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18. 17:38ㆍ佛法 .SGI
“어본존에 대하여”
자신이 걷는 행복의 궤도에 전 인류를 직결시키려는 것이 진정한 부처의 행동입니다. 석존은 자신이 묘법의 당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도 똑같이묘법의 당체며 똑같은 자수법락을 얻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들은 진리에 눈뜨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미혹에 휩싸여 어리석은 행동을 거듭하고 고뇌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인에게 숨어 있는 진리에 사람들도 눈뜨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해 나갔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영원의 법’에 사람들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 ‘전 생명’을 걸고 싸우는 이가 부처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그 ‘영원의 법’을 ‘남묘호렌게쿄’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당연히 남묘호렌게쿄는 법의 이름임과 동시에 그 법과 일체가 된 부처의 생명, 즉 대성인의 생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법이 제불의 능생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석존이나 제불을 본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법을 본존으로 해야 합니다.
대성인은 〈본존문답초〉에서 “본존이란 뛰어난 것을 쓸지어다”(어서 366쪽)라 고 말씀하시고 “뛰어난 본존이란 교주석존이 아니라, 교주석존·다보여래·삼세시방의 제불이 본존으로 한 법화경 그 자체다”(취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석존 자신의 ‘스승’인 ‘법’을 열심히 구해 나가라고 민중에게 호소하여 ‘법’에 직결하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경전이 법화경입니다. 부처란 자신을 깨닫게 해 준, 스승으로 삼은 ‘영원의 법’, 즉‘영원의 부처’를 향해 민중을 이끄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법’에 직결할수 있도록 눈뜨게 하기 위해 꾸준히 싸우는 사람입니다.
석존의 본지(本地)인 ‘영원의 법’과 일체(一體)인 ‘영원의 부처’를 표현하는 것이 묘호렌게쿄로, 이 성불의 근원을 나타내는 것에 만인의 성불을 설한 법화경의 진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그 법화경의 진가를 아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법화경을 읽어도 그저 옛날 이야기처럼 받아들입니다. 또는 ‘석존은 훌륭한 부처였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이 부처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과 직결하는 좀 더 직접적인 길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니치렌 대성인께서 어본존을 도현하시게 된 하나의 의의입니다. 누구나 생명으로 실감할 수 있도록 ‘법’에 직결하는 길을 만인에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말하자면 법화경을 통해서 ‘법’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법’ 그 자체를 어본존으로 도현함으로써 만인이 그대로 직결하는 길을 확립하신 것입니다.
입종선언 이래 다쓰노구치의 법난에 이를 때까지 18년간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사신홍법’―‘법이 근본’인 투쟁이셨습니다. 다쓰노구치의 법난은 그 정점(頂点)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부가 ‘법’과 일체화한 삶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법’과 일체화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 자신이 범부의 몸에 그대로 구원의 부처의 생명을 열었기 때문에 말법의 범부가 성불하는 길이 열렸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개목초〉에서는 ‘법화경의 행자’다운 전인격적(全人格的)인 행동을 통해 묘법과 일체인 대성인의 내증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관심의 본존초〉에서는 대성인의 내증으로 분명해진 본존의 핵심이 묘호렌게쿄의 오(五)자라는 것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제법실상초〉에서는 “범부는 체의 삼신으로서 본불(本佛)인 것이며”(어서 1358쪽)라고 말씀하시며 진실한 부처는 범부라는 것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말법에는 ‘색상장엄한 부처’는 진정한 교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범부의 몸이면서 그 내증은 부처입니다. 부처의 마음을 지닌 범부의 모습이 아니면 삼독강성한 범부가 가득한 세계에서 광선유포할 수 없습니다.
범부의 몸 그대로 부처의 내증을 나타내는 부처가 말법의 교주입니다. 그러므로 본존이 색상장엄한 부처를 조형(造形)한 것이라면 교주와 본존의 사이에 모순이 생깁니다.
또 목상(木像)·회상(繪像)으로는 설령 그것이 아무리 예술적으로 뛰어나다 하더 라도 마음의 일부분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법과 일체인 불계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본존을 문자로 쓰셨다는 것은 심심(甚深)한 의의가 있습니다.
“이 어본존을 결코 타처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의 도라고 하느니라.”(어서 1244쪽)
“그러므로 아부쓰보가 바로 보탑(寶塔)이고 보탑이 바로 아부쓰보이며 이것 이외 의 재각(才覺)은 무익(無益)하니라."(어서 1304쪽)
삼세시방의 제불이 부처가 된 근원의 법이 남묘호렌게쿄며 니치렌 대성인이 그 남묘호렌게쿄여래 이십니다. 그리고 그 남묘호렌게쿄여래의 생명을 한 폭의 만다라로 도현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수지하고 흉중의 남묘호렌게쿄를 용현시킵니다. 요컨대 자신이 바로 묘법의 당체라고 자각하기 위한 어본존인 것입니다.
어본존은 대단하다고 감탄만 하면서 조르거나 매달리기만 하고 있다면 언제까지 가도 자기 자신은빛나지 않습니다. 또 무슨 나쁜 일이 있으면 어본존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굉장한 어본존과 똑같은 경애가 나의 생명에도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날의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명을 갈고 닦으면 복덕이 찬연히 빛나게 됩니다.
예전에 도다 선생님은 어문을 강의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어본존은 맞은 편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저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믿고 받들고 있는 우리들의 생명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신심을 하지 않는 자는 불성이 희미하게 보여서 하나도 작용을 하지 않는 이 즉(理卽)의 범부입니다.
우리들은 어본존을 수지하고 있기 때문에 명자즉(名字卽)의 위(位)입니다. 이 명자즉의 위에 오르면 그 속에서 혁혁하게 어본존이 빛나게 됩니다. 단, 빛의 밝기는 신심의 후박(厚薄)에 있습니다. 전구와 같습니다.
큰 전 구는 밝고 작은 전구는 희미합니다. 또 전구를 예로 들면 신심을 하지 않는 자는 전구가 선에 이어져 있지 않은 것과 같으며 우리들은 신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 어본존이라는 전등에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명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도다 조세이 전집 제6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관심’이란 ‘신심’의 이명(異名)입니다. ‘관심의 본존’이란 ‘신심의 본존’입니다. 강성한 신심으로써 어본존에게 직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안에 있는 어본존이 작용하여 곧바로 희망의 빛으로 감싸이게 됩니다. 힘이 솟아납니다.
요컨대 ‘일심욕견불 부자석신명’ 즉 ‘불석신명의 신심’이 대성인의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또 “일이란 묘이며 심이란 호이며 욕이란 렌이며 견이란 게이며 불이란 쿄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일심으로 구한 것은 ‘묘호렌게쿄’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오자를 단지 자신만이 구한 것이 아니라 신명을 아끼지 않고 홍통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자행화타입니다.
범부의 몸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나 일심으로 구한 마음이 그대로 부처의 마음이 되어 정신적 경애가 변혁한 것입니다. ‘불석신명의 신심’을 관철하면 생명이 묘법에 들어맞아 자연히 ‘무작의 삼신’의 불과(佛果)가 현실에서 개현하는 것입니다.
수지의 핵심은 ‘불석신명의 신심’이고 그 신심에 저절로 관심이 성취됩니다.
인생을 걸고 후회 없는 깨끗한 신심을 지속하는 것만이 자신이 묘법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신심의 지속을 통해 일생성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나의 기심의 묘호렌게쿄를 본존으로 숭앙하고, 나의 기심 중의 불성(佛性)·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 ‘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는 내가 즉 환희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하심은 이 심(心)이니라.”(어서 557쪽)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은 니치렌 대성인이 도현하신 어본존을 최고로 찬탄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나의 기심의 어본존을 찬탄하는 것이며 나의 불계의 생명을 찬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찬탄하는 불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부르고 불리어서’라는 말씀입니다. 부르는 쪽도 자신, 불리는 쪽도 자신입니
다. 밖에서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 깨닫는 것입니다. 어본존과 자신의 감응입니다. 그 소리의 울림에 응해서 전 우주의 제천선신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을 지켜줍니다. 또 모든 부처도 보살도 환희합니다. “환희란 법계(法界) 동시의 환희이니라”(어서 735쪽)입니다. 우주 전체가 환희에 가득 차게 됩니다.
부처도 중생도 국토도 ‘영원의 묘법’의 당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허공회입니다. 말하자면 우주 전체가 영원의 묘법에 일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원의 묘법을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나타내셨습니다.
허공회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영원의 법’, 즉 ‘영원의 부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허공회의 여러 가지 묘사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늘과 땅을 연결하듯이 허공에 우뚝 솟은 거대한 보탑입니다.
이것은 ‘전 우주의 중심축’인 영원의 묘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허공회의 보탑은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으로서 우주근원의 묘법을 나타냄과 동시에 땅〈현실〉에서 하늘〈이상〉로 건너는 ‘위대한 탈 것’, 즉 대승(大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지혜의 빛으로 불자를 가르쳐 기르는 태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보의 탑은, 법화경을 설하면 언제라도 어디라도 출현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가 법화경에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 과거불(過去佛)인 다보여래의 증명은 묘법의 시간적 보편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시방(十方)에서 온 분신의 제불의 증명은 공간적 보편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허공회에서 삼불(석가·다보·시방분신의 제불)의 집합은 바로 모든 부처가 묘법을 근본으로 한 일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법화경 본문에서는 허공회의 의식과 수량품의 설법을 통해 영원의 ‘법’인 남묘호렌게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법’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나타내느냐 입니다. 허공회를 암호에 비유하면 본문수량품은 암호를 푸는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그 답이 남묘호렌게쿄입니다.
〈관심의 본존초〉에는 열좌한 중생으로서 석가·다보와 상행보살 등의 사보살, 적화의 보살, 시방의 제불까지 열거하고 있으나, 〈니치뇨부인답서〉에는 그 밖에 성문이나 육도의 중생을 열거하여 어본존 속에 십계의 무수한 중생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상모로서 남묘호렌게쿄가 전 중생을 둘러싼 대법이며, 전 우주는 남묘호렌게쿄를 중심축으로 하여 남묘호렌게쿄에 떠 받쳐진 코스모스(조화적 질서)라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중앙의 ‘남묘호렌게쿄’는 근원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생명우주의 중심축이기 때문에 허공회의 중심에 우뚝 솟은 보탑으로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좌우에 석가불과 다보여래가 있습니다. 이들은 묘호렌게쿄의 작용을 나타내는 부처입니다. 다보여래는 과거불(過去佛)이며 영원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지혜의 대경(對鏡: 對象)으로서 그 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석존은 현재불(現在佛)입니다. 법을 현실로 깨닫는 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로 남묘호렌게쿄의 두 측면입니다. 이불병좌(二佛竝坐)란 진리와 지혜의 일치, 경지명합을 나타냅니다.
중요한 것은 석가·다보를 본존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석가·다보도 남묘호렌게쿄를 통해 성불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성불의 근원의 법인 남묘호렌게쿄를 본존으로 합니다. 그것은 어본존의 상모에서 남묘호렌게쿄가 중앙에 크게 쓰여 있고, 그 좌우에 석가·다보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봐도 명백합니다.
그리고 상행 등의 사보살은 석존의 협사로 되어 있습니다. 남묘호렌게쿄를 깨달은 부처는 반드시 만인을 구제하는 보살행을 일으킵니다. 그 보살행의 면을 나타내는 것이 사보살입니다. 상행, 무변행, 정행, 안립행이라고 모두 ‘행(行)’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발휘하여 현실에 행동을 전개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묘호렌게쿄와 하나가 되어 무한한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나타내는 ‘최고의 행동’ ‘무한의 행동’ ‘청정한 행동’ ‘확고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탑의 묘법 아래 모인 모든 십계의 중생들이 묘법의 작용의 일부분 일부분을 맡고 있습니다. 묘법의 광명을 받아 묘법의 당체로서 자신을 나타내어 ‘ 본유의 존형’을 밝히고 있습니다. 각각 개성을 발휘하여 묘법의 풍요로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체현조’입니다. 태양의 빛은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강색에서 보라색까지 연속되는 많은 색으로 나뉩니다.
‘태양의 빛’은 전체, ‘각각의 색’은 빛이 나뉘어 생긴 부분부분입니다. 태양
의 빛은 무수한 색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색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물건을 비추면 색이 반사되어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납니다.
묘법은 ‘능생(能生)의 근원’입니다. 만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입니다.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부를 포함한 묘법의 양광(陽光)으로 비추어 주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개성 풍부하게 빛납니다.
대성인은 ‘묘의 삼의’를 설하셨습니다. 즉 묘란 ‘개(開: 연다)’의 의(義)이며 ‘구족(具足), 원만(原滿)’의 의이며 ‘소생(蘇生)’의 의입니다.
당연히 어본존의 공력은 이 삼의를 갖추고 있습니다. 어본존에게는 만인의 불성을 여는 힘이 있습니다. 어본존에게는 모든 공덕을 갖출 수 있는, 모든 기근을 포섭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본존에게는 어떤 악업이나 비참함도 구제하는 소생의 힘이 있습니다. 요컨대 어본존에게는 일체를 살려 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법문’입니다.
허공회의 의식을 본떠서 도현한 어본존을 신앙함으로써 우리들은 ‘지금’ 영원한우주생명과 하나가 되어 ‘여기서’ 전 우주를 내려다보는 경애를 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날의 근행창제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허공회의 의식을 펼칠 수 있습니다.
나의 몸에 나의 생활에 나의 인생에 보탑을 빛내 줍니다. 이것이 어본존의 훌륭함입니다. 장대한 생명의 코스모스가 열려 현실이 가치창조의 세계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문자’의 만다라로서 어본존을 도현하셨을까요?
대성인은 〈목화이상개안지사〉(어서 468쪽)에서 부처가 갖춘 주요한 특징인 ‘32상(相)’ 중에 범음성(梵音聲)만은 색심이법(色心二法)의 양쪽으로 나눌때 유일하게 심법(心法)에 속하기 때문에 목상·회상으로는 부처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가 없다고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심(心)’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히 넓혀지는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하물며 부처의 ‘심’은 그림이나 조각으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또 그림이나 조각으로 된 상모라면 배견했을 때 각각 다른 방법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표현’ 의 측면으로 받아들이기 쉬우므로 표현이 상징하고 있는 ‘진리’ 때문에 깊이 사유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 영원하고 보편적인 법을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인에게 어본존이 ‘영원의 법’, 즉 ‘영원의 부처’라는 것을 나타내서 홍통하기 위해 상(像)이 아닌 문자로 표현하셨다는 것에 깊은 의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자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 문자에는 영원히 사람들을 구제하는 부처의 역용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성인께서는 “부처는 문자에 의해 중생을 제도(制度)하시느니라”(어서 153쪽)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소멸한 범음성은 도리어 형체를 나타내서 문자로 되어 중생을 이익케 하느니라”(어서 469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본존은 십계의 중생을 모두 상모 속에 담고 있습니다. 허공회로 말하면 일좌(一座)의 대중을 모두 공중의 허공회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감싸고 있습니다.
이전권교(爾前權敎)라면 육도(六道)를 잘라 버리고, 이승(二乘)을 잘라 버리고 끝 내 보살도 잘라 버리고 구계(九界)를 기피합니다. 법화경의 방향과 정반대입니다.
‘선택된 백성’만 구제하려는 종교도 있습니다.
어본존의 상모는 만인의 평등한 존엄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본존에게는 어떠한 분단이나 대립도 조화(調和)하고 융합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괴로워하고 있는 육도의 중생을 구제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을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지용의 보살입니다.
“결국은 승부를 결정해버리는 이외는 이 재난이 그치기 어려우리라”(어서 998쪽)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마성(魔性)과 불성(佛性)의 싸움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겨 내는 것이 지용의사명입니다.
지용의 보살이 악(惡)에 이기지 않으면 영원히 악에서 악으로 유전하는 세계가 되어 버립니다. 악을 이겨야만 법성이 나타나 선악불이(善惡不二)의 조화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어본존에는, 단순히 석존에게 적대하여 극한 고뇌에 시달리는 악역무도한 제바달다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묘법의 광명을 받아 지옥계의 조화라는 사명을 띠고 제바달다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지옥계에서 묘법의 사자로서활약하는 제바달다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제바달다 한 사람의 성불이 무수한 악인성불의 길을 연 것입니다.
〈관심의 본존초〉의 결론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어본존은 어본불의 자비의 당체입니다. 광선유포의 실천없이 어본존을 신수한다 해도 진실한 부처의 대자비에 통하지는 않습니다.
‘니치렌과 동의(同意)’ ‘니치렌의 일문(一門)’이라는 대성인과 똑같은 광선유포의 결의에 섰을 때 대하(大河)와 같이 니치렌 대성인의 대자비는 도도히 흘러전해집니다.
어본존의 공력(功力)은 무한대입니다.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공덕과 비교할 수도 없는 무량무변하고 광대한 공덕이 있습니다. 그 최대의 공덕이 인류의 숙명전환입니다. 그 공덕을 끌어내는 것이 창가학회의 신심입니다.
그리고 세계 185나라·지역으로 넓혀진 지용의 보살의 연대가 어본존의 공력의 향기를 그윽하게 풍겨, 지구의 무명을 털어 버려야 할 때를 맞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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