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8. 15:01ㆍ佛法 .SGI
같은 자각으로 광포에 면려 -사설(師說)의 실증이야말로 제자의 사명
‘사제’ ―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들으면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필요 없는 옛 시대의 인간관계라는 인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술이나 학문, 스포츠 등의 세계에서는 기술과 지식을 몸에 익혀 숨은 재능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모범을 보이고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 주는 ‘스승’에 상당하는 사람이나 물질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스승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성장의 척도나 진행방향이 결정됩니다. 따라서 사제라는 것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도 스승이 주는 영향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그것이 인생의 근본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스승’을 선택하고 믿는가에 따라 인생의 궤도와 인격,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대성인만이 진실한 ‘스승’
불법에서 ‘사제’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떠한 ‘인생의 스승’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법화경 법사품 제10에는 “이 스승에 수순(隨順)해서 배우면 항사(恒沙)의 부처를 뵈어 받듬을 득(得)하리라”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본으로부터 인격을 향상시켜 주고 절대적 행복을 약속해 주는 스승은 누군가 ―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니치렌 대성인이며, 南無妙法蓮華經의 어본존입니다. 이 ‘스승’이란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입니다. ‘배우면’이란 南無妙法蓮華經를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수순(따라서 순종한다)’란 신수(信受:믿고 수지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우리들은 니치렌 대성인을 ‘스승’으로 해서 일생 동안 불법의 어본존을 신수하고 열심히 실천할 때 ‘항사의 부처’ ― 갠지즈 강의 모래와 같은 무수한 부처 ― 를 본다. 즉 무엇에도 위협받지 않는 불계의 생명을 개발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중생을 부처와 같은 경애로
그런데 이 ‘사제’라는 말에 ‘옛’이라는 인상을 갖기 쉬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거기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차별을 두어 제자의 인격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사제관(師弟觀)을 타파하고 본래부터 있어야 할 사제의 관계를 설해 밝힌 원리가 불법의 ‘사제불이’입니다.
법화경의 방편품 제2에는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나와 같이 동등하게 하여 다름이 없도록 하느니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이 경문을 ‘사제’에 입각해서 보면 '나’는 ‘부처’이며 ‘스승’에 해당합니다. 제자는‘일체(一切)의 중생(衆生)’이 됩니다. 즉, 일체중생을 이끌어 ‘부처’와 동일한 생명경애로까지 높여 가는 것이 스승인 부처가 법을 설하는 근본목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불법에서 설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사제불이(師弟不二)’라고 합니다. 스승과 제자는 둘이면서 둘이 아닌 일체이다 ― 여기에 불법의 구극(究極)이 있습니다. 불법은 결코 관념의 세계에 머무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스승과 제자, 인간과 인간의 삶의 관계 속에서, 생명과 생명의 맥동 속에서 나타나고 전해져 가는 실천의 철리(哲理)입니다. 불법은 사제상대(師弟相對)하여 신(信)을 취한다고 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구도의 청정한 일념으로 대하는 생명의 약동이 있어야만 비로소 불법 전체를 알게 되는 것이며, 스승의 생명과 법문(法門)이 제자의 생명에 흘러드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가 스승과 일념을 함께 해서 광포의 물결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 사제불이며, 이를 실천하는 가운데 불계의 생명이 용솟음치는 것입니다. 어떤 장마(障魔)가 닥치더라도 스승의 뒤를 어디까지라도 따라간다는 의연한 신심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다쓰노구치 법난 때 대성인에게 바친 시조깅고(四條金吾)의 정성은 영원한 거울입니다. 이 정신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승의 경애에 육박하는 투쟁
‘스승’과 같은 자각에 서서 그 경애에 끝까지 육박해서 ‘사제불이’의 실천을 관철하는 데에 자신의 일생성불(一生成佛)의 길은 열리는 것입니다. 어서의 지도를 정확하게 해득(解得)해서 받아들이고 이것을 생활과 활동에 생생하게 반영하면서 ‘불이(不二)’의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은 원리(原理)이며 제자는 실천, 전개(展開)입니다. 제자의 실천과 해야 할 일 속에 스승의 이상(理想)도 전개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의 모습에 의해 스승의 위대함도 결정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존재를 후세에 남긴 것은 제자인 플라톤이었습니다. 석가(釋迦)에게 가섭(迦葉)·아난(阿難)이 있고, 천태(天台)에게 장안(章安)이, 전교(傳敎)에 기신(義眞)이 있음으로써 불법도 계승됐습니다.
제자의 모습으로 스승이 평가된다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정의(佛法正義)는 닛코(日興) 상인에 의해 계승됐습니다. 그리고 어본불이 나타내신 광선유포를 지금 SGI한국불교회는 한결같이 추진하고 실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케다 SGI회장은 “모든 후계자 여하에 따라 사조(思潮)의 흥폐(興廢)가 결정된다고 해도 좋다. 여러분들은 창가학회의 플라톤이 되어 주기 바란다”고 지도했습니다. 어쨌든 각자의 분야에서 사설(師說)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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