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8. 13:58ㆍ佛法 .SGI
*** 근행과 제목 - 이께다SGI회장 선생님의 지도 중에서-
근행은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고 음성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중간이 좋은 것이다.
근행을 착실하게 하면 몸도 거뜬해진다.
하지 않은 사람에 한하여 이상하게 되는 것이다.
몸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광포의 심부름꾼이 될 수 없다.
근행이 약한 사람은 반드시 병들어 있다.
음성의 크고 작고 빠르고 느린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본존에게 울리는 제목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음성의 울림이 되돌아 오는 것이다.
그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다.
요는 어본존에 대한 일념이 중요한 것이다.
근행을 착실히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어떠한 소원도 이루어지며 병든 사람도 거뜬해진다.
졸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 되는 것은 근행을 착실히 정확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행을 올바르게 하고 있는가 아닌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완벽하게 다 해냈을 때에 모든 것이 궤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몸이 피곤했을 때에 잠을 자면 회복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고 마음껏 근행을 해야한다.
잠이 모자라는 것 같은 것은 없어져 버린다.
세법도 잘되어 나아가게 된다.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 근행을 하는 것이다.
우주와 합치하기 때문에 생명이 우주의 "리듬"에 맞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적게 말하면 실상은 생활인 것이다.
근행만이 마음의 최고의 화장법이며 또한 최고의 건강법인 것이다.
백마가 팍팍 달려가듯이 낭랑한 근행창제를 해 나아가십시다.
어본존에게 일념이 마주쳐서 감응해 가는 근행창제에 무한한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행창제를 실천하며 활달한 일생을 보내지 않으시렵니까.
의심이 있고 형식적인 창제는 백만편의 제목을 올렸다 하더라도 경애가 절대로 열리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발심으로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창제해 나아갔을 때에 경애는 반드시 열리게 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싫어하면서 하는 것은 몇 천만편을 창제한다 해도 경애는 열리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괴로울 때 백만편의 제목을 창제하십시오.
용기있는 실천을 해 나아가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제목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열심히 제목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송신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수신기가 고장나 있으면 소용이 없다.
자신의 생활 또는 생명상의 번뇌가 있을 때에는 당당하고 여유있게 백만편의 제목을 올려보고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 가를 자기 스스로가 체험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론 보다 증거라는 것입니다.
저러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이렇다 저렇다 등 관념적으로 생각한다고 소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본존에게 매달리도록 하십시오.
제목을 올려 냈을 때에는 모두가 변독위약 되는 것이며 복운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와같이 지금 아무리 괴로운 경애라 할지라도 불법의 원리에서 이를 악물고 노력하면 몇 배 몇 십배 몇 백배로 광야가 펼쳐진다.
그리고 또 막힌다 해도 또 펼쳐지는 것이다.
제목을 올려 놓지 않는다면 긴 인생에 있어서 매우 곤란한 때가 있다.
창제를 할 수 있을 때에 제목을 불러 놓으십시오.
비유해서 말하면 제목은 저축이며 충전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여러가지의 고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제목을 올리고 있는 사람과 올리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목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모두가 변독위약되며 올리지 않는 사람은 고뇌에 떨어져 버린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또한 훌륭하게 되었다 해도 제목을 올려 나가는 사람과 비교하면 당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제목을 올려 나아간다면 인생의 모든 것이 열려 가가는 것이다.
불도수행에 있어서 가장 쉬운 것도 제목을 올리는 일이며 제일 어려운 것도 제목을 올리는 일이다.
기뻐도 제목, 슬퍼도 제목, 괴로움과의 싸움이나 전진의 활동에도 제목인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활동의 원천은 제목을 부르고 또 불러 나가는 일이다.
이것이 대성인님의 불법의 진수인 것이다.
일념과 기원에 대하여-선생님 지도 중에서
일념(一念)의 자세가 중요하다.
공덕이 나오는가, 안나 오는가, 생명력이 풍부한가, 아닌가, 그리고 숙명이 타개되는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의 마음 여하이며 일념의 자세에 의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근본이 「책략」인가,「기원」인가, 문제는 거기에 있다.
「책략」뿐이라면 그 이상의「책략」에는 진다.
또 영원히 불모의 수라투쟁(낮은 차원에서의 항쟁과 갈등)을 되풀이 할 것이다.
인생의 승부도, 광선유포도「법화경보다 나은 병법은 없도다」이다.
단연코 마(魔)를 타파해 가는 투철한「기원」또「기원」그 위에서의 혼신을 다한 지혜, 지략, 행동, 단결이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상황의 변화를 승기(勝機)를 취하여 가치적으로 움직여 가는가, 십계삼천(十界三千)이라는 변화해마지않는 삼라만상의 우주, 그 변화의 실상(實相)은 묘법(妙法)이다.
따라서 묘법(妙法) 즉 법화경의 병법에 입각할 때 일체의 변화의 정수를 잡을 수가 있다.
그리고 모든 변화를 가장 가치적으로 가장 창조적인 방향으로 유인하고 결정지워 갈 수 있다.
그 의미에 있어서 정법에의 강상한 신심(信心)이야말로 최극의 병법이다.
(1)「어본존 이외는 없다고 하는 강한 기원과 실천」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법화경의 병법이다. 일념을 정한 강하고 깊은 기원은「일념삼천」이며 우주의 일체를 움직여 가는 것이다.
자신의 일, 벗의 일을 구체적으로 기원해 간다.
자비의 근본도 기원이다.
지도의 근본도 기원이다.
지휘의 근본도 기원이다.
그 근본을 잊으면 일체 어본존으로 부터 벗어난 「책략」이 되어버린 다.
「책략」은 결국 공전하고 모두에게 폐를 끼칠 뿐이다.
기원은「생명의 에너지」로서 전 우주에 전해지고 온갖「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간다.
방사능도 자외선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영향을 미친다.
묘법의 기원의 에너지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힘은 무한하다.
(2)「자각(自覺)」있는 사람은 강하다.
불굴(不屈)이다.무한한 지혜가 솟는다.
(3)「확신」있는 사람은 강하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량한 힘이 넘쳐온다.
끝없는 복운이 쌓여진다.
그것이 위대한 본불님의 불자(佛子)로서의 대공덕이고 영예인 것이다
→자기관의 확립:「나는 어본불의 본 권속으로 광포해 가기위하여 나온 사람이다」
(4)「우리들의 신심」은 어서에 비추어서 경문에 비추어서 절대로 틀림없는 정법의 대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겁내어서는 안 된다.
“신심은 용기”이다. 용기 있는 신심에만이 「행복의 왕자의 영관(榮冠)」은 빛나는 것이다.
(5)「자기 자신의 마음의 세계」가 어떠한가.
그것이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그 마음, 일념을 자기 자신이 조정하여 보다 즐거운 방향으로, 보다 충실한 방향으로 가치적인 확대를 가진 방향으로 리드해 갈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현자이다.
그 지혜가 행복을 낳는다.
(6)「기원은 본래가 서원(誓願)의 창제」이다.
그 서원의 근본은 광선유포이다.
“저는 이 지역의 광선유포를 해가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일도 반드시 훌륭한 실증을 보이겠습니다.
부디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결의의 창제이다.
그 위에 나날이 자기가 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명확히 정하여 하나하나의 성취를 기원하고 도전해 가는 것이다.
그 진지한 일념에서 지혜가 솟고 창의, 연구가 생겨나며 성공이 있다.
제목(題目)을 올릴 때의 마음가짐에 대하여(신.인간혁명 개간(開墾)15)
1.부처와 대면하는 것이므로 엄숙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만 순수한 마음으로 본존님께 부딪쳐 가면 됩니다.
2.본존님은 대자비의 부처님이십니다.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 고민하는 것, 희망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원해 가는 것입니다.
3.힘들 때, 슬플 때 괴로울 때에는 아이들이 어머니의 팔에 몸을 던져 매달리듯이 "본존님!"이라고 부르며 사심 없이 부딪쳐 가면 됩니다.
본존님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십니다.
마음속을 다 털어 놓듯이, 대화하듯이 제목을 거듭해 가는 것입니다.
이윽고 지옥 같은 괴로움도 거짓말처럼, 이슬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4.만약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면 진심으로 사죄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똑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5.또 승부를 낼 때에는 반드시 이긴다고 마음을 정하고 사자가 으르렁 거리듯이, 아수라가 사납게 날뛰듯이, 대우주를 흔들기라도 할 듯이 끝까지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밤에는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깊은 감사의 제목을 드리는 것입니다.
6.어서에도 "朝朝(조조) 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夕夕(석석) 부처와 함께 눕고.."(737쪽)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제목을 끝까지 부른 사람은 언제나 본존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도 현세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본존님이 제천제불이 지켜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오저로부터 안도할 수 있고 그 무엇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유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끝까지 살아가면 됩니다.
7.제목은 고뇌를 환희로 바꿉니다.
더욱이 환희를 대환희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무슨 일이 있어도 오로지 제목을 끝까지 불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비유컨대 대나무의 마디를 하나 쪼개면 나머지 마디도 또 쪼개지는 것과 같으니라.” (法華秒(호렌초), 1046쪽)
통해·해설
대나무의 마디를 하나 쪼개면 다른 마디도 차례차례로 쪼개지는 것과 같다.
--1275년(건치원년)에 적으신 소야마요신에게 주신 어서.
법화경은 일체중생을 부처로 하는 경이며 지옥계나 아귀계 중생의 한 사람을 부처로 만드는 것은 구계 모두의 사람을 성불시키는 것의 증명으로 되는 원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지침
"한 사람의 승리"가 만인의 승리를 연다. 따라서 "한 사람"이 중요하다. 그 "한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지금"의 승리가 중요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자신이 이긴다"는 것이다. "눈 앞의 벽"을 혼신의 힘으로 부수어 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으로(힘껏) 싸우고 이긴다.
일점 타파·전면전개! 하나의 "벽"을 뚫었을 때---
'기쁨'이 끓어오른다. '자신감'이 끓어오른다. '확신'이 깊어진다. '희망'이 부풀어진다. '기세'가 나온다. '미래'가 열린다. 그 제1의 "벽"을 뚫는 힘이 '신심'이다.
신심이란 '용기'의 이명이다.
"완승"을 향한 열쇠는 나의 몸에 구족되어 있는 부처의 생명을 열어가는 신심에 있다! 벽에 도전하는 용기에 있다!
*** 창제 ***
창제로 하루를 시작한다. 창제로 하루를 마감한다. 창제 속에 희망이 있고 창제 속에 소생이 있다. 그리고 행복의 성으로 인도한다.
깊은 늪에서도 거센 폭풍 속에서도 굳굳하게 지켜주는 창제가 있다.
날 미워하는 생명에게도 날 경시하는 생명에게도 자비로 감싸주는 너그러움이 있다.
미진이 쌓이고 쌓여 수미산이 되듯이 거듭되는 창제에 늘어난 복운 어찌 수미산보다 못할 손가
삼천 대천세계 온갖 보화를 남김없이 담고 있는 창제 내 어이 무슨 복운으로 본존님을 만나
이 존귀한 창제를 하고 있는가.
과거세 십만억의 부처를 공양하고 말법에 어본존을 만난 것일까
인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쳐본다. 숙업의 그늘에서 우는 중생들이여 우주 삼라만상의 교향곡 아름다운 대자연의 노래 창제소리를 들어봐요.
그 소리는 승리의 소리 환희의 소리 행복의 소리라오.
이 존귀한 창제로 화택과 같은 사바세계에서 저 피안의 언덕을 향해 상락아정의 여생을
함께 떠나지 않으시렵니까!!!
-1996년 11월 16일 泄田大作 -
*** '기원'에 관한 스피치 ***
리더는 기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인에게나 일가 모두에게도 기원이 중요하다.
기원만이 일체를 타개하고 승리의 원천이 된다.
또한 마와 싸우고 마를 타파한다는 강한 기원의 일념이 있는가에 신심의 정수가 있다.
의사는 신체의 이상이 있는지를 본다.
그렇지만 마음의 세계가 어떤지 오저의 일념이 어떠한지를 보는 것은 불법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오저의 일념이 변혁하는 데서 출발한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거나 간부가 퇴전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신심하고 있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본존에 대한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다.
기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때는 '왜 그런가'하고 생각했던 일도 결과적으로 보면 묘법에 비추어 일어난 일은 모두 가장 좋은 방향으로 향해 간다.
범부의 눈으로 당시에는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심을 관철하면 때와 함께 모두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신심은 '일체가 의미 있는 것이며 최선이다'고 확신 할 때 밝은 경애가 열린다.
어성훈에 비추어 난과 싸우고 묘법 광선으로 열심히 나가는 용자에게 부처의 가호는 엄연하다.
광포에 힘쓰는 불자를 반드시 지킨다.
이것이 석존의 마음이며, 대성인의 대자대비이시다.
그 강성한 기원은 전 우주에 있는 불계의 역용(力用)을 움직이고, 또한 일체의 보살, 이승, 제천의 움직임과도 공명하면서 소원 만족하는 대승리의 인생을 열어 갈 것임을 확신하기 바란다.
나를 만드는 것은 결국 나이다.
그 나라는 것을 요약한다면 일념이다.
일념이란 구체적으로는 기원으로 집약된다.
지용의 용사로서 '서원(誓願)한 기원'만이 나를 한없이 향상시키고 활약하게 하고 완성시키는 원동력이다.
서원- 존귀한 사명이 있는 나의 인생, 무엇을 맹세하고 무엇을 원하며 살아가는가.
그 오저에 있는 일념대로 일생은 전개된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다.
누구의 책임이라 할 필요도 없다.
대성인은 자체현조(自體顯照)(어서1055쪽) 라고 말씀하신다.
묘법의 빛은 나의 본연의 모습을 비추어 나타낸다. 빛낸다.
이 '나의 생명에 살아가는' 인생만큼 행복한 인생은 없다.
어떠한 분야의 차원의 활동이든, 광선유포에 대한 진지한 기원에서 출발하여 움직이면 움직인 만큼, 만나면 만난 만큼, 그리고 말하면 말한 만큼 신뢰와 우정이 넓혀진다.
모든 것을 자기편으로 하여 제천선신의 역용으로 연결되는 것이 이 불법이다.
"기원은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 무사고로 자기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또한 출장이나 여행 등의 출발 때도 무사히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그 밖에 정확하게 일념을 정하여 구체적으로 기념한다. 그래야만 기원은 어본존에게 감응하여 '사(事)의 일념삼천'의 법리에 따라 우주에 있는 모든 차원의 움직임이 기원을 실현하는 쪽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묘법을 믿고 행하는 자의 기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것도 기원하는 측의 '강한 일념'이 있고 난 다음이다.
강한 일념은 목적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때 생겨난다.
묘법의 기원은 자신의 '생명의 변혁'을 가져오고, 그 변혁은 반드시 '주위 사람들이나 생활환경의 변혁으로 이어진다.
지역의 발전도 경제의 호전도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소원이라도 나의 일념에서 말하는 신심의 역용이 어떠한가에 따라 이윽고 엄연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하게 확신하는 것이다.
기원은 말하자면 '생명의 에너지'로서 전 우주에 전해지고 온갖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간다.
방사능도 자외선도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엄연하게 존재한다.
영향을 미친다.
묘법의 기원의 '에너지'도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 힘은 무한하다.
불법은 실천이다.
행체즉신심이다.
진정한 기원과 행동이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 없다.
광선유포를 위한 불도수행을 거듭하고 신심이 투철해지면 기원은 반드시 정확하게 이루어진다.
활도 명인이 쏘면 하나의 화살로도 과녁을 맞춘다.
모든 기원이 소원 만족되는 신심의 달인, 인생의 달인이 되기를 바란다.
자기 바로 앞에 놓은 과제를 기원하고 전력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시에 '광포를 위해' 라는 기원에 섰을 때 그 커다란 일념에 작은 고민은 전부 포함되고 전부 호전된다.
대우주에도 (혹성의) 공전과 자전이 있다.
광선유포라는 대원을 기원하는 것은 공전이다.
자기의 고민을 기원하는 것은 자전이다.
자전과 공전이 있어야 비로소 자기라는 소우주가 대우주의 궤도와 조화할 수 있다.
아무리 기원해도 사신(邪信:그릇된 믿음)의 기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원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정의를 적대하는 만큼 도리어 자신을 망친다.
이 원리는 광포의 역사에도 엄연하게 보아 왔다.
신심의 근본은 기원이다.
자기의 일, 벗의 일을 구체적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자비의 근본도 기원이다.
지도의 근본도 기원이다.
지도를 받는 근본도 기원이다.
그 근본을 잊으면 이미 어본존에게서 벗어난 '책략'이 되고 만다.
책략은 결국 공전하고 모든 사람에게 폐만 끼칠 뿐이다.
기원하고 노력하고 '어본존께 맡기는' 대확신이 중요하다.
진심으로 묘법에 나무(南無)했을 때, 무량한 지혜와 힘이 나온다.
불가능도 가능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기원이 근본이다.
기원하는 것을 잊고 방법론으로 달려갔을 경우는 공전하고 막힌다.
♧ 제목에 대하여
제목은 빛이다.
「백천만년 동안 어두운 곳도 등불을 넣으면 한 순간에 밝아진다」라고.
기원한 순간부터 생명의 암흑은 사라지는 것이다.
인과구시 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확신의 기원이 중요하다.
신력·행력의 강도에 따라서 불력·법력이 나타난다.
기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투철한 기원이면 머지않아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법실상이다.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확신해 가는 것이 신심이다.
신앙이란 불멸의 희망이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투쟁이다.
그 근본이 기원이다.
기원하면 희망이 확신으로 변한다.
그 확신의 일념이 삼천나열로 전개되어 희망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백 천만년 계속되었던 암흑도 밝아지는 것이다.
반드시 태양은 떠오른다.
아니 이미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오랜 세월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체념이 습관화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묘법만은 체념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나 같은 사람이 되겠느냐고 비하 하는 것은 자신의 불계에 대한 모독으로 통한다.
이 고뇌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결정해 버리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영원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묘호니 부인답서) 강의 중에서
기원이라 해도 갓난아이가 어머니 젖을 먹고 싶어 하듯이 마음속의 생각을 그대로 기원하면 된다.
긴장하여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있는 그대로를 어본존께 부딪쳐 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다’며 분명하게 정하고 기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다루기 힘든 사람, 미운 사람 그런 사람에게도 기원해 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전하고 기원해가면 반드시 바뀌어 진다.
자신이 바뀌든가, 상대가 바뀌든가, 여하튼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을 기원해 줄 수 있는 자신으로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재산이 된다.
---청춘대화 (청춘의 우정, 청춘의 인생관)
'佛法 .SG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케다다이사쿠 SGI회장 선생님 말씀 55 (0) | 2012.04.03 |
---|---|
신심 도상에서..... (0) | 2012.03.28 |
창제의 광대한 공덕 (0) | 2012.03.22 |
조직 문제, 간부와의 갈등, 개인적인 문제로 퇴전했다 다시 신심하는 분에게 (0) | 2012.03.22 |
제목의 중요성!! (0) | 2012.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