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5. 10:43ㆍ佛法 .SGI
SGI 교학부장 강의 12월 연찬자료 – 광선유포의 신심
- 나가오카 요시유키 SGI 부교학부장 -
광포를 위해 살아가는
지용보살의 인생이야말로 최고
<본문1> (‘방편품·수량품 강의’ 411~412쪽)
신심의 극의(極意)는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쉽다. 요컨대, 어떠한 고경에서도 어본존을 잊지 않고 구도하면 된다. 자식들이 ‘어머니’ 하고 찾듯이, 어머니가 자식을 껴안듯이 솔직하고 순수하게 부처를 구도하면, 가슴속에 무너지지 않는 행복의 성이 용현한다. 반대로 의심이 깊고 생명에 연막을 친 듯한 삶의 자세이면, 그 신앙은 부처의 대생명과 감응할 수 없다.
자아게(自我偈)의 경문은 그것을 가르친다. 신심이란 ‘연모’ ‘갈앙심’이고, ‘질직의유연(質直意柔軟)’ 다시 말해 어디까지나 부처에 대해서도 또 어본존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유연해야 한다.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경직’된 자세여서는 안 된다.
<본문2> (기조보어서, 어서 892쪽 11~12행)
일심(一心)으로 부처를 보는 마음을 하나로 하여 부처를 보는 일심을 보면 부처이니라.
<본문3> (도키전답서, 어서 962쪽 7~8행)
다만 생애 본래부터 각오하였던바 지금에 와서 번의(飜意)하지 않으며 게다가 또한 유한(遺恨)도 없노라. 모든 악인은 또한 선지식(善知識)이니라.
◇
이케다 선생님 강의인 ‘본문1’에서는 어본존에게 솔직하게 똑바로 마주할 때, 자신에게 어본존의 생명, 대성인의 생명이 용현한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한 공덕은 없다.
마음에 불계라는 최고의 비보(秘寶)를 간직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 평등성에 ‘법화경의 마음’이 있다. 그리고 말법의 전 인류 누구나 그 보물상자를 열 수 있도록 한 것이 ‘대성인의 마음’이다.
법화경 전체는 석존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미래의 인류에게 외치는 경전이고 특히 <수량품>은 말법의 범부가 성불할 수 있는 열쇠를 나타낸 경문이다.
그리고 대성인은 이 경문이 그 열쇠를 나타낸다고 가르치셨다. 이를테면 ‘본문2’인 <기조보어서>에서는‘일심욕견불 부자석신명’(一心欲見佛 不自惜身命)의 글로 ‘니치렌이 기심의 불계’를 나타내고 ‘삼대비법’을 성취했다고 말씀하셨다.
일심욕견불 부자석신명
대성인이 밝히신 성불의 열쇠란 ‘일심욕견불’의 ‘일심’이다. 그리고 이 ‘일심’의 정체를 삼대비법의 남묘호렌게쿄로서 말법의 일체중생에게 열어주셨다. 대성인은 이 어문에서 그 ‘일심’의 비밀을 밝히셨다.
이 어문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첫째가 ‘일심으로 부처를 본다’ 둘째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부처를 본다’ 그리고 셋째가 ‘일심을 보면 부처이니라’ 하는 세 단계이다.
첫째와 둘째는 우리가 부처를 구도하는 마음과 신심의 자세를 말하고 있지만, 셋째는 우리가 그처럼 진지하게 부처를 구도할 때에 우리의 그 마음 자체가 불계를 나타낸다는 내용이다. 즉 ‘부처를 구도하는 범부의 일심’이 그대로 ‘부처의 일심’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밝히셨다.
대성인은 이 일심의 성불을 ‘무작삼신(無作三身)의 불과(佛果)’의 성취(成就)라고 말씀하셨다. 생명의 깊은 비밀을 밝힌 대성인 불법의 결론이 여기에 있다.
대성인이 체현하신 어본불의 대생명을 우리 말법의 일체중생을 위해 도현하신 것이 바로 어본존이다. 말법에서 일심으로 구해야 할 부처는 바로 어본존 외에는 없다.
마음을 하나로 하여 부처를 본다. 즉 부처의 대원인 광선유포를 내 바람으로서 어본존에게 진지하게 창제하는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부처가 된다. 이것이 대성인이 설해 밝힌 법화경의 궁극적인 메시지다.
또 ‘일심욕견불’에 이어 ‘부자석신명’이라고 있지만, 생명 최대의 불가사의인 불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일심욕견불’의 ‘신’과 ‘부자석신명’의 ‘행’에 해당한다. 진지한 구도와 실천이 바로 근간이 된다.
단, ‘부자석신명’이라 해도 생명을 경시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생명경시는 법화경의 마음에 반하는 것이다. 이 경문의 참뜻은 소아에 집착하는 자기를 아까워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 대아라는 참으로 존엄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이케다 선생님은 ‘부자석신명’이란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알기 쉽게 가르쳤다. 자기중심이 아닌 어본존이 근본이고 스승이 근본이라는 마음, 광포 조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부자석신명’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부자석신명’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어느 정도로 경애를 넓힐 수 있는가,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가.
묘법의 공덕은 무한하다. 어본존은 ‘공덕취’이다. 즉 모든 공덕의 집합체이다. 우리 ‘마음’, 우리 ‘신심’, 우리 ‘실천’에 전 우주의 공덕이 모여든다.
제육천의 마왕이 이끄는 십군
지난 교학강의에서 <벤전니부인어서> 한 구절을 배독하고 제육천의 마왕이 이끄는 십군(열 가지 번뇌)에 지지 않는 신심을 가르치신 이케다 선생님의 지도를 배웠다.
제육천의 마왕과 십군을 복습하면, 제육천의 마왕은 사람들의 성불을 방해하는 마의 작용의 근원을 이루는 것으로 마왕이라는 고유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심에 갖춘 생명의 작용이다. 지혜의 생명을 빼앗는다고 해서 ‘탈명’이라고 불리고 ‘타화자재천’이라고도 하여 사람을 지배하고 뜻대로 조종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그리고 제육천의 마왕이 이끄는 십군은 여러 번뇌를 분류한 것으로 ‘욕(欲)’ ‘우수(憂愁)’ ‘기갈(飢渴)’ ‘갈애(渴愛)’ ‘수면(睡眠)’ ‘포외(怖畏)’ ‘의회(疑悔)’ ‘진에(瞋)’ ‘이양허칭(利養虛稱)’ ‘자고멸인(自高蔑人)’ 열 종류이다.
첫째, ‘욕’은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신심이 파괴되는 것이다.
둘째, ‘우수’는 걱정이나 슬픔에 마음을 빼앗겨 신심에 힘쓰지 못하는 상태이다.
셋째, ‘기갈’은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학회활동을 하려고 해도 공복이라서 몸을 움직일 기력도 없다, 교통비도 없다, 그러니까 그만두자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넷째, ‘갈애’는 눈, 귀, 코, 혀, 몸의 오관을 통해 일어나는 다섯 가지 욕망을 얻는 데만 급급해서 신심을 버리고 마는 일이다.
다섯째, ‘수면’은 수마를 말한다.
여섯째, ‘포외’는 두려워하는 일이다.
일곱째, ‘의회’는 의심이나 후회다. 모처럼 신심하게 되었는데 어본존을 의심하고, 학회를 의심하고, 난이 다투어 일어나면 ‘신심 따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그런 어두운 마음을 물리치려면 제목을 불러 상쾌하게 마음을 정해야 한다.
여덟째, ‘진에’는 분노하는 마음이다. 신심 지도를 받으면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성을 내고 원질한다. 또 본인을 생각해 어서에 비춰 잘못된 신심을 지적해도 화를 내고 원망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아홉째, ‘이양허칭’(재물을 탐하고 덧없는 평판에 사로잡히는)은 명문명리를 좇아 신심을 얕보는 자세이다. 학회 인사에서도 정(正) 역직에서 부(副) 역직이 되었을 때 등 마치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해 새롭게 간부에 등용된 사람을 질투하고 학회활동에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이 ‘허칭’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열째, ‘자고멸인’(오만불손하여 사람을 멸시하는)은 만심이다. 만심에 차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학회 조직에 들어가 겸허하게 불법을 배울 수 없게 된다. 또 주위에서 칭찬해주면 학회활동에도 참여하지만,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이 없으면 불도수행을 소홀히 하고 만다. 따라서 숙명전환도 경애혁명도 하지 못하고 복운도 바닥이 난다. 마지막은 비참하다.
모든 악인은 선지식
‘본문3’의 성훈을 배독하고 이케다 선생님은 요지를 이렇게 지도하셨다.
“도다 선생님이 제2대 회장에 취임하신 당시, 3천명 정도에 불과한 지용보살의 연대는, 지금은 전 세계로 넓혀져 1천만 명이 넘는 동지가 환희에 불타 광선유포를 위해 힘쓰고 있다.
따라서 이만큼 광선유포가 추진되었기 때문에 제육천의 마왕이 분노에 불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예상치 못한 대난도 있을 것이다. 감연히 그것에 맞서 일어서겠다는 각오가 중요하다.”
대성인은 ‘다만 생애 본래부터 각오하였던 바’ 하고 말씀하셨다.
제목을 부르기 시작할 때부터 대난의 인생을 각오하셨다. 그리고 그 각오는 ‘지금에 와서 번의 하지 않으며’ 하고 말했듯이 다쓰노구치법난 그리고 사도유죄라는 최대의 난국에 처했을 때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한도 없노라’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대성인은 “세간의 허물은 조금도 없으나”(어서 958쪽)하고 말했듯이 본디 사회적으로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당하게 탄압을 받고 박해를 당했기에 보통이라면 원한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유한도 없노라’ 하고 말한 까닭은 정법을 유포했기에 경문에 비추어 불법의 법리대로 당연히 일어나야 할 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셨다.
생각건대 창가 삼대 회장의 ‘각오’도 대성인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대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요불굴의 각오였다. 이케다 선생님은 모든 난은 광선유포 때문이라고 엄연히 받아들이고 일체에 승리하셨다.
또 이 성훈의 ‘모든 악인은 또한 선지식이니라’는 말씀도 매우 중요하다.
선지식이라는 것은 불도수행을 지탱하고 돕는 존재이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은 모든 악인 즉 불법자를 박해하고 신심을 방해하는 작용을 하는 악지식이 자신에게는 선지식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모든 악인에게 박해받는 일이 법화경 행자임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야 풍차가 돌듯 박해가 있어야 악업을 전환하고 일생성불 할 수 있다.
난이 다투어 일어날수록 신심을 강성하게 불태운다면 악지식도 모두 선지식으로 바꿀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한 신앙의 모습이다.
반대로 학회의 선배가 성장하기를 바라며 잘못을 지적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원한을 품고 퇴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에게 선지식이 되어야 할 것이 결과적으로 악지식과 같은 작용을 하게 된다.
선지식이 되느냐 악지식이 되느냐는 최종적으로 본인의 신심이다. 따라서 탄압과 박해도 신심이 크게 비약하는 도약대로 삼을 수 있다. 즉 어떠한 역경에 처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마가 되지는 않는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일념에 따라 마도 되고 신심 향상의 힘이 되기도 한다.
제육천의 마왕이 이끄는 십군이라는 기심의 마를 부수는 힘은 창제다.
생명의 근본적인 미혹 다시 말해 무명을 단절할 수 있는 것은 남묘호렌게쿄의 이검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제목 제일, 단결 제일로 신심의 왕도를 끝까지 걷지 않겠습니까!” 하고 외치고 지도를 끝맺으셨다.
마군과의 싸움은 정신혁명의 민중운동
이케다 선생님은 ‘법화경의 지혜’에서 우리 불도수행에서 마군과의 싸움은 사회적으로 보면 ‘나르시시즘(자기애) 사회’의 저류를 변혁하는 큰 정신혁명의 민중운동이라고 말씀하셨다.
‘법화경의 지혜’(보급판<中> 487~499쪽)를 보면, “‘자기중심’의 마음이 도달하는 곳은 지옥계입니다. 인생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위하고’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도달하는 곳은 불계입니다. 아니, 인과구시(因果俱時)이므로 그 마음에 이미 불계가 깃들어 있습니다.
사회의 저류를 ‘자기중심’에서 ‘인간애’로, ‘이기주의’에서 ‘자비’로 바꾸는 광선유포의 투쟁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긍지를 가지기 바랍니다. 정의를 끝까지 이야기하기 바랍니다.”(487쪽)
“(중략)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기면 ‘나만큼 불행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 자신의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 괴로움에 얽매이고, 불평과 실망 속에서 생명력이 쇠퇴하고 맙니다.
그때 그 사람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이외의 누군가를 위하여 살아가려는 ‘인간의 연대’가 아닐까 합니다.
에고이즘에 틀어박혀 있으면 행복은 없습니다. 부수고 나와서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그때, 자기 생명의 샘도 소생하는 법입니다.”(494쪽)
“(중략) 학회는 고마운 곳입니다. 남을 보살펴준 만큼, 다시 말해 남에게 ‘살아가는 힘’을 이끌어준 만큼 자신에게도 ‘살아가는 힘’이 증가합니다. 남의 생명을 확대해준 만큼 자기 생명도 확대됩니다. 이것이 보살도(菩薩道)의 묘(妙)입니다. ‘이타(利他)’와 ‘자리(自利)’의 일치입니다.
이타만을 말하면 오만해집니다. 남을 구해주고 있다는 위선이 됩니다. 자신을 위하는 일도 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비로소 ‘수행하게 해주었다’는 겸허함이 나옵니다. 자타불이(自他不二)입니다. 그러므로 보살도 밖에 없습니다.”(495쪽)
“(중략) 어쨌든 사회는 변합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유행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일점. 그 일점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 그 일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일점은 묘법(妙法)입니다. 묘법이야말로 부동의 원점이고, 모든 것을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근본의 힘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하지만 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속임수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불변의 이 절대적인 ‘법’을 중심으로 해야 비로소 인생도 사회도 영원히 번영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환영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광선유포를 위해 끝까지 살아가는 지용보살의 인생이야말로 최고입니다. 이 이상의 인생은 없습니다. 그 점을 자각하느냐 못하느냐는 신심의 문제입니다.”(498~499쪽)
또 이 ‘법화경의 지혜’에서는 인간이 고경에서 꿋꿋이 살아갈 힘을 얻는 원천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말하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그 중 두 가지를 간결하게 전해드리겠다.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강제수용소에서 있던 이야기입니다. 생존자의 체험증언에 따르면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의 규칙에 따라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 그룹은 모든 것을 다 함께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룹의 멤버가 혼자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 그것으로 그 사람의 죽음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고 증언했습니다. ‘남과 서로 나누어 가지는 마음을 잃은 순간 죽음이 시작되었다’ 극한상황 속에서의 무서운 진실입니다.”(495~496쪽)
“또 하나는 일본의 유명한 소설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갔습니다. 지옥에서는 모든 사람이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도 먹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먹을 수 없는가. 젓가락이 자기 손보다 길어 먹을 것을 입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불국토에 갔습니다. 불국토에서도 모든 사람의 젓가락이 손보다 길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만족하며 먹고 있었습니다. 어째서인가. 서로 상대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옥과 불국토의 차이는 환경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차이였다는 것이지요.”(498쪽)
이케다 선생님은 각국의 벗에게“첫째도 사이좋게, 둘째도 사이좋게, 셋째도 사이좋게”라는 지침을 자주 주셨다.
또 단결에 관해 이렇게 지도하셨다.
“‘단결’이란개성을 누르고 말살한 자기희생이 아니라 에고이즘의 껍질을 타파하는 자기 경애의 확대다. 숭고한 목적을 향해 마음을 합해 저마다 갖고 있는 힘을 마음껏 발휘하는 투쟁이다.”
다시 말해 창가의 단결은 ‘조직을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전체주의가 아니라 ‘조직을 수단으로써 인간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주의의 방정식이다.
우리는 모두 생로병사라는 근원적인 고뇌를 마주하고 ‘자타 함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같은 목적을 공유한 동지다.
그러므로 SGI는 ‘함께 서로 격려하는 모임’이다. ‘함께 떠받쳐주는 모임’이다. ‘함께 배우고 서로 촉발하는 모임’이다.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모임’이다.
창가의 신심은 ‘지지 않는 신심’이라고 강하게 확신한다. 우리도 대성인의 ‘태양의 불법’을 드높이 내걸고 이케다 선생님과 맺은 사제의 유대, 동지와 맺은 우정의 유대를 깊이 다지며 영광스러운 인생 드라마를 장식하자.
화광신문 제1191호/ 2016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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