
destruction if the moral tie is not strengthened in proportion as the political tie
is relaxed?” (Tocqueville, vol. I. p.307) As in Biblical thought, a person has to
be obedient to God or to another person. Liberty and order can exist side by
side, if religious morality governs individuals. “But what now remains of those
barriers which formerly arrested tyranny? Since religion has lost its empire over
the souls of men, the most prominent boundary that divided good from evil is
overthrown and everything seems doubtful and indeterminate in the moral
worlds; kings and nations are guided by chance, and none can say where are
the natural limits of despotism and bonds of licence (lie).” (Tocqueville, vol. I.
p.327); “I doubt whether man can ever support at the same time complete
religious independence and entire political freedom. And I am inclined to think
that if faith be wanting in him, he must be subject; and if he be free, he must
believe.” (Tocqueville, vol. II. p.22. emphasis added).
10) Machiavelli, p.37.
11) Machiavelli, p.37.
종교학 연구 142
fidelium based on conscientia and dogmatic tenets was slowly worn out,
and religion took the role of conscientia. Religion was seen as a
necessary control from within. As conscientia was being individualized
during the Reformation, religion took its original meaning―a shared,
inter-subjective knowledge of benevolent action in everyday life. The
meaning of religion from its early days in the 16th century meant
control, and it referred first of all not to dogmas, but to shared common
moral rules. Of course, this change caused a new problem later in the
18th-19th century; if dogmatic faith was not the origin of good moral
action, what on earth can be the origin of these shared common rules
controlling human actions from within?
The meaning of religion was indifferent to truth, because it did not
refer to salvation. It was without a defined content; it was simply a
form of opinion, of thinking. Religion meant immanent moral rules with
this worldly consequences, and it bracketed the future afterlife. Religion
was seen as useful from the point of view of peace in a political
society. This republican and highly sceptic meaning can be found, beside
Montaigne's essays, in Bodin's writings who was the godfather of the
modern notion of the state. Indeed, Bodin's “Colloquium” was not
published until the 19th century, but his other work, the “Six Books of
the Commonwealth” was widely read. This book not only spread the
idea of republicanism, but it had a decisive role in the creation of our
ideas about sovereignty, state, and politics. In Bodin's books, we can
find the same republican and highly sceptic use of religion more in the
“Six Books” than in “Colloquium.” “Even atheists agree that nothing so
tends to the preservation of commonwealth as religion, since it is the
force that at once secures the authority of kings and governors, the
execution of the laws, the obedience of subjects, reverence for the
magistrates, fear of ill-doing, and knits each and all in the bonds of
friendship. Great care must be taken that so sacred a thing should not
be brought into doubt or contempt by dispute, for such entails the ruin
of common wealth.”12)
In the “Colloquium heptaploromes,” that is, “Discourse on the Seven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3
Secrets of the Sublime,” Bodin's main interest was how the harmony of
state could be preserved in spite of the variety of different opinions
about humanity and the divided affairs. “Nothing is more destructive in
a state than for citizens to be split into two factions, whether the
conflict is about law, honor, or religion.”13) In the France that he had
lived, almost everyone was at odds with everyone else, all were angry
at all others. one of this basic axiom was that not a more dangerous
pest could arise than civil discord. “A change in religion has more
dangerous consequences, namely upheaval in public affairs, destructive
wars, even more calamitous than plagues and torments of demons.”14)
Toleration, a sceptic's attitude towards religions keeps religion in people's
mind, but the peace in a political community does not need doctrinal
unity, that is, it does not need a substantive universitas fidelium.15)
Bodin's conclusion was that ambiguity in matters of faith cannot be
removed, and because such matters cannot be decided by reasoning or
arguing, it is laudable to abstain from discussions of divine matters.
From these two premises he concluded the outcome of tolerance, the
indifference of the state in the affairs of divinity. He writes, “Since the
leaders of religions and the priests... have had so many conflicts among
themselves that one could decide which is true among all the religion, is
it not better to admit publicly all religions of all peoples in the state, as
in the kingdom of the Turks and Persians, rather than to exclude one,
for if we seek the reason why the Greeks, Latins, and barbarians
12) Bodin, Jean. Six Books of the Commonwealth, Basil Blackwell, p.141.
13) Bodin, Jean. Colloquium on the Seven Secrets of the Sublime, Princeton University
Pres, p.151.
14) Ibid., p.165.
15) “But if the prince who is assurance of the true religion wishes to convert his
subject, split by sects and factions, he should not, in may opinion, attempt to
coerce them. The more one tries to constrain men's wills, the more obstinate
they become... those who are prevented from the exercise of their own religion,
and not in sympathy with any other end by becoming atheists, as we know.
Once they have lost the fear of God, they trample under foot the law and the
magistrate, and give themselves over to every sort of impiety and wickedness,
beyond the power of any human law to remedy.” (Bodin, Six Books, p.142).
종교학 연구 144
formerly had no controversy about religion, we will find no other cause.
I think, then a concord and harmony of all in all religions (will come
about).”16) We read practically the same sentences in the “Six Books”
where it refers to the political wisdom of pagan antique states as well
as the practice of the Turks.17) Because we cannot decide which religion
is true, “it is safer to admit all religions than to choose one from
many.”18) It is clear that, as the sceptics have thought, religion meant a
form without any reference to rank or grade. As Bodin remarks, “I am
not concerned here with what form of religion is the best.”19)
The point of view from worldly political peace and the view of it's
experts, the politiques, have come out as the winners above the
questions of truth and otherworldly salvation and their experts, the
clerics.20) “I believe all are convinced that it is much better to have a
false religion than no religion. Thus there is not superstition so great
that it (religion) cannot keep wicked men in their duty through the fear
of divine power and somehow preserve the law of nature.... Epicurus
committed an unpardonable sin because in trying to uproot the fear of
divinity he seems to have opened freely all the approaches to sin. Of all
the categories of public consideration nothing is more destructive than
anarchy in which no one rules, no one obeys, no rewards are granted to
good men, no punishment is given for wicked life.”21) “However great
superstition may be, it is more tolerable than atheism for the one who
is bound by some superstition if (he is) kept by his awe of the divine
16) Bodin, Coliquium, p.152.
17) “The Kings of Turks... safeguard the rites of religion as well as any prince in
this world. Yet, they constrain no one, but on the contrary permit everyone to
live accordingly as his conscience dictates.” (Bodin, Six Books, p.142).
18) Ibid., p.154.
19) Bodin, Six Books, p.141.
20) “When, therefore, he realized that Jews, pagans, and Christians were divided on
religious principles, he choose to embrace all the religions of all groups rather
than, by repudiating one, to arouse any one to contempt of divinity. With this
reasoning he joined not only individual men but all men in the state to the
great harmony of piety and love.” (Bodin, Colloquium p.159.)
21) Bodin, Colloquium, p.162. emphasis added.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5
in a certain way within the bounds of duty and of the law of nature.”22)
Beside its effect on people's disposition to obedience, religion took
another meaning of faith and conscientia. Namely, religion was thought,
just like conscientia in Luther's case, as something out of the scope of
political human will. Bodin writes, “we are unable to command religion
because no one can be forced to believe against his will.”23)
While Bodin focused on harmony, peace and integrity in the society,
Machiavelli's concerns were freedom and success. Machiavelli faced in
the renaissance masterless people, so he argued for internal controls, that
of virtue and religion where religion was as import!ant as virtue. Bodin,
on the other hand, lived in a time of religious civil war, and having
seen masterless enthusiasts, he, like Montaigne, claimed religion as a
common shared moral rule that was indifferent to dogmatic tenets.
The notion of religion was blind to differences, but it strictly refused
any atheism because of potentially harmful consequences. Religion meant
something common among the differing sects and faiths, and it excluded
any dogmatic debates among them due to its disruptive effects. That is
why “religion was indifferent with respect to truth and salvation. It is
import!ant for us to know that religion was created by worldly rulers,
politicians whose main interests were a peaceful society, control from
within and without, obedience, but not eternal truth nor salvation.
Religion referred to the inner-worldly consequences of fides, whatever its
content might be. So, these authors did not think import!ant to
understand fides or to demonstrate dogmas.
*
It was an import!ant part in the emergence of the notions of religion
when theologians, the experts of churches started to speak about religion
instead of “Christian faith” or “true faith.” With this change they
emphasized worldly political function instead of salvation and truth. Of
course, it seems to be impossible to give the exact time of this change,
22) Ibid., p.139. Emphasized sentence can also be read in “Six Books.” p.142.
23) Ibid., p.471. Also in “Six Books.” p.142.
종교학 연구 146
but a significant change occurred in the discourse about divinity when
Edward Stillingfleet, the Bishop of Worcester, retitled his book.
Originally published in 1662 as “A Rational Account of the Grounds of
the Christian Faith,” he later revised it with a new title, “A Rational
Account of the Grounds of Natural and Revel'd Religion.”
The central meaning of religion was common inter-subjective moral
rules defining duties indifferent to personal feelings. Not the reformers,
but their opponents, the defenders of establishment, like Cicero, used the
notion of “religion.” During the reformation conscientia received a rather
individualized meaning, and many people referred to his conscientia in
order to find an unquestionable ground on which to judge for
themselves. The experience of the high ages was schism which “arise
from errors of conscience as well as carnal and corrupt reasons.”24) As
Machiavelli argued for religion and virtue for the masterless disobedient
people of Italy, Latitudinarians invoked religion for the civil disorder and
upheaval originating from theological debates in England. Similar to the
Latitudinarian use of religion, “the Apostles did not leave all persons to
act as they judged fit, but did make rules determining their practice, and
obliging them to uniformity therein.”25)
It was because they, namely the Anglican Latitudinarians, started to
use the notion of religion with indifference to doctrinal, dogmatic
questions that they were criticized. Latitudinarians argued for
social-political peace and harmony and against the disorder of civil
society resulting from doctrinal fights about truth. This group of clerics
import!ed the word of “religion” from the political discourse into the
theological. It could be said that they were the first group of
theologians, that is, the experts of divinity who reflected on the subject
of “religion.” one of the leading figure of theological thought was John
Tillotson, and his work, “The Advantage of Religion to Societies” may
be a typical and a decisive one.26)
24) Stillingfleet, Edward. The Mischief of Separation, London, 1680, p.40.
25) Ibid., p.11.
26) At this time, the Calvinist sceptic, John Locke also used the word “religion”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7
Tillotson insisted on religion using intrinsic and political arguments.
He writes, “religion is the great friend to our temporal interest... it doth
not only tent to make every man happy considered singly and in a
private capacity, but is excellently fitted for the benefit of human
society.” “Religion and virtue are the great cause of public happiness
and prosperity” because “God recompenseth religious and virtuous
nations with temporal blessings and prosperity.” Without religion “human
society would in a short space disband, and run into confusion, the earth
would grow wild”27) This positive effect of religion in this world was
interpreted as the consequence of political peace, obedience to the law
of the state, and self-control by the religious people. Tillotson goes on
to say “religion and virtue do naturally tend to the good order and more
easy government of human society... Religion hath a good influence
upon the people, to make them obedient to government, and peaceable
one towards another” because religion “requires the extirpation of all
those passions and vices which render man unsociable and troublesome
to one another; as pride, covetousness and unjustice, hatred and revenge
and cruelty... (Religion) heals the natures of men, and (helps) to sweeten
their spirits, to correct their passions and to mortify all those lusts
which are the cause of enmity and division.”28)
*
Transferring the notion of religion from political discourse into a
theological one is paradoxical but import!ant because firstly, religion
refers to fides without involving the question of truth and salvation, the
main issues of theological debates. Secondly, religion meant a shared
common moral rules of which, the content is out of the control of
clerical experts or any institution. Religion meant control from within
with a doctrinally indifferent meaning in the “Epistola de Tolerantia” when he
argued for toleration. Yet, he was not a cleric!
27) Tillotson, John. The Words of the Most Reverend Dr. John Tillotson, vol, I.
Edinburgh, 1768, pp.70-72, 76.
28) Ibid., pp.74-75.
종교학 연구 148
which was thought necessary for a peaceful political life, obedience to
worldly judges, and loyalty to oath. Moreover, religion was independent
from doctrinal differences of clerics and from any direct control by these
experts. Understanding of religion was supposed to be possible in
this-worldly terms, apart from any special knowledge gained by training
or obtained though inspiration. The early modern idea of religion
continued the Medieval! conception of universitas fidelium, but the word
of fides lost its definite doctrinal content and its institutional and
hierarchical reference. The word “religion” stole the matters of divinity
from clerical experts and gave to the lay people whose common problem
was living a peaceful conventional life. It seems that the religion did
indeed solve this problem. “Let us walk by the same rule, let us mind
the same things.” 829)
Not only the pre-modern notion of religion evolved from the medieval!
conceptions of universitas fidelium and conscientia, but the rationalist
utopia of enlightenment in the 18th century, of which Rousseau and
Kant were the main figures, also came from this heritage, but that is
another story.
29) I. Timothy 2, 8.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49
References
Augustinus. The City of God, London, Penguine Books, 1984.
Cicero. De Natura Deorum, trans. H. Rackham,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William Heinemen, 1967.
Bodin, Jean. Colloquium on the Seven Secrets of the Sublim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Bodin, Jean. Six Books of the Commonwealth, Oxford, Basil Blackwell.
Machiavelli. Nicolo: Discourse on Livy, Chicago -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Montaigne, de Michael. The Complete Essays, London, Penguin Books,
1991.
Stillingfleet, Edward. The Mischief of Separation, London, 1680.
Tocqueville. De Alexis: Democracy in America, London, Everyman's
Library, 1994.
Tillotson, John. The Words of the Most Reverend Dr. John Tillotson,
vol, I. Edinburgh, 1768.
종교학 연구 150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Attila K. Moln ?ar
Conscientia originated from the Hellenistic idea of syneidesis, or
shared feelings of shame and fear of having done wrong. Through the
Roman stoics and Aquinas conscientia took a more legalistic and rational
nature. However, Luther interprets Conscientia to be no different from
faith and as resulting from God's grace rejecting previous notions. It
follows that even goodness was not a natural human inclination but a
gift from God. one had to follow the dictates of one's conscientia and
failing to follow it was sin. It was a radical interpretation that rejected
rationality and polemics and it became personal rather than shared.
Other than this, the Reformation spread the idea of conscientia as a
profane idea of religion and it was during the 17th century that the
word religion begins to be used by theologians. Initially, as instigated by
Cicero, religion was used as a source of social order and harmony rather
than for the attainment of salvation. The profane nature of religion was
made more poignant by Machiavelli when he joined the notion of
religion with the idea of a republican ideal. Thus, a Ciceronian notion
of religion that is stripped of its relevance to truth and salvation is
connected to civility and social order. However the envisioned society
was not based on conscientia as a dogmatic rule but based on religion
as a controlling tool from within.
This republican and highly sceptic meaning of religion can be found
in Bodin's works also. He assert the import!ance of religion to social
order when he insists that changes in religion can be more calamitous
than natural disasters. Like Luther, Bodin too saw that religion was out
of the command of the rulers and namely a form of internal control.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51
Yet, as a source of social stability, religion was seen as a social tool
without any connection to the other-worldly by secular rulers whose
main concern was political.
In following this tradition, the Latitudinarians invoked religion to
counter the social disorder caused by dogmatic conflicts. Their goal,
however, was a theological one not political. This seems ironic but the
Latitudinarian conception of religion did not involve the question of
truth and salvation but included the idea of being a shared but
internalized moral rule. It also was seen as being out of the control of
the clerics or any institution. Religion meant control from within which
was thought necessary for obedience to moral leaders, loyalty to oaths,
and a peaceful society.
Tracing its history from the Greek era to after the Reformation, it
seems the notion of religion stole the matter of divinity from the clerics
and gave it to the populace. There, religion has come to resolve the
problem of peaceful living for the ordinary person and not for the
secular rulers nor clerics. Through religion, other-worldly force came to
be mediated not through external social agents, such as the church, but
through internal personal channels.
종교학 연구 152
종교개념의 형성
Attila K. Moln ?ar
‘Conscientia’는 잘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의미
하는 희랍의 개념 ‘syneidesis’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
과 아퀴나스를 거치면서 conscientia는 좀더 법적인, 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 같은 이전의 관념을 거부하면서, conscientia를 믿
음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고 신의 은총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르자면 선(善)까지도 인간의 본래적인 성향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다. 사람
은 자신의 conscientia의 명령에 따라야하며 이를 따르지 못하면 죄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이성과 논증을 거부하는 급진적인 해석으로 이를 통해 종교는
여러 사람에게 공유되는 것이기보다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은 종교의 세속적인 개념으로서의 conscientia의 개
념을 퍼뜨렸으며, 신학자들은 17세기 무렵부터 ‘종교’라는 말을 쓰기 시작
했다. 처음에는 과거 키케로가 사용한 것과 같이 구원의 성취보다 사회적인
질서와 조화의 원천이라는 의미로 종교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종교
의 세속적인 성격은 마키아벨리가 종교의 개념을 공화정의 이상과 결합시
키면서 보다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진리, 구원과의 연관성이 제거된 키케로
식의 종교 개념은 사회적인 규범과 질서와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
고 있는 사회는 교리적 질서로서의 conscientia에 기반한 사회가 아니라 내
면적 통제 수단으로서의 종교에 기반한 사회였다.
이처럼 공화주의적이고 매우 회의적인 의미의 종교개념은 보딘의 저작에
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종교의 변화가 자연재해보다 더 불행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질서에서 종교가 갖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루
터와 같이 보딘 역시 종교는 지배자들의 명령권 밖에 있는 것으로서 내적
통제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에 주된 관심을 둔 세속
지도자들은 종교가 사회안정의 근원으로서 내세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라
보았다.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153
이러한 전통을 따라 광교파주의자(廣敎派主義者)들은 교리적 충돌로 의한
사회적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종교라는 개념에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
표는 신학적인 것이었지 정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광교파
주의자의 종교 개념은 진리, 구원에 대한 물음을 수반하지 않으며, 여러 사
람에게 공유된, 내재화된 도덕 규범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성직자들이나
어떤 단체의 통제 밖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종교는 도덕적 지도자들에
대한 복종, 서약에 대한 충성, 그리고 평화로운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
는 통제를 의미했다.
희랍시대에서부터 종교개혁 이후까지의 역사를 훑어보면, 종교의 개념이
성직자들에게서 신성의 문제를 빼앗아 이를 민중들에게 넘긴 것처럼 보인
다. 그 과정에서 종교는 세속적인 지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을 위해서가 아니
라 범인들을 위해 평화로운 삶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종교를 통해 신
적인 힘은 교회와 같은 외부의 사회적 대리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개인적 통로를 통해 전달되게끔 되었다.
종교학 연구 154
◆ 논문 심사 및 게재원칙
1. 투고 논문의 창의성과 완성도를 논문 1편당 2명의 심사위원이 종합적으
로 심사하여 게재여부를 결정한다.
2. 심사원칙은 ① 종교학적 주제와 방법의 적절성 ② 논지의 일관성 및 논
거의 타당성 ③ 논문의 참신성 ④ 국내외 연구 참조 정도 등이다.
◆ 원고작성시 준수사항
1. 논문의 투고 및 접수는 매년 1회 실시하며, 99년도부터는 매년 8월 30 일까지 논문 접수를 받는다.
2. 원고분량: (1) 논문: 200자 원고지 100매 내외
(2) 서평: 200자 원고지 30매 내외
(3) 논문평: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3. 투고요령: (1) 워드프로세서(한글97이상)로 작성
(2) 디스켓과 함께 출력 원고 1부 제출
(3) 제목 및 필자 성명의 영문 표기 명기
(4) 투고자의 소속, 주소, 전화번호 명기
(5) 반드시 영문초록을 작성하여 제출
4. 원고모양: (1) 한글 전용. 부득이한 경우 괄호 안에 한문 혹은 외국어를
표기한다.
(2) 문단 모양은 A4 용지를 기준으로 한다.
5. 참고문헌: (1)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참고문헌을 작성하여 첨가하여야 한다.
(2) 참고문헌에는 본문에서 인용, 참조된 문헌의 수록을 원칙
으로 한다.
(3) 참고문헌의 수록 순서는 국한문 문헌 다음에 외국 문헌을
싣되, 각각 저자 이름의 가나다와 알파벳 순서로 기재한다.
6. 문헌부호: 문헌관계의 표기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 약정을 따른다.
(1) 국내 및 중국, 일본 문헌 관계 부호
전집, 단행본:
신문, 잡지:《》
개별 작품, 논문, 기사: ??
(2) 서구 문헌 관계 부호
전집, 단행본, 논문 잡지: 이탤릭체
개별작품, 논문, 기사: “ ”
(3) 기타 부호
강조 부호: ‘ ’
인용 부호: “ ”
7. 투고된 논문과 디스켓 일체를 반환하지 아니한다.
編輯委員
鄭鎭弘尹以欽
琴章泰金鍾瑞
尹元澈종 교 과
宗敎學硏究第20 輯
2001년 12월 5일 인쇄
2001년 12월 10일 발행
발행처 한국종교학연구회
연락처 151-742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산 56-1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
TEL. 880-6237, FAX. 880-6025 인쇄처 관악사(877-1448)
20 2001
▣ 논 문
금 장 태 1 遯窩愼後聃의 서학비판이론과 쟁점
김 종 서 27 한국 종교교육의 과제와 전망
김 현 자 41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 ―
박 규 태 69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일고찰
― 불교혁신운동의 측면을 중심으로 ―
임 부 연 87 정약용 마음론의 구조와 쟁점
― 주희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방 원 일 107 혼합현상을 이론화하기
―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과정을 중심으로 ―
Attila K. Molna?r 133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韓國宗敎學硏究會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Vol. XX, 2001
▣ Articles
Shin Hu-tam's(愼後聃) Theoretical Criticism of Western Learning
and its Issues ···························································· Keum, Jang-tae
Issues and Vistas in Korean Religious Education
··········································································· Kim, Chong-suh
In Search of Lost Paradise: The Myth of Eliade and Le?vi-strauss
················································································ Kim, Hyun-ja
A Study on Soka Gakkai: Renovation of the Japanese Buddhism
··············································································· Park, Kyu-tae
Cho˘ng Yag-yong’s(丁若鏞, 1762-1863) Discourse on Mind
············································································· Lim, Boo-yeon
Theorizing Syncretism: Focusing on the Formation of Korean
Protestant Praxis System ··············································· Bang, Won-il
The Construction of the Notion of Religion
··········································································· Attila K. Moln ?ar
Korean Association of Religious Studies
宗敎學硏究 第 二 十 輯 韓國宗敎學硏究會
第二十輯
韓國宗敎學硏究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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