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法 .SGI

사제불이의 공전보

혜광리 2020. 1. 14. 19:41




법련 2020년 1월호 (법련 기획특집)

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 《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0회 가가와·도쿠시마


시코쿠(四國)는 광선유포의 심지가 붉디붉게 타오르는 '시코쿠(志國)'다.

시코쿠는 인간주의의 대서사시를 써 내려가는 '시코쿠(詩國)'다.

그리고 시코쿠는 사제공전(師弟共戰)의 인재들이 뛰어나오는 '시코쿠(師國)'다.

시코쿠를 생각하는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의 마음은 한없이 깊고 강하다.

이번에는 가가와 그리고 도쿠시마 벗이 엮은 사제의 대하드라마를 소개한다.


벗을 격려하며 과감하게 나아가는 것이 학회의 전통입니다


 간부의 자세로 결정된다

제2권 '민중의 깃발'에는 1960년 12월 6일에 개최한 도쿠시마지부 결성대회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야마모토 신이치 회장은 도쿠시마의 벗에게 간부의 자세에 관해 지도했다.

"마키구치 선생님 이후 학회 간부는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자기자신은 대난(大難)에 맞서 과감하게 싸워 왔다. 그것이 학회의 전통입니다. 진지한 지도도 하지 않고 투쟁의 선두에 서지도 않으면서 조직 위에 걸터앉아 거드름 피우는 간부는 결코 진정한 학회의 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

1962년 3월 21일, 신이치는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 완성된 시코쿠본부 낙성식에 참석했다.(제6권 '가속') 신이치는 이 방문에서도 중심이 되는 간부의 자세를 간절히 외쳤다.

낙성식이 끝나고 신이치는 시코쿠의 간부와 간담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간부란 언제나 가장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 힘들어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매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 나와 호흡을 맞춰 주시기 바랍니다. 나와 호흡을 맞춰가는 것은 광선유포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겠다는 강한 일념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고하는 동지를 항상 염려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등, 몸이 가루가 되도록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동지를 끝까지 지켜 가는 것이 나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시코쿠는 우선 단결하는 것입니다. 의자나 테이블은 4개의 다리가 서로 지탱하며 서 있습니다. 시코쿠도 4개 현의 동지가 단단히 단결해 서로 목표를 정하여 전진해 가는 것입니다. 나도 다시 시코쿠에 오겠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시코쿠의 새로운 시대를 만듭시다."

신이치는 시코쿠의 발전을 위해 먼저 간부들에게 '회원봉사' '사제불이 정신' '이체동심의 단결'을 강조했다.


야시마에서 개최한 간부회

1962년 6월 2일, 신이치는 재차 가가와에서 연 시코쿠 본부간부회에 참석했다.(제6권 '파랑')

회합 장소인 가가와 현립(縣立)야시마육상경기장에는 시코쿠 전 지역에서 동지들이 매우 기뻐하며 모여 정오가 되기 전에 예정된 참석자 3만여명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신이치는 회합 시작을 앞당기도록 부탁했다.

사실은 그 전날, 학회본부에는 "회장이 시코쿠에 온다는데 그만두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다."라는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보고를 받은 신이치는 중지를 진언하는 간부에게 엄하게 말했다.

"절대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모두 며칠 전부터 준비하며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에 겁먹어 시코쿠 동지에게 간부회를 그만두라고 한단 말입니까!"

신이치는 이 간부회에서 시코쿠의 승리를 향한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만일 학회를 공격하려는 자가 있다면 자신이 방패가 되어 목숨을 걸고 지킬 각오였다.

또한 만전을 기하고자 시작 시간을 앞당겨 본디 시작할 예정이던 시간에는 회합을 마칠 생각이었다.

정오가 지나 신이치가 회합 장소에 나타나고 개회를 선언했다. 당분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 참석자들은 예상외로 일찍 회합을 시작하자 크게 기뻐했다.

참석자에게는 협박전화에 관한 일은 알리지 않고 간부회는 환희와 열기가 넘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다만 평소에는 온화한 신이치의 눈동자가 이날만큼은 줄곧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이치는 마음속으로 창제하면서 회합 장소 구석구석까지 주의 깊게 시선을 쏟았다.

단상에 오른 신이치는 강한 신심과 강한 단결로 광선유포의 새로운 전진을 개시하자고 외쳤다. 그 모습은 당당했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었다.

전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모두 창제에 힘썼다. 기원이 통했는지 당일 비는 오지 않고 덥지도 않아 회합하기에 적당한 날씨였다. 회합 시작을 선언하자 신이치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멤버들을 격려했다. 신이치는 차분히 참석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끊임없이 손을 흔들었다. 청각장애가 있는 어느 벗을 격려하는 장면도 있었다.

당시 남자부 리더로 가가와의 사카이데에서 참석하러 온 산가와 야스히로 씨(가가와이케다본진현 주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전날 비가 그쳐 매우 기뻤지만 그래도 여전히 날씨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시작 시간을 앞당긴 것은 비가 내릴까 염려한 선생님의 배려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운동장을 도시던 이케다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성공을 거두는 리더의 자세를 선생님의 행동에서 배운 원점이 되었습니다."

모리타니 요시코 씨(가가와이케다본진현 부부인부장)는 간부회에서 선생님이 지도한 내용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창가학회의 목적은 광선유포로 어본존을 근본으로 모든 민중을 구제하는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고 한다.

"'학회를 위해서만 아닌 모든 민중을 위해서'라는 위대한 목적이 있다는 말씀에 감동했습니다. '학회는 얼마나 자비가 광대한 단체인가.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결의해 지금도 지역의 멤버분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기고--------

영예로운 공전의 역사

가가와총현장 기타노 게이지 / 총현부인부장 쓰즈키 다에코


11월은 가가와의 잊지 못할 역사적인 달입니다.

1981년 11월 10일 저녁, "다시 한번 지휘하겠습니다!"라는 열렬한 스승의 외침이 시코쿠연수원에 울려 퍼졌습니다.

"와~" 하고 폭발할 듯한, 노도와 같은 환성이 장내에 울려 퍼진 광경을 우리 가가와 멤버들은 잊을 수 없습니다.

이틀 뒤 12일, 시코쿠 청년부와 간담회를 열었는데 남자부 대표가 선생님에게 가사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테이프에 녹음된 노래를 들려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제자의 마음을 받아들여 몇번이고 퇴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에서 부르는 '태양의 노래'가 탄생했습니다.

그 연원은 1980년 1월, 선생님이 계시는 가나가와에 '썬플라워 7호'를 타고 동지 800명이 달려간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시코쿠 동지들의 뜨거운 구도심이 기뻤다. 그 일념이 있는 한, 광선유포에 살아가는 창가(創價)의 사제정신은 영원히 맥동하기 때문이다."(제30권〈상〉 '자복') 하고 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1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세계에서 처음으로 'SGI 회장 평화행동전(展)'을 시코쿠연수원에서 개최했습니다.

선생님은 소설에서 이 전시를 소개하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시코쿠 청년들의 손으로 기획·추진한 '평화행동전'은 광선유포의 새로운 길을 비추고 밝히는, 하나의 광명이 되었다.

그저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만 한다면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

'전진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시대와 사회의 과제는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도전해야 비로소 창조의 길이 열린다."(제30권〈하〉 '승리의 함성')

스승 이케다 선생님을 끝까지 구도한 선배들의 분투가 시코쿠 광포의 사제공전의 역사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공전의 가가와'라고 써주신 선생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구도하는 신심으로 사제공전의 역사를 새겨 가가와 광포를 이루어내겠습니다.


 순수한 신심을 관철하는 분들이 학회를 받쳐주고 있다


쓰다의 소나무 벌판에서 만난 노부인

1973년 11월 시코쿠 지도에 나선 모습은 제18권 '전진'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12일, 신이치는 에히메를 떠나 다카마쓰에 있는 시코쿠문화회관으로 갔다. 도착해서 회관 내부를 점검하고 두꺼운 종이에 격려의 말을 쓰거나 현지 간부들과 근행과 간담을 하는 등 신이치의 행동은 멈출 줄 몰랐다.

이튿날인 13일, 신이치는 도쿠시마로 갔다. 가는 도중에 쓰다의 소나무 벌판에서 한 노부인을 만났다. 경애하는 신이치와 만나기를 계속 기원한 분이었다. 신이치는 따뜻하게 감싸 안듯 격려했다.

노부인과 헤어진 뒤 신이치는 동행한 간부에게 말했다.

"그 할머니처럼 한결같이 나를 구도하며 순수한 신심을 관철하는 분이 학회에는 많이 계신답니다. 그분들이 학회를 받쳐주시고 있지요.

모두가 존귀한 부처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목숨을 바치는 마음으로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또 그 회원을 반드시 지키자고 생각하면 용기가 솟고 힘이 나지요. 도쿠시마 간부총회도 전력투구로 임합시다!"


도쿠시마현 간부총회

신이치가 회합장소인 도쿠시마시 체육관에 모습을 나타내자 장내에 환호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피치에서 신이치는 오랜만에 도쿠시마 회원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고 성훈을 배독한 뒤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현대는 세계적으로도 '인간성을 상실한 때'이며 '삶의 보람을 잃은 때'라고 지적합니다. 또 '철학과 사상이 혼미해진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성'과 '희망' 그리고 '생명력'이 현대의 재보(財寶)이며 더욱이 이를 발현할 수 있는 '인간이 충분히 신뢰할만한 불법철학'이야말로 근본이 되는 최고의 재보입니다."

그리고 신이치는 "수지(受持)하는 법이 제일이라면 수지한 사람도 따라서 제일이 되느니라."(어서 466쪽)라는 어문을 배독하고 이렇게 강조했다.

"불법이라는 대법(大法)을 선양하고 현현(顯現)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법이라도 '사람'이 없으면 넓힐 수 없습니다.

또 넓히는 법이 제일이라면 그 법을 넓히는 사람도 제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광선유포에 사는 여러분이 바로 현대에서 최고의 재보를 지닌 사람입니다."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이 '시대의 재보'이며 '사회의 보석'이라고도 해야 할 존재입니다. 보석이라면 그 가치를 발휘해야 합니다.

보석은 빛납니다. 따라서 인간성을 빛내고, 타고난 장점을 빛내 직장에서도 지역사회에서도 귀중한 인재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가 일생 동안 세상을 위해, 타인을 위해, 법을 위해, 뭔가 훌륭한 성과를 남겼으면 합니다. 좋습니까!"

신이치의 외침에 도쿠시마 동지는 "예!"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당시 도쿠시마현 여자부장이던 오니시 미네코 씨(도쿠시마마키구치현 부부인부장)는 이렇게 말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총회 마지막에 참석자에게 '가족이 입회하지 않은 사람, 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든 분들에게 장내에 장식한 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소설에도 선생님은 몸 상태가 좋지 않고 피곤해하셨다고 씌어 있지만, 그런 속에서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온 힘을 쏟으며 거듭 격려해주셔서 가슴이 벅찼습니다."

오니시 씨는 교사로 활약하며 지금도 교육부에서 분투하고 있다. 그 원점이 된 일은 18권 '전진'에 그려진 시코쿠대학회 결성식이다.

오니시 씨는 "선생님은 우리가 한 질문에 대해 교육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지금만큼 인간교육이 요청되는 시대는 없습니다. 이 중에서 위대한 교사가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하고 기대를 보내주셨습니다. 스승의 마음을 제 마음으로 하여 앞으로도 분발하겠습니다." 하고 결의를 말했다.

신이치는 도쿠시마현 간부총회가 끝난 뒤에도 도쿠시마회관을 방문하고 도쿠시마문화회관 건설부지를 둘러봤다. 이튿날인 14일에는 시코쿠합동회의에 참석해 청년 리더를 힘차게 격려했다.

"'광포 제2장'은 청년이 일어서는 시대다. 청년이 크게 성장해야 할 때다. 그럼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까.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엄청난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 체험을 쌓아야 한다. 확신을 가져야 하지."

"힘들겠지만 여러분 손으로 새로운 시코쿠를 열었으면 합니다. 부탁합니다. 소용돌이치는 바닷물을 헤치고 나아가 새로운 시대의 대해(大海)로 출발해야 합니다! 청년이 앞장서서 일어서면 그 다음은 걱정 없습니다. 내가 시코쿠를 방문한 의미도 거기에 있습니다."


계속 격려해야 참된 인간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


빈녀의 일등

1978년 1월, 신이치는 가가와현 아지초에 있는 시코쿠연수원을 처음 방문했다. 제26권 '용장'에서는 19일에 현지 간부와 간담한 신이치가 '지부제' 출발에 즈음하여 중요한 핵심으로서 '개인지도'를 강조했다.

"지금 간부 여러분이 회합에서 하는 지도와 개인지도의 비율은 8대 2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2대 8을 목표로 한다면, 더 많은 인재가 육성됩니다. 학회도 강해집니다. 또 무엇보다 간부 여러분이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지도가 아닌, 인간관계를 착실히 맺으면서 계속 격려해야 참된 인간연대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회도 그런 연대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이치는 간담회를 마치고 이튿날인 20일에 개최하는 가가와현 부인부총회 협의에 참석했다. 오기노 시게코 씨(가가와이케다왕자현 부인부 의장)는 그때의 일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총회 전날인 19일에는 시코쿠연수원에서 발표자 협의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제 원고를 꼼꼼하게 봐주셨습니다. 그리고 '잘 썼군요.' 하고 말한 뒤, 원고를 다듬어주셨습니다."

이튿날 20일, 오기노 씨는 완성된 원고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우리의 관점에서 '빈녀의 일등'은 무엇인가. 바로 '진심'이고 '학회정신'입니다." "'깨끗한 신심' '확고한 신심' '흔들림 없는 신심' '착실한 신심'의 일념, 다시 말해 '학회정신'이 있는 한, 사회가 어떻든 또 아무리 편견에 찬 증상과 비판이 있어도 우리 일념의 대복운을 영원히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 내용에는 부인부를 생각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오기노 씨는 "이 원고는 선생님이 가가와의 부인부뿐만 아니라 부인부 전체에 거는 기대라고 느꼈습니다." 하고 광포 스승의 진심에 감사했다.

소설에서 신이치는 가가와현 부인부총회에 참석한 진심을 이렇게 말했다.

"시코쿠는 방면으로는 작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광선유포 전진의 모범을 보인다면, 그 파동은 학회 전체로 넓혀집니다.

전진하지 않는 곳에는 불법(佛法)이 맥동하지 않습니다. 진보하지 않는 곳에는 참된 보람도 생기지 않습니다. 전진하자는 의욕이야말로 인간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좋다 한번이라도, 백번이라도 더 많이 제목을 부르자.' '날마다 한명씩 만나 개인지도를 완수하자.' 등, 올해는 각자가 무엇인가 한가지는 전진의 결실을 남기기 바랍니다.

그 결실이 축적되면서 1년 뒤, 나아가 5년 뒤, 10년 뒤로 이어지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의 재산이 되고, 인간혁명의 역사가 됩니다."

이튿날인 21일, 시코쿠에서 처음으로 개최하는 본부간부회를 시코쿠연수원에서 열었다. 새로운 지부체제로 출발하는 본부간부회로 임명장과 지부증을 대표에게 전달했다.

지부부인부장과 지부장 대표가 포부를 말하고 간부인사에 이어 신이치가 지도했다. 신이치는 '지부제'의 발족으로 광포의 행보가 가속화되어 학회활동의 방식도 다원화될 것이라고 언급한 다음 기본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그러면 우리에게 그 기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근행입니다. 어본존을 향한 진지하고도 한결같은 기원입니다. 또 눈앞의 한 사람에게 행복의 길을 가르치자며 불법대화를 하고, 홍교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그 사람이 인재로 성장할 때까지 돌본다' 一 이것이 모든 불도수행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임지부장.지부부인부장을 비롯한 간부 여러분은 아무쪼록 모든 동지를 자기 이상의 인재로 성장시키겠노라고 마음을 정하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한사람 한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고, 이해하고, 지키고, 찬탄해야 합니다. 이름 없는 일개 동지를 위해 끝까지 애쓰는 일이야말로 신심의 가장 중요한 기본자세라는 사실을 꿈에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동지를 위해 힘쓰는 일이아말로 신심의 기본자세입니다


근행지도회

신이치는 본부간부회가 끝난 뒤 대표들과 간담했다. 그때 많은 현지 멤버에게서 '야마모토 선생님을 뵙고 싶다'는 요청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신이치는 그 요청에 부응하고자 이튿날 가가와의 동지와 '근행지도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빛나는 무대 시코쿠연수원 --------

'반전공세 (反轉攻勢)의 사자후(師子吼)'가 울려 퍼지고 '태양의 노래'가 탄생한 무대인 시코쿠연수원. 가가와현 아지초에 있는 세토내해의 아름다운 경관이 내려다보이고 겐페이.야시마전투의 무대가 된 야시마섬이 보이는 곳이다.

1977년 12월에 개관한 이 연수원에 이케다 선생님은 1978년 1월에 처음 방문하고 이후 6차례에 걸쳐 방문하셨다.

몇번이나 사제의 만남을 이룬 이 연수원에서는 시코쿠의 첫 본부간부회와 이케다 선생님의 평화행동전 등도 열었다. 지금도 여러 행사와 연수를 개최하는 등 행학(行學)을 연마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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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근행지도회를 개최한다는 연락이 가가와현 전체에 퍼졌다.

이튿날 22일, 시코쿠연수원에는 기쁜 마음으로 모인 벗들의 웃는 얼굴로 가득했다.

오전 11시부터 근행지도회가 시작되었다. 근행과 간부 인사에 이어 신이치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신심을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내 주위에도 온갖 고뇌를 안고 고투하면서 신심에 힘쓰는 동지가 많습니다. '대체 언제쯤이면 숙명전환 할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모두 정말로 행복한 경애가 되었습니다.

그 예를 나는 지금까지 몇만, 몇십만이나 보았습니다. 강성하게 신심을 관철한다면,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아무쪼록 자신감을 가지고, 안심하고 신심을 끝까지 지속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심이 강성한 사람이란 '가장 상식 풍부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사회에서 실증을 나타내기를 바랐다.

신이치는 지도를 마친 뒤에도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다른 회합 장소에 모인 멤버들 곁으로 달려가 격려의 빛을 끊임없이 보냈다.

정오가 지나 예전에 시코쿠본부로 사용한 시코쿠부인회관을 방문해 기념식수를 하고, 모여 있던 멋과 기념촬영도 했다.

또 시코쿠문화회관을 방문해 직원들과 간담한 뒤 댜카마쓰강당이 들어설 건설예정지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신이치의 방문을 기다린 동지 수십 명이 있었다. 신이치는 차에서 내려 찬 바람 속에서 현지 멤버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 다카마쓰강당이 완공되면, 그 옆에 새로운 시코쿠문화회관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이곳은 시코쿠창가학회의 중심지가 될 땅입니다. 여러분은 그 대법정(大法城)이 있는 지역을 지키는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지역에서 신심의 실증을 나타내고, 신뢰받는 한사람 한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역에서 신뢰받고 존경받는 존재가 되어야, 그대로 신심의 승리, 광선유포의 승리가 됩니다."

그리고 신이치의 제안으로 만세를 불렀다.

"만세! 만세!"

기쁨에 넘친 힘찬 목소리가 겨울 하늘에 울려 퍼졌다.


광선유포의 모범으로

신이치는 다카마쓰강당 건설예정지를 뒤로 하고 간부들의 집을 방문해 근황에 귀를 기울이고 힘주어 격려했다.

그리고 시코쿠연수원으로 돌아와 방면, 현 간부와 간담을 하는 등 촌음을 아끼는 신이치의 행동이 이어졌다.

신이치는 장년부, 남자부 대표들과 근행한 뒤 시코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여러분도 어디에 있든, '내가 있는 한, 이 지역을 평화와 번영의 도읍으로 바꾸겠다. 그러기 위해 내가 있다!'는 결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사는 지역은 구습(舊習)이 깊어서 광선유포는 어렵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생각 자체가 패배의 원인입니다.

대성인은 홀로 말법광선유포의 투쟁을 일으키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시코쿠가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광선유포의 모범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 뜻을 마음에 심어주십시오.

그러려면 먼저 '반드시 그렇게 되자! 이기자!'고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성하게 기원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신이치의 투혼은 광선유포를 향한 결의의 불꽃이 되어 동지들의 마음에 퍼졌다.


시코쿠의 노래 '우리의 천지'

제28권 '광선보'에는 시코쿠의 노래 '우리의 천지'가 탄생하는 모습을 소개했다. 여기서도 시코쿠를 생각하는 스승의 마음이 씌어 있다.

"'시코쿠의 천지는 우리의 천지'라고 모두가 진심으로 자각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이곳이 지용보살(地涌菩薩)로서 광선유포의 사명을 맡은 천지입니다."

"영예로운 천지에서 자기답게 광선유포를 추진하겠노라는 결의로 모두가 일어선다면 새로운 시코쿠의 시대가 옵니다!"

제28권 '대도'에는 1978년 7월, 신이치가 그해 두번째 시코쿠 지도에 나선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이치는 시코쿠 초창기 지부결성 22주년을 기념하는 간부회와 쇼도섬 방문 등 힘차게 행사와 벗의 격려에 힘쓴다.

그해 12월, 세번째로 시코쿠를 방문한 신이치의 격려행은 제29권 '역주'에 씌어 있다.

12일 도쿠시마현에서 온 대표 2800명이 시코쿠연수원에 모인 가운데 제1회 현간부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신이치는 "법화경의 행자는 신심에 퇴전이 없고..."(어서 1357쪽)라는 성훈을 배독하고 이렇게 지도했다.

"'결코 퇴전히지 말고 거짓 없는 강성한 신심을 관철하고, 일체를 어본존에게 맡기고 부처님 말씀대로 불도수행에 힘쓰기 바란다. 그러면 후생은 물론이고 금생에서도 안온하고 장수하는 인생을 장식하고, 훌륭한 대공덕을 받아 광선유포의 대원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컨대 '생애 신심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정하는 '각오야말로 일체를 승리하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알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도쿠시마 여리분은 청류와 같이 깨끗하고 지속적인 신심을 관철해, 내년에도 유유한 사자(師子)와 같은 한해를 보내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그 뒤에도 현의 대표 간부와 간담하며 도쿠시마의 희망 가득한 미래도(未來圖)를 함께 이야기했다.


이것으로 승리했다! 여러분이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썬플라워 7호'

1979년 4월 24일, 이케다 선생님이 회장을 사임했다. 회합에서 지도하거나 기관지에 실릴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학회본부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생님의 방문을 희망하는 편지가 도착했지만, 선생님의 행동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한 때에 시코쿠 벗은 광포의 스승을 구도하여 행동을 일으켰다. 그 드라마가 제30권(상) '자복(雌伏)'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광포사에 이름 드높은 '썬플라워 7호'가 떠나는 여정이다.

"선생님의 행동이 제한받고 계시다면, 우리가 선생님을 뵈러 갑시다!"

시코쿠의 간부는 서로 이야기하는 속에 함께 결의했다. 그리고 1979년 12월 시코쿠장 구메가와 세이타로는 가나가와문화회관에서 신이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곳 가나가와문화회관에 계실 때, 시코쿠 멤버 800여명과 함께 이곳으로 오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배를 빌려서 가까운 항구로 올예정입니다. 저희가 도착하면 멤버들을 만나주시겠습니까?"

신이치는 웃으면서 말했다.

"시코쿠 동지들이 나를 만나러 일부러 와주시는군요. 알았습니다. 만나겠습니다. 그 의기가 참으로 기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동지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준비했다. 이듬해 1980년 1월 13일, '썬플라워 7호'가 다카마쓰항을 출발해 스승이 있는 가나가와를 향해 파도를 가르며 달렸다.

얼마 뒤 배 안에서 간부회가 열렸다. 구메가와의 인사말은 시코쿠 동지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 어떤 힘으로도 절대 선생님과 우리의 유대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의 행동이 제약을 받는다면, 우리 제자들이 스승의 슬하로 달려가면 됩니다. 불타오르는 구도(求道)의 일념이 있는 한, '불가능'이라는 장벽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시코쿠가 앞장서서 선생님과 함께 창가학회 창립 50주년의 개막을 축하하지 않겠습니까!"

14일 정오 전, 배가 요코하마항에 들어섰다. 갑판 위에 선 멤버들은 오산바시를 바라보았다. '가나가와에 잘 오셨습니다'라고 쓴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부두에서는 시코쿠의 노래 '우리의 천지'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환영연주를 하는 사람들 앞에는 그토록 만나고 싶던 신이치의 모습이 있었다.

멤버들을 맞이한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 몸은 괜찮은가? 잘 왔네. 이것으로 승리했다! 21세기를 보았다. 여러분이 새로운 광포의 돌파구를 열었다."


소전등

오후 1시 반부터 개최한 시코쿠와 가나가와의 교류간부회에서 신이치는 모든 참석자와 함께 근행하고 벗에게 차례로 말을 건넸다. 그 뒤 회식을 겸한 간담회에서는 '다이난코(大楠公) 등을 피아노로 연주하여 동지를 위로했다.

스승의 진심에 시코쿠의 벗은 이렇게 서원했다.

"저희는 학회정신을 단호히 계승하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광선유포의 길을 활짝 열겠습니다. 시코쿠는 지지 않겠습니다. 창가승리의 깃발을 흔들겠습니다!"

다케무라 후사에 씨(전국부인부 주사, 시코쿠 부인부 총주사)의 가슴속에는 지금도 그날의 감격이 빛나고 있다.

"이케다 선생님은 소설을 비롯해 수필이나 장편시, 스피치 등에서 몇번이나 '썬플라워 7호'의 역사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날, '선생님을 뵙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배에 오른 우리는 복운과 사명을 깊이 새겨 투쟁했습니다."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극진한 환영에 시코쿠의 등지는 가슴이 뭉클했다. 훗날 다케무라 씨는 선생님의 배려였음을 알고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돌아가는 배에서 '선생님과 사모님이 손전등을 흔들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가나가와문화회관을 바라보았습니다. 맨 위층에서 흔들리는 빛을 보았을 때, 우리 가슴에 용기와 희망의 불이 켜졌다고 실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선생님과 함께!'라고 모두 서원했습니다."


정의로운 반전공세의 출발은 항상 시코쿠였다


기고--------------

자 도쿠시마여, 자 일어서라

도쿠시마 총현장 요시모토 가즈히로 / 총현부인부장 다니카 다에코

1981년 11월 9일과 10일 이틀간, 도쿠시마강당 낙성기념근행회에 참석하신 이

게다 선생님은 도쿠시마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도쿠시마(德島)'라는 지명은 현(縣)의 이름으로는 최고입니다. '공덕의 섬' '덕

이 높은 사람들이 모이는 섬'이라는 뜻에도 통합니다. 이 도쿠시마에서 시코쿠

광포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주십시오!" (제30권<하> '승리의 함성')

제1차 종문사건이 한창일 때, 광선유포를 향한 '사제의 서원'을 가슴에 품고 비열한 악승들과 필사적으로 싸워 학회의 정의를 끝까지 외친 도쿠시마의 동지에게 사제가 반전공세를 시작한 도쿠시마 지도는 생애 원점으로 빛납니다. 훗날, 선생님이 역사적인 11월 9일을 '도쿠시마현 부인부의 날'로 정해주신 일은 도쿠시마 부인부의 영예입니다.

이틀간의 도쿠시마 지도를 마치고, 가가와현의 시코쿠연수원으로 이동한 선생님은, 남자부 애창가 '태양의 노래'에 이어서 "도쿠시마도 노래를 만들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몇번이나 거듭 퇴고해 드디어 완성한 노래에 도쿠시마현 애창가 '사랑하는 도쿠시마'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곡의 마지막에는 "자 도쿠시마여, 자 일어서라"라는 가사로 끝맺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사랑하는 도쿠시마의 땅에서 광포확대를 향한 승리의 실증을 확립해야 한다!'는 스승이 제자에게 거는 기대라 여기고 도쿠시마의 동지는 분기했습니다.

그 뒤 우리 지역을, 도쿠시마를 사랑하며 사제공전으로 승리의 실증을 확립해 묘법에 감싸인 대공덕의 인생으로 '도쿠시마가 여기에 있다'는 기개를 보여주었습니다.

2020년은 도쿠시마지부 결성 60주년 그리고 2021년은 '반전공세의 도쿠시마 지도' '도쿠시마현 애창가 사랑하는 도쿠시마' 탄생 40주년의 가절율 맞습니다.

우리 도쿠시마의 동지들은 지금 다시 한번 스승과 새긴 원점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도쿠시마에서 새롭게 사제공전으로 승리의 결과를 확립하겠습니다.

그리고 '자 도쿠시마여. 자 일어서라'고 외치신 스승의 기대에 온 힘을 다해 보답할 것을 결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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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시마강당 낙성

이케다 선생님은 장편시 '시코쿠 합중국의 찬가'에서 드높이 구가했다.

"창가의 역사에 불멸하는 / 정의로운 반전공세(反轉攻勢)의 출발은 / 항상 시코쿠였다."

'정의로운 반전공제의 출발'이라는 말은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 씌어있다.

1981년 11월, 도쿠시마의 벗은 신이치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7일부터 도쿠시마강당 낙성기념행사를 시작했다. 세이쿄신문에도 신이치가 도쿠시마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요인과 회견, 여러 행사의 참석 요청이 많아 '선생님의 도쿠시마 방문은 미정'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7일과 8일에 신이치는 참석하지 않았다.

9일 오후, 도쿠시마강당 낙성기념근행회를 시작했다. 식순이 진행되고 간부지도도 끝났다.

그때였다. 강당 뒷문이 열리고 거기에는 신이치가 서 있었다.

"드디어 왔습니다! 약속을 지키려 왔습니다!"

소설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이치는 참석자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참석자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강당 앞쪽으로 갔다. 스승과 제자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불타오르고, 이곳에서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시코쿠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도쿠시마 대학부의 현위원장인 나카노 히데오 씨(도쿠시마총현 부총합장)는 이 드라마의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제1차 종문사건 당시, 도쿠시마에도 학회를 중상하는 폭풍우가 휘몰아쳤습니다. 역풍 속에서 대화도 생각처럼 진전되지 않아 침체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일선 조직에서 적은 인원이 모여 반좌담회를 철저히 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멤버 한사람 한사람에게 '내 안에 학회가 있다. 내가 학회의 전권대사다.'라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 9월, <세이쿄신문>에 도쿠시마강당 낙성기념행사에 선생님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보도되었다. '반드시 실현시키자! 승리해서 선생님을 도쿠시마에 모시자!'고 모두 불타올랐다. 제목을 부르고 또 부르며 절복을 위해 뛰어다니고 대확대의 결과로 11월을 맞았다.

"선생님은 '도쿠시마 여러분의 제목에 이끌려 오늘 이곳에 을 수 있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도쿠시마강당에 나타나셨을 때는 순간 정적이 흐른 뒤 강당을 뒤흔들 듯한 폭발적인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냐카노 씨)

지도에 나선 선생님은 "도쿠시마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 일본에 밝히고 싶군요." "나는 도쿠시마를 응원하고 싶습니다."라며 진심으로 성원을 보냈다.

선생님은 시코쿠에 머무는 동안 '도쿠시마도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멤버들은 기념근행회에서 받은 지도를 바탕으로 가사를 만들어 제출했다. 선생님은 거듭 퇴고하여 '도쿠시마'라는 말을 여섯 군데에 넣어주셨다. 그리고 도쿠시마현 애창가 '사랑하는 도쿠시마'가 탄생했다. 도쿠시마의 동지는 스승의 진심에 감사하며 도쿠시마의 광포를 새롭게 서원했다.


평화행동전

이튿날인 10일, 신이치는 도쿠시마강당을 출발해 시코쿠연수원으로 갔다.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 그곳에서 시코쿠 청년부가 기획하고 추진한 신이치의 평화행동전을 언급했다.

당시 가가와 대학부의 현위원장인 다카하시 히로유키 씨(부회장 부시코쿠장)는 이렇게 회고했다.

"제1차 종문샤건 당시, 시코쿠 청년부는 '이케다 선생님이 세이쿄신문에 실릴 수 없다면 제자인 우리가 선생님의 진실을 알리자"며 전시를 열기로 정했습니다. 먼저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오셨는지 조사해야 했습니다."

세이쿄신문 축쇄판을 면밀히 조사해 지성과 나눈 회견이나 선생님의 행동을 분야별, 연대별로 나누어 자료를 수집했다. 조사를 하면서 '선생님은 이렇게까지 평화를 위해 거듭 행동하셨구나!' 하고 모두 경탄했다.

전시는 시코쿠연수원에서 열기로 했다. 당시는 모든 패널의 글자를 손으로 써야 했다. 매우 힘든 작업이지만 멤버들의 가슴에는 스승의 위대함을 선양할 수 있다는 긍지가 빛났다.

평화행동전은 1981년 10월 3일부터 한달에 걸쳐 열려 6만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했다. 이듬해 1982년에는 시코쿠이케다평화기념관이 완공되어 환경전과 우주선 등 다양한 전시를 거듭 개최했다.

다카하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일관되게 시코쿠(四國)의 한자를 '시코쿠(志國)' '시코쿠(詩國)' '시코쿠(師國)'라고 써서 선양해주셨습니다. 그에 감동한 지성도 많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스승의 마음과 행동을 끝까지 말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지휘를 하겠습니다!


창가사제의 유대

1981년 11월 10일, 이케다 선생님은 시코쿠연수원에서 개최한 11.10 '가가와의 날' 기념간부회에 참석했다.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는 그 광경을 생생하게 묘샤했다.

신이치는 드높이 선언했다.

"다시 한번 지휘를 하겠습니다! 더 이상 여러분에게 걱정을 끼치거나 고생을 시키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을 아시는 분들은 함께 투쟁합시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이치의 가슴에는 '창가사제의 유대가 강할수록 그 어떤 사악(邪惡)도 반드시 타파할 수 있다. 불의불칙(佛意佛勅)의 광선유포 단체인 학회의 전진이 횡포한 중들의 권위에 더 이상 막히면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반전공세(反轉攻勢)의 때이다!'라는, 단호한 맹세의 불꽃이 불타올랐다."


빛나는 무대 도쿠시마강당 -------------

도쿠시마현 기타지 마초에 있는 도쿠시마강당은 1981년 11월에 낙성해 9일에는 이케다 선생님을 모시고 기념근행회를 개최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잠시만이라도 도쿠시마에 가서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라는 스승의 말에 모두 가슴이 뭉클했다.

10일에도 자유근행회를 열어 선생님은 이틀 동안 4000여명의 동지를 격려했다.

선생님은 1985년 4월 15일에도 도쿠시마강당을 방문해 강당에 모인 벗을 위해 '봄이 왔다'와 '다이 난코' 등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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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인 11일, 신이치는 새로운 시코쿠문화회관과 다카마쓰강당을 둘러보고 연수원에서 시코쿠 간부와 간담했다. 그때 열렬한 기백으로 이렇게 강조했다.

"나는 시코쿠에서 창가사자(創價師子)로서 광선유포를 다시 지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시대건설의 막을 열겠습니다. 왜냐하면, 시코쿠야말로 광선유포의 '선구의 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황금의 역사를 아무쪼록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당시 가가와현 여자부장인 이노우에 구미코 씨(시코쿠방면 부부인부장)는 "이케다 선생님이 시코쿠에 오시고 나서 마치 멈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라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노우에 씨는 선생님이 시코쿠에 머무는 동안 스승의 행동을 가슴에 새겼다. '더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라며 회원들과 차례로 만나 간담을 나눴다.

'태양의 노래'를 퇴고하면서도 전 세계에서 보낸 보고에 재빨리 손을 썼다. 벗에게 보내는 휘호도 거듭 써 내려갔다.

윙윙 소리를 내며 광포가 회전하는 듯했다.

"시코쿠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있는 곳이 광포의 본진이고 제일선'이라며 다 함께 대화하고 스승에 대한 구도심을 불태우며 전진했습니다. 실제로 선생님의 격투를 직접 보고 '광포의 제일선은 지금 여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노우에 씨는 사제공전의 서원을 품고 날마다 벗을 격려하고자 힘쓰고 있다.


후계의 바통은 그대들의 손에 있다


'태양의 노래'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서는 시코쿠 방문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튿날 12일, 신이치는 시코쿠 청년부 대표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이야기가 일단락 되었을 때, 시코쿠 청년부장 오와다 오키미쯔가 일어섰다.

'선생님! 시코쿠 남자부의 애창가를 만들었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신이치에게 가사 적힌 종이가 전달되고 카세트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가사이다. 하지만, 좋은 말만 늘어놓은 듯한 느낌이군."

그리고 신이치는 청년들의 부탁으로 가사를 손보기 시작했다. 1절부터 3절까지 가사를 30여 군데 수정하고 이렇게 말했다.

"좀 더 섕각해보겠네. 청년부를 위해, 영원히 계속 부를 수 있는 최고의 노래를 남기고 싶다. 광선유포의 반전공세를 선언했다고 증명하는 노래를 완성시키자."

신이치는 행사 중간에도 몇번이고 가사를 수정하거나 곡을 듣고 조언했다. 

"창조는 안이하게 타협하려는 자신의 마음과 맞서 싸우는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마음을 이겨내면서 극한까지 도전하고 노력하고, 거듭 궁리해야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린다. 신이치는 그 창조의 투혼을 후계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14일 밤, 스무번 넘게 퇴고한 끝에 '태양의 노래'가 완성됐다.

그리고 '태양의 노래'에 담긴 스승의 진심이 이렇게 씌어 있다.

"아아 저 붉고 붉은 태양이 솟아..."

구름을 뚫고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하늘은 시시각각 붉은 빛으로 물들고 신생(新生)의 아침이 찾아온다.

'붉은 태양'은 우리 가슴속에 불타는 원초(元初)의 태양이다! 시대를 열겠다는 뜨거운 투혼이다! 싱싱한 생명력의 빛이다!

오, 욱광(旭光, 아침 햇살)처럼 세계광포를 위해 선구를 달리는 늠름한 창가청년들이여!

지금 '생명의 세기'를 알리는 효종(曉鐘)이 드높이 울려 퍼지고, 영광의 아침이 도래했다.

영광이란, 불요불굴의 도전이 가져오는 행복과 승리의 광채이다. 

청년이여, 두려워하지마라! '거센 노한 파도'를 그리고 모든 장마를 물리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광선유포는 정의와 사악(邪惡)이 맞서 싸우는 투쟁이다. 정의라고 해서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악(惡)이 번영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불법(佛法)은 승부이다. 지용의 사명에 살아가고, 불법이라는 정의의 깃발을 내건 우리는 절대 지면 안 된다. 이겨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지용보살(地涌菩薩)은 우리 창가의 민중군상(民衆群像)이다. 고뇌하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일부러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말법(末法)에 출현했다. 쓰라린 아픔과 인내 속에서 씩씩하게 자신을 연마하고 인생 승리의 드라마를 연기해, 불법의 위대한 공력(功力)을 증명하겠노라며 씩씩하게 이 세상에 뛰어나왔다.

숙명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도 있다. 고뇌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광선유포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용기를 불태워 투쟁하면 희망의 무지개가 뜨고, 고뇌는 환희로 바뀐다.

인간은 겁쟁이가 되고, 도전을 멈추고, 희망을 버리고, 포기하는 마음을 갖지게 됨으로써 자신을 불행에 빠트리는 법이다. 우리는 묘법이라는 근원의 법에 따라 넘칠 듯한 생명력으로 과제 하나하나를 극복하면서 광포를 위해 달린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빛내면서 자타 함께 행복을 구축하기 위해. 넘치는 환희를 가슴에 안고 자랑스럽게 '민중의 깃발'을 내걸고, 민중이 부르짖는 '승리의 함성'을 드높이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해.

'훼예포폄(毁譽褒貶)하는 자들아 / 물러나가라…'

'훼예'는 '비난하고 칭찬한다'는 뜻이고, '포폄'은 '찬양하고 헐뜯는다.'는 뜻이다. 절조와 신념도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손바닥을 뒤집듯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내려다보고 숭고한 '신념의 길'을 나아가는 것이 창가사제(創價師弟)이다. 그것이 참된 '인간의 길'이다.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을 위대한 교육 사상가로서 우러르던 사람들이 군부정부의 탄압으로 선생님이 체포, 체포되자, 태도를 바꿔 아무렇지도 않게 '마키구치에게 속았다'고 하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또 전쟁이 끝난 뒤에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곤경에 처했을 때도, 선생님에게 신세를 많이 진 사람들이 그 은의(恩義)를 잊은 채 악구(惡口)와 중상(中傷)을 거듭했다.

그런 무리들의 말에 일희일우하면 안 된다. 광선유포라는 신념이 '빛나는 왕도(王道)'를 유유히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제의 대도(大道)'를 걷는다'는 더없이 커다란 긍지가 있다. 함께 맹세한 부자(父子)의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

청년 여러분이 있는 한 나는 안심이다. 

아무쪼록 나를 토대로 하여, 나를 능가하는 거목으로 성장하기 바란다. 나는 경애하는 마움을 담아 그대들을 우러르고, 상찬하고 싶다. 신세기의 드넓은 하늘로 나아가는 그대들이여! 미래를 위해 자신울 연마하고, 단련하고, 일하고, 배우고, 기쁜 마음으로 노고해야 한다. 

'청춘의 / 황금의 땀'이야말로 틀림없이 자신을 영원히 장엄하게 장식하는 재산이 될 것이다. 

나에게는 보인다. 파릇파릇한 잎이 무성한, 내일을 향해 성장하는 나무들 꼭대기 위에서 찬연히 빛나는 영광의 무지개가!

자, 젊은 영재들이여! 지평선 저편에 치솟듯이 힘차게 뛰어나와라! 

만엽(萬葉)의 인간찬가의 시대를, 현란한 생명존엄의 신세기를 열기 위해 기쁘게 춤추며 나아가라!

창가청년의 정열과 힘으로 21세기 대승리의 막을 단호히 열어야 한다.

후계의 바통은 그대들의 손에 있다."


- 법련 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