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2. 15:37ㆍ佛法 .SGI
한국SGI 석존 시대와 불법정신 |
‘한국SGI 창가학회에 인간공화의 이상’
석존이 탄생한 당시의 인도사회는 격렬한 변동기였다.
서기 전 10세기부터 갠지스 강 중유역(中流域)으로 진출한 아리아인의 영향으로
농업경제가 발달하고, 그에 따라 하천을 이용한 상업이 발달, 이어 각처에 도시가 형성되어갔다.
석존 재세 때는, 여러 도시가 큰 나라에 흡수되어가는 과정이었으며 마가다,
고사라, 아반티 등 전 인도가 16개의 큰 나라들로 나뉘어 있었다.
또, 화폐경제의 발달로 상공업자가 부를 축적해서 도시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고,
상공업자나 서민층이 실력을 얻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결과 견고한 카스트제도에 대한 의문과 함께, 물질적 생활의 풍족으로
인한 도덕적인 퇴폐가 조장되어 자유, 향락의 풍조가 퍼져갔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에 석존은 정의감에 불타는 휴머니스트로서,
또 신시대의 선단(先端)을 가는 ‘행동하는 사상가’로서 등장했다.
육사외도의 설을 극복한 확신과 정열
영지의 사람을 움직인 불제자의 모습
생애 이야기하며 계속 걸었던 사상가 석존
서민의 연대로 사회의 편견 오만과 대결
(석존 시대와 불법정신 - 한국sgi)
육사외도의 설을 극복한 확신과 정열
당시의 사상계(思想界)에는, 전통있는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 사상가가 활약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바라문교 문화에 대항한 뿌라나, 고사라, 아지타, 산쟈야 등 이른바 ‘육사외도(六師外道)다.
그들은 모두 베다성전(聖典)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흥도시의 왕후나 귀족,
부호(富豪) 등의 지지를 얻으며, 활동하고 있었다.
원시불전(原始佛典)에는 ‘그들은 도(道)의 사람 혹은 바라문이고,
중도(衆徒)를 거느리며, 단체의 스승이고, 유명하고, 명성있고,
교파의 개조(開祖)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한 사람으로서 숭앙받았다’(산윳다 니카야)고 있고
석존자신도 당초에는 이들과 같은 사상가의 한사람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존자신은 진리에 달(達)해 있다는 깊은 확신과 정열로 많은 사상가나 수행자,
또 일반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법을 확대해 갔던 것이다.
영지의 사람을 움직인 불제자의 모습
육사외도의 사상은 유물론(唯物論)이나 운명론(運命論), 회의론(懷疑論) 등인데,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도 불가능이라고 하는 회의론을
주창(主唱)한 산쟈야는 불교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는 당시 인도 제1의 강국이고 학문, 기술, 문화의 최선단(最先端)의
땅인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후에 석존의 십대제자에 들고, 지혜제일이라고 불리는 사리불(舍利弗)이나
신통제일인 목련(目蓮)도 모두 산쟈야의 제자였다.
어느 땐가 사리불은 탁발(托鉢)하는 불제자와 만났다.
그 청결하고 기품있는 모습에 ‘누구를 스승으로 하고 있는가.
가르침은 어떠한 것인가’ 등을 묻기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 불제자는, 스승은 석존이라고 하고, ‘제법(諸法)은 인(因)으로부터 생(生)한다.
여래(如來)는 그 인(因)을 설하신다. 제법의 멸(滅)도,
또 큰 수행자(修行者) 그같이 설하심’(비나야)이라고 가르침의 일단(一端)을 답했다고 한다.
사리불은 이 말로 ‘법의 눈’을 떠 2백50명의 산쟈야의
제자와 함께 석존에게 귀의(歸依)했던 것이다.
이 일화는 홍교의 규범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혜제일이라고 일컬어져 온 영지의 사람을 움직이게 한 것은
한갓 이론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한사람의 불제자의 모습, 행동이었던 것이다.
바로 “교주석존의 출세의 본회는 사람의 행동에 있었소이다”(어서 1174쪽)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들의 일상의 행동이 불법이해의 테두리를 확대하는 요체라고 하겠다.
생애 이야기하며 계속 걸었던 사상가 석존
한번에 많은 제자가 입문한 것은 사회에 큰 파문을 불렀다.
사람들은 “도(道)의 인(人), 고다마(釋尊)가 와서 자식을 빼앗고,
지아비를 빼앗고, 집을 단절시킨다. 지금 그는 천명(千名)의 결발(結髮)의 바라문을 출가시켰다.
산쟈야의 2백50명의 바라문들을 출가시켰다”(비나야)라고
석존이 내 남편을, 자식을 유괴하고 빼앗아간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석존은, “위대한 영웅, 여래는 정법(正法)으로써 이끄신다.
법으로써 이끄는 지자(智者)를 어찌해서 질투하는가?
”(비나야)라고, 사상의 우월을 가지고 논란을 파(破)했다.
새로운 사상, 철학이 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명(共鳴)하는 것은
구래(舊來)의 사상, 철학에는 큰 위협인 것이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석존을 비난한 것은, 현재의 창가학회(創價學會)에 대한
중상(中傷), 편견(偏見)과 아주 똑같은 구도(構圖)이기도 하다.
또 그같은 비난, 논란이 일어난 것은 석존의 가르침이
단시일에 많은 민중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그것은 석존과 그의 문하의 정열적인 활동과 대화의 결과라고 하겠다.
석존은 결코 ‘앉아있는 사상가’가 아니라 평생을 ‘유행(遊行)’한 사람이었다.
한역불전(漢譯佛典)의 ‘유행(遊行)’의 원의(原義)는 ‘오로지 걷기를 계속하는 것’,
‘오로지 행동하는 것’이었다.
바로 석존은 ‘행동하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상가’였던 것이다.
어느 때는 제자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또 어느 때는 감연(敢然)히 정의를 외치는
대화를 전개한데서 비롯되는 논란이었던 것이다.
그 석존과 불제자의 혼과 외침에, 보다 나은 자신의 생활의 방도를 찾는 민중이 모인 것이다.
이론을 가지고 재롱부리는 것도 아니며 인지를 초월한 운명에도 묶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진실을, 현실의 고뇌를 해결하려는
석존의 가르침이, 또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넓히려는 정열이 민중을 일어서게 만든 것이다.
서민의 연대로 사회의 편견 오만과 대결
석존의 교단에는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들면 ‘나는 전에는 가난하고,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없고, 입는 것도,
먹는 것도 많이 부족했습니다’(데리가다)라는 일절은 가난하고
고독한 한 아주머니의 말이고, ‘하는 일은 천한 쓰레기 청소부였습니다’(데리가다)라는 고백도 보인다.
또 금공(金工)이나 사냥꾼, 우산을 만드는 사람, 유녀(遊女),
도적까지도 석존 밑에서 도(道)를 구해 불도수행을 했다.
그와 함께 지배, 상층계층에서도, 막대한 재산을 내던지고 출가한 부인이나,
부상(富商)의 딸 등이 보인다. 그야말로 교단에는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무상(無上)의 행복을 구해 모인 ‘인간공화(人間共和)의 세계’였다.
석존은 이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회의 오만이나 편견과 싸웠다.
현대에서는 우리 창가학회(創價學會)가 까닭없는 편견이나 민중을 내려다보는
오만과 싸우면서, 진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서민의 연대로 사회를, 세계를 변혁시키려 하고있다.
자타 모두의 행복을 구축하는 광선유포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목표로 하고, 자행화타의 실천으로
서로 한 인간으로서, 서로 받쳐주고, 격려해가면서 전진한다.
바로 시대를 초월한 ‘휴머니즘의 대행진’인 것이다.
이 진열(陣列)을 더욱 견고하게 시대정신으로 해 가는 일이야말로
우리들 청년의 사명이라고 확신해 마지않는다.
‘혼의 불꽃의 바통’을 받아쥐는 것은 혼자 서는, 청년 이외에는 없다.
(한국SGI - 석존 시대와 불법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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