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인간과 종교를 말하다

2011. 4. 6. 16:45佛法 .SGI

 

 

 

21세기의 인간과 종교를 말하다

저자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 스피치

'생사(生死)의 근본고' 해결이야말로 '인류의 행복'의 토대
고등종교 본래의 '정신성' '생명력' '보편성'을 회복

'21세기에 있어서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 이케다 SGI회장과 미국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센터' 소장인 로렌스 설리번 박사와의 대담.(27일, 세이쿄신문사)

여기에서는 '종교의 공죄(功罪)' '세계종교의 조건' '사회·문화와 종교' '종교의 수명' '보편성과 시대성·지역성' 등을 화제로 -.

하버드대학의 '세계종교연구센터'는 세계의 종교 연구를 리드하는 학술기관. 설리번박사는 3년전, 41세의 젊은 나이로 그 소장에 취임했다.(同대학의 종교사교수, 국제종교사학회 부사무국장도 겸임)
부 편집장을 역임한 <종교백과사전> 전16권은 전미 최우수 출판상(87년), 저서<이칸츄의 드럼 - 남미의 종교에 있어서의 의미의 방향설정>은 전미출판협회의 최우수상(철학·종교 분야, 1988년)을 수상했다.

이케다 SGI회장: 위대한 젊은 '탐구인'을 환영합니다. 문화인과 대화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기쁨입니다.

설리번 소장: 따뜻한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도쿄에서는 마침 벚꽃이 피기 시작했지만, 젊은 나는 '피지 않은 벚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장래, 꽃필 것이다 라고 SGI회장이 믿어주신 후의(厚意)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기쁜 일입니다.
나는 SGI회장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불법의 영지와 자비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보내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계십니다.

종교의 공(功)과 죄(罪)

SGI회장: 황송합니다. 힘있는 분일수록 겸손합니다. 박사는 종교사의 탐구자, 나도 실천을 통해 종교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본래 종교란 무엇인가. 이런 중요한 과제를 피하고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 나는 지금 세계를 돌며 그 느낌을 깊게 하고 있습니다.
경제에 대한 논의는 활발합니다. 정치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당연히 관심은 높습니다. 과학도 존경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해서는 실제로 말하는 것 자체에 위험이 동반되는 면조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간의 폭력적 항쟁은 지금도 유혈참사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직접 종교 분쟁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더라도 배경에 그 갈등이 있는 대립도 많습니다. 또 성직자의 부패의 심함, 지도적 입장에 있어야할 승려의 타락, 교의의 비과학성이나 현실과의 유리(遊離) -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있어야할 종교가 그것을 실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많은 불행을 초래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해져도 어쩔 수 없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일반론으로서 종교의 '공'과 '죄'를 비교하면, '죄'의 쪽이 많다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 현상이 아닐까요.
지식인도 민중도 '종교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오히려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싶다는 것이 본심인 것 같습니다.
그보다도 내일을 살기 위한 경제가 중요하고 결과가 직접 눈에 보이는 정치가 중요하며, 물질 생활을 향상시키는 과학기술에 힘을 쏟고 싶다 -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무리가 아닌 시대의 경향성입니다.
우리들 SGI는 불법을 기조로 하면서 '평화' '문화' '교육' 이라는, 모든 사람에서 개방된 분야에서 공헌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서 역시 21세기를 생각하고, 인류의 만년의 미래를 책임감을 갖고 생각했을 경우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가운데, 그것을 구하는 민중의 원망의 싹틈과, 본격적으로 말해 두어야할 '때'를 느꼈던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종교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웃음)

종교를 말하기는 어렵다

설리번 소장: 그렇습니다.(웃음)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종교체험이라는 것의 성격에 의하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깊은 종교체험을 한 후에는 사물을 보는 견해가 달라집니다. 현실을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고, 자신이 있는 방의 공간을 보는 눈, 마을이나 세계를 보는 눈도 바뀝니다. 눈만이 아니라, 귀도 변화하고 같은 음이나 음악을 들어도 듣는 방식이 달라진다. 인간관계에도 변화가 나타납니다.
한 개인에 이러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에 종교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하나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열린 언어로

SGI회장: 일반적으로 확실히 체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종교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종교의 폐쇄성이나 배타성에 연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은 그렇기 때문에 동료사이에서만 통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통하는 '보편적인 언어'로 말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만 ....

- SGI회장의 하버드대학 강연(91년 9월, '소프트·파워의 시대와 철학')에 대해 同대학의 콕스 교수는 "낡은 종교의 언어가 아니라, 현대언어로 종교의 정신을 말하지 못해서는 종교는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 이 강연은 종교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종교의 정신을 전하고 있어 높이 평가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미국 클레아몬트 마케나대학에서의 강연(93년 1월, '새로운 통합원리를 구하여')에 대해 동대학의 배리쳐 교수도 같은 취지의 논평을 보내고 있다 -.

'경애 혁명'

SGI회장: 종교체험에 의한 의식 변혁. 불전(佛典)에는 "갠지스 강을 아귀계(餓鬼界)의 자는 불이라고 본다. 인계(人界)의 자는 물이라고 본다. 천계(天界)의 자는 감로(甘露:괴로움을 없애고 장수를 가져오는 영액)라고 본다. 물은 하나라도 경애에 따라 보는 견해가 천차만별이다"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보다 높은 경애로의 '의식혁명' '경애혁명'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구극이 성불이며, 우리들은 현대적으로 '인간혁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애' '마음'은 불가사의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명을 일신(一新)시키고, 인생관·사회관·생명관·우주관 등을 바꾸는 것은 물론,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고 새로운 자신을 가져온다 - 그 힘을 끌어내는 것이 좋은 종교입니다. 그러한 변혁을 동반하지 않으면 종교가 아니라, 단순한 추상적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바뀌는가에 있습니다.

설리번 소장: 잘 알았습니다.
SGI회장: 사원이나 교회, 신사(神社) 등의 건물, 조직의 외형만을 본 것만으로는 종교를 이해할 수 없다. 그 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종교의 뿌리에 있는 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한편으로는 종교를 말하는 어려움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를 피해 갈 수 없는 필연성이 있다 - 이 이율배반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현대인

설리번 소장: 그러한 어려움을 잘 알고 난 후에, 지금 '21세기와 종교'에 대해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째서 입니까.


인간은 '대지' 사회는 '만화'(万花)

건전한 대지 위에 건전한 문화·정치·경제·교육이

SGI회장: 인류의 영위는 모두 '인간으로부터' 출발해 '인간의 행복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해 '인간에게' 귀착된다 - 그 '인간' 자신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영향을 주고, '인간' 자신을 형성하는 것은 사상이고 철학이며 보다 근저적으로는 종교입니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 교육이든 그것들은 말하자면 대지에 핀 벚꽃이나 단풍, 백합이나 장미꽃이 사람들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는 모습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대지가 잘 다듬어져 있는가, 어떤가 입니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명력을 갖고 있는가 어떤가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도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대지'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방향 짓는 종교도 역시 '대지'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건전한 대지에야말로 풍요로운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한다. 우리들이 평화·문화·교육의 운동을 '불법을 기조로 하여' 추진하고 있는 의의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문제에 답할 수 있는 종교를 기조로 해야 비로소 생활이나 문화, 정치나 경제가 풍요롭게 개화한다고 생각됩니다.
'철학'도 확실히 이러한 문제에 도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전(全) 인격적인 실천'이 없으면 관념이라는 표층적인 영역에 머물고 맙니다.

설리번 소장: 잘 알겠습니다.


'전(全) 인격'을 닦아 향상시키는 '종교'의 힘

SGI회장: 그런데 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할 종교가 지금까지 인류에 무엇을 가져 왔는가 -.
역사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침략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소장의 전공은 남미의 종교라고 들었습니다만, 유럽인의 라틴 아메리카 침략도 종교와 함께였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사실입니다.
일본을 전쟁으로 향하게 했던 커다란 힘도 국가신도(國家神道)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독선적인 교단이나 명상의 세계로 도피하게 할뿐인 종교를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쁜 종교는 인격을 파탄케 합니다.
또 다른 문화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에 종교가 에너지를 낭비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한 경험에서 사람들은 종교를 기피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또 어느 것이 올바른 종교인지 알고 싶다. 그러나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 그러한 사람들의 현 상태에 파고 들어가 민중을 이용하고, 먹이로 하는 성직자도 나타난다.
이러한 '정의'의 소재를 모르는, '태양'이 뜨지 않는 희미한 혼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로부터 멀어져 버렸다고 생각됩니다.

설리번 소장: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미주(迷走)로부터 확실한 '궤도'를 구하여

SGI회장: 그러나 그 결과는 '미주'입니다.
냉전이 끝나고, 세계는 대체적으로 긴장완화와 민주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거기에서 문득 발 밑을 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내일로의 이정표가 될 궤도의 '공백'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요.
공산주의는 종교를 부정했지만, 결국 그 공산주의가 부정되고 그 나라들에서 종교는 부활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물질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데에 익숙해져 인간을 소중히 하는 마음조차 마비 시키고 있습니다. 내면의 공허함에 사람들은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프리카 등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괴로워하고 있다. 단지 괴로워하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일까.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정치에 대한 불신은 쌓여만 갈 뿐. 또 거대화된 경제구조 앞에서 개인은 무력감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과학은 '편리함'에 의해, 어느 의미에서 인간의 '향상심'이나 '충실감'을 빼앗았습니다.
혼미 속에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헤겔이라는 철인에게 배우려 했던 시대도 지나가 버리고, 지금은 '철학의 궤도'가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21세기를 살아갈 소중한 젊은이는 향락주의의 경향을 강화하고, 찰나적인 삶을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활기차게 기쁨과 충실을 갖고 활약해 갈 수 있는 세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 인류는 이러한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설리번 소장: 완전히 동감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SGI회장: 과학이나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원점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생명' 입니다.
어제(26일), 도쿄대학 졸업식에서 아리마 학장이 졸업생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 덧붙여, '타인을 알라'라는 말을 제군에게 하고 싶다. 타인을 존경함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품격과 견식을 갖춘 지구인으로 된다"라고.
나도 찬성입니다.
'자신을 안다' '타인을 안다'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인간의 존귀함을 아는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을 아는'데 있어서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뇌입니다. 태어나서 살아가는 괴로움, 병든 괴로움, 죽음의 괴로움 - 불법에서는 '사고'(四苦)라고 부릅니다만, 이 '근본고'(根本苦)의 해결 없이는 어떠한 '행복의 추구'도 '사상누각'(砂上樓閣)이나 '부초'(浮草)와 같이 덧없는 것으로 되고 맙니다.
또 불법은 나아가서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괴로움), 원중회고(怨憎會苦: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구해도 얻을 수 없는 괴로움), 오음성고(五陰盛苦:육체·정신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갖가지 괴로움)의 네 가지 고뇌가 인생에 있다고 합니다.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와 이들 네가지를 합쳐 '팔고'(八苦)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고' '팔고'의 해결은 인류의 불변의 요구입니다. 그것에 응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법'을 설한 종교밖에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그 해결의 길을 인류를 향해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1세기를 인류의 '희망의 세기'로 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인간의 원점으로 돌아가 행복의 '토대'의 건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생사'에 대한 도전이며, 나는 '21세기는 생명의 세기' 라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습니다.

창시자에게는 후세의 종파성(宗派性)은 없다

설리번 소장: 알겠습니다. 하나 더 질문하겠습니다.
앞에서, 같은 것을 보아도 생명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것이 화제로 되었습니다.
그럼 각각의 종교는 '하나의 진리'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까. 그렇지않으면 각각 '다른 진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SGI회장: 요컨대, 어느 종교나 자신의 것이 최고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웃음) '우리는 두 번째' 라고 생각한다면 예전에 그만두었겠지요.(웃음) 라면이라 해도 실제로는 맛이 없어도 모두 자신의 가게에서 만든 것이 가장 맛있다고 주장하겠지요.(웃음)
은사(도다 제2대회장)는 자주 말했습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을 비롯해 석존, 예수, 마호메트 라는 종교의 창시자가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면, 이야기는 빠를 것이다"라고.(웃음)
일반적으로도 참된 책임감을 가진 일인자끼리는 이야기가 통하는 법입니다. 또 종교의 창시자는 그 나름대로 '민중을 위해'를 원하고 있었겠지요. 위대한 사람은 곧, 보다 위대한 자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회의는 실현되지 못했지만,(웃음) 제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스승이 가장 위대하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종교간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후세의 독단적인 주장을 극복하고, 종조의 '원점의 정신'으로 돌아감으로서 보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넓이를 회복하고 대화의 전제(前提)인 토양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있습니다.
본래 '태양'에는 국경도 종파의 벽도 없습니다. '인간애'에도 국경도 종파의 벽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좁은 마음이 나중에 만든 것입니다.

설리번 소장: 동감입니다.


21세기의 종교는 민중의 영지가 선택

자유경쟁으로 진보

SGI회장: '신교의 자유' '종교의 자유'는 절대의 조건입니다. 국가나 권력이 특정한 종교를 누른다거나, 지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신앙하는 측의 민중이 영지를 가지고 판단할 문제입니다. 민중에게 그 권리가 있습니다.
또 무엇이라도 자유경쟁이 아니면 발전하지 않습니다. 스포츠든 면학이나 경제든. 이것이 진보의 법칙입니다.
종교도 서로 인간으로서 상대를 존중하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평화적으로 개방해서 비교하고, 실험해서 데이터를 뽑아 보다 좋은 것을 선택해 갈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종교계와 인류의 진보가 있습니다.
폭력이나 성직자의 권위로 누르는 것은 '악'입니다. 어디까지나 민중, 신도의 편에서 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불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석존도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출현했던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민중을 위하고 인간을 위한 종교가 아니면 안 됩니다. '종교를 위한 인간'이라는 전도(顚倒)는 이젠 용납할 수 없습니다.
SGI회장: 종교의 평화적 경쟁의 기준으로서 하나의 시사를 말하자면, 불법에서는 문증(文證)·이증(理證)·현증(現證)의 세 가지를 설하고 있습니다.

문증·이증·현증

'문증'이란 자신의 감정이나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역사적 문헌의 뒷받침이 있고, 선인의 지혜의 뒷받침이 있을 것. '이증'이란 인간의 이성 위에서 도리에 맞을 것. '현증'이란 생활상에 설해져 있는 대로의 결과, 현실의 증거가 나올 것 - 이상의 세 가지 점에서 검증해서 결과를 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약한 말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 삼증 외에 모든 각도에서 석존, 천태, 니치렌 대성인을 비롯해 불법자가 검증해서 가려내어 최고의 것으로서 설한 것이 '묘법'이라는 것이 됩니다.
경문에는 "무량의(無量義) 일법(一法)에서 생기느니라"라고 있어, 무량무변한 종교의 교의도 전부 우주의 근본법에서 생겨난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묘법'이라고 명명한다 라고.
이 법을 근본에 두면 모든 '무량의'는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각각의 장소를 얻어 위치가 부여되고, 살려져 간다. 묘법은 원만한 소생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나 이해, 세력다툼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라는 참된 자비 - 발고여락(拔苦與樂:괴로움을 빼내고 즐거움을 준다)에 의해 종교가 대화하고, 전체로서 진보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교에도 수명이

SGI회장: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도 수명이 있습니다. 별이나 태양에도 수명이 있습니다. 만물에 수명이 있듯이, 철학·종교에도 수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데에 인류의 불행이 있습니다.
불전에서는 석존이 설한 가르침이 사후 2천 년으로 힘을 잃을 것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밤이라는 '때'에는 별이나 달에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뜨면 별이나 달은 빛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어느 시대에는 사회를 번영케 하는 힘을 갖고 있던 종교라도 때가 지나면 그 힘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고, 현실 사회에 통용되지 않게 된 종교를 고집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전등의 출현 뒤에 램프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때'를 중시하시어, 南無妙法蓮華經는 '만년'까지 힘이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만'이란 '가득하다'라는 의미로, 만년은 '영원한 미래'의 상징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 근본의 법을 멸후의 민중을 위해 한 폭의 만다라로서 도현하셨습니다. 그것이 본존님이며, 은사는 알기 쉽게 '행복제조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불교에, 개방된 보편적 표현을 준 것입니다.
어쨌든 무엇이 진리인가를 정하는 주체는 '민중'이며, 그 방법은 영지를 통한 '대화'에 의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도 종교는 사회에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고(四苦)의 렌즈에 '21세기의 그림'이

설리번 소장: 사려 풍부한, 그리고 솔직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SGI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21세기의 그림'을 볼 기회에 초대받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21세기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특정한 '눈'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고(四苦)를 비롯해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라는 렌즈를 통해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애와 희망을 갖고 사고의 해결 방향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감명받은 것은 SGI회장이 시사하신 방향으로 '미래'에 눈을 돌렸을 때, 인간의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달리 고고학의 발전에 의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스라엘, 인도, 중국, 아프리카라는 지역의 문화적 역사를 어느 정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정보로부터 '종교에 수명이 있다'라눼?SGI회장의 지적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종교에도 생로병사가 있? 성주괴공(成住壞空:생성해서, 존속하고, 파괴되고, 공(空)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SGI회장: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불법에서는 모든 생명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공으로 돌아가는, 이것을 되풀이한다고 설합니다.
설리번 소장: 21세기로 눈을 향했을 때, 학자로서 신앙자로서 또 인간으로서 무엇을 해야할까 -. 종교학자는 지식이나 데이터는 갖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도를 모른다. 또 종교체험이 불충분합니다.
한편, 신앙자는 개개의 종교체험은 있어도 뒷받침으로서의 객관적인 정보는 부족합니다. 직업 성직자에게 있어서는 일상생활에 뿌리내린 생생한 신앙체험이 없습니다. 신앙이 단순한 형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SGI회장의 제안은 이러한 '이지'(理智)와 '체험'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극의 '중도'를 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애에 종파 없다 '원점'의 '살아있는 숨결'을
종교의 정체·부패와의 투쟁
'현대성' '지역성'에 대한 즉응이 필요

광신이나 형식주의는 '중도'(中道)의 대극(對極)

SGI회장: 그렇습니다. 불법은 본래, '중도주의'를 관철하고 있습니다. 학문과 실천, 실생활과 신앙, 이론과 행동 - 그러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도를 걷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 인격성'이기도 하며, 비폭력의 '점진주의'조차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길 한가운데' 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종합적인 향상의 '길'을 단호하게 걸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의 '중'이란 '(길에) 맞추다'라고 읽습니다. 이 인간으로서의 근본의 길, 중도를 벗어나면 신앙은 '광신'이나 '형식'에 빠져 버립니다. 인간성도 비뚤어져 버립니다. 양식 있는 사람이 보면 이러한 모습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리번 소장: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중도'에 대하여 SGI회장은 또 하나 중요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각 종교의 창시자는 그 시기, 그 사회의 민중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성심성의껏 회답을 제시하면서 종교를 형성해 갔습니다.
그들은 당시 서민의 여러 가지 상황을 생생하게 파악해 (흉중에) 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종교자에게도 그런 능력이 필요시 되고 있는 것입니다.

SGI회장: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중입니다. 미래,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종교자는 결코 민중에 대한 안테나를 비뚤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민중이 진짜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점에 최대로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 노력을 게을리 할 때, 종교자로서는 실격입니다. 그야말로 종교쟁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 종교는 민중과 시대로부터 유리되고 형해화(形骸化)해 간다. 그러므로 '법'과 함께 중요한 것은 종교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민중이 구하고 있는 것에 예민하게

- 또한 SGI회장은 세계종교로서 문화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온 기독교의 장래에 대하여 소장의 견해를 물었다.
소장은 예수가 생전에 가르친 것은 종파성이 아니라 근본의 진리뿐이었으며, 후세에 여러 가지 교의나 종파가 생겨나고 있다고 말하고,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필요성을 말했다.
그리고 '진리'와 그 '표현'의 문제에 대해 언급.

설리번 소장: 생각입니다만, '진리'는 하나라고 해도 '표현'은 유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SGI회장: 같은 가족이라고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는 각기 모습은 다릅니다. 차원은 다릅니다만 '진리' 라고 해도 때와 장소, 상대 등에 따라 여러 가지 '표현'이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설리번 소장: 기독교에도 여러 가지 종파나 형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뉴기니아와 남아프리카, 로마에서는 각기 신앙의 형태가 다릅니다. 설령 진리는 하나라고 해도 그것이 전해지는 지역에는 그 지역의 역사나 전통, 해석의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SGI회장: 체험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SGI의 경우에도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근행은 정좌(正座)가 보통입니다. 그러나 해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정신은 불변으로 하고 지역에 따라 어느 정도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부득이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지역의 사람들이 납득 할 수 있는'것을 제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불법에서도 본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방비니)

어떻게 하면 서민이 납득할 수 있을까

설리번 소장: 그것을 알지 못하는 성직자는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겠지요. 백과사전에서 '기독교에 있어서 신화(神話)와 민화(民話)'라고 하는 항목의 집필을 담당했습니다만, 참고문헌이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연구자에 있어서 연구 대상에 '교회'나 '교의'는 있어도 '일반서민의 경험'은 없었던 것입니다.

SGI회장: 예리한 지적입니다. 특히 '민화'는 서민의 생활에 융화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 연구는 종교가 현실에 얼마나 받아들여졌는가를 명확히 하는 데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조금 각도가 바뀝니다만, 불전에도 많은 설화가 설해져 있습니다. 법화경 '일곱가지 비유'는 유명합니다. 니치렌 대성인도 수많은 비유를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어떻게 하면 서민이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납득성'을 중요시하셨기 때문 입니다. '권위'에서가 아닌 '자비'의 발로였습니다.

설리번 소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종교에 대해서는 SGI회장이 조금 전에 말씀하신대로 민중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연구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태도 민중주체

또한 소장은 기독교도, 또한 과거에 대한 반성에 서서 항상 자신의 '정신의 대지'를 경작하면서 정상화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라고.
SGI회장은 전시중, 군부 권력에 영합한 종문이 보신(保身)을 위해 대성인의 어서를 삭제·개찬한 사실, 그러한 종문 하에서 마키구치 초대회장, 도다 제2대회장을 비롯해 대성인에게 충실했던 학회원이 많은 고난을 강요당한 사실에 언급.
종교는 성직자의 부패·타락의 역사로 채색된 과거를 진지하게 응시하면서 민중이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화의)의 민주화'까지도 도모해 가는 것이 더한층 필요해 진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영원히 종교는 민중 억압을 되풀이하면서 인류는 흘러갈 것이라고.

설리번 소장: 그러한 성직자의 모습도 '말법'(末法)의 특징인 것일까요.

SGI회장: 잘 아시겠지만, '말법'의 특징 중 하나는 '성직자의 타락'입니다. 또 '사상의 혼란' '사람들의 생명이 탁하다' '사회·자연의 조화가 어지럽다'는 등입니다. 모두, 서로 말다툼하고 중상하고 - 참으로 그대로의 세계이지 않습니까.

설리번 소장: 그러한 사회이기 때문에, SGI회장은 사람들의 정신에 '하나의 방향성'을 주고 지향해야 할 '초점'을 가르치려고 하시고 있는 것이군요.

SGI회장: 그렇습니다. '21세기와 종교'에 대해서 남기고자 하는 것도 그 의미에서입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훌륭한 고등종교가 민중에 뿌리내려 생생하게 번영하고 있던 시대는 그런 대로 사회도 문화도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무언가 사는 보람이 있고 희망이 있었습니다.
지금, 종교는 '이해'나 '항쟁'만이 눈에 뜁니다. 언제까지나 이러한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종교의 본류가 아닙니다. 아류(亞流)입니다. 참된 종교의 힘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설리번 소장: 종교라고 하는 말에는 현재,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의 '종교의 수명'과 관계가 있는 것 일런지도 모릅니다.

SGI회장: '종교'의 '종'(宗)의 문자에는 '근본'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가'(宗家) 라고 하면 '본가'(本家)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걸어야 할 '근본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 종교본래의 기풍을 지금이야말로 소생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건강'의 실현이 종교의 주목적

SGI회장: 그런데 소장의 최근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인터뷰 중에서 '건강과 종교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同 소장은 "건강과 치유는 종교 연구에 있어 당연한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조로아스터든 부처든 그리고 예수든, 건강을 장려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모범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주요한 관심은 건강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이란 개인의 욕구나 경험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건강이라고 하는 좀 더 광범위한 과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 "여러 문화에 있어서 상당히 구체적인 형태로 건강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등으로 말하고 있다)

SGI회장: 말씀하신 대로 불교도 건강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석존도 민중의 건강을 항상 원하여 최대로 배려하셨습니다. 부처를 '의왕'(醫王)이라고도 말하고 불법자는 생명의 의사라고도 하시고 있습니다. '병'의 괴로움과 대결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법에서는 '색심연지'(色心蓮持)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육체(색법)와 정신(심법)이 더불어 연속해 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심의 조화'와 '건강'을 만끽하면서 인생을 즐겨 간다. 그것이 불법의 하나의 이상입니다. 소장의 말씀은 그 이상과도 상통하는 것으로서 흥미 깊게 읽었습니다.

설리번 소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