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5. 11:24ㆍ佛法 .SGI
생사일대사혈맥초 강의 제1회 생사일대사의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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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투쟁으로 민중에게 진실한 행복을
‘생사(生死)’란 인간에게는 가장 불가사의한 테마이고, 종교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왜 태어나는가. 우연한 ‘삶’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면 어떤 목적이 부여됐는가. 또 ‘죽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많은 현대인이 막연히 생각하고 있듯이 무의미한 허무(虛無)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고대부터 내려 온 동서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같이 ‘빛나는 불멸의 영혼’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혹은 석존(釋尊)이 설했듯이 그 어느 것도 아닌지.①
단견(斷見)·상견(常見)을 초월한 불법(佛法)의 지혜
〈생사일대사혈맥초〉는 이 ‘생사’에 관한 ‘근본적인 중대사’를 가르쳐 주신 어서입니다. 그것은 또 ‘불법의 진수’이고 ‘종교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일대사’라는 말은 그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에서는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근본 목적을 ②‘일대사인연’이라고 설합니다. 그것은 일체중생에게 불지견(佛知見)을 열게 해서 성불시키는 것입니다. 대성인이 이 어서에서 가르치는 생사에 관한 근본적인 중대사는, 만인성불이라는 법화경의 이념에 깊이 통하고 있습니다. 석존이 깨달은 것 중의 하나인 ③‘연기(緣起)’사상에서는 ‘노고(老苦)나 사고(死苦)’, 즉 ‘늙음’이나 ‘죽음’의 근본 원인으로 ‘무명(無明)’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명’을 소멸시키면 ‘늙음’이나 ‘죽음’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석존이 깨달은 지혜는 죽음을 둘러싼 미혹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였습니다. 석존은 이 지혜를 근본으로 생사에 관한 잘못된 두 가지 생각을 부정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절대로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가지 생각 중 하나는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는 ‘단견’입니다. 또 하나는 죽어도 불멸의 영혼이 이어진다는 ‘상견’입니다. 이 단견과 상견은 ‘태어난 후의 나’를 전제로 한 생사관, 즉 지금 살고 있는 나의 생사만 보는 사고방식인데, 생과 사를 대립하는 것으로 포착하는 데 그칩니다. 생사를 있는 그대로 본 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은 누구나 이 두 가지 생각을 어떤 형태로든 품고 있을 것입니다. ‘단견’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초래하고, ‘상견’은 내 몸을 아끼는 삶의 자세의 결론입니다. 니치렌 대성인도 〈사도어서〉에서 단견과 상견에 해당하는 사고방식은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지혜가 아니라고 밝히시고 있습니다. 즉 “세간에서 사람이 무서워하는 것은 화염(火炎) 속과 도검(刀劍)의 섬광(閃光)과 자신의 죽음이니라. 우마(牛馬)조차 몸을 아끼는데 하물며 인신(人身)에 있어서랴. 나인(癩人: 나병〈문둥병〉에 걸린 사람)도 또한 명을 아끼는데 하물며 건장한 사람에 있어서랴”(어서 956쪽)고 하시며, 공연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 집착하는 ‘세간의 삶의 자세’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불법의 지혜’를 부처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가 설하여 가로되 ‘칠보(七寶)로써 ④삼천대천세계에 꽉 차게 깔지라도 손의 새끼 손가락을 가지고 불경(佛經)에 공양하느니만 못하니라’ 취의(取意). ⑤설산동자가 몸을 던지고 ⑥요법범지가 몸의 가죽을 벗김은 신명보다 더 아까운 것이 없으므로 이것을 보시로 하여 불법을 배우면 반드시 부처가 된다.” (어서 956쪽) 여기서 인용하신 부처의 말씀은 법화경 약왕품 경문⑦의 취의(趣意: 근본뜻)이며, 최고의 공양은 사람들이 아끼는 신명을 불법을 위해 바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것을 받아들여 설산동자와 요법범지와 같이 불법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부처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고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의 자세로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이 어서에서 물고기나 새들이 몸을 아끼는 나머지, 오히려 미끼에 속고 올가미에 걸려 목숨을 잃는 모습을 통해 단견·상견으로 이어지는 어리석은 삶의 자세를 밝히셨습니다.⑧ 〈사도어서〉에서는 불법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는 ‘삶의 자세’와 ‘행동’으로써 단견·상견을 초월하는 부처의 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이 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태어난 후의 나’를 전제로 하는 생사의 사고방식은, ‘사후의 나는 없어지는가 아니면 이어지는가’ 라는 ‘의론(議論)’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면서 죽음이나 죽은 후를 경험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의론’해도 최고의 지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라는 단견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묶인 불안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자기 영혼은 불멸이라는 상견은 때때로 ‘지금의 내가 그대로 불멸이고 싶다’라는 안이한 욕망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높이는 지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집착을 더하고 미혹을 깊이 하는 것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물론 세계의 많은 종교와 사상은 지금의 나를 초월하는 무언가 정신적인 것의 불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상은 죽음에 대해 무언가 안심을 주는 효과는 있어도 삶의 자세를 높이는 최고의 지혜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도리어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집착에 대한 미혹과 노고(勞苦)·사고(死苦)에 속박된 삶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석존은 여래(如來)의 생명이 사후에 이어지는가, 이어지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⑨ 어느 답변이든 상대방을 높이기 위한 가르침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죽음을 둘러싼 미혹과 괴로움을 깊게 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사도어서〉에서 불법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는 ‘삶의 자세’를 탄압을 받고 있는 문하(門下)들에게 밝히셨습니다. 즉 ‘나의 신명을 아끼지 않는다’라는 각오로 사는 자세를 가르치시고, ‘정법(正法)을 아낀다’라는 확고한 삶의 자세에 대한 근본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문하들을 ‘죽음을 둘러싼 고뇌의 근본에 있는 편협한 자기 집착’을 타파하고 ‘죽음을 둘러싼 고뇌에서 실질적으로 해방’시키려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의 괴로움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해방은 관념상으로 되지 않습니다. 생과 사가 우주 자체의 영원하고 위대한 리듬이며, 그 리듬에 사는 위대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나의 생명을 지탱하는 근본적 약동으로 실감할 수 있을 때 죽음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 해방의 길이 바로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입니다. 그리고 그 근본의 생명관을 설하는 것이 〈생사일대사혈맥초〉입니다.
(중략)
① 석존은 단견과 상견을 벗어나는 곳에 중도(中道)가 있고, 이는 진실하고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설했다. ②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법화경(法華經) 방편품에 “제불세존(諸佛世尊)은 오직 일대사의 인연이 있는 고로 세상에 출현하셨느니라”고 있는데,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진실한 목적은 일대사인연을 설하는 데 있고, 그 내실(內實)로서 일체중생이 간직하고 있는 불지견(佛知見: 부처의 지혜, 불계)을 열게 하고 나타내 보이고 깨닫게 하며 들어가게 하는 것<개시오입(開示悟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이라고 밝히고 있다. ③ 연기(緣起): 모든 사물(事物)과 사상(事象)이 서로 관계하여 생성소멸(生成消滅)하는 것. 석존이 성도(成道)할 때 고뇌의 원인을 순서에 따라 탐구하여 그 근원에 이르러 고뇌의 근본적 해결법을 깨달았다 하여, 초기 경전에서는 이를 12단계의 원인탐구<십이인연(十二因緣)>로 종합해서 설했다. ④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태양, 달, 사주(四洲), 육욕범천(六欲梵天)등을 포함하는 것을 소세계(小世界)라고 부르고, 그것이 일천〈(一千) 혹은 백억(百億)이라는 설도 있다>이 모인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 소천세계가 천(千)이 모인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 중천세계가 천이 모인 것을 대천세계라고 부른다. 소천, 중천, 대천의 3종으로 구별하므로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⑤ 설산동자(雪山童子): 석존이 과거세에 수행했을 때의 이름. 설산에서 바라문(婆羅門)으로서 보살의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제석천이 나찰(羅刹)로 변신해서 그의 구도심을 시험해 보았는데 자기 몸을 보시로 해서 법(法)을 구도했으므로 제석은 설산동자가 미래에 반드시 성불한다고 찬탄했다. ⑥ 요법범지(樂法梵志) : 석존이 과거세에 보살도를 수행했을 때의 이름. 법을 원해서 구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 요법이 보살도를 수행하는 중에 부처를 만나지 못하고 사방으로 법을 구했으나 얻지 못했을 때, 바라문(婆羅門)으로 변신한 마(魔)가 몸의 가죽을 종이로 하고 뼈를 붓으로 하며 피를 먹으로 해서 서사(書寫)하면 부처의 일게(一偈)를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다. 요법이 그대로 했으나 마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때 부처가 나타나서 가르침을 설했다. ⑦ “만약 발시마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려고 원한다면 능히 손가락 내지(乃至) 발가락 하나를 태워 불탑(佛塔)에 공양하라. 국성(國城)·처자(妻子) 및 삼천대천국토의 산림(山林)·하지(河池). 모든 진보물(珍寶物)로서 공양하는 자보다 뛰어나느니라.”(법화경 약왕품) ⑧ “물고기는 목숨을 아끼는 고로 연못에 사는데 연못이 얕은 것을 한탄하여 연못 바닥에 구멍을 파고 살지만 미끼에 속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새는 나무에 사는데 나무가 낮은 것을 겁내어 나무 윗가지에 살지만 먹이에 속아 그물에 걸린다.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세상의 얕은 일에는 신명(身命)을 버리면서도 대사(大事)인 불법(佛法) 등에는 버리기가 어려운 고로 부처가 되는 사람도 없느니라.”(어서 956쪽) ⑨ 중부경전(中部經典)에서는 여래(如來)의 생명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가, 세계가 상주(常住)하는가 아닌가, 신체의 영혼은 하나인가 별개의 것인가 라는 극히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며 의론(議論)이 명료한 근거와 방법이 없는 질문에 대해, 석존은 방치하고 명확히 답하지 않았음을 설했다. 월간법련 : 06/11/01 20061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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