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남자부의 체험담

2010. 9. 28. 12:31佛法 .SGI

 

[오사카 남자부의 체험담]

소년 때까지 나는 부모와 남동생 4인 가족이었다. 건축설계사의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자기 회사를 가지고 회사도 원만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집도넓은 대지에 주위에서 부러워할 정도의 큰 저택에 남부러울게 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나는 태어나면서 부터 전신마비로 계속 누워만 있어야하는 부자유스런 몸으로 태어났다.

목에서 아래로 마비가되어 식사도 화장실도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되지않는 상태였다. 내가 10살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쩔수없이 남겨진 가족 회사에는 종업원도 있다. 마냥 슬픔에만 빠져있을수만 없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사를 운영해서 어떻게든 꾸려 나가셨다.

그러나 슬프게도 회사일 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며, 건축설계도, 자금운영도, 장사수완도
아무것도 경험이 없었던 어머니가 끝내는 적자에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빌릴 수 있는 만큼 달러돈까지 거액을 끌어들여 어떻게든 사업을 지속해 보려 했지만 그것도 한계에 부딪쳐 끝내는 도산... 남겨진 가족셋에 수억엔의 막대한 빚만이 우리들을 억눌렀다.

빚을 갚을 방법도 없이 여자의 손 하나로 무엇을 하겠는가. 불과 조금씩 갚아 나갔지만
악평이 높은 달라돈 업자 이자에 이자는 엄청나게 불어가고 야쿠자 같은 무리들이 식전부터
밤늦게까지 큰소리를 질러대고 협박을 하고 전단을 온집에다 갖다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넓은 정원에 미친개를 풀어놓고 새의 목을 비틀어서 던지거나 돌을 던져놓고 온갖 나쁜짓을 다 동원해서 괴롭혔다.

동생은 학교가는길 오는 길에 괴롭힘을 당해 어린 가슴에 매일 상처를 입었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느날, 계속 참고만 있던 어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전신마비인 나를 내버려두고 가버린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자기의 자식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두고 도망을 가 버린 사람이 그래도 어머니인가? 버려진 나는 어떻게하면 좋은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부자유스런 몸인데 버려진것을 알아차린 것은 삼일후의 일이었다.

자리에 마냥 누워만 있던 나는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움직일수없는 몸을 질질 끌어서
필사의 힘을 다하여 뜰에까지 굴러갔다. 거기에는 풀밖에 없었다. 나는 그 풀을 뜯어먹고
생명을 연명했다.

버려진 분함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르면서, 풀을 먹고있는 나를 생각할때,"누구를 의지하며,무엇을 희망으로해서 살아가야만 좋은가? 라고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5일째 되던 어느날 가끔씩 들르고 하시던 친척 아주머니가 방문을 했다.
뜰에 굴러저 풀을 먹고있던 나를 발견한 아주머니는 아주머니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돌봐 주셨던 것이다.

아주머니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부자유의 몸을 극복하기위해 장해 극복운동에 몰입했다.

일반중학교에 다니기위해 고통스런 장애극복 운동에 전념해 휠체어를 탈수 있게끔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남보다 몇배 더 힘썼다.

그래서 중학교에서 상위급, 클럽활동에서는 농구 휠체어 경기에도 출전했으며, 전국대회의 110미터 경기에서는 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장애극복운동의 성과도 더욱더 좋아져서 손끝도 민첩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서도[붓글씨]도 시작했다. 차례차례 급수,단수를 따갔다. 그런 내가 사진으로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외국의 잡지에 일본을 소개하는 팜프레트에 서도의 분야로 소개되었다. 외국 정부기관이 발행하는 잡지였다.

나는 중학교 졸업후 직업훈련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졸업후 취업했다. 불가사의하게도 아버지가 운영했던 건축설계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한것은 하나의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핸디캡을 극복하여 일반사람도 좀처럼 해낼수없는 일에 도전하여 이겨온 이유는 수년전에 나를 버리고 도망친 어머니를 찾아내어 때려죽이고 말겠다는 무서운 집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은 했지만 회사의 동료들과도 친해지지 못하고 어릴적 쓰라린 체험으로 만들어진 성격이 모나고 날카로와서 동료들로부터도 소외를 당했다.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동료가 휠체어를 밀어주려고 하면 "나를 바보로 보느냐" 내가 이런 몸이라 동정을 하는거야"라고 하는 등 그러한 일 등으로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지금까지 혼자서 해 왔는데 건강한 사람에게 차별을 당하기 싫었다. 보통사람들 이상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일을 하던중 갑자기 피를 토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검사결과 전신에 이르는 암이었다. 증세가 말기라 의사도 손을 쓸수 없는 상태였다.

"얼마 남지않는 짧은 생을 즐기세요" 이것이 의사의 말이었다. " 절망이다. 지금까지 잘버텨 왔는데.."  나는 완전히 무기력에 빠져 삶을 포기했었다. 아무 욕망도 없으며 그냥 죽지 못해 숨쉬고 있는 나를 병문안 온 청년이 있었다.

이전에 직업훈련소에서 같이 있었던 N군이었다. N군도 휠체어를 타는 장애자였다.
가정은 가난하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장애자로서 누워서만 생활하는 상태로 좁은 집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N군의 수입 뿐 이었다.
그러나 N군은 언제나 밝은 표정이었다. 고생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의지가 강한 청년이었다.

그런 N군으로부터 신심 이야기를 들었다.  N군은 나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신심으로 건강해지면
좋겠어"라고 힘있게 말했다.

N군은 나에게 "곳간의 재보보다 몸의 재보, 몸의 재보보다 마음의 재보가 제일이니라"라는  어서를 인용하며, 게다가 N군은 "나는 이렇게 모두 부자유스러우며 돈도 없는 빈궁한 가정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행복해! 신심을 하면서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행복하게 될 수 있고 환경을 바꾸어갈 수 있어 그 정도로 위대한 신심이야! "라고 하면서 오달의 경애에 들어간듯이 확신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부자유한 몸, 절대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밝고 굳굳한 N군의 진지한 얘기와 인간성에 접해 나는 신심을 하기로 결의 했다.  몇일후 N군이 소속되어있는 조직에서 본존님을 하부받았다.
그때부터 나의 장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말기암의 고통의 괴로움은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죽음의 공포, 암의 고통, 살고싶어...
나는 잡념을 끊어 머릿속을 제로로 해서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장애자인 나는 손만으로 운전하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다. 친척 아주머니댁에 폐를 끼치기 싫어서 차의 조수석에 작은 불단을 준비하고 그곳에 어본존님을 안치했다.

시에서 경영하는 테니스장 옆에 차를 주차시켜두고 물만 마시는 생활에 도전했다. 필사의 제목을 올렸다.
암의 고통에도 참아나가며, 대량의 피를 토하며, 물을 마시고 참아가며 제목을 불렀다.

부르고,부르고, 또 불렀다. 낮에는 테니스를 하는 여학생들이 나를 바보로 생각하고 웃으면서 지나간다. 초등학생들도 학교에 가는길 오는 길에 내가 있는곳에 들러서 진기한 구경거리라도
만난듯 들여다 본다.  남.여 데이트족도 징그러운듯이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경찰도 왔다. "남에게 폐가 되니까 다른곳으로 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일에는 아예 무시해 버리고 신경도 쓰지않고 오로지 제목만을 불러 나갔다.  N군은 가끔씩 어떻게 하고 있나  모습을 보러
들르곤 했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먹을것이 없는데도 빵과 쥬스를 가지고 와서 격려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격려를 받으면서, 또 제목 투쟁에 들어갔다.

제목을 계속 불러서 2주일간 한숨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2주일 동안 전혀 수면을 취하지않고
제목을 불렀던 것이다.  피를 토하면서 제목, 물을 마시면서 제목,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비웃을 당하면서도 제목을 불렀다.

2주일째 계속 제목을 부르고 있었을 때 문뜩 정신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피를 토하는 것이 멈춰져 있던 것이다.  "어 이상한데" 그 정도로 피를 계속 토해 왔는데 전혀 피를 토하지 않게 된것이다.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서 토하려고 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서도 서둘러서 검사해 주었다.  검사의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이런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말기의 전신전이의 암세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철저한 검사를 했지만 암세포는 어디에도 없다.  완치됐던 것이다.

"의사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믿을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한다면
암은 완치 되었습니다."라고 진단했다.

나는 승리했다. 병마와의 장열한 싸움에 스스로 도전해서 스스로 이겼다. 게다가 2주일 동안에  말기의 암을 훌륭하게 이겨낸것이다.
어본존님의 위대함을 증명한 것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서 훌륭하게 이겨낸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제는 아무것도 무섭지않다.  한번은 죽은 목숨을 살려주신 어본존님!
학회에 모든것을 맡길 결의를 가지고 항상 즐거움 속에서 일과 학회 활동에 힘썼다.

직장에 복귀한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란것은 회사 동료들이었다.  병을 완치시킨것도 그렇지만 나의 인간성의 변화에 깜짝 놀란것이다.

자상하고 남을 배려해 주는 인간성으로 변한 것이다. 어릴때의 쓰라린 체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이전의 나는 너무나도 모가난 성격이었는데 새로 태어난 것과 같이 변해 버린 것이다.

동료에게 고민이 있으면  "어떻게 된거야! 나라도 괜찮다면 힘 닿는 데까지 도울게!
뭐든지 할 수 있어, 혼자서 되지않는 일이 있으면 얘기해줘!"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본존님의 불법 얘기를 들려주고 의욕적으로 절복에도 힘썼다.  내가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바뀐 모습을 보고  동료는 "그 때의 그를 이렇게 까지 바뀐 모습을 보고  동료들은 "그 때의 그를 이렇게 까지 바꾼 불법이라면..."이라고 생각했음인지

7명의 회사 동료가 입신을 한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대망의 사건이 일어났다.

10년전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10살짜리 자식을 내버려두고 간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어색하게 어머니에게 얘기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나를 이런 몸으로 낳아 주셔서 고마워요!"
그때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지금 저는 학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몸으로 태어나서 괴롭고 쓰라린 과거가 있었던 덕분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고마워요 어머니!"

나의 인간혁명 경애혁명 바로 이런 것이다. 신심한다고 하는 것은 이런것을 말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에게 있어서의 최악, 최극의 환경이라도 괴로움 뿐인 인생이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삶의 희망,  전진의 용수철로 해 버린다.

이것이 신심의 힘, 어본존의 위대함이 아니겠는가!  스스로의 손으로 버린 자기자식에게 이런 말을 듣게된 어머니는 죄책감에 울면서 신심을 시작한 것이다.

가지각색의 환경에 처해 나가면서 그 덕분으로 신심할수 있었던 나,  말기의 전심암,  선천적인 부자유의 몸, 어머니와 생 이별...

모든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복운이며. 신심을 만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승과 운명을 함께하는 제자가 되라

스승과 고락을 함께하는 제자가 되라

스승과 목적을 함께하는 제자가 되라

스승과 승리를 함께하는 제자가 되라

스승과 생사를 함께하는 제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