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행복을 여는 불계는 제목을 부를때 용현

2019. 1. 23. 11:45佛法 .SGI




행복을 여는 여섯 가지 열쇠

 

이 절()에서는 ‘상대적 행복’과 ‘절대적 행복’의 행복관을 바탕으로 행복을 여는

열쇠가 되는 구체적인 핵심 여섯 가지를 제시 합니다.

첫째는 ‘충실’, 둘째는 ‘깊은 철학을 지니는 것’, 셋째는 ‘신념을 지니는 것’,

넷째는 ‘명랑하게’ 생기발랄할 것, 다섯째는 ‘용기’, 여섯째는 ‘포용력’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것도 ‘신심’이라는 두 글자에 모두 포함되고, 신심에 꿋꿋이 사는

인생이 바로 ‘최고로 행복한 인생’이라고 강조합니다.

 

- SGI 총회 스피치에서 1996년 6월 23일, 도쿄 -


니치렌대성인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만세(萬歲)

후회하는 일 없을지어다.”(어서 970쪽)

즉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만년 동안 후회하면 안 된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생인가.

일본의 유명한 작가의 말에 “꽃의 생명은 짧고 괴로운 일만 많도다.”

(하야시 후미코) 라고 있습니다. ‘꽃은 일시에 확 피었다가 일시에 확 진다.

괴로움만이 오래 남을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실은 인생도 그럴지 모릅니다.

어느 철학자는 “인생을 마칠 때에 즐거운 일이 더 많았는지 아니면 괴로운 일이

더 많았는지를 따져 그 결과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지위가 있고 재산이 있어도 행복을 잡지 못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결혼을 해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합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는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인이 되어도 병으로 괴로워하다 죽는 사람은 많습니다. 미인으로

태어나서 오히려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것이 인생의

근본 문제이자 영원히 추구해야 할 과제 입니다. 이것을 해결한 것이 불법이고 신심입니다.

결론을 말하면 행복은 ‘자신을 어떻게 확립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으리으리한 저택이나

명예 같은 외면적인 행복은 ‘상대적 행복’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행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환경이라도 자신이 허무함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끼면 불행합니다.

굉장히 훌륭한 집안에서 싸움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유명한

회사에 근무해도 늘 상상에게 혼나고, 일에 지쳐 무미건조하게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행복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치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 그 ‘생명의 실감’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전제로 말씀드리면 행복의 첫째 조건은 ‘충실’입니다.

‘정말로 의욕이 넘친다’ ‘보람차다’ ‘충실하다’. 날마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한가해서 ‘허무함’을 느끼는 사람보다 바빠도 ‘충실함’을 느끼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근행을 합니다.

마지못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웃음), 근행을 하는 자체가 위대합니다. 근행을 말하자면

대우주를 멀리 내다보고, 내려다보는 장엄한 의식입니다. 우주와 하는 대화입니다.

어본존을 향해 근행창제하는 일은 자기 생명의 새벽이고 태양이 떠오른 일이며 이보다 더한

생명의 ‘충실’은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행복해 보여도 아침부터 우울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침에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고(웃음), ‘이런 결혼을 왜 했을까’라며 하루를 울적하게 출발한다,

이래서는 불행합니다. 거기에 ‘충실’은 없습니다.

아침만 보아도 우리 인생은 최고로 ‘충실’하고 ‘가치 있는’인생입니다.

게다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생활에서 승리하며 남는 시간을 ‘법을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근성이 비뚤어진’ 사람이 많은 말법에서(웃음) 고생하며 오로지 상대의 행복을 위해

기원하고, 찾아가고, 대화하고 고심하며 보살핍니다.

틀림없이 보살이고, 이렇게 위대한 ‘철학을 지닌 인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최고의 철학을 실천하고 넓히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만큼 가치 있는 철학을 지녔다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행복의 둘째 조건은

‘깊은 철학’을 지니는 것입니다.


셋째는 ‘신념을 지니는 것’입니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경향입니다.

이대로 가면 인류는 혼란에 빠지고 퇴폐하고 맙니다.  그러한 속에서 여러분은

‘최고선(最高善)’인 불법을 받들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결국 천()도 버리시고 제난(諸難)도 당하여라. 신명(身命)

바칠 뿐이로다.”(어서 232쪽) 즉 “결국은 제천도 우리를 버려라. 제난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치겠다.”

‘일본국 지배자의 지위를 물려주겠다’는 유혹과 ‘부모의 목을 치겠다’는 협박에도

분동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성인 말씀대로 엄연히 ‘신념’을 관철해야 합니다. 그러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그러한 사람이 여러분입니다.


넷째는 ‘명랑하게’ 생기발랄하게 사는 것입니다.

‘늘 불평불만’을 하고 ‘늘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러면 자신도 주위도 불행합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발랄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제 만나도 따분한 얼굴을(웃음) 하고 기쁨도 감격도 없다, 그러한 인생은 어둡습니다.

반대로 아내가 잔소리를 해도 ‘무슨 노랫소리가 들리는구나.’(웃음) 아이의 성적이 나빠도

‘앞으로 점점 좋아질 징조다.’(웃음) 하고 전부 좋은 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인다.

그 강함, 현명함, 밝음이 행복을 낳습니다.

모든 것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해도, 어리석고 마냥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제대로 응시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이면 실제로 그 방향으로 가는 ‘현명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신앙이고 불법입니다. 그런 인격을 형성하면

어떤 재산보다 값진 인생의 보배가 됩니다.


다섯째 조건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용기가 없는 겁쟁이는 인생을 즐기지 못합니다. 그러면 불행합니다.


여섯째 조건은 ‘포용력’입니다.

포용력 있는 사람은 모두에게 안심을 줍니다.

사소한 일로 사람을 꾸짖거나 일일이 떠들어댄다, 그렇게 마음이 좁은 사람은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고 무서워하게 만듭니다.

리더는 사람을 무서워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남을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모두가 안심하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다정함과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바다와 같이 넓디넓은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신도 행복하고 주위도 행복합니다.

이러한 모든 조건도 결국은 ‘신심’의 두 글자에 담겨있습니다. 신심으로

꿋꿋이 사는 인생이 바로 ‘최고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성훈에 “남묘호렌게쿄는 환희 중의 대환희이니라.”(어서 788쪽)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속 깊이 실감하고 상쾌하게 증명하는 여러분이기 바랍니다.

 

마음은 ‘지옥’도 ‘천국’으로 바꾼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그 사람의 생명경애로 결정됩니다.

이 절()에서는 니치렌대성인불법이 자신의 생명경애를 높이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꾸어 현실에서 확고한 인생의 행복과 사회 번영을 이룩해 국토까지

전환할 수 있는 대법임을 밝힙니다.

 

존 밀턴(1608년-1674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고 천국을 지옥으로 바꿀 수 있다.”(<실락원>)

밀턴은 셰익스피어와 함께 칭송받는 17세기 영국의 대시인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지옥’을 ‘천국’으로 또 ‘천국’을 ‘지옥’으로 바꿀 수 있다는

밀턴의 이 말은 불법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법리와도 통하며 밀턴이

깊은 사색 끝에 도달한 한 가지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또 인생을 어떻게 느끼느냐. 그것은 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애로 결정됩니다.

어서에는 “아귀(餓鬼)는 항하(恒河)를 불이라고 보며 사람은 물로 보고

천인(天人)은 감로(甘露)라고 보니 물은 하나이지만 과보(果報)에 따라서

따로따로이니라.”(어서 1025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같은 항하(갠지스강)의 물이라도 아귀도(餓鬼道)의 사람에게는 불로 보이고

인간에게는 물 그리고 천인에게는 감로로 보입니다. 보는 사람의 과보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과보는 과거의 업인(業因)으로 초래된 현재의 생명경애입니다. 그 생명

상태가 외계(外界) 세계를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를 결정합니다.

같은 처지라도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견딜 수 없는 불행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국토에 있어도 멋진 천지(天地)라며 자기

지역을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재 살고 있는 곳을 싫어하고

타토(他土)에만 눈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법은 그러한 자신의 경애를 높이면서 무너지지 않는 행복과 사회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법’입니다. 게다가 국토까지 ‘상적광토(常寂光土)’로 바꿀 수 있는

‘사()의 일념삼천’의 ‘대법’입니다.

더구나 상주(常住)의 대법을 실천하고 얻은 복덕(福德)과 기쁨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수목(樹木)이 해마다 착실하게 나이테를 더하듯 그 복운은 생명에 차곡차곡

쌓여 삼세(三世)까지 향기를 풍깁니다.

반대로 세간(世間)적인 부()와 명성 그리고 쾌락은 일시적으로는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덧없는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념삼천

인도에서 출현한 석가 불법의 정수는 ‘일체중생의 성불(成佛)’의 법리를 설한

‘법화경(法華經)’으로 귀결됩니다.

중국의 천태대인(6세기)는 이 ‘법화경’을 바탕으로 생명의 전체상을

‘일념삼천’의 법문(法門)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일념’은 매 순간의 생명이고 ‘삼천’은 생명을 다른 관점에서 파악한 십계,

십계호구(十界互具), 십여시(十如是), 삼세간(三世間)의 법리를 종합한 것입니다

.(십계X십계X십여시X삼세간=삼천)

십계는 지옥계(地獄界), 아귀계(餓鬼界), 축생계(畜生界), 수라계(修羅界), 인계(人界),

 천계(天界), 성문계(聲聞界), 연각계(緣覺界), 보살계(菩薩戒), 불계(佛界)라는 열 가지 생명경애입니다.

십계가 제각기 또 십계를 갖추고 있는 것을 십계호구라고 합니다.

십여시는 십계 생명이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는 상(), 성(), 체(), 력(), 작(),

인(), 연(), 과(), 보(),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라는 열 가지 측면을 말합니다.

삼세간은 오음세간(五陰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을 말하며,

 십계의 생명이 구체적으로 존재하거나 활약하는 환경 세계를 밝힌 것입니다.


일념삼천’의 법문은 ‘일념’ 즉 매 순간의 생명에 ‘삼천’ 즉 전 우주의 모든 현상과

작용이 갖추어진다는 생명과 우주의 전체상을 제시했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석존의 ‘법화경’과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의 법문을 바탕으로 몸소

깨달은 생명과 우주의 궁극적인 대법을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으로 도현해 모든

사람이 생명변혁을 할 수 있는 실천적인 불법을 확립했습니다.

대성인불법을 실천하는 일은 자기 혼자만의 생명변혁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환경,

더 나아가 전 인류의 변혁도 가능케 합니다.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철저하게 현실의 생명과 세계를 변혁하려고 노력하기에

특히 대성인불법을 ‘사의 일념삼천’이라고 합니다.


불계는 고뇌에 찬 현실을 비추는 태양

 

이 절에서는 ‘불법의 생명론’의 기본인 십계와 십계호구를 간결하게 설명하고

니치렌대성인불법이 불계라는 가장 존귀한 생명을 모든 사람이 나타낼 수 있도록

어본존을 믿고 신심을 수행하는 현실적인 방법을 확립했다고 밝힙니다.

 

매 순간 흘러가는 생명에는 크게 열 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불법은 이것을 ‘십계’로

파악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생명에는 ‘육도(六道)’ 즉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수라계’ ‘인계’ ‘천계’라는 경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성(四聖)’ 즉 ‘성문’

‘연각’ ‘보살’ ‘불’이라는 더 고차원의 경애가 있습니다. 생명의 실상(實相)은 엄연히

이 범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십계의 생명 중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어느 한 가지 생명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다음 순간에는 십계 중 또 다른 한 가지 생명을 현현(顯現)합니다. 불법의 직관지(直觀知)

이 생명의 역동성을 절묘하게 파악한 법리가 ‘십계호구’입니다.

<관심본존초>에는 인계소구(人界所具)의 구계(九界)의 모습이 참으로 간결하고

명료하게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자주 타면(他面)을 보건대, 어느 때는 기뻐하고 어느 때는 노()하며 어느 때는

평온하고 어느 때는 탐()을 나타내며, 어느 때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어느 때는

첨곡(諂曲)이니라. 노함은 지옥, 탐함은 아귀, 어리석음은 축생, 첨곡함은 수라,

기뻐함은 천, 평온함은 인()이니라.”(어서 24I쪽)

이러한 것들이 각 각 현현하거나 명복(冥福)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고 또 자주 느끼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불법을 탐구하는 입장에서 존엄하고 무한한 힘을 지닌 ‘불계’라는

생명을 어떻게 현현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본디 이 ‘불계’를 용현(涌現)하려면

불도수행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의 위대한 불법은 이 일점에 응결되어, 올바른 ‘본존’을 확립해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신심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아직도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유전(流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지’는 저급한 것에 구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어떠한 시대가 되어도 이 ‘포박’을 끊고 인간 자신의 상승을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과 사회가 근본적으로 소생할 길은 없습니다.

불법은 이 수렁 같은 사회에서 그래도 ‘불계’라는 인간 생명의 가장 존귀한 ‘존엄성’이라는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육도에 번롱(翻弄)되는 우리의 일념이 올바른 본존에게 나무(南無)하고 경지명합(境地冥合)하면

‘불계’라는 무한한 생명력이 발동합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불계’는 다른 구계(九界)처럼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구계를 무한한 가치의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본원적인 생명의 작용입니다.

날씨가 계속 흐려도 비가 와도 제트기가 고도 1만미터에 도달하면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안정된 비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현실 생활이 아무리 어렵고 고난이 끊이지 않아도

이 흉중의 태양을 한껏 빛낼 수 있다면 유유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비유하면

이 태양은 ‘불계’라 할 수 있겠지요.

한 가지 차원에서 <어의구전>에는 “보살이란 불과(佛果)를 득하는 하지(下地)이니라

.”(어서 738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법을 위해, 사람을 위해, 사회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그 보살이라는 행동의 토대가 없이는 불과(佛果)를 얻을 수 없습니다.

관념으로는 불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불교 서적을 만권(萬卷) 읽어도 얻을 수 없습니다.

불과를 얻었다 해도 모습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육도구계의 현실사회에서 그 모습

그대로 꿋꿋이 살아갑니다. 신비로운 깨달음이나 부처 같은 것은 절대 진실한 불법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낮은 경애에서 더 높은 경애로, 협소한 경애에서 무한히 넓은 경애로 나아가고

넓히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가장 존귀한 최고의 경애가 ‘불계’입니다.


생명의 기저부를 ‘불계’로

 

이 절에서는 십계호구의 법리를 바탕으로 생명의 기저부라는 사고방식을 밝힙니다.

생명에는 저마다 과거의 행위가 쌓여 만들어진 기저부가 되는 경애가 있습니다.

 ‘성불’은 이 기저부를 ‘불계’로 변혁하는 일입니다. 기저부를 불계로 변혁할 수 있어도

현실에서 구계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어떠한 고뇌가 닥쳐도 생명 근저에서

 불계의 자비와 희망 그리고 환희가 넘쳐 나게 됩니다. 니치렌대성인이 <관심본존초>에서

 법화경의 “내가 본래 보살도(菩薩道)를 행하여 성취(成就)한 바의 수명(壽命)

지금도 아직 다하지 않았다.” 등의 글월을 인용하며 “불계소구(佛界所具)의 구계이니라

.”(어서 240쪽)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의 실천적인 모습은 불계를 기저부로

한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십계호구의 당체라는 관점에서 생명의 ‘기저부’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같은 인간이라도 지옥계를 기조(基調)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살계를

기조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저부’는 말하자면 생명의 ‘버릇’입니다. 지금까지 쌓은 업인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 나름의 ‘버릇’이 있습니다.

용수철이 늘어났다가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듯 자신의 기저부로 되돌아갑니다.

기저부가 지옥계라도 24시간 계속 지옥계는 아닙니다. 인계가 되기도 하고 수라계가

되기도 합니다. 수라계인 ‘승타(勝他)의 염()’이 기저부인 사람이라도 때로는

보살계나 천계가 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기저부가 수라계인 사람은 일시적으로 보살계를 나타내더라도 다시 곧장

수라계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이 기저부를 바꾸는 일이 인간혁명이자 경애혁명입니다.

그 사람의 ‘오저(奧底)의 일념’을 바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생명의 기저부가

어디에 있는가로 결정됩니다. 비유하면 기저부가 아귀계인 사람은 아귀계라는

배에 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귀의 궤도를 나아가면서 그 배 위에서 어떤 때는 웃고 어떤 때는 괴로워합니다.

여러 변화가 있지만 배는 엄연히 아귀계의 궤도를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풍경도 아귀계의 색으로 물들어 있으며 죽은 뒤에도 우주의 아귀계 쪽으로 합치하고 말 것입니다.

이 기저부를 불계로 변혁하는 것이 성불입니다. 물론 기저부가 불계가 되어도 구계가

있기 때문에 고뇌나 괴로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근저가 ‘희망’이 됩니다.

‘안심’과 ‘환희’의 리듬이 됩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병에 걸려도 ‘이 정도쯤, 괜찮다 어본존에게 기원하면 낫는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경애가 바로 불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불계 속에

또 구계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화가 나거나 곤란해 하기도 합니다. 안심하기에

화를 내지 않겠다거나 어떻게든 참아야 한다 가 아니라 역시 걱정되는 일은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근저에서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부처입니다.”

“살아 있는 자체가 더없이 즐거운 것이 부처가 아닐까요. 이것이 대성인의 경애를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수(斬首)한다는데도 태연하셨습니다. 우리라면 정말

당황했을 것입니다. 혹한의 사도로 유배되서도 제자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개목초>와 <관심본존초>를 쓰셨을 정도니 말입니다. 안심하지 못하면 그러한

대단한 논문은 쓸 수 없습니다.”

근행창제는 부처의 생명과 하나가 되는 장엄한 의식입니다. 근행창제라는 불계를

용현시키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 우리 생명의 불계가 흔들리지 않는

대지처럼 단단히 다져집니다.

그 대지 위에서 매 순간 구계의 드라마를 자유자재로 연기합니다. 또 사회의

기저를 불계로 바꾸는 일이 광선유포의 싸움입니다. 그 근본은 ‘동지를 늘리는’ 일입니다.

어쨌든 이 신심을 근저로 하면 무엇 하나 헛됨이 없습니다.

기저가 불계인 인생은 과거와 현재에 겪은 구계의 생활을 모두 살리면서 희망찬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구계의 노고가 불계를 강하게 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번뇌즉보리로 괴로움(번뇌=구계)이 모두 행복(보리=불계)의 장작이 됩니다. 몸이 섭취한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흡수해 에너지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 속 구계의 고뇌와 무관한 부처는 참된 부처가 아닙니다. 십계호구의 부처가 아닙니다.

그것이 법화경 수량품(壽量品)의 마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계는 ‘일부러 지옥의 괴로움을 떠안는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계소구의 지옥계, 그것은 동고(同苦)이며 일부러 떠안는 고뇌이자 책임감과 자비의 발로(發露)입니다.

‘홍교를 위해, 동지를 위해 굳이 고뇌한다.’ 그 고뇌가 불계를 강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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