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다이사쿠 SGI 회장선생님 지도

2018. 7. 19. 16:32佛法 .SGI



본존(本尊)에 대하여


본존(本尊)에는 근본존경의 의의가 있다. 인생. 생명의 근본으로서 존경하고 귀의해 가는 대상이 본존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본존으로 하는가에 의해서 인생이 근저적(根低的)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종래의 불교의 본존은 거의가 불상(佛像)이다. 또한 불화(佛畵)인 경우도 있다. 초기의 불교에는 불상은 없었으나, 후세에 서방의 그리스문화의 영향 아래, 서북인도(간다라지방)에서 불상이 탄생했다. 말하자면 실크로드 교류의 한 산물이다.

 

이러한 불상. 불화를 통하여 부처의 이미지를 민중은 받아들이고, 갈앙, 신앙의 마음을 일으켜 왔던 것이다.

 

그러나 日蓮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문자의 어본존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 영상의 결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영지(英智)의 세계, 어본불의 위대한 지혜의 최고이면서 존극의 표현이라고 배견된다. 이 점에서도 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종래의 불법의 본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자는 불가사의하다. 문자의 힘은 위대하다. 예를 들면 사람의 이름이 있다. 싸인을 한다. 그 문자에는 일단, 그 사람의 인격, 입장, , 심신(心身), 역사, 인과, 그러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이라는 한자로는 2개의 문자 속에 그 국토, 사람들, 동식물 기타 일체가 포함되어 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는 법성의 기. ()은 이는 법성의 멸(천태) 이라고 하듯이, 일체의 현상은 묘법의 나타남이다.

어본존에는 변전하는 대우주(제법)의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완벽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우주의 실상이란 우리들 소우주의 경우도 완전히 똑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어서에 말씀하신 대로이다.

 

또 문자로 어본존을 도현 하시는 이유의 하나에 대하여 총본산 제65세 니치준 상인은, 회상(繪像)으로는 가령 십계까지 (문상교상에 집착된 색상장엄한 , 말법의 올바른 본존은 될 없다)를 표현할 수 있어도 십계호구 이상 (진정한 백계천여 또한 사의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이라는 어본불의 경계)은 도저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배견된다고 가르치셨다.

 

 

선도 악도 일체를 살리는 묘법


우주에는 선의 힘도 악의 작용도 있다.

어본존에는 불계의 대표인 석가여래, 다보여래로부터, 지옥계의 대표인 제바달다까지 십계의 대표가 모두 도현 되시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의 힘 작용의 대표도, 의 힘 작용의 대표도 조금도 빠짐없이 남묘호렌게쿄의 광명에 비추어져서 본유(本有)의 존형(尊形)즉 본래 있는 그대로의 존귀한 모습. 작용으로 되어 간다고 설해져 있다. 본유의 존형으로 되기 때문에 본존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어본존에게 근행. 창제할 때, 우리들의 생명의 선악의 힘도, 모두 본유의 존형으로서의 작용을 시작한다. 지옥계의 괴로움의 생명도, 아귀계의 항상 굶주림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생명도, 수라계의 비뚤어진 노여움의 생명도, 모두 자기자신의 행복과 가치를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해 간다. 불행으로 이끌리는 생명이 묘법을 근본으로 하면, 반대인 선의 방향으로 힘을 기울여 가는 것이다.

 

그것은 괴로움이라는 장작을 연료로 해서 환희와 지혜와 자비의 불길이 타올라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불을 붙이는 것이 묘법이며 신심이다.

 

더욱이 불계. 보살계. 범천. 제석 등의 선의 생명은 창제에 의해서 그 빛남이 늘어나고, 자꾸자꾸 위광세력을 넓혀 간다. 우리 소우주 속의 대일천도 대월천도 찬란하게 대광을 발산하여 생명의 어둠을 밝게 한다.

 

선도 악도 십계삼천의 모든 작용이 일체가 되어 완전 회전하여, 행복으로 상락아정의 인생으로 우리들의 생명을 끌어 가는 것이다.

 

인생에는 당연히 병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병은 묘법의 법리에 의해 본유의 병이라고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즉 병에 좌우되어, 인생을 괴로워하고 고민해 가는 그러한 일은 절대로 없다. 삼세영원의 생명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 절대적행복이라는 ""는 엄연히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생활상의 막다른 막힘도 반드시 타개되어 다음의 보다 넓고 넓은 경애로의 비약대가 된다.

 

 

창제의 소리는 시방의 불보살에 통한다


다음에 뜻을 모르는 경문을 읽고, 제목을 불러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답해 두고자 한다.

 

물론 뜻을 아는 쪽이 좋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것은 법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며, 그 깊은 뜻의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를 들면 개가 짖고, 새가 지저귄다. 개에는 개의, 새에는 새의 세계의 소리가 있으며, 말과 신호가 있다. 사람이 들어도 전연 모르지만 개끼리, 새끼리는 서로 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근행.창제의 소리는 비록 사람은 의미를 모르더라도, 어본존에게 통하고 삼세시방의 부처. 보살의 세계에는 정확히 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처. 보살의 세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대성인은 근행. 창제에 의하여 우리들은 매일 가만히 앉아서 대우주를 여행하는 그러한 대경애를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제자 단나로 되는 사람은 한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천축의 영산을 보고 본유의 적광토도 주야로 왕복할 것이니 기쁨은 말할 수 없노라(어서 1343)라고.

 

어본존을 배견하면 나의 소우주의 문은 그 자리, 그 때에 대우주에로 전개되고, 전우주를 내려다보는 그러한 유유한 대 행복감을 맛볼 수가 있다. 대충실감과 대환희, 일체를 손바닥에 넣는 듯한 대확신을 실감할 수 가 있다. 우주에 에워 싸여져 있었던 소우주가 우주를 도리어 에워싸 간다.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중략) 실상진여의 허공을 날게 되느니라(어서 1443) 라고.

 

또한 자기자신은 등()과 같지만 법화경의 소나무에 걸려 묘각의 산에 오르리라. 일승의 날개를 의지하고 적광의 하늘에도 날아가리라(어서1430)라고.

 

또 대우주로 날아가듯이 반짝이는 은하. 달리는 유성군,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무한한 확대, 깊이를 시시각각으로 맛보고, 음미하며 살아가는 상락의 경애가 된다.

 

어쨌든, 기필코 소원만족의 인생, 영원한 행복경애를 자연히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 묘법의 공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공덕도 신심 여하에 달려 있다.

 

대성인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이 대복운을 7대 까지나 되는 선조. 또한 7대 까지나 되는 자손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설하시고 있다. 얼마나 굉장한 대공덕일까.

 

신심의 대공덕은 명익에

 

마쓰노전답서성인이 부르시는 제목의 공덕과 우리들이 부르는 제목의 공덕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나이까 라고 운운. 조금도 승열(勝劣)은 있을 수 없도다. 그 까닭은 우자가 가진 금이나 지자(智者)가 가진 금이나 우자가 켜 놓은 불이나 지자가 켜 놓은 불이나 그 차별은 없느니라.(1381)

--- 성인이 부르시는 제목의 공덕과 우리들 범부가 부르는 제목의 공덕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다.

(대답하여 말하면) 그 공덕에는 승열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자가 가지고 있는 금과, 지자가 가지고 있는 금에 가치의 차이는 없고, 우자가 켠 불과 성인이 켠 불에 차이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어본존의 공덕은, 그 사람의 입장이나 재산 등에는 일체 관계없이 평등하게 나온다. 어떠한 사람도 제목을 부름으로써, 반드시 행복하게 되어 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어본존의 공덕에는 현익과 명익이 있다.

병이라든가, 업무상의 곤란이라든가, 뭔가 문제가 있을 때에 엄연히 수호를 받아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현익이다.

그와 동시에, 마치 바닷물이 밀물이 되듯이 복운을 쌓아, 풍요한 대경애를 점차로 구축해 간다. 그 경애만 구축하게 되면 어떠한 인생의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무너지는 일은 없다. 금세 뿐만 아니라 영원히 행복한 경애로 유락해 갈 수 있다. 이것이 명익이다.

 

예를 들면 태엽을 완전히 감아둔다면, 언제라도 탄력이 붙어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비축되어 있다. 느슨해져 있으면 유사시에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생명의 태엽을 감는 힘이 신심의 실천이며, 무슨 일에도 대응 할 수 있도록 충분히 힘을 완전하게 비축한 상태가, 명익에 가득 찬 인생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기필코 소원만족의 인생. 영원한 행복경애를 자연히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 묘법의 공덕인 것이다.

 

대성인도아무리 법화경을 믿으신다 해도 방법이 있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 천통에 게의 발 하나 넣음과 같도다(어서 1056) - 아무리 법화경을 믿고 있어도 방법이 있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것은 천통의 옻에 게의 다리를 하나 넣어서, 옻을 소용없게 하고 마는 것이다 - 라는 말씀이시다.

 

아무리 진지하게, 착실하게 신심을 하고 있는 듯 해도, 방법이 있으면 공덕을 없애고 만다. 그것은 아주 소량의 청산가리 때문에 금방 죽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악의 인을 만드는 것으로서, 십사비방을 드시고 있는데, 그 중에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이 있다.

신심하고 있는 사람을 경시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열심히 이 만큼 신심을 하고 있는데 공덕을 느낄 수 없다라는 경우가 있다. 그 때는 이 네가지의 비방이 있는가 없는가를 자기에게 물어 봐 주시기 바란다.

경선. 증선. 질선. 한선의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공덕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동지에게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을 명확히 말해 간다는 것은 자유이고,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생각해서 엄하게 말하는 것과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망의 말은 같지가 않다. 그 점을 깊이 깊이 판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본존 슬하에 모여, 광선유포로 전진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불자이며, 묘법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존경하고, 신뢰하고, 격려하면서 이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 주시기 바란다. 그 사람에야말로 어본존의 공덕과 제천의 가호는 더한층 늘어 간다는 점을 확신해 주시기 바란다.

 

근행이란

日蓮대성인의 불법은 생명즉우주, 우주즉생명 - 인간생명은 하나의 소우주이다 라고 설한다.

근행이란 이 소우주인 우리 자신과 대우주가 어본존을 근본으로 해서, 생생하게 교류해 가는 장대하고도 장엄한 의식이다.

 

우리 생명이 소우주인 것을 신체의 면에서 말하면,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이 둥근 것에 비기고, 두 눈은 태양과 달에 비긴다.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것은 주야(晝夜)를 나타낸다. 머리털은 빛나는 별에 비긴다. 대머리인 사람은 거의 유성(별똥별)이 되어 버렸다(큰웃음).

 

눈썹은 북두칠성에 비긴다. 여인이 화장하고 그린 눈썹은 인공위성(큰웃음). 호흡은 바람을 의미하고, 코의 조용한 숨소리는 계곡의 바람, 골짜기의 평온한 바람을 나타낸다. 큰 소리로 고함치는 리더의 숨소리는 태풍일지도 모른다(큰웃음). 모두 피난할 수 밖에 없다(큰웃음). 몸의 마디가 굽은 곳은 다해서 약 삼백육십절. 이것은 1년을 의미한다. 복부측(배부분)은 봄. 여름을, 차고 단단한 등부분은 가을.겨울을 의미한다.

 

혈관은 작은 하천. 큰 하천에 비긴다. 제방이 끊어져 홍수가 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뇌출혈이다. 뼈는 돌 등에, 피부나 살은 대지에 비기고, 몸의 털은 삼림(森林)이다. 그 밖에 내장에 대해서는 등등. 신체가 하나의 소천지(小天地)인 것을 불교경전에는 상세히 설하고 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있다. 바람이 분다. 별이 반짝인다. 땅에는 바다가 있다. 냇물이 흐른다. 화산이 불을 뿜는다. 또 금, , 동 등의 많은 광물, 칼륨, 칼슘, 그 외의 원소가 매장되어 있다. 그들의 활동, 요소가 동등하게 우리 몸에도 포함되어 있다. 우주에 있는 무수한 원자. 양자. 전자. 중성자. 중간자 등의 소립자. 세균 등의 미생물.

 

또한 중력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 외 모든 법칙, 또한 선악의 작용도 하나의 소우주에 거의 같게 관련되어 있다. 몸의 활동을 봐도 우리들의 생명은 하나의 대제약공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요한 약을 스스로 만들어 건강을 지키는 힘이 있다. 또 음식물을 섭취해 자신의 영양, 에너지로 해 간다. 또 뇌는 큰 컴퓨터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좀처럼 발휘할 수 없을 뿐이다.

60조나 되는 세포가 정연하게 질서 바르게 운동하여 생의 리듬을 새겨간다. 이것이 인간생명의 이상(理想)이다.

 

생명즉우주. 이와 같이 그 운행은 절묘하다. 태양의 열량이 조금이라도 변화하면, 지구를 비롯한 혹성은 대변동을 일으킨다. 지구의 자전(自轉)이 일순이라도 멈추면, 아니 지축이 조금 기울기만 해도, 일체의 생물은 죽음의 위기를 맞이한다. 그 만큼 미묘하다. 그러면서도 엄연히 대우주의 법이 실재한다. 소우주도 같다.

 

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법칙을 탐구한 것이 과학이고, 그 성과를 응용해 기계 등을 만든 것이 과학기술이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모든 부분적 의 근본에 있는 생명의 대법의 각지를 남묘호렌게쿄로서 인류에 나타내 주신 분이 日蓮대성인이시다. 결코 나중에 누군가가 생각해 낸 것은 아니다. 묘법은 대우주도, 일체의 소우주도 동일하게 일관하고 있다. 우주와 인간은 묘법에 있어서 일체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은 때로는 눈에 보이는 존재로 되어 나타난다.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는 하나의 도 우주에 융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수태(受胎)를 연으로 하여 이 세계에 현현해 온다. 또 단적으로 말하면, 배는 보이지 않는 부력의 법칙이 보이는 형태로 결정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행기는 양력의 법칙, 라디오와 TV전파라고 하는 법칙등을 각각 형태로서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과 원래 차원은 다르지만 우주와 생명의 근원의 一法도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묘법의 공력을 범부도 느낄 수 있도록, 대성인이 자신의 경계로서 도현 하신 것이 어본존이다.

법화경을 비롯한 타경문은 어본존의 설명서로 된다. 도다 선생님은 어본존을 황송한 일이지만 행복제조기에 비유할 수 있다라고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셨다. 이 어본존에게 근행. 창제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대우주와 완전히 조화한다. 우주도 생명도 다 같이 남묘호렌게쿄의 당체이다. 어본존도 남묘호렌게쿄의 당체이시다. 그러므로 근행. 창제할 때 어본존을 근본으로 해서 우리 생명과 우주가 정확히 기어를 맞추어 소리를 내며 회전을 시작한다. 소우주의 일념은 즉, 대우주의 삼천여시. 세간과 일체가 되어 큰 가치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근행은 소우주가 본래 가진 무한한 힘을 끌어내어 회전시키는 실천이다. 숙명이 전환되어 막다른 길이 개척되고 고뇌가 행복으로 바뀐다 라고 하는 소우주의 변화, 혁명. 이것은 우리 생명 속의 광선유포의 하나의 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광선유포는 이 대우주. 지구의 천지도 인류사회도 묘법의 리듬에 따른 평화안온의 조화의 세계로 바꾸어 가는 운동이다.

 

차도 다른 기계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고 순조롭게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 적당히 운전하고 기름을 치고 정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머리털의 경우도 방치해 두면 비듬투성이가 되어 버린다(웃음). 생명도 근행을 하지 않으면 리듬이 어긋나 녹슬어 버리기는 이와 마찬가지이다.

 

근행. 창제에 의해 엔진을 걸고 행복의 방향으로 정의의 방향으로 매일 용감하게 계속 달려간다. 그 반복에 의해 차츰 우주의 과 완전하게 합치한 생명이 된다. 그것이 부처의 생명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영원히 자재(自在)이며 유락(遊樂)의 생명이다. 삼세에 무너지지 않는 금강의 몸으로 된다. 따라서 일생성불을 위해 절대로 퇴전해서는 안 된다 라고 대성인은 엄애로써 말씀해 주시고 있다.

 

가령 일시적으로 괴롭고 쓸쓸한 날들이 있어도 번죄즉보리의 법리로, 고뇌는 반드시 큰 환희와 진보와 가치로 바뀌어 간다. 어본존에게는 그 무한한 법력. 불력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 걱정도 없다.

 

흔히 강성한 신심이라든가 용맹정진, 용기 있는 행동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강한 마음과 용기 있는 실천이 없으면 어떠한 위업도 성취할 수 없는 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대화에서도 명쾌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 용기가 없어 애매하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고 있으면, 상대방의 가슴에 찡하게 가 닿을 리가 없다. 더욱이 상대방의 마음을 파악해, 움직이게 하고 또 감명을 주기 위해서는 강한 일념의 파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