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제목 ·창제에 대한 스피치 모음
2007. 10. 19. 11:16ㆍ佛法 .SGI
제목 ·창제에 대한 스피치 모음
♧「서원의 기원」이 중요
그의 질문은 새롭게 시작한 야채재배에 실패하여 빛이 늘어났는데 어떻게 하면 타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흉작이 되고만 원인은 무엇입니까?
기후 탓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
같은 야채를 재배해서 성공한 분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흉작입니다.
비료에 문제는 없습니까?
·.. 상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재배방법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
토양과 품종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글쎄요 ·
그는 신이치의 질문에 거의 만족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누구 나가 열심히 이다.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는 점에 방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신이치는 예리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왜 흉작으로 끝나 버렸는지,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 가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참고로 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충분한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승부에 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연구와 고민이 뒤따릅니다. 그것을 게을리하면 성공은 없습니다. 신심을 하고 있으니 자기 밭만은 저절로 풍작이 되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최고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신심의 강성함은 남보다 몇 배 연구하고 고민하여 노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도전의 에너지를 용솟음치게 하는 원인이 진지한 창제입니다. 그 또한 서원(誓願)의 창제가 아니면 안됩니다.
서원이 무슨 뜻입니까
기원이라고 해도 스스로 노력을 게을리하며 그저 선반에서 찹쌀떡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듯한 기원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종교라면 인간을 그릇되게 만들어 버리는 종교입니다.
日蓮불법의 기원은 본래 서원의 창제입니다. 그 서원의 근본은 광선유포입니다.
즉 나는 이 브라질의 광선유포를 해 가겠습니다. 그를 위해서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훌륭한 실증을 보여 가겠습니다. 부디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는 결의의 창제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래의 기원입니다.
그 위에 매일 자신이 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명확히 하나하나 성취를 기원하며 도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 진지한 일념에서 지혜가 솟고 창의연구가 생기며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즉 결의 와 기원 그리고 노력 과 연구 가 갖추어져야 비로서 인생의 승리가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한밑천 잡으려고 한다거나 그럴 듯한 손쉬운 돈벌이 이야기에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신심이 아닙니다. 관념입니다.
일은 생활을 지탱하는 기반입니다. 그 일에서 승리의 실증을 보이지 않으면 신심즉생활의 원리를 입증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안이한 자세는 일체 배제하고 다시 한번 새로운 결의로 전혼을 기울여 일에 몰두해 주십시오.
역경이면 역경일수록 인생의 승부의 때라고 정하고 끝까지 도전해 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본존의 공력(功力)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역경은 또 불법을 증명하는 찬스라고 할 수 있다.
신인간혁명 1권 5장 개척자中에서
♧ 「한 번의 창제에 광대한 공덕」
신심은 일생이다. 그리고 삼세이다. 광선유포도 기나긴 여로이다.
그 「행복에의 여행」을, 어떻게 완주하는가. 보배의 일생을 매일 매일 어떻게 가치적으로 상쾌하게 살아가는가. 거기에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누구라도 「피곤이 쌓일」때가 있다. 「컨디션이 나쁠」때도 있다. 살아있는 몸이라면 당연하다. 그러할 때, 근행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창제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오늘은 여러분의 평소의 의문에 답하는 의미에서도 日蓮대성인의 말씀을 배견하면 말해 두고자 한다. 어서근본의 이러한 「구체적인 지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 경우에 따라 총명한 판단을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대성인은 「경우에 따라 창제만이라도 좋고, 어보전(御寶前)이 아니라도 좋은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문하인 다이가쿠 사부로의 부인이 「월수(月水=월경)」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질문한 것에 대한 답서이다. 예로부터 일본에는 「월수」를 부정하다고 하는 관념이 뿌리깊었다. 질문한 부인도 이러한 때에는 경전을 독송해도 좋은지 어떤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에 답하신 대성인은 「월수」는 전혀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며, 중요한 생리적 작용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당시로서는 극히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셨다.
그리고 컨디션이 나쁜 「장병(長病)과 같은 것」(어서 1202쪽) 이라고 하시어, 이러한 경우의 실천방법을 교시하신 것이다.
현대에서는 「부정(不淨)」등은 전혀 문제로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어서에서의 대성인의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몸이 본래의 컨디션이 아닐 때에 근행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는 과제에 명쾌한 해답을 주셨다고 배견 된다.
즉 근행도 여러 조건을 고려해서, 유연하게 실천해 가야 한다 라는 원칙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대성인은 어디까지나 「경전근본」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말법의 경전인 「어서」를 근본으로 해서 나아간다.
♧ 어서에 5좌 3좌의 규정은 없다.
5좌 3좌에 대해서도 어서에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후세에 이루어진 형식이다. 게다가 본래는 승려의 수행이었다. 지금은 승려쪽이 더 못하고 있는 듯하다(폭소). 그것을 다망한 재가(在家)가 하고 있는 것이므로 대단한 일이다.
♧ 가치적으로, 무리하는 것과 강한 신심은 다르다
특히 부인부들은 너무 성실한 나머지 밤늦게 피곤할 때나 몸의 컨디션이 나쁠 때라도 완벽하게 5좌 3좌를 하려고 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 신심은 너무나도 존귀하다. 반드시 어본존께 통해 갈 것이다.
그러나 특히 연로한 부인들은 무리를 하면 크게 건강을 해쳐 버리는 경우가 있다. 컨디션에 따라 짦은 창제만, 혹은 제목만으로 쉬는 편이 가치적인 경우도 많다. 그것을 자기자신이 판단하는 것이다.
평생의 신심이다. 가령 5좌 3좌의 근행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어본존을 믿고, 구도해 가는 「신심」이 있다면 복운은 소멸되지 않는다.
「무리」와「강신(强信)」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발랄하게 희망에 넘쳐 살아가는 생명력이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빨리 쉬어 피곤을 없애고 상쾌한 기분으로 근행을 하는 편이 좋은 경우도 있다.
근행. 창제는 범부의 생활 속에서 가장 장엄한 어본불과의 대면이다. 자기자신의 불계. 흉중의 어본존을 열어가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상쾌하고 기쁨에 넘친 것이기를 바란다. 끝나면 목욕탕에서 나온 듯이 개운하다 라는 근행이기 바란다.
형식적으로 된다거나, 시계만 신경 쓴다거나(폭소), 신경 쓰는 만큼 시간의 흐름도 느리고(폭소), 지쳐서 장해의 어디를 하고 있는지(웃음), 저쪽으로 건너뛴다거나, 이쪽으로 되돌아온다거나(폭소) 그래도 하자 라는 신심은 굉장하지만(웃음), 역시 총명한 신심즉생활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녁근행은 가능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대성인은 이렇게 결론지으셨다.
「경을 읽지 마시고, 암송으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도록 하시라. 예배하는 것도 바로 경을 향하지 마시고 예배를 하시라」(어서 1203쪽)
--- (월수 때의 근행은 원칙은 어디까지나 자유이고) 경(법화경)을 읽지 말고, 다만 남묘호렌게쿄라고 창제만 하시요. 예배할 때도 경을 향하지 말고(어보전에 가지 말고) 예배를 하시오 라고
독경은 하지 않고, 다만 창제만으로 좋다. 게다가 어보전에서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이다.
누운 채로의 경우도 생각하시고 있다고 배견된다.
이와 같이 대성인은 형태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유연하셨다. 어디까지나 「다만 마음만이 중요」(어서 1192쪽)인 것이다.
물론 「좋은 말을 들었다」(폭소), 「그런 것이라면 언제나 실천하고 있다」(큰 웃음) 라는 등으로 이용 해서는 안된다(큰 웃음). 특히 장년부. 남자부에게는 얼렁뚱땅 하는 것이 강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폭소)
어디까지나 근행.창제의 기본에 진지하게 도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도 어서를 나쁘게 이용 해서 불도수행을 게을리하면 자신이 손해일 뿐이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전부 자기자신을 위한 신심이다.
♧ 한 번의 창제의 공덕은 부처의 지혜로도 헤아릴 수 없다.
「단지 창제만으로도 좋은 것입니다」- 대성인이 그렇게 말씀하신 전제에는 「南無妙法蓮華經의 대공덕」이 있으시다. 이 편지의 처음에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법화경은 일일의 소작(所作)으로 1부 8권. 28품. 혹은 1권. 혹은 1품. 1게. 1자. 혹은 제목만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다만 한 번 부르고」(어서 1199쪽)
--- 법화경의 하루의 수행으로서 법화경 1부 8권 28품 전부를 읽는다. 혹은 그 중 1권만을 읽는다. 혹은 그 중 1품이든 1게, 1구이든 1자만을 읽는다. 혹은 (법화경의 제목만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단지 한번만을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법화경의 독송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라고.
「혹은 또 일기(一期) 동안에 다만 한 번 부르고, 혹은 또 일기 동안에 다만 한 번 부르는 것을 듣고 수희하고, 혹은 수희하는 소리를 듣고 수희하고」(어서 1199쪽)
--- 혹은 또 일생동안 단 한 번 (제목을) 부른다. 혹은 또 일생동안에 단 한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수희한다. 혹은 또 그 수희하는 소리를 듣고 수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까지 「수희」한다. 그러한 상쾌한 창제의 소리이기 바란다. 묘법을 봉창하는 소리. 또 확신의 소리에 접하여, 저 사람은 훌륭하구나, 학회의 사람은 굉장하구나, 원기가
넘치는구나 라고 들은 사람도 수희한다.
또 혈색도 좋고, 좋은 얼굴을 하고 있구나,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있구나, 빛나고 있구나 라고 수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모습은 중요하다. 제법실상이다.(제법=현상의 모습은 즉 실상= 생명의 진실한 모습이다>
이러한 수희의 모습은 그야말로 「회우」분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희에서 수희로 - 「회우」운동의 방정식이다.
「이와 같이 오십전전(五十展轉)해서 끝이 되어 가면 신심도 엷어지고 수희하는 마음이 약해짐이, 이삼세의 유치한 자의 어리석음이 우마들이 전후를 가리지 못함과 같아지지만」(어서 1199쪽)
--- 이와 같이 (묘법의 수희를 다른 사람에게 차례로 전하여) 50명에게 전전해서 끝이 되어가면 그 기분도 엷어지고 수희의 마음도 약한 것은 마치 2,3세의 유아가 미덥지 않은 것과 같으며 ,소나 말 등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되지만(분명히 하지 못하지만)
「타경을 배우는 사람이 이근이고 지혜도 어질고 사리불. 목련.문수. 미륵과 같은 사람으로 제경을 마음 속에 다 알고 계시는 사람들의 공덕보다도 뛰어남이 백천만억배 된다는 것이 경문 및 천태. 묘락의 60권 중에 쓰였도다」(어서 1199쪽)
---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50전전 끝의 공덕은) 다른 경을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 기근도 뛰어나고, 지혜가 훌륭하며 사리불이나 목련, 문수보살이나 미륵보살과 같이 많은 경전을 암기하고 계시는 사람들의 공덕보다도 백천만억배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문 및 천태. 묘락이 저술한 60권의 책 속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제목의 공덕은 훌륭한 것이다(대박수).
단 한 번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불러도 광대한 공덕이 있다. 영원한 공덕이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심이다. 이 대확신이 없으면 안 된다.
대성인은 계속해서 부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이라고 전제하시면서, 경문을 인용해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다만 법화경의 일자를 부르는 사람의 공덕만은 알지 못하신다고 쓰였도다. 하물며 우리들 역죄(逆罪)의 범부가 이 공덕을 알 수 있을소냐」(어서1199쪽)
--- 다만 법화경의 1자를 부르는 사람의 공덕만은 (부처의 지혜를 가지고도) 알 수 없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 역죄의 범부가 이 (묘법의) 공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니, 결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목 한번이라도 그 만큼의 공덕이 있다. 활도 명인이 쏘면 하나의 화살로 딱 표적에 맞춘다.
일념이 정해진, 강하고 깊은 기원은 「일념삼천」으로 우주의 일체를 움직여 가는 것이다.
한편 이만큼의 공덕이 있으므로 오늘은 세편이나 올렸다(폭소) 라고 아주 으스대도 좋은 것이다. 그 환희가 소중하다. 어서에는 몇편 올리시오 라든가. 몇시간 올리시오 라든가는 정해져 있지 않다.
♧ 장시간의 창제에서 유의할 점
그런 위에서 물론 제목은 많이 올릴 수 있으면 그 쪽이 좋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자각과 결의에 맡겨 둘 수 밖에 없다. 형식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제목을 「10시간 올렸다」「8시간 불렀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는다. 물론 부인부로 부터이다. 장년부나 남자부로부터는 거의 듣지 못한다(폭소).
부인부 여러분의 신심의 한결같음, 진지함에는 정말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만약 오히려 그 그늘에서 남편이나 자녀가 「밥은 아직 안됐나」(폭소) 「시장에 누가 가는걸까」(큰웃음) 등으로 염려하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가엾다. 그래서는 「신심즉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장시간의 창제로 인하여 생활이 내버려둔 채로 되거나 타인에게 폐를 끼쳐 불쾌한 생각을 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은 하루에 이렇게 장시간 창제했다 라고 시간의 길이를 자랑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모습은 주위에 여러 가지 면에서 오해를 낳기 쉽다. 이웃으로부터 광신(狂信)이라고 생각되기도 쉽다. 그렇게 되면 신뢰를 잃고 법은 낮추고 만다.
조직의 경우도 똑같다. 10시간 제목투쟁 등으로 이름 붙여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두 세 명의 뜻 있는 사람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면 몰라도 많은 사람이 일률적으로 한다고 하면, 각자각자 생활시간대는 다르고 바쁜 것도 다르다. 몸의 상태도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몇 사람에게는 결국 무리를 시키고 말 가능성이 있다.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하물며 강제는 안 된다. 거기에 참가하지 않으면 창가학회 본래의 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극단은 안 된다.
♧ 리더는 명쾌하게, 상식 풍부하게
신심은 「기쁨」과 「안심」「희망」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강요하는 듯한 또 괴롭히는 듯한 지도는 절대로 삼가 해야만 한다.
제목의 위대한 공덕은 당연한 일이라 치고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모두가 즐겁게 「신심즉생활」의 리듬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명쾌한」「상식 풍부한」지도이기를 바란다. 창제의 파동을 일으키자고 생각한다면 리더 자신이 솔선하여 깊고 강하게 기원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간사이의 여러분이 전국에 그 모범을 보여주시리라 믿고 있다.
♧ 공부는 노력으로, 복운은 신심으로
가정에서의 교육에 대해 한마디 해 두고 싶다.
아이가 근행 하면 그것만으로도 「성적이 올라간다」고 믿어버린다 그 신심이 강함(폭소)은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공부는 역시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성적도 오르지 않는다. 당연한 도리이다.
「실력」을 붙이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다. 그 노력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 신안의 힘이며, 또 실력을 모두 완전히 발휘하기 위한 「생명력」과 「복운」이 신심에 의해 갖추어지는 것이다. 노력, 실력 자체가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신심은 일생이다. 미래부 시대는 「면학제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있어서의 「신심즉생활」이다.
「아이들에게는 인생의 힘든 때에는 신심으로 극복해간다 는 것을 단단히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라고 도다 선생님은 지도하셨다.
다른 아이들은 싱글벙글 즐겁게 학교에 가는데 나는 매일아침 입만 열면 「근행, 근행」하고 시달린다(폭소). 이래서는 아이들도 매일 우울하다(폭소). 오히려 신심이 싫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자녀가 제목삼창일지라도, 방편품. 자아게 만일지라도 훌륭한 것이므로 「잘 했다」라고 칭찬해주는 것이다. 「어서 다녀오너라. 나머지는 어머니가 다 해줄 테니까」(큰 웃음) 등 그 정도의 넉넉함, 여유, 대범함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누구보다도 인생을 즐기기 위한 신앙이다. 그 신앙 때문에 쓸데없이 다툼이나 괴로움을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
♧ 수방비니에 대하여
대성인은 이 편지 속에서 「수방비니」(어서 1202쪽)의 戒에 대해 가르치시고, 그 나라, 그 지역에 따라서 불법을 실천해 나가시오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수방비니란 불법의 본의에 따르는 한, 각 지역의 풍속. 습관이나 시대의 관습에 위배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
그리고 현실의 상황이나 생활, 사회를 무시한 「강의(强義)」(강경한 가르침)을 훈계하시고 있다.
예를 들면 정좌의 습관이 없는 외국멤버에게 「의자는 안된다」라든가 그 밖에 실정을 무시하고 일본적인 방식 등 이제까지의 습관 등을 강요한 사람도 있었다.
대성인은 이러한 「강의(强義)」는 「많은 단나를 손상하는 일이 있다」(어서 1203쪽)
--- 많은 신도를 잃는 일이 있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전적으로 그대로 이다. 「무리」나 「강제」로 많은 사람을 리드해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래 지속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광선유포는 커녕 모두 떨어져 나가 버린다.
결론지어 말하면 모든 것에 걸쳐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행복을 위해」「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을 생각해 주는 것이 불법의 마음이다. 그것이 석존의 마음이며 대성인의 마음이시다.
상식 있는 「유연한 지혜」에야말로 불법의 빛은 빛난다. 거기에 참된 「강성한 신심」은 있다.(대박수). 여러분이 오늘도 「멋진 하루」이기를 기원하며 나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간사이 패밀리 총회 (1993. 5. 4)
산다는 것은 최후까지 버티어 가며 힘의 한계를 초월해 절망과 체념을 극복하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생명은 영원하다. 인생에 후회를 남긴다면 무엇을 위한 신앙인가.
괴로움이 없으면 즐거울지는 몰라도 향상은 없다. 10의 곤란이 있으면 20의 힘을 내야하고, 100의 장해가 있으면 200의 힘을 내야 한다.
슬프면 울어라 맘껏 울고 한 번의 눈물로 모두 풀어버리고 눈물의 강을 건너야 한다.
눈물의 강에 잠겨있어서는 안 된다.
잘 만들어진 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어본존님께 아무리 하겠습니다 라고 맹세해도 이루어야만 맹세이다.
평소에 제목을 저축해 두지 않으면 정말 어려울 때 제천의 가호를 받을 수 없다. 안일을 탐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은 편하고 자유롭게 보이지만 최후에는 가장 부자유한 패배자가 된다. 신앙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은 많다. 그렇게 때문에 신앙자인 우리는 그 이상으로 더 많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은 극복해야지 피할 수는 없다.
인간은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모습이 되어 나타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의 인간이 된다. 마음하나로 지옥에도 즐거움이 있다.
죽어가면서 조차도 아! 즐거웠다. 자!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신심의 경애이다.
그러한 사람은 곧바로 태어난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모습 그대로 태어날 수 있다.
매일 매일의 작은 노력이 위대한 힘이 된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기개가 없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관철할 수 없다. 괴로움이 많은 사람은 필사적으로 기원하라. 1000만편의 제목을 해봐야만 신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용기의 두 글자로 살아라.
져서 울지 말고 울면서 승리하자.
이케다 선생님 스피치 중에서
♧ 창제의 사람이 승리의 사람
이 사바세계는 「감인(勘忍)」의 세계라고 한다.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러가지 일이 항상 있다. 그 속에서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괴로워도 어떠한 숙명도 전부 유유히 극복하고 가장 행복한 경애를 열어갈 수 있는 것이 日蓮대성인의 불법이고, 창가학회의 신심이다. 자신이나 가족의 병 또 죽음, 경제고, 인간관계의 괴로움,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괴로움, 그 밖에 살아있는 한 온갖 싸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어찌할 수도 없는 인생의 현실이다.
「신심」이란, 「창제」란 그것들을 전부 변독위약 하는 힘이다. 괴로움의 독이 행복이라는 약으로 변한다. 번뇌즉보리로 번뇌가 깨달음으로 바뀌고, 행복으로 바뀐다. 번뇌, 슬픔이 크면 클수록 보다 커다란 행복으로 바꾸어 갈 수 있다. 이것이 제목의 힘이다. 그러므로 제목을 부르는 사람은 무엇도 두렵지 않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무도 작았을 때는 약한 바람에 조차 흔들린다. 큰 나무로 되면 어떠한 폭풍우에도 흔들림이 없다. 인간도 생명력이 약하면 작은 괴로움의 폭풍우에도 분동 되고 만다. 사바세계인 이상, 바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자신이 강해지는 수 밖에 없다. 자신이 큰 나무로 되면 어떠한 대풍도 태연하다. 오히려 즐겨갈 수 있다. 그러한 인생, 생명으로 인간혁명 해 가기 위한 신앙인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무는 매일 생장하고 있다. 우리들의 창제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매일 자기자신을 복운의 대목(大木)으로 키우고 있다. 10년, 20년, 학회 속에서 신심을 관철해 가면 이윽고 반드시 대수(大樹)로 된 복운이 분명하게 눈에도 보이게 된다.
묘법은 우주 최고의 보배이다. 창제하는 것은 매일, 나의 생명에 보배를 쌓고 있는 것으로 된다. 한편 생명 속의 과거의 죄업은 청정한 물에 더러운 물이 밀려나듯이, 깨끗이 씻겨간다. 그러므로 완전히 청정하게 되기 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는 아주 더러웠던 물, 즉 자신의 숙명과의 싸움이 있다. 그것도 창제의 힘으로 가볍게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속」하는 것이다. 이윽고 완전히 생명이 청청해지면, 점점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 복덕에 가득찬,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의 경애로 반드시 되어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즐겁다. 명성이나 재보가 없어도 만족스럽다. 일순일순이 최고로 충실하게 된다. 기쁨에 넘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무엇을 보아도 정확히 옳고 그름을 알고 본질을 알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줄 수 있다. 그러한 자신으로 되어 간다. 그러므로 행복으로의 길은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다.
광포의 세계 속에서는 어쨌든 제목을 끝까지 부른 사람이 최후에 승리한다. 반드시 「절대의 행복경애」, 즉 「부처」의 경애를 획득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근본은 이것 하나만 기억해 두면 인생은 영원히 반석 같다.
초조해 하지 말고 끝까지 기원해 가면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방향으로 바뀌어 간다. 제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南無妙法蓮華經는 대성인의 이름이고 생명이시다. 제목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대성인의 생명이 솟아오른다. 반드시 부처로 되어 간다.
언제까지나 가난해서 괴로워하는 부처는 없다. 매정한 부처나 심술궂은 부처도 없다. 인생에 지는 약한 부처는 없다. 부처란 「절대로 승리하는 사람」의 이명(異名) 이다.
그 위에서 신앙자라 해도 나머지는 아무것도 특별한 것은 없다. 훌륭한 사회인이고, 양식과 예의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좋은 시민, 좋은 부모, 좋은 남편,좋은 아내, 좋은 자녀로 되어 가기 위한 신앙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자신의 경애를 높이기 위한 불법이다. 그러므로
그 신앙의 일로 가정에서 싸우는 일은 현명하지 않다. 그럴수록 창제하는 편이 가치적이다. 가족 중에서 그다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몫까지 자신이 창제하고 기원해 드리면 된다.
- 1993년 3월 3일 브라질 대표자 근행회 중에서 -
제목을 부르면 3가지 변화가 생긴다.
첫째, 생명력이 강해진다. 둘째, 불지혜가 솟는다. 셋째, 복운이 쌓인다.
그러므로, 제목을 철저히 부르고 실천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복운 넘치는 인생으로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원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기원하는 것이다. 법화경에 이기는 병법은 없다라고 있지 않은가. 얼굴이 변할 정도로 기원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저에서부터 진심으로 제목을 올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마가 타파되지 않으면 아무리 해도 공전이다. 어쨌든 하루 1시간, 싸우는 속에서 제목을 올려라. 제목 제일로 해 나가자.
회합 전에도 제목, 집에 돌아 와서도 또 제목을 올리는 것이다. 생명이 바뀌지 않을리가 없다.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밖에 싸움은 없다. 제목을 올려서 이긴 사람만이 확신과 환희와 공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제목이다. 일체가 제목이다. 백만 마디의 지도보다, 백만 권의 철학서보다도 제목이다. 제목을 올려라. 기원해라. 전부 그대로 되어 싸움은 열려져 간다. 자신이 얼만큼 제목을 올렸는가 이다. 제목을 올리면 자연히 교학은 필요하게 되어간다. 제목을 올리면 자연히 그 일이 충실해진다.
하루, 1시간의 제목을 확고하게 올려나가라. 근행은 신심의 제일 기본이다.
지금 대충 대충의 근행을 하고 있으면 10년,20년 후에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것이 아이들로 나오기도 하고, 가정으로 나오기도 하고, 개인의 입장에 따라 여러 곳으로 파급되어 간다. 자신의 신심을 제대로 해가지 않으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얄팍한 입사귀 처럼 되어버린다. 그러한 사람은 신심의 갑옷을 입지않고 증상만의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속에서 증상만이 있어 실패한다. 증상만의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근행 하나를 해도 긴장이 없다. 그런 사람은 요주의다.
학회의 조직에 관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일체의 원인은 근행 그것이다. 정말로 근행을 하고 실천한 사람은 학회를 만들어 온 사람들의 고충과 괴로움을 자연히 알아가게 된다. 제목을 올리고 근행을 하고 학회의 고충을 알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비판이 되어 버린다.
매일 1시간의 제목을 올려가자. 그 하루 1시간의 제목이 올라가면 생명의 회전이 시작되어 간다. 생명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1시간의 제목을 올리면 학회의 리듬이 되어간다. 항상 1시간을 올리면 그만큼 생명력이 풍부해져서 그 자체가 행력으로 되어간다. 제목을 올려서 마를 타파해가자. 불도수행에서 가장 쉬운 것이 제목이다. 불도수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제목이다. 그러나 일체의 승리의 원인, 복운의 원천은 제목에 있다.
- 池田선생님 지도 中에서-
♧ 제목에 대하여
제목은 빛이다. 「백천만년 동안 어두운 곳도 등불을 넣으면 한 순간에 밝아진다」라고. 기원한
순간부터 생명의 암흑은 사라지는 것이다. 인과구시 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확신의 기원이 중요하다.
신력·행력의 강도에 따라서 불력·법력이 나타난다. 기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투철한
기원이면 머지않아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법실상이다.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확신해 가는 것이 신심이다.
신앙이란 불멸의 희망이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투쟁이다. 그 근본이 기원이다.
기원하면 희망이 확신으로 변한다. 그 확신의 일념이 삼천나열로 전개되어 희망을 성취해 나가
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백 천만년 계속되었던 암흑도 밝아 지는 것이다.
반드시 태양은 떠오른다. 아니 이미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오랜 세월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체념이 습관화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묘법만은 체념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나 같은 사람이 되겠느냐고 비하 하는 것은 자신의 불계에 대한 모독으
로 통한다. 이 고뇌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결정해 버리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 영원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묘호니 부인답서) 강의 중에서
기원이라 해도 갓난아이가 어머니 젖을 먹고 싶어하듯이 마음속의 생각을 그대로 기원하면
된다. 긴장하여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있는 그
대로를 어본존께 부딪쳐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다며 분명하게 정하고
기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다루기 힘든 사람, 미운 사람 그런
사람에게도 기원해 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전하고 기원해가면 반드시 바뀌어진다.
자신이 바뀌든가, 상대가 바뀌든가, 여하튼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많
은 사람들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을 기원해 줄 수 있는 자신으로 바뀌
었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재산이 된다.
청춘대화 (청춘의 우정, 청춘의 인생관)
청년은 교학에 도전해 주기 바란다. 청년은 행동으로 자신을 단련해 주기 바란다. 그 기대를 담아, 또한 평소의 감사의 생각을 담아서, 신심의 기본에 대해 몇 가지 말씀 드려 두고 싶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삼좌의 근행을 행하고 어본존께 깊이 기념 드렸다. 어본존의 일을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되지만, 이곳은 불법유포의 역사가 얕은 미국 땅이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납득」과 「확신」을 주어 가는 것이 리더의 사명이다. 그래서 약간 비약이 있다고 생각하나 극히 간결하게 요점을 말해 두고자 한다.
본존(本尊)에는 근본존경의 의의가 있다. 인생. 생명의 근본으로서 존경하고 귀의해 가는 대상이 본존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본존으로 하는가에 의해서 인생이 근저적(根低的)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종래의 불교의 본존은 거의가 불상(佛像)이다. 또한 불화(佛畵)인 경우도 있다. 초기의 불교에는 불상은 없었으나, 후세에 서방의 그리스문화의 영향 아래, 서북인도(간다라지방)에서 불상이 탄생했다. 말하자면 실크로드 교류의 한 산물이다.
이러한 불상. 불화를 통하여 「부처」의 이미지를 민중은 받아들이고, 갈앙, 신앙의 마음을 일으켜 왔던 것이다.
그러나 日蓮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문자의 어본존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 영상의 결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영지(英智)의 세계, 어본불의 위대한 「지혜」의 최고이면서 존극의 표현이라고 배견된다. 이 점에서도 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종래의 불법의 본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자는 불가사의하다. 문자의 힘은 위대하다. 예를 들면 사람의 이름이 있다. 싸인을 한다. 그 문자에는 일단, 그 사람의 인격, 입장, 힘, 심신(心身), 역사, 인과, 그러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이라는 한자로는 2개의 문자 속에 그 국토, 사람들, 동식물 기타 일체가 포함되어 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起)는 법성의 기. 멸(滅)은 이는 법성의 멸」(천태) 이라고 하듯이, 일체의 현상은 묘법의 나타남이다.
어본존에는 변전하는 대우주(제법)의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완벽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우주의 실상이란 우리들 소우주의 경우도 완전히 똑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어서에 말씀하신 대로이다.
또 문자로 어본존을 도현 하시는 이유의 하나에 대하여 총본산 제65세 니치준 상인은, 회상(繪像)으로는 가령 십계까지 (문상교상에 집착된 색상장엄한 佛등, 말법의 올바른 본존은 될 없다)를 표현할 수 있어도 십계호구 이상 (진정한 백계천여 또한 사의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이라는 어본불의 경계)은 도저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배견된다고 가르치셨다.
♧ 선도 악도 일체를 살리는 묘법
우주에는 선의 힘도 악의 작용도 있다.
어본존에는 불계의 대표인 석가여래, 다보여래로부터, 지옥계의 대표인 제바달다까지 십계의 대표가 모두 도현 되시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선」의 힘 ·작용의 대표도, 「악」의 힘 · 작용의 대표도 조금도 빠짐없이 남묘호렌게쿄의 광명에 비추어져서 「본유(本有)의 존형(尊形)」즉 본래 있는 그대로의 존귀한 모습. 작용으로 되어 간다고 설해져 있다. 「본유의 존형」으로 되기 때문에 「본존」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어본존에게 근행. 창제할 때, 우리들의 생명의 선악의 힘도, 모두 「본유의 존형」으로서의 작용을 시작한다. 「지옥계」의 괴로움의 생명도, 「아귀계」의 항상 굶주림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생명도, 「수라계」의 비뚤어진 노여움의 생명도, 모두 자기자신의 행복과 가치를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해 간다. 불행으로 이끌리는 생명이 묘법을 근본으로 하면, 반대인 선의 방향으로 힘을 기울여 가는 것이다.
그것은 괴로움이라는 장작을 연료로 해서 환희와 지혜와 자비의 불길이 타올라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불을 붙이는 것이 묘법이며 신심이다.
더욱이 불계. 보살계. 범천. 제석 등의 선의 생명은 창제에 의해서 그 빛남이 늘어나고, 자꾸자꾸 위광세력을 넓혀 간다. 우리 소우주 속의 대일천도 대월천도 찬란하게 대광을 발산하여 생명의 어둠을 밝게 한다.
선도 악도 십계삼천의 모든 작용이 일체가 되어 완전 회전하여, 행복으로 상락아정의 인생으로 우리들의 생명을 끌어 가는 것이다.
인생에는 당연히 병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병은 묘법의 법리에 의해 「본유의 병」이라고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즉 병에 좌우되어, 인생을 괴로워하고 고민해 가는 그러한 일은 절대로 없다. 삼세영원의 생명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 절대적행복이라는 我 는 엄연히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생활상의 막다른 막힘도 반드시 타개되어 다음의 보다 넓고 넓은 경애로의 비약대가 된다.
♧ 창제의 소리는 시방의 불보살에 통한다
다음에 「뜻을 모르는 경문을 읽고, 제목을 불러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답해 두고자 한다.
물론 뜻을 아는 쪽이 좋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것은 법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며, 그 깊은 뜻의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를 들면 개가 짖고, 새가 지저귄다. 개에는 개의, 새에는 새의 세계의 소리가 있으며, 말과 신호가 있다. 사람이 들어도 전연 모르지만 개끼리, 새끼리는 서로 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근행.창제의 소리는 비록 사람은 의미를 모르더라도, 어본존에게 통하고 삼세시방의 부처. 보살의 세계에는 정확히 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처. 보살의 세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대성인은 근행. 창제에 의하여 우리들은 매일 가만히 앉아서 대우주를 여행하는 그러한 대경애를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제자 단나로 되는 사람은 한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천축의 영산을 보고 본유의 적광토도 주야로 왕복할 것이니 기쁨은 말할 수 없노라」(어서 1343쪽)라고.
어본존을 배견하면 나의 소우주의 문은 그 자리, 그 때에 대우주에로 전개되고, 전우주를 내려다보는 그러한 유유한 대행복감을 맛볼 수가 있다. 대충실감과 대환희, 일체를 손바닥에 넣는 듯한 대확신을 실감할 수 가 있다. 우주에 에워 싸여져 있었던 소우주가 우주를 도리어 에워싸 간다.
또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중략) 실상진여의 허공을 날게 되느니라」(어서 1443쪽) 라고.
또한 「자기자신은 등(藤)과 같지만 법화경의 소나무에 걸려 묘각의 산에 오르리라. 일승의 날개를 의지하고 적광의 하늘에도 날아가리라」(어서1430쪽)라고.
또 대우주로 날아가듯이 반짝이는 은하. 달리는 유성군,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무한한 확대, 깊이를 시시각각으로 맛보고, 음미하며 살아가는 상락의 경애가 된다.
어쨌든, 기필코 소원만족의 인생, 영원한 행복경애를 자연히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 묘법의 공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공덕도 신심 여하에 달려 있다.
대성인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이 대복운을 7대 까지나 되는 선조. 또한 7대 까지나 되는 자손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설하시고 있다. 얼마나 굉장한 대공덕일까.
♧ 신심의 대공덕은 명익에
「마쓰노전답서」에 「성인이 부르시는 제목의 공덕과 우리들이 부르는 제목의 공덕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나이까 라고 운운. 조금도 승열(勝劣)은 있을 수 없도다. 그 까닭은 우자가 가진 금이나 지자(智者)가 가진 금이나 우자가 켜 놓은 불이나 지자가 켜 놓은 불이나 그 차별은 없느니라.」(1381쪽)
--- 성인이 부르시는 제목의 공덕과 우리들 범부가 부르는 제목의 공덕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다.
(대답하여 말하면) 그 공덕에는 승열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자가 가지고 있는 금과, 지자가 가지고 있는 금에 가치의 차이는 없고, 우자가 켠 불과 성인이 켠 불에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어본존의 공덕은, 그 사람의 입장이나 재산 등에는 일체 관계없이 평등하게 나온다. 어떠한 사람도 제목을 부름으로써, 반드시 행복하게 되어 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어본존의 공덕에는 현익과 명익이 있다.
병이라든가, 업무상의 곤란이라든가, 뭔가 문제가 있을 때에 엄연히 수호를 받아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현익이다.
그와 동시에, 마치 바닷물이 밀물이 되듯이 복운을 쌓아, 풍요한 대경애를 점차로 구축해 간다. 그 경애만 구축하게 되면 어떠한 인생의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무너지는 일은 없다. 금세 뿐만 아니라 영원히 행복한 경애로 유락해 갈 수 있다. 이것이 명익이다.
예를 들면 태엽을 완전히 감아둔다면, 언제라도 탄력이 붙어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비축되어 있다. 느슨해져 있으면 유사시에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생명의 태엽을 감는 힘이 신심의 실천이며, 무슨 일에도 대응 할 수 있도록 충분히 힘을 완전하게 비축한 상태가, 명익에 가득 찬 인생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기필코 소원만족의 인생. 영원한 행복경애를 자연히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 묘법의 공덕인 것이다.
대성인도「아무리 법화경을 믿으신다 해도 방법이 있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칠(漆) 천통에 게의 발 하나 넣음과 같도다」(어서 1056쪽) 아무리 법화경을 믿고 있어도 방법이 있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것은 천통의 옻에 게의 다리를 하나 넣어서, 옻을 소용없게 하고 마는 것이다 라는 말씀이시다.
아무리 진지하게, 착실하게 신심을 하고 있는 듯 해도, 방법이 있으면 공덕을 없애고 만다. 그것은 아주 소량의 청산가리 때문에 금방 죽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악의 인을 만드는 것으로서, 십사비방을 드시고 있는데, 그 중에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이 있다.
신심하고 있는 사람을 경시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열심히 이 만큼 신심을 하고 있는데 공덕을 느낄 수 없다라는 경우가 있다. 그 때는 이 네가지의 비방이 있는가 없는가를 자기에게 물어 봐 주시기 바란다.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의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공덕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동지에게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을 명확히 말해 간다는 것은 자유이고,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생각해서 엄하게 말하는 것과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망의 말은 같지가 않다. 그 점을 깊이 깊이 판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본존 슬하에 모여, 광선유포로 전진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불자이며, 묘법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존경하고, 신뢰하고, 격려하면서 이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 주시기 바란다. 그 사람에야말로 어본존의 공덕과 제천의 가호는 더한층 늘어 간다는 점을 확신해 주시기 바란다.
NSA 청년연수회 1990. 2. 20
日蓮대성인의 불법은 생명즉우주, 우주즉생명 인간생명은 하나의 소우주이다 라고 설한다.
근행이란 이 소우주인 우리 자신과 대우주가 어본존을 근본으로 해서, 생생하게 교류해 가는 장대하고도 장엄한 의식이다.
우리 생명이 소우주인 것을 신체의 면에서 말하면,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이 둥근 것에 비기고, 두 눈은 태양과 달에 비긴다.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것은 주야(晝夜)를 나타낸다. 머리털은 빛나는 별에 비긴다. 대머리인 사람은 거의 유성(별똥별)이 되어 버렸다(큰웃음).
눈썹은 북두칠성에 비긴다. 여인이 화장하고 그린 눈썹은 인공위성(큰웃음). 호흡은 바람을 의미하고, 코의 조용한 숨소리는 계곡의 바람, 골짜기의 평온한 바람을 나타낸다. 큰 소리로 고함치는 리더의 숨소리는 태풍일지도 모른다(큰웃음). 모두 피난할 수 밖에 없다(큰웃음). 몸의 마디가 굽은 곳은 다해서 약 삼백육십절. 이것은 1년을 의미한다. 복부측(배부분)은 봄. 여름을, 차고 단단한 등부분은 가을.겨울을 의미한다.
혈관은 작은 하천. 큰 하천에 비긴다. 제방이 끊어져 홍수가 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뇌출혈이다. 뼈는 돌 등에, 피부나 살은 대지에 비기고, 몸의 털은 삼림(森林)이다. 그 밖에 내장에 대해서는 등등. 신체가 하나의 소천지(小天地)인 것을 불교경전에는 상세히 설하고 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있다. 바람이 분다. 별이 반짝인다. 땅에는 바다가 있다. 냇물이 흐른다. 화산이 불을 뿜는다. 또 금, 은, 동 등의 많은 광물, 칼륨, 칼슘, 그 외의 원소가 매장되어 있다. 그들의 활동, 요소가 동등하게 우리 몸에도 포함되어 있다. 우주에 있는 무수한 원자. 양자. 전자. 중성자. 중간자 등의 소립자. 세균 등의 미생물.
또한 중력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 외 모든 법칙, 또한 선악의 작용도 하나의 소우주에 거의 같게 관련되어 있다. 몸의 활동을 봐도 우리들의 생명은 하나의 「대제약공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요한 약을 스스로 만들어 건강을 지키는 힘이 있다. 또 음식물을 섭취해 자신의 영양, 에너지로 해 간다. 또 뇌는 큰 컴퓨터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좀처럼 발휘할 수 없을 뿐이다.
60조나 되는 세포가 정연하게 질서 바르게 운동하여 생의 리듬을 새겨간다. 이것이 인간생명의 이상(理想)이다.
생명즉우주. 이와 같이 그 운행은 절묘하다. 태양의 열량이 조금이라도 변화하면, 지구를 비롯한 혹성은 대변동을 일으킨다. 지구의 자전(自轉)이 일순이라도 멈추면, 아니 지축이 조금 기울기만 해도, 일체의 생물은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다. 그 만큼 미묘하다. 그러면서도 엄연히 대우주의 법이 실재한다. 소우주도 같다.
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법칙을 탐구한 것이 과학이고, 그 성과를 응용해 기계 등을 만든 것이 과학기술이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모든 부분적 「법」 의 근본에 있는 「생명의 대법」의 각지를 「남묘호렌게쿄」로서 인류에 나타내 주신 분이 日蓮대성인이시다. 결코 나중에 누군가가 생각해 낸 것은 아니다. 이 「묘법」은 대우주도, 일체의 소우주도 동일하게 일관하고 있다. 우주와 인간은 「묘법」에 있어서 일체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은 때로는 「눈에 보이는 존재」로 되어 나타난다.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는 하나의 「법」도 우주에 융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수태(受胎)를 연으로 하여 이 세계에 현현해 온다. 또 단적으로 말하면, 배는 보이지 않는 「부력의 법칙」이 보이는 형태로 결정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행기는 「양력의 법칙」, 라디오와 TV는 「전파라고 하는 법칙」등을 각각 형태로서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과 원래 차원은 다르지만 우주와 생명의 근원의 「一法」도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묘법의 공력을 범부도 느낄 수 있도록, 대성인이 자신의 경계로서 도현 하신 것이 어본존이다.
법화경을 비롯한 타경문은 어본존의 설명서로 된다. 도다 선생님은 어본존을 「황송한 일이지만 행복제조기에 비유할 수 있다」라고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셨다. 이 어본존에게 근행. 창제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대우주와 완전히 조화한다. 우주도 생명도 다 같이 남묘호렌게쿄의 당체이다. 어본존도 남묘호렌게쿄의 당체이시다. 그러므로 근행. 창제할 때 어본존을 근본으로 해서 우리 생명과 우주가 정확히 기어를 맞추어 소리를 내며 회전을 시작한다. 소우주의 「일념」은 즉, 대우주의 「삼천여시. 세간」과 일체가 되어 큰 가치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근행은 소우주가 본래 가진 무한한 힘을 끌어내어 회전시키는 실천이다. 숙명이 전환되어 막다른 길이 개척되고 고뇌가 행복으로 바뀐다 라고 하는 「소우주」의 변화, 혁명. 이것은 우리 생명 속의 광선유포의 하나의 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광선유포」는 이 대우주. 지구의 천지도 인류사회도 묘법의 리듬에 따른 「평화」와 「안온」의 조화의 세계로 바꾸어 가는 운동이다.
차도 다른 기계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고 순조롭게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 적당히 운전하고 기름을 치고 정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머리털의 경우도 방치해 두면 비듬투성이가 되어 버린다(웃음). 생명도 근행을 하지 않으면 리듬이 어긋나 녹슬어 버리기는 이와 마찬가지이다.
근행. 창제에 의해 엔진을 걸고 「행복」의 방향으로 「정의」의 방향으로 매일 용감하게 계속 달려간다. 그 반복에 의해 차츰 우주의 「법」과 완전하게 합치한 생명이 된다. 그것이 부처의 생명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영원히 자재(自在)이며 유락(遊樂)의 생명이다. 삼세에 무너지지 않는 금강의 몸으로 된다. 따라서 일생성불을 위해 절대로 퇴전해서는 안 된다 라고 대성인은 엄애로써 말씀해 주시고 있다.
가령 일시적으로 괴롭고 쓸쓸한 날들이 있어도 「번죄즉보리」의 법리로, 큰 「고뇌」는 반드시 큰 환희와 진보와 가치로 바뀌어 간다. 어본존에게는 그 무한한 법력. 불력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 걱정도 없다.
흔히 강성한 신심이라든가 용맹정진, 용기 있는 행동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강한 마음과 용기 있는 실천이 없으면 어떠한 위업도 성취할 수 없는 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대화에서도 명쾌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 용기가 없어 애매하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고 있으면, 상대방의 가슴에 찡하게 가 닿을 리가 없다. 더욱이 상대방의 마음을 파악해, 움직이게 하고 또 감명을 주기 위해서는 강한 일념의 파동이 필요하다.
이것은 연애 때도 같지 않을까?(큰 웃음) 또 취직의 면접시험에서도 자신의 의사나 생각을 명쾌하게 말하지 않으면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결국 「강한 마음」「용기 있는 행동」이 모든 상황을 변화 시키고 행복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힘인 것이다.
♧ 행동이야말로 생명의 개가
비행기가 날아 오르기 위해서는 활주로의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 조주(助走)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도, 예습을 철저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어떠한 일에서도 보다 힘을 발휘하고 보다 성과를 높여가기 위한 「조주」가 있는 것이다. 불법에서는 자행. 화타라고 설한다. 어느 쪽이 빠져도 올바른 수행으로는 되지 않는다.
더욱이 어본존은 「광선유포」를 가르쳐 주신 대성인의 생명의 당체이시다. 그러므로 광포와 인생과 생활을 위한 행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근행. 창제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어본존 과의 진실한 감응은 없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포를 원하는 행동이 있으면 그만큼 생명이 하나의 「조주(助走)」가 되어 근행. 창제때에도 경애의 위대한 도약과 비상을 성취하는 힘이 된다. 또 근행이라는 자행으로 에너지가 광포를 위한 자신의 행동으로 탄력을 붙여가는 것도 당연하다.
요는 근행이라는 행동. 광선유포에 봉사한다라는 행동, 양자가 일체로 되어 묘법의 무한한 힘을, 이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 몸」에 열어갈 수가 있다. 「행체즉신심」이 불법의 세계이다.
즉 행동이 바로 신심이고, 행동 없이 올바른 신앙은 있을 수 없다. 그 행동이란 것은 이 자행. 화타 라고 하는 어서 말씀대로의 궤도인 것이다.
행동이 바로 복덕의 원천이다. 예를 들면 홍교에 있어서도 그 때 상대가 발심해 입신하는가 안하는 가는 소위 상대의 문제이다. 기근의 문제도 있고, 또 상황에 따라 행동의 결과는 여러 가지 이다. 그 결과에 일희일우할 필요는 결코 없다. 우주에서 가장 올바르고 가장 멋진 생명의 법칙을 끝까지 실천한 긍지를 가지고 가슴을 당당히 펴고 전진해 가면 된다.
광포를 위해 철저하게 행동한 사람은 이미 생명의 대승리자인 것이다.
어본존에게는 「약뇌란자 두파칠분(만약 뇌란 하는 사람은 머리가 칠분으로 깨진다)」이라고 쓰여져 있다. 자신의 훌륭한 법칙을 근본적으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 라는 훈계이다. 퇴전이나 비방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여 산산조각이 나게 해 버리는 것이다.
또 「유공양자 복과십호(공양하는 자는 복이 십호 보다 더 하다)」라고도 쓰여져 있다. 어본존에게 창제하고 홍교 하는 자의 공덕은 석존에게 공양하는 복덕 보다 휠씬 크다라는 엄연한 어문(御文)이다.
우주에 있는 일체의 행복이라는 자양을 소우주라고 하는 우리 내면에 흡수해, 최고로 행복한 생명이 되어 간다는 약속이시다. 따라서 광포에 살아가는 불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드시 행복해 진다. 누구보다도 행복해지지 않을 리가 없다. 어본존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대박수)
현당이세의 신심
또 어본존에게는 「위현당이세(현당이세를 위해)」라고도 쓰여져 있다. 현재. 미래를 위한 신앙이다. 불법이다. 어본존을 배알하는 순간 구원원초의 생명이 솟아오른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구원원초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인 것이다. 오늘에서 미래로 이 순간으로부터 영원한 행복으로 항상 출발이고 항상 희망이다. 항상 청춘이고 항상 시작인 것이다. 그것을 확신하여 존귀하고 소중한 인생을 후회 없이 마음도 즐겁게 명랑하게 전진해 주기 바라며 기념인사로 하고 싶다.(대박수)
NSA 각부 합동연수회 1990. 2. 19
♧「서원의 기원」이 중요
그의 질문은 새롭게 시작한 야채재배에 실패하여 빛이 늘어났는데 어떻게 하면 타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흉작이 되고만 원인은 무엇입니까?
기후 탓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
같은 야채를 재배해서 성공한 분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흉작입니다.
비료에 문제는 없습니까?
·.. 상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재배방법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
토양과 품종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글쎄요 ·
그는 신이치의 질문에 거의 만족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누구 나가 열심히 이다.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는 점에 방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신이치는 예리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왜 흉작으로 끝나 버렸는지,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 가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참고로 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충분한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승부에 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연구와 고민이 뒤따릅니다. 그것을 게을리하면 성공은 없습니다. 신심을 하고 있으니 자기 밭만은 저절로 풍작이 되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최고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신심의 강성함은 남보다 몇 배 연구하고 고민하여 노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도전의 에너지를 용솟음치게 하는 원인이 진지한 창제입니다. 그 또한 서원(誓願)의 창제가 아니면 안됩니다.
서원이 무슨 뜻입니까
기원이라고 해도 스스로 노력을 게을리하며 그저 선반에서 찹쌀떡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듯한 기원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종교라면 인간을 그릇되게 만들어 버리는 종교입니다.
日蓮불법의 기원은 본래 서원의 창제입니다. 그 서원의 근본은 광선유포입니다.
즉 나는 이 브라질의 광선유포를 해 가겠습니다. 그를 위해서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훌륭한 실증을 보여 가겠습니다. 부디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는 결의의 창제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래의 기원입니다.
그 위에 매일 자신이 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명확히 하나하나 성취를 기원하며 도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 진지한 일념에서 지혜가 솟고 창의연구가 생기며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즉 결의 와 기원 그리고 노력 과 연구 가 갖추어져야 비로서 인생의 승리가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한밑천 잡으려고 한다거나 그럴 듯한 손쉬운 돈벌이 이야기에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신심이 아닙니다. 관념입니다.
일은 생활을 지탱하는 기반입니다. 그 일에서 승리의 실증을 보이지 않으면 신심즉생활의 원리를 입증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안이한 자세는 일체 배제하고 다시 한번 새로운 결의로 전혼을 기울여 일에 몰두해 주십시오.
역경이면 역경일수록 인생의 승부의 때라고 정하고 끝까지 도전해 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본존의 공력(功力)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역경은 또 불법을 증명하는 찬스라고 할 수 있다.
신인간혁명 1권 5장 개척자中에서
♧ 「한 번의 창제에 광대한 공덕」
신심은 일생이다. 그리고 삼세이다. 광선유포도 기나긴 여로이다.
그 「행복에의 여행」을, 어떻게 완주하는가. 보배의 일생을 매일 매일 어떻게 가치적으로 상쾌하게 살아가는가. 거기에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누구라도 「피곤이 쌓일」때가 있다. 「컨디션이 나쁠」때도 있다. 살아있는 몸이라면 당연하다. 그러할 때, 근행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창제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오늘은 여러분의 평소의 의문에 답하는 의미에서도 日蓮대성인의 말씀을 배견하면 말해 두고자 한다. 어서근본의 이러한 「구체적인 지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 경우에 따라 총명한 판단을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대성인은 「경우에 따라 창제만이라도 좋고, 어보전(御寶前)이 아니라도 좋은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문하인 다이가쿠 사부로의 부인이 「월수(月水=월경)」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질문한 것에 대한 답서이다. 예로부터 일본에는 「월수」를 부정하다고 하는 관념이 뿌리깊었다. 질문한 부인도 이러한 때에는 경전을 독송해도 좋은지 어떤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에 답하신 대성인은 「월수」는 전혀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며, 중요한 생리적 작용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당시로서는 극히 합리적인 사고방식이셨다.
그리고 컨디션이 나쁜 「장병(長病)과 같은 것」(어서 1202쪽) 이라고 하시어, 이러한 경우의 실천방법을 교시하신 것이다.
현대에서는 「부정(不淨)」등은 전혀 문제로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어서에서의 대성인의 말씀은 넓은 의미에서 몸이 본래의 컨디션이 아닐 때에 근행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는 과제에 명쾌한 해답을 주셨다고 배견 된다.
즉 근행도 여러 조건을 고려해서, 유연하게 실천해 가야 한다 라는 원칙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대성인은 어디까지나 「경전근본」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말법의 경전인 「어서」를 근본으로 해서 나아간다.
♧ 어서에 5좌 3좌의 규정은 없다.
5좌 3좌에 대해서도 어서에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후세에 이루어진 형식이다. 게다가 본래는 승려의 수행이었다. 지금은 승려쪽이 더 못하고 있는 듯하다(폭소). 그것을 다망한 재가(在家)가 하고 있는 것이므로 대단한 일이다.
♧ 가치적으로, 무리하는 것과 강한 신심은 다르다
특히 부인부들은 너무 성실한 나머지 밤늦게 피곤할 때나 몸의 컨디션이 나쁠 때라도 완벽하게 5좌 3좌를 하려고 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 신심은 너무나도 존귀하다. 반드시 어본존께 통해 갈 것이다.
그러나 특히 연로한 부인들은 무리를 하면 크게 건강을 해쳐 버리는 경우가 있다. 컨디션에 따라 짦은 창제만, 혹은 제목만으로 쉬는 편이 가치적인 경우도 많다. 그것을 자기자신이 판단하는 것이다.
평생의 신심이다. 가령 5좌 3좌의 근행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어본존을 믿고, 구도해 가는 「신심」이 있다면 복운은 소멸되지 않는다.
「무리」와「강신(强信)」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발랄하게 희망에 넘쳐 살아가는 생명력이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빨리 쉬어 피곤을 없애고 상쾌한 기분으로 근행을 하는 편이 좋은 경우도 있다.
근행. 창제는 범부의 생활 속에서 가장 장엄한 어본불과의 대면이다. 자기자신의 불계. 흉중의 어본존을 열어가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상쾌하고 기쁨에 넘친 것이기를 바란다. 끝나면 목욕탕에서 나온 듯이 개운하다 라는 근행이기 바란다.
형식적으로 된다거나, 시계만 신경 쓴다거나(폭소), 신경 쓰는 만큼 시간의 흐름도 느리고(폭소), 지쳐서 장해의 어디를 하고 있는지(웃음), 저쪽으로 건너뛴다거나, 이쪽으로 되돌아온다거나(폭소) 그래도 하자 라는 신심은 굉장하지만(웃음), 역시 총명한 신심즉생활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녁근행은 가능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대성인은 이렇게 결론지으셨다.
「경을 읽지 마시고, 암송으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도록 하시라. 예배하는 것도 바로 경을 향하지 마시고 예배를 하시라」(어서 1203쪽)
--- (월수 때의 근행은 원칙은 어디까지나 자유이고) 경(법화경)을 읽지 말고, 다만 남묘호렌게쿄라고 창제만 하시요. 예배할 때도 경을 향하지 말고(어보전에 가지 말고) 예배를 하시오 라고
독경은 하지 않고, 다만 창제만으로 좋다. 게다가 어보전에서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이다.
누운 채로의 경우도 생각하시고 있다고 배견된다.
이와 같이 대성인은 형태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유연하셨다. 어디까지나 「다만 마음만이 중요」(어서 1192쪽)인 것이다.
물론 「좋은 말을 들었다」(폭소), 「그런 것이라면 언제나 실천하고 있다」(큰 웃음) 라는 등으로 이용 해서는 안된다(큰 웃음). 특히 장년부. 남자부에게는 얼렁뚱땅 하는 것이 강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폭소)
어디까지나 근행.창제의 기본에 진지하게 도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도 어서를 나쁘게 이용 해서 불도수행을 게을리하면 자신이 손해일 뿐이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전부 자기자신을 위한 신심이다.
♧ 한 번의 창제의 공덕은 부처의 지혜로도 헤아릴 수 없다.
「단지 창제만으로도 좋은 것입니다」- 대성인이 그렇게 말씀하신 전제에는 「南無妙法蓮華經의 대공덕」이 있으시다. 이 편지의 처음에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법화경은 일일의 소작(所作)으로 1부 8권. 28품. 혹은 1권. 혹은 1품. 1게. 1자. 혹은 제목만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다만 한 번 부르고」(어서 1199쪽)
--- 법화경의 하루의 수행으로서 법화경 1부 8권 28품 전부를 읽는다. 혹은 그 중 1권만을 읽는다. 혹은 그 중 1품이든 1게, 1구이든 1자만을 읽는다. 혹은 (법화경의 제목만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단지 한번만을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법화경의 독송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라고.
「혹은 또 일기(一期) 동안에 다만 한 번 부르고, 혹은 또 일기 동안에 다만 한 번 부르는 것을 듣고 수희하고, 혹은 수희하는 소리를 듣고 수희하고」(어서 1199쪽)
--- 혹은 또 일생동안 단 한 번 (제목을) 부른다. 혹은 또 일생동안에 단 한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수희한다. 혹은 또 그 수희하는 소리를 듣고 수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까지 「수희」한다. 그러한 상쾌한 창제의 소리이기 바란다. 묘법을 봉창하는 소리. 또 확신의 소리에 접하여, 저 사람은 훌륭하구나, 학회의 사람은 굉장하구나, 원기가
넘치는구나 라고 들은 사람도 수희한다.
또 혈색도 좋고, 좋은 얼굴을 하고 있구나,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있구나, 빛나고 있구나 라고 수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모습은 중요하다. 제법실상이다.(제법=현상의 모습은 즉 실상= 생명의 진실한 모습이다>
이러한 수희의 모습은 그야말로 「회우」분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희에서 수희로 - 「회우」운동의 방정식이다.
「이와 같이 오십전전(五十展轉)해서 끝이 되어 가면 신심도 엷어지고 수희하는 마음이 약해짐이, 이삼세의 유치한 자의 어리석음이 우마들이 전후를 가리지 못함과 같아지지만」(어서 1199쪽)
--- 이와 같이 (묘법의 수희를 다른 사람에게 차례로 전하여) 50명에게 전전해서 끝이 되어가면 그 기분도 엷어지고 수희의 마음도 약한 것은 마치 2,3세의 유아가 미덥지 않은 것과 같으며 ,소나 말 등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되지만(분명히 하지 못하지만)
「타경을 배우는 사람이 이근이고 지혜도 어질고 사리불. 목련.문수. 미륵과 같은 사람으로 제경을 마음 속에 다 알고 계시는 사람들의 공덕보다도 뛰어남이 백천만억배 된다는 것이 경문 및 천태. 묘락의 60권 중에 쓰였도다」(어서 1199쪽)
---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50전전 끝의 공덕은) 다른 경을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 기근도 뛰어나고, 지혜가 훌륭하며 사리불이나 목련, 문수보살이나 미륵보살과 같이 많은 경전을 암기하고 계시는 사람들의 공덕보다도 백천만억배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문 및 천태. 묘락이 저술한 60권의 책 속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제목의 공덕은 훌륭한 것이다(대박수).
단 한 번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불러도 광대한 공덕이 있다. 영원한 공덕이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심이다. 이 대확신이 없으면 안 된다.
대성인은 계속해서 부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이라고 전제하시면서, 경문을 인용해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다만 법화경의 일자를 부르는 사람의 공덕만은 알지 못하신다고 쓰였도다. 하물며 우리들 역죄(逆罪)의 범부가 이 공덕을 알 수 있을소냐」(어서1199쪽)
--- 다만 법화경의 1자를 부르는 사람의 공덕만은 (부처의 지혜를 가지고도) 알 수 없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 역죄의 범부가 이 (묘법의) 공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니, 결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목 한번이라도 그 만큼의 공덕이 있다. 활도 명인이 쏘면 하나의 화살로 딱 표적에 맞춘다.
일념이 정해진, 강하고 깊은 기원은 「일념삼천」으로 우주의 일체를 움직여 가는 것이다.
한편 이만큼의 공덕이 있으므로 오늘은 세편이나 올렸다(폭소) 라고 아주 으스대도 좋은 것이다. 그 환희가 소중하다. 어서에는 몇편 올리시오 라든가. 몇시간 올리시오 라든가는 정해져 있지 않다.
♧ 장시간의 창제에서 유의할 점
그런 위에서 물론 제목은 많이 올릴 수 있으면 그 쪽이 좋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자각과 결의에 맡겨 둘 수 밖에 없다. 형식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제목을 「10시간 올렸다」「8시간 불렀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는다. 물론 부인부로 부터이다. 장년부나 남자부로부터는 거의 듣지 못한다(폭소).
부인부 여러분의 신심의 한결같음, 진지함에는 정말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만약 오히려 그 그늘에서 남편이나 자녀가 「밥은 아직 안됐나」(폭소) 「시장에 누가 가는걸까」(큰웃음) 등으로 염려하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가엾다. 그래서는 「신심즉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장시간의 창제로 인하여 생활이 내버려둔 채로 되거나 타인에게 폐를 끼쳐 불쾌한 생각을 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은 하루에 이렇게 장시간 창제했다 라고 시간의 길이를 자랑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모습은 주위에 여러 가지 면에서 오해를 낳기 쉽다. 이웃으로부터 광신(狂信)이라고 생각되기도 쉽다. 그렇게 되면 신뢰를 잃고 법은 낮추고 만다.
조직의 경우도 똑같다. 10시간 제목투쟁 등으로 이름 붙여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두 세 명의 뜻 있는 사람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면 몰라도 많은 사람이 일률적으로 한다고 하면, 각자각자 생활시간대는 다르고 바쁜 것도 다르다. 몸의 상태도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몇 사람에게는 결국 무리를 시키고 말 가능성이 있다.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하물며 강제는 안 된다. 거기에 참가하지 않으면 창가학회 본래의 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극단은 안 된다.
♧ 리더는 명쾌하게, 상식 풍부하게
신심은 「기쁨」과 「안심」「희망」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강요하는 듯한 또 괴롭히는 듯한 지도는 절대로 삼가 해야만 한다.
제목의 위대한 공덕은 당연한 일이라 치고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모두가 즐겁게 「신심즉생활」의 리듬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명쾌한」「상식 풍부한」지도이기를 바란다. 창제의 파동을 일으키자고 생각한다면 리더 자신이 솔선하여 깊고 강하게 기원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간사이의 여러분이 전국에 그 모범을 보여주시리라 믿고 있다.
♧ 공부는 노력으로, 복운은 신심으로
가정에서의 교육에 대해 한마디 해 두고 싶다.
아이가 근행 하면 그것만으로도 「성적이 올라간다」고 믿어버린다 그 신심이 강함(폭소)은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공부는 역시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성적도 오르지 않는다. 당연한 도리이다.
「실력」을 붙이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다. 그 노력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 신안의 힘이며, 또 실력을 모두 완전히 발휘하기 위한 「생명력」과 「복운」이 신심에 의해 갖추어지는 것이다. 노력, 실력 자체가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신심은 일생이다. 미래부 시대는 「면학제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있어서의 「신심즉생활」이다.
「아이들에게는 인생의 힘든 때에는 신심으로 극복해간다 는 것을 단단히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라고 도다 선생님은 지도하셨다.
다른 아이들은 싱글벙글 즐겁게 학교에 가는데 나는 매일아침 입만 열면 「근행, 근행」하고 시달린다(폭소). 이래서는 아이들도 매일 우울하다(폭소). 오히려 신심이 싫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자녀가 제목삼창일지라도, 방편품. 자아게 만일지라도 훌륭한 것이므로 「잘 했다」라고 칭찬해주는 것이다. 「어서 다녀오너라. 나머지는 어머니가 다 해줄 테니까」(큰 웃음) 등 그 정도의 넉넉함, 여유, 대범함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누구보다도 인생을 즐기기 위한 신앙이다. 그 신앙 때문에 쓸데없이 다툼이나 괴로움을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
♧ 수방비니에 대하여
대성인은 이 편지 속에서 「수방비니」(어서 1202쪽)의 戒에 대해 가르치시고, 그 나라, 그 지역에 따라서 불법을 실천해 나가시오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수방비니란 불법의 본의에 따르는 한, 각 지역의 풍속. 습관이나 시대의 관습에 위배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
그리고 현실의 상황이나 생활, 사회를 무시한 「강의(强義)」(강경한 가르침)을 훈계하시고 있다.
예를 들면 정좌의 습관이 없는 외국멤버에게 「의자는 안된다」라든가 그 밖에 실정을 무시하고 일본적인 방식 등 이제까지의 습관 등을 강요한 사람도 있었다.
대성인은 이러한 「강의(强義)」는 「많은 단나를 손상하는 일이 있다」(어서 1203쪽)
--- 많은 신도를 잃는 일이 있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전적으로 그대로 이다. 「무리」나 「강제」로 많은 사람을 리드해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래 지속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광선유포는 커녕 모두 떨어져 나가 버린다.
결론지어 말하면 모든 것에 걸쳐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행복을 위해」「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을 생각해 주는 것이 불법의 마음이다. 그것이 석존의 마음이며 대성인의 마음이시다.
상식 있는 「유연한 지혜」에야말로 불법의 빛은 빛난다. 거기에 참된 「강성한 신심」은 있다.(대박수). 여러분이 오늘도 「멋진 하루」이기를 기원하며 나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간사이 패밀리 총회 (1993. 5. 4)
산다는 것은 최후까지 버티어 가며 힘의 한계를 초월해 절망과 체념을 극복하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생명은 영원하다. 인생에 후회를 남긴다면 무엇을 위한 신앙인가.
괴로움이 없으면 즐거울지는 몰라도 향상은 없다. 10의 곤란이 있으면 20의 힘을 내야하고, 100의 장해가 있으면 200의 힘을 내야 한다.
슬프면 울어라 맘껏 울고 한 번의 눈물로 모두 풀어버리고 눈물의 강을 건너야 한다.
눈물의 강에 잠겨있어서는 안 된다.
잘 만들어진 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어본존님께 아무리 하겠습니다 라고 맹세해도 이루어야만 맹세이다.
평소에 제목을 저축해 두지 않으면 정말 어려울 때 제천의 가호를 받을 수 없다. 안일을 탐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은 편하고 자유롭게 보이지만 최후에는 가장 부자유한 패배자가 된다. 신앙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은 많다. 그렇게 때문에 신앙자인 우리는 그 이상으로 더 많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은 극복해야지 피할 수는 없다.
인간은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모습이 되어 나타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의 인간이 된다. 마음하나로 지옥에도 즐거움이 있다.
죽어가면서 조차도 아! 즐거웠다. 자!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신심의 경애이다.
그러한 사람은 곧바로 태어난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모습 그대로 태어날 수 있다.
매일 매일의 작은 노력이 위대한 힘이 된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기개가 없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관철할 수 없다. 괴로움이 많은 사람은 필사적으로 기원하라. 1000만편의 제목을 해봐야만 신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용기의 두 글자로 살아라.
져서 울지 말고 울면서 승리하자.
이케다 선생님 스피치 중에서
♧ 창제의 사람이 승리의 사람
이 사바세계는 「감인(勘忍)」의 세계라고 한다.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러가지 일이 항상 있다. 그 속에서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괴로워도 어떠한 숙명도 전부 유유히 극복하고 가장 행복한 경애를 열어갈 수 있는 것이 日蓮대성인의 불법이고, 창가학회의 신심이다. 자신이나 가족의 병 또 죽음, 경제고, 인간관계의 괴로움,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괴로움, 그 밖에 살아있는 한 온갖 싸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어찌할 수도 없는 인생의 현실이다.
「신심」이란, 「창제」란 그것들을 전부 변독위약 하는 힘이다. 괴로움의 독이 행복이라는 약으로 변한다. 번뇌즉보리로 번뇌가 깨달음으로 바뀌고, 행복으로 바뀐다. 번뇌, 슬픔이 크면 클수록 보다 커다란 행복으로 바꾸어 갈 수 있다. 이것이 제목의 힘이다. 그러므로 제목을 부르는 사람은 무엇도 두렵지 않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무도 작았을 때는 약한 바람에 조차 흔들린다. 큰 나무로 되면 어떠한 폭풍우에도 흔들림이 없다. 인간도 생명력이 약하면 작은 괴로움의 폭풍우에도 분동 되고 만다. 사바세계인 이상, 바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자신이 강해지는 수 밖에 없다. 자신이 큰 나무로 되면 어떠한 대풍도 태연하다. 오히려 즐겨갈 수 있다. 그러한 인생, 생명으로 인간혁명 해 가기 위한 신앙인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무는 매일 생장하고 있다. 우리들의 창제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매일 자기자신을 복운의 대목(大木)으로 키우고 있다. 10년, 20년, 학회 속에서 신심을 관철해 가면 이윽고 반드시 대수(大樹)로 된 복운이 분명하게 눈에도 보이게 된다.
묘법은 우주 최고의 보배이다. 창제하는 것은 매일, 나의 생명에 보배를 쌓고 있는 것으로 된다. 한편 생명 속의 과거의 죄업은 청정한 물에 더러운 물이 밀려나듯이, 깨끗이 씻겨간다. 그러므로 완전히 청정하게 되기 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처음에는 아주 더러웠던 물, 즉 자신의 숙명과의 싸움이 있다. 그것도 창제의 힘으로 가볍게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속」하는 것이다. 이윽고 완전히 생명이 청청해지면, 점점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 복덕에 가득찬,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의 경애로 반드시 되어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즐겁다. 명성이나 재보가 없어도 만족스럽다. 일순일순이 최고로 충실하게 된다. 기쁨에 넘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무엇을 보아도 정확히 옳고 그름을 알고 본질을 알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줄 수 있다. 그러한 자신으로 되어 간다. 그러므로 행복으로의 길은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다.
광포의 세계 속에서는 어쨌든 제목을 끝까지 부른 사람이 최후에 승리한다. 반드시 「절대의 행복경애」, 즉 「부처」의 경애를 획득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근본은 이것 하나만 기억해 두면 인생은 영원히 반석 같다.
초조해 하지 말고 끝까지 기원해 가면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방향으로 바뀌어 간다. 제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南無妙法蓮華經는 대성인의 이름이고 생명이시다. 제목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대성인의 생명이 솟아오른다. 반드시 부처로 되어 간다.
언제까지나 가난해서 괴로워하는 부처는 없다. 매정한 부처나 심술궂은 부처도 없다. 인생에 지는 약한 부처는 없다. 부처란 「절대로 승리하는 사람」의 이명(異名) 이다.
그 위에서 신앙자라 해도 나머지는 아무것도 특별한 것은 없다. 훌륭한 사회인이고, 양식과 예의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좋은 시민, 좋은 부모, 좋은 남편,좋은 아내, 좋은 자녀로 되어 가기 위한 신앙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자신의 경애를 높이기 위한 불법이다. 그러므로
그 신앙의 일로 가정에서 싸우는 일은 현명하지 않다. 그럴수록 창제하는 편이 가치적이다. 가족 중에서 그다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몫까지 자신이 창제하고 기원해 드리면 된다.
- 1993년 3월 3일 브라질 대표자 근행회 중에서 -
제목을 부르면 3가지 변화가 생긴다.
첫째, 생명력이 강해진다. 둘째, 불지혜가 솟는다. 셋째, 복운이 쌓인다.
그러므로, 제목을 철저히 부르고 실천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복운 넘치는 인생으로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기원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기원하는 것이다. 법화경에 이기는 병법은 없다라고 있지 않은가. 얼굴이 변할 정도로 기원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저에서부터 진심으로 제목을 올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마가 타파되지 않으면 아무리 해도 공전이다. 어쨌든 하루 1시간, 싸우는 속에서 제목을 올려라. 제목 제일로 해 나가자.
회합 전에도 제목, 집에 돌아 와서도 또 제목을 올리는 것이다. 생명이 바뀌지 않을리가 없다.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밖에 싸움은 없다. 제목을 올려서 이긴 사람만이 확신과 환희와 공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제목이다. 일체가 제목이다. 백만 마디의 지도보다, 백만 권의 철학서보다도 제목이다. 제목을 올려라. 기원해라. 전부 그대로 되어 싸움은 열려져 간다. 자신이 얼만큼 제목을 올렸는가 이다. 제목을 올리면 자연히 교학은 필요하게 되어간다. 제목을 올리면 자연히 그 일이 충실해진다.
하루, 1시간의 제목을 확고하게 올려나가라. 근행은 신심의 제일 기본이다.
지금 대충 대충의 근행을 하고 있으면 10년,20년 후에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것이 아이들로 나오기도 하고, 가정으로 나오기도 하고, 개인의 입장에 따라 여러 곳으로 파급되어 간다. 자신의 신심을 제대로 해가지 않으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얄팍한 입사귀 처럼 되어버린다. 그러한 사람은 신심의 갑옷을 입지않고 증상만의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속에서 증상만이 있어 실패한다. 증상만의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근행 하나를 해도 긴장이 없다. 그런 사람은 요주의다.
학회의 조직에 관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일체의 원인은 근행 그것이다. 정말로 근행을 하고 실천한 사람은 학회를 만들어 온 사람들의 고충과 괴로움을 자연히 알아가게 된다. 제목을 올리고 근행을 하고 학회의 고충을 알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비판이 되어 버린다.
매일 1시간의 제목을 올려가자. 그 하루 1시간의 제목이 올라가면 생명의 회전이 시작되어 간다. 생명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1시간의 제목을 올리면 학회의 리듬이 되어간다. 항상 1시간을 올리면 그만큼 생명력이 풍부해져서 그 자체가 행력으로 되어간다. 제목을 올려서 마를 타파해가자. 불도수행에서 가장 쉬운 것이 제목이다. 불도수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제목이다. 그러나 일체의 승리의 원인, 복운의 원천은 제목에 있다.
- 池田선생님 지도 中에서-
♧ 제목에 대하여
제목은 빛이다. 「백천만년 동안 어두운 곳도 등불을 넣으면 한 순간에 밝아진다」라고. 기원한
순간부터 생명의 암흑은 사라지는 것이다. 인과구시 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확신의 기원이 중요하다.
신력·행력의 강도에 따라서 불력·법력이 나타난다. 기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투철한
기원이면 머지않아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법실상이다.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확신해 가는 것이 신심이다.
신앙이란 불멸의 희망이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투쟁이다. 그 근본이 기원이다.
기원하면 희망이 확신으로 변한다. 그 확신의 일념이 삼천나열로 전개되어 희망을 성취해 나가
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백 천만년 계속되었던 암흑도 밝아 지는 것이다.
반드시 태양은 떠오른다. 아니 이미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오랜 세월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체념이 습관화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묘법만은 체념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나 같은 사람이 되겠느냐고 비하 하는 것은 자신의 불계에 대한 모독으
로 통한다. 이 고뇌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결정해 버리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 영원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묘호니 부인답서) 강의 중에서
기원이라 해도 갓난아이가 어머니 젖을 먹고 싶어하듯이 마음속의 생각을 그대로 기원하면
된다. 긴장하여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있는 그
대로를 어본존께 부딪쳐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다며 분명하게 정하고
기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다루기 힘든 사람, 미운 사람 그런
사람에게도 기원해 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전하고 기원해가면 반드시 바뀌어진다.
자신이 바뀌든가, 상대가 바뀌든가, 여하튼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많
은 사람들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을 기원해 줄 수 있는 자신으로 바뀌
었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재산이 된다.
청춘대화 (청춘의 우정, 청춘의 인생관)
청년은 교학에 도전해 주기 바란다. 청년은 행동으로 자신을 단련해 주기 바란다. 그 기대를 담아, 또한 평소의 감사의 생각을 담아서, 신심의 기본에 대해 몇 가지 말씀 드려 두고 싶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삼좌의 근행을 행하고 어본존께 깊이 기념 드렸다. 어본존의 일을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되지만, 이곳은 불법유포의 역사가 얕은 미국 땅이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납득」과 「확신」을 주어 가는 것이 리더의 사명이다. 그래서 약간 비약이 있다고 생각하나 극히 간결하게 요점을 말해 두고자 한다.
본존(本尊)에는 근본존경의 의의가 있다. 인생. 생명의 근본으로서 존경하고 귀의해 가는 대상이 본존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본존으로 하는가에 의해서 인생이 근저적(根低的)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종래의 불교의 본존은 거의가 불상(佛像)이다. 또한 불화(佛畵)인 경우도 있다. 초기의 불교에는 불상은 없었으나, 후세에 서방의 그리스문화의 영향 아래, 서북인도(간다라지방)에서 불상이 탄생했다. 말하자면 실크로드 교류의 한 산물이다.
이러한 불상. 불화를 통하여 「부처」의 이미지를 민중은 받아들이고, 갈앙, 신앙의 마음을 일으켜 왔던 것이다.
그러나 日蓮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문자의 어본존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 영상의 결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영지(英智)의 세계, 어본불의 위대한 「지혜」의 최고이면서 존극의 표현이라고 배견된다. 이 점에서도 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종래의 불법의 본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자는 불가사의하다. 문자의 힘은 위대하다. 예를 들면 사람의 이름이 있다. 싸인을 한다. 그 문자에는 일단, 그 사람의 인격, 입장, 힘, 심신(心身), 역사, 인과, 그러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이라는 한자로는 2개의 문자 속에 그 국토, 사람들, 동식물 기타 일체가 포함되어 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起)는 법성의 기. 멸(滅)은 이는 법성의 멸」(천태) 이라고 하듯이, 일체의 현상은 묘법의 나타남이다.
어본존에는 변전하는 대우주(제법)의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완벽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우주의 실상이란 우리들 소우주의 경우도 완전히 똑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어서에 말씀하신 대로이다.
또 문자로 어본존을 도현 하시는 이유의 하나에 대하여 총본산 제65세 니치준 상인은, 회상(繪像)으로는 가령 십계까지 (문상교상에 집착된 색상장엄한 佛등, 말법의 올바른 본존은 될 없다)를 표현할 수 있어도 십계호구 이상 (진정한 백계천여 또한 사의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이라는 어본불의 경계)은 도저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배견된다고 가르치셨다.
♧ 선도 악도 일체를 살리는 묘법
우주에는 선의 힘도 악의 작용도 있다.
어본존에는 불계의 대표인 석가여래, 다보여래로부터, 지옥계의 대표인 제바달다까지 십계의 대표가 모두 도현 되시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선」의 힘 ·작용의 대표도, 「악」의 힘 · 작용의 대표도 조금도 빠짐없이 남묘호렌게쿄의 광명에 비추어져서 「본유(本有)의 존형(尊形)」즉 본래 있는 그대로의 존귀한 모습. 작용으로 되어 간다고 설해져 있다. 「본유의 존형」으로 되기 때문에 「본존」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어본존에게 근행. 창제할 때, 우리들의 생명의 선악의 힘도, 모두 「본유의 존형」으로서의 작용을 시작한다. 「지옥계」의 괴로움의 생명도, 「아귀계」의 항상 굶주림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생명도, 「수라계」의 비뚤어진 노여움의 생명도, 모두 자기자신의 행복과 가치를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해 간다. 불행으로 이끌리는 생명이 묘법을 근본으로 하면, 반대인 선의 방향으로 힘을 기울여 가는 것이다.
그것은 괴로움이라는 장작을 연료로 해서 환희와 지혜와 자비의 불길이 타올라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불을 붙이는 것이 묘법이며 신심이다.
더욱이 불계. 보살계. 범천. 제석 등의 선의 생명은 창제에 의해서 그 빛남이 늘어나고, 자꾸자꾸 위광세력을 넓혀 간다. 우리 소우주 속의 대일천도 대월천도 찬란하게 대광을 발산하여 생명의 어둠을 밝게 한다.
선도 악도 십계삼천의 모든 작용이 일체가 되어 완전 회전하여, 행복으로 상락아정의 인생으로 우리들의 생명을 끌어 가는 것이다.
인생에는 당연히 병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병은 묘법의 법리에 의해 「본유의 병」이라고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즉 병에 좌우되어, 인생을 괴로워하고 고민해 가는 그러한 일은 절대로 없다. 삼세영원의 생명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 절대적행복이라는 我 는 엄연히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생활상의 막다른 막힘도 반드시 타개되어 다음의 보다 넓고 넓은 경애로의 비약대가 된다.
♧ 창제의 소리는 시방의 불보살에 통한다
다음에 「뜻을 모르는 경문을 읽고, 제목을 불러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답해 두고자 한다.
물론 뜻을 아는 쪽이 좋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것은 법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며, 그 깊은 뜻의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를 들면 개가 짖고, 새가 지저귄다. 개에는 개의, 새에는 새의 세계의 소리가 있으며, 말과 신호가 있다. 사람이 들어도 전연 모르지만 개끼리, 새끼리는 서로 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근행.창제의 소리는 비록 사람은 의미를 모르더라도, 어본존에게 통하고 삼세시방의 부처. 보살의 세계에는 정확히 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처. 보살의 세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대성인은 근행. 창제에 의하여 우리들은 매일 가만히 앉아서 대우주를 여행하는 그러한 대경애를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제자 단나로 되는 사람은 한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천축의 영산을 보고 본유의 적광토도 주야로 왕복할 것이니 기쁨은 말할 수 없노라」(어서 1343쪽)라고.
어본존을 배견하면 나의 소우주의 문은 그 자리, 그 때에 대우주에로 전개되고, 전우주를 내려다보는 그러한 유유한 대행복감을 맛볼 수가 있다. 대충실감과 대환희, 일체를 손바닥에 넣는 듯한 대확신을 실감할 수 가 있다. 우주에 에워 싸여져 있었던 소우주가 우주를 도리어 에워싸 간다.
또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중략) 실상진여의 허공을 날게 되느니라」(어서 1443쪽) 라고.
또한 「자기자신은 등(藤)과 같지만 법화경의 소나무에 걸려 묘각의 산에 오르리라. 일승의 날개를 의지하고 적광의 하늘에도 날아가리라」(어서1430쪽)라고.
또 대우주로 날아가듯이 반짝이는 은하. 달리는 유성군,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무한한 확대, 깊이를 시시각각으로 맛보고, 음미하며 살아가는 상락의 경애가 된다.
어쨌든, 기필코 소원만족의 인생, 영원한 행복경애를 자연히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 묘법의 공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공덕도 신심 여하에 달려 있다.
대성인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이 대복운을 7대 까지나 되는 선조. 또한 7대 까지나 되는 자손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설하시고 있다. 얼마나 굉장한 대공덕일까.
♧ 신심의 대공덕은 명익에
「마쓰노전답서」에 「성인이 부르시는 제목의 공덕과 우리들이 부르는 제목의 공덕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나이까 라고 운운. 조금도 승열(勝劣)은 있을 수 없도다. 그 까닭은 우자가 가진 금이나 지자(智者)가 가진 금이나 우자가 켜 놓은 불이나 지자가 켜 놓은 불이나 그 차별은 없느니라.」(1381쪽)
--- 성인이 부르시는 제목의 공덕과 우리들 범부가 부르는 제목의 공덕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다.
(대답하여 말하면) 그 공덕에는 승열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자가 가지고 있는 금과, 지자가 가지고 있는 금에 가치의 차이는 없고, 우자가 켠 불과 성인이 켠 불에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어본존의 공덕은, 그 사람의 입장이나 재산 등에는 일체 관계없이 평등하게 나온다. 어떠한 사람도 제목을 부름으로써, 반드시 행복하게 되어 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어본존의 공덕에는 현익과 명익이 있다.
병이라든가, 업무상의 곤란이라든가, 뭔가 문제가 있을 때에 엄연히 수호를 받아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현익이다.
그와 동시에, 마치 바닷물이 밀물이 되듯이 복운을 쌓아, 풍요한 대경애를 점차로 구축해 간다. 그 경애만 구축하게 되면 어떠한 인생의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무너지는 일은 없다. 금세 뿐만 아니라 영원히 행복한 경애로 유락해 갈 수 있다. 이것이 명익이다.
예를 들면 태엽을 완전히 감아둔다면, 언제라도 탄력이 붙어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비축되어 있다. 느슨해져 있으면 유사시에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생명의 태엽을 감는 힘이 신심의 실천이며, 무슨 일에도 대응 할 수 있도록 충분히 힘을 완전하게 비축한 상태가, 명익에 가득 찬 인생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기필코 소원만족의 인생. 영원한 행복경애를 자연히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 묘법의 공덕인 것이다.
대성인도「아무리 법화경을 믿으신다 해도 방법이 있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칠(漆) 천통에 게의 발 하나 넣음과 같도다」(어서 1056쪽) 아무리 법화경을 믿고 있어도 방법이 있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것은 천통의 옻에 게의 다리를 하나 넣어서, 옻을 소용없게 하고 마는 것이다 라는 말씀이시다.
아무리 진지하게, 착실하게 신심을 하고 있는 듯 해도, 방법이 있으면 공덕을 없애고 만다. 그것은 아주 소량의 청산가리 때문에 금방 죽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악의 인을 만드는 것으로서, 십사비방을 드시고 있는데, 그 중에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이 있다.
신심하고 있는 사람을 경시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열심히 이 만큼 신심을 하고 있는데 공덕을 느낄 수 없다라는 경우가 있다. 그 때는 이 네가지의 비방이 있는가 없는가를 자기에게 물어 봐 주시기 바란다.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의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공덕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동지에게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을 명확히 말해 간다는 것은 자유이고,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생각해서 엄하게 말하는 것과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망의 말은 같지가 않다. 그 점을 깊이 깊이 판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본존 슬하에 모여, 광선유포로 전진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불자이며, 묘법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존경하고, 신뢰하고, 격려하면서 이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 주시기 바란다. 그 사람에야말로 어본존의 공덕과 제천의 가호는 더한층 늘어 간다는 점을 확신해 주시기 바란다.
NSA 청년연수회 1990. 2. 20
日蓮대성인의 불법은 생명즉우주, 우주즉생명 인간생명은 하나의 소우주이다 라고 설한다.
근행이란 이 소우주인 우리 자신과 대우주가 어본존을 근본으로 해서, 생생하게 교류해 가는 장대하고도 장엄한 의식이다.
우리 생명이 소우주인 것을 신체의 면에서 말하면,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이 둥근 것에 비기고, 두 눈은 태양과 달에 비긴다.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것은 주야(晝夜)를 나타낸다. 머리털은 빛나는 별에 비긴다. 대머리인 사람은 거의 유성(별똥별)이 되어 버렸다(큰웃음).
눈썹은 북두칠성에 비긴다. 여인이 화장하고 그린 눈썹은 인공위성(큰웃음). 호흡은 바람을 의미하고, 코의 조용한 숨소리는 계곡의 바람, 골짜기의 평온한 바람을 나타낸다. 큰 소리로 고함치는 리더의 숨소리는 태풍일지도 모른다(큰웃음). 모두 피난할 수 밖에 없다(큰웃음). 몸의 마디가 굽은 곳은 다해서 약 삼백육십절. 이것은 1년을 의미한다. 복부측(배부분)은 봄. 여름을, 차고 단단한 등부분은 가을.겨울을 의미한다.
혈관은 작은 하천. 큰 하천에 비긴다. 제방이 끊어져 홍수가 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뇌출혈이다. 뼈는 돌 등에, 피부나 살은 대지에 비기고, 몸의 털은 삼림(森林)이다. 그 밖에 내장에 대해서는 등등. 신체가 하나의 소천지(小天地)인 것을 불교경전에는 상세히 설하고 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있다. 바람이 분다. 별이 반짝인다. 땅에는 바다가 있다. 냇물이 흐른다. 화산이 불을 뿜는다. 또 금, 은, 동 등의 많은 광물, 칼륨, 칼슘, 그 외의 원소가 매장되어 있다. 그들의 활동, 요소가 동등하게 우리 몸에도 포함되어 있다. 우주에 있는 무수한 원자. 양자. 전자. 중성자. 중간자 등의 소립자. 세균 등의 미생물.
또한 중력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 외 모든 법칙, 또한 선악의 작용도 하나의 소우주에 거의 같게 관련되어 있다. 몸의 활동을 봐도 우리들의 생명은 하나의 「대제약공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요한 약을 스스로 만들어 건강을 지키는 힘이 있다. 또 음식물을 섭취해 자신의 영양, 에너지로 해 간다. 또 뇌는 큰 컴퓨터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좀처럼 발휘할 수 없을 뿐이다.
60조나 되는 세포가 정연하게 질서 바르게 운동하여 생의 리듬을 새겨간다. 이것이 인간생명의 이상(理想)이다.
생명즉우주. 이와 같이 그 운행은 절묘하다. 태양의 열량이 조금이라도 변화하면, 지구를 비롯한 혹성은 대변동을 일으킨다. 지구의 자전(自轉)이 일순이라도 멈추면, 아니 지축이 조금 기울기만 해도, 일체의 생물은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다. 그 만큼 미묘하다. 그러면서도 엄연히 대우주의 법이 실재한다. 소우주도 같다.
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법칙을 탐구한 것이 과학이고, 그 성과를 응용해 기계 등을 만든 것이 과학기술이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모든 부분적 「법」 의 근본에 있는 「생명의 대법」의 각지를 「남묘호렌게쿄」로서 인류에 나타내 주신 분이 日蓮대성인이시다. 결코 나중에 누군가가 생각해 낸 것은 아니다. 이 「묘법」은 대우주도, 일체의 소우주도 동일하게 일관하고 있다. 우주와 인간은 「묘법」에 있어서 일체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은 때로는 「눈에 보이는 존재」로 되어 나타난다.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는 하나의 「법」도 우주에 융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수태(受胎)를 연으로 하여 이 세계에 현현해 온다. 또 단적으로 말하면, 배는 보이지 않는 「부력의 법칙」이 보이는 형태로 결정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행기는 「양력의 법칙」, 라디오와 TV는 「전파라고 하는 법칙」등을 각각 형태로서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과 원래 차원은 다르지만 우주와 생명의 근원의 「一法」도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묘법의 공력을 범부도 느낄 수 있도록, 대성인이 자신의 경계로서 도현 하신 것이 어본존이다.
법화경을 비롯한 타경문은 어본존의 설명서로 된다. 도다 선생님은 어본존을 「황송한 일이지만 행복제조기에 비유할 수 있다」라고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셨다. 이 어본존에게 근행. 창제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대우주와 완전히 조화한다. 우주도 생명도 다 같이 남묘호렌게쿄의 당체이다. 어본존도 남묘호렌게쿄의 당체이시다. 그러므로 근행. 창제할 때 어본존을 근본으로 해서 우리 생명과 우주가 정확히 기어를 맞추어 소리를 내며 회전을 시작한다. 소우주의 「일념」은 즉, 대우주의 「삼천여시. 세간」과 일체가 되어 큰 가치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근행은 소우주가 본래 가진 무한한 힘을 끌어내어 회전시키는 실천이다. 숙명이 전환되어 막다른 길이 개척되고 고뇌가 행복으로 바뀐다 라고 하는 「소우주」의 변화, 혁명. 이것은 우리 생명 속의 광선유포의 하나의 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광선유포」는 이 대우주. 지구의 천지도 인류사회도 묘법의 리듬에 따른 「평화」와 「안온」의 조화의 세계로 바꾸어 가는 운동이다.
차도 다른 기계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고 순조롭게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 적당히 운전하고 기름을 치고 정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머리털의 경우도 방치해 두면 비듬투성이가 되어 버린다(웃음). 생명도 근행을 하지 않으면 리듬이 어긋나 녹슬어 버리기는 이와 마찬가지이다.
근행. 창제에 의해 엔진을 걸고 「행복」의 방향으로 「정의」의 방향으로 매일 용감하게 계속 달려간다. 그 반복에 의해 차츰 우주의 「법」과 완전하게 합치한 생명이 된다. 그것이 부처의 생명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영원히 자재(自在)이며 유락(遊樂)의 생명이다. 삼세에 무너지지 않는 금강의 몸으로 된다. 따라서 일생성불을 위해 절대로 퇴전해서는 안 된다 라고 대성인은 엄애로써 말씀해 주시고 있다.
가령 일시적으로 괴롭고 쓸쓸한 날들이 있어도 「번죄즉보리」의 법리로, 큰 「고뇌」는 반드시 큰 환희와 진보와 가치로 바뀌어 간다. 어본존에게는 그 무한한 법력. 불력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 걱정도 없다.
흔히 강성한 신심이라든가 용맹정진, 용기 있는 행동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강한 마음과 용기 있는 실천이 없으면 어떠한 위업도 성취할 수 없는 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대화에서도 명쾌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 용기가 없어 애매하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고 있으면, 상대방의 가슴에 찡하게 가 닿을 리가 없다. 더욱이 상대방의 마음을 파악해, 움직이게 하고 또 감명을 주기 위해서는 강한 일념의 파동이 필요하다.
이것은 연애 때도 같지 않을까?(큰 웃음) 또 취직의 면접시험에서도 자신의 의사나 생각을 명쾌하게 말하지 않으면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결국 「강한 마음」「용기 있는 행동」이 모든 상황을 변화 시키고 행복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힘인 것이다.
♧ 행동이야말로 생명의 개가
비행기가 날아 오르기 위해서는 활주로의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 조주(助走)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도, 예습을 철저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어떠한 일에서도 보다 힘을 발휘하고 보다 성과를 높여가기 위한 「조주」가 있는 것이다. 불법에서는 자행. 화타라고 설한다. 어느 쪽이 빠져도 올바른 수행으로는 되지 않는다.
더욱이 어본존은 「광선유포」를 가르쳐 주신 대성인의 생명의 당체이시다. 그러므로 광포와 인생과 생활을 위한 행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근행. 창제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어본존 과의 진실한 감응은 없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포를 원하는 행동이 있으면 그만큼 생명이 하나의 「조주(助走)」가 되어 근행. 창제때에도 경애의 위대한 도약과 비상을 성취하는 힘이 된다. 또 근행이라는 자행으로 에너지가 광포를 위한 자신의 행동으로 탄력을 붙여가는 것도 당연하다.
요는 근행이라는 행동. 광선유포에 봉사한다라는 행동, 양자가 일체로 되어 묘법의 무한한 힘을, 이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 몸」에 열어갈 수가 있다. 「행체즉신심」이 불법의 세계이다.
즉 행동이 바로 신심이고, 행동 없이 올바른 신앙은 있을 수 없다. 그 행동이란 것은 이 자행. 화타 라고 하는 어서 말씀대로의 궤도인 것이다.
행동이 바로 복덕의 원천이다. 예를 들면 홍교에 있어서도 그 때 상대가 발심해 입신하는가 안하는 가는 소위 상대의 문제이다. 기근의 문제도 있고, 또 상황에 따라 행동의 결과는 여러 가지 이다. 그 결과에 일희일우할 필요는 결코 없다. 우주에서 가장 올바르고 가장 멋진 생명의 법칙을 끝까지 실천한 긍지를 가지고 가슴을 당당히 펴고 전진해 가면 된다.
광포를 위해 철저하게 행동한 사람은 이미 생명의 대승리자인 것이다.
어본존에게는 「약뇌란자 두파칠분(만약 뇌란 하는 사람은 머리가 칠분으로 깨진다)」이라고 쓰여져 있다. 자신의 훌륭한 법칙을 근본적으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 라는 훈계이다. 퇴전이나 비방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여 산산조각이 나게 해 버리는 것이다.
또 「유공양자 복과십호(공양하는 자는 복이 십호 보다 더 하다)」라고도 쓰여져 있다. 어본존에게 창제하고 홍교 하는 자의 공덕은 석존에게 공양하는 복덕 보다 휠씬 크다라는 엄연한 어문(御文)이다.
우주에 있는 일체의 행복이라는 자양을 소우주라고 하는 우리 내면에 흡수해, 최고로 행복한 생명이 되어 간다는 약속이시다. 따라서 광포에 살아가는 불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드시 행복해 진다. 누구보다도 행복해지지 않을 리가 없다. 어본존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대박수)
현당이세의 신심
또 어본존에게는 「위현당이세(현당이세를 위해)」라고도 쓰여져 있다. 현재. 미래를 위한 신앙이다. 불법이다. 어본존을 배알하는 순간 구원원초의 생명이 솟아오른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구원원초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인 것이다. 오늘에서 미래로 이 순간으로부터 영원한 행복으로 항상 출발이고 항상 희망이다. 항상 청춘이고 항상 시작인 것이다. 그것을 확신하여 존귀하고 소중한 인생을 후회 없이 마음도 즐겁게 명랑하게 전진해 주기 바라며 기념인사로 하고 싶다.(대박수)
NSA 각부 합동연수회 1990. 2. 19
출처 : 창가가족
글쓴이 : 청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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