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도 환희 사도 환희’ ― 삼세의 사명에 살아가는 생사불이의 대경애
강의
“현재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관해 둘이서 유익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타이핑한 토인비 박사의 항공우편을 받은 때는 반세기 전인 1969년 9월이었습니다.
그 2년 전에 일본을 방문하신 박사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각계의 지성들에게서 창가학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대사회의 큰 주제
1972년 5월부터 2년 넘게 40시간에 걸쳐, 박사와 나는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해 대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큰 주제가 ‘생사(生死)’에 관한 문제입니다.
토인비 박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사회의 지도자들은 생사의 문제를 정면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모두 피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와 세계의 미래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생사’의 해결이 일체의 근본
사람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왜 ‘생로병사’의 고뇌가 있는 것일까.
석존이 출가를 결심하고 불도에 들어간 까닭도 이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를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토인비 박사는 생사의 문제에 관해 ‘나는 이 길을 고등종교, 특히 대승불교에서 찾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사는 대승불교에서 생사라는 근본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고 있었기에 기대가 크셨습니다.
‘사(死)의 문제’를 직시하는 불법
도다(戶田) 선생님은 자주 ‘불법(佛法)이 해결해야 할 최후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죽음을 기피하고 꺼릴 대상이 아니라고 직시하고 올바로 정의한 것이 대승불교의 생사관입니다. 이것은 ‘본유(本有)의 생사(生死)’, ‘생사불이(生死不二)’ 등 니치렌(日蓮) 대성인 불법에 명확히 설해져 있습니다.
‘건강의 세기를 향해, 복덕 장수의 지혜’를 마무리 하는 이번 회에서 이러한 ‘불법의 생사관’에 관해 어서를 배독하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에노전미망인답서〉의 일절
고성령(故聖靈)은 이 경(經)의 행자(行者)이므로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의심할 바 없으니 그렇게 한탄하시지 말지어다. 또한 한탄하시는 것이 범부의 도리이니라. 그러나 성인(聖人)에게도 이것은 있느니라. 석가불이 입멸하셨을 때 깨달은 제대제자(諸大弟子)들의 한탄은 범부의 거동을 명시하신 것일까요. 어떻게든 추선공양(追善供養)을 마음껏 면려하실지어다.
(어서 1506쪽 8행~11행)
현 | 대 | 어 | 역
돌아가신 우에노전은 법화경 행자이므로 반드시 즉신성불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한탄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또 한탄하는 것은 범부의 습성입니다.
당연히 성인이라도 한탄하기 마련입니다. 석가불이 입멸하실 때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었는데도 한탄한 일은 범부의 행동을 나타낸 것이겠지요.
어떻게 해서든 만족할 때까지 추선공양에 힘써야 합니다.
‘즉신성불’의 극리를 전하다
이 어서는 남편인 난조 효에시치로를 젊어서 여읜 우에노전 부인에게 보내신 격려 편지입니다.
편지 끝머리에 “가슴속에 간직한 중요한 법문을 써놓았다.”(어서 1506쪽, 통해) 하고 씌어 있듯이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극리에 관해 밝히셨습니다.
중병을 앓던 난조 효에시치로는 대성인의 격려를 받으면서 마지막까지 신심을 관철하다 영산으로 떠났습니다.
효에시치로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인 도키미쓰는 아직 일곱살이었습니다. 게다가 부인은 다섯째인 막내 아들(시치로고로)을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비롯해 뱃속에 태아까지 가진 상황에서 한 집안의 기둥을 잃은 미망인의 비탄과 불안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 미망인에게 대성인은 ‘돌아가신 남편은 법화경 행자이니 즉신성불은 의심이 없다.’는 격려로 절대 안심을 주셨습니다.
‘생의 부처’ ‘사의 부처’
이 어서 앞단에는 “살아계셨을 때는 생(生)의 부처, 지금은 사(死)의 부처, 생사(生死) 다 같이 부처이니라. 즉신성불이라고 하는 중요한 법문은 이것이로다.”(어서 150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즉신성불’의 법문입니다. ‘죽은 뒤에 부처가 된다.’고 설하지 않았습니다. 묘법(妙法)에 끝까지 살아가면 ‘그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고 설하셨습니다.
‘법화경 행자’로서 신심을 관철한 효에시치로는 살아 있을 때는 ‘생의 부처’이고 지금은 ‘사의 부처’ 다시 말해 생사 함께 부처임은 틀림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대성인은 ‘그러므로 죽음을 한탄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설하는 영원한 생명관에서 ‘무엇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힘차게 격려하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마음에 다가선다
한편으로 사별을 한탄하는 일은 석존의 뛰어난 제자들도 그랬다고 하시면서 어디까지나 미망인의 마음에 다가서서 따뜻하게 감싸주셨습니다.
생사관이나 생명론을 관념적으로 이해해도 현실적으로 자신과 가족들의 생사의 문제를 마주할 때에는 동요되거나 미혹되기도 합니다. 한탄하거나 슬퍼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대성인은 결론적으로 마음이 흡족할 때까지 창제에 창제를 거듭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슬픔을 추선의 기원으로 바꾸면 된다는 지도입니다.
묘법의 제목이 최고의 추선회향
고인은 틀림없이 성불하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목에 힘쓰면 된다.’는 대성인의 따뜻한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고인이 신심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묘법을 수지한 가족과 우인이 추선제목을 부르면 걱정 없습니다. 자신이 불도수행으로 얻은 공덕을 회향한다, 이것이 바로 추선회향의 본뜻입니다.
중요한 점은 진심 어린 제목입니다. 올바른 신심입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하물며 ‘승려가 추선하지 않으면 성불하지 못한다.’는 말은 어서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습니다.
〈어의구전〉에는 “지금 니치렌(日蓮) 등의 동류(同類)가 성령(聖靈)을 추선할 경우, 법화경을 독송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할 때 제목의 빛이 무간에 이르러 즉신성불시킴이라.”(어서 712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부르는 제목의 빛이 무간지옥까지 이르러 성불로 인도할 수 있다는 확언입니다.
영취산에서 ‘천불’이 마중나온다
〈생사일대사혈맥초〉에는 “기쁘도다. 일불(一佛) 이불(二佛)도 아니고 백불(百佛) 이백불(二百佛)도 아닌 천불(千佛)까지도 마중을 나오시어 손을 잡으실 것이니, 환희의 감루(感淚)를 금할 길이 없도다.”(어서 1337쪽) 하고도 씌어 있습니다.
가족은 물론 많은 학회 동지의 제목에 감싸여 영산으로 떠난 일은 실로 ‘천불’이 손을 잡아주시는 모습에 통할 것입니다. 광포를 위해 투쟁한 서민의 영웅을 모두 찬탄하고 배웅하는 것입니다.
“환희의 감루를 금할 길이 없도다.”입니다. 여기에 ‘생도 환희, 사도 환희’라는 묘법의 진수가 있습니다.
천지를 장엄하게 물들이는 거대한 석양이 이튿날 떠오르는 혁혁한 아침 해의 자광(慈光)을 약속하듯 묘법으로 감싸인 임종정념(臨終正念)의 죽음은 원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다음 생으로 나아가는 출발이 됩니다.
영원한 성불의 궤도에 들어서다
‘또 다음도 광선유포의 사명에 살아가는 인생’을 바라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묘법과 함께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삼세 영원히 부처의 생명과 하나가 되어 개가를 울리는 경애를 여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다음 생에 대한 결의를 피력하는 생기발랄한 동지의 모습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학회원은 오랜 신앙의 축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을 연마하고 삼세에 걸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궤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자신법성(自身法性)의 대지를 생사생사(生死生死)로 유전(流轉)해 가느니라.”(어서 724쪽)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법성의 대지’ 다시 말해 ‘불계의 대지’ 위에서 생도 사도 유연히 넘나들 수 있습니다.
누구나 황금빛으로 물든 ‘생사의 여행’을 ‘자수법락(自受法樂)’의 경애 그대로 유락하면서 서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묘법은 생사의 어둠을 비추는 태양
물론 ‘노(老)’나 ‘사(死)’의 모습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도키미쓰의 동생인 시치로고로는 열여섯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마음은 부친과 같이 영산정토(靈山淨土)에 가서”(어서 1568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신심을 관철한 사람은 생명의 기저부에 불계가 찬연히 빛납니다.
생명에 축척된 ‘마음의 재보’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 절대로 부서지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때라도 묘법에 꿋꿋이 살아간 모든 동지가 똑같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은 어본불의 약속입니다.
대성인은 “생사의 장야(長夜)를 비추는 대등(大燈),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자르는 이검(利劍)은 이 법문보다 더함이 없느니라.”(어서 991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묘법은 생사의 긴 어둠을 비추는 태양입니다.
묘법은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자르는 이검입니다.
묘법의 빛을 받은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 지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불안함도 사라집니다.
니치렌불법으로 ‘생로병사’의 괴로움으로 가득찬 인생을 ‘상락아정’의 환희가 넘치는 인생으로 엄연히 바꾸어낼 수 있습니다.
<중략>
월간법련 : 20/01/01 202001호