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성인의 생애

2007. 10. 19. 11:13佛法 .SGI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

 

1222 2 16, 태평양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아와지방 고미나토라는 어촌에서 니치렌 대성인은 탄생하셨습니다.

 

대성인께서는 12 세이초 사에 들어가 수학하셨는데 16년간 각지의 큰절을 방문하시어 일체의 경론을 독파한 , 세이초 사에 돌아오신 대성인께서는 1253 4 28, 성수 32세때 세이초 사에서 南無妙法蓮華經야말로 말법 유일의 정법이라고 입종선언을 하시고 그 때에 스스로 "日蓮"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언망국, 염불은 무간지옥, 선은 천마의 소위, 율승은 국적(어서 585)”이라고 제종의 사의를 파절하시고 특히 염불은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원흉이라고 강하게 파절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회는 천재지변이 끊임없는 시대였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유행하고, 대화재, 대기근, 대홍수 등이 일어나 민중은 도탄의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1257 8월에 가마쿠라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은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국토의 양상을 예리하게 응시하신 대성인은 계속되는 재난의 근본원인과 민중을 구제할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이와모토 짓소사에 들어가 일체경을 열독하셨고, 때에 대성인의 존용을 접한 13세의 호키공, 후의 닛코상인이 제자가 되셨습니다.

 

대성인은 1260 7 16, 입정안국론을 때의 최고 권력자였던 호죠도키요리에게 제출하셨습니다. 어서에서 대성인은 “"세상은 모두 정을 배반하고 사람은 모두 악에 귀하였도다.”(어서 17)라고 지적하시고 특히 금지해야 사의사법의 일흉으로서 호넨의 염불을 파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의 간효를 채용하지 않으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타국침핍난, 자계반역난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예언, 경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의 지성어린 간언을 도키요리는 받아 드리지 않고 오히려 박해를 해왔습니다. 대성인의 생애는 대난과의 투쟁의 연속이셨는데 먼저 입정안국론을 제출하신 직후인 1260 8 27일의 , 때의 집권자인 호죠나카토키의 아버지인 고쿠라쿠사 시케토키의 후원을 받은 염불자들이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에 계시는 대성인을 습격했습니다. 이것이 마쓰바가야쓰 법난입니다.

 

 "이 법문을 말하니 일일 월월 년년 난이 거듭하니라. 사소한 난은 부지기수이고 대난이 네 번인데"(어서 200)라는 말씀과 같이 대성인의 몸에 대소(大小) 난이 덮쳤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난이 네 번인데"라는 말씀의 최초가 이 마쓰바가야쓰의 법난이였습니다. 이 때는 무사히 난을 모면하였으나 다음 1261512, 이즈(伊豆) 이토(伊東)의 지방으로 유죄(流罪)되는 두번째의 난을 당하셨습니다.

 

세 번째의 대난은 12632월에 사면되시어 이토에서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다음 해에, 아와방면으로 홍교를 가셨을 때 아마쓰의 쿠도 요시다카의 저택으로 향하시는 도중, 고마쓰바라에서 지두인 도죠 카게노부의 군세에게 습격당하시어 쿠도 요시다카와 교닌보가 대성인을 외호하다 전사하고 대성인도 이마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난이 1264 11 11일에 일어난 고마쓰바라 법난입니다.

 

 

1271년 무렵부터 전국적인 한발이 계속되었기 떄문에 고쿠라쿠사 료칸은 막부의 명령에 의해 기우의 법요를 행하였습니다.  대성인은 이 때, 료칸에 대하여 승부를 도전했습니다. 사법을 가지고 아무리 기원한다해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 승()이 지계(持戒)인듯 하면서 대광혹(大惑)인 것이 현연(顯然)하니라"(어서 1157)라고 파절하셨습니다. 그 결과 일주일이 지나도 이주일이 지나도 비를 내리게 할 수 가 없었으며 반대로 대폭풍(大暴風)이 불어, 료칸의 대패배(大敗北)로 끝났습니다.

 

 이 때문에 대성인을 원망한 료칸은 비열하게도 막부의 유력자를 움직여 대성인을 처형하도록 공작하였습니다. 법난이 다쓰노구치의 법난(法難)입니다. 1271년 9월 10일에 당시의 군사 결정권을 가졌던 헤이노사에몬노조(平左衛門尉) 대성인을 불러, 심문을 하였는데, 대성인은 반대로 막부의 자세를 엄하게 간언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헤이노사에몬노죠는 1271년 9월 12일 대성인을 체포하여 심야에 가마쿠라 교외(郊外)의 다쓰노구치에서 몰래 처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 처형하려는 순간에 "달처럼 비치는 공같은 물체(物體)"(同九一四쪽)가 나타나서,망나니는 눈이 아찔하여 쓰러졌고, 병사들은 겁에 질려 도망갔습니다. 강대(强大)한 권력을 가지고도, 대성인을 처형할 수 없었습니다. 대성인은 "日蓮이라고 하는 ()는 去년年九월十二일 자축(子丑)의 시()에 목이 잘렸느니라-"(어서 223)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법화경에 설해진 말법(末法)에 법화경(法華經)을 홍통하는 상행보살(上行菩薩)의 재탄이라는 적()의 모습을 버리시고 구원원초(久遠元初)의 자수용보신여래(自受用報身如來) 말법(末法)의 본불님으로서의 본지(本地)를 나타내신 순간이십니다. 이것을 발적현본(發迹顯本)이라고 합니다.

 

1271 10 10, 처형할 수 없었던 막부는 이번에는 대성인을 사도로 유죄(流罪)에 처합니다. 이 다쓰노구찌에서 사도에 이르는 법난(法難)이 네번째의 대난(大難)에 해당합니다. 사도는 유배지(流配地)입니다만 대성인의 생애에서도 중요한 많은 어서(御書)를 저술하신 시기(時期)입니다.

 

1272 1 16일에는 밀어닥친 수백명의 제종의 승과 대결하시어 모두 파절하는 쓰카하라문답을 하였습니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1272 2월에  개목초(開目抄)에서는 대성인이야말로 말법(末法)의 인본존(人本尊)이시라는 것을 개현(開顯)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1273 4월에는  말법(末法)의 법본존(法本尊)을 개현(開顯)하신 관심의본존초(觀心本尊抄)를 저술하셨습니다.

 

마침내, 1274년 2월, 대성인은 사면되시어 3월에 가마쿠라로 돌아오셨습니다.

때마침 몽고 내습의 위기가 날로 급해짐을 느끼고 간언하셨지만 막부는 이를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언사에게 적국조장의 기도 등을 명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세 번 나라를 간효(諫曉)해도 받아 들이지 아니하면 산림(山林)을 벗삼는다고"(어서 323)하는 고사에 따라 미노부산에 들어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성인이 미노부에 입산하신 것은 마음속 깊이 기()하는 바가 계셨다고 배견됩니다.

  

 첫째 말법만년의 광선유포를 위하여 삼대비법을 교시하시고, 출세의 본회를 완수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영법구주(令法久住)의 준비를 하시고 제자의 육성을 도모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성인은 선시초, 보은초등의 많은 중요한 어서를 미노부에서 저술하십니다

 

 

 그 당시 쓰루가아쓰하라지방에서는 닛코상인에 의한 절복홍교에 의해서 많은 농민신도가 탄생되었습니다. 놀란 류센사의 원주대 교치일당들은 간계를 꾸며서 탄압하고 퇴전 개종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관철한 농민들은 마침내 헤이노사에몬노죠의 사택에서 고문당하고 진시로, 야고로, 야로쿠로의 세사람이 처형당했습니다. 이것이 아쓰하라 법난입니다. 이 입신한지 얼마 안 되는 농민들의 불석신명의 신심의 모습에 대성인은 때를 느끼시고, 1279년 10월 12일, 본문계단의 대어본존(大御本尊)을 건립하여 출세의 본회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1282년 10월 13일, 육노승 가운데에서도 신행제일인 닛코상인에게 일체의 법을 부촉하신 日蓮대성인은 무사시지방의 이케가미 무네나가의 저택에서 성수 61세로, 멸불멸의 존귀한 생애를 마치신 것입니다.

 

 

해설 : V 1952년의 창가학회

 

해설 : 니치렌 대성인이 입종을 선언하고 홍교의 길을 딛은 1253년으로부터 정확히 700년 후 도다는 회장취임시 약속한 75만세대 절복달성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점진적인 증가가 없는 절복행진에 도화선같은 계기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V

 

도다 : V 창가학회는 절복의 단체입니다. 부처의 금언대로 절복행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창가학회밖에 없습니다. 절복이야말로 각자의 행복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고 세계평화로의 최단거리이며 한 나라를 살리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절복이야말로 불법수행 중 최고의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해설 : 도다는 전혼을 기울여 절복에의 매진을 외쳤다. 1951년 8월 지부장회의에서 발표된 입신 세대수는 증가일로에 있었으나 광선유포라는 그 목적지에 닿기에는 너무나 저조한 것이었다.

 

해설 : V 1951년 8월 입신세대수 V

 

해설 : 이어 9월, 10월에도 절복전은 계속 되었으나 모두의 목표였던 천세대는 어림도 없는 숫자였다. 그리고 입종 700년째인 1952년의 3월

 

해설 : V 1952년 3월 입신세대수 V

모두의 관념속에 존재했을 법한 1073세대의 절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모두의 머릿속으로부터 천 세대의 절복을 과감하게 현실로 끌어올린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도다 :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저는 마키구치 선생님께 낙제생에 불과합니다. 이번엔 죽을 때 까지 이 몸을 바치려고 합니다. 만약 제가 살아있는 동안 V 75만세대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장례식없이 저의 유해를 시나가와 앞바다에 던져 버리세요. 좋습니까? V

 

신이치 :도다 선생님! 세계 사람들의 근본적인 행복과 평화를 확립하는 길은 니치렌대성인의 불법밖에 없으며 하루, 한 시라도 빨리 알리지 않으면 안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학회입니다. 저희 청년은 선생님의 말씀을 절대로 허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대성인의 제난, 법난, 갖가지 유난의 몇만분의 일일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모든 강적에 맞서 선생님의 기대에 보답할 것을 맹세합니다. V

 

해설 : 일념만큼 강한 것은 없다. 한 사람의 강철같은 부동의 일념이 드디어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것이다. 니치렌 대성인의 정신의 맥은 엄연히 학회로 이어졌고 마키구치에서 도다로 그리고 야마모토 신이치의 가슴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사제의 맥은 지금 우리들에게 선생님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 강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V

 

 

 

 

 

 

 

출처 : 목우산책
글쓴이 : 혜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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