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오보 의장
ㅇ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표면의 현상만이 아니라 그 내면의 법칙을 "불가사의 법칙"이라고 임의로 이름 붙였습니다만.
- 어떤 법칙이냐면, 예를 들어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또 가족을 위해, 또 학회활동을 위해, 광선유포를 위해, 세계평화를 위해, 세상의 정의를 위해 싸운다.
ㅇ 하지만 자신을 죽이고, 자신이 참고, 즉 자신을 소멸시켜 가고 있는 사람은 복운을 잃어버린다 라고. 따라서 자신을 소멸시켜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로부터도 그런 취급을 당한다 라고 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나만 가만히 있으면, 나만 참고 있으면 언젠가 이 고생이 없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까지는 참고 견디자 라고. "음덕을 쌓아두면 반드시 응보가 돌아온다"라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심해집니다. 즉 그것이 음덕으로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 왜 묘법의 당체를 죽이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일을 해도 자기 자신이 기쁘게, 즐겁게, 자신의 생명을 빛내가면서 한다면 복운으로 되어갑니다. 따라서 타인으로부터도 대접받습니다.
- 마침 SGI 그라프(잡지)에 이케다 선생님께서 사모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사모님은 항상 웃는 얼굴이시지요.
-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다. 웃는 얼굴이 행복의 원인으로 된다. 행복하니까 웃거나, 행복의 결과로 웃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때라도 거기에서 빙그레 웃어간다, 그 생명에 복운이 쌓여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일절이 있었는데, 역시 불가사의 법칙입니다.
- 흔히 예를 들면, "절복하면 길이 열린다" "신문계몽을 하면 행복해진다" 또 "공양을 몇 배로 도전하면 행복해진다"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아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댓가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원망이 됩니다.
- 보살도 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대성인은 "자타공히 기뻐하게 되느니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유명한 덕승동자의 설화가 있지요. 석가모니에게 모두 공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뭔가 공양하고 싶은데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어 흙떡을 만들어 드렸다. 만약 그 때 덕승동자가 이 흙떡을 드리면 나중에 공덕을 받는다, 후세에 아육왕으로 태어난다. 그러니까 이것을 드리는 것이다라고 거래하는(댓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양을 했다면 그 때는 복운이 쌓이지 않겠지요.
- 진심으로 기뻐서 해 가는 것, 그 생명에 복운이 쌓이는 것입니다. Give and Take(주고받는 거래)가 아닙니다. 즉 자기희생 정신이 아닙니다. 열심히 자기희생 정신으로 노력하면 언젠가 공덕이 나올 것이다 라는 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 이 불가사의 법칙. 자신을 빛내가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억지로 참으면서 해 가는 사람, 이케다 선생님은 어느 쪽일까요 확실히 전자이지요. 즐겁게 해나가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이 쓰시는) 그러한 시는 절대 쓸 수 없겠지요. 하기 싫어 억지로 마지못해 한다면, 그런 사진이 나올 리가 없지요.
- (회관 벽의 선생님이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이케다 선생님의 사진을 보세요. 선생님의 사진을 보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저 꽃들이 마치 여자부, 부인부가 "선생님"하고 달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찍는다면 좀처럼 저런 느낌이 들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꽃이 저기 피어 있구나하는 느낌밖에 안되지요.
- 어째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점점 알 수 있었다. 법화경이라고 하는 것은 "기쁨의 경전"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환희에 차계시다. 환희의 생명에 자연이 감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뻐하고 있는 자연을 사진에 담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의 대화"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 이전에 예술부의 멤버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과의 회식 장소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두들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자연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그 대화의 결과가 사진이다"라고.
-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 불가사의 법칙. 불가사의라는 것은 묘(妙). 법칙은 법(法). 즉 묘법의 당체를 소멸시켜 가는 인간은 복운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묘법의 당체를 빛내 가는 사람은 복운을 쌓아 가는 것이구요.
-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표면이 어느 쪽인가. 자신의 생명을 빛내가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방향인가, 자신을 비하해 가는 방향인가. 그 생명의 오저가 어느 쪽을 향해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 조석근행에서 이좌의 관념문이 뭐지요 본존공양이지요. "일념부제 총여 삼대비법의 대어본존님께 나무하옵고 보은 감사드립니다".
- 본존공양. 이좌를 할 때 이 본존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불단의 어본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대성인은 「만약 기심의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전혀 묘법이 아니니라」(어서 383쪽)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법화경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 또 다른 어서에서도 「이 어본존을 결코 타처에서 구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 하는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 (어서 1244쪽)라고. 흉중에, 자신의 생명에, "흉중의 육단에 계시느니라"라고 공부했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가사의합니다. 배운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릅니다.
- "촌락 문화"라고 하는 것이 실은 "염불 문화"입니다. "염불 문화"란 어본존 절대입니다. 대성인 절대입니다. 그래서 복운이 없고, 경애가 낮고, 힘이 없는 우리들은 위대한 어본존에게 의지해서 그 공덕을, 그 지혜를 나눠 받는다는 것. 이것을 "염불 문화"라고 합니다. 어본존을 아미타불로 바꾸면 딱입니다. "미약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지합시다"라는 구조입니다.
- 법화경은 다릅니다. 그것을 이케다 선생님께서 "법화경의 지혜"에서 4년반에 걸쳐 설명해주셨습니다. 이 "법화경의 지혜"에서 가장 단적으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 견보탑품입니다. 견(見)=보다, 보탑(寶塔)=보물의 탑. 보탑을 보다. 이 보탑이라는 것은 법화경에 나와 있습니다. 높이 500유순, 계산하면 히말라야의 약 500배이상의 높이입니다. 후지산도 높은데, 히말라야는 후지산의 2배 이상입니다. 그 500배 이상이니까 어마어마하지요. 게다가 잡동사니의 산이 아닙니다, 보물의 탑입니다. 대단히 장엄합니다, 장대합니다. 우주규모입니다. 이 위대한 보탑. 그것이 사실은 우리들 생명의 위대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생명이 우주규모의 장대한, 또 영원성을 가진 그러한 존재이다 라고 실감하는 것을 견보탑이라고 한다.
- 대성인은 이 보탑품의 의식을 빌어 어본존을 도현하셨다. 따라서 어본존은 우리 자신을 위대한 보탑이라고 보기 위한 명경, 깨끗한 거울이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ㅇ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읽어도, 거울을 숭상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염불에 너무나 깊이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가사의 법칙의 "자신만 참으면"이라는 방향으로 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지 못하고, 즐거워하지 못합니다. 좋을 때는 기뻐하지만, 실패하면 "이렇게 한심한다니"라고 말해버립니다.
- 법화경이라는 것은 "최악의 상태의 자신이 위대하다"라고 설해진 경전이라는 것 알고 있습니까 이 법화경과 이전경의 차이. 이것을 권실상대라고 합니다. 어째서 법화경이 뛰어나고, 이전경이 열등한가. 교학적으로는 이승성불, 악인성불, 여인성불이 설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인이나 여인들이, 이승(성문, 연각) 이러한 사람들은 대승경전이 설해졌던 시대, 세간에서도 상대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대승경전은 그러한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다.
- 그런데, 법화경은 세간이 상대도 하지 않는 차별 받은 사람들을, 실은 위대하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주이지요. 그것을 생명론적으로 보면, 이승, 악인,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의 가장 실망스런 모습입니다. 가장 한심한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도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비참한 경우의 자신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위대한 묘법의 당체이다 라고 믿는 것. 그것이 법화경을 수지 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난신난해입니다. 건강한 자신, 최상의 상태의 자신, 또 타인에게 인기 있는 자신을 위대하다고 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진짜로 대실패하고, 타인에게 바보 취급당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자신을 위대하다고 보는 것은 난신난해,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거기에 서야만 법화경인 것입니다.
[닥터 오보 의장지도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