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4. 22:03ㆍ佛法 .SGI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있다. 그 드라마는 언젠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놓인 과제에 용감하게 기원하고 맞서는 그 순간 막이 오른다. 진검승부의 투쟁을 펼치는 곳에 인간혁명이 있다. - 수필 '민중개가의 대행진' - 불법철리의 원천 그때그때 하신 강의·지도에서
영원한 생명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만인이 피할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그 점을 조명하신 대성인의 성훈을 배독하고자 합니다. 〈어의구전>에 “우리가 생로병사에 즈음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것은 그대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사덕(四德)의 향기를 풍기는 것이다.” (어서 740쪽, 통해)라고 있습니다. '상락아정'의 사덕이란 흔들리지 않는 행복경애 즉, '부처의 생명'에 갖춰지는 네가지 덕을 말합니다. ‘상(常)'은 부처의 생명이 삼세(三世) 영원하다'는 것을, '낙(樂)'은 괴로움이 없어 기쁘고 평온한 상태'를, '아(我)'는 그 무엇에도 파괴되지 않는 자유자재의 경애’를, '정(淨)'은 더없이 청정함'을 뜻합니다. 우리는 묘법(妙法)에 끝까지 살아감으로써 '생로병사'라는 괴로운 생명을 '상락아정'이라는 가장 기쁜 생명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그렇게 단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학회의 뜰에서 최후까지 광선유포를 위해 철저히 싸운 사람은 '상락아정'이라는 최고의 행복경애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임종을 맞은 후에도 또 내세에도, 그 다음 내세에도 영원히 '부처의 경애'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지금 영산에 가신다면 태양이 떠올라 시방(十方) 세계를 바라보듯이 기쁘고 '일찍 죽길 잘했다.'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서 1480쪽, 통해) 일반적으로 '죽음'은 '쓸쓸하고' '어두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더 본원적인 생명의 법칙에서 보면 생(生)도, 사(死)도 영원한 생명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묘호렌게쿄라고 끝까지 부르고 철저히 넓힌 사람은 죽어서도 태양이 혁혁히 떠올라 '일찍 죽기를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자재의 경애를 즐길 수 있습니다. 실로 '생도 환희' '사도 환희'입니다. 그렇기에 대성인은 금세에 진지하게 묘법, 의 신앙을 관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족에 대해서는 '신심을 하고 돌아가셨으면 아무 걱정 없습니다. 분명 본인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이것이 묘법의 세계입니다.
생명은 '생'과 '사'를 되풀이하면서 영원히 연속해 갑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한강연(1993년 9월, 테마는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일생을 잘 산 사람의 죽음은 내일을 위해 활력을 축적하는 수면처럼, 다음 '생’을 위한 충전기간이 됩니다. 그리고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는 대경애를 유유히 또 엄연히 여는 것이 투철한 신앙입니다. 〈어의구전>에서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가 어본존을 믿고 묘법을 봉창할 때, 본유(本有)의 생사라는 올바른 생명의 본원(本源)을 깨달아 자연스럽게 '영원한 생명'을 자각해 우리 몸을 열 수 있다.”(어서 754쪽, 통해)고 설한 대로입니다.
대성인은 어서에서 열반경의 글을 인용해 “악상(惡象) 때문에 살해되어도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거듭 가르치셨습니다. 악상에게 살해된다는 것은 현대로 치면,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 등에 해당합니다. 불법(佛法)을 행하는 생명의 절대적 '행복 궤도'는 그러한 재난으로는 결코 파괴되지 않습니다. 정법(正法)을 수지한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전중경수(轉重輕受, 무거운 것을 바꾸어 가볍게 받는다)'의 법리에 따릅니다. 또 단연코 ‘변독위약(變毒爲藥, 독을 바꾸어 약으로 한다)’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문명인이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아는 사람'이라는 선인의 말을 인용해) 영원한 생명관에 서서 자기를 연마하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학회원이야말로 '참된 문명인'이 아닐까요. 학회에는 장엄한 생명의 드라마가 무수히 많습니다. 병상에서 학회에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곧바로 다시 태어나 광포의 진열에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웃으면서 눈을 감은 분도 있었습니다. 테이프로 '동지의 노래'나 '인간혁명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세에도 크게 활약하겠다는 꿈을 이야기하고 떠난 분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자각한 유유한 '참된 문명인'의 자세가 아닐까요.
니치렌 대성인은 “곳간의 재(財)보다도 몸의 재가 뛰어나고” (어서 1173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뛰어난 ‘몸의 재’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생로병사 등 인생의 근원적 고뇌는 몸의 재만으로는 타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멸하는 인생의 보배는 있는가. 어떠한 잔혹한 운명에도 무너지지 않고 삼세 영원히 빛나는 황금의 가치는 대체 무엇인가.. 대성인은 명확하게 "몸의 재보다 마음의 재가 제일이로다.”(어서 1173) 하고 결론지으셨습니다. 마음의 재란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속에 구축한 풍요로움이고, 궁극적으로는 '신심의 복덕' 입니다. '영원한 대법(大法)'과 함께 끝까지 살아가면 그 인생도 삼세 영원히 빛납니다. '광선유포의 사명'에 철저하면 그 경애도 우주대로 넓혀집니다. 우리 생명에 쌓은 복운만큼은 불멸합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누구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이야말로 소중한 것입니다.
불법철리의 원천Ⅱ 그때그때 하신 강의·지도에서
본인묘
본인(本因)은 성불의 근본 원인입니다. 행복의 본원입니다. 구원에 석촌이 실천한 수행에 본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묘(妙)’하고 불가사의하기에 '본인묘(本因妙)'라고 합니다.
수량품에서 석존의 참된 성불은 오백진점겁(五百占)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구원의 과거사라고 설합니다. 이 구원의 성불을 '구원실성(久遠實成)'이라고 하며 이때 성불의 원인을 '본인', 성불의 결과를 '본과(本果)'라고 합니다. 이 본인·본과에 의한 성불은 수량품의 문상(文上)에서는 석존을 설하지만, 문저(底)에서 보면 석존의 성불에만 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본과는 석존이 구원에 이룬 성불임과 동시에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성불의 인과(因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만인성불의 인과이기도 합니다.
“인과구시(因果俱時)·불가사의의 일법(一法)” (어서 513쪽)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본인·본과는 남묘호렌게쿄의 일법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과일념(因果一念)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남묘호렌게쿄의 일법을 믿는 일념에 본인·본과가 갖추어집니다. 이 '일념의 묘'가 대성인의 '본인묘 불법'의 극의(極意)입니다. 또 일념삼천(一| 念三千)의 구극입니다. 범부의 일념에도 본인·본과가 함께 갖추어집니다. 일념이 바뀌면 일체가 근터부터 바뀝니다. 본인 본과를 일념의 생명으로 보는 문저불법(文民佛法)의 생명관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삶의 자세를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생명 본원의 출발점에 서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전진을 개시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행불행과 고락(苦樂)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현재 일순간의 생명은 과거의 원인에서 초래한 결과입니다. 이것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일순간의 생명은 미래로 향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 일은 이론상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듯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깨닫기 어렵습니다. 어떤 미래를 실현하느냐는 현재의 일념에 달렸습니다. 도다(戸田)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순간에 일어난 생활의 사실을 끊임없이 미래의 원인으로 삼는다. 혹은 원인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정한다. 이것이 본인묘의 불법이다." “어본존을 열심히 신봉하는 생활은 일상의 사건을 청정한 구원의 인(因)으로 삼아 활동하는 것이다. 또 어본존의 공덕으로 헤아릴 수 없는 생명력이 솟아나므로 그것이 결과로 이어질 때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생기는 법이다.” 본인·본과는 우리 일념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인과구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설령 그것이 아무리 불행한 결과라 해도 신심의 일념으로 구원의 본인 즉 행복의 근본 원인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청정한 본원의 생명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 전체가 흔들리지 않는 행복경애로 향합니다. 이것이 '본인묘의 삶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 '이렇게 되겠다.' '나는 평생 광선유포를 위해 달리겠다.' '나는 평생 이 신심으로, 이 무대에서 싸우겠다.'고 정한 사람이 역사를 남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 일념이 크게 성장하는 ‘인(因)'이 됩니다.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씨앗은 겉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윽고 싹이 트고 뿌리를 내려 잎과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거목이 됩니다. 정말 투철하게 결의한 '씨앗'은 몇백년 뒤에도 우러러보는 장대한 거목이 됩니다. '언젠가'가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지금'이 싸울 때입니다. '여여(如如)히 오다(來)'를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여래'란 철학적으로는 '과래(過來)’ ‘미래(未來)'에 비해 지금 이 순간순간에 약동하고 용솟음쳐 창조하고 계속 확대되는 위대한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어쨌든 지금이다! '지금부터다'라고 어디까지나 '현당이세(現當二世)'로 끝까지 살아간다, '현재'에서 ‘미래’로 계속 도전한다. 이것이 '본인묘'의 불법입니다.
불법에서 설하는 경애혁명의 인과는 현실적으로 사제(師弟)가 없으면 실현하지 못합니다. '묘법의 인과'는 이를테면 '사제의 인과'입니다. 제자는 '인'이고 스승은 '과' 입니다. 제자의 자각에 모든 인이 있습니다. 제자의 승리가 곧 스승의 승리입니다. 스승의 승리는 곧 제자의 승리입니다. 이것이 불법의 심원한 방정식이자 '사제불이'의 진수입니다. 은사의 서원인 75만 세대 절복을 달성한 1957년 연말, 나는 이렇게 시를 읊었습니다. “겨울의 마른 나무에/ 봄의 새싹은/ 인과구시” 불이(不二)의 제자로서 미래에 성장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시입니다. 스승은 마음의 대지입니다. 제자는 그 마음의 대지에 영원히 승리의 꽃을 피워 향기롭게 합니다. 그러니 그대여, 결코 지지 마라! 현재에서 미래를 향해 단호히 승리해 나아가라! '사제의 인과 '승리의 인과'에 살아가는 청춘이 바로 후회 없는 가장 존귀한 생명의 대도(大道)입니다. -.-
젊은 보우에게 승리를 바라는 성원
행복이란
행복이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어떠한 환경에 있더라도 인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 신심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무척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경애가 성불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는 노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해야 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결혼하면 편해지는가 하면, 가사와 육아에 쫓겨 마치 전쟁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속에서 의미를 발견해 삶의 보람을 만들고 목표를 정해 발랄하게 도전하며 고생마저 즐기면서 순간순간을 최고로 뜻있게, 마음껏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의 달인입니다. 결국 행복이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법입니다.
나쁜 환경도 자신이 지배해 컨트롤하면 행복합니다
행복은 환경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택에 살아도 울면서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환경과 무관하게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도 주지 못하면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행복은 환경(외부 세계)과 자기 생명력의 '관계'로 결정됩니다. 나쁜 환경에 지배되면 불행합니다. 나쁜 환경도 자신이 지배해 컨트롤하면 행복합니다.
절대적 행복은 외부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생명 안에서 솟아나는 행복감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가장 큰 행복 즉 절대적 행복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절대적 행복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외부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생명 안에서 솟아나는 행복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간의 지위나 재산, 만족 등과 같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법에 따라 살고 '법’차원에서 어떠한 위(位)를 얻는가. 그 '생명의 위'는 법과 함께 영원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왕자(王者)' 로서 살 수 있습니다.
창가의 운동은 행복해지는 근본 궤도를 가르칩니다
마음이 강한 사람, 마음이 현명한 사람, 마음이 늠름한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저앉지 않습니다.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 이것이 행복의 근간입니다. 그 근간을 세우는 것이 묘법입니다. 대성인은 “진실로 모든 사람이 신심(身心)의 난을 물리치는 비술(秘術)은 오직 남묘호렌게쿄다”(어서 1170쪽, 통해) 하고 단언하셨습니다. 행복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물건도 아닙니다. 행복은 재산이나 지위, 명성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먼저 제목을 불러야 합니다. 제목을 부르면 생명력이 솟아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즐겁습니다. 벗과 대화하고 만족할 때까지 제목을 부르면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를 기뻐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이 행복의 실상(實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가(創價)의 운동은 행복해지는 이 근본 궤도를 가르칩니다.
어느 날 어느 때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질문회 편 소설 《신·인간혁명》에서
(제9권 '광채’, 1964년 가을, 프랑스를 방문한 야마모토 신이치는 앞으로 광포를 짊어질 멤버들과 간담한다.) 멤버 가운데에는 두명의 프랑스인이 있었다.
Q 신심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A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는 자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3년 전에 일본에서 입회하여 현재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는 30대 후반의 장년이었다. 또 한 사람은 불교를 연구하고 파리대학교 동양어학교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있는 20세의 남자 대학생이었다. 이 프랑스 청년은 전년 2월에 입회했다. 신이치는 두명의 프랑스인에게 커다란 기대를 보냈다. 프랑스의 광선유포를 생각한다면 역시 프랑스인 가운데에서 신심이 강성한 인재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신이치는 모두의 현황을 듣고 나서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묻고 싶은 것이나 의문 나는 점이 있다면 사양하지 마시고 뭐라도 좋으니 말씀해주세요.” 신이치의 말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프랑스인 청년이 질문했다. “신심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는 불교를 연구하며 그 목적이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니치렌불법은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인에 비추어 말하자면 일생성불(一生成佛)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를 쌓는 일입니다. 더욱 알기 쉽게 말하자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는 자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혁명(人間革命)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불법자(佛法者)의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광선유포입니다. 광선유포란 사람들에게 올바른 불법을 가르쳐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인류의 평화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곧바로 청년이 되물었다. “그러면 자신만 신심하는 것이 아니라 포교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그는 선(禪) 등을 연구해 왔기 때문에 자신이 수행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신이치는 미소를 머금고 질문에 답했다. "대성인 불법에서 말하는 불도수행은 '자행화타(自行化他)'입니다. 자행(自行) 즉 스스로 근행 창제하고 어서를 연찬하여 교학을 배우면서 동시에 화타(化他) 즉 남에게 불법을 가르쳐 가는 것을 수행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으로 이 두가지를 실천해 가는 가운데 성불의 길이 열려 갑니다. 또 이번에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자세를 생각했을 때 자기 혼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열면 된다는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만약 주위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도 무자비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우리는 지용의 보살이며, 말법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컨대 자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평화를 위해, 사회의 번영을 위해, 살아가라는 것이 대성인의 가르침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진정 살아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존도 생애 포교의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대성인 역시 절복에 절복을 거듭하는 일생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명도 정법을 유포하는 데 있습니다.” 프랑스인 청년은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신심은 어떻게 배워 가면 좋을까요." “그것은 학회의 조직 속에서 함께 불법의 가르침을 실천해 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유도나 당수(唐手)도 책을 보며 배우는 것만으로는 능숙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계속되는 프랑스 청년의 질문에 신이치는 정중하면서도 명쾌하게 답해 갔다. 신이치는 그러한 구도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신이치는 만난 한사람 한사람을 철저하게 연마하여 성장시키고 싶었다. 하나의 장작이 불타오르면 계속해서 다른 장작으로 불길이 퍼져 난로는 눈부신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일어서면 거기서부터 인재의 흐름이 만들어져 간다.
대학부 페이지 명작과 친하게 지내자
이케다 선생님의 젊은 날의 독서에서 여기에서는 영지의 대학부가 대학시절에 읽어야 할 서적을 젊은 날 이케다 선생님의 독서를 바탕으로 깊이 배웁니다.
단테 《신곡》
1300년 부활제, 단테는 어두운 숲속을 헤매다 그곳에서 스승으로 삼은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안내에 따라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세계에서 죄를 지은 자가 떨어지는 '지옥'과 죄를 씻는 '연옥' 그리고 '천국'을 편력한다. 스승 베르길리우스와 제자 단테의 '사제(師弟) 이야기'이기도 한 이 책에는 승리의 인생을 걷는 실마리가 곳곳에 씌어 있다. 《신곡》은 700년에 걸쳐 읽힌 세계문학의 최고봉으로서, 청년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힌다.
이케다 선생님 지침 《신곡》에서 가장 감동한 부분은 장절한 '지옥'과 '연옥'을 답파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의 '사제의 유대’입니다. '사제'가 아니면 부수지 못하는 벽이 있습니다. '사제'가 아니면 나아가지 못하는 길이 있습니다. 《신곡》 서두에서 젊은 단테는 인생의 올바른 길을 잃고 고뇌하다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만났습니다. 《신곡》에 묘사한 사제도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스승 베르길리우스는 죄와 벌이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지옥'과 '연옥'을 통과하며 제자 단테를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엄하게 계속 격려합니다. “겁내지 마라. 내가 그대를 안내하는 동안은.”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의 앞길을 그 누구도 막지 못하리니.” “나를 따라 오라, 제멋대로 지껄이도록 놔둬라. 바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탑처럼 / 듬직한 태도를 보여라.” “우리는 반드시 이 싸움에 이겨야 한다." 한편, 제자 단테는 “그리운 발자취를 따라갔다.”고, 스승의 발자취까지 그립다며 고마워합니다. “길잡이가 희망을 주고 빛이 된 것이다.” “내가 얼마나 선생님께 은혜를 느끼는지/ 나는 살아 있는 한 세상에 말하고 증명할 생각입니다.” 경애하는 스승의 은혜에 부응하고 싶다, 단테의 이 보은하는 마음이 바로 험난한 여로를 끝까지 걸어가 승리하는 힘이 됐습니다. 지옥과 연옥의 여행을 마칠 무렵, 스승 베르길리우스는 강하고 늠름하게 성장한 단테 머리에 관을 씌웁니다. 제자의 '성장과 승리' 야말로 스승에게 최고로 기쁜 일입니다.
단테가 떠난 정신의 여행 - 스승과 함께 진실한 인생길을 대학부 교육실장 마나베 다쿠마
《신곡》의 저자 단테는 고향 피렌체에서 30대부터 민중을 위한 정치에 뛰어든다. 그러나 권력의 획책에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 선고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망명 한다. 《신곡》을 쓴 시기는 바로 그 직후다. 당시 심경을 나타내듯 이 책 첫머리는 단테가 어둠이 짙게 깔린 숲에서 길을 잃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곳에 나타난 사람이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다. 단테는 그를 스승으로 정한다. 두 사람은 괴로움이 소용돌이치는 지옥과, 사람들이 혼을 구제받고자 애쓰는 연옥을 돈다. 도중에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때로는 엄하게 혼내고, 때로는 격려해 용기를 준다. 그 여로 끝에 단테는 천국에 이르다. 그곳에서 커다란 존재인 신을 만나 '인생은 운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련에 응하는 의지로 결정된다.'고 깨닫는다. 이 책에는 모범을 보인 스승이 있었기에 자신을 응시해 올바른 인생을 걸을 수 있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 책을 통해 “사제가 있기에 제자는 고난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사제가 없으면 목숨을 건 신념의 싸움을 관철하기 어렵습니다. 인격을 단련하는 근본의 힘도 사제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대학 입학 당시,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던 나는 ‘주변을 소중히 하는 데에 자신의 행복도 있다'는 선생님의 지침 덕분에 올바른 삶을 배워 학회활동에 힘썼다. 어느새 우인에게 둘러싸여 충실한 인생을 걷고 있다. 스승이 없었다면 제멋대로 행동하며 나약하게 생활했을 것이다. 사제의 길이 바로 진실한 인생길이다. 앞으로 더욱 인간혁명하는 나날을 걷고 싶다. - 법련 2021년 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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