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행 때 왜 법화경을 독송하는가?
2019. 12. 7. 14:22ㆍ佛法 .SGI
방편품과 자아게
창가학회 회원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근행, 창제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근행할 때는 법화경 <방편품> 제2와 <여래수량품> 제16의 <자아게(自我偈)>를 독송(독경)합니다. 왜 법화경의 경문을 독송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연재를 통해 배운 대로 석존이 설한 불법(佛法)의 정수를 담은 경전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그리고 법화경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법리를 설한 부분이 <방편품> 제2와 <여래수량품> 제16입니다.
지금까지의 복습으로 각각의 법리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방편품>에는 법화경 전반(적문)의 중심 법리인 ‘제법실상(諸法實相)’이 씌어 있습니다. 이 법리는 알기 쉽게 말하면 ‘우주의 모든 현상이 묘법(妙法)의 발로’라는 점을 나타냅니다. 이 법리를 설함으로써 일체중생이 평등하게 성불할 수 있다는 점이 이론적으로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수량품>에는 법화경 후반(본문)의 중심 법리인 ‘구원실성(久遠實成)’이 씌어 있습니다. ‘석존이 금세에서 처음 성불했다(시성정각<始成正覺>)’는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타파하고 ‘실은 석존은 구원이라는 아득히 먼 옛날에 성불한 이래 이 사바세계에 상주하는 부처’라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로써 구원이라는 과거부터 무한한 미래까지 본디 누구나 부처라는 생명의 진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독송하는 <수량품>의 ‘자아득불래(自我得佛來)’로 시작하는 <자아게>는 <수량품> 전체를 요약했습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특히(법화경) 28품 중에서도 뛰어나게 훌륭한 품은 방편품과 수량품입니다”(어서 1201쪽, 통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방편품> <자아게>를 독송한다는 것은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찬탄한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불의 근원법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방편품>, <자아게>라는 부처가 설한 최고의 말씀으로 찬탄하는 것입니다.
정행과 조행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근행에서 근간이 되는 수행은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제를 ‘정행(正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편품> <자아게>를 독송하는 것은 정행이라는 제목의 공덕을 도와 나타내기 위해 행하므로 ‘조행(助行)’이라고 합니다.
최고의 정행을 실천하기 위해 <방편품> <자아게>를 불러 최고의 조행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면 쌀이나 면이라는 주식(=정행)과 주식의 맛을 거드는 소금이나 식초와 같은 조미료(=조행)의 관계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창제를 정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는 대성인 불법의 관점에서 법화경을 독송하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말법에서 불석신명의 실천으로 법화경을 신독하여 만인성불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한 대성인이 넓힌 것은 “법화경의 본문(本門) 수량품(壽量品)의 문저(文底)에 잠겨 있느니라”(어서 189쪽) 하고 씌어 있듯 법화경의 간심은 남묘호렌게쿄입니다.
따라서 대성인의 관점에서 보면 법화경은 모두 남묘호렌게쿄를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어본존을 믿고 근행, 창제를 실천하는 데에 절대적인 공덕이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열린 수행
<방편품> <자아게>에는 중요한 법리가 씌어 있습니다. 하지만 독송할 때 경문의 의미를 모두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서에는 “갓난아기가 물과 불을 분별하지 못하고, 독과 약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지만, 젖을 빨아 먹음으로써 목숨을 이어나갈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전에 통달하지 못해도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들은 사람이 부처가 되지 못할 리 없다”(어서 1046쪽, 취의) 하고 씌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국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발음이 정확하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상대에게는 제대로 의미가 전해집니다. 말하자면 근행, 창제의 소리는 ‘부처와 보살이 사는 세계의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행, 창제를 실천하는 데 중요한 점은 어디까지나 어본존을 믿고 묘법을 끝까지 부르고 구도하는 자세입니다. 거기에 반드시 무량한 복덕도 빛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성인이 나타낸 독경과 창제야말로 만인이 실천할 수 있는 불도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의 뒤를 이은 불의불칙의 교단인 창가학회 덕분에 오늘날 지용의 연대는 전 세계로 넓혀졌습니다.
24시간 365일, 부처의 생명을 찬탄하는 음성이 지구상에서 끊이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근행할 때 <방편품> 독송 마지막에 “소위제법(所謂諸法) 여시상(如是相) -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이라고 세번 반복해서 읽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제법실상’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법리인 ‘십여시(十如是)’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세번 읽는 이유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①어본존을 향하는 자신이 그대로 부처의 지혜를 갖추었다고 보고 읽습니다. ②어본존을 향하는 자신이 그대로 현실에서 부처의 행동을 한다고 보고 읽습니다. ③어본존을 향하는 자신이 그대로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당체라고 보고 읽습니다.
대성인은 “세번 읽으면 공덕이 뛰어나다”(어서 412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쪽이든 십여시를 세번 읽으면 ‘내 몸이 존귀한 부처’라는 것을 세가지 측면에서 상찬하는 것입니다.
[매자작시념]
일체중생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
<여래수량품> 제16 마지막은 “매자작시념(每自作是念) 이하령중생(以何令衆生) 득입무상도(得入無上道) 속성취불신(速成就佛身)”(법화경 493쪽)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은 “부처는 항상 어떻게 하면 중생을 무상도에 들어가게 해 속히 부처의 몸을 성취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매자작시념의 비원(悲願)”(어서 466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매자작시념’이란 한마디로 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일념(一念)을 말합니다.” “‘오저의 일념에 늘 무엇이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바라고 기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거기에 자신의 경애가 여실히 나타납니다.”(소설 ‘신·인간혁명’ 제26권 <법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를 석존 자신에게 물으며 끝나는 부분이 바로 <수량품>입니다. 학회원이 벗의 행복을 기원하고 헌신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부처의 서원과 똑같은 가장 존귀한 실천입니다.
[‘법화경의 지혜’에서]
자신의 깊은 사명을 자각하여
지금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일체가 ‘성불 즉 인간혁명’이라는 금세의 드라마로서 필요불가결한 한 장면, 한 장면입니다. ‘진실(불계)’을 나타내는 ‘방편(구계)’입니다. 이것이 비묘방편입니다.
대성인은 “고(苦)는 고라고 깨닫고 낙(樂)은 낙이라고 열어서 고락(苦樂)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계시라. 이 어찌 자수법락(自受法樂)이 아니겠느뇨”(어서 114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락은 구계이고, 방편입니다. 묘법을 부르는 일은 불계이고, 부처의 진실한 지혜의 세계입니다.
“‘고’도 ‘낙’도 신심이라는 크고 높은 경애에서 유유히 내려다본다. 그리고 묘법의 기쁨을 즐겁게 맛본다.” - 그것이 ‘묘호렌게쿄 방편품’을 신독(身讀)한 것이 됩니다.
◇
구원원초의 부처 -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상주하는 부처는 우주생명 그 자체이고, 일순(一瞬)도 정체하지 않고 언제나 끊임없이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활동한다. 그 부처와 자기자신이 실은 일체이고, 자기자신이 구원의 옛날부터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활동해왔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다.’ - 이렇게 자각하는 것이 수량품의 마음입니다.
‘법화경의 지혜’<상> <방편품 제2장>
‘법화경의 지혜’<중> <여래수량품 제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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