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5. 11:39ㆍ佛法 .SGI
생사일대사혈맥초 강의 제12회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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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생사일대사혈맥초 1338쪽 8행 ~ 12행) 기필코 기필코 강성한 대신력(大信力)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 임종정념(臨終正念)이라고 기념하시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은 이 외에 절대로 구하지 말지니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란 이것이로다. 신심(信心)의 혈맥이 없이는 법화경을 가질지라도 무익하니라. 자세한 것은 또 말씀드리겠소. 공공근언(恐恐謹言). 문영(文永) 9년 임신(壬申) 2월 11일 상문(桑門) 니치렌 화압(花押) 사이렌보 상인답서
【통해】 철저히 조심해서 강성한 대신력을 일으켜 남묘호렌게쿄, 임종정념이라고 기념하세요. 생사일대사의 혈맥을 이 외에서 절대 구하지 마시오.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은 이것을 말합니다. 신심의 혈맥이 없으면 법화경을 수지해도 무익합니다. 상세한 것은 또 말씀드리겠소. 삼가 올림. 문영9년 2월 11일 상문 니치렌 화압 사이렌보 상인답서 미혹과 고뇌에 잠긴 내 몸에 확신과 환희와 희망을 열어라
강 의
묘법의 공력(功力)은 무량합니다. 그러므로 둘도 없는 내 인생에서 대성인이 말씀하신 대로 신심을 관철하면 일생성불이라는 최고 경애를 이룰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이 어서의 마지막 일절에서 생사일대사의 혈맥을 이어받는 ‘올바른 신심의 핵심’을 밝히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최고의 인생을 걷자고 역설하십니다. 오직 창가학회(SGI)만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올바르게 수지(受持)하고 행하여, 대성인 말씀대로 세계에 광선유포하고 대성인에게서 생사일대사혈맥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묘법의 무한한 힘이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는 우리 학회원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에 넘쳐흐릅니다. 묘법의 당체인 내 생명속에서 대환희를 나타내면, 어떤 고뇌라도 지혜로 바꿔 마음껏 가치를 창조하는 힘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의 대지에는 ‘이제는 한계다.’라는 국면을 얼마든지 타개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본래부터 엄연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일지라도 그것을 도약대로 삼아 확고한 행복을 성취하는 ‘변독위약(變毒爲藥)’의 힘을 확신하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묘법은 자신이 본래 지닌 무한한 힘을 끌어내려는 근본 법칙입니다. 그 무한한 힘이 작용하여 불이 나무를 태워 빛으로 바꾸듯이 번뇌를 지혜로 바꿉니다. 그리고 생사(生死)의 고뇌에 찬 자신을, 봄날 햇볕이 빙설을 녹이듯이 약동하는 환희의 경애로 바꿉니다. 불법의 근본 주제는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니치렌 대성인 불법은 현실에서 자신의 생명을 변혁하는 종교입니다. 어디까지나 ‘나’와 ‘당신’을 위한 인간혁명에서 출발합니다. 이 점을 잊으면 니치렌 불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가학회의 실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생사일대사혈맥초〉의 끝부분에 “당신 자신의 위대한 힘을 자각하세요.” “위대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확신하며 제목을 부르세요.” “그것이 진정한 혈맥입니다.” 하고 가르치시며 끝맺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부처가 되는 혈맥이 흐르는 요체로서 ‘신심의 혈맥’을 나타내고 이 어서를 완결하셨습니다.
혈맥을 이어받는 신심의 요체
〈생사일대사혈맥초〉 전체에 일체중생을 성불시키는 불교의 근본정신이 흘러 넘칩니다. 만인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참으로 자비심 넘치는 대성인의 일념이 흐르는 어서입니다. 지난번 강의에서는 생사일대사혈맥을 이어받아 말법에 출현하는 상행보살이 해야 할 실천을 대성인이 하셨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본인묘(本因妙)의 교주(敎主), 니치렌 대성인이 민중을 구하는 대법(大法)을 엄연히 확립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 어서에 결론을 내리면서 말법의 중생이 대성인에게서 성불의 혈맥을 이어받고자 하는 신심의 요체를 다시 제시하십니다. 이것을 ‘강성한 대신력’ ‘임종정념’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그리고 ‘신심의 혈맥’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번과 다음 강의는 이 법리(法理)와 실천을 배견하겠습니다. 먼저 대성인 말씀을 순서에 따라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 ‘기필코 기필코 강성한 대신력을 다하여’라고 한사람 한사람이 혈맥을 이어받는 근본은 ‘강성한 대신력’에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기필코 기필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자기 자세를 바로잡고 언제나 새로운 ‘신(信)’을 일으키는 힘이 바로 ‘강성한 대신력’입니다. 그 신심의 기본 자세로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내용을 나타내신 것이 다음 구절입니다. “남묘호렌게쿄·임종정념이라고 기념하시라.” ‘임종정념’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법련 2007년 2월호) 죽음 앞에서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고 올바른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임종할 때 사마(死魔) 등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묘법을 신수(信受)하던 만족과 안심으로 인생을 총결산하면 영원히 행복 대경애를 확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임종정념의 경지를 획득하고자 날마다 후회 없는 삶의 자세를 관철하는,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 자세가 중요하다고 이미 배웠습니다. 즉 대성인은 각자 임종정념의 경지를 열려면 날마다 깊이 기원하고 후회 없는 신심을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강성한 대신력’을 일으켜 ‘임종정념’을 확신하고 남묘호렌게쿄를 자행화타에 걸쳐 부르는 진심 어린 신심이 아니면 생사일대사의 혈맥을 이어받을 방도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생명 변혁이 혈맥의 근본
이 어서는 어떻게 하면 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결론을 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이 넓힌 본인묘의 불법은 현실의 인간이 성불의 인과(因果)를 성취하고자 하는 교법입니다. 어디까지나 ‘눈앞의 한 사람’이 근본이고 ‘현실의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혈맥의 법리’를 논해도 그것은 무익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니치렌 불법을 실천하는 사람도 “내 생명은 반드시 바뀐다.”고 자각하고 확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사일대사의 혈맥은 이 외에 절대로 구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생사일대사혈맥은 어디까지나 한사람 한사람이 창제를 근본으로 경애를 변혁해서 일생성불을 실현하는 본인묘 신심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생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혁되는지, 신심에 따라 어떤 경애를 득할 수 있는지…. 그것을 대성인은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이란 이것이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강성한 대신력’을 발휘해서 ‘임종정념’으로 기원하고 창제하는 것이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이며 그 경애를 획득하면 불법의 진실한 공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는 확고한 ‘신력(信力)’과 ‘창제’로써, 미혹과 고뇌를 계기로 가치를 창조하고 지혜를 연마하여 안심과 환희의 경애를 확립할 수 있습니다.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의 경지는 ‘즉신성불’이며 ‘변독위약’의 대공덕입니다. 누구나 본인묘 불법인 신심으로써 자기 가슴속에 성불이라는 불멸의 대경애를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의 경애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즉신성불의 경애와 공력(功力)을 표현
먼저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의 법의(法義)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이 두 개의 법리(法理)는 공통적으로 중생의 생명을 변혁하는 작용을 나타냅니다. ‘번뇌즉보리’는 번뇌에 지배당하는 중생의 생명에 성불할 수 있는 깨달음의 지혜〈보리(菩提)〉가 나타납니다. ‘생사즉열반’은 생사의 고뇌에 시달리는 중생의 몸에 부처가 이룬 참된 안락의 경지〈열반〉가 나타납니다. 어서를 보면 이 두 개 법리를 단독으로 논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대체로 ‘번뇌즉보리’와 ‘생사즉열반’을 합쳐서 즉신성불의 경애와 공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대종(相對種)의 인과와 변독위약의 묘법
본래 ‘번뇌’와 ‘보리’는 정반대이므로 글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즉(卽)’으로 결부할 수 없습니다. ‘생사’와 ‘열반’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석존(釋尊)이 ‘번뇌’와 ‘생사’는 동질적이고, 탐진치(貪瞋癡) 등의 번뇌가 생사의 고뇌를 불러오는 인과라고 통찰한 사실은 잘 알려졌습니다. 그런 인과관(因果觀)에서 번뇌를 멸함으로써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소승교(小乘敎)의 수행(修行)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승교의 수행이 생사를 혐오하고 도피하는 자세를 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번뇌를 단절하는 수행은, ‘악(惡)은 악을 만든다.’는 일방적 인과관에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인과관에서 악을 단절한다는 것은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대승교(大乘敎)에서는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라는 말을 설하는데, 실제적인 수행은 역겁수행(歷劫修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끝없는 선행(善行)을 쌓는가, 절대적인 부처의 구제를 기다리는가, 이 두 길 중에서 성불을 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대승교의 수행과 신앙도 생사를 혐오하는 도피 자세에 빠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선(善)’은 선을 만든다.’는 일방적인 인과관에 근본을 두기 때문입니다. 자력(自力)의 보살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끝없는 미래의 성불을 기할 수밖에 없으며, 타력(他力)의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은 아미타미불 등 절대적인 부처의 힘을 빌려 사바세계에서 떨어진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해서 다시 ‘선은 선을 만든다.’는 수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세 인생에서 수행을 성취할 수 있는지는 보증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악은 악을 만든다.’는 인과관을 뒤집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번뇌의 미혹과 생사의 고뇌에 속박된 사람들은 당연히 번뇌와 생사에서 풀려난 진실한 환희를 얻지 못하고, 성불에 대한 확신과 희망도 품지 못합니다. 어서에 이전경의 ‘번뇌즉보리’ 등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을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전(爾前)의 심(心)은 번뇌를 버리고 생사를 염리(厭離)하여 따로 보리열반(菩提涅槃)을 구하였는데 법화경의 의(意)는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이라고 했느니라.”(어서 821쪽) 그러면 번뇌·생사와 보리·열반을 별개로 보지 않는 사고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대성인이 도키조닌에게 주신 〈시문불승의〉에서 범부가 법화경을 수행하는 중요한 부분은 ‘상대종(相對種)’이라는 사고방식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어서 982쪽) ‘상대종’은 결과(성불)와 반대인 것(번뇌 등)이 성불의 원인(종자)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범부가 성불하려면 ‘악은 악을 만든다.’는 인과관도 ‘선은 선을 만든다.’는 인과관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악과 선을 구별하는 사고방식에서는 악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범부는 결국 희망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통상적인 불교가 현실과 동떨어진 체질이 되고, 수행자와 승려 등 일부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에 빠진 까닭은, 선과 악을 별개로 생각해서 탁세(濁世)에 사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대성인이 ‘상대종’을 강조하신 까닭은, 범부가 참된 희망을 품으려면 ‘악이 선을 만든다.’ ‘악이 선으로 전환한다.’는 인과관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통찰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성인은 〈시문불승의〉에서 상대종의 인과를 ‘변독위약’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뛰어난 의사가 독을 약으로 사용하듯이 묘법의 힘으로 범부의 번뇌·업·고의 삼도(三道)를 법신·반야·해탈의 삼덕으로 바꿀 수 있다는 법리입니다. 참으로 ‘번뇌즉보리’이고 ‘생사즉열반’입니다. 또 이 어서에서 ‘삼도즉삼덕(三道卽三德)’을 믿으면 비로소 생사의 고뇌를 극복할 수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법화경을 들은 것이 된다고 하시며 끝맺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을 진심으로 믿으면 고뇌의 근본인 생사를 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법화경의 문법〈聞法: 청문(聽聞)〉이 확실히 성립됩니다. 상대종은 ‘상대종 개회(開會)’라고 하기도 하며, 서로 대립하는 것을 보다 넓은 관점에서 통일하여 더욱 넓은 의미를 명백히 함을 말합니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라고 할 때는 서로 대립하는 ‘번뇌’나 ‘생사’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뇌가 있으므로 어본존에게 진지하게 기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고뇌에 진지하게 대처하려는 일념이 생명에 내재한 힘을 더욱 강하게 용현시킵니다. 이때 고민, 즉 번뇌는 보리로 전환하는 인(因)으로 바뀐 번뇌이고, 실은 그 번뇌 속에 보리가 포함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기를 괴롭히는 번뇌’에서 ‘보리로 전환하는 번뇌’로 번뇌가 질적으로 바뀝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인과구시(因果俱時)의 묘법(妙法)’인 남묘호렌게쿄의 역용(力用)입니다.
‘본연(本然)’의 부처
범부의 번뇌와 생사를 떠나 성불은 없습니다. 성불은 인간에서 격리된 초월적 존재가 아닙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를 일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번뇌와 함께 살면서 번뇌 그대로, 안심에 찬 행복경애를 누리는 생활을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라고 합니다.” “보리다, 깨달음이다 해도 별로 특별하지 않습니다. 번뇌가 있으므로 만족이 있고, 만족이 있으므로 행복을 느낍니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 상태가 좋고 밥이 맛있으며 날마다 하는 일이 기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 이 생활이 보리(菩提)입니다. 별다르지 않습니다. 번뇌즉보리를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도다 선생님은 ‘본연’의 본유무작(本有無作) 경애를 이룬 달인이셨습니다. 외견상으로 보면 범부 모습이었으나 학회 발전을 생각하는 두뇌는 언제나 예민하게 회전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광선유포를 향한 책임감은 그야말로 깨달음을 득한 대경애였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광선유포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번뇌’를 지니고, 책임즉오달(責任卽悟達)의 경애로 끝까지 광선유포를 위해 살겠다는 생사불이(生死不二)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본연’은 그 몸 그대로 항상 생명을 연마한다는 뜻입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인간혁명의 가장 중요한 모습이 즉신성불을 실증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은 오직 ‘계속 투쟁하는 신심’으로 실현할 수 있습니다.
환희 중의 대환희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을 실천하면 환희를 용솟음치게 할 수 있습니다. ‘범부즉극(凡夫卽極)’이고 ‘생사 다함께 부처다.’라는 경지를 열 수 있는, 그 이상의 환희는 없습니다. 우리의 실천을 바탕으로 생각해 봐도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으로 여는 즉신성불의 실천은 언제나 환희에 넘쳐흐릅니다. 예를 들어 고뇌와 정면으로 대결해서 본원적 지혜를 용현할 때, 그때까지 모든 고난을 감싸안는 위대한 생명의 저력이 넘쳐, 어느덧 대환희의 경애에 이릅니다. 본래 부처의 생명은 대환희에 넘치고 궁극의 진리에 도달한 법락(法樂)이 충만하며 불사(不死)의 경지를 얻어 영원히 삶을 영위하는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 가슴속에 환희찬 부처의 생명을 나타내는 일이 불계(佛界) 용현(涌現)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묘법을 수지하고 어떤 어려움에도 대처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면 부처의 생명이 용현합니다. 이 부처의 생명은 어떤 절망에도 지지 않는 희망이 있으면 단절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고뇌와 고난에 지던 내가, 묘법의 힘으로 고뇌와 고난에 맞서는 강한 생명이 나에게 있음을 알고 광선유포의 목적을 이루고자 일어섰을 때, 내 고뇌가 불법(佛法)을 증명하는 변혁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고뇌에 지지 않는 내 모습이 많은 사람을 격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광선유포를 위해 계속해서 투쟁할 마음을 품음으로써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알게 됩니다. 법화경에 ‘심대환희(心大歡喜)’라고 있습니다. 〈어의구전〉에 이 ‘대환희’라는 경문 옆에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라고 주석(註釋)하셨습니다.(어서 788쪽)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의 경지가 바로 대환희입니다. 이어서 〈어의구전〉에 “처음으로 나의 마음이 본래의 부처라고 아는 것을 즉 대환희라고 이름한다. 소위 남묘호렌게쿄는 환희 중의 대환희이니라.”(어서 788쪽)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은 고뇌와 비애도 모두 환희의 생명으로 감싸면서 인생을 강인하게 지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는 톨스토이의 다음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인생의 사업, 인생의 사명은 기쁨이다. 하늘을 향해, 태양을 향해, 별을 향해, 풀을 향해, 나무를 향해, 동물을 향해, 인간을 향해 기뻐함이 좋다. 이 기쁨을 무엇인가가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라. 이 기쁨이 깨지면 그것은 네가 어디선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잘못을 찾아내어 바로잡아야 한다.” 참으로 대문호가 지향한 ‘인생의 사업, 인생의 사명은 기쁨’은 불법의 깊은 철리(哲理)와 통합니다. 우리는 이 환희를 용현하는 방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또 ‘이 기쁨을 깨는 잘못을 찾아 잘못을 바로 잡는 행위’는 우리 불법의 눈으로 보면 번뇌를 전환하고 생사를 전환하는 ‘즉(卽)’의 실천, 결국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그리고 숙명전환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묘법을 수지한 우리 학회원의 경애는 어떤 고뇌와 미혹에 찬 나날일지라도 실은 최고 현자(賢者)의 길입니다. 창가학회의 신심은 일체의 독을 묘법의 대양약으로 ‘변독위약’합니다. “이 독을 생사즉열반·번뇌즉보리로 함을 묘(妙)의 극(極)이라고 말했느니라.”(어서 1006쪽) 묘법은 인생을 승리하기 위한, 정말로 보배로운 법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묘법을 근본으로 삼아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라는 승리의 인생을 걷는 그 영광이 넓혀지는 가운데, 생사일대사의 혈맥이 만인에게 흐르는 니치렌 불법이 승리하는 모습이 있습니다.(계속)
어구해설 변독위약(變毒爲藥): “독을 바꾸어 약으로 한다.”라고 새겨 읽는다. 묘법의 위대한 힘을 표현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00에 “대약사(大藥師)가 능히 독을 가지고 약으로 함과 같다.”고 있으며, 천태대사는 〈법화현의(法華玄義)〉에서 이 글을 인용해서 제경(諸經)에서는 영원히 성불할 수 없다는 이승(二乘)도 법화경의 공력(功力)으로 성불의 기별을 받은 것을 비유했다.
본인묘(本因妙): 구원(久遠)의 부처가 성불한 근본의 인(因), 즉 모든 생명이 궁극적으로 성불하는 인이 묘(妙)라는 것. 또 그 묘법을 설하는 교법(敎法)과 교주(敎主)를 말한다. 니치렌 대성인 불법은 본인묘의 불법이고, 대성인은 본인묘의 교주다.
“법화경은 염념(念念)에 일심삼관(一心三觀)·일념삼천의 이치를 관(觀)한다면 나의 몸이 본각(本覺)의 여래임이 깨달아져서 무명(無明)의 구름은 개고 법성(法性)의 달은 분명하니 망상(妄想)의 꿈은 깨어서 본각의 월륜(月輪)은 상쾌하며 부모 소생의 육신(肉身)·번뇌구박(煩惱具縛)의 몸은 즉 본유상주(本有常住)의 여래로 되느니라. 이를 즉신성불이라고도 번뇌즉보리라고도 생사즉열반이라고도 하는데”(어서 413쪽) “고(故) 성령(聖靈), 최후 임종에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셨으니 일생 내지 무시(無始)의 악업(惡業)이 변하여 부처의 종자(種子)로 되시니,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즉신성불이라고 하는 법문이니라.”(어서 1405쪽)
역겁수행(歷劫修行): 한없이 많은 겁(오랜 세월)을 거쳐 많은 생사를 거듭하며 불도수행을 단계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소승교(小乘敎)에서는 삼기(三祇)·백겁(百劫) 등에 걸친 수행을 설하고, 권대승교(權大乘敎)에서는 무수겁(無數劫) 등에 걸친 수행을 설한다. 절대적인 부처의 구제(救濟): 예를 들어 정토(淨土)신앙에서는 초월적 부처인 아미타불의 자비를 전면적으로 믿고 그 부처가 사는 정토에 태어나서 수행하며 성불을 기한다고 설했다. 자력(自力)의 보살행(菩薩行): 자신의 힘으로 영겁(永劫)에 걸쳐 불도수행을 거듭해서 선근(善根)을 쌓아 많은 단계를 거쳐 성불로 향하는 실천. 타력(他力)의 신앙: 절대적인 부처·보살 등의 자비를 전면적으로 믿고 그에 따른 구제를 기다리는 신앙.
〈시문불승의(始聞佛乘義)〉: 1278년 2월 28일 니치렌 대성인이 도키조닌에게 준 어소식. 법화경 수행에는 취류종(就類種)의 개회(開會)와 상대종(相對種)의 개회(開會)가 있다고 말씀하고 법화경을 신수(信受)함으로써 번뇌·업·고의 삼도(三道)가 즉 법신·반야·해탈의 삼덕(三德)으로 전환하여 즉신성불할 수 있다고 나타내셨다. 번뇌(煩惱)·업(業)·고(苦)의 삼도(三道): 범부가 생명에 갖추어진 미혹인 번뇌 때문에 악업(惡業)을 쌓고 고뇌의 경애에 빠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 법신(法身)·반야(般若)·해탈(解脫)의 삼덕(三德): 부처가 갖추고 있는 세 가지 덕성(德性)으로 법신은 증득(證得)한 진리, 반야는 그 진리를 각지(覺知)하는 지혜, 해탈은 고(苦)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재(自在)의 경지(境地).
“묻되 그와 같소이다. 이를 듣고 무슨 이익이 있느뇨. 답하여 가로되 비로소 법화경을 듣느니라. 묘락(妙樂) 가로되 만약 삼도(三道) 즉 이는 삼덕(三德)이라고 믿으면 역시 능히 이사(二死)의 강(江)을 건너는데 하물며 삼계(三界)에 있어서랴 라고 운운. 말대(末代)의 범부가 이 법문을 들으면 오직 나 일인(一人)만이 성불함이 아니라 부모도 또한 즉신성불하리니.”(어서 9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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