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제에 대한 선생님 스피치(2)

2011. 10. 27. 17:27佛法 .SGI

 

제목에 대하여

제목은 빛이다. 「백천만년 동안 어두운 곳도 등불을 넣으면 한 순간에 밝아진다」라고. 기원한 순간부터 생명의 암흑은 사라지는 것이다. 인과구시 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대확신의 기원이 중요하다.

신력·행력의 강도에 따라서 불력·법력이 나타난다. 기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투철한 기원이면 머지않아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제법실상이다.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확신해 가는 것이 신심이다.
신앙이란 불멸의 희망이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투쟁이다. 그 근본이 기원이다.
기원하면 희망이 확신으로 변한다. 그 확신의 일념이 삼천나열로 전개되어 희망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백 천만년 계속되었던 암흑도 밝아 지는 것이다.
반드시 태양은 떠오른다. 아니 이미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오랜 세월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체념이 습관화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묘법만은 체념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나 같은 사람이 되겠느냐고 비하 하는 것은 자신의 불계에 대한 모독으로 통한다. 이 고뇌만은 어찌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결정해 버리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영원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묘호니 부인답서) 강의 중에서...

 



기원이라 해도 갓난아이가 어머니 젖을 먹고 싶어하듯이 마음속의 생각을 그대로 기원하면 된다. 긴장하여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있는 그대로를 어본존께 부딪쳐 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하고 싶다며 분명하게 정하고 기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다루기 힘든 사람, 미운 사람 그런
사람에게도 기원해 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이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전하고 기원해가면 반드시 바뀌어진다.

자신이 바뀌든가, 상대가 바뀌든가, 여하튼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을 기원해 줄 수 있는 자신으로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재산이 된다.



청춘대화 (청춘의 우정, 청춘의 인생관)

청년은 교학에 도전해 주기 바란다. 청년은 행동으로 자신을 단련해 주기 바란다.
그 기대를 담아, 또한 평소의 감사의 생각을 담아서, 신심의 기본에 대해 몇 가지 말씀 드려 두고 싶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삼좌의 근행을 행하고 어본존께 깊이 기념 드렸다. 어본존의 일을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되지만, 이곳은 불법유포의 역사가 얕은 미국 땅이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납득」과 「확신」을 주어 가는 것이 리더의 사명이다.
그래서 약간 비약이 있다고 생각하나 극히 간결하게 요점을 말해 두고자 한다.

본존(本尊)에는 근본존경의 의의가 있다. 인생. 생명의 근본으로서 존경하고 귀의해 가는 대상이 본존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본존으로 하는가에 의해서 인생이 근저적(根低的)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종래의 불교의 본존은 거의가 불상(佛像)이다. 또한 불화(佛畵)인 경우도 있다. 초기의 불교에는 불상은 없었으나, 후세에 서방의 그리스문화의 영향 아래, 서북인도(간다라지방)에서 불상이 탄생했다. 말하자면 실크로드 교류의 한 산물이다.

이러한 불상. 불화를 통하여 「부처」의 이미지를 민중은 받아들이고, 갈앙, 신앙의 마음을 일으켜 왔던 것이다.

그러나 日蓮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문자의 어본존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 영상의 결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영지(英智)의 세계, 어본불의 위대한 「지혜」의 최고이면서 존극의 표현이라고 배견된다. 이 점에서도 대성인의 불법의 「본존」은 종래의 불법의 본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자는 불가사의하다. 문자의 힘은 위대하다. 예를 들면 사람의 이름이 있다. 싸인을 한다. 그 문자에는 일단, 그 사람의 인격, 입장, 힘, 심신(心身), 역사, 인과, 그러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이라는 한자로는 2개의 문자 속에 그 국토, 사람들, 동식물 기타 일체가 포함되어 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起)는 법성의 기. 멸(滅)은 이는 법성의 멸」(천태) 이라고 하듯이, 일체의 현상은 묘법의 나타남이다.
어본존에는 변전하는 대우주(제법)의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완벽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우주의 실상이란 우리들 소우주의 경우도 완전히 똑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어서에 말씀하신 대로이다.

또 문자로 어본존을 도현 하시는 이유의 하나에 대하여 총본산 제65세 니치준 상인은, 회상(繪像)으로는 가령 십계까지 (문상교상에 집착된 색상장엄한 佛등, 말법의 올바른 본존은 될 없다)를 표현할 수 있어도 십계호구 이상 (진정한 백계천여 또한 사의 일념삼천 즉 자수용신이라는 어본불의 경계)은 도저히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배견된다고 가르치셨다.


 


♧ 선도 악도 일체를 살리는 묘법


우주에는 선의 힘도 악의 작용도 있다.
어본존에는 불계의 대표인 석가여래, 다보여래로부터, 지옥계의 대표인 제바달다까지 십계의 대표가 모두 도현 되시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선」의 힘 ·작용의 대표도「악」의 힘 · 작용의 대표도 조금도 빠짐없이 남묘호렌게쿄의 광명에 비추어져서 「본유(本有)의 존형(尊形)」즉 본래 있는 그대로의 존귀한 모습. 작용으로 되어 간다고 설해져 있다. 「본유의 존형」으로 되기 때문에 「본존」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어본존에게 근행. 창제할 때, 우리들의 생명의 선악의 힘도, 모두 「본유의 존형」으로서의 작용을 시작한다. 「지옥계」의 괴로움의 생명도, 「아귀계」의 항상 굶주림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생명도, 「수라계」의 비뚤어진 노여움의 생명도, 모두 자기자신의 행복과 가치를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해 간다. 불행으로 이끌리는 생명이 묘법을 근본으로 하면, 반대인 선의 방향으로 힘을 기울여 가는 것이다.

그것은 괴로움이라는 장작을 연료로 해서 환희와 지혜와 자비의 불길이 타올라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불을 붙이는 것이 묘법이며 신심이다.

더욱이 불계. 보살계. 범천. 제석 등의 선의 생명은 창제에 의해서 그 빛남이 늘어나고, 자꾸자꾸 위광세력을 넓혀 간다. 우리 소우주 속의 대일천도 대월천도 찬란하게 대광을 발산하여 생명의 어둠을 밝게 한다.

선도 악도 십계삼천의 모든 작용이 일체가 되어 완전 회전하여, 행복으로 상락아정의 인생으로 우리들의 생명을 끌어 가는 것이다.

인생에는 당연히 병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병은 묘법의 법리에 의해 「본유의 병」이라고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즉 병에 좌우되어, 인생을 괴로워하고 고민해 가는 그러한 일은 절대로 없다. 삼세영원의 생명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 절대적행복이라는 我는 엄연히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생활상의 막다른 막힘도 반드시 타개되어 다음의 보다 넓고 넓은 경애로의 비약대가 된다.

 



♧ 창제의 소리는 시방의 불보살에 통한다


다음에 「뜻을 모르는 경문을 읽고, 제목을 불러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답해 두고자 한다.

물론 뜻을 아는 쪽이 좋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것은 법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며, 그 깊은 뜻의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를 들면 개가 짖고, 새가 지저귄다. 개에는 개의, 새에는 새의 세계의 소리가 있으며, 말과 신호가 있다. 사람이 들어도 전연 모르지만 개끼리, 새끼리는 서
로 통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근행.창제의 소리는 비록 사람은 의미를 모르더라도, 어본존에게 통하고 삼세시방의 부처. 보살의 세계에는 정확히 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처. 보살의 세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대성인은 근행. 창제에 의하여 우리들은 매일 가만히 앉아서 대우주를 여행하는 그러한 대경애를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제자 단나로 되는 사람은 한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천축의 영산을 보고 본유의 적광토도 주야로 왕복할 것이니 기쁨은 말할 수 없노라」(어서 1343쪽)라고.

어본존을 배견하면 나의 소우주의 문은 그 자리, 그 때에 대우주에로 전개되고, 전우주를 내려다보는 그러한 유유한 대행복감을 맛볼 수가 있다. 대충실감과 대환희, 일체를 손바닥에 넣는 듯한 대확신을 실감할 수 가 있다. 우주에 에워 싸여져 있었던 소우주가 우주를 도리어 에워싸 간다.

또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중략) 실상진여의 허공을 날게 되느니라」(어서 1443쪽) 라고.

또한 「자기자신은 등(藤)과 같지만 법화경의 소나무에 걸려 묘각의 산에 오르리라. 일승의 날개를 의지하고 적광의 하늘에도 날아가리라」(어서1430쪽)라고.

또 대우주로 날아가듯이 반짝이는 은하. 달리는 유성군,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무한한 확대, 깊이를 시시각각으로 맛보고, 음미하며 살아가는 상락의 경애가 된다.

어쨌든, 기필코 소원만족의 인생, 영원한 행복경애를 자연히 터득해 갈 수 있는 것이 묘법의 공덕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공덕도 신심 여하에 달려 있다.

대성인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이 대복운을 7대 까지나 되는 선조. 또한 7대 까지나 되는 자손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설하시고 있다. 얼마나 굉장한 대공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