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5. 16:13ㆍ佛法 .SGI
-사프란 크로커스(saffron crocus)꽃-
(6-7)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마주하다 / 이케다 SGI 회장 지도선집 (법련 2015년 1월호)
이케다 SGI 회장 지도 선집(指導選集)
행복과 평화를 창조하는 지혜
제1부 행복을 위한 지침
제6장 '생사(生死)를 마주하다'
(6-7)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마주하다
문하인 난조 도키미쓰와 그 어머니에게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이 격려하신 내용을 통해 '애별리고(愛別離苦)'의 고뇌를 어루만지는 불법(佛法)의 영지(英智)를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제2총도쿄대표자회의 스피치에서(20069년 2월 20일, 도쿄)
인간은 어떻게 해야 본디 지닌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뇌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 확실한 해결의 빛을 비춘 것이 불법(佛法)의 영지(英智)입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 또한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불법은 이 점에 대해서 명쾌하게 시사했습니다.
난조 도키미쓰의 아버지는 도키미쓰가 일곱살 때, 젊은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성인에게 귀의해 한 집안의 숙명전환의 길을 엄연히 연 아버지었습니다.
대성인은 도키미쓰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가신 남편은) 살아계실 때는 생(生)의 부처, 지금은 사(死)의 부처입니다. 생사 함께 부처입니다." (어서 1504쪽, 통해) 하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묘법을 근본으로 꿋꿋이 사는 생명은 '생도 부처' '사도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는 큰 경애를 유유하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도키미쓰의 어머니는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강성한 신심을 관철하며 도키미쓰를 비롯한 자식들을 훌륭한 후계자로 육성했습니다. 자식들도 아버지에게 배운 신심을 의연하게 계승했습니다.
도키미쓰도 당연히 '자신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많은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대성인은 도키미쓰의 그 마음을 깊이 헤아려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이 경(經)을 수지하는 사람들은 타인이라도 같은 영산(靈山)에 가서 또 만나게 됩니다. 더구나 돌아가신 아버지도 그대도 같은 법화경(法華經)을 믿고 있으므로 반드시 같은 곳에 태어나게 됩니다."어서 1508쪽, 통해)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묘법으로 맺어진 인연은 영원합니다. 하물며 묘법을 근본으로 사는 가족은 같은 곳에 태어나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가사의한 묘법의 역용(力用)입니다.
대성인 문하 중에는 사랑하는 횰륭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일을 계기로 발심하여 부모와 함께 묘법을 깊이 신앙하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 부모는 착실하게 묘법을 수행하고 진심을 다해 대성인을 섬겼습니다.
대성인은 그 신심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의 횰륭한 신심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이는 오로지 석가불(釋迦佛)이 그대들의 몸에 바꾸어 들어가신 것인가. 또 돌아가신 자식이 부처가 되어 부모를 불도(佛道)로 이끌기 위해 그대들의 마음에 바꾸어 들어가신 것인가."(어서 1397쪽, 통해)
"그대들에게 만약 어떤 일이 있으면 어두운 밤에 달이 떠오르듯,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다섯 글자가 달이 되어 나타나 그대들의 앞길을 비추겠지요.
그리고 그 달 속에는 석가불, 시방(十方)의 제불은 물론이고 먼저 떠난 자식도 나타나 그대들을 이끌 것이라고 확신하세요."(어서 1397쪽, 통해)
묘법으로 맺어진 생명은 생사를 뛰어 넘어 서로 함께 더불어 격려하고 지키며 이끌어 절대적인 행복과 승리의 궤도를 나아갑니다.
묘법의 세계에는 비탄도 없거니와 비관도 없습니다. 묘법을 수행하는 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달빛에 감싸입니다. 그리고 그 업적이 뒤를 잇따르는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법련 2015년 1월호
(6-8) 자신의 성불(成佛)이 고인(故人)의 성불로
이 절(節)에서는 성훈을 바탕으로 자신의 성불이 고인에게 진정한 추선(追善)이 된다는 불법의 법리(法理)를 말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춘계피안근행법요 스피치에서 (2006년 3월 21일, 도쿄)
니치렌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니치렌과 제자들이 돌아가신 성령(聖靈)을 추선하고 법화경을 독송하며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할 때, 제목의 빛이 무간지옥(無間地獄)에까지 이르러 즉신성불(卽身成佛)시킨다. 회향문(廻向文)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어서 712쪽, 통해)
제목의 힘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우리가 부르는 제목의 '광명'은 우주 구석구석까지 미치어 무간지옥의 경애로 괴로위하는 중생을 비추고 즉신성불시킵니다.
<사지키부인답서>에는 "이 공덕은 그대의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중생에게도 미지겠지요."(어서 1231쪽, 통해) 하고 씌어 있습니다. 광포를 위해 살아가는 신심의 위대한 공덕은 죽은 사람과 자손만대까지 전해집니다.
참된 추선은 묘법밖에 없습니다. 묘법의 공력은 금세(今世)뿐 아니라 삼세(三世)에 걸쳐 사람들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니치렌대성인 문하 중에 조렌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조렌보의 부친은 염불종 신앙자였습니다. 대성인은 이 조렌보에게 "부모가 남긴 몸은 자식의 색심(色心)이다. 조렌상인(淨蓮上人)이 법화경을 수지한 공덕은 자부(慈父)의 공덕이 된다."(어서 1434쪽, 통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심을 하지 않던 부모라도 자식인 자신이 묘법을 수지하면 그 공덕은 부모의 공덕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부모 덕분입니다. 이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성불은 부모의 성불로 이어집니다.
과거에 어땠느냐가 아닙니다. '지금'으로 결정됩니다. 선조가 어땠느냐가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가로 결정됩니다. 스스로 깨달은 '한사람'이 태양이 되어 한 집안과 한 가문을 묘법의 빛으로 비추면 됩니다.
"자신이 부처가 되지 못하면 부모조차 구하기 어렵다. 하물며 남을 구하는 일은 더욱 할 수 없다."(어서 1429쪽, 통해)는 성훈을 마음 깊이 새깁시다.
-법련 2015년 1월호
(6-9) 묘법의 인연은 영원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하고 솔직하게 묻는 고등부원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내며 대답합니다.
이케다 SGI 회장 지침
<청춘대화 2>에서 (2000년 9월 발간)
니치렌대성인은 "만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다정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석가불의 안내로 영산정토(靈山淨土)에 가서 만나십시오."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여성이 그리워하는 자식을 만나지 못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법화경에) 설해져 있습니다."(어서1576쪽, 취의)
영산정토에서 만난다는 의미는 "죽은 자녀도 성불했습니다. 그대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불계의 세계에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주에 녹아든 생명이 상대방과 일체감을 느낀다고도 할 수 있으며, 우주의 다른 불국토(佛國土)에서 만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우주 전체의 은하(銀河)계는 약 1,250억개'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 되었습니다.(미국천문학회에서. NASA(미국항공우주국)의 허블 우주망원경으로 관측한 것을 근거로 한 것)
그래도 불법의 우주관에서 보면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근행할 때 읽는 법화경 수량품에는 그보다 훨씬 광대한 우주상(宇宙像)이 설해져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무한(無限)'을 표현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굉장합니다.
어쨌든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은 지구만이 아닙니다. 수없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불국토'에 다시 함께 태어나는 경우도 있겠지요. 또 지구를 비롯해 '아직 광선유포하고 있는별'에 함께 태어나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모두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입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사별했다'고 해도 잠시 먼 곳으로 떠났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 가서 잠시 만날 수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도다(戶田) 선생님도 젊을 때 자식을 잃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물세 살 때, '야스요'를 잃었습니다. 여자아이입니다. 나는 밤새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어본존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도 슬퍼 아이를 껴안고 있다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별하여 이제 나는 쉰여덟 살입니다.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당시 세 살이었으니까 상당히 훌륭한 부인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금세에 이미 다시 만났을지도….그것은 신심으로 감득(感得)할 문제입니다. 나는 그 아이를 만났습니다. 금생에서 만나든, 내세에서 만나든 모두 신심으로 감득 할 문제입니다.(<도다조세이 전집>2)
이것은 자식을 일찍 여읜 사람을 격려하신 말씀입니다. "금세에 그 아이와 또 다시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답하신 말씀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딸을 여윈 뒤에 부인도 사별했습니다. 자식과 아내를 먼저 보내고 괴로움에 시달렸지만, 그렇게 온갖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지금 수 많은 사람을 격려할 수 있다, 대중의 지도자로서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는 슬프고 괴로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아도 지지 않고 꿋꿋이 살면 나중에 '아아,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것이 신심의 힘입니다. 또 그것이 인생의 진수(眞髓)입니다.
-법련 2015년 1월
(6-10) 뜻밖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소설 《신·인간혁명》에는 어느 지방의 중심 간부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야마모토 신이치가 급히 달려가 모두를 격려하고 불법의 깊은 생사관을 말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소설 《신·인간혁명》10권 ‘언론성’에서
(2001년 10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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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렌대성인은 어서(御書) 곳곳에서 ‘삼장사마(三障四魔)’에 대해 설하셨는데 그중 ‘사마(死魔)’가 있습니다. 불법에 정진(精進)하는 사람이 죽음으로써 신심에 대한 의심과 미혹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숙업이 있는데 범부는 그 숙업의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설령 젊은 나이로 죽었다 해도 신심을 관철한 사람은 숙업을 ‘전중경수(轉重輕受: 무거운 것을 바꾸어 가볍게 받는다)’한 죽음입니다.
어쨌든 참된 신앙자로서 광선유포를 위해 힘쓰는 사람은 어떠한 형태로 일생을 마친다 해도 틀림없이 성불합니다.
초기의 불전(佛典)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하남(마하나마)이라는 재가(在家) 신자가 있었습니다. 마하남은 만약 혼잡한 거리에서 삼보(三寶)에 대한 마음을 잊고 있을 때 재난을 만나 목숨을 잃는다면 자신은 어디서 어떠한 생을 받게 되는가 하고 불타(佛陀)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불타는 말했습니다.
“마하남이여, 예를 들어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는 동쪽을 향하여 동쪽으로 기울어져 동쪽으로 뻗고 있다. 만약 그 뿌리를 자른다면 나무는 어느 방향으로 쓰러지겠는가.”
마하남은 답했습니다.
“그 나무가 기울어져 뻗고 있는 방향입니다.”
불타는 불법에 귀의하여 수행에 힘쓰는 사람은 설령 사고 등으로 뜻밖의 죽음을 당해도 법의 흐름에 따라 선처(善處)에 태어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
신이치는 이시자키의 죽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시자키 씨가 사고로 돌아가신 것을 보고 ‘신심하고 있는데 왜 그런 사고를 당하는가’ 하고 생각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깊은 인과는 그리고 숙명은 참으로 엄합니다. 그러므로 신심을 하고 있어도 여러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마키구치(牧口) 선생님처럼 옥중에서 돌아가시어 순교(殉敎)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병이나 사고로 젊어서 죽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심의 눈으로 보면 거기에는 깊고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은 지용보살입니다. 부처의 권속(眷屬)입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묘법의 원리에서 보면 그 지용보살이, 부처의 권속이 구제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뒤에 남은 가족도 반드시 수호를 받습니다.
신심을 관철하면 광포를 위해 헌신하신 남편의 복운과 공덕까지 이어받아 반드시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진다고, 저는 선언합니다.”
신이치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모두의 마음을 뒤덮고 있던 미혹의 암운(暗雲)이 걷히고 희망의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편이 안 계시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명예나 영달도 재산도 결코 행복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진실한 행복, 절대적인 행복은 신심을 통해 자신이 묘법의 당체(當體)임을 자각하고 인간혁명하여 부처의 위대한 생명을 용현하는 것 외에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혼자입니다. 삼세에 걸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묘법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면 삼세시방(三世十方)의 불보살(佛菩薩)이 옹호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말을 들어도 또 아무리 괴롭힘을 당해도 절대 분동하면 안 됩니다. 만약 겁쟁이가 되어 신심에서 멀어지면 결국은 비참해집니다.
생명은 영원하지만 일생은 순식간에 끝나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을 자각하고 광포를 위해 달리면서 대복운을 쌓기 바랍니다.”
(6-11) 성불의 증거는 명확히 나타난다
이 절에서는 신심을 근본으로 후회 없이 끝까지 산 사람의 임종(臨終)에 관해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수필 신·인간혁명’ 〈불법의 생사관〉에서
(2000년 11월 3일, ‘세이쿄신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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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프랑스 청년들과 함께 루아르 지역을 걸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삶을 마감한 집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이 르네상스의 거인이 최후를 맞이한 침실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말이 새겨진 동판이 있습니다.
“충실한 생명은 길다.
충실히 보낸 하루하루는 편안한 잠을 이루게 한다.
충실히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좋은 일생을 후회 없이 끝까지 산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는 없습니다.
특히 우주와 생명을 관철하는 영원한 법칙에 따르며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위해 싸우며 나아간 인생이 얼마나 환희 찬 정상에 도달하는가.
니치렌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퇴전(退轉) 없이 수행해 마지막 임종 때를 기다려 보시라. 묘각(妙覺)의 산에 달려 올라가 사방(四方)을 쫙 바라보면 얼마나 즐겁고 기분이 좋을까. 법계(法界)는 모두 적광토(寂光土)로서 유리(琉璃)를 가지고 땅으로 하고, 황금 밧줄로 길을 여덟 개로 구분했다. 하늘에서 네 종류의 꽃이 내리고 공중에서는 음악이 들리며,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바람에 산들거리며 진심으로 기뻐하신다. 우리도 그 속에 들어가 유희(遊戱)하고 즐기게 될 때가 다가왔다.”(어서 1386쪽, 통해)
이것이 우주에 율동하는 불계, 보살계라는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입니다.
대성인 재세 시, 광선유포에 불멸의 공로를 남긴 난조 가문에서는 도키미쓰의 막내동생인 시치로고로가 열여섯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었습니다.
마음씨도 외모도 매우 시원시원하고 대성인에게도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남편을 먼저 떠나 보냈을 때 뱃속에 있었던 사랑하는 자식입니다.
대성인은 그 갑작스러운 죽음을 매우 깊이 슬퍼하며 성불은 틀림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편지 추신(追伸)에서는 “석가불, 법화경에 몸담고 있었으니 임종도 훌륭하셨으리라.”(어서 1568쪽)라고.
설령 너무 젊은 나이의 죽음이나 뜻밖의 죽음처럼 보여도 성불의 증거는 분명히 나타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애석해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남겨진 가족이 수호 받고 번영하는 모습입니다.
가족이 강하게 꿋꿋이 살아갈 때, 죽은 사람은 그 가슴속에 엄연히 계속 살아 있습니다.
대성인은 격려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비모(悲母)가 자기 자식을 그립다고 생각한다면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러 돌아가신 부군(夫君)과 자식과 같은 곳에 태어나겠다고 기원하세요.
한 종자(種子)는 한 종자이며, 다른 종자는 다른 종자입니다. 같은 묘호렌게쿄의 종자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면 같은 묘호렌게쿄의 나라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 세 사람이 얼굴을 마주할 때, 얼마나 기쁘고 기쁠까요.”(어서 1570쪽, 통해)
심원(深遠)한 법리를 바탕으로 동화처럼 행복한 로망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불법입니다.
(6-12) “병에 의해서 도심(道心)은 일어납니다.”
성훈에 비추어 불법은 병마저 성불하는 계기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와카야마현기념총회 스피치에서
(1988년 3월 24일, 와카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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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병을 앓은 사람은 인생의 깊은 맛을 안다고 합니다. 불법에서는 ‘병’도 궁극의 목적인 ‘성불’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평가합니다. 고통스러운 병이라는 불행이 그대로 영원에 걸쳐 절대적 행복으로 가는 발판이 됩니다.
어서에 “이 병은 부처의 계책(計策)이신가. 그 까닭은 정명경(淨名經), 열반경(涅槃經)에는 병이 있는 사람은 부처가 된다는 뜻이 설해져 있소이다. 병에 의해서 도심(道心)은 일어납니다.”(어서 1480쪽)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남편이 병에 걸린 부인에게 “이 병은 부처의 계책일까요. 왜냐하면 정명경과 열반경에는 ‘병이 있는 사람은 부처가 된다.’고 설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병에 의해 불도를 구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하고 따뜻하게 격려하셨습니다.
자재(自在)롭고 커다란 대성인의 지혜와 자애가 가슴에 다가오는 지도입니다.
확실히 보통 때는 어쨌든 병으로 괴로우면 누구나 열심히 제목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또 그러한 고난의 때야말로 더욱더 신심의 불꽃을 태워야 합니다. 병을 불행으로 가는 출발점으로 하는가, 더 큰 행복의 궤도로 가는 시작으로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제목의 힘은 병을 극복하는 강한 생명력을 가져올 뿐 아니라 생명 깊은 곳에 있는 숙업도 전환합니다. 생명의 ‘아(我)’를 불계로 상승시켜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 경애로, 무량한 복덕을 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병이라는 마이너스를 본디 건강체라는 제로에 되돌릴 뿐 아니라 더 큰 플러스의 방향으로, 행복의 방향으로, 멋지게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역용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고난도 용감하게 비약하는 계기로 삼는 ‘불굴의 신심’입니다.
‘신심을 하면 어떠한 병도 바로 치유되는가.’ 하나같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숙명적인 문제도 있고 신심의 강약도 있습니다. 또 범지(凡智)로는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깊은 의미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심만 강성하면 반드시 건강한 방향으로, 행복한 방향으로, 성불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삼세(三世)의 생명에서 보면 우리 생명은 가장 좋은 방향으로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숨이 있는 한 묘법을 부르고 또 불러 ‘광선유포를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라는 정열적인 일념을 환하게 계속 불태웠으면 합니다.
그 단련된 강하고 강한 신심의 ‘마음’이 바로 ‘생사’의 괴로움도 유연히 타고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6-13) ‘늙음’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다
‘노화’와 ‘병’ 그리고 ‘죽음’을 외면하는 일은 ‘교만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석존의 통찰을 언급하며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해 말합니다.
※ 더욱이 이케다 SGI 회장이 2013년 발표한 1·26 ‘SGI의 날’ 기념 제언에서도 ‘석존이 지적한 교만한 마음’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제언 발췌 내용을 게재)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제3의 인생’을 말한다》에서
(1998년 10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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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전에 석존이 ‘생로병사’ 중 ‘노’와 ‘병’과 ‘사’의 ‘세 가지 교만’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노인에 대한 혐오’가 있는데 이것은 ‘젊은이의 교만’입니다.
‘병자에 대한 혐오’가 있는데 이것은 ‘건강한 사람의 교만’입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혐오’가 있는데 이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교만’입니다.
석존이 말한 이 ‘세 가지 교만’은 결코 과거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고령사회 문제가 논의되고 사회의 변화와 미비된 제도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지금 사람들에게 깃든 ‘교만한 마음’에 빛을 비추고 인간을 변혁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자칫하면 자신과 다른 것을 경멸하거나 혐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기념강연(1993년 9월,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 《이케다 다이사쿠 전집》제2권 수록)에서 이야기 한 ‘차이에 대한 집착’입니다.
석존은 그것을 사람의 마음에 꽂힌 ‘보이지 않는 화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차이에 대한 집착’이 자기 생명의 영역을 스스로 작게 만들고 막아 버립니다. 자신의 지금 경애로밖에 살 수 없게 만듭니다.
어느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고 생각하면, 현대인이 그렇게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외면하는 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닫고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늙음’에 대한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연장자가 지닌 커다란 인생 경험은 본인에게도 주변 사람에게도 그리고 이 세상에도 매우 소중한 재산입니다.
어서에는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이 연장자를 소중히 하고 그 지혜를 존경한 사람이며 “주 왕조 8백년 번영의 근본은 이 왕의 치세(治世)에 있다.”고 씌어 있습니다.
연장자의 원숙미에서 나오는 말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지혜와 무게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을 나는 수없이 알고 있습니다.
광포 활동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자신을 구축한 사람은 빛납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6-14) 생사의 고뇌를 바꾸기 위해
여기서는 생사의 고뇌를 타고 넘어 영원히 이어지는 행복 경애를 열기 위해 금세에서 ‘마음의 재보’를 쌓는 불도수행이 중요함을 말합니다.
[이케다 SGl 회장 지침] 오키나와 청년부 대표 연수 스피치에서 (1988년 2월 19일, 오키나와) -----------------------------------------------------
이러한 불교설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석존 곁에, 먼 곳에서 찾아온 바라문(婆羅門) 장로(長老)의 수행자 일곱 명이 있었습니다. 그 수행자들은 방 한 칸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처럼 석존 곁으로 불도를 구하러 왔으면서 날마다 방에 모여 잡담을 늘어놓고 흥겹게 웃으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수행자 일곱 명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오사(五事)를 바라며 그것이 충족되면 스스로 만족한다. 오사란 첫째 젊기를 바라고, 둘째 용모가 단정하기를 바라고, 셋째 힘이 충분하기를 바라고, 넷째 재산이 풍족하기를 바라고, 다섯째 사회적인 신분이 높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의지할 만한 것인가. 그대들은 날마다 하찮은 잡담을 하면서 웃고 지내는데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렇게 편히 사는가.” 그리고 석존은 다시 한번 인생은 무상신속(無常迅速)하며 인생에는 생로병사라는 ‘사고(四苦)’가 있다고 설해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듣고 수행자 일곱 명은 비로소 자신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마음을 고쳐 먹어 수행에 힘썼다고 합니다.(법구비유경) “그대들은 무엇을 믿고 사는가.” 이것이 석존의 물음이었습니다. 이 인생은 무엇을 양식으로 삼으며 살아야 하는가. 니치렌대성인은 ‘곳간의 재보’ ‘몸의 재보’ ‘마음의 재보’라는 세 가지 ‘인생의 재보’를 제시하셨습니다.(어서 1173쪽) 이 설화 속의 ‘오사’란 이른바 ‘곳간의 재보’와 ‘몸의 재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산은 말할 나위도 없이 ‘곳간의 재보’입니다. 젊음, 외모, 건강이나 능력 같은 힘, 지위나 신분 그리고 명성은 ‘몸의 재보’입니다. 모두 인생과 생활상의 가치이며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이 과연 인생의 진실한 ‘보배’이자 영원한 ‘양식’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 필요도 없습니다. 재산이 있기 때문에 위협을 당하거나 살해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질투를 받거나 함정에 빠지는 여성도 많습니다. 명성과 힘을 믿고 교만에 빠져 인생을 그르치는 사람, 지위가 높기 때문에 권력의 마성에 마음이 잠식된 사람들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이중에 영원히 계속되는 ‘보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곳간의 재보’와 ‘몸의 재보’는 결코 진실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인생의 양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적어도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하는가. 대성인은 “마음의 재(財)가 제일이로다.”(어서 1173쪽) 하고 명쾌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마음의 재보’는 ‘신심’입니다. 신심이 바로 인생의 영원한 ‘보배’이자 ‘양식’입니다. ‘신심’에는 무량한 공덕과 무변한 복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토마저 변혁하는 우주대의 역용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환희와 절대적 지혜 그리고 자비의 원천이며 ‘곳간의 재보’와 ‘몸의 재보’도 모두 영원한 행복으로 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 최고의 ‘인생의 양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그 무한한 힘을 어떻게 끌어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은 빠릅니다. 망설이거나 푸념하거나 남을 비판하면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또 자신의 게으름에 지는 동안, 청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맙니다. 소중한 하루하루입니다. 여러분은 현실 사회에서 씩씩하게 살면서 아울러 ‘대우주’를 우러러보며 ‘영원’을 생각하는 드넓은 경애로 하루가 천년에도 천겁(千劫)에도 통하는 충실한 청춘과 인생을 보내기 바랍니다.
별첨 : 제38회 1·26 ‘SGI의 날’ 기념제언 ‘2030년을 향해 평화와 공생의 큰 조류를’에서 (2013년 1월 26일 ‘세이쿄신문’ 게재)
불법(佛法)이 성립할 때 그 출발점에 가로놓였던 문제도 ‘여러 괴로움에 부닥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은가.’ 하는 주제였습니다. 왕족으로 태어나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보장받은 석존이 젊은 시절에 출가를 결심하기까지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승(傳乘)에 함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석존의 본 마음은 생로병사를 인생에 수반하는 근본적인 고뇌로 여기고 무상하다고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석존은 ‘어리석은 범부(凡夫)는 자신이 늙고 또 늙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도, 타인이 노쇠해지는 모습을 보면, 생각에 잠겨 고민하며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자신이 늙는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사람들이 병이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그때의 심경을 회상합니다.(나카무라 하지메 (《고타마 붓다》Ⅰ, 《나카무라 하지메 전집 ‘결정판’》11 수록, 슌주샤) 어디까지나 석존은 마치 자신은 늙고 병들지 않을 것처럼, 늙고 병든 사람들을 기피해야 할 존재로 차별하는 ‘교만한 마음’을 주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주위에서 포기한 고령자나 홀로 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면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수도승(修道僧)이 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석존이 ‘그대는 왜 괴로워하는가. 그대는 왜 홀로 있는가.’ 하고 묻자, ‘저는 천성이 게을러서 타인을 간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앓아도 간병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석존은 ‘선남자(善男子)여, 내가 지금 그대를 돌보겠다.’ 하고 더러워진 깔개를 바꾸고 게다가 몸도 손수 씻겨주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리고 석존이 ‘열심히 수행하시오.’ 하고 말하니, 수도승은 심신이 함께 기쁨에 넘쳤다.”(현장 《대당서역기》미즈타니 마사나리 번역, 《중국 고전문학 대계》22 수록, 헤이본샤) 미처 생각지도 못한 헌신적인 간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석존이 다른 건강한 제자들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을 자신에게도 해주었다는 사실이, 꺼질 듯한 그의 생명에 ‘존엄의 등불’을 틀림없이 다시 타오르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화를 다른 경전에 설해진 전승과 대조하면, 석존의 또 다른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석존은 수도승을 간병한 뒤,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하나하나 물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전부터 수도승이 중병으로 괴로워한다는 사실도, 어떤 병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한 사람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제자들의 답변은 수도승이 병상에 누워 말한 그대로 ‘그가 다른 수도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간병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이 답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평소 행동이 나쁘니까’ ‘본인의 노력이 부족하니까’하는 자기책임론에 통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수도승에게는 운명론을 감수하는 ‘체념’이 되어 마음을 쇠약하게 만들었고, 다른 제자들에게는 방관을 정당화하는 ‘교만’이 되어 마음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제자들의 흐린 마음을 맑게 하려고 “나를 섬기려는 자는 병자를 간호하라.”며 반성을 촉구하듯 설했습니다. 즉 불도(佛道) 수행은 다름이 아니라 눈앞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내 일처럼 정성을 다해 고락을 함께하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존엄의 빛을 되찾은 사람은 괴로움에 빠진 사람뿐 아니라, 그 괴로움을 함께하려는 사람도 포함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생명은 존엄하다고 하지만 저절로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호관계에서 타자의 생명이 참으로 ‘둘도 없이 소중한 것’임이 명확해지고, 그 생명을 어디까지나 지키고 돕겠다는 마음이 자신의 생명도 장엄하게 합니다. 또 석존이 앞에서 말한 ‘나(부처)’와 ‘병자’를 하나로 보며 가르치고자 한 점은 병든 몸이든 늙은 몸이든 인간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점에서는 전혀 다름이 없고 차별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 뜻에서 말하면 타인이 병들고 늙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인생에서 패배한 사람이라고 보면 잘못일 뿐 아니라 서로의 존엄을 멸시하는 태도가 됩니다. 석존의 사상 중에서 ‘법화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니치렌대성인은 ‘법화경’에 생명존엄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보탑(寶塔)의 모습에서 “사면(四面)이란 생로병사이며 사상(四相)을 가지고 우리들의 일신(一身)의 탑을 장엄(莊嚴)하느니라.”(어서 740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보탑을 형성하는 네 면은 생로병사에 따르는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네 개의 상<相>)으로 더욱더 눈부시게 빛납니다. 그러므로 언뜻 보기에 불이익으로 보이는 노화나 병 그리고 죽음도 인생을 장엄하게 하는 양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존엄이라고 해도, 현실의 여러 고뇌를 떠나서는 본디의 빛을 발할 수 없기 때문에 불법에서는 고뇌를 함께 나누고 어디까지나 정성을 다해 ‘자타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여는 삶의 자세를 촉구합니다.
법련 제305호(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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