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보살의 실천과 인간주의

2009. 11. 6. 16:40佛法 .SGI

 

불경보살의 실천과 인간주의
우주적 휴머니즘의 시대로


“혼자 무엇을 한들 큰 기구(機構)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현대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이처럼 무력감이라고 이케다(池田) SGI회장은 지적했다.


그리고 “무력감의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법화경의 철리다.

현대인을 ‘마음이 변하면 일체가 변한다’는 우주적 진리에 눈뜨게 하는 것이 법화경이다.


이것을 ‘우주적 인간주의’ ‘우주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면 어떨지”라고 말했다.


‘우주적 휴머니즘’.


장대하고 따뜻한 멋진 소리를 느낀다.

21세기와 법화경의 세계를 잇는 키워드로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우주적 휴머니즘’을 우리들이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내면 좋겠는가.


여기서는 법화경에 설해져 있는 ‘불경보살(不輕菩薩)’의 실천을 통해 생각해 본다.

 

수행하는 사람의 간심

 

불경보살은 물리적인 폭력, 언론 폭력의 폭풍에 견디면서

만인에게 존극(尊極)의 생명, 즉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예배하던 구도자다.


상불경(常不輕)이란 ‘언제나 사람을 가벼이 하지 않는다’는 뜻.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언제나(사람들에게)가벼이 다루어졌다’는

수동적으로 되었던 것을 구마라습은 원문을 넘어선 능동적 보살로 번역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일대(一代)의 간심(肝心)은 법화경.

법화경의 수행의 간심은 불경품이니라”(어서 1174쪽)라고 말씀하시고

불경보살의 행동을 불도수행의 모범으로 할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행동이었던가.


상불경은 앉아서 경전독송에 마음을 몽땅 빼앗기고 마는 수행자는 아니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향해 예배했다.


어쩌다 눈에 띤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도 일부러 찾아가서 예배했다.


“나는 깊이 당신을 공경합니다. 감히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모두 보살의 도(道)를 행(行)해서 반드시 부처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상만(上慢)의 사중(四衆, 출가<出家>, 재가<在家>의 남녀)은

증오하는 마음을 일으켜 상불경보살에게 욕을 퍼부었다.


“어디서 왔느냐. 이 무지한 중놈! 그따위 엉터리 예언 믿지 않는다!”


그래도 불경은 화를 내지 않고 예배를 계속했다.

어떤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막대기나 나뭇가지로 때리려고 했다.

그럴 때는 재빨리 먼 곳으로 피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당신들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반드시 부처로 될테니까요!”


‘초수희(初隨喜)’.(부처의 설법<說法>을 듣고 환희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


대성인도 천태대사(天台大師)도 불경보살을 이렇게 불렀다.


결코 외곬으로 생각하고 번민하는 고행자는 아니었다.

사람을 공경하며 밝은 기쁨에 넘쳐 있었다.

 

자타불이의 예배행에 도전

 

일반적으로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상대방에게서 원망을 받는다면

똑같이 원망하거나 무기력에 빠져 버리든가 할 것이다.


그런데 불경보살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실컷 욕을 먹으면서도

진에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예배(禮拜)이니라”(어서 769쪽)라고

대성인은 그 원리를 단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불경보살과 사중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던 것일까.


그것은 ‘불성’과 ‘불성’이다.


“불경보살이 사중을 예배하면 상만의 사중소구(四衆所具)의 불성 또한 불경보살을 예배하느니라. 거울을 보고 예배할 때 떠오른 그림자 또한 나를 예배하느니라.”(어서 769쪽)


불경보살이 사중을 예배하면 상만의 사중 불성도 또 동시에 불경보살을 예배한다.


이것은 마치 거울을 향해 예배할 때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도 자기를 예배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불경보살이 사중의 불성을 예배하면 사중의 불성도 불경보살을 예배한다.
불경보살의 불성을 ‘자(自)’로 하고 사중의 불성을 ‘타(他)’로 할 때,

양자(兩者)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것이 ‘자타불이’의 예배이다.


바로 불경보살의 거동은 자타가 함께 불성을 빛나게 하기 위한 인간관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사중은 자기의 불성을 예배한 것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한다.


한차례 눈뜬 불성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동시에 불성과 대극(對極)의 생명인 제육천의 마왕이 그것을 눌러 버리려 한다.


그 마왕의 작용이 노하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되고 박해하려는 행위로 되어 사중의 몸에 나타났다.


“사중(四衆)이란 일본국중의 일체중생이고.”(어서 765쪽)


인간존엄의 철리를 실천하는 창가학회를 파괴하려는 것은 이 제육천의 마왕의 작용 바로 그것이다.


“사중의 속에서 법을 설함에 있어 마음에 두려워할 바 없을지니라.

즉 두려움 같은 것은 없어야 한다.”


불경보살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법을 이야기한 것처럼

정의의 언론 싸움은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

 

부처의 종자는 법화경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다.


“동물로서 인간은 폭력적이지만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은 비폭력적이다.

한차례 내적인 신적정신에 눈뜨면, 인간은 폭력적인 채로는 있을 수 없다.

아힘사(비폭력)로 향하는가, 파멸로 가는가 둘 중 하나다.”


불법과 통하는 예리한 통찰이다.


그러나 비폭력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좋을 지도 모르겠다.


파멸로 달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인간주의’는 그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


대성인은 “선악불이(善惡不二), 사정일여(邪正一如)”(어서 768쪽)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불경(不輕)은 선인(善人)·상만(上慢)은 악인(惡人)이라고

선악을 세우는 것은 무명(無明)이니라.”(어서 768쪽)


불경(不輕)은 선인, 상만의 사중은 악인이라고 선악의 차별을 세우는 것은 미혹(迷惑)이다.


선과 악, 사와 정을 갈라 세우고 이원적으로 보는 것은 미혹에 빠져서 깨닫지 못하는 일이다.

선인도 악인도 함께 묘법의 당체이고 모두를 구제하는 것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그렇기에 대성인은 외쳤다.


“어떻게 하든 법화경을 굳이 설해 듣게할지어다”

“뭐라고 해도 부처의 종자(種子)는 법화경 이외에는 없느니라”(어서 552쪽)라고.


여기에 대우주 근본법인 묘법의 위대함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우주적 휴머니즘’의 강함, 광대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법의 불경보살

 

대성인은 단언(斷言)하셨다.

 

“결국 지금 니치렌(日蓮)등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행자(行者)는 말법의 불경보살이니라.”(어서 765쪽)


묘법을 봉창하는 소리가 퍼지면, 불경보살의 세계가 넓혀진다.


전인류 생명 오저에 이 묘법 자애(慈愛)의 종자를 각인하는 정신의 투쟁.

이것이 SGI의 운동이다. 21세기를 표방하고 현대인의 무력감을 타파하는 ‘우주적 휴머니즘’.


그 조류는 ‘불경(不輕)의 정신’ ‘불경(不輕)의 행동’을

잇는 SGI 동지들에 의해 도도히 세계로 흐를 것이다.


 

| 화광신문 : 04/06/11 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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