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 왜 삼계탕·보신탕을 먹지?
2009. 7. 17. 17:21ㆍ좋은글,건강,기타(공)
복날 왜 삼계탕·보신탕을 먹지?
날씨가 더워지면서 여름철 보양음식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됐다. 여름이면 시원한 냉면과 콩국수가 생각나고 한 여름 복날에는 보신탕, 삼계탕을 먹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다. 무심코 입맛 따라 먹는 여름철 보양식이지만 그 역사와 유래를 살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복날음식은 삼계탕 대신 육개장
여름 삼복 더위 때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 보신탕이고 삼계탕이다. 요즘은 보신탕 수요가 줄어 든 대신 삼계탕을 많이 찾아 복날이면 삼계탕 집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복날 보신탕 대신에 먹는 음식은 삼계탕보다 육개장이었다고 한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육개장이 삼복 더위 때 보신탕을 대체하는 음식이라고 했다.
삼복이면 자극성 있는 조미료를 얹은 '개장'을 계절음식으로 먹었는데 개고기가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은 쇠고기로 대체를 하고 이를 육(肉)개장이라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육개장에서 개장은 원래 개고기로 국을 끓인 구장(狗醬)인데 대신 쇠고기를 넣었기 때문에 고기 육(肉)자를 써서 '육개장'이라고 했다. 쇠고기 대신 닭고기를 사용했다고 해서 '육계장'이라고도 하지만 표준말은 '육개장'이요, 닭고기를 사용할 경우에는 '닭육개장' 혹은 '닭개장'이라고 불렀다.
육개장은 뜨거운데다 매운 것이 특징이다. 보통 파 마늘 참기름 고춧가루 후추로 양념을 하고 양념을 한 고기를 국에 넣고 고추기름을 넣어 끓이기 때문에 국물이 빨갛다. 보기만 해도 뜨겁고 매워 보이는데 한 여름에 왜 이런 음식을 먹었을까?
우리나라 여름 보양식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이열치열(以熱治熱)'이다. 더운 여름이면 뜨거운 음식을 먹어 더위를 쫓았다. 따지고 보면 콩국수와 들깨탕도 얼핏 찬 음식처럼 보이지만 몸의 열을 제거하고 냉기를 치료하는 역할이 강조된 만큼 이열치열의 개념이 적용됐다고 할 수 있다.
남조 시대 양나라의 학자이며 의사였던 도홍경이 남긴 글을 보면 한의학적으로 왜 복날 보신탕이나 육개장을 먹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계절 중에서 여름이 몸이 견디기 가장 힘든 계절이다. 여름이면 양기가 바깥으로 뻗어 나오고 음기는 뱃속 깊숙한 곳에 숨어 몸에 냉기가 돈다. 뱃속이 차갑기 때문에 음식으로 냉기를 보완해야 하기 때문에 보신탕이 없어서는 안 된다. 뱃속을 따듯하게 해야 질병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뜨거운 보신탕이 제격이다.
여름에는 또 뜨거운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은 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경락이 뭉쳐 혈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보신탕은 여름을 이겨내려는 옛 사람들의 지혜다. 보신탕을 대신한 육개장이 고춧가루에 고추기름을 넣어 끓일 정도로 빨갛고 뜨거워야 했던 이유는 여름날 뱃속에 모여 있는 냉기를 없애기 위한 의학적 목적이 담겨 있다.
반대로 겨울이면 음기가 밖으로 나오고 양기가 뱃속에 뭉쳐 동치미나 냉면 같은 차가운 음식으로 속을 다스려야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복날 보신탕이나 육개장 혹은 삼계탕을 먹는 이유에 대해 최남선은 '이열치열'이라는 실용적 측면과 함께 주술적인 의미도 있다고 했다.
복날은 음양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고기는 불(火)에 해당하고 복날(三伏)은 쇠(金)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로써 쇠를 이기니(火克金) 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 이전부터 복날을 중요시했는데 복날이 되면 개고기를 사대문에 널어 벌레의 침입을 막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최남선이 말한 것처럼 개고기가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적 역할을 한 것이다.
여름별미 서민 '콩국수' 양반 '들깨탕'
더위에 지쳐 없어진 입맛을 살리는 여름철 별미 중 하나가 콩국수다. 콩 국물에 얼음 동동 띄우고 국수를 말아 먹으면 더위가 싹 가신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콩국수 대신 들깨탕을 여름 별식 중 으뜸으로 쳤다. 세시풍속사전에 보면 조선시대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6월 삼복 때가 되면 사람들이 임자수탕을 먹었다고 한다. 임자(荏子)는 들깨다. 어린 암탉을 잡아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 넣고 들깨를 볶아 갈아 만든 국물에 미나리, 오이채, 버섯을 살짝 데쳐 먹는데 이를 임자수탕 혹은 깻국탕이라고 했다.
콩과 들깨로 국물을 만드는데 콩이 많아 콩 국물이 중심을 이루면 콩국수가 되는 것이요, 들깨를 많이 넣고 끓여 식히면 임자수탕이 되는데 콩국수는 여름철 서민들의 음식이었고, 임자수탕은 양반들이 즐겼던 여름철 별미였다고 한다.
여름에 콩국수나 들깨탕을 먹는 이유는 의학적으로도 이유가 있다. 명나라 때 이시진이 쓴 의학서인 본초강목에 들깨는 몸의 열을 제거하고 냉기를 치료하며 소화를 돕는다고 했다. 여름에 들깨를 먹으면 더위를 막으며 식욕이 살아나 소화를 도우며 감기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들깨를 넣은 임자수탕이 여름 별미로 꼽히는 이유다.
들깨를 여름철 계절 음식으로 먹은 것은 역사가 무척 깊은 모양이다. 중국 송나라에서 궁중 어의들을 모아 여름철 음료를 만드는 경연대회를 열었다. 다양한 종류의 여름 음료가 선을 보였는데 그 중에서 들깨 죽이 일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송 인종은 한림원에 명을 내려 들깨를 넣어 여름에 더위를 쫓는 음료로 만든 후 신하들에게 하사하기까지 했다.
더위를 쫓고 소화를 돕는데 들깨가 효능이 있다고 했지만 들깨는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딸을 둔 어머니들은 딸이 시집갈 때가 되면 들깨 죽을 많이 먹였다. 들깨가 피부를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지금으로 치면 시집가기 전 신부화장을 위해 집중적으로 피부 관리에 들어갔던 셈이다. 현대에서도 들깨에는 리놀린산과 비타민 E와 F가 많아 피부 미용에 좋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중의 하나로 이아(爾雅)라는 서적이 있는데 기원 전 2세기 무렵에 나온 책이다.
[냉면을 퍼뜨린 일등공신은 기생?]
지금은 흔히 먹는 냉면이지만 냉면이라는 단어는 문헌에서 16세기 말에 등장해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사대부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냉면이 사대부 사이에 퍼진 연유로 일부에서는 기생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거친 메밀을 갈아서 만드는 메밀국수는 메밀이 많이 나는 평안도나 경상도 산간지방에서 서민들이 먹는 음식 혹은 구황식품으로 쓰이다가 기생 문화와 접목되면서 오늘날의 냉면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3대 냉면으로는 평양냉면, 함흥냉면, 진주냉면을 꼽는다. 평양과 진주는 옛날부터 미인이 많았던 고장이며 평양기생과 진주기생은 우리나라 최고의 기생으로 여겼다.
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처럼 술 먹은 뒤에는 냉면을 먹어야 제 맛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냉면과 술 자리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기생 문화가 발달한 평양과 진주의 냉면이 유명한 이유도 기생들이 사대부들과 함께 냉면을 야참으로 발전시켜 자리를 잡게 됐다는 설이 있지만 고증할 길은 없다.
사실여부를 떠나 냉면은 아무래도 기생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냉면이 서울에 퍼진 것은 일제시대 유명한 기생집이었던 명월관 덕분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이 망한 후 왕실 요리사가 명월관에서 고종 황제가 즐겼던 냉면을 선보이며 장안의 한량들 사이에 퍼졌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신문광고를 보면 냉면집 개업 광고가 자주 보이는데 이북 사람들이 서울로 내려와 냉면집을 차리면서 남한에서도 냉면이 크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냉면을 본격적으로 즐기게 된 것은 6.25전쟁 이후다. 북한 출신 실향민이 서울로 피난 와 고향에서 먹던 냉면집을 차리면서 대부분의 한국 인들이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복날음식은 삼계탕 대신 육개장
여름 삼복 더위 때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 보신탕이고 삼계탕이다. 요즘은 보신탕 수요가 줄어 든 대신 삼계탕을 많이 찾아 복날이면 삼계탕 집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삼복이면 자극성 있는 조미료를 얹은 '개장'을 계절음식으로 먹었는데 개고기가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은 쇠고기로 대체를 하고 이를 육(肉)개장이라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육개장에서 개장은 원래 개고기로 국을 끓인 구장(狗醬)인데 대신 쇠고기를 넣었기 때문에 고기 육(肉)자를 써서 '육개장'이라고 했다. 쇠고기 대신 닭고기를 사용했다고 해서 '육계장'이라고도 하지만 표준말은 '육개장'이요, 닭고기를 사용할 경우에는 '닭육개장' 혹은 '닭개장'이라고 불렀다.
육개장은 뜨거운데다 매운 것이 특징이다. 보통 파 마늘 참기름 고춧가루 후추로 양념을 하고 양념을 한 고기를 국에 넣고 고추기름을 넣어 끓이기 때문에 국물이 빨갛다. 보기만 해도 뜨겁고 매워 보이는데 한 여름에 왜 이런 음식을 먹었을까?
우리나라 여름 보양식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이열치열(以熱治熱)'이다. 더운 여름이면 뜨거운 음식을 먹어 더위를 쫓았다. 따지고 보면 콩국수와 들깨탕도 얼핏 찬 음식처럼 보이지만 몸의 열을 제거하고 냉기를 치료하는 역할이 강조된 만큼 이열치열의 개념이 적용됐다고 할 수 있다.
남조 시대 양나라의 학자이며 의사였던 도홍경이 남긴 글을 보면 한의학적으로 왜 복날 보신탕이나 육개장을 먹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계절 중에서 여름이 몸이 견디기 가장 힘든 계절이다. 여름이면 양기가 바깥으로 뻗어 나오고 음기는 뱃속 깊숙한 곳에 숨어 몸에 냉기가 돈다. 뱃속이 차갑기 때문에 음식으로 냉기를 보완해야 하기 때문에 보신탕이 없어서는 안 된다. 뱃속을 따듯하게 해야 질병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뜨거운 보신탕이 제격이다.
여름에는 또 뜨거운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은 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경락이 뭉쳐 혈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보신탕은 여름을 이겨내려는 옛 사람들의 지혜다. 보신탕을 대신한 육개장이 고춧가루에 고추기름을 넣어 끓일 정도로 빨갛고 뜨거워야 했던 이유는 여름날 뱃속에 모여 있는 냉기를 없애기 위한 의학적 목적이 담겨 있다.
반대로 겨울이면 음기가 밖으로 나오고 양기가 뱃속에 뭉쳐 동치미나 냉면 같은 차가운 음식으로 속을 다스려야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복날 보신탕이나 육개장 혹은 삼계탕을 먹는 이유에 대해 최남선은 '이열치열'이라는 실용적 측면과 함께 주술적인 의미도 있다고 했다.
복날은 음양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고기는 불(火)에 해당하고 복날(三伏)은 쇠(金)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로써 쇠를 이기니(火克金) 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 이전부터 복날을 중요시했는데 복날이 되면 개고기를 사대문에 널어 벌레의 침입을 막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최남선이 말한 것처럼 개고기가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적 역할을 한 것이다.
여름별미 서민 '콩국수' 양반 '들깨탕'
더위에 지쳐 없어진 입맛을 살리는 여름철 별미 중 하나가 콩국수다. 콩 국물에 얼음 동동 띄우고 국수를 말아 먹으면 더위가 싹 가신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콩국수 대신 들깨탕을 여름 별식 중 으뜸으로 쳤다. 세시풍속사전에 보면 조선시대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6월 삼복 때가 되면 사람들이 임자수탕을 먹었다고 한다. 임자(荏子)는 들깨다. 어린 암탉을 잡아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 넣고 들깨를 볶아 갈아 만든 국물에 미나리, 오이채, 버섯을 살짝 데쳐 먹는데 이를 임자수탕 혹은 깻국탕이라고 했다.
콩과 들깨로 국물을 만드는데 콩이 많아 콩 국물이 중심을 이루면 콩국수가 되는 것이요, 들깨를 많이 넣고 끓여 식히면 임자수탕이 되는데 콩국수는 여름철 서민들의 음식이었고, 임자수탕은 양반들이 즐겼던 여름철 별미였다고 한다.
여름에 콩국수나 들깨탕을 먹는 이유는 의학적으로도 이유가 있다. 명나라 때 이시진이 쓴 의학서인 본초강목에 들깨는 몸의 열을 제거하고 냉기를 치료하며 소화를 돕는다고 했다. 여름에 들깨를 먹으면 더위를 막으며 식욕이 살아나 소화를 도우며 감기 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들깨를 넣은 임자수탕이 여름 별미로 꼽히는 이유다.
들깨를 여름철 계절 음식으로 먹은 것은 역사가 무척 깊은 모양이다. 중국 송나라에서 궁중 어의들을 모아 여름철 음료를 만드는 경연대회를 열었다. 다양한 종류의 여름 음료가 선을 보였는데 그 중에서 들깨 죽이 일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송 인종은 한림원에 명을 내려 들깨를 넣어 여름에 더위를 쫓는 음료로 만든 후 신하들에게 하사하기까지 했다.
더위를 쫓고 소화를 돕는데 들깨가 효능이 있다고 했지만 들깨는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딸을 둔 어머니들은 딸이 시집갈 때가 되면 들깨 죽을 많이 먹였다. 들깨가 피부를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지금으로 치면 시집가기 전 신부화장을 위해 집중적으로 피부 관리에 들어갔던 셈이다. 현대에서도 들깨에는 리놀린산과 비타민 E와 F가 많아 피부 미용에 좋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중의 하나로 이아(爾雅)라는 서적이 있는데 기원 전 2세기 무렵에 나온 책이다.
[냉면을 퍼뜨린 일등공신은 기생?]
지금은 흔히 먹는 냉면이지만 냉면이라는 단어는 문헌에서 16세기 말에 등장해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사대부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냉면이 사대부 사이에 퍼진 연유로 일부에서는 기생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거친 메밀을 갈아서 만드는 메밀국수는 메밀이 많이 나는 평안도나 경상도 산간지방에서 서민들이 먹는 음식 혹은 구황식품으로 쓰이다가 기생 문화와 접목되면서 오늘날의 냉면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3대 냉면으로는 평양냉면, 함흥냉면, 진주냉면을 꼽는다. 평양과 진주는 옛날부터 미인이 많았던 고장이며 평양기생과 진주기생은 우리나라 최고의 기생으로 여겼다.
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처럼 술 먹은 뒤에는 냉면을 먹어야 제 맛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냉면과 술 자리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기생 문화가 발달한 평양과 진주의 냉면이 유명한 이유도 기생들이 사대부들과 함께 냉면을 야참으로 발전시켜 자리를 잡게 됐다는 설이 있지만 고증할 길은 없다.
사실여부를 떠나 냉면은 아무래도 기생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냉면이 서울에 퍼진 것은 일제시대 유명한 기생집이었던 명월관 덕분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이 망한 후 왕실 요리사가 명월관에서 고종 황제가 즐겼던 냉면을 선보이며 장안의 한량들 사이에 퍼졌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신문광고를 보면 냉면집 개업 광고가 자주 보이는데 이북 사람들이 서울로 내려와 냉면집을 차리면서 남한에서도 냉면이 크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냉면을 본격적으로 즐기게 된 것은 6.25전쟁 이후다. 북한 출신 실향민이 서울로 피난 와 고향에서 먹던 냉면집을 차리면서 대부분의 한국 인들이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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