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류의 신심

2018. 2. 7. 10:54佛法 .SGI




근행창제는

    소우주인 자기 자신이 대우주의 근본 리듬에 합치시켜 가는 숭고한 의식입니다.


- 본존님에게 합장하고 근행창제 한다. 그 소리는 모든 부처와 보살 그리고 제천선신에게 전해진다.

-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우주의 부처와 보살, 제천선신에게 둘러싸여 수호받고, 불보살과 제천은 내편이 된다.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게 된다.


- 창제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것은 모든 부처와 보살, 제천이 아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구하는 힘이 있습니다. 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 세종류의 신심-

 

1. 결의 목표를 명확히 세우고 바꾸자! 변하자! 이렇게 하자!’ 라고 정하고 투쟁하는 사람을 전진(前進)의 신심

2. 타성과 의무로 분투하는 사람, 막연하게 할 수 없이 하는 사람, 직책이 주어져 있으니 안하면 겁이 나는 사람, 이런사람은 어중간한 신심

3. 불신과 푸념으로 분투하는 사람, 활동하고 푸념하고, 활동하고 원망하는 사람, 이런분을 후진(後進)의 신심


그러면 어떻게 하는 신심이 가장 좋을까요? 1번과 같은 전진의 신심으로, 과거의 것은 후회하고 책임을 전가 시키지 말 것, 앞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강한 일념으로 기원할 것, 후진하는 것은 사고의 근원, 뒤돌아 보았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서로간 원질만 됩니다. 뒤돌아 보았자 바보스럽기만 합니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 갑시다. 강하게 나아 갑시다.

 

선생님께서는 터치의 차이라고 하였습니다. 자동(오토)인 차의 전진과 후진기아는 2-3센티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 변하기 위해 공덕을 내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연속으로 변혁되어 갑니다. 투쟁을 위한 투쟁은 금물입니다.

- 할 수 없이 투쟁하자는 안됩니다. 손해만 보게 됩니다. 백만번 제목을 올려도 불신이면 공덕은 제로가 됩니다. 원질과 푸념은 공덕을 지운다 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기원하지 않고 푸념하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 공덕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원질과 푸념을 금해야 합니다.


 ○ 상대의 성장을 기원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좋게 열립니다.

- 성장을 기원해 주면 상대는 변하지 않더라도 본인은 좋게 열립니다

- 형제가 싸우는것도 경애가 비슷하니까 싸우는 것입니다. 10세의 형과는 싸움이 될 수 없습니다. 부부의 경우도 같습니다.

- 감정으로 부딪치니까 원질이 됩니다.


 ○ 원질하지 말고 상대를 기원해야만 자기가 좋게 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 부인부는 장년부가 술, 근행, 활동문제 등으로 원질을 종종합니다. 그렇지만 장년부는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때 장년부를 원질하는 것을 바른원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질하는 쪽의 부인부의 공덕도 소멸되어 갑니다.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부인부입니다. 그래서 원질을 하면 안됩니다.

 

- 수도꼭지에 넘치는 물을 구멍이 있는 물통에 담으면 서서히 전부 새 버립니다. 부인부는 이것과 닮았습니다. 원질의 구멍, 푸념의 구멍, 질투의 구멍이 열려 있기에 공덕이 새 버립니다.


푸념, 잔소리, 원질, 이 세가지를 추방하는 것이 삼약추방 이라고 합니다.

그후에 공덕을 모으는 것은 목표를 정하고, 기원하고, 움직일 때 공덕을 모을 수 있습니다. 공덕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차이는 모두가 근행, 창제하고 있으나 일념이 어본님께 향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차이입니다.


- 기원이라고 함은 절대 신심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강한 결의입니다. 구체적으로 목표를 담아서 기원하세요. 기원하니까 이루어 집니다.

 

- 기원을 담지 않는 제목, 목표가 정해져 있지 않는 제목, 제목을 위한 제목, 어떻게 해야지 하며 방법론을 생각하며 하는제목, 안될거야 하는 불신의 제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일념(一念)이 어본존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원이 담긴 제목이 아니기 때문에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 자발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제목을 불렀을 때 경애는 꼭 열립니다. 의무적, 형식적 근행창제 이것은 타성에 흐르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전을 부르고 있습니다


 ○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신앙이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솔직히 쏟아붇는 것을 기원이라고 합니다. 될까 안될까가 아니라 이렇게 되고 싶다! 라고 기원하면 필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카와이 지도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