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15. 11:57ㆍ佛法 .SGI
● 기저부(基底部)를 바꾸는 것이 인간혁명이며 경애혁명
누구에게나 지금까지의 업인(業因)으로 만들어진 그 사람 나름의 ‘버릇’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 사람의 인격도 포함됩니다.
용수철이 늘어난 후에도 다시 되돌아 가듯이 누구나 자기의 기저부가 있습니다.
수라계를 기저부로 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보살계를 현출해도 다시 곧장 수라계로 되돌아간다. 이 기저부를 바꾸는 것이 인간혁명이며 경애혁명입니다.
그 사람의 오저의 일념을 바꾼다 해도 좋습니다.
생명의 기저부가 어디에 있는가로 인생은 결정됩니다.
비유하여 말하면, 아귀계가 기저부인 사람은 아귀계라는 배에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귀계의 궤도를 나가면서 그 배 위에서 어느 때는 웃고 어느 때는 괴로워합니다.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배는 엄연하게 아귀계의 궤도를 나갑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풍경도 아귀계 색(色)으로 물들어 있으며 사후에도 우주의 아귀계 방향으로 합치할 것입니다.
이 기저부를 불계(佛界)로 해 가는 것이 성불(成佛)입니다.
★ 기저부가 불계로 되면, 어떤 인생이 될까요?
소설 ‘신 인간혁명’에는 불계를 기저부로 인생을 승리해 가는 야마모토 신이치라는 한 인간의 진솔한 삶이 담겨있습니다.
학회 멤버들은 소설 ‘신 인간혁명’에서 불계를 기저부로 해가는 인생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제직결의 인생입니다.
생활상의 악(惡)도 신심의 눈으로 보면 우리를 성불로 인도해 주는 선지식입니다.
물론 기저부가 불계로 되었다 해도, 구계가 있기 때문에 번뇌나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근저(根底)가 ‘희망’으로 된다. ‘안심’과 ‘환희’의 리듬으로 되는 것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병에 걸려도 ‘뭐야 괜찮아 어본존님을 뵈면 낫게 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경계가 바로 불계가 아닌가.
그러면서 불계에 구계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화를 내거나 곤란해 한다. 안심하고 있기에 화를 내지 않거나 어떻게 해야 된다 가 아니라, 역시 걱정할 것은 걱정한다. 그러나 근저가 안심되는 그것이 부처인 것입니다”
이달 법련(2015년, 2월, 107쪽)의 내용입니다.
“자기 일념이 바뀌면 자신이 바뀐다.
아니 자기일념을 바꾸어 자신과 환경을 바꾼다.
이것이 일념삼천의 불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념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 일체가 결정됩니다”
★ 사제정신을 목표로 한 인생일 때는, 불법을 지키자, 불자를 지키자, 난을 내 몸으로 받아 가자는 사자왕의 마음으로 악을 가책할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사제정신에 서면 안심이 되고 희망이 샘솟습니다.
집행부의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스승을 철저히 배반했습니다.
“마음은 즉 대지, 대지 즉 초목이니라”(법련 2015년 2월호, 107쪽)
마음이 불계이면 대지도 불계, 마음이 지옥이면 대지도 지옥계, 의정불이입니다.
마음이 지옥이니 그들 자신과 환경도 모두 지옥입니다. 그들은 평생 파화합승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굴욕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사제를 외쳐도 생명에 각인된 반역이라는 멍에는 지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신심을 외쳐도 용수철이 되어 되돌아 갈 곳은 지옥입니다.
그들은 바람소리만 들어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올 인과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겠지요,
이런 것이 제바달다가 살아서 지옥에 떨어졌다는 무간 지옥이 아닐까요?
● 번뇌즉보리로서 괴로움이 전부 행복의 장작으로
생명의 기저부를 불계로 해 가기 위한 근본이 근행·창제입니다.
이 근행·창제는 부처의 생명과 일체가 되는 장엄한 의식입니다. 근행·창제라는 불계를 용현하는 작업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여 끊임없이 계속해 감으로써, 내 생명의 불계를 흔들림 없는 대지처럼 굳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 대지 위에서 순간순간 구계의 드라마를 자유자재로 연출해 가고 있습니다.
★ 그 원리가 ‘번뇌즉보리’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기저(基底)를 불계로 바꾸어 가는 것이 광선유포의 싸움입니다.
신심을 근저로 하면 무엇 하나 헛된 법이 없습니다. 불계가 기저인 인생은 과거, 현재의 구계 생활을 전부 살리면서 희망찬 미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구계의 노고야말로 불계를 강하게 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 “팔만사천의 법장은 자신 일인의 일기문서로다”(어서 563쪽)
석존과 제바달다의 격투라고 해도, 결국 자기 일신(一身)에 담겨있다. 그렇게 읽는 것이 문저(文底)의 법화경입니다.
스승을 배반한 집행부라 해도 우리들 자신의 경애를 혁명하기 위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惡)은 인간을 선(善)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대아의 경애입니다.
소아의 경애는 '때문에'라는 이유를 붙여, 열등감과 우월감에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번뇌즉보리’로서 괴로움(번뇌=구계)은 전부 행복(보리=불계)의 장작으로 됩니다.
신체가 음식물을 섭취하여 소화 흡수하면 에너지로 바뀌게 됩니다. 음식물이 없으면 신체 에너지도 없습니다. 또 장작이 없으면 불도 지필 수 없습니다.
불계도 구계가 없으면 힘을 잃게 되겠지요. 구계의 현실적 고뇌와 관계 없는 부처는 참된 부처가 아닙니다. 십계호구의 부처가 아닙니다.
★ 사바세계가 아닌 서방극락정토에 산다는 상상 속의 부처는, 성불이라는 목적으로 이끄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법화경을 설한 후에는 버려야 할 방편의 부처입니다.
법화경에 설한 십계호구의 부처가 아닙니다.
구계를 피해 악을 가책하지 않는다면, 변독위약도 못한 체, 결국 번뇌를 없애 열반으로 간다는 소승교의 회신멸지의 수행이 됩니다.
이는 니치렌 불법에서 설한 번뇌즉보리의 신심이 아닙니다.
● 불계소구의 지옥계, 그것은 동고이며 일부러 떠맡은 고뇌와 책임감과 자비의 발로
어느 의미에서 불계란 지옥의 괴로움을 굳이 떠 맡는 생명이라 해도 좋습니다.
불계소구(佛界所具)의 지옥계, 그것은 동고(同苦)이며, 일부러 떠맡은 고뇌이며, 책임감과 자비의 발로입니다. 홍교를 위해, 동지를 위해, 굳이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이 불계를 강하게 합니다.
스스로 자진해서 노고해 가자는 것이 신심입니다.
요령만 피우고 남에게만 시키는 것은 신심이 아닙니다. 조직주의며 권위주의입니다.
“노고하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노고를 피하면 참된 신심도 인간혁명도 없습니다” 굳이 괴로움 속으로-
이는 보살의 원겸어업의 정신과도 서로 통합니다.
노고한 사람에게는 인간미가 있습니다.
나에겐 마이클이라는 동지가 있습니다. 신체적인 불편과 인간관계로 어려움을 격어서인지 심성이 깊고 인간미가 넘치는 동지입니다.
개중에는 노고에 져서 자신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식물도 소화하여 흡수하는 힘이 약할 때 지나치게 섭취하면 몸을 망가뜨립니다.
그러기에 강한 생명력이 중요합니다.
생명력이 강하면 노고를 전부 영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신심을 하고 근행·창제를 했다 해도 광선유포의 노고를 피한다면 불계가 강해질 리 없습니다.
● 맺음 말
십계호구의 인생은 신심을 근본으로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십계호구를 설하지 않는 가르침에서는 구계를 혐오합니다. 구계를 끊어버리고 불계에 도달하고자 합니다.
이전경에서는 십계가 설해져도 그것은 이른바 조각조각이 난 존재였습니다. 그러기에 인계의 중생이 불계에 도달하려면 회신멸지라고 하여 인계의 생명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하의 말처럼 스트레스나 번뇌를 피해 나만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에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 집행부는 권력 때문에 스승을 협박했습니다. 이는 나만 잘 살고, 나만 부처가 되겠다는 이기주의입니다.
신심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노여워할 때 노여워하고, 괴로워해야 할 때 괴로워하며,
웃어야 할 때 웃고, 즐거워해야 할 때 즐기고,
“고(苦)는 고라고 깨닫고 낙(樂)은 낙이라고 열어서”(어서 1143쪽) 활발하고 생생하게 나날을 살아가면서 자기 그리고 남도 절대적 행복으로 향해 돌진해 가는 것입니다”
(법화경의 지혜 272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에서 발돋움할 필요도 없고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울고 싶을 때도 있고, 웃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화를 내고 싶을 때도, 헤맬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범부가, 오저에 있는 일념을 광선유포로 지향시킴으로써 생명의 기저부가 불계로 되어 갑니다.
< 법화경의 지혜, 법화경병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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