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성립과 홍통

2008. 9. 24. 11:30佛法 .SGI

 

 

 

석존께서는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최초로 설법 하신 후 80세에 입멸하시기

까지 5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 수많은 설법 중에서 각 모임의 제자들과 또 그들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들었던,

혹은 입으로 전해진 설법 등을 생각나는 대로 책으로 정리한 것이

현존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경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느 경전을 통하여 도움을 청하여도

항상 같은 빛을 우리들에게 비추어 주시는 고귀한 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이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것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을 찬양하기 위해 다른 경전을 무시하거나 하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추가> *이것은 본과 적을 모르는 일반 불교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개회(開會)와 회입(會入)을 모르는 것입니다.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관의 안목으로 이전 경을 살리며 파절하는 것입니다.] 

이 <법화경>을 중국에 전해 중국어로 번역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현재 사용되고 있는 것은

구마라집이라고 하는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사람의 부친은

본래 인도의 명문 출신이었으나,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구자(龜慈)라고 하는 나라에 가서

그 국왕의 여동생과 결혼했습니다. 그리하여 태어난 아이가 바로 구마라집입니다.

그 나라는 매우 불교가 융성한 나라여서 구마라집도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인도에 유학, 대승불교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재능과 인격이 모든 사람들에 비해 뛰어난 것을 꿰뚫어 본

스승 수리야소마(須梨耶蘇摩)는 라집이 귀국할 때에 <묘법연화경>을 전수하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처님의 해가 서쪽에 지고 그 남은 빛이 바야흐로 동쪽으로 퍼지려 한다.

이 경은 동북에 연(緣)이 있다. 너는 삼가 이것을 전하라'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라집은 스승의 말에 따라서 동북쪽에 있는 중국에 가서 이 경전을 널리 퍼뜨리고자

굳은 결심은 하였지만, 그 당시의 중국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하거나

다시 일어나거나 하여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집의 명성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기에 마침내 후진(後秦)이라고 하는 나라가 세워졌을 때,

그 국왕의 초대를 받아 수도 장안(長安)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이는 이미 62세였지만, 그 이후 8년간 70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국사의 대우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법화경>이 가장 중요한 경이였던 것입니다.
그 때까지의 중국어 번역에는 오류가 많이 있었으므로

라집은 대단히 신중한 태도로, 생명을 바치는 진지함으로 그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즉, 라집은 인도말도 중국말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지만,

자기 혼자 힘으로 역술하려 하지 않고, 양국어에 능통한 많은 학자를 모아

국왕과 신도들도 자리를 함께하는 가운데 <법화경>을 강의하였습니다.

학자들은 그 필기를 기본으로 하여 제각기 중국어로 번역본을 만들고,

그것을 모아 연구를 거듭하고 엄중한 토의를 거쳐, 마침내 정본(定本)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종사한 사람이 대략 2,000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인도어에서 중국어로 번역되었다고 해도

석존의 가르침은 조금도 틀림없이 전해졌다고 단정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왕은 라집의 인물과 재능에 깊이 탄복한 나머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의 자식을 남기게 하고자 여러 가지 궁리를 꾀하였습니다.

마침내, 무리한 일이었으나 라집에게 아내를 갖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라집은 입적할 때에,

 ‘저는 어쩔 수 없이 계율을 어기며 아내를 갖게 되었지만,

제가 말로서 설한 것만은 결코 부처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저의 몸을 화장할 때 혀만은 타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자, 입멸 후 화장을 하였더니,

과연 혀만 푸른 연꽃 위에서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후, 중국 불교의 중심이 된 것은 이 <법화경>이고,

그것도 ‘작은 석가모니’라고 불리우는 천태대사(天台大師)가

여러 가지 대승과 소승 경전을 철저히 연구한 결과,

‘불타(佛陀)의 참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단언하고,

<법화현의(法華玄義)>(10권), <법화문구(法華文句)>(10권), <마하지관(摩하止觀)>(10권)

과 같은 훌륭한 해설서를 편찬하여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법화경>이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많은 명승. 고승이 속출하였습니다.
이 법화사상은 중국 천태종이 개종(開宗)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니,

지자대사(智者大師), 즉 천태대사와 함께 남악혜사(南嶽蕙思)스님에게 배운

백제 스님 현광법사(玄光法師)와 또 지자대사의 문하생이었던

신라의 연광(椽光)대사 등이 있어 우리나라에도 법화홍통은 있었다고 보아집니다.

특히 신라에서는 원광(圓光). 자장(慈藏). 원효(圓曉). 의상(義湘). 원측(圓測) 등

기라성 같은 고승들이 배출 되어,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더욱이 이 중에서도 원효대사는 대중 불교의 건설을 위해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를 비롯한 저서 99부 204권을 찬술하고,

모든 불교를 융회귀일(融會歸一)(자세히 이해하여 하나 되다)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특히 그가 진언한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신라 삼국통일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한편 수당(隨唐)시대에 성황 하던 중국불교는 안록산의 병란과

당 무종의 파불(破佛) 및 주세종의 배불(拜佛) 등의 법난에 의해

전적(典籍)이 분실되고 사탑이 파괴되어 교세가 쇠퇴일로에 이르렀으나

송태조에 의해 불교가 소생되고 오월(吳越)의 충의왕이 영가집을 독송하던 중

의문이 생겨 의적대사에게 질문하였더니, 그 해답은 천태의 <법화문구(法華文句)> 중에 있지만

그 책은 이미 일실(逸失)되었으나 고려에는 있다고 하자 충의왕은 고려에 사자(使者)를 보내

구득(求得)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천태학에 조예가 깊은

체관법사(諦觀法師)를 전교사로 지명하여 중국에 파견하니

이분이 바로 천태학 입문서로서 유명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의 저자입니다.

또 고려 문종의 넷째 왕자 의천(義天)이 있었으니, 어린 나이로 일찍이 출가하여

화엄(華嚴)을 익혀 뜻하는 바가 있어 왕 몰래 송나라에 건너가

천태학을 섭렵한 후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천태종을 세웠으니

바로 이분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 입니다. 그런데 특기코자 하는 바는

국사께서는 흔히 우리 나라사람들이 지닌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을 배격하여,

고려 천태종의 개조(改祖)에 원효대사를 그리고 중흥조(中興祖)에 체관법사을 세우고

개종(開宗)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천태학이 비록 중국에서 발흥했지만

우리나라가 훨씬 우세하다는 것을 만방에 선포한 것이 되는 셈입니다.

그 후 법화 천태 사상은 우리나라의 모든 불교를 통일하여 놀랄 만큼 발전하였으나,

불행히도 고려 말엽에 이르러 그 힘이 비대해지자

소자종(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으로 분파되더니 기어코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새로 건국된 조선조의 배불숭유 정책에 의해 제4대 세종 조에 이으러

선교양종(禪敎兩宗)의 통합으로 인해 선종으로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영영 그 법맥이 끊어지고 말았으나 그래도 언제나 이 <법화경>만은

모든 경전 중에 왕으로서 가장 빼어난 경전으로 인정되어 왔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조정은 배불숭유 사상에 지배되고 있었지만 내심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조선의 제7대 왕인 세조가 간경도감으로 하여금 이 <묘법연화경>,

즉 구마라집 역(譯) 계환해(戒環解) 본(本)을 <금강경>,<아미타경>,<원각경>,<능엄경>과

더불어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발간케 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전해져서 두루 쓰이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불교는 일본의 고대문화에 크게 공헌하였으니,

그 업적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특히 고구려 영양왕 때 일본으로 건너간

혜자(慧慈)법사가 <법화경>을 일본 왕실에 전하였습니다.

당시 섭정의 자리에 있던 쇼오도꾸다이시(聖德太子, 성덕태자)는

이 법화사상에 입각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이것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나라(奈良)의 법륭사(法隆寺)는

성덕태자가 <법화경>을 연구하고 강의를 했던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일본의 천태학은 원래 현교(顯敎)였습니다.

즉 경전을 알기 쉽도록 설법한 가르침 이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이쪼오(最證= 전교대사)가 밀교(密敎)에도 깊은 동경과 이해를 가졌기 때문에

그 제자들 중에 밀교에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이 있어 천태밀교(天台密敎, 台密)를 연구하더니

니찌렌(日蓮)에 이르러 마침내 천태의 이(理)의 일념삼천(一念三千)사상은 →

사(事)의 일념삼천(一念三千)으로 변하여서 법화종(法華宗)을 만들게 되었으며

그 후 전자를(이(理)의 일념삼천(一念三千)) 천태종(天台宗)이라 하고

후자를(사(事)의 일념삼천(一念三千)) 법화종 또는 일련종(日蓮宗)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양자간의 차이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난행도(難行道)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이행도(易行道) 받아들이느냐의 차이인데 즉 실행하기가 어렵게 받아들이느냐

또는 실행하기가 쉽게 받아들이느냐의 관점의 차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추가>* 日蓮대성인님에 대해서 부분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천태종은 고려 천태종의 원묘국사 요세스님처럼 순수한 난행도는 아니나

<법화삼매참의>에 의한 참회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念)하므로 인해

정토구생(淨土求生)을 원하고 즉 왕생극락을 바라고 수행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밀교적인 색체가 농후한 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일련종 즉 법화종에서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고

<법화경>의 제목을 부름으로써,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정화하고

성불한다고 하는데 일본 천태종과 큰 차이가 있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