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생길을 밝혀주는 등대와 같은 신심의 힘!

2015. 11. 30. 14:05佛法 .SGI

 인생길을 밝혀주는 등대와 같은 신심의 힘!

 

신천권  권선옥

경북 청송 오지마을에서 우리가족은 남의 논을 빌려 생계를 꾸려야하는 소작농으로 살았는데 5남매를 데리고 몸 아끼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도 언제나 궁핍한 살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동네에서도 따돌림을 당해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동네사람들이 머리에 이고 등에 짐을 지고 절에 공양을 하러 다니고 때때로 방생을 하러다니는 것을 보며 나도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어려운 살림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도 남들처럼 돈 걱정 안하고 살아봤으면... 남들처럼 일 걱정 안하고 훨훨 돌아다녀봤으면...’ 라는 생각이 간절해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에 치여 자나 깨나 막막한 심정이었다.

그러다 1992년 이웃 아주머니로부터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면 어떠한 소원도 이뤄지고 공양에 대한 부담도 없으니 같이 해보자.” 고 불법을 권유 받았을 때, 마음은 있었지만 사는 게 바빠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얼마 후 면소재지로 이사를 나왔을 때 우연히 회원님과 연결이 되어 좌담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신심을 하기 시작했다.

1994년 몸이 너무 아파 안동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병이 위중해 지방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으니 대구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유해서 일단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여러 가지 정밀검사를 한 결과 간 담석증 진단이 났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 의술로는 도저히 수술이 어렵다고 고개를 저으며 외국에서 의사를 초빙해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가난한 시골 살림에 수술까지 하면 그 많은 병원비를 어떻게 가당할 것이며, 만약 그러다 내가 죽으면 아이들에게 큰 빚만 짐으로 남길 것 같아서 그대로 죽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때 경대를 졸업하고 경북도청에 공무원으로 갓 취직한 큰아들이 “어머니가 안 계시면 안 됩니다. 우리 5남매는 어찌 살라구요.” 라며 울면서 간곡히 설득하는 바람에 결국 수술받기로 결정했다.

수술을 집도할 의사가 2달 후에나 외국에서 온다고 해서 가퇴원을 하고 집에 있는 동안 온 힘을 다해 제목을 불러 나갔다.

2달 후 재입원을 하여 외국의사의 집도로 수술을 받은 후 중환자 무균실로 옮긴 나는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모두들 걱정하는 속에 불력, 법력으로 8일만에 겨우 의식이 돌아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변이 안 나와 고생을 했지만, 의사와 간호사가 제천이 도어 해결할 수 있었고 수술도 성공적이었고 회복도 빨랐다.

의식을 찾고부터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이 병은 부처의 계책이신가. 그 까닭은 정명경, 열반경에는 병이 있는 사람은 부처가 된다는 뜻이 설하여져 있다. 병에 의해서 도심은 일어나느니라⌟(어서 1480쪽)라는 어성훈을 가슴에 새기며 가안 기원으로 마른 흙에서 물을 구하는 심정으로 부처님께 살려달라고 기원을 거듭해갔다.

한 달 정도 지나 퇴원할 만큼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그렇게 병원생활을 끝으로 오늘날까지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이 일을 계기로 본존님의 불력을 크게 확신하게 되었고, 부처님께 받은 목숨을 열심히 광포를 위해 쓰겠노라 ㄷ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신심을 지속해나왔다.

1998년 큰아들 결혼식이 있던 날, 둘째아들의 사법고시 최종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져 결혼식에 모인 하객들은 집안에 겹경사가 났다며 한마음으로 모두 축하해주었다.

결혼 전부터 신심을 하며 교직에 몸담고 있던 큰며느리는 36살의 늦은 나이에 시집을 와 바로 입신이 되었지만 자궁에 물혹이 있어 임신 기간 동안 혹이 자라면 아이와 산모 둘 다 위험하다고 아이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전국의 유명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를 해봐도 결과는 모두 같아 결국 며느리는 1년 휴직을 한 후 태아를 지키기 위해 아무 일도 못한 채 오로지 기원에 기원을 더해갔다.

나 역시 손주와 며느리를 지키기 우해 밤낮으로 제목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 결과 다행히 혹이 커지지 않아 건강하게 아들을 순산하는 공덕을 받았다. 며느리는 아이를 낳은 후 물혹 제거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건강하게 반담으로서 또 미술교사로서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둘째아들은 공공기관 변호사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하여 검사시험을 본 결과, 2007년 검사로 발령을 받아 검찰청에서 차장검사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얼마 후 미국 유학시험에도 합격해서 지금은 학비, 생활비 모두 국가에서 지원받으며 가족과 함께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던 유학을 떠나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맏사위는 철도청에, 둘째딸은 농협에, 둘째 사위는 군청에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며 근무 잘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 가정을 등한시하며 무책임했던 남편이 2001년 어느 날 속이 답답하고 갑자기 체중이 줄며 기운이 없다고 해서 병원을 갔더니, 많은 나이에다 합병증으로 더 이상 치료는 불가능하다며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다.

남편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을 거듭하는 속에 1년 6개월 후 평온한 모습으로 영산으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 후 나는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대구에 있는 큰 아들 집에서 손자의 재롱과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며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2008년에는 교사로 근무하는 막내딸이 갑상선 수치가 너무 높아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술을 하면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아직 미혼인 딸의 몸이 건강해야 결혼도 하고 직장도 계속 다닐 수 있기에 제목으로 반드시 변독위약 시키겠다고 결의하고 제목에 도전해갔다.

그 후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다시 조직검사와 정밀검사를 한 결과 암이 아니라는 판정과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된다는 진단을 받고 다시 한 번 부처님의 불력을 크게 확신하며 깊은 감사의 제목을 올렸다. 그 후 막내딸과 함께 북유럽 4개국을 여행하면서 생애 잊을 수 없는 추억도 만들었다.

내 나이 일흔 일곱, 뒤돌아보면 순간순간 부처님의 공덕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잘 타고 넘어 오늘의 이 행복을 맛보고 있음에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요즘은 잠자고 밥 먹는 시간외에는 제목을 부르며 ‘본존님, 제가 부르는 제목 한 마디 한마디가 아이들의 앞길을 열어주는 등대가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원하며, 생이 끝나는 날까지 물과 같은 신심으로 법화경 행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끝으로 제가 힘들 때마다 격려해주신 간부님과 많은 회원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다.

 

                                              


출처 : KSGI 한마음 카페
글쓴이 : 도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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