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3. 11:37ㆍ佛法 .SGI
전중경수(轉重輕受) - 무거운 숙업을 가볍게 전환
‘난(難)을 이겨 내는 신심’이 중요
인간은 누구 한 사람도 완전히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격이나 체격이라 해도 천차만별입니다.
또한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등 갖가지 개인차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러한 태어날 때부터의 갖가지 차별은 현재의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또 같은 노력을 해도 사람에 따라 운이 좋고 나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생명의 경향성을 사람들은 ‘숙명(宿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차이를 알고 갖가지 괴로움을 느낄 때마다 사람들은 막연하나마 ‘운명’이라든가 ‘숙명’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실한 종교는 이 ‘숙명’의 문제에 해답을 주고 고뇌나 나쁜 숙명에 도전하여 행복으로 전환하는 용기와 힘과 지혜의 개발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면 불법에서는 ‘숙명’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답을 하고 있을까요.
이것을 생각하는 데에는 먼저 불법의 생명관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법에서는 생명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연속되는 존재라고 설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관’에 입각해야만 ‘숙명’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숙명’을 결정짓는 것은 자기 자신
니치렌 대성인은 <개목초(開目抄)>라는 상하 2권으로 된 대논문을 저작하였습니만, 그 중에서 이 ‘숙명’의 문제에 대해 심지관경의 글을 인용하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인(因)을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과(果)를 보라, 미래의 과를 알려고 하면 그 현재의 인을 보라」(어서 231쪽)
즉 ‘숙명’이라 해도 결코 부처라든가 신(神) 등 자기 이외의 ‘뭔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디까지나 ‘숙명’의 결정자는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과거로부터 쌓아올린 일체의 행동이 원인으로 되어 나타난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동시에 현재를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미래의 인생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숙명(宿命)’을 형성하는 요소를 불법에서는 ‘숙업(宿業)’이라고 설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같은 행동을 몇 년에 걸쳐 되풀이하는 사이에 언젠가 그것이 습성으로 되어 무의식 중에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숙업’도 그와 같이 구원을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쌓아올린 행동에 의해 형성된 생명의 버릇이며 습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구좌(口座)’를 흑자로
또 다른 예로 설명한다면 ‘숙명’=‘숙업’이란 우리들의 일체 행동이 모조리 기장(記帳)된 은행구좌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좌’의 차액잔고가 적자였다든가 흑자였다든가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 생명의 ‘구좌’가 대단한 적자로 되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해집니다. 말하자면 이 ‘적자 해소’에 대한 유력한 방법을 가르친 것이 ‘전중경수(轉重輕受)’라는 불법의 원리인 것입니다.
‘무거운 것을 전환하여 가볍게 받는다’고 읽는 이 말은 열반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것을 인용하시어 니치렌 대성인은 <전중경수법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선업(先業)이 무거워서 금생(今生)에 다하지 않아 미래에 지옥의 고(苦)를 받게 될 것을 금생에 이같은 중고(重苦)를 만나면 지옥의 괴로움은 금방 사라지고」(어서 1000쪽)
중죄(重罪)를 소멸시키는 힘을 개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 ‘전중경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도어서>에는 반니원경의 글을 인용하시어 「종종(種種)의 인간의 고보(苦報)를 현세에 가볍게 받음은 이는 호법(護法)의 공덕력에 의하기 때문이니라」(어서 959쪽)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호법의 공덕력’이란 본존님을 믿고 근행·창제에 면려하며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활동에 면려함으로써 얻게 되는 대공덕을 말합니다.
미래 영원히 고뇌의 과보를 받지 않으면 안 될 무거운 생명의 죄가 있어도 현재에 본존님을 믿고 불도수행에 면려한다면 가볍게 받고 소멸시킬 수 있다 ― . ‘숙명전환’의 대공덕을 여기서 밝히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 의하여 ‘전중경수’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南無妙法蓮華經야말로 ‘숙업’을 형성하고 있는 생명의 차원보다도 더 깊은 곳을 흐르고 있는 우주·생명의 근원을 꿰뚫고 있는 청정한 ‘일법(一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본원(本源)에서 분출하는 흐름을 자신의 생명에 끄집어 내었을 때, 그 때까지의 ‘숙업’에 의해 물들어져 있는 생명의 방향성이 근저로부터 타개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도전하여 ‘인간혁명’
그러나 ‘숙명전환’에는 당연히 고생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생명 자체의 더러움’인 ‘나쁜 숙업’을 전환하는 데는 소멸해야 할 그 ‘생명의 흠’을 나타내어 그것을 제거한다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난’이란 그 ‘흠’ ‘더러움’이 나타나서 소멸하려고 세차게 솟아오르는 것이며, 이 ‘숙명전환’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묘법의 본존님 이외에 없습니다.
결국 ‘난을 이겨 내는 신심’을 일관해야 참된 행복과 인간적인 성장을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난(難)이 옴을 가지고 안락(安樂)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어서 750쪽)
우리들은 난을 만났을 때야말로 ‘숙명전환할 절호의 찬스!’라고 확신하여 ‘전중경수’의 원리를 몸으로써 증명해 갑시다. 거기에 ‘인간혁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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