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6. 11:19ㆍ佛法 .SGI
사이토 교학부장 사도어서 강의1
(2000.9.23 공전실)
1 년 동안 선생님의 지도 속에서 신심의 강의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도어서(佐渡御書)는 신심의 진수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읽을 때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게 됩니다. 21세기가 눈 앞에 와 있습니다. 신심으로 구도하는 자리로 하여 마음을 같이 하여 배워갑시다.
사도어서(佐渡御書)는 문영 9년(1272년)3월20일 대성인이 성수 51세때, 온갖 난에도 불구하고 퇴전하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가마쿠라의 문하에게 주신 어서입니다. 도다(戶田) 선생님께서는 [사도어서에서 배운다]는 논문 속에서, 이 어서를 배독하면 깊은 감동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어서를 통해, 생명이 위험한 핍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자, 문하를 나의 자식처럼 자애롭게 생각하시는 대성인의 무한한 자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위와 같이 해변에 우뚝 선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대성인의 무한한 자애란 대난을 만난 문하에 대한 격려뿐만 아니라, 이 대난을 좋은 기회로 오히려 제자의 경애를 혁명시키고 일생성불 시키려고 하는 무한한 자애라고 생각합니다.
바다 속에 우뚝 솟은 유연한 대암과 같이 대성인을 스승으로 우러러 모시고 제자에게 있어서 기준이고 목표이기도 합니다. 광선유포의 활동, 인생의 투쟁, 어렵고 곤란할 때의 투쟁 등에 직면하여 사제불이(師弟不二)의 신심(信心)은 어디를 향해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 스승의 지도입니다. 불법(佛法)의 사제불이란 「부처의 높은 경애인 불계의 경애에 자신을 일치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에게 부처와 같은 불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엇인가 괴로운, 곤란한 일이든 반대로 좋은 일이든 연에 분동 되어 신심을 잃으면 사제불이의 신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은 불계를 열어 반드시 일생성불(一生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사제불이의 신심이고, 사도어서(佐渡御書)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올바르게 사는 자세를 제시하여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가르쳐 주시는 것이 스승의 존재입니다.
대성인(大聖人)께서 사도어서 직전(直前)의 어서인 개목초(開目抄)에서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諸難)이 있을지라도 의심(疑心)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연히 불계(佛界)에 이르리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사도어서에서 본불(本佛)의 경애(境涯), 영롱한 불계를 나타내어 주셨습니다. 또한 어본존님, 대성인과 나는 차별이 없고 자신의 범부의 생명속에 본존님의 생명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부처의) 사는 기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부처의 경애와 일치하기 위해 자신의 불계를 마음으로부터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불계의 생명을 깨달은 부처는 반드시 이러한 대원을 세운다. "만인을 부처로 해야 한다"는 대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고 만인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 이것이 사제불이(師弟不二)의 신심(信心)」입니다. 만인을 부처로 해야한다는 대원(大願)은 바로 광선유포의 대원입니다. 광선유포의 대원에 섰을 때 "자연히 불계(佛界)에 이르리로다" 의 어문처럼 광선유포의 대원은 자연히 부처의 대원이다. 부처의 일념(一念)과 맞아서 자연히 불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광선유포의 대원을 화합승단(和合僧團)으로 공명(共鳴)시켜 가는 것이 SGI입니다. 그것은 간단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끼꾸치 선생님께서는 "단순히 절에 다니는 신자(信者)도 아니고, 단순한 식자(識者)도 아니며 행동하는 행자(行者)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시며, 행동으로 박해 속에서 실천을 굽히지 않고 순교(殉敎)하셨습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마끼꾸치 선생님과 사제불이의 실천(實踐)으로 스승과 함께 감옥에 들어가셔서 "부처란 생명(生命)이다"라고 깨닫고, 지용(地涌)의 보살(菩薩)로서 광선유포(廣宣流布)의 대원(大願)을 세웠습니다. 이케다 선생님도 도다선생님의 말씀을 쫓아 전 인류(人類)의 경애혁명(境涯革命)을 시키겠다는 스승의 뜻대로 사제불이의 신심으로 세계 광선유포의 길을 열어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SGI는 수지(受持) 하는 법화경(法華經), 대성인 직결(直結) 사제불이의 신심을 종사(縱絲)로 한사람 한사람의 움직임(광선유포)을 횡사(橫絲)로 하여 짜여진 조직(組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입신동기는 여러 가지 고민(苦悶)이 있어서 이지만 실제로는 대원의 입장에서 신심하게 된 것입니다. 대원에 입각해서 불계를 용현(涌顯)하는 사제불이의 신심이 되었다. 사제불이는 부처의 경애로 살아가기 위한 절대 불가결(不可缺)한 길입니다. 이로써 사도어서(佐渡御書)의 근본 뿌리가 되는 테마는 바로 사제불이(師弟不二)입니다. 다음으로 중생(衆生)이 어떤 대원(大願)을 가지고 성불(成佛)했는가 입니다.
『이 書信은 도키씨(富木氏)의 편인 사부로 사에몬전(三郞左衛門殿), 오오쿠라도(大藏塔)의 쓰지쥬로입도전( 十郞入道殿) 등(等) 사지키의 이부인(尼夫人) 일일이 보셔야 할 분들에 보내느니라. 교토 가마쿠라(京都 鎌倉)의 접전(接戰)에서 죽은 사람들을 적어 보내주시기 바라나이다. 외전초(外典抄) 문구(文句)의 이(二), 현(玄)의 사(四)의 본말(本末), 감문(勘文), 선지(宣旨) 등(等)을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내도록 하시라』
서문으로서 도키죠닌등 가마쿠라에서 싸우고 있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보내 주신 어서입니다. 대성인은 자신도 박해(迫害)를 당하고 계시면서도, 인내(忍耐)로 싸우고 있는 한사람 한사람의 제자(弟子)에게 이 어서를 보내주셨습니다. 어려울 때 한사람 한사람에게 맞추어 나가는 것이 지도자(指導者)의 마음입니다.
회향(回向)을 위해 가마쿠라전의 전사자 이름을 보내 주시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호죠씨 내란(2월 소동 1272.2.11)으로 자계반역의 난이 적중되었는데 이는 다쓰노구치 법난(法難) 때(1271.9.12)헤이노사에몬노죠에게 타국침핍난을 예언(豫言)한 후 150일 지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2월 소동에서 문하(門下)가 죽었을지 모르니까 회향해주시겠다고 하는, 한사람 한사람을 배려(配慮)하는 스승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인 사도(佐渡)에서 직전의 개목초에(1272년2월) 이어 아마도 말법(末法)의 최고(最高)의 법본존 개현의 書인 관심본존초를 집필하시기 위한 자료를 다시 수집하셔서 중서(重書)를 저술하시기 위한 준비로 외전초, 현의 사의 본말, 막부의 공문문서 등을 가져다 주기를 부탁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조금 전 와다 이사장님이 말씀하신 투쟁(鬪爭)의 교학(敎學), 실천(實踐)의 교학(敎學)인 것입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아주 짧은 서문만 보아도 대성인(大聖人)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본문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배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러한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은 미노부도 닛켄종도 아니고 오직 창가학회(創價學會) 밖에 없습니다.
『세간(世間)에서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화염(火炎) 속과 도검(刀劍)의 섬광(閃光)과 자신(自身)의 죽음이니라, 우마(牛馬)조차 몸을 아끼는데 하물며 인신(人身)에 있어서랴, 나인(癩人)도 또한 명(命)을 아끼는데 하물며 건장(健壯)한 사람에 있어서랴, 부처가 설(說)하여 가로되 「칠보(七寶)로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꽉차게 깔지라도 손의 새끼손가락을 가지고 불경(佛經)에 공양(供養)하느니만 못하니라」 취의(取意). 설산동자(雪山童子)가 몸을 던지고 요법범지(樂法梵志)가 몸의 가죽을 벗김은 신명(身命)보다 더 아까운 것이 없으므로 이것을 보시(布施)로 하여 불법(佛法)을 배우면 반드시 부처가 된다, 신명(身命)을 버리는 사람이 다른 보물(寶物)을 불법(佛法)에 아끼겠느뇨. 또한 재보(財寶)를 불법(佛法)에 아끼는 자(者)가 더한 신명(身命)을 버리겠느뇨』
세간(世間) 일반 사(事)에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의 생명(生命)을 아낀다. 부처는 자신의 둘도 없는 귀중(貴重)한 생명을 불법에 공양(供養)하고 불법을 위해 쓰도록 가르쳐주고 계신다. 요법범지와 같이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불법을 배우는 것이 부처의 마음이다.
화염 속, 섬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누구라도 두려워한다. 인간(人間)은 누구라도 죽음이라는 근본의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에 있어서 동물(動物)보다도 유난히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 것이다. 인간이 평소에 둘도 없는 자신이라는 생(生)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정해져 있다. 이 생명의 무상(無常)으로, 생의 집착(執着)과 죽음이라는 현실(現實)의 양자(兩者)의 모순(矛盾)을 자각하는 데서 인간의 근본적(根本的)인 괴로움이 있고 불안이 있는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데서 복잡한 인간의 삶의 자세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차피 죽을 바에는 이름을 남기고 명예(名譽)에 집착하거나 아니면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찰라 찰라 즐겁게 보내고 보자는 향락주의(享樂主義)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또한 즐겁게 살기 위해서 금전이 만능이라 배금주의(拜金主義) 권력숭배(權力崇拜) 등에 빠지는 등 여러 삶의 자세가 있다. 반대로 사람의 생명에 환희(歡喜)를 느끼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생명도 있으나 인생(人生)의 복병(伏兵)을 만나면 부지런한 삶을 관철(貫徹)한다고 확신(確信)할 수 없다.
불법(佛法)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만을 아끼는 것이 소중한 목숨을 아끼는 것으로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의 경애(境涯)에 정체(停滯)하여 경애혁명(境涯革命)을 방해(妨害)하기 때문이다.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일 경우는 배금주의에 그 자체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결국(結局) 불계(佛界)를 용현(涌顯)하는 수 밖에 사고(四苦)의 괴로움에서 해방(解放)되는 길은 없다.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된다 해도 병고(病苦), 노고(老苦)의 불안이 찾아오게 된다. 자신에 대해 아무런 반성(反省)도 없는 체 단순히 보신(保身)만을 꾀하고 있어서는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작은 자기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빛나는 큰 자신을 얻을 수 있다고 불법에서는 설한다. 불법은 결국 경애를 높이는 것. 경애혁명하는 길 만이 최고(最高)의 행복(幸福)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대성인께서 십계(十界) 변혁(變革)을 강조(强調)하심이 여기에 이유가 있다. 삼천대천세계 대우주의 재보(財寶) 보다 더 귀중한 몸을 공양(약왕품에서 이미 인용)하라고 대성인께서 의미를 알기 쉽게 가르치고있다. 또한 석가의 전신의 모습인 설산동자, 요법범지, 약왕보살은 몸을 던져서 부처가 되었다고 설하고 있다. 작은 자신을 자기 자신의 집착을 버려서 경애혁명 해나가는 사람만이 부처가 된다는 말씀이다.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부처의 삶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삶의 자세의 뿌리, 깨달은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사제불이가 되고 경애혁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설명(說明)하면 이론적(理論的)이 되겠으나 불법은 이론도 중요하므로 상세(詳細)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들 생명(生命)의 근저(根底), 우주(宇宙) 전체(全體)의 모든 뿌리는 묘법(妙法)의 움직임입니다. 불, 부처는 깨달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깨달았느냐하면 자신의 뿌리가 묘법(妙法)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신(自身)의 생명(生命)이 妙法蓮華經의 당체(當體)임을 깨달아 나타내 자각(自覺)한 사람이 부처입니다. 자신의 영원(永遠)한 진리(眞理)인 묘법(妙法)에서 나타난 인격(人格)이 妙法蓮華經의 생명(生命)적 존재(存在)가 여래(如來)인 것이다. 깨달은 상태(狀態)를 부처라 하고 그 깨달은 내용(內容)을 여래(如來)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열어서 진리(眞理)에서 온 존재(存在), 부처에서 온 존재가 근저(根底)이다. 진리에서 나온 존재는 여래(如來)입니다만 묘법(妙法)입니다 .여래(如來)야말로 둘도 없는 자신의 소중한 본질(本質)이다. 자기 자신이 우주를 성립(成立)시킨 영원(永遠)한 본지(本地)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 유래(由來)가 있다. 자신의 근저의 영원한 여래를 아는 것이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영원한 길이다. 생사(生死)란 여래(如來)의 운동리듬에 갖추어진 리듬인 것이다』
묘법(妙法)에는 3개의 뜻이 있다. 첫째는 구족(具足)으로 모든 가능성의 가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개(開)의 뜻이며, 어떤 마(魔)도 타파(打破)하고 새로운 가치(價値)를 여는 힘이며, 셋째는 소생(蘇生)의 힘으로 새로운 힘이 소생하고 끊임없이 솟아 소생되어 불, 여래의 참된 만족(滿足)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소생의 힘으로 끊임없이 솟아오른 것이 불계이고 참된 불계입니다. 석가여래는 자신의 본체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불사(不死)를 알게 되었다. 죽음에 괴로워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여 모든 괴로움도 타파할 수 있다고 석존(釋尊)은 설하고 있습니다.
후반에서는 신명을 버리는 사람, 불법을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은 신앙(信仰)을 찬탄(讚嘆)한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 광포(廣布)를 열어오신 한국의 여러분을 대성인(大聖人)께서는 반드시 칭찬(稱讚)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불법을 위해 재보(財寶)를 아끼는 자는, 재산을 아끼기 위해 퇴전(退轉)한 자는 성불(成佛)할 수 없다는 경고(警告)이기도 하다. 순교(殉敎)의 자세가 아닌 보신(保身), 권위(權威), 사치(奢侈)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광포를 방해하는 닛켄을 대성인께서는 엄하게 야단치실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불법을 위해 신명을 버려 여래(如來)라는 최고(最高)의 보배를 얻을 수 있음을 믿고 열심히 활동해 나갑시다.
『세간(世間)의 법(法)에도 중은(重恩)은 목숨을 버려 보답(報答)하는 것이니라, 또한 주군(主君)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적은 것 같지만 그 수(數)는 많도다, 남자(男子)는 수치(羞恥) 때문에 목숨을 버리고 여인(女人)은 남자(男子)를 위해 목숨을 버리느니라, 물고기는 묵숨을 아끼는 고(故)로 연못에 사는데 연못이 얕은 것을 한탄(恨歎)하여 연못 바닥에 구멍을 파고 살지만 미끼에 속아 낚시 바늘을 삼키고, 새는 나무에 사는데 나무가 낮은 것을 겁내어 나무 윗가지에 살지만 먹이에 속아 그물에 걸린다.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세상(世上)의 얕은 일에는 신명(身命)을 버리면서도 대사(大事)인 불법(佛法) 등(等)에는 버리기가 어려운 고(故)로 부처가 되는 사람도 없느니라』
일반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위해서 신명을 버리는 예를 들어주시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여러 삶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다. 세간의 얕은 일에 목숨을 버림은 여래를 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할 수 없다. 물고기, 새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행동 결과는 결국 신명을 소중히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신명을 버리고 마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갖가지 삶의 자세는 나름대로 그 시대에 가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된 인간, 참된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중간에 멈추어 끝나버리게 되면, 어리석음으로 남는 삶의 자세가 된다. 대성인의 결론(結論)은 『몸을 아끼지 않고 불법을 배워감이 중요하며, 부처가 목숨 신명을 써서 부처와 여래를 깨달아 가는 것은 최고의 삶의 자세라고 가르쳐 주시고 있다. 그것이 여래의 삶의 자세임을 체득해야 한다. 이것을 체득(體得)하기 위한 최고의 찬스로 대난(大難)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말법의 중생이다. 정법을 아끼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투쟁(鬪爭)해 가는 것이다. 정법을 아끼기 위해 대난을 만나고 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사신 대성인(大聖人)의 정신(精神)을 통해 대난을 극복(克復)해 가는 자세(姿勢)를 어서(御書)를 통해 알 수 있다』
포교(布敎)야말로 지금 가장 때에 맞는 수행(修行)인 것이다. 포교의 투쟁이 성불의 길이다. 축생과 같은 자세가 아니고 강한 사자왕의 마음으로 여래의 생명을 체득해 가는 것이 포교입니다. 용기(勇氣)를 가지고 포교를 하여 여래의 마음을 배워감이 다음에 전개되는 내용이다. 다음은 광포의 도상(途上)에 박해를 당하는 것은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으로 그로 인해 본격적(本格的)인 숙명전환(宿命轉換) 경애혁명(境涯革命)에 통한다. 전체를 통해서 인간혁명을 배우는 것이다. 대성인 불법의 진수(眞髓)를 배우게 될 것이다.
사도어서(佐渡御書)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마음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어서입니다.
「축생의 마음은 약한 자를 위협하고 강자를 두려워하느니라. 당세(當世)의 학자(學者)들은 축생(畜生)과 같도다. 지자(智者)가 약함을 얕보고 왕법의 사를 두려워하니 유신(諛臣)이라 함은 이것이니라.」어서957쪽
사도어서의 전반부의 하이라이트 포인트인 사자왕의 마음을 배우는데 사자왕의 마음은 사도어서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은 말법의 성불의 요점(要點)이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앞에서 불법을 위해서 신명(身命)을 버려라. 불법을 위해서 신명을 버리는 용기를 가지고 실천하면 사자왕의 마음이 틀림없다.
사자왕의 마음은 계속 수지(受持)하는 사람, 범부의 몸으로 우주의 불계에 공명(共鳴)한다. 이것이 범부가 불계를 용현하는 유일(唯一)한 길이고 南無妙法蓮華經는 우주(宇宙)의 불계를 표현(表現)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大聖人)은 문하(門下)에 대하여 사자왕의 마음을 익혀라. 사자왕의 자식(子息)으로 살아가라고 호소(呼訴)하고 계십니다.
당세의 학자는 대성인님이 계실 때 사종교의 승려를 말하고 그 본질을 축생의 마음이라고 하셨다. 그 당시의 승려의 권위는 지금보다 강하다. 이것을 공격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축생과 같은 마음에 대비하여 사자왕과 같은 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당시의 학자는 축생" "사자왕과 같은 마음은 대성인님의 마음"이다. 축생의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축생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다. 동물의 마음이 아니고 저차원(低次元)의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축생의 마음은 감정(感情)이나 눈앞의 이해(利害)에 마음쓰고 올바른 마음의 자세에 살지 않는 어리석은 마음을 말합니다. 십계론에도 축생계라고 있습니다. 어서에 어리석음은 축생이다. 어리석음이 축생계의 경애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축생계의 경애(境涯)란 눈앞의 이해에 움직이는 경애로 판단하고 상대방의 힘이 강한가 약한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판단(判斷)합니다. 보신에 사로잡혀 약함을 가벼이 하고 강함을 두려워한다.
약육강식은 동물의 전형적인 삶의 자세이지만 동물도 높은 경애의 동물도 있다. 인간 이하의 마음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축생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경애를 높이자. 함께 성장하자. 그 사람을 위해서 인간적인 행동을 하지 못 합니다. 자기 중심의 보신의 삶의 자세는 상대방을 보고 자기 경애를 높이자는 마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학자 승려는 자기 자신이 수행하고 자기 자신의 경애를 높여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승려의 사명(使命)이다. 축생의 마음은 승려의 실격(失格)이다. 선(善) 악(惡) 정(正) 사(邪) 진위(眞僞)를 기준으로 사람의 정신을 이끄는 지도자(指導者)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학자는 축생계에 빠졌다고 대성인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승려이면서 나의 몸은 아끼고 법을 아끼는 마음이 없다. 그러니 승려(僧侶)로서 실격(失格)이고 축생(畜生)이다.
이러한 승려가 있는 곳 생각나지 않습니까. 일반 사회에도 있지만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닛켄이라는 승려이다. 닛켄이란 켄은 일본말로 개도 켄이다. "개로 사는 것이 낫겠다"라는 학생도 있다. 하여튼 나의 몸을 아낄 뿐 법을 아끼려는 마음, 자기를 향상하려는 마음, 사람을 구제(救濟)하려는 마음이 없는 승려가 있는 것이 말법이니라.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성인님께서 얼마나 법화경(法華經)에 진실(眞實)을 가늠하는 용기있는 분인지 모른다. 대성인님은 혼자다. 그러므로 약하다. 그러므로 박해를 하는 것이다.
결국 약한 사람을 위협하고 강한 사람에게 아첨(阿諂)하고 힘이 있는 자에게 두려워하고 아첨하며 따라가는 축생이다. 자기 이해를 위해 이용하고 불법을 굽히는 것도 불법 정의도 민중(民衆)의 행복(幸福)도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대성인은 유신(諛臣)이라고 하셨다. 자기를 위해 권력을 따르고 있다. 정말로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권력자를 따른다. 이것을 유신(諛臣), 간신(奸臣)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실(眞實)을 가지고 포교에 가면 난(難)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각오(覺悟)하시고 말법의 포교(布敎)를 해가는 강성(强盛)한 마음 중생을 위해 투쟁을 하는 마음을 사자왕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강적(强敵)을 굴복(屈伏)시켜야 비로소 역사(力士)임을 알도다. 악왕(惡王)이 정법(正法)을 파(破)하는데 사법(邪法)의 승(僧)들이 한편이 되어 지자(智者)를 멸실(滅失)하려할 때는 사자왕(獅子王)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 반드시 부처로 되느니라. 예를 들면 日蓮과 같도다」어떠한 분야든 그 사람의 힘의 유무는 강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지 아닌지로 알 수 있다. 강함에 이겨야 알 수 있다. 池田선생님도 강적(强敵)에 이겨야 정의(正義)를 증명(證明)할 수 있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사이토 교학부장 사도어서 강의2 (2000. 11. 4. 광선회관)
사도어서(佐渡御書) 〈어서 전집 957쪽 7행∼10행〉
안녕하세요? 사도어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의 마음을 변혁할 수 있는 힘있는 어서 입니다.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축생(畜生)의 마음은 약(弱)함을 위협하고 강(强)함을 두려워하느니라. 당세(當世)의 학자(學者)들은 축생(畜生)과 같다. 지자(智者)가 약(弱)함을 깔보고 왕법(王法)의 사(邪)를 두려워하니 유신(諛臣)이라 함은 이것이니라. 강적(强敵)을 굴복(屈伏)시켜야 비로소 역사(力士)임을 안다, 악왕(惡王)이 정법(正法)을 파(破)하는데 사법(邪法)의 승(僧)들이 한편이 되어 지자(智者)를 살해(殺害)하려 할 때는 사자왕(獅子王)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者) 반드시 부처가 되느니라, 예컨대 니치렌(日蓮)과 같다. 이것은 교만함이 아니라 정법(正法)을 아끼는 마음이 강성(强盛)함이니라』 (어서 957쪽7행∼10행)
사도어서의 전반부의 하이라이트 포인트인 사자왕의 마음을 배우는데 사자왕의 마음은 사도어서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사자왕의 마음은 말법의 성불(成佛)의 요점(要點)이라고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는 불법을 위해서 신명을 버려라. 불법을 위해서 신명을 버리는 용기를 가지고 실천하면 사자왕의 마음이 틀림없다.
사자왕의 마음은 계속 수지하는 사람이 범부의 몸으로 우주의 불계에 공명하고 이것이 범부가 불계를 용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南無妙法蓮華經는 우주의 불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님은 문하에 대하여 "사자왕의 마음을 일으켜라. 사자왕의 자식으로 살아가라"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사자왕의 마음에 대해서 배워갑시다.
당세의 학자는 대성인님이 계실 때 사종교의 승려를 말하고 그 본질을 축생의 마음이라고 하셨다. 그 당시의 승려의 권위는 지금보다 강하다. 경애(境涯)의 본질(本質)을 단언(斷言)하신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축생과 같은 마음에 대비하여 사자왕과 같은 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당시의 학자는 축생/사자왕과 같은 마음은 대성인님의 마음이다. 축생의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축생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다. 동물의 마음이 아니고 저차원의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축생의 마음은 감정이나 눈앞의 이해에 마음쓰고 올바른 마음의 자세에 살지 않는 어리석은 마음을 말합니다. 십계론에도 축생계라고 있습니다. 어서에 어리석음을 축생이라 합니다. 어리석음이 축생계의 경애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축생계의 경애란 눈앞의 이해에 움직이는 경애로 판단하고 상대방의 힘이 강한가 약한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판단합니다. 보신에 사로잡혀 약함을 가벼이 하고 강함을 두려워한다.
약육강식은 동물의 전형적인 삶의 자세이지만 동물도 높은 경애의 동물도 있다. 인간 이하의 마음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축생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경애를 높이자. 함께 성장하자. 그 사람을 위해서"라는 인간적인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 중심의 보신의 삶의 자세는 상대방을 보고 자기 경애를 높이자는 마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학자 승려는 자기 자신이 수행하고 자기 자신의 경애를 높여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승려의 사명이다. 축생의 마음은 승려의 실격이다. 선악, 정사, 진위를 기준으로 사람의 정신을 이끄는 지도자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학자는 축생계에 빠졌다고 대성인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승려이면서 나의 몸은 아끼고 법을 아끼는 마음이 없다. 그러니 승려로서 실격이고 축생이다.
이러한 승려가 있는 곳 생각나지 않습니까. 일반 사회에도 있지만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닛켄이라는 승려이다. 닛켄이란 켄은 일본말로 개도 켄이다. 개로 사는 것이 낫겠다라는 학생도 있다. 하여튼 나의 몸을 아낄 뿐 법을 아끼려는 마음, 자기를 향상하려는 마음,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없는 승려가 있는 것이 말법이다.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성인님께서 얼마나 법화경에 진실을 가늠하는 용기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대성인님은 혼자다. 그러므로 약하다. 그러므로 박해를 하는 것이다.
결국 약한 사람을 위협(威脅)하고 강한 사람에게 아첨(阿諂)하고 힘이 있는 자에게 두려워하고 아첨하며 따라가는 축생이다. 자기의 이해를 위해 이용하고 불법을 넓히는 것도, 불법 정의도, 민중의 행복도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대성인은 유신이라고 하셨다. 자기를 위해 권력을 따르고 있다. 정말로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권력자를 따른다. 이것을 유신, 간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실을 가지고 포교에 가면 난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각오하시고 말법의 포교를 해 가는 강성한 마음 중생을 위해 투쟁을 하는 마음을 사자왕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강적을 굴복시켜야 비로소 역사임을 알도다. 악왕이 정법을 파하는데 사법의 승들이 한편이 되어 지자를 멸실하려 할 때는 사자 왕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 반드시 부처로 되느니라. 예를 들면 日蓮과 같도다」어떠한 분야든 그 사람의 힘의 유무는 강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지 아닌 지로 알 수 있다. 강함에 이겨야 알 수 있다. 池田선생님도 강적에 이겨야 정의를 증명할 수 있다고 자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악왕이란 국왕 -- 권력을 갖고 있다.(사회적으로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다)
사법의 승 -- 사종교의 승(사람들의 마음을 미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만큼의 강적은 없습니다. 이것이 결탁하기 때문에 굉장히 두려운 것입니다. 양자가 결탁해서 박해하더라도 의연하게 정의를 관철하는 사람은 진실된 지혜의 자이다. 진리를 확고하게 가진 사람은 지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사자왕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진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용기이고 정법이 소중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용기입니다. 그러므로 강적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번 강의에서 세간에서 사람이 무서워하는 것은 "화염 속과 도검과 죽음이다."-- 화염 도검은 모두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강적도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을 극복, 초월한다 -- 석존의 깨달음입니다. 석존은 불법의 진리를 깨달아 불사의 경지를 알았다. 깨달았다는 것은 불사,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괴로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생사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 묘법에 나타남이다. 영원함의 리듬에 들어가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존을 자유롭게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권력자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에 권력자나 권위가 두렵지 않았다. 죽음을 극복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마음, 이것이 사자왕의 마음입니다. 사자왕의 마음 이것을 부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범부는 이것을 모른다. 모른다고 어쩔 수 없다가 아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쉽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강한 신심 믿는 곳에 두려움이 없다. 강한 신심에서 권력자도 종교적 권위자도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신심의 강함에서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성인은 사자왕의 마음에 대해서 다른 어서에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결국은 천도 버리시고 제난(諸難)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 신자가 육십 겁의 보살의 행을 퇴전한 것은 걸안의 바라문은 졸음을 참지 못한 때문이고, 구원대통(久遠大通)의 자가 삼오(三五)의 진을 경과함은 악지식(惡知識)을 만났기 때문이니라. 선에서이든 악에서이든 법화경을 버림은 지옥의 업이 되느니라. 대원(大願)을 세우리라. 일본국의 위를 물려주리라. 법화경을 버리고 관경(觀經)등에 붙어서 후생을 기약하라. 염불을 부르지 않으면 부모의 목을 베겠노라 는 등의 종종의 대난이 출래한다 할지라도 지자 에게 아의(我義)가 타파되지 않는 한 채용하지 않으리라. 기외(其外)의 대난은 바람 앞의 먼지와 같으니라.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안목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대선이 되겠노라. 이렇게 맹서한 원(願)은 깨뜨리지 않겠노라」(개목초 232쪽)
이것이 사자왕의 마음이다.
"일본국의 위를 물려주겠다"는 유혹에도 지지 않았습니다."염불을 부르지 않으면 목을 자르겠다."는 위협에도 지지 않았다. 불퇴전의 자세를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일본국의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다.명심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사자왕의 마음이고, 사자(獅子)는 백수(百獸)의 왕이고 어떤 동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자가 부르짖으면 도망간다. 사자는 백수의 왕이다.
최근에 TV에서 사자에 대해서 봤는데 저는 사자는 반려자(伴侶者)를 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보니까, 사자가 떼를 지어서 간다는 것입니다. 표범이나 호랑이는 한 마리씩 다니고 있다. 사냥은 암컷이 하고 수컷은 사냥은 안하고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잘못 지도(指導)한 것을 반성(反省)하였다. 그런데 사냥감을 놓고 하이에나가 가져 가려할 때 마지막에 사자(수컷)가 혼자서 나와 투쟁(鬪爭)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싸울 때 반려(伴侶)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안심(安心)했다.
옛날 인도는 부처를 사자로 비유했습니다. 부처가 앉는 자리를 사자좌(獅子座 - 사자가 앉는 자리로 비유)아육대왕의 목비에도 사자를 상징하는 목을 놓았다. 부처를 사자에 비유한다.
만인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이다. 법화경의 가르침을 믿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갖는 사람은 믿고 있으면 부처의 자식, 사자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쓰하라 법난 때 -- (성인어난사 1190쪽)
「각자는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을 발휘(發揮)해서 남들이 아무리 위협할지라도 겁내지 말지니라. 사자왕은 백수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사자의 새끼도 또한 이와 같다. 그들은 야간(野干)이 짖는 것이고, 日蓮의 일문(一門)은 사자가 짖는 것이로다」
이 말씀은 사자왕의 마음을 갖고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우리들은 용기를 내라고. 법화경을 믿으면 만인이 부처로 된다. 일생성불(一生成佛)은 틀림없다. 불행하게 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용기를 갖자"고 분발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용기란 막힘을 타개(打開)해 가는 유일(唯一)한 힘이다. 새로운 가치. 새로운 힘을 여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 인생의 막힘도, 사회의 막힘도 여는 힘은 용기인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에 대한 신(信)!! 어본존(御本尊)을 믿는 신(信)은 모두 부처로 될 수 있다는 신(信)이다. 이 신(信)을 믿는 마음 즉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自身)의 생명(生命)을 여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대성인은 묘(妙)에 삼의(三義)가 있다고 가르쳐주시고 있다.
* 묘법(妙法)에는 삼천(三千) 제법(諸法)의 사(事)도 이(理)도 포함해서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원만(圓滿), 구족(具足)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묘법입니다. 묘법의 힘이란 연다(開)는 것. 연에 의해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구족, 원만 모든 가치가 나타나게 된다. 연이라는 조건에 의해 모든 가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가 열려져 가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막혀 있던 자신도 사회도 모두 소생(蘇生)한다는 의미, 이것이 소생의 의미인 것이다. 구족되고 있고, 열어갈 수 있고, 소생할 수 있다. 이 묘법의 운동이 나의 생명에 나타나는 창구, 그 열쇠는 신(信)이다.
신(信)하는 용기 이것이 사자왕의 마음이다. 확신 -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줄여서 용기라고 한다. 묘법의 힘을 열어 가는 유일한 힘, 열쇠 이것이 용기이다!
사자왕의 마음에 대해서 대성인은 '니치렌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대성인은 사도유배를 가신 후 日蓮대성인의 교단은 막힘이었다. 종교활동도 못함, 사도유배는 언제 죽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평균기온이 2-3도 가량 낮습니다.
11월 아주 추울 때 쓰가하라 삼매당에 도착하셨습니다. 여기가 사자왕의 모델입니다. 대성인은 절망(絶望)하셨는가? 아니다. 고경(苦境)을 극복(克復)하고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을 구제해가자' 라고 하시어 개목초(開目抄)를 쓰시고, 어본존(御本尊)을 도현(圖顯)하고 사람들을 구제. 이것이야말로 사자왕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가장 어려울 때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경에 빠질 때 구해가자! 숭고(崇高)한 목적관(目的觀)을 달성하시는 이것이 사자왕의 마음입니다. 고경에 빠질 때도 있지만 순연의 때에도 사람들을 구제해가자는 마음! 이것이 대성인이시다. 말법 만년에 걸쳐 사람을 구제해 가자는 마음으로 대어본존님을 도현(圖顯)하시고, 말법 만년의 중생을 위해 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이라 적으셨다. 대성인의 이 마음은 가장 어려운 난을 증명하면서도 괴로워한 것은 가마꾸라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가마쿠라의 제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사도초(佐渡抄)를 쓰셨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야말로 각오(覺悟)의 사람은 지지 않는다!!
도다(戶田)선생님 말씀에 "자신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간단하다. 남을 구제하자는 마음은 학회의 진수(眞髓)이다. 대성인의 마음이고, 학회(學會)의 정수(精髓)이다" 라고.
다음 어서도 사자왕에 대해서 말씀.
「교만(驕慢)한 자는 반드시 강적(强敵)을 만나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타나니 예컨대 수라의 교만이 제석(帝釋)에게 공격당하여 무열지(無熱地)의 연꽃 속에 소신(小身)이 되어 숨은 것과 같다」(어서 957쪽)
사자왕의 마음, 교만의 마음의 차이에 대해서입니다. 사자왕의 마음 -- 정법을 아끼는 마음, 즉 신심이 근본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나의 몸만 아끼는 마음, 보신의 마음입니다. 강적을 만나면 두려워해서 퇴전하는 마음이다. 교만함 강적을 만나면 두려워해서 퇴전한다. (예) 거대한 몸의 수라도 평소엔 순조로울 때는 큰바다의 물도 무릎까지 밖에 안 오는데 강적인 제석과 싸울 때는 무열지의 연꽃 속에 숨는 작은 몸이 되는 것이다.
교만한자는, 아무 것도 없을 때는 기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투쟁해야 될 때는 도망가는 것입니다. 일본의 학회 간부 중에서도 평소엔 종교적 권위를 부리고 으시대면서 유사시엔 즉, 광포, 인생, 가정문제 등 중요할 때는 퇴전 했다. 저도 몇 명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려고 결의합니다.
닛켄도 교학부장 시절에 일련정종에서 자신은 가장 교학을 잘한다고 으시대었는데 묘신강이라는 절과 논쟁할 때는 간사이의 온천으로 도망갔던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교학부장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거기에 비교(比較)해서 부지런한 SGI 회원님은 신심으로 부지런히 인생의 고난 속에서 광선유포(廣宣流布)의 고난(苦難) 속에서 용기를 내어 투쟁하신다. 그러한 분들이 광포의 공로자(功勞者)들입니다. 그 신심의 마음이 사자왕의 마음이고, 대성인의 마음과 깊이 통하고 있으므로 공덕(功德)이 큰 것입니다.
「정법은 일자(一字). 일구(一句)일지라도 시기에 맞으면 반드시 득도하며 천경(千經). 만론(萬論)을 습학한다해도 시기에 상위 하면 이루어지지 않느니라.」어서 957쪽
이것은 대성인께서 말법에 있어서 사자왕의 마음만 있으면 南無妙法蓮華經 일구만 있으면 성불할 수가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말법에 南無妙法蓮華經를 사자왕의 마음으로 봉창하면 꼭! 성불할 수 있다!! 사자왕의 마음이란 신심이며, 용기이다. 나무(南無)에 해당한다. 나무(南無)의 마음. 사자왕의 마음이 있으면 妙法蓮華經하고 봉창하면 성불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묘(妙)의 삼의(三意)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우주(宇宙)의 근본(根本) 이것을 묘호(妙法)라 한다. 부처라는 인격적(人格的)인 가치(價値)를 꽃피운다. 연화(蓮華)이다. 南無妙法蓮華經는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이다.妙法蓮華經 봉창(奉唱)하면 개화(開花)할 수 있다. 南無妙法蓮華經는 영원(永遠)이라는 의미이지만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妙法蓮華經의 개화로써의 불계의 생명이 나무(南無)하는 마음에 사자왕의 마음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하는 마음, 믿는 마음은 본인(本因)입니다. 열려진 마음은 과(果)이고 인과구시(因果俱時)입니다. 妙法蓮華經라는 불계(佛界) 생명(生命)의 개화(開花)를 과(果), 열려진 불계(佛界)와 구시(俱時), 인과구시이므로 인과 일체의 생명이 妙法蓮華經라고 하는 것입니다. 妙法蓮華經생명을 대성인이 용현하시고 어본존 중앙에 南無妙法蓮華經 日蓮라고 적으셨다. 우주의 근본이 南無妙法蓮華經이다. 이것을 우리들에게 생명의 거울로써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본존님은 사자왕의 마음으로 나무(南無)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본존님은 벽걸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한 사자왕의 마음으로써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한다면 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이 됩니다. 살아있는 日蓮대성인(大聖人)의 대(大) 생명으로 우리들의 힘이 용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사(商業)로써 부르는 南無妙法蓮華經 돈만 받고 중들이 부르는 南無妙法蓮華經는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이 아니고 참된 힘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중이 불러줘서 공덕(功德)이 있다는 南無妙法蓮華經는 자신이 부르는 것이 아니고 중이 불러주는 것은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이 아니고 대성인(大聖人)의 마음이 아니다. 우리들의 제목을 할 때 투쟁하는 마음으로 하면 반드시 불계가 용현(涌顯)된다. 행복(幸福)하게 된다라고 강하게 믿을 때 참된 힘 - 불계가 용현된다.
살아있는 제목(題目)이라 할까. "자신이 믿고 자신이 봉창(奉唱)해서 자신이 공덕(功德)을 받는다"는 것을 700여년 간 잊고 있었던 것을 발견(發見)한 분이 초대회장 마키쿠치 선생이다.
마키쿠치 선생님은 신심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監獄)에서 순교(殉敎), 사제불이의 도다(戶田)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시어 법화경(法華經)을 읽으시고 제목을 불러 '부처란 자기의 생명(生命)이다' 라고 깨달으셨습니다. 이것을 알려 가신 분이 도다선생님, 이께다 선생님이시다.
이께다선생님은 도다(戶田)선생님과 사제불이(師弟不二)의 마음으로써 인격(人格)을 변혁(變革)하는 신심(信心), 인류(人類)의 경애(境涯)를 바꿔갈 수 있는 신심, 지구전체의 평화(平和)를 가져올 수 있는 신심(信心)이다 라고 하시며 163개국에 넓혀 가셨습니다. 그러한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을 사제불이(師弟不二)의 신심(信心)으로써 같은 마음으로 투쟁(鬪爭)해서 공덕(功德) 받아나가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께다선생님은 청년부(靑年部)들에게 『'사제불이(師弟不二)는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이다'라고. 이것은 `부처의 마음', `강한 신심(信心)의 마음', `퇴전(退轉)하지 않는 마음', '깊이 확신(確信)을 갖고 투쟁(鬪爭)하는 마음`, '인생(人生)에 있어서 투쟁(鬪爭)하는 마음`, '광포(廣布)에 있어서 투쟁(鬪爭)하는 마음` 그것이 신심(信心)의 마음이다』라고. 이와 같이 사자왕(獅子王)의 마음에 대해서 깊이 알아주기 바랍니다.
사도어서 968쪽에 나오는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 -- 악귀가 그 몸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바로 불법에 대해서 박해를 가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으므로 이것은 다음시간에....
『보치(寶治)의 합전(合戰)이래 이미 이십육년(二十六年) 금년(今年) 이월십일일(二月十一日)과 십칠일(十七日)에 또 합전(合戰)이 있었느니라. 외도(外道)ㆍ 악인(惡人)은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을 파(破)하기 어려우나 불제자(佛弟子) 등(等)은 반드시 불법(佛法)을 파(破)하느니라, 사자신중(獅子身中)의 충(蟲)이 사자(獅子)를 먹는다 등(等)운운(云云). 대과보(大果報)의 사람을 다른 적(敵)은 파(破)하기 어렵지만 친밀(親密)한 자(者)가 파(破)하느니라. 약사경(藥師經)에 가로되 「자계반역란(自界叛逆難)」이란 이것이니라』 (어서 957P 13행∼끝까지)
※ 보치의 합전이란 호죠도키요리와 미우라야스무라와의 싸움. 이 결과, 미우라씨가 멸망하고 호죠씨의 집권정치가 확립되었다. (교토와 가마쿠라의 싸움)
대과보(大果報)의 사람이란 국주(國主), 국왕(國王)의 사람이다. 대과보(大果報)의 싸움이란 외적(外敵)보다 내란(內亂)에 의해 망(亡)한다. (호죠씨의 일가도 마찬가지다) 대성인은 불법이 멸망(滅亡)하는 것은 외도(外道) 악인(惡人)이 아니고 반드시 불제자(佛弟子) 내부자의 다툼, 부패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사자신중의 충의 자(者)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명심!! 참된 강적(닛켄)과 투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동지와 동지끼리 투쟁하는 것은 사자신중의 충인 것입니다. 동지와 동지끼리 대립해서 원질하는 것은 묘(妙)의 삼의(三義)로써의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妙法蓮華經는 대립(對立)을 총합(總合)해 가는 힘, 대립을 감싸주고 연결(連結)시켜주는 힘,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힘입니다. 반대로 사람과 사람을 분단(分斷)시키는 것은 반(反)묘법이다. 아무리 지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불법을 파괴하는 것은 반(反)불법 입니다. 큰 벌은 당연한 일이다. 광선유포의 신심의 힘, 묘법의 힘으로 사이좋게 해 가는 것이 우리들 동지의 삶의 자세이다.
『인왕경(仁王經)에 가로되「성인(聖人)이 떠날 때 칠난(七難)이 반드시 일어난다」운운(云云).... 후생(後生)을 의심(疑心)하지 말지어다』 (어서 957P)
여기서 인왕경(仁王經)의 경문(經文)을 인용(引用).
대성인은 사도(佐渡)에 추방(追放)됐기 때문에 자계반역의 난(難)이 일어난 것입니다. 대성인(大聖人)이 나라를 구제(救濟)하는 대성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법화경을 설(說)과 여(如)히 수지하면 성인과 같이 된다. 여기서는 "법화경(法華經)은 만인은 원래 부처이다." " 부처는 만인을 부처로 만들고 싶다" 원해서 광선유포(廣宣流布)의 투쟁(鬪爭)을 하는 것은 법화경을 여설수행(如說修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과 같다 라고 말씀. (如說修行) 광선유포(廣宣流布)의 대원(大願)과 같다. 이 실천(實踐)이 부처의 행동(行動)이다. 법화경(法華經)을 대성인(大聖人)과 여(如)히 수행(修行)하니 성인(聖人)과 같다. 만인은 원래 부처이다. 만인(萬人)을 자기와 같은 부처로 만들고 싶다는 이것이 여설수행(如說修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과 같다는 말씀이다.
다음엔 금강명경을 인용하여 대성인(大聖人)의 주장(主張). 행동(行動)이 올바르다는 것을 말씀. 천(天)이 분노하는 것은 일국(一國)의 성인(聖人)을 그냥 내버려두니까 분노(忿怒)하신 것. 원리대로 말하면 여러 가지 재해가 있는 것은 방법(訪法)때문이라고 말씀. 입정안국론에서 이 원리대로 하지 않으면 "전쟁, 자계반역, 타국침핍이 일어난다" 예언이 적중되었다. 세간의 법은 도리를 말한다. 이것을 알고 써놓은 것이 입정안국론인데 적중했습니다. 대성인 말씀대로 실천하면 사후의 일도 틀림없다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해 간다. 올바름을 실증(實證)해간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다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대성인의 예언은 적중했다. 대성인이야말로 가마꾸라, 일본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인데 박해하고, 비웃고, 고소하는 것은 미친 모습 같다. 이것이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입니다. 구제하려는 사람을 박해하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日蓮대성인은 어본불(御本佛)이시다. 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해서 사도어서 전반 부분은 악귀입기신, 후반의 다음의 테마는 숙명전환(宿命轉換)입니다. 단순히 고경(苦境)에 빠지고 괴로움에 있다. 마이너스입니다. 인생(人生)의 고난(苦難), 어려움을 성불(成佛)의 최대(最大)의 가치(價値)로 만들어간다. 그것이 대성인(大聖人)의 마음입니다.
사도어서(佐渡御書)는 읽을 때마다 발심(發心)하는 어서(御書)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인생(人生)의 근본(根本)에서 활력(活力)을 주는 어서(御書)이므로 천천히 읽으시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또 굉장하면 굉장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읽고 모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시간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도어서 강의(3) - 사이토 교학부장(2000. 12. 16. 광선회관)
추운 날씨 속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12월 중순이 되었습니다. 20세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신(信)행(行)학(學)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어서(御書) 공부 잘 부탁합니다. 지난번에 계속해서 오늘은 마지막까지 예정합니다만 길어서 다시 한 번 하려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日蓮대성인(大聖人)의 생애(生涯)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절입니다. 사도 유죄 가시고 4~5개월 지났을 때입니다. 제자를 어떻게 하더라도 지키려는 자애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어서의 후반입니다. 테마는 숙업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숙업전환이 테마인데 마이너스(-)에서 제로(0)가 되면 죄장소멸(罪障消滅)이고 대난(大難)속에서 신심을 하는 것이 숙업전환(宿業轉煥)입니다.
『日蓮도 또한 이렇게 책(責)을 당함도 선업(先業)이 없지 않음이라, 불경품(不輕品)에 가로되 기죄필이(其罪畢已) 등(等) 운운(云云) 불경보살(不輕菩薩)이 무량(無量)의 방법자(謗法者)에게 매리타척(罵打擲) 당한 것도 선업(先業)의 소감(所感)이니라』 (어서958쪽 8행~9행)
지난번 배웠던 것은 박해자(迫害者)는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이다. 자신의 문제로 난을 당한 것은 숙업(宿業)이다. 이론적으로 불경보살품(不輕菩薩品)을 인용하시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께서 자신의 법난은 선업(先業)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불경품의 기죄필이(其罪畢已)는 "그 죄를 이미 필한 후"입니다. 이 경문에서 불경보살이 만인의 성불을 위해 이십사문자(二十四文字)의 법화경[아심경여등 불감경만 소이자하 여등개행보살도 당득작불(我深敬汝等 不敢輕慢 所以者何 汝等皆行菩薩道 當得作佛)]을 설하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불성이 있다.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예배행(禮拜行)을 했습니다. 매리타척은 욕설, 장목, 돌에 맞는다는 박해(迫害)입니다. 예배행을 실천하여 박해받으면서 죄를 소멸(消滅)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기죄필이(其罪畢已)입니다.
이런 수행(修行)을 끝내고 성불(成佛)하였다고 후에 나옵니다. 불경보살의 수행은 1)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다고 믿고 예배행을 수행했다. 2)어떠한 박해를 당해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러한 신심의 강함이 불경보살의 수행입니다. 그리고 돌을 맞을 때 아프니까 누구라도 도망치게 된다. 불경보살은 일단 도망치고 돌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예배행을 계속했다. 대나무와 같이 꺽이지 않고 휘어지는 것은 창가학회의 활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러분도 괴로움이 있다 해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면 누구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믿고 수행하는 것이 불경보살의 수행과 같다. 그러한 실천을 관통하면 숙업전환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죄필이(其罪畢已)의 경문입니다.
이 경문 인용해서 법화경 행자로서 대성인이 난을 당하는 이유를 금생(今生)과 과거(過去)의 비유를 들어 지도하십니다. 금생의 예를 읽겠습니다.
『하물며 日蓮은 금생(今生)에는 빈궁하천(貧窮下賤)한 자로 태어나고 전다라( 陀羅)의 집에서 출생(出生)하였도다, 마음만은 약간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것 같지만 몸은 인신(人身)을 닮은 축신(畜身) 이니라, 어조(魚鳥)를 뭉쳐서 적백이제(赤白二 )로하여 그 속에 식신(識神)을 간직하였으니 탁수(濁水)에 달이 비침과 같고 분낭(糞囊)에 금(金)을 싸 넣은 것과 같도다, 마음은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고로 범천(梵天) 제석(帝釋)마저도 두렵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몸은 축생(畜生)의 몸이니 색심(色心) 불상응(不相應)한 고(故)로 우자(愚者)가 멸시(蔑視)하는 것도 도리(道理)이니라, 마음도 또한 몸에 비하면 달과 금(金)에 비유된다. 또 과거(過去)의 방법(謗法)을 생각함에 누가 알리요, 승의비구(勝意比丘)의 혼(魂)인가 대천(大天)의 혼(魂)인가 불경(不輕)을 경훼(輕毁)한 유류(流類)인 것일까, 실심(失心)의 여잔(餘殘)인가, 오천상만(五千上慢)의 권속(眷屬)인가, 대통제삼(大通第三)의 여류(餘流)이기라도 한가, 숙업(宿業)은 헤아리기 어렵다 』(어서958쪽 9행~14행)
여기서는 금생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최하층이지만 마음만은 법화경을 믿는 고로 제석(帝釋) 범천(梵天) 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몸은 축신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대성인을 깔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과거세의 이유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과거세를 알아보려면 어떠한 방법의 죄업이 있는지 모르지만 금생의 죄업을 소멸시키기 위해 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한 중죄소멸을 위해 난을 받는 것은 과거의 방법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라는 어문입니다.
"승의 비구"라는 사람은 위음왕불의 말법에 나타나서 희견보살을 비방하였습니다.
"대천"은 마하제바를 말하고, 석가 멸후 아버지 어머니 아라한을 죽이고 반성 출가하여 불교교단의 이설을 설하고 대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 승의 비구와 같은 그런 사람의 혼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대천의 파화합승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경훼의 유류, 불경보살을 박해한 사람이다. 그 사람의 흐름이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심의 여잔"이란 수량품에 양의 아버지와 아이의 이야기다. 독기 심입 때문에 본심을 잃는 것을 실심(失心)이다. 실심의 여잔 남은 것이 우리들에게도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천상만"은 방편품에 나옵니다. 부처가 모든 중생의 불계를 용현시키고 싶다. 모든 중생에 가르치고 싶다. 이때 우리들을 필요가 없다. 일어서 나간 5천의 증상만을 이야기합니다.
"대통제삼의 여류" - 화성유품에 나오는 삼천진점겁의 옛날에 대통지승불시대의 이야기이다.
부처가 법화경을 설하였을 때 16명의 왕자들의 설법을 듣고 세 종류의 사람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법을 듣고 발심하여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을 제1류, 법을 듣고 발심하지만 퇴전하는 사람을 제2류, 법을 듣고 발심하지 않고 타락하는 사람을 제3류 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인지는 모르지만 현세의 난을 당해 괴로워하는 것은 과거세의 숙업, 과거세의 이유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을 공부하면 희망이 없어지는 절망이 되어버립니다. 현세는 외면적으로 그렇고 과거세의 방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 대성인은 이러한 이유를 말씀하시면서도 신심을 하면 난을 통해서 최저의 숙명도 최고의 공덕으로 전환할 수 있다. 우리는 숙업을 전환할 수 있다는 참된 희망을 말씀하시고 있다. 다음에는 단련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검(劍)으로 되고 현성(賢聖)은 매리(罵 )함으로써 시험(試驗)되느니라. 나의 이번의 감죄(勘罪)는 세간(世間)의 허물은 조금도 없으나 오로지 선업(先業)의 중죄(重罪)를 금생(今生)에 없애고 후생(後生)의 삼악(三惡)을 면하기 위함이니라』 (어서958쪽 14행~15행)
쇠는 두드리면 단련되어 검이 된다. 쇠 속에 공기 불순물이 들어 있다. 불에 달구에 두드리면 단련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현성은 매리 당함으로 시험되느니라. 현성은 성인을 말한다. 욕을 당하면 인격이 발휘된다. 이러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 현인이고 성인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시련에 인내해서 단련 극복하면 그 속에 불계를 용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신심의 수행이란 시련에 의해서 단련을 받아나가는 것입니다.
난을 당하는 것은 과거세의 죄장을 소멸시키기 위한 시련이고 난이다. 악귀입기신으로 본인이 난을 당하고 있지만 모두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받아들인다.
지금은 단련의 때이다. 시련의 때이다. 나도 그렇게 난을 받고 있다. 제자도 그렇게 하라. 다쓰노구찌 법난, 사도유죄, 대성인께서는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시련이고 난이라고 받아들이고 계신다. 제자들도 그렇게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박해를 가하는 상대방이 나쁘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결국은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법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럴 때 숙업을 소멸(轉換)시킬 수 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의 생명이고 자기 자신의 내적인 문제라고 받아들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돌멩이에 넘어지면 돌멩이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
결국은 불법에서는 자기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받아드리면 퇴전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극복해 나가라. 그렇게 받아드리는 것이 불법의 가르침이다.
하여튼 대난을 극복하고 신심을 관통해 나가는 신심 속에 생각지도 않는 큰 힘이 나타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숙업도 전환시키는 것이다. 대풍 앞의 먼지라고 있습니다. 숙업을 소멸시키는 힘이 나오고 강한 신심에 의해 숙업을 소멸시키고 성불한다. 숙업을 소멸하고 성불시킨다. 난이 있지만 극복하면 대단한 힘과 희망이 나온다. 죄장 소멸에 그치지 않고 숙업마져 바꿀 수 있다. 대단한 힘이 나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람 앞의 먼지라고 하면 또 하나의 생각이 납니다. 우리들이 생명속에 헤아릴 수 없는 숙명을 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에 비유하고 불계를 태양에 비유하여 태양의 빛이 나오면 나머지 별들은 안보이게 됩니다. 불계가 나오면 많은 숙업이 한꺼번에 소멸된다. 숙업의 자신이 불계를 용현하면 남을 구제하는 사명의 자신으로 소생한다. 숙업의 자신이 사명의 자신으로 소생한다. 이것이 인간혁명입니다. 법난을 죄장소멸,숙업전환으로 불경품을 인용한 것은 사도어서의 큰 테마입니다.
불경보살은 난을 당하여 극복하여 부처(석가불)가 되었다. 박해자는 타지옥이다. 불계의 용현을 태양의 출현에 비유하지만 태양이 나타나면 많은 별들이 태양 빛에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된다. 불계가 나타나면 무수한 숙업은 한꺼번에 사라지게 된다. 이것을 대성인은 강조하시고 있다.
같은 시기의 大聖人이 쓰신 開目抄에 같은 의미의 御文이 있습니다.
『결국은 천도 버리시고 제난도 당하여라. 신명을 바칠 뿐이로다. 신자가 육십겁의 보살의 행을 퇴전한 것은 걸안의 바라문의 졸음을 참지 못한 때문이고 구원 대통의 자가 삼오의 진을 경과함은 악지식을 만났기 때문이니라. 선에서든 악에서든 법화경을 버림은 지옥의 업이 되느니라. 대원을 세우리라 일본국의 위를 물려주리라. 법화경을 버리고 관경 등에 붙어서 후생을 기약해라. 염불을 무르지 않으면 부모의 목을 베겠노라는 등의 종종의 대난이 출래한다 할지라도 지자에게 아의가 타파되지 않는 한 채용하지 않으리라. 기 외의 대난은 바람 앞의 먼지와 같으니라. 나는 일본의 기둥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의 안목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이 대선이 되겠노라. 이렇게 맹서한 원은 깨뜨리지 않겠노라』 (어서 232페이지 1행~6행)
왜 난을 당하는가. 불법에서는 죄업이 있어 숙명전환을 위해 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있습니다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천도 버리고 난도 당하여 불계의 생명을 용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원이란 하나는 퇴전하지 않고 물러섬이 없이 지지 않는 것. 그것이 대원입니다. 자신이 괴로워하는 것에 지지 않고 대원을 실천한다. 대성인께서는 당신을 괴롭히는 법난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기둥이 되겠다. 대선이 되겠다. 안목이 되겠다"는 맹서를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투쟁이야말로 불계의 용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은 대성인 불법의 중심사상이고, 창가학회의 기본이념이다. 민중을 구제하는 대원은 불계의 생명에서 일어난다. 확고한 대원을 일으킨 불제자는 법화경 때문에 난을 만나면 더욱 힘을 낸다. 대원만 있으면 숙업의 전환, 숙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천도 버려라. 제난도 당하여라" 그러한 생명이 되었을 때 "일본의 안목으로 된다"는 것이다.
법화경의 법사품(法師品)에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는 스스로 원하여 악세(惡世)에 태어나서 법화경을 설한다고 있다.
"이 사람은 깨달은 사람, 중생을 불쌍하게 여겨 널리 妙法蓮華經를 가르쳐 주고자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 중생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널리 법화경을 설한다. 악업 때문에 고생스레 末法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불계의 생명, 대원의 생명으로 살아가면서 불계의 생명을 용현하기 위해 태어났다. 이것이 법화경 행자의 본질이다. 그러한 인생관을 확립하기 위해 대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해 있다.
대성인께서는 금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도유죄 중인 대성인은 신분이 낮다. 범부와 같은 모습이다. 과거의 죄장은 헤아릴 수 없다. 자기자신이 범부임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 계시다. 妙法蓮華經의 원리에 범부라도 부처가 되지 않는 일은 없다. 범부의 몸으로 즉신성불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참된 본불이다. 범부도 성불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말법의 중생을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범부의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다.
이 진실한 성불, 진실한 부처의 열쇠가 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으로 진심으로 믿는 고로 범천 제석마저도 두렵지 않다. 마음의 소중함을 강조하신다. 마음을 탁수에 달이 비침과 같다. 육체를 분 주머니에 비유하신다. 마음을 금과 같다고 비유하신다. 마음이 야말로 중요하다. 마음의 일점이 약하여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인간은 연에 분동 되어 좌우되지만 맑은 신심 청정한 신심으로 불계를 용현할 수 있어야 한다. 불계를 용현하는 열쇠는 마음이다. 그 외 종교는 엘리트와 시간 있는 사람만 된다고 있지만 어떠한 사람도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신심을 하면 성불할 수 있다.
창가학회는 마음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가학회의 신심이다. 마음의 청정함 신심으로 불계를 용현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시고 있다.
대성인은 자기자신을 전다라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전다라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 (바라문은 승려 , 크샤트리아는 왕, 바이샤는 평민, 수드라는 노예)의 四姓의 밑의 위치이다. 더욱 차별 받는 찬디라의 음사를 "전다라" 라고 한다. 이러한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이제메하는 것을 긍지로 삼는 것이 지금 세상의 풍조이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한 신분의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에게 불계의 참된 생명이 있다. 차별하는 사람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도, 중국, 한반도, 일본으로 전래된 대승불교를 전파한 중요 인물은 왕족, 귀족이나 비슷한 지배계급 신분이다. 日蓮 대성인과 같은 서민계층의 인물은 극히 드물었다. 일본 가마쿠라 불교의 연이 있는 사람은 귀족 지배계층이다. 日蓮 대성인은 서민이고 문화적으로도 후진인 동쪽 섬나라 출신이다. 대성인께서는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서민으로서 법화경을 믿어 불계를 용현하셨다" 만인의 불계를 용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성인의 불법이다. 지금 창가학회의 세계 광포도 것은 그러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반니원경(般泥洹經)에 가로되 「당래(當來)의 세(世)에 가령 가사(袈裟)를 입고 아(我)의 법중(法中)에 있어서 출가(出家) 학도(學道)하여 나타해태(懶惰懈怠)로서 이런 등(等)의 방등계경(方等契經)을 비방(誹謗)하는 일이 있으리니 마땅히 알지어다. 이들은 모두 금일(今日)의 여러 이도(異道)의 도배(徒輩)이니라」등(等) 운운(云云). 이 경문(經文)을 보는 자(者)는 자신(自身)을 부끄러워할지니라. 지금 우리들이 출가(出家)하여 가사(袈裟)를 걸치고 나타해태(懶惰懈怠)함은 이는 불재세(佛在世)의 육사(六師) 외도(外道)의 제자(弟子)라고 부처는 기술(記述)하셨느니라』 (어서958쪽 16행~18행)
지금까지는 대성인과 대성인 문하가 난을 당하는 이유를 공부했다. 다음은 대성인이 불법을 믿는 사람 중(中) "이러한 사람은 불법을 믿고 있지만 불법을 파괴하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반니원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이것은 멸후 승려의 타락을 엄하게 탄핵하고 출가하여 가사를 걸친 신분으로 게으르고 수행도 하지 않는 나타해태 - 수행하지 않고 가사만 입은 - 자는 석존 재세의 외도의 사람이 태어난 것이다. 석존 재세시 육사외도는 유물론, 허무주의, 쾌락주의에 빠진 사람을 육사외도라 하는데 육사외도가 불교내부에 들어온 모습이라고 하신다.
도다(戶田)회장은 "타락한 승려와 같다"고 이 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툭툭 치시면서 반성하라고 하셨다. "타락한 승은 대성인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장래에도 나타날 것이다"라고 도다(戶田)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한 승려가 나타난 것이 日顯이다. 우리들은 닛켄종의 중을 만나면 이 경문을 보여주고 부끄러워하게 해야한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호넨(法然)의 동류(同類), 다이니치(大日)의 동류(同類)가 염불종(念佛宗), 선종(禪宗)이라 칭하여 법화경(法華經)에 사폐각포(捨閉閣抛)의 사자(四字)를 첨부해서 제지(制止)를 가(加)하고 권교(權敎)의 미타(彌陀) 칭명(稱名)만을 세우며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칭하여 법화경(法華經)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다만 문자(文字)를 헤아린다는 따위로 웃는 자(者)는 육사(六師)의 말류(末流)가 불교(佛敎) 중(中)에 출래(出來)한 것이니라』 (어서958쪽 18행~959페이지3행)
여기서 당시 일본의 종교를 ...종,...종, 등 개종한 사람을 대성인께서 일일이 말씀하시고 있다. 염불종이 이렇고 선종이 이렇다고 파절(破折)하시고 있다. 말해야 할 것은 말해야 한다. 불법의 본질을 대성인님은 일일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염불종의 본질은 무엇인가. 또 호넨이 설한 선종의 본질은 시간관계로 각자가 공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걱정스럽도다. 열반경(涅槃經)에 부처가 광명(光明)을 발(發)하여 지하(地下) 일백삼십육지옥(一百三十六地獄)을 비추시니 죄인(罪人)은 한 사람도 없도다, 법화경(法華經)의 수량품(壽量品)에서 모두 성불(成佛)하였기 때문이니라. 단(但) 일천제인(一闡提人)이라하여 방법자(謗法者)만이 지옥수(地獄守)에게 억류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낳아 퍼뜨려 금세(今世)의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으로 되었느니라』 (959쪽3행~5행)
여기서 열반경의 부처가 광명을 발하여 136지옥을 비추시니 모두 성불해서 죄인은 없었으나 일천제인(一闡堤人) 만이 지옥에 억류되어 있었다. 일본의 일체중생은 일천제인이 낳아 퍼뜨린 것이다. 一闡堤人은 눈앞의 욕망과 이해에 사로잡혀 올바르게 살려고 하지 않는 생명을 나타낸다. 무명에 덮여 영원의 진리를 몰라서 욕망에 지배되어 살아간다는 일천제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일천제란 범어의 잇찬티카(이쟌데이카)의 음사이다. 원래의 의미는 욕구하는 사람의 뜻으로 무명에 덮여 영원한 근원의 진리를 모르고 믿지도 않고 욕망과 눈앞의 이해에 지배된 사람이다. 욕망에 지배되어있는 현세주의자도 의미적으로는 같다. 불법에 있어서 정법을 믿을 수 없다. 가르쳐 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는 불신의 사람을 일천제라 한다. 그러니까 방법입니다.
대성인께서는 본질은 같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 이지만 본인은 믿지 않고 믿기는커녕 남에게 해독을 주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인간이 부처와 같은 대 생명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대경애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일천제라고 파절했다. 파절하셨기 때문에 난을 당한다. 이 일점이 중요하다. 난을 당해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말법의 이러한 중생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일천제의 본질을 간파해서 파절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법화경을 지키는 신심을 했다. 그러기 때문에 파절한다. 이 법을 지키는 신심속에 숙명 전환도 있다. 하여튼 정법인 대성인(大聖人)의 불법(佛法)을 헐뜯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죄가 되는가를 쓰고 있다.
과거는 법을 헐뜯었지만 지금 법을 지키는 신심을 하면 어떠한 숙명도 전환하고 호법(護法)의 공덕(功德)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다음에 공부하겠습니다.
사도어서 강의(4) - 사이토 교학부장 (2001. 1. 14. 광선회관)
안녕하세요. 추운 속에서 노고 많으십니다. 제가 일본을 떠나기 전에 선생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몸을 소중히 하십시오. 사이좋게 최고의 인생을 보내주십시오. 저도 제목을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사도어서 959페이지 15행부터입니다.
[ 더?더 日蓮의 선생(先生), 금생(今生), 선일(先日)의 방법(謗法)이 두렵도다. 이러한 자(者)의 제자(弟子)가 되어 이러한 나라에 태어났으니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노라. 반니원경(般泥洹經)에 가로되 "선남자(善男子)여, 과거(過去)에 무량(無量)의 제죄(諸罪). 종종(種種)의 악업(惡業)을 지음에 이 모든 죄보(罪報). 혹(或)은 경이(輕易)당하고 혹(或)은 형상추루(形狀醜陋)하며 의복(衣服)이 부족하고 음식(飮食) 추소( 疎)하며 재(財)를 구(求)하되 이(利)가 없고 빈천(貧賤)한 집 및 사견(邪見)의 집에 태어나며 혹(或)은 왕난(王難)을 당한다"등(等) 운운(云云), 또 가로되 "그 밖의 종종(種種)의 인간(人間)의 고보(고報)를 현세(現世)에 가볍게 받음은 이는 호법(護法)의 공덕력(功德力)에 의(依)하기 때문이니라"등(等) 운운(云云). 이 경문(經文)은 日蓮 자신(自身)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부처의 망어(妄語)로 되었으리라. 일(一)에는 혹피경이(或被輕易) 이(二)에는 혹형상추루(或形狀醜陋) 삼(三)에는 의복부족(依服不足) 사(四)에는 음식추소(飮食 疎) 오(五)에는 구재불리(求財不利) 육(六)에는 생빈천가(生貧賤家) 칠(七)에는 급사견가(及邪見家) 팔(八)에는 혹조왕난(或遭王難) 등(等) 운운(云云). 이 팔구(八句)는 오직 日蓮 한사람만이 몸에 느꼈느니라. (사도어서 959쪽 15행 ~ 960쪽 2행)]
지난 번에는 숙업(宿業)의 문제에 대해서 대성인(大聖人)께서 언급하셨으며 숙업(宿業)중에서 방법(謗法)의 죄업을 강조하셨습니다. 대성인 자신도 과거에 방법이 있었고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방법(謗法)이란 정법(正法)을 헐뜯는 것으로써 불신(不信)의 마음을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범하는 악업(惡業) 중에서 가장 본원적인 중죄(重罪)입니다. 정법인 법화경(法華經)을 헐뜯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법을 헐뜯는 것이므로 생명 자체를 헐뜯는 것으로 됩니다. 근본의 망설임입니다.
방법(謗法)을 극복하는 길은 법화경(法華經) 밖에 없습니다. 사도어서(佐渡御書)에는 이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말법(末法)의 중생(衆生)을 근본적으로 구제하는 것에 대해서 입니다. 방법에 대해서 강조하시고 대성인(大聖人) 자신도 과거에 방법을 저질렀다고 말씀하시고, 방법(謗法)을 극복하는 방법(方法)에 대해서 교시하시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 방법을 지금부터 반니원경(般泥洹經)을 통해서 2가지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배울 부분은 말법 구제의 숙명전환(宿命轉換)의 법리를 명확히 하시고 계십니다.
반니원경의 두가지 비유(譬喩) 중 첫 번째는 [선남자여! 과거에~~~(중략)~~~ 많은 벌을 받게 된다] [혹은 경멸 당하고 멸시 당한다] [혹은 형상이 추한 것] [의복부족] [음식추소]-음식물이 변변치 못하다. 몹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구해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저의 경우에도 같습니다.
[빈천한 집에 태어나다] [사견의 집에 태어난다]-잘못된 종교, 사상의 집에 태어난다. [왕난을 당한다]-권력자로부터 박해, 난을 당한다. 여기서는 현세의 괴로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8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日蓮 大聖人 께서는 마지막에 「이 八句는 오직 日蓮 한 사람만이 몸에 느끼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大聖人)님 혼자서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日蓮 대성인(大聖人)께서는 말법의 때에 신분이 낮은 곳에서 태어나셨다. 그 속에서 불법을 홍통하셨다. 대난을 당하시면서 투쟁하는 속에서 8가지 고통을 혼자서 받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日蓮 대성인(大聖人)의 생애를 공부한다면 8가지 고통에 대해서 이럴 때는 이렇다. 그 때는 그렇다. 라고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각자 공부해 주시기 바란다.
단 형상추루라고 있다. 日蓮 대성인(大聖人)님의 모습이 추루가 아니고 죄인으로 사도에 유죄된 것이 사회적으로 추하다는 것이다.
또 의복부족 음식추소 구제불리에 대해서는 사도유죄이외에 이즈유죄 등의 경우가 있는데 생활을 말씀하시고 있다.
지금 첫 번째 경문과 같이 현세에 8가지 괴로움을 혼자서 받으시고 있다. 「日蓮 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 경문은 헛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日蓮 대성인(大聖人)께서 반니원경에서 인용하신 두 번째의 경문 「그 밖의 종종의 인간의 고보를 현세에 가볍게 받음은 이는 호법의 공덕력에 의하기 때문이니라」등 운운. 日蓮 대성인(大聖人)께서 인간의 호법의 실천의 공덕력에 의해 과거의 중죄를 가볍게 받는 전중경수의 법문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고산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내려오며 내가 남을 경시하면 도리어 자신이 남에게 경이 당하느니라. 형상단엄을 헐뜯으면 추루의 과보를 얻고 남의 의복 음식을 빼앗으면 반드시 아귀가 되도다. 지계존귀를 비웃으면 빈천한 집에 태어나고 정법의 집을 비방하면 사견의 집에 태어나도다. 선계를 비웃으면 국토의 백성으로 되어 왕난을 만나니 이는 통상의 인과의 정해진 법이니라」어서960쪽 2행~5행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불법의 인과에 대해서 8가지의 하나 하나 해당시켜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과거의 선한 행위로서 금세의 선한 결과 낙의 과를 알게 된다. 보를 받는다.
나쁜 행동으로 나쁜 결과 보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법의 인과응보로 선인 선과 악인 악과 선인낙과 악인고과 의 불법의 법칙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평소의 인과의 정해진 법이고 불교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日蓮 大聖人께서는 사도어서에서 일반적인 상의 인과를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인과로서는 말법의 중생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의 인과 과보 응보의 원리로는 숙명전환의 원리로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업 사상에 의해서 과거의 업은 당연하게 현재의 보가 나타납니다. 보가 나타남으로서 하나의 계를 마친다. 그리고 죄업은 소멸되고 인간은 각자의 의지에 의해서 새로이 개척되고 의지에 의해 숙명 전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이외의 인도의 사고방식이다. 과거의 업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고방식이 인도에 있었다.
불교이전 사고방식이다. 제사, 보시, 공양 등의 종교적인 선업을 쌓은 사람은 내세에 천에 태어난다. 악업을 쌓은 사람은 내세에 지옥에 태어난다.
윤회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윤회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종교적인 의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적인 의식을 하기 위해 신의 힘에 의지한다. 이것에 대해 불법의 업 사상은 신의 힘에 의해 숙업전환 되는 것이 아니고 각자 선한 행에 의해 업을 바꿀 수 있다. 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각자의 행에 의해서 숙업전환 할 수 있다. 이것이 불교일반의 상의 인과에 의한다. 상의 인과라 하더라도 그 숙업을 전환하는 것은 숙업전환을 하기 위해 몇 세에 걸처서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무거운 숙업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현세에는 모자라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게된다. 몇 세에 걸친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몇 세에 걸친 긴 시간은 새로운 악업을 쌓는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불교의 인과율에서는 실질적으로는 난사라 할 수 있다. 가령 몇 번이나 태어나서 장원한 기간에 걸처 수행하여 과거 원원겁의 악업을 소멸하여 성불이라는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원한 시간이 필요하다. 역겁수행 역겁수행하여도 악업을 쌓으면 되돌아간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숙명전환은 결국 성불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인간은 숙명으로밖에 살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고 나온 것이 다음의 글월입니다.
숙명전환을 가능케 하는 보다 원초적인 인과에 대해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日蓮 대성인(大聖人)께서는 방법을 멸하는 것은 불계를 용현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불계의 현현입니다.
대성인(大聖人)께서는 숙업은 모두가 가지고 있으나 불계를 현현할 수 있을 때 숙명은 전환된다. 불계를 현현했을 때 숙업을 전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보를 받고서는 그 업을 소멸해나간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상의 인과라 합니다. 불계에 의해 한꺼번에 타파할 수있다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숙업을 지난번에는 별에 비유했는데 불계의 현현은 태양에 비유할 수있습니다. 태양이 나타나면 무수한 별빛이 태양에 흡수되어 태양의 빛이 납니다.
불계의 현현은 무수의 숙업은 한꺼번에 전환됩니다. 불계를 자각하면 대생명력이 살아나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제하게 되고 이것이 숙명전환입니다. 창가학회가 말하는 인간혁명입니다. 오늘 어서는 남을 헐뜯으면 본인이 당하게된다. 생김이 추하다고 하면 본인이 그렇게된다. 이것을 포함하여 위대한 인과는 불계를 용현하는 것이다. 불계를 용현하면 숙명 전환되고 죄장 소멸되고 성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도다 선생님께서 단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낮은 불교의 인과의 설법만으로는 숙명전환은 불가능하고 운명은 정해진 것으로 된다. 인생은 나빠진다. 진미래제에 걸쳐서 .....
과거의 인과를 범부 자신이 타파할 수 있다고 하신 분은 日蓮 대성인(大聖人)이셨다, 南無妙法蓮華經를 봉창하면 보다 나은 운명으로 전환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도중의 인과가 전환되고 구원의 본불이 용현하는 것입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도중의 인과는 선인 선과 악인 악과로 좋은 행은 좋은 과가 나오고 나쁜 행은 나쁜 과가 나오는 것은 일반법 등의 상의 인과이다.
구원의인과는 말법의 범부의 있는 그대로의 생명에 불계를 용현하는 것이다. 불계를 용현하면 도중의 하나 하나의 인과는 다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범부가 구원에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불계의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불계의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불계를 용현한다는 것입니다.
말법의 구제는 모든 중생을 구원의 범부로 자각시키는 수 밖에 없다. 불계를 용현시킬 수밖에 없다고 도다 선생님은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日連 대성인(大聖人)께서는 이 인과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상의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말법의 구제는 이 인과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日蓮 대성인(大聖人)께서는 말씀하시고 다음의 어문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日蓮은 이 인과는 아니며, 법화경의 행자를 과거에 경이한 고로 법화경은 달과 달을 나란히 하고 별과 별이 줄을 짓고 화산에 화산을 겹치고 옥과 옥을 줄지어 놓은 듯한 경을 혹은 높이고 혹은 낮추며 조롱하였으므로 이 팔종의 대난을 만나느니라. 」어서전집960쪽 5행~7행
日蓮 대성인(大聖人)께서 이 팔종의 대난을 당하시는 것은 법화경의 방법 때문이다. 이런 일은 이런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법화경의 방법에의 해 이런 과보를 받는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든 악의 근본은 자기자신의 생명은 ..하는 법을 믿을 수없다는 것, 법을 믿을 수 없다는 것, 불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방법이다. 상의 인과를 포용하는 것이 성불의 인과이다.
이 인과를 포용하는 것이 마음이다.
이것을 포용하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지 없는 지 마음이 중요하다.
자기를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믿을 수없다는 것이다.
불신을 극복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인과 구계의 모든 행위를 감싸는 불계의 생명 이것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 지는 마음이 중요하다. 이것이 성불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정해진다. 자신의 생명의 근저에 묘법이 맥동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이다. 나는 불계를 용현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은 불계를 맥동한다. 자기자신의 믿는 마음에 불계의 생명이 용현하고 이것에 의해 숙명전환도 되는 것이다. 반대로 묘법을 믿지 않는 다거나 묘법에 대한 무지는 학업 악보의 유전을 낳게 하고 그것을 거듭하게되는 것입니다.
다라서 묘법에 대한 信 不信이야말로 성불의 인과로 나아가게 되는가 악에 떨어지는가의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日蓮 대성인(大聖人)께서 말법 중생구제의 원리인 숙명전환을 설하기 위해 방법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방법은 정법을 헐뜯는 행위입니다. 법화경행자를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정법에 배반하는 마음은 고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반세간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묘법에 대한 불신이라는 근본악이 있는 한 여러 가지 선악의 마음 상의 인과 도중의 인과로 악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불신이 근본악인 것입니다.
묘법에 대한 신의 마음 은 불계를 용현하고 불계를 염색하여 범부의 몸 그대로 성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인과입니다.
우리들은 범부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평 불만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제목을 올리고 있는 구원의 범부이다. 의심 없이 信의 마음으로 확신해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도다 선생님께서는 "구원의 범부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상쾌하다. 사이가 좋다. 창가학회 SGI는 민족의 대립 같은 것은 없다. 사이가 좋다. 화를 낼 때도 있지만 상쾌하고 사이가 좋은 것이 구원의 범부이다."
원질 비방 등은 묘법을 비난하는 것과 똑같다. 욕을 하는 것은 방법이 된다. 단연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방법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사도에서 사자 왕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부처가 되느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으로 법화경을 믿는 고로 범천제석도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전중경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배우겠다.
「이 팔종은 진미래제동안 하나씩 나타날 것을 日蓮이 강하게 법화경의 적을 가책함으로써 일시에 모여 일어나게 했느니라. 비유하면 백성이 향군 등에 있을 때는 지두 등에게 아무리 이전을 빚졌다 해도 심하게 책하지 않고 해마다 늦추어 가지만 그 곳을 떠날 때에는 다투어 일어남과 같도다. 이는 호법(護法)의 공덕력(功德力)에 의하는 때문이라고 함은 이것이니라.」어서 960쪽 7행~9행
반니원경의 두 번째 인용문으로 과거의 죄업의 경....
호법의 공덕력에 가볍게 받을 수 있다고 있다. 이 때문에 이 경문에 기초한다.
호법이란 강하게 방법자를 책하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의 실천이라고 말씀하신다.
원래 진미래제에 계속 받을 팔 중고를 금세에 모아서 가볍게 받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팔 종의 고보를 모아 받는 것이 어떻게 공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도는 오늘 날씨와 같이 추위가 심한 곳인데 의복, 옷도 없었다. 그런데 日蓮 大聖人 께서는 공덕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쓰가하라 삼매당은 문도 없는 집이고 생명력이 약했으면 죽었을 것이다.
공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묘법의 불신은 근본악을 호법의 공덕력에 의해 쫓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 방법의 생명의 모든 인과를 악과 불행으로 물들이는 근본악이 있으면 악에서 악으로 고뇌에서 고뇌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악의 유전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받을 고의 대표로 여덟 가지 고보를 다 받는 것은 ...
생명의 불신인 근본악을 쫓는 시련과 단련이기 때문에 고보도 대수롭지 않다. 불계의 생명을 용현하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계를 용현하기 위한 시련이고 단련이라 받아드리는 것이다. 지난번에 공부한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검으로 되고 현성은 매리 함으로서 시험되느니라.」(958쪽13행)라고 있다. 시련이고 단련이라 받아드렸습니다. 개목초의 단련에 관한 어서로 "철은 단련하여 심히 달구어 두드리지 않으면 흠이 숨어서 "여기서는 간단히 줄이겠다.
호법이란 강하게 법화경의 적을 가책하는 포교였다. 절복 포교는 자기자신의 불계를 믿고 남의 불계를 믿는 것이다.
당시는 방법이 만연하여 포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교의 실천의 공덕력에 의해서 진미래제까지 받을 과보를 현세에 받을 수 있다. 이것이 공덕이다.
그리고 불신이 있는 한 미래영겁에 거듭되는 고통이 있다. 약간의 괴로움이 있어도 지금 쫓아내자는 것입니다.
가령 빚이 있는 사람이 점점 이자가 늘어난다. 빚이 조금밖에 없을 때 정신차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일본의 역사를 아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백성이 사는 한 군에 있어서 지두는 작은 지역을 지배하는 사람이다. 빚이 진 사람이 떠날 때 갚으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마을을 떠난다. 생명이 악의 유전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곳을 떠날 때는 자유로운 세계로 나가 선의 유전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의 유전에서 빠져나간다. 선의 유전에 들어간다. 같은 의미이다.
개목초에서 열반경을 인용하여 빈녀의 비유가 있다. 가난한 여성이 애기를 업고 고난의 길을 간다. 그 공덕으로 범천으로 태어난다는 이야기인데 천계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대성인님은 이 빈녀는 불법은 모르지만 자비가 있는 범부이다. 아이는 법화경의 신심을 말하고 범천은 불계를 말씀하신다. 즉 호법의 실천에 의해 죄장소멸만이 아니고 성불이 한다. 불계를 용현한다는 말씀이다.
개목초의 유명한 일절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 천의 가호가 없음을 의심하지 말 것이며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지어다. 나의 제자에게 조석으로 가르쳐 왔건만 의심을 일으켜서 모두 버렸으리라.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것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전집 234쪽 7행~9행) 라고 말씀하셨다.
불계를 믿고 가라는 말씀이다. 어머니다 자식을 안고 있는 모습, 정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투쟁을 하기 때문에 제천의 가호가 없을 수 없다. 현세 안온하지 않음을 의심하지 말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정법을 믿어가라는 말씀이다.
방법 불신은 불계를 믿지 않는 것이다. 무명 무지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신심을 한다. 방법은 안 된다. 법을 지키는 실천을 해야한다. 불신은 불법을 헐뜯는 것이다. 법을 지켰을 때 성불의 공덕이 있다. 법화경의 적을 책한다. 방법이 있는 것이 법의 본질이다. 불계를 믿을 수가 없다. 자기자신도 믿을 수가 없다. 남도 믿을 수도 없다. 이것이 말법의 본질이다. 악을 가책하는 투쟁 이것이 절복이다. 악을 강하게 책해야 한다. 이것이 법을 지키는 것이 된다.
현대의 악은 닛켄종이다. 닛켄에는 어디까지나 투쟁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를 위해 자기의 불계를 믿고 남의 불계를 믿는 것 이것이 광선유포이다. 그런데 악을 철저히 투쟁해야 한다.
불법의 파괴자인 닛켄에게는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 투쟁하지 않는 것은 악을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닛켄의 악에 투쟁해야 한다.
포교는 악과 투쟁하는 것이지만 사람을 욕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인의 불계가 있다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께다 선생님께서는 "포교는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절복이다. 남의 욕을 하고 큰소리 치는 것은 포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진실을 말해서 불계의 가르침을 지킨다. 큰 소리로 말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조용히 말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절복이다.
빗자루로 쓸 때 강하게 쓸면 먼지가 나지만 조용히 쓸면 먼지가 제거된다. 이것을 인용하여 이것이 참된 포교라고 말씀하신 대로이다.
「법화경에는 "여러 무지한 사람이 있어 악구매리등 하고 도장와석을 가하며 내지 국왕, 대신, 바라문, 거사를 향하여 내지 삭삭빈출 당하리라."등 운운, 옥졸이 죄인을 책하지 않으면 지옥을 나오기가 어려우리라 당세의 왕신이 없으면 일련의 과거의 방법의 중죄는 소멸하기 어려우니라. 일련은 과거의 불경과 같고 당세의 사람들은 그를 경훼한 사중과 같으니라. 사람은 바뀌었지만 인은 하나이니라. 부모를 살해란 사람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무간 지옥에 떨어지나니 어찌하여 불경의 인을 행해여 일련일인만이 석가 불이 되지 않겠느뇨. 또 그 제인은 발다바라등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뇨. 단 천겁아비지욕에서 책함을 당하게 될 일이야말로 측은하게 생각되니 이를 어찌해야 하겠느뇨.」어서전집 960쪽 10행~15행
지금까지 난을 당한 것은 숙명전환을 위해서 이다. 여기서 난을 당한 것은 불경보살과 같은 행동으로 성불의 길이 있는 것이다.
법화경 권지품의 경문대로 대성인님께서 포교의 실천을 하셨다. 법화경의 예언대로 박해 당하고 잇다는 것을 간단하게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법화경에는 "여러 무지한 사람이 있어 악구매리등 하고 도장와석을 가하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악구매리, 박해 당했다는 것입니다.
"국왕, 대신, 바라문, 거사"
인도의 높은 계급 지배계급, 참성증상만의 참언에 의해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삭삭빈출 당하리라" 몇 번에 걸쳐 추방을 당했다. 두 번이 유배도 있었다는 것이다. 권지품에서 나오는 삼류의 강적 대성인 님의 박해가 권지품에 부합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불경보살이 박해 당해서 자신의 죄를 멸했다. 기죄필이이다. 대성인 님도 박해를 당해서 숙업을 전환학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불경보살은 불경품에 설해져 있지만 권지품의 박해 하나하나를 인용하시면서 결국 불경보살과 같은 박해를 당했다고 말씀하셨다.
"당세의 사람들은 그를 경훼한 사중과 같으니라"사중은 비구,비구니,우바세,우바이 경훼한 사중과 같다. 불경 보살과 똑같은 난을 당해 사중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어문이다. 불경품에 의해 하나하나 말씀하시고 계신다.
불경보살은 석가 여래가 되었다. 이런 박해를 받아 성불을 하여 석가여래가 된 것이다. 사중은 천겁 무간 지옥에 떨어졌다. 악인이 연에 의해 무관지옥에 떨어졌으나 나중에 법화경 회좌에 참석하였다.
난을 당한 것은 틀림없다. 법화경행자를 박해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틀림없다고 말씀하신다.
"일련은 과거의 불경과 같고 당세의 사람들은 그를 경훼한 사중과 같으니라"
불경과 같은 난을 당하는 대성인 님은 이 인을 쌓은 대성인 님을 성불은 틀림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음에는 생사일대사혈맥초를 공부하고 반은 사도어서를 공부할 것이다.
죄장 소멸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불의 길은 불계를 용현하는 훌륭한 길이다.
사이가 좋은 것이 중요하다.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 이것이 범부다.
생활하는 속에서 사람을 구제하고 동지와 사이좋게 확신을 가지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께다 선생님의 전언 "몸을 소중하게 사이좋게 최고로 행복하게 되어 주십시오.
사도어서 강의(5) - 사이토 교학부장 (2001. 2. 17 광선회관)
『법화경에는 "여러 무지(無智)한 사람이 있어 악구(惡口) 매리(罵 )등하고 도장와석(刀杖瓦石)을 가(加)하며 국왕(國王)ㆍ대신(大臣)ㆍ바라문(婆羅門)ㆍ거사(居士)를 향하여 삭삭빈출(數數出)당하리라"등(等) 운운(云云)』 (어서 960쪽 10행 ~ 11행)
이 앞단에서는 日蓮대성인께서 절복을 실천하는 호법의 공덕력에 대하여 과거의 방법을 금세에 멸하고 과거의 죄장소멸과 숙명전환에 대해서 논하셨습니다. 오늘 배울 부분은 법화경 불경품의 불경보살의 절복의 실천이 죄장소멸뿐 아니라 성불의 근본원인임을 설명해 갑니다.
우선 법화경 권지품을 인용하여 대성인의 절복의 실천이 권지품의 예언임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권지품의 내용<"여러 무지(無智)한 사람이 있어 악구(惡口) 매리(罵 )등하고 도장와석(刀杖瓦石)을 가(加)하며 국왕(國王)ㆍ대신(大臣)ㆍ바라문(婆羅門)ㆍ거사(居士)를 향하여 삭삭빈출(數數出)당하리라"등(等) 운운(云云)>
법화경 제13 권지품에서 세 문장 정도의 글월을 택해서 인용하고 계십니다.
권지품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대로 말법에 법화경을 실천하면 삼류의 강적의 박해를 받는다. 속중(俗衆)증상만. 도문(道門)증상만. 참성(僭聖)증상만등 삼류의 강적에 의해 박해를 받는다고 설하고 계십니다. 자세히 설명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세 문장의 박해를 받는다는 권지품의 예언과 일치하고 있다고 단적으로 설명하고 계신 부분이 이 문장입니다.
「여러 무지(無智)한 사람이 있어 악구(惡口) 매리(罵 )등하고 도장와석(刀杖瓦石)을 가(加)하며」 - 불법에 전혀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악구매리 즉 언어폭력과 도장와석 즉 몸의 폭력을 당한다. 대성인께서 진실로 그러한 폭력, 탄압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음 가장 나쁜 것인데 「국왕(國王)ㆍ대신(大臣)ㆍ바라문(婆羅門)ㆍ거사(居士)를 향하여」―가장 나쁜 참성증상만인 고승(지혜가 높은 승려들)이 뒤에 숨어서 책략을 통해서 국왕, 대신, 지위나 위치가 높은 승려, 재산가들에게 책략을 써서 법화경의 행자를 박해한다는 경문입니다. 이 경문 그대로 대성인께서는 참성증상만의 책모로 권력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삭삭빈출(數數 出)당하리라」- 수 차례에 걸쳐 추방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번 정도 추방을 당한 사람은 역사상 몇 명이 있지만, 대성인께서는 두 번이나 유죄를 당하십니다. 경문 그대로입니다.
이처럼 대성인(大聖人)은 법화경(法華經)의 예언(豫言) 그대로 박해를 받으신 법화경의 행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법화경의 행자로서 박해(迫害)를 받는다는 것은 불법 상(上)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다음부분에 설해져 있으므로 배독(拜讀)해 가겠습니다.
『옥졸(獄卒)이 죄인(罪人)을 책(責)하지 않으면 지옥(地獄)을 나오기 어려우리라, 당세(當世)의 왕신(王臣)이 없으면 日蓮의 과거(過去)의 방법(謗法)의 중죄(重罪)는 소멸(消滅)하기 어려우니라, 日蓮은 과거(過去)의 불경(不輕)과 같고 당세(當世)의 사람들은 그를 경훼(輕毁)한 사중(四衆)과 같으니라, 사람은 바뀌엇지만 인(因)은 하나이니라, 부모(父母)를 살해(殺害)한 사람은 다르더라도 동일(同一)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나니 어찌하여 불경(不輕)의 인(因)을 행(行)하여 日蓮 일인(一人)만이 석가불(釋迦佛)이 되지 않겠느뇨』 (어서 960쪽 11행 ~ 13행)
대성인이 법화경의 행자로서 박해를 받으신 의의를 법화경 불경품(不輕品)에 설해진 불경보살의 실천에 바탕을 두고 설명해 나가고 계십니다.
불경보살의 실천에 대해서 불경품의 내용의 대강을 설명해 두고자 합니다. 아주 먼 옛날 위음왕불이라는 부처의 멸후 상법시대 말엽ㆍ말법시대에 접어들려고 하는 때 증상만의 비구(비구니ㆍ우바이ㆍ우바새) 등이 많은 때에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는 보살이 있었습니다. 이 상불경(常不輕)이라는 말는 언제나 항상 사람을 경시(輕視)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줄여서 불경보살(不輕菩薩)이라고 합니다.
불경보살은 당시 거만할대로 거만해진 비구(출가한 남성)ㆍ비구니(출가한 여성)ㆍ우바새(재가의 남성신도)ㆍ우바이(재가의 여성신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예배를 해나갔습니다. 「아심경여등(我深敬汝等)ㆍ불감경만(不敢輕慢)ㆍ소이자하(所以者何)ㆍ여등개행보살도(汝等皆行菩薩道)ㆍ당득작불(當得作佛) = 나는 깊이 그대들을 존경(尊敬)한다. 감히 경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길을 통하여 마땅히 작불(作佛)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배를 해 나갔습니다.
그 말은 "만인이 부처가 될 수 있다. 성불할 수 있다. 만인에게 본래 부처의 생명이 갖추어져 있다"는 법화경의 근본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기만 해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신들은 모두 성불할 수 있다.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당신들을 가벼이 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문(漢文)으로 24글자이므로 「24문자(文字)의 법화경(法華經)이라고도 합니다.
불경보살은 법화경의 근본 가르침인 만인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입으로써 말하고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예배 행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배를 했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말 뿐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진심을 다해 예배를 했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저 사람은 싫으니까 예배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본인의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을 실천한 것이 아닙니다. 법을 실천했다는 것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받들었기 때문에 법화경의 근본 사상을 실천한 것이 됩니다.
더구나 우리들은 동지(同志)입니다. 저 사람이 싫다. 이 사람이 싫다고 벽을 만들거나 거리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대성인께서는 동지를 경시(輕視)하고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신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방법(謗法)은 범(犯)하지는 않지만 동지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들이 훨씬 범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아주 조심을 하라고 어서(다른 어서에도)에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시 불경품으로 돌아와서, 불경보살은 모두를 예배하면서 돌아 다녔지만, 오히려 불경보살로부터 예배를 받은 증상만의 4부류의 사람은 불경보살을 헐뜯고 매도를 하고 도장와석(刀杖瓦石)을 가(加) 했습니다. 그래도 불경보살은 자신의 신념(信念)의 실천(實踐 =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배를 한다)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증상만의 사람들은 만인성불을 믿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런 말을 불경보살이 말했기 때문에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들 나름의 불교관(佛敎觀)을 세우고 거기에 귀착(歸着)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불교관이 올바르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만심(慢心)이 가득찬 증상만(增上慢)입니다. 불경보살이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불경보살을 우습게 보고 박해를 했던 것입니다. 불경보살은 박해를 받았지만 신념을 굴(屈)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했습니다. 불경보살은 박해를 받으므로 해서 과거세의 자신의 죄(罪)를 소멸(消滅)시켜갔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경문에 설해 있습니다. 기죄필이(其罪畢已)의 경문입니다. (어서 958쪽 8행)
과거의 죄를 모두 소멸시키고 불경보살의 목숨이 다 하려는 순간 불가사의하게도 위음왕불이 설한 법화경이 하늘로부터 빠짐없이 들리고 이것에 의해서 육근(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청정(淸淨-깨끗해지고 풍부해지고)의 공덕을 얻고, 이백만억 나유타의 수명을 연장하고, 수명을 연장한 만큼 사람들을 위해서 법화경을 설해 나갔습니다. 박해를 받고 그것을 극복하여서 생명의 변혁이라는 실증을 보인 후에 공격적으로 법화경을 넓혀갔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점입니다. 공덕을 받아 연장한 수명만큼 법화경을 위해서 열심히 수행해 나간다는 이것이 부처의 삶의 방식입니다. 보살의 삶을 초월한 부처의 삶의 방식입니다. 석가여래도 구원 오백진점겁에 성불한 이래 오랫동안 수행을 했다고 법화경 수량품에 설해져 있습니다만 이것이 열쇠입니다. "어떠한 것이 가장 가치있는 인생인가? 인간으로서 어떠한 것이 가장 귀중한 삶인가?"하는 것은 자신이 실증(부처가 되었다는)을 보여서 이러한 것을 사람들에게 끝까지 설해 가면서 끝까지 살아가는 것. 이러한 삶을 되풀이하는 것이 정말 즐겁다고 깨닫는 것이 불경보살의 인간혁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학회활동이 즐거워서 즐거워서 어찌할 줄 모를 때의 모습이 바로 불경보살의 감각ㆍ감동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학회활동(學會活動)을 하면서 이 보다 더한 나의 인생(人生)은 없다고 여기에 참된 성불(成佛)의 증거(證據)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경품에는 이 불경보살이 나중에 석가여래(釋迦如來)로 태어났다(중요)고 설해져 있습니다. 결국 불경보살의 실천이 석가여래로 태어나는 근본(根本) 원인(原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경보살의 실천(實踐)은 죄장소멸뿐 아니라 성불의 근본적인 길이었습니다. 법화경의 가장 근본인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는, 영원(永遠)한 부처의 생명(生命)을 맛보며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確信)하고, 모두에게 가능하게 말을 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성불을 위한 가장 근본(根本)의 인(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불경품(不輕品)에서 설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증상만의 사중(四衆)은 불경보살이 설하는 법화경을 듣고 불경보살에게 신복수종(信伏隨從)했습니다. 그러나 불경보살을 박해했던 죄업(罪業)에 의해서 천겁(千劫)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죄를 멸하고 난 후에 불경보살에 의해 성불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중은 석존(釋尊) 재세(在世) 시(時)에는 발다바라(跋陀婆羅)등 오백명의 보살로서 다시 태어나 법화경(法華經)의 회좌(會座)에서 성불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 불경품의 대강입니다. 이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처음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입니다. 「불경(不輕)의 인(因)을 행(行)하여 日蓮 일인(一人)만이 석가불(釋迦佛)이 되지 않겠느뇨」라고 대성인께서 성불하지 못 할 이유가 없다는 근본이유를 밝히고 계십니다.
권지품(勸持品)에서는 "삼류의 강적에 의해 법화경의 행자가 박해를 받는 모습"이 설해져 있습니다. 불경품(不輕品)은 "박해를 받아도 끝까지 더욱 관철해 나가는 법화경 행자의 실천에 의해 죄장소멸이 있고 성불이라는 굉장한 공덕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지품과 불경품은 표리일체(表裏一體)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日蓮대성인께서는 데라도마리어서(寺泊御書) - "데라도마리"는 일본 본섬에서 사도섬으로 건너가기 전에 머문 곳, 그 곳에서 쓰신 어서 -에는 「과거(過去)의 불경품(不輕品)은 지금의 권지품(勸持品), 지금의 권지품(勸持品)은 과거(過去)의 불경품(不輕品) (어서 953쪽 18행 ~ 954쪽 1행)」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거의 불경품이란 석존의 성불의 근본원인을 나타내는 불경보살의 실천을 말하며, 지금의 권지품이란 삼류의 강적의 박해와 싸우는 대성인의 실천을 말합니다. 대성인의 실천과 불경보살의 실천이 똑같다는 것은 대성인의 실천이 성불의 근본원인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성인의 실천과 불경보살의 실천이 어떠한 점에서 같은가? 대성인과 불경보살의 실천이 왜 성불의 근본원인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또 다른 어서 「현불미래기(顯佛未來記)」에 대성인과 불경보살의 실천의 공통점을 세 가지로 논하고 있습니다. ①불경보살이 넓힌 이십사문자(二十四文字)의 법화경과 대성인께서 홍통하는 南無妙法蓮華經는 말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같다는 것입니다. ②불경보살과 대성인님이 출현한 시(時)가 같다. 불경보살은 상법시대 말엽이고 대성인님의 출현은 말법의 초(初)로써 모두 악세(惡世)에 출현했다는 점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③불경보살의 수행의 단계는 가르침을 신해(信解)하여 처음으로 환희의 마음을 일으키는 단계이고, 대성인의 수행의 단계는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 단계로써 모두 낮은 단계의 범부(凡夫)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인 믿는다는 수행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공통점인「말은 다르지만 넓히는 내용은 같다」는 것은 불경보살이 넓히는 교법이란 이십사문자(二十四文字)의 법화경 <아심경여등(我深敬汝等)ㆍ불감경만(不敢輕慢)ㆍ소이자하(所以者何)ㆍ여등개행보살도(汝等皆行菩薩道)ㆍ당득작불(當得作佛) - 나는 깊이 그대들을 존경한다. 감히 경만(輕慢)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대들은 모두가 보살의 도(道)를 행하여 마땅히 작불(作佛)함을 득(得)하리라 (어서 사전 1258~1259쪽)> -입니다. 대성인은 다른 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거(過去)에 불경보살(不輕菩薩)은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불성(佛性)이 있으니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면 반드시 성불(成佛)하리라. 이를 가벼이 하면 부처를 가벼이 하는 것으로 된다고 하여 예배행(禮拜行)을 수행(修行)했느니라(취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 불경보살의 24문자의 법화경은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하고, 각각의 사람에게 자신의 내적 불성(佛性)을 각지(覺知)시키는 것을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불경보살은 24문자의 법화경을 설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성인께서는 南無妙法蓮華經의 의의에 대해서 다른 어서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모든 부처가 깨달은 묘법(妙法)이 똑같다는 도리(道理)를 밝혀 명명(命名)한 것이다. 그것이 妙法蓮華經다」라고. 따라서 南無妙法蓮華經에는 그것을 단 한마디 부르는 것에 의해서 불성을 모두 일으켜 각성시킨다는 무량(無量) 무변(無邊)의 공덕(功德)이 있는 것이라고 대성인께서는 가르치고 계십니다.
결국 대성인님의 南無妙法蓮華經도 불경보살의 24문자의 법화경과 똑같이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는 진리를 설한 것이며, 대성인의 홍교도 이 진리를 넓히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것을 실현해 가기 위해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도 있고 당신에게도 있다. 이러한 진리를 단언해 가는 것에야말로 대성인과 불경보살의 실천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말법이라는 악세에 있어서 만인의 불성을 스스로 깨워 가는 이것이 사람들을 구제해 가는 가장 본원적인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대성인께서는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고 단언해 가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실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불성을 확신하고 그 확신을 모두에게 말해가는 실천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성불의 근원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대성인님은 불경보살의 사람을 존경한다는 실천이야말로 불법수행의 간심이라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어서 참조>
절복(折伏)이란 상대방의 나쁜 점을 말하는 것 같지만,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공경(恭敬) 존경(尊敬)하는 것입니다.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고 단언하는 실천이 바로 절복입니다. 하지만 악세에는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절복으로 되어) 강하게 받아들여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믿을 수 없다. 너무나 이상적(理想的)인 말을 한다라고, 꿈같은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이 악세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강하게 받아들이는 절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고 단언을 하므로 해서 대성인께서는 수 많은 박해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악세(惡世)라는 두 번째 공통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근본은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넓히고 실천해 간다는 것이 대성인과 불경보살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대성인과 불경보살의 두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악세에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이라는 근본적인 선한 선성(善性)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인간경시(人間輕視) 생명경시(生命輕視)의 악세야말로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는 진리를 단호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으면 그러한 사상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는 진리(眞理)를, 자신도 믿고 타인에게도 확신(確信)을 갖고 말해 가는 것이야말로 불법 실천에 있어서 불가결(不可缺)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대성인과 불경보살이 말하려고 했던 부분도 이 부분입니다. SGI는 이 사상을 자기 자신도 실천하고 타인에게도 단호하게 말해 가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동지들끼리 서로 싸우거나 헐뜯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일입니다.
세 번째 공통점인 두 사람 모두 수행 단계가 낮은 범부라는 것은 한사람의 범부가 자신의 생명의 불성을 확신하고 그것을 신념으로써 관철하고 불성을 증명해서 만인에게 파급되어 갔을 때 굉장한 설득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한사람의 서민으로서 불계의 생명을 증명해 가는 사명을 갖고 태어난 지용의 보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성인과 불경보살의 실천은 악세의 사람들에게 만인을 본원적으로 구제해 가는 근본적인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을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박해를 받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투쟁한 사람이 증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신 분이 대성인과 불경보살입니다.
중요한 부분이므로 또 다시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불경보살과 대성인에 의해서 나타내어진 진리 즉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는 진리를 단호히 말해가는 실천이야말로 상대방의 불성을 촉발시켜 가는 실천입니다. 그 가르침을 듣게 하는 것에 의해 상대방의 불성을 촉발하는 것을 문법하종(聞法下種)이라고 합니다. 불성의 촉발은 성불의 종자를 심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하종(下種)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단호히 말해가는 실천은 인간경시 생명경시의 악세에 있어서는 자신과 타인의 불성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미혹인 무명(無明)을 타파해 가는 절복의 실천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화경에는 불경보살이 상대방의 잘못. 그릇됨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책했다고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고 24문자로 집합시켜서 단호하게 말해 나가면서 난(難)을 불러 일으키고 난을 극복하면서 사람들을 구제해 나갔던 것입니다.
日蓮대성인께서는 생명에 미치는 대난(大難)을 타고 넘으면서 삼대비법(三大秘法)의 南無妙法蓮華經의 묘법을 홍통하셨습니다. 대성인께서 받은 대난(大難)은 불경보살의 난(難)을 초월(超越)한 것이며, 실로 대성인은 불경품에 설해진 절복행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석존(釋尊)의 불법(佛法)으로는 구제(救濟)하지 못하는 말법(末法)의 중생(衆生)ㆍ방법(謗法) 불신(不信)이라는 극악(極惡)의 생명(生命)에 물들어 있는 중생(衆生)을 구제한다는 말법(末法)의 본불(本佛)로서의 대자비(大慈悲)의 실천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불경보살(不輕菩薩)도 日蓮대성인(大聖人)도 이러한 진리를 단호히 말했기 때문에 절복(折伏)의 형태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앞에서 말했던 호법(護法)의 실천(實踐)이 되는 것입니다. 이 호법의 실천에 의해서 숙명전환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악세(惡世)라는 인간을 믿지 못하는 속에서 굴하지 말고 용기를 갖고 만인에게는 불성이 있다. 만인은 부처이다라고 단호히 말해 가는 것에 의해 자신의 확신이 깊이 각인(刻印)되어 자신의 마음(생명)에 실제로 불성(佛性)이 열려져 가는 것입니다. 대난을 극복해 가는 것에 의해 더욱더 자신의 불성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고, 불계의 생명이 더욱더 용현된다는 것입니다. 투쟁에 의해서 불계가 더욱 확고해 져서 성불의 공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불신(不信)을 극복(克復)하여 단호하게 말해 가기 위해서는 용기(勇氣)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했던 사자왕(獅子王)과 같은 마음이란 실(實)로 악세에서 진리를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단호히 말하는 것에 의해 자신의 확신도 깊어지고 불계가 용현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하종을 하고 자신에게는 수행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세에 만인이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여 법을 지켜가는 실천에 의해서 자신도 공덕을 받고 그 힘에 의해서 성불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장소멸뿐 아니라 성불의 길이 되는 것이다. 대난을 받는다는 것은 깊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음은 불경보살은 이렇게 공덕을 받았는데 박해를 한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또 그 제인(諸人)은 발다바라(跋陀婆羅)등(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뇨, 단(但) 천겁아비지옥(千劫阿鼻地獄)에서 책(責)함을 당하게 될 일이야말로 측은하게 생각되니 이를 어찌해야 하겠느뇨. 그 경훼(輕毁)의 중(衆)은 처음엔 비방(誹謗)했지만 후(後)에는 신복수종(信伏隨從)하여 죄(罪)가 대부분(大部分)은 소멸(消滅)되고 조금 남아있었는데 부모(父母) 천인(天人)을 살해(殺害)한 만큼의 대고(大苦)를 받았었다. 당세(當世)의 제인(諸人)은 개심(改心)할 마음이 없으니 비유품(譬喩品)과 같이 무수겁(無數劫)을 경과(經過)할 것이고 삼오(三五)의 진점(塵點)을 보내야 할 것이니라』 (어서 960쪽 14행~16행)
박해를 참고 정법을 끝까지 넓힌 불경보살은 성불했다는 것에 반해서, 불경보살을 박해했던 증상만의 사중은 나중에 개심은 했지만, 법화경행자를 박해한 죄에 의해서 천겁동안 아비지옥(阿鼻地獄=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그 죄를 멸했다고 불경품에 설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경보살을 또 다시 만나 불경보살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발다바라등의 석존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 석존의 슬하에 모여 보살로서 법화경을 듣고있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박해를 받은 불경보살은 과거의 죄장을 금세에 소멸시킬 수 있었다는 것에 반해, 박해를 한 증상만의 사중은 천겁동안 아비지옥의 고뇌(苦惱)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죄를 소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과보(果報)에 있어서 크나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불경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인데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불경보살로부터 정법(正法)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연에 의해서 최종적(最終的)으로는 구제를 받았던 것입니다. 연(緣)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순수하게 법을 믿어 가는 것을 순연(順緣)이라고 하고, 정법에 위배하면서 연을 맺어가는 것을 역연(逆緣)이라고 합니다. 정법은 순연은 물론 역연까지도 최종적으로는 구제할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만인에게 불성이 있다ㆍ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정법을 단호히 말해 가는 법화경 행자의 말과 행동이 역연의 사람들의 생명의 오저(奧底-깊은 곳)를 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흔드는가하면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생명의 오저에 있는 미혹에 생명의 진실이 반응을 보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를 받아도 정법을 끝까지 말해가는 실천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법화경 행자의 자비(慈悲)라고 대성인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상 불경품(不輕品)에 준(準)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만, 결론적(結論的)으로 말하면 묘법 광포(妙法 廣布)의 주체자(主 者)가 되는 것 -박해자가 아니라- 박해를 받아도 불법을 넓혀 가는 주체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죄장소멸(罪障消滅)ㆍ일생성불(一生成佛)의 직도(直道)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어서의 마지막부분을 배독합시다.
『이것은 차치(且置)하고 日蓮을 믿는 듯하던 자(者)들이 日蓮이 이렇게 되자 의심(疑心)을 일으켜 법화경(法華經)을 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日蓮을 교훈(敎訓)하고 자신(自身)이 현명(賢明)하다고 생각하는 벽인(僻人)들이 염불자(念佛者)보다도 더 오랫동안 아비지옥(阿鼻地獄)에 있게 될 것은 불쌍하다고 할 수 밖에 없구나. 수라(修羅)가 부처는 십팔계(十八界) 나는 십구계(十九界)라 말하고 외도(外道) 가로되, 부처는 일구경도(一究竟道) 나는 구십오구경도(九十五究竟道)라고 말하였듯이, 日蓮房(니치렌보)는 사장(師匠)이긴 하시지만 너무나 강경(强硬)하니 우리들은 부드럽게 법화경(法華經)을 홍통(弘通)하리라고 말함은 반딧불이 일월(日月)을 비웃고 의총(蟻塚)이 화산(華山)을 얕보며 정강(井江)이 하해(河海)를 깔보고 까치가 난봉(鸞鳳)을 비웃음과 같으니라, 비웃음과 같으니라. 南無妙法蓮華經. 문영(文永) 구년(九年) 三月 二十日 日蓮제자(弟子)단나(檀那)등(等)어중(御中)』 (어서 960쪽 17행 ~961쪽 3행)
다쓰노구치(龍口)법난. 사도(佐渡)유죄라는 일련(一連)의 법난은 日蓮대성인 혼자 만이 아니라 대성인의 문하(門下) 전체에게 가해졌던 박해였습니다. 몽고의 침략(侵略)이 임박해진 정세(政勢) 하(下)에서 방위 체제의 강화(强化)를 도모(圖謀)하고 있었던 가마쿠라 막부(幕府)는 대성인의 교단을 통제에 위반하는 위협집단이라고 간주하고 공격적인 탄압(彈壓)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성인 뿐만 아니라 문하에 대해서도 소령(所領)을 몰수(沒收)한다거나 추방(追放)한다거나, 벌금(罰金)등의 처벌(處罰)이 여지없이 가해졌던 것입니다.
문하 중에는 묘이치니(妙一尼) 부인의 남편도 소령몰수라는 탄압이 가해집니다. 하지만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신심을 관철해 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해에 직면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나, 의심(疑心)하는 마음을 일으켜 퇴전(退轉)하고 반역(反逆)해 갔습니다. 대성인께서는 평소부터 법화경의 신심을 관철하는 사람은 말법(末法)의 초기(初期)에는 반드시 난(難)이 나온다고 알아서 각오(覺悟)하라고 가르쳐 왔지만 실제로 법난(法難)이 일어나면 <인간세계의 모습이지만> 대부분의 문하들이 의심을 일으켜 떠나갔던 것입니다.
그 중에는 퇴전하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성인님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日蓮房(니치렌보)는 사장(師匠)이긴 하시지만 너무나 강경(强硬)하니 우리들은 부드럽게 법화경(法華經)을 홍통(弘通)하리라」라는 부분이 비판의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법화경은 올바르지만 日蓮이 말하고 있는 절복이라는 방법(方法)이 그릇되어 있다. 절복 따위를 하기 때문에 적을 만들고 난(難)을 초래한다. 우리들은 좀더 부드럽고 보다 능숙하게 법화경을 넓혀 가자라고 주장합니다만, 실제로는 법을 홍통하지도 않고, 홍통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해서 대성인을 비판해 갔던 것입니다. 대성인께서 말씀하시는 절복의 의미는 (진실을 단호하게 말해 가는 것의 의미) 단순한 포교(布敎)의 방법론(方法論)이 아니라 불성을 믿을 수 없는 말법 악세의 사람들을 구제해 가기 위한 유일(唯一)한 길이었으며 진실을 말해 가는 용기에 의해서 자신의 확신을 깊게 하고 성불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타인을 구하고 자기 자신이 성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반역자(反逆者)들의 어리석은 비판에 대해 대성인께서는 반딧불이나 의총이 태양이나 화산을 얏보는 것에 비유하시며, 참으로 이상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퇴전자 중(中)에는 신앙을 버렸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신앙을 버리도록 획책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람들로 쇼오보, 노토보, 나고에부인을 대표로 들고 계십니다.
그들이 반역(反逆)한 원인(原因)에 대해서 대성인께서는 몇 가지로 들고 계십니다. 그 중 하나는 욕심(慾心)이 너무나 강했다. 겁쟁이이고, 어리석은 마음이며, 그리고 자신은 지혜자(智慧者)라는 만심(慢心)을 예로 들고 계십니다. 퇴전한 반역한 사람들은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 신심을 퇴전(退轉)하면서 천박(淺薄)한 자신의 지식(知識)을 휘둘러서 대성인을 비판(批判)하는 것으로 자신(自身)들을 정당화(正當化)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 겁쟁이는 만심(慢心)과 실(實)은 하나입니다. 똑같습니다. 이미 사도(佐渡) 어서 앞부분에서 「교만한 자는 강적을 만나면 반드시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무열지의 연꽃 속에 숨어버린 수라의 예를 들어 겁쟁이는 만심과 표리일체(表裏一體)임을 설명했습니다.
퇴전 반역하는 무리들은 난을 받지 않도록 피해 가는 것이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성인은 그런 부분은 서투르다라고. 그렇기 때문에 대성인은 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서 난을 받으며 정법을 넓혀 가는 대성인의 실천의 깊은 의미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법악세의 중생을 위해 숙명전환과 성불의 길을 대성인께서 열어주시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어서의 처음부분에 눈앞의 먹이에 속아 목숨을 잃고 말았던 물고기나 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퇴전하고 반역한 무리들의 어리석음을 물고기나 새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대성인께서는 「법화경(法華經)을 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日蓮을 교훈(敎訓)하고 자신(自身)이 현명(賢明)하다고 생각하는 벽인(僻人)들이 염불자(念佛者)보다도 더 오랫동안 아비지옥(阿鼻地獄)에 있게 될 것은 불쌍하다고 할 수 밖에 없구나」라고. 퇴전하고 반역한 무리들의 중죄(重罪)를 지적함과 동시에 그들을 불쌍하다고 매우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사법에 집착하여 대성인을 박해해 온 염불자들의 죄보다 정법을 수지하였으면서 나중에 퇴전하고 반역한 자들의 죄가 훨씬 무겁고 크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임>
형제초에는 「처음에는 믿고 있었으나 세상이 두려워 버리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그 중에는 원래 비방한 사람보다 더 강성히 비방하는 사람이 허다하도다」라는 어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퇴전, 반역한 무리들은 처음부터 정법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 보다도 더욱 강하게 정법을 비방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퇴전자는 자신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숨기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보다 더 심하게 비방을 하기 때문에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을 더 깊이 상처를 주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더 심한(깊은)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비방하는 것 보다, 조금이라도 정법을 배운 사람이 비방하는 것이 주변에 보다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실제로 "노토보"라는 반역자는 주변의 문하들까지 꼬셔서 퇴전시켰기 때문에 정법에 대한 불신을 교단의 내외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반역하는 행위는 처음부터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비방보다도 훨씬 그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초에서는 정법을 아끼는 마음으로 불법 신념의 용기있는 투쟁에 일어서는 사람은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힘과 동시에, 정법에 위배하는 사람의 그 반역의 마음의 정도에 따라서 각각의 죄가 결정되어 진다는 준엄한 인과율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마지막 추신부분을 배독. 『사도(佐渡)의 지방(地方)은 종이가 없는데다가 각인별(各人別)로 말하려면 번거러움이 있고 일인(一人)이라도 빠진다면 원망하리라. 이 서신(書信)을 뜻있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보시고 사색(思索)하시어 마음을 위로(慰勞)하시라. 세간(世間)에 더한 한탄(恨歎)이라도 출래(出來)한다면 그 보다 덜한 한탄(恨歎)은 별것이 아니로다. 당시(當時)의 싸움에 사망(死亡)한 사람들은 실(實) 부실(不實)은 차치(且置)하고 얼마나 슬프겠느뇨, 이자와(伊澤)의 입도(入道) 사카베(酒部)의 입도(入道)는 어떻게 되었는지, 가와노베야마시로도쿠교지전(河邊山城得行寺殿) 등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써서 보내시라, 외전서(外典書)인 정관정요(貞觀政要) 모든 외전(外典)의 이야기 팔종(八宗)의 상전(相傳)등(等)이 없으면 편지도 쓰지 못하므로 꼭 명심(銘心)하고 명심(銘心)하여 보내주시라』 (어서961쪽 7행 ~ 11행)
여기서는 대성인께서 문하 한사람 한사람에게 편지를 쓸 수 없는 사정을 말씀하시면서 이 사도어서를 문하들이 모여서 읽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성인님 재세 당시부터 문하들이 서로 가끔 모여서 격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성인께서는 문하의 연대. 단결을 소중히 하셨다는 것을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석존의 시대부터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격려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힘든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격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석존의 시대부터 자연스럽게 조직이 완성되어갔다는 것입니다. 승가(僧伽)라고 하는데 승려(僧侶)라는 말도 이 승가(僧伽)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수행에 면려하고 서로 격려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승가(僧伽)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본래는 승가에 소속되어있는 사람들을 승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에서 승려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주 「진지하게 광선유포에 투쟁하고 있는 SGI멤버야말로 진정한 승려이다. 진정한 출가자이다」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SGI멤버는 서로 격려하면서 훌륭한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절대로 서로 싸우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대성인께서는 전쟁에 죽어 가는 고통의 슬픔에 비하면 대성인 문하의 박해는 아주 작은 고난이 아닌가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또 이자와 입도라든지 감옥에 들어가 있는 문하들을 걱정하면서 소식을 전해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어본불(御本佛)의 마음입니다. 모든 문하들에 대해서는 격려하고, 고생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배려하고 마음을 쓰는 것이 진정한 SGI라는 승가의 모습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사도어서의 처음부분에는 당시의 전쟁에 의해서 돌아가신 동지들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내가 회향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선공양하겠습니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공로자에 대해 진심으로 회향ㆍ추선공양하는 마음, 日蓮과 똑 같은 마음으로 투쟁하고 있는 동지를 격려하는 마음이 日蓮 불법(佛法)의 가장 핵심(核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실천 속에 생(生)과 사(死)를 초월한 묘법의 당체를 자신이 확신해서 확립해 갈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삶을 초월해서 생명의 영원한 힘을 실감해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힘을 합쳐(연대=連帶)야만 실감할 수 있는 것이지, 분단의 끊어진 마음에서는 절대로 실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에 연계해 가자`라는 마음에 만이 묘법을 실감 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성인께서는 사도의 쓰가하라 삼매당이라는 곳에 유배되었습니다. 사도는 죽은 사람을 버리는 아주 험난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먹을 것도 없고, 혹한(酷寒)과 싸우는 극한 상황 속에서 대성인께서는 난을 받고 있는 문하를 격려하고, 또 자료를 구하시면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전개하고 계십니다. 이 대성인의 행동에 일체중생을 화도(化導)하시려는 어본불의 대자비의 경애를 배알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문하들도 사도어서의 여러 곳곳에 보여지는 대성인의 깊은 배려의 마음에 무엇보다도 많은 격려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도어서의 첫 번째 강의 때도 대성인님의 자비를 설한 부분에 대한 도다선생님이 받으신 감동을 말씀드렸지만, 한번 더 말씀드리면, 도다선생님은 이 사도어서를 배독하고 깊이 감동받은 것은 대성인 자신의 목숨도 위험하고 생활도 핍박받고 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마치 나의 자식처럼 사랑하시는 모습이 절실(切實)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봄에 바다에 커다란 바위가 의연하게 솟아있고 바위주변에 햇살을 받은 작은 물결들이 모여있는 풍경과도 닮아있는 느낌이라고 도다선생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도다선생님의 관점에 서서 다시한번 사도어서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전체를 되돌아보는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이 사도어서는 대난(大難)을 만나 괴로워하고 있는 문하를 격려하기 위해서 대난이 갖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는 어서(御書)입니다. 처음 부분에 대성인(大聖人)께서는 세상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신명(身命)을 아끼지만 불법(佛法)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불법을 위해 버려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 성불(成佛)의 열쇠는 불석신명(不惜身命)에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성인의 실천을 예로 드시면서 구체적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즉 악승(惡僧=사악한 종교적인 권위자)와 사악(邪惡)한 권력자(權力者)가 결탁(結託)해서 정법을 행하는 지자(智者)들을 박해하려 할 때는 정법을 아끼고 지키는 마음에서 용기(勇氣)를 불러 일으켜서 감연(敢然)히 악과 싸우는 사람은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권력(權力)과 종교적(宗敎的)인 권위(權威)의 결탁(結託)이라는 최고의 두려운 적과 싸우는 최고의 용기를 대성인의 사자왕(獅子王)과 같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자왕(獅子王)과 같은 마음ㆍ정법(正法)을 지키기 위해 일으키는 최고(最高)의 용기(勇氣)야말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비롯하여 인생(人生)을 불행(不幸)하게 하는 여러가지 미혹(迷惑)이나 괴로움을 타파(打破)하고 우리들 (생명) 안에 있는 영원(永遠)한 불계(佛界)의 생명(生命)을 나타내 갈 수 있는 열쇠입니다.
대성인은 광기(狂氣)어린 박해자(迫害者)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본질(本質)을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 즉 악귀(惡鬼)가 그 몸에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간파(看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또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의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괴로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 문하(門下)들은 자신의 속에 숙업(宿業)이 있기 때문이며 그 과보(果報)로써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의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박해(迫害)나 고난(苦難)을 타인(他人)이나 환경(環境)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원인(原因)을 찾는 것이 불법(佛法)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인 것입니다. 자신(自身)의 문제로 받아들여 가는 것에 근본적(根本的)인 해결(解決)이 비로소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만 원인(原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원인이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根本的)인 길이 숙명전환(宿命轉換)이고 성불(成佛)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앞서 말씀한 정법(正法)을 지키기 위해서 일으키는 투쟁(鬪爭)하는 용기(勇氣)ㆍ사자왕(獅子王)과 같은 마음은 가장 근본적인 악업(惡業)인 과거세(過去世)의 방법(謗法)의 죄(罪)까지도 타파(打破)해 가는 힘이 있습니다. 법(法)을 지키는 용기(勇氣)만이 과거(過去)의 방법(謗法)의 죄(罪)를 소멸(消滅)시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방법(謗法)의 악(惡)까지도 소멸(消滅)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여러 가지 작은 숙업(宿業)들을 소멸시키지 못할 리 없다. 모두 소멸시켜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숙명전환(宿命轉換)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법(法)을 지키는 용기(勇氣)로 박해(迫害)라는 고난(苦難)을 받고 있지만, 과거(過去)의 모든 숙업(宿業)을 지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에 걸쳐서 받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과거의 헤아릴 수 없는 죄장(罪障)의 과보(果報)를 금생(今生)의 투쟁(鬪爭)으로 모두 지워갈 수 있다, 소멸시켜갈 수 있다는 것을 대성인(大聖人)께서는 전중경수(轉重輕受=무거운 죄보를 가볍게 받아서 모두 소멸시킬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단순(單純)한 죄장(罪障)의 소멸이 아니라 실(實)은 성불(成佛)의 근본원인(根本原因), 성불의 길인 것입니다. 마이너스(-)에서 제로(0)가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플러스(+)로 전환(轉換)해 갈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악(惡)에서 악(惡)으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유전(流轉)했던 지금까지의 생명(生命)을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불계(佛界)를 만끽(滿喫)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까지 불계를 가르쳐서 구제(救濟)해 가는, 부처와 똑같은 생명(生命)의 즐거운 유전(流轉)으로 바꿔갈 수가 있다는 것이 사도어서(佐渡御書)의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격려(激勵)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문하(門下)들에게 대난(大難)의 의미(意味)를 가르치면서 불계(佛界)로 이끌어 가고자 했던 것이 사도어서(佐渡御書)입니다. 도다(戶田)선생님은 거기에 바로 어본불(御本佛)의 대자비(大慈悲)를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대자비(大慈悲)로 이어지는 SGI 조직 속에서 착실(着實)하게 정법(正法)을 수호(守護)하면서 개인(個人)이 실증(實證)을 보여 나가는 그리고 세계(世界)에 그러한 생각을 넓혀 나가는 행동(行動)을 했으면 합니다. 다섯 번에 걸쳐 사도어서(佐渡御書) 강의(講義)를 했습니다만 저 자신도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진심(眞心)으로 감사(感謝)드립니다. <끝>
「강적을 굴복시켜야 비로소 역사(力士)임을 안다.악왕이 정법을 파하는데 사법의 승들이
한편이 되어 지자(智者)를 살해하려 할 때는 사자왕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가 반드시
부처가 되느니라.예컨대 니치렌과 같다」 (사도어서 957쪽)
이 어문의 요점 - 대성인은「사자왕과 같은 마음」이야말로 말법의 성불의 열쇠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자왕과 같은 마음] - 정법을 지키고 넓히기 위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싸우는 용기입니다.
대성인은, 다른 어서에서는 [사자왕의 마음]이라고 간결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을 해도 좋습니다.
이 [사자왕의 마음]을 계속해서 지니는 사람이야말로, 지금의 이 범부의 몸 그대로 우주의 불계와 공명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범부에게 불계의 생명이 용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남묘호렌게쿄는 대성인의 사자왕의 마음을 나타낸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대성인은 문하들에게 대하여 항상 [사자왕의 마음을 일으켜라][사자왕의 자식으로 살아가자]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제불이 - 이 대성인과 똑같은 「사자왕의 마음」을 배워 가는 것이 사도어서의 하나의
포인트입니다.
○축생의 마음과 대비
처음에 <강적을 굴복시켜야 비로소 역사임을 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분야이든 그 사람이 이 분야에서 힘이 있는 사람인가 어떤가는, 가장 강한 적에게 이기는가 어떤가로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의 정의도 진짜의 강적에게 이겨야만 불법의 정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들의 실천에서도 실증이라는 승리의 모습이 있어야만 비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불법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 앞에 있는 <축생의 마음은 약함을 위협하고 강함을 두려워 하느니라>라는 말씀과 대조적입니다. [축생의 마음]이란 당시의 여러 종파의 승려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승려의 권위를 생각하면 이와 같은 본질을 확실히 말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축생의 마음]과 대비시켜 대성인의 마음을 [사자왕과 같은 마음]이라고 밝히고 계십니다.그럼 [축생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축생의 마음]이란 감정이나 눈 앞의 이해에 마음을 뺏기어 올바른 인생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십계론에서도 대성인이 [어리석음은 축생]이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어리석음이 축생계의 경애의 본질입니다.
축생계의 경애의 사람은 눈 앞의 이해를 근본의 판단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볼 때도 [상대방의 힘의 강약] [자신보다 강한가 약한가] [자신의 보신으로 되는가 안 되는가]로 판단해 갑니다.단지 보신에 얽매이기 때문에 <약함을 위협하고 강함을 두려워 하느니라>는 말씀처럼 동물의 약육강식과도 닮은「인간 이하의 마음,인간 이하의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축생의 마음]에 얽매인 사람은 [함께 성장해 가자]라든지 [저 사람에게 배우자]라든지 [커다란 목적을 위해 힘을 합하여 가자]는 이러한 인간적인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위와 같은 마음은 상대방을 존경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만, 자기 중심의 축생의 마음에 얽매인 사람은 원래 상대방을 [인간으로서 존경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승려란 본래는 선인가 악인가, 정인가 사인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기준으로 살며,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이끌어 가는 지도자이어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승려들은 이해, 강약만으로 얽매인 [어리석은 마음]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승려이면서도 나의 몸을 아낄뿐이고 법을 아끼는 마음은 없다. 말법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성인이 얼마나 법화경의 근저에 다다른 지자인가, 또는 얼마나 법화경의 진실을 끝까지 이야기해 가는 용자인가 모른다. 그리고 대성인이 한 사람이며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대성인의 어떠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박해를 가해 왔다.
한편으론 힘있는 권력자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품고 아첨을 하며 따른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를 위해 권력자를 이용한다. 그를 위해서는 불법을 왜곡하는 것도 불사한다. 불법의 정의도 민중을 지키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들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축생의 마음]과 대조적인 것이 대성인의 [사자왕과 같은 마음]입니다. 즉 진실을 위해 정의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을 구하기 위해 예를 들어 어떠한 강적이라 하여도 싸워서 정의를 증명해 가는 마음입니다.
그 강적으로서 이곳에서 대성인은 최고의 최대의 강적 중의 강적을 들고 계십니다. 그것은 [악왕]과 [사법의 승려]의 결탁입니다. 이 정도의 악은 없으며 이 정도의 강적은 없다. 또 이것 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마음을 함께 유린하는 최강의 악입니다.
악왕은 실질적으로 물리적 사회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악왕에게 거역하면 몸을 멸할지도 모른다. 글자 그대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또 사법의 승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속박하는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이 양자가 결탁하여 박해를 가해 온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굴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강적에 의한 박해가 있어도 엄연히 정의를 관철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실한 지혜자입니다. 진리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자왕과 같은 마음]이란 확실히 진리를 깨닫고, 정법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용기입니다. 또 정법을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용기입니다. 정법을 믿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용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강적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석존은 불법의 진리를 깨닫고 [불사의 경지]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괴로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그것까지도 극복하였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의 마음입니다.
사자왕은 백수의 왕. 어떠한 적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처의 마음을 사자왕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자왕의 마음]과 [교만함]의 차이
사도어서에서는 [사자왕의 마음]과 [교만함]의 차이를 가르치고 있다.
사자왕의 마음은 [정법을 아끼는 마음] 즉 [신심]이 근본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말하여 온 것 처럼 어떠한 강적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교만함]은 [나의 몸만을 아끼는 마음] 즉 [보신의 마음]이 근본입니다. 따라서 강적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퇴전해 간다. 양자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간부이면서도 평소는 으시대고 있어도 막상 인생의 고난의 때나 광선유포의 싸움이 어렵게 되면 퇴전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착실한 학회원, SGI 멤버야 말로 인생의 고난을 참고 광선유포의 싸움에 용기를 분기하여 도전해 왔습니다. 그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이야 말로 오늘의 광선유포의 조류를 구축한 공로자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신심]과 [싸우는 마음]이야말로 사자왕의 마음이며 대성인의 불계의 생명에 깊이 상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지도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용기야 말로 일체의 인간성을 살리는 [원동력]이다. 용기야 말로 청년의 가능성의 문을
열어가는 [열쇠]이다. 용기야말로 세기말의 어둠을 태워 없애는[불꽃]이며 [태양]이다.
용기야말로 인류를 앞으로 앞으로 진보시키는 [엔진]이다.그리고 [용기]가 [정의]와
함께 되었을 때 그 사람은 무적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용기야 말로 [신앙자]의 증명인 것입니다.」
*사자왕의 마음과 남묘호렌게쿄
또 대성인은 사도어서에서 말법의 때에 적합한 [사자왕의 마음]이 있다면 묘호렌게쿄의 일구를 수행하는 것만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자왕의 마음]이란 우리들의 차원으로 이야기 한다면 신심이며 용기이기 때문에 [나무]에 해당합니다. [묘호렌게쿄]는 법화경 28품이 설하려고 하는 근본법이며 묘법이 부처라는 최고의 인격적 가치(연화)로서 꽃 피워가는 것, 즉 묘법이 연화로서 개화하는 것입니다.
나무하는 마음, 사자왕의 마음에, 묘법의 개화로서의 불계의 생명이 저절로 열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묘호렌게쿄입니다.
범부가 일으키는 나무하는 마음=귀명의 마음=신심은, 원인입니다. 묘호렌게라는 불계의 생명의 개화는 결과입니다. 이 원인과 결과는 순간의 생명으로서 일체이며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이 생명을 대성인은 어본존의 중앙에 [남묘호렌게쿄 니치렌]이라고 적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본존에 사자왕의 마음으로 나무해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목도 '반드시 불계가 열려진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금세에서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강한 신(믿음)]으로 부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제목만이 대성인이 넓히신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 스피치 중에서 (제13회 본부간부회 1997년 7월 )
나치렌 대성인은 말씀하신다.
「악왕(惡王)이 정법을 파하는데 사법(邪法)의 승들이 한편이 되어 지자(智者)를 살해하려 할 때는 사자왕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 반드시 부처가 되느니라」(어서 957쪽)
겁쟁이는 부처가 될 수 없다. 사자왕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부처가 될 수 없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용감하게 일어선다. 여기에 학회정신의 진수가 있다. 가장 힘든 곳에 스스로 발을 옮겨야만 길은 열린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광선유포를 외치셨을 무렵 종문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광선유포를 파괴하고자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당시 종문은 어서의 발간을 금지하고 「니치렌은 일염부제 제일의 성인이로다」(어서 974쪽)의 어문을 비롯한 중요한 어성훈 14군데를 삭제했다.
누가 이런 무도함을 허락하게 하는가. 우리들은 허락할 수 없다. 대성인도 허락하실 리가 없다. 게다가 종문은 아직껏 대성인에게도 신도에게도 사죄조차 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종문은 다이세키사에 '신찰'을 모시고 마키구치 선생님에게도 "신찰을 받으라."고 강요했다. 얼마나 큰 방법인가. 게다가 마키구치 선생님이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단언하자 뒤에서 학회를 탄압하는 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마키구치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떠했던가. 모두 마키구치 선생님의 기세에 놀라고 두려워했다. 모두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나 쥐였던 것이다.
"광선유포, 국가간효" 이렇게 마키구치 선생님은 외치셨다. 그것에 대해 제자들은 "지금의 시기에 당치도 않다." "시기상조다." "모두 헌병대에 끌려 가고 말 것이다."라며 떨었다.
평소에는 '마키구치 선생님과 함께'라고 외치던 간부가 '고양이 앞의 쥐'보다도 꼴사납게 되었다. 간부라고 해서 신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전선에 있는 학회원 쪽이 신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속에 도다 선생님만이 "나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제자다." "끝까지 나는 마키구치 선생님과 함께 한다."며 담담하게 계셨다. 엄숙한 사제의 모습이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은 "당신의 자비의 광대무변은 나를 감옥에까지 데려가 주셨습니다."라고 스승에게 감사를 드린 것이다.
감옥에 연루되어 불평을 하기는커녕 도다 선생님은 함께 난을 받게 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가 라고 고마워하시고 있다. 이것이 사제이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은 살아서 출옥하여 스승이 내건 광선유포의 깃발을 다시 엄연히 내걸고 혼자서 일어섰다.
사제는 일체불이였기 때문에 은사의 죽음을 극복하여 광선유포의 물결은 넓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제불이의 길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
부별연찬회를 위하여
<이것은 차치하고 니치렌을 믿는 듯하던 자들이 니치렌이 이렇게 되자 의심을 일으켜 법화경을 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니치렌을 교훈하고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벽인들이 염불자보다도 더 오랫동안 아비지옥에 있게 될 것은 불쌍하다고 할 수밖에 없구나. 수라가 부처는 십팔계 나는 십구계라 말하고 외도 가로되, 부처는 일구경도 나는 구십오구경도라고 말하였듯이, 니치렌보는 사장이긴 하시지만 너무나 강경하니 우리들은 부드럽게 법화경을 홍통하리라고 말함은 반딧불이 일월을 비웃고 의총이 화산을 얕보며 정강이 하해를 깔보고 까치가 난봉을 비웃음과 같으니라, 비웃음과 같으니라>
* 박해에 직면하여 많은 문하가 퇴전
다쓰노구치 법난, 사도유죄라고 하는 일련의 법난은 니치렌대성인 한 사람뿐만 아니라 대성인의 문하 전체에 가해진 박해였습니다. 몽고습격이 급박히 다가온 정세하에서 방위체제의 강화를 도모했던 가마쿠라막부는 대성인의 교단을 '통제에 위반하는 위험집단'으로 간주하여 본격적인 탄압을 단행하였습니다. 대성인의 문하에 대해서 소령몰수, 추방, 벌금 등의 처벌이 가차없이 가해졌던 것입니다.
문하 중에는 묘이치니 부인의 남편처럼 소령몰수에도 굴하지 않고 신심을 관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박해에 직면하자 겁쟁이의 마음이나 의문의 마음을 일으켜 퇴전하거나 반역하였습니다.
대성인은 평소부터 법화경의 신심을 관철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난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오셨습니다만 실제로 법난이 일어나보면 대부분의 문하가 의심을 일으켜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 중에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하여 스승인 니치렌대성인을 비판하는 사람까지도 있었습니다.
<니치렌보는 사장이긴 하시지만 너무나 강경하니 우리들은 부드럽게 법화경을 홍통하리라>(961)라는 것은 그 비판의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법화경은 올바르지만 니치렌보가 말하고 있는 절복이라는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 절복따위를 하기 때문에 적을 만들고, 난을 부른다. 우리들은 좀더 부드럽고 능숙하게 법화경을 넓히자"라고 주장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대성인의 절복의 의미는 단지 포교의 방법론이 아니라 불성을 믿지 못하는 악세의 사람을 구제해 가기 위한 오로지 하나의 길입니다.
악세이면 악세일수록 만인에게 불성이 구족되어 있다고 단언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언해 가면 사람들의 불성을 뒤흔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진실을 용기를 갖고 단언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확신을 깊게 하고 성불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절복은 사람들에 대한 포교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반역자의 비판이 실로 경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경박한 비판에 대하여 대성인은 석존이 설한 십팔계에 대항하여 수라가 단지 수를 늘려 자신 쪽이 뛰어났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설한 어리석음이나 외도가 역시 수를 늘려 자신 쪽이 뛰어 났다고 말한 어리석음을 예로서 열거하고 있다. 또 반딧불과 의총 따위가 일월과 화산 등을 비웃는 것과 같다고 일축하며 비웃고 계십니다.
* 강한 욕망, 겁쟁이의 마음, 어리석음, 만심이 반역자의 본질
또 퇴전자 중에는 노토보, 나고에 비구니와 같이 스스로가 신앙을 깨는(부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문하에게도 움직여 퇴전시킨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반역자로서 대성인은 쇼우보, 노토보, 나고에 비구니와 같은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반역한 원인에 대해서 대성인은 (1)강한 욕망 (2)겁쟁이의 마음 (3)어리석음 (4)자신을 지자로 생각하는 만심 등이 있다고 갈파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 신심을 퇴전하고 천박한 지식을 과시하며 대성인을 비판함으로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퇴전 반역의 무리는, 난을 받지 않기 위해 약삭빠르게 피하는 것이 현명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의 이해에 사로잡혀 난을 받더라도 정법을 넓혀가는 대성인의 실천의 깊은 의미를 몰랐습니다.
말법 악세의 사람들을 위해 '숙명전환'과 '성불의 길'을 대성인이 열어주신 것을 몰랐습니다. 본초의 앞 부분에서 목숨을 아끼면서도 눈앞의 먹이에 속아 목숨을 빼앗겨버린 물고기나 새의 비유를 인용하고 계시는 것은 퇴전, 반역의 무리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배견할 수 있습니다.
*박해자보다 무거운 반역자의 죄
[법화경을 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니치렌을 교훈하고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벽인들이 염불자보다도 더 오랫동안 아비지옥에 있게 될 것은 불쌍하다고 할 수 밖에 없구나](960)라고 퇴전, 반역의 무리들의 중죄를 지적함과 동시에 그들을 깊이 불쌍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당초부터 사법에 집착하여 대성인을 박해해 온 염불자들의 죄보다도 정법을 수지하면서 후에 퇴전, 반역한 사람의 죄가 더욱 무겁고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왜 일까요?
형제초에는 [처음에는 믿고 있었으나 세상이 두려워서 버리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고 그 중에는 오히려 본래 비방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강성히 비방하고 사람들이 또한 허다하니라](1088쪽 18행) 라고 있습니다.
퇴전, 반역의 무리는 당초부터 정법을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욱더 강하게 정법을 비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퇴전자는 자신의 겁쟁이의 마음을 감추고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심하게 비방하여 생명에 내재하는 불종을 깊이 상처입히게 됩니다.
또 정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비방하는 것보다도 조금이라도 정법을 배운 사람이 비방하는 쪽이 주위에 대해 더욱더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실제로 노토보 등의 반역자는 주위의 문하를 말려들게 하여 퇴전시켰습니다만 내부에서의 반역은 정법에 대한 불신의 마음을 교단의 내외의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반역의 행위는 당초부터 입장을 달리한 사람들의 비방보다도 죄가 무겁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반역의 행위는 불법자로서 불법을 안쪽에서부터 깨뜨리는 파화합승의 중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초에서는 정법을 아끼는 마음으로 불석신명의 용기있는 투쟁에 일어선 사람은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계심과 동시에 정법에 등을 돌린 사람은 그 반역의 마음의 정도에 따라 각각의 죄가 결정되어 진다는 준엄한 인과율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 참고자료 - 선생님의 스피치 중에서 (청년교육자회의 1996년 1월)
창가(創價) 교육의 아버지, 마키구치 선생님은 근엄한 분이셨습니다. 남아 있는 사진에도 웃는 사진이 없다고 합니다. 그 마키구치 선생님이 크게 웃으실 때가 있다고 도다(戶田)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언제나 「사도어서」의 이 말씀을 흥얼거리시며 크게 웃으셨다.
「니치렌보(日蓮房)는 사장(師匠)이긴 하시지만 너무나 강경하니 우리들은 부드럽게 법화경을 홍통하리라고 말함은 반딧불이 일월(日月)을 비웃고 의총(蟻塚)이 화산(華山)을 얕보며 정강(井江)이 하해(河海)를 깔보고 까치가 난봉(鸞鳳)을 비웃음과 같으니라, 비웃음과 같으니라」(어서 961쪽)
이 "비웃음과 같으니라, 비웃음과 같으니라" 부분을 흥얼거리며 마키구치 선생님은 항상 소리높여 크게 웃으셨다고 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전 인류의 미래를 위해 타협없이 권력과 싸우셨습니다. 싸웠기 때문에 탄압받고 사도에 유죄되셨습니다.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제자들이 대성인을 지키기는커녕 비난했습니다. "스승의 방식은 서툴다. 그런 방식이니까 박해받는다. 우리들은 더 능숙하고 부드럽게 법화경을 넓히자"이렇게 말하며 비판했습니다. 또 뒤에서 비웃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골적으로 '나는 퇴전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난을 두려워한 '마음의 퇴전'이었습니다.
그 겁쟁이의 모습을 대성인은 유유히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 나는 태양이고, 대월천(大月天)이다. 나는 커다란 고산(高山)이다. 나는 대하(大河)이고, 대해(大海)이다. 나는 큰 새이다. 나는 대우주와 일체(一體)이다. -
그러한 기개이셨습니다. 작은 나라의 작은 정부가 박해하든 유죄를 보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작은 일이 아닌가. 오히려 명예가 아닌가. 경문대로가 아닌가. 기뻐해야 하지 않은가. 영원의 역사를 지금 만들고 있지 않은가. -
그것도 모르는 제자들을 대성인은 한탄하시고 또 웃어넘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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