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어의구전(御義口傳)

2010. 1. 11. 10:57佛法 .SGI

 

南無妙法蓮華經

(P.708~p.803)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나무(南無)란 범어(梵語)이며 여기서는 귀명(歸命)이라 하느니라.

인법(人法)이 있으니 인(人)이란 석존(釋尊)을 받들어 귀명(歸命)하고 법(法)이란 법화경(法華經)을 받들어 귀명(歸命)함이라.

또 귀(歸)라 함은 적문불변진여(迹門不變眞如)의 이(理)에 귀의(歸依)함이며 명(命)이란 본문수연진여(本門隨緣眞如)의 지(智)에 의거(의거(依據))함이라.

귀명(歸命)이란 南無妙法蓮華經 이니라.

 

석(釋)에 가로되, 수연불변(隨緣不變)・일념적조(一念寂照)라고, 또 귀(歸)란 우리들의 색법(色法)이고 념(念)이란 우리들의 심법(心法)이며 색심불이(色心不二)임을 일극(一極)이라고 하느니라.

 

석(釋)에 가로되, 일극(一極)에 귀(歸)하게 하는 고(故)로 불승(佛乘)이라 한다 라고.

또 가로되, 南無妙法蓮華經의 나무(南無)란 범어(梵語)이고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는 한어(漢語)이며 범한(梵漢) 공시(共時)에 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느니라.

또 가로되 범어(梵語)로는 살달마・분다리가・소다람이라 하며 여기서는 妙法蓮華經라 하느니라.

 

묘(妙)란 법성(法性)이고 법(法)이란 무명(無明)이며 무명(無明)・법성(法性)이 일체(一體)임을 묘법(妙法)라 하느니라.

연화(蓮華)란 인과(因果)의 이법(二法)이고, 이것또한 인과일체(因果一體)이니라. 경(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언어(言語) 음성(音聲)을 경(經)라고 하느니라.

 

석(釋)에 가로되, 성불사(成佛事)를 함을 이름하여 경(經)라 한다고, 혹은 삼세상항(三世常恒)임을 경(經)라고 하느니라.

법계(法界)는 묘법(妙法)이고 법계(法界)는 연화(蓮華)이며 법계(法界)는 경(經)니라.

연화(蓮華)란 팔엽구존(八葉九尊)의 불체(佛體)이니라.

차근차근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이상(已上).

 

 

전(傳)에 가로되,

 

제일(第一) 서품(序品) 칠개(七箇)의 대사(大事)

제이(第二) 방편품(方便品) 팔개(八箇)의 대사(大事)

제삼(第三) 비유품(譬喩品) 구개(九箇)의 대사(大事)

제사(第四) 신해품(信解品)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제오(第五) 약초유품(藥草喩品) 오개(五箇)의 대사(大事)

제육(第六) 수기품(授記品) 사개(四箇)의 대사(大事)

제칠(第七) 화성유품(化城喩品) 칠개(箇)의 대사(大事)

제팔(第八) 오백제자수기품(五百第子授記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구(第九)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이개(二箇)의 대사(大事)

제십(第十) 법사품(法師品) 십육개(十六箇)의 대사(大事)

제십일(第十一) 견보탑품(見寶塔品) 이십개(二十箇)의 대사(大事)

제십이(第十二)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팔개(八箇)의 대사(大事)

제십삼(第十三) 권지품(勸持品) 십삼개(十三箇)의 대사(大事)

제십사(第十四) 안락행품(安樂行品) 오개(五箇)의 대사(大事)

 

제십오(第十五)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 일개(一箇)의 대사(大事)

제십육(第十六)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이십칠개(二十七箇)의 대사(大事)

제십칠(第十七)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십팔(第十八)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이개(二箇)의 대사(大事)

제십구(第十九)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사개(四箇)의 대사(大事)

제이십(第二十)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삼십개(三十箇)의 대사(大事)

제이십일(第二十一) 여래신력품(如來神力品) 팔개(八箇)의 대사(大事)

제이십이(第二十二) 촉루품(囑累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이십삼(第二十三)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제이십사(第二十四)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이십오(第二十五)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오개(五箇)의 대사(大事)

제이십육(第二十六) 다라니품(陀羅尼品)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제이십칠(第二十七) 묘장엄왕본사품(妙莊嚴王本事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이십팔(第二十八) 보현보살권발품(普賢菩薩勸發品)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무량의경(無量義經)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보현경(普賢經) 오개(五箇)의 대사(大事)

이상 이백삼십일개조(二百三十一箇條)니라.

이 외(外)에 별전(別傳)이 있는데 소상하게 이것을 기술(記述)하여 놓았음.

 

이십팔품(二十八品)에 일문(一文)씩의대사(大事) (二十八箇)

이십팔품(二十八品) 悉南無妙法蓮華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 권상(卷上)

日蓮 소립(所立) 자(自) 서품(序品) 지(至) 용출품(涌出品)

 

 

서품(序品) 칠개(七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여시아문지사(如是我聞之事)

 

문구(文句)의 一 에 가로되,

여시(如是)란 소문(所聞)의 법체(法體)를 듣고 아문(我聞)이란 능지(能持)의 사람이다.

기(記)의 一 에 가로되,

고(故)로 시(始)와 말(末)과 일경(一經)을 소문(所聞)의 체(體)로 한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소문(所聞)의 문(聞)은 명자즉(名字卽)이고 법체(法體)란 南無妙法蓮華經이며 능지(能持)란 능(能)의 자(字) 이를 생각할지니라.

다음에 기(記)의 一 의 고시말일경(故始末一經)의 석(釋)은 시(始)란 서품(序品)이고 말(末)이란 보현경(普賢經)이며, 법체(法體)란 심(心)이라는 것이고 제법(諸法)이며 제법(諸法)의 심(心)이라는 것인데 제법(諸法)의 심(心)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전교(傳敎)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을 찬탄(讚歎)한다 해도 도리어 법화(法華)의 심(心)을 죽인다 라고. 사(死)의 글자를 마음에 두고 생각할지어다.

불신(不信)하는 사람은 여시아문(如是我聞)의 문(聞)이 아니며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여시(如是)의 체(體)를 듣는 사람이라 해야하느니라.

 

이로써 문구(文句)의 一에 가로되 [여시(如是)란 신순(信順)의 말이다, 신(信)은 즉 소문(所聞)의 이(理)를 터득하고 순(順)은 즉 사자(師資)의 도(道)를 성취한다] 라고.

결국 日蓮 등의 동류(同類)를 가지고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사람이라 해야하느니라. 운운.

 

제이(第二) 아야교진여지사(阿若憍陳如之事)

 

소(疏)의 一에 가로되,

교진여(憍陳如)는 성(性)이며 여기서는 화기(火器)라 번역한다.

바라문종인데 그 선조가 화(火)를 섬김으로써 일족에 이름붙였노라.

화(火)에 이의(二義)가 있으니 조(照)이고 소(燒)이며 조(照)는 즉 암(闇) 불생(不生), 소(燒)는 즉 물(物) 불생(不生) 여기서는 불생(不生)을 가지고 성(性)으로 하였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화(火)란 법성(法性)의 지화(智火)니라.

火의 이의(二義)란 一의 조(照)는 수연진여(隨緣眞如)의 지(智)이고, 一의 소(燒)는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이며 조소(照燒)의 이자(二字)는 본적이문(本迹二門)이니라. 그런데 화(火)의 능작(能作)으로서는 조소(照燒)의 이덕(二德)을 구비(구비(具備))하는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지금 日蓮 등의 동류가 南無妙法蓮華經 이라 봉창함은 생사(生死)의 암흑(暗黑)을 비추어 밝혀 열반(涅槃)의 지화(智火)가 명료(明了)하며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 개각(開覺)함을 조즉암불생(照則闇不生)이라 하느니라.

번뇌(煩惱)의 장작을 태워서 보리(菩提)의 혜화(慧火)가 현전(現前)하니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 개각(開覺)함을 소즉물불생(燒則物不生)이라 하느니라.

이로써 이것을 생각해보니 진여(眞如)는 우리들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을 나타냈느니라. 운운.

 

제삼(第三) 아사세왕지사(阿闍世王之事)

 

문구(文句)의 一에 가로되,

아사세왕(阿闍世王)이란 미생원(未生怨)이라 이름하노라.

또 가로되 대경(大徑)에 왈(曰) 아사세(阿闍世)란 미생원(未生怨)이라 이름하고

또 말씀하기를 대경(大徑)에 가로되 아사(阿闍)를 불생(不生)이라 이름하며 세(世)란 원(怨)이라 이름한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아사세왕(阿闍世王)이니라.

이미 제불(諸佛)이라는 부(父)를 살해하고 법화경(法華經)이라는 모(母)를 해침이라.

 

무량의경(無量義經)에 가로되,

제불(諸佛)이란 국왕과 이 경(經)이란 부인과 화합해서 함께 이 보살이란 자식을 낳았다.

방법(謗法)의 사람은 지금은 모(母)의 태내에 있으면서 법화(法華)의 원적(怨敵)이니라. 어찌 미생원(未生怨)이 아닐소냐.

그 위에 일본국 당세(當世)는 삼류(三類)의 강적(强敵)이니라.

세자명원(世者名怨)의 사자(四字)에 마음을두고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日蓮 등의 동류는 이 중죄를 벗어났다.

방법(謗法)의 사람들이 법화경(法華經)을 믿고 석존(釋尊)에 귀의(歸依)한다면 어찌 이전의 살부(殺父) 살모(殺母)의 중죄가 멸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부모라해도 법화경(法華經) 불신(不信)의 자라면 살해할지어다. 그이유는 권교(權敎)를 사랑하는 어머니・방편(方便) 진실(眞實)을 밝히지 못한 아버지를 살해할지어다.라고 쓰여있다.

 

따라서 문구(文句) 二에 가로되,

[관해(觀解)는 탐애(貪愛)라는 어머니・무명(無明)이라는 아버지 이를 해치는 고(故)로 역(逆)이라 하지만 역즉순(逆卽順)이라 비도(非道)를 행(行)하여 불도(佛道)에 통달한다]라고 관해(觀解)란 말법(末法) 당금(當今)에는 제목(題目)의 관해(觀解)가 된다.

 

자식으로서 부모(父母)를 살해(殺害)함은 역(逆)이니라 그렇다해도 법화경(法華經) 불신(不信)의 부모(父母)를 살해(殺害)하는것은 순(順)으로 되니 그러므로 역즉시순(逆卽是順)이라 석(釋)하였느니라.

 

지금 日蓮등의 동류(同類)는 아사세왕(阿闍世王)이니라.

그 까닭은 南無妙法蓮華經의 검(劍)을 잡고 탐애(貪愛)・무명(無明)의 부모를 해치고, 교주석존(敎主釋尊)과 같은 불신(佛身)을 감득(感得)하느니라.

탐애(貪愛)의 모(母)란 권지품(勸持品) 삼류(三類) 중 제일(第一)의 속중(俗衆)이며 무명(無明)의 부(父)란 제이(第二) 제삼(第三)의 승(僧)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불소호념지사(佛所護念之事)

 

문구(文句)의 三에 가로되,

불소호념(佛所護念)이란 무량의처(無量義處)는 이는 부처가 증득(證得)하신 바이므로 여래(如來)가 호념(護念)하시는 바이니라. 하문(下文)에 불자주대승(佛自住大乘)이라 하셨다.

개시(開示)하려고 원한다 해도 중생(衆生)의 근(根)이 둔(鈍)하므로 오래도록 이 요(要)를 침묵하고 서둘러 급하게 설하지 않으시었다 고로 호념(護念)이라 한다.

 

기(記)의 三에 가로되,

옛날에 아직 설(說)하지 않은고로 이를 이름하여 호(護)라 한다.

법(法)의 입장에서 기(機)의 입장에서 모두 호념(護念)하는 고(故)로 내지(乃至) 기근(機根)이 아직도 훈발(薰發)하지 않아 숨기고 설(說)하지 않은 고로 호념(護念)이라 한다.

내지(乃至) 미설(未說)인 까닭에 호(護)라하고 미창(未暢)이므로 염(念)한다.

구묵(久默)이라 함은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이다.

사요(斯要) 등의 뜻을 생각하여 알지어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호념(護念)의 체(體)에 있어서는 본적이문(本迹二門)이며, 수제(首題)의 오자(五字) 이니라.

이 호념(護念)에 있어서 칠종(七種)의 호념(護念)이 있으니

一에는 시(時)의 입장에서

二에는 기(機)의 입장에서

三에는 인(人)의 입장에서

四에는 본적(本迹)의 입장에서

五에는 색심(色心)의 입장에서

六에는 법체(法體)의 입장에서

七에는 신심(信心)의 입장이니라. 운운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는 호념(護念)의 체(體)를 넓히느니라.

 

一에 시(時)의 입장이란

부처가 법화경(法華經)을 사십여년간(四十餘年間) 아직 시(時)가 이르지 않는고로 호념(護念)하시느니라.

 

二에 기(機)의 입장에서란

파법불신고추어삼악도(破法不信故墜於三惡道)인 고(故)로 전(前) 사십여년간(四十餘年間)에 아직 이것을 설(說)하지 않았느니라.

 

三에 인(人)의 입장에서란

사리불에 대해서 설(說)하기 위함이라

 

四에 본적(本迹)의 입장에서란

호(護)를 가지고 본(本)으로고 염(念)을 가지고 적(迹)으로 하도다.

 

五에 색심(色心)의 입장이란

호(護)를 가지고 색(色)으로 하고 염(念)을 가지고 심(心)으로 하도다.

 

六에 법체(法體)의 입장이란

법체(法體)란 본유상주(本有常住)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자비심이로다.

 

七에 신심(信心)의 입장이란

신심(信心)을 가지고 호념(護念)의 본(本)으로 함이니,

결국 日蓮 등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을 봉창함은 그대로 호념(護念)의 체(體)를 여는 것이니라.

 

호(護)는 불견(佛見)이고 염(念)이란 불지(佛知)이며 이 지견(知見)의 이자(二字)는 본적양문(本迹兩門)이니라.

불지(佛知)를 묘(妙)라 하고 불견(佛見)을 법(法)이라 하며 이 지견(知見)의 체(體)를 수행(修行)함을 연화(蓮華)라고 하느니라.

인과(因果)의 체(體)이며 인과(因果)의 언어(言語)는 경(經)이니라.

뿐만 아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이 호념(護念)하시느니라.

 

보현품(普賢品)에 가로되,

일자위제불호념(一者爲諸佛護念)의 호념(護念)이란 妙法蓮華經이며 제불(諸佛)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호념(護念)하심은 법화경(法華經)을 호념(護念)하시는 것이니라.

기법(機法) 일동(一同) 호념일체(護念一體)이니라.

記(기)의 三의 석(釋)에 약법약기(約法約機)・개호념고(皆護念故)라 함은 이뜻이니라.

 

또 문구(文句)의 三에 가로되

[불소호념(佛所護念)이란 전(前)의 지동서(地動瑞)를 결정하느니라. 지동(地動)은 육번파혹(六番破惑)을 표시하느니라. 妙法蓮華經을 수지(受持)하는 자는 육번파혹(六番破惑) 의심(疑心)없느니라.]

 

신력품(神力品)에 가로되

[어아멸도후(於我滅度後)・응수지사경(應受持斯經)・시인어불도(是人於佛道)・결정무유의(決定無有疑)] 불자주대승(佛自住大乘)이란 이것이니라.

또 일의(一義)에 부처가 중생을 호념(護念)하시는일은 호(護)란 유아일인능위구호(唯我一人能爲救護)・염(念)이란 매자작시념(每自作是念) 이것이니라.

보현품(普賢品)에 이르러 일자위제불호념(一者爲諸佛護念)이라고 설(說)하느니라. 日蓮은 생년(生年) 삼십이(三十二)부터 南無妙法蓮華經를 호념(護念)하느니라.

 

제오(第五) 하지아비지옥지사(下至阿鼻地獄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십계개성(十界皆成)의 문(文)이니라.

제바의 성불(成佛)은 이 문(文)에 분명하니라.

보탑품의 다음에 제바의 성불(成佛)을 설하는것은 이개(二箇)의 간효(諫曉)의 부분이로다. 제바는 이 문(文)의 때에 성불(成佛)했느니라.

이 지(至)의 자(字)는 백호(白毫)가 가는 것을 말하며 백호(白毫)의 광명(光明)은 南無妙法蓮華經 이니라.

상지아가니타천(上至阿迦尼天)은 공제(空諦)・하지아비지옥(下至阿鼻地獄)은 가제(假諦)・백호(白毫)의 빛은 중도(中道)이니라.

이에 의해서 십계동시(十界同時)의 성불(成佛)이니라.

 

천왕불(天王佛)이란 보호(保護)를 보낸것 뿐이니라. 그런데 의정이보(依正二報)의 성불(成佛)의 때는 이 품(品)의 하지아비지옥(下至阿鼻地獄)의 문(文)은 의보(依報)의 성불(成佛)을 설하고 제파달다의 천왕여래(天王如來)는 정보(正報)의 성불(成佛)을 설하니 의보(依報)정보(正報)함께 묘법(妙法)의 성불(成佛)이니라.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가 성령(聖靈)을 추선(追善)한 경우 법화경(法華經)을 독송(讀誦)하고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할 때 제목(題目)의 빛이 무간(無間)에 이르러 즉신성불(卽身成佛)시키도다.

회향(廻向)의 문(文)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느니라.

 

법화(法華) 불신(不信)의 사람은 타재무간(他在無間)이지만 제목(題目)의 빛을 가지고 효자가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로서 추선(追善)하니 어찌 이 의(義)에 어긋남이 있을소냐.

그러므로 하지아비지옥(下至阿鼻地獄)의 문(文)은 부처가 빛을 발하여 제바를 성불(成佛)시키기 위함이라고 日蓮은 삼가 추지(推知)하느니라.

 

제육(第六) 도사하고지사(道師何故之事)

 

소(疏)에 가로되,

참으로 생각해 보면 설법(說法) 입정(入定)하여 능히 사람을 인도(引導)하므로 이미 도사(導師)라 칭하도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도사(道師)는 석존(釋尊)의 일이니라.

설법(說法)이란 무량의경(無量義經)・입정(入定)이란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 들어가시는 것이니라.

 

결국 도사(道師)에 있어서 이(二) 가있는데 악(惡)의 도사(道師) 선(善)의 도사(道師)가 있느니라.

악(惡)의 도사(道師)란 호넨(法然)・고보(弘法)・지카쿠(慈覺)・지쇼(智證)등이니라. 선(善)의 도사(道師)란 천태(天台)・전교(傳敎)등이니라.

말법(末法)에 들어와서는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는 선(善)의 도사(道師)이니라.

설법(說法)이란 南無妙法蓮華經 입정(入定)이란 법화수지(法華受持)의 결정심(決定心)에 들어가는것이니라.

능도어인(能導於人)의 능(能)자에 마음을 두고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용출품(涌出品)의 창도지사(唱導之師)와 같은것이니라.

결국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인도(引導)하기 위해 설법(說法)하는 사람이니라. 운운.

 

제칠(第七) 천고자연명지사(天鼓自然鳴之事)

 

소(疏)에 가로되,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은 무문자설(無問自說)을 표시(表示)하느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문(文)은 차토(此土)・타토(他土)의 서(瑞)가 같음을 장황(張皇)하게 칭송(稱頌)했느니라.

무문자설(無問自說)이란 석가여래(釋迦如來)가 妙法蓮華經을 무문자설(無問自說) 하심이니라.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는 무문자설(無問自說)이며 염불무간(念佛無間)・선천마(禪天魔)・진언망국(眞言亡國)・율국적(律國賊) 이라고 외치는것은 무문자설(無問自說)이니라.

삼류(三類)의 강적(强敵)이 오는것은 이때문이니라.

 

천고(天鼓)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자연(自然)이란 무장애(無障碍)이며 명(鳴)이란 봉창하는 바의 음성(音聲)이니라.

일의(一義)에 일체중생(一切衆生)이 어언음성(語言音聲)을 자재(自在)로 내는것은 무문자설(無問自說)이며, 자설(自說)이란 옥졸(獄卒)이 죄인(罪人)을 가책(呵責)하는 소리・아귀(餓鬼) 기근(飢饉)의 음성(音聲)등 일체중생(一切衆生)의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의 염념(念念)등을 자설(自說)이라 하느니라.

이 음성(音聲)의 체(體)란 南無妙法蓮華經 이니라.

본적(本迹) 양문(兩門)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는 천고(天鼓)이니라.

천(天)이란 제일의천(第一義天)이니라.

자설(自說)이란 자수용(自受用)의 설법(說法)이니라.

 

기(記)의 三에 가로되,

무문자설(無問自說)을 표(表)함이란 방편(方便)의 초(初)에 삼매(三昧)로 부터 일어나서 사리불에게 고(故)하여 넓게 찬탄(讚歎)하고 약(略)해서 찬탄(讚歎)함이니라.

말로써 다할수 없으므로 차토타토(此土他土)란 말에의하도다.

혹은 경(境) 혹은 지(智) 이는 즉 일경(一經)의 근본(根本)이며 오시(五時)의 요진(要津)이니라.

이 일은 가볍지 않노라고. 이 석(釋)에 일경(一經)의 근원(根源)인 오자(五字)의 요진(要津)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방편품(方便品) 팔개(八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방편품지사(方便品之事)

 

문구(文句)의 三에 가로되,

방(方)이란 비(秘)이고 편(便)이란 묘(妙)이다.

묘(妙)가 방(方)에 달함은 즉 진실한 비(秘)이다.

내의리(內依裏)의 무가(無價)의 주(珠)를 점검(點檢)하니, 왕(王)의 정상(頂上)의 유일주(唯一珠)가 있다고 함과 이(二)가 아니고 별(別)도 아니로다.

객작(客作)의 사람을 가리켜 이는 장자의 아들로서 역시 이(二)가 아니고 별(別)도 아니로다. 이와 같은 말은 시비시묘(是秘是妙)이니라.

경(經)에 유아지시상(唯我知是相)・시방제불역연(十方諸佛亦然)・지지부수설(止止不須說)・아법묘난사(我法妙難思) 와 같은 고(故)로 비(秘)를 가지고 방(方)을 석(釋)하며 묘(妙)를 가지고 편(便)을 석(釋)하셨다. 바로 금품(今品)의 뜻이다. 고로 방편품(方便品)이라 한다.

 

기(記)의 三에 가로되,

제삼(第三)에 비묘(秘妙)의 입장에서 석(釋)한다 함은 묘(妙)로써 하는 고로 즉(卽)이고 원(圓)으로써 즉(卽)으로 하며 三을 부즉(不卽)으로 하는 고(故)로 또한 부즉(不卽)에 대하여 그로써 즉(卽)을 석(釋)한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석(釋) 중에 일주(一珠)란 의리주(衣裏珠)・즉(卽) 정상주(頂上珠)이니라.

객작(客作)의 사람과 장자(長者)의 아들과 전혀 부동(不同)이 없도다.

결국 방법불신(謗法不信)의 사람은 체외(體外)의 권(權)으로서 법용능통(法用能通)의 이종(二種)의 방편(方便)이니라 이로써 무이무별(無二無別)이 아니로다.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 라고 봉창함은 이는 비묘방편(秘妙方便)으로서 체내(體內)이니라. 그러므로 妙法蓮華經라 제호(題號)를 붙이고 다음에 방편품(方便品)이라 하느니라.

 

묘락(妙樂)의 기(記)의 三의 석(釋)에

본소(本疏)의 즉시진비(卽是眞秘)의 즉(卽)을 이원위즉(以圓爲卽)이라 소석(消釋)하였도다.

즉(卽)은 원(圓)이므로 법화경(法華經)의 별명(別名)이니라.

즉(卽)이란 범부즉극(凡夫卽極)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부처이고 원(圓)이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즉(卽)과 원(圓)과 말은 다르지만 묘(妙)의 별명(別名)이니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실상(實相)의 부처라서 묘(妙)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니라. 말법(末法)의 사람은 지금 이것을 모르는고로 이것을 비(秘)라하도다.

 

또 가로되, 법계삼천(法界三千)을 비묘(秘妙)라 하도다.

비(秘)란 엄(嚴)함이라 삼천나열(三千羅列)이로다. 이것 이외(外)에 불가사의(不可思議)는 없느니라.

대방법(大謗法)의 사람이라 해도 妙法蓮華經 를 수지(受持)하여 받드는 바를 妙法蓮華經 방편품(方便品)이라 하느니라.

이것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도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이라고도 설(說)하도다.

또 방편(方便)이란 십계(十界)를 말하며 또는 무명(無明)이니라.

妙法蓮華經는 십계(十界)의 정상(頂上)이며 또 법성(法性)이니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란 이것이니라.

이원위즉(以圓爲卽)이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며 묘(妙)와 즉(卽)과는 동일한것이니라.

일자(一字)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것은 원(圓)과 묘(妙)를 말하며 원(圓)이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니라.

 

원(圓)이란 석(釋)에 가로되,

원(圓)을 원융원만(圓融圓滿)이라 이름한다고 원융(圓融)은 적문(迹門) 원만(圓滿)은 본문(本門)이니라.

또는 지관(止觀)의 이법(二法)이며 또는 우리들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이니라. 일자(一字)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에신류(慧心流)의 비장(秘藏)이니라.

에운담(口)은 일념(一念)이고 원(圓)은 삼천(三千)이니라.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는 것이니라.

 

이 묘(妙)는 전삼교(前三敎)에 아직 이것을 설(說)하지 않은 고(故)로 비(秘)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알았도다.

南無妙法蓮華經는 일심(一心)의 방편(方便)이며 妙法蓮華經는 구식(九識)이고 십계(十界)는 팔식이하(八識已下)이니라. 마음에 두고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방(方)이란 즉(卽) 시방(十方), 시방(十方)은 즉(卽) 십계(十界)니라. 편(便)이란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는 것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제불지혜심심무량기지혜문지사(諸佛智慧甚深無量其智慧門之事)

 

문구(文句)의 三에 가로되,

우선 실(實)을 찬탄(讚歎)하고 다음에 권(權)을 찬탄(讚歎)하도다.

실(實)이란 제불(諸佛)의 지혜(智慧)이며 삼종(三種)의 화타(化他)의 권실(權實)이 아닌고(故)로 제불(諸佛)이라 하도다.

자행(自行)의 실(實)을 나타내는 고(故)로 지혜(智慧)라 하며, 이 지혜(智慧)의 체(體)는 즉(卽) 일심(一心)의 삼지(三智)니라.

심심무량(甚深無量)이란 즉(卽) 칭탄(稱歎)의 말이니라.

부처의 실지(實智)가 종(種)으로 여리(如理)의 저변(底邊)에 까지 달하는 것을 밝히는 고(故)로 심심(甚深)이라 하며 횡(橫)으로 법계(法界)의 변(邊)에 도달하는 고(故)로 무량(無量)이라고 하느니라. 무량심심(無量甚深)하여서 종(種)으로 높고 횡(橫)으로 넓도다.

 

비유(譬喩)하면 뿌리가 깊으면 즉(卽) 가지가 무성(茂盛)하고 수원(水源)이 멀면 즉(卽) 흐름이 긴것과 같도다. 실지(實智)가 이미 그러하니 권지(權智)도 따라 그러하니라. 운운.

 

기지혜문(其智慧門)은 즉(卽)이는 권지(權智)를 찬탄(讚歎)함이라. 그러나 이는 자행(自行)의 도전(道前)의 방편(方便) 진취(進趣)의 힘이 있는 故로 이름하여 門이라 하도다.

문(文)으로부터 들어가 도중(道中)에 이르는 도중(道中)을 실이라 칭(稱)하고 도전(道前)을 권(權)이라 하도다.

 

난해난입(難解難入)이란 권(權)을 찬탄(讚歎)하는 말이니라.

불모(不謀)이지만 깨달으면 무한(無限)의 대역용(大力用)이 있도다.

칠종(七種)의 방편(方便)도 측도(測度)할수 없도다.

십주(十住)에서 비로소 깨닫고 십지(十地)를 입(入)으로 함이라. 초(初)와 후(後)를 들도다. 중간(中間)의 난시난오(難示難悟)는 알지니라. 그러므로 특별히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소불능지(所不能知)를 드는 것은 집착(執著)이 강(强)한 고(故)로 특별히 이를 파절(破折)하는것이로다.

 

기(記)의 三에 가로되,

종고횡광(縱高橫廣) 이란 문중(門中)에 법비합(法譬合)이 있는데 이로써 후(後)의 예(例)로 함이라.

지금 실(實)을 해석(解釋)함에 이미 두루 횡종(橫縱)을 구명(究明)하였다.

하(下)에 권(權)을 해석(解釋)함에 이심극(理心極)함이니라.

하(下)에 바로 권(權)을 해석(解釋)함에 있어 사전에 그 상(相)을 말하는 고(故)로 운운이라 하도다.

 

기지혜문(其智慧門)이란 기(其)는 즉(卽) 전(前)의 실과(實果)의 인지(因智)를 가리키며 만약 지혜즉문(智慧卽門)이라면 문(門)은 권(權)이고 만약 지혜(智慧)의 문(門)이라면 지(智)는 즉(卽) 과(果)니라. 그러나 시등(是等)이란 그중에 마땅히 십지(十地)를 가지고 도전(道前)으로 하고 묘각(妙覺)을 도중(道中)으로 하여 증후(證後)를 도후(道後)라 할지어다. 고로 알았노라. 문(文)의 의(意)는 인(因)의 위(位)에 있다함을.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본말(本末)의 뜻은 분명하도다.

그 중(中)에 종(縱)은 높고 횡(橫)은 널다란 종(縱)은 본문(本門)이고 횡(橫)은 적문(迹門)이니라.

근(根)이란 초목(草木)이고 초목(草木)은 위로 올라가니 이는 적문(迹門)의 뜻이니라.

원(源)이란 본문(本門)이고 원(源)은 수(水)이며 물은 밑으로 내려가니 이는 본문(本門)의 뜻이니라.

가지가 무성(茂盛)하다고 함은 적문십사품(迹門十四品)이며 유장(流長)이란 본문 십사품(本門十四品)이니라. 지혜(智慧)란 일심(一心)의 삼지(三智)이며 문(門)이란 이 지혜(智慧)에 들어가는 바의 능입(能入)의 문(門)이니라.

삼지(三智)의 체(體)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문(門)이란 신심(信心)을 말함이니 이로써 제이권(第二卷)에는 이신득입(以信得入)이라고 하느니라. 입(入)과 문(門)과는 동일하니라.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함을 지혜(智慧)라 하느니라.

 

비유품(譬喩品)에 가로되,

유유일문(唯有一門)이라고

문(門)에 있어서 유문(有門)・공문(空門)・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 있느니라.

유문(有門)은 생(生)이며 공문(空門)은 사(死)니라.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은 생사일념(生死一念)이며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은 생(生)도 사(死)도 아니로다.

 

유문(有門)은 제목(題目)의 문자(文字)이고, 공문(空門)은 이 오자(五字)에 만법(萬法)을 구족(具足)하여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뜻이니라.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은 오자(五字)에 구족(具足)하는 본적(本迹)이고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은 일부(一部)의 의(意)이며 이 내증(內證)은 법화(法華) 이전(已前)의 이승(二乘)의 지혜(智慧)도 미치지 못하는 바이니라.

 

문구(文句)의 三에 가로되

[칠종(七種)의 방편(方便)은 측도(測度)할 수 없도다]라고.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는 이 지혜(智慧)에 득입(得入)하느니라.

따라서 게송(偈頌)에 제제보살중신력견고자(除諸菩薩衆信力堅固者)라 함은 우리들 행자(行者)의 일을 설(說)하느니라. 운운.

 

제삼(第三) 유이일대사인연지사(唯以一大事因緣之事)

 

문구(文句)의 四에 가로되,

一은 즉(卽) 일실상(一實相)이고, 오(五)도 아니고 삼(三)도 아니며, 칠(七)도아니고 구(九)도 아닌고(故)로 일(一)이라 하도다.

그 성(性)은 광박(廣博)하여 오(五)・삼(三)・칠(七)・구(九)보다 넓은 고(故)로 이름하여 대(大)라 하며, 제불출세(諸佛出世)의 의식(儀式)인 고(故)로 이름하여 사(事)라하고 한다. 중생(衆生)에 이 기(機)가 있어 부처를 감(感)하는 고(故)로 이름하여 인(因)이라고 하며, 부처가 기(機)를 받아 응하는 고(故)로 이름하여 연(緣)이라 하는데 이것을 출세(出世)의 본의(本意)로 함이라.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一) 이란 법화경(法華經)이고 대(大)란 화엄(華嚴)이며 사(事)란 중간(中間)의 삼미(三味)니라.

법화(法華) 이전(已前)에도 삼제(三諦)가 있으나. 부서진 주(珠)는 보물(寶物)이 아님과 같도다. 운운.

 

또 가로되 일(一)이란 묘(妙)이고 대(大)란 법(法)이며 사(事)란 연(蓮)이고 인(因)이란 화(華)이며 연(緣)이란 경(經)이니라. 운운.

또 가로되 우리들의 머리는 묘(妙)이고 목은 법(法)이며 가슴은 연(蓮)이고 배는 화(華)이며 발은 경(經)이니라.

이 오척(五尺)의 몸이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이니라.

이 대사(大事)를 석가여래(釋迦如來)는 사십여년간(四十餘年間) 은밀(隱密)히 하셨다가 금경(今經)의 때 설(說)하기 시작하셨도다.

이 대사(大事)를 설(說)하시기위해 부처는 출세(出世)하셨노라.

 

우리들의 일신(一身)이 묘법(妙法)의 오자(五字)라고 개불지견(開佛知見)할 때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느니라.

개(開)란 신심(信心)의 이명(異名)이므로 신심(信心)을 가지고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그대로 개불지견(開佛知見)하느니라. 그러하므로 신심(信心)을 열때 南無妙法蓮華經라 나타냄을 시불지견(示佛知見)이라고 하느니라. 나타낼 때에 영산정토(靈山淨土)의 주처(住處)라 깨닫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오달(悟達)함을 오불지견(悟佛知見)이라고 하느니라. 깨닫는 당체(當體)가 직지도량(直至道場)임을 입불지견(入佛知見)이라고 하느니라.

그런 까닭으로 신심(信心)의 개불지견(開佛知見)을 가지고 정의(正義)로 했도다.

 

입불지견(入佛知見)의 입자(入字)는

적문(迹門)의 의(意)는 실상(實相)의 이내(理內)에 귀입(歸入)함을 입(入)이라 하느니라.

본문(本門)의 의(意)는 이즉본각(理卽本覺)으로 들어가느니라.

지금 日蓮 등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사람이면 보탑(寶塔)에 들어가느니라. 운운.

 

또 가로되 개불지견(開佛知見)의 불(佛)이란 구계소구(九界所具)의 불계(佛界)이고 지견(知見)이란 묘법(妙法)의 이자(二字)・지관(止觀)의 이자(二字)・적조(寂照)의 이덕(二德)・생사(生死)의 이법(二法)이며 색심(色心)인과(因果)니라.

결국 지견(知見)이란 묘법(妙法)이며 구계소구(九界所具)의 불심(佛心)을 법화경(法華經)의 지견(知見)으로써 여는것이니라.

이것으로써 이를 생각하니 불(佛)이란 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을 말함이니라.

이 개각(開覺)이 나타나서 금신(今身)으로부터 불신(佛身)에 이르기까지 수지(受持)하느뇨, 않느뇨라고 나타내는 바가 묘법(妙法)을 나타내는 시불지견(示佛知見)이라 하느니라.

사제감응(師弟感應)해서 수취(受取)할 때 여아등무이(如我等無二)라고 깨달음을 오불지견(悟佛知見)이라 하느니라.

깨닫고 보면 법계삼천(法界三千)의 각각(各各)의 당체(當體)가 법화경(法華經)이니라.

이 내증(內證)에 들어감을 입불지견(入佛知見)이라 하느니라.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운운.

 

또 가로되 사불지견(四佛知見)이란 팔상(八相)이니라.

개(開)란 생(生)의 상(相)이며, 입(入)이란 사(死)의 상(相)이고 중간(中間)의 시오(示悟)는 육상(六相)이니라.

하천탁태(下天託胎) 등은 시불지견(示佛知見)이고 출가(出家)・항마(降魔)・성도(成道)・전법륜(轉法輪)등은 오불지견(悟佛知見)이니라.

권교(權敎)의 의(意)는 생사(生死)를 원리(遠離)하는 교(敎)이므로 사불지견(四佛知見)이 아니로다.

 

금경(今經)의 때 생사(生死)의 이법(二法)은 일심(一心)의 묘용(妙用)이고 유무(有無)의 이도(二道)는 본각(本覺)의 진덕(眞德)이라 개각(開覺)함을 사불지견(四佛知見)이라고 하느니라.

사불지견(四佛知見)을 가지고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은 일대사(一大事)를 생각하시어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하시느니라.

 

이 개불지견(開佛知見)의 법화경(法華經)을 호넨(法然)은 사폐각포(捨閉閣抛)라 말하고 고보대사(弘法大師)는 제삼(第三)의 열(劣)이며 희론(戲論)의 법(法)이라고 욕설하였느니라.

오불도동(五佛道同)의 혀를 자르는 자가 아닐소냐.

지카쿠대사(慈覺大師)・치쇼(智證) 등은 악자(惡子)에게 검을 주어 자기(自己)의 부모(父母)의 머리를 자르게 하는자가 아닐소냐. 운운.

 

또 가로되 일(一)이란 중제(中諦)・대(大)란 공제(空諦)・사(事)란 가제(假諦)이니라.

이 원융(圓融)의 삼제(三諦)는 무엇이뇨.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오자(五字)는 日蓮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며 이를 이름하여 사(事)라 하도다.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 중에 日蓮의 제자 단나가 되는 사람은 중생유차기감불고명위인(衆生有此機感佛故名爲因)의 사람이니라. 그러기에 법화경(法華經)의 극리(極理)를 홍통(弘通)함은 승기이응고명위연(承機而應故名爲緣)이 아닐소냐.

인(因)은 하종(下種)이며 연(緣)은 삼오(三五)의 숙연(宿緣)에 귀함이니라.

사(事)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은 日蓮 자신에 해당되는 대사(大事)이니라.

일(一)이란 일념(一念)이고 대(大)란 삼천(三千)이니라.

이 삼천(三千)으로 나타남은 사(事)의 인연(因緣)이니라.

사(事)란 중생세간(衆生世間)・인(因)이란 오음세간(五陰世間)・연(緣)이란 국토세간(國土世間)이니라.

국토세간(國土世間)의 연(緣)이란 남염부제(南閻浮提)는 妙法蓮華經를 홍통(弘通)해야하는 본연(本緣)의국(國)이니라.

 

경(經)에 가로되

[염부제내(閻浮提內) 광령유포(廣令流布) 사부단절(使不斷絶)]이것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오탁지사(五濁之事)

 

문구(文句)의 四에 가로되,

겁탁(劫濁)은 특별한 체(體)는없다. 겁(劫)은 이는 장시(長時)・찰나(刹那)는 이는 단시(短時)이다.

중생탁(衆生濁)은 특별한 체(體)는 없고 견만과보(見慢果報)를 남(攬)함이며,

번뇌탁(煩惱濁)은 오둔사(五鈍使)를 가리켜 체(體)로 하고

견탁(見濁)은 오리사(五利使)를 가리켜 체(體)로하며

명탁(命濁)은 연지색심(連持色心)을 가리켜 체(體)로한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日蓮 등의 동류(同類)는 이 오탁(五濁)을 벗어났느니라.

아차토안온(我此土安穩)이므로 겁탁(劫濁)이 아니로다.

실상무작(實相無作)의 불신(佛身)이므로 중생탁(衆生濁)이 아니며,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묘지(妙旨)이므로 번뇌탁(煩惱濁)이 아니로다.

오백진점겁(五百塵點劫)으로부터 무시본유(無始本有)의 신(身)이므로 명탁(命濁)이 아니니라.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 단설무상도(但說無上道)의 행자(行者)이므로 견탁(見濁)이 아니니라.

결국 南無妙法蓮華經를 경(境)으로 해서 일어나는 바의 오탁(五濁)이므로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오탁(五濁)의 정의(正意)니라,

 

그러므로 문구(文句) 사(四)에 가로되,

[상(相)이란 사탁(四濁)이 증극(增劇)하여 이 때에 취재(聚在)하였다. 진에(瞋恚)가 증극(增劇)하여 도병(刀兵)이 일어나고 탐욕(貪欲)이 증극(增劇)하여 기아(飢餓)가 생기고 우치(愚癡)가 증극(增劇)하여 질역(疾疫)이 생겨 삼재(三災)가 발생하는 고(故)로 번뇌(煩惱)가 더욱 더 성(盛)하게되고 제견(諸見)이 매우 심하도다]

 

경(經)에 여래현재(如來現在)・유다원질(猶多怨嫉)・황멸도후(況滅度後)라 함은 이것이니라.

법화경(法華經) 불신자(不信者)를 가지고 오탁장중(五濁障重)의 자(者)로 하도다.

 

경(經)에 가로되

[이오탁악세(以五濁惡世)・단요착제욕(但樂著諸欲)・여시등중생(如是等衆生)・종불구불도(終不求佛道)]운운.

불도(佛道)란 법화경(法華經)의 별명(別名)이니라.

천태(天台) 가로되

[불도(佛道)란 별(別)해서 금경(今經)을 가리키도다]라고

 

제오(第五) 비구비구니유회증상만우바새아만우바이불신지사

(比丘比丘尼有懷增上慢優婆塞我慢優婆夷不信之事)

 

문구(文句)의 四에 가로되

상만(上慢)・아만(我慢)・불신(不信)은 사중(四衆)에 공통해서 있다.

단 출가(出家)의 이승(二乘)은 대개 도(道)를 수행(修行)해서 선(禪)을 득(得)하고 잘못알고 성과(聖果)라 말하며 오로지 상만(上慢)을 일으킨다.

재속(在俗)은 긍고(矜高)해서 대개 아만(我慢)을 일으킨다. 여인(女人)은 지혜(智慧)가 얕아 대개 사벽(邪僻)이 생긴다. 스스로 그 과실(過失)을 보지 못한다 함은 삼실(三失)이 마음을 덮는것이다.

허물을 감추고 덕(德)을 높이며 스스로 반성 못함은 이는 무참(無慙)한 사람이다. 만약 스스로 과실(過失)을 본다면 유수(有羞)의 승이로다.

 

기(記)의 四에 가로되,

허물을 숨기는 등(等)이란 삼실(三失)을 석(釋)하였다.

허물을 숨기고 덕(德)을 높임은 상만(上慢)이라 석(釋)하고 스스로 반성못함은 아만(我慢)이라 석(釋)하고 무참한 사람이란 불신(不信)이라 석한다.

만약 스스로 허물을 봄은 이 삼실(三失)이 없으며 아직 과(果)를 증득 못했다 하더라도 잠시 유수(有羞)라고 이름한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본말(本末)의 석(釋)의 뜻은 오천(五千)의 상만(上慢)을 석(釋)하느니라. 상세하게는 본말(本末)을 볼지어다.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의 이인(二人)은 출가(出家)이니라. 함께 증상만(增上慢)이라 이름하고, 허물을 숨기고 덕(德)을 높임을 가지고 본(本)으로 했도다.

우바새(優婆塞)는 남자(男子)이며 아만(我慢)을 가지고 본(本)으로 하고 우바이(優婆夷)는 여인(女人)인데 무참(無慙)을 가지고 본(本)으로 했도다.

이 사중(四衆)은 지금 일본국에 성(盛)한데, 경(經)에는 기수유오천(基數有五千)이라 있지만 일본국에 사십구억구만사천팔백이십팔인(四十九億九萬四千八百二十八人)이라고 보이도다.

재세(在世)에는 오천인(五千人)이 불좌(佛座)를 떠났고 지금 말법(末法)에는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 日蓮의 소좌(所座)를 떠났도다.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증상만(增上慢)이란 도류 료칸 등(等)이 아닐소냐

또 가마쿠라 중(中)의 비구니(比丘尼) 등(等)이 아닐소냐.

우바새(優婆塞)란 사이묘사이며 우바이(優婆夷)란 상하(上下)의 여인이 아닐소냐. 조금도 스스로의 허물을 알지 못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를 비방(誹謗)하여 악명(惡名)을 세우니 어찌 부자견기과(不自見其過)의 자(者)가 아닐소냐.

대방법(大謗法)의 죄인(罪人)이며 법화(法華)의 어좌(御座)를 떠나는것은 의심(疑心)없는 것이니라. 그렇다 하더라도 日蓮을 만나는것은, 이는 오로지 예불이퇴(禮佛而退)의 의(義)이며 이 예불이퇴(禮佛而退)는 경천(輕賤)의 의(義)이고 결코 신해(信解)의 예퇴(禮退)가 아니로다. 이들의 무리는 어계유결루(於戒有缺漏)의 자(者)이니라.

 

문구(文句)의 四에 가로되,

[어계유결루(於戒有缺漏)란 율의(律義)에 실(失)이 있음을 결(缺)이라 이름하고 정공도공(定共道共)에 실(失)이 있음을 루(漏)라 이름하도다] 라고 이 오천(五千)의 상만(上慢)이란 우리들 소구(所具)의 오주(五住)의 번뇌(煩惱)이니라.

지금 법화경(法華經)을 만나뵈올때 만즉법계(慢卽法界)라 열어서 예불이퇴(禮佛而退)함을 불위덕고거(佛威德故去)라고 하느니라.

불(佛)이란 우리들 소구(所具)의 불계(佛界)이며 위덕(威德)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고거(故去)란 이거불거(而去不去)의 의(意)이며 보현품(普賢品)의 작례이거지(作禮而去之)를 생각해야하느니라.

또 가로되, 오천(五千)의 퇴좌(退座)라 하는것은 법화(法華)의 의(意)는 불퇴좌(不退座)이니라.

그 이유(理由)는 제법실상(諸法實相) 약개삼현일(略開三顯一)의 개오(開悟)이니라. 그래서 그때는 아만증상만(我慢增上慢)이란 만즉법계(慢卽法界)라고 열어서 본유(本有)의 만기(慢機)이니라.

기수유오천(基數有五千)이란 우리들의 오주(五住)의 번뇌(煩惱)이니라.

 

만약 또 오주(五住)의 번뇌(煩惱)가 없다고 한다면 법화(法華)의 의(意)를 잃는것이니라.

오주(五住)의 번뇌(煩惱)가 있으면서 본유상주(本有常住)라고 말할 때 기수유오천(基數有五千)이라고 설(說)하느니라.

단혹(斷惑)에 관계치 않고 그대로 본유묘법(本有妙法)의 오주(五住)라고 보면 부자견기과(不自見其過)라 하느니라.

그런데 어계유결루(於戒有缺漏)란 소승(小乘) 권교(權敎)의 대치중병(對治重病)의 계법(戒法)은 아니며 시명지계(是名持戒)의 묘법(妙法)인 고(故)로 결루(缺漏)의 당체(當體) 그대로 시명지계(是名持戒)의 체(體)이니라.

그런데 결루(缺漏)를 그대로 본유(本有)라 담(談)하는 고(故)로 호석기하자(護惜其瑕疵)라고 설(說)하느니라.

본래부터 일승(一乘)의 묘계(妙戒)이므로 일진함법계(一塵含法界)・일념편시방(一念遍十方)하는 고(故)로 시소지이출(是小智已出) 이라고 하느니라.

 

조강(糟糠)이란 진진법법(塵塵法法) 본각(本覺)의 삼신(三身)이로다. 그러므로 복덕(福德)이 적은 당체(當體)도 본각무작(本覺無作)의 각체(覺體)이니라.

 

불감수시법(不堪受是法)이란 약개(略開)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법체(法體)를 듣고 그대로 개각(開覺)하느니라. 그런데 신자존자(信者尊者)가 둔근(鈍根)을 위해서 분별(分別)하여 해설(解說)해 주시라고 청(請)하는 광개삼(廣開三)의 법문(法門)을 불감수시법(不堪受是法)이라 설(說)하느니라. 그런데 법화(法華)의 실의(實義)에 되돌아가 본다면 묘법(妙法)의 법체(法體)는 전혀 능수(能受) 소수(所受)를 잊어버리는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묘법(妙法)이니라.

 

본법(本法)의 중(重)을 깨닫고서 보는고로 차중무지엽(此衆無枝葉)이라고 하느니라. 그러한 내증(內證)은 순일실상(純一實相)・실상외경무별법(實相外更無別法)이기에 유유제정실(唯有諸貞實)이로다.

결국 정실(貞實)이란 색심(色心)을 묘법(妙法)이라고 여는 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하는 바를 유유제정실(唯有諸貞實)이라고 설(說)하느니라.

제(諸)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부처이고 제(諸)는 십계(十界)이며, 정실(貞實)은 십계(十界)의 색심(色心)을 묘법(妙法)이라 하느니라.

금경(今經)에 한하는 고(故)로 유(唯)라 하느니라.

오천(五千)의 상만(上慢) 이외에 전혀 법화경(法華經)은 없는것이며, 오천(五千)의 만인(慢人)이란 우리들의 오대(五大)이고 五大卽妙法蓮華經이니라.

오천(五千)의 상만(上慢)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인 고(故)로 예불이퇴(禮佛而退)인것이며 이것은 구식(九識) 팔식(八識) 육식(六識)으로 내려가는 분(分)이고 유전문(流轉門)의 담도(談道)이니라.

불위덕고거(佛威德故去)란 환멸문(還滅門)이라 그러므로 위덕(威德)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고 본미(本迷) 본오(本悟)의 전체(全體)이니라.

차근 차근히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운운.

 

제육(第六) 여아등무이여아석소원지사(如我等無二如我昔所願之事)

 

소(疏)에 가로되,

인(因)을 들어 신(信)을 권(勸)한다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아(我)란 석존(釋尊) 아실성불구원(我實成佛久遠)의 부처이고 이 본문(本門)의 석존(釋尊)은 우리들 중생(衆生)의 일이니라.

여아(如我)의 아(我)는 십여시(十如是)의 말(末)의 칠여시(七如是)이고 구계(九界)의중생(衆生)은 처음의 삼여시(三如是)이며 우리들 중생(衆生)은 어비이이고 부처는 아들이므로 부자일체(父子一體)로서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니라.

이 우리들을 수량품(壽量品)에서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라고 설(說)하였는데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 부르는자(者)가 이것이니라.

이로써 이를 생각하건데 석존(釋尊)의 총별(總別)의 이원(二願)이란 우리들 중생(衆生)을 위해서 세우신바의 원(願)이니라. 그러므로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하여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내가 성불시키려고 하는 바의 원(願)이 모두 여아석소원(如我昔所願)이니라.

마침내 인도(引導)하여 기신(己身)과 화합(和合)하는것을 금자이만족(今者已滿足)이라고 이해할지니라.

이 금자이만족(今者已滿足)의 이자(已字)는 이미라고 읽는것인데 어느곳을 가르켜이미라고 설(說)했느뇨.

대저 소석(所釋)의 뜻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문(文)을 가리켜 이미라고 하였느니라. 그렇기는 하지만 당가(當家)의 입의(立義)로서는 南無妙法蓮華經 을 가리켜 금자이만족(今者已滿足)이라 설(說)하시었다라고 이해할지니라.

그러므로 여아등무이(如我等無二)의 문(文)은 중요하니라.

여아석소원(如我昔所願)은 본인묘(本因妙), 여아등무이(如我等無二)는 본과묘(本果妙)이니라.

묘각(妙覺)의 석존(釋尊)은 우리들의 혈육(血肉)이고 인과(因果)의 공덕(公德)은 골수(骨髓)가 아닐소냐.

석(釋)에는 거인권신(擧因勸信)이라고 거인(擧因)은 즉본과(卽本果)이니라.

 

지금 日蓮이 부르는 바의 南無妙法蓮華經는 末法 일만년의 중생(衆生)까지 성불(成佛)시키는 것이니 어찌 금자이만족(今者已滿足)이 아닐손가.

이(已)란 건장오년(建長五年) 사월 이십팔일에 처음으로 부르기 시작한 바의 제목(題目)을 가리켜 이(已)라 이해(理解)할지니라.

묘법(妙法)의 대양약(大良藥)을 가지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무명(無明)의 대병(大病)을 치료 하는것은 의심(疑心)이 없느니라,

이것에 생각이 미칠때가 바로 만족(滿足)이며 만족(滿足)이란 성불(成佛)을 말하는 것이니라.

석(釋)에 가로되

[원(圓)은 원융원만(圓融圓滿)에서 이름을 부치고, 돈(頓)은 돈극돈족(頓極頓足)에 이름 부친다] 라고 이것을 생각할지니라. 운운.

 

제칠(第七) 어제보살중정직사방편지사(於諸菩薩中正直捨方便之事)

 

문구(文句)의 四에 가로되,

어제보살중(於諸菩薩中)이라 한데서부터 밑의 삼구(三句)는 틀림없이 실(實)을 나타내느니라.

오승(五乘)은 이는 곡(曲)으로서 직(直)이 아니고, 통별(通別)은 편방(偏旁)으로서 정(正)이 아니며 지금 모두 저 편곡(偏曲)을 버리고 단 정직(正直)의 일도(一道)를 설(說)한다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보살(菩薩)이란 구계(九界)의 제구(第九)에 거(居)하는 보살(菩薩)이며 또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보살(菩薩)이라 하는것인데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니라.

또 제천선신등(諸天善神等) 까지도 이는 보살(菩薩)이며 정직(正直)이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니라. 그런데 일도(一道)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지금 말법(末法)에 있어서 정직(正直)의 일도(一道)를 홍통(弘通)하는 자는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아닐손가.

 

제팔(第八) 당래세악인문불설일승미혹불신수파법타악도지사

(當來世惡人聞佛說一乘迷惑不信受破法墮惡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당래세(當來世)란 말법(末法)이고 악인(惡人)이란 호넨(法然)・고보(弘法)・지카쿠(慈覺)・지쇼(智證)등이며 부처란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니라.

일승(一乘)이란 妙法蓮華經이며 불신(不信)인 고(故)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것이니라.

 

비유품(譬喩品) 구개(九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비유품지사(譬喩品之事)

 

문구(文句)의 五에 가로되,

비(譬)란 비황(比況)이고 유(喩)란 효훈(曉訓)이오. 대비(大悲)는 그치지 않고 교지무변(巧智無邊)이므로 다시금 수목(樹木)을 움직여 바람을 가르치고 부채를 들어 달을 알게 한다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대비(大悲)란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자비(慈悲)와 같으며 지금 日蓮 등(等)의 자비(慈悲)이니라.

 

장안(章安)가로되

[그를 위해 악(惡)을 제거함은 이는 그의 어버이] 라고.

교지(巧智)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제종무득도(諸宗無得道)의 입의(立義)이고 교어난문답(巧於難問答)의 의(意)이며 다시금이란 재세(在世) 다음에 멸후(滅後)란것을 알지어다.

수목(樹木)을 움직인다 함은 번뇌(煩惱)이고 바람을 가르친다 함은 즉보리(卽菩提)이니라. 부채를 든다함은 생사(生死)이고 달을 알게 한다함은 즉 열반(涅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할 때 대백우거(大白牛車)에 타고 직지도량(直至道場)함이니라.

 

기(記)의 五에 가로되

[수목(樹木)과 부채와 바람과 달이란 다만 원교(圓敎)의 이(理)이다]라고

또 가로되

[법설(法說)의 실상(實相)은 어찌해서 숨으며 어찌해서 나타나느뇨. 장풍(長風)은 멎는일이 없고 하늘의 달은 항상 떠있다]라고 이 석(釋)을 생각할지어다.

 

은(隱)이란 사(死)이고 현(顯)이란 생(生)이니라.

장풍(長風)이란 우리들의 호흡(呼吸)이고 공월(空月)이란 심월(心月)이며 법화(法華)의 생사(生死)란 삼세상항(三世常恒)으로서 은현(隱顯)이 없도다.

우리들의 식풍(息風)이란 토하는 바의 언어(言語)이며 이것이 南無妙法蓮華經 이니라.

일심법계(一心法界)의 각월(覺月)은 상주(常住)로서 떠있고 이를 가리켜 오직 원교(圓敎)의 이(理)라 석(釋)하였다.

원(圓)이란 법계(法界)이고 교(敎)란 삼천나열(三千羅列)이며 이(理)란 실상(實相)의 일리(一理)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즉기합장지사(卽起合掌之事)

 

문구(文句)의 五에 가로되,

외의(外義)를 서(敍)한다고 함은 즉기합장(卽起合掌)은 신(身)의 영해(領解)라 이름하고 옛날에는 권실(權實)을 이(二)라 했으니 손바닥이 맞지 않는것과 같도다.

지금은 권즉실(權卽實)이라 해득(解得)하여 대원인(大圓因)을 이룬다.

인(因)은 반드시 과(果)로 향하는 고(故)로 합장향불(合掌向佛)이라고한다.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합장(合掌)이란 법화경(法華經)의 이명(異名)이니라.

향불(向佛)이란 법화경(法華經)을 만나 뵈옵는다는 것이며 합장(合掌)은 색법(色法)이고 향불(向佛)은 심법(心法)이니라.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을 묘법(妙法)이라 개오(開悟)하는것을 환희용약(歡喜踊躍)이라 설(說)하느니라.

 

합장(合掌)에 있어서 또 두가지의 뜻이 있는데 합(合)이란 묘(妙)이고 장(掌)이란 법(法)이니라.

또 가로되 합(合)이란 妙法蓮華經이고 장(掌)이란 이십팔품(二十八品)이니라.

또 가로되 합(合)이란 불계(佛界)이고 장(掌)이란 구계(九界)이며, 구계(九界)는 권(權)・불계(佛界)는 실(實)이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 가로되,

[구계(九界)를 권(權)으로 하고 불계(佛界)를 실(實)로하도다]라고

십계(十界) 모두 합장(合掌)의 이자(二字)에 포함되어 삼라삼천(森羅三千)의 제법(諸法)은 합장(合掌)이 아닌것이 없느니라.

대체로 삼종(三種)의 법화(法華)의 합장(合掌)이 있는데, 지금의 妙法蓮華經는 삼종(三種)의 법화미분(法華未分) 이니라. 그렇다 해도 우선 현설법화(顯說法華)를 정의(定意)로 하느니라.

 

이에 의해 전교대사(傳敎大師)는 어일불승(於一佛乘)이란 근본법화(根本法華)의 교(敎)이니라. 묘법(妙法)외(外)에 결코 일구(一句)의 여경(餘經)도 없다라고, 향불(向佛)이란 일일문문(一一文文)이 모두 금색(金色)의 불체(佛體)라고 받들어 뵈옵는 것이며, 합장(合掌)의 이자(二字)에 법계(法界)가 다 들어있느니라.

지옥(地獄)・아귀(餓鬼)의 각기(各其)의 당체(當體)와 그 외(外) 삼천(三千)의 제법(諸法)이 그대로 합장향불(合掌向佛)이니라. 그러므로 법계(法界)는 모두 사리불(舍利佛)이며 사리불(舍利佛)이란 법화경(法華經)이니라.

사(舍)란 공제(空諦) 이(利)란 가제(假諦) 불(佛)이란 중도(中道)이니라.

원융삼제(圓融三諦)의 묘법(妙法)이니라.

사리불(舍利佛)이란 범어(梵語)이고 여기서는 신자(身子)라고 하는데 신자(身子)란 십계(十界)의 색심(色心)이니라.

신(身)이란 십계(十界)의 색법(色法)이고 자(子)란 십계(十界)의 심법(心法)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모두 사리불(舍利佛)이니라.

사리불(舍利佛)은 즉(卽) 석가여래(釋迦如來)・석가여래(釋迦如來)는 즉(卽) 법화경(法華經)・법화경(法華經)은 즉(卽) 우리들의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이니라.

따라서 신자(身子)는 이 품(品)에서 문차법음(聞此法音)이라고 영해(領解)했도다.

 

문(聞)이란 명자즉(名字卽)・법음(法音)이란 제법(諸法)의 음(音)이고 제법(諸法)의 음(音)이란 묘법(妙法)이니라.

 

그러하므로 문구(文句)에 석(釋)할 때

장풍(長風)은 그치는 일이 없다라고 장풍(長風)이란 법계(法界)의 음성(音聲)이며 이 음성(音聲)을 신해품(信解品)에 이불도성령일체문(以佛道聲令一切聞)이라 하였느니라.

일체(一切)란 법계(法界)의 중생(衆生)을 말함이니라.

이 음성(音聲)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제삼(第三) 신의태연쾌득안은지사(身意泰然快得安穩之事)

 

문구(文句)의 五에 가로되,

종불(從佛)은 이는 신(身)의 희(喜)를 결(結)함이며 문법(聞法)은 구(口)의 희(喜)를 결(結)하는 것이고 단제의회(斷諸疑悔)란 이는 의(意)의 회(悔)를 결(結)한다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신의태연(身意泰然)이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니라. 신(身)이란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며 의(意)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니라. 종불(從佛)이란 日蓮에 따르는 동류(同類) 등(等)을 말함이니라.

 

구(口)의 희(喜)란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의(意)의 희(喜)란 무명(無明)의 혹장(惑障)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로써 이를 생각하건대 이 경문(經文)은 일심삼관(一心三觀) 일념삼천(一念三千) 우리들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이니라.

방편(方便)의 교(敎)는 태연(泰然)이 아니며 안온(安穩)도 아니로다,

행어험경다유난고(行於險經多留難故)의 교(敎)이니라.

 

제사(第四) 득불법분지사(得佛法分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불법(佛法)의 분(分)이란 초주일분(初住一分)의 중도(中道)를 말하느니라.

적문(迹門)초주(初住) 본문(本門)이주(二住) 이상(已上)이라 하는것은 이 분(分)의 자(字)로부터 일어나느니라.

결국 이 분(分)의 일자(一字)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이니라.

그 까닭은 지옥(地獄)은 지옥(地獄)의 분수(分數)에서 불과(佛果)를 증득(證得)하며 내지 삼천(三千)의 제법(諸法)이 각기(各其) 당체(當體)의 분수(分數)에서 불과(佛果)를 증득(證得)하였음이니 진실한 우리들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부르는 당체(當體)의 분수(分數)에서 불과(佛果)를 증득(證得)하였음이니 진실한 우리들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부르는 분수(分數)에서 불과(佛果)를 증득(證得)하느니라.

 

분(分)이란 권교(權敎)는 무득도(無得道)・법화경(法華經)은 성불(成佛)이라고 분별(分別)함이라고 이해(理解)할지어다.

또 가로되 분(分)이란 본문수량품(本門壽量品)의 뜻이며, 각기(各其) 본분(本分)의 분(分) 이니라.

대체로 적문초주분증(迹門初住分證)이라 함은 교상(敎相)이고 진실(眞實)은 초주분증(初住分證)에서 일경(一經)은 극(極)했느니라.

 

제오(第五) 이자회전지사(而自廻轉之事)

 

기(記)의 五에 가로되, 혹은 대론(大論)과 같도다.

경(經)에 이자회전(而自廻轉)이라 함은 신자(身子)의 득기(得記)를 듣고 법성(法性)이 자연(自然)히 전(轉)하여 인과(因果)・의정(依正)・자타(自他) 모두 전(轉)함을 나타낸다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초목성불(草木成佛)의 증문(證文)에 이자회전(而自廻轉)의 경문(經文)을 내놓느니라.

이것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의정체일(依正體一)의 성불(成佛)을 남김없이 설(說)하였느니라.

초목성불(草木成佛)의 증인(證人)이란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함을 가리키느니라.

회전(廻轉)이란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며, 자(自)란 우리들 행자(行者)를 말하느니라.

기(記)의 五의 석(釋)을 깊이 깊이 이를 생각할지어다. 운운 .

 

제육(第六) 일시구작지사(一時俱作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시(一時)란 말법(末法)의 일시(一時)이며 구작(俱作)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구(俱)란 필경주일승(畢竟住一乘)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소작(所作)으로는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며 여행(餘行)을 섞지 않았느니라.

또 가로되 십계(十界)의 어언(語言)은 한번의 제목(題目)을 구작(俱作)하였도다. 이 어찌 감응(感應)이 아니겠는가.

 

제칠(第七) 이비유득해지사(以譬喩得解之事)

 

지관(止觀)의 五에 가로되,

지(止)란 비(譬)에 의하는데 이 의(意)에 징증(徵證)이 있다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경문(經文)가지고 경상원융(鏡像圓融)의 삼제지사(三諦之事)를 傳하느라.

대체로 경상(鏡像)의 비(譬)란 자부자영(自浮自影)의 경(鏡)을 가리키는데 이 경(鏡)이란 일심(一心)의 경(鏡)이니라.

대체로 경(鏡)에 대해서 중중(重重)의 상전(相傳)이 있는데 결국 경(鏡)의 능덕(能德)이란 만상(萬像)을 나타내는 것을 본(本)으로 했고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는 만상(萬像)을 나타내서 일법(一法)도 남은것이 없도다.

 

또 가로되, 경(鏡)에 있어서 오경(五鏡)이 있으니 妙의 경(鏡)에는 법계(法界)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나타내고, 法의 경(鏡)에는 법계(法界)의 체(體)를 나타내고, 蓮의 경(鏡)에는 법계(法界)의 과(果)를 나타내고, 華의 경(鏡)에는 법계(法界)의 인(因)을 나타내고, 經의 경(鏡)에는 만법(萬法)의 언어(言語)를 나타낸다.

 

또 가로되, 妙의 경(鏡)에는 화엄(華嚴)을 나타내고, 法의 경(鏡)에는 아함을 나타내고, 蓮의 경(鏡)에는 방등을 나타내고, 華의 경(鏡)에는 반야를 나타내고, 經의 경(鏡)에는 법화(法華)를 나타내느니라.

순역(順逆)의 순서에 따라 이해할지니라.

우리들 중생(衆生)의 오척(五尺)・오륜(五輪) 이 妙法蓮華經로 나타났으므로 보탑품(寶塔品)을 가지고 경(鏡)이라 전수(傳受)하느니라.

신방(信謗)의 나타나는 모양을 차근 차근히 이를 생각할지어다.

자부자영(自浮自影)의 경(鏡)이란 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운운.

 

제팔(第八) 유유일문지사(唯有一門之事)

 

문구(文句)의 五에 가로되,

유유일문(唯有一門)이란 상(上)의 이종종법문선시어불도(以種種法門宣示於佛道)에 비유(譬喩)한다.

문(門)에 또 이(二)가 있으니 택문(宅門)과 거문(車門)이다.

택(宅)이란 생사(生死)이고 문(門)이란 나오는 요로(尿路)이다.

이것은 방편교(方便敎)의 구극(究極)이며 거(車)란 대승(大乘)의 법(法)이고 문(門)이란 원교(圓敎)의 구극(究極)인것이다.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문(一門)이란 법화경(法華經)의 신심(信心)이고 거(車)란 법화경(法華經)이며 우(牛)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택(宅)이란 번뇌(煩惱)이고 자신법성(自身法性)의 대지(大地)를 생사생사(生死生死) 유전(流轉)해 가느니라. 운운.

 

제구(第九) 금차삼계등지사(今此三界等之事)

 

문구(文句)의 五에 가로되,

다음에 금차삼계(今此三界)로부터 하(下)・제이(第二)에 일행반(一行半)은 상(上)의 소견제중생(所見諸衆生) 위생로병사지소소자(爲生老病死之所燒煮)를 송(頌)하여 제이(第二)의 소견(所見)・화(火)의 비유(譬喩)를 합(合)친다고.

유아일인(唯我一人)부터 하(下)・제삼(第三)에 반게(半偈)는 상(上)의 불견차이(佛見此已)・변작시념(便作是念)을 송(頌)하여 경입화택(驚入火宅)을 합(合)치는 것이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경문(經文)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문(文)이니라.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은 적문(迹門)에는 생음이천(生陰二千)의 세간을 밝히고 본문(本門)에는 국토세간(國土世間)을 밝히느니라.

 

또 가로되 금차삼계(今此三界)의 경문(經文)은 국토세간(國土世間)이며 기중중생(其中衆生)의 경문(經文)은 오음세간(五陰世間)이니라.

이금차처(而今此處)・다제환난(多諸患難)・유아일인(唯我一人)의 경문(經文)은 중생세간(衆生世間)이니라.

 

또 가로되 금차삼계(今此三界)는 법신여래(法身如來)이고 기중중생(其中衆生)・실시오자(悉是吾子)는 보신여래(報身如來)이며 이금차처(而今此處)등 응신여래(應身如來)이니라.

 

신해품(信解品)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신해품지사(信解品之事)

 

기(記)의 六에 가로되,

정법화(正法華)에는 신요품(信樂品)이라고 이름하는데 그뜻이 통(通)한다 해도 요(樂)는 해(解)에 미치지 않는다.

지금은 영해(領解)를 밝히는데 무엇을 가지고 요(要)라하느뇨.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일부이십팔품(法華一部二十八品)의 제호중(題號中)에 신해(信解)의 제호(題號)는 이 품(品)에 있느니라.

일념삼천(一念三千)도 신(信)의 일자(一字)에서 일어나며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성도(成道)도 신(信)의 일자(一字)에서 일어나느니라.

 

이 신(信)의 자(字)는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자르는 이검(利劍)이로다.

그 까닭은 신(信)은 무의왈신(無疑曰信)이라해서 의혹(疑惑)을 단파(斷破)하는 이검(利劍)이고 해(解)란 지혜(智慧)의 이명(異名)이며 신(信)은 가치(價値)와 같고 해(解)는 보배와 같도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지혜(智慧)를 사는 것은 신(信)의 일자(一字)이며 지혜(智慧)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신(信)은 지혜(智慧)의 인(因)으로서 명자즉(名字卽)이며, 신(信) 외(外)에 해(解)가 없고 해(解) 외(外)에 신(信)이 없으며 신(信)의 일자(一字)를 가지고 묘각(妙覺)의 종자(種子)로 정(定)했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는 南無妙法蓮華經라고 신수영납(信受領納)하는 고(故)로 무상보취(無上寶聚)・불구자득(不求自得)의 대보주(大寶珠)를 얻는 것이며 신(信)은 지혜(智慧)의 종자(種子)이고 불신(不信)은 타옥(墮獄)의 인(因)이니라.

 

또 가로되 신(信)은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로다.

그 까닭은 신(信)은 지일체법(知一切法)・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 체달(體達)하여 실상(實相)의 일리(一理)라고 믿느니라.

해(解)는 수연진여(隨緣眞如)이며 자수용지(自受用智)를 말하느니라.

 

문구(文句)의 九에 가로되,

의심이 없음을 신(信)이라 하며 명료(明了)함을 해(解)라 한다 라고

 

문구(文句)의 六에 가로되,

중근(中根)의 사람이 비유(譬喩)를 설(說)함을 듣고 비로소 의혹(疑惑)을 파(破)하여 대승(大乘)의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고(故)로 이름하여 신(信)이라 하며 나아가서 대승(大乘)의 수도(修道)에 들어가는 고(故)로 이름하여 해(解)라 하도다.

 

기(記)의 六에 가로되,

대(大)로써 이를 바라보니 즉 양자(兩字)를 나누어가지고 이도(二道)에 속(屬)함이라. 의심(疑心)을 파(破)하는 고(故)로 신(信)이며 나아가서 들어감을 해(解)라 이름하였다.

신(信)은 이도(二道)에 통하고 해(解)는 다만 수(修)에 있는 고(故)로 수도(修道)를 해(解)라 이름한다고 한다 라고.

 

제이(第二) 사부도서지사(捨父逃逝之事)

 

문구(文句)의 六에 가로되,

사부도서(捨父逃逝)란 대(大)를 퇴(退)함을 사(捨)라하고 무명(無明)을 스스로 덮음을 도(逃)라 말하며 생사(生死)에 취향(趣向)함을 서(逝)라한다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부(父)에 있어서 삼(三)이 있으니 법화경(法華經)・석존(釋尊)・日蓮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부(父)인데 이 부(父)에 배반(背反)하는 고(故)로 유전(流轉)의 범부(凡夫)로 되느니라.

석존(釋尊)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부(父)인데 이 부처를 배반(背反)하는 고(故)로 빠짐없이 제도(諸道)를 윤회(輪廻)하느니라.

지금 日蓮은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부(父)이니라.

장안대사(章安大師) 가로되,

[그를 위해 악(惡)을 제(際)함은 즉(卽) 이는 그의 어버이다]라고.

 

퇴대(退大)의 대(大)는 南無妙法蓮華經이고 무명(無明)이란 의혹(疑惑)・방법(謗法)이니라.

스스로 덮는다 함은 호넨(法然)・고보(弘法)・지카쿠(慈覺)・지쇼(智證)・도류(道隆)・료칸(良觀)등의 악비구(惡比丘)가 방법(謗法)의 죄과(罪過)를 제멋대로 덮어 숨기는 것이니라.

 

제삼(第三) 가부궁곤지사(加復窮困之事)

문구(文句) 六에 가로되,

출요(出要)의 술(術)을 득(得)하지 못함을 또 궁(窮)이라 하고, 팔고(八苦)의 불에 타버리는 고로 곤(困)이라고 한다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출요(出要)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술(術)이란 신심(信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궁곤(窮困)을 면리(免離)하는것은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여 받들기 때문이니라.

또 가로되, 묘법(妙法)에 치우(値遇)하여 받들때는 팔고(八苦)의 번뇌(煩惱)의 화(火)는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의 지화(智火)라고 개각(開覺)하느니라. 운운.

 

제사(第四) 심회회한지사(心懷悔恨之事)

 

문구(文句)의 六에 가로되,

회(悔)를 부(父)의 입장(立場)으로 하고 한(恨)을 자(子)의 입장(立場)으로 한다고

 

기(記)의 六에 가로되,

부(父)에게도 회한(悔恨)이 있으며 자(子)에게도 회한(悔恨)이 있다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자(子)와 같고 日蓮은 부(父)와 같도다.

법화(法華)・불신(不信)의 죄과(罪過)에 의해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져 도리어 日蓮을 원망하리라.

또 日蓮도 소리도 아끼지 않고 법화(法華)를 버리지 말지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영산(靈山)에서 후회(後悔)할일 있을것이라.

문구(文句) 六에 가로되,

[심회회한(心懷悔恨)이란 옛날 정중하게 교조(敎詔)하지 않고 훈계(訓戒)하는 일이 없어 도서(逃逝)케한것을 후회(後悔)하고 자(子)가 은의(恩義)를 생각지 않고 나를 멀리하고 남과 친(親)하는 것을 원망한다]

 

제오(第五) 무상보취불구자득지사(無上寶聚不求自得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무상(無上)에는 중중(重重)의 단계(段階)가 있음이라.

외도(外道)의 법(法)에 대하면 삼장교(三藏敎)는 무상(無上)・외도(外道)의 법(法)은 유상(有上)이니라.

삼장교(三藏敎)는 유상(有上)・통교(通敎)는 무상(無上)

통교(通敎)는 유상(有上)・별교(別敎)는 무상(無上)

별교(別敎)는 유상(有上)・원교(圓敎)는 무상(無上) 이니라.

또 이전(爾前)의 원(圓)은 유상(有上)・법화(法華)의 원(圓)은 무상(無上)

또 적문(迹門)의 원(圓)은 유상(有上)・본문(本門)의 원(圓)은 무상(無上)이니라. 또 적문(迹門) 십삼품(十三品)은 유상(有上)・방편품(方便品)은 무상(無上)이니라. 또 본문(本門) 십삼품(十三品)은 유상(有上)・일품이반(一品二半)은 무상(無上)이니라.

또 천태대사(天台大師)의 소홍(所弘)의 지관(止觀)은 무상(無上)・현문이부(玄文二部)는 유상(有上)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본의(本意)는 무상(無上)이란 南無妙法蓮華經・ 무상중(無上中)의 극무상(極無上)이니라.

 

이 묘법(妙法)을 가리켜 무상보취(無上寶聚)라고 설(說)하셨느니라.

보취(寶聚)란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만행만선(萬行萬善)의 제파라밀(諸波羅密)의 보(寶)를 모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무상보취(無上寶聚)를 신로(辛勞)도 없고 행공(行功)도 없이 일언(一言)으로 수취(受取)하는 신심(信心)이며 불구자득(不求自得)이란 이것이니라.

자(自)의 자(字)는 십계(十界)이며 십계각각(十界各各)이 득(得)하느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 이것이니라. 그러한 까닭으로 이 문(文)은 묘각(妙覺)의 석존(釋尊)은 우리들 중생(衆生)의 골육(骨肉)이니 깊이 깊이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운운.

 

제육(第六) 세존대은지사(世尊大恩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세존(世尊)이란 석존(釋尊)이고 대은(大恩)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석존(釋尊)의 대은(大恩)을 보답(報答)하려고 생각하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해야할것이니라.

이것이 즉(卽) 석존(釋尊)의 은덕(恩德)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니라.

대은(大恩)을 제목(題目)이라 하는것은 차하(次下)에 이희유사(以稀有事)라 설(說)하며 희유(稀有)의 사(事)란 제목(題目)이니라.

 

이 대은(大恩)의 妙法蓮華經를 사십여년간(四十餘年間) 비장(秘藏)하신 후(後) 팔개년(八箇年)에 대은을 여셨느니라.

 

문구(文句)의 一에 가로되

[법왕(法王)이 운(運)을 열도다]라고.

운(運)이란 대은(大恩)의 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도우려고 생각함은 어찌 세존(世尊)의 대은(大恩)이 아닐손가

 

장안대사(章安大師)가 십종(十種)의 은(恩)을 열거(列擧)하였느니라.

제일(第一)에는 자비두물(慈悲逗物)의 은혜(恩惠)이고

제이(第二)에는 최초하종(最初下種)의 은혜(恩惠)이고

제삼(第三)에는 중간수축(中間隨逐)의 은혜(恩惠)이고

제사(第四)에는 은덕시졸(隱德示拙)의 은혜(恩惠)이고

제오(第五)에는 녹원시소(鹿苑施小)의 은혜(恩惠)이고

제육(第六)에는 치소모대(小慕大)의 은혜(恩惠)이고

제칠(第七)에는 영지가업(領地家業)의 은혜(恩惠)이고

제팔(第八)에는 부자결정(父子決定)의 은혜(恩惠)이고

제구(第九)에는 쾌득안온(快得安穩)의 은혜(恩惠)이고

제십(第十)에는 환용이다(還用利多)의 은혜(恩惠)인데

이 십은(十恩)은 즉(卽)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이니라고. 운운.

 

기(記)의 六에가로되,

[숙맹(宿萌)이 초초(稍稍) 갈라져 아직도 부영(敷榮)하지 못했으니 장원(長遠)의 은(恩)을 무엇으로 보답(報答)하리오]라고.

또 가로되 [주가(注家)는 단(但) 물(物)로서 시(施)를 천지(天地)에 답(答)하지 않고 자(子)로서 생(生)을 부모(父母)에게 사(謝)하지 않는다. 감보(感報)는 이에 망(亡)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보정기(輔正記)의 六에 가로되,

[물(物)은 시(施)를 천지(天地)에 답(答)하지 않는다함은 소위(所謂) 물(物)은 천지(天地)에 의해 생(生)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天地)의 혜택(惠澤)을 보은(報恩)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식(子息)도 또한 그와 같도다]

 

기(記)의 六에 가로되,

[하물며 또한 오직 나로 하여금 보망(報亡)케하는데 依함이라. 이 은혜(恩惠)에 보은(報恩)하기 어려움이랴]고.

 

보정기(輔正記)에 가로되,

지연령아보망(只緣令我報亡)이란 의(意)에 가로되 오직 여래(如來)가 성문(聲聞)으로 하여금 동등(同等)하게 망보(亡報)의 이(理)를 득(得)하게 함에 의(依)해서이다.

이(理)는 이르되, 일대열반(一大涅槃)이다.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그와 같이 중중(重重)의 소석(所釋)이 있다해도, 결국 南無妙法蓮華經의 하종(下種)이니라.

하종(下種)인 고(故)로 여영수형(如影隨形)하시느니라.

지금 日蓮도 그와 같으니라.

妙法蓮華經를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 등(等)에 수여(授與)함이니 어찌 석존(釋尊)의 십은(十恩)이 아닐소냐.

 

십은(十恩)이란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이니라고 함은 제일(第一)・제이(第二)・제삼(第三)은 대자위실(大慈爲室)의 어은(御恩)이니라.

제사(第四)・제오(第五)・제육(第六)・제칠(第七)은 유화인욕의(柔和忍辱衣)의 은(恩)이니라.

제팔(第八)・제구(第九)・제십(第十)은 제법공위좌(諸法空爲座)의 은(恩)이니라.

제육(第六)의 치소모대(耻小慕大)의 은(恩)을

기(記)의 六에 가로되

[고(故)로 돈(頓)의 후(後)에 있어서 즉(卽) 소화(小化)를 내려 탄척도태(彈斥淘汰)하여 추침단련(砧鍛鍊)함이라]라고.

 

약초유품(藥草喩品) 오개(五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약초유품지사(藥草喩品之事)

 

기(記)의 七에 가로되,

무시(無始)의 성덕(性德)은 대지(大地)와 같으며 대승(大乘)의 마음을 발생(發生)함은 종자(種子)와 같고 이승(二乘)의 마음을 발생(發生)함은 초목(草木)의 아경(芽莖)과 같다.

지금 초주(初住)에 들어감은 동일(同一)하게 불승(佛乘)의 아경(芽莖)등이 생기는 것과 같다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法華)의 심(心)을 믿음은 종자(種子)이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내증(內證)에 들어가면 불과(佛果)를 성취(成就)하느니라.

약(藥)이란 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의 심법(心法)이니라. 그 까닭은 권교(權敎)의 심(心)은 독초(毒草)이지만 법화(法華)를 만나게 되면 삼독(三毒)의 번뇌(煩惱)의 심지(心地)를 삼신과만(三身果滿)의 종자(種子)라고 개각(開覺)함을 약(藥)이라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는 묘법(妙法)의 약(藥)을 번뇌(煩惱)의 초(草)에 받음이며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깨닫게 함을 유(喩)라 하느니라.

 

석(釋)에 가로되 [유(喩)란 효훈(曉訓)이다]

약초유(藥草喩)란 우리들 행자(行者)를 말함이니라.

 

제이(第二) 차품술성단지사(此品述成段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술(述)이란 가섭(迦葉)이고 성(成)이란 석존(釋尊)이니라.

술성(述成)의 이자(二字)는 가섭(迦葉)・세존(世尊)이 일치(一致)하는 의(義)이니라.

결국 술(述)은 소화(所化)의 영해(領解)이고 성(成)의 부처의 인가(印加)로다.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영해(領解)하는 것은 술(述)이고 日蓮이 찬탄(讚歎)함은 성(成)이니라.

우리들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남김없이 설(說)한 품(品)이로다.

술성(述成)이 일치부계(一致符契)함은 술성불이(述成不二)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이니라.

이 술성(述成)은 법계삼천(法界三千)의 개성불도(皆成佛道)의 술성(述成)이니라.

 

제삼(第三) 수일지소생일우소윤등지사(雖一地所生一雨所潤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수연불변(隨緣不變)이 생기는 바의 경문(經文)이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 가로되

[수연불변(隨緣不變)의 설(說)은 대교(大敎)에서 나오고 목석무심(木石無心)의 말은 소종(小宗)에서 생긴다] 라고.

이 대교(大敎)란 일경(一經)의 총체(總體)가 아니고 이 수일지소생등(雖一地所生等)의 십칠자(十七字)를 가르키느니라.

일지소생일우소윤(一地所生一雨所潤)은 무차별비(無差別譬)이며 이제초목각유차별(而諸草木各有差別)은 유차별비(有差別譬)이니라.

무차별비(無差別譬)인 고(故)로 묘(妙)이며 유차별비(有差別譬)인 고(故)로 법(法)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함은 유차(有差)를 두느니라.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유차별(有差別)이며 묘법(妙法)의 오자(五字)는 무차별(無差別)이니라.

일지(一地)란 종인지과(從因至果)이고 일우(一雨)란 종과향인(從果向因)이니라.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종과향인(從果向因)의 일우(一雨)를 홍통(弘通)하느니라.

일우(一雨)란 제목(題目)에 여행(餘行)을 섞지 않음이라. 서품(序品)의 때는 우대법우(雨大法雨)라 설(說)하고 이 품(品)의 때는 일우소윤(一雨所潤)이라 설(說)하였노라.

일우소윤(一雨所潤)은 서품(序品)의 우대법우(雨大法雨)를 거듭해서 부처가 설(說)하셨느니라.

일지(一地)란 오자(五字)중(中)의 경(經)의 일자(一字)이고

일우(一雨)란 오자(五字)중(中)의 묘(妙)의 일자(一字)이며

법연화(法蓮華)의 삼자(三字)는 삼천만법(三千萬法) 중(中)에서도 초목(草木)이며 삼승(三乘)・오승(五乘)・칠방편(七方便)・구법계(九法界)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파유법왕출현세간지사(破有法王出現世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유(有)란 방법자(謗法者)이고 파(破)란 절복(折伏)이며 법왕(法王)이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이고 세간(世間)이란 일본국이니라.

또 가로되 파(破)는 공(空)이고 유(有)는 가(假)이며 법왕(法王)은 중도(中道)이니라. 그러므로 이 경문(經文)을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종자(種子)라고 전(傳)하느니라. 대체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출세(出世)는 이 경문(經文)에 의하느니라. 유(有)란 삼계(三界)・이십오유(二十五有)이며 파(破)란 유집(有執)을 파(破)하는 것이니라.

법왕(法王)이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심법(心法)이고 왕(王)이란 심법(心法)을 말하느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여는 것을 파유법왕(破有法王)이라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방법(謗法)의 유집(有執)을 단절(斷切)하여 석가법왕(釋迦法王)으로 되는 것을 말하느니라. 유(有)라함은 우리들의 번뇌(煩惱)・생사(生死)이니라.

번뇌(煩惱)・생사(生死)를 버리고 별도(別途)로 보리(菩提)・열반(涅槃)이 있다고 함은 권교(權敎)의 심(心)이로다.

금경(今經)의 심(心)은 번뇌(煩惱)・생사(生死)를 그대로 두고 보리(菩提)・열반(涅槃)으로 여는바를 파(破)라 하느니라.

유(有)란 번뇌(煩惱)이고 파(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유(有)는 소파(所破)이며 파(破)는 능파(能破)이니라.

능파(能破)・소파(所破) 함께 실상(實相)의 일리(一理)이니라.

서품(序品)의 때는 진제유결(盡諸有結)이라 설(說)햇고 이 품(品)에는 파유법왕(破有法王)이라 설(說)했으며 비유품(譬喩品)의 때는 개시아유(開始我有)라 말씀하셨도다. 운운.

 

제오(第五) 아관일체・보개평등・무유피차・애증지심・아무탐착・역무한애지사

(我觀一切・普皆平等・無有彼此・愛憎之心・我無貪著・亦無限礙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육구(六句)의 경문(經文)은 오식(五識)이니라.

아관일체보개평등(我觀一切普皆平等)이란 구식(九識)이고 무유피차(無有彼此)란 팔식(八識)이며 애증지심(愛憎之心)이란 칠식(七識)이고 아무탐착(我無貪著)이란 육식(六識)이며 역무한애(亦無限礙)란 오식(五識)이고 우리들 중생(衆生)의 관법(灌法)의 대체(大體)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어찌 아관일체보개평등(我觀一切普皆平等)의 구식(九識)의 수행(修行)이 아닐소냐.

그렇다면 무유피차(無有彼此)가 아닐소냐.

애증지심(愛憎之心)이 아닐소냐.

아무탐착(我無貪著)이 아닐소냐.

역무한애(亦無限礙)가 아닐소냐.

 

수기품(授記品) 사개(四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수기지사(授記之事)

 

문구(文句)의 七에 가로되,

수(授)란 이는 여(與)의 의(義)이니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기(記)란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수(授)란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니라.

불신(不信)의 자(者)에서는 수여(授與)하지 않느니라. 또 이것을 받지않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의 기(記)를 받느니라.

또 가로되, 수기(授記)란 법계(法界)의 수기(授記)이고 지옥(地獄)의 수기(授記)는 악인(惡人)이므로 악업(惡業)의 수기(授記)를 죄인(罪人)에게 수여(授與)하는것이며 나머지는 이것에 준(準)해서 알아야하느니라.

생(生)의 기(記)가 있으면 반드시 사망(死亡)하는것이며 사(死)의 기(記)가 있으면 또 생(生)하느니라.

삼세상항(三世常恒)의 수기(授記)이니라.

결국 중근(中根)의 사대성문(四大聲聞)이란 우리들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상(四相)이니라.

가섭(迦葉)은 생(生)의 상(相)・가전연(迦旃延)은 노(老)의 상(相)・목련(目連)은 병(病)의 상(相)・수보리(須菩提)는 사(死)의 상(相)이니라.

법화(法華)에 이르러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상(四相)을 사대성문(四大聲聞)으로 나타냈는데 이것은 즉팔상작불(卽八相作佛)이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의 행위(行爲)이니라고 기(記)를 수여(授與)하는 것이며 묘법(妙法)의 수기(授記)인 고(故)로 법계(法界)의 수기(授記)이니라.

연화(蓮華)의 수기(授記)인 고(故)로 법계(法界)가 청정(淸淨)이니라.

경(經)의 수기(授記)인 고(故)로 중생(衆生)의 언어음성(言語音聲)은 삼세상항(三世常恒)의 수기(授記)이니라.

오직 일언(一言)으로 수기(授記)해야할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가섭광명지사(迦葉光明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광명(光明)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상호(相好)이니라.

광(光)이란 지옥(地獄)의 등연맹화(燈燃猛火) 이는 즉 본각자수용(本覺自受用)의 지화(智火)이니라. 내지(乃至) 불과(佛果)는 이와같도다.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의 광명(光明)을 방법(謗法)의 암명(闇冥)속으로 보내는 것이니 이것은 즉(卽) 가섭(迦葉)의 광명여래(光明如來)이니라.

가섭(迦葉)은 두타(頭陀)를 본(本)으로 하며 두타(頭陀)는 여기에는 두수(抖擻)라 하느니라.

지금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여행(餘行)을 두수(抖擻)하여 오로지 南無妙法蓮華經을 수행(修行)함은 차경난지행두타자(此經難持行頭陀者)라고 하느니라. 운운.

 

제삼(第三) 사시신이지사(捨是身已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문단(文段)에서 사불사(捨不捨)가 생기느니라.

전사(轉捨)로서 영사(永捨)는 아니로다.

전사(轉捨)는 본문(本門)이며 영사(永捨)는 적문(迹門)이니라.

이몸을 버림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본지(本地)에 배반하느니라.운운.

 

결국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함은 사시신이(捨是身已)이니라. 불석신명(不惜身命)이기 때문이니라. 운운.

또 가로되, 이몸을 베푼다고 읽을때는 법계(法界)에 오대(五大)를 베푸느니라.

버리는 바의 의(義)가 아니니라. 이 몸을 버리고 부처가 된다는것은 권문(權門)의 뜻이니라. 이러한 집정(執情)을 버림을 사시신(捨是身)이라 설(說)하느니라.

 

이 문(文)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이고 사시신(捨是身)이란 환귀본리(還歸本里)・일념삼천(一念三千)의 의(意)이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가 당지신토(當知身土)・일념삼천(一念三千)・고성도시(故成道時)・칭차본리(稱此本理)・일심일념(一心一念)・편어법계(遍於法界)라고 해석함은 이의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숙세인연오금당설지사(宿世因緣吾今當說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이란 삼천진점(三千塵點)의 옛날의 일을 말하며 하근(下根)을 위해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을 설(說)하리라는 것이니라.

인연(因緣)이란 인(因)은 종(種)이고 연(緣)은 옛날로 돌아간다는 의(義)이며 의거(依據)한다고 훈독(訓讀)하느니라.

대통결연(大通結緣)의 하종(下種)에 의거(依據)하는것을 인연(因緣)이라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함은 과거(過去)의 인(因)에서 비롯됨이니라.

이로써 묘락대사(妙樂大師) 가로되

[고(故)로 알았도다. 말대(末代)의 일시(一時), 들을 수 있어듣고 나서 믿음이 생기는것은 모름지기 숙종(宿種)이니라]고

숙(宿)이란 대통(大通)의 왕시(往時)이고 종(種)이란 하종(下種)의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이 하종(下種)에 의거(依據)함을 인연(因緣)이라 하느니라.

본문(本門)의 의(意)는 오백진점(五百塵點)의 하종(下種)에 의거(依據)해야하는것이며 진실한 묘법(妙法)의 인(因)에 의거(依據)함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

 

화성유품(化城喩品) 칠개(七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화성지사(化城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화(化)란 색법(色法)이며 성(城)이란 심법(心法)이니라.

이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을 무상(無常)이라고 설(說)하는것은 권교(權敎)의 심(心)이며 법화경(法華經)의 의(意)는 무상(無常)을 상주(常住)라 설(說)함이니 화성즉보처(化城卽報處)이니라.

결국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는 색심(色心)을 묘법(妙法)이라고 여는것을 화성즉보처(化城卽報處)라고 하느니라.

 

십계개화성(十界皆化城)이라 하니 십계(十界)의 각각(各各)이 보처(寶處)이고 화성(化城)은 구계(九界)이며 보처(寶處)는 불계(佛界)이니라.

화성(化城)을 떠나서 보처(寶處)에 이른다고 함은 오백유순(五百由旬)의 거리인데 오백유순(五百由旬)은 견사(見思)・진사(塵沙)・무명(無明)이니라.

이 번뇌(煩惱)의 오백유순(五百由旬)을 묘법(妙法)의 오자(五字)로 여는것을 화성즉보처(化城卽報處)라 하느니라.

화성즉보처(化城卽報處)란 즉(卽)의 일자(一字)는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염념(念念)의 화성(化城), 염념(念念)의 보처(寶處)로다.

우리들의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을 무상(無常)이라 설(說)함은 권교(權敎)이고 상주(常住)라 설(說)함은 법화경(法華經)이니라.

무상(無常)이라고 집착(執著)하는 집정(執情)을 멸(滅)함 즉멸화성(卽滅化城)이라고 하느니라.

화성(化城)은 피육(皮肉)이고 보처(寶處)는 골(骨)이니라.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을 묘법(妙法)이라 개각(開覺)함을 화성즉보처(化城卽報處)의 실체(實體)라고 하느니라.

실체(實體)란 무상상주(無常常住)・구시상즉(俱時相卽)・수연불변(隨緣不變)・일념적조(一念寂照)이고 일념(一念)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며 무의왈신(無疑曰信)의 일념(一念)이니 즉(卽)의 일자(一字)에 마음을 두고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운운.

 

제이(第二) 대통지승불지사(大通智勝佛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대통(大通)은 심왕(心王)이고 지승(智勝)은 심수(心數)이며 대통(大通)은 적문(迹門)이고 지승(智勝)은 본문(本門)이며 대통지승(大通智勝)은 우리들의 일신(一身)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이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대통(大通)이며 제목(題目)을 부르는 것은 지승(智勝)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지(智)는 권종(權宗)의 대지(大智)보다 백천만배(百千萬倍)나 뛰어난 바를 지승(智勝)이라고 알지어다.

 

대(大)는 색법(色法)이고 통(通)은 심법(心法)이며 우리들의 생사(生死)를 대통(大通)이라 하느니라.

이 생사(生死)의 신심(信心)에 행동(行動)하는 기념(起念)을 지승(智勝)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이것을 생각하니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행자(行者)는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고 십육왕자(十六王子)란 우리들의 심수(心數)이니라. 운운.

 

제삼(第三) 제모체읍지사(諸母涕泣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제모(諸母)란 제(諸)는 십육인(十六人)의 모(母)를 말하는것이라.

실의(實義)로는 모(母)란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며 이 무명(無明)에서 일어나는 혹장(惑障)을 제모(諸母)라고도 하느니라.

유전(流轉)의 때는 무명(無明)의 모(母)와 같이 나오고 환멸(還滅)의 때에는 무명(無明)의 모(母)를 살해하느니라.

무명(無明)의 모(母)란 염불(念佛)・선(禪)・진언(眞言) 등(等)의 사람들이니라.

이수송지(而隨送之)란 방인(謗人)을 가리키느니라.

그렇다 해도 마침내 법화경(法華經)의 광선유포(廣宣流布)가 나타나서 천하일동(天下一同)으로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로 될것이니 [수지도량(受持道場) 환욕친근(還欲親近)]이것이니라.

 

제사(第四) 기조전륜성왕지사(其祖轉輪聖王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본지신(本地身)의 부처란 이 문(文)에서 나왔는데, 조(祖)란 법계(法界)의 이명(異名)이며 이것은 방편품(方便品)의 상(相)・성(性)・체(體)의 삼여시(三如是)를 조(祖)라하느니라.

이 삼여시(三如是) 이외(以外)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은 없음이니 전륜(轉輪)이란 생주이멸(生住異滅)이어서 성왕(聖王)이란 심법(心法)이니라.

이 삼여시(三如是)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부모(父母)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부모(父母)로서 기조(祖轉) 전륜성왕(轉輪聖王)이니라.

 

금은동철(金銀銅鐵)이란 금(金)은 생(生)・은(銀)은 백골(白骨)로써 사(死)이고・동(銅)은 노(老)의 상(相)・철(鐵)은 병(病)이며 이것은 즉(卽) 개시오입(開示悟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이니라.

삼세상항(三世常恒)하여 생사(生死)・생사(生死) 이렇게 돌아감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하느니라.

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출현(出現)할 시(時)의 윤보(輪寶)란 우리들이 토하는 바의 언어(言語) 음성(音聲)이니라.

이 음성(音聲)의 윤보(輪寶)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 이로써 평등대혜(平等大慧)라 하느니라.

 

제오(第五) 십육왕자지사(十六王子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십(十)이란 우리들 십계(十界)이며 육(六)이란 육근(六根)이며 왕(王)이란 심왕(心王)이고 자(子)란 심수(心數)인데, 이것은 즉(卽) 실상(實相)의 일리(一理)의 대통(大通)의 자(子)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십육왕자(十六王子)이며 팔방작불(八方作佛)이란 우리들의 팔고(八苦)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로 여느니라. 운운.

 

제육(第六) 즉멸화성지사(卽滅化城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우리들이 멸(滅)하는 당체(當體)는 화성(化城)이니라.

이 멸(滅)을 멸(滅)이라 보면 화성(化城)이고 불멸(不滅)의 멸(滅)이라 지견(知見)함을 보처(寶處)라고 가르키느니라.

이것을 수량품(壽量品)에서는 이실불멸도(而實不滅度)라고 설(說)하느니라.

멸(滅)이라는 견(見)을 멸(滅)함을 멸(滅)이라 하느니라.

삼권즉일실(三權卽一實)의 법문(法門)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혹은 즉멸화성(卽滅化城)이란 방법(謗法)의 사탑(寺塔)을 멸(滅)하는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화성즉보처(化城卽報處)이니라.

우리들이 거주(居住)하는 산곡광야개개상적광(山谷曠野皆皆常寂光)의 보처(寶處)이니라. 운운.

 

제칠(第七) 개공지보처지사(皆共至寶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개(皆)란 십계(十界)이고 공(空)이란 여아등무이(如我等無二)이며 지(至)란 극과(極果)의 주처(住處)이고 보처(寶處)란 영산(靈山)이니라.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이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는 일동(一同)으로 개공지보처(皆共至寶處)이니라.

공(共)의 일자(一字)는 日蓮과 공(共)히 할 때는 보처(寶處)에 이를 것이며 불공(不共)이라면 아비대성(阿鼻大城)에 떨어질 것이로다. 운운.

 

오백제자품(五百弟子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의리지사(衣裏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에는 무가(無價)의 보주(寶珠)를 의리(衣裏)에 다는 것을 설(說)하느니라.

결국(結局)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일승묘법(一乘妙法)의 지보(智寶)를 신수(信受)하는것이니라.

신심(信心)을 가지고 의리(衣裏)를 단다고 말하느니라.

 

제이(第二) 취주이와지사(醉酒而臥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주(酒)란 무명(無明)이고 방법(謗法)이며 와(臥)란 방법(謗法)의 집에 출생(出生)한다는 것이니라.

삼천진점(三千塵點)의 당초(當初)에 악연(惡緣)의 술을 마시고 오도(五道) 육도(六道)에 취(醉)해 윤회(輪廻)하여 지금 방법(謗法)의 집에 있느니라.

취(醉)란 불신(不信)이며 각(覺)이란 신(信)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 때 무명(無明)의 취기(醉氣)가 깼느니라.

 

또 가로되 주(酒)에는 중중(重重)이 있음이니 권교(權敎)는 주(酒)이고 법화경(法華經)은 깬것이며

본적상대(本迹相對)할 때 적문(迹門)은 주(酒)니라. 시각(始覺)이기 때문이며 본문(本門)은 깬 것이니 본각(本覺)이기 때문이니라.

또 본적이문(本迹二門)은 주(酒)이고 南無妙法蓮華經는 깬 것이며, 술과 깨는 것과는 서로 떨어지지 않느니라.

주(酒)는 무명(無明)이고 깬것은 법성(法性)이며, 법(法)은 주(酒)이고 묘(妙)는 깨어 있는 것이며, 묘법(妙法)이라 부르면 무명법성(無明法性) 체일(體一)이니라.

 

지(止)의 一에 가로되,

무명진로즉시보리(無明塵勞卽示菩提) 라고

 

제삼(第三) 신심편환희지사(身心遍歡喜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신(身)이란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고 심(心)이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며 편(遍)이란 십계(十界) 동시(同時)이고 환희(歡喜)란 법계(法界) 동시(同時)의 환희(歡喜)이니라.

이 환희중(歡喜中)에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의 환희(歡喜)도 들어있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아즉환희(我則歡喜)라 해서 석존(釋尊)도 환희(歡喜)하시느라.

환희란 선악(善惡)함께 환희(歡喜)이며 십계(十界) 동시(同時)이며 깊이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인기품(人記品) 이개(二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학무학지사(學無學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학(學)이란 무지(無智)이며 무학(無學)이란 유지(有智)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학무학(學無學)사람에게 여아등무이(如我等無二)의 기별(記別)을 수여(授與)함이 아니겠느뇨,

 

색법(色法)은 무학(無學)이고 심법(心法)은 학(學)이며 또 심법(心法)은 무학(無學)이고 색법(色法)은 학(學)이며 학무학(學無學)의 사람이란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니라.

지자(智者) 우자(愚者) 누구에게나 南無妙法蓮華經의 기(記)를 설(說)해서 이강독지(而强毒之)하느니라.

 

제이(第二) 산해혜자재통왕불지사(山海慧自在通王佛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산(山)이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고 해(海)란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며 혜(慧)란 우리들이 토(吐)하는 바의 언어이고 자재(自在)란 무장애(無障碍)이며 통왕(通王)이란 십계호구(十界互具) 백계천여(百界千如)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또 가로되 산(山)이란 적문(迹門)의 의(意)이고 해(海)란 본문(本門)의 의(意)이며 혜(慧)란 묘법(妙法)의 오자(五字)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산해혜자재통왕불(山海慧自在通王佛)이로다. 전혀 다른일이 아니니라. 우리들 행자 이외(以外)에 아난(阿難)은 없느니라.

아난(阿難)이란 환희(歡喜)이고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개각(開覺)이니라. 운운.

 

법사품(法師品) 십육개(十六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법사지사(法師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法)이란 제법(諸法)이고 사(師)란 제법(諸法)이 곧 스승이 되는것이며, 삼라삼천(森羅三千)의 제법(諸法)이 곧 스승이 되고 제자(弟子)가 되어야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법사중(法師中)의 대법사(大法師)이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개각(開覺)이 나타나고 보면 지옥(地獄)의 등연맹화(燈燃猛火)・내지(乃至)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족(具足)하여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사(法師)이니라.

또 가로되, 법(法)이란 제목(題目)이고 사(師)란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니라.

 

제이(第二) 성취대원민중생고생어악세광연차경지사

(成就大願愍衆生故生於惡世廣演此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대원(大願)이란 법화홍통(法華弘通)이니라.

민중생고(愍衆生故)란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고 생어악세(生於惡世)의 인(人)이란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며 광(廣)이란 남염부제(南閻浮提)이고 차경(此經)이란 제목(題目)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이니라.

 

제삼(第三) 여래소견행여래사지사(如來所遣行如來事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는 여래(如來)의 사자(使者)로서 왔느니라.

여래(如來)란 석가(釋迦)이고 여래사(如來事)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여래(如來)란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중생(衆生)을 말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진실(眞實)한 사자(使者)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여여래공숙지사(與如來共宿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는 남녀(男女) 공(共)히 여래(如來)이고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여여래공숙(與如來共宿)의 자(者)이니라.

 

전교대사(傳敎大師)의 석(釋)에 가로되

[조조(朝朝) 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석석(夕夕) 부처와 함께 눕고 시시(時時)로 성도(成道)하며 시시(時時)로 현본(顯本)함이라]라고. 운운.

 

제오(第五) 시법화경장심고유원무인능도지사(是法華經藏深固幽遠無人能到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시법화경(是法華經)이란 제목(題目)이고 심고(深固)란 본문(本門)이며 유원(幽遠)이란 적문(迹門)이고 무인능도(無人能到)란 방법(謗法)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무인능도(無人能到)의 자(者)가 아니니라. 운운.

 

제육(第六) 문법신수수순불역지사(聞法信受隨順不逆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문(聞)이란 명자즉(名字卽)이고 법(法)이란 제목(題目)이며 신수(身受)란 수지(受持)이고 수순불역이란 본적이문(本迹二門)에 수순(隨順)함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를 말하느니라.

 

제칠(第七) 의좌실지사(衣座室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의좌실(衣座室)이란 법보응(法寶應)의 삼신(三身)이고 공가중(空假中)의 삼제(三諦)이며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이 삼궤(三軌)를 일념(一念)에 성취(成就)하느니라.

의(依)란 유화인욕(柔和忍辱)의 의(衣)이고 당착인욕개(當著忍辱鎧) 이것이니라. 좌(座)란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수행(修行)이므로 공좌(空座)에 居함이니라.

실(室)이란 자비(慈悲)에 주(住)해서 홍통(弘通)하기 때문이고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함에 같으니라.

어찌 일념(一念)에 삼궤(三軌)를 구족(具足)함이 아닐소냐.

 

제팔(第八) 욕사제해태응당청차경지사(欲捨諸懈怠應當聽此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또는 해태(懈怠)란 사십여년(四十餘年)의 방편(方便)의 경교(經敎)이고 하나 남김없이 모두 해태(懈怠)의 경(經)이며 차경(此經)이란 제목(題目)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이는 즉(卽) 정진(精進)이며 응당청차경(應當聽此經)은 이것이니라.

응당 日蓮에게 이 경(經)을 들을지어다 라고 하였느니라. 운운.

 

제구(第九) 불문법화경거불지심원지사(不問法華經去佛智甚遠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불문(不問)이란 방법(謗法)이며 성불(成佛)의 지(智)를 멀리하는 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는 불지개오(佛智開悟)하는 사람이므로 성불(成佛)이 가깝다는 것이니라.

 

제십(第十) 약설차경시유인악구매가도장와석염불고응인지사

(若說此經時有人惡口罵加刀杖瓦石念佛故應忍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차경(此經)이란 제목(題目)이고 악구(惡口)란 구업(口業)이며 가도장(加刀杖)은 신업(身業)이니라.

이 신구(身口)의 이업(二業)은 의업(意業)에서 일어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불칙(佛勅)을 염(念)하는 고(故)로 응인(應忍)이라고 하느니라.

 

제십일(第十一) 급청신사녀공양어법사지사(及淸信士女供養於法師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사녀(士女)란 남녀(男女)이고 법사(法師)란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며 청신(淸信)이란 법화경(法華經)을 신심(信心)하는 자(者)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가 이것이니라. 운운.

이는 제천선신(諸天善神) 등(等)이 남녀(男女)로 나타나서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공양(供養)하리라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제십이(第十二) 약인욕가악도장급와석즉견변화인위지작위호지사

(若人欲加惡刀杖及瓦石則遣變化人爲之作衛護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변화인(變化人)이란 다쓰노구찌 수호(守護)의 팔번대보살(八番大菩薩)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를 수호(守護)하리라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제십삼(第十三) 약친근법사속득보살도지사(若親近法師速得菩薩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친근(親近)이란 신수(信受)의 이명(異名)이며 법사(法師)란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니라. 보살(菩薩)이란 불과(佛果)를 득(得)하는 하지(下地)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의 일이니라.

 

제십사(第十四) 수순시사학지사(隨順是師學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시사(是師)란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고 학(學)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수순(隨順)이란 신수(信受)이니라. 운운.

 

제십오(第十五) 사(師)와 학(學) 지사(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는 학자(學者)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며 사(師)도 학(學)도 공(共)히 법계삼천(法界三千)의 사학(師學)이니라.

 

제십육(第十六) 득견항사불지사(得見恒沙佛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견항사불(見恒沙佛)이란 견보탑(見寶塔)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항사불(恒沙佛)이란 다보(多寶)를 말하며 다보(多寶)의 다(多)란 법계(法界)이고 보(寶)란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개오(開悟)이며 법계(法界)를 다보불(多寶佛)이라고 봄을 견항사불(見恒沙佛)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법사품(法師品) 다음에 보탑품(寶塔品)이 오느니라.

해행증(解行證)의 법사(法師)의 탈것은 보탑(寶塔)이니라. 운운.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묘해(妙解)・ 묘행(妙行)・묘증(妙證)의 불가사의(不可思議)의 해(解)・불가사의(不可思議)의 행(行)・불가사의(不可思議)의 증득(證得)이며 진실(眞實)한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개오(開悟)이니라. 운운.

이 항사(恒沙)라고 함은 악(惡)을 멸(滅)하고 선(善)을 생(生)하는 강하(江河)이니라.

항사불(恒沙佛)이란 일일문문(一一文文)이 모두 금색(金色)의 불체(佛體)이니 견(見)의 자(字)를 이를 생각할지어다.

불견(佛見)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수순(隨順)이란 불지견(佛知見)이며 득견(得見)의 견(見)자와 견보탑(見寶塔)의 견(見)은 의정이보(依正二報)이니라.

득견항사(得見恒沙)의 견(見)은 정보(正報)이고 견보탑(見寶塔)의 견(見)은 의보(依報)이니라. 운운.

 

보탑품(寶塔品) 이십개(二十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보탑지사(寶塔之事)

 

문구(文句) 八에 가로되,

전불(前佛)은 이미 있고 금불(今佛)도 병좌(並座)하며 당불(當佛)도 또한 그러하니라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보(寶)란 오음(五陰)이고 탑(塔)이란 화합(和合)이며 오음화합(五陰和合)을 가지고 보탑(寶塔)이라 하느니라.

이 오음화합(五陰和合)이란 묘법(妙法)의 오자(五字)이다 라고 보는것을 견(見)이라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견보탑(見寶塔)이니라.

 

제이(第二) 유칠보지사(有七寶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칠보(七寶)란 문(聞)・신(信)・계(戒)・정(定)・진(進)・사(捨)・참(慙) 이니라.

또 가로되, 두상(頭上)의 칠혈(七穴)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유칠보(有七寶)의 행자(行者)이니라. 운운.

 

제삼(第三) 사면개출지사(四面皆出之事)

 

문구(文句) 八에 가로되,

사면출향(四面出香)이란 사제(四諦)의 도풍(道風)・사덕(四德)의 향(香)을 풍기는 것이다.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사면(四面)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이며 사상(四相)을 가지고 우리들의 일신(一身)의 탑(塔)을 장엄(莊嚴)하느니라.

우리들이 생로병사(生老病死)에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그대로 사덕(四德)의 향(香)을 풍기는것이다.

南無란 낙파라밀(樂波羅蜜)이고・妙法란 아파라밀(我波羅蜜)이며・蓮華란 정파라밀(淨波羅蜜)이고・經란 상파라밀(常波羅蜜)이니라.

 

제사(第四) 출대음성지사(出大音聲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우리들 중생(衆生)이 조석(朝夕)으로 토(吐)하는 바의 언어(言語)이니라.

대음성(大音聲)이란 권교(權敎)는 소음성(小音聲)이고 법화경(法華經)은 대음성(大音聲)이며,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소음성(小音聲)이고 제목(題目)은 대음성(大音聲)이니라.

 

대체로 대음성(大音聲)이란 대(大)는 법계(法界)이며 법계(法界)의 중생(衆生)의 언어(言語)를 묘법(妙法)의 음성(音聲)이라고 분별(分別)함을 대음성(大音聲)이라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대음성(大音聲)이니라.

또 가로되, 대(大)란 공제(空諦)이고 음성(音聲)이란 가제(假諦)이며 출(出)이란 중도(中道)이니라. 운운.

 

제오(第五) 견대보탑주재공중지사(見大寶塔住在空中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견대보탑(見大寶塔)이란 우리들 일신(一身)이며 주재공중(住在空中)이란 우리들 중생(衆生)이 마침내 멸(滅)에 귀(歸)하는 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 신심(信心)에 주(住)하는 곳이 주재공중(住在空中)이며 허공회(虛空會)가 주(住)하는 것이니라.

 

제육(第六) 국명보정피중유불호왈다보지사(國名寶淨彼中有佛號曰多寶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보정세계(寶淨世界)란 우리들의 어머니의 태내(胎內)이며 유불(有佛)이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부처로다.

이로써 다보불(多寶佛)이라고 하느니라.

태내(胎內)란 번뇌(煩惱)를 말하며 번뇌(煩惱)의 어니(淤泥) 속에 진여(眞如)의 부처가 있으니 우리들 중생(衆生)을 말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을 당체연화(當體蓮華)의 부처라고 하느니라. 운운.

 

제칠(第七)

어시방국토(於十方國土) 유설법화경(有說法華經) 처아지탑묘(處我之塔廟) 위청시경고용현기전(爲聽是經故涌現其前) 위작증명(爲作證明) 찬언선재지사(讚言善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시방(十方)이란 십계(十界)이며 법화경(法華經)이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유전(流轉)의 십이인연(十二因緣)이니라.

따라서 언어(言語)의 음성(音聲)을 가리키며 선재(善哉)란 선악불이(善惡不二)・사정일여(邪正一如)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곳을 다보용현(多寶涌現)이라 하느니라.

 

제팔(第八) 남서북방사유상하지사(南西北方四惟上下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사방(四方)・사유(四惟)・상하(上下) 합하여 시방(十方)이며 즉(卽) 십계(十界)이니라.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이 모두 삼독(三毒)의 빛이 있으니 이것을 백호(白毫)라고 하는 것이며 일심중도(一心中道)의 지혜(智慧)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십계동시(十界同時)에 광명(光明)이 비추니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광명(光明)이기 때문이니라.

 

제구(第九) 각재보화만국지사(各齎寶華滿掬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보화(寶華)란 합장(合掌)이고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소표(所表)니라.

각(各)이란 십계(十界)이며 만(滿)의 일자(一字)를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알지어다.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부처에게 보화(寶華)를 봉정(奉呈)하는것이니라.

보화(寶華) 즉(卽) 보주(寶珠)이고 보주(寶珠) 즉(卽)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합장이경심욕문구족도(合掌以敬心欲聞具足道)란 이것이니라. 운운.

 

제십(第十) 여각관약개대성문지사(如却關鑰開大城門之事)

 

보주(補註)의 四에 가로되,

이 개탑견불(開塔見佛)은 확실히 소표(所表)가 있음이니라.

왜냐하면 즉(卽) 개탑(開塔)은 즉(卽) 개권(開權)이고 견불(見佛)은 즉 현실(顯實)이며 이것은 또 전(前)을 증명(證明)하고 또한 바로 후(後)를 일으키려고 함이라.

 

여각관약(如却關鑰)이란 각(却)은 제(除)이다. 장(障)을 제거(除去)하고 기(機)를 움직이는것을 나타냄이니 소위(所謂) 법신(法身)의 대사(大士)는 혹(惑)을 파(破)하여 이(理)를 나타내고 도(道)를 증(增)하여 생(生)을 손(損)한다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관약(關鑰)이란 방법(謗法)이고 무명(無明)이며 개(開)란 우리들의 성불(成佛)이니라.

대성문(大城門)이란 우리들의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이고 대성(大城)이란 색법(色法)이며 문(門)이란 구(口)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 때 무명(無明)의 혹장(惑障)을 물리치고 기심(己心)의 석가(釋迦) 다보(多寶)가 주(住)하느니라.

관약(關鑰)이란 무명(無明)이고 개(開)란 법성(法性)이며 약(鑰)이란 묘(妙)의 일자(一字)로다.

 

천태(天台) 가로되

[비밀(秘密)의 오장(奧藏)을 열도다. 이것을 칭하여 묘(妙)라 하도다]라고

묘(妙)의 일자를 가지고 약(鑰)이라 심득(心得)할지어다.

이 경문(經文)은 방법불신(謗法不信)의 관약(關鑰)을 물리치고 기심(己心)의 부처를 연다고 하는것이니라.

개불지견(開佛知見)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운운.

 

제십일(第十一) 섭제대중개재허공지사(攝諸大衆皆在虛空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대중(大衆)이란 청중(聽衆)이며 개재허공(皆在虛空)이란 우리들 사(死)의 상(相)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 개각(開覺)함을 개재허공(皆在虛空)이라고 설(說)하며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피섭(被攝)하느니라.

 

대지(大地)는 색법(色法)이며 허공(虛空)은 심법(心法)이므로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이해할것이며 허공(虛空)이란 적광토(寂光土)이니라.

 

또 가로되, 허공(虛空)이란 蓮華이며 經란 대지(大地)이고 妙法는 천(天)이며 허공(虛空)이란 중(中)이니라.

일체중생내(一切衆生內)에 보살(菩薩)이 연화(蓮華)에 좌정(座定)하느니라.

이것을 妙法蓮華經라고 설(說)하였느니라.

 

경(經)에 가로되

[약재불전연화화생(若在佛前蓮華化生)]이라고.

 

제십이(第十二) 비여대풍취소수지지사(譬如大風吹小樹枝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게송(偈頌)의 여청량지(如淸凉池)와 비여대풍(譬如大風)과 연대거화(燃大炬火)란 삼신(三身)이니라.

 

그중에 비여대풍(譬如大風)이란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며 취소수지(吹小樹枝)란 절복문(折伏門)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대풍(大風)이 부는 것과 같으니라.

 

제십삼(第十三) 약유능지즉지불신지사(若有能持卽持佛身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여 받드는 것은 나의 몸이 불신(佛身)이라고 수지(受持)하느니라.

 

즉(卽)의 일자(一字)는 생불불이(生佛不二)이며 위의 능지(能持)의 지(持)는 범부(凡夫)이니라.

수지(受持)하는 체(體)는 묘법(妙法)의 오자(五字)이고 불신(佛身)을 수지(受持)한다고 하는것은 일일문문(一一文文)이 모두 금색불체(金色佛體)이기 때문이니라.

그런데 불신(佛身)을 수지(受持)함이란 나의 몸 이외에 부처가 없다라고 수지(受持)함을 말하느니라.

 

이즉(理卽)의 범부(凡夫)와 구경즉(究竟卽)의 부처와는 이(二)가 없으며 즉(卽)의 자(字)는 즉고초후불이(卽故初後不二)이기 때문이니라. 운운.

 

제십사(第十四) 차경난지지사(此經難持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자(者)는 난(難)을 만나리라고 알고 수지(受持)하느니라.

그러므로 즉위질득(卽爲疾得) 무상불도(無上佛道)의 성불(成佛)은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이 이것이니라. 운운.

 

제십오(第十五) 아즉환희제불역연지사(我則歡喜諸佛亦然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아(我)란 심왕(心王)이고 제불(諸佛)이란 심수(心數)이며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여 받들때는 심왕(心王) 심수(心數)가 동시(同時)에 환희(歡喜)하는 것이니라.

또 가로되, 아(我)란 범부(凡夫)이고 제불(諸佛)이란 삼세제불(三世諸佛)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불러서 환희(歡喜)함은 이것이니라. 운운.

 

제십육(第十六) 독지차경지사(讀持此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오종(五種)의 수행(修行)의 독송(讀誦)과 수지(受持)의 이행(二行)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독(讀)이고 이경(經)을 수지(受持)함은 지(持)로다.

차경(此經)이란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니라. 운운.

 

제십칠(第十七) 시진불자지사(是眞佛子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진실(眞實)로 석가법왕(釋迦法王)의 자(子)이니라.

그러므로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해야 하느니라.

실시오자(悉是吾子)의 자(子)와 시진불자(是眞佛子)의 자(子)를 깊이 생각하여 맞추어 볼지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석가법왕(釋迦法王)의 왕자(王子)이니라.

 

제십팔(第十八) 시제천인세간지안지사(是諸天人世間之眼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세간(世間)이란 일본국이며 안(眼)이란 불지견(佛知見)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은 제천세간(諸天世間)의 안목(眼目)이며 안(眼)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시제천인세간지안(是諸天人世間之眼) 또 가로되, 시제불안목(是諸佛眼目) 운운.

 

이 눈을 후비는자는 선(禪)・염불(念佛)・진언종(眞言宗) 등(等)이며 안(眼)등(等)이란 눈을 감는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제천세간(諸天世間)의 눈이 아닐소냐. 운운.

 

제십구(第十九) 능수유설지사(能須臾說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능(能)의 일자(一字)를 이를 생각할지어다.

설(說)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는 능수유설(能須臾說)의 행자(行者)이니라. 운운.

 

제이십(第二十) 차경난지지사(此經難持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경문(經文)으로 삼학(三學)을 구전(俱傳)하느니라.

허공부동계(虛空不動戒)・허공부동정(虛空不動定)・허공부동혜(虛空不動慧)의 삼학(三學) 다 함께 전(傳)함을 이름하여 묘법(妙法)이라 함이라고.

 

계(戒)란 색법(色法)이고 정(定)이란 심법(心法)이며 혜(慧)란 색심이법(色心二法)의 거동(擧動)이니라.

구(俱)의 자(字)는 南無妙法蓮華經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고 전(傳)이란 말법만년(末法萬年)을 가르키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고 권교(權敎)는 무득도(無得道)・법화경(法華經)은 진실(眞實)이라고 수행(修行)하는것이 계(戒)이며 방비지악(防非止惡)의 의(義)이니라.

수지(受持)하는 바의 행자(行者)는 결정무유의(決定無有疑)의 불체(佛體)라고 정(定)함이니 이는 정(定)이니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지혜(智慧)를 한번의 제목(題目)으로 수지(受持)함은 이는 혜(慧)이니라.

이 삼학(三學)은 피육골(皮肉骨)・삼신(三身)・삼제(三諦)・삼궤(三軌)・삼지(三智) 등(等)이니라.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 팔개(八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제바달다지사(提婆達多之事)

 

문구(文句) 八에 가로되,

본지(本地)는 청량(淸凉)으로서 적(迹)으로는 천열(天熱)을 나타낸다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제바(提婆)란 본지(本地)는 문수(文殊)니라.

본지(本地) 청량(淸凉)이라고 하며 적(迹)에는 제바(提婆)라 하니 천열(天熱)을 나타냄이 이것이니라.

청량(淸凉)은 물이며 이것은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니라.

제바(提婆)는 妙法蓮華經의 별명(別名)이고 과거(過去)의 시(時)에는 아사선인(阿私仙人)이니라.

아사선인(阿私仙人)이란 묘법(妙法)의 이명(異名)이고 아(我)란 무(無)의 의(義)이며 사(私)가 없는 법(法)이란 묘법(妙法)이니라.

 

문구(文句) 八에 가로되,

무사법(無私法)을 가지고 중생에게 유입(流入)한다고 하였다.

아사선인(阿私仙人)이란 법계삼천(法界三千)의 별명(別名)이로다. 그러므로 사(私)가 없느니라.

일념삼천(一念三千) 이를 생각할지어다. 운운.

 

제이(第二) 약불위아당위선설지사(若不違我當爲宣說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妙法蓮華經를 선설(宣說)함에 있어서 그대는 나와 틀리지 않게 선설(宣說)할지어다라고 하는것이니라.

약(若)의 자(字)는 여(如)이니라.

 

천태(天台)가 가로되

[법(法)을 받아 봉행(奉行)하도다]라고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日蓮과 틀리지않게 선설(宣說)할지어다.

아사선인(阿私仙人)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제삼(第三) 채과급수습신설식지사(採菓汲水拾薪設食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채과(採菓)란 치번뇌(癡煩惱)이고 급수(汲水)란 탐번뇌(貪煩惱)이며 습(拾)이란 진번뇌(瞋煩惱)이고 설식(設食)이란 만번뇌(慢煩惱)이니라.

이 하(下)에 팔종(八種)의 급사(給仕)가 있는니라.

이 외(外)에 妙法蓮華經의 전수(傳受)는 없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즉(卽) 천세급사(千歲給仕)이니라. 이는 즉(卽) 일념삼천(一念三千)이며 탐진치만(貪瞋癡慢)을 대치(對治)하느니라.

 

제사(第四) 정존묘법고신심무해권지사(情存妙法故身心無懈倦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신심(信心)의 이자(二字)는 색심묘법(色心妙法)이라고 전수(傳受)하느니라.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해서 즉신성불(卽身成佛)하느니라.

신심무권(身心無倦)이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운운.

 

제오(第五) 아어해중유상선설지사(我於海中唯常宣說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아(我)란 문수(文殊)이고 해(海)란 생사(生死)의 해(海)이며 유(唯)란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이고 상(常)이란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이니라.

妙法蓮華經란 법계(法界)의 언어음성(言語音聲)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이것이니라.

생사(生死)의 해즉진여(海卽眞如)의 대해(大海)이고 아(我)란 법계(法界)의 지혜(智慧)이며 문수(文殊)이니라. 운운.

 

제육(第六) 연시팔세지사(年始八歲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팔세(八歲)란 팔권(八卷)이고 제바(提婆)는 지옥계(地獄界)이며 용녀(龍女)는 불계(佛界)이니라. 그런 까닭으로 십계호구(十界互具)・백계천여(百界千如)・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또 가로되 팔세(八歲)란 법화경(法華經)의 팔권(八卷)이며 우리들 팔고(八苦)의 번뇌(煩惱)이니라.

대체로 법화경(法華經)의 성불(成佛)은 팔세(八歲)니라고 알지어다.

 

팔고즉팔권(八苦卽八卷)이며 팔고팔권(八苦八卷)은 즉(卽) 팔세(八歲)의 용녀(龍女)로 나타나는 것이니

일의(一義)에 가로되

팔세(八歲)라 함은 주(珠)를 연다고 읽느니라.

주(珠)란 용녀(龍女)의 일심(一心)이고 팔(八)이란 삼천(三千)이며 삼천(三千)이란 법화(法華)의 팔권(八卷)이니라.

따라서 팔세(八歲)란 개불지견(開佛知見)의 소표(所表)이며, 지혜이근(智慧利根)에서 능지보리(能至菩提)까지 법화(法華)에 귀입(歸入)하느니라.

그 중(中)에 심념구연(心念口演)이란 구업(口業)이고 지의화아(志意和雅)란 의업(意業)이며 실능수지심입선정(悉能受持深入禪定)이란 신업(身業)이니라.

삼업즉삼덕(三業卽三德)이므로 삼제법성(三諦法性)이니라.

 

또 가로되 심념(心念)이란 일념(一念)이며 구연(口演)이란 삼천(三千)이니라.

실능수지(悉能受持)란 용녀(龍女)가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 문(文)이니라.

세(歲)란 여의보주(如意寶珠)이고 묘법(妙法)이니라.

팔(八)이란 색심(色心)을 묘법(妙法)으로여는 것이니라.

 

제칠(第七) 언론미글지사(言論未訖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문(文)은 무명즉법성(無明卽法性)의 명문(明文)이니라.

그 까닭은 지적(智積) 난문(難問)의 말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용녀(龍女)가 삼행반(三行半)의 게(偈)를 가지고 답하였느니라.

 

난문(難問)의 의(意)는 별교(別敎)의 의(意) 이며 무명(無明)이고 용녀(龍女)의 답은 원교(圓敎)의 의(意)이며 법성(法性)이니라.

지적(智積)은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고 용녀(龍女)는 법성(法性)의 여인(女人)이니라. 따라서 무명(無明)에 즉하는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에 즉하는 무명(無明)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언론미글(言論未)이니라.

시(時)란 위의 일의 말(末) 말(末)의 일의 시(始)이니라.

시(時)란 무명(無明) 법성(法性) 동시(同時)의 시(時)이며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시(時)니라.

 

지적보살(智積菩薩)을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차녀(不信此女)의 불신(不信)의 이자(二字) 이고 불신(不信)이란 의혹(疑惑)을 근본(根本)의 무명(無明)이라고 하느니라.

 

용녀(龍女)를 법성(法性)이라 하는것은 아천대승교(我闡大乘敎)의 문(文)이고 용녀(龍女)의 용(龍)은 아버지이며 여(女)란 팔세(八歲)의 자식이니라.

그러므로 여인(女人)의 성불(成佛)은 이 품(品)에 있으며 아버지인 용(龍)의 성불(成佛)은 서품(序品)에 있느니라. 유팔용왕(有八龍王)의 문(文) 이것이니라.

그렇지만 부자동시(父子同時)의 성불(成佛)이니 서품(序品)은 일경(一經)의 서(序)이기 때문이니라.

 

우문성보리(又聞成菩提)란 용녀(龍女)가 지적(智積)을 책(責)한 말이니라. 그러므로 오직 자기의 성불(成佛)을 부처께서 아시리라고 하여 우문성보리유불당증지(又聞成菩提唯佛當證知) 라고 하였으니 고(苦)의 중생(衆生)이란 별(別)해서 여인(女人)을 말하느니라.

 

이 삼행반(三行半)의 게(偈)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이고 편조어시방(遍照於十方)이란 십계(十界)이니라.

특히 이 팔세(八歲)의 용녀(龍女)의 성불(成佛)은 제왕지경(帝王持經)의 선조(先祖)로다.

 

인왕(人王)의 초(初)는 神武天皇인데 神武天皇은 지신오대(地神五代)의 제오(第五) 우가야후끼아에즈노미코토의 아들이고 이 후끼아에즈노미코토는 도요타마히메의 아들이며 이 도요타마히메는 사갈라용왕(沙竭羅龍王)의 딸이고 팔세(八歲)의 용녀(龍女)의 자(姉)이니라. 그러므로 선조(先祖)는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이니라. 심심(甚深) 심심(甚深) 운운.

 

그러므로 이 제바(提婆)의 일품(一品)은 일천(一天)의 요도(腰刀)이며 무명(無明) 번뇌(煩惱)의 적(敵)을 베고 생사애착(生死愛著)의 오랏줄을 자르는 비법(秘法)이니라.

 

한고(漢高)의 삼척(三尺)의 검(劍)도 일자(一字)의 지검(智劍)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묘(妙)의 일자(一字)의 지검(智劍)을 가지고 생사번뇌(生死煩惱)의 오랏줄을 자르니느라.

 

제바(提婆)는 화염(火炎)을 나타내고 용녀(龍女)는 대사(大蛇)를 표시(表示)하고 문수(文殊)는 지검(智劍)을 나타냄이니 따라서 부동명왕(不動明王)의 존형(尊形)이라고 구전(口傳)하였느니라.

 

제바(提婆)는 우리들의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를 나타내고 용녀(龍女)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을 나타내느니라.

문수(文殊)를 여기에서는 묘덕(妙德)이라 번역하느니라. 번뇌(煩惱) 생사(生死) 구족(具足)하여 당품(當品)의 능화(能化)이니라.

 

제팔(第八) 유일보주지사(有一寶珠之事)

 

문구(文句) 八에 가로되,

일(一)이란 주(珠)를 진상(進上)하여 원해(圓解)를 득(得)함을 표시(表示)하도다 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一)이란 妙法蓮華經이고 보(寶)란 묘법(妙法)의 용(用)이며 주(珠)란 묘법(妙法)의 체(體)이니라.

묘(妙)이기 때문에 심법(心法)이고 법(法)이기 때문에 색법(色法)이며 색법(色法)은 주(珠)이고 심법(心法)은 보(寶)이며 묘법(妙法)이란 색심불이(色心不二)이니라.

일념삼천(一念三千)을 표시(表示)하는 바로서 용녀(龍女)가 보주(寶珠)를 바치느니라.

석(釋)에 표득원해(表得圓解)라고 함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용녀(龍女)가 손에 가질때는 성득(性得)의 보주(寶珠)이고 부처가 받으실 때는 수득(修得)의 보주(寶珠)이니라. 그 중(中)에 있는것은 수성불이(修性不二)이니라.

 

심질(甚疾)이란 돈극(頓極)・돈속(頓速)・돈증(頓證)의 법문(法門)이며 즉위질득(卽爲疾得) 무상불도(無上佛道)이니라.

신력(神力)이란 신(神)은 심법(心法)이며 력(力)이란 색법(色法)이며 관아성불(觀我成佛)이란 사리불(舍利佛)이 용녀(龍女)의 성불(成佛)이라 생각하는것은 벽사(僻事)이니라. 자신의 성불(成佛)이라 관(觀)하라고 책(責)하였느니라.

 

관(觀)에는 육즉(六卽)의 관(觀)이 있음인데 여기에는 원(圓)의 관(觀)은 명자즉(名字卽)의 관(觀)이라고 알지어다.

그까닭은 南無妙法蓮華經 들은바를 일념좌도량성불불허야(一念坐道場成佛不虛也)라고 했느니라.

변성남자(變成男子)란 용녀(龍女)도 본지(本地)는 南無妙法蓮華經이니 그 의(意)는 경문(經文)에 분명(分明)하니라.

 

권지품(勸持品) 십삼개(十三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권지지사(勸持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권(權)이란 화타(化他)이고 지(持)란 자행(自行)이며 南無妙法蓮華經는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를 권(權)해서 수지(受持)케 하느니라.

 

제이(第二) 불석신명지사(不惜身命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신(身)이란 색법(色法)이고 명(命)이란 심법(心法)이며 사리(事理)의 불석신명(不惜身命)이 있느니라.

법화(法華)의 행자(行者)가 전답(田畓) 등(等)을 빼앗기는 것은 이(理)의 불석신명(不惜身命)이며 명근(命根)을 잘림을 사(事)의 불석신명(不惜身命)이라고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사리(事理) 다함께 만나느니라.

 

제삼(第三) 심불실고지사(心不實故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심불실고(心不實故)란 법화(法華) 최제일(最第一)의 경문(經文)을 제삼(第三)이라 읽고 최위기상(最爲其上)의 경문(經文)을 최위기하(最爲其下)라 읽고 법화경(法華經)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을 화엄(華嚴) 대일(大日)등(等)에 있다고 하며 법화(法華)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대일경(大日經)에 취입(取入)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심불실고(心不實故)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는 심실(心實)이 되느니라. 운운.

 

제사(第四) 경순불의지사(敬順佛意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에 순종(順從)함은 경순불의(敬順佛意)이며 의(意)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경순불의(敬順佛意)의 의(意)이니라.

 

제오(第五) 작사자후지사(作師子吼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사자후(獅子吼)란 부처의 설(說)이며 설법(說法)이란 법화(法華)이고 별(別)해서는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사(師)란 사장(師匠)이 수여(授與)하시는 바의 묘법(妙法)이고 자(子)란 제자(弟子)가 받는바의 묘법(妙法)이며 후(吼)란 사제(師弟) 공(共)히 부르는바의 음성(音聲)이고 작(作)이란 일으킨다고 읽느니라.

말법(末法)에 있어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를 일으키느니라.

 

제육(第六) 여법수행지사(如法修行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여법수행(如法修行)의 사람이란 천태(天台) 묘락(妙樂) 전교(傳敎)등(等)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여법수행(如法修行)이니라. 운운.

 

제칠(第七) 유제무지인지사(有諸無智人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문(一文) 불통(不通)의 대속(大俗)이니라. 악구(惡口) 매리(罵詈) 등(等) 분명하니라. 일본국의 속(俗)을 제(諸)라고 하느니라.

 

제팔(第八) 악세중비구지사(惡世中比丘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악세중비구(惡世中比丘)의 악세(惡世)란 말법(末法)이며 비구(比丘)란 방법(謗法)인 고보(弘法)등(等)이 이것이니라.

법화(法華)의 정지(正智)를 버리고 권교(權敎)의 사지(邪智)를 본(本)으로 했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는 정지(正智)중(中)의 대정지(大正智)이니라.

 

제구(第九) 혹유아련야지사(或有阿練若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제삼(第三)의 비구(比丘)이며 료칸(良觀)등이니라.

여육통나한(如六通羅漢)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니라.

 

제십(第十) 자작차경전지사(自作此經典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을 소작(所作)해서 읽는다고 비방(誹謗)하리라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운운.

 

제십일(第十一) 위사소경언(爲斯所輕言) 여등개시불지사(汝等皆是佛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경멸(輕蔑)하고 생불(生佛)이라 말하리라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이것은 경심(輕心)을 가지고 비방(誹謗)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를 말해야하느니라.

 

제십이(第十二) 악귀입기신지사(惡鬼入其身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악귀(惡鬼)란 호넨(法然) 고보(弘法)등(等)이니라.

입기신(入其身)이란 국왕(國王)・대신(大臣)・만민(萬民)등(等)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를 원질(怨嫉)하리라고 하는 것이니라.

귀(鬼)란 목숨을 빼앗는 자로써 탈공덕자(脫功德者)라고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은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명근(명근(命根))이며 이 경(經)은 일체제보살(一切諸菩薩)의 공덕(功德)을 포함한 경(經)이니라.

 

제십삼(第十三) 단석무상도지사(但惜無上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무상도(無上道)란 南無妙法蓮華經이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을 아끼는 일은 명근(命根)보다도 아끼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경문(經文)에서 불자지아심(佛自知我心)이라 설(說)하였으며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심중(心中)을 교주석존(敎主釋尊)이 알고 계시니라.

부처란 석존(釋尊)이시고 아심(我心)이란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이니라.

 

안락행품(安樂行品) 오개(五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안락행품지사(安樂行品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妙法蓮華經을 안락(安樂)하게 행(行)하는 일은 말법(末法)에 있어서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妙法蓮華經를 수행(修行)함에 난(難)이 옴을 가지고 안락(安樂)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제이(第二) 일체법공지사(一切法空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차하(此下)에 있어서 십팔공(十八空)이 있으며 십팔공(十八空)의 체(體)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십팔공(十八空)은 모두가 묘법(妙法)을 말하느니라.

 

제삼(第三) 유소난문불이소승법답등지사(有所難問不以小乘法答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대치(對治)할때는 권교(權敎)를 가지고 회통(會通)하지 말지니라.

일체종지(一切種智)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일체(一切)는 만물(萬物)이고 종지(種智)는 만물(萬物)의 종(種) 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또 가로되 일체종지(一切種智)란 우리들의 일심(一心)이며 일심(一心)이란 만법(萬法)의 총체(總體)이니라.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제사(第四) 무유포외가도장등지사(無有怖畏加刀杖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적화(迹化)의 보살(菩薩)에게는 도장(刀杖)의 난(難)이 있을수가 없다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권지품(勸持品)은 말법(末法)의 법화(法華)의 행자(行者)에게는 급가도장자(及加刀杖者) 삭삭견빈출(數數見擯出)이라고. 이 품(品)에는 없느니라.

그는 말법(末法)의 절복(折伏)의 수행(修行)이고 이 품(品)은 상법(像法) 섭수(攝受)의 수행(修行)이기 때문이니라. 운운.

 

제오(第五) 유인래욕난문자제천주야등지사(有人來欲難問者諸天晝夜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말법(末法)에 있어서 법화(法華)를 행(行)하는 자(者)에게 제천(諸天)의 수호(守護)가 있으리라.

상위법고(常爲法故)의 法이란 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용출품(涌出品) 일개(一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창도지사지사(唱導之師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용출(涌出)의 일품(一品)은 본화(本化)의 보살(菩薩)의 일이니라.

본화(本化)의 보살(菩薩)의 소작(所作)으로서는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이것을 창(唱)이라 하느니라.

도(導)란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영산정토(靈山淨土)에 인도(引導)하는 것이니라.

말법(末法)의 도사(導師)란 본화(本化)에 한한다고 하는것을 사(師)라고 하느니라.

 

이 사대보살(四大菩薩)의 일을 해석(解釋)할 때

소(疏)의 九를 받아 보정기(輔正記)의 구(九)에 가로되

[경(經)에 사도사(四導師)가 있다함은 지금 사덕(四德)을 표시하도다. 상행(上行)은 아(我)를 표시하고 무변행(無邊行)은 상(常)을 표시하고 정행(淨行)은 정(淨)을 표시하고 안립행(安立行)은 낙(樂)을 표시(表示)함이라. 어느때는 일인(一人)에 이 사의(四義)를 갖추도다. 이사(二死)의 표면(表面)에 나오는것을 상행(上行)이라 이름하고 단상(斷常)의 경계(境界)를 넘는것을 무변행(無邊行)이라 칭(稱)하고 오주(五住)의 구루(垢累)를 넘는 고로 정행(淨行)이라 이름하고 도수(道樹)로서 덕(德)이 원만(圓滿)한 고로 안립행(安立行)이라 하도다]라고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모두 지용(地涌)의 유류(有類)이니라.

또 가로되 불은 물질(物質)을 태우는 것으로써 행(行)으로 하고 물은 물질(物質)을 깨끗이 하는것을 행(行)으로 하고 바람은 진구(塵垢)를 털어내는 것으로써 행(行)으로하고 대지(大地)는 초목(草木)을 자라게 하는 것으로써 행(行)으로 하도다. 사보살(四菩薩)의 이익(利益)이 이것이니라.

 

사보살(四菩薩)의 행(行)은 부동(不同)이라 하지만 모두가 妙法蓮華經의 수행(修行)이니라.

이 사보살(四菩薩)은 하방(下方)에 주(住)하는 고(故)로 석(釋)에 [법성지연저(法性之淵底) 현종지극지(玄宗之極地)]라고 하였도다.

하방(下方)으로 주처(住處)로 하니 하방(下方)이란 진리(眞理)이니라.

 

보정기(輔正記)에 가로되

[하방(下方)이란 생공(生公)이 가로되, 주(住)하여 이(理)에 있도다]라고. 운운. 이 이(理)의 주처(住處)에서 현출(顯出)함을 사(事)라고 하느니라.

또 가로되 천초만목(千草萬木)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이 아니라는 것은 없도다. 그러므로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을 본화(本化)라고 했느니라.

 

본(本)이란 과거(過去) 구원오백진점(久遠五百塵點)부터의 이익(利益)으로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이익(利益)이니라.

이 보살(菩薩)은 본법(本法)을 소지(所持)한 사람이며 본법(本法)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제목(題目)은 반드시 지용(地涌)의 소지물(所持物)이지 적화(迹化)의 보살(菩薩)의 소지(所持)가 아니로다.

이 본법(本法)의 체(體)에서 용(用)을 내어 지관(止觀)으로서 넓히고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하였도다.

대체로 대사(大師) 인사(人師)의 소석(所釋)도 이 묘법(妙法)의 용(用)을 홍법(弘法)하셨느니라.

이 본법(本法)을 수지(受持)함은 신(信)의 일자(一字)이며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대치(對治)하는 이검(利劍)은 신(信)의 일자(一字)이니라.

무의왈신(無疑曰信)의 석(釋)을 생각할지어다. 운운.

 

어의구전(御義口傳) 권상(卷上)

홍안원년(弘安元年) 무인(戊寅) 정월일일(正月一日) 집필(執筆) 닛코(日興)

 

 

어의구전(御義口傳) 권하(卷下)

日蓮 소립(所立) 자(自) 수량품(壽量品) 지(至) 개결이경(開結二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이십칠개(二十七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南無妙法蓮華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십육지사(第十六之事)

 

문구(文句)의 九에 가로되,

여래(如來)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제불(諸佛)・이불(二佛)・삼불(三佛)・본불(本佛)・적불(迹佛)의 통호(通號)이며 별(別)해서는 본지(本地) 삼불(三佛)의 명호(名號)이니라.

수량(壽量)이란 전량(詮量)이니라. 시방삼세(十方三世)・이불(二佛)・삼불(三佛)의 제불(諸佛)의 공덕(功德)을 전량(詮量)하는 고(故)로 수량품(壽量品)이라고 한다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의 제목(題目)은 日蓮 자신에 해당(該當)하는 대사(大事)이며 신력품(神力品)의 부촉(付屬) 이것이니라.

여래(如來)란 석존(釋尊)・총(惣)해서는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제불(諸佛)이며 별(別)해서는 본지무작(本地無作)의 삼신(三身)이니라.

 

지금(至今)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의(意)는 총(惣)해서는 여래(如來)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이요 별(別)해서는 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로다. 그러므로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란 말법(末法)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이고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의 보호(寶號)를 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하느니라.

수량품(壽量品)의 사(事)의 삼대사(三大事)란 이것이니라.

 

육즉(六卽)의 배립시(配立時)에는 이 품(品)의 여래(如來)는 이즉(理卽)의 범부(凡夫)이며 머리에 南無妙法蓮華經를 받아서 모실 때는 名字卽이니라. 그 까닭은 처음으로 듣는바의 제목(題目)이기 때문이다. 삼가 받들어 듣고 수행(修行)하는것은 관행즉(觀行卽)이라 이 관행즉(觀行卽)이란 사(事)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본존(本尊)을 관(觀)하는 것이니라. 그리하여 혹장(惑障)을 명복(冥伏)하는것을 상사즉(相似卽)이라고 한다. 화타(化他)로 나가는것을 분진즉(分眞卽)이라고 하며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을 부처라고 구경(究竟)한것을 구경즉(究竟卽)의 부처라고 하느니라.

통틀어 복혹(伏惑)을 가지고 수량품(壽量品)의 극(極)으로 하지않고 오직 범부(凡夫)의 당체본유(當體本有) 그대로를 이 품(品)의 극리(極理)라고 알아야만 한다.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의 소작(所作)은 무엇인가 라고 말할 때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여래비밀신통지력지사(如來秘密神通之力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의 의문(依文)이니라.

이 문(文)에 있어서 중중(重重)의 상전(相傳)이 있다.

신통지력(神通之力)이란 아등중생(我等衆生)이 作作發發하게 행동(行動)하는 바를 신통(神通)이라고 한다. 옥졸(獄卒)이 죄인(罪人)을 가책(苛責)하는 소리도 모두 신통지력(神通之力)이니라.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삼라삼천(森羅三千)의 당체(當體) 모두가 신통지력(神通之力)의 체(體)이니라.

지금(至今)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의(意)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개각(開覺)하는것을 여래신통지력(如來神通之力)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불(成佛)하는 이외(以外)의 신통(神通)과 비밀(秘密)이란 없느니라.

이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을 일자(一字)로 가지고 얻었으니. 소위(所謂) 신(信)의 일자(一字)이니라.

따라서 경(經)에 가로되 [아등당신수불어(我等當信受佛語)]라고 신수(身受)의 이자(二字)에다 유의(留意)해야하느니라.

 

제삼(第三) 아실성불이래(我實成佛已來) 무량무변등지사(無量無邊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아등(我等)이란 석존(釋尊)의 구원실성도(久遠實成道)라는 것을 설(說)하셨다.

그러나 당품(當品)의 뜻은

 

아(我)란 법계(法界)의 중생(衆生)이며 십계각각(十界各各)을 가리켜서 아(我)라고 하느니라.

 

실(實)이란 무작삼신(無作三身)의 부처라고 정(定)하고 이것을 실(實)이라고 한다.

 

성(成)이란 능성(能成)・소성(所成)이며 성(成)이란 연다는 의의(意義)이고 법계(法界)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의 부처라고 연 것이니라.

 

부처란 이것을 각지(覺知)함을 말하고

 

이(已)란 과거(過去)이며

내(來)란 미래(未來)이니라. 이래(已來)의 말속에 현재(現在)는 있느니라.

 

아실(我實)이라고 여신 불(佛)로서 이(已)도 내(來)도 무량(無量)이며 무변(無邊)이니라.

백계천여(百界千如)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설(說)했느니라.

백천(百千)의 이자(二字)는 백(百)은 백계(百界)・천(千)은 천여(千如)이며 이는 즉(卽) 사(事)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수량품(壽量品)의 본주(本主)이니라.

통틀어서 적화(迹化)의 보살(菩薩)은 이 품(品)에 손을 대어 취급할수 없는 자이니라. 그는 적표본리(迹表本裏)・이는 본면적리(本面迹裏)・그렇다 하더라도 더욱이 당품(當品)은 말법(末法)의 요법(要法)이 아니로다.

그 까닭은 이 품(品)은 재세(在世)의 탈익(脫益)이요 제목(題目)의 오자(五字)만이 당금(當今)의 하종(下種)이니라.

그러므로 재세(在世)는 탈익(脫益)・멸후(滅後)는 하종(下種)이며 따라서 하종(下種)을 가지고 말법(末法)의 근본(根本)으로 하느니라. 운운.

 

제사(第四)

여래여실지견(如來如實知見) 삼계지상(三界之相) 무유생사지사(無有生死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여래(如來)란 삼계(三界)의 중생(衆生)이며, 이 중생(衆生)을 수량품(壽量品)의 눈을 뜨고 보면 십계본유(十界本有)라고 여실히 지견(知見)했느니라.

삼계지상(三界之相) 이란 생노병사(生老病死)이며 본유(本有)의 생사(生死)라고 보면 무유생사(無有生死)이다. 생사(生死)가 없으면 퇴출(退出)도 없고 다만 생사(生死)가 없음이 아니니라. 생사(生死)를 보고 염리(厭離)함을 미(迷)라하여 시각(始覺)이라한다. 그런데 본유(本有)의 생사(生死)라고 지견(知見)함을 오(悟)라고 하며 본각(本覺)이라고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 때 본유(本有)의 생사(生死)・본유(本有)의 퇴출(退出)이라고 개각(開覺)하느니라.

또 가로되 무(無)도 유(有)도 생(生)도 사(死)도 약퇴(若退)도 약출(若出)도 재세(在世)도 멸후(滅後)도 모두가 본유상주(本有常住)의 거동(擧動)이니라.

 

무(無)란 법계동시(法界同時)에 妙法蓮華經의 거동(擧動) 이외(以外)는 없느니라.유(有)란 지옥(地獄)은 지옥(地獄)이 있는 그대로 십계본유(十界本有)의 묘법(妙法)의 전체(全體)이니라.

생(生)이란 묘법(妙法)의 생(生)이므로 수연(隨緣)이요.

사(死)란 수량(壽量)의 사(死)이므로 법계동시(法界同時)에 진여(眞如)이고 약퇴(若退)인 고(故)로 멸후(滅後)이며 약출(若出)인 고(故)로 재세(在世)이니라.

그러므로 무사퇴멸(無死退滅)은 공(空)이고 유생출재(有生出在)는 가(假)이며 여래여실(如來如實)은 중도(中道)이니라.

무사퇴멸(無死退滅)은 무작(無作)의 보신(報身)이요.

유생출재(有生出在)는 무작(無作)의 응신(應身)이요.

여래여실(如來如實)은 무작(無作)의 법신(法身)이니라.

이 삼신(三身)은 나의 일신(一身)이며 일신즉삼신(一身卽三身) 명위비(名爲秘)란 이것이니라. 삼신즉일신(三身卽一身) 명위밀도 이 의(意)니라.

그러므로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의 당체(當體)의 연화(蓮華)의 부처란 日蓮의 제자단나(弟子檀那) 등(等)이니 南無妙法蓮華經의 보호(寶號)를 수지(受持)해 받들기 때문이니라. 운운.

제오 약불구주어세 박덕지인 부종선근 빈궁하천 탐착오욕 입어억상 망견망중지사

(第五 若佛久住於世 薄德之人 不種善根 貧窮下賤 貪著五欲 入於憶想 妄見網中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경문(經文)은 부처가 세상(世上)에 구주(久住)하신다면 박덕(薄德)한 사람은 선근(善根)을 심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망견망중(妄見網中)이라고 설(說)했느니라.

 

결국 이 박덕(薄德)이란 재세(在世)의 누락(漏落)된 중생(衆生)이 지금 멸후(滅後) 일본국에 태어 났는데, 소위(所謂) 염불(念佛)・선(禪)・진언(眞言)등(等)의 방법(謗法)이니라.

부종선근(不種善根)이란 선근(善根)은 제목(題目)이며 부종(不種)이란 아직 갖지 않은 자(者)이다.

억상(憶想)이란 사폐각포(捨閉閣抛) 제삼(第三)의 열등(劣等) 이와 같은 억상(憶想)이다.

망(妄)이란 권교망어(權敎妄語)의 경교(經敎)이며 견(見)은 사견(邪見)이고 법화최제일(法華最第一)의 일(一)을 제삼(第三)으로 보는것이 사견(邪見)이니라.

망중(網中)이란 방법불신(謗法不信)의 가(家)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이와같은 망견(妄見)의 경(經)・망중(網中)의 가(家)를 떠난 자이니라. 운운.

 

제육(第六) 음타독약(飮他毒藥) 약발민란(藥發悶亂) 완전우지지사(宛轉于地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타(他)란 염불(念佛)・선(禪)・진언(眞言)의 방법(謗法)의 비구(比丘)이니라.

독약(毒藥)이란 권교(權敎) 방편(方便)이고 법화(法華)의 양약(良藥)이 아닌 고(故)로 민란(悶亂)하는것이며 민(悶)이란 숨이 끓어지는것이니라.

수량품(壽量品)의 명(命)이 없는 고(故)로 민란(悶亂)하는 것이며, 완전우지(宛轉于地)란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들어감이니라. 운운.

 

제자음독(諸子飮毒)이란 석(釋)에 가로되

[사사(邪師)의 법(法)을 신수(身受)함을 이름하여 음독(飮毒)이라고 한다]

제자(諸子)란 방법(謗法)이며 음독(飮毒)이란 미타(彌陀)・대일(大日)등(等)의 권법(權法)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본심(本心)을 잃지 않음이니라.

 

제칠(第七) 혹실본심(或失本心) 혹불실자지사(或不失者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본심(本心)을 잃는다란 방법(謗法)이니라. 본심(本心)이란 하종(下種)이고 불실(不失)이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이니라.

실(失)이란 본시(本是) 있는것을 잃는다는 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본심(本心)을 잃지 않음이니라. 운운.

 

제팔(第八) 도사화합여자령복지사(擣簁和合與子令服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경문(經文)은 공가중(空假中)의 삼제(三諦)・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이니라. 색향미미(色香美味)의 양약(良藥)이다.

도(擣)는 공제(空諦)이며 사(簁)는 가제(假諦)이고 화합(和合)은 중도(中道)이다.

여(與)는 수여(授與)이며 자(子)는 법화(法華)의 행자(行者)이고 복용(服用)한다고 하는것은 수지(受持)의 의(義)이니라.

이것을 차대양약색향미미개실구족(此大良藥色香美味皆悉具足)이라고 설(說)하였느니라.

개실(皆悉)의 이자(二字)는 만행만선(萬行萬善)・제파라밀(諸波羅密)을 구족(具足)한 대양약(大良藥)인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색향(色香)등(等)이란 일색일향(一色一香)・무비중도(無非中道)로서 초목성불(草木成佛)이니라. 그러므로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에 일법(一法)도 구족(具足)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없으니 만약 복용(服用)하는자(者)는 속제고뇌(速除苦惱)이니라.

그러므로 묘법(妙法)의 대양약(大良藥)을 복용(服用)함은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의 번뇌(煩惱)의 병환(病患)을 제거(除去)하느니라.

법화(法華)의 행자(行者)가 매리(罵詈)를 당한다해도 인욕(忍辱)을 행(行)함은 진에(瞋恚)의 병(病)을 제거(除去)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시인어불도결정무유의(是人於佛道決定無有疑)라고 각지(覺知)함은 우치(愚癡)의 번뇌(煩惱)를 치유(治癒)하느니라.

그러므로 대양약(大良藥)은 말법(末法)의 성불(成佛)의 감로(甘露)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대양약(大良藥)의 본주(本主)이니라.

 

제구(第九) 독기심입실본심고지사(毒氣深入失本心故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독기심입(毒氣深入)이란 권교방법(權敎謗法)의 집정(執情)이 깊이 들어간 자(者)이니라.

이 때문에 법화(法華)의 대양약(大良藥)을 신수(身受)하지 않느니라.

복용(服用)시킨다 해도 토(吐)해내는 것은 이위불미(而謂不美)라고 하여 맛이 없다고 하는 자(者)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이위불미(而謂不美)의 자(者)가 아니니라.

 

제십(第十) 시호양약 금류재차 여가취복 물우불차지사

(是好良藥 今留在此 汝可取服 勿憂不差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시호양약(是好良藥)이란 혹(或)은 경교(經敎) 혹(或)은 사리(舍利)이니라. 그런데 말법(末法)에 있어서는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호(好)란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좋아하는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니라.

금류(今留)란 말법(末法)이며 차(此)란 일염부제(一閻浮提)중(中)에는 일본국이니라.

여(汝)란 말법(末法)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요

취(取)란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할 때의 의식(儀式)이니라.

복용(服用)한다는 것은 봉창(奉唱)하는 것이니라.

복용(服用)함으로써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며 시성정각(始成正覺)의 병환(病患)이 치유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제십일(第十一) 자아득불래지사(自我得佛來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구삼신(一句三身)을 전수(傳受)한 문(文)이라고 하느니라.

자(自)란 구계(九界)요 아(我)란 불계(佛界)이니라.

이 십계(十界)는 본유무작(本有無作)의 삼신(三身)으로서 출현(出現)하신 부처라고 하느니라.

 

자(自)도 아(我)도 득(得)하신 불(佛)이 출현(出現)하심은 십계본유(十界本有)의 명문(明文)이니라.

아(我)는 법신(法身)・불(佛)은 보신(報身)・내(來)는 응신(應身)이며 이 삼신(三身)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고불(古佛)로써 자득(自得)이니라.

무상보취(無上寶聚)불구자득(不求自得) 이를 생각할지어다.

따라서 즉현본원수(卽顯本遠壽)의 설(說)은 깊이 제교(諸敎)에 없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의 행자(行者)니라. 운운.

 

제십이(第十二) 위도중생고(爲度衆生故) 방편현열반지사(方便現涅槃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열반경(涅槃經)은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다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이미 방편(方便)이라고 설(說)해졌느니라. 운운.

 

제십삼(第十三) 상주차설법지사(常住此說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상주(常住)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주처(住處)이니라.

차(此)란 사바세계(娑婆世界)이며 산곡광야(山谷曠野)를 가리켜 차(此)라고 설(說)하시었다.

설법(說法)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언어(言語)의 음성(音聲)이 본유(本有)의 자수용지(自受用智)의 설법(說法)이니라.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설법(說法)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설법(說法)이 이것이니라.

 

제십사(第十四) 시아급중승(時我及衆僧) 구출영추산지사(俱出靈鷲山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영산일회(靈山一會) 엄연미산(儼然未散)의 문(文)이니라.

시(時)란 감응말법(感應末法)의 시(時)이고 아(我)란 석존(釋尊) 급(及)이란 보살(菩薩) 성중(聖衆)을 중승(衆僧)이라고 설(說)하였으며 구(俱)란 십계(十界)이고 영추산(靈鷲山)이란 적광토(寂光土)이니라.

시(時)에 아(我)도 급(及)도 중승(衆僧)도 다 같이 영추산(靈鷲山)에 나아가는 것이니라. 비밀로 할지어다. 비밀로 할지어다.

본문(本門) 사(事)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명문(名文)이며 어본존(御本尊)은 이 문(文)을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므로 구(俱)란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이며 출(出)이란 수연진여(隨緣眞如)의 지(智)이고 구(俱)란 일념(一念)이요 출(出)이란 삼천(三千)이니라. 운운.

 

또 가로되 시(時)란 본시(本是)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시(時)이다, 하(下)는 십계완연(十界宛然)의 만다라(曼茶羅)를 나타내는 문(文)이니라.

그 까닭은 시(時)란 말법(末法) 제오시(第五時)의 시(時)이니라.

아(我)란 석존(釋尊)・급(及)은 보살(菩薩)・중승(衆僧)은 이승(二乘)・구(俱)란 육도(六道)이니라. 출(出)이란 영산정토(靈山淨土)에 열출(列出)함이고 영산(靈山)이란 어본존(御本尊)및 일련(日蓮)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의 주소(住所)를 설(說)하느니라.운운.

 

제십오(第十五) 중생견겁진(衆生見劫盡)○이중견소진지사(而衆見燒盡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본문수량(本門壽量)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을 칭송(稱頌)하는 문(文)이니라.

대화소소시(大火所燒時)란 실의(實義)로는 번뇌(煩惱)의 대화(大火)이니라.

아차토안온(我此土安穩)이란 국토세간(國土世間)이며 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이란 중생세간(衆生世間)이고 보수다화과(寶樹多華菓)란 오음세간(五陰世間)이니라.

이는 즉(卽) 일념삼천(一念三千)을 설했느니라.

 

또 가로되 위에 말한 문(文)은 십계(十界)이고,

대화(大火)란 지옥계(地獄界)이며 천고(天鼓)란 축생(畜生)이고, 인(人)과 천(天)이란 인천(人天)의 이계(二界)이니라. 천(天)과 인(人)이 항상(恒常) 충만(充滿)하느니라.

우만다라화(雨曼茶羅華)란 성문계(聲聞界)이고 원림(園林)이란 연각계(緣覺界)이며 보살계(菩薩界)란 급(及)의 일자(一字)이고 불계(佛界)란 산불(散佛)이며 수라(修羅)와 아귀계(餓鬼界)란 우포제고뇌(憂怖諸苦惱) 여시실충만(如是悉充滿)의 어귀(語句)에 섭(攝)하느니라. 이러한 것을 시제죄중생(是諸罪衆生)이라고 설(說)하시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수량품(壽量品)의 설(說)이 나타나고 나면 즉개견아신(則皆見我身)이라 하여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이것이니라. 운운.

 

제십육(第十六) 아역위세부지사(我亦爲世父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아(我)란 석존(釋尊)・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부(父)이며 주사친(主師親)에 있어서 부처에 입각(立脚)하고 경(經)에 입각(立脚)함.

 

부처의 입장에서란

적문(迹門)의 부처의 삼덕(三德)은 금차삼계(今此三界)의 문(文)이 이것이니라.

본문(本門)의 부처의 주(主)・사(師)・친(親)의 삼덕(三德)은

주(主)의 덕(德)은 아차토안온(我此土安穩)의 문(文)이며

사(師)의 덕(德)은 상설법교화(常說法敎化)의 문(文)이고

친(親)의 덕(德)은 이 아역위세부(我亦爲世父)의 문(文)이 이것이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는 수량품(壽量品)의 문(文)을 알지못하는 자(者)는 부지은(不知恩)의 축생(畜生)이라고 석(釋)하셨도다.

경(經)의 입장(立場)에서는 제경(諸經)중(中) 왕(王)은 주(主)의 덕(德)이고 능구일체중생(能救一切衆生)은 사(師)의 덕(德)이며 또 여대범천왕(如大梵天王) 일체중생지부(一切衆生之父)의 문(文)은 부(父)의 덕(德)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부(父)이니 무간지옥(無間地獄)의 고(苦)를 구제(救濟)하는 까닭이니라. 운운.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이(異)의 고(苦)를 받음은 모두가 이는 여래(如來) 일인(一人)의 고(苦)]라고 운운.

日蓮이 말하되

일체중생(一切衆生)이 이(異)의 고(苦)를 받음은 모두가 이는 日蓮 일인(一人)의 고(苦)가 되느니라.

 

제십칠(第十七) 방일착오욕(放逸著五欲) 타어악도중지사(墮於惡道中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방일(放逸)이란 방법(謗法)의 이름이며 입아비옥(入阿鼻獄)은 의심없는 자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이 경문(經文)을 면리(免離)했느니라. 운운.

 

제십팔(第十八) 행도불행도지사(行道不行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일을 설(說)한것이며 행도(行道)는 사성(四聖)・불행도(不行道)는 육도(六道)이니라.

또 가로되 행도(行道)는 수라(修羅)・인천(人天) 불행도(不行道)는 삼악도(三惡道)이니라.

 

결국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는 행도(行道)이며 방법(謗法)의 자(者)는 불행도(不行道)이니라. 도(道)란 법화경(法華經)이다.

 

천태(天台) 가로되

[불도(佛道)란 별(別)해서 지금의 이 경(經)을 가리킴]이라고.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행도(行道)이며 부르지 않음은 불행도(不行道)이니라. 운운.

 

제십구(第十九) 매자작시념지사(每自作是念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매(每)란 삼세(三世)이고 자(自)란 별(別)해서는 석존(釋尊) 총(惣)해서는 십계(十界)이니라.

시념(是念)이란 무작본유(無作本有)의 南無妙法蓮華經의 일념(一念)이니라.

작(作)이란 이 작(作)은 유작(有作)의 작(作)이 아니며 무작본유(無作本有)의 작(作)이니라. 운운.

널리 십계본유(十界本有)의 입장(立場)에서 말한다면 자(自)란 만법(萬法) 각기(各其)의 당체(當體)이니라.

시념(是念)이란 지옥(地獄)의 가책(呵責)의 소리 그 외(外)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염념(念念)・모두 이는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의 지(智)이며 이를 염(念)이라고 말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염(念)은 대자비(大慈大悲)의 염(念)이니라. 운운.

 

제이십(第二十) 득입무상도등지사(得入無上道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무상도(無上道)란 수량품(壽量品)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며, 이 외(外)에 성취불신(成就佛身)은 없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성취불신(成就佛身)은 의심(疑心)없느니라. 운운.

 

제이십일(第二十一) 자아게지사(自我偈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자(自)란 구계(九界)이며 아(我)란 불신(佛身)이고 게(偈)란 도리법리(道理法理)이며 본유(本有)라고 도리(道理)를 밝힌 게송(偈頌)이니 깊이 이것을 사색(思索)할지니라. 도리(道理)의 실체(實體)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제이십이(第二十二) 자아게시종지사(自我偈始終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자(自)란 시(始)이고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의 신(身)은 종(終)이며 시종(始終) 자신(自身)이고 중간(中間)의 문자(文字)는 수용(受用)이니라.

따라서 자아게(自我偈)는 자수용신(自受用身)이며 법계(法界)를 자신(自身)이라고 열고 법계자수용신(法界自受用身)이므로 자아게(自我偈)가 아니라 함은 없다.

자수용신(自受用身)이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전교(傳敎) 가로되

[일념삼천(一念三千)즉(卽) 자수용신(自受用身)・자수용신(自受用身)이란 존형(尊形)을 초출(超出)한 부처라고・출존형불(出尊形佛)이란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운운.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가 이것이니라.

 

제이십삼(第二十三) 구원지사(久遠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의 구극(究極)은 구원실성(久遠實成)이며 구원(久遠)이란 작용(作用)하지 않고 꾸며 갖추지 않고 본래있는 그대로라는 의(義)이니라.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므로 처음으로 생긴것이 아니니 이는 작용(作用)하지 않음이니라.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구족(具足)하지 않았으니 이는 꾸며 갖추지 않은 것이고 본유상주(本有常住)의 부처이므로 본래 그대로이며 이것을 구원(久遠)이라고 하느니라.

구원(久遠)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실성무작(實成無作)이라고 열렸느니라. 운운.

 

제이십사(第二十四)

이 수량품(壽量品)의 소화 (所化)의 국토(國土)와 수행지사(修行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당품(當品) 유포(流布)의 국토(國土)란 일본국이며 통틀어서는 남염부제(南閻浮提)이니라.

소화(所化)란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고 수행(修行)이란 무의왈신(無疑曰信)의 신심(信心)을 말하며 수여(授與)의 인(人)이란 본화지용(本化地涌)의 보살(菩薩)이니라. 운운.

 

제이십오(第二十五) 건립어본존등지사(建立御本尊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본존(本尊)의 의문(依文)이란 여래비밀신통지력(如來秘密神通之力)의 문(文)이니라.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은 수량품(壽量品)의 사(事)의 삼대비법(三大秘法) 이것이니라.

日蓮은 틀림없이 영산(靈山)에 있어서 면수구결(面授口決)하였느니라.

본존(本尊)이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일신(一身)의 당체(當體)이니라.운운.

 

제이십육(第二十六) 수량품(壽量品)의 대고중지사(對告衆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경문(經文)은 미륵보살(彌勒菩薩)이니라. 그렇다 하더라도 멸후(滅後)를 본(本)으로 하는 고(故)로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니라.

그 중(中)에서도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가 이것이니라.

미륵(彌勒)이란 말법(末法)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를 말하는 것이니라.

미륵(彌勒)을 자씨(慈氏)라고도 하며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를 가리킴이니라.

장안대사(章安大師) 가로되 [위피제악즉시피친(爲彼除惡卽是彼親)]이라고 이 어찌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아닐소냐.

 

제이십칠(第二十七) 무작삼신지사(無作三身之事) 종자존형삼마야(種子尊形三摩耶)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존형(尊形)이란 십계본유(十界本有)의 형상(形像)이고 삼마야(三摩耶)란 십계(十界)가 소지(所持)의 물(物)이며 종자(種子)란 신(信)의 일자(一字)이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며 삼마야(三摩耶)란 합장(合掌)이니라.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운운.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기유중생 문불수명 장원여시 내지능생 일념신해 소득공덕 무유한량지사

(其有衆生 聞佛壽命 長遠如是 乃至能生 一念信解 所得功德 無有限量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념신해(一念信解)의 신(信)의 일자(一字)는 일체지혜(一切智慧)를 수득(受得)하는 바의 인종(因種)이니라.

신(信)의 일자(一字)는 명자즉(名字卽)의 위(位)이다. 따라서 신(信)의 일자(一字)는 최후품(最後品)의 무명(無明)을 자르는 이검(利劍)이니라.

신(信)의 일자(一字)는 수량품(壽量品)의 이(理) 현본(顯本)을 믿는것이며 해(解)란 사(事)의 현본(顯本)을 해득(解得)하는것이고 이 사리(事理)의 현본(顯本)을 일념(一念)에 신해(信解)함이라.

일념(一念)이란 무작본유(無作本有)의 일념(一念)이니라.

이와같이 신해(信解) 하는 사람의 공덕(功德)은 한량(限量)이 있을수 없느니라.

신(信)이 있는곳에 해(解)가 있으며 해(解)가 있는곳에 신(信)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信)을 가지고 성불(成佛)을 결정(決定)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가 이것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시즉능신수(是則能信受) 여시제인등(如是諸人等) 정수차경전지사(頂受此經全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을 머리에 받는다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여시제인(如是諸人) 등(等)의 문(文)은 널리 일체중생(一切衆生)에 걸치느니라.

따라서 삼세시방(三世十方)의 제불(諸佛)은 妙法蓮華經을 받아서 수지(受持)하여 성불(成佛)하시느니라. 따라서 앞의 수량품(壽量品)의 제목(題目)을 妙法蓮華經라 제호(題號)를 쓰고 다음에 여래(如來)라고 표제(表題)를 썼느니라.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운운.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것은 이 까닭이니라. 운운.

 

제삼(第三) 불자주차지즉시불수용지사(佛子住此地則是佛受用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문(文)을 자수용(自受用)의 명문(明文)이라고 했느니라.

차지(此地)란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의 의지(依地)이고 불자(佛子)란 법화(法華)의 행자(行者)이며 불자(佛者)는 보살(菩薩)이고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는 보살(菩薩)이고 주(住)란 신해(信解)의 의(義)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묘법(妙法)의 지(地)에 주(住)하는 것이며 부처의 수용(受用)의 신(身)이니라.

깊이 이것을 사색(思索)할지어다. 운운.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이개(二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妙法蓮華經 수희공덕지사(隨喜功德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수(隨)란 사리(事理)에 수순(隨順)함을 말하고, 희(喜)란 자타(自他) 공(共)히 기뻐하는 것이니라.

사(事)란 오백진점(五百塵點)의 사(事) 현본(顯本)에 수순(隨順)함이고

이(理)란 이 현본(顯本)에 따르는 것이며 결국 수량품(壽量品)의 내증(內證)에 수순(隨順)함을 수(隨)라고 하느니라.

그리고 자타(自他) 공(共)히 지혜(智慧)와 자비(慈悲)가 있음을 희(喜)라 고한다.

 

결국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 때 반드시 무작삼신(無作三身)의 부처로 되는것을 희(喜)라고 하느니라.

그러하므로 수(隨)란 법(法)의 입장(立場)이고 희(喜)란 인(人)의 입장(立場)이니라.

인(人)이란 오백진점(五百塵點)의 고불(古佛)인 석존(釋尊)이며 법(法)이란 수량품(壽量品)의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에 따르고 기뻐함을 수희(隨喜)라고 하며 통틀어서 수(隨)란 신(信)의 이명(異名)이니라. 운운. 오직 신심(信心)을 가리켜 수(隨)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권(卷)에는 수순차경비기지분(隨順此經非己智分)이라고 설(說)하였느니라. 운운.

 

제이(第二)

구기무취예(口氣無穢) 우발화지향(優鉢華之香) 상종기구출지사(常從其口出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구기(口氣)란 제목(題目)이니라.

무취예(無穢)란 미타(彌陀) 등(等)의 권교(權敎) 방편(方便) 무득도(無得道)의 교(敎)를 섞지 않음이니라.

우발화지향(優鉢華之香)이란 법화경(法華經)이며 말법(末法)인 지금은 제목(題目)이니라.

방편품(方便品)에 여우담발화(如優曇鉢華)를 가리켜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했으니 이를 사색(思索)할지어다.

상(常)이란 삼세상주(三世常住)이며 기구(其口)란 법화(法華)의 행자(行者)의 입이고 출(出)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상종기구출(常從其口出)이니라. 운운.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사개(四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법사공덕지사(法師功德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사(法師)란 오종법사(五種法師)이고 공덕(功德)이란 육근청정(六根淸淨)의 과보(果報)이니라.

결국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니라.

그러므로 妙法蓮華經의 법(法)의 스승으로 되어, 큰 덕(德)이 있느니라.

공(功)이란 행(行)하는 것이며 또한 악(惡)을 멸(滅)함을 공(功)이라 하고 선(善)을 생(生)함을 덕(德)이라고 하느니라.

공덕(功德)이란 즉신성불(卽身成佛)이고 또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설문(說文)과 같이 수행(修行)함을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운운.

 

제이(第二) 육근청정지사(六根淸淨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눈의 공덕(功德)이란 법화불신(法華不信)의 자(者)는 무간(無間)에 타재(墮在)하고 믿는 자(者)는 성불(成佛)한다고 보는것을 가지고 눈의 공덕(功德)이라고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을 봉지(奉持)하는 곳에 눈의 팔백(八百)의 공덕(功德)을 얻느니라. 눈이란 법화경(法華經)이며 이 대승경전(大乘經典)은 제불(諸佛)의 안목(眼目)이라고.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눈의 공덕(功德)을 얻느니라. 운운.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도 또한 이와같으니라. 운운.

 

제삼(第三) 우여정명경지사(又如淨明鏡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에 거울의 비유(譬喩)를 설(說)함은 이 명문(明文)이니라.

육근청정(六根淸淨)의 사람은 유리명경(琉璃明鏡)과 같이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본다는 경문(經文)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명경(明鏡)에 만상(萬像)을 비추는 것과 같이 지견(知見)하느니라.

이 명경(明鏡)이란 법화경(法華經)이고 별(別)해서는 보탑품(寶塔品)이니라.

또 나의 일심(一心)의 명경(明鏡)이니라.

결국 유리(琉璃)와 명경(明鏡)과의 두가지의 비유(譬喩)를 설(說)하셨으니 선근청정(善根淸淨)의 하(下)이니라.

색심불이(色心不二) 이므로 어느 것이나 청정(淸淨)의 덕분(德分)이라,

정(淨)이란 부정(不淨)에 대(對)하여 정(淨)이라고 하여 명(明)이란 무명(無明)에 대(對)하여 명(明)이라고 설(說)하느니라.

경(鏡)이란 일심(一心)이며 정(淨)은 가제(假諦)・명(明)은 공제(空諦)・경(鏡)은 중도(中道)이고 실견제색상(悉見諸色像)의 실(悉)은 십계(十界)이니라.

결국 정명경(淨明鏡)이란 색심(色心)의 이법(二法) 南無妙法蓮華經의 체(體)이며 정명경(淨明鏡)이란 신심(信心)이니라. 운운.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지견(知見)한다 함은 삼세간(三世間)을 말하느니라.

 

제사(第四) 시인지차경안주희유지지사(是人持此經安住希有地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시인(是人)이란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 안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이며 희유지(希有地)란 수량품(壽量品)의 사리(事理)의 현본(顯本)을 가리키느니라.

이것을 또 분별품(分別品)에서는[불설희유법(佛說希有法)]이라고 설(說)하였으며 별(別)해서는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의 희유(希有)의 지(地)란 말법홍통(末法弘通)의 명경(明鏡)인 본존(本尊)이니라.

통틀어 이 품(品)의 육근청정(六根淸淨)의 공덕(功德)은 십신상사즉(十信相似卽)이고 대고중(大告衆)의 상정진보살(常精進菩薩)은 십신(十信)의 제삼신(第三身)이라고 했느니라.

그렇지만 말법(末法)에 있어서는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가리켜 상정진보살(常精進菩薩)이라고 알아야 하며 이 경(經)의 지자(持者)는 시즉정진(是則精進)인 까닭이니라.

 

불경품(常不輕品) 삼십개(三十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상불경지사(常不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상(常)의 자(字)는 삼세(三世)의 불경(不輕)의 일이니라.

불경(不輕)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내증소구(內證所具)의 삼인불성(三因佛性)을 가리키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득대세보살지사(得大勢菩薩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득(得)이란 응신(應身)이고 대(大)란 법신(法身)이며 세(勢)란 보신(報身)이니라. 또 득(得)이란 가제(假諦)이고 대(大)란 중도(中道)이며 세(勢)란 공제(空諦)이고 원융(圓融)의 삼제삼신(三諦三身)이니라.

 

제삼(第三) 위음왕지사(威音王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위(威)란 색법(色法)이고 음(音)이란 심법(心法)이며, 왕(王)이란 색심불이(色心不二)를 왕(王)이라고 하느니라.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이것이 곧 위음왕(威音王)이니라. 운운.

그 까닭은

음(音)이란 일체(一切) 권교(權敎)의 제목(題目)등(等)이고

위(威)란 수제(首題)의 오자(五字)이며

왕(王)이란 법화(法華)의 행자(行者)이니라. 운운.

 

법화(法華)의 제목(題目)은 사자(獅子)가 짖는것과 같고 여경(餘經)은 여수(餘獸)의 소리와 같으며 제경(諸經)중(中)의 왕(王)인 고(故)로 왕(王)이라고 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위음왕불(威音王佛)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범유소견지사(凡有所見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지금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의 기(機)라고 지견(知見)하느니라. 운운.

 

제오(第五) 아심경여등 불감경만 소이자하 여등개행보살도 당득작불지사

(我深敬汝等 不敢輕慢 所以者何 汝等皆行菩薩道 當得作佛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이십사자(二十四字)와 묘법(妙法)의 오자(五字)는 다르지만 그 의(意)는 같은것이며 이십사자(二十四字)는 약법화경(略法華經)이니라.

 

제육(第六) 단행예배지사(但行禮拜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예배(禮拜)란 합장(合掌)이고 합장(合掌)이란 법화경(法華經)이며 이는 즉(卽)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그러하므로 부전독송경전단행예배(不專讀誦經典但行禮拜)라고 하느니라.

 

제칠(第七) 내지원견지사(乃至遠見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위의 범유소견(凡有所見)의 견(見)은 내증소구(內證所具)의 불성(佛性)을 본다는 것이니라. 이것은 이(理)이며 원견(遠見)의 견(見)은 사중(四衆)이라고 하는것 이므로 사(事)이니라.

따라서 상(上)은 심법(心法)을 보며 지금은 색법(色法)을 본다.

색법(色法)은 본문(本門)의 개오(開悟) 사일개회(四一開會)이니라.

심법(心法)을 본다란 적문(迹門)의 의(意)이며 또 사일개회(四一開會)이니라.

원(遠)의 일자(一字)는 수량품(壽量品)의 구원(久遠)인 고(故)로 고왕예배(故往禮拜)라고 했느니라. 운운.

 

제팔(第八) 심부정자지사(心不淨者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방법(謗法)하는 자(者)는 색심이법(色心二法) 공(共)히 부정(不淨)이니라.

먼저 심법부정(心法不淨)이란 문(文)은 지금 이 심부정자(心不淨者)니라.

또 신부정(身不淨)이란 문(文)은 비유품(譬喩品)에[신상취처구예부정(身常臭處坵穢不淨)]이라고 했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색심(色心) 공(共)히 청정(淸淨)이니라.

 

신정(身淨)은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에 가로되

[약지법화경기신심청정(若持法華經其身甚淸淨)]의 문(文)이니라.

심정(心淨)이란 제바품(提婆品)에 가로되

[정심신경(淨心信敬)]이라고. 운운.

정(淨)이란 법화경(法華經)의 신심(信心)이며 부정(不淨)이란 방법(謗法)이니라. 운운.

 

제구(第九) 언시무지비구지사(言是無智比丘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문(文)은 법화경(法華經)의 명문(明文)이니라.

상만(上慢)의 사중(四衆)은 불경보살(不輕菩薩)을 무지(無智)의 비구(比丘)라고 매리(罵詈)했도다.

범유소견(凡有所見)의 보살(菩薩)을 무지(無智)라고 하는것은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의 소위(所謂)이니라.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는 무지(無智)의 비구(比丘)라고 비방(誹謗)당한다는 것은 경문(經文)의 명경(明鏡)이니라.

무지(無智)를 가지고 법화경(法華經)의 기(機)로 정(定)하였느니라.

 

제십(第十) 문기소설개신복수종지사(聞其所說皆信伏隨從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문(聞)이란 명자즉(名字卽)이며 결국은 이강독지(而强毒之)의 제목(題目)이니라. 개(皆)란 상만(上慢)의 사중(四衆)등(等)이며 신(信)이란 무의왈신(無疑曰信)이고 복(伏)이란 법화(法華)에 귀복(歸伏)하는 것이며 수(隨)란 마음을 법화경(法華經)에 옮기는 것이고 종(從)이란 몸을 이 경(經)에 옮기는 것이니라.

 

결국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행자(行者)는 말법(末法)의 불경보살(不輕菩薩)이니라.

 

제십일(第十一) 어사중중설법심무소외지사(於四衆中說法心無所畏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사중(四衆)이란 일본국중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고 설법(說法)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심무소외(心無所畏)란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바의 절복(折伏)이니라. 운운.

 

제십이(第十二) 상불경보살기이인호즉아신시지사(常不輕菩薩豈異人乎則我身是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과거(過去)의 불경보살(不輕菩薩)은 금일(今日)의 석존(釋尊)이니라.

석존(釋尊)은 수량품(壽量品)의 교주(敎主)이고 수량품(壽量品)의 교주(敎主)란 우리들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의 일이며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는 불경(不輕)이니라. 운운.

 

제십삼(第十三) 상불치불불문법불견승지사(常不値佛不聞法不見僧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문(文)은 불경보살(不輕菩薩)을 경천(輕賤)하는 고(故)로 삼보(三寶)를 배견(拜見)하지 못함이 이백억겁(二百億劫) 지옥(地獄)에 떨어져서 대고뇌(大苦惱)를 받는다고 했느니라.

지금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를 경천(輕賤)하는 것은 그보다 더함이니라.

 

그는 천겁(千劫) 이는 무수겁(無數劫)에 이르며 말법(末法)의 부처란 범부(凡夫)이고 범부승(凡夫僧)이니라.

법(法)이란 제목(題目)이며 승(僧)이란 우리들의 행자(行者)이니라.

부처라고도 하며 또 범부승(凡夫僧)이라고도 하느니라.

심각원리명지위불(深覺圓理名之爲佛)이기 때문이며 원리(圓理)란 법화경(法華經)이니라. 운운.

 

제십사(第十四) 필시죄이부우상불경보살지사(畢是罪已復遇常不輕菩薩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만약 법화(法華) 비방(誹謗)의 죄과(罪過)를 고치고 신복수종(信伏隨從)한다 해도 얕은 상태로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느니라.

선방(先謗)이 강하기 때문에 천겁(千劫)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후(後)에 나올때가 되어 또 日蓮을 만나게 될 것이니 부우(復遇) 日蓮으로 되느니라.

 

제십오(第十五) 어여래멸후등지사(於如來滅後等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불경보살(不輕菩薩)의 수행(修行)은 이와 같으며 부처의 멸후(滅後)에 오종(五種)으로 妙法蓮華經을 수행(修行)하라고 쓰여있느니라.

틀림없이 시고(是故)로부터 아래 이십오자(二十五字)는 말법(末法)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일이니라.

이미 시고(是故)라고 다짐해놓고 어여래멸후(於如來滅後)라고 설(說)하시었는데 유통(流通)의 품(品)이기 때문이니라.

총(惣)해서는 유통(流通)이란 미래당금(未來當今)을 위함이니라.

법화경일부(法華經一部)는

일왕(一往)은 재세(在世)를 위함이요.

재왕(再往)은 말법당금(末法當今)을 위함이라.

그 까닭은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공(共)히 허락하여 미래멸후(未來滅後)의 자(者)를 위함이니라.

 

품품(品品)의 법문(法門)은 제목(題目)의 용(用)이며 체(體)의 묘법(妙法)・말법(末法)의 용(用)이라면 어찌 용(用)의 품품(品品)이 다르겠느뇨.

이 법문(法門)은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천태(天台)의 [강유(綱維)를 끌어 당기는데 어찌 망목(網目)이 움직이지 않을리 없는것과 같다]등(等)이라고 석(釋)함은 이 의(意)로다.

묘락대사(妙樂大師)는 [약(略)하여 경제(經題)를 들면 현(玄)에 일부(一部)를 포함한다]라고

이런것을 모르는 자(者)는 말법(末法)의 홍통(弘通)에 부족(不足)한자(者)이니라.

 

제십육(第十六) 차품(此品)의 시(時)의 불경보살(不輕菩薩)의 체지사(體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불경보살(不輕菩薩)이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이니라.

삼세상주(三世常住)의 예배행(禮拜行)을 세우는 것이며 말하는 바의 언어(言語)는 묘법(妙法)의 음성(音聲)이니라.

 

옥졸(獄卒)이 장(杖)을 들고 죄인(罪人)을 가책(呵責)함이 체(體)의 예배(禮拜)이고 감히 경만(輕慢)하지 않느니라.

죄인(罪人)이 나를 책(責)한다고 생각한다면 불경보살(不輕菩薩)을 가책(呵責)하는 것이며 절복(折伏)의 행(行)이 이것이니라.

 

제십칠(第十七) 불경보살(不輕菩薩)의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이에 대하여 십사개소(十四箇所)의 예배주처(禮拜住處)의 일이 있음.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예배(禮拜)의 주처(住處)란 다보탑중(多寶塔中)의 예배(禮拜)이니라.

그 까닭은 탑파(塔婆)란 오대(五大)의 소성(所成)이고 오대(五大)란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이며 이것을 다보(多寶)의 탑(塔)이라고도 하느니라.

법계(法界)가 넓다 하지만 이 오대(五大)에 불과(不過)한것 이로다. 그러므로 탑중(塔中)의 예배(禮拜)라고 상전(相傳)하느니라.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운운.

 

제십팔(第十八) 개시오입(開示悟入)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개시오입(開示悟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주처(住處)로 하느니라.

그러므로 방편품(方便品)의 이 문(文)을 예배(禮拜)의 주처(住處)라고 하며 이것은 내(內)에 불경(不輕)의 해(解)를 품는다고 석(釋)했느니라.

해(解)란 정인불성(正因佛性)을 구족(具足)한다고 석(釋)함이며 개불지견(開佛知見)이란 이 불성(佛性)을 열게 하기 위해서 부처는 출현(出現)하시느니라.

 

제십구(第十九) 매자작시념(每自作是念)의 문(文)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매(每)의 자(字)는 삼세(三世)이며 염(念)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을 염(念)하셨느니라. 따라서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과 개당작불(皆當作佛)과는 같은 일이며 따라서 이 일문(一文)을 상전(相傳)하느니라.

천태대사(天台大師)는 [개삼현일(開三顯一)○개근현원(開近顯遠)]이라고 석(釋)하셨다. 비밀(秘密)로 할지니라. 비밀(秘密)로 할지니라. 운운.

 

제이십(第二十) 아본행보살도(我本行菩薩道)의 문(文)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아(我)란 본인묘(本因妙)의 시(時)를 가리키느니라. 본행보살도(本行菩薩道)의 문(文)은 불경보살(不輕菩薩)이며 이것을 예배(禮拜)의 주처(住處)라고 가리키느니라.

 

제이십일(第二十一) 생로병사(生老病死)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체중생(一切衆生)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염리(厭離)하지않고 무상천멸(無常遷滅)의 당체(當體)에 미혹(迷惑)함으로써 후세보리(後世菩提)를 각지(覺知)하지 못함이라.

이를 가리킬때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가르치는 당체(當體)를 예배(禮拜)라고 하느니라.

좌우(左右)의 양수(兩手)를 벌릴때는 번뇌생사(煩惱生死) 상만불경(上慢不輕) 각별(各別)이니라.

예배(禮拜)할 때 양수(兩手)를 합하는 것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니라.

상만(上慢)의 사중(四衆)의 소구(所具)의 불성(佛性)도 불경소구(不輕所具)의 불성(佛性)도 동일종(同一種)의 묘법(妙法)이라고 예배(禮拜)하느니라. 운운.

 

제이십이(第二十二) 법성예배주처지사(法性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불경보살(不輕菩薩)・법성진여(法性眞如)의 삼인불성(三因佛性)・南無妙法蓮華經의 이십사자(二十四字)를 근본(根本)으로 하여 무명(無明)의 상만(上慢)의 사중(四衆)을 예배(禮拜)하는것은 온재중생(薀在衆生)의 불성(佛性)을 예배(禮拜)하는것이니라. 운운.

 

제이십삼(第二十三) 무명예배주처지사(無明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자타(自他)의 격의(隔意)를 세워 그는 상만(上慢)의 사중(四衆) 나는 불경(不輕)이라고 한다.

불경(不輕)은 선인(善人)・상만(上慢)은 악인(惡人)이라고 선악(善惡)을 세우는것은 무명(無明)이니라.

여기에 입각(立脚)해서 예배(禮拜)를 행(行)할 때 선악불이(善惡不二)・사정일여(邪正一如)의 南無妙法蓮華經라고 예배(禮拜)하느니라.

 

제이십사(第二十四) 연화(蓮華)의 이자(二字)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연화(蓮華)란 인과(因果)의 이법(二法)이니라.

악인(惡因)이 있으면 악과(惡果)를 느끼고 선인(善因)이 있으면 선과(善果)를 느끼며 내증(內證)에는 여등(汝等) 삼인불성(三因佛性)의 선인(善人)이 있느니라.

사(事)로 현현(顯現)할 때는 선과(善果)로 되어 개당작불(皆當作佛)하리라고 예배(禮拜)하시느니라. 운운.

 

제이십오(第二十五) 실보토(實報土)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실보토(實報土)는 종(縱)의 시(時)는 보살(菩薩)의 주처(住處)이니라. 따라서 불경보살(不輕菩薩)의 주처(住處)를 실보토(實報土)로 정(定)하여 여기에 예배행(禮拜行)을 세웠으므로 실보토(實報土)는 예배(禮拜)의 주처(住處)이니라. 운운.

 

제이십육(第二十六) 자비(慈悲)의 이자(二字)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불경예배(不輕禮拜)의 행(行)은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고 가르치는 고(故)로 자비(慈悲)이니라.

이미 장목와석(杖木瓦石)을 가지고 타척(打擲)하여도 이강독지(而强毒之)함은 자비(慈悲)로부터 일어났느니라.

불심(佛心)이란 대자비심(大慈悲心) 이것이라고 설(說)해 있으므로 예배(禮拜)의 주처(住處)는 자비(慈悲)이니라. 운운.

 

제이십칠(第二十七) 예배주처(禮拜住處) 분진즉지사(分眞卽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보살(菩薩)은 분진즉(分眞卽)의 위(位)라고 정(定)하느니라.

이 위(位)에 서서 이즉(理卽)의 범부(凡夫)를 예배(禮拜)하는데 이에 의하여 이즉(理卽)의 범부(凡夫)이므로 이 수기(授記)를 받지 아니하고 무지(無智)의 비구(比丘)라고 비방(誹謗)하였노라. 운운.

 

제이십팔(第二十八) 구경즉(究竟卽)의 예배주처지사(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범유소견(凡有所見)의 견(見)은 불지견(佛知見)이니라. 불지견(佛知見)을 가지고 상만(上慢)의 사중(四衆)을 예배(禮拜)하므로 구경즉(究竟卽)을 예배(禮拜)의 주처(住處)로 정(定)하는 것이니라. 운운.

 

제이십구(第二十九) 법계예배주처지사(法界禮拜住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계(法界)에 서서 예배(禮拜)함이라 법계(法界)란 넓은 것도 아니고 좁은것도 아니로다.

대체로 법(法)이란 제법(諸法)이고 계(界)란 경계(境界)이니라.

지옥계(地獄界) 내지(乃至) 불계(佛界) 각각(各各) 계(界)에 합치(合致)하므로 불경보살(不輕菩薩)은 불경보살(不輕菩薩)의 계(界)에 합치(合致)하고 상만(上慢)의 사중(四衆)은 사중(四衆)의 계(界)에 합치(合致)하느니라.

따라서 법계(法界)가 법계(法界)를 예배(禮拜)하는 것이며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예배(禮拜)이니라.

그 까닭은 불경보살(不輕菩薩)이 사중(四衆)을 예배(禮拜)하면 상만(上慢)의 사중소구(四衆所具)의 불성(佛性)또한 불경보살(不輕菩薩)을 예배(禮拜)하느니라.

거울을 보고 예배(禮拜)할 때 떠오른 그림자 또한 나를 예배(禮拜)하느니라. 운운.

 

제삼십(第三十) 예배주처(禮拜住處) 인욕지지사(忍辱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미 상만(上慢)의 사중(四衆)이 매리(罵詈) 진에(瞋恚)를 하며 허망(虛妄)의 수기(授記)라고 비방(誹謗)했지만 불생진에(不生瞋恚)라고 설(說)하므로 인욕지(忍辱地)에 주(住)하여 예배행(禮拜行)을 세우느니라. 운운.

처음의 一의 주처(住處)는 세간일반(世間一般)의 학자(學者)도 알고 있으나 후(後)의 십삼개조(十三箇條)의 당세(當世)의 학자(學者)도 알지 못하는 일이니라. 운운. 이상 십사개조(十四箇條)의 예배(禮拜)의 주처(住處)이니라. 운운.

 

신력품(神力品) 팔개(八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妙法蓮華經 여래신력지사(如來神力之事)

 

문구(文句)의 十에 가로되,

신(神)은 불측(不測)에 이름하고 력(力)은 간용(幹用)에 이름하여 불측(不測)은 즉 천연(天然)의 체(體)가 깊고 간용(幹用)은 즉(則) 전변(轉變)의 힘이 크니라.

차중(此中)・심법(心法)을 부촉(付屬)하기 위하여 십종(十種)의 대력(大力)을 나타내는 고(故)로 신력품(神力品)이라 이름한다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妙法蓮華經는 석존(釋尊)의 묘법(妙法)이 아니니라. 이미 이 품(品)의 시(時)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부촉(付屬)하셨기 때문이니라.

대체로 妙法蓮華經를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부촉(付屬)하시는 것은 보탑품(寶塔品)시(時)에 일이 일어나서 수량품(壽量品)시(時)에 일이 나타나고 신력촉루(神力屬累)의 시(時)에 일이 끝났느니라.

 

여래(如來)란 위의 수량품(壽量品)의 여래(如來)이며, 신력(神力)이란 십종(十種)의 신력(神力)이고 결국 妙法蓮華經의 신(神)과 력(力)이니라.

신력(神力)이란 위의 수량품(壽量品)시(時)의 여래비밀신통지력(如來秘密神通之力)의 문(文)과 같은것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제목(題目)이며 이 십종(十種)의 신력(神力)은 재세멸후(在世滅後)에 걸치느니라.

그렇지만 십종(十種) 다같이 멸후(滅後)에 한(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니라.

 

또 가로되 妙法蓮華經如來와 신(神)과 력(力)의 품(品)이라고 알지어다. 운운.

여래(如來)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이며 수량품(壽量品)과 같다. 따라서 석(釋)에도 여래(如來)란 위에 석(釋)했노라고 말하였으며 이 신(神)이란 산왕칠사(山王七社) 등(等)이니 이 요지(要旨)를 깊이 사색(思索)할지니라. 운운.

 

제이(第二) 출광장설지사(出廣長舌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광(廣)이란 적문(迹門)・장(長)이란 본문(本門)・설(舌)이란 중도법성(中道法性)이고 십법계(十法界)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이므로 광(廣)이라하며 종(縱)으로 높기 때문에 장(長)이라고 하느니라.

광(廣)이란 삼천진점(三千塵點)부터 이래(已來)의 묘법(妙法)・장(長)이란 오백진점(五百塵點)이래의 묘법(妙法) 다같이 광장설이니라. 운운.

 

제삼(第三) 시방세계(十方世界) 중보수하(衆寶樹下) 사자좌상지사(師子座上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시방(十方)이란 십계(十界)이고, 이 하(下)에 있어서 초목성불(草木成佛) 분명하니라.

사자(師子)란 사(師)는 사장(師匠) 자(子)는 제자(弟子) 좌상(座上)이란 적광토(寂光土)이고 십계즉본유(十界卽本有)의 적광(寂光)인 국토(國土)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만백천세지사(滿百千歲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만(滿)이란 법계(法界)이고 백(百)은 백계(百界)이며 천(千)은 천여(千如)이고 일념삼천(一念三千)을 만백천세(滿百千歲)라고 설(說)하느니라. 운운.

일시(一時)도 일념(一念)도 만백천세(滿百千歲)로서 십종(十種)의 신력(神力)을 나타내는 것이며 십종(十種)의 신력(神力)이란 십계(十界)의 신력(神力)이니라.

십계각각(十界各各)의 신력(神力)은 일종(一種)의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제오(第五)

지개육종진동기중중생(地皆六種震動其中衆生)○중보수하지사(衆寶樹下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지(地)란 국토세간(國土世間)이고 기중중생(其中衆生)이란 중생세간(衆生世間)이며 중보수하(衆寶樹下)란 오음세간(五陰世間)이니 일념삼천(一念三千)이 분명하니라.운운.

 

제육(第六) 사바시중(娑婆是中) 유불명(有佛名) 석가모니불지사(釋迦牟尼佛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본화(本化)가 홍통(弘通)하는 妙法蓮華經의 대인욕(大忍辱)의 힘을 가지고 홍통(弘通)하는것을 사바(娑婆)라고 하느니라.

인욕(忍辱)은 적광토(寂光土)이고 이 인욕(忍辱)의 마음을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 하였고 사바(娑婆)란 감인세계(堪忍世界)라고 하느니라. 운운.

 

제칠(第七) 사인행세간(斯人行世間) 능멸중생암지사(能滅衆生闇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사인(斯人)이란 상행보살(上行菩薩)이며 세간(世間)이란 대일본국이고 중생암(衆生闇)이란 방법(謗法)의 대중병(大衆病)이니라.

능멸(能滅)의 체(體)는 南無妙法蓮華經이며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이것이니라. 운운.

 

제팔(第八)

필경주일승(畢竟住一乘)○시인어불도(是人於佛道) 결정무유의지사(決定無有疑之事)

 

어의구전에 가로되,

필경(畢竟)이란 광선유포(廣宣流布)이니라.

주일승(住一乘)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의 일법(一法)에 주(住)해야 한다는 것이고

시인(是人)이란 명자즉(名字卽)의 범부(凡夫)이며

중도(中道)란 구경즉(究竟卽)이고

의(疑)란 근본의혹(根本疑惑)의 무명(無明)을 가리키느니라.

말법당금(末法當今)은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는 일행(一行)만으로써 성불(成佛)한다고 정(定)하느니라. 운운.

 

촉루품(囑累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종법좌기지사(從法座起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기(起)란 탑중(塔中)의 座에서 일어나 탑외(塔外)의 의식(儀式)이며 삼마(三摩)의 부촉(付屬)이 있느니라.

삼마(三摩)의 부촉(付屬)이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삼덕(三德) 삼제(三諦) 삼관(三觀)이라 부촉(付屬)하신것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여래시(如來是) 일체중생지(一切衆生之) 대시주지사(大施主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여래(如來)란 본법불가사의(本法不可思議)의 여래(如來)이므로 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가리키느니라.

대시주(大施主)의 시(時)란 말법당금(末法當今) 유포(流布)하는 南無妙法蓮華經

주(主)란 상행보살(上行菩薩)의 일이라고 알아야하느니라.

그렇지만 당품(當品)은 적문부촉(迹門付屬)의 품(品)이며, 상행보살(上行菩薩)을 상수(上首)로 하여 부촉(付屬)하시는 고(故)로 상행보살(上行菩薩)의 본의(本意)이시라고 보았느니라. 운운.

 

제삼(第三) 여세존(如世尊) 칙당구봉행지사(勅當具奉行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제보살등(諸菩薩等)의 서언(誓言)의 문(文)이니라.

제천선신(諸天善神) 보살(菩薩)등(等)을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간효(諫曉)함은 이 문(文)에 의(依)함이니라. 운운.

 

약왕품(藥王品)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불여수지(不如受持) 차법화경(此法華經) 내지일사구게지사(乃至一四句偈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이란 일경(一經) 이십팔품(二十八品)이며 일사구게(一四句偈)란 제목(題目)의 오자(五字)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십유지사(十喩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십유(十喩)란 십계(十界)이니라.

이 산(山)밑에 지옥계(地獄界)를 포함(包含)했도다. 천류(川流) 강하(江河) 아귀(餓鬼) 축생(畜生)을 설(說)하였고 일월(日月)밑에 수라(修羅)를 포함하였으며 제석(帝釋) 범천(梵天)은 천계(天界)이고 범부인(凡夫人)이란 인간이니라.

성문(聲聞)이란 사향(四向) 사과(四果)의 아라한(阿羅漢)이고 연각(緣覺)이란 벽지불중(辟支佛中)이라고 설(說)해졌느니라.

보살(菩薩)은 보살위(菩薩位) 제일(第一)이라고 했으며 불계(佛界)는 여불위제법왕(如佛爲諸法王)이라고 쓰였느니라.

이 십계(十界)를 십유(十喩)라고 열거(列擧)해서 교상(敎相)을 분별(分別)하여 妙法蓮華經의 여일불승(如一佛乘)에서 분별설삼(分別說三)할 때 이와 같이 열거(列擧)하였느니라.

따라서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이며 일념삼천(一念三千)은 발고여락(拔苦與樂)이니라.

 

제삼(第三)

이일체고(離一切苦) 일체병통(一切病痛) 능해일체(能解一切) 생사지박지사(生死之縛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法華)의 심(心)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니라.

이해(離解)의 이자(二字)는 이 설상(說相)에 위배(違背)됨이니,

따라서 이(離)의 자(字)를 명(明)이라고 읽느니라.

본문수량(本門壽量)의 혜안(慧眼)이 열리고 보면 본래본유(本來本有)의 병통고뇌(病痛苦惱)라고 분명(分明)해지니 따라서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의 지혜(智慧)이니라.

해(解)란 우리들의 생사(生死)는 지금 시작된 생사(生死)가 아니라. 본래본유(本來本有)의 생사(生死)이니라. 시각(始覺)의 사박(思縛)을 푸느니라. 운운.

이해(離解)의 이자(二字)는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화불능소(火不能燒) 수불능표지사(水不能漂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화(火)란 아비(阿鼻)의 화염(火炎)이고 수(水)란 홍련(紅蓮)의 얼음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이와 같이 되느니라. 운운.

 

제오(第五) 제여원적(諸餘怨敵) 개실최멸지사(皆悉摧滅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원적(怨敵)이란 염불(念佛)・선(禪)・진언(眞言)등(等)의 방법(謗法)의 사람이고 최멸(摧滅)이란 법화절복(法華折伏) 파권문리(破權門理)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이 이것이니라. 운운.

 

제육(第六) 약인유병 득문시경 병즉소멸 불로불사지사

(若人有病 得聞是經 病卽消滅 不老不死之事)

 

문구(文句)의 十에 가로되,

여기에 관해(觀解)를 사용할것이니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약인(若人)이란 상(上)・불과(佛果)로부터 하(下)・지옥(地獄)의 죄인(罪人)까지 이것을 포함하느니라.

병(病)이란 삼독(三毒)의 번뇌(煩惱)・불보살(佛菩薩)에 있어서도 이것은 있느니라. 불로(不老)는 석존(釋尊) 불사(不死)는 지용(地涌)의 유(類)이니라.

이것은 멸후(滅後) 당금(當今)의 중생(衆生)을 위해서 설(說)해진 것이로다.

따라서 병(病)이란 방법(謗法)이니라.

이 경(經)을 수지(受持)해 받드는자(者)는 병즉소멸(病卽消滅) 의심(疑心) 없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가 이것이니라. 운운.

 

묘음품(妙音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묘음보살지사(妙音菩薩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음보살(妙音菩薩)이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이니라.

묘(妙)란 불가사의(不可思議)이고 음(音)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발(發)하는 바의 언어음성(言語音聲)이 묘법(妙法)의 음성(音聲)이고 삼세상주(三世常住)의 묘음(妙音)이니라.

소용(所用)에 따라서 제사(諸事)를 설법(說法)함은 자비(慈悲)이며 이것을 보살(菩薩)이라고 하느니라.

또 가로되 묘음(妙音)이란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는것은 말법당금(末法當今)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음성(音聲)이니라. 그 까닭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묘음(妙音)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육계백호지사(肉白毫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두개의 상호(相好)는 효순(孝順) 사장(師長)으로부터 일어났으며 법화경(法華經)을 봉지(奉持)함을 가지고 일체(一切)의 효양(孝養)의 최정(最頂)으로 하였다. 또 가로되,

이 백호(白毫)란 부(父)의 음(婬)이요 육계(肉髻)란 모(母)의 음(婬)이며, 적백이제(赤白二渧)・금경(今經)에 와서 육계(肉髻)・백호(白毫)의 이상(二相)으로 나타났느니라.

또 가로되, 육계(肉髻)는 수연진여(隨緣眞如)의 지(智)이고 백호(白毫)는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함은 이들의 상호(相好)를 구족(具足)하느니라.

우리들의 생(生)의 시작은 적색육계(赤色肉髻)이며 사후(死後)의 백골(白骨)은 백호상(白毫相)이니라.

생(生)의 시작의 적색(赤色)은 수연진여(隨緣眞如)의 지(智),사후백골(死後白骨)은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니라.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운운.

 

제삼(第三) 팔만사천칠보발지사(八萬四千七寶鉢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문(文)은 묘음보살(妙音菩薩) 운뢰음왕불(雲雷音王佛)에게 바치는 바의 공양(供養)의 발(鉢)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발(鉢)을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에게 공양(供養)해 드림이니라.

 

팔만사천(八萬四千)이란 우리들의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진로(塵勞)이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곳에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法門)으로 나타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문자(文字)는 개(開)・결(結) 이경(二經)을 합(合)하여 팔만사천(八萬四千)이니라.

또 가로되 팔(八)이란 팔고(八苦)이며 사(四)란 생로병사(生老病死)이고 칠보(七寶)란 두상(頭上)의 칠혈(七穴)이며 발(鉢)이란 지기(智器)이고 묘법(妙法)의 지수(智水)를 수지(受持)함을 가지고 발(鉢)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운운.

 

보문품(普門品) 오개(五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무진의보살지사(無盡意菩薩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무진의(無盡意)란 원융(圓融)의 삼제(三諦)이니라.

무(無)란 공제(空諦)・진(盡)이란 가제(假諦)・의(意)란 중도(中道)이니라.

 

관세음(觀世音)이란

관(觀)은 공제(空諦)・세(世)는 가제(假諦)・음(音)은 중도(中道)이니라.

 

妙法蓮華經란

妙는 공제(空諦)・法蓮華는 가제(假諦)・經은 중도(中道)이니라.

삼제법성(三諦法性)의 묘리(妙理)를 삼제(三諦)의 관세음(觀世音)과 삼제(三諦)의 무진의(無盡意)에 대하여 설(說)하셨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말법(末法)의 무진의(無盡意)이니라.

결국 무(無)란 우리들의 사(死)의 상(相)이고, 진(盡)이란 우리들의 생(生)의 상(相)이며 의(意)란 우리들의 명근(命根)이니라.

 

그러므로 일체(一切)의 법문(法門)・경지명합(境智冥合)등(等)의 법문(法門)은 의(意)의 일자(一字)에 이를 섭입(攝入)하며, 이 의(意)란 중도법성(中道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따라서 의(意)의 오자(五字)이며 우리들의 태내(胎內)의 오위중(五位中)에는 제오번(第五番)의 모습이니라.

그 까닭은 제오번(第五番)의 모습은 오륜(五輪)이며 오륜(五輪) 즉(卽) 묘법(妙法) 등(等)의 오자(五字)이니라.

이 오자(五字) 또 의(意)의 자(字)요 불의(佛意)란 묘법(妙法)의 오자(五字)이며 이것은 바로 없느니라.

불(佛)의 의(意)란 법화경(法華經)이며 이것을 수량품(壽量品)에서는 시호양약(是好良藥)이라고 하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이 좋아하는 양약(良藥)이라고 설(說)해졌으며 삼라삼천(森羅三千)의 제법(諸法)은 의(意)의 일자(一字) 이상은 없느니라.

이 부처의 의(意)를 믿음을 신심(信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심(心)은 유분별(有分別)이며 다같이 묘법(妙法)의 전체(全體)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관음묘지사(觀音妙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법(妙法)의 범어(梵語)는 살달마(薩達摩)라고 하느니라.

살(薩)이란 묘(妙)라고 번역(飜譯)하며, 이 살(薩)자는 관음(觀音)의 종자(種子)이고 따라서 관음법화(觀音法華)・안목이명(眼目異名)이라고 석(釋)했느니라.

 

지금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는것은 관음(觀音)의 이익보다 천지운니(天地雲泥)와 같이 많으니라.

 

결국 관(觀)이란 원관(圓觀)이며 세(世)란 불가사의(不可思議)이고 음(音)이란 불기(佛機)이며 관(觀)이란 법계(法界)의 이명(異名)인데 이미 원관(圓觀)인 까닭이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관세음(觀世音)이므로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등(等)의 각계(各界)를 불가사의세계(不可思議世界)라고 지견(知見)하느니라.

음(音)이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므로 중생(衆生)으로서 실상(實相)의 부처가 아니라고 함이 없노라.

 

수량품(壽量品)의 시(時)는 십계본유(十界本有)라고 설(說)하여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니라.

관음(觀音) 이미 법화경(法華經)을 정수(頂受)하였으니 그러므로 이 경(經)을 수지(受持)한 행자(行者)는 관세음(觀世音)의 이익(利益)보다 뛰어났느니라. 운운.

 

제삼(第三) 염념물생의지사(念念勿生疑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염념(念念)이란 一의 염(念)은 육범(六凡)이고 一 의 념(念)은 사성(四聖)이며 육범사성(六凡四聖)의 이익(利益)을 베푸는것이니 의심(疑心)을 일으키지 말라. 운운.

 

또 가로되 염념(念念)이란 전념후념(前念後念)이니라.

또 가로되 묘법(妙法)을 염(念)함에 의심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운운.

또 삼세상주(三世常住)의 염념(念念)이니 이에 의(依)해서 위의 문(文)에 시고중생념(是故衆生念)이라고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는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 염념물생의(念念勿生疑)의 신심(信心)에 주(住)해야 하며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은 의심(疑心)이 있을수 없느니라. 운운.

 

제사(第四) 이구양원지사(二求兩願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구(二求)란 구남구녀(求男求女)이니라.

구녀(求女)란 세간(世間)의 과보(果報)・구남(求男)이란 출세(出世)의 과보(果報) 따라서 현세안온(現世安穩)은 구녀(求女)의 덕(德)이고 후생선처(後生善處)는 구남(求男)의 덕(德)이니라.

구녀(求女)는 용녀(龍女)의 성불(成佛)・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을 나타내고 구남(求男)은 제바(提婆)의 성불(成佛)・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를 나타냄이며 우리들의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나타내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행자(行者)는 구남구녀(求男求女)를 만족(滿足)하여 부모(父母)의 성불(成佛)이 결정(決定)되느니라. 운운.

 

제오(第五) 삼십삼신이익지사(三十三身利益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삼십(三十)이란 삼천(三千)의 법문(法門)이니라.

삼신(三身)이란 삼제(三諦)의 법문(法門)이니라 .운운

 

또 가로되 삼십삼신(三十三身)이란

십계(十界)에 각각(各各) 삼신(三身)을 구족(具足)하므로 십계(十界)에는 삼십(三十)・본(本)의 삼신(三身)을 더하면 삼십삼신(三十三身)이니라.

 

결국 삼(三)이란 삼업(三業)이며 십(十)이란 십계(十界)이고 삼(三)이란 삼독(三毒)이며 신(身)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신(身)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삼십삼신(三十三身)의 이익(利益)이니라. 운운.

 

다라니품(陀羅尼品)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다라니지사(陀羅尼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다라니(陀羅尼)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그 까닭은 다라니(陀羅尼)는 제불(諸佛)의 밀어(密語)이고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비밀(秘密)의 밀어(密語)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것은 다라니(陀羅尼)를 홍통(弘通)하는 것인데 사악지선(捨惡持善)인 까닭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안이만이지사(安爾曼爾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안이(安爾)란 지(止)이며 만이(曼爾)란 관(觀)이니라.

이 안이(安爾)・만이(曼爾)로부터 지관(止觀)의 이법(二法)을 석(釋)해냈느니라.

따라서 이 주(咒)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주(咒)이며 약왕보살(藥王菩薩)은 천태(天台)의 본지(本地)이니라.

안이(安爾)는 우리들의 심법(心法)이며 묘(妙)이고 만이(曼爾)는 우리들의 색법(色法)이며 법(法)이고, 색심묘법(色心妙法)이라고 주(咒)할 때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이니라. 운운.

 

제삼(第三) 귀자모신지사(鬼子母神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귀(鬼)란 부(父)이고 자(子)는 십나찰녀(十羅刹女)이며 모(母)란 가리제모(伽利諦母)이니라.

순서를 역차(逆次)로 하면 신(神)이란 구식(九識)이고 모(母)란 팔식(八識)으로 나가는 무명(無明)이며 자(子)란 칠식(七識) 육식(六識)이고 귀(鬼)란 오식(五識)이니라.

유전문(流轉門)의 때는 악귀(惡鬼)이고 환멸문(還滅門)의 때는 선귀(善鬼)이니라. 따라서 십계호구(十界互具) 백계천여(百界千如)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을 귀자모신(鬼子母神) 십나찰녀(十羅刹女)라고 하느니라.

 

삼보황신(三寶荒神)이란 십나찰녀(十羅刹女)를 말하는 것이니 소위(所謂) 기갈신(飢渴神)・탐욕신(貪欲神)・장애신(障碍神)이니라.

지금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삼독즉삼덕(三毒卽三德)으로 전(轉)하는 고(故)로 삼보황신(三寶荒神)이 아니며 황신(荒神)이란 법화불신(法華不信)의 사람이고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 앞에서는 수호신(守護神)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수지법화명자복불가량지사(受持法華名者福不可量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法華)의 명(名)이라 함은 제목(題目)이니라.

자(者)라고 함은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중(中)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이니라.

 

또 가로되 자(者)의 자(字)는 남녀(男女)중(中)에서는 특(特)히 여인(女人)을 칭찬(稱讚)하였으며 여인(女人)을 가리켜서 자(者)라고 하느니라.

십나찰녀(十羅刹女)는 특(特)히 여인(女人)을 본(本)으로 하였으니 예컨대 용녀(龍女)가 도탈고중생(度脫苦衆生)이라 하여 여인(女人)을 고(苦)의 중생(衆生)이라고 함과 같도다.

약왕품(藥王品)의 시경전자(是經典者)의 자(者)와 같은 것이니라. 운운.

 

제오(第五) 고제녀지사(皐諦女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고제녀(皐諦女)는 본지(本地)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니라.

산해(山海) 어떠한 곳에서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리라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구악일선(九惡一善)이라고 하여 고제녀(皐諦女)를 일선(一善)이라고 정(定)하였느니라.

십악(十惡)의 번뇌시(煩惱時)는 고제녀(皐諦女)는 투도(偸盜)에 해당(該當)되며 순서(順序)가 반대로 되느니라. 운운.

 

제육(第六) 오번신주지사(五番神呪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오번신주(五番神呪)란 우리들의 일신(一身)이니라.

妙란 십나찰녀(十羅刹女)이며 法이란 지국천왕(持國天王)이고 蓮이란 증장천왕(增長天王)이며 華란 광목천왕(廣目天王)이고 經이란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니라. 이 묘법(妙法)의 오자(五字)는 오번신주(五番神呪)이니라.

오번신주(五番神呪)는 우리들의 일신(一身)이니라.

 

십나찰녀(十羅刹女)의 주(呪)는 妙의 일자(一字)를 십구구(十九句)로 나란히 한것이며, 경문(經文)에는 영상아두상(寧上我頭上)의 문이 이것이니라.

 

지국천(持國天)은 法의 일자(一字)를 구구(九句)로 나란히 했으며

경문(經文)에는 사십이억(四十二億)이라고 했느니라.

사(四)란 생로병사(生老病死)・십(十)이란 십계(十界)・이(二)란 미오(迷悟)이니라.

지국(持國)은 의보(依報)의 명(名)이며 법(法)은 십계(十界)이니라.

 

증장천(增長天)은 蓮의 일자(一字)를 십삼구(十三句)로 나란히 했으며

경문(經文)에는 [역개수희(亦皆隨喜)]라고 했는데 수희(隨喜)란 말은 불계(佛界)의 입장(立場)이라.

 

광목천(廣目天)은 華의 일자(一字)를 사십삼구(四十三句)로 나란히 했으며 경문(經文)에는[어제중생다소요익(於諸衆生多所饒益)]이라고 했느니라.

 

비사문천(毘沙門天)은 經의 일자(一字)를 육구(六句)로 나란히 했으며 경문(經文)에는 [지시경자(持是經者)]등(等)의 문(文)이 이것이니라. 운운.

 

엄왕품(嚴王品) 삼개(三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묘장엄왕지사(妙莊嚴王之事)

 

문구(文句)의 十에 가로되,

묘장엄(妙莊嚴)이란 묘법공덕(妙法功德)을 가지고 제근(諸根)을 장엄(莊嚴)하게 하느니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妙)란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이니라.

제근(諸根)이란 육근(六根)이고 이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을 가지고 육근(六根)을 장엄(莊嚴)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결국 묘(妙)란 공제(空諦)이며 장엄(莊嚴)이란 가제(假諦)이고 왕(王)이란 중도(中道)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하나같이 모두 묘장엄왕(妙莊嚴王)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부목공지사(浮木孔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공(孔)이란 소공(小孔) 대공(大孔)의 두가지가 있느니라.

소공(小孔)이란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교(經敎)이고 대공(大孔)이란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것은 대공(大孔)이니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일안(一眼)의 거북이요. 전단(栴檀)의 부목(浮木)이란 법화경(法華經)이니라.

생사(生死)의 대해(大海)에 南無妙法蓮華經의 대공(大孔)이 있는 부목(浮木)은 법화경(法華經)에 있느니라. 운운.

 

제삼(第三) 당품사견즉정지사(當品邪見卽正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엄왕(嚴王)의 사견(邪見)은 이인(二人)의 교화(敎化)에 의(依)하여 공덕(功德)을 얻고 사(邪)를 고쳐 정(正)으로 하였느니라.

지(止)의 일(一)에

변사개중정(邊邪皆中正)이란 이것이니라.

지금 일본국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사견(邪見)으로서 엄왕(嚴王)이니라.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이인(二人)과 같으니 종말(終末)에는 필경주일승(畢竟住一乘)하여 사견즉정(邪見卽正)이 되니니라. 운운.

 

보현품(普賢品)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보현보살지사(普賢菩薩之事)

 

문구(文句)의 十에 가로되,

권발(勸發)이란 연법(戀法)이란 말이니라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권발(勸發)이란 권(勸)은 화타(化他)이고 발(發)은 자행(自行)이니라.

보(普)란 제법실상(諸法實相)・적문(迹門)의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이니라. 현(賢)이란 지혜(智慧)의 의(義)이며 본문(本門)의 수연진여(隨緣眞如)의 지(智)이니라.

그러므로 경말(經末)에 와서 본적이문(本迹二門)을 연법(戀法)하셨느니라.

결국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수호(守護)이니라. 운운.

 

제이(第二) 약법화경행염부제지사(若法華經行閻浮提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법화경(法華經)을 염부제(閻浮提)에 행(行)한다고 하는 것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위신(威神)의 힘에 의(依)하느니라.

이 경(經)을 광선유포(廣宣流布)하는 것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수호(守護)인것이니라.운운

 

제삼(第三) 팔만사천천녀지사(八萬四千天女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진로문(塵勞門)이니라.

이것은 즉(卽)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며 칠보(七寶)의 관(冠)이란 두상(頭上)의 칠혈(七穴)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가 이것이니라. 운운.

 

제사(第四) 시인명종위천불수수지사(是人命終爲千佛授手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불신(法華不信)의 사람은 명종시(命終時)에 지옥(地獄)에 타재(墮在)하리라.

 

경(經)에 가로되

[약인불신훼방차경(若人不信毁謗此經) 즉(卽) 단일체세간불종(斷一切世間佛種) 기인명종입아비옥(其人命終入阿鼻獄)]이라고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명종(命終)하여 성불(成佛)할것이니 시인명종위천불수수(是人命終爲千佛授手)의 문(文)이 이것이니라.

 

천불(千佛)이란 천여(千如)의 법문(法門)이고, 방법(謗法)의 사람은 옥졸(獄卒)이 내영(來迎)하며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천불(千佛)이 내영(來迎)하시리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천불(千佛)의 내영(來迎)이 의심(疑心)없는 자(者)이니라. 운운.

 

제오(第五) 염부제내(閻浮提內) 광령유포지사(廣令流布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내(內)라는 자(字)는 동서북(東西北)의 삼방(三方)을 제외(除外)한 문(文)이니라. 광령유포(廣令流布)란 법화경(法華經)은 남염부제(南閻浮提)에만 유포(流布)할 것이라는 경문(經文)이니라. 이 내(內)란 자(字)를 사색할지어다.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깊이 이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운운.

 

제육(第六) 차인불구당예도량지사(此人不久當詣道場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차인(此人)이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을 봉지(奉持)하는곳을 당예도량(當詣道場)이라고 하며 이 곳을 떠나서 저 곳으로 가는것이 아니니라.

도량(道場)이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주처(住處)를 말하느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의 주처(住處)는 산곡광야개적광토(山谷曠野皆寂光土)이며 이것을 도량(道場)이라고 하느니라.

차인무역고운직지(此因無易故云直至)란 석(釋)을 잘 생각하여라.

 

이 품(品)의 때 최상(最上) 제일(第一)의 상전(相傳)이 있다.

석존(釋尊)팔개년(八箇年)의 법화경(法華經)을 팔자(八字)에 담아서 말대(末代)의 중생(衆生)에게 물려주시었으니 팔자(八字)란 당기원영당여경불(當起遠迎當如敬佛)이란 문(文)이니라.

문(文)까지로써 경(經)은 끝나는데 당(當)의 자(字)는 미래(未來)이며 당기원영(當起遠迎)이란 반드시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부처와 같이 공경(恭敬)할지어다. 라고 하는 문(文)이니라.

법사품(法師品)에는 어차경권경시여불(於此經卷敬視如佛)이라고 설(說)했느니라.

 

팔개년(八箇年)의 설법(說法)의 시작은 南無妙法蓮華經 방편품(方便品)의 제불지혜(諸佛智慧)이고 끝은 당기원영(當起遠迎) 당여경불(當如敬佛)의 팔자(八字)이니라. 오직 이 팔자(八字)를 가지고 법화일부(法華一部)의 요로(要路)로 하였으니

그러므로 문구(文句)의 十에 가로되

[당기원영(當起遠迎) 당여경불(當如敬佛)부터는 그 신자(信者)의 공덕(功德)을 결(結)한다는것을 말함]이라고

법화일부(法華一部)는 신(信)의 일자(一字)를 가지고 본(本)으로 했느니라. 운운.

 

물어가로되,

지금의 법화경(法華經)에 있어서 서품(序品)에는 처음 여(如)자(字)를 놓고 끝에는 보현품(普賢品)의 거(去)의 자(字)를 놓았는데, 나습삼장의 심지(心地)는 어떠한 것을 나타내는 법문(法門)인가.

 

답하여 가로되,

지금의 경(經)의 법체(法體)는 실상(實相)과 구원(久遠)의 이의(二義)를 가지고 정체(正體)로 하였으며 처음의 여(如)의자(字)는 실상(實相)을 나타내고 거(去)란 자는 구원(久遠)을 나타내느니라.

그 까닭은

실상(實相)은 이(理)요 구원(久遠)은 사(事)이고

이(理)는 공(空)의 의(義)요. 공(空)은 여(如)의 의(義)이니 이에 의해 여(如)를 이공(理空)으로 상배(相配)하느니라.

 

석(釋)에 가로되

[여(如)는 불이(不異)에 이름하니 즉(卽) 공(空)의 의(義)이니라]고

구원(久遠)은 사(事)이니라.

그 까닭은 본문수량(本門壽量)의 심(心)은 사원(事圓)의 삼천(三千)을 가지고 정의(正意)로 함이니라.

거(去)는 구원(久遠)에 해당(該當)되며 거(去)는 개(開)의 의(義)이고 여(如)는 합(合)의 의(義)이며, 개(開)는 분별(分別)을 뜻하고 합(合)은 무분별(無分別)이란 뜻이니라.

 

이 개합(開合)을 생불(生佛)에 배당(配當)할 때 합(合)은 불계(佛界) 개(開)는 중생(衆生)이니라.

서품(序品)의 처음에 여(如)란 자(字)를 나타낸것은 생불불이(生佛不二)의 의(義)이니라.

적문(迹門)은 불이(不二)의 분(分)이니 불변진여(不變眞如)인 까닭이니라.

이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여(如)는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여(如)라고 읽느니라.

공가중(空假中)의 삼제(三諦)에는 여(如)는 공(空)・시(是)는 중(中)・아문(我聞)은 가제(假諦)이며 적문(迹門)은 공(空)을 표면(表面)으로 하는 고(故)로 불이(不二)의 위의 이이(而二)이니라.

따라서 이이(而二)의 의(義)를 나타낼 때 동문중(同聞衆)을 별도(別途)로 열거(列擧)하였느니라.

그리고 본문(本門)의 끝의 거(去)는 수연진여(隨緣眞如)로서 이이(而二)의 분(分)이며 따라서 거(去)의 자(字)를 놓았느니라.

작례이거(作禮而去)의 거(去)는 수연진여(隨緣眞如)라고 약속(約束)하느니라.

 

본문(本門)은 이이상(而二上)의 불이(不二)이며 이이불이(而二不二)・상동상별(常同常別)・고금법이(古今法爾)의 석(釋)을 생각할지니라.

이 거(去)란 자(字)는 저 오천기거(五千起去)의 거(去)라고 읽느니라.

그 까닭은 오천(五千)이란 오주(五住)의 번뇌(煩惱)라고 상전(相傳)하므로 오주(五住)의 번뇌(煩惱)가 기심(己心)의 부처를 예배(禮拜)하고 떠난다는 의(義)이니라.

 

여거(如去)의 이자(二字)는 생사(生死)의 이법(二法)이니

전교(傳敎) 가로되

[거(去)는 무래지여래무거지원거(無來之如來無去之圓去)]등(等)이라고. 운운.

여(如)란 자(字)는 일체법시심(一切法是心)의 의(義)이며 거(去) 의 자(字)는 심시일체법(心是一切法)의 의(義)이니라.

일체법시심(一切法是心)은 적문(迹門)의 불변진여(不變眞如)이며 심시일체법(心是一切法)은 본문(本門)의 수연진여(隨緣眞如)이니라.

그러므로 법계(法界)를 일심(一心)에 포함(包含)시키는 것은 여(如)의 의(義)이며 법계(法界)에 여는것은 거(去)의 의(義)이고 삼제(三諦) 삼관(三觀)의 구결상승(口訣相承)과 같은 뜻이니라. 운운.

 

일의(一義)에 가로되,

여(如)는 실(實)이고 거(去)는 상(相)이며 실(實)은 심왕(心王)이고 상(相)은 심수(心數)이니라.

또 제법(諸法)은 거(去)이고 실상(實相)은 여(如)이며 금경(今經) 일부(一部)의 시종(始終)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사자(四字)로 읽는다는것은 이것이니라.

 

석(釋)에 가로되

[금경(今經)은 무엇을가지고 체(體)로 하느뇨.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가지고 체로한다]라고

이제 한층 더 깊이 들어가서 日蓮의 수행(修行)에 배당(配當)하면 여(如)란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여(如)이니라.

그 까닭은 결요오자(結要五字)의 부촉(付屬)을 말씀하실 때

보탑품(寶塔品)에서 일이 비롯되어 성철하방(聲徹下方)하여 근령유재(近令有在)・원령유재(遠令有在)라고 해서 유재(有在)의 이자(二字)를 가지고 본화(本化)・적화(迹化)의 부촉(付屬)을 말하였으므로 따라서 본문(本門)의 밀서(密序)로 하느니라.

그리하여 이불병좌(二佛並座)・분신(分身)의 제불(諸佛)이 모여서 시호양약(是好良藥)의 妙法蓮華經를 설(說)해 나타내고 석존(釋尊)은 십종(十種)의 신력(神力)을 나타내어 사구(四句)로 묶어서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부촉(付屬)하시니

그 부촉(付屬)이란 묘법(妙法)의 수제(首題)인데 총별(總別)의 부촉(付屬) 탑중(塔中)・탑외(塔外) 이를 생각할지어다.

이로 인해서 용출수량(涌出壽量)에 일이 나타나고 신력(神力)・촉루(屬累)에 일이 끝나느니라.

 

이 묘법(妙法)등(等)의 오자(五字)를 말법(末法)・백법은몰(白法隱沒)의 시(時) 상행보살(上行菩薩) 출세(出世)하시어 오종(五種)의 수행(修行)중(中)에는 사종(四種)을 약(略)하고 오직 수지(受持)의 일행(一行)으로써 성불(成佛)하리라고 경문(經文)에 엄연(嚴然)히 있느니라.

 

그러므로 신력품(神力品)에 가로되

[어아멸도후(於我滅度後)・응수지사경(應受持斯經)・시인어불도(是人於佛道)・결정무유의(決定無有疑)]운운. 이 문(文) 명백(明白)하니라.

따라서 이 문(文)을 부처의 회향(廻向)의 문(文)이라고 알아야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여 받드는 심지(心地)는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여(如)이며 이 여(如)의 심지(心地)에 묘법(妙法)등(等)의 오자(五字)를 수지(受持)하여 받들고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곧 무명번뇌(無明煩惱)의 병(病)을 모조리 버리고 묘각극과(妙覺極果)의 성불(成佛)의 경애(境涯)를 빛내는 것을 나타내므로 거(去)자(字)로써 끝을 맺었느니라.

 

따라서 그위에 수지불어(受持佛語)라고 설(說)하였으니 번뇌악각(煩惱惡覺)의 마왕(魔王)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빛에 비추어져서 일심일념편어법계(一心一念遍於法界)라고 관달(觀達)되느니라.

그러므로 오히려 기심(己心)의 부처를 예배(禮拜)하는 고(故)로 작례이거(作禮而去)라고 설(說)하셨느니라.

피피삼천호편역이(彼彼三千互遍亦爾)의 석(釋) 이를 생각할지어다.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유수일인(唯受一人)의 상승(相承)이니라. 함부로 말하지 말지어다.

따라서 이 거(去)의 자(字)는 불거이거(不去而去)의 거(去)라고 상전(相傳)함을 가지고 지극(至極)으로 하느니라. 운운.

 

무량의경(無量義經) 육개(六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무량의경(無量義經) 덕행품(德行品) 제일지사(第一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무량의(無量義)의 삼자(三字)를 본적관심(本迹觀心)으로 배당(配當)하는일

처음의 무(無)의 자(字)는 적문(迹門)인데 그 까닭은 이원(二圓)을 면(面)으로 하고 불변진여(不變眞如)의 뜻을 말한다.

적문(迹門)은 무상(無常)의 섭속(攝屬)이며 상주(常住)를 밝히지 않았다.

단(但) [시법주법위세간상상주(是法住法位世間相常住)]라고 밝혔지만 이것은 이상주(理常住)로서 사상주(事常住)가 아니며 이상주(理常住)의 상(相)을 설(說)함이니라.

공(空)은 무(無)의 의(義)인데 단(但) 이 무(無)는 단무(斷無)의 무(無)가 아니고 상즉(상즉(相卽))의 위의 공(空)인것을 무(無)라고 하고 공(空)이라고 하느니라. 원(圓)의 위에서 이를 논(論)한것이니라.

 

본문(本門)의 사상주무작(事常住無作)의 삼신(三身)에 대(對)하여 적문(迹門)을 무상(無常)이라고 하느니라.

수호장(守護章)에는 유위(有爲)의 보불(보불(報佛))은 몽중(夢中)의 권과(權果)・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은 각전(覺前)의 실불(實佛)이라고. 운운.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무작(無作)의 삼신(三身) 각전(覺前)의 실불(實佛)이라고. 운운.

 

제이(第二) 양(量)의 자지사(字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양(量)의 자(字)를 본문(本門)에 배당(配當)하는 것은 양(量)이란 권섭(權攝)의 의(義)이니라.

본문(本門)의 심(心)은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을 말하는 것이며 이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란 부처의 입장(立場)에서 만이 아니고 삼라만법(森羅萬法)을 자수용신(自受用身)의 자체현조(自體顯照)라고 말하는 고(故)로 적문(迹門)에서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원(二圓)을 밝히는 것을 그대로 바꾸지 않고 각기당체(各其當體)가 무작삼신(無作三身)이라고 논(論)한것이 본문사원삼천(本門事圓三千)의 의(意)이니라.

이는 즉(卽) 앵매도리(櫻梅桃李)의 각기(各其)의 당체(當體)를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삼신(無作三身)이라고 개견(開見)하면 이것은 즉(卽) 양(量)의 의(義)이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자(者)는 무작삼신(無作三身)의 본주(本主)이니라. 운운.

 

제삼(第三) 의(義)의 자지사(字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의(義)란 관심(觀心)이니라.

그 까닭은 문(文)은 교상(敎相)이고 의(義)는 관심(觀心)이며 소설(所說)의 문자(文字)를 심지(心地)에 관(觀)함을 의(義)라고 하느니라.

그중에서도 무량의(無量義)는 일법(一法)으로부터 무량(無量)의 의(義)를 출생(出生)한다고 설(說)함이라.

 

능생(能生)은 의(義)・소행(所行)은 무량(無量)이며 이것은 무량의경(無量義經)의 능생(能生)・소생(所生)이니라.

법화경(法華經)과 무량의경(無量義經)을 상대(相對)하는 능소(能所)가 아니라 무상불상명위실상(無相不相名爲實相)의 이(理)로부터 만법(萬法)을 개출(開出)한다고 하며 원(源)이 실상(實相)인 고(故)로 관심(觀心)이라고 하느니라.

이와같이 무량의(無量義)의 삼자(三字)를 적문(迹門)・본문(本門)・관심(觀心)에 배당(配當)하는 것은 법화(法華)의 묘법(妙法)등(等)의 제호(題號)와 지금의 무량의(無量義) 제호(題號)와 일체불이(一切不二)의 서정(序正)이라고 상승(相承)의 심(心)을 상전(相傳)케 하기 위함이다.

 

제사(第四) 처(處)의 일자지사(一字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처(處)의 일자(一字)는 법화경(法華經)이니라.

삼장교(三藏敎)와 통교(通敎)는 무(無)의 자(字)에 포함(包含)되며

별교(別敎)는 양(量)의 자(字)에 포함(包含)되고

원교(圓敎)는 의(義)의 자(字)에 포함(包含)되느니라.

 

이 이전(爾前)의 사교(四敎)를 소생(所生)이라고 정(定)하고 서분(序分)인 이 경(經)을 능생(能生)이라고 정(定)했느니라.

능생(能生)을 잠시 처(處)라하며 소생(所生)을 무량의(無量義)라 정(定)했느니라. 따라서 권교(權敎)에 상대(相對)해서 무량의처(無量義處)를 논(論)하는것이니라. 운운.

 

제오(第五) 무량의처지사(無量義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 팔권(八卷)은 처(處)이고 무량의경(無量義經)은 무량의(無量義)이니라.

무량의(無量義)는 삼제(三諦)・삼관(三觀)・삼신(三身)・삼승(三乘)・삼업(三業)이며 법화경(法華經)에 어일불승(於一佛乘)・분별설삼(分別說三)이라고 설(說)하여 법화(法華)를 위한 서분(序分)으로 되는것이니라.

이것을 가지고 격별(隔別)의 삼제(三諦)는 무득도(無得道) 원융(圓融)의 삼제(三諦)는 득도(得道)라고 정(定)하는 고(故)로 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고 파절(破折)하셨느니라. 운운.

 

제육(第六) 무량의처지사(無量義處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무량의처(無量義處)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십계각각(十界各各) 무량의(無量義) 의처(處)이니라.

이 당체(當體) 그대로서 실상(實相)의 일리(一理) 이외(以外)에는 없다는 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설(說)했느니라.

그러기 위(爲)한 서(序)인 고(故)로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서(序)로 하여 무량의처(無量義處)라고 하느니라.

처(處)는 일념(一念)・무량의(無量義)는 삼천(三千)이니라.

 

우리들 중생(衆生)이 조석(朝夕)으로 말하는 언어(言語)도 의정이법(依正二法) 다 같이 무량의(無量義) 의처(處)이니라.

이것을 妙法蓮華經라고 하며 따라서 법화(法華)를 위(爲)한 서분(序分)이며 개경(開經)이니라. 운운.

 

보현경(普賢經) 오개(五箇)의 대사(大事)

 

제일(第一) 보현경지사(普賢經之事)

 

제호(題號)에 가로되,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佛說觀普賢菩薩行法經)이라고. 운운.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법화경(法華經)은 십계호구(十界互具)・삼천구족(三千具足)의 법체(法體)이므로 삼천십계(三千十界)가 남김없이 보현(普賢)이니라.

법계(法界)의 일법(一法)도 빠지는 의(義)가 없는 고(故)로 보현(普賢)이니라.

묘법(妙法)의 십계(十界)는 연화(蓮華)의 십계(十界)이므로 의정(依正)의 이법(二法) 모두가 법화경(法華經)이라고 매듭지어 포함(包含)시킨 경(經)이므로 이 보현경(普賢經)을 결경(結經)이라고 하느니라.

따라서 십계(十界)를 妙法蓮華經와 결합(結合)시켰느니라. 운운.

 

제이(第二) 부단번뇌(不斷煩惱) 불리오욕지사(不離五欲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문(文)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을 설(說)했느니라. 법화(法華)의 행자(行者)는 탐욕(貪欲)은 탐욕(貪欲) 그대로 진에(瞋恚)는 진에(瞋恚) 그대로 우치(愚癡)는 우치(愚癡) 그대로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행법(行法)이라고 알아야 할것이다. 운운.

 

제삼(第三) 욕념지사 염불 염법 염승 염계 염시 염천

(欲念之事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염불(念佛)이란 유아일인(唯我一人)의 도사(道師)이니라.

염법(念法)이란 멸후(滅後)는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고

염승(念僧)이란 말법(末法)에는 범부승(凡夫僧)이며

염계(念戒)란 시명지계(是名持戒)이고

염시(念施)란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제목(題目)을 수여(授與)함이니라.

염천(念天)이란 제천주야상위법고이위호지(諸天晝夜常爲法故而衛護之)의 의(意)이니라.

말법당금(末法當今)의 행자(行者)의 일이니 이것을 생각할지니라. 운운.

 

제사(第四)

일체업장해 개종망상생 약욕참회자 단좌사실상 중죄여상로 혜일능소제지사

(一切業障海 皆從妄想生 若欲懺悔者 端坐思實相 衆罪如霜露 慧日能消除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중죄(衆罪)란 육근(六根)에 있어서 업장(業障)이 내려옴이 상로(霜露)와 같도다. 그러나 혜일(慧日)을 가지고 능(能)히 소제(消除)한다고 했느니라.

 

혜일(慧日)이란 말법당금(末法當今) 日蓮 소홍(所弘)의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혜일(慧日)이란 부처의 입장(立場)과 법(法)의 입장(立場)에서이니라.

세존(世尊)을 혜일대성존(慧日大聖尊)이라 말하고 법화경(法華經)을 우여일천자능제제암(又如日天子能除諸闇)이라고 설(說)하였도다.

말법(末法)의 도사(道師)를 여일월광명(如日月光明)등(等)이라고 설(說)했느니라.

 

제오(第五) 정법치국불사왕인민지사(正法治國不邪枉人民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말법(末法)의 정법(正法)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오자(五字)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속이지 않는 비법(秘法)이니라.

정법(正法)을 천하일동(天下一同)으로 신앙(信仰)한다면 이 나라는 안온(安穩)할 것이로다.

 

그러므로 현의(玄義)에 가로되

[만약(萬若) 이 법(法)에 의(依)하면 즉(卽) 천하태평(天下泰平)]이라고.

이 법(法)이란 법화경(法華經)이니 법화경(法華經)을 신앙(信仰)하면 천하안전(天下安全)하다는 것은 의심(疑心)할 바 없느니라.

 

이십팔품(二十八品)에 일문(一文)씩의 대사(大事)

 

서품(序品)

 

十界也 (십 계 야) 시 각(始覺)

무 루 실 상(於無漏實相) 심(心) 이(已) 득(得) 통달(通達)

묘 법(妙法)불 변(不變) 수연(隨緣)

이 문(文)은 나의 마음이 본래(本來)부터 각(覺)이니라고 처음으로 깨달음을 성불(成佛)이라고 한다.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비로소 깨닫는 제목(題目)이니라.

 

방편품(方便品)

 

진 제(眞諦) 속 제(俗諦)

시법(是法) (住) 법위(法位)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

적 문(迹門) 본 문(本門)

 

이 문(文)은 중생의 마음은 본래(本來) 부처라고 설(說)함을 상주(常住)라고 하며 만법(萬法)이 원래부터 각(覺)의 체(體)이니라.

 

비유품(譬喩品)

 

수지인(受持人) 대백우거(大白牛車) 범 부 즉 극(凡夫卽極)

승 차(乘此) 보 승(寶乘) 도 량(直至道場)

제 목(題目) (極果)극 과 처야(處也)

 

이 문(文)은 자신(自身)의 불승(佛乘)을 깨닫고 자신(自身)의 궁전(宮殿)에 들어감이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자신(自身)의 궁전(宮殿)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신해품(信解品)

 

일념삼천(一念三千)

무 상(無 上) 보주(寶珠) 불구자득(不求自得) 했느니라.

제 목(題 目) .

 

이 문(文)은 무시색심본시이성묘경묘지(無始色心本是理性妙境妙智)이므로 기심(己心) 이외에 실상(實相)을 구(求)하지 말지어다.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불구자득(不求自得)이니라.

 

약초유품(藥草喩品)

 

(三世)삼세 제목(題目)일체 중생(一切衆生)

우제불자(又諸佛者)전심불도(專心佛道)상행(常行) 자비(慈悲)자지(自知)작불(作佛)

 

이 문(文)은 당래(當來)의 성불(成佛)이 현연(顯然)하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수기품(授記品)

 

십계실상불 삼 세 상 주 번뇌즉 보리생사즉열반

(十界實相佛)(三 世 常 住) (煩惱卽 菩提生死卽涅槃)

어제불소상수범행(於諸佛所常修梵行)어 무량겁(於無量劫)봉지불법(奉持佛法)

일 체 업 장(一切業障)

 

이 문(文)에 상(常)이라 하고 무량겁(無量劫)이라 함은 즉(卽) 본유소구(本有所具)의 묘법(妙法)이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화성유품(化城喩品)

 

삼 천 진 점(三千塵點)

관피구원(觀彼久遠)유여금일(猶如今日)

재세(在世)

 

이 문(文)은 원초(元初)의 일념(一念) 일법계(一法界) 이외(以外)에 결코 육도사성(六道四聖)이란 있을수 없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삼세일념(三世一念)이며 금일(今日)이란 말법(末法)을 가리켜서 금일(今日)이라고 하느니라.

 

오백품(五百品)

 

본국체중생 제존 심법색법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

(日本國一切衆生 題目御本尊 心法色法 煩惱卽菩提生死卽涅槃)

빈 인 견 차 주 기 심대환희 신심

(貧 人 見 此 珠 基 心大歡喜 信心)

 

이 문(文)은 처음으로 나의 마음이 본래(本來) 부처라고 아는 것을 즉(卽) 대환희(大歡喜)라고 이름한다.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환희(歡喜)중(中)의 대환희(大歡喜)이니라.

 

인기품(人記品)

 

일부(一部) 제목(題目)

안주(安住) 어불도(於佛道) 이구무상도(以求無上道)

광약(廣略) (要)

 

이 문(文)은 본래상즉(本來相卽)의 삼신(三身)의 묘리(妙理)를 처음으로 각지(覺知)하는 것을 구무상도(求無上道)라고 하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법사품(法師品)

 

적광(寂光)

당지여시인(當知如是人) 자(自在) 소욕생(所欲生)

 

이 문(文)은 우리들의 일념(一念)의 망심(妄心)외(外)에 불심(佛心)은 없다.

구계(九界)의 생사(生死)가 진여(眞如)이므로 즉(卽) 자재(自在)이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 라고 봉창(奉唱)함은 즉(卽) 자재(自在)이니라.

 

보탑품(寶塔品)

 

지야(受持也)

즉위질득(卽爲疾得) 무상불도(無上佛道)

범부즉극야(凡夫卽極也)

 

이 문(文)은 지자즉(持者卽) 원돈(圓頓)의 묘계(妙戒)이므로 등묘이각(等妙二覺) 일념개오(一念開悟)이기에 질득(疾得)이라고 하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은 질득(疾得)이니라.

 

제바품(提婆品)

 

홀연지간(忽然之間) 변성남자(變成男子)

 

이 문(文)의 뜻은 삼혹(三惑)의 전체(全體)가 삼제(三諦)라고 깨달음을 변(變)이라고 설(說)하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라고 奉唱함은 삼혹즉(三惑卽) 삼덕(三德)이니라.

 

권지품(勸持品)

 

색법(色法) 심(心法)

아불애 신명(我不愛身命)석무상도(但惜無上道)

 

이 문(文)은 색심환화사대오음(色心幻化四大五陰) 원래(元來) 악습(惡習)이라 그런데 본각진여(本覺眞如)는 상주(常住)이고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안락행품(安樂行品)

 

일체제법 공 무소유 무 유 상주 역무 기멸

(一切諸法 空 無所有 無 有 常住 亦無 起滅)

 

이 문(文)은 원래(元來) 상주(常住)의 묘법(妙法)인 고(故)로 육도(六道)의 생멸(生滅)은 본래(本來) 불생(不生)이라고 설(說)함이라.

고(故)로 기멸(起滅)이 없도다.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본래(本來) 무기멸(無起滅)이니라. 운운.

 

용출품(涌出品)

 

주야상정진(晝夜常情進) 위구(爲求) 불도고(佛道故)

 

이 문(文)은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

 

수량품(壽量品)

 

여래여실지견(如來如實知見) 삼계지상(三界之相) 무유생사(無有生死)

 

이 문(文)은 만법(萬法)을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라고 보는 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하여 무작(無作)의 각체(覺體)이므로 무엇에 의(依)하여 생사(生死)가 있다고 할것이뇨.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지차일심복(持此一心福) 원구무상도(願求無上道)

 

이 문(文)은 일체(一切)의 만행만선(萬行萬善)은 단일심본각(但一心本覺)의 삼신(三身)을 현현(顯現)하기 위함이라.

선악일여(善惡一如) 이므로 일심복(一心福)이라고 하여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일심복(一心福)이니라.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언차경심묘(言此經深妙) 천만겁난우(千萬劫難遇)

 

이 문(文)은 일체즉묘법(一切卽妙法)이므로 일심(一心)의 원저(源底)를 나타내는 일이 심묘무외(心妙無外)이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이니라.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靜) (散)

입선(入禪) 선자(出禪者) 문향실능지(聞香悉能知)

불변사(不變死)수연생(隨緣生) 십계(十界)

 

이 문(文)은 일심(一心) 안정시(安定時)는 입선(入禪)・일심(一心) 산란시(散亂時)는 출선(出禪) 정산즉본각(靜散卽本覺)이라고 아는것을 실지(悉知)라고 하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입선(入禪) 출선(出禪)이니라. 운운.

 

불경품(不輕品)

 

응당일심광설(應當一心廣說) 차경(此經) 세세치불질성불도(世世値佛疾成佛道)

 

이 문(文)은 법계(法界)가 모두 본래(本來) 삼제일심(三諦一心)에 구족(具足)하는 것을 나타내면 기심(己心)의 염념(念念)에 부처를 만나는 것을 즉(卽) 세세치불(世世値佛)이라고 하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가 이것이니라.

 

신력품(神力品)

 

단파원품무명(斷破元品無明)

시인어불도(是人於佛道) 결정 무유의(決定無有疑)

십여시(十如是)

 

이 문(文)은 십계각각(十界各各) 본유본각(本有本覺)의 십여시(十如是)이므로 지옥(地獄)도 불계(佛界)도 일여(一如)이므로 성불결정(成佛決定)하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의 수지(受持)이니라. 운운.

 

촉루품(囑累品)

 

신여래지혜자(信如來知慧者) 당연설차법화경(當演說此法華經)

 

이 문(文)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오달(悟達)과 같으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의 깨달음과 부동(不同)이 있을수 없다. 고(故)로 여래(如來)의 지혜(智慧)를 믿음은 즉(卽) 묘법(妙法)이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의 지혜(智慧)이니라. 운운.

 

약왕품(藥王品)

 

시진정진(是眞精進) 시명진법(是名眞法) 공양여래(供養如來)

 

이 문(文)은 색향중도(色鄕中道)의 관념(觀念) 해태(懈怠) 없음을 즉(卽) 진법공양여래(眞法供養如來)라고 이름하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유유일승(唯有一乘)인 고(故)로 진법(眞法)이고 세간(世間)도 출세(出世)도 순일실상(純一實相)이니라. 운운.

 

묘음품(妙音品)

 

구원(久遠) 적광토(寂光土)

신부(信不) 동요(動搖) 면입삼매(面入三昧)

 

이 문(文)은 즉(卽) 구원(久遠)을 깨달음을 신부동요(信不動搖)라고 하느니라.

혹장(惑障)을 단진(斷盡)하지 않고 적광(寂光)에 들어가는것을 삼매(三昧)라고 하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의 삼매(三昧)이니라. 운운.

 

보문품(普門品)

 

복지(福智)

자안시중생(慈眼視衆生) 복취해무량(福聚海無量)

 

이 문(文)은 법계(法界)의 의정(依正)이 묘법(妙法)인 고(故)로 평등일자(平等一子)의 자비(慈悲)이니라.

의정(依正) 복지(福智)가 공(共)히 무량(無量)이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복지(福智)의 이법(二法)이니라. 운운.

 

다라니품(陀羅尼品)

 

미래현(未來顯)

수행시경자(修行是經者) 영득안온(令得安穩)

현재현(現在顯)

 

이 문(文)은 오백묘행(五百妙行)을 수행(修行)하면 오달(悟達)의 도(道)에 들어가 험로(險路)에 들어가지 않으니 이것을 안온(安穩)이라고 하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 卽 안온(安穩)이니라. 운운.

 

엄왕품(嚴王品)

 

순복심후(宿福深厚) 생치불법(生値佛法)

 

이 문(文)은 일구(一句) 묘법(妙法)에 결연(結緣)하면 억겁(億劫)에도 소실(消失)되지 않고 대승무가(大乘無價)의 보주(寶珠)를 연마(硏磨)하여 나타냄을 생치불법이라고 하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의 불법(佛法)이니라.

 

권발품(勸發品)

 

시인명종(是人命終)위천불수수(爲千佛授手) 영불공포(令不恐怖)불타악취(不墮惡趣)

 

이 문(文)은 묘법(妙法)을 개오(開悟)하면 분단(分斷)의 신(身) 즉(卽) 상적광(常寂光)으로 나타남을 명종(命終)이라고 하며 천불(千佛)이란 천여(千如)・어수(御手)란 천여구족(千如具足)이니라.

고(故)로 불타악취(不墮惡趣)이고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의 어수(御手)이니라.

 

이상품품별전필(已上品品別傳畢)

 

 

이십팔품(二十八品) 悉南無妙法蓮華經之事

 

소(疏)의 十에 가로되,

통틀어 일경(一經)을 결(結)함에 오직 네가지 뿐이며 그 추병(樞柄)을 촬(撮)하여 이를 수여(授與)한다고.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경(一經)이란 본적이십팔품(本迹二十八品)이고 유사(唯四)란 명용체종(名用體宗)의 사(四)이며 추병(樞柄)이란 오직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이고 수여(授與)란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수여(授與)하는 것이며, 이것이란 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이 석(釋) 분명(分明)하니라.

 

지금 日蓮 등(等)의 홍통(弘通)하는 南無妙法蓮華經는 체(體)이고 심(心)이니라.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용(用)이고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조행(助行)이며 제목(題目)은 정행(正行)이니라. 정행(正行)에다 조행(助行)을 포함(包含)시켜야 하느니라. 운운.

 

一.무량의경지사(無量義經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법(妙法)의 서분(序分)이 무량의경(無量義經)이므로 십계(十界)가 모두 妙法蓮華經의 서분(序分)이니라.

 

一.서품(序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사자(四字)를 깊이 터득한다면 일경(一經) 무량(無量)의 의(義)는 알기 쉬운것이니라.

 

십계호구(十界互具) 삼천구족(三千具足)의 묘(妙)라고 듣는 것이며, 이 소문(所聞)은 妙法蓮華라고 듣는 고(故)로 묘법(妙法)의 법계호구(法界互具)하여 삼천청정(三千淸淨)이니라.

이 사자(四字)는 일경(一經)의 시종(始終)에 걸치며 이십팔품(二十八品)의 문문구구(文文句句)의 의리(義理)가 나의 신상(身上)의 법문(法門)이라고 들음을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하느니라.

그 듣는 것이 南無妙法蓮華經이므로 개성불도(皆成佛道)라고 하느니라.

이 개성(皆成)의 이자(二字)는 십계삼천(十界三千)에 걸쳐야 하는데, 묘법(妙法)의 개성(皆成)이기 때문이니라.

 

또 부처란 나의 일심(一心)이며 이것이 또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심심(心心)이니라.

도(道)란 능통(能通)에 이름하는 고(故)로 십계(十界)의 심심(心心)에 통하는 것이며 이 때에 개성불도(皆成佛道)로 나타나도다.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法)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一.방편품(方便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에는 십여시(十如是)를 설(說)함이라.

이 십여시(十如是)란 십계(十界)이며 이 방편(方便)이란 십계삼천(十界三千)이니라.

이미 妙法蓮華經를 봉수(奉受)하는 고(故)로 시방불토중(十方佛土中)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이며 묘법(妙法)의 방편(方便) 연화(蓮華)의 방편(方便)이므로 비묘(秘妙)이고 청정(淸淨)이니라.

 

묘법(妙法)의 오자(五字)는 구식(九識)・방편(方便)은 팔식(八識)이하(已下)이고 구식(九識)은 오(悟)이며 팔식(八識)이하는 미(迷)이니라.

 

妙法蓮華經 방편품(方便品)이라고 부제(咐題)하였으므로 미오불이(迷悟不二)이고 삼라삼천(森羅三千)의 제법(諸法)이 이 妙法蓮華經 방편(方便)이 아니라고 함이 없으며 품(品)은 의류동(義類同)이니라.

의(義)란 삼천(三千)이며 유(類)란 호구(互具)이고 동(同)이란 일념(一念)이니라. 이 일념삼천(一念三千)을 가리켜 품(品)이라고 하느니라.

이 일념삼천(一念三千)을 삼불(三佛)이 합의(合意)하였으니 따라서 품품(品品)에다 부제(咐題)했느니라.

南無妙法蓮華經의 신(信)의 일념(一念)으로부터 삼천구족(三千具足)이라고 들렸느니라. 운운.

 

一.비유품(譬喩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의 대백우거(大白牛車)란[무명치혹본시법성(無明癡惑本是法性)]의 명암일체(明闇一體)의 의(義)이니라.

즉(卽) 삼천구족(三千具足)의 일승(一乘)을 내 건 수레이므로 명암일체(明闇一體)로서 삼천구족(三千具足)의 의(義)를 나타내느니라.

법계(法界)의 편만(徧滿)하였어도 일법(一法)임을 일승(一乘)이라고 하느니라.

이 일승(一乘)이란 제승구족(諸乘具足)의 일승(一乘)이며 제법구족(諸法具足)의 일법(一法)인 고(故)로 一의 백우(白牛)이니라.

 

또 백우(白牛)는 일이라 할지라도 무량(無量)의 백우(白牛)이니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체(體)가 대백우거(大白牛車)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묘법(妙法)의 대백우거(大白牛車)에 묘법(妙法)의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중생(衆生)이 탓느니라.

연화(蓮華)의 대백우거(大白牛車)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중생(衆生)도 연화(蓮華)로서 청정(淸淨)하도다. 南無妙法蓮華經의 법체(法體)는 이와 같으니라.

 

一.신해품(信解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신해(信解)는 중근(中根)의 사대성문(四大聲聞)의 영해(領海)에 한(限)하지 않고 묘법(妙法)의 신해(信解)인 고(故)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신해(信解)이니라. 연화(蓮華)의 신해(信解)인 고(故)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청정(淸淨)한 신해(信解)이며 이 신해(信解)의 체(體)란 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운운.

 

一.약초유품(藥草喩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법(妙法)의 약초(藥草)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독초(毒草)・연화(蓮華)의 약초(藥草)이므로 본래(本來) 청정(淸淨)이니라.

청정(淸淨)하므로 부처이고, 이 부처의 설법(說法)이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그러므로 이 품(品)에는 종상체성(種相體性)의 종(種)의 자(字)에 종류종(種類種)・ 상대종(相對種)의 두가지의 개회(開會)가 있는데 상대종(相對種)이란 삼독즉삼덕(三毒卽三德)이며 종류종(種類種)이란 처음의 종(種)의 자(字)는 십계삼천(十界三千)이니라.

유(類)란 호구(互具)이고 하(下)의 종(種)의 자는 南無妙法蓮華經이며 種類種이니라.

十界三千의 초목각각(草木各各)이지만 오직 南無妙法蓮華經의 일종(一種)이니라. 독초(毒草)의 독(毒)도 없고 청정(淸淨)한 초목(草木)으로서 약초(藥草)이니라. 운운.

 

一.수기품(授記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십계각각(十界各各)의 당체(當體)의 언어(言語)는 妙法蓮華의 수기(授記)이므로 청정(淸淨)한 수기(授記)이니라.

청정(淸淨)한 수기(授記)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부처로다.

이로써 부처는 南無妙法蓮華經라고 수기(授記)하느니라. 운운.

 

一.화성유품(化城喩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법(妙法)의 화성(化城)이므로 십계동시(十界同時)의 무상(無常)이니라.

연화(蓮華)의 화성(化城)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개락(開落)이니라.

상주(常住)・무상(無常) 다같이 妙法蓮華經의 전체(全體)이니라.

화성보처(化城寶處)는 생사본유(生死本有)이며 생사본유(生死本有)의 체(體)란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석(釋)에 가로되

[기(起)는 이는 법성(法性)의 기(起)요. 멸(滅)은 이는 법성(法性)의 멸(滅)]이라고.

 

一.오백품(五百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에는 오백제자수기작불(五百弟子授記作佛)한다고 현문(現文)에 쓰여있느니라.

그러나 묘법(妙法)의 오백(五百)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 모두가 오백(五百)의 제자(弟子)이니라.

연화(蓮華)의 제자(弟子)이므로 또한 청정(淸淨)이니라.

결국 십계삼천(十界三千)이 南無妙法蓮華經의 제자(弟子)가 아님이 없으며, 이 경(經)의 수기(授記)가 바로 이것이니라.운운.

 

一.인기품(人記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에는 학(學)・무학(無學)의 성자(聖者)가 와서 성불(成佛)하느니라.

이미 묘법(妙法)을 봉수(奉受)한 학(學)・무학(無學)이므로 십계호구(十界互具)・삼천구족(三千具足)의 학(學)・무학(無學)이니라.

묘법(妙法)의 학(學)・무학(無學)이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십계(十界)에 번뇌(煩惱)를 아직 다 없애지 않았으며 연화(蓮華)의 학(學)・무학(無學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 청정(淸淨)의 개락(開落)이니라.

이 학(學)・무학(無學)은 무엇이뇨.

학(學)이란 법(法)이고 무학(無學)이란 묘(妙)이며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一.법사품(法師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법(妙法)의 법사(法師)이므로 십계(十界) 모두 묘법(妙法)을 수지(受持)한 일구일게(一句一偈)의 법사로다.

연화(蓮華)의 법사(法師)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이 청정(淸淨)한 법사(法師)니라.

 

십계중생(十界衆生)의 색법(色法)은 능지(能持)의 사람이며

십계(十界)의 심성(心性)은 소지(所持)한 법(法)이니라.

따라서 색심(色心)이 다같이 법사(法師)로서 자행화타(自行化他)를 나타냄이니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의 법사(法師)이기 때문이니라. 운운.

 

一.보탑품(寶塔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보탑(寶塔)은 보정세계(寶淨世界)로부터 용현(涌現)하느니라.

그 보정세계(寶淨世界)의 부처란 사상(事相)의 의(義)는 차치(且置)하고,

중도관심(中道觀心)의 때는 모(母)의 태내(胎內)가 이것이로다.

그러므로 부모(父母)는 보탑조작(寶塔造作)의 목수(木手)이니라.

 

보탑(寶塔)이란 우리들의 오륜(五輪)・오대(五大)이니라.

그런데 탁태(托胎)의 태(胎)를 보정세계(寶淨世界)라고 하는 고(故)로 출태(出太)하는 곳을 용현(涌現)이라고 하느니라.

 

대체로 중생(衆生)의 용현(涌現)은 지륜(地輪)으로부터 출현(出現)하는 고(故)로 종지용출(從地湧出)이라고 하느니라.

묘법(妙法)의 보정세계(寶淨世界)이므로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태내(胎內)는 모두 이는 보정세계(寶淨世界)이니라.

연화(蓮華)의 보정(寶淨)이므로 십계(十界)의 태내(胎內)는 남김없이 무구청정(無垢淸淨)한 세계(世界)이니라.

묘법(妙法)의 지륜(地輪)이므로 십계(十界)에 걸치는 것이며 연화(蓮華)의 지(地)이므로 청정지(淸淨地)이니라.

 

묘법(妙法)의 보정(寶淨)이므로 우리들의 신체(身體)는 청정(淸淨)한 보탑(寶塔)이며 妙法蓮華의 용출(湧出)이므로 십계(十界)의 출태(出胎)의 산문(産門)은 본래(本來) 청정(淸淨)한 보탑(寶塔)이니라.

 

법계(法界)의 탑파(塔婆)로서 십법계즉탑파(十法界卽塔婆)이며 묘법(妙法)의 이불(二佛)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모두 경지(境智)의 이불(二佛)이니라.

묘법(妙法)의 일좌(一座)에는 삼천(三千)의 심성(心性) 모두가 이존(二尊)의 소좌(所座)이며 妙法蓮華의 이불(二佛) 일좌(一座)이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이고 청정(淸淨)이니라.

 

妙法蓮華의 견(見)이므로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삼천(三千)의 군류(群類)・모두가 자신의 탑파(塔婆)를 보느니라.

십계(十界)가 부동(不同)이라해도 나의 몸을 봄은 삼천구족(三千具足)의 탑(塔)을 보는 것이고 나의 마음을 보는것은 삼천구족(三千具足)의 부처를 보는 것이니라.

 

분신(分身)이란 부모(父母)로부터 상속(相續)하는 분신(分身)의 의(意)이니라.

미혹(迷惑)할때는 유전(流轉)의 분신(分身)이고 깨달을 때는 과중(果中)의 분신(分身)이로다.

그런데 분신(分身)이 일어나는 곳을 배우자면 지옥(地獄)을 배워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보탑(寶塔)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 이외(以外)에는 없느니라.

妙法蓮華經을 보면 보탑즉일체중생(寶塔卽一切衆生)・일체중생즉(一切衆生卽) 南無妙法蓮華經의 全體이니라. 운운.

 

一.제바품(提婆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에는 석존(釋尊)의 본사(本師)・제바달다(提婆達多)의 성불(成佛)과 문수사리(文殊師利)가 교화(敎化)한 용녀성불(龍女成佛)을 설(說)하느니라.

이는 또한 妙法蓮華經의 제바(提婆)・용녀(龍女)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 모두가 조달(調達)・용녀(龍女)이니라.

 

법계(法界)의 중생(衆生)의 역(逆)의 쪽은 조달(調達)이며 법계(法界)의 탐욕(貪欲)・진에(瞋恚)・우치(愚癡)의 쪽은 모두가 용녀(龍女)이니라. 조달(調達은 수덕(修德)의 역죄(逆罪)・일체중생(一切衆生)은 성덕(性德)의 역죄(逆罪)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성덕(性德)의 천왕여래(天王如來)이고 조달(調達)은 수덕(修德)의 천왕여래(天王如來)이니라.

용녀(龍女)는 수덕(修德)의 용녀(龍女)・일체중생(一切衆生)은 성덕(性德)의 용녀(龍女)이니라.

 

결국(結局) 석존(釋尊)도 문수(文殊)도 제바(提婆)도 용녀(龍女)도 하나의 종자(種子)인 妙法蓮華經의 공능(功能)이므로 본래(本來) 성불(成佛)이니라.

따라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때는 십계동시(十界同時)에 성불(成佛)하느니라. 이것을 妙法蓮華經의 제바달다(提婆達多)라고 하느니라.

십계삼천(十界三千) 용녀(龍女)이므로 무구세계(無垢世界)가 아님이 없도다.

용녀(龍女)의 일신(一身)도 본래(本來) 성불(成佛)로서 南無妙法蓮華經의 당체(當體)이니라. 운운.

 

一.권지품(勸持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의 이모(姨母)・야수(耶輸)의 기별(記別)은 십계동시(十界同時)의 수기(授記)이니라.

묘법(妙法)의 이모(姨母)・묘법(妙法)의 야수(耶輸)이기 때문이니라.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심성(心性)은 소지(所持)한 경(經)의 체(體)이며 이는 즉(卽) 권지(勸持)의 유통(流通)이니라.

 

심성(心性)에 소지(所持)한 경(經)을 권지(勸持)하여 자행화타(自行化他)로 향해가는 것이니라.

이모(姨母)・야수(耶輸)는 여인(女人)의 성불(成佛)이고 이만(二萬)의 대사(大士)는 남자(男子)의 유통(流通)이며

이 문(文)은 음양일체(陰陽一體)로서 南無妙法蓮華經의 당체(當體)이니라. 운운.

 

一.안락행품(安樂行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법(妙法)의 안락행(安樂行)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 남김없이 안락행(安樂行)이니라.

자수용(自受用)의 당체(當體)이며 신구의(身口意) 서원(誓願) 모두가 안락행(安樂行)이니라.

연화(蓮華)의 안락행(安樂行)이므로 삼천십계(三千十界)가 청정(淸淨)한 수행(修行)이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이므로 안락행(安樂行) 아님이 없도다.

 

본문(本門)의 의(意)는 십계(十界)의 색심(色心)이 본래본유(本來本有)로서 진실(眞實)한 안락행(安樂行)이니라.

안락행(安樂行)의 체(體)란 소위(所謂) 상행소전(上行所傳)의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운운.

영산정토(靈山淨土)에 안락(安樂)하게 행예(行詣)해야 할것이니라. 운운.

 

一.용출품(涌出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은 적문유통(迹門流通)의 후(後)・본문개현(本門開顯)의 서분(序分)이니라.

 

고(故)로 우선 본지(本地)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을 현현(顯現)하기 위해 석존(釋尊)・소구(所具)의 보살(菩薩)인 고(故)로 본지본화(本地本化)의 제자(弟子)를 부르느니라.

이는 또한 묘법(妙法)의 종지(從地)이므로 십계(十界)의 대지(大地)이며 묘법(妙法)의 용출(湧出)이므로 십계(十界) 모두 용출(湧出)이니라.

 

십계(十界) 묘법(妙法)의 보살(菩薩)이므로 개요익유정계(皆饒益有情界)의 자비심중(慈悲心重)한 대사(大士)이고 연화(蓮華)의 대지(大地)이므로 십계(十界)의 대지(大地)도 십계용출(十界湧出)의 보살(菩薩)도 본래(本來) 청정(淸淨)이니라.

 

결국(結局) 오도(悟道)의 입장(立場)에서

종지(從地)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대종(大種)의 소생(所生)이고

용출(湧出)이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출태(出胎)의 상(相)이며

보살(菩薩)이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본유(本有)의 자비(慈悲)이니라.

이 보살(菩薩)에게 본법(本法)인 妙法蓮華經 부촉(付屬)하기 위해서 종지용출(從地湧出)함이니라.

 

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종지용출(從地湧出)의 보살(菩薩)이니, 이밖에서 구(求)하는 일 없을지어다. 운운.

 

一.수량품(壽量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수량품(壽量品)이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의 본법(本法)이니라.

이 품(品)을 본문(本門)이라고 하는 것은 본(本)에 들어가는 문(文)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범부(凡夫)의 혈육(血肉)의 색심(色心)을 본유(本有)라고 말하는 고(故)로 본문(本門)이라고 하느니라.

이 중(重)에 이르지 않음을 시각(始覺)이라 하며 적문(迹門)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깨달음을 본각(本覺)이라고 하며 본문(本門)이라고 하느니라.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본유(本有)의 재처(在處)이니 이를 가지고 경(經)에 아실성불이래(我實成佛已來)라고 하느니라. 운운.

 

一.분별품(分別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은 상(上)의 품(品)의 때 본지무작(本地無作)의 삼신여래(三身如來)의 수(壽)를 듣는 고(故)로 이 품(品)에서는 위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을 신해(信解)하느니라.

그 공덕(功德)을 분별(分別)함이며 공덕(功德)이란 십계각각(十界各各)의 당체(當體)의 삼독(三毒)의 번뇌(煩惱)를 이 품(品)에서 그대로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이라고 분별(分別)하느니라.

그 공덕(功德)이란 본유(本有)의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운운.

 

一.수희품(隨喜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을 수희(隨喜)하는 것을 설(說)하느니라.

오십전전(五十展轉)이란 오(五)는 묘법(妙法)의 오자(五字)이며 십(十)이란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이고 전전(展轉)이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교상(敎相)의 때는 제오십인(第五十人)의 수희(隨喜)의 공덕(功德)을 교량(校量)했으며 오십인(五十人)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말함이니라.

묘법(妙法)의 오십인(五十人) 妙法蓮華經을 전전(展轉)하기 때문이로다.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을 전전(展轉)하느니라. 운운.

 

一.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도 여래(如來)의 수(壽)도 분별공덕(分別功德)도 수희(隨喜)도 자기 신상(身上)의 일이니라.

그러므로 부모소생(父母所生)의 육근(六根)은 청정(淸淨)하게 자재무애(自在無碍)이고 묘법(妙法)의 육근(六根)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육근(六根)이 모두 청정(淸淨)하니라.

연화소구(蓮華所具)의 육근(六根)이므로 전연(全然) 부정(不淨)이 아니로다.

이 육근(六根)으로 南無妙法蓮華經라고 견문각지(見聞覺知)할 때 본래본유(本來本有)의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니라.운운

 

一.불경품(不輕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보살(菩薩)의 예배(禮拜)의행(行)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일이니라.

자타일념(自他一念)의 예배(禮拜)이고 부모과박(父母果縛)의 육신(肉身)을 妙法蓮華經라고 예배(禮拜)하느니라.

 

불성(佛性)도 불신(佛身)도 중생(衆生)의 당체(當體)의 색심(色心)이므로 바로 예배(禮拜)의 행(行)하느니라.

따라서 개당작불(皆當作佛)의 사자(四字)는 南無妙法蓮華經의 종자(種子)에 의(依)하느니라.

 

一.신력품(神力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십종(十種)의 신력(神力)을 나타내서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를 부촉(付屬)하심이니 이 신력(神力)이란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중생(衆生)의 신력(神力)이니라.

범부(凡夫)는 체(體)의 신력(神力)・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은 용(用)의 신력(神力)이고 신(神)이란 심법(心法)・역(力)이란 색법(色法)이며 역(力)은 법(法)・신(神)은 묘(妙)이니라.

 

묘법(妙法)의 신력(神力)이므로 십계(十界)가 모두 신력(神力)이니라.

연화(蓮華)의 신력(神力)이므로 십계청정(十界淸淨)의 신력(神力)이니라.

통틀어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신력(神力)은 이 품(品)에 다하였으며 석존출세(釋尊出世)의 신력(神力)의 본의(本意)도 이 품(品)의 신력(神力)이로다.

 

소위(所謂) 妙法蓮華經의 신력(神力)이며 십계개성(十界皆成)이라고 말하는 이외(以外)에 제불(諸佛)의 신력(神力)은 없도다.

일체(一切)의 법문(法門)이 신력(神力)이 아님이 없느니라. 운운.

 

一.촉루품(囑累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에는 마정부촉(摩頂付囑)을 설(說)하여 이 묘법(妙法)을 멸후(滅後)에 남기셨느니라.

이 또한 묘법(妙法)의 부촉(付囑)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이 모두 부촉(付屬)된 보살(菩薩)이니라.

또한 삼마(三摩)하는 것은 능화소구(能化所具)의 삼관(三觀)・삼신(三身)의 어수(御手)로써 소화(所化)의 정상(頂上)에 명주(明珠)를 물려 주셨다는 뜻이니라.

대저 정상(頂上)의 명주(明珠)는 각오지견(覺悟知見)이며 정상(頂上)의 명주(明珠)란 南無妙法蓮華經가 이것이니라. 운운.

 

一.약왕품(藥王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은 약왕보살(藥王菩薩)이 부처의 멸후(滅後)에 있어서 법화(法華)를 홍통(弘通)함이니라.

결국(結局) 소신소비(燒身燒譬)란 소(燒)는 조(照)의 의(義)이며 조(照)는 지혜(智慧)의 의(義)이고 지(智)는 능히 번뇌(煩惱)의 몸 생사(生死)의 팔꿈치를 태움이니라.

 

천태대사(天台大師)도 본지(本地)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이로다.

능설(能說)의 입장에서는 석가(釋迦)이며 중생(衆生)의 중병(重病)을 소제(消除)하는 면(面)에서는 약왕(藥王) 약사여래(藥師如來)이고

또 이물(利物)의 면(面)에서는 약왕(藥王)이라고 하며 자오(自悟)의 면(面)에서는 약사(藥師)라고 하느니라.

이 약왕(藥王) 약사(藥師)가 출세(出世)할때는 천태대사(天台大師)이며 약왕(藥王)도 멸후(滅後)에 홍통(弘通)하고 약사여래(藥師如來)도 상법(像法) 잠시(暫時)의 이익(利益) 유정(有情)이로다.

 

시(時)를 가지고 신체(身體)를 나타내고 이름을 가지고 의(義)를 나타내는 일을 부처가 나타내셨느니라.

약왕보살(藥王菩薩)은 지관(止觀)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法門)을 홍통(弘通)하셨는데 그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운운.

 

一.묘음품(妙音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보살(菩薩)은 법화홍통(法華弘通)의 보살(菩薩)이니라. 고(故)로 삼십사신(三十四身)을 현현(顯現)하고 십계호구(十界互具)를 나타내시니 이익설법(利益說法)하느니라.

 

이는 또한 묘법(妙法)의 묘음(妙音)이므로 십계(十界)의 음성(音聲)은 모두 묘음(妙音)이니라.

또 십계(十界)가 남김없이 삼십사신(三十四身)의 소현(所現)의 묘음(妙音)이니라.

또 연화(蓮華)의 묘음(妙音)이므로 십계삼천(十界三千)의 음성(音聲)은 모두 무염청정(無染淸淨)하니라.

그러므로 지카쿠대사(慈覺大師)를 묘음(妙音)의 출세(出世)라고 하며 이에 의(依)해 당결(唐決)의 시(時)・인성묘음(引聲妙音)을 전(傳)해 받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법화(法華)를 비방(誹謗)하여 대일경(大日經)등(等)보다 열등(劣等)하다고 하였는가. 운운.

소위(所謂) 법계(法界)의 음성(音聲)・南無妙法蓮華經의 음성(音聲)이 아님이 없었느니라. 운운

一.관음품(觀音品)

 

이 품(品)은 심심(甚深)한 비품(秘品)이고 식재연명(息災延命)의 품(品)이며 당도왕경(當途王經)이라고 이름하도다.

그러므로 이 품(品)에 있어서 직위법문(職位法門)을 계승(繼承)한다고 배우느니라.

 

천태(天台)도 삼대부외(三大部外)에 관음현(觀音玄)이라고 소(疏)를 만들고

장안대사(章安大師)는 양권(兩卷)의 소(疏)를 만드셨는데 깊고 깊은 비품(秘品)이로다.

관음(觀音)・법화(法華)・안목이명(眼目異名)이라 하여 관음즉(觀音卽) 법화(法華)의 체(體)이고 소위(所謂) 南無妙法蓮華經의 체(體)이니라. 운운.

 

一.다라니품(陀羅尼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은 이성(二聖)・이천왕(二天王)・십나찰녀(十羅刹女) 다라니(陀羅尼)를 설(說)하여 지경자(持經者)를 옹호(擁護)하시느니라.

 

결국(結局) 묘법다라니(妙法陀羅尼)의 진언(眞言)이므로 십계(十界)의 어언(語言)・ 음성(音聲) 모두가 다라니(陀羅尼)이니라.

그러므로 전교대사(傳敎大師) 가로되,

[묘법(妙法)의 진언(眞言)은 타경(他經)에는 설(說)하지 않았고 보현상호(普賢常護)는 타경(他經)에 설(說)하지 않았도다]

다라니(陀羅尼)란 南無妙法蓮華經의 용(用)이니라. 이 오자(五字)속에는 묘(妙)의 일자(一字)로부터 다라니(陀羅尼)를 설(說)해 내느니라. 운운.

 

一.엄왕품(嚴王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은 이자(二子)의 교화(敎化)에 의해서 부(父)인 묘장엄왕(妙莊嚴王)이 사견(邪見)을 바꾸고 정견(正見)에 주(住)하여 사라수왕불(沙羅樹王佛)이 되었느니라.

 

사라수왕(沙羅樹王)이란 범어(梵語)이며 여기서는 치성광(熾盛光)이라고 하도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모두 이는 치성광(熾盛光)으로부터 출생(出生)한 일체중생(一切衆生)이니라. 그런 고(故)로 십계중생(十界衆生)의 부(父)이니라.

 

법화(法華)의 심(心)으로서는 자수용지(自受用智)이며 홀연화기범소사택(忽然火起梵燒舍宅)이란 이것이니라.

번뇌(煩惱)의 일념(一念)의 불이 일어나서 미오불이(迷悟不二)의 사택(舍宅)을 불태움이니, 사견(邪見)이란 이것이로다.

이 사견(邪見)을 사견즉정(邪見卽正)이라고 조명(照明)한 南無妙法蓮華經의 지혜(智慧)이니라.

소위(所謂) 육범(六凡)은 부(父)이고 사성(四聖)은 자(子)이며

사성(四聖)은 정견(正見)・육범(六凡)은 사견(邪見)인 고(故)로 육도(六道)의 중생(衆生)은 모두 나의 부모(父母)라고 함은 이것이니라. 운운.

 

一.권발품(勸發品)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이 품(品)은 재연(再演) 법화(法華)이고 본적이문(本迹二門)의 극리(極理)는 이 품(品)에 지극(至極)하느니라.

 

지카쿠대사(慈覺大師) 가로되,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은 발심수행(發心修行)이라고 석(釋)하신 것은 이 품(品)을 말하느니라.

 

결국(結局) 이 품(品)과 서품(序品)은 생사(生死)의 이법(二法)이며 서품(序品)은 우리들 중생(衆生)의 생(生)이고 이 품(品)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사(死)이며 생사일념(生死一念)임을 妙法蓮華經라고 하느니라.

 

품품(品品)에 있어서 처음 제호(題號)는 생(生)의 면(面)이요. 끝의 면(面)은 사(死)의 면(面)이로다. 이 법화경(法華經)은 생사생사(生死生死)로 유전(流轉)하느니라.

생(生)인 고(故)로 시초(始初)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썻는데

여(如)는 생(生)의 의(義)이며 사(死)인 고(故)로 끝에다 작례이거(作禮而去)라고 결(結)했느니라.

 

거(去)는 사(死)의 의(義)이며 작례(作禮)의 언(言)은 생사간(生死間)에 이루는 바의 모든 아등중생(我等衆生)의 소작(所作)이로다.

이 소작(所作)이란 妙法蓮華經이니라.

예(禮)란 불란(不亂)이란 의(義) 이며 법계(法界)의 묘법(妙法)이므로 불란(不亂)이니라.

 

천태대사(天台大師) 가로되

[체(體)는 자(字)는 예(禮)라 읽으며 예(禮)란 법(法)이니라. 각각(各各)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하며 그 자식을 자식으로 하듯이 출세(出世)의 법체(法體)도 또한 이와 같다]고 .

체(體)란 妙法蓮華經을 가리키며 우선 체현의(體玄義)를 석(釋)하느니라.

체(體)란 십계(十界)의 이체(異體)이고, 이것을 법화경(法華經)의 체(體)로 했는데 이런 것을 작례이거(作禮而去)라고 설(說)했느니라.

 

법계(法界)의 천초만목(千草萬木) 지옥아귀등(地獄餓鬼等) 어느 계(界)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작례(作禮)가 아님이 없으며 이는 즉(卽)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니라.보(普)한 법계(法界) 현(賢)이란 작례이거(作禮而去)이며 이는 즉(卽) 妙法蓮華經이니라. 이로써 품품의 처음에도 오자의 제목을 붙이고 끝에도 오자를 가지고 결론했으며 전후(前後) 중간(中間) 南無妙法蓮華經의 칠자(七字)이니라.

 

말법(末法) 홍통(弘通)의 요법(要法)은 오직 이 일단(一段)에 있느니라.

이러한 뜻을 잊고 요법(要法)에 결(結)하지 않는다면 말법홍통(末法弘通)의 법(法)으로는 부족한것이며 더구나 日蓮의 본의(本意)를 잃는 것이니라.

日蓮의 제자단나(弟子檀那)는 이외(以外)의 재각무익(才覺無益)하니라.

 

묘락(妙樂)의 석(釋)에 가로되

[자(子)가 부(父)의 법(法)을 홍통(弘通)하면 세계(世界)에 이익(利益)이 있다]라고

자(子)란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이고 부(父)란 석존(釋尊)이며 세계(世界)란 일본국이며 익(益)이란 성불(成佛)이고 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지금 또한 이와 같도다.

부(父)란 日蓮이며 자(子)란 日蓮의 제자단나(弟子檀那)이고 세계(世界)란 일본국이며 익(益)이란 수지성불(受持成佛) 법(法)이란 상행소전(上行所傳)의 제목(題目)이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 권하(卷下)

홍안원년무인정월일일(弘安元年戊寅正月一日) 집필닛코(執筆日興)

 

어의구전(御義口傳) 종(終)

 

 

 

 

출처 : 한국SGI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평회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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