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華經의 智慧11 信解品

2011. 4. 4. 17:04佛法 .SGI

 

 

法華經의 智慧11 信解品-‘신앙’과 ‘지혜’의 역동적 관계

 

  1993년 3월 하바드 대학의 설리번 박사와의 [21세기의 인간과 종교를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대담시 이케다 선생님은 종교와 종교는 민중에 부응한다는 점에서 자유경쟁를 해야한다고 선생님은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경쟁하는 기준으로 佛法(불법)은 三證(文證, 理證, 現證)을 설한다는 것, 종교에도 수명이 있으니 죽은 종교에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것등을 논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여아튼 무엇이 진리인가를 결정하는 주체는 ‘민중’입니다”라는 결론를 내리셨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사도 유죄에서 돌아오셨을 때, 절을 기진하겠다는 막부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막부의 보호를 받겠다는 발상은 추호도 갖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민중은 종교에 무지한 채로 정체되고, 그 무지에 달라붙어 불안감을 조장하고, 그 결과로 권력자의 종교관리.통제의 움직임에도 맹목적으로 되어 갑니다.

 

  학회는 민중의 단체입니다. 민중이 우롱당하지 않고자 싸우고 있습니다.

모든 민중이 강하고 현명해지기 위해 평화와 문화의 연대망을 넓히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민중이 본래 갖고 있는 강함, 현명함, 명랑함, 따뜻함, 그런 가능성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신앙입니다.

어리석어지기 위해 신앙하는 것은 아니다. 현명해지기 위해 신앙이 있다.

현명함이란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자타 함께 향상하기 위한 지혜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왜곡됨은 전 인격적인 ‘지혜’와 ‘지식’을 혼동하고 전 인격적인 ‘신앙’과 ‘맹신’을 구분할 수 없는 데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信解(신해)란 알기 쉽게 말하면 진심으로 납득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화경은 그런 신앙을 설하고 있다. 결코 맹신이 아닌 것입니다.

 

  신해품은 二乘作佛(이승작불)이 설해진 환희에서 개막됩니다. 앞서 비유품에서 석존은 사리불이 장래 부처가 될 것이라는 보증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대승경전에서는 성불할 수 없다고 엄한 규탄을 받던 이승이 장래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설해진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 4대성문(해공제일의 수보리, 논의제일의 가전연, 두타제일의 가섭, 신통제일의 목련)이 그 기쁨을 말합니다. 그들은 석존교단의 최고 간부였습니다.

 

  이미 자신들은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애쓸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 부처의 깨달음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입장이 있다. 연공이 있다. 경험이 있다. 사대성문은 거기에 안주하고 말았다.

이미 나는 오랫동안 수행하고 늙었다.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었다. 이젠 이것으로 충분하다. 스승인 석존의 깨달음은 확실히 훌륭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다. 그러니 이대로가 좋다. 이런 대간부의 무기력을 부순 것이 사리불에 대한 授記(수기)였습니다. 평생을 구도심을 불태운다. 그것이 법화경이 보여주는 인생입니다.

 

  이승은 말하자면 ‘마음이 죽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원하지 않는다.

또 부처가 되려는 목표로 노력하는 사람에게도 도도하게 굴며 냉담하다.

자신은 하지도 않으면서 타인에게만 하라, 하라고 한다. 당치도 않습니다. 자신은 하지도 않고 남에게 시키는 것은 조직악의 증상이기도 합니다. 윗사람에게 그런 비겁함이 있으면 어떤 조직, 교단도 동맥경화에 걸립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성장하지 않는다. 생명의 정체 생명의 병입니다.

 

  법화경에 이르러 이승들은 석존의 격려와 질타를 온힘을 다해 받아들였다.

그래서 비로소 사람들에게 정법의 소리를 들려주는 참된 성문으로 소생한 것입니다. 다시 젊어졌습니다.

우리들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너무나 감동한 말이 [無上寶聚不求自得(무상보취불구자득)]입니다.

‘무상보취’란 법화경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고, 佛界(불계)라고도 할 수 있다. ‘무상의 보물’은 결코 물질적인 ‘곳간의 재보’는 아니다.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어떤 사람이 “가장 중요한 건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목숨과 공기와 인간의 배려이다.”

라고 말했는데, 음미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발한 이승들은 감동한 채 스스로 이해한 법문을 비유를 써서 말합니다. 그것이 유명한 장자궁자의 비유입니다.

 

‘장자궁자의 비유’가 석존 50년간의 교설을 순서를 나타낸다고 본 것이 천태대사인데 다음표와 같다

장자궁자의 비유

意味(의미)

敎說(교설)

五味(오미)

아들을 발견해 뒤쫓게하다

擬宜(의의)

華嚴(화엄)

乳味(유미)

저택에서 일하도록 권유하다

誘引(유인)

阿含(아함)

酪味(낙미)

父子의 신뢰가 강해지다

彈呵(탄가)

方等(방등)

生蘇味(생소미)

家業을 관리하게 하다.

淘汰(도태)

般若(반야)

熟蘇味(숙소미)

가업을 정식으로 상속

開會(개회)

法華(법화)

醍醐味(제호미)

궁자는 본인이 장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면 큰 부자가 되는 것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조그마한 급료를 받고 만족한다. 少欲知足(소욕지족)도 중요하나, 정법에 대해서는 욕심스러워야 한다. 욕심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욕심을 갖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이정도로 만족 한다”는 것은 겸허한 것 같으나, 실은 생명의 가능성을 낮게 보는 大慢(대만)인 것입니다.

 

  신해의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信解(신해)’라는 두 글자 속에 ‘신심과 지혜’ ‘신앙과 깨달음’이라는 불법상의 근본문제가 응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신앙과 이성’ ‘믿는 것과 아는 것’ 이라는 철학과 문명의 근원적인 과제와도 연관됩니다.

 

  고등종교는 본래 이성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인간이 이성을 억압하면서 인류의 보편적인 신뢰를 쟁취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특히 ‘지혜의 종교’라는 불교는 극히 이성적인 종교입니다. 인간을 초월한 인격신 등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서구적인 종교관에서 보면 “불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조차 있을 정도입니다.

확실히 종교뿐 아니라 어떤 수행이라도 처음부터 스승을 의심하면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믿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信(신)’은 인간 생의 기본조건이며, 인간은 ‘믿는가’ ‘믿지 않는가’를 선택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무엇인가의 신념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기반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신념 자체를 최대로 존중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 그러나 그 신념도 ‘이성’과 ‘사실’에 의한 검증을 받지 않으면 자기의 주관으로 끝나 버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보편성을 갖지 못합니다. 법화경에서 설하는 신이 해와 일체가 된 신, 즉 信解(신해)라 함은, 그 신이 단순한 주관에 그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지요

 

  신해의 ‘해’란 ‘지혜’를 말합니다. 이성 자체는 아니지만 이성과 합치하여 이성이 그 일부인 ‘지혜’입니다. 극한까지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전 이격적인 ‘지혜’, 그것을 ‘신’에 의해 얻는 것이 ‘신해’입니다.

 

  입종선언을 하시기 전에 대성인은 각지의 사원 등을 순회하셨습니다. 그 때 [그런데 十宗.七宗이 서로 쟁론하여 따르지 아니하니, 나라에 七人, 十人의 대왕이 있어서 만민이 평온치 아니함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근심한 끝에 하나의 원을 세웠노라. 나는 八宗. 十宗에 따르지 않겠노라] (어서294 보은초)

 

  종파로 갈라져 서로 다투는 당시의 불교계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권위에 맹종하는 것이 아니고, 경전을 기준으로 스스로 깊이 사색하시고, 당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확증을 추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깊이 새겨야 할 대목입니다. 신심이라 하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야지 무조건 맹종해서는 않됩니다.

 

  [개목초]에는 種種의 大難이 出來한다 할지라도 智者에게 我義가 타파되지 않는 한 採用하지 않으리라, 其外의 대난은 바람앞의 먼지와 같으니라(어서232쪽)

 

  법화경의 ‘信’-以信代慧(이신대혜)

불법의 신이란 이성을 내던지고 맹목적으로 귀의하는 그런 광신이 결코 아니다. 경건한 탐구심을 출발점으로 하여 지혜를 길러 나가려는 이성적인 정신의 영위인 것이다.

 

‘信’의 종류

① 敬信(슈라다)- 불법을 듣고 그 훌륭함에 외경의 마음을 품어 신을 일으켜 실천에 들 어 가는것

② 信解(아디무쿠티)-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영해(납득)하여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

③ 淨信(프라사다)-신해를 관철함으로써 마음이 연마되고 단련되어 누구나 평등하게 존 엄하다고 각지하는 대경애의 완성

④바쿠티-神에 대한 절대적이고 열렬한 信, 불교에서는 쓰지 않음.

 

  법화경이 信을 강조하는 이유-부처의 수자의의 경이기 때문

법화경이 신을 강조하는 이유를 생명의 차원에서 말하면 -법화경의 목적은 생명의 근본적 무지, 즉 ‘原品의 無明’을 끊고 ‘元品의 法性’, 즉 본래의 자기 자신을 아는 지혜에 눈뜨는 데 있다. 이 법성을 ‘佛性’ ‘佛界’라 해도 좋다.

 

  이 信의 자는 원품의 무명을 자르는 이검이로다 (어서725쪽)

信은 不變眞如의 理(영원히 변하지 않는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로다.解(지혜의 이명)는 隨緣眞如이며(어서725쪽)

 

  信은 가치와 같고 解는 보배와 같다. 三世의 지혜를 사는 것은 信의 일자이며(어서725쪽)

 

  信과 解는 본래 일체의 것이지만, 굳이 나누면 [信에서 解로] 그리고 해에 의해 더욱 신을 강하게 하는 [解에서 信]으로 이 쌍방향의 역동적인 되풀이를 함으로써 무한하게 향상하는 것이 신해의 본의라고 하겠지요

 

  ‘아디무쿠티’가 ‘志(지)’으로도 번역됩니다. 성불이라고 해도 하나의 정지된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지혜즉자비를 깊게 하면서 끝없이 계속 향상하는 경애 그것이 불계입니다. 인간으로서 끝없는 향상으로 그 ‘志’으로 나가는 두 바퀴가 ‘信’과 ‘解’인 것입니다.

 

  현대의 세속적 사회에서는 ‘신앙’이라고 하면 ‘이성’을 잠재우고 폐쇄된 주관의 세계에 안주한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법화경이 설하는 ‘신앙’은 인생이라는 난문제에 대해 안이한 회답을 얻으려는 것은 아니다. ‘信’과 ‘解’라고 하는 ‘생명 탐구의 두가지 무기’를 끝없이 의문을 품고 향상해 간다.

 

  근대의 ‘志’는 ‘信’과 분리함으로써 자립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실은 물질주의를 비롯해 검증없는 信위에 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서 근대의 고뇌와 유전이 시작되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대의 여러 과학마저 시야에 넣은 새로운 ‘信과 志의 통합’니다. ‘신념없는 지식’과 ‘이성없는 광신’으로 찢겨진 인간사회를 부흥시키는 시도입니다.

 

  信解 그것은 현대라는 ‘정신의 표류시대’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생명의 높은 곳으로 향해 진보시키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